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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27화 (127/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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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스토니아에서는 1년에 세 번의 축일을 가장 크게 기념한다. 첫 번째는 헤바가 이 땅에 빛을 전해주며 인간의 1년이 시작되었다 여겨지는 1월 1일의 성축일, 두 번째는 황제의 탄생일, 세 번째는 9월 25일의 가을 추수절이다.

그 중 '성축연'이라 불리는 성축일의 연회가 가장 규모가 크고 의미가 있었다. 그 해 16세가 되는 귀족들은 모두 성축연에서 사교계 데뷔를 하고, 그 전 해 큰 공을 세운 이들에게는 황제가 직접 그 공로를 치하하며 상을 내렸다. 가장 많은 선물과 축하가 오가고, 귀족은 물론 평민들까지 계피를 넣은 따끈한 포도주와 훈제 햄을 곁들인 식사를 하며 새해도 평탄하고 행복하기를 빌었다.

그러나 황궁에 대부분의 귀족이 모여드는 만큼, 그 안에서 정치 역시 치열하게 벌어지는 날이기도 했다. 공적을 인정받아 황제의 눈에 든 이들을 경계할 것인지 혹은 받아들일 것인지 여론몰이를 하고, 새롭게 데뷔한 영애와 영식들을 찬찬히 살피며 어디와 사돈을 맺는 것이 좋을지 가늠해보고, 황제와 귀족 사이의 힘의 균형추가 왔다갔다하는 일들이 암암리에 벌어졌다. 그리고 아직 황권이 안정될 시간조차 가져보지 못한 타셀은 이번 성축연에서 자신의 측근들을 확실히 띄워줘야 했다. 단단한 황제파를 만들어야 이제부터 시작될 파격적인 정책들을 밀어붙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성축연에서 가장 타깃이 되기 쉬운 이들이 바로 카시야와 에르논, 루크였다.

카시야는 평민 출신이라 귀족의 예법에 무지하다는 것을 꼬투리 잡아 폄하할 것이 뻔했고, 에르논과 루크는 1황자파였다는 사실을 가지고 교묘히 조롱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귀족 사회에서 배척당한다면, 그들을 요직에 앉힐 생각을 하고 있는 타셀로서는 또 고리타분한 귀족들을 한참 설득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고 그것은 결국 황권의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서 카시야 경에게 드레스를 권했던 거예요. 경이 그 어느 귀족보다 귀족다워도 꼬투리를 잡을 그들인데, 아예 대놓고 물어뜯을 거리를 줄 수는 없었으니까요."

알리시아는 대관식 다음날, 카시야의 드레스가 가까스로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에 카시야의 방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칼리스토니아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드레스를 보며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겨우 입을 열었던 것이다. 왜 카시야가 드레스를 입기 싫어하는지 알면서도 권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전날 밤까지 새며 드레스를 겨우 완성한 디자이너는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바들바들 떨었다. 하지만 카시야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가 아무리 화려한 드레스를 입는다고 해도 그들이 원하는 귀족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그들도 그런 수준까지 원하는 것은 아닐 거예요."

"제 말씀을 오해하셨군요. 그들이 원하는 수준 따위, 저는 별로 관심 없습니다. 저는 타셀 칸 에반 아마리스 황제 폐하께 직접 힘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전 세대에 귀족이었던 이들의 고리타분한 수준에 맞춰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내린 권력이 저들의 더러운 잇속 계산보다는 훨씬 우선한다는 것을, 황제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수준이 그들이 물들어있는 수준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임을, 그들은 앞으로 똑똑히 배우게 될 겁니다. 폐하께 누가 되지 않는 선이라면 제가 무엇을 입고 춤을 추든 그들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닙니다. 비웃어보라고 하십시오. 가소롭습니다."

썩 제 마음에 들게 나온 드레스를 바라보며 카시야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직 전쟁의 피 냄새가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열리는 연회라 불안감이 가득했던 알리시아는, 카시야가 오만해보일 정도로 타셀을 강력하게 신뢰하는 모습을 보면서 긴장되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풉. 역시 카시야 경은 못 이기겠네요. 맞아요. 내가 이렇게 눈치를 보고 있을 입장이 아니죠. 그들이 내 눈치를 봐야 하는 거죠. 나는 이 제국의 황후가 될 사람이니까. 내 남편은 이 제국의 황제니까. 내가 그걸 잊고 있었네요. 깨닫게 해줘서 고마워요, 카시야 경. 내일 멋진 모습 기대하겠어요."

