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0/20)

3. 어른이 되기 위한 성장통

배움이 부족했을 뿐이지 레이너드는 타고난 머리가 비상한 편이었다.

글자나 숫자는 기본이고, 데이브가 가르쳐 주고 있는 마법 관련 지식도 습자지처럼 금세 흡수해서 제 것으로 만들었다. 크론 왕국어도 조금씩 배워 간단한 회화가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게 나름대로 뿌듯했는지 하루는 자랑스레 유리나에게 크론 왕국어로 말을 걸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능숙하게 왕국어로 대화를 이어 가자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이후로 그는 유리나 앞에서 절대로 왕국어를 쓰지 않았다.

예법이나 춤 등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서 고작 계절이 한 번 바뀌었을 뿐인데 그는 평민으로 지내던 ‘톰’의 모습을 탈피하고 카르티아 후작가가 후원하는 마법 유망주 ‘레이너드’가 되었다.

아직 서툰 부분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 당장 다른 귀족가의 사람과 식사를 하더라도 창피를 당하지 않을 정도는 됐다.

“한 곡 청해도 될까요?”

레이너드가 석 달 전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말끔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말투도 제법 그럴싸한 수도 귀족 악센트를 흉내 내고 있었다.

그의 말투를 교정해 주었던 가정 교사는 그가 수도에 가까운 영지에서 산 덕분에 사투리를 쓰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주기적으로 여신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는 했다.

‘다행이긴 다행이지.’

만약 그가 사투리를 썼다면 말투 교정에만 시간을 몇 개월 써야 했을 테니까.

“기꺼이.”

유리나는 그의 손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손끝에 닿은 그의 손바닥은 그동안 하녀들이 열심히 관리를 해 준 덕에 더 이상 거칠지 않았다.

“그럼 가실까요?”

레이너드가 춤 선생의 지시에 맞춰 유리나를 홀 중앙까지 에스코트했다. 얼굴엔 가면을 쓴 것처럼 줄곧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유리나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걸음에 새삼 감탄했다.

‘정말 많이 발전했네.’

매일 보면 달라지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게 일반적인데도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변화를 늘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그가 그만큼 노력한다는 뜻일 것이다.

하루아침에 이곳으로 와서 하루 종일 수업을 듣는 게 힘들 텐데도 착실히 따라 주는 레이너드가 기특했다. 처음으로 날갯짓을 한 아기 새를 보는 어미 새의 심정이 이럴까.

홀 중앙으로 온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나눴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비슷했던 두 사람의 눈높이는 두 달 사이에 달라져 있었다. 그간 잘 먹은 덕분에 유리나보다 레이너드가 자라는 속도가 빨라 눈높이가 점점 더 높아진 것이다.

광대뼈가 도드라졌던 얼굴에도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예쁘장한 미모가 더욱 두드러졌다.

“어때? 나 좀 멋있지 않아?”

유리나의 허리에 손을 올리며 레이너드가 작게 속삭였다. 유리나는 그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그런 말, 본인 입으로 하면 민망하지 않아?”

“뭐, 어때. 사실인걸.”

어련하시겠어. 유리나가 고개를 저으며 스탠딩 자세를 취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이올린 선율이 홀 안에 울려 퍼졌다. 조금 전 자신만만하게 웃던 것과 달리 레이너드는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유리나는 긴장한 것이 역력한 그의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웃지 마.”

그의 날 선 목소리에도 유리나는 미소를 지으며 보란 듯이 발을 움직였다. 그녀와 달리 레이너드는 바닥을 보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스텝을 완벽하게 익히지 못한 탓이었다.

비상한 머리 못지않게 레이너드는 운동 신경도 좋은 편이라서 교사가 가르쳐 준 스텝을 곧잘 익히고 따라했다.

처음 배우는 것치고는 자세도 반듯하다고 칭찬을 받았지만 그래 봤자 이제 겨우 두 달 배운 솜씨다. 배운 기간에 비하면 뛰어났지만 유리나를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다.

‘진짜 이런 버프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그간 레이너드가 가정 교사들에게 견과류마냥 달달 볶여 가며 고생한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그녀는 줄곧 쓸모없다 여겼던 ‘귀족의 몸가짐’ 버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유리나의 몸 감각을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 예법이나 춤 같은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면 이곳 생활이 퍽 고달팠을 것이다. 어쩌면 기억을 잃은 가여운 소녀 연기를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레이, 춤을 출 땐 파트너의 눈을 바라봐야 해.”

“알아.”

“알면 나 좀 보지?”

“…….”

유리나의 재촉에도 그는 꿋꿋하게 입을 다물었다. 유리나는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묵묵히 춤만 추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발밑에 집중을 하던 레이너드는 음악 속도가 느려진 구간이 되어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생일 선물로 갖고 싶은 게 생겼어.”

“생일 선물?”

유리나는 머릿속으로 오늘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생각해 보니 벌써 추수의 달이네.’

이곳의 일 년은 한국처럼 열두 달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만, 달의 이름을 1월, 2월 등 숫자로 세던 한국과는 달리 각 달마다 지칭하는 이름이 따로 있었다.

그중 한국의 10월에 해당하는 달은 ‘추수의 달’로, 레이너드의 생일은 이 추수의 달의 19일이었다. 그의 생일까지는 2주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유리나가 따로 생일 파티에 대해 지시를 하지 않았는데도 하녀들 중에서도 유독 레이너드를 아끼는 베시는 얼마 전에 레이너드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생일 파티를 해 주겠다고 잔뜩 들떠 있었다.

그녀와 친한 하녀와 시종 몇몇이 같이 준비하겠다고 동조하기도 했다. 이제껏 제대로 파티를 즐겨 본 적이 없을 테니 기억에 남을 파티를 준비하겠다나 뭐라나.

유리나가 잔뜩 들뜬 베시의 얼굴을 생각하며 웃자 레이너드가 고개를 들며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예법 수업 덕분에 한동안 보지 못했던 날것 그대로의 표정이었다.

“그 반응은 뭐야? 혹시 내 생일을 잊고 있던 거야?”

“설마. 당연히 기억하지. 추수의 달 19일이잖아.”

정확한 날짜에 레이너드의 표정이 금세 풀어졌다. 이럴 땐 또 처음 봤을 때 그 다듬어지지 않았던 ‘톰’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튼 레이, 생일 선물로 뭐가 갖고 싶어?”

“음…….”

먼저 호기롭게 이야기를 꺼낸 것과 달리 그는 유리나의 눈치를 보며 뜸을 들였다.

“뭔데 그래? 뭐든 말해 봐. 나 유리나 카르티아야.”

유리나는 그가 어떤 것을 얘기해도 구해 줄 수 있는 재력과 영향력을 가졌다. 정확히는 그녀의 아버지인 후작이 가진 거지만 그의 재력이 곧 그녀의 재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리나의 호언장담에도 계속 눈치를 보던 레이너드가 한숨을 한 번 쉬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물건이 아니야.”

“물건이 아니면 소원 같은 거야?”

“응.”

“일단 들어 보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해 줄게. 무리한 소원이면 생일이라고 해도 못 들어줘.”

“그렇게까지 예외 조항을 붙여야 해?”

그새 ‘예외 조항’ 같은 단어도 쓸 줄 아는 걸까. 유리나는 그의 변화에 또 한 번 감탄했다.

“당연히 붙여야지. 네가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약속 한 번 잘못 했다가는 한 집안이 망하는 수가 있어.”

장난으로 한 소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는지 레이너드가 얼굴을 굳혔다.

“설마 내가 너한테 그런 부탁을 할 것 같아?”

“그건 모르는 일이지.”

“아, 정말……!”

그가 고개를 퍼뜩 든 순간, 유리나가 눈을 찌푸렸다. 놀라서 동그랗게 뜨인 레이너드의 시선이 유리나의 얼굴에서 발밑으로 옮겨 갔다. 그의 발이 작은 유리나의 발을 꾹 밟고 있었다.

“미안해!”

유리나는 샐쭉 그를 흘겨봤다.

“일부러 그런 거지?”

“아니야!”

레이너드가 금방이라도 펄쩍 뛸 듯이 움찔거리며 유리나를 끌고 소파로 향했다. 유리나가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그는 꿋꿋하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발을 제 다리에 올리고 살폈다.

춤 연습을 할 때마다 같은 자리를 하도 많이 밟힌 터라 그녀의 양 발등엔 푸르스름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은 발등을 덮는 구두를 신은 탓에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흰 발등에 생긴 멍 자국을 오늘 처음 봤다.

“이거 언제부터 그런 거야?”

“괜찮대도 그러네.”

유리나는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들어 발을 얼른 거둬들이려고 했지만 레이너드가 먼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멍이 들었으면 멍이 들었다고 말하지 왜 안 말했어?”

“얘기할 필요를 못 느꼈으니까. 별로 아프지도 않고.”

“아팠을 것 같은데.”

“그렇게 걱정되면 춤 실력을 더 늘려서 내 발을 안 밟으면 되잖아. 안 그래?”

일부러 건넨 농담에도 그의 표정은 펴지질 않았다. 유리나는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다가 괜히 그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기껏 정리했던 머리가 순식간에 새 둥지처럼 흐트러졌지만 레이너드는 상관이 없는지 유리나만 올려다보았다.

“다음부터 또 멍이 들면 꼭 말해.”

단호하게 건네는 말에 유리나는 더 이상 장난스럽게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덩달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나도 앞으로 발 안 밟을 수 있도록 열심히 연습할 테니까.”

레이너드가 손바닥으로 그녀의 발등을 살살 문질렀다. 푸르스름했던 멍은 순식간에 없어졌다.

데이브에게 본격적으로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 그는 이제 간단한 마법들은 숨 쉬는 것처럼 손쉽게 쓸 수 있었다. 데이브나 그의 동료들이 넋을 놓고 감탄할 정도였다.

레이너드는 치료를 하고도 뭐가 그리도 불만인지 유리나의 발등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가 손끝으로 문지를 때마다 발등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유리나는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그를 얼른 일으켜 세웠다. 비어 있는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리자 그제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에 앉았다.

한구석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춤 선생과 바이올린 연주자는 눈치껏 잠깐 쉬는 시간을 갖겠다며 홀을 빠져나갔다.

“하던 얘기나 계속 해 볼까? 레이, 생일 때 하고 싶은 게 뭐야?”

“생일 파티 안 해 줘도 되니까 그날 둘이 놀러 나가자.”

“둘이? 우리 둘이서만?”

“응.”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 유리나를 보며 레이너드가 망설이다 물었다.

“안 돼?”

“안 된다기보다는 못하는 거지. 아버지가 우리 둘이 외출하는 건 절대 허락 안 해 주실걸? 호위 기사와 하녀들이 따라올 거야.”

“아.”

레이너드가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유리나는 풀이 죽은 것처럼 손을 꼼지락거리는 그를 보다가 역으로 제안했다.

“호위 기사와 하녀를 데려가도 상관없다면 놀러 나갈까? 나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상점 구경도 하고 네 선물도 사자.”

“정말? 그래도 돼?”

“당연하지.”

금세 환하게 웃는 그를 보며 유리나는 따라 웃었다.

‘귀족가의 사람은 제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표정을 감출 줄 알아야 하며, 환하게 웃으면 안 된다’라는 예절 교육을 받은 뒤로 레이너드는 항상 가면을 쓴 것처럼 제 진솔한 표정을 숨기고는 했다.

가정 교사는 그런 그의 변화를 칭찬했지만 유리나는 가끔 그의 다양한 표정과 솔직한 말들이 그리웠다.

‘그래도…….’

