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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26화 (126/134)

00126 시작(4) =========================

"…제가 왜 드레스를 입어야 합니까?"

며칠 전부터 체력단련을 시작한 카시야는 방 안에서 맨손체조를 하는 도중 들이닥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 황제를 죽였다는 여기사에 대한 온갖 소문에 비해 험악하게 생기지는 않았다며 좋아하던 황실 재단사는 그녀의 냉기 서린 목소리에 그녀가 황제를 죽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고 여겼다.

"하, 하지만… 대관식과 성축연의 행사 규모를 생각하신다면 그 자리에 걸맞는 의상을…."

"그런 거라면 황제 폐하께서 이미 황실 기사단 제복을 하사해주셨습니다."

"대, 대관식 때라면 모르겠지만 성축연은 말 그대로 연회입니다. 여성분은 드레스를 착용하시는 게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그건 또 무슨 기준에 따른 양분입니까? 저는 기사입니다. 기사는 어느 공식석상에서건 기사 제복을 입어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 그건 억지입니다! 더군다나 이제 더 이상 평민도 아니신데 귀족다운 교양과 몸가짐을…!"

"메레디스 경이나 페레이아 경이 기사 제복을 입고 무도회에 참석하는 게 귀족다운 교양이나 몸가짐과 거리가 멉니까?"

시시각각으로 냉랭해지는 카시야의 얼굴에 재단사는 더 이상 설득하려 들었다간 제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겠다는 위협을 느꼈다. 그는 분한 얼굴로 돌아서서 곧장 알리시아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카시야가 자신을 험악하게 위협했으며,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드레스를 거부했고, 귀족이 되기엔 한참 모자란 저속한 여자라며 험담에 가까운 한탄을 늘어놓았다. 물론 그 결과, 그는 알리시아에게 호된 질책을 받고 쫓겨났지만 말이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그날 오후 그 문제를 갖고 친히 카시야를 방문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카시야 경! 확실히 날이 갈수록 혈색이 좋아지는 게 눈에 보이네요. 건강해지는 것 같아 정말 안심이에요."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관식과 성축연 준비로 매우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떤 일로 여기까지 귀한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카시야의 물음에 알리시아는 우웅, 하며 그저 방 안을 휘 둘러보고는 폭신한 소파에 가 앉았다. 그 뜬금없는 태도 때문에 카시야는 알리시아가 어떤 문제에 대해 자신을 설득하러 왔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지난번 영지 문제 때도 이런 식으로 순진한 척 자신을 구슬렸던 그녀니까.

솔직히 그때 느꼈지만, 알리시아가 사람을 설득하는 재주는 놀라웠다. 복잡한 문제들이 다 마무리되면 에르논과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며 둘 다 생전 누려보지 못한 자유를 만끽하려 했는데 커다란 영지를 떼어준다니, 정말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카시야를 붙잡고 여성 영주가 있는 곳은 없으니 그녀의 영지 안에서만이라도 여아를 위한 학교를 만들고, 특수 기사 학교를 만들고, 선진적인 조세나 행정 시스템을 만들어보라고 부추겼다. 거기까지는 그냥 흘려들을 만 했다. 하지만 그녀가 영지를 갖게 되면 많은 포상이 내려질 수 없는 쿠론이나 루나엔 같은 평민 동료들을 불러 돌봐주는 것도 가능할 거라고 한 부분에서 크게 흔들렸다. 전쟁이 끝나면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다 여겼던 막연한 꿈이, 알리시아의 혓바닥 위에서 점차 구체화되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제가 매년 미르바하라 산포도 와인 스무 병씩은 꼭 보내드릴 테니, 성축연 전야에 카시야 경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주성의 커다란 다이닝룸에서 축배를 드는 거예요. 맛있는 요리도 대접하고, 밤새 웃고 떠들며 새해를 맞는 거죠. 그들의 아이들이 태어나도 경의 영지에서 안전하게 자랄 수 있을 테고요. 어쩌면 경이 그 아이들의 대모가 되어줄 수도 있겠네요. 어때요? 너무 행복할 것 같지 않나요?"

