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처투성이 소년
눈이 유난히도 많이 내리던 12월의 어느 날 밤, 세나는 죽었다.
원인은 교통사고, 그것도 뺑소니였다. 얼어 버린 도로 위에서 미끄러진 자동차가 횡단보도를 건너가던 세나를 덮쳤는데 사고를 낸 당사자는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그녀를 보며 욕설만 내뱉다가 도망가 버렸다.
아마도 그때 그가 바로 신고를 했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워낙 인적이 드문 도로였던 데다가 시간도 늦고 날씨가 추워서인지 사람들이 다니질 않았다. 겨우 발견되어 응급실로 실려 갔을 땐 이미 시간이 꽤 많이 흐른 상태였고, 세나는 그렇게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다.
눈을 감기 전, 연락을 받고 온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종교가 없었던 세나는 사후 세계나 환생 같은 이야기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고작 열 살인 유리나 카르티아가 되어 낯선 방에 누워 있었다.
처음엔 모든 것이 꿈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난 후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싯적 많이 읽었던 차원 이동을 하는 소설이나 트럭에 치여 죽은 고등학생이 이세계의 귀족으로 태어나는 소설처럼 자신에게도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녀가 처한 상황은 차원 이동이나 환생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요즘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서 인기가 많은 소재처럼 그녀는 책 속 인물에 빙의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정확히는 악녀 빙의지.’
솔직히 말하자면 책 속에 들어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엔 책 제목도, 정확한 내용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틈나는 대로 읽었던 많고 많은 로맨스 판타지 소설 중 하나였을 뿐이다.
줄거리가 비슷한 다른 소설과 헷갈릴 정도로 재미도, 특별한 내용도 없었다. 절정 부근을 본 다음엔 결말을 보지도 않고 책을 덮었던 것도 같다.
다만 데프론 후작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몸 어딘가 간지러운데 정확히 어디가 간지러운지 알 수가 없어서 긁지 못하고 괴로운 것과 비슷한 느낌.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유리나는 겨우 두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나마 소설의 내용이 기억나는 건 비교적 최근에 읽은 덕분이었다.
리디아 데프론과 유리나 카르티아.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소설 속 여주인공과 악녀의 이름.
소설 속에서 카르티아 후작가와 데프론 후작가는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었다. 가뜩이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하필이면 나이까지 같아 같은 해 사교계 데뷔를 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늘 비교 대상이 되었다.
장미 같은 유리나와 백합 같은 리디아. 그녀들이 황후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치가 늘 그러하듯 객관적으로 볼 때 둘 중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 따질 수가 없었다.
적어도 유리나가 된 세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카르티아 후작이 리디아를 끌어내리기 위해 악질적인 소문을 퍼뜨리고 위해를 가했지만 그건 데프론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카르티아 후작가와 유리나 카르티아가 독자들에게 욕을 먹은 건 순전히 그들이 주인공과 대립되는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역사도 승자의 편에서 쓰인다고 하지. 아마 유리나가 주인공이었다면 분명 리디아가 악녀라고 욕을 엄청 먹었겠지.’
두 가문은 종이책 네 권 중 세나가 읽은 세 권 분량 내내 줄다리기를 하듯 팽팽하게 대립했다.
엎치락뒤치락하며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승부를 종결 낸 건 데프론 후작이 고아원에서 우연히 발견해 데리고 온 아이, ‘카리온’이었다. 꽤 실력 있는 마법사인 데프론 후작은 ‘카리온’을 보자마자 그가 자신을 훨씬 뛰어넘는 재능을 타고났다는 것을 알아봤다.
‘카리온’은 여신의 상징인 붉은 눈을 가진 남자로, 세기의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마법에서 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일찍이 그의 재능을 발견한 데프론 후작의 후원을 받아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놀라운 속도로 발전했다.
졸업을 하고 돌아왔을 즈음엔 제국뿐만 아니라 인접 국가에서도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가 되었다.
그의 등장으로 저울의 추가 데프론 후작 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제게 잘해 주었던 리디아 데프론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카리온이 그녀가 황후가 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것이다.
사랑하지만, 우습게도 사랑하기 때문에 여주인공의 행복을 빌어 주는 안타까운 조연. 그게 바로 ‘카리온’이었다.
그리고 유리나 카르티아는 그의 손에 죽었다. 여주인공을 괴롭힌 악역의 말로답게 비참하고 잔혹하게. 당연히 카르티아 후작가 또한 멸문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왜 죽었더라?’
죽었다는 것만 떠오를 뿐, 정확한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다. 특별히 기억이 남을 만큼 강렬함이 있는 죽음은 아니었다. 그냥 악역이라서 어쩔 수 없이 죽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그 소설은 지나칠 정도로 모든 상황이 여주인공인 리디아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그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여 읽는 내내 짜증 났던 기억이 있었다.
아무튼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뒤에 유리나는 데프론 후작보다 먼저 그를 찾기 위해 수도와 그 근처 영지에 있는 고아원을 열심히 다녔다.
단서는 환한 금발과 붉은 눈동자밖에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세계에서도 붉은 눈동자는 거의 나올 수 없는 색이었으니까.
올 초부터 그를 찾기 시작했는데 벌써 계절은 여름에 접어들고 있었다. 6개월. 오랜 기다림이었지만 기다림의 열매는 달았다.
얼마 안 되는 물건을 챙겨서 나오는 아이를 발견한 유리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기 위해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다.
“다 챙겼어?”
“어.”
“작별 인사는 하고?”
“그런 거 할 사람 없어.”
다른 아이들과 꽤나 거리를 두고 살았나 보지? 잠시 그를 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이던 그녀는 이내 납득하고 말았다.
저런 까칠하고 퉁명스러운 성격에 다른 이들과 살갑게 잘 지냈을 리가 없다. 거기다 귀족인 그녀에게도 꿋꿋하게 반말을 고수하는 저 오만함은 또 어떤가.
‘저러다 정말 귀족 모독죄로 혀라도 잘리는 거 아니야?’
유리나는 그에게 존댓말을 쓰라고 하려다 말았다. 존댓말을 쓰며 굽실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오랜만에 반말을 틱틱 쓰는 아이를 보고 있으니 호기심이 돌았다.
다른 귀족에게만 존댓말을 쓰도록 가르치면 그녀에게 반말을 쓰는 것 정도는 그녀 선에서 충분히 보호해 줄 수 있었다.
“적어도 이곳 생활이 그리워서 돌아가고 싶다고 난리 칠 일은 없어서 좋네. 그럼 가자.”
신랄한 비판에 눈썹을 치켜세우던 아이는 순순히 그녀 뒤를 따라왔다.
“아가씨,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유모가 마차로 향하는 유리나의 팔을 잡으며 초조한 듯 말했다. 유리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부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마차에 태웠다.
유모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이를 끌어내리려고 했지만 그보다 유리나가 마차 문을 닫는 것이 빨랐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유모?”
“저야말로 아가씨께서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
“말했잖아. 저 아이는 능력이 있어. 이런 곳에 있을 애가 아니야. 내가 데려가서 후원해 줄 거야.”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세요? 저 아이를 이렇게 데려갔다가는 주인님께서도 노하실 거예요. 정말 데려가고 싶으시다면 일단 허락부터 받으시고 데려오는 게…….”
“유모.”
유모는 평소보다 낮은 유리나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유리나는 그런 그녀를 표정 없는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난 카르티아가의 사람이야. 내가 하고자 마음먹는다면 이 세상에 못 할 일은 없어.”
세상 물정 모르는 열 살 아이의 치기 어린 발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제로 카르티아 가문은 그럴 힘이 있었다.
그 가문에서 고명딸로 자라 사랑만 받고 자라 온 유리나도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릴 권리가 있었다. 고아원에서 아이 하나를 데려다 후원하는 것 정도는 누구의 허락 없이도 할 수 있다는 소리다.
유모는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유리나는 유모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마차에 올랐다.
잔뜩 주눅이 든 얼굴로 화려한 마차 내부를 훑어보던 아이가 허리를 빳빳하게 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유리나는 그 맞은편에 앉으며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아이가 도끼눈을 하고 등이 등받이에 바짝 닿을 때까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노리개가 아니라 후원을 하러 데려가는 거라며. 거짓말을 한 거야?”
“너, 내가 말조심하라 그러지 않았어?”
낮게 읊조리던 그녀는 소설 속 내용을 다시 상기하며 미소를 지었다. 입 안의 혀처럼 잘해 줘서 호감을 얻는 것이 그녀에게 이득이다.
열심히 찾아서 이렇게 데려가는데 호의를 얻지 못하고 원작대로 가 버린다면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어 버릴 테니까.
“이름이 뭐야?”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놀랐는지 아이가 어깨를 움츠리며 작게 속삭였다.
“……톰.”
원래 이름이 톰이었던가. 그의 원래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읽었던 책에 나와 있지 않았거나 아니면 워낙 사소한 설정이라 대충 읽고 넘겼을지도 모른다.
“흔한 이름이네. 이름이 마음에 들어?”
그렇게 묻긴 했지만 유리나는 그가 제 이름을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싫어할 만도 하지.’
그 이름은 아들에겐 애정이라고는 전혀 없던 그의 어머니가 술집에 자주 놀러 오던 단골손님의 이름을 대충 따다 지은 것이었다. 예상대로 그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후원자가 된 기념으로 내가 새로 이름을 지어 줘도 될까?”
데프론 후작은 그에게 새 이름을 주면서 처음으로 호감을 얻었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그녀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아이들은 의외로 사소한 것에 호감을 느낀다.
당연히 이것만으로는 의심이 많은 아이의 벽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없지만, 첫 단추를 잘 끼우는 건 늘 중요하다.
유리나는 아이의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멋대로 해석하고 입을 열었다.
“레이너드. 줄여서는 레이. 어때?”
데프론 후작이 원래 지어 주었던 이름인 ‘카리온’은 고대어로 ‘승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승리자’는 마법사가 될 아이를 위한 게 아니라 그런 아이를 일찍이 발견한 후작 본인을 위한 단어였다.
그래서인지 아이를 ‘카리온’이라고 부르는 순간, 원작 내용 그대로 그의 손에 죽고 데프론 후작에게 승리를 넘겨줄 것 같았다.
이토록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라니. 유리나는 ‘카리온’이란 이름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데프론 후작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이름이 레이너드. 고대어로 ‘희망’.
하루아침에 낯선 곳에 떨어져 또다시 죽을 운명을 타고난 그녀를 구원해 줄 유일한 희망. 낯간지럽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에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부끄러움도 감수할 수 있었다.
입 속으로 레이너드라는 이름을 몇 번 되뇌던 아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마차가 출발하고 속도가 제법 붙을 때까지도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인내심 있게 대답을 기다리던 유리나는 결국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대답이 없어? 싫어?”
“…….”
“톰?”
“톰 아니야.”
아이가 고개를 조금 더 깊숙이 숙였다.
“레이너드야.”
밝은 금발 사이로 언뜻 드러난 그의 두 귀가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 * *
카르티아 후작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 눌렀다. 딸과의 언쟁이 길어지자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유리나, 네가 정 그 아이를 데리고 있고 싶다면 시종으로 교육시키라고 로버트에게 말해 두겠다.”
그는 늘 아내를 닮은 딸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해 주려고 노력했다. 아들들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만 아들만 셋이었던 그에게 축복처럼 찾아온 유리나는 조금 더 특별하게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몇 개월 전 그녀가 제 또래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다며 직접 고아원으로 가서 물품을 전해 주겠다고 부탁했을 때도 망설임 없이 허락했다.
그렇지만 이번 일은 사정이 달랐다.
‘대체 그 아이가 뭐라고.’
예상보다 조금 늦게 돌아온 딸을 마중 나간 자리에서 그는 유리나와 함께 마차에서 내리는 한 소년을 보았다.
평민들이나 입을 법한 후줄근하고 가벼운 옷과 몸을 웅크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 그리고 그의 품에 들린 작은 보따리.
굳이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말벗으로 지낼 수 있는 또래 시종으로 데려왔다고 여겼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만, 이제 슬슬 이성에 눈을 뜰 때가 된 딸이 귀족가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아이의 외모를 보고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아이들 또래의 시종이 필요했으니 교육을 시켜 아이들의 말벗을 시키라고 이미 지시를 해 둔 참이다.
하지만 집무실로 따라 들어온 딸은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을 던졌다.
―아버지, 저 아이는 마법 재능을 타고났어요. 저 아이를 후원하고 싶어요.
재능이 있는 평민 아이를 후원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평민들을 후원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고, 후원을 받은 아이들이 이름을 떨칠수록 그 가문의 위상도 올라갔다.
그 때문에 처음엔 호의로 시작했던 일이 지금은 제 안목과 능력을 과시할 수단으로 변해 현재 수도 사교계에선 너도나도 후원할 평민을 찾으려고 혈안이다.
카르티아 후작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분야에서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었다. 제국에서 유명한 아론 경도 십여 년 전 그가 일찍이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을 자처했었다.
다만 그건 여러 과정을 걸쳐 재능이 있는 아이를 선별한 경우였다. 고작 고아원에 가서 한 번 본, 그것도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아이를 데려다가 후원을 하라니.
아무리 유리나의 말이지만 안 될 소리였다. 덜컥 후원을 했다가 재능이 없다고 판명이 나면 그 비웃음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렇지만 아무리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어도 유리나는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시종으로 데리고 있을 아이가 아니에요. 크론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을 정도로 인재란 말이에요.”
