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11/20)

5. 너에게로 가는 길

[레이에게.

레이, 잘 지내고 있어?

네가 떠난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아. 아마 네가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넌 아카데미에 입학을 하고 난 뒤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새삼 제국이랑 왕국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실감이 난다.

이곳은 벌써 봄이 오나 봐. 여전히 춥기는 하지만 그래도 불어오는 바람이 점점 더 따뜻해지기 시작했어. 그거 알아? 내 생일은 봄이야.

그러니까 나도 곧 열한 살이 돼. 그럼 다시 너랑 두 살 차이가 되는 거야. 재밌지?

지난번에 네 생일에 했던 파티가 좋아서 이번 내 생일도 베시에게 부탁해서 그때와 똑같이 해 달라고 조를까 봐.

음, 아무리 똑같이 한다고 해도 네가 없을 텐데, 그건 좀 아쉽긴 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생일 선물도 줬는데 넌 내 생일 선물도 안 주고 가 버렸네? 네가 준 루비 팔찌를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할게.

제국력 467년, 눈의 달 13일

벌써부터 네 빈자리를 느끼며

유리나가.]

[나는 잘 지내고 이써. 사람드리 다들 조아. 걱정 마. 그리고 생일 추카해.]

* * *

[레이에게.

레이! 잘 지내고 있다는 소리를 데이브에게서 전해 들었어. 데이브가 네 얼굴이 좋아 보인다며 다행이라고 하더라.

마법 실력도 많이 늘고 성적도 좋다면서? 역시 네 말처럼 재능이 있는 사람이 노력도 열심히 하면 따라갈 수가 없나 봐.

사실 이번에 데이브와 같이 크론 왕국에 엄청 가고 싶었는데, 아직 어리다며 아버지가 허락을 안 해 주셨어.

나도 벌써 열두 살이니 아이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완고하시더라. 오빠들은 내 나이엔 이미 아카데미에서 기숙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열두 살이 뭐니. 릭스 오빠는 여덟 살에 아카데미에 입학했는데. 그러고 보니 너도 열두 살 같은 열세 살에 왕국으로 떠났었네.

아무튼 나도 따라갔다면 네 얼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건 좀 아쉽다. 부디 데이브가 떠났다고 너무 우울해하고 있지 않기를 바라.

제국력 468년 꽃의 달 28일

그리움을 담아

유리나가.

추신. 데이브를 통해 보내 준 생일 선물 잘 받았어. 안 그래도 요즘 꽃 모양 머리 장식이 유행하고 있는데 잘 쓸게.

노란색 꽃이라 내가 하면 눈에 잘 띄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예뻐. 고마워.]

[유리나에게.

나도 스승님을 통해 네 안부를 전해 들었어.

요즘 네 첫째 오라버니인 릭스 카르티아 님이 아카데미 졸업을 하고 돌아와서 저택이 많이 북쩍거린다며? 얘기할 상대가 늘어나서 다행이야.

널 못 본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스승님을 본 건 참 조았어. 열흘이 참 금방 가더라. 스승님이 떠난 건 아쉽긴 하지만 그 후에 과제가 엄청 쏘다져서 우울해할 틈이 없으니 걱정 마.

제국력 468년 녹음의 달 3일

레이너드.

추신. 생일 선물이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야. 시간을 겨우 내서 산 거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마음이 노였어.]

* * *

[레이에게.

편지가 늦어서 미안해. 최근에 황태자 전하의 성년식이 있었거든. 그 때문에 영지에 좀 갔다 오느라 조금 바빴어.

내가 영지에 가는 것과 황태자 전하의 성년식이 무슨 상관이냐고? 핑계처럼 들리겠지만 핑계가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이제 겨우 열네 살이야. 사교계에 데뷔를 하기는커녕, 데뷔탕트를 치르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어.

그런데 황태자 전하가 데이브를 통해 내가 성년식에 와 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해 왔어.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그래서 참석하지 않기 위해 몸이 좋지 않아 영지에 간다는 핑계를 대며 영지에 다녀왔어. 덕분에 올여름은 시원하게 보낼 수 있었어. 카르티아 영지는 수도보다 남쪽에 있기는 한데 해안가를 끼고 있어서 선선하거든.

쌍둥이 오빠들도 같이 간 덕분에 두 달이 지겹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레이, 이번에 크론 왕국의 여름이 평년보다 무더웠다고 하는데 더위는 먹지 않았어? 걱정된다.

제국력 470년 하늘의 달 20일

애정을 담아

유리나가.]

[유리나에게.

별일 없었던 것 같아 다행이야. 올 때가 됐는데도 편지가 오지 않아서 많이 걱정했어.

음, 황태자 전하의 성년식에 참석하지 않고 영지로 간 것은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 이건 그냥 내 생각이지만 앞으로도 그분과는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앞으로도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영지로 가 있어. 아예 데뷔탕트를 치를 때까지 영지에서 지내는 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아. 들어보니까 그곳은 바다도 있어서 수도 생활보다는 훨씬 재밌을 것 같으니까.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이번 여름이 덥기는 했지만 이곳에는 남아도는 게 마법사들이라 아카데미 곳곳에 마법을 걸어서 온도를 쾌적하게 유지하고 있거든.

그러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너야말로 몸조심해.

제국력 470년 고요의 달 2일

레이너드.

추신.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영지에 갔다고 했는데 설마 진짜 안 좋은 건 아니지? 아닐 거라는 것은 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봐. 아니었으면 좋겠다.]

* * *

[레이에게.

글씨가 알아보기 힘든 건 이해해 줘. 지금 흔들리는 마차에서 급하게 편지를 쓰고 있어서 그래.

있잖아, 레이! 내가 지금 어디 가고 있는지 알아? 나 지금 데이브와 크론 왕국으로 향하고 있어.

곧 있으면 네 열여덟 번째 생일이잖아. 성년이 되는 날까지 이국땅에서 널 혼자 있게 할 수 없다고 아버지와 오빠들께 거듭 말했더니 아버지께 크론 왕국에 갔다 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어.

네가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나는 크론 왕국의 국경을 넘고 있을 거야.

조금만 기다려. 얼른 갈게.

제국력 471년 하늘의 달 27일

널 만나러 가는

유리나가.]

* * *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이 있다. 뽀얀 피부, 발그레한 두 뺨, 볼록하게 솟은 반듯한 이마, 앙증맞은 코, 붉은 입술, 가늘고 긴 손가락.

어느 곳 하나 안 예쁜 곳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예쁜 곳을 꼽으라면 별을 박아 넣은 듯 반짝반짝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인상 깊은 소녀.

유리나 카르티아.

‘많이 자랐을까.’

레이너드는 침대에 누워 열다섯 살이 되었을 그녀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건 열 살 무렵의 모습뿐. 사실 그 모습마저 흐릿했다.

벌써 헤어진 지 5년. 유리나의 얼굴을 잊지 않고 계속 머릿속에 붙잡아 두려고 해도 새침한 눈을 한 그녀는 계속 머릿속에서 조금씩 빠져나갔다. 유일하게 새파란 눈동자만 기억에 선명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그 얼굴을 그려 보았다. 쌍꺼풀은 조금 더 진해졌을 것 같다. 앙증맞던 코는 조금 더 오뚝해졌을 것이며 말간 눈동자엔 조금 더 많은 감정이 담겨 있겠지.

‘키는 얼마나 컸을까.’

저택을 떠나올 당시에도 그녀는 그보다 살짝 작았으니까 5년이 지난 지금은 그보다 훨씬 작을 것이다. 데이브 또한 레이너드가 또래에 비해서 큰 것에 비해 유리나는 또래보다 약간 작다는 말을 스쳐 지나가듯 얘기해 준 적이 있었다.

어깨에도 못 미치는 작은 그녀가 촉촉한 눈으로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는 상상을 해 보았다. 도톰한 붉은 입술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환청이 들린다.

―레이.

이른 새벽, 작은 새가 종알거리는 것 같은 부드럽고 산뜻한 목소리. 유리나가 제 이름을 불러 줄 때면 레이너드는 꼭 이 세상에서 제일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녀에게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이를 악물고 노력을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허망함뿐이었다. 의지할 곳이 그녀밖에 없는 레이너드와 달리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그녀를 아껴 주는 가족들이 있으니까.

상상에 조금 더 사심이 담기기 시작했다.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 그가 처음으로 선물해 주었던 루비 팔찌를 차고 있을 하얀 팔목, 드레스 자락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한 하얀 발목.

그리고 그 하얀 발목 위를 조금 더 올라가면…….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레이너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마른세수를 했다. 가빠진 호흡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아 잠시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미쳤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이 분명했다. 뭐든 도가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고, 그리움을 지나칠 정도로 꾹꾹 참다 보니 실성을 한 것이다.

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지만 유리나만 생각하면 생각이 이상한 쪽으로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갔다.

‘이대로는 곤란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은 아마도 틀린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리나가 잊히기는커녕 그리움만 무게를 더해 갔다.

돌아가려면 아직도 2년하고도 반년이나 남았다는 생각에 기를 쓰고 유리나를 털어내 보려고 노력하지만, 방금처럼 잠깐만 방심하면 감은 눈 위로 그녀의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하긴, 잊는 게 가능했다면 이곳에서 생활하는 지난 5년 동안 그녀를 잊어야만 했다. 하지만 오히려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자꾸만 순수하게 웃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빨려 들어가는 늪에 빠져 버린 것 같았다.

‘과제나 해야지.’

생각을 돌리기 위해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향하는데 문득 노크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달갑지 않은 방해였겠지만 지금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덕분에 생각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있었다.

“누구?”

재빨리 문을 열자 무언가를 팔랑팔랑 흔들며 웃고 있는 에이든의 얼굴이 보였다.

