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9/20)

2. 한 걸음 더 가까이

유리나는 데이브가 레이너드의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을 진지하게 지켜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레이너드의 상처 위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작은 빛이 나며 부어오른 상처가 말끔히 사라졌다.

원래의 희고 투명한 피부를 되찾은 그의 얼굴을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마법이 대단하긴 하네.’

의학이 발달한 한국에서도 저 상처를 흉터 없이 말끔히 치료하려면 시간이 엄청 걸렸다.

그나마도 운이 나쁘면 새살이 돋는다는 연고를 바르고 흉이 지지 않도록 도와준다는 밴드를 붙이고도 희미한 흉터가 나는 것을 각오해야 했었다. 새삼 마법의 위대함이 느껴졌다.

“뭐야, 왜 자꾸 봐?”

“신기해서.”

“그렇게 자꾸 보면 얼굴 닳아.”

그래도 유리나가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관찰하며 놀란 표정을 짓자 레이너드가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픽 돌렸다.

“그런데 아가씨.”

“응?”

유리나가 데이브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가 이번엔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을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어디를 다치신 겁니까? 아까 하녀들이 큰일 났다며 걱정을 하던데.”

“아, 그거.”

유리나는 상처가 났었던 부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곳에 상처는커녕 희끄무레한 흉터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건 아까 거울로 확인했다.

“여기에 분명히 상처가 났었는데 아까 레이너드가 손가락으로 문지르니까 감쪽같이 사라졌어. 마법이었을까?”

그녀가 가리킨 곳을 잠시 관찰하던 데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법 맞습니다. 상처를 한순간에, 그것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치료했다면 마법밖에 없으니까요.”

“확실해? 그거 조금 엉터리 설명 같은데.”

그녀야 특별한 이유 없이 ‘상처가 사라졌으니 마법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웠지만 마법사인 데이브가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된다.

유리나가 의심 가득한 눈을 하자 데이브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엔 그녀가 뭘 해도 귀여워 보이나 보다.

“물론, 그 이유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것보다는 아가씨의 볼에 남아 있는 마법의 흔적을 보고 알았습니다.”

“마법의 흔적이라니?”

“마법은 주위에 있는 자연 상태의 마나를 사용하여 구현하는데, 이때 마법을 쓰면서 인위적으로 변형된 마나가 일정 기간 동안 남아 있게 됩니다. 아가씨의 볼에도 변형된 마나 흔적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그래?”

유리나는 괜히 아무것도 없는 볼을 문질렀다.

“그런데 레이는 마법을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야?”

“가끔 레이너드 군처럼 마법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수재들은 무의식적으로 마법을 사용하고는 합니다. 물론 고위급 마법은 불가능해서 아가씨의 상처를 치료해 준 것같이 간단한 마법만 사용하지만 말입니다. 몸에 넘치는 마나를 무의식적으로 갈무리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니 치료 마법을 무의식적으로 구현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지요.”

데이브는 진이 빠진 것처럼 소파에 털썩 누운 레이너드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지금은 말끔히 치료했지만 상처가 있었던 자리를 보는 그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그나저나 보면 볼수록 탐나는 인재입니다, 아가씨.”

“안 돼.”

“알고 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레이너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레이너드는 잔뜩 지쳤는지 그 잠깐 사이에 잠들었다. 아기처럼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조용한 방에 울려 퍼졌다.

유리나는 소파 옆에 쪼그려 앉아 레이너드의 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넘겨 주었다.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뻣뻣하고 거친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간질였다.

“하지…… 마.”

잠꼬대처럼 어눌한 어조로 중얼거린 레이너드가 팔을 허우적대며 유리나를 등지고 돌아누웠다.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리나는 그에게 담요를 덮어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데이브, 내 상처를 치료해 준 레이가 왜 정작 자기 상처는 치료하지 못했을까? 데이브 말대로라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그건 말이죠.”

그가 레이너드와 유리나를 번갈아 보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레이너드 군은 본인이 다친 것보다 아가씨께서 다친 것이 더 싫었나 봅니다.”

* * *

눈가에 난 상처는 데이브의 마법으로 말끔하게 치료했지만 한 번 다친 마음은 쉽게 치료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특별히 몸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었는데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레이너드는 그날 저녁부터 온몸에 열이 올랐다.

자초지종을 들은 의원은 한 번 정도는 있을 만한 일이라고 담담하게 설명했다. 원래 몸 상태가 안 좋은 것을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다가 이번 일을 계기로 한꺼번에 터져 버린 것이란다.

그렇다는 건 여태껏 긴장하고 있다가 이제야 풀렸다는 소리인 걸까.

‘아무리 봐도 잘만 지냈던 것 같은데.’

하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자라고 해도 낯선 이만 가득한 곳에서 마냥 안심하고 지냈을 리가 없었다.

어찌 됐든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아 유리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녀들의 만류에도 그녀는 꿋꿋하게 레이너드 옆을 지켰다. 로렌 부인의 일이 마음에 걸려 직접 간호를 해 줄 생각이었는데, 사실 간호라고 해 봤자 할 게 많지 않았다.

고운 손이 상하면 안 된다며 미지근해진 수건을 갈아 주는 건 하녀들이 기를 쓰고 사수했고, 식사는 레이너드가 혼자 할 수 있다며 꿋꿋하게 혼자 먹었다.

손이 덜덜 떨려서 수프를 잔뜩 흘리는 주제에 말이다.

땀에 젖은 옷은 레이너드가 절대로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갈아입힐 수도 없었다.

‘애초에 그건 내가 할 생각이 없긴 했지만.’

결국 유리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침대 옆에 앉아 가만히 그를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그만 봐. 얼굴에 구멍 나.”

색색거리며 잠만 잘 자던 레이너드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얼굴에 구멍 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알겠어. 책임은 못 지니까 그만 볼게.”

장난기 섞인 대답에 그가 입술을 씰룩이더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돌아누웠다.

“대체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내가 자는 사이에 무슨 짓을 하려고.”

유리나는 이불 위로 그의 머리를 꾹 눌렀다.

“계속 오냐오냐하니까 아무래도 내가 만만한 모양이지? 노리개부터 시작해서 쪼그만 꼬맹이가 아주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미안한데 나도 너처럼 작은 남자애는 관심 없어.”

“내가 너보다 2년이나 많이 살았어. 키도 너보다 크다고.”

“솔직히 크지는 않잖아.”

그리고 내가 너보다 10년은 더 살았어. 속으로 중얼거린 유리나는 코웃음을 치며 그의 머리를 다시 꾹 눌렀다.

“자꾸 말대꾸하는 거 보니까 이제 안 아픈가 보네.”

대답 대신 이불 속에서 콜록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너무나 생생해서 유리나는 그게 꾀병인 건지 진짜인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물 줄까?”

이불 속에서 고개가 까딱이는 것이 보였다. 하녀를 부르기 위해 줄을 당기려던 유리나는 생각을 바꿔 직접 테이블에 있는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왔다.

일단 컵을 침대 옆 작은 간이 테이블에 놓고 레이너드를 일으키자 그의 입에서 끙, 하고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자, 마셔.”

레이너드가 양손으로 컵을 쥐고 꼴깍꼴깍 물을 마셨다. 손이 덜덜 떨리는 바람에 턱과 목을 타고 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다 마신 컵을 유리나에게 건네주며 몸을 달달 떨었다.

“으으, 추워.”

이미 옷이 땀으로 젖어 있는 데다가 물까지 들이부었으니 추울 만도 했다.

유리나는 양팔로 몸을 감싸 안고 바르르 떠는 그의 몸을 이불로 둘둘 말았다. 여름이라 벽난로 청소를 하지 않아서 장작을 땔 수도 없으니 무조건 껴입는 방법밖에 없었다.

“땀이 식어서 그런가 봐. 열이 내리고 있다는 거니까 다행이네. 이러고 있으면 따뜻해질 거야. 아니면 옷을 갈아입을래?”

“네가 있는데 어떻게 갈아입어?”

“나가 있으면 되지.”

여전히 추위에 어깨를 떨면서도 그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본인이 싫다고 하니 유리나는 더 이상 강요할 수는 없었다. 대신 턱까지 떨어 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는 그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레이너드의 덜덜 떨리는 몸이 품 안 가득히 느껴졌다.

“그렇게 추워? 나는 조금 더운데.”

“응.”

“벽난로 청소 좀 해 두라고 해야겠어. 벽난로를 피우면 조금 나을 텐데.”

“지금은 괜찮아.”

그가 유리나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다가 문득 땅속으로 들어가는 두더지처럼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래 봤자 얼굴만 간신히 숙인 터라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이불 위로 삐쭉삐쭉 튀어나왔다.

‘얼굴도 시린 건가?’

유리나는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이불을 잘 여며 주었다. 그 손짓에 레이너드가 꿈틀거리나 싶더니 구멍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있잖아.”

“응?”

“나 지금 냄새나?”

“갑자기 그건 왜?”

“……냄새나?”

“음…….”

아직도 그 말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걸까.

유리나는 코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처음 데려왔을 때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게 양호했지만 워낙 땀을 많이 흘린 탓에 솔직히 눅눅한 냄새 같은 게 조금 났다.

“응.”

“진짜?”

레이너드가 아예 땅굴을 파고 들어갈 기세로 머리를 조금 더 깊이 숙였다. 유리나는 다시 한번 코로 숨을 들이쉬며 웃었다.

머리 위로 내려앉는 작은 웃음소리에 레이너드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유리나는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미소 지었다.

“좋은 냄새가 나.”

전에 그가 목욕 후 당당하게 말하던 말투를 따라 한 말이었다.

그러니 냄새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한 소리였는데 되레 그는 냄새가 난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유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움찔거리며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나 잘 거야. 너도 가서 자.”

“안 춥겠어?”

“이제 괜찮아.”

“진짜?”

유리나는 뜨끈한 기운이 제법 사라진 그의 이마를 한 번 짚었다가 방 한구석에 놓여 있었던 여벌 옷을 가져와 이불 위에 올려 두었다.

“그 옷 그냥 입고 자면 감기 걸릴지도 모르니까 옷은 꼭 갈아입고 자.”

“응.”

“혼자 안 무섭겠어?”

“내가 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플 때 혼자 있으면 외로운 법이야. 그리고…….”

나도 아플 때 혼자 있으면 서러웠어. 그 말을 하려는데 그 많고 많았던 아팠던 날 중 하필 죽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사지가 불타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 살아 보겠다고 숨을 가쁘게 헐떡이는데도 좀처럼 편해지지 않는 호흡, 빨갛게 물들었다가 점점 흐려지는 시야.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심리적인 고통이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죽어 간다는 외로움과 두려움.

누구라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좋으니 제발 괜찮을 거라고 다독여 주며 차갑게 식은 손을 따뜻하게 잡아 달라고 빌던 그 끔찍한 밤의 기억.

“유리나?”

일그러지는 유리나의 표정을 읽은 레이너드가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며 잠깐 사이에 차갑게 식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유리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제 손을 잡고 있는 작은 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곱고 보드라운 그녀의 손과 달리 거칠고 상처투성이인 하얀 손. 그의 손을 잡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다가 그녀는 이내 과거를 떨쳐 내고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리고 너 애 맞잖아.”

