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레이너드의 아카데미 적응기
떠날 준비는 모두 끝났다. 아카데미에 가져갈 짐도 싣고 아카데미에서 온 사람들도, 아카데미 입학식까지 같이 있어 줄 데이브도 모두 마차에 탔다.
‘이제 나만 타면 되네.’
그걸 알면서도 레이너드는 선뜻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태연하게 웃으며 떠나자고 어제 밤새도록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좀처럼 마음이 따라 주지 않았다.
그를 배웅하러 나온 유리나는 하얀 손이 더욱 하얗게 질릴 정도로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레이너드는 파들파들 떨리는 그 작은 손을 내려다보다가 웃었다. 웃을 기분이 아니었는데도 왠지 웃음이 나왔다.
‘내가 가는 게 싫은 걸까?’
아카데미에 가면 졸업할 때까지 서로를 볼 수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땐, 사나운 독수리가 부리와 발톱으로 제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몸속 어딘가가 아프고 쓰라려서 치솟는 감정을 다스리기가 힘들었다. 늘 함께하리라고 믿었던 유리나를 향한 배신감은 그렇게나 컸다.
그렇지만…….
―레이, 나는 줄곧 널 기다렸어.
고작 그 한마디. 유리나가 나지막하게 내뱉은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만 같았다. 그녀만 원한다면 그 머나먼 타지에도 망설임 없이 갈 수 있었다.
“이제 가야 해. 다들 기다려.”
겨우 내뱉은 재촉에도 유리나는 그의 손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레이너드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며 차갑게 식은 손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손 차갑다. 얼른 들어가. 감기 걸리겠어.”
유리나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유리나가 우는 모습을 보기 싫었는데도 곧 울 것처럼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며 레이너드는 이상하게 안도했다.
‘진짜로 내가 가는 게 싫구나.’
그거면 됐다.
“다녀올게. 그동안 잘 있어.”
레이너드는 밤새 종이 몇 장을 구겨 가며 겨우 완성한 쪽지를 유리나의 손에 쥐여 준 뒤 몸을 돌렸다. 잘 다녀오라는 유리나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마차 문이 닫혔다.
조금이라도 늦게 떠나고 싶었지만, 그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마차는 야속하게도 문이 닫히자마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리나.”
레이너드는 위험하다는 데이브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창문을 열어 저택을 바라보았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유리나가 저 멀리서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줄곧 그녀 앞에서 의연하게 행동하느라 애써 참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 잊지 마.”
그는 유리나에겐 차마 말하지 못했던 그의 작은 소망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언어도 다르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 무려 7년이나 지내야 하는 사실은 물론 두려웠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건 유리나의 얼굴을 오랫동안 보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보다도 더 끔찍한 건 그 긴 시간 동안 그녀에게서 잊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나 잊으면 안 돼.”
긴 시간이긴 하지만, 돌아오기까지는 오래 걸릴 테지만 난 널 꼭 기억할 테니까 너도 날 잊으면 안 돼.
약속했잖아.
나 꼭 위대한 마법사가 돼서 네 옆으로 돌아올 거야. 널 지켜 주기 위해.
그러니까 나 잊지 마.
* * *
데이브와 허트슨 교수가 레이너드를 달래 주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그는 좀처럼 우울한 감정을 떨쳐 내지 못했다. 그는 어미를 잃은 새끼 고양이처럼 마차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차가 드넓은 제국의 평야를 달리고, 국경을 넘고 크론 왕국 수도에 위치한 아카데미 정문을 넘을 때까지도 레이너드는 시들시들한 새싹처럼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여기가 앞으로 네가 졸업할 때까지 지낼 방이야, 레이너드.”
데이브가 그를 기숙사 방으로 안내하며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 어느 저택보다 넓고 호화스럽던 카르티아 저택의 방에 비하면 턱없이 작고 초라했지만 아카데미에서 준비한 1인실 방은 개인 욕실과 벽난로를 비롯하여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적게는 두 명, 많게는 여섯 명까지도 한방에서 지내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특혜였다. 이게 다 카르티아 후작의 기부금과 허트슨 교수가 직접 데려올 정도로 뛰어난 실력 덕분이었다.