정식으로 입학식을 치르기도 전에 아카데미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는 당시 레이너드에게 살갑게 굴며 이것저것 캐물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지난 5년 동안 끊임없이 레이너드의 옆에서 알짱거렸다. 세간에서는 늘 붙어 다니는 둘을 보고 막역한 친구 사이라고들 표현하지만, 글쎄.

“무슨 일이야?”

“이봐, 레이. 내가 뭘 갖고 왔게?”

에이든이 5년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실실 웃었다. 레이너드는 그가 부채마냥 팔랑팔랑 흔들고 있는 것이 편지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편지의 발신인도 금세 눈치챘다.

그에게 편지를 보낼 사람은 유리나와 데이브 외에도 몇 명 있지만, 이렇게 편지지에서 희미하게 향기가 새어 나오는 건 유리나의 편지밖에 없었다.

“이리 줘.”

“뭐가 그리도 급하실까? 가족도 없다면서 매달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단 말이야. 우리 가족은 일 년에 한 번 보낼까 말까 하는데.”

“에이든, 얼른 줘.”

단호한 표정으로 손을 뻗자 에이든이 그제야 멋쩍은 표정으로 편지를 건넸다.

“미안, 여기 있어. 앞으로는 주의할게.”

“괜찮아.”

“그나저나 누구야?”

에이든이 소중하게 편지 봉투를 쓸어내리는 레이너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리나 카르티아? 처음 들어 보는 성인데 제국 사람인가. 혹시 제국에 두고 온 연인?”

에이든은 크론 왕국 출신이다. 그것도 시골과 다름없는 남부 지방 출신. 카르티아 가문이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이라고 하지만, 에이든은 남의 나라 고위 귀족 가문의 이름까지 외우고 있을 만큼 제국에 관심이 있지 않았다.

“알 것 없어.”

“그럼, 네가 맨날 실실거리면서 편지를 보내는 그분?”

“허튼소리.”

말투는 툴툴거려도 대답해 주는 레이너드의 목소리에도 다소 웃음이 섞여 있었다. 처음에는 에이든의 살가움이 낯설고 당혹스러웠지만, 5년이 지난 지금은 그게 그의 애정 표현이라는 것을 안다.

다만, 제 성격 탓에 그에게 살갑게 대해 주지 못해서 그렇지.

레이너드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하는 그에게 입꼬리를 올려 보인 뒤 편지 뒷면을 확인했다. 이미 누가 보냈는지 알고 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유리나 카르티아.]

유리나의 글씨체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어쩜 이렇게 귀여운 걸까. 새침한 성격과 다르게 동글동글한 필체를 보자마자 웃음부터 나왔다.

평소와 달리 표정 관리를 전혀 안 하고 허물어진 표정으로 웃는 그를 보며 레이너드는 입을 떡 벌렸다.

“와, 표정부터 달라지네. 나와 얘기할 때도 그런 표정 좀 지어 주지 그래?”

대답 대신 어깨를 한 번 으쓱인 에이든은 조급하게 밀랍 인장을 뜯었다. 그러다 에이든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편지를 등 뒤로 감췄다. 에이든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흘겼다.

“뭐야? 설마 내가 편지를 엿보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런데 이 편지를 왜 네가 갖고 와?”

“우리 방 편지함에 꽂혀 있어서 갖다준 거야. 맞은편이라 잘못 넣어 놨나 봐. 오히려 나에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아? 너에게 고맙다는 얘기는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불청객 취급이라니.”

말로는 툴툴거리면서도 에이든은 얼굴에서 호기심을 완벽하게 지우지 못했다.

“그래서 누구야, 레이? 누구길래 그렇게 즐겁다는 듯이 웃는 거야? 진짜 연인이라도 돼? 이제 얘기 좀 해 줄 때가 되지 않았어?”

“알 것 없어.”

“친구 사이에 뭔 비밀이 그렇게나 많아? 난 시시콜콜 다 말해 주잖아.”

“넌 너무 말이 많아. 그리고 레이너드라고 부르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해?”

“레이너드는 너무 길단 말이야. 레이라는 짧은 애칭을 놔두고 왜 굳이 그 긴 이름을 부르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친한 친구끼리 애칭 좀 부르는 게 어떻다고 그래? 나도 에디라고 불러 달라고 했잖아.”

“아무튼 안 돼. 레이너드라고 불러.”

레이너드는 섭섭해하는 에이든의 표정을 본 척도 안 하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세상에서 그를 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5년 전에도, 지금도 단 한 명뿐이다.

그 낯간지러우면서도 다정한 애칭이 다른 사람 입에서 나오는 것을 절대 들어 줄 수 없었다.

‘……낯간지럽나?’

스스로가 생각하고도 이상한 수식어에 레이너드는 잠시 의문이 들었다. 에이든의 입에서 나올 땐 이렇게 별 감흥이 없는 이름인데 정말 낯간지러운 게 맞나?

레이.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도 아니고 ‘레이너드’라는 긴 이름을 그저 이름을 줄여 부르는 것뿐이다. 굳이 친밀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케이틀린’을 ‘케이트’라고 줄여 부르고, ‘네이선’을 ‘네이트’라고 줄여 부르는 것처럼.

낯간지러울 일도, 다정하게 들릴 일도 전혀 없었다.

레이너드는 유리나가 부르던 제 애칭을 떠올려 보았다.

―레이.

그 푸른 눈으로 웃어 주는 얼굴을 떠올리니 몸이 간질간질하고 부끄럽게 느껴진다. 역시 낯간지러운 애칭이 맞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그는 손안에 놓인 편지를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쨌든 갖다줘서 고맙고, 지금 바쁘니까 용건이 있으면 조금 이따 다시 와.”

“어? 야, 야! 잠깐만!”

레이너드는 단호하게 축객령을 내린 뒤 문을 닫았다. 에이든이 배신당한 사람마냥 허탈한 표정을 지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진짜로 중요한 건 손에 들린 편지였다.

유리나의 이름이 적힌 부근을 괜히 한번 손끝으로 살살 문질러보다가 편지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쉬었다. 아마도 그녀는 어릴 때도 그렇고, 조금 더 큰 지금도 그렇게 이런 달콤하고 향긋한 향을 좋아하나 보다.

‘기억해 둬야지.’

유리나의 손을 떠날 당시엔 진한 향이 풍겼을 편지지엔 희미한 향기만 남아 있었다. 그게 못내 아쉬우면서도 이럴 때마다 제국과 왕국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실감이 났다.

‘보고 싶다.’

반가운 편지로도 채 충족되지 못한 그리움이 다시 마음속에서 움텄다. 애써 그리움을 떨치며 레이너드는 인장을 뜯고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레이에게.

글씨가 알아보기 힘든 건 이해해 줘. 지금 흔들리는 마차에서 급하게 편지를 쓰고 있어서 그래.]

그녀의 말마따나 편지는 평소보다 조금 덜 정돈된 필체로 쓰여 있었다. 그러나 레이너드는 이미 편지의 내용에 정신이 팔려 유독 성의가 없어 보이는 그 필체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딜 오고 있다고?’

편지를 다 읽은 뒤에도 어안이 벙벙해서 좀처럼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헛것을 보나 싶어 다시 한번 편지를 읽어 봤지만 몇 번을 읽어도 보이는 내용은 같았다.

[네가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나는 크론 왕국의 국경을 넘고 있을 거야. 조금만 기다려. 얼른 갈게.]

……정말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정말로? 유리나가? 날 만나러?

저도 모르게 거친 숨을 내쉬던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겨 입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 어? 레이! 어디 가!”

밖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지 에이든이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나 복도에 쩌렁쩌렁 울리는 ‘레이’라는 애칭을 정정해 줄 새도 없이 레이너드는 서둘러 아카데미를 빠져나갔다.

* * *

“이제 곧 크론 왕국의 국경을 지나가겠네요. 내일이나 모레쯤 되면 통과할 것 같습니다.”

마차 밖을 보던 데이브가 중얼거렸다. 어느덧 삼십 대 중반에 접어든 그는 5년 전과 별다를 것 없이 이십 대 초반의 외모를 자랑했다.

유리나는 그가 특별히 제조해서 사용하는 화장품이 있는 건지, 아니면 혹시 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엘프나 드래곤 같은 생명체는 아닌지 종종 궁금했다.

“그래? 어떻게 알았어? 아무리 봐도 평야밖에 보이지 않는데.”

거대한 텍시 산맥이 있는 제국의 서쪽과는 달리 제국의 동쪽은 드넓은 평야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그 비옥한 땅을 굽이굽이 흐르는 모아른 강을 경계로 크론 왕국과 국경선이 형성되어 있는데 아무리 밖을 바라봐도 모아른 강은 보이지 않았다.

창밖에 폴폴 날리는 먼지를 보며 유리나가 콧잔등을 찌푸리자 데이브가 가볍게 웃었다.

“아가씨, 제가 전에 수업 때 크론 왕국의 마나 농도가 제국보다 진하다고 말씀드린 거 기억하고 계십니까?”

“당연히 기억하지. 다른 방면에선 제국에 많이 뒤처진 크론 왕국이 유독 제국보다 마법이 훨씬 발달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마나 농도 때문이라고 했잖아.”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역시 레이너드 군과 마찬가지로 아가씨도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학생입니다.”

“별것 아닌 걸로 띄워 주지 마. 이건 마법 상식 중에서도 아주 기초잖아?”

애 취급도 정도껏 해야지. 유리나는 그를 샐쭉 흘겼다. 그의 눈에 자신이 마냥 어린아이로 보일 거라는 것을 알아도 이건 조금 심했다.

지금뿐만 아니라 데이브는 그녀가 누구나가 다 아는 상식을 말해도 똑똑하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는 했던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대체 데이브가 까다로운 레이너드를 어떻게 살살 달래며 마법을 가르쳤나 했는데, 그의 비법은 바로 이 칭찬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애도 아니고.’