국가의 면적 크기, 군사력, 경제력 등 여러 방면에서 제국보다 열세한 크론 왕국이지만 딱 하나, 마법만큼은 제국보다 뛰어났다.
많은 학생들이 제국으로 유학 오는 것과 달리 마법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은 역으로 크론 왕국으로 유학 가길 원했다.
그중에서 가장 질 좋은 교육 과정과 교수진을 자랑하는 크론 왕립 아카데미는 콧대가 높아 정원이 차지 않더라도 제 기준치에 맞지 않는 학생들에겐 입학 허가서를 내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런 크론 왕립 아카데미를 그 아이가 갈 수 있다니.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철이 없을 줄은 몰랐다. 예쁜 딸이라고 그저 오냐오냐하며 하고 싶은 것을 전부 해 준 것이 문제였을까.
“유리나.”
그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유리나를 보며 잠시 생각을 골랐다.
“아무래도 우리끼리 대화해서는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구나. 데이브를 부르겠다. 지금 연구실에 가 있어서 서신을 보내면 저녁 식사 후에나 올 게야.”
데이브는 카르티아 후작가 소속 마법사다. 아무리 냉정하게 거절을 하려고 해도 후작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딸을 완강히 내칠 수가 없었다.
대신 그녀가 더 이상 아이처럼 우기지 못하게 객관적인 의견을 구할 생각이다.
“데이브가 그 아이를 만나 봐서 재능이 있다고 하면 그때 정식으로 후원을 해 주겠어. 그러나 재능이 전혀 없다면 이 아비가 말한 것처럼 시종으로 교육시키겠다. 어떠냐?”
“아버지 말씀대로 할게요.”
밝게 웃는 딸을 보며 후작은 이상하다 여겼지만 유리나는 목적을 이룰 수 있어서 신이 났다.
데이브가 온다면 아버지의 뜻과 반대로 오히려 레이너드의 재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후원을 해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카데미에 보내지 않고 자기가 가르친다고 달려들지도 모른다. 그녀가 듣기로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별난 곳이 있어서 제자들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라고 했다.
‘어찌 됐든 이제 죽지 않을 수 있어.’
또다시 얻게 된 이 삶이, 그것도 낯선 곳에서 남의 몸으로 살게 된 이 인생이 기회인지 저주인지는 아직 결론지을 수가 없었다.
남들은 남부러울 것 없는 귀족 아가씨의 인생이 마냥 부럽다고는 할지는 모르겠으나, 정작 유리나는 이곳에서 적응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지난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차라리 다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한 적도 몇 번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유리나는 악착같이 살고 싶었다. 뺑소니 사고로 허무하게 잃어버린 삶에 대한 갈망도 있었지만 그게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그녀는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이, 무력하게 사그라져 가는 그 시간이 두려웠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기를 쓰고 살고 싶었다.
‘죽지 않을 거야.’
캄캄했던 눈앞에 조금씩 빛이 나타나는 것 같았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또다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어서 그런가.
이곳에 와서 한 번도 제 것이라 여긴 적이 없는 ‘유리나’의 몸이 이제야 조금씩 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 * *
12년 동안 톰으로 살아온 레이너드는 주춤거리며 다가오는 하녀들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오지 마!”
“하지만…….”
그의 목욕을 도와주러 온 하녀들이 난처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귀족 저택에서는 보기 힘든 냄새나고 더러운 아이를 씻기는 것도 영 내키지 않는데 이렇게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기세로 거부하니 난감했다.
마음 같아서는 내버려 두고 가고 싶지만 아가씨의 부탁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나마 셋 중 경력이 가장 많은 하녀가 용기를 내어 그의 가냘픈 팔을 잡는 순간, 레이너드가 팔을 휘둘렀다. 왜소한 몸과 다르게 강한 힘에 하녀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목욕 한 번 하는데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야.”
때마침 방으로 들어오던 유리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녀들이 눈에 띄게 밝아진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안면이 있는 그녀의 등장에도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는지 레이너드가 제 옷을 꽉 움켜쥐며 구석으로 걸어갔다.
‘고양이를 만난 쥐도 아니고.’
유리나는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그에게 다가갔다.
“레이.”
벽에 등을 딱 붙인 채 굳어 있던 레이너드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안심해. 이 저택에 널 해칠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렇지만 쟤들이 내 몸을 더듬었단 말이야!”
유리나가 돌아보자 하녀들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데?”
“더듬었잖아! 내 옷을 벗기려고 했어! 다 큰 어른들이 나 같은 어린애를 데리고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데? 그 조그만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고 사는 거야?
유리나는 턱 밑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목 뒤로 삼켰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쟤들은 그냥 목욕을 도와주려고 그런 거야.”
“뭐? 목욕?”
“그래. 저기 욕조에 따뜻한 물 받아 놨잖아. 아니면 설마 씻지도 않고 그냥 그대로 지내려고 한 건 아니겠지?”
차분한 설명에도 레이너드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내 옷을 벗기는데!”
“씻겨 주려고 그런 거지.”
“애도 아니고 쟤네가 날 왜 씻겨!”
“여기선 다들 그래.”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귀족들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아니면 남들이 씻겨 주는 걸 즐기는 거야?”
“음, 그런 발언은 이곳에선 삼가는 게 좋을 거야. 아무리 나라도 보호해 주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 평민들에게 혀 하나쯤은 없어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귀족들이거든. 정작 자기 몸에 생채기 하나 나면 아랫사람들을 이 잡듯이 달달 볶으면서 말이야.”
유리나는 최대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내용을 모르고 듣는다면 저녁 메뉴로는 삶은 아스파라거스와 구운 가지를 곁들인 스테이크가 좋다고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다행히 눈치는 빠른지 레이너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 빠른 건 아닌가.’
정말 눈치가 있었다면 처음 그녀를 보자마자 납작 엎드리고, 이곳에 와선 쥐 죽은 듯이 있었을 테니까.
그와 지내는 것이 예상했던 것보다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유리나는 손을 흔들었다. 하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방을 나갔다.
눈동자를 굴려 가며 상황을 살피던 레이너드가 퍼뜩 두 팔을 엑스 자로 꺾어 제 가슴을 가렸다.
“무슨 속셈이야!”
“얼른 들어가 씻어.”
유리나는 턱짓으로 욕조를 가리켰다. 그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하녀들이 씻겨 주는 게 싫다며. 그럼 혼자 씻으면 되는 거 아냐?”
“근데 너는 왜 여기 있어?”
“나도 나갈 거니까 얼른 씻어.”
“그렇게 말해 놓고 내가 씻고 있을 때 누가 들어오면 어떡해!”
유리나는 머리가 아파 왔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그가 자라 온 환경을 고려한다면 그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술집 주인의 아들로 태어난 ‘카리온’. 말이 좋아 술집이었지 그곳에선 몸을 파는 일도 빈번하게 있었고 그 또한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자랐다. 그의 자랑인 예쁘장한 얼굴은 불행히도 그런 환경 속에선 악조건으로 작용했다. 그는 자신을 보며 침을 흘리는 변태 같은 남자들의 희롱을 매일 받아야 했다.
그의 울타리가 되어 줘야 하는 어머니는 그를 보호해 주기는커녕 얼른 가서 팁이나 받아 오라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가 거부하고 방구석에 들어가 숨으면 기어코 따라 들어온 어머니의 손찌검이 날아왔다.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어렸던 그가 의지할 곳은 모순적이게도 그곳밖에 없었다.
열두 살.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집을 나와 고아원으로 도망치기까지 그는 매일 이를 갈며 그런 지옥 속에서 살았다.
가시를 바짝 세운 고슴도치 같은 모습을 보아하니 이대로 그냥 둔다면 저 모양, 저 꼴로 방 안과 침대를 휘젓고 다닐 것 같았다.
잠시 그 광경을 상상해 보던 유리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알아서 경계를 풀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내가 유리나 카르티아의 이름을 걸고 약속할게. 여기서는 아무도 널 안 건드릴 거야.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네 방에 함부로 들어오거나 네 몸에 손대는 일도 당연히 없을 거고. 넌 귀족이 이름을 건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감이 잘 안 잡힐 테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에겐 이건 굉장한 일이야.”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애초에 날 믿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 아니었어? 지금 내가 한 말을 못 믿으면서 어떻게 날 따라올 생각을 했어?”
“그건…….”
레이너드가 시선을 피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저건 대체 무슨 반응이지?’
후원을 해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레이너드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따라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유리나는 그가 자신을 온전히 믿고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오만한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가 믿고 있는 게 있다면 그녀가 아니라 그녀가 가진 돈일 것이다. 고달픈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을 테지.
그의 신임을 얻는 것이 앞으로 그녀가 해야 할 일이자 그녀의 유일한 목표다.
하지만 그때도 피우지 않았던 고집을 왜 이제 와서 피우고 있는지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경계를 하려면 진작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그보다 곤란한 질문을 한 것도 아니고 왜 눈을 피하며 쭈뼛거리는데?
점점 안 좋아지는 그녀의 표정을 흘끔 보던 레이너드가 제 가슴을 가렸던 팔을 살며시 내렸다.
“그래, 믿어. 누가 뭐래?”
“그리고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녀는 뒷걸음질로 주춤주춤 그에게서 물러났다.
“솔직히 너 지금 냄새나.”
레이너드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충격받은 표정을 하더니 팔을 들고 겨드랑이 부근을 킁킁거렸다.
“……많이 나?”
“응.”
지저분한 모습이 타고난 그의 외모를 숨길 수 없었지만, 그런 그의 수려한 외모가 냄새를 숨겨 주지는 못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유리나는 그와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코를 톡 쏘는 냄새를 참으며 표정 관리를 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
어째서 창문을 열어 놔도 냄새가 약해지지 않는 건지. 아마 지금쯤 하인들이 마차에 밴 냄새를 빼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거다.
진심 가득한 유리나의 표정에 레이너드가 욕조를 향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아무리 봐도 동물 같네.’
천적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상대편의 눈을 보며 뒷걸음으로 조금씩 도망가는 그런 초식 동물. 레이너드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인 것마냥 오만 방자하게 굴었지만 그래도 애는 애인지 자세히 관찰하다 보면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유리나와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을 때 레이너드가 후다닥 욕조 주변에 세워 둔 가림막 뒤로 도망쳤다. 유리나가 그 앞에 옷과 수건을 내려놓자 가림막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안 나가?”
“지금 나갈 거야.”
유리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닫힌 문 너머로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 것 같았다.
* * *
레이너드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뒤에야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발가락부터 시작하여 서서히 위로 올라오는 온수의 열기가 낯설었다. 어쩐지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 괜히 아무도 없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가 어깨까지 몸을 담갔다.
‘따뜻해.’
이렇게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런 사치는 감히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마 극진한 보살핌이 필요한 신생아였을 때도 이렇게 따뜻한 물을 써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런 욕조도 처음 봐.’
집에 있던 작은 목욕통은 지금 그가 몸을 담그고 있는 욕조와는 비교도 안 되게 작아서 체구가 작은 그와 새어머니의 몸만 겨우 들어갈 정도였다.
열 살이 넘은 뒤엔 그것도 버겁게 느껴져 날이 따뜻한 날이면 종종 냇가에 가서 몸을 씻었다. 여러 아이들이 같이 씻어야 하는 고아원에는 그나마도 없었다.
한참 동안 무릎을 껴안고 가만히 있던 레이너드는 자신을 충격에 빠지게 했던 유리나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솔직히 너 지금 냄새나.
그렇게 냄새가 많이 나나. 그는 코로 숨을 쭉 들이켰다.
사실 쿰쿰한 냄새가 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뿐만 아니라 고아원에 가기 전 지내던 동네 아이들에게서도, 고아원 아이들에게서도 나던 냄새라 사람에게선 으레 이런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곱게 자란 귀족 아가씨에겐 이 냄새가 지독한가 보다.
하긴 그러고 보니 유리나에게선 좋은 냄새가 났다. 사람에게서 꽃처럼 향긋한 향기가 풍길 수 있다는 걸 그녀를 만나고서 알았다.
여러모로 그에게 신선함을 선사한 소녀.
‘유리나 카르티아.’
레이너드는 눈을 감고 유리나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까맣고 거친 고아원 아이들의 피부와 달리 하얗고 반지르르한 피부, 가냘파 보이는 목과 손목, 분홍빛이 도는 진한 금발.
그리고 그를 맞바로 쳐다보며 웃어 주던 푸른 눈.
사람의 눈동자가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고 예쁠 수 있다는 것도 오늘 그녀를 보고 처음 깨달았다. 지금껏 다들 피처럼 붉은 눈이 무섭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봐 주지 않았던 까닭에 그는 타인의 눈을 제대로 들여다볼 일이 없었다.
심지어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조차도 그의 눈이 불길하다며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때로는 서슬 퍼런 눈으로 네가 저주를 받아 네 어미가 널 낳다가 죽었다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술에 취한 날이면 레이너드는 제 방구석에 숨어 덜덜 떨었다.
재능이 있으니 후원해 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도 여기까지 따라온 것은 아마도 자신을 똑바로 봐 주던 그 눈 때문이었을 것이다.
금색이 아닌데도 별처럼 반짝반짝한, 태양보다도 더 빛이 날 것 같은 그 푸른 눈.
한참 머릿속으로 유리나의 얼굴을 그려 보던 레이너드는 여전히 뜨거운 물에 얼굴을 푹 담갔다. 얼굴과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물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숨을 참다못해 괴로워질 때쯤에야 빨개진 얼굴을 들며 욕조 옆 테이블에 놓인 동그란 비누를 집어 들었다. 아버지가 큰마음을 먹고 새어머니에게 선물해 주었던 싸구려 비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보드랍고 좋은 향기가 났다.