"…정말로, 유능한 관리들을 보내주시는 겁니까? 제가 영지를 비워도 영지가 돌아갈 수 있게 말입니다."

"물론이죠! 그건 정말 걱정하지 마세요. 물론 영주가 자신의 영지에 애정을 갖고 통치를 해야겠지만, 골치 아픈 법률문제나 돈 문제는 관리들을 시키세요. 카시야 경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영지에 메여있을 필요는 없답니다. 귀족들 중에도 영지에는 1년에 한 두 번 밖에 내려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결국 영지의 규모를 조금 줄이겠다는 약속을 받고 제안을 수락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알리시아는 그날과 아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번엔 뭡니까, 폐하."

"웅?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이러지 마십시오. 분명 또 곤란한 주제를 들고 오신 것 아닙니까."

"곤란한 주제라뇨. 저는 그냥, 카시야 경의 첫 무도회가 될 성축연의…."

"드레스는 안 입습니다."

"…너무 단호하신 것 아닌가요?"

카시야는 알리시아의 애교 섞인 투정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카시야에게 이 세계의 드레스란 끔찍한 것이었다. 성축연에서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이고 크리놀린으로 치마폭을 잔뜩 부풀린 드레스를 입으라니…. 그러면 안 되겠지만 최악의 경우, 황제파의 잔당들이 테러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다른 남자 기사들이 용감하게 그 일을 해결할 때, 자신 혼자만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자락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거나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진다면…. 차라리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 카시야 델 로만 사전에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 시종이 들어와 에르논의 방문을 알렸다. 카시야가 침대에서 벗어난 이후, 에르논은 자신의 방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대부분 카시야의 방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이전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말이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께서 와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말씀 중이시면 나중에 찾아오겠습니다."

에르논은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자리를 물러나려 했지만 알리시아가 황급히 그를 잡았다.

"에르논 님! 에르논 님께서는 성축연 때 어떤 분과 춤을 추시나요?"

"예? 아… 저…."

에르논의 시선이 카시야에게 가 머물렀다가 다시 돌아왔다.

"에르논 님께서도 멋진 예복을 맞추셨다죠?"

알리시아는 그의 대답에는 관심 없다는 듯 곧바로 옷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예. 폐하의 배려로 어제 재단사가 왔다 갔습니다."

"에르논 님도 첫 무도회라면서요? 기대가 많이 되시겠어요. 어떤 옷감으로 고르셨나요?"

"재단사가 추천해주는 대로 은회색을 골랐습니다."

"그렇다면 같이 춤추는 상대는 짙은 색의 드레스를 입으면 딱 어울릴 것 같네요. 그죠?"

카시야는 알리시아의 속셈이 빤히 보여 편치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얘기 중간에 들어온 에르논은 그런 사정은 모른 채 저와 춤추는 카시야를 상상하며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주느라 애쓰고 있었다.

"검은 색이나 녹색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 합니다."

보통 때라면 아무 거나 상관없다고 했을 에르논인데 오늘따라 왠지 카시야가 그런 짙은 색의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특정 색까지 입에 올리고 말았다.

"맞아요. 상상만 해도 정말 아름다울 것 같아요. 후움…. 하지만 카시야 경은 다른 기사분들처럼 제복을 입으신다니까, 에르논 님의 '생애 첫 춤'을 나눌 분은 카시야 경은 아니겠군요. 바지 입은 사람 둘이 춤을 췄다간 길이길이 손가락질을 받을 테니까 말이에요. 귀족 사회는 그런 쓸 데 없는 것 같고 입방아를 찧거든요. 아,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봐야겠네요. 드레스 싫다는 카시야 경을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나 봐요."