여전히 제 앞에서는 당돌하고 솔직한 아이로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좋았다.

“아, 그런데 말이야.”

“응?”

“너는 생일 파티가 필요 없다고는 했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아. 너보다도 네 생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거든.”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좋아하는 음식 목록을 작성하며 열심히 준비하고 있을 베시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아침에 파티를 하고 점심쯤에 나가서 놀자. 어때?”

“좋아. 그렇게 하자.”

고개를 끄덕인 레이너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리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일어났다.

그 후 레이너드는 필사적으로 집중을 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유리나의 발을 두 번이나 더 밟고 말았다.

* * *

추수의 달 19일, 레이너드의 생일 아침.

유리나는 화려하게 꾸민 응접실을 들여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응접실 안에는 커다란 테이블이 총 네 개가 있었다. 각각 애피타이저, 메인 디시, 디저트 그리고 예쁘게 포장해 놓은 선물들로 가득했다.

말이 좋아 ‘가득’이지 양이나 숫자로 따지면 웬만한 소규모 파티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지난번 유리나가 또래의 아이들 열 명 정도 초대한 티 파티의 규모도 이것보다는 작았다.

“대체 언제 일어나서 준비를 한 거야?”

“소품들은 2주일 전부터 준비를 했고, 디저트나 차가운 음식은 어제 저녁에 만들어 놓았고, 따뜻한 음식들은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준비를 했어요. 주인님과 마님께서도 신경 써서 준비하라고 말씀해 주셔서 열심히 했어요.”

“힘들었을 텐데 수고했어.”

“에이, 수고는요. 다들 좋아서 한 건데요.”

소맷자락으로 이마를 닦으며 자랑을 늘어놓던 베시가 문득 걱정스런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런데 레이너드 님께서 좋아하실까요? 평소 잘 드시던 음식들로 준비했는데 사실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는 직접 듣지 못해서요.”

“좋아할 거야. 걱정 마.”

유리나가 알고 있기론 레이너드는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은 있어도 특별히 싫어하거나 가리는 음식이 없었다. 부족하게 살아온 탓에 편식은 사치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테이블을 둘러보니 베시의 말마따나 레이너드가 유독 잘 먹던 메뉴들이 많이 보였다.

“다들 레이너드를 많이 좋아하나 봐.”

“당연하죠. 저택에 레이너드 님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요?”

“그건 조금 의왼데.”

“어머,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가씨?”

“그냥…….”

사교성이 좋지 않아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기는커녕, 다가오는 사람의 손길도 거부할 정도로 마음을 꽁꽁 닫아 놓은 레이너드.

그와 친해지려면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고, 한가한 유리나와 달리 할 일이 많은 고용인들은 그에게 그렇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 까닭에 고용인들이 그를 챙겨 준다고 해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낼 줄 알았다.

‘좋아해 준다니 다행이지만.’

이 정도로 그를 좋아할 줄이야.

오묘한 유리나의 표정을 보던 베시가 알아서 설명을 곁들였다.

“툴툴거리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다 보면 귀엽거든요. 지난번엔 저보고 먹으라고 쿠키도 챙겨 주셨는걸요. 그리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동생 같기도 하고……. 아, 귀한 분께 이런 말은 하면 안 될까요?”

“안 될 게 뭐가 있어? 데이브는 나도 동생 같아서 귀엽다고 하는걸.”

사실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유리나는 데이브의 조카뻘이었다. 그게 이상해서 언젠가 왜 조카가 아니라 동생이냐고 물어보자 그는 처음으로 우는 것 같은 미소를 짓더니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아버지를 통해 들은 이야기로는 데이브에게는 어릴 적에 죽은 동생이 있다고 했다. 그때 그의 나이가 열셋, 그녀의 나이가 다섯 살이랬다.

유리나가 네 살 때 데이브를 처음 봤으니 그의 눈엔 그녀가 동생처럼 보일 만도 했다.

‘이 상황에선 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유리나가 애써 그 우울했던 미소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망을 보고 있던 시종이 응접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레이너드 님이 오고 계셔요!”

미소 띤 얼굴로 준비를 마무리하던 고용인들이 하나같이 문 앞에 서서 숨을 죽였다. 유리나 또한 베시가 이끄는 대로 작게 잘린 형형색색 종잇조각들을 한 움큼 움켜쥐고 고용인들 사이에 서서 문밖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집중했다.

“유리나? 여기 있어?”

끼이익,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레이너드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다들 손에 쥐고 있던 종잇조각을 그의 머리 위에 뿌렸다.

“생일 축하드려요!”

눈앞에서 일렁이는 종잇조각과 밝게 웃는 고용인들을 보던 레이너드의 눈이 놀란 듯 동그랗게 커졌다. 유리나는 땅에 떨어진 조각들을 지르밟으며 레이너드와 마주 보며 섰다.

“레이, 생일 축하해. 벌써 열세 살이네? 오늘로 나보다 세 살이나 많아졌어.”

유리나는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며 움켜쥐었던 주먹을 폈다. 팔랑거리는 빨간 종잇조각이 레이너드의 콧잔등에 떨어졌다. 그는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주위를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어, 어?”

그러고는 순식간에 투명한 눈물을 뚝뚝 흘렸다.

* * *

“운 거 아니야.”

레이너드가 코를 훌쩍이며 생크림이 잔뜩 얹어진 케이크를 입 안 가득 욱여넣었다. 토끼처럼 빨개진 눈으로 그런 소리를 해 봤자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그 혼자만 몰랐다.

“은 그 으느르느끄!”

그는 숨죽여 웃느라 어깨까지 떨고 있는 고용인들을 보며 소리쳤다. 케이크 탓에 발음이 뭉개지자 케이크를 빨리 먹어 치우기 위해 전투적으로 턱을 움직이며 씩씩거렸다.

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눈치챈 고용인들이 필사적으로 웃음을 멈추려고 노력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우유와 차를 더 가져온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모두들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유리나는 아직도 주전자에 가득 남아 있는 차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어느새 케이크 한 조각을 다 해치운 레이너드가 우유를 꼴깍꼴깍 들이켰다.

“진짜 운 거 아니야.”

“그래, 알겠어.”

“그냥 조금…… 놀란 것뿐이야.”

그는 다시 촉촉해진 눈으로 응접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놀랐어? 오늘 아침에 파티 한다고 이미 말했잖아.”

“알아, 그건 아는데…….”

레이너드가 괜히 포크로 청포도를 콕콕 찔렀다.

“나는 그냥 작은 케이크 하나만 있을 줄 알았어. 사람도 이렇게 많을 줄 몰랐고.”

“그랬어?”

“응. 그리고 사실 이런 파티도 처음이야.”

“정말?”

“응. 다들 내 생일은 신경 써 주지 않았으니까.”

하긴, 그가 살아온 삶을 생각하면 그럴 법도 했다. 유리나는 풀이 죽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동안 한국에서 겪었던 제 생일날을 떠올려 보았다.

레이너드만 할 때는 초등학교 반 친구들을 모두 집에 초대해 파티를 한 적도 있고, 조촐하게 가족들과 외식을 한 적도 있고, 그게 여의치 않을 때에도 전화와 문자로 생일 축하한다는 인사를 잔뜩 받았다.

그녀에게 생일은 항상 기쁘기만 한 날이었다. 레이너드에게 생일은 대체 어떤 날이었을까. 아버지도 모르고 태어난 아이었으니 어머니의 외면만 받았을까.

그랬다면 그의 생일은 어쩌면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한 기억만 남아 있을지 모른다.

유리나는 생크림만 남아 있는 그의 접시에 케이크 한 조각을 더 얹어 주었다.

“많이 먹어. 그거 다 먹고 약속한 대로 놀러 나가자.”

그에게도 오늘 생일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 * *

“유리나, 저것 좀 봐!”

그동안 열심히 해 온 예법 수업이 무색하게도, 레이너드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얼굴로 마차 밖을 가리켰다.

유리나는 그를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지만 그가 대체 뭘 보고 저렇게 흥분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냥 평범한 거리 풍경인데.’

사람이 많은 수도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닌다는 에반 거리는 평민과 귀족 모두에게 인기 있는 번화가라 여러 가지 문화가 혼재해 있는 곳이었다.

평민들이 간단하게 요기를 하거나 구경을 할 수 있는 노점상들이 줄지어 있었고, 벽돌로 지은 건물에는 귀족들을 위해 꾸며 놓은 가게들이 즐비했다.

봄 축제가 펼쳐지면 제국 곳곳에서 모인 악단이나 유랑 공연단이 공연을 하는 진풍경이 펼쳐지지만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이 시점에는 특별한 볼거리는 없었다.

번화가에 많이 와 본 유리나에게는 별 감흥이 없는 풍경이었다.

“저기 밖에 앉아서도 음식을 먹는 거야?”

레이너드가 아예 유리나의 팔을 잡아끌며 그녀를 재촉했다. 그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고급스럽게 꾸민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햇빛이 잘 드는 테라스에선 나들이를 나온 아가씨 몇몇이 애프터눈 티타임을 갖는 것이 보였다.

“응. 무거운 식사는 안 되겠지만 샌드위치나 샐러드 같은 간단한 식사는 가능할 거야.”

유리나는 계속해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카페를 바라보는 레이너드의 속내를 읽고는 베시에게 손짓했다. 베시가 재빨리 마부 쪽과 이어진 창을 열어 마차를 세웠다.

레이너드가 원하는 대로 카페에서 간단한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길 새도 없이 다시 거리로 나왔다. 가을이라 해가 많이 짧아졌고, 볼 것은 많으니 서둘러야 한다는 레이너드의 재촉 때문이었다.

유리나는 오늘은 그가 원하는 대로 군말 없이 따라 주었다.

“신기한 게 되게 많아.”

레이너드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목소리 크기를 줄이면서도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유리나는 베시를 시켜 그가 주의 깊게 본 깃펜과 잉크를 그의 품에 안겨 주었다.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아 귀족들만 드나드는 고급 상점에 데려가 그의 눈 색에 어울릴 만한 루비 브로치를 구매했다.

“이거 정말 나 주는 거야?”

손바닥 위의 브로치를 보며 레이너드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유리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브로치를 집어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생일 선물이야. 이거 그때 내가 말한 루비야. 어때? 네 눈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지?”

“이렇게 비싼 걸 내가 해도 돼?”

“뭘 새삼스럽게 그래? 지금 네가 입고 있는 옷도 가격이 만만치 않은데.”

그녀는 일부러 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하며 그의 왼쪽 가슴팍에 브로치를 걸어 주었다. 레이너드가 고개를 내려 브로치를 보았다.

햇빛에 반짝이는 그의 붉은 눈과 공을 들여 세공한 루비의 빛이 참 잘 어울렸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베시 또한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동안 그렇게 브로치를 내려다보던 레이너드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베시에게 다가가더니 까치발을 하고 그녀에게 귓속말을 속닥였다.

베시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탄성을 지르다가 이내 어딘가 결연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무슨 말을 그렇게 속닥이는 거야?”

“비밀.”

“네, 비밀이에요.”

“뭐?”

그들은 서로를 보며 꿍꿍이가 있는 얼굴로 웃어 보이고는 그녀만 두고 어딘가로 가 버렸다. 졸지에 소외당한 유리나는 호위 기사들과 함께 상점 앞에서 묵묵히 두 사람을 기다렸다.

‘갑자기 이게 뭐야.’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항상 자신의 뒤만 졸졸 쫓아다녔던 강아지 같은 레이너드가 자신을 버리고 베시와 비밀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뿌듯해해야 하는 건지, 섭섭해해야 하는 건지.