비누를 코에 바짝 갖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유리나의 몸에서 나던 것과 똑같은 봄꽃 향기.
거기까지 생각을 했는데 문득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굉장히 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번 뜨거운 물에 얼굴을 넣었다 뺐다. 물에 닿은 양 볼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이 비누 진짜 내가 써도 되나.’
레이너드는 한참 망설이다가 비장한 얼굴을 하고 비누로 몸을 빡빡 문질렀다.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을 때까지.
* * *
유리나는 제 앞에 서 있는 남자아이가 열두 살 꼬마라는 것도 잊고 그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옷이 날개라더니.’
곱상하게 생기긴 했지만 영락없이 평민 아이처럼 보였던 첫 이미지와 달리 말끔하게 씻고 유리나의 오빠가 입던 옷을 입은 레이너드는 귀하게 자란 귀족 소년처럼 보였다.
묵은 때를 벗겨 내니 더욱 하얗게 보이는 피부, 잘 먹지 못해 나이보다 키가 작고 왜소하지만 전체적으로 잘 타고난 골격, 촉촉하게 젖은 밝은 금발, 깊은 눈매, 오뚝한 코와 도톰한 붉은 입술.
옷이 커서 형의 옷을 빌려 입은 것 같은 모양새가 조금 흠이었지만, 외모로는 남주인공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소설 속 서브 남주인공다운 완벽한 외모였다.
무엇보다도 주눅 든 기세 없이 당당하게 빛나는 붉은 눈이 그를 더욱 귀족처럼 보이게 했다.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유리나와 눈이 마주치자 레이너드가 과장된 모양새로 팔짱을 꼈다. 오른쪽 입꼬리만 비쭉 들어 올린 표정은 오랜 전쟁을 종결시킨 개선장군마냥 의기양양해 보였다.
“나 이제 좋은 냄새가 나.”
‘좋은 냄새가 나?’도 아니고 무려 평서문이다. 그 사소한 문장 하나에서도 자만심이 담뿍 묻어났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족히 100년은 발효시킨 것 같은 치즈 냄새를 풍긴 주제에.
여전히 코끝에 그 지독한 냄새가 남아 있는 것 같아 유리나는 코를 찡그리다가 웃었다.
“그래, 그런 것 같네.”
“그런데 내가 쓴 비누 말이야, 네가 쓰는 거랑 같은 거야?”
“비누? 어떤 비누였는데?”
“노란색, 동그란 거.”
유리나는 아침에 자기가 썼던 비누를 떠올려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다른 사람도 그거 써?”
“음, 아마 아닐걸.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른 비누를 쓸 거야. 원래 쓰던 비누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내가 새로 고른 비누거든. 그건 왜? 아, 혹시 향이 마음에 안 들어?”
유리나는 지난번에 아카데미 방학을 맞이하여 저택에 왔던 오빠들이 꽃 비누 향이 별로라며 몸서리를 쳤던 것을 기억해 냈다.
“달콤한 향이라 싫을 수도 있겠네. 다음부터 오빠들이 쓰는 걸로 갖다 달라고 할게.”
“아냐.”
레이너드가 노을이 지고 있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목을 긁적였다.
“그냥 그거 쓸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이 어딘가 수상쩍었지만 유리나는 더 이상 의심을 품지 않고 그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녀들이 식기를 세팅했다.
그 모습을 담담하게 보는 유리나와 달리 레이너드는 테이블 위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신기하다는 기색을 열심히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들뜬 목소리까지는 완벽하게 숨길 수 없었다.
“왜 포크가 네 개야? 칼은 또 왜 세 개고? 귀족들은 손이 네 개라도 돼?”
유리나는 그를 향해 두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귀족은 괴물이 아니야. 손이 네 개일 리가. 포크와 나이프가 여러 개인 건 나오는 음식마다 다른 걸 사용해야 해서 그래.”
“음식이 여러 개야?”
“응. 그리고 음식의 종류에 따라 써야 하는 포크도 정해져 있어. 그렇게 질색하는 표정 짓지 마. 너도 조만간 배워야 하니까.”
얼른 그에게 가정 교사를 붙여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유리나는 하녀가 접시 위에 올려 준 빵을 집어 들었다.
사실 그녀 또한 한국에서 살 때는 이런 것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처음 식사를 할 때 걱정을 많이 했지만, 낯선 곳에 떨어진 그녀를 위한 배려였는지 테이블에 앉자마자 원래의 유리나가 가지고 있던 예절 지식들이 떠올랐다.
식사뿐만 아니라 귀족으로서 갖춰야 하는 예의범절 또한 자연스럽게 터득했고, 몸가짐 또한 원래 그렇게 살아온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버프가 이런 거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왕 버프를 줄 거면 제 한 몸 거뜬히 지킬 수 있는 마법 능력이나 검술 능력을 줄 것이지.
유리나는 속으로 조소하며 능숙하게 버터나이프로 빵에 버터를 발랐다.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던 레이너드가 제 주먹만 한 빵을 집어 버터를 잔뜩 바르더니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단단한 빵 겉 부분이 갈라지며 그의 옷 위로 빵가루가 떨어졌다. 바사삭하는 기분 좋은 소리도 났다. 입가에 빵가루를 잔뜩 묻힌 채로 입을 오물거리던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거 뭐야?”
“빵이잖아.”
“빵?”
그가 꼭 모욕을 당한 사람처럼 얼굴을 기묘하게 일그러뜨렸다. 순식간에 흰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놀리지 마! 나도 이게 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고! 빵은 씹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한 거잖아.”
“네가 먹던 빵은 밀가루가 제대로 정제되지 않고 발효도 제대로 시키지 않아서 그런 거야. 네가 먹던 것도, 지금 먹는 것도 모두 빵 맞아.”
그러나 이미 그는 설명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꼭 해바라기 씨를 볼이 터질 때까지 억지로 욱여넣는 햄스터처럼 두 뺨이 빵빵해질 정도로 빵을 입에 넣었다.
꽤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유리나는 어쩐지 한숨이 나왔다.
‘얼른 가정 교사를 붙여야겠어.’
아카데미에서 학업을 마치고 제국으로 돌아온 ‘카리온’은 기사의 작위를 받았다. 그러니 앞으로 귀족으로서 살아갈 그를 위해선 내일이라도 당장 교육을 시작해야 했다.
‘갈 길이 먼걸.’
착잡한 그녀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그는 그새 엉성하게 스푼을 쥐고 하녀가 가져다준 수프를 떠먹고 있었다. 하얀 수프가 테이블은 물론 그의 턱과 가슴팍에 툭툭 떨어졌다.
순간 유리나의 눈앞에 어릴 적 보았던 한 애니메이션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식기를 사용하지 않고 수프를 그릇째 들어 후루룩 마시는 야수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미녀. 곧 미녀는 그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스푼을 내려놓고 수프 그릇을 들고 마셨다.
그러나 유리나는 그런 마음씨 좋은 미녀가 아니라서 레이너드를 위해 수프를 흘려 가며 식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레이.”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하녀가 눈치껏 그녀의 식기와 접시를 다시 세팅해 주었다. 유리나는 냅킨으로 더러워진 그의 얼굴과 옷을 닦아 준 뒤 그의 손에 들린 스푼을 가져왔다.
“스푼 쥐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그녀는 레이너드가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다른 손으로 그의 거친 손을 잡았다. 엄지로 그의 손바닥을 살살 문지르자 그가 어정쩡하게 굽혔던 손가락을 완전히 폈다. 유리나는 그의 손에 스푼을 다시 쥐여 주었다.
레이너드는 처음엔 유리나가 스푼을 쥐고 수프를 먹는 법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따라 하려고 애를 썼지만, 굉장히 허기가 졌는지 어느 순간부터 그냥 제 식대로 수프를 후룩후룩 떠먹기 시작했다.
유리나는 접시에 구멍이 뚫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스푼으로 박박 긁어 먹는 그의 앞으로 제 수프 접시를 밀어 주었다.
“내 것도 더 먹어.”
하녀 하나가 그녀의 뒤에서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아가씨. 저희가 수프를 더 가져오겠습니다.”
“괜찮아.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서 그래.”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식사 시간 내내 그를 도와주었다. 레이너드는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지만 중간중간 간단하게 식사 예법도 가르쳐 주었다.
레이너드가 두툼한 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어 통째로 베어 물려고 했을 땐 진심으로 놀라며 스테이크를 한 입 크기로 썰어 주기도 했다.
시종일관 놀란 얼굴로 감탄을 하며 식사를 마친 레이너드는 볼록해진 배를 부여잡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런 게 천국이라면 지금 당장 죽어도 좋을 것 같아.”
“지금 죽으면 안 돼. 그거 계약 위반이야.”
“계약?”
레이너드가 누운 채로 머리만 빼꼼 들었다. 유리나는 의자를 끌고 와 그의 앞에 앉았다.
“말했잖아. 오늘 내가 널 구한 대가로 넌 날 구해야 한다고.”
“나도 아까 말했잖아. 내가 싫다면?”
“뭐, 네가 싫다면 내가 강제할 방법은 없지만…….”
유리나는 그를 보며 장난스럽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원래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라고 자신만만한 대답을 다시 들려줄 생각이었는데 배부른 고양이처럼 나른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까 왠지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 소리를 지금 해도 돼? 벌써부터 날 구해 주기 싫다는 말을 하면 내가 네게 투자를 안 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아, 정말.”
레이너드가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소파에 바로 앉자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그렇지만 난 네 말을 믿을 수 없는걸.”
“후원해 주겠다는 말? 그거 내가 카르티아의 이름을 걸고 약속했잖아.”
“그거 말고. 내가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소리 말이야.”
배가 불러 성질이 살짝 누그러졌는지 그는 식사를 하기 전보다 다소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마법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그래도 그게 엄청난 거라는 건 알아. 내가 그런 대단한 사람이 될 거라고? 말이 안 돼. 게다가 우리 부모님은 마법사가 아니었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마법사가 돼?”
“마법 능력은 선천적이긴 하지만 유전적인 건 아니야.”
“선천……, 유전, 뭐?”
“마법 능력은 날 때부터 타고나는 거지만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게 아니야. 쉽게 말하면 부모가 마법사여도 아이들이 마법사가 아닐 수도 있고, 부모가 마법사가 아니어도 아이들이 마법사일 수 있단 소리야.”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지 레이너드가 콧잔등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 마법이 선천? 뭐, 아무튼 그런 거라 치고, 너는 내가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 너도 마법사야?”
“아니,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네가 마법사가 될 거란 건 네 빨간 눈을 보고 알았고.”
그가 멍하니 유리나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콤플렉스를 건드렸는지 그가 꾸물거리며 소파에 엎드렸다.
유리나는 그를 보며 주인에게 혼난 뒤 제집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새끼 강아지를 떠올렸다.
“그렇지만 다들 내가 여신님께 저주받아서 빨간 눈을 가졌다고 했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받은 거라니까.”
“그렇지만 네가 잘못 안 거면 어떡해?”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그가 고개만 살짝 돌려 유리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만약 나중에 내가 마법을 잘하지 못하면 그땐 어떻게 할 거야?”
“응?”
“나 다시 그 고아원으로 돌려보낼 거야?”
그러니까 이 구구절절 이어진 대화의 진짜 이유가 저거였다.
고아원에서 저택으로 올 때까지 자신만만하던 태도와 달리 그는 자신이 재능 하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버림받지는 않을지 계속 걱정하고 있었던 거다.
따뜻한 손길을 모를 때는 상관없지만 그 단맛을 알아 버린 뒤 버림을 받으면 충격은 몇 배로 클 테니까.
유리나가 재능이 없어도 후원을 계속할 거라고 달래는 말을 건네려던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유리나.”
카르티아 후작의 목소리였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팔을 잡고 그를 일으켰다.
“마침 잘됐네. 레이, 네가 재능이 있다는 걸 확언해 줄 사람이 왔어.”
* * *
후작과 함께 데이브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연한 주홍빛 머리와 콧잔등에 가득한 주근깨가 인상 깊은 데이브는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가 잠시 멀찍이 떨어져서 레이너드를 관찰하더니 이내 유리나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가씨.”
마법사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기사의 작위를 받은 그는 괴팍하다고 유명한 다른 마법사들과는 달리 사근사근한 성격을 지녔다.
유리나가 손을 내밀자 데이브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카르티아 저택의 사람들은 모두 그가 오로지 유리나에게만 이런 공손한 인사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데이브. 아버지께 들었겠지만 이쪽이 내가 이번에 데려온 레이너드야.”
유리나가 뒤통수를 꾹 누르자 레이너드가 마지못해 고개를 까딱였다. 데이브가 그를 보며 미간을 좁히다가 이내 웃으며 유리나를 보았다.
“후작님께서 레이너드 군에게 재능이 있는지 살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잠시 살펴봐도 될까요?”
유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이브가 레이너드의 손을 잡았다. 레이너드가 불쾌하단 얼굴로 손을 빼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성인 남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는지 이내 포기한 듯 잠잠해졌다.
곧 데이브의 손에서 흘러나온 밝은 빛이 레이너드의 손을 타고 팔, 어깨 그리고 머리를 향해 옮겨 갔다.
한참 동안 그의 몸 구석구석 흘러 다니던 빛이 왔던 길을 되돌아 데이브의 손으로 돌아갔다.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레이너드의 손을 놓는 데이브의 얼굴은 평소 정중한 그답지 않게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아가씨!”