알리시아는 짐짓 아무런 미련 없다는 듯 일어나 사뿐사뿐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계산대로, 방문에 채 닿기도 전에 등 뒤에서 카시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코르셋과 크리놀린 같이 몸을 구속하는 속옷은 안 입을 겁니다. 움직이기도 편해야 하고요. 드레스 안에 바지도 받쳐 입을 겁니다. 만에 하나 적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치마를 찢어내서 싸워야 하니까요."

그제야 알리시아가 화사하게 웃으며 뒤돌아보았다.

"이번엔 정말 유능한 디자이너를 보내줄게요. 카시야 경의 취향에 딱 어울리는 드레스를 만들어줄 사람으로요!"

그렇게, 카시야는 알리시아를 상대로 한 협상에서 또 판정패를 당하고 말았다.

덕분에 카시야는 몇 날 며칠을 치수 재기와 가봉에 시달려야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급하게 거행하는 식이다보니, 귀족들은 갖고 있는 옷을 입고, 평민 출신이라거나 수도에 집이 없는 귀족들만 새로 옷을 맞추게 명령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수도의 재단사들을 싹 다 써야 겨우 일정에 맞출 만큼 빠듯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바쁜 몇 주가 흐르고, 황궁의 모든 이들이 바짝 긴장한 대관식과 포상식이 열리는 아침이 밝았다. 카시야는 황실 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허리에는 예식용 검을 찼다.

원래 황실 기사단의 예복은 하얀 제복에 푸른 망토, 은색 술로 장식한 견장을 차는 게 보통이었지만 타셀이 황권을 잡은 이후에는 하얀 제복에 검은 망토, 금색 술로 장식한 견장으로 바뀌었다.

"여어, 멋진데?"

"감사합니다. 미하일 경 역시 잘 어울리십니다."

"너도 귀족 다 됐다? 입에 발린 소리 할 줄도 알고. 솔직히 말해봐. 나보다는 에르논 고 자식이 황실 마법사 예복 입은 거 보고 싶을 거 아냐?"

카시야와 에르논 사이의 달콤한 기류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에르논은 그런 놀림에 귀 끝을 붉히거나 도망치기 바빴지만, 카시야는 놀리든 말든 덤덤했다.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창피한 짓을 하는 것도 아니니 당황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황실 기사단이 서서 대기해야 할 곳으로 이동했다. 그 자리는 황실 기사단이면서 지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이들만 따로 세워두는 자리였다.

대관식은 전통적으로 히드레이 교 대신관이 주재하는 덕분에 카시야는 오랜만에 아르헨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대신관의 예복을 입고 커다란 지팡이를 쥔 채 예의 그 정결한 목소리로 식을 주도하는 그의 모습은 의외로 대신관의 위엄이 있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외모가 오히려 위엄을 만든달까. 성가대가 신의 업적을 찬양하고 제국의 미래를 축복하는 노래를 부르는 동안, 홀의 끝에서부터 타셀이 등장하여 천천히 제단을 향해 나아갔다. 그가 나아가는 길의 양옆에 줄선 신하들은 차례로 허리를 숙여 그들의 새로운 군주를 기쁘게 맞아들였다. 타셀이 아르헨의 앞까지 걸어 나간 뒤 그의 앞에 높인 푹신한 쿠션 위에 무릎을 꿇자 아르헨이 다시 여러 가지 축복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곁에 서있던 신관에게서 건네받은 황제의 관을 그의 머리에 가만히 얹어주고는 현명하고 자애로우며 용맹하고 엄정한 황제가 되기를 기원했다.

대신관이 물러난 자리에 황제의 관을 쓰고 왕홀을 든 채 신하들을 바라보고 선 타셀의 위용은 대단했다. 이제까지 알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동안은 모진 고생을 하던 안타까운 사정의 황자로만 보였는데, 지금은 그저 날 때부터 황제로 태어난 사람처럼 아르헨이 기원했던 그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듯 보였다.

