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홍의 카르마-132화 (132/134)

00132 [외전] 안개 숲 =========================

내전이 끝난 지도 1년이 지났다.

지독한 일벌레인 황제와 황후 부처 덕분에 공신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지독한 업무에 허우적대야 했다. 그것은 제국 최고의 대마법사인 에르논 키샤스 역시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연인은 이미 '정책연구회의'라는 골치 아픈 황제 직속 기구의 부의장직까지 맡고 있었고, 덕분에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 얼굴을 맞대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실정이었다. 그나마 에르논은 개인 연구가 중요한 마법사라는 포지션 때문에 황제의 압박을 덜 받고 있었을 뿐이다.

에르논은 내전 이후 더더욱 '공격 마법의 정점'이라는 위명을 확고히 하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공격 마법 이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마법 지식 습득에 골몰하고 있었다. 부끄러움이 많은 탓에 남들 앞에서는 정신 계열 마법과 방어 마법을 연구하는 척했지만, 사실 서재에 틀어박혀 꾸물꾸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흰 눈이 날리는 장면이나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장면을 볼 수 있는 환상 마법이 대부분이었다. 며칠 동안 골몰해 만들어낸 아름다운 환상 마법에 카시야가 홀린 듯 멍한 표정을 짓는 게 그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늘 날이 벼려진 듯한 그녀에게서 그런 무방비한 표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제국 통틀어 자신 밖에 없을 거라는 사실이 늘 그를 짜릿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도 그는 책 여러 권을 펴놓고 이것저것 조합해보며 환상 마법 하나를 만들고 있었다. 도로 바꿔놓을 수는 없을 그들의 첫 만남에 대한 사과의 의미까지 담아 안개 숲과 비슷한 아름다운 숲 환상을 만들어 낼 생각이었다. 카시야는 숲길을 거니는 것을 좋아하니까 말이다.

환상 마법 하나를 만드는 데는 의외로 여러 가지 신경 써야 할 게 많았다. 제 머릿속에 자신이 만들어 낼 환상의 디테일이 명확하게 잡혀있지 않으면 환상이 금방 허물어져버렸기 때문에 이미지 하나하나에 공을 들여야 했다. 맨 처음 만들었던 눈 내리는 환상은 비교적 쉬웠다. 카시야와 처음 살을 맞댔던 그날 밤의 이미지가 그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 만들었던 화원의 환상을 위해서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황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황후궁 정원을 여러 번 들락거려야 했다.

'이 근처에는 안개 숲만큼 아름다운 숲이 없단 말이지…. 흐음. 안개 숲을 한 번 갔다 와야겠어.'

에르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 두어 권을 챙기고 로브를 걸쳤다. 그대로 움직이려다 혹시나 카시야가 걱정할까봐 <연구를 위해 며칠 키렐에 갔다 올게.>라는 간단한 메모를 남겼다. 그리고 곧장 티렐의 안개 숲을 향해 공간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에르논의 메모를 다음 날 밤에서야 발견한 카시야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메모가 아니었다면 에르논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할 만큼 지쳐있었던 데다가 에르논이 연구를 위해 며칠씩 수도를 비우는 게 드문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일주일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사이라 그가 며칠 멀리 떠났다 해도 상관없었다. 분명 그랬을 터였다.

카시야는 그날 밤 왠지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분명 머리와 육체는 피곤해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이상하게 정신은 점점 또렷해지는 것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까만 밤하늘과 언제 봐도 신기할 정도로 반짝대는 별들이 밤이 깊었음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카시야는 침대에 누운 채 두 눈만 껌뻑거리며 창밖의 밤하늘만 가만 바라볼 뿐이었다.

'키렐이면… 여기서 빠른 말로 4, 5일쯤 걸리려나…. 에르논은 공간 이동으로 갔겠지? 마력 소모가 심하지 않을까?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려고 그러지? 툭하면 끼니를 거르니까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나…. 지난번에 보니까 왠지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한 번 시작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와 연인이 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에르논은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100% 다 아는 게 불가능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에르논 역시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고 말이다.

어쨌든 끝없이 이어지는 에르논 생각에 잠을 설쳐도 다음 날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카시야는 또다시 전생의 기억을 쥐어짜내며 타셀이 바라는 제국의 건설을 위해 현 시점에 도입 가능한 제도를 제안해야하는 하루를 보냈다. 수도의 저택에 돌아갈 시간도 없어서 황궁 내의 방을 침실로 쓰고 있는 그녀는 일어나서 씻고 옷을 입자마자 출근하여 시종들이 갖다 주는 빵과 차로 아침을 해결하며 그날 주제에 대해 검토했다. 황제와 의원들이 모두 회의실에 들어오면 계급장을 뗀 채 제안과 토론을 3시간 동안 이어갔고 2시간 동안의 식사 시간을 가졌다. 휴식 시간을 겸한다지만 오후에 이어질 토론을 위해 오전의 내용을 정리하느라 2시간 쯤은 금방 지난다. 그리고 또다시 4시간 동안 제안과 토론을 이어갔고, 저녁이 되면 식사와 함께 다른 귀족들 개개인과 접촉하며 귀족 사회 내의 흐름을 만들고 공작을 펼쳐야 했다. 그러다보면 깜깜한 밤이 되곤 하는 것이다.