그는 같은 방 안에 후작이 있다는 것도 망각하고 유리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가씨, 레이너드 군을 제게 주십시오!”
“안 돼. 제자를 수집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알아봐.”
예상했던 반응이라 유리나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일축했다. 연인의 아버지에게 결혼 허락이라도 구하는 것 같은 데이브의 말에 소름이 돋았는지 레이너드가 몸을 떨었다.
유리나의 손을 잡은 데이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은 생각을 해 보고 대답해 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음…….”
유리나는 뜸을 들이며 그에게 잡힌 제 손을 빼냈다.
“그래도 안 돼.”
“아니, 대체 왜요!”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소리쳤던 데이브가 등 뒤에 있던 후작의 눈치를 살피며 헛기침을 했다.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대체 왜 안 된다고만 하시는 겁니까? 저도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가르쳐 주겠습니다. 저 아이는 집중적으로 가르치면 몇 년 안으로 크게 발전할 겁니다.”
“레이는 크론 왕립 아카데미로 보낼 거야.”
“제가 크론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저도 거기 출신이에요. 지금 거기서 교수로 있는 이들의 반은 아카데미 재학 시절에 저보다 성적이 더 좋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안 된다니까.”
예상보다 데이브를 떼어 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껏 제자를 한 명도 두지 않아서 혹시 후진 양성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닌가 의심을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계속되는 거절에 데이브가 조금 상처받은 것 같은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제가 그렇게 못 미더우십니까? 이래 봬도 제 제자로 오고 싶다는 사람이 줄지어 있는데.”
“그런 게 아니야. 데이브가 유능한 마법사란 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잖아. 그렇지만 레이에게는 마법뿐만 아니라 다양한 교육이 필요해. 그래서 아카데미에서 체계적으로 공부하게 하고 싶어.”
“그건 여기서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가정 교사를 붙이면 되지 않습니까?”
유리나는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카르티아 가문에서 후원을 해 준다고 하더라도 귀족들이나 가르치는 콧대 높은 가정 교사들이 레이의 스승이 되어 주려고 할까? 데이브야 레이가 재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레이를 가르치겠다고 자원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아니잖아.”
“제가 설명하면 됩니다.”
“그리고 사실 나는 레이가 귀족들에 둘러싸여서 주눅이 드는 것보다는 아카데미에서 또래의 다양한 아이들과 교류를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
그럴싸하게 지어내긴 했지만 유리나가 아카데미를 고집하는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원작에서 카리온은 크론 왕립 아카데미를 다녔어.’
타고난 재능이 있으니 원작과 달리 레이너드가 데이브에게서 마법을 배운다 하더라도 원작 못지않은 실력을 갈고닦을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유리나는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카리온’이 제국을 들썩이는 실력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크론 왕립 아카데미에 있고, 레이너드가 그곳에 가지 않을 경우 그 행운을 만날 수 없게 된다면?
그래서 추후에 레이너드가 데프론 후작으로부터 그녀를 지켜 줄 수 없다면?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리디아 데프론.’
유리나는 이곳에 오기 전 소설 속 빙의를 다룬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여럿 읽어 보았다.
조연, 악녀, 엑스트라 등 다양한 인물에 빙의한 여주인공은 제 미래를 위해 먼저 남주인공이나 서브 남주인공을 가로챈 뒤에도 안심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그들이 원작의 여주인공을 만나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탓이다. 그걸 생각하니 유리나도 완벽하게 안심을 할 수 없었다.
레이너드가 길을 가다가 우연히 리디아를 마주쳤다가 원작처럼 그녀에게 반하기라도 한다면? 지금껏 그를 찾아 고아원을 돌아다닌 것이 헛수고가 되어 버린다.
살아남기 위한 보험이었던 레이너드가 입장을 바꿔 원작대로 유리나를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불확실한 요소는 확실하게 제거해 두는 게 좋아.’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같이 단호한 유리나를 보던 데이브가 설득의 상대를 바꿨는지 레이너드를 보았다.
레이너드가 옆 걸음질로 슬금슬금 그에게서 멀어지다가 재빨리 유리나의 뒤로 숨었다. 뼈마디가 앙상한 손이 그녀가 유일한 희망이라도 되는 양 유리나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브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가씨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혹시 아카데미에 가기 전까지만이라도 제가 가르쳐도 되겠습니까?”
“그래 준다면 나야 고맙지. 안 그래도 데이브만 괜찮다면 부탁하고 싶었는걸.”
“데이브, 저 아이가 크론 왕립 아카데미의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나?”
카르티아 후작이 둘의 사이로 걸어 들어왔다. 갑자기 가려진 시야에 유리나는 후작의 옆구리 너머로 고개를 삐쭉 내밀어야 했다.
“입학 허가요? 후작님, 지금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냐고 하셨습니까? 당연하죠! 그냥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학장이 제발 입학해 달라고 제국까지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처음엔 마나 파동이 느껴지지 않아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아까 관찰해 보니까 타고난 마나가 이렇게 넘쳐 나는데 그걸 무의식적으로 갈무리를 하고 있던 거였습니다. 마법을 배운 마법사에게도 힘든 일을 레이너드 군은 숨 쉬는 것처럼 하고 있단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아이가 아직까지 후원자를 찾지 못했는지 더 이상하군요. 아가씨, 대체 레이너드 군을 어디서 찾으셨습니까?”
“제이논 남작령에 있는 고아원에서?”
“제이논 남작이라면 그 머리에 든 것도 없이 허세만 가득한 남자 말이군요. 그런 남자가 다스리는 영지에 있었으니 능력을 발견하지 못한 게 이해가 가는군요.”
꽤나 신랄한 비판에 유리나는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저런 말도 할 수 있었어?’
늘 생글생글 웃고 있어서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지 미처 몰랐다.
그러나 곧이어 들려오는 질문에 유리나는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했다.
“그런데 아가씨께선 레이너드 군이 재능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요즘 고아원에 다닌다고 이곳저곳을 다녔잖아. 그러다 언젠가 여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가 붉은 눈을 타고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작은 마을이었는데, 그 마을에서 내려오는 구전이었나 봐. 대마법사인 윌리엄 또한 붉은 눈이라고 하던데!”
당연히 거짓말이다. 유리나는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었고, 애초에 그런 구전이 내려오는 곳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알게 뭐람. 어차피 데이브가 그 구전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마을을 찾아다닐 일 따위는 없었다.
‘전생에 레이너드가 미래에 제국뿐만 아니라 주변 왕국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가 돼서 날 죽이는 소설을 읽었어!’라는 진실보단 이쪽 거짓말이 훨씬 그럴싸했다.
그래서 유리나는 차라리 신비한 이야기를 믿은 순진한 꼬마 아가씨가 요행으로 레이너드를 만났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꾸미기로 진작 마음먹고 있었다.
‘어차피 원작에서도 이 붉은 눈의 진실은 카리온의 등장으로 밝혀지니까 미리 말한다고 해서 나쁠 건 전혀 없겠지.’
유리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데이브의 양손을 잡고 방방 뛰었다.
“들어 봐, 데이브. 신기하지 않아? 난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세상에 빨간 눈이 어디 있냐고 웃었는데 진짜로 빨간 눈을 가진 레이너드를 발견했으니까 말이야! 난 한눈에 그가 위대한 마법사가 될 거란 걸 알아봤어! 왜 그런 표정으로 봐? 데이브는 안 신기해? 내가 이상한 거야?”
유리나는 최대한 순진무구한 표정과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노력의 결과인지 제법 열 살다운 해맑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닙니다, 신기합니다.”
그는 잠시 또랑또랑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유리나와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레이너드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커다란 손으로 유리나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었다.
“최근 들어 아가씨께서 많이 어른스러워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나 봅니다. 아직은 아이시군요.”
“뭐야. 나 어린애 아니야. 열 살이나 먹었다고.”
유리나는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렸다. 뒤에서 레이너드가 놀라서 숨을 급하게 들이쉬는 게 민망할 정도로 크게 들렸다.
“네, 네. 아가씨는 다 큰 아가씨입니다. 그래도 뭐, 아가씨 말씀처럼 진짜로 레이너드 군이 여신의 축복을 받았을지도 모르죠. 저런 능력을 확실히 여신의 축복을 받지 않고선 타고나기 힘들 테니까요. 그럼 저는 얼른 돌아가서 아카데미에 보낼 추천장을 작성해야겠습니다.”
“추천장도 써 주는 거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제 제자로 들이지 못하는 건 속이 쓰리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레이너드 군이 재능을 활짝 펼치길 바라고 있으니까요.”
후작에게 양해를 구한 데이브가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유리나가 어린애처럼 말할 때부터 웃고 있던 후작이 그녀의 볼을 애정이 가득한 손길로 문질렀다.
“저 애 아니에요.”
그 말에 그가 소리 내어 웃자 그녀는 새침하게 팔짱을 끼며 삐친 척을 했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기 위해 “흥” 하고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픽 돌리기까지 했다.
“이런, 삐쳤니?”
“안 삐쳤어요. 그런 건 어린애나 하는 거예요.”
다시 한번 레이너드가 ‘끅’거리며 기겁하는 소리를 냈다. 순간, 민망함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이 짓도 못 하겠네.’
유리나는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며 얼른 팔짱을 풀었다.
“레이가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셨죠? 그럼 이제 레이를 후원해 주시는 거 맞죠?”
“그래, 네 뜻대로 하거라.”
카르티아 후작은 제가 내뱉은 말은 지키는 남자였다. 그는 지금부터 레이너드를 후원자로서 극진한 대우를 해 주겠다며 그에게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덧붙였다. 그러고는 유리나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유리나는 아이처럼 헤실헤실 웃던 표정을 갈무리했다.
유리나와 레이너드만 남은 방에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둘 중 먼저 입을 연 건 여전히 그녀 뒤에서 쭈뼛쭈뼛 서 있던 레이너드였다.
“나 정말 마법사가 될 수 있어?”
“아까 데이브가 한 말 들었잖아.”
“그 사람 대단한 마법사야?”
“응. 제국에서도 알아주는 마법사니까.”
그가 잠시 입을 다물더니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럼 나 이제 여기서 지내는 거야?”
“응. 아마 조금 이따 하녀가 방을 안내해 주러 올 거야. 그러니까 이제 내가 널 그 고아원으로 되돌려 보낼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마.”
“응.”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정적이 찾아오나 싶었지만, 레이너드가 무언가 결심을 한 듯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응?”
“……저 어린애 아니에요?”
방금 전 그녀가 했던 것처럼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였다. 예상치도 못한 말에 유리나는 당황하여 말문이 막혔다. 이 꼬마에게 놀림을 당했다는 사실도 어이가 없지만 그보다는 화끈거리는 얼굴이 더욱 당황스러웠다.
“레이, 조용히 해.”
“……어, 응.”
다시 한번 어색한 공기가 둘을 감싸 안았다.
* * *
레이너드에게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사실 유리나에게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녀는 굳게 닫혀 있는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방을 보며 숨을 고르다가 옆에 쭈뼛쭈뼛 서 있는 레이너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레이.”
유리나가 팔을 쿡 찌르자, 지나가는 고용인을 노려보던 레이너드가 재빨리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저택에서는 그렇게 날을 세우며 사람을 경계하면 안 된다고 유리나가 몇 번이나 말한 결과였다.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는 또다시 자신과 유리나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하녀를 흘겨보며 유리나의 뒤에 몸을 숨겼다.
“저 인사, 꼭 해야 해?”
재능이 있는 아이를 후원해 주는 건지, 아니면 겁이 많은 아이를 돌봐 주는 건지. 어쩐지 후자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유리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버지가 널 공식적으로 후원해 주기로 했으니까 고용인들이 널 윗사람 대우하는 건 당연한 거야. 평민이라고 해도 귀족가의 후원을 받으니까 저들하고 같을 수는 없잖아. 그리고 넌 마법을 배울 거잖아.”
“마법이 무슨 상관이 있어?”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마법 아카데미를 무사히 졸업하고 돌아오면 실력에 상관없이 기사 작위를 받아. 게다가 넌 데이브가 인정한 실력이잖아. 그러니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는 게 당연하지.”
“흐음.”
그래도 영 못마땅한지 레이너드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복도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유리나는 제 팔을 꽉 잡고 있는 그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그렇게 볼 거 없어. 어머니가 직접 보고 뽑은 고용인들이야. 여기에 널 무시하고 함부로 대할 사람은 없대도 그러네. 있다면 바로 해고할 거니까 걱정 마.”
“…….”
“그러니까 얼굴 찌푸리지 말고 웃어. 적어도 어머니를 볼 때는 그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
벌써 몇 번째 듣는 당부에 레이너드가 입술을 삐쭉였다.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야? 왜 자꾸만 웃으라고 그래?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는 안 그랬잖아.”
“무섭지는 않으셔. 자상한 분이야.”
“근데 왜 그래?”
유리나는 말없이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무서운 분이기는 하지.’
그녀가 이곳에 와서 6개월이 넘게 봐 온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청초한 붓꽃 같은 사람. 유리나는 그녀를 보면 항상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다.
늘 따뜻하게 웃고 있는 후작 부인은 가족들에게는 물론, 저택의 고용인들이나 외부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고 상냥했다. 고위 귀족들이 보일 수 있는 고압적인 태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평소 성격과 달리 의외로 엄격한 구석이 있어서 유리나나 지금은 아카데미에 있는 유리나의 오빠들에게 예의범절을 철저하게 가르쳤다.