알리시아는 눈가를 곱게 접어 오랜만에 숲의 요정 같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다음날, 카시야는 난생 처음 시녀들이 해주는 머리와 화장 봉사를 받아보았다. 정말 어색해 죽을 것 같았지만, 그 쪽만큼은 저도 손을 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전문가들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카시야를 꾸미러 온 시녀들은 한참동안 그녀를 한가운데 놓고 저희들끼리 심각한 회의를 했다. 가장 큰 문제가 '저 짧은 머리를 갖고 어떻게 꾸밀 것인가'였다. 싸울 때 불편하지 않게 늘 목덜미를 넘지 않게 잘라오던 머리카락이라 그걸 갖고 재주를 부릴 범위가 굉장히 좁았다. 게다가 카시야가 가발을 쓸 리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동백기름과 향유를 섞어 발라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빗어 넘긴 뒤 블랙 다이아몬드 머리띠를 두르기로 했다. 드레스가 검정색이었기 때문에 눈에 띌 요소가 너무 없다고 시녀들이 좀 더 밝은 색상의 보석을 권했으나 어차피 누구의 눈에 띄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다 거절했다.

화장 역시 대단하게 할 것도 없었다. 이 세계의 화장 도구들이래야 연지와 루주, 백분 정도 밖에 없었던 것도 한몫했지만 카시야는 볼을 붉게 물들이는 것조차 거부했다. 카시야를 설득하다 지친 시녀들은 그래도 카시야의 피부가 험한 생활에 비해 굉장히 희고 깨끗하다는 것을 위안 삼았다. 결국 입술만 살짝 붉게 표현한 정도로 그친 화장까지 마치고 드레스를 입었다. 시녀들의 도움이 없으면 입기도 힘든 보통의 드레스와는 달리 카시야의 드레스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입을 수 있었기 때문에, 시녀들은 옷을 입고 나온 그녀의 곳곳을 조금 더 매만져주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뭐 한 것도 없는데 벌써부터 진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색한 옷차림에 몸을 뒤틀며 행동 가능한 범위를 가늠하고 있으려니 시종이 에르논의 도착을 알렸다.

"아…."

소맷단을 살피며 에르논을 맞던 카시야는 처음 보는 에르논의 예복 차림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연회색이 감도는 공단 위에 금사로 장식된 예복을 입은 에르논은 북쪽의 얼음 나라에서 온 귀공자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신선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가끔씩 연회에 참석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카시야는 에르논의 모습이 흡족했다. 에르논 역시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카시야의 드레스는 드레스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검정색 기사 제복의 허리에 샤 스커트 자락을 두른 것 같은 모양새에다 움직이기 쉽게 치마의 앞단은 무릎길이 정도로 짧고 뒷단은 보통의 드레스 길이였다. 치마 안에는 몸에 붙는 검정 팬츠를 입고 거기에 그녀를 위해 특별 제작된 무릎 바로 아래 길이의 늘씬한 부츠를 신은 데다 허벅지에는 단도와 작게 감은 강철 스트링을 메어 놓아 만약의 사태에 철저히 대비했다.

하지만 그 파격적인 드레스 안에는 디자이너가 뼈를 깎는 고민과 노력을 한 흔적이 역력했다. 카시야가 보기에는 기사 제복과 비슷했지만, 보통의 기사 제복보다는 훨씬 깊게 파인 브이넥의 가슴 라인이나, 바짝 조인 허리 라인에서 충분히 남성과는 다른 곡선이 드러났다. 금사로 꼬아놓은 견장의 술은 보통의 제복 견장보다 훨씬 풍성하고 화려하게 디자인 되어 있었고 라펠의 끝 라인 역시 금사로 아름다운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샤 스커트는 엉덩이 위쪽에 볼륨을 넣어 크리놀린 없이도 치맛자락이 풍성해보일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와…. 하하…. 와…."

에르논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저 감탄사만 내뱉을 뿐이었다. 그게 자신의 제복 같은 드레스에 대한 실망이라고 여긴 카시야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기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제 타협 가능한 선은 여기까지였습니다."

하지만 에르논의 대답은 카시야의 기대와는 달랐다.

"충분히 아름다워. 남들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아. 이제까지 너를 남자처럼 대하던 녀석들도 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아버릴 거야."