열두 살 레이너드에게나 통했을 법한 그의 비법은 그녀에겐 통하지 않았다. 유리나는 자신을 보고 흐뭇하게 웃고 있는 데이브에게 다시 한번 뾰로통한 시선을 던졌다가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가씨, 그렇게 손을 내밀면 위험해요!”

유리나의 옆에서 하품을 하던 베시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괜찮아. 나무 한 그루도 없는 곳인데 손을 내민다고 해서 위험할 게 뭐가 있어. 그나저나 데이브, 마나 농도 이야기를 꺼낸다는 건 지금 이곳의 마나 농도가 진해졌다는 소리야?”

“역시 하나를 가르쳐 드리면 둘을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내가 애도 아니고, 그런 칭찬은 필요 없대도 그러네.”

데이브가 하하 웃으며 유리나에게로 손을 뻗었다가 금방 손을 거뒀다.

어느덧 그녀의 나이도 열다섯 살.

나이상으론 아직 성인은 아니었지만, 신분 차이가 있었어도 허물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 있던 열 살 아이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나이만 세 살 모자랄 뿐이지 유리나는 이제 어엿한 성인의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유리나는 다소 씁쓸한 표정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는 그의 손을 끌어와 제 머리 위에 얹었다. 화들짝 놀라 손을 빼려고 하는 그에게 고개를 저으며 웃어 보였다.

“여기엔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데이브.”

“어머, 아가씨. 저는 안 보이시나요? 저도 눈이 있는걸요?”

“에이, 베시는 내 편이잖아. 안 그래?”

“그건 그래요.”

유리나는 소녀처럼 까르르 웃는 베시를 보며 웃다가 직접 데이브의 손을 움직여 제 머리를 문질렀다.

“데이브는 내게 삼촌 같은 사람인걸. 내가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고 유리나라고 부르라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아?”

데이브가 입술을 잠시 깨물었다가 손을 움직여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유리나는 눈을 감고 그의 손길을 느꼈다. 애정이 담뿍 어린 손길에 기분이 좋아졌다.

전에 홀로 떨고 있는 레이너드를 보며 애정이 필요한 동물 같다고 느꼈는데 어쩌면 정말 따뜻한 애정이 필요한 건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걸.’

하루아침에 사랑하던 사람들을 잃고 이곳에 떨어졌을 때, 태연한 척하려고 해도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던가. 처음엔 가족이라고 인정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이젠 진짜 제 가족 같았다. 다 그들의 조건 없는 애정 덕분이었다.

비록 신분은 다르고, 피도 섞이지 않았지만 데이브는 그녀에게 그런 애정을 준 가족 중 하나였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아.”

지켜 주겠다고 손가락을 걸던 그 선한 미소가 생각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따뜻한 애정을 보여 주었던 레이너드를 생각하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마음 한구석에 꾹꾹 눌러 봉인해 두었던 그리움이 넘쳐흘러 버릴 듯이 넘실거리는 듯한 느낌에 유리나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아냐, 아무것도.”

“갑자기 안 하시던 멀미를 하시나? 아가씨, 속이 울렁거리세요?”

유리나는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데이브와 베시에게 고개를 저어 보인 뒤 코로 숨을 깊숙이 들이쉬었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마음을 이내 다 잡았다.

‘어차피 곧 만나는걸.’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다시 마차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나저나 아까 하던 얘기를 계속해야지. 국경 근처에 다다랐기 때문에 마나 농도가 진해졌다고 했지? 그걸 어떻게 숨 쉬듯이 느낄 수 있어, 데이브?”

유리나의 태연한 목소리에 데이브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대답했다.

“그걸 느끼지 못하면 마법을 그만둬야죠.”

“나는 느끼지 못하겠는걸? 역시 나는 진작 마법을 그만뒀어야 했나?”

“아가씨께서도 집중을 하시면 충분히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유리나는 눈을 감고 데이브의 말처럼 온 신경을 집중했다. 얼마 되지 않는 체내 마나를 끌어모아 손끝에 집중하니 손가락에 달라붙은 마나의 양이 제국 수도에 있을 때보다 많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세를 모아 스펠을 외워 보았다. 저택에서 하던 것보다 조금 큰 빛 덩어리가 마차 안에 둥둥 떠다녔다.

“우와, 아가씨! 전에 보던 것보다 훨씬 커요!”

베시가 놀란 눈을 하며 손뼉을 짝짝 쳤다. 데이브 또한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별것 아닌 마법인데.’

어쩐지 과한 반응에 민망해져서 유리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떠세요, 아가씨? 확실히 마나 농도가 진해진 것 같죠?”

“응, 그러네. 빛 구체 크기 좀 봐. 난 내가 이만한 걸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몰랐어.”

“그리고 체력 소모도 적으시고요.”

“어,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러네.”

유리나는 제가 호흡을 편안하게 하고 있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깜짝 놀랐다. 저택에서는 작은 구체를 띄워 놓고도 체력 소모가 커서 잠시간 동안 숨을 헐떡여야 했던 것이다.

‘내 본래 실력이 이 정도만 돼도 좋을 텐데.’

그녀는 제 주위를 뽈뽈거리며 날아다니는 빛 구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5년 전, 레이너드가 크론 왕국으로 떠난 뒤 유리나라고 마냥 안심하고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의 실력을 못 믿는 건 아니었다.

다만, 언제나 예상치 못한 변수는 생기는 법이고 그 변수를 예측해서 대비하는 건 늘 중요한 일이었다.

저택 밖에 나갈 땐 항상 호위 기사가 함께 다니고, 2년 뒤 레이너드가 졸업하고 돌아오면 그와 함께 다닐 테지만 마냥 그들에게만 의지할 수 없었다.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그들에게 떨어지거나,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큰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할 것인가.

그래서 유리나는 호신술을 배우기로 했다. 배운다고 해 봤자 누군가가 정말 작정하고 달려든다면 아무짝에도 소용없겠지만 최소한의 준비였다.

처음엔 단검을 이용한 호신술을 배우려고 했는데, 그런 위험한 물건을 쥐게 둘 수 없다고 길길이 날뛰는 카르티아 후작 때문에 마법으로 종목을 변경해야만 했다.

그건 유리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아무리 호신술을 배운다고 해도 날카로운 단검을 쓴다고 나서다가 오히려 역으로 위험해지는 상황이 올 수 있었으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리나는 마법 재능이 있긴 있었지만 아주 미미했다. 우습게도 예상했던 일이라 아쉽지도 않았다.

‘악녀에게 뛰어난 마법 능력 같은 설정을 넣어 줄 리가 없지.’

이 세계에서 마법을 사용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 자연 상태의 마나.

둘, 마나 친화력.

셋, 시전자의 몸속에 있는 체내 마나.

마나 농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자연 상태의 마나는 어디든 존재하니 마법 재능을 결정하는 건 마나 친화력과 체내 마나, 이 두 가지였다.

마법은 체내 마나와 자연 마나를 결합시키면서 생성되는 인공 마나로 발현할 수 있는데, 당연히 마나 친화력이 높을수록, 체내 마나가 많을수록 더 고도의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유리나는 마나 친화력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타고난 체내 마나가 별로 없었다.

체내 마나는 날 때부터 몸에 담아 둘 수 있는 최대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리 늘리려고 노력해 봤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유리나가 할 수 있는 마법이라고는 마나를 많이 쓰지 않는 간단한 마법 정도였다.

이를테면 식은 차를 데우거나 조금 전처럼 작은 빛을 만들어 내는 것 정도. 집중해서 마나를 최대치까지 사용하면 간단한 치료 마법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 탈진해서 하루 종일 잠을 자야 했다.

전에 한 번 치기에 팔에 긁힌 상처를 치료해 보았다가 기절하다시피 잠든 이후로 치료 마법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는다.

‘레이너드를 처음 보고 데이브가 놀란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지.’

데이브의 말에 따르면 레이너드는 체내 마나가 마법사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많은데 그걸 숨 쉬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갈무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나 친화력 또한 최고 수준으로 높았던 것이다.

타고난 마나에 비해 마나 친화력이 높지 않으면 마나를 갈무리하지 못하고 열병에 시달리다 죽는 일도 종종 있다고 하니 무작정 체내 마나가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니었다.

마차 안을 돌아다니는 빛 구체를 귀여운 고양이 보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던 유리나는 가빠지는 호흡을 느끼고 손을 저었다. 빛 구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데이브는 크론 왕립 아카데미를 졸업했다고 했지? 오랜만에 아카데미에 다시 가는 소감이 어때?”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묻자 데이브는 지금껏 대답을 잘하던 것과 달리 입을 다물고 부드럽게 웃었다.

“그건 무슨 표정이야? 너무 감격스러워서 말이 안 나오는 거야?”

“‘내가 그 지옥에 또다시 내 발로 걸어 들어갈 줄이야’라는 표정입니다, 아가씨.”

유리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많이 보던 표정인데.’

지금 데이브의 표정은 지도 교수님께 졸업 논문 중간 피드백을 받으러 가던 4학년 선배가 짓던 것과 비슷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과 함께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애쓰던 모습이 얼마나 안쓰러워 보였는지.

짓궂은 동기 몇몇은 그런 그를 보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다며 낄낄거렸다. 1년 뒤 똑같은 고통에 시달릴 제 미래는 꿈에도 모른 채.

유리나는 데이브에게 묘하게 동정심이 일었다.

“학업이 힘들다는 소문은 듣긴 했는데 많이 힘들었나 보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지금 말과 표정이 일치하지 않다는 거 알고 있어? 지금 얼굴은 완전히 죽을상을 하고 있어.”

“그럴 리가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데이브의 표정은 여전히 석연치 않았다. 유리나는 그간 레이너드가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힘들다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는데.’

