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3 [외전] 미카엘 =========================
캉-! 카앙-!
어린아이용의 날 무딘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연무장에 울리고 있었다. 땀에 젖은 밀빛 머리카락의 소년은 검술 스승의 지도 대련에서 한 치의 느슨함도 없이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도 결국은 스승에 의해 검을 놓치며 수업 시간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 어머니를 따라잡을 날이 머지않았군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날은 아마 영영 오지 않을 겁니다."
푸른 눈을 반짝이는 소년, 미카엘 키샤스 로만은 아직 성인의 힘을 이기지 못하는 제 가냘픈 손목을 원망스레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매일같이 어머니가 고안한 체력단련 루틴을 따르고 있지만 생각처럼 금방 근육이 붙지 않는 몸이 답답했다. 뾰루퉁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제 팔뚝을 주무르던 미카엘은, 그러나 연무장 바깥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이를 확인하자마자 대번에 얼굴이 밝아졌다.
"어머니!"
카시야는 저를 발견하고 곧장 달려오는 미카엘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아이는 아직 열세 살. 노는 것에만 매달려도 충분히 용납될 나이임에도 미카엘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검술 수련과 학문 습득에 노력했다. 악착같다고 할 정도로 말이다. 카시야는 미카엘이 그러는 이유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아서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남의 상처에 무심한 이들은 미카엘더러 제국에서 가장 운 좋은 아이라며 비아냥대곤 했다. 언뜻 보면 고생 한 번 해보지 않은 부잣집 도련님으로만 보이는 밀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과 고운 인상의 그 아이가 어떤 지옥에서 살아남았는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거기서 살아남고도 제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미카엘의 대단한 점이라는 것을 카시야는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게 어떤 식으로든 무의식에 커다란 흉터를 남겼을 거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지만….
"수고했다, 스윈델. 곧바로 할까, 아니면 좀 이따가 할까?"
"지금 바로 부탁드립니다. 안 그래도 딱 좋을 정도로 몸이 데워졌으니까요."
"좋아. 미카엘. 넌 여기 앉아서 구경하고 있어라."
카시야는 미카엘이 연무장 밖 잔디 밭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대련용 쌍검을 들고 연무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스윈델이 미카엘과 대련을 해주고 나면, 카시야가 스윈델과 대련을 해주는 시간이 이어지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미카엘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구경했다. 미카엘에게 자신의 어머니는 무적의 기사이자 영원한 우상이었다.
"오늘은 다를 겁니다."
"그래? 그럼 오늘은 내기를 걸지. 이기는 사람이 원하는 것 하나를 들어주기로 하자."
"정말이십니까? 그럼 오늘 제가 단장님의 레퀴에스를 가져가겠습니다!"
카시야가 황제에게 하사받은 검 레퀴에스를 가져가겠다는 스윈델의 자신만만한 선언에 카시야가 피식 웃으며 대련이 시작되었다.
황궁의 특수 기사 양성소인 회색 늑대 기사단에서 부단장을 맡고 있는 스윈델은 이제 이견 없는 기사단의 2인자였다. 과거 카시야가 자신의 분대원들에게 자행했던 고문을 이제는 스윈델이 제 밑으로 들어오는 햇병아리 기사들에게 자행하고 있었고, 덕분에 카시야의 진짜 모습을 잘 모르는 신입 기사들은 카시야보다 스윈델을 더 무서워했다. 물론 그들이 어느 정도 훈련을 마친 중급 기사가 되어 카시야의 손에 맡겨진 순간 스윈델이 얼마나 자애로운 이였는지 깨닫게 되지만 말이다.
그들의 대련 시간은 다섯 합도 맞추지 못했던 몇 년 전과 비교하면 비약적으로 늘어나있었다. 카시야는 아슬아슬할 정도로만 이기며 스윈델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지도 대련을 하고 있었고, 스윈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언제나 패배에 분해했다. 하지만 언제나 오늘은, 오늘만큼은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덤벼드는 스윈델이었다.
하지만 오늘도 파캉-, 하는 소리와 함께 스윈델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졌습니다."
스윈델은 순순히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고 카시야는 마주 절한 뒤 몸을 돌려 미카엘 쪽을 향했다.
끼리릭!
카시야의 검에 날아드는 와이어의 소리에 미카엘이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스윈델이 소매 속에 숨겼던 와이어를 던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카시야의 나머지 검 하나가 스윈델의 목을 겨눴다.
"시도는 좋았다. 그래, 회색 늑대는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지."
여유롭게 웃는 카시야의 모습에 스윈델은 그제야 진짜 항복을 선언했다.