에르논은 정말 큰일 났다는 듯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흘끗흘끗 그녀의 깊이 파인 가슴 쪽에 시선을 던졌다. 강인해 보이는 검정 드레스와 대비되는 하얗고 도도록한 가슴께가 입안에 침이 고이도록 아찔했다. 물론 카시야는 자신의 외양이 사내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 따위는 까맣게 몰랐다. 그래서 에르논의 걱정을 귀족 남자가 레이디에게 건네는 찬사를 흉내 낸 것인가 보다 여겼을 뿐이다.

"키샤스 경 역시 아주 멋있…다기 보다는 아름다운 것에 가깝네요. 남성이 더 아름다운 유일한 커플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출발하죠."

절대 그렇지 않다며 펄쩍 뛰는 에르논을 가볍게 어르고 달래 연회장을 향했다. 모든 귀족들이 모이는 자리다보니 연회장 앞에는 입장 순서를 기다리는 이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귀족들의 입장을 고하는 이의 목이 걱정될 정도였다.

"에르논 키샤스 백작, 카시야 델 로만 백작 드십니다."

화제의 중심인물 중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에 쏠렸다. 그리고 그들은 카시야의 드레스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저… 저, 저게 지금… 도대체 뭘 입은 겁니까?"

"제 눈이 잘못 된 건가요? 저건, 드레스도 아니고 제복도 아닌 것 같은데요…."

"세상에나…. 보는 것도 민망하네요. 아무리 평민에 여기사 출신이라지만 저 정도로 상식이 없을 줄은…."

그들의 기준에서는 도저히 드레스라 할 수 없는 옷을 입은 데다 가발을 쓰지도 않은 채 짧은 머리카락을 드러낸 카시야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당당한 태도로 에르논의 손을 잡고 홀로 들어서는 카시야의 강렬한 이미지는 늘 새로운 것에 목말라 하는 젊은 층에서 또 다른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저런 식이라면 우리도 기사 제복을 입어볼 수 있겠는 걸요?"

"맞아요. 스커트만 좀 더 변형하면 충분히 연회용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저분이 차라리 남자분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너무 멋있지 않아요? 같이 춤춰봤으면…."

"전 데런의 아나클리프 성에서 저분께 손수건도 드린 적이 있어요. 진짜 기사 제복을 입고 검을 차고 계시면 남자 기사님들보다 더 멋있으세요. 그 때 거기 있던 영애들 대부분이 저분께 손수건을 드리려고 난리였죠."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소문의 그 대마법사님? 대마법사라기에는 너무 미남이신데요?"

"어머, 어머. 대마법사님이 로만 경한테서 시선을 못 떼시는 걸요?"

어린 영애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얘기가 오가는 줄도 모르고 카시야와 에르논은 아는 얼굴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이 등장하면서부터 빤히 바라보던 미하일과 지크 형제, 그리고 루크는 처음으로 보는 카시야의 단장한 모습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에르논은 경계의 눈초리로 싸늘하게 쳐다보는 중이었다.

"와하하! 역시 옷이 날개라는 말이 만고의 진리구나. 못 알아볼 뻔 했다."

미하일이 히죽거리며 말문을 열었지만 루크는 어딘지 씁쓸한 미소를 띠었을 뿐, 준비된 샴페인 잔을 홀짝 대다가 자리를 떠버리고 말았다. 미하일과 지크 형제의 만담에 가까운 놀림에 에르논의 얼굴이 빨개질 무렵, 카시야는 잠깐 실례하겠다며 루크가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루크는 구석의 발코니에서 난간을 붙든 채 가만히 바깥만 바라보고 있었다.

"페레이아 경. 무슨 일 있습니까? 안색이 별로 좋지가 않으신데요."

카시야의 등장에 루크는 뜻밖이라는 듯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카시야로서는 그의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 뭔가 심각한 일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주변을 살피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발코니의 커튼을 친 뒤 루크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페레이아 경답지 않게 힘이 없어 보이시는데요."

카시야는 농담조로 말을 걸며 그를 살폈다. 하지만 루크는 가만히 바깥에 펼쳐진 황궁의 정원만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카시야는 그를 따라 황궁의 정원을 내려다보며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루크는 몇 번이나 입을 떼려다 말고 입술을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정말로 그가 이렇게까지 불편해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카시야는 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궁금했지만 뭐가 됐든 그를 돕고 싶었다. 그는 이제 그녀의 친우였으니까 말이다.

“페레이아 경. 도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경을 돕고 싶습니다. 그 정도 사이는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말에 루크의 입매가 살짝 미소를 그렸다. 그는 그러고도 한참 입을 못 떼다가 잔뜩 찌푸린 회색 하늘이 하얀 눈송이를 흩뿌리기 시작하자 한숨을 내뱉듯 말했다.