유리나는 뭐라고 탁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오묘한 감정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갔다. 귀족가의 문양을 그려 넣은 마차들도, 나들이옷을 곱게 차려입은 귀족들도 꽤 보였다.

‘좋은 날이네.’

유리나는 눈을 감고 감은 눈 위로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빛을 즐겼다. 레이너드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나온 거였지만, 사실 그녀 또한 그와 함께하는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정말 친한 친구와 함께 놀러 나온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 좋은 평온함.

“아가씨.”

아무리 기다려도 두 사람이 돌아오지 않아 의아해하고 있을 때쯤, 뒤에 서 있던 호위 기사가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쪽에 잠깐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유리나는 심드렁하게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귀족들이 많은 이 거리에서도 유독 잘 차려입은 한 남자가 레이너드의 팔을 잡고 뭐라고 소리 높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유리나와는 꽤 거리가 있었는데도 흥분한 그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어느 가문의 사람이지?”

남자는 레이너드의 얼굴만 한 커다란 손으로 그의 볼을 움켜잡고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하녀만 달랑 하나 데리고 나온 레이너드를 귀족이 아니라 어느 부유한 평민의 자제라고 생각한 듯싶었다.

유리나를 막 만났을 때 자유분방하던 레이너드라면 그런 그의 손을 탁 쳐 내며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악을 썼을 테지만 그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유리나는 그런 그의 태도가 그녀와 카르티아 가문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이너드의 뒤를 따라오던 베시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남자가 데려온 호위 기사가 검을 들어 그녀의 앞을 막았다. 검은 검집에서 뽑지 않은 채였지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화들짝 놀란 베시가 레이너드 옆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유리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그녀를 향해 얼른 오라는 듯 손을 휙휙 저었다.

일개 하녀가 모시는 아가씨에게 하기에는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소리였다.

유리나는 제 뒤에서 대기 중인 호위 기사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한 후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사이에도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레이너드의 눈을 뚫어질 정도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딜 감히…….’

화가 치솟아 올라 유리나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카르티아 가문의 눈 밖에 났다는 소문이 퍼져 지금은 사교계에서 자취를 감춘 로렌 부인의 가증스런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상황은 뻔했다. 저건 분명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 레이너드의 붉은 눈을 보고 괜히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만약 레이너드가 저 남자에게 먼저 무례를 저지른 상황이었다면 그가 사과하기 전에 베시가 먼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대신 잘못을 빌었을 테니까.

유리나가 코앞까지 다가가자 베시가 눈에 띄게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까지도 남자는 레이너드의 얼굴을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오히려 허리까지 숙여 가며 그를 들여다보았다.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거지? 난 어느 가문의 사람이냐고 물었는데.”

“제가 데리고 있는 아이가 무례를 저질렀다면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리도록 하지요.”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옆에 다가가 일부러 들으란 듯이 말했다. 그러니 얼른 그 손을 치우라는 의미였다.

더불어 레이너드가 무례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반대로 당신이 내게 사과를 해야 한다는 조금 더 깊은 속뜻을 담고 있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남자는 유리나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오로지 레이너드를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붉군. 붉어.”

“이게 대체 무슨…….”

“보고 있어도 믿기지가 않아. ‘베아투스’가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었는데 왜 그동안 찾지 못했던 거지? 오늘 이렇게 보지 않았으면 헛수고를 할 뻔했군.”

그의 무례를 따지려고 했던 유리나는 그의 말에서 나온 ‘베아투스’라는 단어에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걸 어떻게?’

그 단어는 그녀가 마법에 관련된 고서란 고서는 손 잡히는 대로 읽어 겨우 발견한 단어였다. 오래전에 멸망한 데니크 왕국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여신의 축복을 받은 붉은 눈을 가진 이들을 지칭하는 고대어 ‘베아투스.’

그런데 어째서 눈앞의 남자는 단순히 그 단어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베아투스’가 실존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는가.

그제야 유리나는 남자의 외모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아버지인 카르티아 후작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보통 귀족이 아닌지 관록이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모든 이의 속마음을 꿰뚫어 볼 것같이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매.

유리나를 볼 때는 표정이 한없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카르티아 후작도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저렇게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유리나가 놀란 건 그가 고위 귀족이라서가 아니었다.

‘붉은 머리카락.’

오늘따라 유독 밝은 햇빛에 빛나는 붉은 머리카락과 이곳에서도 흔치 않은 금안의 조화는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었다.

낯설면서도 낯익은 것 같은 기묘한 느낌. 무엇보다 그의 입에서 나온 ‘베아투스’라는 단어에서 유리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누군지 깨칠 수 있었다.

“데프론 후작…….”

줄곧 레이너드에게 향해 있던 그의 금빛 눈동자가 퍼뜩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낯선 곳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것까지 알아차릴 것 같은 그의 냉혹한 시선을 받으며 유리나는 손을 떨었다. 태연한 척을 하기 위해 두 손을 맞잡아 보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나를 아나?”

정답이었다. 유리나는 본능적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보폭이 작아 그와 별로 거리가 멀어지지 않았다. 남자, 데프론 후작이 드디어 레이너드의 뺨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레이너드가 목이 졸렸다가 풀려난 사람처럼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며 유리나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수도에서 후작님을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유리나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길 바라며 최대한 힘주어 대답했다. 그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턱을 문지르던 데프론 후작이 유리나의 뒤에 있던 호위 기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다 무언가 알아차린 듯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카르티아 가문의 사람이로군.”

그의 입에서 가문의 이름이 나오자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전에 황태자인 커티스를 만났을 때보다 더 긴장이 되고 도망가고 싶었다.

그게 이십여 년 인생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그의 관록 때문인 건지, 아니면 그녀를 직접적으로 죽음으로 몰고 가던 원작 속 데프론 후작에 관한 기억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장이 비틀리는 것 같은 통증에 유리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두 팔로 배를 감싸 안았다.

그가 고개를 숙여 유리나와 대충 눈높이를 맞췄다.

“그렇다면 이쪽은 카르티아 후작이 아낀다던 여식인가?”

그가 꼭 분노를 짓씹는 듯이 말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유리나는 그의 눈가가 일그러지며 파들파들 떨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왜?’

단순히 이해관계가 달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가문을 대하는 태도라고 하기에는 과한 반응이었다. 귀족은 어릴 때부터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표정 관리를 하는 법을 배운다.

이제 고작 열 살인 유리나, 귀족의 후원을 받는 평민일 뿐인 레이너드도 늘 가족 외에 사람에게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항상 웃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정치판에서 몇십 년을 지내며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이골이 났을 데프론 후작이 이렇게 제 감정을 가감 없이 토해 내다니.

“마침 내 딸도 영애와 비슷한 나이니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방금 보았던 표정은 환각이었다고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뒤쪽에 있던 마차로 시선을 주었다. 데프론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양이 새겨진 고급스러운 마차의 창밖으로 백금발의 소녀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하녀가 말리려고 손을 뻗어도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유리나와 레이너드 쪽을 주시했다.

‘리디아 데프론.’

‘카리온’이 사랑에 빠졌던 원작의 여주인공. 퍼뜩 정신이 들었다.

‘레이너드가 리디아에게 한눈에 반하면 어떡하지?’

이게 이유 없는 불안감이라는 걸 유리나도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 ‘카리온’이 리디아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녀가 그를 지극정성으로 돌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원작은 바뀌지 않았던가. 만약 레이너드가 원작처럼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그 상대는 유리나라는 게 이론적으로 옳았다.

그런데도 ‘만약’이란 가정이 유리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카리온’이 리디아를 사랑하게 된 것이 순전히 그녀가 소설 속 여주인공인 ‘리디아’이기 때문이라면? 애초부터 그는 무조건 그녀를 사랑하도록 설정이 되어 있다면?

레이너드는 리디아를 보는 순간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녀에게 반해 버릴지도 모른다.

미련을 가진 데프론 후작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레이너드를 데려가서 리디아를 소개시켜 준다면?

그래서 레이너드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버린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유리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레이너드의 앞을 막아섰다. 데프론 후작을 향한 두려움보다는 레이너드를 뺏길 수 없다는 간절함이 더 컸다.

“이 아이는 카르티아 가문에서 후원하고 있는 아이예요.”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데프론 후작이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유리나는 등 뒤로 팔을 뻗어 레이너드를 보호할 것처럼 감싸 안으며 다시 한번 또렷하게 얘기했다.

“카르티아 가문에서 후원하고 있는 아이예요.”

“그런가?”

그의 시선이 유리나의 뒤쪽에 있는 레이너드에게로 옮겨 갔다.

“카르티아는 대대로 검을 잡아 왔지만, 그와 달리 데프론은 오래전부터 마법의 길을 걷고 있지. 나 또한 선조의 명예를 물려받았고. 자네의 재능은 예사롭지 않아. 자네의 재능을 제대로 꽃피우려면 분명 카르티아보단 데프론이 나을 거야.”

“후작님!”

유리나는 불안한 마음에 다급하게 외쳤지만 데프론 후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미 다른 가문의 후원을 받고 있는 이를 데려가는 것은 귀족 사이에서 질타를 받고 있는 일이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후작이 그 모든 오명을 무릅쓰고서 레이너드를 데려가려 한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그를 눈독 들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떤가?”

유리나와 달리 그의 시선을 묵묵히 받던 레이너드가 유리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그럴싸한 귀족의 예법으로 후작에게 허리를 숙였다.

“귀한 분을 몰라 봬서 인사가 늦었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후작님. 이미 들으셨다시피 저는 카르티아 가문의 은혜를 받고 있는 레이너드라고 합니다. 제 능력을 높이 사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지금 제 처지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유리나의 염려와 달리 그는 아주 반듯한 표정과 말투로 후작의 제안을 은근히 거절했다. 데프론 후작이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레이너드?”

“그렇습니다.”

“레이너드. 그래, 레이너드라…….”

후작이 레이너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턱을 살살 문질렀다. 레이너드를 위아래로 훑는 후작의 시선은 다소 노골적이었지만 레이너드는 불쾌하단 기색 하나 없이 그의 시선을 묵묵히 받았다.

“참 재미있는 이름이군. 고대어로 ‘희망’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이지. 알고 있었나?”

“그런 과분한 이름인 줄은 몰랐습니다.”

“자네 부모가 이름의 뜻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나? 고대어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면 마법사였을 것 같은데.”

“제 부모님은 마법사가 아니셨습니다. 제 이름 또한 그분들이 지어 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지어 준 이름이지?”

레이너드가 대답 대신 유리나를 바라보았다. 데프론 후작의 날카로운 시선 또한 그녀를 향했다.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레이너드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불쾌해.’

몇 번을 마주해도 데프론 후작의 시선은 팔에 벌레가 기어오르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었다. 꼭 발가벗겨진 것 같은 기분이다.

“영애는 고대어를 배웠나? 마법에 소질이 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는데.”

“그냥 재미로 몇몇 단어만 배웠을 뿐입니다.”

“그런가?”

그의 시선이 다시 레이너드에게 옮겨 갔다. 후작은 레이너드의 붉은 눈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영애는 정말 훌륭한 보석을 얻었군. 정말 재밌게 됐어. 그대가 손에 쥔 인재가 어떤 인재인지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레이너드를 더 설득하기 위해 노력할 거란 예상과 달리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분에 넘치는 행운일지도 모르지.”