학비가 지원되는 아카데미지만, 다양한 출신이 모인 만큼 기숙사만큼은 별도의 기부금에 따라 차등 배정된다. 레이너드에게 최대한 지원해 주기로 약속한 카르티아 후작은 그 누구보다도 많은 기부금을 냈다.
“배 많이 고플 텐데, 저녁은 허트슨 교수와 번화가에 나가서 먹을까? 유명한 식당을 알고 있다는데.”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아요. 오늘은 그냥 잘래요.”
“그래, 그러렴. 긴 여행이 힘들었을 테니까.”
데이브는 말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레이너드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레이너드는 어리광을 피우는 것처럼 눈을 감고 그의 손길을 묵묵히 받았다.
“같이 있어 줄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 무슨 일이 있으면 이걸로 날 부르고. 알겠지?”
“네.”
데이브는 한 쌍으로 된 마법 도구 하나를 레이너드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 마법 도구를 나눠 가진 사람들은 일정 거리 이내에서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그 반경이 넓지 않다는 것이었다. 제국에 있는 유리나의 목소리를 듣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마법 도구를 주고서도 자리를 뜨지 못했던 데이브는 괜찮다고 연신 속삭이는 레이너드의 말에 겨우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뒤에야 레이너드는 터벅터벅 걸어가 침대 위에 엎어졌다. 씻을 생각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몸이 무겁고 무기력하기만 했다. 뭘 해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새로운 곳에 왔다는 설렘보다는 익숙한 것을 두고 왔다는 상실감이 더 컸다.
대체 그동안은 이 긴 시간을 어떻게 보냈더라. 무력함을 이겨 내기 위해 애써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떠오르는 건 늘 자신을 향해 웃어 주던 반짝반짝 빛나던 푸른 눈뿐이었다.
아침이면 같이 앉아 간단한 아침을 먹고, 오전엔 같이 지루한 역사 수업을 듣고, 오후엔 같이 예법 수업을 들으며 춤 연습을 하고, 저녁을 먹은 뒤엔 응접실에 나란히 앉아 같이 글씨 연습을 했다.
밤에는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따뜻한 우유를 마시며 도란도란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다가 내일 보자는 인사를 하고 각자의 방으로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그 일상이 반복되었다. 어찌 생각하면 지루할 법도 한데, 그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이 지겹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얼른 아침이 와 유리나와 같이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상의 주축이 되었던 사람이 사라지니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입학식을 치르고 바쁜 일상을 보내다 보면 조금은 나아질까?
‘유리나…….’
북받쳐 오는 그리움에 레이너드는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떨며 눈물을 떨구었다.
* * *
“응? 베시? 방금 뭐라고 했어?”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가던 유리나는 문득 등을 돌렸다.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던 베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 말도 안 했는걸요.”
“방금 ‘유리나’라고 하지 않았어?”
“어머, 아가씨. 제가 어떻게 아가씨를 그렇게 부르나요? 큰일 날 소리예요.”
“그런가.”
분명 누가 부르는 것 같았는데. 그녀는 민망함에 멋쩍게 웃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채 걷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베시가 진짜로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어디 가세요?”
“어딜 가긴. 응접실에…….”
무심코 레이너드의 숙제를 도와주려 한다는 소리를 하려다가 흠칫했다. 뒷말을 급하게 삼켰는데도 그 속내를 알아챘는지 베시가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
유리나는 그녀를 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입술이 이상한 모양으로 비틀리는 바람에 손등으로 입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따뜻한 우유에 꿀을 넣어서 가져다 드릴 테니까 그거 드시고 오늘은 일찍 주무세요.”
“……응.”
눈치 빠른 베시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데리고 방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적막한 복도를 걸으며 유리나는 괜히 항상 저녁을 먹고 난 뒤 머물던 작은 응접실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오빠들이 오면 좀 나으려나.’
레이너드도, 데이브도 없는 저택은 고용인이 많은데도 어쩐지 삭막하기만 했다. 여름 방학이 되면 아카데미에 머물고 있는 세 오빠들이 돌아올 테니 조금은 북적해지겠지.
얼굴을 몇 번 보지 않아 어색하게 느껴지는 오빠들이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테다.