심각하게 그녀의 얼굴을 살피던 레이너드가 눈썹을 한껏 치켜세웠다.

“아, 뭐야. 그런 소리 할 거면 얼른 가서 잠이나 자.”

“진짜? 안 무섭겠어?”

“나 애 아니라니까.”

“하녀라도 부를까?”

“그건 더 싫어. 그냥 가.”

어느새 침대에서 내려온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등을 밀었다. 유리나는 그의 뜻대로 문으로 향하면서도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라면 이런 미련 따위 전혀 없었겠지만 낮에 제 얼굴을 마구 할퀴고 웅크리고 있던 그의 모습을 보아서인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지금 상태를 봐선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지만 혹시라도 밤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결국 문 앞까지 쫓겨난 유리나는 기사를 시켜 방문 앞을 지켜야겠다고 다짐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뒤에서 레이너드가 안심하는 듯이 진한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왜 안심을 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해?’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괜히 뒤를 돌아보며 짓궂게 웃었다.

“나 없다고 울면 안 된다?”

“아, 정말! 나가!”

레이너드가 재빨리 문을 열어 그녀를 밖으로 떠밀었다. 한순간에 복도로 쫓겨난 유리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닫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어두운 복도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 * *

“유리나,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깃펜을 들고 글자 연습을 하던 레이너드가 유리나가 읽고 있는 책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유리나가 책을 들어 보여 주자 그는 제가 쓴 글씨와 책 속의 글씨를 비교해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나도 못 읽겠어. 공부 많이 했는데.”

그는 종이 위에 꼬불꼬불 쓴 글씨를 보며 한탄하듯 한숨을 쉬었다.

며칠 전부터 가정 교사에게 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는 가장 먼저 글자를 익혀 나가고 있었다. 아직 글씨는 보고 베끼는 수준만 가능했지만, 읽는 것은 간단한 단어를 더듬더듬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가정 교사는 레이너드를 ‘머리도 똑똑하고 노력도 열심히 하는 좋은 학생’이라고 평가했다.

“아직 많이 부족한가 봐.”

“그거야 당연하지.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그렇지만 걱정 마, 레이. 이건 고대어라서 못 읽는 거야.”

“고대어? 그거 읽을 수 있어?”

레이너드의 붉은 눈이 동그래졌다. 유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보통 빙의물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보면 여주인공이 처음 듣는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알아듣고 말한다거나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몇 안 된다는 고대어를 쓱쓱 읽기도 하던데, 안타깝게도 유리나에겐 그런 능력은 없었다.

레이너드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눈에도 고대어는 꼭 아기들이 해 놓은 낙서처럼 꼬불거리는 글씨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에이, 뭐야. 그냥 보기만 하는 거야? 읽지도 못하는 거 왜 그렇게 뚫어지게 보고 있어?”

“찾고 있는 게 있거든.”

“읽지도 못하는데 뭘 어떻게 찾아?”

“기록을 찾을 거야.”

“무슨 기록?”

“네 눈이 여신의 축복을 받은 거라는 기록.”

한동안 꺼내지 않던 눈동자 얘기에 레이너드가 눈에 띄게 경직된 표정을 지으며 눈가를 매만졌다. 전처럼 격렬한 반응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리나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레이너드가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 거 안 찾아도 돼.”

“찾을 거야.”

유리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듯 중얼거리며 다시 책장을 넘겼다. 책 옆에는 고대어 단어가 여러 개 적혀 있는 양피지가 놓여 있었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해.’

처음부터 레이너드의 붉은 눈이 여신의 상징이라는 객관적인 기록을 찾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후작이나 데이브를 설득하는 것도 쉬웠을 것이고, 레이너드가 제 눈을 끔찍하게 여기는 일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변명을 하자면 시도를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레이너드를 찾기 위해 고아원을 다니면서도 유리나는 틈틈이 대마법사 윌리엄을 비롯하여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마법사들의 기록을 찾아다녔다.

그렇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이곳 글자를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다고 해도 읽어야 할 책의 양이 너무 많았다. 한국처럼 인터넷 검색 엔진이 있어 손만 몇 번 까딱하면 찾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애초에 마법사들의 외모에 대해 서술해 놓은 것이 별로 없었다.

한 달 정도 책을 뒤지던 유리나는 문득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이런 책에 있을 리가 없지.’

그녀가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라면 데이브는 물론, 웬만한 마법사들도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럼 데프론 후작은 대체 그 사실을 어디서 보고 어떻게 안 것일까.

없는 기억을 괜히 되짚어 보다가 유리나는 고대어로 쓰인 고서에 생각이 미쳤다. 그 후 그녀는 데이브에게 부탁해 단서가 있을 만한 고서를 가져와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당연한 소리지만 유리나가 고서를 해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데이브에게 부탁하여 ‘눈, 눈동자, 빨간색, 붉은색, 여신, 축복’ 등의 단어를 고대어로 써 달라고 부탁했다.

이곳의 마법 언어는 고대어에 뿌리를 두고 있어 웬만한 마법사들은 고대어를 조금씩 읽고 쓸 수 있었다. 그건 데이브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는 의아해하면서도 양피지에 유리나가 말한 단어를 고대어로 정리해서 적어 주었다.

‘어차피 다 읽을 필요 없이 필요한 부분만 찾으면 되니까.’

그녀는 고대어와 고서의 단어를 비교해 나가며 빨간 눈에 관한 기록을 찾았다.

‘없어.’

뻐근한 눈을 문지르며 유리나는 마지막 책을 덮었다. 며칠 동안 밤잠을 줄여 가며 데이브가 가져다준 책들을 읽었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아무래도 데이브를 따라 도서관에 가서 직접 책을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 * *

며칠 뒤, 유리나는 후작과 데이브를 설득하여 데이브와 함께 직접 황실 도서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호기롭게 도서관에 온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많은 고서의 양에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원하는 책을 찾을 때까지 저 많은 책들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졸업 논문에 쓸 자료 조사도 이것보다는 쉬울 것 같은데.’

한숨을 푹 쉬는 유리나의 표정을 살핀 데이브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아가씨, 굳이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구전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큽니다.”

“있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반드시 찾아서 레이에게 보여 줄 거야.”

유리나는 다시 한번 각오를 굳게 다졌다. 레이너드가 상처받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곳에 있는 책뿐만 아니라, 제국 전체를 뒤질 수 있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 뒤 데이브에게 일일이 책을 가리켰다. 데이브는 그녀의 뜻대로 고어로 된 책 제목을 하나, 둘씩 읽어 주었다.

그중 유리나가 도움이 될 만한 책을 고르면 데이브가 키가 작은 그녀를 대신하여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아가씨께선 레이너드 군을 많이 아끼시나 봅니다.”

세 번째 책을 꺼내며 데이브가 문득 중얼거렸다. 유리나는 그가 꺼낸 책 표지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데려온 아이인걸.”

“아무리 아껴도 이렇게까지 하시긴 쉽지 않으실 텐데.”

“다 내 부주의 때문에 레이가 그런 일을 겪은 거니까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

“정말 그것뿐입니까?”

옆 책장을 살피던 유리나가 고개를 돌려 다시 데이브에게 시선을 주었다. 데이브가 나이답지 않게 장난기 많은 얼굴로 웃었다.

“레이너드 군에게 관심이 있으신 건 아니고요? 아가씨는 도련님들 외에 또래 남자아이들과 어울리신 적이 별로 없으니까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저 책 제목들 좀 읽어 줘.”

유리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일축하며 책장을 가리켰다. 데이브가 여전히 짓궂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눈썹을 추켜올려 보였다. 흡사 ‘나는 네 마음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듯한 그 표정에 유리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거 아니야.”

서른 살이 넘은 데이브의 눈에야 또래인 유리나와 레이너드가 같이 어울려 노는 것이 귀여워 보일 테지만 당사자인 그녀는 아니었다.

‘이건 보모야.’

그것도 하루 종일 떽떽거리며 우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보모.

만약 유리나가 정말 열 살 꼬마였다면 하루 종일 붙어 다니고 잘생기기까지 한 레이너드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정신 연령은 스물두 살이었다.

친구처럼 친근하게 굴고 있다고 해도 열 살이나 어린 꼬마를 친구라고 생각할 일은 없었다. 그에게 이성적인 마음을 갖는 것은 더더욱 없을 일이다.

‘그랬다간 큰일 나지.’

질색하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 유리나를 데이브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유리나는 그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체하며 책장 가장 윗부분에 있는 책을 가리켰다.

“가만히 있지 말고 저 책 제목 좀 읽어 줘.”

“네.”

데이브는 표정만큼이나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유리나가 가리킨 책 제목들을 다시 하나, 둘씩 읽어 주었다. 유리나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원하는 내용이 있을 법한 책들을 꺼내 데이브의 품에 안겨 주었다.

어느 정도 책을 모은 뒤 두 사람은 도서관을 나왔다.

“정말 이걸 다 보실 수 있으세요?”

유리나의 뒤를 따라가던 데이브가 품 안의 책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유리나가 고른 책은 다섯 권. 게다가 책 두께가 유독 두꺼워 다른 책으로 따지면 일곱, 여덟 권은 족히 되는 양이었다.

매일 책에 파묻혀 생활하는 그에겐 아무것도 아닌 양이었지만 고작 열 살인 유리나가 읽기엔 버거운 양이다. 읽는 게 아니라 단순히 원하는 단어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해도 상당히 고된 일일 게 분명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봐야지.”

유리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얘기하며 자꾸 흘러내리려는 품속의 책을 꽉 끌어안았다. 지금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은 ‘이 책을 어떻게 다 읽지?’가 아니라 ‘이 책을 어떻게 하면 유모에게 뺏기지 않을 수 있지?’였다.

요 며칠 밤잠을 줄여 가며 책을 읽은 탓에 피부가 조금 거칠어지고 하품을 하는 일이 잦아졌더니 유모가 그러면 안 된다고 책을 빼앗으려 들었다.

유리나가 필사적으로 책을 품에 안고 사수한 덕분에 뺏기지는 않았지만, 아마 오늘도 이 책들을 갖고 돌아가면 유모는 한숨을 잔뜩 쉬며 또다시 책을 뺏으려 들 것이다.

‘데이브의 연구실에 갖다 놓고 봐야 하나?’

어떻게 하면 이번에도 책을 사수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열심히 걸어가는데, 문득 호위 기사 여럿을 데리고 도서관 쪽으로 걸어오는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 그에게 시선이 간 것은 그가 데리고 있는 호위 기사 때문이었다.

‘누구지?’

귀족이 호위 기사를 데리고 다니는 건 흔한 풍경이었고 황궁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검을 소지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불미스러운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근무를 서고 있는 황실 기사단 외엔 황궁 내에서 검을 소지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보통 호위 기사들은 황궁 밖에 마련된 대기실에서 대기를 하거나 경비원에게 검을 맡기고 황궁으로 들어온다.

충분히 위협이 될 수 있는 마법사인 데이브가 별다른 제재 없이 황실 출입이 가능한 것은 황실 전체에 마력을 억제하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소년의 뒤를 따라오는 기사들은 저마다 하얀 제복에 검을 소지하고 있었다.

‘황족이라도 되는 걸까.’

호기심이 돌아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며 소년을 관찰했다.