마지막으로 그가 중얼거린 소리가 바람에 실려 아주 작게 들렸다. 정말로 그가 내뱉은 말인지 아니면 유리나가 환청을 들은 건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유리나는 두 주먹을 꽉 쥐고 멀어지는 후작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데프론 후작과 리디아는 떠나갔는데 왠지 모르게 죽음의 그림자가 여전히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 * *

데프론 후작이 떠날 때까지 입술을 파르르 떨던 유리나는 그가 사라지자마자 구석으로 달려가 속에 있는 것을 게워 냈다. 평소 식사량이 많지 않은 데다가 아직 저녁 식사 전이라 게워 낼 것이 없을 텐데도 벽을 붙잡고 계속해서 헛구역질을 해 댔다.

베시가 서둘러 달려갔지만 유리나는 그녀가 채 다가가기도 전에 숨을 헐떡이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오지 마.”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레이너드는 지난 석 달 동안 그녀와 생활하면서 이렇게 신경이 곤두선 유리나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보다 두 살이나 어린 그녀는 이상하게도 늘 그보다 어른인 것처럼 행동했다.

눈높이가 비슷한데도 늘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고,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차분함을 잃지 않고 조곤조곤 말했다. 고용인들에게 주의를 줄 때도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았다.

그래서 레이너드는 종종 그녀가 자신보다 어리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는 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그런 그녀의 이성을 무너뜨린 걸까.

“아무도 따라오지 마.”

유리나가 비틀거리며 조금 더 골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명령 복종과 신변 보호라는 이해관계가 충돌하자 하녀들과 호위 기사들은 곧바로 그녀를 따라가지 못했다.

‘한심하기는.’

레이너드는 그들을 아주 잠깐 노려보다가 유리나가 향한 방향으로 뛰어갔다.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유리나가 속도를 높였다. 위태로운 걸음새를 바라보던 레이너드는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더 이상 안 갈게. 그러니까 너도 좀 멈춰. 그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제야 유리나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귀족가의 영애답지 않게 돌담에 등을 기댄 채로 주저앉았다.

레이너드는 제 무릎에 고개를 파묻는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기척을 눈치챘을 텐데도 유리나는 도망가거나 뭐라고 하지 않았다.

‘나도 이랬을까.’

레이너드는 그녀의 방어적인 모습에서 제 모습을 발견했다. 처음 카르티아 저택으로 왔을 때 모든 이를 경계하던 모습을. 그때 유일하게 유리나가 까칠한 그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주었다.

그러니 이번엔 그가 그녀에게 다가갈 차례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제 겉옷 왼쪽 가슴께에 꽂혀 있는 손수건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왜 귀족들이 이런 걸 장식이라고 달고 다니는 줄 몰랐는데.’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유리나.”

재촉에도 그녀는 꼼짝하지 않았다. 레이너드는 파르르 떨고 있는 그녀의 손에 강제적으로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맞닿은 손이 차가웠다.

그 손에 입김이라도 불어 주고 싶었지만 미처 행동에 옮기기 전에 유리나가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레이너드는 손수건을 쥔 채 가만히 있는 그녀를 보며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고 하지?’

무슨 말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유리나가 너무나 위태로워 보여 농담이든 위로든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지금껏 누군가를 달래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제 어깨를 갖다 댔다. 작은 떨림이 어깨에서 어깨로 전해졌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유리나가 안정을 찾기를 기다렸다.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유리나가 문득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얀 손 안에서 그녀의 눈을 닮은 파란색 손수건이 잔뜩 구겨졌다.

“억울해.”

한참의 기다림 끝에 유리나가 혼잣말인지 그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대체 뭐가 그리도 억울한지 되묻고 싶었지만 레이너드는 입을 꾹 다물고 그녀의 뒷말을 기다렸다. 왠지 지금은 차분히 그녀를 기다려 줘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착하게만 산 건 아니야. 나도 내 성격이 그렇게 좋다고 생각 안 해. 나는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소중했고 그래서 이기적으로 행동할 때도 많았어. 그렇지만 그건 다들 그런 거잖아? 이타적으로만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그건 그래. 네 말이 맞아. 세상에 자기만 아는 사람이 많지. 그렇지만 유리나, 넌 착해. 네 옆에 있는 내가 바로 그 증거잖아.

그는 제 생각을 그녀가 알아주길 바라며 속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누구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았어.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았단 말이야. 따지고 보면 이곳도 그렇고 그곳도 그렇고 나보다 훨씬 악독한 사람들 많잖아. 그런데 왜 나야. 왜 나만 이런 꼴을 당해야 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떨리는 목소리에 울음기가 배어들었다. 레이너드는 그녀가 이토록 불안해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대체 유리나는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대체 아까 그 남자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멍한 머리를 열심히 굴려 보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싫어. 난 죽기 싫어. 살고 싶어. 악착같이 살 거야. 내가 지금까지 왜 그렇게 애를 썼는데.”

특히 그녀의 입에서 죽음이 거론되는 순간엔 머릿속이 더욱 엉망이 되었다. 그는 그녀의 두려움을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고아원에서 먹을 것을 걱정하며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었던 ‘톰’과 달리 유리나는 배를 곯을 일도, 추위에 덜덜 떨 일도 없었다.

가벼운 감기라도 걸렸다 하면 제국에서 제일가는 의원이 찾아와 그녀를 돌보기까지 했다. 그깟 감기가 대체 뭐라고.

오늘은 또 어떤가. 그녀를 끔찍이 아끼는 그녀의 아버지, 카르티아 후작은 위험할 것 하나 없는 번화가에 그녀를 외출시키면서도 혹시라도 그녀의 손끝 하나 상할까 두려워 호위 기사와 하녀들을 줄줄이 딸려 보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죽음은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하나, 적어도 이런 사랑 속에서 자라 온 그녀는 죽음을 이렇게까지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왜 지금 그녀는 누가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대기라도 한 것처럼 떨고 있는 걸까.

‘그때도 이상했어.’

그는 고아원에서 유리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이야기를 상기했다.

―오늘 일을 꼭 기억해. 그리고 훗날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넌 날 꼭 구해야 해. 오늘 내가 널 구한 것처럼.

잘 생각해 보면 이상한 구석이 있는 말이었다.

데이브에게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재능을 알아본 이유가 언젠가 들었던 붉은 눈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우연히 만난 그를 보고 그 이야기가 떠올라 어린 치기로 그를 후원해 주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레이너드가 보기에 당시 그녀는 꼭 그를 만나기 위해 기다려 온 것처럼 행동했다. 망설임 없이 계약을 운운해 가며 손을 내밀던 모습 하며, 자기를 지켜 주라는 조건 하며.

그녀의 말들은 즉흥적으로 건넸다고 하기엔 너무나 체계적이었다. 꼭 누가 그녀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알고 대비라도 하는 것처럼.

대체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카르티아 후작이 아끼는 고명딸을 누가 죽이려 한다는 걸까. 그런데 왜 카르티아 후작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걸까. 왜 유리나 카르티아는 그 공포 속에서 혼자 떨고 있나.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은 그의 어설픈 머리로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그들만의 세계.

그러나 딱 한 가지.

“유리나.”

그녀가 이렇게 불안해하고 있으니 제 마음도 위태롭게 흔들린다는 것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유리나는 이렇게 약한 모습보다는 당당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더 아름다운 소녀였다. 레이너드는 그녀의 미소를 되찾아 주고 싶었다.

“너 안 죽어.”

그 말을 건네면 유리나가 평소처럼 그를 내려다보며 ‘그래, 안 죽어. 난 카르티아가 사람이니까. 누가 감히 날 죽일 마음을 품을 수 있겠어?’라고 당당하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언제나 빛이 나던 그 푸른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위로도 할 줄 알다니, 많이 컸네.’라고 말하며 그를 놀리듯 웃을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그녀는 뾰족하게 날이 선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잠시 말을 고르던 레이너드는 오늘따라 유독 작아 보이는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 주었다.

“알 수 있어.”

“아니, 몰라. 넌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모르면서 듣기만 좋은 위로 건네지 마.”

“진짜야. 너 안 죽는다니까. 설마 우리가 계약한 거 그새 까먹었어? 네가 날 후원해 주는 대가로 내가 널 지켜 주기로 했잖아.”

유리나가 살짝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레이너드가 한쪽 입술을 비쭉 들어 올렸다.

“스승님이 그러는데 나 마법 실력이 엄청 빨리 늘고 있다고 했어. 뭐, 당연하지. 나같이 능력 좋은 애가 노력도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실력이 안 느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니겠어?”

그는 그녀의 표정을 힐끔 살피다 목소리를 줄였다.

“그리고 이건 스승님께는 비밀인데, 나 조만간 스승님을 뛰어넘는 마법사가 될 것 같아.”

그제야 표정이 없던 유리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평정을 되찾았는지 그녀가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뭐야, 그게. 너 아직 한참 멀었어.”

“너야말로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해? 적어도 마법만은 내가 너보다 훨씬 잘 알거든? 네가 원소나 마나에 대해서 알아? 넌 마법으로 네가 좋아하는 차를 데우는 것도 못하잖아. 난 할 수 있는데.”

“…….”

“그러니까 유리나. 조금만 기다려. 나, 지금보다 훨씬 더 노력해서 얼른 스승님을 뛰어넘는 마법사가 될 거야.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만 믿어.”

레이너드는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내가 레이너드의 이름으로 약속할게. 앞으로 이 세상에서 네게 해를 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자신의 말투를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유리나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가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꾹 눌렀다.

“이름 걸고 약속하는 건 나 정도 되니까 할 수 있는 거야.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냐.”

레이너드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거드름을 피웠다.

“네 말대로라면 난 앞으로 위대한 마법사가 될 텐데 뭐 어때.”

“그렇다고 해도 안 돼. 그 이름은 내가 지어 준 건데 누구 마음대로 이름을 걸어? 내 허락은 받았어?”

“아, 정말. 이 상황에서 눈치도 없이 그렇게 꼬치꼬치 따져야겠어?”

유리나의 웃음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못마땅하다는 레이너드의 시선에도 한참을 웃던 그녀가 곧 표정을 갈무리하고 그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내가 지어 준 소중한 이름 함부로 걸지 말고 손가락이나 걸어.”

그 행동의 의미를 알 수가 없어 그가 바라보기만 하자 그녀가 제 손을 그의 코앞에서 달랑달랑 흔들었다.

“손가락 안 걸고 뭐 해?”

“뭘 걸어?”

“내 새끼손가락에 네 새끼손가락을 걸라고.”

그래도 그가 이해를 하지 못한 기색을 내비치자 그녀는 직접 그의 오른손을 끌어와 그의 새끼손가락을 제 새끼손가락으로 감싸 안았다.

“자, 이제 약속한 거야.”

티 없이 맑고 푸른 눈이 그를 향했다. 감정을 못 이기고 눈물을 조금 흘렸는지 눈가가 발갛고 촉촉하다. 장난 많은 요정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레이너드는 그녀를 넋 놓고 바라보다가 여전히 손가락을 걸고 있는 유리나의 손을 제 쪽으로 당겼다.

“그래, 약속한 거야.”

그러고는 예법 시간에 배운 것처럼 그녀의 하얀 손등 위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손등 위에 하는 입맞춤의 의미는 존경과 헌신.

“유리나, 넌 내가 지켜 줄게.”

여전히 붉은 시선은 그녀의 푸른 눈을 향한 채였다.

빛깔만큼이나 뜨거운 시선을 묵묵히 받던 유리나가 그의 말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눈이 사라질 정도로 환히 웃었다. 가식이라고는 전혀 담기지 않은 미소였다.

레이너드는 입을 살짝 벌린 채 그녀를 보다가 예쁘게 휘어지는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훔쳐 냈다.

“착하네.”