그렇게 바쁜 하루를 보내고 다시 침실로 돌아온 카시야는 뻐근한 어깨와 뒷목을 풀 겸 뜨거운 욕조에 들어가기로 했다. 진한 향기를 싫어하는 카시야는 청량한 향의 페를로냐 찻잎을 목욕물에 띄우곤 했는데 뜨끈한 욕조 안에서 반쯤 넋을 놓고 있으려니 에르논의 욕실에서 목욕을 했던 그날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그 때 에르논은 내 알몸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카시야는 투명한 목욕물 아래 일렁이는 자신의 벗은 몸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에는 전사로서도, 여체로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황궁의 여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근육들이 눈에 띄었다. 황궁 복도를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지나가는 시녀들만 보더라도 자신과 같은 울퉁불퉁한 근육 따위는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몸은 부드러운 곡선으로만 이루어진 것 같았다. '목'이라는 명칭이 들어가는 부분들은 또 어찌나 가는지, 여인의 가는 발목에 흥분하는 남자들도 있다던가. 검은 든 손을 단단하게 지지하는 자신의 팔목이나 땅을 박차야하는 자신의 발목은 그녀들의 것보다 확실히 많이 두꺼웠다.

'그리고 에르논은 오히려 보통 남자들보다 가는 편이라서… 나랑 별 차이도 없단 말이지.'

카시야의 시선은 자신의 손목을 훑다가 다시 가슴께로 옮겨졌다.

'…가슴은 좋아하는 것 같던데. 흐음…. 다른 여자들 가슴은 어떤 느낌인지 알아야 말이지.'

제 가슴을 주물럭거려보면서 카시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르논이 하는 것처럼 집게손가락 끝으로 정점을 문질러봤지만 그가 하던 때처럼 찌릿거리는 감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제 몸을 만지던 기억이 떠오르자 갑자기 목이 바싹 마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몸 어딘가가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후우…."

그러고 보니 누군가를 이토록 그리워해본 적이 없었던 그녀였다. 단 한 번도 제 곁에 없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애타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전생에서는 그럴 대상 자체가 없었고, 현생에서는 에르논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부터 늘 그가 제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카시야를 당황시켰다. 그를 원하는 이 감정은 단순히 육욕을 채우고 싶다는 갈망도 아니었다. 그저 그가 지금 제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그의 눈과 마주보고 싶다는 생각, 그의 체온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야 키렐에 닿았을 터였다. 앞으로의 며칠이 정말 길게 느껴질 것 같았다.

*

에르논이 아르카나에 도착한 것은 키렐로 떠난 지 닷새만이었다.

가까운 지역으로 공간 이동을 계속 해나가면서 키렐의 안개 숲까지 도착하는 데 하루, 돌아오는 데에도 하루가 걸렸으니 안개 숲을 조사한 것은 사흘 정도였다. 에르논 역시 안개 숲을 다시 본 것은 마력 폭발이 있었던 그 날 이후 처음이었다. 그 때는 그저 도망치기 바빠 제대로 눈에 담지 못했었지만, 다시 가서 확인한 안개 숲은 정말 신비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름처럼 아침에는 안개가 숲에 내려앉았는데 음산하다기 보다는 신비로운 느낌만이 가득한 안개였다. 그리고 해가 뜨면 안개는 금방 걷혀 숲 속의 나뭇잎과 풀잎에 맺힌 이슬이 영롱하게 빛났다. 졸졸 흐르는 개울도 예뻤고, 군락을 이룬 라벤더 무리 역시 감탄할 만 했다. 에르논은 카시야에게 선물할 환상을 위해 요소요소를 세심히 관찰하고 기억하며 그것을 재생시킬 마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 밤, 카시야의 생일을 맞아 그것을 선보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려 미칠 것 같았다. 카시야의 생일은 사실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이 세계에서 눈 뜬 그날을 생일이라 하기로 두 사람만 약속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을 위해 에르논이 준비한 게 하나 더 있었다. 그는 책상 서랍 깊숙이 숨겨뒀던 상자를 꺼내 다시 열어보고는 크게 심호흡했다. 오늘밤이 완벽하기만을 그는 간절히 바랐다.