한국에서 늘 보던 진한 검은 머리카락과 생소한 금색 눈동자를 지닌 그는 열다섯 살인 유리나의 첫째 오빠인 릭스 카르티아와 체격이 비슷했다.

얼굴은 아직 앳된 인상이 남아 있었지만 키가 유리나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큰 데다 운동을 많이 했는지 어깨가 넓고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판타지 소설에 흔히 나오는 냉철하지만 내 여자에게는 따뜻한 황자의 외모 같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뒤따라오던 데이브가 그녀의 앞으로 나오며 허리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가 일부러 강조해서 말한 ‘황태자 전하’라는 단어에 눈앞이 하얘졌다. 유리나는 자신을 흘끔 쳐다보는 데이브의 시선에 눈치껏 한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예를 갖췄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 말을 대체 어떻게 말했는지 모르겠다. 유리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인사말을 내뱉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까만 머리카락, 황금빛 눈동자, 결코 웃는 일이 없는 서늘한 표정 그리고 ‘황태자’라는 호칭.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눈앞의 소년은 그녀가 생각하는 그 남자가 맞는 것 같았다.

‘커티스 제노시안.’

그녀가 반드시 피해야 할 소설 속 남주인공.

“일어나게.”

냉혹하다는 설정답게 차갑게 한기가 서린 것 같은 딱딱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쏟아졌다.

유리나는 그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무너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데이브의 뒤로 몸을 숨겼다. 커티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며 숨소리까지 죽였다.

“오랜만에 보는군, 케스트 경. 그간 통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보니 카르티아 후작이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가 보지?”

“늘 바쁘긴 했는데 요즘 유독 바빴습니다.”

두 남자는 얼른 돌아가고 싶은 유리나의 속도 모르고 계속 대화를 이어 갔다. 정확히는 말을 하는 쪽은 커티스였고 데이브는 간단히 맞장구를 치며 말을 들어 주었다.

유리나는 필사적으로 데이브의 등 뒤에 매달리며 두 남자의 시시콜콜한 대화가 얼른 끝나기를 기다렸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나와 차나 한잔하며 이야기를 좀 더 나누는 게 어떤가?”

그러다 갑작스레 커티스가 데이브에게 제안을 건넸다. 십 분가량 대화를 했는데도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웃는 얼굴로 대화를 이어 가던 데이브가 처음으로 난색을 표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오늘은 혼자 온 것이 아니라서…….”

그 말에 커티스의 시선이 그의 뒤에 있는 유리나에게로 향했다. 그는 “흐음.” 하고 작게 소리를 내더니 어미 새에게 붙어 있는 아기 새마냥 데이브 뒤에 숨어 있는 유리나에게 다가왔다.

“경과 있는 것을 보아하니, 이쪽이 카르티아 후작이 그토록 아낀다던 여식인가?”

오지 마, 보지 마.

유리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바람이 무색하게도 바로 코앞에서 커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게.”

유리나는 고개를 젓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 보고 싶지가 않아서 시선은 살짝 아래로 향한 채였다.

“이름이?”

“유리나 카르티아라고 합니다.”

“유리나 카르티아라…….”

커티스가 검지로 제 턱을 톡톡 두드리며 유리나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리 떠는 거지? 내가 그대를 잡아먹기라도 하나?”

“아니, 아닙니다.”

“흠.”

그는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유리나의 턱을 살짝 그러쥐며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유리나는 소리도 지를 새도 없이 그의 금빛 눈과 시선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 순간, 그녀는 기척을 숨기려는 초식 동물처럼 숨을 멈췄다. 그가 얼굴을 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쿵쿵쿵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어왔다.

‘왜 이러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해일처럼 온몸을 덮쳤다. 그저 이 남자 앞에서 그의 시선을 받고 있는 것만으로도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커티스는 그녀가 제 뜻대로 다룰 수 있는 아이 같은 레이너드와는 달랐다. 그는 날 때부터 모든 이를 발밑에 두고 제왕학을 배워 온 남자였다.

정신 연령은 스물두 살인 그녀가 이제 고작 열대여섯쯤 되는 남자아이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는 게 우습지만, 커티스에겐 그럴 만한 위압감이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원작의 내용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유리나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던 커티스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카르티아 영애가 어린 나이인데도 굉장한 미녀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헛소문은 아니었나 보군.”

그가 흥미롭단 얼굴로 중얼거리며 유리나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그제야 유리나는 참았던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유리나 카르티아라. 기억해 두지.”

그는 유리나에겐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남기며 호위 기사들을 데리고 도서관 쪽으로 사라졌다. 유리나는 그의 뒷모습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숨을 할딱였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유리나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커티스의 표정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왠지 불길해.’

당당하게 한쪽 입꼬리만 들어 웃고 있던 모습은 거만해 보이던 레이너드의 모습하고는 달랐다. 오만해 보이면서도 좋지 않은 속내를 감추고 있는 듯한 표정은 어쩐지 소름 끼치기까지 했다.

미소 짓던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데, 문득 머릿속 한구석에서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옥수수 알갱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지는 것처럼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말도 안 돼.’

원작에서 리디아와 커티스가 이어지기 전, 그는 ‘유리나 카르티아’와 연인 사이였다.

* * *

어떻게 저택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공부방으로 쓰고 있는 작은 응접실에서 레이너드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너 오늘 좀 이상해.”

레이너드가 글씨 연습을 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나의 이마를 짚었다. 이마가 뜨거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흐음.” 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다른 손으로 제 이마를 매만졌다.

“열이 있나?”

유리나는 그의 손을 힘없이 떼어 냈다.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계속 그 이상한 글자를 봐서 그런 거 아냐?”

“응, 그런가 봐.”

유리나는 책을 덮고 그 위에 엎드렸다. 오늘은 레이너드와 대거리할 힘도 없었다. 그녀는 계속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그에게 대꾸하지도 않고 눈을 감았다.

‘황태자와 연인 사이…….’

두 사람이 어떻게 연인이 되었는지, ‘유리나’는 어쩌다가 리디아와 라이벌 관계가 되었는지, 어쩌다가 커티스가 ‘유리나’를 버리고 리디아와 사랑에 빠지는지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거대한 바위에 길이 막힌 것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무언가가 그녀의 기억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기억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혹시 ‘유리나’와 커티스가 연인 관계였다는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닐까 의심해 보았지만 그건 제대로 된 기억 같았다. 아니, 기억이 맞든 틀리든 상관없었다. 마지막에 들었던 그의 말.

―유리나 카르티아라. 기억해 두지.

그것만으로도 이미 황태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리나는 필사적으로 황태자비 후보가 되지 않을 계획이었는데.

유리나가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자 레이너드가 의자를 가져와 그녀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는 유리나처럼 테이블에 엎드리며 그녀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유리나, 혹시 무슨 일 있어?”

오늘 아무도 묻지 않았던 질문에 유리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걱정을 가득 담은 그의 표정이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이상해.’

그녀에게 예민한 가족들도 묻지 않은 질문을 고작 2주일 남짓 같이 지낸 레이너드가 하다니.

그가 유독 타인의 감정에 예민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녀가 그의 앞에서 긴장을 풀고 있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누군가가 걱정해 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유리나가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레이너드가 얼굴을 조금 더 바짝 붙였다.

“괜찮아. 나한테는 말해도 돼. 무슨 일이야?”

웃음기 하나 없는 그의 얼굴은 퍽 믿음직해 보였다. 근엄한 표정을 짓고 싶었는지 그가 두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 표정을 보며 유리나는 왠지 그가 처음으로 자기보다 오빠 같아 보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그래 봤자 열두 살 꼬맹이인데.

“비밀.”

“아무에게도 안 말할게.”

“그래도 비밀.”

“진짜 안 말할게. 나 못 믿어?”

“널 못 믿는 건 아닌데.”

오히려 네가 내 말을 못 믿을 거야. 유리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삼키며 웃었다.

자신은 원래 다른 세계의 사람이고, 사고를 당해 죽었는데 눈 떠 보니 소설 속 세계더라, 하는 이야기는 내뱉자마자 비웃음만 살 법한 허황된 소리였다.

거기에 자신이 죽는 미래까지 알고 있다니.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은 이야기다.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사람도, 제 얘기에 공감해 줄 사람도 없이 혼자인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낯선 세계가 오늘따라 어쩐지 유독 낯설었다.

레이너드가 조금 더 다가와 유리나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박았다.

“그러지 말고 얘기해 봐.”

그의 따뜻한 숨이 입술을 간지럽혔다. 그의 앞머리가 그녀의 앞머리와 한데 엉켜 눈앞에 살랑거렸다.

유리나가 머리카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붉은 눈을 응시하자 레이너드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보며 눈으로 웃었다.

“응? 말해 봐.”

작게 속삭인 그 말은 꼭 최면을 거는 마법 주문처럼 들렸다.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뗐다.

“꿈을 꿨어.”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어서 이야기를 조금 각색해 보기로 했다.

“응. 무슨 꿈이었는데?”

“꿈에서 나는 성인식을 치른 성인이었어.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 남자를 되게 좋아했던 것 같아. 그 남자도 나를 좋아했던 것 같고. 아마도 연인 사이가 아니었을까?”

“……응. 그래서?”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대답이 다소 느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내 연인이었던 남자는 다른 여자와 연인이 되어 있었어. 그 후에 난 그 여자의 아버지의 손에 죽었어. 아마 내가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했나 봐.”

“으음?”

“그리고 오늘 꿈속에서 본 남자와 똑같은 소년을 봤어.”

“으으음?”

“그 소년을 보니까 꿈속에서 죽었던 기억이 떠올라서…….”

이게 대체 뭐라고 이렇게 구구절절 늘어놓고 있는 걸까. 유리나는 차마 레이너드의 표정을 살필 수 없어서 눈을 감았다.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웃겠지. 스스로가 생각해도 웃긴 이야기였다.

유리나가 속으로 제 자신을 비웃고 있는데, 레이너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등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의 뜨끈한 가슴이 등에 닿는 느낌이 났다.

“무서웠겠다.”

“……응?”

유리나는 실눈을 뜨며 레이너드의 얼굴을 살폈다. 장난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레이너드가 그녀의 등을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많이 무서웠을 것 같아.”

당연히 날아올 거라 생각했던 비웃음도, 고작 꿈 갖고 이러냐는 놀림도 없었다. 유리나는 제 어깨를 토닥이는 그의 손길에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얘 설마 진짜로 날 위로해 주고 있는 걸까.

“우습지 않아?”

“그게 왜 웃겨?”

“고작 꿈 갖고 무서워하는 거잖아.”

“그게 왜?”

그는 진짜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콧잔등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얼굴을 찌푸렸다. 어쩐지 그에게 표정으로 혼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 그런가, 이상하게 오늘따라 레이너드에게 말려들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무서운 건 무서운 거잖아. 나도 음, 죽는 건 무섭거든. 거기다 꿈에서 본 남자와 똑같은 남자를 봤으니 무서울 수 있다고 생각해.”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그래도 말이야, 괜히 찝찝하니까 그 남자는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앞으로 만나지 마.”

그렇게 말하는 레이너드의 목소리는 다소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리나는 그의 목소리보단 그가 말한 내용에 더 신경이 쓰였다. 별것 아닌 말이었지만 그의 말에서 해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니 무서워할 것 없잖아.’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제아무리 원작에서 ‘유리나’와 커티스가 연인 사이라고 하더라도 이곳에서 그녀가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면 끝날 일이다.