그가 보낸 편지에는 늘 잘 지내고 있다, 사람들이 좋다, 공부가 즐겁다, 마법이 많이 늘었다 등등 긍정적인 말뿐이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타지에서, 그것도 가뜩이나 공부나 예법에 익숙하지 않은 그가 마냥 편하게 지냈을 리가 없었다.

유리나 또한 그를 아카데미로 떠나보낸 후, 한동안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엄마의 심정으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걱정을 했었다.

“데이브도 그렇게 힘들어하던 곳인데, 레이는 정말 잘하고 있을까? 편지로는 늘 잘 지내고 있다고 쓰긴 했는데.”

걱정이 담긴 그녀의 말에 데이브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녀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아가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적응하지 못하고 뭔 일이 있었다면 진작 소식이 오지 않았겠습니까?”

“음, 그건 그렇지만…….”

“게다가 이 데이브가 가르친 제자가 아닙니까? 누구보다도 잘하고 있을 겁니다.”

유리나는 데이브의 표정을 살피며 혀를 찼다. 다리를 꼬고 턱을 살짝 추켜올린 그의 표정은 꼭 레이너드가 잘난 척을 할 때와 비슷해 보였다.

레이너드야 원래 오만한 구석이 있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마냥 자상해 보이는 데이브가 마법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저리 변하는 모습은 5년 넘게 지켜봐도 여전히 신기했다.

‘마법사들은 다 저렇게 자신만만한 거야?’

물어볼까 하다가 참았다.

“그리고 아가씨께선 잘 모르고 계시지만 레이너드 군은 독한 면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도 악착같이 잘 살아남았을 겁니다.”

“그거 칭찬이야?”

“당연히 칭찬입니다.”

“도무지 칭찬으로는 안 들리는데.”

더 이상 변명을 하는 대신 데이브는 호탕하게 웃었다.

* * *

국경 지역이라 마땅한 마을이 없어 그날 밤에는 노숙을 해야 했다. 노숙이라고 해 봤자, 바닥에 대충 천을 깔고 잠을 청한 기사들과 달리 유리나는 널찍한 마차 안에서 홀로 잠을 청했다.

불침번을 서는 기사 둘이 뜬눈으로 마차를 지켰으니 나름대로 호화로운 노숙이었다.

서둘러야 해지기 전에 국경을 넘는다는 말에 그다음 날은 동이 트기도 전에 서둘러 출발해야만 했다. 그래 봤자 유리나가 할 일은 딱히 없었다.

그저 베시가 깨우는 대로 일어나 데이브가 마차에 타기 전에 세수를 하고 겉옷을 입은 게 전부였다. 펼쳤던 침낭을 챙기고 말을 돌보는 기사들과 고용인들에 비하면 충분히 귀족다운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식사할 시간도, 식량도 없어 다들 육포를 뜯는 와중에도 혼자 지난 마을에서 산 빵과 잼을 먹을 수 있었다.

‘권력이란 참 좋아.’

지난 5년 동안 수없이 겪은 바를 새삼 느끼며 유리나는 찌뿌드드한 허리를 문질렀다.

쾌적한 여행을 위해 데이브가 마차에 이런저런 마법을 걸어 둔 덕분에 마차는 꼭 기차라도 탄 것처럼 흔들림 없이 편안했지만 계속 앉아만 있으니 온몸이 쑤셨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단 생각이 간절했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고. 풍경 구경도, 카드 게임도 이젠 지겨워질 때쯤, 창문 너머로 황금빛 햇빛에 반짝이는 모아른 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오는데, 베시가 그녀보다도 더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가씨, 저 큰일 났어요.”

진짜로 무슨 큰일 났나 싶어 고개를 돌린 유리나는 생각보다 베시의 표정이 평온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베시는 뜀박질을 하고 온 사람처럼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니까 심호흡은 장난이었구나?’

유리나는 재빨리 파악하고 덩달아 장난스럽게 그녀를 흘겼다. 그녀보다 무려 열 살이나 많은 베시는 언제 봐도 소녀 같은 면이 있었다.

“베시, 설마 곧 레이를 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아가씨. 레이너드 님은 곧 성인이 되신다고요.”

“응, 그건 그렇지.”

유리나가 건성으로 받아넘기자 베시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그 모습도 꽤 깜찍해 보였다.

“‘응, 그렇지’가 아니에요. 레이너드 님이 많이 크셨을 텐데 기대되지 않으세요?”

“으음…… 별로?”

유리나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레이너드를 만나러 가는 게 기대되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하게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물이 날 것 같았으니까.

그와 떨어져 있던 5년이란 시간은 추억도 다 잊고 그리움만 남을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레이너드가 성장한 모습이 기대가 되냐고? 글쎄다. 그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궁금하긴 했어도 딱히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기대를 하거나 마음이 설레는 일은 없었다.

“레이너드 님은 솔직히 잘 생기셨잖아요. 저는 그분께서 어떤 남성으로 자라셨을지 솔직히 기대돼요. 아, 그렇다고 제가 레이너드 님께 사심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동생 같은 분이 컸다고 생각하니까…….”

“그냥 사심이 담겼다고 해, 베시.”

“그런 거 아니에요!”

유리나는 다급한 그녀의 대답에 소리 내어 웃었다.

‘레이너드가 성장한 모습이라고?’

베시가 하도 레이너드가 잘생겼다는 점을 강조해서 조금 호기심이 돌았다. 확실히 그의 외모는 어릴 적부터, 그것도 제대로 씻지 못해 꼬질꼬질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에도 빛이 났다.

소설 속에서도 분명 성인이 된 후 아카데미에서 돌아온 그가 그 완벽한 외모로 뭇 영애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모습이 좀처럼 상상되지 않았다. 그녀의 상상 속 레이너드는 늘 저택을 떠날 무렵, 작고 어렸던 열세 살 때 모습으로 있었다.

그가 보낸 편지를 보면 확실히 그가 성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여전히 동글동글한 눈으로 해맑게 재잘대던 5년 전 모습만 떠올랐다.

그래도 그녀는 꿋꿋하게 며칠 뒤 마주할 레이너드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곧 열여덟 살이니 키는 아주 많이 컸을 것 같고, 손도 조금 더 커졌을 것 같다.

‘골격 자체는 좋아서 어깨도 넓어졌을 것 같은데, 왜소했던 몸에는 근육이 좀 붙었으…… 려나?’

생각이 의문으로 끝난 건 그것에 대해서는 조금, 아니, 많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데이브를 비롯하여 그녀가 지금까지 본 마법사들은 대체적으로 조금 마른 체형이었다.

항상 연구실에 처박혀서 연구만 해 대니 근육이 붙을 일은 당연히 없었고, 먹을 것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항상 압박감에 시달리니 살도 제대로 찌지 않았던 것이다.

‘레이라고 다르진 않을 것 같은데.’

베시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상상을 계속 이어 가던 유리나는 이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누군가가 레이너드의 머리와 다리를 쭉 잡아당긴 것처럼, 열세 살 레이너드의 얼굴에 키만 허우대같이 큰 그의 모습이 상상됐던 탓이다. 엽기가 따로 없었다.

“아가씨, 갑자기 왜 그렇게 웃으세요?”

“아무것도…….”

유리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막고 끅끅거렸다. 질문을 건넸던 베시는 물론이고, 얌전히 책을 읽고 있던 데이브 또한 이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루했던 여행에 꿀맛 같은 웃음이었다.

* * *

카르티아 가문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인지 카르티아 가문의 문양을 달고 있는 마차는 제국의 검문소는 물론이고, 크론 왕국의 검문소 또한 별일 없이 통과했다.

“몸이 쑤셔 죽는 줄 알았어요, 아가씨.”

마차에서 내린 베시가 하늘 높이 기지개를 켜며 동시에 하품을 했다. 데이브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던 유리나는 그녀를 보고 웃었다.

“베시, 사람도 많은데 그러면 어떡해.”

“헙!”

베시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고 서둘러 손으로 하품을 하던 입을 막았다.

그간 일정이 너무 고된 탓에 오늘은 검문소 옆에 있는 마을에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커다란 모아른 강을 끼고 있는 데다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다 보니 국경 지역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워낙 외진 곳이라 마을이 없던 제국의 국경 지역하고는 달랐다.

“구경해도 될까요, 아가씨?”

유리나는 눈을 반짝이는 베시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일단 조금 쉬었다 나와서. 지금은 따뜻한 물에 몸 좀 담그고 싶어.”

“숙소를 잡았습니다, 아가씨.”

때마침 마을에서 가장 좋은 숙소에서 나온 데이브가 그녀를 방으로 안내했다.

베시의 시중을 받으며 원하는 대로 따뜻한 물에 몸을 씻은 유리나는 간단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오랜만에 누리는 호사에 눈꺼풀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베시가 놀러 나가야 하니 주무시면 안 된다고 말하는 소리가 한 귀로 흘러들어 왔다가 한 귀로 흘러 나갔다.

설핏 잠이 들려고 할 때 언뜻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데이브인가 봐. 슈미즈 차림이 아니니까 열어 줘도 괜찮아.”

“네.”

베시가 문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고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당황한 듯한 베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세요?”

어? 데이브가 아닌가? 잠이 확 달아났다. 유리나는 본능적으로 침대에서 빠져나와 방 한구석으로 도망갔다.

“누구냐고 물었잖아요! 아니, 잠깐만! 들어오면 안 돼요!”

그러다 베시가 도망치지 않고 온몸으로 침입자를 막고 있는 것에 깜짝 놀라 베시 쪽으로 다급하게 다가갔다. 머릿속으로는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마법을 떠올리면서.

‘파이어 볼? 아냐, 잘못 조준했다간 오히려 베시가 큰일 날 수가 있어. 그럼 전기?’

