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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28화 (128/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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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축연에 등장한 황제와 황후의 모습은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단단한 근육으로 가득 찬 건장한 체구와는 달리 사제 같아 보이는 점잖은 얼굴의 타셀이나, 금빛 머리카락을 화사하게 흩날리며 제국 제일을 다투는 미모로 회장을 밝히는 알리시아나, 그 자리의 모든 영애와 영식의 기를 죽여 놓을 만 했다. 하지만 늙은 황제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알랑거리던 황비 및 후궁들의 분위기에 늘 어딘가 살얼음판 같던 무도회는 새로운 황제를 맞아 희망차고 밝고 설렘이 가득했다. 젊은 황제 부부의 눈부신 자태가 부러웠던지, 무도회장의 젊은 남녀들은 바쁘게 눈빛을 주고받으며 핑크빛 기류를 형성했다.

그러는 사이, 귀족들은 차례로 황제에게 나아가 신년 하례를 올렸다.

"새해에도 주신 헤바의 축복이 가득하길 빕니다."

카시야는 에르논과 함께 인사를 올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타셀의 눈빛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로만 경과 키샤스 경에게도 헤바의 축복이 가득하길. 그나저나 로만 경. 이거, 정말 몰라보겠군 그래."

"정말 아름다워요, 로만 경. 드레스만 보고 판단했던 거, 사과할게요. 로만 경이 입으니까 이렇게나 멋진 드레스인걸."

황제 부부의 감탄에 에르논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알리시아가 웃음을 터트렸고, 카시야가 에르논을 돌아봤고, 에르논의 뺨이 또 화드득 붉어졌다.

성축연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저녁부터 시작되는 무도회였다. 황제와 황후가 홀 한가운데서 우아하게 신년 첫 춤을 추고 물러나자 귀족들은 쌍쌍이 손을 맞잡고 나와 홀을 가득 메웠다. 북적거리는 홀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춤을 출 생각은 없었던 카시야는 물끄러미 그들이 하는 양을 가만히 볼 뿐이었다. 얼마 전에 속성으로 춤을 배우기는 했지만, 춤을 추는 자신이 우스워 보일 것 같다는 생각에 따로 연습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저 알려준 대로만 스텝을 밟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몸으로 하는 것은 금방 배우는 타입이라 그게 어렵다고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습을 왜 해야 하는지도 납득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막상 연회장에서 춤추는 이들을 관찰해보니 춤이라는 게 그저 루틴만 밟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그들 모두 손가락 끝까지 우아함이 배어있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의 선율에 맞춰 흐르듯 움직이는 모양새가 과연 '율동'이 아닌 '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 에르논의 발만 실컷 밟고 어색하게 삐걱대다가 끝나는 게 아닌가 싶어졌다.

사실 자신만 생각하자면 굳이 춤을 출 생각도 없었지만, 에르논이 생애 첫 춤을 굉장히 기대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적어도 그가 난처해질 만한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춤추는 영애들을 관찰하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아…. 저렇게까지 계산된 움직임이라니…. 귀족 영애들을 우습게 볼 게 아니었군. 엄청난 훈련이 아니라면 저렇게까지 자로 잰 듯 움직일 수는 없지.'

남들이 몇 년을 훈련한 움직임인데 저가 몇 분 본 것만으로 따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노력을 모독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에르논."

카시야가 조용히 에르논을 불렀다.

"아무래도 내가 당신에게 창피를 줄 것 같습니다. 저는 군악 퍼레이드는 가능해도, 저런 건 불가능합니다."

"괜찮아. 상관없어. 정 스텝이 꼬이면 내가 마법으로 바닥에서 살짝 띄워줄게. 그럼 대충 스텝 밟는 척만 하고 내 리드만 따라와."

몇 차례의 춤곡이 지난 뒤 카시야는 에르논의 든든한 약속 하나만 믿고 홀에 발을 디뎠다. 그들이 홀에 들어서자 마치 약속이나 한듯 기사 동료들이 제 파트너의 손을 잡고 같이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또다시 시작된 춤곡에 맞춰 허리를 살짝 마주대고 손을 어깨에 올리며 춤을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이런 무도회가 처음일 카시야에게 은근히 쏠려 있었다. 그 시선의 대부분은 그녀가 무슨 실수를 저지를지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시야는 그들의 기대를 보기 좋게 져버리고 말았다. 에르논이 그녀를 공중에 띄워줄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스텝은 완벽했으니까.

백색의 아름다운 남자가 리드하지만 왠지 거기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그 리드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까만 드레스의 여자. 보통 귀족 영애들처럼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몸짓은 아니지만 기사라는 배경 때문인지 어딘가 절도 있는 동작이 또 독특하니 매력적이었다. 까만 부츠가 밟는 스텝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영애들의 스텝과 비교하면 훨씬 무거웠다. 하지만 그렇게 디딘 발끝을 축으로 빙글 몸을 돌리는 모습에서는 흔들림이 전혀 없어 견고해보였다. 파트너에게서 몸을 떼고 빙그르르 돌며 저쪽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그녀의 샤 스커트는 그래서 오히려 더욱 아름답게 나부꼈다. 그 언밸런스한 차이에서 오는 기묘한 매력은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지만, 그 시선들의 온도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이 커플 중 부드러운 쪽은 에르논이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한없이 말랑말랑해진 채로 자신의 품에 있는 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카시야의 손을 잡아끄는 그의 손길은 마치 여신의 손을 받아 잡는 듯 감격스러워보였고, 카시야의 스텝과 교차해 딛는 발끝은 그녀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으려 조심스러웠다. 결국 그들은 다른 커플들과 마찬가지로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를 제대로 지키고 있었다.