레이너드의 말처럼 지금부터 커티스를 만나지 않고, 그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면 연인으로 발전할 일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연스레 황태자비의 자리를 놓고 리디아와 싸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녀와 대립하지도 않고, 원작에서 그녀를 사랑하던 ‘카리온’ 또한 제 옆에 있으니 그의 손에 죽을 일도 없었다.

‘어쩌면 지금 안 게 다행일지도 몰라.’

유리나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레이너드의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았다. 새 둥지 같은 머리를 한 레이너드가 유리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웃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응.”

“다행이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유리나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유리나가 무겁다며 내려오라고 머리를 꾹 밀었지만 레이너드는 그녀의 말을 한동안 못 들은 척하며 그녀를 끌어안고 계속 그녀의 어깨에 뺨을 문질렀다.

* * *

레이너드는 자꾸만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겨 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게 있는 법이라 아무리 눈을 부릅뜨려고 해도 눈이 감겼다. 앞에서 열심히 책을 읽어 주는 가정 교사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자면 안 돼!’

그는 고개를 재빨리 흔들며 두 손으로 볼을 착착 때렸다. 작은 응접실 안에 찰진 소리가 들리자 글자 하나하나 짚어 가며 읽어 주던 가정 교사가 책을 덮었다.

“피곤할 시간이긴 하죠. 잠깐 쉬었다 할까요?”

깐깐하기로 소문나 있지만 그녀는 최선을 다하는 레이너드에게는 다소 너그러운 편이었다.

“감사합……, 흐암.”

레이너드는 하품을 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얼른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예전이라면 보는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입을 쩍쩍 벌렸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는 이런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이젠 안다.

이것 외에도 누가 보는 앞에서 벌러덩 눕지 않고, 식사를 할 때 쩝쩝 소리도 내지 않으며 제 이름을 직접 쓸 수도 있다.

그보다 어린 나이에도 반듯한 유리나의 글씨에 비교하면 삐뚤빼뚤하지만 누가 봐도 뭐라고 썼는지 알아볼 정도는 됐다.

저택에 온 지 불과 한 달 만에 일어난 변화들이었다. 유리나가 그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그런 삶.

가정 교사는 레이너드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볼일이 있다며 응접실을 나갔다. 혼자가 된 레이너드는 그제야 테이블에 털썩 엎드렸다.

딱딱한 책상이지만 꼭 폭신한 침대에 누운 것처럼 잠이 솔솔 왔다. 다시 한번 하품을 크게 하며 그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졸려.’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놀던 고아원 생활과 달리 저택에서의 생활은 규칙적이었다.

틀에 박힌 생활만 해도 힘든데 그동안 배우지 못한 학업을 따라가려고 아등바등하며 하루하루 보내니 피곤이 많이 쌓였다. 육체적이 아니라 정신적 피곤이었다.

“달콤한 것을 먹으면 정신이 조금 맑아질 거예요.”

레이너드는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재빨리 허리를 세웠다. 하녀, 베시가 작게 웃으며 달달한 핫초콜릿이 담긴 컵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레이너드는 제 몸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는 그녀에게 고맙다고 웅얼거렸다.

“고맙긴요, 이게 제 할 일인걸요.”

갓 스무 살을 넘긴 베시는 레이너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작고 어린 그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고향에 두고 온 여덟 살배기 남동생이 생각났다.

머리 색이며, 눈 색이며 성격이며 닮은 곳이라곤 하나도 없는데도 자꾸 ‘누나, 누나’거리며 가지 말라고 울먹이던 그 어린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래서일까. 베시는 굳이 유리나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먼저 나서서 레이너드를 조금이라도 더 챙겨 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작은 호의마저도 경계하며 예민하게 반응하던 레이너드가 어느새 자신을 비롯한 저택의 고용인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을 땐 뿌듯한 마음마저 들었다.

“잘 먹을게요.”

레이너드는 베시에게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보이며 두 손으로 컵을 들었다. 그는 제게 호의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꽤 민감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마냥 경계하느라 몰랐는데 이곳 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대하긴 해도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지금 눈앞의 베시만 해도 항상 웃으면서 그가 싫어하는 것은 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그를 살뜰히 챙겨 주었다.

그에게 대놓고 불쾌함을 표현했던 로렌 부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로렌 부인.’

싫은 사람을 생각하니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레이너드는 우울한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 얼른 핫초콜릿을 홀짝이며 베시에게 물었다.

“그런데 유리나는 어디 갔어요?”

베시가 비어 있는 레이너드의 옆자리에 시선을 주며 대답했다.

“아가씨께선 데이브 님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그래요?”

“아가씨가 없으니까 허전하세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는 괜히 불퉁거리며 적당히 식은 핫초콜릿을 꼴깍꼴깍 들이켰다. 베시가 다시 한번 소리 내어 웃다가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레이너드는 다 마신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시선이 자꾸 비어 있는 옆자리로 향했다. 베시에게는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허전했다.

‘대체 뭐 하느라 안 오는 거야.’

낯선 이를 경계하는 그를 배려해 주기 위해 유리나는 한동안 그와 같이 수업을 들었다. 그러나 며칠 전부터는 붉은 눈에 관한 기록을 찾아야 한다며 그를 두고 데이브와 있는 시간이 잦아지더니 이젠 아예 수업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굳이 자료 조사가 아니더라도 그가 이곳에 제법 익숙해졌으니 수업을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어지긴 했다. 그래도 레이너드는 유리나에게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붉은 눈에 관한 내용을 찾는 게 다 자신을 위한 것이란 것을 알아도 섭섭한 건 섭섭한 거였다.

‘안 찾아도 상관없다는 데도 왜 그럴까.’

그런 것보단 지금 당장 옆에서 같이 수업을 듣는 게 더 좋은데. 지금 제게 진짜로 필요한 건 축복받은 붉은 눈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로렌 부인에게 상처받고 혼자 떨고 있는 그를 안아 주던 유리나였다.

―난 네 눈이 좋아, 레이.

온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를 저주받았다고 비난하며 손가락질을 해도 유리나만 그의 눈을 좋다고 해 준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제 눈을 바라보며 웃던 유리나를 생각하자 왠지 몸이 간지러운 것 같아 레이너드는 뜨겁게 달아오른 목을 박박 긁었다.

“자, 다시 수업을 시작할까요?”

어느새 돌아온 가정 교사가 맞은편에 앉았다. 레이너드는 목을 긁던 손을 후다닥 내리며 깃펜을 잡았다.

‘열심히 해야지.’

졸린 것을 꾹 참으며 수업을 듣는 것도, 손가락과 팔목이 아플 정도로 열심히 글씨 연습을 하는 것도 다 유리나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니까. 그러니 그녀가 옆에 없어도 열심히 할 것이다.

그래도 역시 유리나가 옆에 없는 건 여전히 허전했다.

* * *

레이너드가 열심히 수업을 듣는 동안 자료 찾기에 열중하고 있던 유리나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으며 고서와 데이브가 적어 준 고어를 차분히 비교했다.

‘찾았어.’

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 짚어 가며 비교를 해 봐도 결과는 같았다. 무슨 문장인지까지는 해석할 수 없었지만 제국어로 번역하자면 ‘붉은 눈’에 해당하는 고대 단어를 발견했다.

유리나는 재빨리 고서를 품에 안고 데이브가 있을 연구소로 뛰어갔다.

“아가씨?”

벌컥 열리는 문소리에 놀란 데이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나는 상체를 숙이고 가쁜 숨을 헉헉거리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데이브, 데이브!”

그녀는 그가 괜찮으냐는 안부를 채 묻기도 전에 그의 품에 고서를 안겨 주었다.

“이것 좀 해석해 줘!”

데이브는 그녀가 가리킨 문장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유리나는 그의 옆에서 숨을 고르며 잠자코 기다렸다.

유리나가 가리킨 문장이 있는 페이지를 전부 읽어 본 데이브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대단하세요, 아가씨.”

유리나는 그의 칭찬에 우쭐할 새도 없이 그를 재촉했다.

“왜, 왜? 뭐라고 쓰여 있길래 그래? 내가 원하던 기록을 찾은 거야?”

데이브는 제 팔을 흔드는 유리나를 데려와 의자에 앉힌 뒤 그 옆 의자에 앉아 책을 폈다. 그러고는 유리나가 알려 준 부분부터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한 문장, 한 문장씩 해석해 주었다.

“기록에 따르면 대마법사 윌리엄은 붉은 눈이었다고 한다. 혹자는 그의 눈을 짐승의 것과 비슷하다고 칭하며 저주받았다고 말하지만 윌리엄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제논 아티스는 그의 눈이 그의 마력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제국이 통일되기 전, 제국 남부 지방에 자리 잡고 있던 데니크 왕국의 건국 신화를 근거로 내세웠다.”

데이브에게도 고서를 해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는지 그는 평소와 다르게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느리게 설명을 이어 갔다. 유리나는 그의 목소리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데니크 왕국의 건국 신화에 언급되는 초대 국왕, 알렉산드로 데니크는 붉은 눈을 가진 남자로, 스스로를 여신의 아들이라고 칭하며 여신의 축복을 받아 붉은 눈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데니크 왕국을 건국한 알렉산드로 1세는 그 후 붉은 눈을 가진 이를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뜻을 지닌 ‘베아투스’라고 부르며 이들을 살아 있는 신처럼 대했다.”

거기까지 읽은 데이브가 작게 감탄사를 흘렸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 봅니다. 아가씨께서 찾아내지 않으셨다면 아마 몰랐을 겁니다.”

그는 유리나를 칭찬해 주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지만 정작 유리나는 으스대는 기색 없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말았다.

“얼른 뒤의 내용도 읽어 줘.”

“아, 네.”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린 데이브가 눈을 찡그리며 고대어에 집중했다.

“그가 정말로 여신의 아들이었는지, 그의 붉은 눈이 여신의 축복으로부터 비롯된 건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알렉산드로를 비롯하여 데니크 왕국에서만 발견되는 ‘베아투스’라고 불리는 이들이 당대 최고의 마법사라는 점과 이견이 없다.”

‘베아투스’라는 단어를 입 속으로 되뇌던 유리나는 퀭한 눈가를 문지르며 웃었다.

‘진짜로 찾았어.’

레이너드가 사람들에게 무시받지 않을 수 있는 근거. 이 사실과 더불어 그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이제 앞으로 로렌 부인처럼 그를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단순히 유리나의 권력 때문에 말을 아끼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레이너드를 다르게 보게 되겠지.

“왜 붉은 눈에 관해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요.”

필요한 부분은 그게 끝이었는지, 책을 덮으며 데이브가 중얼거렸다. 유리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고서들을 뒤지며 왜 이렇게까지 기록이 없었는지 의아했는데 이제 그 의문이 풀렸다.

“일부러 기록을 없앤 거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베아투스’라는 존재가 데니크 왕국을 오랫동안 지탱해 주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한 것 같으니 제국 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았겠죠.”

역사서를 보다 보면 흔히 있는 일이다. 꾸준히 전해져 내려오는 역사서는 항상 승자의 편에서 쓰이는 법이고, 유리나가 살고 있는 대륙에서 승자는 제노시안 제국이었다.