호신용 전기 충격기처럼 침입자에게 전기 충격을 주면 베시를 데리고 데이브에게 도망갈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다. 원래라면 자신의 실력으로 불가능했겠지만 이곳은 크론 왕국이다.

오늘 저녁에 기절할 각오를 한다면 충분히 쓸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유리나가 손끝에 마나를 모으며 베시를 구하기 위해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침입자를 온몸으로 막던 베시가 갑자기 “어? 어?” 하는 놀란 소리를 내더니 옆으로 비켜섰다.

이곳에 온 목적이 유리나였는지, 침입자는 더 이상 방해 없이 유리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유리나는 갑자기 길을 비켜 준 베시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낄 새도 없이 서둘러 방구석까지 뒷걸음질을 쳤다.

“오지 마! 오면 가만히 안 둘 거야.”

그녀의 으름장에도 남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고작 몇 걸음 만에 유리나의 코앞까지 성큼 다가오더니 뒤집어썼던 후드를 뒤로 넘겼다.

그에게 마법을 날려 줄 생각을 하고 있던 유리나는 그를 마주 보는 순간 집중력을 잃고 말았다. 파지직 소리를 내며 손끝에 모였던 마나가 다시 흩어졌다.

‘설마…….’

그늘진 실내에서도 꼭 햇빛 아래 있는 것처럼 화사한 밝은 금발,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뜯어봐도 모난 곳이 없는 수려한 외모, 그리고…….

그녀를 흔들림 없이 바라보는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

자신을 바라보는 바로 그 붉은 눈에서 유리나는 그가 자신이 늘 기다려 오던 남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레이?”

마치 동상처럼 가만히 서 있던 그가 그 이름 하나에 반응했다. 어렸을 땐 보이지 않았던 목울대가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굳었던 표정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지다가 간신히 미소를 그려 냈다.

“유리나.”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막연히 예전에 듣던 높고 낭랑한 아이의 목소리를 상상했던 유리나는 그 남자다운 목소리에 다시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저 남자가 정말 레이가 맞긴 한 걸까. 붉은 눈을 본다면 분명히 그가 맞는데도 자꾸 제 눈을 의심하게 된다. 유리나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는 동안, 남자가 그녀에게로 팔을 뻗었다.

“유리나.”

항상 유리나의 품에 쏙 안기던 그가 이번엔 그녀를 제 품에 가둬 버릴 듯이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그가 유리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속삭였다. 뜨거운 숨결이 예민한 목 위로 쏟아지는 생소한 느낌에 유리나는 그의 품에서 몸을 바스락거렸다.

도망갈 의도는 없었는데 다르게 해석했는지 레이너드가 허리 조금 더 세게 끌어당겼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어.”

레이너드가 그녀의 향기를 맡는 것처럼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유리나는 점점 더 거칠어지는 그의 호흡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낯선 장소, 낯선 얼굴, 낯선 눈높이, 낯선 목소리, 낯선 말투, 낯선 품.

5년이란 세월은 너무 길어서 유리나는 눈앞의 남자에게서 자기가 알고 있던 맹랑한 열세 살 꼬마 아이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마냥 반가울 줄 알았던 그와의 재회가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낯섦 속에서 그녀는 제 기억과 똑같은 것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녀의 몸을 따뜻하게 덥혀 주는 다정한 온기.

눈앞에 데이브를 뛰어넘을 마법사가 될 거라고 오만하게 웃던 열세 살 레이너드의 얼굴이 저절로 그려졌다. 눈을 감고 그의 체온을 느끼는 그녀의 얼굴엔 어느새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유리나는 이제는 척추뼈 대신 단단한 근육이 만져지는 그의 등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나도 보고 싶었어, 레이.”

무려 5년 만의 재회였다.

* * *

제 뒤를 졸졸 따라오는 에이든을 무시하고 아카데미를 빠져나온 레이너드는 마구간으로 뛰어가 제 말에 올라탔다.

아버지인 테시 남작에게서 검과 승마를 배웠다던 에이든의 손에 이끌려 지난 5년간 검과 승마를 배웠기 때문에 말을 숨 쉬는 것처럼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다.

그는 아카데미를 벗어나 제국과 왕국의 국경으로 향했다.

편지에는 자세한 내용은 쓰여 있지 않았지만 귀족 아가씨인 유리나가 많은 호위 기사를 거느리며 안전하게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검문소는 딱 하나뿐이었다. 그 덕분에 유리나의 경로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제발 만날 수 있기를…….’

생각해 보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를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다는 마음에 무작정 국경을 향해 달려가고는 있지만 조금만 길이 어긋나면 오히려 기다림의 시간만 더 길어질 터였다.

그걸 알면서도 유리나에게 달려가는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보러 온다는데 아카데미에서 에이든의 시시껄렁한 수다나 들으며 태평하게 수업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레이너드는 유리나가 편지에 적었던 날짜와 마차로 모아른 강까지 다다르는 시간을 비교해 가며 하염없이 말을 몰았다. 다행히도 그녀보다는 먼저 국경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중간중간 공간 이동 마법을 쓰고, 말에 가속 마법까지 걸며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빨리 국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하지 않았어.’

카르티아 가문의 마차가 국경을 통과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잔뜩 긴장했던 몸에서 힘을 빼며 안심을 할 수 있었다.

하루, 이틀, 사흘.

5년보다도 더 길게 느껴졌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저 멀리서 카르티아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다리를 넘어오는 것이 보였다.

쉴 새 없이 말을 몰고 왔을 때보다도 가슴이 더 세차게 뛰었다.

처음에는 유리나가 머무는 숙소 입구에서 그녀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다. 분명 그녀는 오랜 여행에 지친 몸을 씻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밖으로 나올 테니까.

그렇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유리나는커녕, 데이브를 비롯한 카르티아 가문의 사람들이 아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초조함에 손까지 떨려 왔다.

결국 레이너드는 무례함을 무릅쓰고 유리나의 방으로 걸어갔다.

“누, 누구세요?”

오랜만에 보는 베시는 키가 많이 작아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예전과 얼굴이 똑같았다. 그 반가운 얼굴에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베시의 너머로 낯익은 듯 낯선 얼굴이 보였다.

분홍빛이 도는 금발, 멀리서도 빛이 나는 뽀얀 피부, 가녀린 체구, 낯선 침입자를 경계하는 듯 움츠리면서도 주눅 들지 않은 표정.

유리나 카르티아.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직접 손으로 그녀를 안아 봐야만 그녀의 존재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레이너드는 베시에게 제 정체를 채 밝히지도 못하고 안으로 성큼 걸어가려고 했다. 본능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누구냐고 물었잖아요! 아니, 잠깐만! 들어오면 안 돼요!”

날카로운 베시의 목소리를 들은 뒤에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붉은 눈을 본 베시의 갈색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녀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옆으로 움직이며 길을 비켜 주었다.

그 덕분에 레이너드는 별다른 방해 없이 유리나의 앞으로 다가갔다. 포식자에게 사로잡힌 가녀린 초식 동물처럼 방구석까지 도망간 유리나가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이너드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정말 유리나일까?’

눈앞에 서 있는 소녀는 그가 상상해 오던 열다섯 살 유리나보다도 훨씬 귀엽고 예뻤다. 특히 긴 속눈썹 때문에 우수에 젖은 것처럼 보이는 푸른 눈은 촉촉하고 더욱 생기가 있어 보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호기롭게 이곳까지 찾아왔던 것과 달리 그는 유리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레이?”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비로소 듣고 싶었던 제 이름이 나오는 순간 더 이상 제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레이너드는 유리나를 품 안 가득히 끌어안았다.

‘작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유리나는 그보다 아주 약간 작았다. 품에 안으면 누가 누구를 안아 주고 있는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누가 봐도 그에게 안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지금은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상상보다도 더 가냘픈 목덜미와 어깨선, 한 팔에 감길 것 같은 허리는 그의 커다란 손으로 조금만 세게 잡았다가는 유리 인형처럼 깨져 버릴 것 같아 차마 세게 끌어안을 수도 없었다.

품속에서 그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는 모습은 또 귀여워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레이너드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유리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코로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웠던 향기가 났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꽃향기. 늘 그녀에게서 났던 꽃 비누 향. 그제야 정말로 유리나가 제 앞에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리고…….

“나도 보고 싶었어, 레이.”

유리나의 한마디를 듣는 순간, 세차게 뛰던 심장이 한순간에 멎어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레이너드는 숨조차 멈추고 유리나의 온기를 느꼈다.

이것이 꿈이라면 차라리 깨지 않기를 바랐다.

* * *

다그닥, 다그닥. 크론 왕국에 도착할 때만 해도 세 사람을 싣고 달렸던 마차는 이제 네 사람을 싣고 왕국의 수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베시와 유리나가 마차 안쪽에 마주 보며 앉았고, 데이브는 베시 옆에, 레이너드는 유리나 옆에 자리를 잡았다.

“한 사람이 늘었을 뿐인데 마차가 꽉 찬 것 같네요.”

유리나의 무릎에 담요를 덮어 주던 베시가 레이너드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전부터 그를 동생처럼 생각했던 베시는 못 본 새 훌쩍 큰 레이너드를 보며 자랑스러워했다.

어젯밤에는 유리나에게 넌지시 ‘낯선 곳에서 힘들었을 텐데 잘 자라신 것 같아서 제가 다 뿌듯해요. 주제넘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요.’라는 말을 건넸다.

유리나는 그런 그녀에게 ‘뿌듯해해도 돼. 저택에 있을 때 베시가 많이 신경 써서 돌봐 줬잖아. 레이도 내심 고마워할 거야.’라고 그녀를 치켜세워 줬다.

“으음.”

유리나는 다소 굳은 표정으로 제 오른편에 앉은 레이너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계속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레이너드가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 위로 구김살 없이 해맑게 웃던 어린 레이너드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유리나는 다시 그에게 거리감을 느꼈다.