만약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예의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이면 가차 없이 꾸짖기도 했다. 유리나의 일이라면 웬만해서 좋게 넘어가려는 카르티아 후작과는 확연히 달랐다.
유리나의 걱정은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과연 레이를 받아 줄까?’
유리나는 카르티아 후작에게 레이너드를 단순히 피후원자가 아니라 또래의 친구처럼 대하고 싶다고 했다. 다른 후원자와 달리 레이너드를 카르티아 저택에 머물게 한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카르티아 후작도 재능이 확실치 않은 그를 후원하는 것을 꺼렸을 뿐이지, 유리나가 그와 함께 어울리는 것을 꺼려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인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입장에서는 유리나가 또래의 남자아이를, 그것도 평민 아이와 어울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레이너드를 다른 곳에 머물게 하라고 지시한다면 레이너드에게 잘해 주어서 환심을 사려고 했던 유리나의 계획이 어긋나게 된다.
덕분에 유리나는 만약 후작 부인이 반대를 할 경우 그녀를 설득할 말을 찾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또 아이 흉내를 내면서 무조건 졸라야 하나?’
상상만 해도 끔찍한 광경에 몸서리를 치고 있는데, 후작 부인의 방에서 하녀가 나와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레이, 가자.”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옷매무시를 마지막으로 정리해 준 뒤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너드는 안에 앉아 있는 후작 부인을 발견하고 잠깐 쭈뼛거렸지만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따라 들어갔다.
“유리나.”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자 후작 부인이 환하게 웃으며 유리나에게 팔을 벌렸다. 유리나는 못 이기는 척 그녀의 품에 조심스럽게 안겼다. 언제나 그렇듯, 후작 부인은 유리나를 꽉 안아 주었다. 왠지 모르게 코끝이 시큰거리는 따뜻한 포옹이었다.
“어머니.”
“그래, 몸은 좀 괜찮니? 아픈 곳은 없어? 먼 길 다녀오느라 피곤할 텐데 그냥 방에 있지 그랬니. 그러다가 또 열이 오르면 어쩌려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요.”
일부러 콧소리를 섞은 유리나의 목소리에 레이너드가 쿨럭 헛기침을 했다. 그는 말없이 눈을 흘기는 유리나의 시선을 피해 창밖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두 아이들의 소리 없는 신경전을 알아채지 못한 것인지 후작 부인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방에 있으면 엄마가 어련히 알아서 보러 갔으려고. 사실 돌아오자마자 보러 가고 싶었는데 먼지가 너무 많이 묻어서 그럴 수가 없었단다. 혹시라도 네게 안 좋을까 싶어서.”
그 정도로 약하지 않다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유리나는 그저 입을 다물고 웃었다.
‘유리나가 약하긴 약했지.’
6개월 전, 이 저택의 진짜 주인인 ‘유리나 카르티아’는 심한 열병을 앓았다. 며칠 밤낮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딸을 간호했던 후작 부인은 유리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뒤에도 안심하지 못했다.
자신이 온 마음을 다 바쳐 사랑했던 딸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 같아 유리나는 후작 부인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나왔다. 그제야 후작 부인의 시선이 유리나의 뒤에 쭈뼛쭈뼛 서 있는 레이너드에게로 향했다.
“그래, 아버지께 이야기는 들었단다. 후원해 줄 아이를 데려왔다고?”
“네. 레이너드라고 해요. 레이, 이리 와서 인사드려.”
혹시나 또 퉁명스런 표정을 짓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는 데이브를 만날 때와 달리 유리나가 알려 준 대로 순순히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말은 전혀 귀족적이지 않았지만.
유리나는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제 눈치를 보는 그를 보며 입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후작 부인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그러나 날카로운 시선으로 레이너드를 위아래로 훑었다. 유리나는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려는 것을 보고 눈에 힘을 주었다.
레이너드가 입술을 삐쭉이더니 이번에도 순순히 웃었다.
“그래, 저택은 마음에 드니?”
잠깐 동안의 침묵 끝에 후작 부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열심히 표정 관리를 하고 있던 레이너드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네?”
“저택이 마음에 들어? 이렇게 어린 손님은 오랜만이라 다들 잘 대해 주었는지 모르겠네.”
“아, 뭐…….”
웅얼거리던 그가 뒤늦게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좋아요. 엄청 좋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방을 준비하라고 이르기는 했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직은 별 준비를 하지 못했어. 방에 별 게 없지? 그래도 곧 가구도 들이고 네 취향대로 꾸며 줄 거니 조금만 기다리렴.”
“저는 지금도…… 괜찮은데.”
“괜찮기는. 손님방으로 쓰던 곳이라 정말 기본적인 것만 있어서 불편할지도 몰라.”
가볍게 손을 젓던 그녀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참, 그리고 네 방 근처에 있는 작은 응접실을 공부방으로 꾸밀 생각이란다. 조금 작지 않을까 걱정되기는 하는데 공부하고 놀기에는 큰 것보다는 차라리 아늑한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어떠니? 괜찮니?”
레이너드가 ‘끅’ 소리를 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거 없어도 돼요.”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단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널 지원해 줄 거야. 가장 중요한 마법은 데이브가 가르쳐 줄 거고, 나머지 과목을 가르쳐 줄 선생은 수소문해서 데려올 거야.”
“감사…… 합니다.”
유리나는 예상과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조금 얼떨떨했다.
‘분위기가 생각보다 괜찮네?’
후작 부인이 레이너드를 저택 밖 숙소로 내보내기는커녕 이렇게까지 호의를 갖고 있는 것도 신기했고, 앙칼진 고양이 같던 레이너드가 그녀의 말을 순순히 듣고 있는 것도 의아했다.
‘생각보다 성격은 순한가?’
그녀는 독기가 많이 사라진 레이너드를 보다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가 사람들에게 적의부터 보인 건 그동안 그에게 적의를 보이는 사람만 가득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따뜻한 호의마저 내치며 벽을 세울 정도로 악에 받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긴 이제 겨우 열두 살이니까.’
어쩌면 그는 지금껏 사람의 손길에 굶주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옷이 많이 크구나.”
문득 후작 부인의 시선이 레이너드의 옷소매로 향했다. 옷이 커서 자꾸 옷소매가 손가락까지 덮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한 번 걷어 올려 보기에는 좋지 않았다.
레이너드가 두 귀를 붉히며 두 손을 등 뒤로 가렸다.
“옷이 가장 급했는데 미처 생각을 못 했네. 내일 당장 로렌 부인을 부르마.”
“괜찮아요. 이 옷도 좋아요.”
“아무리 좋아도 치수가 맞지 않으면 불편해서 어떡하니.”
“맞아, 레이. 안 그래도 나도 새 옷을 장만해 주려고 했어.”
유리나까지 거들자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한바탕 대화를 마치고 나자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후작 부인이 두 아이들을 소파로 안내했다. 세 사람이 앉자 방 한쪽에서 대기하던 하녀들이 테이블 위에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간식과 우유, 홍차를 내왔다.
달콤한 디저트들로 가득 찬 테이블을 보는 레이너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버터 쿠키를 덥석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다 뒤늦게 후작 부인의 시선을 느꼈는지 쿠키를 내려놓으며 입가에 묻은 가루를 탈탈 털어 냈다.
“죄송해요.”
후작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죄송할 필요 없어. 예법은 차차 배우면 되는 거지. 많이 먹거라.”
평소 예법을 깐깐히 챙기는 그녀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이 아니었다. 유리나는 내심 또 한 번 놀랐지만 그 자리에서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디저트로 배를 채울 정도로 양껏 먹은 레이너드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선 하녀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돌아갔다. 후작 부인과 단둘이 방에 남은 유리나는 괜히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 정말 괜찮으세요?”
“뭐가 말이니?”
“그러니까, 레이 말이에요.”
잘못을 한 아이처럼 유리나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작아졌다.
후작 부인의 속내야 어찌 됐든 레이너드가 저택에 머물 수 있게 되었고, 후작 부인 또한 그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 계획이 성공했다며 좋게좋게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유리나의 마음 한구석에 어쩐지 찝찝한 기분이 남아 있었다. 인재 육성에 관심이 많은 카르티아 후작이야 레이너드가 재능이 있으니 마음에 들어 했다지만 후작 부인은 왜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은 걸까?
후작 부인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이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니?”
“그게 아니라…… 레이가 이대로 저택에 머물러도 돼요?”
“도통 모를 소리만 하는구나. 저택에 데리고 있다고 싶다고 한 건 너였잖니.”
“그렇지만…….”
유리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치맛자락만 매만졌다.
카르티아 후작 앞에서는 걱정 하나 없이 당당할 수 있었다. 레이너드의 재능이 확실하니 후작이 그를 후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도 했지만,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서 그의 앞에 담담히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후작 부인의 앞에서는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그녀 앞에서는 꼭 죄를 지은 사람처럼 긴장이 되고, 진짜 열 살 아이처럼 잔뜩 움츠러들게 된다.
“왜 그렇게 잘못을 한 아이처럼 굳어 있니? 설마 엄마가 혼낼 거라고 생각했어?”
허리를 숙인 후작 부인이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유리나의 뺨을 감싸 쥐며 눈을 마주했다. 유리나를 향한 애정이 담긴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넌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해도 된단다. 그냥 전처럼 아프지만 말고 밝게 지내기만 해 주렴. 엄마는 그거면 돼.”
후작 부인의 입술이 유리나의 이마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유리나는 드레스를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래, 이건 죄책감이다.
후작 부인이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하면 대할수록 마음속에서는 죄책감이 더욱 커졌다.
카르티아 후작 앞에서는 태연한 척할 수 있어도 후작 부인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어쩌면 바로 이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과분한 애정을 쏟아 주는 그녀의 진짜 딸이 아니라는 죄책감 때문에.
동시에 시선을 마주하며 웃어 주는 그녀의 모습에서 어쩌면 지금은 다시 보지 못할 진짜 엄마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기에.
“네, 어머니.”
유리나는 억지로 입술을 당겨 웃었다.
그러나 그게 후작 부인에게는 웃는 것으로 보였을지, 우는 것처럼 보였을지는 모를 일이다.
* * *
“레이, 그러고 보니 몇 살이야?”
유리나는 로렌 부인이 능숙하게 레이너드의 치수를 재는 것을 구경하다가 문득 물었다. 대충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무심코 그의 나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순간 레이너드가 내 뒷조사를 한 거냐고 바락바락 화낼지도 모른다.
‘지금은 열한 살? 열두 살?’
어렴풋한 기억에 따르면 데프론 후작이 올겨울 ‘카리온’을 후작가로 데려갔을 때 그는 리디아와 두 살 차이가 났다.
그리고 리디아는 유리나와 동갑. 지금이 여름이란 것을 감안했을 때 레이너드의 생일이 지났다면 열두 살, 지나지 않았다면 열한 살일 거라는 추측을 대충 할 수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로렌 부인에게 몸을 맡기고 있던 레이너드가 장난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열두 살. 너는 열 살이지? 그때 들었어.”
“응.”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리잖아. 완전 애네?”
그가 다소 짓궂게 웃었다.
‘어이구, 그러셔?’
겉과 달리 알맹이는 스무 살이 넘은 유리나에게야말로 레이너드가 애로 보였다. 겉모습만 놓고 봐도 레이너드가 유리나보다 어린 것처럼 보였다.
두 살이 많다고 해도 그는 워낙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유리나와 체구가 비슷하거나 살짝 작았다. 남들의 눈엔 아무리 좋게 봐 줘도 동갑내기로 보일 터다.
“겨우 두 살 많으면서.”
“겨우 두 살이라니? 2년이나 빨리 어른이 될 수 있는데? 아냐, 3년이나 빨리 어른이 될 수 있어.”
“두 살 많은데 3년이나 빨리 성인이 되는 건 대체 어느 나라 계산법이야?”
유리나의 지적에도 그는 굴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턱을 살짝 치켜세우는 모습이 거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곧 있으면 열세 살이 되거든.”
“어?”
“열세 살.”
유리나가 제대로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레이너드가 손가락으로 10과 3을 펼쳐 보였다. 그러나 로렌 부인이 가만히 있으라고 핀잔을 주자 이내 굳은 얼굴로 팔을 내렸다.
‘열세 살이라.’
그렇다면 그는 유리나와 리디아보다 세 살이 많은 게 되어 버린다. 잠시 기억과 현실의 차이점에 대해 고민하던 유리나는 깔끔하게 결론지었다.
‘잘못 기억하고 있었네.’
애초에 어떤 소설이었는지 제목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소설이다. 나이 같은 사소한 기억이 잘못된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녀가 ‘카리온’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는 것이라곤 사실 많지는 않았다.
카리온이라는 특이한 이름과 금발에 빨간 눈이라는 것, 술집 주인인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고아원으로 스스로 도망을 간 것, 겨울이 시작될 때 데프론 후작에게 거둬졌다는 것, 그리고 크론 왕립 아카데미로 유학을 갔다가 리디아가 성년식을 치르는 해에 돌아왔다는 것 정도다.
그나마도 남주인공인 황태자보다 카리온의 설정을 더 많이 기억하는 건 잔학무도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황태자보다 여주인공에게 다정다감하던 카리온이 더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리디아가 왜 그런 카리온을 놔두고 황태자를 선택했나 싶었지.’
유리나는 팔짱을 끼고 레이너드를 위아래로 훑었다.