전쟁을 거듭하며 영토를 넓혀 가던 제국은 정복지의 후손들이 힘을 모아 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철저하게 짓밟았을 것이다.

이번에 찾은 기록처럼 ‘베아투스’가 정말로 데니크 왕국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왔다면, 데니크 왕국의 후손들이 베아투스를 토대로 뭉치지 못하도록 기록을 완전히 지워 버렸을 게 분명했다.

고서에나마 내용이 남아 있는 건 고서를 완벽하게 해독하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리나처럼 미리 알고 있는 사실을 토대로 내용을 짜 맞추기 위해 고서를 찾는 게 아닌 이상 이 내용을 발견하는 일 또한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저주받았다는 내용도 악의적으로 퍼뜨린 소문이 구전되어 내려와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

유리나는 2주 가까이 책을 보느라 찌뿌드드한 어깨를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사이 데이브는 다시 책을 펼쳐서 양피지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데이브, 뭐 해?”

“흥미로운 이야기라서 연구를 좀 더 할까 합니다. 아카데미에 레이너드 군의 추천장을 보낼 때 이 내용을 같이 첨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응, 그것도 그렇겠네.”

그렇게 된다면 레이너드의 입학이 조금 더 쉬워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유리나는 데이브의 연구실을 나왔다. 데이브에게 양해를 구해 ‘베아투스’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책도 가져왔다.

‘그런데 데프론 후작은 이 사실을 대체 어떻게 알았지?’

레이너드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이 소식을 알려 주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는데 문득 그런 의문이 생겼다.

아무리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그는 어떻게 이 고서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이야기를 알고 있던 걸까.

‘알게 뭐람.’

유리나는 고개를 저으며 잠시 들었던 생각을 떨쳐 냈다. 책에서 스쳐 지나갔을 내용이 기억날 리가 없고, 그렇다고 데프론 후작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영영 풀리지 않을 질문을 계속 머릿속에 남겨 두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

말끔하게 생각을 정리하며 유리나는 응접실 문을 열었다. 촛불이 켜진 응접실 안쪽에서 레이너드가 심각한 얼굴로 동화책을 베껴 적고 있는 것이 보였다.

“레이, 뭐 해?”

한참 집중하고 있던 탓에 문소리도 듣지 못했던 레이너드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는 유리나를 보자마자 잔뜩 찡그렸던 표정을 풀고 웃었다.

“숙제하고 있었어.”

“이 시간까지? 좀 쉬지 그랬어?”

“내일까지 이 동화책을 다 베껴 가야 해. 이거 다 하고 쉴 거야.”

“그래? 내가 없어도 열심히 하네.”

“당연하지. 봐 봐. 벌써 이만큼이나 썼어!”

그가 자랑스레 제가 베껴 쓴 종이를 보여 주었다. 유리나는 그가 쓴 글씨를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글씨 많이 늘었네.”

여전히 글을 처음 배우는 다섯 살 아이처럼 삐뚤빼뚤한 글씨지만 그동안 안 본 사이에 거칠었던 선이 한결 정리되어 있었다. 그것만으로 그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엄청 열심히 했어. 이것 봐, 여기 이렇게 굳은살도 생겼어.”

레이너드가 엄마에게 자랑하는 아이처럼 유리나에게 제 손을 펼쳐 보였다. 그의 말마따나 깃펜이 닿는 부분에 살짝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정말이네. 열심히 했나 봐. 아프지는 않아?”

“이 정도 가지고 아픈 게 말이 돼?”

“그런가?”

“응.”

유리나는 그의 손가락을 살살 문질러 주다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레이, 네가 열심히 하는 동안 나도 열심히 이걸 찾았어.”

“뭘?”

“붉은 눈에 관한 이야기 말이야. 내가 말했지? 여신의 축복을 받은 눈이라고. 여기 봐 봐. 여기에 그 내용이 적혀 있어. 너랑 같은 눈을 가진 사람을 ‘베아투스’라고 부른대.”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한층 올라간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며 그를 향해 책을 펼쳤다.

그러나 기뻐할 거란 기대와 달리 레이너드의 반응은 어쩐지 시큰둥했다. 그는 글씨 연습을 하던 자세 그대로 시선만 돌려 심드렁하게 유리나가 펼쳐 놓은 책을 힐끔 보았다.

그게 끝이었다. 이내 다시 글씨 연습을 하는 레이너드를 보며 유리나는 다소 떨떠름하게 물었다.

“반응이 왜 그래?”

“뭐가?”

“안 기뻐?”

“음, 잘 모르겠어. 기뻐해야 하는 거야?”

레이너드가 무의식적으로 깃펜의 끝을 잘근잘근 깨물며 유리나가 갖고 온 책을 노려보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별로 없잖아.”

“달라지는 게 왜 없어? 데이브는 이 자료를 첨부해서 아카데미에 추천서를 보낼 거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다시는 네 눈을 갖고 트집 잡지 못할 거야.”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아니, 바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유리나가 그동안 그 고생을 하며 이 내용을 찾아낸 거니까.

그러나 레이너드는 여전히 감흥 없는 얼굴로 다시 동화를 베껴 나가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유리나는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말이야.”

허탈한 유리나의 시선을 받으며 묵묵히 글씨를 써 내려가던 레이너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이제 다시 나와 수업 듣는 거야?”

“응?”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을 수가 없어 유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콧잔등을 잔뜩 찌푸렸다.

“원하던 자료를 찾았잖아. 그럼 내일부터 수업 빠지지 않고 나랑 수업 들을 거야?”

“아, 수업? 글쎄, 어떡할까.”

유리나는 책을 덮으며 잠시 고민했다. 레이너드가 듣는 수업은 아주 기초 수업이라 사실 그녀가 들을 필요는 없었다. 지금까지 그 수준에도 맞지 않은 수업에 참여한 것은 오로지 불안해하는 레이너드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수업을 듣는다고 해도 몇 시간 동안 그의 옆에 앉아 가정 교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다른 것을 했다. 레이너드만 아니었다면 시간 낭비인 일.

‘레이도 적응한 것 같은데.’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너드의 시선이 너무 따가웠다.

그는 꼭 무언가를 잔뜩 바라는 강아지처럼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유리나는 그의 눈을 보며 충동적으로 대답했다.

“계속 같이 들을까?”

“응! 같이 듣자!”

그가 베아투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보다 더 활기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글씨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했던 글씨가 꼭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처럼 유독 꼬불꼬불거렸다.

* * *

사계절이 뚜렷한 제국의 여름은 꽤나 더운 편이었다. 지금껏 짧고 얇은 옷을 입고 여름을 보냈던 레이너드는 격식에 맞춰 꼭꼭 껴입은 옷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더운데 꼭 이렇게 입어야 해? 왜 이렇게까지 피곤하게 살아야 해? 보는 사람도 없잖아.”

“내가 보잖아.”

유리나가 당연하다는 투로 대꾸하자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넌 봐도 별로 상관없잖아.”

자칫하면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이었지만, 레이너드는 그저 유리나의 앞에서는 이렇게 격식을 차려 옷이란 옷을 껴입을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것뿐이었다.

“진짜로 덥단 말이야.”

그가 책상에서 일어나더니 비척비척 걸어와 소파에 털썩 엎어졌다. 팔이 소파 밖으로 힘없이 축 늘어진 모양새가 꼭 유리나에게 항의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언제는 옷에 손도 못 대게 하고, 누가 보지도 못하게 나가라고 난리를 쳤으면서 지금은 왜 그래?”

“그거랑 이거랑 같아? 그때는 목욕하려는데 들어오려고 했잖아. 지금은 조끼만 벗으면 되는데……. 안 돼?”

유리나가 허락을 안 해 주자 그는 소파에 얼굴을 푹 처박고 “더워어어어.”라고 중얼거리며 도리질을 했다.

유리나는 그가 뭐라고 하든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원래 아이들이 떼를 쓸 때는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 최고의 대응책이라고 했다.

과연, 레이너드가 더 투덜대는 대신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고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하얀 그의 얼굴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렇게 덥나.’

하긴 더울 만도 했다. 여름이라 얇은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 레이너드는 치렁치렁한 장식이 많이 달린 긴 셔츠와 긴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더운데 그 위에 조끼까지 입고 있으니 오죽할까.

그래도 예의범절을 배워 나가는 중이니 참아야 한다고 할까 하다가 유리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덥다고 투덜거리는 해도 조끼를 안 벗고 제 양해를 구하는 게 기특했기 때문이다.

“이제 살 것 같아.”

재빠르게 조끼를 벗은 레이너드가 테이블 위에 놓인 얼음 앞으로 바짝 다가가 앉았다. 더위에 지친 꼬맹이들을 위해 데이브가 마법으로 만들어 준 녹지 않는 얼음이었다.

이 주위의 공기는 다른 곳보다 낮아서 레이너드는 더울 때마다 얼음과 한 몸이 될 정도로 바짝 다가가 더위 먹은 강아지마냥 헥헥거렸다.

지금도 그는 테이블에 뺨을 대고 엎드려 얼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원한 기운을 즐기다가 유리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넌 안 더워? 얼굴이 완전 빨간데.”

“안 더워.”

“거짓말. 나보다도 더 옷을 많이 입었는데 어떻게 안 더울 수가 있어?”

“진짜 안 더워.”

말은 그렇게 했어도 덥긴 엄청 더웠다. 유리나는 더위에 뇌 속까지 익어 가는 것 같았다.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레이너드가 입고 있던 옷보다 더 두껍고 무거웠다. 귀족 아가씨 행세가 이렇게도 힘든 것이다.

유리나는 벌써부터 반팔과 핫팬츠,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간절히 생각났다.

레이너드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유리나를 보다가 테이블에 놓여 있는 부채를 들고 팔랑팔랑 바람을 부쳐 주었다. 별거 아닌 행동이었는데도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유리나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자 레이너드가 그녀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조금 전까지 덥다고 노래를 부르며 난리 친 주제에 덥지도 않은 모양이다.

“있지, 유리나.”

“왜?”

“이런 날은 강에서 수영하는 게 최곤데.”

“강?”

“응. 내 고향에서는 이렇게 더운 날에 다들 강에 놀러 갔거든. 나무 그늘 아래서 수영하고 놀면 엄청 시원해.”

“그래서 놀러 가고 싶다는 거야?”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호기롭게 얘기를 꺼낼 때는 언제고 그는 의기소침하게 목을 움츠렸다. 유리나는 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

정곡을 찔렀는지 레이너드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런 거 아냐!”

그러다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유리나를 발견하고는 작게 웅얼거렸다.

“아니, 더우니까 집중이 안 되기도 하고. 손에 땀이 나니까 깃펜을 잡기도 힘들고, 선생님도 힘들어 보이고, 스승님도 지쳐 보이고…….”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요컨대 수업이 듣기 싫다는 소리였다.

‘지칠 때가 되기는 했지.’

레이너드는 벌써 한 달이 넘게 수업을 들었다. 그동안 수업 시간 내내 이를 악물고 제 뺨을 때려 가며 졸린 것도 참고 집중해서 수업을 듣고, 수업이나 숙제를 안 하기 위해 꾀병이나 잔꾀를 부린 적도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숙제를 다 하지 않으면 밤잠을 줄여서라도 기어코 다 하고 자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쳤을 거다. 자유롭게 살던 그가 틀에 박힌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지 유리나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녀도 한국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이곳에 처음 와서 격식이니 뭐니 하는 것을 맞춰서 지내느라 힘이 좀 들었다.