"쳇. 성공할 줄 알았는데."
아까의 미카엘과 똑같이 부루퉁한 표정의 스윈델이 투덜대며 손가락으로 카시야의 검 끝을 슬쩍 밀어냈다. 미카엘뿐만 아니라 스윈델에게도 카시야는 무적의 기사이자 영원한 상관이었다. 매번 지는 대련이지만 이런 나날이 언제까지고 이어졌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래, 내가 이겼으니 내가 원하는 것 하나를 요구하겠다."
"예? 아, 아니, 그런 게 어딨습니까! 솔직히 제가 단장님을 어떻게 이깁니까?"
"그런 생각을 갖고 덤볐으니 지는 거다.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까 말야."
"뭐, 뭘 원하시는 데요?"
"수염 밀어."
"예에에에에에?"
스윈델은 몇 달간 공들여 기르고 다듬은 제 수염을 양손으로 감싸며 한 발짝 물러났다.
"싫습니다! 아니 왜 제 수염에 그렇게 집착하십니까?"
"보기 싫어. 지저분해. 네 놈이 맥주를 먹고 그 수염에 묻은 거품을 보면 입맛이 떨어진다."
"남자는 수염이라고요! 진짜 뭘 모르시네. 미카엘 님! 미카엘 님은 제 수염 좋아하시죠? 남자답지 않습니까?"
당황해서 얼굴까지 새빨개진 스윈델은 미카엘을 간절하게 쳐다보며 제 편을 들어달라 무언의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자면, 미카엘의 영원한 우상은 제 어미이지 스윈델이 아니었다.
"기사라면 약속을 지키셔야죠."
제자의 배신에 스윈델은 부들부들 떨었다. 결국 그는 그날 저녁 깔끔하게 면도한 얼굴로 식사 테이블에 앉았다. 스윈델의 곁에 앉는 그의 아내가 카시야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내는 것은 까맣게 모른 채로 말이다.
"서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별궁을 탈출해 어디로 도망쳤나 했는데 제국을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 같더군요."
스윈델은 입 주변이 매끈해졌음에도 수염을 피하는 것처럼 조심스레 음식을 먹었다. 그러다가 버릇처럼 제 턱을 만지고, 사라진 수염을 깨닫고는 또 미간을 찌푸렸다. 어쨌든 지금은 스윈델의 수염에 대한 애정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멜라니아 입장에서 보자면 얼마나 억울했겠어? 황후 자리와 제 아이가 황제가 되는 날을 코앞에 두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흥! 그렇게 따지면 안 억울한 사람이 어딨답니까? 하여간에 지독한 여자야. 덕분에 유리카데온 공이 더 말랐다더군요."
타셀은 유리카데온의 목을 베라 청하는 측근들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겨우 열 살이 갓 되었던 이복동생을 죽이지 않았다. 그 아이는 너무도 여렸고 황제와 황비가 벌인 짓에 대한 책임이 손톱만큼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대로 뒀다간 분명 반란의 불씨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타셀은 유리카데온이 열두 살이 되자마자 트렌퀼리엄 왕국 막내딸의 부마로 보내버렸다. 트렌퀼리엄 왕국의 막내딸은 겨우 열네 살이었지만 타셀에게 잘 보여야 할 트렌퀼리엄 입장에서는 반강제적이었던 그 결혼을 거부할 어떤 힘도 없었다. 오히려 대제국의 황자가 부마로 온다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할 판이었으니까. 유리카데온도 타셀의 처분을 감사히 여기며 그의 명을 얌전히 따랐고, 다행이 왕국의 막내딸과 사이좋게 잘 지낸다고도 했다.
그런데 말썽은 별궁에 유폐시켜놨던 폐비 멜라니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처음엔 유리카데온과 자신,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를 살려줘서 고맙다며 타셀에게 눈물로 감사를 전했다. 그러면서도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었는데, 그 가녀린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가 합쳐지자 그녀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저렇게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다 늙은 황제의 비로 오고 싶어 왔겠느냐, 원래는 타셀의 배우자감으로 물색되고 있었는데 황제가 채갔으니 그녀야말로 피해자다는 등의 얘기가 돌며 동정론이 일자 알리시아가 먼저 그녀의 처우를 개선해주도록 타셀에게 청했었다. 그래서 탑에 갇혔던 그녀가 작으나마 '궁'이라 불리는 북쪽 별궁으로 처소를 옮길 수 있었고, 거기서 아기를 키우며 조용히 사는가 싶었더랬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자신을 숭배해 마지않는 기사단장을 꼬여내 별궁을 탈출하고 서쪽의 안텔라 지역을 거점삼아 반란을 일으킬 줄이야….