유리나는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발을 겨우 떼며 방으로 향했다.
* * *
1년 같던 일주일이 지나고, 어느 정도 낯선 아카데미 공기에 익숙해지기 시작할 때쯤.
레이너드는 코앞에서 제 얼굴을 들여다보는 남자애를 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붉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을 가진 아이는 그 불쾌하단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관찰했다.
결국 참다못한 레이너드가 입을 열었다.
“뭘 봐?”
불편한 심기답게 날 선 목소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데이브와 같이 점심을 먹으려 방을 나오는데 맞은편에서 나온 눈앞의 남자애와 눈이 딱 마주쳤다. 모르는 얼굴이라 눈인사도 할 것 없이 그냥 지나쳐 가려는데, 이 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우와.” 하는 감탄사를 내뱉더니 그의 앞에 딱 서는 거 아닌가.
그러고는 지금껏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는 상태다. 잘만 하면 얼굴에 구멍이 서너 개는 족히 생길 정도로 그의 시선이 뜨거웠다.
레이너드는 반사적으로 제 눈을 가리며 대답이 없는 소년에게 다시 한번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 눈은 구경거리가 아니거든?”
“아, 미안해.”
그제야 남자애가 순박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이미 레이너드의 심사는 단단히 꼬인 지 오래였다. 미안? 뭐가 미안해? 사과만 하면 다야?
표정도 관리가 되지 않아 저도 모르게 부루퉁한 표정을 짓자 눈앞의 남자아이가 멋쩍게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인사도 없이 내가 너무 무례했지? 안녕? 난 에이든 테시야. 왕국 남쪽 끝에 있는 시골 영지에서 왔어. 너는?”
레이너드는 그가 내민 손을 내려다보다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뀐 뒤 그를 지나쳐 갔다.
“어?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
에이든이라고 소개한 남자애가 다급하게 따라와 그의 팔을 잡았다.
“뭐야?”
“미안, 진짜 미안해. 내가 잘못했으니까 화 풀어. 진짜 미안해. 그냥 조금 신기해서 그랬어.”
신기하다는 말에 레이너드는 꾹꾹 참았던 말을 결국 제 입으로 꺼내고야 말았다.
“신기해? 그래. 내 눈이 신기한 건 나도 알아. 그래서 뭐?”
일종의 방어 기제였다. 제 약점을 남이 들추기 전에 먼저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는.
어른들은 열이면 열 그의 눈을 불길하다고 손가락질했지만 또래 아이들의 반응은 대개 둘로 나뉘었다.
하나, 다가가지 말라는 부모의 말을 듣고 레이너드를 슬금슬금 피하는 애들.
둘, 처음 보는 붉은 눈이 신기하다며 관심을 보이는 애들.
어느 쪽이든 그 끝은 늘 좋지 않았다. 레이너드를 피하던 아이는 물론이고, 관심을 보이던 애들마저도 이내 그를 이상하다고 평가했다.
단순히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그나마 나을 텐데 많은 아이들이 그의 붉은 눈을 손가락질하며 악의적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괴물, 악마, 마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들어도 그 단어들에 무뎌지지 않았고, 레이너드는 매번 또다시 상처를 받고는 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제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처음부터 경계하고 날카롭게 대했다. 그 끝이 어떻게 될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딱 한 명, 유리나만 빼고.
카르티아 저택에서 따뜻한 대우만 받으며 조금은 경계가 느슨해졌지만 그때의 기억이 여전히 머릿속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가뜩이나 낯선 것만 가득한 곳에서 지내느라 심적으로 피곤한 상태다 보니 에이든의 행동 하나하나가 부정적으로만 보였다.
차가운 레이너드의 표정에 에이든이 눈을 크게 뜨며 얼른 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냐! 그런 거 아냐! 나는 그냥 나보다 어린 신입생들만 보다가 내 또래 신입생을 봐서 신기했던 거야. 너도 알겠지만 음, 우리가 다른 애들보다 조금 늦게 입학한 편이잖아?”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이 영 의심스러웠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변명에 레이너드가 팔짱을 끼고 대꾸도 하지 않자 에이든이 급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사실, 음……. 또래인 것도 신기하지만 사실 내가 신기하다고 한 건 눈이 아니라 네 얼굴 때문이었어.”