‘오늘은 소원대로 해 줄까.’

때마침 간식을 가지러 갔던 베시가 얼음이 잔뜩 들어간 시원한 과일 주스와 차갑게 식힌 푸딩을 가져왔다.

“베시, 근처에 시원하게 놀러 갈 곳이 있을까?”

“놀러 갈 곳이요?”

유리나의 생각을 기민하게 눈치챘는지 푸딩을 눈독 들이고 있던 레이너드가 손을 번쩍 들었다.

“너무 더워서 강에 수영하러 가고 싶어요!”

“강에 수영이요?”

뜻밖의 제안이었는지 베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진지하게 생각을 가다듬었다.

“강은 없지만 수도 외곽에 호수가 있죠. 뱃놀이를 많이들 한다고는 들었어요. 그런데 날씨가 이렇게 더워서 가능할지는 모르겠어요.”

“이걸 가져가면 되잖아요.”

레이너드가 뽀얀 수증기가 폴폴 새어 나오는 얼음 덩어리를 품에 안았다. 베시는 곧바로 “앗, 차가!”를 외치며 얼음을 다시 내려놓는 그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너드는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유리나의 옆으로 다시 살살 다가왔다.

“유리나, 호수 갈 거야?”

“가고 싶어?”

평소라면 바로 고개를 끄덕였을 텐데 그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다가 유리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유리나는 제 어깨에 이리저리 얼굴을 문지르는 그의 이마를 꾹 누르며 그를 떼어 놓았다.

“왜 그래?”

그는 꿋꿋하게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작게 웅얼거렸다.

“정말 가도 돼? 오늘 아직 수업이 남았는데.”

“마법 수업?”

“응.”

“수업이 없다면 가고는 싶고?”

“그거야 그렇지.”

레이너드는 유리나에게만 겨우 들릴 만한 작은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코앞에 앉은 그에게선 뜨거운 열기가 풍겼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숨도 드러난 목과 어깨에 닿아 몸이 더 뜨거워졌다.

유리나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쭉 밀었다.

“더워, 조금 떨어져. 베시, 데이브한테 호수에 같이 가자고 전해 주고 나랑 레이 외출 준비 좀 도와줘. 주방에는 간식 좀 싸 달라고 말하고. 베시도 같이 가자.”

“정말 놀러 가는 거야?”

“놀러 가는 거 아니야. 데이브한테 호수 가서 수업하라고 할 거야.”

“와아!”

수업을 한다는 말을 덧붙였는데도 뭐가 그리도 좋은 건지, 그는 양손을 하늘 번쩍 들어 올리고 소리를 질렀다.

“진짜 수업하라고 할 거야.”

“알아. 그래도 좋아.”

환하게 웃은 레이너드는 땅에 대충 던져 두었던 조끼를 다시 껴입은 뒤 외출 준비를 하겠다며 제 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저렇게 좋을까?’

유리나는 더위에 지쳐 소파에 앉아 복도에서 울려 퍼지는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있던 그녀는 보송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모자까지 쓰고 돌아온 레이너드가 얼른 챙기라며 닦달을 한 뒤에야 겨우 방으로 걸어갔다.

* * *

“우와, 이게 호수야?”

레이너드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앞에 펼쳐진 호수를 서둘러 둘러보았다. 이미 호수에는 더위를 피해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유리나를 대신하여 베시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을 해 주었다.

“네, 수도에서 가장 크다는 레만 호수예요. 신기하세요?”

“네! 저는 호수는 처음 봐요. 강은 고향에도 있었는데.”

레이너드는 강과 호수가 이렇게 다를 줄 몰랐다며 호숫가로 다가가 참방참방 두 손을 담그며 장난을 쳤다. 양손 가득 물을 담아 뿌리려고 하길래 유리나는 얼른 그에게서 멀어져 키가 큰 데이브의 뒤에 숨었다.

차마 스승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데이브에게 물을 뿌릴 수는 없었는지, 레이너드가 입맛을 다시며 물을 애꿎은 땅에 뿌렸다.

마차에서 한참을 부스럭거리던 베시는 유리나의 손에 양산을 쥐여 준 뒤 레이너드의 손에도 병아리처럼 샛노란 양산을 쥐여 주었다. 그는 이런 건 안 어울린다면서 다시 베시에게 양산을 넘겼다.

“햇볕에 얼굴이 타면 오이를 얹어 놓아도 밤에 잘 때 많이 따가워요. 오늘은 볕이 뜨거우니까 쓰는 게 좋아요.”

그제야 그는 순순히 양산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꽃 자수가 놓인 양산이 여전히 못마땅했는지 뚱한 얼굴로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말고 딴 건 없어요?”

“아가씨가 쓰시던 양산밖에 없어서 어쩔 수가 없어요.”

“어울리는데 왜?”

연구실에 있다가 얼떨결에 호수까지 끌려 나온 데이브가 레이너드와 양산을 번갈아 보다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았다.

평소라면 까치집이 된 머리를 재빨리 정리했을 레이너드는 여전히 세모꼴 눈으로 양산을 노려보고 있었다.

보다 못한 데이브가 양산을 톡톡 두드리자 샛노란 색이었던 양산이 중앙부터 서서히 검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유리나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던 베시가 반 이상 새까매진 양산을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마법사님!”

“아, 이건 마법으로 일시적으로 바꾼 겁니다. 서너 시간 뒤엔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그런 건 미리 말씀해 주셔야죠. 놀랐잖아요.”

두 사람이 그러든 말든, 레이너드는 놀란 얼굴로 이젠 완전히 까맣게 변한 양산을 올려다보다가 두 손으로 양산을 빙글빙글 돌렸다. 손을 높이 들어 손끝으로 양산 안쪽 천을 톡톡 두드려 보기도 했다.

“나도 얼른 이렇게 마법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간절함과 비슷한 감정이 묻어 나왔다. 유리나는 분홍색 양산을 한 손으로 고쳐 쥐고 그의 손을 톡톡 쳤다.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진짜 할 수 있을까?”

“그렇다니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왜? 데이브는 너 잘하고 있댔는데.”

얄팍한 위로가 아니라 정말로 데이브는 유리나에게 레이너드의 재능이 심상치 않다고 말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마력 검사를 하면서 이미 알고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가르쳐 보니 제 생각을 뛰어 넘는다고 했다.

―이쯤 되니 ‘베아투스’라는 기록이 정말로 전설이 아니라 사실인 것 같습니다. 크론 왕국으로 유학 갔다가 돌아오면 얼마나 발전해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물론, 이제 겨우 기초 마법을 배운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실력이라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다. 그래도 데이브는 지금까지 발전한 것보다는 앞으로의 가능성을 더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레이너드는 그저 답답한 모양이다.

“그렇지만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걸. 스승님은 이렇게 뚝딱 마법을 쓰는데, 나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대체 언제?”

“이제 막 배우기 시작했으면서 마법을 마음대로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유리나는 그의 이마 정중앙을 톡톡 두드렸다. 별로 아프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레이너드는 이마를 쓱쓱 문지르며 아프다고 꾀병을 부렸다.

“안 아픈 거 다 알아. 그것보다 여기 있으니까 덥다. 얼른 배 타러 가자.”

“응, 그러자!”

레이너드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유리나의 손을 힘 있게 움켜쥐었다. 몸에 열이 많은 건지 맞잡은 그의 손은 뜨거워서 더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유리나는 내색하지 않고 그를 시종이 준비해 준 놀잇배로 이끌었다.

“레이너드, 자연 원소 중에서도 물은 가장 마나를 많이 품고 있는 원소야. 지난주에 배운 내용 기억하지?”

데이브에게 호수에 가서 수업을 할 거라던 유리나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데이브는 유리나에게서 나들이가 아니라 야외 수업을 나온 거라는 말을 들은 후 착실하게 수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마법 이론서까지 챙겨 온 그를 보며 레이너드는 여유롭게 간식을 먹으려다 말고 눈을 찡그렸다.

“뭔가 속은 기분이야.”

유리나는 아까 공부방에서 못 먹은 푸딩을 한 스푼 떠먹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속기는 뭘 속아? 수업할 거라고 했잖아. 난 분명히 말했어.”

“그렇지만 진짜로 수업을 할 줄 몰랐단 말이야.”

“얼른 끝내면 놀 수 있어. 집중해서 들으면 금방 끝날 거야. 데이브한테 오늘은 짧게 하라고 했으니까.”

그는 풀이 죽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유리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본 척도 안 하고 푸딩을 마저 떠먹자 포기한 듯 데이브를 향해 몸을 돌렸다.

“네, 기억해요. 그래서 같은 마법을 쓰더라도 물가에서 쓰면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고 했어요.”

“잘 기억하네. 그래서 강이나 호수를 끼고 있는 곳에서는 광범위 마법이나 대형 마법을 쓸 수 있어.”

“계곡에서는요?”

“계곡도 마찬가지지.”

수업이 싫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레이너드는 양산을 제대로 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진지하게 데이브의 말을 경청했다. 펼쳐진 채로 방치된 까만 양산이 널찍한 놀잇배 한구석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빛과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보다가 쓰고 있던 양산을 그의 머리 위로 기울였다. 갑자기 햇빛에 노출된 왼쪽 어깨가 뜨끈했지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레이너드가 기어코 여기까지 가져온 녹지 않는 얼음도 그의 옆으로 밀어 주었다. 시원한 게 마음에 들었는지 레이너드는 수업을 듣는 중간중간에 무의식적으로 얼음을 만지작거렸다.

시원해진 손바닥으로 뜨끈한 이마와 볼을 매만지고 또다시 얼음을 만지작거리기를 몇 번 반복했다.

유리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레이너드에게 양산을 반 이상 내어 준 까닭에 감은 눈 위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주위에선 놀잇배를 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좋네.’

간만에 느끼는 평화로운 날이었다. 사실 유리나 또한 이런 나른한 일상을 즐긴 지 오래됐다.

레이너드를 만나기 전에는 이곳에 적응하면서 그를 찾아다니느라, 그를 저택으로 데리고 온 다음엔 그를 챙기고 같이 수업을 듣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잠시 그러고 있던 유리나는 갑자기 뺨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바로 코앞에서 레이너드의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유리나와 눈이 마주치자 레이너드가 두 눈이 사라질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시원하지?”

“응?”

“이렇게 하면 시원해.”

그가 유리나의 볼에 댔던 손을 떼서 얼음에 마구 비볐다. 차갑다고 눈을 찌푸리면서도 한참을 그렇게 비비더니 빨개진 손바닥을 다시 유리나의 볼에 갖다 댔다.

얼음을 직접 얼굴에 대고 있는 것 같은 차가움에 유리나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어깨를 움찔거렸다.

감은 눈 너머에서 레이너드가 해맑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시원하지? 시원하지?”

“응, 시원해.”

“역시 이걸 가져오길 잘했어. 안 그랬으면 이대로 통구이가 되었을 거야.”

그는 얼음에 비빈 두 손으로 제 뺨을 착착 소리 나도록 때리더니 유리나의 두 뺨을 다시 움켜쥐었다.