고양이의 등을 매만지는 것처럼 유리나가 그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자신보다 어린 주제에 애 취급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그보다 먼저 그의 두 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덩달아 빨개졌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그녀의 시선을 재빨리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돌아가자.”

“응.”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부축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멀찍이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 기사가 다가왔다.

유리나는 두 남자를 모두 거절하고 혼자 마차로 걸어가려고 했지만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몇 걸음 떼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말았다. 다행히 레이너드가 재빨리 팔을 잡아 준 덕분에 차가운 바닥을 뒹구는 일은 없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가씨.”

호위 기사가 그녀 앞에서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뒤 그녀를 안아 올렸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기사의 넓은 품에 조용히 머리를 기댔다. 기사는 흔들림 없이 그녀를 데리고 마차로 걸어갔다.

레이너드는 발이 땅에 붙은 사람처럼 가만히 서서 멍하니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빨리 크고 싶어.’

그가 그녀보다 키가 많이 컸더라면 호위 기사 대신 그녀를 안아 줄 수 있었을 텐데. 진득한 아쉬움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만약 지금보다 훌쩍 자란다면 그녀도 자신을 완전히 의지해 줄 수 있을까.

어느새 서쪽 하늘에서 저물어 가는 햇빛을 받으며 그는 아무도 듣지 못할 생일 소원을 홀로 빌었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요.”

하루라도 빨리, 지키고자 하는 이를 무사히 지킬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 * *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나는 호흡을 한 번 깊이 들이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류 처리를 하고 있던 카르티아 후작이 그녀를 발견하곤 반색하며 일어났다.

“그래, 유리나. 어쩐 일이냐?”

“제가 꼭 일이 있어야만 아버지를 보러 오나요?”

“하하, 그건 그렇지.”

유리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그래, 얘기 들었다. 새벽부터 저택이 떠들썩하던데 오늘 하루는 즐겁게 보냈느냐?”

“네. 다들 적극적으로 준비를 해 줘서 즐겁게 파티를 즐겼어요. 거리 구경도 재밌게 했고요.”

유리나는 시끌벅적했던 생일 파티를 떠올리며 웃었다. 번화가 나들이도 분명 즐거웠다. 데프론 후작을 만나기 전까지.

저도 모르게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유리나는 차가워진 손을 꼼지락거리다 물었다.

“아버지, 카르티아 가문과 데프론 가문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고 들었어요.”

피곤한지 손끝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던 카르티아 후작이 자세를 바로 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제 말이 맞나요?”

유리나의 뜻이 확고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고야 할 수 없지. 카르티아와 데프론은 늘 정치적인 노선을 달리하고 있으니까.”

“정말 그것뿐인가요?”

“무슨 뜻이냐?”

“뜻을 달리하는 가문이 사이가 좋지 않은 건 늘 있는 일이잖아요. 그 외에 두 가문이 사이가 유독 안 좋은 이유가 있냐는 뜻이에요.”

“그럴 일이 있을 리가 있나. 그런 거 없다. 그리고 네가 생각한 것만큼 사이가 영 나쁜 것만은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후작은 데프론 후작과는 달리 정말로 별 감정이 없어 보였다. 갑작스러운 이름에 놀란 표정은 지었지만, 그뿐이었다. 신경질적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 깔끔한 반응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연기일까?’

유리나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이나 행동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기보다는 오후에 보았던 데프론 후작의 표정이 너무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노선을 달리하는 정적을 본다고 하기엔 과하게 경계하고 날을 세운 표정.

그의 표정이 지금 눈앞에 있는 카르티아 후작의 표정과는 확연히 달라 대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데프론 가문에서 카르티아 가문에 일방적으로 앙심을 품을 일이라도 있었나?’

그렇다고 해도 그 사실을 카르티아 후작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정말인가요?”

“내가 왜 네게 거짓말을 하겠니.”

“정말로, 진짜로 아무 일도 없나요?”

의심 섞인 목소리에 후작이 미소를 지우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심중을 파악하려는지 평소보다 진지한 눈이었다. 유리나는 애써 그를 향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제 딴에는 나름 표정 관리를 한다고 했는데 노련한 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나 보다.

“오늘 나가서 그를 만난 것이냐?”

속이 뻔히 보이는 질문이긴 했지만 이렇게 금방 간파당할 줄이야. 유리나는 시치미를 떼 볼까 하다가 소용없을 거라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자가 네게 무슨 짓을 했어?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야?”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 그제야 노기가 서렸다. 그러나 그건 소중한 딸을 건드린 이에게 화를 내는 아버지의 표정에 가까웠다. 유리나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그저 그분이 레이의 후원을 자처하시길래요. 카르티아 가문이 후원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려도 신경 쓰지 않고 레이에게 데프론가로 오라고 하셔서……. 혹시 카르티아 가문이라고 일부러 더 그런 건 아닌가 싶어서요.”

“신경 쓰지 말거라. 너는 그런 거 생각할 필요 없단다.”

후작이 조심스럽게 유리나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좋은 날이었을 텐데 많이 놀랐겠구나. 괜찮다, 괜찮아. 이 아비가 있으니까.”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어요. 내가 어떻게…….

속으로 되뇌던 그녀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자상한 손길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기사인 후작의 품은 참 넓고 듬직해서 그 어떤 모진 풍파도 다 막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리나는 후작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에게 매달렸다.

정말 열 살 아이가 된 것처럼 모든 문제는 그에게 맡겨 버리고 지금은 그저 그의 품에서 어리광을 부리며 쉬고 싶었다.

* * *

레이너드는 두 손으로 손바닥만 한 선물 상자를 들고 유리나의 방문 앞에서 한참이나 서성였다.

‘이걸 줘야 하는데.’

그는 손안의 상자를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까 번화가에 나갔을 때 베시와 단둘이 샀던 유리나를 위한 선물이었다.

이보다 더 값진 보석들이 많은 유리나의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석 달 동안 늘 자신에게 베풀기만 했던 그녀에게 무언가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베시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후작님께서 생일 선물로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라고 하셨는데, 혹시 그걸로 유리나의 선물을 사 줘도 될까요?

뜻밖의 말에 베시는 놀란 것 같았지만 이내 가능하다며 레이너드를 유리나 또래의 귀족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가게로 이끌었다.

원래는 가게를 나오자마자 바로 선물을 해 줄 생각이었는데, 그 가게에서 그 이상한 귀족을 만나는 바람에 적절한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 후에는 유리나의 기분이 어쩐지 우울해 보여 차마 선물을 건넬 수가 없었다.

‘그래도 주긴 줘야 하는데.’

그는 괜스레 벨벳으로 된 상자 겉면을 문지르다가 오른쪽 가슴에 달린 브로치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촛불에도 반짝반짝 예쁘게 반짝이는 루비는 새어머니가 아끼던 싸구려 보석하고는 확연히 달랐다. 보석의 가치를 모르는 그의 눈에도 참 예쁘게 보였다.

이걸 볼 때마다 자꾸 의심이 피어올랐다.

‘유리나의 눈엔 내 눈이 진짜로 이렇게 예쁘게 보이나?’

그녀의 말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예쁘다는 말을 해 주었을 때 유리나의 얼굴엔 거짓이라곤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으니까. 다만 그가 믿지 못한 건 그 자신이었다.

유리나가 예쁘다고 몇 번이나 말을 해 줘도 그는 제 눈이 예쁘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까 거울을 보며 몇 번이나 제 눈과 루비 브로치를 비교해 보아도 붉은색이라는 것 빼고는 닮은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으음.”

눈까지 찌푸려 가며 브로치를 내려다보던 레이너드는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열린 틈 사이로 시선을 마주한 유리나가 놀란 기색도 없이 웃었다. 고양이처럼 새초롬해 보이는 눈이 예쁘게 휘어지는 모습을 레이너드는 넋 놓고 바라보았다.

“어쩐지 밖에 누가 있는 것 같았어.”

잠옷으로 갈아입은 유리나는 우울해하던 기색 하나 없이 그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방이라고는 해도 침실과 작은 응접실 겸 활동 공간으로 쓰는 방이 분리되어 있어서 두 사람은 응접실에 마주 보고 앉았다.

부름을 받은 베시가 꿀을 넣은 따뜻한 우유를 두 잔 가져왔다.

“이 야심한 시간에 무슨 일이야?”

우유엔 손도 대지 않고 유리나가 물었다. 레이너드는 검붉은 벨벳으로 된 상자를 등 뒤에 감추고 괜히 우유만 홀짝였다. 대답 없는 그를 보는 유리나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나처럼 예쁜 애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유리나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팔을 엑스 자로 꺾어 제 몸을 가렸다. 한때 레이너드가 종종 그녀를 비롯한 저택의 다른 이들에게 하던 말과 행동이었다.

직접 저 말을 할 때는 몰랐는데, 역으로 그 소리를 들으니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도 정말 못된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처럼 죄책감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나처럼 예쁜 애’라는 부분은 당연히 해당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짧은 열두 살, 아니 열세 살 인생에서 본 사람 중 가장 예뻤다.

처음 보자마자 예쁘다고 느꼈던 눈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를 봐도 예뻤고, 심지어 거칠었던 고아원 아이들의 손과 달리 하얗고 매끈한 손도,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가지런한 치아도 예뻤다.

그렇지만 지금껏 그래 왔듯 이런저런 이유로 이 사실은 그녀에게, 아니 모두에게 비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진짜 무슨 일로 온 거야?”

“꼭 할 말이 있어야만 올 수 있는 거야?”

괜히 목소리가 퉁명하게 나갔다. 말하고 난 다음에야 아차 싶어서 레이너드는 유리나가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리고 제 입술을 툭 때렸다. 이 바보야.

“그건 아니지만 꼭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너 지금 굉장히 수상해 보여.”

“그게 그러니까…….”

레이너드는 눈을 또르륵 굴리며 등 뒤에 숨긴 상자를 만지작거리다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내 이름 뜻이 정말 ‘희망’이야?”

어? 이걸 물어보려고 했던 게 아닌데. 생각도 없이 튀어 나간 말에 그는 본인이 말하고도 놀라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참 재미있는 이름이군. 고대어로 ‘희망’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이지. 알고 있었나?

흘려들은 줄 알았는데 아까 그 이상한 귀족이 했던 말이 머릿속 어딘가에 돌멩이처럼 박혀 있었나 보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그 뜻을 제대로 곱씹어 보지 못했지만 뒤늦게 생각해 보니 그냥 지나칠 말이 아니었다.

희망, 분명 희망이랬다.

어릴 적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인 ‘톰’은 동네에서 가장 흔하디흔한 이름이었다. 번화가로 나가 ‘톰!’이라고 소리치면 꼬마 애들 두세 명은 족히 뒤를 돌아볼 만한 그런 이름.

아버지는 이름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레이너드는 그가 제 이름을 깊게 생각해 보지 않고 대충 지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이름에 별다른 애정도 없었다.

가끔은 애정이라고는 하나 담기지 않은 그 이름이 싫을 때도 있었다.

12년을 쓰던 ‘톰’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유리나가 지어 준 ‘레이너드’라는 이름을 망설임 없이 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레이너드’라는 이름은 ‘톰’보다는 신경을 쓴 것 같았으니까. 우중충하기만 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이 있기도 했고.

‘그런데 희망이라니.’

레이너드는 긴장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숨도 쉬지 않고 유리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1초, 2초가 1분, 2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숨이 막히는 건지. 스스로가 웃겼지만 생각과는 반대로 손바닥에서는 긴장감 때문에 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왔다.

고민을 하는 것처럼 팔짱을 끼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유리나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레이너드’는 고대어로 ‘희망’이라는 단어야.”

레이너드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되물었다.