그가 다소 난감하다는 듯 볼을 긁적였다.
“난 너처럼 이렇게 잘생긴 남자애는 처음 봤단 말이야. 말했다시피 내 고향은 엄청 시골이라 애들이 다 꾀죄죄하거든. 너처럼 얼굴 하얀 애도 없고, 금발인 애들도 별로 없어. 역시 수도 애들은 다른가.”
솔직히 그의 말에 별 감흥이 없었다. 레이너드는 자기가 외모만 놓고 본다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 정도로 잘생겼다는 것을 이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또래의 남자애에게서 들어봤자 별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렇지만 말이야, 내가 여자애도 아니고 처음 보는 남자애가 잘생겨서 넋 놓고 봤다고 그러면 조금 이상하잖아.”
“조금이 아니라 많이 이상해.”
“그건 그래. 그래도 너 되게 잘생겼어.”
그 말을 남자애에게서, 그것도 또래의 낯선 소년에게서 들으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레이너드는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래서 이름이 뭔지 다시 물어봐도 돼?”
레이너드는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한 번 쉬고 손을 잡았다.
“레이너드. 성은 없어.”
“어? 귀족이 아니었어?”
“아니야.”
“그렇지만 귀족처럼 생겼는데.”
“그런 소리를 좀 들어. 내가 워낙 귀티가 나서.”
남들이 들으면 재수 없다고 했을 말인데도 에이든은 고개를 세게 끄덕이며 “맞아, 그래 보여.”라고 긍정했다. 저 잘난 줄 아는 레이너드라도 이쯤 되니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용건도 끝났겠다, 얼른 도망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또다시 팔을 잡히고 말았다. 얼굴만 보면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는데 손힘이 어찌나 센지 레이너드는 그의 손을 좀처럼 뿌리칠 수가 없었다.
“또 왜?”
“이것도 인연인데 나랑 점심 먹으러 가자!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엄청 나.”
“이게 무슨 인연이야? 다른 애랑 가.”
“룸메이트들이 아직 하나도 안 왔단 말이야. 아직 너무 낯설어서 카페테리아에 혼자 가긴 조금 무서워.”
글쎄, 네 성격이면 혼자 카페테리아를 정복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레이너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예의상 한 번 참았다.
“너네 방은 룸메이트 다들 왔어?”
“아니.”
그는 제 방문을 한 번 쳐다보았다가 작게 덧붙였다.
“1인실이라 룸메이트가 없어.”
“뭐? 정말?”
에이든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동그랗게 커졌다. 그는 제자리에서 껑충 뛸 기세로 화들짝 놀라며 레이너드의 팔을 흔들었다.
“귀족 아니라며? 그런데 어떻게 1인실을 써? 귀티가 난다 했더니 귀족이 아니라 잘사는 집 자식이었어?”
“내가 잘사는 게 아니라 내 후원자가.”
그 말을 한 다음에야 레이너드는 자신이 점점 이 참새 같은 녀석에게 말려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름도 말하고, 귀족이 아니라는 것도 말하고, 후원자가 있다는 것도 말하다니.
‘이런 애는 처음이야.’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레이너드는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다. 고향에서도, 고아원에서도 심지어 카르티아 저택에서도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려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어울려 지냈던 유리나는 아이답다기보다는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제대로 또래다운 또래와 대화를 해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그런데 제대로 대화를 한 또래 아이가 앞도 보지 않고 달려드는 성난 망아지 같은 애라니.
대체 이 대화가 어디로 튈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사실 어떻게 하다가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이러다가 제가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고아원에서 지냈고, 진짜 후원자는 카르티아 후작이 아니라 저보다 두 살, 아니 세 살 어린 유리나라는 것까지 말해 버릴 것 같아 조금 두려웠다.
“어느 가문의 후원을 받는데?”
“알아서 뭐 하게?”
이 아이의 장단에 놀아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부러 퉁명스레 대꾸했는데 에이든은 그의 목소리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꿋꿋하게 물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낼 건데 조금씩 알아 가면 좋잖아. 나도 우리 가족 얘기해 줄게! 그래서 어디 가문의 후원을 받아?”