“그럼,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네! 말씀하십시오.”

"…다음 생에서는, 나를 한 번만 돌아봐줄래?"

루크의 말에 카시야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시 제가 경께 무례하거나 섭섭하게 해드렸던 적이 있나요?"

역시나 자신의 마음을 조금도 모르고 있는 카시야의 반응에 루크의 가슴에는 아린 통증이 일었다. 그의 강직한 이성은 얼른 아무 것도 아니라고 넘긴 뒤 그녀의 좋은 친구가 되어 이번 생을 보내야 한다고 채근하고 있었지만,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그녀가 이토록 아름답게 차려입은 모습을 본 적 없던 루크는 그 고혹적인 아름다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이고 제 품에 가두고 싶다는 욕망이 이성과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야 전생과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약속해줘. 다음 생에서는 나에게도 기회를 주겠다고. 이번 생은, 내가 전생에 너한테 지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고… 물러날 테니까. 다음 생에서는,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거, 빨리 좀 눈치 채 줘."

루크의 고백에 카시야의 눈이 점점 커지고 숨이 거칠어졌다.

"…세이지?"

카시야의 부름에 루크는 그저 슬픈 미소를 보였을 뿐이었다. 카시야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세이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루크가 세이지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언… 제부터… 기억을 하고 있었습니까."

"오래 되지 않았어. 그리고… 차라리 기억 못했으면 좋았을 뻔 했지.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너를 놓아주겠다는 마음 따위 먹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카시야는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이토록 당황해본 적이 없었다. 루크가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해 연기를 하는 것인가 싶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의 눈빛이, 그녀가 기억하는 세이지의 눈빛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미안합니다. 당신의 마음에 관심 갖지 않아서… 미안… 합니다. 나는… 당신이 설마,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리라고는…."

"알아. 네 잘못이 아니야. 우리는 감정을 품고, 표현하고, 알아채는 모든 것을 말살 당했었으니까. 그렇지? 그랬다고 해도, 내가 너에게 그래서는 안 됐지만. 나야말로… 미안했다."

그들은 회한과 슬픔 섞인 정적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볼 뿐이었다. 하얀 입김과 눈송이가 그들의 주변에 어지러이 흩날렸다.

루크는 다시 하늘을 쳐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그 정적을 깼다.

"이번 생은 전생의 벌이라 치고, 다음 생에서는 절대 안 놓칠 거야. 에르논더러 이번 생에 널 만난 걸 행운으로 여기라고 해. 얼른 들어가 봐. 지금쯤 너 없어졌다고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거 아냐."

평소의 그다운 매끄러운 미소에 카시야의 긴장 역시 탁 풀어졌다. 전생에서는 동족이라는 애정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끝까지 증오한 적도 없었다. 그저 서로가 불쌍해서….

타인에 의해 형편없이 꼬여버렸던 그들의 인연이 이제야 그 복잡한 매듭을 풀어낸 것 같았다.

"벌써부터 다음 생이 기대되는군요."

카시야는 루크를 향해 그녀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으로 밝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싸늘해진 드레스 자락을 끌며 발코니를 벗어나 조금 걷다보니 에르논의 연회색 예복 끝자락이 시선 끝에 닿았다.

"에르논?"

카시야의 부름에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하얀 머리카락의 장막을 걷고 나타났다. 어딘지 조금 슬프고 불안해 보이는 그 눈빛에, 그가 자신과 루크의 대화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짐짓 환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카시야에게 다가왔다.

"연회장 안에 있으면 찾기 어려울까봐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바람 쐬고 왔나보네. 뺨이 차가워. 얼른 들어가자. 곧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실 시간이야."

카시야는 그의 파르르 떨리는 불안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라고 여기는 사랑이 자신을 버리고 뒤돌아 가버릴까봐, 방금 누구와 무슨 얘기를 했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고 있었다.

하지만 카시야는 그를 아프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카시야의 회유에,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응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전생이나 현생의 관계를 넘어서서, 그저 처음 만난 그때부터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어왔고, 카시야 자신에게도 특별한 감정을 품게 만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눈이 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올 것 같은데, 이따 같이 나가서 구경하시지 않겠습니까?"

"아…! 응."

흑과 백의 조화 같은 두 사람이, 다시 손을 맞잡았다. 그들의 첫 무도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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