‘낯설어.’

머리로는 제가 알던 맹랑한 꼬맹이와 눈앞의 남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비유를 하자면, 마치 집을 나갔던 귀여운 새끼 고양이가 늠름하고 늘씬한 표범이 되어 돌아온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이너드의 외모는 5년 새에 달라져도 너무 달라져 있었다. 유리나 또한 그동안 키도 크고 외모가 변해 아이의 태를 벗었지만 레이너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정말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만약 저 익숙한 붉은 눈이 아니었다면 그가 레이너드라는 사실조차 믿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객관적으로만 따지자면 그는 유리나가 괜히 뿌듯함을 느낄 정도로 참 훌륭하게 자랐다. 지금 당장 파티복을 입혀 수도 사교계에 내놓으면 남녀노소 불구하고 모두가 흘끔 돌아볼 정도로 그는 수려한 외모를 자랑했다.

‘키는 왜 또 이렇게 큰 거야?’

헤어질 당시에 그녀보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컸던 그는 지금은 그녀보다 머리통 하나는 족히 더 클 정도로 키가 많이 자랐다.

거기에 골골댄다는 마법사에 관한 편견은 어디다 던져 버렸는지, 레이너드는 비실대기는커녕 얼핏 보면 기사 지망생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몸이 좋았다.

단순히 골격이 좋아진 게 아니라 셔츠 너머로 느껴질 정도로 몸 전체에 적당히 근육도 잡혀 있었다. 검을 잡는 기사처럼 과한 근육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요즘 사교계 영애들에게서 인기가 있는 날렵한 몸이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는 마냥 꼬맹이로만 느껴졌던 그가 조금은, 아주 조금은 남자로 느껴졌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상한 치즈처럼 꼬릿꼬릿한 냄새를 풍기고 꾀죄죄한 모습까지 죄다 봤었는데.

‘대체 얘는 왜 낯설어하는 기색이 없는 건데?’

더 자존심이 상하는 건 심란한 자신과 달리 레이너드는 그녀를 전혀 어색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딱히 그에게서 특별한 반응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이쪽은 어색한데 저쪽은 태연하니 기분이 더욱 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괜히 혼자만 쓸데없이 의식하고 있는 기분이다.

“으음…….”

“유리나,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아냐, 아무것도.”

유리나는 차마 ‘네가 너무 빤히 쳐다봐서 부담스럽다’는 말을 하는 대신 그의 시선을 피하며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그에게서 몸을 떨어뜨리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지만, 레이너드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이내 따라와서 다시 거리를 좁혔다.

도망가면 따라오고, 또다시 도망가면 따라오고. 의미 없는 추격전을 하다 보니 유리나는 곧 마차 벽에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유리나가 아픈 어깨를 살살 문지르는 동안, 레이너드가 옆에 바짝 다가와 앉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희고 길어서 예쁜 편이기는 했지만 마법사답지 않게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었다.

‘굳은살?’

대체 마법사인 그에게 굳은살이 왜 있는 걸까. 그러나 그것에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유리나는 제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에 돌돌 말려 있는 것을 보고 진짜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것도 아닌 행동인데 신체 접촉을 한 것보다 더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의 손에서 머리카락을 빼내며 이 민망한 분위기를 풀 만한 이야깃거리를 생각해 냈다.

“저기, 레이.”

“응?”

“어제는 미처 물어보지 못했는데 대체 여긴 어떻게 왔어? 아카데미는 어쩌고?”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사실 나올 대답은 뻔했다. 지금 아카데미는 학기 중이고, 오늘은 수업이 있는 평일. 그런데도 그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은 소위 말해 ‘땡땡이’를 치고 있다는 뜻이다.

“으음…….”

차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는지 레이너드가 말꼬리를 흐리며 그저 웃었다. 참 예쁘장한 미소였지만 유리나는 그 표정에서 어릴 적 불리한 상황이 있을 때마다 말을 돌리던 어린 레이너드의 모습을 보았다.

그 때문인지 어색함을 잊고 그에게 장난을 건넬 수 있었다.

“왜 수업을 빼먹고 왔다고 사실대로 말을 못 하실까? 수도에서 여기까지 왕복만 최소 일주일은 넘을 텐데 그동안 계속 수업을 빼먹을 거야?”

“…….”

“정말 말 안 할 거야? 흠, 그러라고 보내 준 아카데미가 아닌데. 편지에는 매번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성적도 좋다고 해서 대견하다고 생각했는데, 다 거짓말이었구나?”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을 정도로 쿡 찌르자 레이너드가 맞은 곳을 문지르며 아프다고 엄살을 피웠다.

“아파.”

“아프라고 그런 거야. 그러니까 누가 수업 빼먹고 오랬어?”

“……안 빼먹었어.”

“거짓말하지 마.”

또다시 옆구리를 찌르자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팔을 얼른 잡았다.

“진짜 열심히 했어. 수업을 빼먹은 건 이번이 처음이야.”

“그러니까 수업을 빼먹고 왔다는 소리네.”

“으음, 그게 말이지…….”

말꼬리를 흐리며 유리나의 눈치를 보던 레이너드는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작게 웃으며 유리나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너 보니까 진짜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아.”

소리 내어 웃는 그와 달리,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한 유리나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의 따뜻한 숨이 쇄골 위에 내려앉았을 때, 유리나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이번만 봐줘. 오랜만이잖아. 그동안은 진짜로 수업을 빼먹은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에이든이 놀러 가자고 할 때도 안 빠졌단 말이야.”

“에이든?”

“몰라도 되는 녀석이야.”

“친구야?”

“글쎄…….”

말을 흐리며 그가 유리나에게로 몸을 바짝 붙였다. 어느새 부쩍 커진 그의 손이 유리나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맞닿은 그의 몸은 보기보다 더 단단했고, 서늘한 마차 안 공기와 달리 뜨거웠다. 유리나는 마차 안에 맴도는 어색한 분위기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어릴 적부터 레이너드는 불안하거나 초조해할 때면 지금처럼 유리나에게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거나 어깨에 얼굴을 비비고는 했다. 꼭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습관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그의 불안함을 잘 알고 있던 유리나는 그럴 때마다 한숨을 쉬면서도 그를 다독여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머릿속이 하얘져서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유리나는 그에게 안긴 자세 그대로 눈동자만 돌려 맞은편에 앉은 베시와 데이브를 바라보았다. 데이브는 아까와 별달라진 것 없이 책을 읽고 있는 반면, 베시는 유리나보다 더 붉어진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유리나는 고양이마냥 제 어깨에 얼굴을 비비는 레이너드의 머리를 쭉 밀어냈다.

“레이, 조금 떨어져 앉아.”

이번엔 어깨 위로 따뜻한 한숨이 쏟아져 내렸다. 유리나가 들은 척도 안 하는 그의 머리를 재촉하듯이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자 허리를 감싸 안고 있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레이.”

“…….”

“나 조금 불편한데…….”

“알겠어.”

그는 그제야 마지못해 꾸물꾸물 상체를 일으켰다. 유리나는 아쉬움이 그득한 그의 시선을 못 본 척하며 눈을 감았다.

“유리나, 피곤해?”

“응, 조금 피곤하네.”

유리나는 보란 듯이 눈 주위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의 뜨거운 시선을 피하기 위해 눈을 감긴 했지만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가뜩이나 체력이 좋지 않은데 요 며칠 계속 노숙을 했더니 피로가 쌓인 데다가 어제 예고도 없이 나타난 레이너드와 그동안의 회포를 푸느라 잠을 얼마 자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긴, 계속 마차를 타고 왔으니 피곤하긴 하겠다. 다음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좀 자 둬.”

레이너드가 긴 팔을 뻗어 유리나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눈을 감고 있어 얼굴을 보지 못한 탓인지 그가 덜 낯설게 느껴졌다. 유리나는 어릴 적 종종 그랬던 것처럼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다가 미간을 좁혔다.

‘불편해.’

앉은키가 비슷해서 서로에게 머리를 기대도 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던 5년 전과 달리 키가 크고 어깨도 넓어진 레이너드의 어깨는 영 불편하기만 했다.

몸을 움직여 가며 편안한 자세를 찾으려고 했지만, 유리나는 결국 불편함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많이 불편해?”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어깨를 여전히 끌어안은 채로 어깨높이를 낮춰 주었다. 유리나는 제 앉은키에 맞춰진 그의 어깨에 다시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확실히 방금보다는 편안했다.

레이너드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다가 무릎 위에 올려진 담요를 그녀의 어깨까지 덮어 주었다.

“잘 자.”

감미로운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유리나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있던 탓에 맞은편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베시와 데이브의 표정은 눈치채지 못했다.

* * *

저녁에 머무를 마을 초입에 들어선 마차가 조금은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레이너드는 앞으로 고꾸라지는 유리나의 몸을 서둘러 끌어안았다.

그때까지도 그의 어깨에 기대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선잠을 자고 있던 유리나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마차 밖에서 성난 말의 투레질 소리와 말을 달래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별일 아닐 거야.”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를 달래는 동안, 데이브가 마부와 연결된 창을 열어 상황을 확인했다. 마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마차 앞쪽을 가리키며 데이브에게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유리나는 마부의 말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지만, 얼마나 작게 속닥이는지 한마디도 들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 걱정 마.”

걱정되는 마음에 유리나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레이너드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그는 밖에서 일어난 상황보다 유리나가 더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 자상한 손길에 유리나는 다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꾸벅꾸벅 졸았다.

“아가씨, 아무래도 여기서 내려서 숙소까지 걸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데이브가 다소 굳은 표정으로 창문을 닫았다. 곧바로 내릴 준비를 하는 그를 보며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대신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스승님?”

“그게…….”