“왜?”

“왜냐니?”

“왜…… 그런 이름을 지어 준 거야?”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그거야…….”

그가 지금껏 듣던 소리는 온통 부정적인 것뿐이었다. 괴물, 악마, 여신의 미움을 받은 아이 등. 누군가의 희망이라는 말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유리나의 속내가 궁금했다.

그녀는 어떻게 처음으로 만난 그에게 ‘희망’이란 이름을 붙여 줄 수 있었을까.

아니, 어쩌면 확인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자신이 희망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 특별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확답받고 싶었다.

“네가 내 희망이니까. 너도 약속했잖아. 날 지켜 주겠다고.”

그녀의 입에서 듣고 싶었던 말이 나오는 순간, 레이너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는 화끈거리는 뺨을 식히기 위해 두 손으로 팔랑팔랑 손부채를 부쳤다.

갑자기 목 안쪽도 타들어 가는 것 같아서 잔을 들어 남아 있던 우유를 순식간에 꼴깍꼴깍 마셨다. 유리나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우유를 다 비우고도 본론을 꺼내지 못하던 레이너드는 자야 한다는 유리나의 재촉에 헛기침을 하며 등 뒤에 숨긴 상자를 꺼냈다.

“그게 뭐야?”

“그러니까…….”

“그거 혹시 아까 베시랑 둘이 가서 산 거야?”

아, 정말. 눈치는 왜 이렇게 빠른 거야. 그는 괜히 머리를 헝클이다가 재빨리 그녀 옆으로 다가앉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선물을 주려고 오긴 왔는데 막상 주려고 하니 왠지 모르게 긴장이 돼서 목이 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유를 아껴 마시는 건데.’

그는 혀로 입술을 축이다가 한숨을 한 번 쉬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엔 그와 베시가 고심하며 고른 루비 팔찌가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사 준 루비 브로치와 세트라고 우길 수 있는 그런 팔찌.

“응? 웬 팔찌야?”

“그게, 그러니까…….”

갸웃거리는 유리나의 얼굴을 보자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순간적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그를 보다가 유리나가 다시 물었다.

“설마 나한테 주는 거야?”

그제야 그는 겨우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응. 항상 네가 나한테 주기만 했잖아. 오늘도 나한테 선물을 사 주기만 하고…….”

“그거야 생일이니까…….”

“아무튼, 주고 싶었어.”

레이너드는 유리나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그러고는 그녀가 망설이다가 천천히 내민 하얀 팔목에 조심스러운 손길로 팔찌를 채워 주었다.

유리나가 손을 머리 위쪽으로 들어 올리며 천천히 팔찌를 훑었다.

레이너드의 눈에는 제 붉은 눈과 루비 브로치보다는 유리나의 흰 손목과 붉은 루비가 더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였다. 흰색과 빨간색의 조합이 참 예뻤다.

촛불 불빛에 이리저리 팔찌를 비춰 보던 유리나가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웃었다.

“고마워, 레이. 예쁘다.”

“아냐. 뭘 이런 걸 가지고.”

레이너드는 왠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푸른 핏줄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고 하얀 손목을 내려다보는데 이상하게도 자꾸 목이 뜨끈한 것 같고 간지러웠다.

유리나의 손과 맞닿았던 손가락도 잘 구운 알 감자를 잡은 것처럼 뜨거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녀의 손은 뜨겁기보다는 조금 서늘했었는데.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유리나는 그의 손에 잡힌 제 손목과 팔찌를 바라보느라 입을 다물었고, 레이너드는 울렁거리는 배 속을 진정시키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나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잠시간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유리나가 입을 열었다.

“내가 사 준 브로치도 부담스러워 하던 애가 어떻게 이걸 나에게 사 줄 생각을 했어?”

그녀는 진심으로 의아했다. 레이너드는 카르티아의 후원을 받고 있으니 매달 일정량 이상의 용돈을 받고 있었으나 아직 이 고급 팔찌를 선뜻 살 만한 돈이 모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용돈이 아니더라도 그가 원한다면 이 정도는 카르티아 가문에서 그를 위해 구매해 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레이너드는 아직도 카르티아 가문의 과한 호의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런데 어떻게 선뜻 카르티아 가문의 재력으로 그녀의 선물을 사고 싶다고 베시에게 말한 걸까?

“후작님께서 생일이니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하라고 하셨어.”

“생일 선물? 네 생일 선물로 이걸 사고 싶다고 말한 거야?”

레이너드는 얼떨떨해하는 유리나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레이, 선물은 고맙긴 하지만 생일 선물은 네가 원하는 걸 사야지.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인데.”

그는 그 말에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이게 내가 원하는 거야.”

유리나가 기뻐하는 것, 그래서 그와 마주 보며 웃어 주는 것. 그게 그가 이 기쁜 생일날 가장 보고 싶은 것이다.

유리나가 그의 대답에 잠시 입을 다물고 손끝으로 루비 팔찌를 만지작거리더니 그가 원하던 예쁜 미소를 보여 주었다.

“다시 한번 고마워, 레이. 정말 예쁘다. 이것도 네 눈처럼 예뻐.”

이상했다. 늘 보던 웃음인데 오늘따라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콩닥콩닥 뛰었다.

이상하다, 이상해. 그녀의 웃음에 부끄러운 적은 있어도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지는 않았는데.

처음 느끼는 생소한 감정이 당황스러워서 레이너드는 서둘러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콩, 콩, 콩, 콩, 콩.

조막만 한 심장이 눈치도 없이 그의 손을 마구 때렸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참아 보았다.

쿵, 쿵, 쿵, 쿵, 쿵.

심장이 조금 더 빠르고 강하게 손을 때렸다. 레이너드는 고개를 내려 보이지도 않는 심장을 노려보았다. 이 요망한 것.

“레이?”

유리나가 의아하단 얼굴로 물었지만 더 이상 그녀의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속사정을 모르는 그녀의 말간 눈동자가 부끄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쥐구멍에라도 숨어들어 가 그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그녀와 한 공간에 있기 부담스러웠다.

‘그렇지만…….’

모순적이게도 동시에 다른 충동이 찾아왔다.

유리나의 눈을 계속 보고 싶었다. 얼른 자러 가야 하는데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다.

이렇게 보드라운 손을 잡고, 지금처럼 매일같이 수업을 듣고 춤 연습도 하고, 농담도 하면서 지내고 싶다. 계속해서 이렇게 그녀 옆에 있고 싶었다.

몇 달 뒤면 그녀와 데이브와 함께 열심히 입학 준비를 하던 아카데미로 떠나야 하는데 갑자기 떠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넘게 같이 한방에서 살을 맞대고 지낸 고아원 아이들과도 미련 없이 헤어졌는데 이제 고작 석 달 남짓 함께한 유리나와의 이별이 두려웠다.

아카데미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사귈 수 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 속에 유리나가 없는데. 그를 보며 웃어 주고 그의 옆에서 같이 글씨 연습을 해 주던 그녀는 이곳에 남을 텐데.

“유리나.”

나, 아카데미 가기 싫어. 그냥 이대로 너와 여기서 있으면 안 될까? 여기서 더 열심히 하면 되잖아. 스승님께도 마법 더 열심히 배울게. 네 옆에서 지금부터 널 지켜 주면서 지내면 되잖아.

레이너드는 물끄러미 저를 보는 그 푸른 눈을 보며 목 안에서 올라오는 간절한 소망을 다시 목 속으로 꿀꺽 삼켰다.

* * *

책에서 읽었던 것처럼 그해 겨울, 그 어느 때보다 독한 한파가 밀려왔다. 이곳에서 처음 보내는 겨울이지만 유리나는 이번 겨울이 역사상 손꼽힐 정도로 춥다는 말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온도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기구가 없기 때문에 절대적인 비교는 할 수는 없지만 체감 온도만 따지면 원래 지내던 한국보다 훨씬 추운 느낌이었다. 그나마 카르티아 저택은 예산 걱정 없이 장작을 충분히 때는 데도 그랬다.

‘너무 추워.’

그녀는 갑자기 밀려오는 오한에 몸을 떨며 두툼한 숄을 어깨에 둘렀다. 몸을 덥히기 위해 아까 베시가 갖다준 차를 한 모금 마셨는데 그새 미지근해져서 별 효과는 없었다. 오히려 또다시 몸이 으슬으슬해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추워?”

데이브가 준 과제를 하던 레이너드가 벽난로 앞에서 덜덜 떨고 있는 유리나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유리나는 실내복만 입고도 멀쩡한 그가 신기했다. 반대로 그는 유리나를 보며 ‘너무 곱게 자라서 이 정도 추위에도 비실거린다’고 평가했다.

‘그건 어느 정도 맞는 소리긴 하지.’

감기를 달고 살 것 같은 왜소한 체격과 달리 레이너드는 의외로 추위를 타지 않았다. 아마 땔감이 부족한 탓에 매년 매서운 추위 속에서 자라서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한국에서 늘 전기장판을 끼고 살았던 유리나는 한 몸이나 다름없었던 전기장판이 사라지자 추위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빙의한 유리나의 몸 또한 늘 지극정성으로 보살핌을 받았을 테니 체력이 많이 약했다.

“응, 추워.”

몸을 웅크리며 겨우 웅얼거린 유리나를 보며 레이너드가 혀를 쯧, 찼다. 그는 과제를 하던 이상한 마법 도구를 내려놓고 그녀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너같이 추위를 잘 타는 애는 처음 봤어. 내가 살던 곳에선 애들이 너보다도 얇은 옷을 입고도 밖에서 뛰어놀았는데.”

그가 미지근하게 식은 찻주전자를 손바닥으로 살살 문질렀다. 곧 막 차를 끓인 것처럼 주전자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유리나는 그가 따라 주는 따끈한 차를 조심스레 마셨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뜨끈한 느낌에 등이 후끈해졌다.

“고마워.”

“뭘 이 정도 가지고.”

레이너드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자칫하면 거만하게 보일 행동이었는데도 그에 걸맞은 실력이 있으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유리나는 양손으로 잔을 움켜쥐며 다시 과제를 하기 시작한 레이너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는 그의 출신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영락없이 귀족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귀티가 났다. 글씨를 끼적이는 손놀림에도, 이마에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손동작에도 품위가 깃들어 있었다.

각지에서 온 유학생을 위해 아카데미에선 제국 공통어로 수업이 진행되어 왕국어를 능숙하게 할 필요는 없지만, 왕국에서의 생활이 불편하지 않도록 어느 정도 왕국어도 익힌 상태였다. 데이브의 말에 따르면 마법 기초 이론도 다 배웠다고 했다.

그는 벌써 아카데미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이제 아카데미에서 입학 허가장이 오는 것만 남았다.

유리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곧 첫눈이 올 것처럼 하늘이 희뿌옜다.

완연한 겨울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레이너드가 곧 왕국으로 떠날 때가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토록 바라던 일인데 속이 얹힌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레이가 아카데미로 떠나면 허전할 것 같아.’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 * *

첫눈이 내리던 겨울의 어느 날.

문양도 없는 마차 하나가 수도 중심에 있는 카르티아의 저택을 향해 힘차게 달려왔다. 눈이 쌓여 바닥이 미끄러울 텐데도 마차는 속도를 줄이지도, 바퀴가 미끄러져서 휘청거리지도 않았다.

레이너드와 함께 창문에 매달려 눈을 구경하던 유리나는 수상한 느낌이 물씬 나는 마차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 아침부터 웬 손님?’

그러다 이 시기에 올 만한 손님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리나?”