“어차피 넌 말해도 몰라.”
“너, 지금 내가 시골 출신이라고 무시하는 거야?”
말은 그렇게 해도 에이든의 목소리와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레이너드의 팔을 잡고 늘어지며 앵무새마냥 “무시하는 거야? 무시하는 거야?”라고 반복해서 물었다.
레이너드는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쭉 밀었다.
“므스흐는 그으?”
입술이 손바닥에 짓눌린 상태에서도 그는 잘만 떠들어 댔다. 아, 정말 머리 아파.
“제노시안 제국 사람이라 말해도 몰라. 이제 됐어?”
“오, 제국! 그럼 너 여기 오느라 되게 힘들었겠다. 혼자 왔어?”
“아니, 스승님이랑 허트슨 교수님이랑.”
“허트슨? 마법 이론 과목의 허트슨 교수님? 뭐야? 신입생이 어떻게 교수님과 같이 올 수가 있어?”
대화가 멈출 듯하면서도 끝이 없었다. 고작 십 분 만에 하루에 할 말을 다 해 버린 것 같은 기분에 기운이 쭉 빠졌다. 아직 점심을 먹기도 전인데.
에이든이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어떻게 하면 이 너구리 같은 녀석의 입을 다물 수 있을까 고민하던 레이너드는 한숨을 한 번 쉰 뒤 입을 열었다.
“……점심 먹으러 가자고 했지?”
“나랑 점심 먹으러 갈 거야?”
“……질문 좀 그만하면.”
“내가 얼마나 물어봤다고 그래?”
“점심 안 먹을 거야?”
“안 물어볼게! 얼른 가자! 나, 배가 너무 고파서 이제 배가 아프기까지 해.”
배를 문지르며 씩 웃은 에이든이 레이너드의 손을 잡고 카페테리아를 향해 냅다 뛰기 시작했다. 레이너드는 그의 속도에 맞춰 뛰어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는 몰랐다. 고요할 거라고만 생각했던 아카데미 생활에 에이든 테시라는 이 시끄러운 소년이 영원히 끼어들 거란 사실을.
* * *
에이든을 만난 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레이너드는 그에게 끌려다니며 아카데미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당연히 식사도 데이브 대신 그와 카페테리아에서 먹는 일이 잦아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처음에는 마냥 시끄럽기만 했던 그의 수다가 이젠 익숙해졌는지 조금은 덜 피곤하다는 점이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오늘도 에이든과 저녁까지 같이 먹고 온 레이너드는 그에게 기운이 다 빨린 것 같은 기분으로 침대에 털썩 엎어졌다.
둘 다 말을 많이 하는 편이라면 죽이 조금 더 잘 맞았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재잘재잘 떠드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니,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해도 에이든의 수다는 절대 못 당해 냈을 것이다.
고작 며칠 같이 지냈을 뿐인데 레이너드는 그의 사정을 시시콜콜 알 수 있었다.
에이든 테시. 귀족이 아니라 평범한 평민처럼 행동하던 그는 의외로 남작가의 사람이었다. 다만 그의 말대로 테시 영지는 워낙 시골이라 귀족이 귀족 같지 않다고 했다.
농사가 주된 사업이라고 하는 테시 영지에는 사람보다 소와 양이 더 많다고. 덕분에 맨날 저택에서도 소똥 냄새가 난다며 한참이나 투덜거렸다.
거기에 밑으로는 그보다 더 수다스러운 여동생이 둘, 남동생이 하나가 있다고도 했다.
원래는 수도에 올 일 없이 영지에서 후계자 교육을 받으려고 했는데, 우연히 저택을 방문한 마법사가 그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본 뒤로 수도행이 결정됐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건 그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귓가에 계속 재잘대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레이너드는 몸을 떨었다.
‘얼른 씻고 자자.’
서둘러 목욕을 하고 옷을 입고 나오는데 저도 모르게 시선이 탁자 위에 올려 두었던 루비 브로치로 향했다.
에이든에게 시달릴 때는 생각나지 않았던 유리나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기분이 또다시 급격하게 울적해졌다.