데이브는 아직도 졸려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유리나를 흘끔거리며 말을 아꼈다. 그 태도에서 무언가 깨달았는지 레이너드가 덩달아 얼굴을 굳혔다가 이내 유리나를 향해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유리나, 들었지? 숙소까지 걸어가야 할 것 같아. 얼른 내리자.”

“……응.”

잠에서 덜 깬 탓에 유리나는 두 남자의 이상한 분위기를 채 감지하지 못하고 졸린 눈을 비볐다.

마차 안에 있는 짐을 챙긴 데이브와 레이너드가 먼저 마차에서 내리고, 그다음으로 유리나의 옷깃을 여며 주던 베시가 데이브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유리나는 몽롱한 정신을 붙잡으려고 애쓰며 몸을 일으켰다. 한 손으로는 마차를 잡고 에스코트를 받기 위해 마차 밖으로 다른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늘 그녀를 에스코트해 주던 데이브 대신 레이너드가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응? 두 손?’

유리나는 멍한 정신으로도 그의 이상한 행동을 감지했다.

에스코트는 한 손으로 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건 마차에서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레이너드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이제껏 에스코트를 잘만 하다가 왜 갑자기 두 손인 걸까.

설마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동안 저택에서 열심히 배웠던 예법을 까먹기라도 한 걸까?

유리나가 머뭇거리자 레이너드가 바짝 다가오더니 단단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몸이 떠오르는 아찔한 감각에 유리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레이?”

놀라서 높아진 목소리로 소리치다시피 이름을 부르자 레이너드가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분명 그녀의 놀란 표정을 봤을 텐데도 그는 별다른 설명 없이 태연하게 그녀를 가뿐히 안아 마차에서 내려 주었다.

키가 비슷했던 예전이라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행동이었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베시가 “어머. 어머.” 하고 감탄사를 내뱉으며 유리나를 대신하여 얼굴을 붉혔다.

“위험하니까.”

아니, 고작 마차에서 내려오는 건데 뭐가 그렇게 위험하다고 그래? 퉁명스레 묻고 싶었지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니 유리나는 차마 그런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대신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는데, 그제야 주변이 어수선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여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단순히 사람이 많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 사이를 맴도는 묘한 분위기가 문제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서서 하나같이 심각한 얼굴로 수군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고, 또 어떤 이는 입을 틀어막고 여신을 찾고 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길을 걸어가던 한 여인은 재빨리 아이를 품에 안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뭐야?’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불길한 느낌에 유리나가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 하자 데이브가 재빨리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쪽은 보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가씨.”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그의 눈짓을 받은 레이너드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가자, 유리나. 피곤할 테니까 얼른 가서 쉬자.”

“알겠어.”

유리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레이너드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만류하는데 괜한 호기심에 굳이 상황을 살펴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몇 걸음 채 가지 않아 발밑을 내려다보던 유리나는 데이브가 그토록 숨기고자 했던 장면을 보고 말았다.

‘……피?’

울퉁불퉁한 돌바닥의 틈 사이로 새빨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놀란 얼굴을 눈치챈 레이너드가 재빨리 손바닥으로 그녀의 눈을 가렸다.

그러나 그의 손에 시야가 가려지기 전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던 유리나는 피범벅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하얀 손과 팔을 보고야 말았다.

사고를 당해 피투성이가 되어 길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사람. 그건 유리나가 그토록 잊고 싶었던 기억을 아주 순식간에 불러일으켰다. 몽롱했던 정신이 바짝 들면서 숨이 가빠졌다.

“보지 마.”

레이너드가 가쁜 숨을 쌕쌕거리는 유리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낮은 그의 목소리는 분명 안정감이 있었지만, 유리나의 심장은 차분해지기는커녕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제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소리를 그녀가 직접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빨리.

“움직이질 않아. 어떡해, 죽은 거야?”

“피 좀 봐. 의원이 와도 못 살릴 것 같은데.”

“그 망할 귀족. 사람을 저렇게 치어 놓고 동전만 던지고 가면 다야?”

눈앞이 깜깜해지자 청력이 예민해진 탓인지, 아까까지만 해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던 주위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분노와 안타까움이 담긴 목소리를 들으며 유리나는 몸을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었다.

“유리나, 왜 그래? 유리나, 괜찮아? 유리나!”

다급한 레이너드의 목소리가 꼭 날카로운 바늘처럼 귓속을 아프게 찔러 왔다. 갑자기 느껴지는 두통과 삐이이, 하고 귀를 찔러대는 이명 소리에 유리나는 두 귀를 틀어막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차 멀미를 하면서도 한 번도 속을 게워 낸 적이 없는데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향기에 속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아냐, 아냐…….”

유리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떨치려고 해도 감은 눈 위로 선명하게 보이는 붉은 피의 잔상이 사라지지가 않았다.

‘싫어.’

잊으려고 애를 썼던 5년 전 그날의 기억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머릿속으로 자꾸 흘러들어 왔다.

* * *

5년 전 그날은 이상할 만큼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어쩌면 모두가 떠들썩해지는 연말이라 들떴던 걸지도 모른다.

그날 세나는 하얀 함박눈을 맞으며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집에 돌아가고 있었다. 손에는 가족들에게 주기 위해 산 유명 베이커리의 조각 케이크를 달랑달랑 든 채였다.

‘으으, 추워.’

코트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에 몸을 떨면서도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얼른 가서 가족들에게 케이크를 주고 따뜻한 장판에 몸을 녹여야지. 달콤한 귤도 까먹으면 더 좋을 것 같아. 평범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상상하며 횡단보도를 반쯤 건넜을 때쯤이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은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과 함께 고막을 찢어 버릴 것처럼 날카로운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인지할 새도 없이 몸을 뒤흔드는 강한 충격과 함께 몸이 날아올랐다.

또 한 번 강렬한 충격과 함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그녀는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눈꺼풀을 힘겹게 살짝 들어 올렸을 때, 흰 눈 사이로 스며든 붉은 피를 볼 수 있었다.

‘죽는 걸까? 이렇게 허망하게?’

불길한 예감과 함께 죽고 싶지 않다는 강한 생존 본능이 그녀의 몸속에서 싹텄다. 그러나 그녀를 죽음의 벼랑 끝으로 밀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녀를 살려 줄 유일한 사람이었던 운전자는 손가락 하나 꿈틀거리지도 못하는 그녀를 보다가 그냥 도망가 버렸다.

세나는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자동차를 향해 살려 달라고 소리치지도 못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인 하얀 눈은 쉴 새 없이 내려 이불처럼 그녀의 몸 위를 덮었다. 가쁜 숨을 힘겹게 내쉬며 세나는 속으로 누군가가 와 주길 간절히 빌었다.

그때, 깨져 버린 휴대 전화 액정에 ‘엄마♡’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그 글자를 보는 순간, 이를 악물고 참던 눈물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어으…….”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을 이겨 내며 떨리는 손을 뻗어 보았지만 휴대 전화에 손이 닿지 않았다. 위이잉, 위이잉. 그녀의 마음을 대신하여 휴대 전화가 온몸을 떨어 가며 울었다.

“……마.”

나 좀 살려 줘. 나 죽기 싫어. 엄마, 보고 싶어. 제발 나 좀 데리러 와 줘. 눈앞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소원은 조금 더 강렬해졌다.

‘누구라도 좋으니 나 좀 살려 줘요. 제발.’

세나는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소원을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곧 죽는구나.’

그와 동시에 마음속에서 원망이 싹텄다.

어차피 죽을 거였다면 차라리 고통 없이 한 번에 죽으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외롭고 고통스런 죽음은 상상해 본 적이 없는데.

시간이 지난 뒤에 근처를 지나가던 차량 운전자에게 발견되어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지만 세나는 제 예감대로 조금씩 의식을 잃어 갔다.

의식의 끈을 완전히 놓기 직전 본,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뭐라고 속삭이는 가족들의 얼굴이 전생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세나는 죽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장 먼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녀가 눈을 뜨기 전, 원래 몸의 주인인 ‘유리나’는 고열에 시달리며 그날 밤을 넘길 수 있을지 장담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면서 세나는 낯선 그들의 뜨거운 눈물에 덩달아 눈시울을 붉혔다.

‘죽기 싫어.’

사고를 당했을 때처럼 누군가가 정신을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세나는 오로지 그 한 가지 소원만을 빌었다.

죽기 싫었다. 가족들은 어디 가고 왜 처음 보는 서양인들의 지극한 보호를 받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살고 싶었다. 그래서 악착같이 정신을 붙잡으며 살려고 발버둥을 쳤다.

기적적으로 입술을 움직여 목이 마르다는 말을 꺼냈을 때, 줄곧 그녀의 옆에서 병간호를 하던 후작 부인은 물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카르티아 후작은 여신께 감사 기도를 올리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녀는 강렬했던 죽음의 기억에 펑펑 울음을 쏟아 냈다. 그 누구도 그 눈물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는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뜨거웠던 몸이 점점 식어 가고, 몽롱했던 정신은 맑아져 갔다.

세나는 당장이라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바락바락 고함을 지르며 저택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차분히 상황 파악을 하려고 애썼다. 하녀들이 조금씩 던져 주는 단서를 맞히다가 깨달았다.

‘유리나 카르티아가 된 거야.’

그리고 윤세나는 죽었다는 사실도.

하지만 제 죽음에 슬퍼할 여유도,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져서 눈물을 흘릴 새도 없었다. 세나는 그 후 눈앞에 닥친 제 운명을 이겨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아원을 돌아다녀야 했다.

죽음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제대로 추스를 여유도 없었다. 그저 또다시 그 고통 속에서 죽고 싶지 않다는 열망만이 간절했다.