그녀는 의아하단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레이너드의 손을 이끌고 1층 홀로 나왔다. 예상이 맞았는지, 카르티아 후작과 데이브가 그녀보다 먼저 나와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방문객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중 세 명은 호위 기사였는지 옆구리에 칼을 차고 있었고, 나머지 두 명은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다섯 사람이 가장 먼저 카르티아 후작에게 인사를 마치자마자 데이브가 환하게 웃으며 손님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어서 오게나.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건가?”

표정과 말투를 보아하니 하루 이틀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남자 또한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자네가 아카데미에서 도망간 지 벌써 10년이 지났으니 10년 만이지.”

“그 후에도 한 번 만나지 않았나?”

“아, 그랬지. 그럼 한 5년 만에 만나는 건가. 아무튼, 데이브. 아카데미에서 벗어나 기어코 제국으로 돌아가더니 아주 신수가 폈군, 그래.”

“하하, 그러는 자네 얼굴은 20년은 늙은 것 같네. 교수 생활이 힘들긴 힘든가 봐.”

데이브의 또래로 추정되는 남자는 먼 길을 오느라 피곤에 찌들었는지 얼굴색이 칙칙하긴 했지만 외관은 영락없이 삼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제 나이 대의 모습으로 보이니 분명 농담으로 한 소리였겠지만, 이십 대로 보이는 데이브의 입에서 나오니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유리나가 느낀 것을 남자도 느꼈는지, 그는 대번에 얼굴을 찌푸리며 데이브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다.

“이 친구가. 자네가 그런 소리를 하니 농담이 농담 같지가 않아.”

“저런, 어쩌나.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는데. 이제라도 아카데미에서 나오는 게 어떤가? 내가 잘 말해 두면 카르티아 후작님께서도 자네를 받아 주실 것 같은데.”

“누누이 말하지만 내 목표는 후학 양성이라네. 자네처럼 죄다 학업에서 손을 떼 버리면 학생들은 누가 가르치겠나. 그래서 말인데 소문의 그 아이는 어디 있나?”

남자가 눈썹 위에 손을 올리고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때마침 유리나와 시선이 마주친 카르티아 후작이 두 사람을 불렀다.

“마침 잘 내려왔구나. 유리나, 레이너드. 이쪽으로 오거라.”

두 사람이 주춤주춤 다가가자 낯선 남자가 예를 갖춰 유리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크론 왕립 아카데미에서 마법 이론 과목 교수직을 맡고 있는 제레미 허트슨입니다.”

“유리나 카르티아예요.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데이브와 안면이 있는 것 같은데 아카데미 동기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실력은 제가 훨씬 낫습니다, 아가씨.”

데이브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끼어들자 사람 좋던 얼굴을 하던 허트슨 교수가 그를 보며 처음으로 얼굴을 굳혔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내 성적이 자네보다 더 좋았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그 따분한 교수들이 평가하는 성적이야 자네가 좋았지만, 실전 실력은 내가 더 낫다는 것이야말로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아카데미를 다녔던 십 대 시절을 항상 붙어 다녔다던 두 남자는 꼭 십 대 소년들처럼 투닥투닥 말다툼을 이어 갔다. 이러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팔짱을 끼고 옆에 섰다.

“아카데미에서 오셨다고 하셨죠? 그럼 레이를 보러 오신 건가요? 전에 데이브가 레이를 직접 보러 아카데미에서 사람들이 올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 적이 있거든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허트슨 교수의 고개가 재빠르게 레이너드에게 돌아갔다.

“오오, 데이브! 이 소년이 자네가 말했던 그…….”

“맞아.”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미끄러져 내려온 안경을 추켜올리고는 레이너드의 손을 덥석 잡았다. 무례하고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레이너드는 얼굴만 살짝 굳힐 뿐, 놓으라고 소란은 피우지 않았다.

일전에 데이브가 그의 재능을 살펴볼 때처럼 허트슨 교수의 손에서 나온 밝은 빛이 레이너드의 몸을 팔부터 훑기 시작했다. 레이너드가 질색하는 얼굴로 몸을 떨며 유리나에게 속닥였다.

“두 번짼데도 이 느낌은 익숙해지지 않아.”

어떤 느낌이냐 물으니 깃털 같은 것이 온몸을 간지럽히는 것 같은 오싹한 느낌이라고 한다.

마침내 그의 온몸을 모두 훑은 빛이 사라졌을 때, 허스튼 교수는 데이브가 그랬던 것처럼 탐욕에 번들거리는 얼굴로 그의 손을 꽉 쥐었다.

“교수를 10년 넘게 하면서 재능 있다는 학생이란 학생들은 엄청 만나 봤는데 이런 인재는 또 처음이야!”

“그럼 무시험으로 입학할 수 있겠나?”

은근히 떠보는 데이브의 물음에 허트슨 교수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당연하지! 합격, 합격이야! 면접을 볼 필요도 없어. 지금이라도 당장 아카데미로 떠나는 게 어떻겠는가?”

안 간다고 했다간 야밤에 납치라고 해서 데려갈 것 같은 그의 기세에 소름이 돋았는지 레이너드가 이번에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본격적으로 입학 절차와 학업 과정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레이너드와 카르티아 후작, 데이브, 허트슨 교수는 저택에서 가장 좋은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 대화 속에 아카데미에 관한 중요한 정보들도 포함되어 있어 유리나는 참여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늘 레이너드와 공부를 하던 작은 응접실에서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진짜 떠나네.’

유리나는 베시가 가져다준 차에 손 하나 대지 않고 레이너드가 공부했던 책들을 괜히 들춰 보았다.

손때가 잔뜩 묻고 너덜너덜해진 그 책들은 지난 6개월 동안의 길고 험난한 여정을 어김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연습장 한 장에서도 둘만의 추억이 묻어 나왔다.

[졸녀.]

유리나는 문득 글씨 연습장 한 귀퉁이에 쓰인 삐뚤빼뚤한 낙서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테이블 위에 눕다시피 엎드려서 반 이상 내려온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글씨 연습을 하는 레이너드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졸녀’가 아니라 ‘졸려’지, 레이.”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잘 쓸 수 있다는 대답은 당연하게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괜히 머쓱해진 유리나는 ‘졸녀’ 옆에 ‘바보’라는 낙서를 끼적인 뒤 책을 덮었다.

오늘따라 무슨 변덕이 들었는지, 평소 제가 앉던 자리가 아니라 레이너드가 앉던 자리에 앉아 차가워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 때문인지 배 속이 시렸다. 유리나는 시린 몸을 웅크리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조용하네.’

이 고요한 응접실은 앞으로 레이너드가 떠나면 마주할 풍경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와닿지 않았던 그의 부재가 갑자기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유리나는 이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았을 레이너드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햇볕이 뜨거웠던 어느 여름날, 그늘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레이너드의 얼굴이 떠오른다.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던 거만한 목소리도, 지켜 주겠다며 맹세하던 그 표정도, 팔에 팔찌를 채워 주던 차분한 손길도 떠올랐다.

‘생각보다 추억이 많네.’

이 낯선 세계에 떨어져서 쌓은 기쁜 추억들은 모두 그와 함께한 것들이었다. 기분 좋은 기억인데도 이상하게 내장이 배배 꼬이는 것처럼 배 속이 기분 나쁘게 조여 왔다.

유리나는 애써 레이너드의 얼굴을 떨쳐 내기 위해 다른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이마가 간지러워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테이블에 엎드려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레이너드를 볼 수 있었다.

굳은 얼굴로 그녀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던 레이너드가 유리나와 눈이 마주치자 힘없이 웃었다.

“밖에 눈 많이 온다. 눈 구경하러 갈래?”

* * *

“춥긴 춥네.”

눈을 감고 흰 눈을 맞던 레이너드가 문득 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몸에 입을 수 있는 옷이란 옷은 모조리 착용하고 정원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몸을 파르르 떨던 유리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너드가 키에 비해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 앞에 쪼그려 앉았다.

“코가 빨개.”

“그래? 루돌프 같겠네.”

“루돌프?”

“그런 게 있어. 코가 빨간 사슴.”

“세상에 코가 빨간 사슴이 대체 어디 있어?”

퉁명스레 묻는 그의 코야말로 루돌프처럼 빨갰다. 유리나는 그 점을 지적해 주려다 말고 장갑 낀 손으로 그의 코보다 더 빨개져 있을 제 코나 살살 문질렀다.

하지만 온기가 없는 털장갑은 손 보온 효과는 있을지언정 다른 곳을 데우는 데엔 효과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 봐.”

레이너드가 장갑을 벗고 두 손바닥을 요란한 소리가 날 정도로 마구 비볐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입김까지 호호 불어 넣은 뒤 코만큼이나 빨개진 유리나의 뺨을 감싸 쥐었다.

유일하게 노출되어 있던 얼굴이 따뜻해지자 온몸이 노곤해지는 것 같았다.

“따뜻해?”

“응.”

“더 해 줄게.”

“괜찮아. 손 시릴 텐데 얼른 장갑이나 껴.”

“나 추위 안 타는 거 알잖아.”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또 한 번 손바닥을 비볐다. 유리나는 빨간 그의 볼을 바라보다가 장갑을 벗었다. 눈치 빠른 레이너드가 곧바로 그녀의 손에 도로 장갑을 끼워 주었다.

“넌 끼고 있어. 추워.”

“너도 추울 거 아냐. 네 얼굴도 빨개.”

“안 추워. 이 정도쯤이야.”

그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또다시 따뜻해진 손바닥으로 유리나의 볼을 살살 문질렀다. 유리나는 장갑 낀 손을 비벼 제 볼을 문질러 주는 그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안 춥다는 말과 달리 귓불에 닿는 손끝이 차갑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

“이제 슬슬 들어갈까?”

유리나가 레이너드의 빨간 코끝을 보며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 가자.”

“그러자, 그럼.”

때마침 베시가 감기 걸린다며 유리나의 어깨에 커다란 숄을 둘러 주었다.

유리나는 손바닥에 입김을 불고 있는 레이너드를 보며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의자에 쌓인 눈을 맨손으로 대충 털고 앉는 그의 어깨에 숄 반대쪽 부분을 걸쳐 주었다.

레이너드는 자기는 괜찮으니 너나 하라고 투덜거리다가 유리나가 말없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조용해졌다.

“눈 많이 온다, 그렇지?”

유리나가 하늘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레이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 많이 온다.”

“조금 이따 눈사람 만들까?”

“손 시린데 무슨 눈사람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유리나는 얼른 그의 팔을 잡으며 그를 도로 의자에 앉혔다.

“됐어. 네 말처럼 손 시린데 눈사람은 무슨 눈사람이야. 그냥 이러고 있다가 들어가자.”

“그래.”

유리나는 다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장갑 낀 손을 허공에 뻗었다. 하얀 눈송이가 빨간 털장갑 위에 떨어졌다가 곧바로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어쩐지 분한 마음에 다시 눈송이를 잡으려고 하자, 레이너드가 재빨리 장갑도 끼지 않은 손을 뻗었다. 유리나의 손 위에선 금세 녹았던 것과 달리 그의 손과 거리를 두고 둥둥 뜬 하얀 눈송이는 제 형태를 유지했다.

“그것도 마법이야?”

“응, 신기하지?”

레이너드가 킥킥 웃으며 눈송이에 호, 하고 바람을 불어넣었다. 눈송이가 천천히 날아와 유리나의 콧잔등 위에 내려앉았다.

“차가워.”

눈을 찌푸리며 코를 문지르는 그녀를 보며 레이너드가 다시 킥킥거렸다. 유리나는 그를 흘겨보다가 어깨 위에 쌓인 눈을 모아 그의 뺨에 문질렀다.