"멜라니아의 아이는 딸이라던가?"
"예. 이제 여섯 살 밖에 안 된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곁에서 듣고 있던 스윈델의 아내가 멜라니아를 이해한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
"하지만 저였더라도 그랬을지 몰라요. 제 아이가 계속 눈칫밥을 먹어야 하고 목숨의 위협을 당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미 된 마음에 그 아이를 차라리 황제로 올리려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죠."
하지만 스윈델이나 카시야의 생각은 달랐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모정 때문에 그랬다면, 유리카데온이 트렌퀼리엄의 사위가 되자마자 관심을 끊어버린 게 납득되지 않았다. 그녀의 반란으로 가장 먼저 위험해질 사람이 유리카데온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는데, 유리카데온에게 반란에 대한 일언반구 언질조차 한 적이 없었다는 것 역시 그랬다. 결국 그녀에게는 황제가 되어 자신의 말을 착실히 들을 제 핏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똑같이 아이를 낳은 알리시아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날뛰어봤자지. 진압군 사령관으로 페레이아 경이 갔다며?"
"예. 검은 사자 기사단도 몇 따라갔으니, 아마 금방 진압하고 돌아올 겁니다."
"음. 우리 군 걱정은 안 되는데, 어미를 잘못 만난 죄 없는 아이가 희생될까봐 걱정되는군."
카시야의 말에 다들 끄응, 하는 앓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멜라니아의 아이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확률이 컸다. 반란까지 일어났으니 귀족들이 가만 놔둘 리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스윈델은 그러다가 카시야의 곁에서 얌전히 식사를 하고 있는 미카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카시야와 에르논과 미카엘은 서로 너무나 다른 외모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세 사람이었다. 카시야는 미카엘을 양자로 들인 이후, 어디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가 굉장히 부드러워졌다. 실제로는 아이를 낳아본 적 없는 여자임에도 진짜 '엄마'같다는 느낌이 든달까. 물론 회색 늑대 기사단장으로서의 실력과 감각은 녹슬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연륜이 쌓여 가끔 신 같아 보일 정도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카시야의 모성은 피어났다.
아마 그것은 미카엘이 만들어준 감정일 것이다. 미카엘은 처음에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카시야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고, 카시야는 그런 미카엘을 단 한 번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미카엘이 안정될 때까지 그를 토닥여주고 쓰다듬어주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에르논 역시 그 곁에서 떨어지지 않아, 미카엘 때문에 가장 강력한 제국의 수호자들이 '마비'됐다는 불평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정성이 미카엘의 마음의 문을 열었고, 지금은 또래 아이들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단단하고 조숙한 아이가 되었다. 로만 백작가를 볼 때마다 '가족의 사랑'의 표상을 보는 것 같아 스윈델은 조금 신기한 기분이 되곤 했다. 어렵게 임신에 성공해 이제 꽤 배가 부른 제 아내를 보며, 자신도 저런 가정의 가장이 될 수 있을지 고민스러워지기도 했다. 그래서 무심코 말이 튀어나갔다.
"후우. 저는 남의 아이보단 저희 아이가 더 걱정되네요. 저희 아이도 미카엘 님처럼 열심히 실력을 쌓아 씩씩한 기사가 되어줘야 할 텐데 말입니다."
스윈델이 아내의 배를 살짝 쓰다듬으며 쓸 데 없는 푸념을 내뱉자 카시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기사가 되어줘야 하는데?"
"제가 기사니까요. 저는 황제 폐하의 기사라는 것에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한미한 작위지만 제 아이가 기사로 커서 작위를 이어나가줬으면 합니다. 단장님도 그렇지 않으십니까?"
스윈델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대답했지만 카시야는 여전히 의아한 얼굴이었다.
"미카엘이 하고 싶다니까 하게 하는 것뿐이야. 음악가가 되고 싶다니까 웬만하면 손을 다칠 위험이 있는 일을 시키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본인이 하고 싶은 건 일단 다 해보는 게 좋으니까."
"예? 백작가 자제가 웬 음악가입니까?"
그 말에 카시야가 섬뜩하게 눈을 부라렸다.
"제국, 아니, 외국까지 초청받는 음악가가 될 수도 있는 거지. 아! 네가 아직 미카엘의 비올라 연주를 못 들어봐서 그래. 정말 놀랍다니까. 아직 어린데도 손가락이 길쭉길쭉해서 손부터가 음악가의 손이야. 이왕 말이 나왔으니 미카엘, 이따 다과 시간에 네 검술 스승에게 한 곡 들려주는 게 어떻겠니?"