에르논은 태어나길 잘했다고, 살아있길 잘했다고 난생 처음으로 생각했다. 차가워 보이는 에메랄드 빛 눈동자와 마주칠 때마다 등줄기가 오싹해질 정도로 짜릿했다. 이 아름다운 피조물이 자신의 품 안에 있다는 것, 마법이 아니라면 어디 하나 잘난 것 없는 자신이 그녀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서 더 욕심이 났다. 믿기지가 않아서 확인을 받고 싶었고, 깨어버릴 꿈인 것 같아서 증표를 얻고 싶었다.

'날이 갈수록 욕심만 느는구나….'

에르논은 카시야의 시선을 피해 씁쓸하게 웃으며 자신을 탓했다. 노예 처지에서 벗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욕심을 드러내는 자기 자신이 염치도 모르는 인간 같아 부끄러웠다.

한편, 카시야는 에르논의 품이 생각했던 것보다 넓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늘 애처롭게만 봐왔던 탓인지, 에르논을 떠올릴 때마다 그를 가느다랗다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와 스칠 때마다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향에 신경 쓰였다. 체취인 것 같긴 한데 사람의 체취 치고는 정말 기분이 포근해질 정도로 마음에 드는 냄새였다. 그 냄새와, 그의 조심스럽고도 애정 어린 손길과, 저만을 향해 고정되어 있는 눈동자에 카시야는 갑자기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순간 발을 헛디딜 뻔 했지만 예민하게 알아챈 에르논이 그녀의 허리를 좀 더 강하게 붙들어 주었다. 그 단단한 안정감에, 카시야는 문득 몸에 힘을 빼고 그의 팔에 기댔다. 그러자 방금까지 군인 태가 풀풀 났던 동작에 농염하고 나른한 기색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카시야다워서 그녀의 변화를 콕 집어 눈치 챈 이들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밤이 깊어갔지만 연회장은 오히려 점점 더 활기를 띠었다.

계피를 넣은 따끈한 포도주는 어깨와 팔을 훤히 드러낸 여자들의 체온을 지켜주며 그들의 뺨을 사랑스럽게 물들였고, 남자들에게는 아리따운 여성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서먹서먹한 기색이 사라진 초면의 사이에서도 점점 대화가 오갔고, 황제와 황후가 자리를 뜨기만 기다리던 귀족들은 재빨리 삼삼오오 모여 이런저런 논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더 이상 연회장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카시야는 지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신이 머무는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 그를 에르논이 착실히 에스코트했다.

시끌벅적한 메인 홀 주변과는 달리, 카시야 같이 머물 곳 없는 공로자들이 임시로 지내고 있는 내궁 쪽은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고요했다.

"제 방에 황후 폐하께서 보내주신 산포도 와인이 있습니다. 눈 구경을 하면서 마시면 딱 좋을 것 같은데요."

"너, 은근히 술 좋아하더라?"

"네. 좋아합니다. 자주 마시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긴장을 풀어주기도 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해서 카시야의 방 발코니 쪽에 소파와 테이블을 끌어다놓고 한 잔씩 따른 와인을 마시며, 두 사람은 눈이 떨어지는 적막감을 즐겼다. 갑갑한 드레스나 예복은 편한 셔츠와 로브로 갈아입고 도톰한 숄을 어깨에 둘렀다. 마치 파자마 파티를 하는 어린애들이 된 기분이었다. 캄캄해진 하늘에서는 하얀 눈꽃들이 끝도 없이 떨어져 제국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에르논과 함께 바라보며 같은 기억을 공유하게 된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그와 같은 기억을 더 많이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시야는 와인을 입술에 대다가 맞은편에 앉아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에르논을 쳐다보았다. 하얀 눈만큼이나 하얀 사람이었다. 초를 몇 개 켜지 않아 벽난로의 조명이 거의 다인 어두운 방안에서도 에르논은 혼자 하얗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얀 머리카락, 하얀 이마, 하얀 속눈썹, 하얀 코 끝, 하얀 손가락….

그렇게나 모진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이토록 순결하고 순수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하얀 눈을 보면 괜히 첫 발자국을 내고 싶어지는 심리처럼, 카시야는 하얗게 빛나는 그를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때 마침 에르논이 고개를 돌려 카시야를 마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어딘지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카시야가 취했다고 여긴 그는 카시야의 손에서 잔을 뺏어들고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너 취했어. 완벽히 다 낫지도 않은 몸인데 그동안 무리했으니 피곤할 만도 했지. 이제 그만 자."

카시야는 목소리와 함께 진동하는 그의 가슴께에 머리를 기대고 그의 몸에서는 역시 좋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의 품에서 그의 냄새를 실컷 맡고 싶었고, 그의 몸을 만지고 싶었다.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카시야로서는 굉장히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제까지는 굳이 타인과 몸을 붙이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 상황에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정상적인 건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에르논을 원하는 마음은 점점 커져갔다.

에르논이 카시야를 침대 위에 내려주고 이불을 덮어주려는 순간, 카시야가 그의 셔츠 깃을 잡고 자기 쪽으로 확 잡아끌어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던 그의 근육들이 점차 긴장을 푸는 게 느껴졌다.

"오늘 밤, 같이 있고 싶은데… 이런 제가 이상한 건가요?"

입술을 뗀 카시야가 속삭였다. 공작성에서 어릴 때부터 손님들의 침실에 밀어 넣어졌다는 에르논이 옛날의 트라우마를 떠올릴까봐 적잖이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조금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다정하게 대답해주었다.

"난 너와 항상 같이 있고 싶어서… 그게 뭐가 이상한 건지 잘 모르겠다."

그러고는 카시야에게 깊이 입맞춤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빼빼로 데이네요. 우리 도짜님들 모두 사랑이 넘치는 하루가 되시길...

+ 그녀의밤 님, jina201 님, 징수니 님, sodamm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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