조물조물. 그는 꼭 밀가루 반죽을 만지는 것처럼 보드라운 유리나의 뺨을 매만지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수업 끝났어. 이제 진짜 놀아도 돼.”

“그래, 그러자.”

유리나는 그의 손이 제 뺨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레이너드는 그 잠깐 사이에 배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호수에 두 손을 담갔다. 앞으로 고꾸라질 것같이 위태로운 그의 자세에 깜짝 놀라 베시가 얼른 그의 셔츠를 잡았다.

참방, 참방. 그가 두 손으로 수면 위를 때릴 때마다 투명한 물방울들이 뺨에 튀었다. 유리나는 얼굴에 튄 물을 닦으며 그만두라고 핀잔을 주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그의 옆으로 다가가 앉아 오른손을 호수에 담갔다.

“앗, 차가!”

유리나가 물을 튀기자 레이너드가 얼굴을 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는 재빨리 두 손으로 물을 잔뜩 펐다가 모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유리나를 보며 멈칫했다. 손가락 사이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뭐 해, 레이?”

양산으로 물을 막을 준비를 하던 유리나가 멍한 그의 표정을 보며 물은 뒤에야 그는 손을 탈탈 털며 베시가 꺼내 놓은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더워서 머리가 어지러워.”

그는 이 더운 날에 공부를 해서 그런다며 전투적으로 쿠키를 씹었다. 시선은 땅바닥을 향한 채였다.

* * *

누구에게나 잠 못 드는 밤이 오고는 한다. 레이너드에게는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특별히 잠을 못 잘 이유가 없는데도 그는 침대에 누워 말똥말똥한 눈을 깜빡였다.

‘잠이 안 와.’

호수에 가서 유리나와 물장난을 치며 놀았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진작 곯아떨어졌어야 했는데. 그는 의미 없이 몸을 뒤척이며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 올렸다.

이제 온 지 한 달 반이나 된 이 저택이 낯설다거나, 친하지 않았어도 한방에서 같이 잤던 고아원 아이들이 없어서 외로운 건 아니었다. 쓸쓸했다면 진작 그랬어야지. 이제 와 뭘 새삼스럽게.

그냥 이유도 없이 잠이 안 왔다. 그러니 더 미칠 노릇이다.

“아으으으으으.”

이불 속에 들어가 잠시 꿈틀대던 그는 곧 비장한 표정으로 베개를 품에 안고 방을 나왔다. 처음엔 아무도 없는 휑한 복도에 겁을 잔뜩 먹고 몸을 움츠렸지만 곳곳에 있는 촛불에 용기를 얻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모두가 자고 있는 밤에도 초를 켜 놓다니, 참 호화스러운 저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벅, 저벅, 저벅. 제 발소리에 본인이 놀라 계속 뒤를 돌아보던 그는 발꿈치를 들고 목적지를 향해 후다닥 뛰어갔다. 뜀박질 때문인 건지 공포 때문인지 심장이 콩닥거렸다.

무사히 목적지까지 도착한 레이너드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역시 자겠지?’

한 번 더 노크를 할까 고민하다가 포기하고 몸을 돌리는데 문이 열렸다.

“이 시간에…… 대체…… 누구…….”

자다 일어난 기색이 역력한 유리나가 말을 채 끝마치지 못하고 하품을 했다. 그녀는 제대로 뜨이지도 않는 눈을 뜨려고 노력하다가 레이너드를 발견하고 눈을 비볐다.

레이너드는 그녀를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 녕.”

“안 자고 뭐 해, 레이?”

“그게……. 잠이 안 와서.”

“음, 비가 와서 무섭구나?”

“아냐!”

아냐, 아냐아, 아냐아아.

고요한 복도에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유리나가 서둘러 그의 입을 막으며 팔을 잡아당겼다.

“조용히 해. 다들 깨겠어.”

레이너드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이끄는 대로 방으로 들어왔다. 그를 놓아준 유리나가 서툰 손길로 성냥을 켜서 초에 불을 붙였다. 레이너드는 베개를 세게 끌어안고 쭈뼛거리다가 유리나가 침대를 팡팡 두드린 뒤에야 가서 앉았다.

게으름을 잘 부리지 않는 성격과는 달리 의외로 잠이 많은 유리나가 또 한 번 하품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이너드는 뒤늦게 후회했다.

“자고 있는데 깨워서 미안. 나 그냥 갈게.”

유리나는 일어나려는 그의 팔을 잡아 도로 앉혔다.

“괜찮아. 어차피 이미 깼는걸.”

하암. 또다시 하품을 하는 그녀를 따라 레이너드도 베개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졸리지 않았는데 하품도 전염이 되는 모양이다.

“넌 안 졸려?”

어느새 베개를 끌어안은 유리나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레이너드의 어깨가 빳빳하게 경직됐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유리나의 머리를 살짝 밀며 대답했다.

“안 졸린 것 같아.”

“안 졸린 거야, 아니면 졸린데 빗소리가 무서워서 못 자겠는 거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베개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는 그를 보며 유리나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잠 올 때까지 게임 할까?”

“무슨 게임?”

레이너드가 조금 전보다 조금 느리고 어눌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는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는 그녀를 보다가 크게 하품했다.

“졸리긴 졸리구나?”

“아…… 니야.”

말과 달리 다시 하품하는 까닭에 목소리가 이상해졌다.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유리나는 침대 위로 올라와 앉아 카드를 펼쳤다. 레이너드는 베개를 내려놓고 무릎으로 그녀 옆으로 기어가 앉았다.

수도에서도 꽤 이름 있는 화가가 손수 그린 카드는 잘 모르는 그가 보기에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화려하고 예뻤다. 레이너드는 카드에 코를 박을 기세로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깜빡였다.

“이거 되게 신기해.”

“카드 처음 봐?”

“그건 아닌데.”

그가 지금까지 본 카드는 누가 그렸는지도 모를, 엉성한 그림이 그려진 카드뿐이었다. 오로지 게임을 하기 위한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카드.

반면 유리나의 새하얀 손에 들린 카드는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거 되게 예뻐.”

“그렇지? 생일 선물로 받은 거야.”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유리나가 착착 카드를 섞었다. 레이너드는 그녀가 해 주는 게임 설명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며 귀담아들었다.

유리나가 알려 준 건 서로 일정량의 카드를 나눠 가진 뒤 제시된 카드와 같은 숫자나 무늬의 카드를 내놓는 아주 쉬운 방식의 게임이었다.

잘 모르는 레이너드도 금세 규칙을 숙지하고 게임에 임할 수 있었다. 그래도 첫 판은 익숙하지 않아서 쩔쩔매느라 유리나가 많이 도와주었다. 당연히 첫 판을 이긴 것도 유리나였다.

“이거 재밌다! 또 하자!”

처음엔 져도 마냥 신이 났던 레이너드는 연속으로 네 판을 지고 나자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렸다.

“나도! 잘할 수 있어!”

분명히 이해를 잘했는데 왜 자꾸만 지는 거지? 시간이 꽤 지난 탓에 눈꺼풀에 잠을 한가득 올려놓은 주제에 레이너드는 뾰로통하게 제 카드를 바라보았다. 잘만 하면 시선만으로도 카드에 구멍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리나는 부채처럼 펼친 카드로 입을 막으며 하품을 했다. 어느새 창을 때리는 빗줄기는 더욱 굵어지고 밤은 야심해져 가는데 승부욕이 발동한 레이너드는 자기가 이길 때까지 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번 판은 져 주자.’

그녀는 자기 위해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같은 무늬의 카드가 있으면서도 없는 척하며 새로운 벌칙 카드를 가져오고, 또 가져오고, 레이너드가 눈치채면 안 되니까 중간중간 카드를 내려놓고.

그의 눈치를 살피며 전략적인 게임을 이어 가다 보니 어느덧 레이너드가 마지막 카드를 내려놓았다.

“이겼다!”

그는 두 팔을 하늘 높이 들고 소리치다가 그 자세 그대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졸려.”

“얼른 가서 자.”

“일어나기도…… 힘들어.”

레이너드가 베개를 안고 웅얼거리며 이불 속으로 꼬물꼬물 기어들어 갔다. 유리나가 발끝으로 등을 꾹 밀자 그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에 힘을 주며 버텼다.

“하지…… 마. 떨어지면 아파.”

도무지 돌아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유리나는 하는 수 없이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다행히 침대는 조그만 두 아이가 굴러다니면서 놀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해서 거리를 꽤 떨어뜨릴 수 있었다.

“잘 자, 레이.”

이미 잠이 들었는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유리나는 일정 속도로 쌔근거리는 그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유리나를 깨우러 온 베시는 카드가 널브러진 침대 위에서 머리를 맞대고 자고 있는 두 아이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 * *

레이너드가 한밤중에 찾아온 그날 이후로 장마가 시작됐다. 하루 종일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잊을 만하면 빛이 번쩍이며 우렁찬 천둥소리가 들렸다.

저택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던 레이너드는 장마가 시작된 이후로 어딘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유리나만 보면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쉴 새 없이 쫑알쫑알거리고는 했는데. 유리나를 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게 이상하여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그냥 피곤하다는 대답만 들려올 뿐이었다.

‘저택 안에서만 있으려니까 답답한가.’

그동안은 날씨가 좋으면 정원에 나가 놀고는 했는데 장마가 온 이후로 두 사람은 하루 종일 방에서만 지냈다. 한창 뛰어놀 나이니 방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 그러겠거니 했다.

다만 가장 이상한 것은 밤에 좀처럼 자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유리나는 팔짱을 낀 채로 레이너드가 하품하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벌써 다섯 번째 하품이었다.

“졸리면 가서 자.”

“안…… 흐암, 졸려.”

이로써 여섯 번째. 어눌해진 말과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을 보면 졸린 것이 확실한데도, 그는 아까부터 멀쩡하다며 유리나의 방에 딸린 응접실에서 버티고 있었다.

평소에도 숙제를 다 하고 나면 자기 전까지 유리나의 방에서 같이 따뜻한 우유를 마시거나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냈으니 특이한 풍경은 아니었다.

다만, 열 시만 되면 칼같이 졸리다며 방으로 가던 레이너드는 자정이 다 되어 가도록 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오늘뿐만 아니라 장마가 시작된 후로 계속 이랬다.

대체 뭐가 문제냐고 물어보아도 아무 일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러나 유리나가 보기엔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

‘비가 그렇게 많이 무서운가.’

유리나는 얼마 전 제 방으로 찾아왔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와중에도 레이너드는 고개를 떨구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레이너드 님, 침대에서 주무셔야죠.”

보다 못한 베시가 레이너드를 살살 달래 일으켰다.

“안 졸린데…….”

“졸리지 않아도 일찍 주무셔야 키가 쑥쑥 크지요.”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이 있다던 베시는 능숙하게 그를 어르며 방을 나갔다.

‘괜찮겠지?’

닫힌 문을 보며 한참이나 제자리에 서 있던 유리나는 베시가 레이너드를 재우고 돌아오는 것을 본 뒤에야 침실로 들어갔다.

마지막까지 방에 가지 않으려고 하던 레이너드의 표정 때문인지, 아니면 요란하게 내리는 빗소리 때문인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유리나는 침대에서 몇 번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다.

그렇게 한,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잠결에도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우렁찬 천둥소리에 유리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제대로 뜨이지도 않는 눈을 비비며 주위를 살폈다.