레이너드는 이불 속으로 꼬물꼬물 들어가 애벌레처럼 이불로 몸을 둘둘 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혼자가 됐다고 또 이 모양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에이든 덕분에 확실히 낮에는 외롭지 않았는데…….
창밖에 불어오는 바람에도, 아이들이 속삭이는 목소리에도 흠칫 놀라며 레이너드는 몸을 떨었다.
‘안 울 거야.’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었다. 울다가 잠들면 내일 눈이 퉁퉁 부어서 데이브가 걱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소식이 유리나의 귀에도 들어가겠지.
그건 싫었다. 유리나에게 잘 있다는 소식만 전해 주고 싶었다. 그래야 그녀도 안심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를 기억하고 있다면 말이다.
‘기억해 줄까.’
그 생각을 하자 울지 않으려고 부릅뜬 눈이 또다시 촉촉해졌다. 벌써 저택을 떠난 지 한 달가량이 지났는데 설마 유리나는 그새 그를 잊었을까.
외로운 것도, 무서운 것도 다 참을 수 있어도 그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울면 안 돼.’
그렇게 다짐의 다짐을 하며 울지 않기 위해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쉴 때였다. 똑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스승님인가?’
데이브가 이 시간에 올 리가 없는데. 혹시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레이너드는 이불 밖으로 얼굴만 빼꼼 내밀고 문을 바라보았다. 똑똑똑. 이번엔 노크 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렸다.
“야, 레이너드. 자?”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에이든 녀석이었다. 이대로 대꾸도 안 하고 잠든 척을 하려는데 노크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결국 레이너드는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었다.
“뭐야?”
“안 잤네? 다행이다.”
폭신해 보이는 베개를 품에 안은 에이든이 그답지 않게 조금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혹시 내 노크 소리에 깬 거야?”
레이너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 불청객이 달갑지 않기는 해도 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런데 이 시간에 왜?”
그의 시선이 에이든의 품속에 있는 베개로 향했다. 이 시간에 다른 방을 방문하는데, 베개?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혹시 오늘 네 방에서 좀 재워 줄 수 있어?”
“응?”
“나도 무례한 부탁인 거 아는데.”
그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저녁 먹고 방에 돌아가니까 룸메이트가 둘이 더 와 있어서 말이야.”
“그게 왜? 너네 방은 4인실이니까 당연한 거잖아.”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답지 않게 에이든이 한탄하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네이선 녀석이……. 아, 걔는 내 룸메이트인데, 여덟 살짜리 애거든? 그런데 요 쪼그만 게 수도에 오느라 피곤했는지 코를 엄청 고는 거야. 잠을 잘 수가 없어.”
“응, 그래서?”
“무리한 부탁인 거 아는데……. 오늘 하루만 재워 줄 수 없을까? 오늘 딱 하루만. 네이선도 피곤이 풀리면 괜찮아질 테니까, 진짜 딱 오늘 하루만 재워 줘.”
레이너드보다 키가 큰 주제에 그는 꼭 주인을 애처롭게 올려다보는 강아지처럼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밑으로 내려 보니 무릎을 살짝 굽히고 있는 게 보였다.
레이너드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오늘 하루 만이야.”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에이든은 쏜살같이 방으로 들어와 침대로 몸을 날렸다.
“와, 침대도 엄청 넓다. 둘이 아니라 네 명이서 자도 되겠어.”
“잠이나 자.”
“그런데 말이야.”
보드라운 이불을 손으로 쓸어 보던 에이든이 침대에 앉은 레이너드를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울었어? 눈이 빨개.”
“나 눈 원래 빨간 거 알잖아.”
레이너드는 재빨리 소맷자락으로 눈매를 훔치며 등을 돌렸다. 그런데 이 귀찮은 에이든 녀석은 졸졸 쫓아와 기어코 그와 눈을 마주했다.
“아니, 눈동자 말고 눈이 빨갛다니까. 요기, 요오오기 흰자가 말이야.”
에이든이 검지로 제 눈을 가리키며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너도 향수병에 걸린 거야?”
“아냐.”