"네, 어머니."
자식 있는 자는 다 팔불출이라더니 카시야 역시 이것만은 비켜가지 않았다. 악기 연주를 권하는 카시야의 말에 미카엘이 부끄러워하면서도 순순히 응하는 것을 보니 카시야의 칭찬이 빈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회색 늑대 기사단장의 아들을, 음악가나 시키신다고요?"
"내 아이면 제 능력이나 소망 따위 무시하고 기사여야 하나? 내 아이이자 에르논의 아이이기도 하니까, 기사이자 마법사이기도 해야 하나? 왜 음악가로 대성할 수 있는 아이가 부모의 직업을 따르며 그 재능을 묻어버려야 하지? 그거야말로 재능 낭비이자 인생 낭비야."
스윈델은 조금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제국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출세를 했던 카시야는 여전히 제 작위나 가문 따위에 별 미련이 없었다. 그게 존경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샘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스윈델은 안다. 그녀는 절대 틀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녀의 말이 맞을 것이다. 제 아이와 즐겁게 검술 대련을 할 미래를 꿈꾸던 스윈델은 조금 실망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만약 아이가 서기관이 되겠다고 하면 그 길을 지원해줘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그리고 미카엘의 비올라 연주를 들은 뒤, 그 생각을 확고하게 굳히게 되었다.
카시야나 에르논은 자신들이 행복한 유년시절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미카엘을 양육하는 데 정말 많은 공부를 했다. 혹시라도 자신들에게는 당연한 일이 아이에게는 억압으로 다가갈까봐, 자신들의 무심한 말 한 마디가 안 그래도 상처 많은 아이의 마음을 할퀼까봐 말이다.
카시야와 에르논은 미카엘을 입양하면서 그 아이가 저희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임을 받아들이고 미카엘이 자신의 본성을 발현할 수 있게 노력했다. 미카엘은 연약하고 시들시들하던 식물이 단 샘물과 따뜻한 햇빛을 받아들이듯 그들의 사랑을 받아들여 점차 자신을 감싸고 있던 단단한 공포의 껍질을 깨고 나왔다. 제 모든 행동을 통제하던 공포심을 깨자 미카엘은 날개를 단 것처럼 빛나기 시작했고, 그 아이를 통해서 카시야와 에르논 역시 자신들의 유년기의 상처를 치유해갔다.
"어머니. 제가 회색 늑대 기사단장이 되길 원하신다면 저는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밤 문안인사를 하러 온 미카엘이 뜬금없이 덧붙인 말에 카시야와 에르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윈델이 한 말을 꽤나 심각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내가 만약 기사단장을 그만두면, 너는 어쩔 셈이니? 내가 기사단장을 그만두고 영지 관리만 하면서 놀고먹는 귀족이 된다면 너도 그럴 생각이야?"
카시야의 입매에 떠오르는 짓궂은 미소에 미카엘은 바람직한 대답을 생각하느라 우물쭈물 거렸다.
"이런. 미카엘은 아빠의 직업을 이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구나."
그 옆에서 에르논까지 짐짓 슬픈 척하며 놀림을 거들었다.
"그, 그건… 저는, 마력도 없고, 능력도 없고…."
"미카엘. 우리는 작위나 직위를 이어받게 하려고 널 아들 삼은 게 아니야."
미카엘은 자신이 양자라는 입장을 떠올릴 때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런데 자신에게 그런 걸 시키려 했던 게 아니라니 더욱 찌푸린 얼굴이 되고 말았다. 쓸모가 없다면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카시야는 그런 미카엘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넌…. 아니, 우리 세 사람은 그저 가족이 될 운명이었던 거야. 신이 맺어준 인연에 어떻게 이유와 필요를 갖다 붙이겠니? 넌 그저 우리의 사랑스러운 아이일 뿐이야. 네가 느껴야 할 책임감이 있다면 그건 너 자신을 위해서여야지, 우릴 위해서여서는 안 돼. 알겠니?"
미카엘은 사실 어머니의 말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제 부모의 부드럽고 따뜻한 눈빛을 보며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정말 구해졌음을….
"네…. 안녕히 주무세요."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간질거리는 기분이 되어 미카엘은 괜히 몸을 배배 꼬았다.
"잘 자렴.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에 미카엘의 뺨이 또 발긋하게 물들었다. 미카엘은 카시야와 에르논이 바라던 대로 행복에 충만한 유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로만 백작저에는 오늘도 행복한 밤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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