저렇게 자기가 잘난 줄 아는 거만한 꼬맹이가 어떻게 8년 뒤에 그런 다정다감의 정석인 남자가 되는 걸까. 대체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무튼 너는 앞으로 밥을 더 먹어야겠어. 나보다 세 살이나 많다면서 키가 나랑 비슷하면 어떡해? 네가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릭스 오빠가 열 살 때 입던 옷이야. 근데 그것도 크잖아.”
“두고 봐. 난 앞으로 키가 엄청 클 거야. 너 나중에 날 올려다보느라 목 좀 아플걸.”
그가 어깨를 으쓱이다가 또다시 로렌 부인의 눈초리를 받았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아버지를 닮아서 키가 클 거라고 그랬어.”
“누가 그래? 어머니가?”
“아니. 아버지가. 아버지 키가 아주 컸거든.”
순간, 유리나는 그와 나누고 있는 대화에서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대화는 막힘없이 술술 이어지고 이상한 곳은 하나도 없는데 어딘가 삐걱거리는 것 같은…….
“아가씨.”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유리나는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온 건지 모를 집사 로버트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기분 탓인지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는 일이 없는 그의 얼굴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레이가 여전히 못마땅한 거겠지.’
카르티아 후작에게 레이너드와 친구처럼 지내고 싶다는 말을 건네고 난 다음,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자신을 ‘유리나’라고 부르고 반말을 사용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넌지시 내비쳤다.
그가 고용인처럼 그녀를 깍듯하게 대하면 절대로 친구처럼 지낼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처음에 놀란 표정을 짓던 후작은 한참 진지한 얼굴로 고심을 하더니 몇 가지 조건을 붙여 겨우 허락을 해 주었다.
하나. 레이너드에게 예절 교육을 철저하게 시킬 것.
둘. 그가 작위를 받기 전까지 대외적인 곳에서는 예의를 갖추게 할 것.
셋. 후작 내외를 비롯하여 지금은 아카데미에 있는 유리나의 세 오빠들에겐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게 할 것.
그건 어차피 유리나도 생각하고 있던 것이라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너드에게도 그 조건을 확실하게 주입시켜 준 뒤 그다음 날, 그를 가르칠 예절 선생을 고용했다.
후작의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로버트는 레이너드에게 따로 주의를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완전히 무시를 할 수는 없었는지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스스럼없이 대할 때마다 주의 대신 따가운 눈초리를 건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너드는 그런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 같지만.’
유리나는 레이너드와 로버트를 번갈아 보다가 혀를 가볍게 찼다. 레이너드가 무덤덤하다고 해서 그녀까지 이 신경전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로버트.”
그제야 로버트가 레이너드를 보던 시선을 거뒀다. 순식간에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유리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급한 일이야?”
“데이브 님도 함께 계십니다.”
그렇다면 급한 일인가 보다. 유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흐트러진 드레스 자락을 정리했다.
때마침 레이너드의 치수를 다 잰 로렌 부인이 옷 정리를 도와주었다.
“다 끝났나요?”
“치수는 다 쟀고 옷 디자인과 옷감 등을 골라야 합니다.”
비척비척 걸어와 유리나 옆에 앉던 레이너드가 대놓고 싫은 얼굴을 했다.
“끝난 게 아니야? 아까부터 내내 서 있었는데? 여기서 뭘 또 해?”
“옷이 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잖아. 네게 어울리는 디자인은 물론, 옷감과 색상을 골라야 해. 벌써부터 그렇게 지치면 안 돼. 옷이 완성되면 옷과 어울리는 신발도 골라야 하고 손수건이나 장신구도 봐야 하니까.”
레이너드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꼭 한겨울에 얼었다 녹아 시들시들해진 샐러드 채소 같은 모양새로 소파에 축 늘어졌다.
예절이나 기품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행동에 로버트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흘끔 쳐다보았다. 로렌 부인은 디자인 책을 가져오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작 경우 없는 행동으로 모두를 놀라게 한 당사자는 그 시선들을 신경도 쓰지 않고 불퉁거렸다.
“죽을 것 같아. 뭐가 이렇게 복잡한 거야? 몰랐는데 너 되게 불편하게 산다. 포크를 네 개나 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어.”
“이제라도 알아주니 고맙네. 참고로 앞으로 배울 거 많으니까 고작 이거 가지고 앓는 소리 내지 마. 갈 길이 머니까. 그리고 보는 눈이 있을 땐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서 앉아. 정식으로 후원하기로 했으니 너도 이제 카르티아의 일원이야. 네가 밖에서 흉잡히면 카르티아 가문에 먹칠을 하게 된다는 거 명심해.”
유리나는 ‘차라리 날 잡아 잡수쇼’라고 온몸으로 항의라도 하는 것 같은 레이너드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가 주위 사람들을 살피다 뒤늦게 멋쩍어졌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나 저거 아무리 봐도 모르겠어. 저거랑, 저거랑 같은 색 아니야?”
“달라.”
“똑같은 빨간색이잖아.”
“왼쪽은 푸른색이 섞인 빨간색이고 오른쪽은 노란색이 섞인 빨간색이잖아. 그러고 보니 네 피부색엔 오른쪽은 안 어울리겠다. 앞으로 네 옷엔 저 색은 절대로 쓰지 말라고 해야겠어.”
레이너드가 입을 떡 벌렸다. 유리나는 못하겠다며 또다시 소파 위에 널브러지려는 그의 팔을 먼저 잡아챘다.
“아무튼 나 잠깐 아버지 좀 보고 올 테니까 얌전히 디자인과 옷감 고르고 있어.”
“나 혼자 고르라고? 가지 말고 여기 같이 있으면 안 돼?”
유리나는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레이너드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그렇게 불안한 건가.’
이곳에 온 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그는 아직도 경계를 완전히 풀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특히 누가 제 몸을 만지는 것을 극도로 꺼려 해서 누가 실수로 몸에 손이라도 댔다 하면 소리를 지르며 구석으로 도망갔다.
조금 전에도 로렌 부인이 옷 치수를 재려고 하는 것을 싫다고 악을 쓰며 거부하다가 ‘맞지도 않는 옷을 계속 입고 있는 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유리나의 말에 겨우 허락했던 참이다.
그런 그가 조금이나마 경계를 푸는 건 유리나뿐이었다.
낯선 이만 가득한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지, 그는 그녀가 자기만 두고 어딘가로 갈 때면 지금처럼 불안한 시선을 던지고는 했다.
‘꼭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 같네.’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낑낑거리는 작은 강아지. 왠지 모를 죄책감에 유리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주제에 같이 있으면 맨날 툴툴거리지.’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저 가련한 표정이 사실은 고도의 연기가 아닌지 잠깐 의심이 들었다.
“로렌 부인도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러니까 걱정이지.”
그가 로렌 부인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몸을 웅크렸다. 로렌 부인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는 자신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로렌 부인을 유독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금만 기다려. 아버지랑 데이브가 찾는 거라 안 갈 수가 없어. 금방 갔다 와서 같이 봐 줄게.”
“그래도…….”
“괜찮아. 로버트도 도와줄 거야. 로버트, 나 아버지께 다녀오는 동안 로렌 부인과 함께 레이 좀 도와줄 수 있어?”
충실한 집사인 로버트가 곧바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유리나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로렌 부인이 보여 주는 옷 디자인을 살피는 레이너드를 보다가 방을 나왔다.
* * *
유리나는 달달한 레몬차를 마시며 데이브와 카르티아 후작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카데미의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입학시험을 치르는 거고, 또 하나는 저명한 인사들의 추천장을 받아 서류 심사를 통과하는 방법입니다. 이 경우엔 입학하기 전 재능 확인차 면접을 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크론 왕립 아카데미 입학식은 매년 봄. 유리나와 데이브는 내년 봄에 레이너드를 입학시키는 것을 목표로 계획을 짜고 있었다.
진지하게 데이브의 말을 경청하던 카르티아 후작이 턱을 문지르며 뜸을 들이다 물었다.
“어느 쪽이 더 쉽지?”
“사실 허가를 받는 것 자체가 워낙 힘들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쉽지는 않지만 보통은 전자가 조금 더 통과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추천장은 아무래도 객관성이 떨어지는 데다가 아카데미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문제니까요.”
후작이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카데미 입학을 준비할 무렵에 추천장으로 크론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가 생각보다 재능이 없다고 떠들썩한 적이 있었지.”
“네, 저도 재학 시절에 얘기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이후로 더 까다로워진 것 같습니다.”
“자네가 볼 때 레이너드 군은 시험에 붙을 가능성이 희박한가?”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준비 기간이 짧으니까요. 마법이야 지금부터 가르쳐도 재능이 있으니 충분히 다른 입학생들을 따라잡을 수 있겠지만, 아시다시피 마법 과목만 시험을 보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과목까지 준비하려면 반년은 너무 촉박합니다.”
“그렇다면 내년 봄 입학은 좀 힘들지 않겠나?”
후작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데이브의 말처럼 정상적인 입학 방법이라면 반년이 아니라 일 년 반을 준비한다고 해도 힘들 것이다. 마법 학과가 유명하기는 했지만 크론 왕립 아카데미는 종합 아카데미, 그것도 한 왕국을 대표하는 아카데미였다.
각 학과마다 전공과목 성적을 가장 중요하게 보기는 하지만, 역사, 정치, 경제 등 갖가지 과목이 시험 범위에 들어가 있다.
‘마법 시험만 본다고 해도 문제지.’
아직 글자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레이너드가 반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마법 이론을 완전히 깨우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유리나는 반 이상 비운 찻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레이너드는 충분히 추천장만으로도 입학할 수 있을 거예요.”
추천장을 받아 면접을 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레이너드에게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무조건 합격할 수 있었다. 다른 지식을 요구하는 시험과 달리 면접에서는 오로지 마법 잠재력만 평가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전에 서류가 통과될 수 있을지가 최대 문제였다.
“데이브가 제자로 삼고 싶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아이니 재능이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유리나, 그 전에 추천장만으로 서류가 통과될 확률이 낮지 않느냐.”
“흠, 흠. 후작님,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조금 쑥스럽지만 제가 마법사들 사이에선 영향이 있어서 제가 가르친 제자라고 하면 다들 인정해 줄 겁니다.”
‘쑥스럽다’라는 말과 달리 데이브는 자신감이 잔뜩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저런 건 레이와 똑같네.’
어쩌면 두 사람은 마음이 잘 맞는 사제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유리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거기에 제국의 카르티아 가문이 후원한다는 소문까지 퍼지면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도 능력이 있다고 소문이 날 테죠.”
걱정이라고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실제로도 그녀는 레이너드가 내년에 아카데미에 입학할 거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카리온도 그렇게 입학했으니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면 ‘카리온’이 어떤 방식으로 입학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카리온’이 고작 몇 달 만에 시험을 통과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떻게 그 높고 높은 크론 왕립 아카데미의 벽을 넘었을까?
‘데프론 후작은 마법사지.’
그것도 제국에서도 꽤 실력 있는 마법사였다. 그런 그가 추천서를 써 줬다면 아카데미에서도 카리온을 주의 깊게 보았을 것이다.
어디 한번 얼굴이나 보자는 심정으로 면접에 불렀다가 한눈에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입학 허가를 주었을 것이다.
‘추천장을 써 주는 게 데프론 후작이 아니라 데이브라서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걱정은 없었다.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나선 데이브는 데프론 후작을 뛰어넘는 실력자에 크론 왕립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게다가 레이너드 등 뒤에는 데프론 못지않게 영향력이 있는 카르티아가가 버티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유리나는 아카데미에서 레이너드의 재능을 눈여겨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유리나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던 데이브가 그녀보다도 더 당당한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저 말고도 추천장을 써 줄 이들도 구했습니다. 제가 레이너드의 군의 능력에 대해 설명을 하니 다들 기꺼이 추천장을 써 주겠다고 하더군요.”
“정말? 번거로웠을 텐데 언제 그런 부탁도 한 거야?”
뜻밖의 말에 유리나가 진심으로 놀라자 데이브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아가씨께서 레이너드 군이 아카데미에 입학하길 바라시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죠. 그리고 레이너드 군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내년 봄에 입학시키고 싶었습니다.”
“그건 좀 의외네. 나는 데이브가 레이너드를 조금 더 가르치고 싶어서 최대한 아카데미 입학을 늦출 줄 알았어.”
유리나는 데이브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년 봄 입학을 강력하게 주장할 생각이었다. 아카데미의 기본 재학 기간은 7년. 그보다 졸업이 더 늦어지는 사람은 수두룩해도 일찍 학업을 마치는 사람이 없었다.
‘카리온’ 또한 7년을 꽉 채워 유리나와 리디아가 성년이 되던 해 봄에 돌아오지 않았던가.
유리나가 성년이 되는 해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 해가 소설 속의 주 무대가 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해 봄, 비슷한 시기에 성년을 맞은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황태자비가 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할 거지만 내 뜻대로만 되는 일은 아니니까.’
유리나를 끔찍하게 아끼는 카르티아 후작은 분명 유리나가 싫다고 하면 최대한 막아 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힌 치정 관계가 그렇게 깔끔하게 끝날 일이던가.
카르티아 후작을 따르는 귀족들은 거듭해서 유리나를 황태자비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데프론 후작이 유리나와 카르티아 가문을 견제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러니 레이너드는 반드시 내년 봄에 입학해서 8년 뒤에 돌아와서 유리나를 지켜 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 모든 계획을 세우는 거니까.
그렇지만 그건 유리나의 사정이지 데이브의 사정이 아니었다. 지난 며칠 동안 그녀는 데이브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경우를 대비하여 그를 설득할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레이너드 군을 조금 더 오래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만, 어차피 아카데미를 입학할 거라면 하루라도 빨리 입학하는 것이 레이너드 군에게 좋아서 말이죠. 이미 레이너드 군은 열두 살인데 열두 살에 입학하는 것도 늦은 편이라서 말이죠.”