"나, 타셀 칸 에반 아마리스는 위대한 칼리스토니아 제국의 제 2대 황제로서 나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회피하지 않을 것이며 백성과 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을 이 자리에서 선언하노라."

타셀은 스스로 감격할 법도 한데 끝까지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침착하게 대관(戴冠)의 맹세를 마쳤다. 그리고 곧바로 포상식이 시작되었다.

"비극적인 내전을 종식시킨 나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 그 공적에 걸맞은 포상을 내림이 마땅하다. 다만 포상의 내용에 관해서는 이의를 불허한다."

타셀이 포상식의 시작을 알리자 화장으로도 눈 밑의 그늘이 가려지지 않은 궁내부 대신이 나와 수훈자의 명단을 하나씩 부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불린 것은 타셀의 오랜 벗들이었다.

"엔드로스 루벤 아나클리프 변경백. 귀 관을 공작에 봉하고 데런과 루스토니아 지역의 영지를 하사한다."

"지크 탈리온 메레디스 경. 미하일 탈리온 메레디스 경. 귀 관을 백작에 봉하고 각각 키렐과 테르미안 지역의 영지를 하사한다."

"세드릭 히멜 갤리언 백작. 귀 관에게 델피언 지역의 영지를 하사한다."

그리고 곧 소문의 중심이자 폭풍의 눈이라 불리는 카시야의 이름이 홀 내에 울렸다.

"카시야 경. 귀 관을 백작에 봉하고 로만이라는 성의 사용을 허하며 엘런 지역의 영지를 하사한다."

순간 회장 내에서는 분주히 시선들이 오고가느라 소리 없는 소란이 일어난 것 같았다. 평민, 그것도 여성이 자작이나 남작도 아닌 백작위에 봉해지는 것은 칼리스토니아 왕국 때부터 생각해보더라도 전례 없는 일이었다. 수도와 가까운 엘런 지역 역시 과거 구귀족 중 하나의 금싸라기 같은 땅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신검 카라볼그의 현신으로서 전 황제를 무찌르는 데 결정적인 공적을 세웠다는 것 역시 보통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머리에서는 공적과 포상에 대한 저울질이 한참 일었다. 물론 그래봤자 포상의 내용에 관해서 이의를 불허하겠다는 타셀의 강력한 선언이 있었으니 쓸 데 없는 짓들이었지만 말이다.

"루크 페레이아 남작. 귀 관을 백작에 봉하고 타노버 지역의 영지를 하사한다."

"에르논 알리스타스 경. 귀 관을 백작에 봉한다. 다만 반란군의 수괴 알리스타스 공작가와의 연을 끊는다는 조건에 따라 새로운 성, 키샤스를 하사한다."

적이었다가 우군으로 돌아선 루크와 에르논에 대한 포상 역시 입방아에 오르내릴만한 것이었다. 둘 다 1황자군의 주요 전력이었다는 점에서 너무 후한 포상이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있었지만, 이들 역시 마지막에 황제가 악마와 계약을 맺는 것을 저지하고 타셀의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을 깎아내릴 수는 없었다.

그런 식으로 타셀에게 충성을 바친 이들에게 내려질 포상의 긴 목록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주요 수훈자 이외에는 대부분 재물과 1회 한정 특별 면책권이 내려졌고, 모두가 만족스러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큰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던 포상식이 끝나자 다들 그 다음날 있을 성축연에 대한 기대로 들뜨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1. 감기에 헤롱거리느라고 정신 없었어요. 감기 조심하세요.ㅠㅗㅠ

2. 에르논의 새로운 성(姓)인 키샤스. 기억하시나요? 카시야가 지어준 에르논의 이름이예요. ㅎㅎㅎㅎ

+ 그녀의밤 님, jina201 님, 채운1 님, 징수니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 폭식한 소파 -> 폭신한 소파로 바꿨습니다. 솜을 폭식한 폭신한 소파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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