“하긴, 나도 벌써부터 가족들이 그립긴 해. 사실, 룸메이트가 아무도 안 와서 조금 혼자 잘 때는 조금 외로웠는데, 이렇게 너랑 같이 있으니까 좀 낫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레이너드는 애써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꾸하며 침대에 누웠다.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여전히 에이든에게서 등을 돌린 채였다. 다행히 에이든은 그의 몸을 넘어오면서까지 얼굴을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그와 등을 맞대며 침대에 누웠다.
“혼자 있으니까 더 그런 걸걸? 나도 혼자 있다가 룸메이트가 와서 지지고 볶고 하니까 정신이 쏙 빠져서 가족들 생각이 싹 사라지던걸. 그리워할 시간도 없다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너에게도 룸메이트가 필요하다는 소리야.”
“……그래도 재워 주는 건 오늘만이야.”
“에이, 안 넘어오네. 네 침대가 훨씬 편하고 좋은데. 어쩔 수 없지.”
등 너머에서 거하게 하품하는 소리가 났다. 레이너드는 침대 옆 테이블에 켜 두었던 촛불을 입으로 불어서 껐다.
자려고 눈을 감았지만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뜨끈한 온기가 영 낯설었다. 고아원에서도 그의 붉은 눈이 무섭다며 아이들이 그와 가까이에 붙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얘는 내 눈이 안 무섭나?’
눈이 예쁘다고 해 주었던 유리나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레이너드의 눈보다는 외모에 더 관심을 보이던 에이든은 그 후에도 붉은 눈에 대해 언급을 하거나 이유도 없이 물끄러미 쳐다보는 일이 없었다.
그게 정말로 흥미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레이너드가 붉은 눈에 예민하게 반응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야, 레이너드. 자?”
문득 자는 줄 알았던 에이든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레이너드는 눈을 감으며 자는 척을 했다.
“너 안 자는 거 알거든.”
그래도 꿋꿋하게 자는 척을 했다. 저기에 대꾸를 해 주었다간 오늘 밤새도록 저 수다를 들어야 할 것이다.
“내 동생들도 꼭 엄마가 나갈 때는 잠든 척하다가 엄마가 나간 뒤에는 열심히 이야기를 하거든. 너 내 동생이 자는 척을 할 때랑 숨소리가 똑같아.”
“……왜 부르는데?”
“나, 네 눈에 대해서 소문 들었어. 너 이미 아카데미에서 유명하던데?”
순간,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레이너드는 숨을 죽이며 눈가를 더듬거렸다.
‘소문이 퍼졌다고?’
달갑지 않은 소문이 분명했다. 분명 저주받은 아이가 아카데미에 들어왔다고 수군거리고 있겠지. 늘 가는 곳마다 있었던 일인데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이상하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꼭 겨우 아물어 가던 딱지를 떼어 낸 것처럼 마음 어딘가가 아렸다.
이곳에는 그를 품에 안고 네 눈이 좋다고 말해 줄 유리나도 없는데, 어쩌지?
거칠어져 가는 숨소리를 듣지 못한 것인지 에이든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네 눈 말이야, 여신의 축복을 받은 눈이라며?”
생각지도 못한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했다. 레이너드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며 에이든을 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머리 뒤로 손깍지를 끼고 누워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이 들어왔다.
“여신의 축복을 받아서 너 실력이 엄청 뛰어나다면서? 허트슨 교수님과 같이 온 것도 다 네가 엄청난 천재라서 그런 거라며?”
“누가 그래?”
“알렉스네, 그러니까 알렉스는 네이선 말고 내 또 다른 룸메이트인데, 그건 그렇다 치고, 알렉스네 아버지가 마법사라서 아버지에게 들었대. 그러니까 붉은 눈이 베이? 아무튼 베이, 뭐시기라며?”
“……‘베아투스’야.”
레이너드는 언젠가 유리나에게서 스쳐 지나가듯이 들었던 단어를 떠올렸다. 지금껏 잊고 지냈던 단어였다.
“아, 맞아! 베아투스! 그거였어. 아무튼 그거 엄청 대단한 거라며! 내가 그런 대단한 애의 가장 첫 친구가 되다니! 내가 네 첫 친구 맞지? 그렇지? 너 아카데미에 와서 나랑 처음으로 카페테리아 간 거지?”