“열세 살이야.”
“네?”
“내년 봄이면 레이는 열세 살이야. 곧 생일이라고 했어.”
“그렇다면 더더욱 열심히 준비를 해야겠군요.”
데이브가 보란 듯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리나는 비장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가 끝났다면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레이의 옷을 고르다가 잠깐 나온 거라서요.”
“그래.”
유리나가 후작과 데이브에게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오자마자 문 앞에서 발을 동동거리고 있던 하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가왔다.
“아가씨, 큰일 났어요! 얼른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 * *
하녀의 재촉에 뛰다시피 도착한 응접실 앞 복도는 어수선했다.
평소 교육을 잘 받은 카르티아 가문의 고용인들답지 않게 시종과 하녀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응접실 문고리를 잡았다 놓았다만 반복하고 있었고, 로렌 부인과 로버트는 어디로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긴장감마저 감도는 상황을 바라보던 유리나는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레이너드는?”
레이너드의 시중을 맡겼던 하녀 하나가 급하게 그녀의 앞에 허리를 숙였다.
“레이너드 님께선 안에 계세요.”
“그런데 너희들은 왜 밖에 나와 있는 거지?”
“그게…….”
딱히 질책하는 게 아니라 그저 사실 관계를 묻는 질문이었다. 그런데도 고용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기 바쁠 뿐, 누구 하나 나서서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레이너드가 다 쫓아냈나 보네.’
낯선 이를 과할 정도로 경계하는 레이너드가 유리나가 사라지자마자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모양이었다. 몇 번 있었던 일이라 새삼스럽지 않았다.
유리나는 지금쯤 손톱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긴장하고 있을 레이너드의 모습을 상상하며 고용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가씨! 들어가시면 안 돼요!”
“왜?”
유리나가 문고리를 잡은 채로 돌아보자 말을 꺼냈던 하녀가 이번에도 쭈뼛거리며 말을 아꼈다. 유리나는 그녀를 재촉하는 대신 문고리를 돌렸다.
그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날이 잔뜩 선 레이너드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들어오지 마! 나가! 나가란 말이야!”
쨍그랑, 하고 무언가가 문과 부딪히며 깨지는 소리가 났다. 작고 날카로운 것이 문 앞에 서 있던 유리나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깨진 도자기 조각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복도에 굴러떨어졌다.
“아가씨!”
유리나의 뒤를 계속 따라다니던 하녀가 서둘러 문을 닫고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유리나는 소맷자락으로 제 뺨에 묻어 나오는 피를 닦아 주는 하녀에게 고갯짓을 해 보인 뒤 주위를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차가운 그녀의 시선을 받을 때마다 다들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예의 없이 굴고 바락바락 거친 말을 내뱉기는 해도 레이너드는 신체적으로 남에게 폭력을 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거친 언사는 험한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기 위한 방어 기제에 가까웠다. 몸을 잔뜩 부풀려 천적이 다가오는 것을 차단하는 성난 복어 같은 모습.
아까 로렌 부인을 달갑지 않아 했을 때도 따가운 시선을 보내며 구석으로 물러난 게 전부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격렬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레이너드를 얼마 보지 않았지만 유리나는 왠지 확신할 수 있었다.
“베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똑똑하게 말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유리나의 전속 하녀로서 이번에 레이너드의 관리까지 담당하게 된 베시가 숨을 고르다가 유리나가 응접실을 나간 다음부터 이야기를 해 주기 시작했다.
“아가씨가 나간 다음에 레이너드 님께서 저희와 로렌 부인을 경계하기는 했지만 별 탈은 없었어요. 로렌 부인께선 레이너드 님 피부색에 어울릴 만한 천 색상을 직접 골라 주셨고,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을 보여 주셨죠.”
거기까지는 평범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외출용 모자 디자인을 살피는데 로렌 부인께서…….”
“왜 말을 멈춰? 로렌 부인이 뭐라고 했길래?”
베시는 꼭 제가 잘못을 한 사람처럼 손을 달달 떨었다.
“레이너드 님의 붉은 눈이 불길해 보인다며 밖에 나갈 때는 꼭 가리는 게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뭐?”
유리나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날카롭게 되물었다. 질책하는 듯한 목소리에 베시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내가 분명히 레이너드 눈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엄히 처벌할 거라고 로버트에게 주의를 주었는데.”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유리나의 눈엔 레이너드의 눈이 희망처럼 느껴진다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니었다.
생소한 것에 막연한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사람들은 생전 처음 마주하는 붉은 눈을 이유 없이 두려워했다.
붉은색을 딱히 흉조로 여기지 않는 제국에서 붉은 눈을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 건 그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유리나는 레이너드를 저택으로 데려오던 날, 고용인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라고 로버트에게 미리 말해 두었다. 그 덕분인지 지금까지 별 탈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외부에서 데려온 사람이라고 해도 로버트가 주의를 주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어째서 로버트가 로렌 부인을 그냥 놔뒀냐는 질타에 베시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집사장님께서는 분명 미리 주의를 주셨어요. 저 말을 했을 때도 로렌 부인을 급하게 말리셨는데 부인께서 말을 듣지 않으셨어요.”
베시의 말에 따르면 로렌 부인은 로버트의 경고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레이너드의 눈을 계속 지적했다고 한다.
이런 불길한 아이를 후원하기로 결정한 카르티아 가문에 늘 감사해야 한다, 카르티아 영애는 정말 마음씨가 고운 것 같다 등의 말도 함께.
처음에는 빨개진 얼굴로 조용히 하라고 소리만 지르던 레이너드는 ‘카르티아 가문이 아니었다면 나도 네 옷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 불길함이 옮는 것 같다’라는 로렌 부인의 말에 결국 이성을 잃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로버트와 하녀들이 바로 떼어 냈지만 이미 로렌 부인의 손등에는 레이너드가 할퀸 상처가 났다.
로버트가 로렌 부인을 의원에게 데려가는 중에도 그녀는 카르티아 가문을 위해서 한 소리였을 뿐이라며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고 베시는 설명했다.
며칠 사이에 레이너드에게 정이라도 들었는지 그녀는 로렌 부인을 ‘못된 여우’라고 지칭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그 후에 레이너드 님께서 다들 나가라고 난동을 피우시는 바람에 다들 복도로 쫓겨났어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르니 들어는 가야 하는데 문을 열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 설명을 듣는 내내 유리나는 자기가 모욕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주먹을 꽉 쥐어도 두 손이 달달 떨리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얼굴이 뜨끈했다.
만약 로렌 부인이 눈앞에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그 추악한 얼굴에 손찌검을 했을 것이다.
‘그런 소리를 하면 내게 좋은 인상을 줄 거라고 생각했나?’
자기보다 약한 자는 무참히 짓누르고 강한 자에게는 한껏 몸을 낮추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로렌 부인의 목적이 뻔히 보이는 작태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상황을 전해 듣는 그녀도 비참한 마음이 들고 화가 나는데 그 악의에 찬 말을 직접 듣고 있었을 레이너드의 심정은 어땠을까.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그의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유리나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을 몇 번 하다가 이를 악물고 짓씹듯이 말했다.
“치료가 끝나는 대로 로렌 부인을 데려와.”
그러고는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고용인들이 기겁을 하며 말리려 했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노크를 했다.
“레이, 나야. 들어갈게.”
일부러 크게 이야기를 한 뒤 문을 열었다. 목소리를 들은 건지 이번엔 들어오지 말라는 외침이 들리지 않았다. 유리나는 따라 들어오려는 하녀들을 손을 들어 제지한 뒤 문을 닫았다.
응접실 안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버건디색 카펫은 흥건히 젖어 있었고, 그 위엔 깨진 꽃병 조각과 시들해진 꽃잎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유리나는 난장판이 된 바닥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천천히 레이너드가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양팔로 두 무릎을 감싸 안고 그 위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레이너드가 기척을 느꼈는지 몸을 더욱 웅크렸다.
몸을 한껏 옹송그리고 있는 모습은 가뜩이나 작은 그를 더욱 왜소해 보이게 했다.
‘차라리 화를 낼 것이지.’
평소처럼 유리나에게 ‘저 여자가 나를 무시했어!’라고 바락바락 악을 쓰며 소리를 쳤다면 ‘널 무시한 대가를 단단히 치르게 할 거야’라고 그의 화풀이를 받아 줬을 것이다.
‘혼자 두고 가지 말라고 했잖아’라고 유리나를 원망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그를 다독여 줬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이렇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머릿속이 하얘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레이.”
잠시 할 말을 고르던 유리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레이너드가 고개를 더욱 파묻었지만 나가라고 소리치지는 않았다.
“늦게 와서 미안해.”
“…….”
“로렌 부인은 널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거야. 그러니까 레이…….”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의 고개를 들어 올리던 유리나의 눈이 순간 동그랗게 커졌다.
“이거 왜 이래?”
레이너드의 눈가에 손톱으로 마구잡이로 할퀸 것 같은 상처가 가득했다.
실핏줄이 보일 정도로 투명한 눈꺼풀 위에도, 관자놀이 위에도, 광대뼈 위에도 새빨간 생채기가 잔뜩 있었고 그 주위가 불그스름하게 부풀어 오른 게 보였다.
새하얀 피부와 대조적인 붉은 상처를 보며 유리나는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보지 마.”
레이너드가 한 손으로 제 눈을 가리며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어깨를 밀어냈다.
“보지 마, 싫어.”
잘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유리나는 뜨거운 돌멩이를 삼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목 안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며 목구멍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레이너드의 몸을 끌어안았다. 객관적으로는 그녀와 체격이 비슷한데도 품 안에 들어오는 그의 몸은 참 작고 여렸다.
유리나는 떨리는 그의 몸을 조금 더 세게 끌어안으며 척추뼈가 도드라진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레이너드가 더듬거리며 그녀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가 흐느끼는 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닿았다.
“너,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 이게 무슨 여신의 축복을 받은 눈이야. 내가 무슨 재능이 있다고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원망하듯 중얼거리면서도 그는 유리나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에게 할 변명은 많았다.
너는 분명 여신의 축복을 타고났고, 붉은 눈은 바로 그 상징이며, 네가 재능이 있다는 건 데이브도 증명해 주었다고, 그리 자신 있게 말해 줄 수 있었다. 모든 게 사실이니까.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의 말처럼 그 말을 믿는 건 유리나밖에 없었다.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질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그녀의 잘못이었다.
아무리 고용인들의 입단속을 시키고 좋지 않은 소리가 레이너드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막더라도 그 방법으로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없었다.
덧난 상처를 그저 붕대로 칭칭 감아 숨긴다고 해서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곪고 곪아 언젠가는 터지기 마련이다.
레이너드에게 붉은 눈은 그런 곪아 버린 상처였다. 이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터졌을 일.
“미안해.”
결국 유리나가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미안하다는 말밖에 없었다. 유리나 품에 안긴 레이너드의 가녀린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내가 그 여자 싫다고 했잖아. 날 보는 눈이 이상하다고 했잖아.”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어깨가 젖어 오는 것을 느끼며 유리나는 눈물을 참기 위해 이를 꽉 물었다.
‘이렇게까지 힘들어할 줄은 몰랐어.’
그의 삶이 순탄치 않았을 거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붉은 눈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무차별적인 비난을 받고 자라는 삶이 어떻게 편안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에겐 세상의 모진 풍파로부터 여린 몸과 마음을 지켜 줄 사람조차 없었다. 처음 보는 유리나의 손을 잡아야 할 정도로 그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의 편이 되어 주고 그의 마음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유리나는 특별히 그에게 연민을 느끼지 못했다. 이 낯선 곳에 익숙해지기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게 쉽지 않았던 탓이다.
어쩌면 레이너드가 주눅 들지 않고 그녀를 대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 나이 대 아이처럼 이렇게 서럽게 흐느끼는 그를 보며 유리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적어도 그녀만은 그를 조금 더 세심하게 살펴야 했다.
이 세상에서 적어도 그녀 하나만은.
“미안해.”
결국 그녀는 그의 목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떨구었다.
“미안해, 레이.”
누군가는 이런 그녀를 위선자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같잖은 동정심이라고 폄하할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유리나에겐 로렌 부인을 비난할 자격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레이너드를 이곳으로 데려온 건 순전히 그녀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그에게 잘해 주었던 것도 훗날 그가 그녀를 지켜 줄 수 있도록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
순수하기로 따지자면 차라리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을 하기로 결정한 원작 속 데프론 후작의 마음이 더 순수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애초부터 그를 데려올 때도 순수한 호의가 아니라 거래라고 못 박아 두었다고 해도 그게 면죄부가 될 수 없었다.
그녀 또한 살기 위해 레이너드를 이용하고 있는데, 로렌 부인의 행동에 화를 낸다면 그거야말로 위선적인 행동이 아닐까.
‘그래도…….’
누군가가 위선자라고 손가락질하더라도 유리나는 이 아이의 상처 난 몸뿐만 아니라, 상처투성이 마음까지 지켜 주고 싶었다.
“레이, 그 멍청한 여자 말은 무시해.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입을 함부로 놀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거니까. 생각해 보니 그 여자가 갖고 온 디자인도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 다음엔 조금 더 실력 있는 사람을 데려오라고 할게.”
“…….”