“앗, 차가!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네가 먼저 했잖아. 기억 안 나?”

“알겠어, 알겠어. 내가 잘못했어.”

그가 항복한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눈싸움은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이 나고 말았다. 둘은 다시 서로에게 기대며 점점 더 굵어지는 눈송이를 올려다보았다.

“네 말처럼 올해 겨울은 유독 더 추운 것 같아. 어떻게 안 거야?”

잠깐 동안의 침묵을 깨고 레이너드가 물었다.

“비밀.”

네 손가락을 한 손에 집어넣는 손모아 장갑이라 검지만 펼 수 없었던 탓에 유리나는 손바닥 전체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별 게 다 비밀이네.”

그가 헛웃음을 터뜨리다가 신발 앞코로 소복이 쌓인 하얀 눈을 톡톡 밟았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지 장난기를 지우고 심각한 표정을 짓나 싶더니 곧 결심한 듯 숨을 크게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 여기도 이렇게 추운데 내가 있던 고아원은 이곳보다 훨씬 춥겠지? 사실 그때는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었는데, 지금 같은 날씨라면 네 말처럼 난 올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을지도 몰라.”

그때 그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나. 그를 데려오기 위해 즉석에서 그냥 둘러댄 말이었는데. 유리나는 그의 어깨에 기댔던 고개를 들어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아니, 아까 아카데미에서 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이후로 그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무슨 얘기를 했길래.’

이럴 줄 알았다면 아까 같이 따라 들어갈 걸 그랬다.

“내가 이렇게 이 추운 날에도 따뜻하게 지내는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도, 평생 배울 일 없던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것도 다 네 덕분이야.”

“고마워할 필요 없어. 투자라고 했잖아.”

“알아. 그렇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날 발견해서 데려온 건 어쨌든 너야.”

유리나는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일말의 죄책감이 양심을 콕콕 찔렀다. 그녀는 그를 살렸다고 칭찬받을 만한 위인이 되지 못했다.

그녀가 아니었어도 그는 데프론 후작의 비호 아래 지금 못지않은 삶을 누렸을 것이다.

아니, 원작처럼 데프론 후작가에서 리디아와 함께하는 그 삶이 지금보다 더 나을지 누가 알겠는가.

“혹시 모르지. 네 재능을 알아본 다른 사람이 널 데려갔을 수도 있잖아.”

데프론 후작이 갔을 거야. 말하지 못한 말이 입속에서 웅웅거렸다. 차마 그 말까지는 꺼낼 수가 없었다. 그건 무덤까지 갖고 갈 비밀이다.

“글쎄, 그 구석에 있는 곳까지 그런 사람이 또 왔을 것 같지는 않아.”

레이너드가 고개를 돌려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며 확신에 찬 어조로 쐐기를 박았다.

“네가 날 살린 거야, 유리나.”

유리나는 그 말에 어떤 대답을 해 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껏 한 번도 그날의 일을 꺼낸 적이 없던 그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런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눈만 깜빡이며 나이답지 않게 진지한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레이너드는 대답이 없는 그녀를 잠시 맞바로 쳐다보다가 이내 맥 빠진 것처럼 힘없이 웃었다.

“더 있다가는 감기 걸리겠다. 들어가자.”

유리나는 천천히 저택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서둘러 따라갔다.

“유리나.”

앞서가던 레이너드가 계단을 올라가기 전 유리나를 돌아보았다.

“나, 가지 말까?”

스쳐 지나가듯 툭 내뱉은 그 짧은 한마디에 유리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카데미 가지 말고 그냥 여기 계속 머무를까?”

그가 아까보다도 더 진지한 얼굴로 유리나를 바라보았다. 유리나는 그의 마음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아까 교수님께 들었어. 그 아카데미에 가면 졸업할 때까지 제국으로 돌아올 수 없대.”

그건 유리나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크론 왕립 아카데미는 신분에 상관없이 크론 왕실에서 학비 전액은 물론, 생활비까지 지원을 해 준다. 대신 학생들은 졸업 전까지 왕실에 소속되며 왕실을 위해 일을 해야 했다.

혹시라도 중간에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학생의 국외 출입을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학비의 부담을 느끼는 평민들도 차별 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입한 제도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건 마법 인재를 왕국에 잡아 두기 위한 일종의 계략이었다.

아주 가끔 정말 탐나는 인재가 있으면 갖가지 핑계를 대며 졸업 유예를 시키는 방법으로 왕국에 잡아 두기도 한단다.

‘레이너드는 무사히 돌아오니까 상관은 없지만.’

왜 왕국에서 ‘카리온’을 잡아 두지 않고 졸업을 시켰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그의 실력이 교수들보다 뛰어나서 흠잡을 곳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유리나는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았다.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나를 보며 레이너드가 당혹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알고…… 있었어?”

떨리는 목소리는 꼭 그녀를 책망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랬기 때문에 유리나는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침묵의 의미를 깨달은 듯 레이너드가 다소 거칠게 제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이미 알고 있는데 왜?”

“…….”

“내가 거길 가면 몇 년 동안 못 만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대체 왜…….”

원망을 가득 담은 그의 눈빛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그는 그녀를 노려보다시피 바라보다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유리나는 차마 그의 뒷모습조차 바라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였다.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의 어깨를 아프게 짓눌렀다. 그 어색함을 견딜 수 없어 유리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레이, 너도 알다시피 크론 왕립 아카데미는 현존하는 아카데미 중 가장 좋은 곳이야. 데이브도 그곳을 다녔고. 너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어.”

“이곳에서도 배울 수 있어.”

이를 악문 것 같이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날 지켜 준다고 했잖아. 그래서 데려온 거잖아. 난 널 믿고 여기 온 거야. 아카데미니 뭐니 하는 거 다 필요 없어. 오로지 너 하나만 믿고 여기 온 거라고! 그런데 너는, 너는……!”

날 버리는 거야?

유리나는 그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원망의 말을 엿들었다. 그녀의 상상이 만들어 낸 환청이었겠지만 실제로 그가 하고자 했던 말도 그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유리나는 오늘따라 작아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해, 레이. 하지만 난 네가 꼭 그 아카데미에 갔으면 좋겠어. 그곳에서 리디아와 데프론 후작과 마주치지 않고 많이 발전해서 돌아왔으면 좋겠어. 어떤 위험에서도 날 지킬 수 있도록. 그게 내가 널 찾기 전부터 줄곧 바랐던 일이야. 부탁이야, 레이.

분명 그런 말을 건네야 했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정작 입 밖으로 나간 말은 정반대의 말이었다.

“레이, 그냥 여기서 데이브에게 마법을 배울래?”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는지 스스로가 말하고도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처럼 그와 함께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원작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그와 함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들을 즐기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나도 달콤해서 잃고 싶지 않았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땐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생각이었다.

‘어쩌면 원작과 달리 레이가 리디아를 본다고 해도 마음을 주지 않을 수 있고.’

분명 과거에 읽었던 빙의물에서 여주인공들이 원작을 걱정하는 이야기가 항상 나왔다. 하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남주인공이나 서브 남주인공은 그런 여주인공의 색다른 매력에 빠져들었다.

어떤 경우에는 원작의 여주인공에 관심을 눈곱만큼도 주지 않기도 했다. 그렇다면 레이너드 또한 원작과 다른 노선을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기대감이 싹텄다.

그러니 레이너드를 믿어 보자는 비이성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던 레이너드가 한 발짝 다가오며 대답 대신 물었다.

“줄곧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물어봐도 돼?”

조금 전 하던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유리나는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때, 우리 처음 만났던 그날 말이야. 너는 분명 스승님과 후작님께 우연히 내 붉은 눈을 보고 날 충동적으로 후원하고 싶다고 했잖아. 내 눈을 보고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내가 마법 능력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고 했어.”

“응, 그랬지.”

“네 말대로라면 넌 날 보고 신기해했다는 건데, 내 기억은 좀 다르거든. 넌 분명히 그때 날 봤을 때 놀란 게 아니라 기뻐하고 있었어.”

그건 그의 말이 맞다. 그때 유리나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희열감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이제 와 무슨 문제가 있기에 그는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유리나, 우스운 말인 거 아는데 혹시, 그러니까 어이가 없는 말인 거는 알고 있는데…….”

“말해 봐.”

“혹시 날 만날 걸 알고 있었어?”

차분하게 시작했지만 끝으로 갈수록 그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유리나는 온갖 감정이 뒤섞인 그의 붉은 눈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말처럼 그녀는 분명 기뻐했다.

죽지 않아도 된다는 희열감과 제 손으로 운명을 바꿨다는 성취감. 그건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 말하지 못할 그녀만의 비밀이었다. 이걸 숨기기 위해 아버지와 데이브 앞에서 같잖은 열 살 아이 흉내까지 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상하게 레이너드에게만은 그녀가 갖고 있는 비밀을 조금쯤 들려줘도 될 것 같았다.

“응, 맞아.”

유리나는 감았던 눈을 뜨며 어느덧 눈높이가 많이 차이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난 그때 널 찾아다녔어. 네 존재를 어떻게 알았냐고는 묻지 말아 줘. 그렇지만 나는 네가 어디엔가 있을 거란 걸 알았고, 널 찾기 위해 고아원을 열심히 돌아다녔어. 오로지 널 찾기 위해.”

“…….”

“그리고 그날 널 발견했을 때 난 엄청 기뻤어. 그때 내가 느꼈던 기쁨은 넌 평생 모를 거야.”

유리나는 장갑을 벗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닿고 싶었다. 그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레이, 나는 줄곧 널 기다렸어.”

그는 덜덜 떨리는 그녀의 손을 보며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유리나는 묵묵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던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래, 그거면 돼.”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유리나의 손을 잡고 보드라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그 한마디면 돼.”

그가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손바닥에 닿는 뜨거운 숨이 낯설어 유리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레이너드가 말캉한 손바닥을 입술로 물었다 놓자 쪽, 하고 물기 어린 소리가 났다. 별것 아닌 접촉이었는데도 유리나의 얼굴이 조금씩 붉게 달아올랐다. 정말 순진한 열 살 아이라도 된 모양이다.

“너는 늘 많은 생각을 하며 행동하잖아. 날 아카데미에 보내는 것도 분명 이유가 있겠지. 아카데미에 갈게. 그게 네 뜻이라면 얼마든지.”

그가 유리나의 손을 제 뺨에 갖다 대며 웃었다. 하얀 눈을 맞으며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어쩐지 처연해 보여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유리나는 제법 소년의 태가 나기 시작하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다른 손으로 그의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 * *

며칠 뒤, 그는 아카데미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크론 왕국으로 떠났다. 고작 한 사람이 없을 뿐인데 커다란 저택이 텅 빈 것처럼 고요했다. 아니, 텅 빈 것은 그녀의 마음일까.

유리나는 창가에 앉아 마차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가 떠나기 전 조심스레 손에 쥐여 주었던 쪽지를 펼쳤다.

[약소근 꼭 지킬 꺼야. 쪼금만 기다려. 언른 스승님보다 뛰어난 마법사가 되서 도라오께.]

여전히 정돈되지 않은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쓴 편지였다. 중간중간 섞여 있는 맞춤법이 틀린 글자를 보며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발신인도, 수신인도, 안부 인사도, 뭐 하나 예법에 따라 적힌 것이 없는 편지였지만 그 속에 담긴 레이너드의 진심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녀는 짧은 편지를 읽고, 읽고, 또 읽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을 편지지를 제 뺨에 갖다 대며 눈을 감았다.

“응, 기다릴게.”

그러니 얼른 내 옆으로 돌아와, 레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