친구인가? 레이너드는 처음 들어 보는 단어에 조금 얼떨떨했다. 유리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그를 친구 취급해 주지 않았다.
‘하긴, 먼저 다가와 준 애들도 별로 없었지만.’
그렇지만 고작 만난 지 며칠 만에 친구가 될 수 있는 걸까? 얘는 만나는 애들은 모두 친구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자 괜한 반발심에 조금은 들떴던 것 같은 기분이 오히려 더 축 가라앉았다.
“누가 친구야? 그리고 내 첫 친구는 너 말고 따로 있어.”
“뭐? 누구야? 그 친구가 누군데? 걔도 여기 다녀?”
“넌 몰라도 돼.”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퉁명스레 대답한 레이너드는 반짝반짝 빛나는 에이든의 눈을 피해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에게서 몸을 돌리며 진정해 보려고 했지만 두근두근 뛰는 심장은 속도를 줄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달라지는 게 왜 없어? 데이브는 이 자료를 첨부해서 아카데미에 추천서를 보낼 거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다시는 네 눈을 갖고 트집 잡지 못할 거야.
자랑스레 늘어놓던 유리나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때는 그녀가 자신과 같이 수업을 듣지 않고 데이브와 지내는 것에 심술이 나서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그 말의 의미를 지금에서야 온전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그의 미래를 위해 밤잠을 줄이고 코피를 쏟아 가며 그 자료를 찾아낸 것이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그가 홀로 상처를 받지 않도록.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꾹 다문 입술 사이를 비집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야? 너 갑자기 왜 웃어? 유명해져서 좋은 거야?”
“그런 거 아니……. 흡!”
웃음을 멈추기 위해 입을 틀어막아도 자꾸 웃음소리가 새어 나갔다. 카르티아 저택을 떠난 후 처음으로 레이너드는 어깨까지 들썩여 가며 크게 웃었다.
“왜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같이 웃자.”
갑자기 웃는 그가 웃길 법도 한데, 에이든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 대신 제 배를 움켜쥐며 레이너드보다 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두 동갑내기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한동안 어두운 방 안을 밝게 채웠다.
* * *
이틀 뒤, 레이너드는 데이브에게서 편지 한 장을 건네받았다. 발신인은 유리나였다.
[유리나 카르티아.]
몇 주 만에 보는 그 글씨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레이너드는 갑자기 또 왜 실실 웃는 거냐고 묻는 에이든을 피해 재빨리 방으로 도망쳤다.
유리나의 이름을 보고 또 보고,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고 또 한 뒤에야 편지를 봉인한 인장을 뜯을 수 있었다.
[레이에게.
레이, 잘 지내고 있어?]
익숙한 필체와 함께 그리웠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유리나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레이너드는 편지에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잘 지내고 있어.”
‘잘 지내고 있다’라고 말하기엔 살짝 어폐가 있었지만 유리나에게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레이너드는 그다지 길지 않은 편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아직 글자에 완벽하게 익숙해지지 않은 터라 처음에는 무슨 글씨인지 한 번에 읽기가 쉽지가 않아서 몇 번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곧 편지의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었다.
그 후, 제일 마지막 인사가 자꾸 눈에 밟혔다.
[벌써부터 네 빈자리를 느끼며
유리나가.]
유리나가 내 빈자리를 느끼고 있대. 날 잊지 않았어! 저 하늘 높이 몸이 날아오는 것 같았다. 레이너드는 편지를 쥔 두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침대 위에 엎어졌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에서 가져온 짐을 뒤져 편지지와 필기도구를 꺼냈다. 그러고는 책상에 앉아 잔뜩 긴장한 얼굴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써 내려갔다.
[나는 잘 지내고 이써.]
그 외에 뭔가 많은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었지만 뭐라고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쓸 말이 있다고 해도 아직 그의 작문 실력으론 긴 편지를 쓸 수도 없었다.
깃펜을 앙 물고 잠시 고민하는데 머릿속에 이상하게 문득 며칠 동안 옆에서 계속 종알거리던 에이든 녀석의 얼굴이 두둥실 떠올랐다.
레이너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문장 하나를 더 써 내려갔다.
[사람드리 다들 조아. 걱정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