“그리고 다음부터 누가 널 무시하면 당당하게 말해. ‘날 데려온 사람은 유리나 카르티아야. 날 무시하는 건 유리나를 무시하는 거고, 유리나를 무시하는 건 카르티아 가문을 무시하는 거지. 감당할 자신이 있겠어?’라고. 그리고 말이야.”
유리나는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네 눈 되게 예뻐.”
거짓말처럼 그의 흐느낌이 작아졌다. 레이너드가 치솟은 감정을 억누르느라 끅끅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유리나는 빨개진 그의 눈가를 옷소매로 조심스럽게 닦아 주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진짜야. 엄청 예뻐. 반짝거리는 루비 같아. 루비가 뭔 줄 알아? 네 눈처럼 빨간 보석이야. 보여 주고 싶은데 루비 장신구는 갖고 있는 게 없어서 아쉽네.”
솔직히 말하자면 레이너드의 눈이 마냥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았다. 유리나 또한 가끔 어두운 곳에서 그를 마주할 때면 익숙하지 않은 붉은색에 흠칫 놀랄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의 눈이 마음에 들었다.
여신의 상징이란 걸 알고 있어서? 자신을 구해 줄 사람이란 걸 알아서?
‘물론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저 거리낌 없이 마주하고 있는 그 시선이 좋았다.
이곳에 온 이후로 유리나는 누군가와 마주 보고 진솔한 대화를 나눈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귀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자유롭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뿐더러, 그녀 스스로 또한 낯선 이들과 대화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대화를 나누는 가족들마저 간혹 불편할 때가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지만 그들이 보는 건 자신들과 십 년을 함께한 딸과 여동생이었지, 하루아침에 딴사람이 되어 버린 윤세나가 아니었다.
그러나 레이너드는 달랐다. 그는 이전의 유리나를 모른다. 그의 앞에서 그녀는 ‘유리나’인 척 연기할 필요 없이 그저 본디 그녀의 모습 그대로 있을 수 있었다.
“난 네 눈이 좋아, 레이.”
유리나의 솔직한 발언에 붉은 생채기가 자리 잡은 그의 뺨이 조금 더 진한 붉은색이 되었다. 레이너드가 물고기처럼 말없이 입을 벙긋거리다가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남자애한테 예쁘다는 소리가 뭐야? 이상하잖아!”
그가 순식간에 유리나에게서 멀찍이 도망치더니 예전에 하녀들이 목욕을 도와주려 했을 때처럼 팔을 엑스 자로 꺾어 몸을 끌어안았다. 기껏 위로를 해 주었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이런 것이라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게다가 발톱을 세우고 잔뜩 경계하는 것 같은 저 눈빛은 또 뭐지? 무슨 소리를 했다고? 그냥 눈 좀 예쁘다고 한 것뿐인데?
살가운 반응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반응 또한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리나는 잠깐 당황했다.
어쩐지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레이너드가 기운을 조금 차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예쁜 걸 예쁘다고 하는 게 어때서? 그래도 싫으면 멋지다고 해 줄까? 네 눈 되게 멋져.”
레이너드가 말없이 씩씩거리며 그녀를 흘겨보았다. 유리나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리자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눈물범벅이 된 제 얼굴을 손등으로 벅벅 닦았다.
유리나가 깜짝 놀라 그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닦으면 안 돼. 상처 덧나.”
“어, 응.”
유리나는 그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살살 두드리며 닦아 주었다.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그녀의 손길을 묵묵히 받던 레이너드가 조용히 웅얼거렸다.
“있잖아.”
“응.”
“……네 눈도 예뻐.”
얘 좀 봐라. 유리나는 꼭 병아리 반 원생에게서 ‘선생님이 제일 좋아요!’라는 말을 들은 유치원 선생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맨날 떽떽거리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귀여운 면도 있었네.’
어쩐지 조금 더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녀는 그의 눈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래? 내 눈이 어떤데?”
“그러니까…….”
유리나의 눈을 흘끔거리며 우물쭈물하던 레이너드가 갑자기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거, 그거 뭐야?”
“응? 뭐가?”
말을 참 티 나게 돌리는구나. 유리나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레이너드가 그녀의 상처 부근을 매만졌다.
“아까는 없었는데…….”
조용히 중얼거리며 무언가 생각하던 그가 곧 끅, 하고 목이 졸린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이거…… 내가 그런 거야? 아까 내가 던진 꽃병에 맞은 게 너야?”
유리나는 재빨리 손으로 상처를 가리며 웃었다.
“아니.”
“거짓말.”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리나는 그가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 주길 바랐다. 이미 한껏 괴로워하고 있는 그가 이걸로 또 자책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나 말고 네 상처나 신경 써. 흉 지겠어.”
그녀는 그의 이마를 꾹 눌렀다. 얼굴에 이것보다 훨씬 더 심한 상처를 달고 있는 주제에 누가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데이브에게 마법으로 치료해 달라고 하면 되겠다. 그렇지? 분명 흉터 없이 치료해 줄 수 있을 거야.”
“…….”
안 넘어가네. 자연스레 화제를 돌리려고 했던 그녀는 멋쩍게 웃었다. 평소라면 내 얼굴인데 왜 네가 그렇게 신경을 쓰냐고 핀잔을 주었을 텐데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잠시 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레이너드가 볼을 감싸고 있는 유리나의 손을 매만졌다.
“손 좀 치워 봐.”
“싫어.”
“얼른.”
유리나의 마음과 달리 그는 그녀의 손을 떼어 내며 기어코 상처를 살펴보았다. 고개를 숙여 가까이에서 상처를 보는 그의 얼굴이 좀 전보다 더 잔뜩 일그러졌다.
“아파?”
그가 앙상한 손가락으로 상처 주위를 더듬거리며 물었다. 유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아파.”
아예 통증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크게 아픈 것은 아니었다. 다쳤다고 의식을 하면 약간 화끈거리는 정도고 의식을 하지 않으면 그나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녀들이야 귀한 아가씨의 얼굴에 상처가 났다고 난리 법석을 피우겠지만 유리나는 이 상처에 별 감흥도 없었다.
“아프잖아.”
“진짜 안 아파.”
“아플 것 같아.”
레이너드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와 앉으며 상처 위에 바람을 호호 불었다. 순간적으로 따끔한 느낌에 유리나가 뒤로 상체를 빼자 레이너드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두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선 향긋한 향기가 났다. 그가 좋은 냄새가 난다고 자랑했던 봄꽃 향기. 그녀가 쓰는 비누와 같은 향이었다.
호오오, 또 한 번 시린 바람이 볼 위에 내려앉았다. 바람은 차가운데 유리나는 왠지 볼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얼굴에 닿는 그의 눈빛이 불처럼 빨간색이라서 그랬을까. 알 수 없었다.
“미안해. 내가 괜히 꽃병을 던져서…….”
그가 엄지로 상처 주위를 조심스럽게 매만질 때마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났다. 새살이 돋을 때처럼 상처를 마구 긁고 싶은 충동이 드는 간지러움이었다.
유리나가 괜히 다른 쪽 뺨을 긁는 사이, 계속해서 상처를 매만지던 레이너드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어어?”
그가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리다가 끈적끈적한 피가 묻은 제 엄지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레이너드는 유리나가 의아한 얼굴로 볼을 매만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모습이 꼭 한밤중에 유령이라도 본 사람 같았다.
“사, 상처가 없어졌어! 분명 방금 전까지 있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레이너드가 상처가 있던 유리나의 뺨을 콕 찔렀다.
“여기 분명 상처가 있었는데 없어졌어! 이게 대체 뭐야!”
“갑자기 그게 무슨…….”
그가 가리킨 곳을 더듬거리던 유리나는 뒤늦게 뺨에서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상처가 없어졌어?’
유리나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손거울로 재빨리 얼굴을 확인했다. 레이너드의 말마따나 상처가 있어야 할 얼굴은 작은 생채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한 거야, 레이?”
“모르겠어. 나는, 나는 그냥 네가 아프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마법이야.”
마법을 배우지 않은 레이너드가 어떻게 마법 중에서도 어렵다는 치료 마법을 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기이한 현상을 설명할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마법이야, 레이! 네가 마법으로 치료한 거야!”
유리나는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레이너드가 재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단순히 알고 있다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달랐다.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것처럼 자꾸 웃음이 나왔다.
“내가? 그럴 리가 없어.”
“마법 맞아. 내가 말했잖아. 너 재능 있다고.”
레이너드가 제 손과 희열에 찬 유리나의 얼굴을 멍하니 번갈아 보았다.
“나 정말 재능이 있는 걸까?”
“그렇다니까!”
유리나는 진짜로 열 살 아이가 된 것처럼 그의 두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레이, 한번 네 상처도 치료해 봐 봐. 그럼 더 확실해질 거 아냐.”
“어떻게?”
“나한테 했던 것처럼 이렇게…….”
그녀는 그의 손가락을 상처가 난 그의 눈가로 가져갔다.
“이렇게 살살 문지르다 보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아무리 상처를 매만져 보아도 그는 제 얼굴에 난 상처는 조금도 치료하지 못했다.
* * *
“제가 없는 사이에 레이너드가 무례를 저질렀다고 들었어요. 손은 좀 괜찮으신가요?”
유리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로렌 부인을 향해 선하게 웃어 보였다.
내심 긴장한 눈으로 그녀를 살피던 로렌 부인이 그제야 잔뜩 힘을 주었던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녀는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붕대로 감싼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제발 이것 좀 봐 달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유리나는 얼굴을 구기지 않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레이가 심성이 못된 애는 아닌데 아직 이곳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했나 봐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흉이 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네요.”
로렌 부인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날 것처럼 몸을 들썩이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닙니다. 영애께서 사과라뇨. 이 정도는 별일 아닙니다. 어차피 옷을 만들다 보면 숱하게 바늘에 찔리고 가위에 손을 베여서 엉망이에요.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머, 이렇게 마음이 넓으신 분인 줄 미처 몰랐네요.”
유리나는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들고 있던 부채를 펼쳐 얼굴을 반 이상 가렸다.
‘가증스러워.’
자기 딸보다도 어릴 것 같은 제게는 저렇게 굽실거리면서 정작 진짜로 감싸 줘야 하는 레이너드에겐 그 난리를 피웠단 말이지?
사실 귀족의 입장에선 이번 일이 별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남작가의 안주인이기는 했지만 로렌 부인은 어찌 됐든 귀족이었고, 카르티아 가문에서 후원하고 있다지만 레이너드는 아직 예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평민 아이였다.
그녀가 레이너드에게 손찌검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에게 욕을 한 것도 아니니 보통의 귀족이었다면 이번 일을 그냥 덮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유리나는 결코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뼛속까지 귀족인 다른 이와 달라서 그녀는 같은 귀족인 로렌 부인보다는 레이너드가 더 중요했다.
마음 같아서는 저 검은 속내를 감추고 웃고 있는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뜯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을 생각이다.
원한다면 할 수는 있었다. 그럴싸한 이유도 있었다.
‘레이의 눈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는 로버트의 말까지 무시했어.’
카르티아 가문을 위해 한 말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카르티아 가문을 무시했다고 몰아갈 수 있었다.
설사 마땅한 이유가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로렌 부인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갖다 대며 유리나가 그녀에게 손찌검을 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카르티아 후작은 남들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만들어 내고 고용인들에게 함구령을 내려 제 딸을 두둔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제 손을 더럽혀 가며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 줄 필요가 있을까. 유리나는 그녀가 충격에 빠지게 할 다른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사려 깊으신 분께서 왜 이 저택의 집사가 미리 건넨 충고를 무시하고 그런 발언을 하셨을까요?”
“네?”
유리나가 여전히 웃으며 하는 말을 로렌 부인은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잠시 눈만 깜빡였다. 유리나는 그녀를 잠시 보다가 뒤에 서 있던 하녀에게 손짓했다.
“가져와.”
곧 하녀들이 유리나의 드레스 몇 벌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동안 로렌 부인이 제작한 드레스들이었다. 로렌 부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하녀들이 가져온 드레스를 보며 침을 삼켰다.
“저건 대체 왜…….”
유리나는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번 말을 하기 위해선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어.’
이곳에 와서 내로라하는 가문의 귀족 영애가 되었다고는 했지만 그 권력의 맛에 취해 안하무인처럼 행동하고 아랫사람들을 무시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먼저 레이너드를 무시한 로렌 부인에게만은 그녀가 행한 짓을 똑같이 당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가 겪었을 마음의 고통을 그녀도 똑같이 겪게 해 주고 싶었다.
유리나는 로렌 부인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하녀들에게 똑똑히 말했다.
“찢어.”
하녀가 망설임 없이 가위질을 할 때마다 천이 부욱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토도독, 실이 끊어지며 장식용 구슬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로렌 부인이 작은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유리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옆에 하녀에게도 손짓했다.
“찢어.”
이번에도 하녀는 망설임 없이 드레스를 찢었다. 유리나는 하녀들이 가져온 드레스를 하나, 하나 찢으라고 명령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로렌 부인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마지막 드레스까지 찢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유리나를 보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레이너드에게 한 충고가 카르티아 가문을 위해 하신 말이라고 하셨나요? 그 마음은 참 고맙지만 정말 카르티아를 위하셨다면 레이의 눈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는 충고는 들으셨어야죠. 카르티아의 말을 무시하면서 한 말이 카르티아를 위한 충고라니.”
유리나는 경악으로 물들어 가는 로렌 부인의 얼굴을 보며 아이처럼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마 이 정도 각오도 하지 않고 그런 말을 하신 건 아니었겠죠?”
앞으로 그녀는 귀족들을 위한 옷을 결코 만들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