에르논이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도 회의실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카시야는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다. 특히 회의가 거의 끝나갈 즈음 갑자기 장황한 질문을 늘어놓던 모 자작은 두고두고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차라도 한 잔 하고 가라는 타셀의 제안도 거절한 채 카시야는 서둘러 자신이 침실로 쓰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평소처럼 거의 일주일 만에 만나는 그인데도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종일 회의와 토론에 찌든 상태로 그를 맞이하기는 싫었다. 카시야는 에르논이 방문한다고 전해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옷을 벗으면서 욕실로 뛰어들어 온힘을 다해 빠르게 몸을 씻었다. 누가 봤더라면 누가 뒤쫓아 오는 줄 알았을 것이다. 에르논이 방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할 때쯤에는 아직 물기가 덜 마른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쥐어짜고 있었다.

"씻고 있는데 내가 방해했어?"

"아, 아닙니다. 후우…. 오랜만…이네요."

"어?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이지만, 우리 평소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봤잖아."

"…이번 한 주가 굉장히 길게 느껴져서 말이죠."

"그렇게 일이 많았어? 폐하도 널 너무 부려먹는 거 아냐? 이러다 몸 축나겠어."

에르논은 카시야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카시야는 제 곁에서 울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까까지만 해도 안절부절 못하던 제 심장이 점점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참 신기한 감각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제야 카시야는 평소처럼 피식 웃을 수 있었다.

"키렐에는 무엇 때문에 다녀오신 겁니까?"

"음. 사실은… 이것 때문에."

에르논의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것 같더니, 고개를 들자 방금까지 침실이었던 주변이 어느새 초록빛이 반짝이는 숲 한가운데가 되어 있었다.

"아…. 이건…."

"안개 숲이야."

카시야는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환상은 이제까지 그가 보여주던 환상에 비해 훨씬 크고 정교했다. 나뭇잎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이나 나무 사이를 흐르는 서늘한 공기마저 실제와 똑같았다. 카시야는 입도 다물지 못하고 조심스레 한 발짝 내디뎌보았다. 분명 침실의 평평한 바닥일 게 분명한데 발밑에서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몇 발짝 너머에는 조그만 개울이 바위틈 사이를 졸졸 흐르고 있었고, 그 너머에서는 언젠가 본 기억이 아련히 남아있는 라벤더 꽃무리가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워요."

이번에도 역시 카시야는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무방비한 표정을 에르논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에르논이 그녀의 손을 잡고 지긋이 시선을 맞춰왔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날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안개 숲이 너에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덧칠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 저는 괜찮대도요. 하지만 그 안개 숲이 이렇게나 아름다웠던 줄은 몰랐네요.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기쁩니다."

카시야가 환하게 웃었다. 에르논은 그녀의 미소에 용기를 얻고는 긴장감에 축축해진 손으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우리의 첫 시작이나 다름없는 안개 숲 한가운데서, 너에게 영원을 약속하고 싶었어."

카시야는 그가 제 손가락에 끼워주고 있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색과 똑같이 시린 녹색의 에메랄드가 왼손 약지에서 반짝거렸다. 에르논의 손가락에도 이미 비슷한 에메랄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단순히 금속 링 하나가 손가락에 끼워진 것뿐인데도 그와 뭔가가 연결된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런… 이런 식으로… 프러포즈 받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해봤습니다."

안개 숲의 환상은 정말로 강력했다. 주변을 떠도는 미세한 먼지들마저 아름답게 빛을 산란시켰고, 멀리서 갓 깬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런 아름다운 숲 한가운데서 영원을 약속한다는 것이, 마치 다른 이의 환상 속에 제가 대신 서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이 이런 기쁨을 누려도 되는 건가 싶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환상이 아니었다. 그는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로 그녀의 기쁨에 젖어드는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카시야 델 로만 경. 당신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합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카시야는 이 상황이 낯설고 민망하다고 느꼈다. 귀하게 자란 귀족 영애나 상상해볼 법한 이 상황은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과는 달리 콧잔등이 시큰거리더니 눈가가 홧홧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목이 콱 막히고 숨이 가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찰나가 영원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에게 뭔가 대답을 해줘야했다. 그래서 그녀는 에르논의 목에 팔을 감고 그의 입술을 찾아 떨리는 제 입술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살덩이가 제 입 속을 헤집어 놓은 뒤에야 목이 뚫린 것 같았다.

"네. 저 역시…. 저 역시…."

카시야와 에르논의 기억 속에 안개 숲이 재정의 되던 밤이었다.

============================ 작품 후기 ============================

조만간 오겠다고 했는데 너무 빨리 온 것 같기는 합니다만.... 주말이니까요.

+ 징수니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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