여전히 사위는 어두웠고 창밖에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더 많이 오네.’

빗줄기가 툭툭 튀는 창문을 보고 있는데, 소름이 끼칠 정도로 밝은 빛이 아주 잠깐 방 안을 비추었다가 사그라졌다. 유리나가 반사적으로 두 귀를 틀어막기가 무섭게 쩌렁쩌렁한 천둥소리가 또 한 번 저택을 뒤흔들었다.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는데.’

덤덤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급하게 문이 열렸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잠옷 위에 카디건 하나 걸치지 못하고 달려온 유모가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는 유리나에게 다가왔다. 천둥소리보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더 놀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유리나의 표정이 생각보다 평온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천둥이 쳐서 많이 놀라셨죠?”

“아니, 별로. 그냥 좀 시끄러워서 잠이 안 올 뿐이야.”

“그러세요? 이상하네. 늘 장마철에 천둥소리가 무섭다면서 마님을 찾으셨잖아요.”

오묘해지는 유모의 얼굴을 본 뒤에야 유리나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원래 유리나는 천둥을 엄청 무서워했나 보지.’

이제 고작 열 살 어린아이인 데다가 이곳은 어둠이 무섭다고 바로 불을 환하게 켤 수가 없으니 소리를 지르며 어른을 찾을 법했다.

‘그렇다면 아이다운 연기를 해 줘야지.’

이미 데이브와 카르티아 후작에게 한번 해 본 전적이 있어서 쉽게 할 수 있었다.

유리나는 다소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하지만 나도 이제 열 살인걸. 열 살은 어린애가 아니야. 천둥 따위가 무섭다고 어머니를 찾으며 울 수는 없어. 오빠들은 열 살에 이미 혼자 아카데미에서 생활했는걸.”

이불 너머에서 유모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아가씨가 언제 이렇게 크셨을까요. 그래도 깨셨으니 따뜻한 우유라도 한 잔 가져다 드릴까요?”

이불 위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낯설게 느껴졌다.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재차 중얼거렸다.

“아냐. 괜찮아.”

“그럼 다시 잠드실 때까지 자장가를 불러 드릴까요?”

“내가 애도 아니고.”

퉁명스럽게 나간 진심에 유모가 다시 웃는 소리가 났다. 이건 뭘까.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애 취급을 할 때마다 ‘너보다 내가 더 나이가 많다’며 뚱하게 받아치던 레이너드의 기분이 이랬을까.

“잠드실 때까지 옆에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주무세요, 아가씨.”

옆에 있는 게 더 부담스러운데. 유리나는 이불 위로 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한 번 달아난 잠은 도무지 오지 않았고, 유모는 정말로 그녀가 잠이 들 때까지 옆에 있어 줄 생각인 것 같았다.

결국 유리나는 일부러 잠자는 것처럼 숨을 새근새근 내뱉었다. 다소 어색한 연기였는데도 속았는지 유모는 이불을 다시 한번 잘 여며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불 위로 느껴지던 다정한 온기가 사라졌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린 뒤에야 유리나는 이불에서 빠져나왔다.

‘열 살 흉내도 쉽지가 않네.’

기지개를 켜며 경쾌하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감상하던 유리나는 문득 레이너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잠은 잘 자고 있으려나.’

자신도 깊은 잠을 자다가 소리에 깼으니 레이너도 또한 소리에 놀라 깼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다시 잠이 들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홀로 덜덜 떨며 천둥이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한번 가 봐야 하나.’

조금 전 유모가 달려왔던 것처럼 천둥이 치는 날이면 보통 어른들은 이렇게 아이들이 잠을 설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는 한다.

그렇지만 레이너드에게는 그런 신경을 써 줄 사람이 없다. 낮에는 유리나의 부탁을 받은 하녀들이 그의 상태를 잘 살펴 주지만 밤까지 자진해서 달려올 마음은 없을 것이다.

그럼 그를 이곳으로 데려와 그의 보호자 격 역할을 하고 있는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해 줘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도달했다.

‘괜한 오지랖인가.’

문을 잠시 노려보았지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만약 예상대로 레이너드가 잠을 설치고 있다면 그날처럼 베개를 안고 진작 찾아왔을 텐데.

“흠…….”

베개를 끌어안고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침대에서 내려와 휴대용 촛대에 촛불을 붙인 뒤 방을 나왔다.

희미한 촛불이 빛나는 어두컴컴한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한밤중에 일어난 소란에 다들 깼는지 어쩐지 온 저택이 소란스러운 것 같았다.

유리나는 그 소란을 뒤로한 채 망설임 없이 레이너드의 방까지 걸어갔다.

“레이, 자?”

노크를 하며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예상과는 달리 숙면을 취하고 있는 걸까. 유리나는 여전히 대답 없는 문을 응시하며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자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방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 들다가도 동시에 제대로 확인을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잠을 자고 있는 건지 확인만 하는 거야.’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마자 침대 위에서 꼬물거리는 거대한 누에고치, 아니, 이불고치를 보았다.

“아으으으.”

때마침 천둥이 방 안을 뒤흔들자 이불고치가 크게 움찔거리더니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유리나는 방문을 닫으며 서둘러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레이?”

“으으으.”

“레이? 나야. 일어나 봐.”

유리나가 촛대를 내려놓고 다독여 주자 그제야 레이너드가 앓던 소리를 멈추고 이불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는 유리나를 발견하더니 동그래진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유…… 리나? 여기 왜 있어?”

무슨 짓을 하려고 이 밤중에 내 방에 왔냐는 바락바락 악을 쓰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이불 속에서 뒹구느라 새집처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꾹꾹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설마 너도 잠이 안 와서 그런 거야?”

“뭐?”

유리나는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못 본 건지 그가 코를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천둥이 무섭나 보네. 역시 너도 애구나.”

그건 누가 할 소린데. 유리나는 그의 이마를 꾹 누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너 잘 자고 있는지 보러 온 거야. 네 모습을 보니까 오길 잘한 것 같네.”

“안 보러 와도 됐어. 잘 자고 있었단 말이야.”

“이불 속에서 벌벌 떨고 있는 거 다 봤어.”

“소리가 시끄러워서 잠이 안 와서 그런 거야.”

그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시치미를 뗐다. 촛불에 비치는 볼에 희미하게 눈물 자국이 남아 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그럼 나 갈까?”

침대에서 일어나는 시늉을 해 보이자 레이너드가 다급하게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유리나가 그를 놀릴 요량으로 레이너드를 돌아보기가 무섭게 창밖에서 빛이 번쩍였다. 몇 초의 간격을 두고 뒤늦게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치마를 잡았던 손을 떼며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으으.”

“레이?”

유리나가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그는 그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녀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가 침대 위로 올라갔다.

레이너드와 조금 떨어진 곳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자 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한쪽 눈을 살짝 떴다.

“뭐야?”

“혼자 있는 것보다는 둘이 있는 게 낫잖아.”

“역시 너도 무서운 거지?”

또, 또 저 소리. 누가 봐도 벌벌 떨고 있는 건 그 쪽인데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소리를 하는 건지. 유리나는 손가락으로 오뚝한 그의 코끝을 꾹 눌렀다.

“잔말 말고 잠이나 자.”

레이너드는 코가 납작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리나에게 바짝 다가왔다.

“혼자 자려니까 많이 무서웠지? 이젠 내가 옆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

바로 코앞에서 웅얼거리는 그의 따뜻한 숨이 얼굴을 간질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앓는 소리를 냈던 주제에 목소리는 제법 비장했다. 유리나는 그의 코끝을 더욱 세게 눌러 주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네 옆에 있어 주는 거잖아.”

“무서우니까 내 방으로 온 거잖아. 안 그래?”

“그럼 지난번에 무서워서 내 방에 왔던 게 맞다는 소리네?”

재깍재깍 대꾸를 잘만 하던 레이너드가 일순간 입을 다물고 눈을 또르르 굴려 시선을 피했다.

그가 침묵을 유지하는 동안에도 얇은 여름 이불 너머로 빛이 반짝이더니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이너드가 헛숨을 크게 들이쉬며 유리나의 팔을 힘껏 움켜쥐었다. 아직도 앙상한 손이 파르르 떨리긴 했지만 그는 태연한 척을 하며 눈을 부릅떴다.

“괜찮아, 이 정도는 안 무서워.”

비장한 표정만 봐서는 지금 당장 괴물이 방에 쳐들어와도 굴하지 않고 유리나를 보호해 줄 것만 같았다. 그 정성이 갸륵해서 유리나는 그에게 속아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네가 있으니까 든든하다. 이제 잘 수 있을 것 같아.”

“역시 너도 무서운 거였어.”

“어, 어. 무서운 거 맞으니까 너도 얼른 자.”

“응.”

그 후로도 쉴 새 없이 천둥 번개가 몰아쳤다. 그럴 때마다 유리나의 손을 꽉 잡던 레이너드는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댄 뒤에야 조금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있잖아.”

한참의 침묵 끝에 자는 줄 알았던 레이너드가 눈을 감은 채로 웅얼거렸다.

“난 비가 싫어.”

유리나는 그의 단어 선택에 조금 의아했다. 이렇게 덜덜 떨면서 무서운 게 아니라 싫다고? 게다가 천둥 번개가 아니라 비가 싫다는 말도 조금 이상했다.

“왜? 비가 오면 날씨가 흐려서?”

“아니, 그건 아니고…….”

그가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도리질을 쳤다. 꼭 졸린 아기가 제 엄마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는 것처럼 한참을 그렇게 도리질을 하던 그는 방금보다 조금 더 작아진 소리로 종알거렸다.

“비가 오면 싫은 기억이 떠올라.”

“어떤 기억인데?”

“…….”

먼저 운을 뗐으면서 그는 유리나의 물음에 조개마냥 입을 꽉 다물었다. 유리나는 어쩐지 의기소침해 보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며 묵묵히 대답을 기다렸다.

레이너드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다가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싫어.”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아주 짧은 대화를 끝마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유리나는 그의 감은 눈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렇게 기운 없이 축 늘어진 그의 모습이 조금은 당혹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가 지금껏 살아온 삶이 순탄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로렌 부인 사건 이후로 한 번도 이런 약한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홀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떨고, 아무것도 아닌 유리나의 온기에 안심을 할 정도라면 대체 그는 얼마나 괴로웠던 것일까.

그러나 그의 인생엔 괴로운 일만 가득해서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런 건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에 집에서 가출하기라도 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비가 오는 날에 집 밖으로 쫓겨나기라도 했나.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꼭꼭 숨겨 두고 있는 마음속 진실을 조금이나마 엿본 것 같았다.

“레이, 자?”

“……으응.”

잠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한 그가 몸을 웅크렸다.

“얼른…… 날이 맑아지면…… 좋겠다.”

불분명한 어조로 웅얼거린 그 이후로 정말 잠에 들었는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유리나는 여전히 제 팔을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에 손을 얹으며 눈을 감았다.

“응, 얼른 그랬으면 좋겠다.”

지금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하고 비가 쏟아지지만 이 고요한 밤도 이내 지나가리라.

어둠이 무서워 덜덜 떠는 이 아이의 머리 위에도 얼른 찬란하고 따뜻한 여름의 햇살이 드리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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