5년 전 여름, 희망의 빛처럼 강렬하게 반짝이던 금빛 태양 아래서 레이너드를 만나고, 그와 함께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며 자연스럽게 끔찍했던 기억 또한 서서히 잊을 수 있었다.

아니, 오늘까지만 해도 완벽하게 잊은 줄만 알았다. 기억이란 것은 참으로 질겨서 5년이나 지났는데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 * *

“유리나, 정신 좀 차려 봐. 유리나!”

레이너드는 몸을 한껏 웅크리고 덜덜 떨고 있는 유리나의 몸을 감싸 안았다. 유리나는 눈앞에 있는 레이너드가 제 유일한 구원자라도 되는 것마냥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그의 셔츠를 잡은 두 손이 달달 떨렸다.

“레이…….”

“응, 나 여기 있어. 괜찮아. 걱정하지 마. 다 괜찮아.”

레이너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짜증 내는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유리나를 다독였다. 유리나는 제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는 손길을 느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좋은 냄새가 난다고 자랑하던 어릴 적 그때처럼, 레이너드에게선 향기로운 꽃향기가 났다. 지금도 어리지만, 조금 더 어릴 적 저택 생활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던 그를 품에 안고 다독여 줄 때 나던 것과 똑같은 향기였다.

그래서였을까. 유리나는 꼭 그때처럼 아무도 없는 응접실에 그와 단둘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향기로운 꽃향기에 온몸에 달라붙었던 끔찍한 피비린내가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유리나는 두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그의 손을 꽉 쥐었다.

“아까 그 사람…….”

고작 질문 하나 묻는 건데 감정이 치솟아 목이 콱 막히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목이 졸린 것처럼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죽었어?”

아무 죄도 없었던 스물두 살 윤세나처럼? 차마 말하지 못한 말이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레이너드가 그녀의 몸을 조금 더 세게 안으며 그녀의 머리에 턱을 괴었다.

“아니.”

“거짓말.”

“내가 왜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어. 정말 괜찮아.”

“그렇지만 바닥에 피가 흥건했는데…….”

“많이 다치기는 했지만 분명 살아 있었어. 스승님이 바로 뛰어갔으니까 지금은 많이 호전됐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 다 괜찮으니까.”

유리나는 담담히 이어지는 그의 말이 선의의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데이브는 뛰어난 마법사였다. 사고를 당한 사람이 살아만 있었다면 데이브의 실력으로 무사히 살려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실이 뚝 끊긴 것처럼, 긴장이 풀리자 몸에서 힘이 빠졌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품에 축 늘어지듯이 안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그 사람은 살았구나.”

나와는 달리. 뒷말을 삼키며 그녀는 꾸물꾸물 레이너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말에 꼭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홀가분해졌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가슴팍에 코를 묻은 채 킥킥거렸다.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된다던데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자꾸 웃음이 나왔다.

레이너드는 그 웃음에 당황하지도, 어이없어하지도 않고 그저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유리나는 눈을 감고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좋은 냄새가 나.”

심각한 얼굴로 유리나의 상태를 살피던 레이너드가 표정을 풀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이네.”

“그 꽃 비누, 아직도 써?”

“응.”

“남자가 쓰기엔 향이 별로지 않아?”

“난 그 향이 제일 좋아.”

“취향도 특이해.”

“그럼 네 취향도 특이한 거지. 너도 나랑 같은 비누 쓰잖아.”

“그건 그렇네.”

유리나가 다시 한번 아이처럼 키득거리자 레이너드가 고개를 숙여 유리나의 얼굴을 확인했다. 유리나가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의 시선이 흔들림 없이 맞부딪혔다.

여전히 입가에 웃음기가 남아 있는 그녀와 달리 레이너드의 얼굴엔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유리나는 새삼 자신이 그에게 안겨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덜덜 떠느라 미처 의식하지 못했는데, 맞닿은 그의 몸에선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유리나는 그의 차분한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려 제 눈물로 범벅이 된 그의 셔츠를 보았다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돌아가자. 길 한복판에서 이게 대체 뭐 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였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유리나는 뒤늦게 주위 풍경을 확인하고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레이, 여기는 대체 어디야?”

새빨간 피로 범벅이 되었던 살벌한 마을의 거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눈앞에 보이는 건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들판이었다.

향긋한 향기가 풍기는 노란 꽃이 활짝 피어 있는 들판. 머리 위에는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하늘 한가운데엔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황금빛 태양이 떠 있었다.

이 평화롭고 고요한 들판에 오로지 유리나와 레이너드, 단둘만 존재했다.

유리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너드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크론 왕국 수도 근처에 위치한 들판이야. 아까 그곳은 네가 보기에 좋지 않은 것 같아서.”

그러나 그 내용은 절대로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수도 근처에 위치한 들판이라니. 설마 마법을 쓴 거야?”

“응.”

“언제?”

“아까 네가 바닥에 앉아서 덜덜 떨고 있을 때.”

“이렇게 멀리까지 순간 이동을 할 수 있어? 그게 가능해?”

“응.”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이마 위로 흐트러진 잔머리를 넘겨 주며 웃었다.

“나니까 가능해.”

가볍게 소리 내어 웃은 그가 유리나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코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네가 그리울 때마다 종종 이곳에 왔어. 이곳에 오면 늘 너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너에게서 나던 향기와 같은 향기가 나거든. 그가 조용히 덧붙이자 낯설 정도로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그 생소한 느낌에 몸을 움츠리면서도 유리나는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이해해.’

그녀 또한 레이너드가 그리운 날이면 그가 보낸 편지를 꺼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으니까. 그것으로도 부족할 때면 그와 공부를 했던 작은 응접실로 가서 그가 쓰던 손때 묻은 책, 연습장, 필기구들을 괜히 들춰 보기도 했다.

익숙한 곳에 있던 그녀도 그랬는데 낯선 곳에서 생활한 레이너드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남들이 볼 땐 온실 속의 꽃처럼 지낸 그녀가 그의 심정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할 테지만, 실제로 유리나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알았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녀는 여전히 이 낯선 세계에 처음 떨어져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던 나날을 기억했다. 그 상실감과 외로움은 어떤 것으로도 충족될 수 없었다.

레이너드가 그런 고통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하니 죄책감마저 들었다. 그가 그 먼 곳에서 힘들어할 거란 걸 알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뭘 새삼스럽게. 그런 스스로가 추악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다. 유리나는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제 목덜미에 코끝을 문지르는 레이너드의 등을 꼭 끌어안았다.

분명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크고 어깨는 두 뼘은 족히 넓을 남자인데 이상하게도 그의 몸이 작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눈앞에 작고 어렸던 레이너드의 얼굴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애정을 갈구하던 작은 동물 같던 아이. 그제야 눈앞의 남자가 원래 알고 지내던 오만한 꼬맹이, 레이너드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래, 레이는 언제 어디서든 레이지.’

유리나가 어린 그에게 늘 그랬던 것처럼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자 레이너드가 꼭 작은 짐승이 기분 좋을 때 낼 것 같은 한숨 비슷한 소리를 냈다. 유리나 또한 그의 머리에 뺨을 기대며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불편했겠다.”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레이너드가 멋쩍은 듯 미소를 지으며 유리나를 놓아주었다. 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꽃이 없는 곳에 깐 뒤 유리나를 그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정작 본인은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상관없는지 맨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 더 있다가 상황이 정리되면 돌아가자.”

“응.”

“화관 만들어 줄까?”

“화관? 그런 것도 만들 줄 알아?”

“에이든이 가르쳐 줬어. 걔네 영지는 시골이라 동생들과 자주 들판에서 놀았는데, 동생들에게 종종 만들어 줬대.”

에이든? 유리나는 그 이름을 입속으로 곱씹어 보았다.

“아, 그 아카데미 친구?”

“친구 아니래도.”

“친구 맞는 것 같은데? 왜 편지에는 한 번도 쓰지 않았어?”

“아니래도 그러네.”

레이너드는 ‘나는 네 마음을 다 알고 있어’라고 표정으로 얘기하는 것처럼 장난스럽게 웃는 유리나의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하지 못하기는.’

무의식적으로 이름을 계속 말할 정도면 분명 친한 사이일 텐데. 제 마음에 솔직하지 못한 건 여전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도 여전히 레이너드다워서 웃음이 나왔다.

유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꽃을 하나, 둘 꺾기 시작하는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기척을 느꼈는지 레이너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앉아 있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유리나의 손을 잡고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심심하잖아. 나도 같이할래.”

“그럼 너도 화관 만들어 볼래?”

“나는 만들 줄 모르는걸.”

“내가 알려 주면 되지.”

“그래. 그럼 같이 만들자.”

유리나는 소매를 살짝 걷어붙이고 그를 따라 꽃을 하나 꺾었다. 싱싱한 꽃을 코에 대고 향기를 맡자 좋은 향기가 났다. 레이너드의 말처럼 유리나가 어릴 때부터 줄곧 쓰던 꽃 비누 향기와 같은 냄새였다.

“향기 좋다. 목욕물에 띄워 놓고 목욕하면 피로가 풀릴 것 같아.”

“그래? 그럼 돌아갈 때 많이 따서 가져가자.”

그가 꽃을 꺾는 속도를 높였다. 유리나는 그의 손에 수북이 쌓여 가는 꽃잎을 보다가 제 드레스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다 다 떨어뜨리겠다. 여기에 담아.”

달랑달랑 드레스를 흔들어 보이자 레이너드가 손에 쥐고 있던 꽃을 드레스 위에 흩뿌렸다. 붉은색 드레스 이곳저곳에 노란 꽃이 피어났다.

그때, 가을바람이 한차례 불어와 유리나의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어 놓았다. 드레스 자락을 잡고 있던 탓에 유리나는 제대로 머리를 매만지지 못하고 하염없이 고개만 뒤로 젖혔다 숙이기만을 반복했다. 하지만 머리만 더욱 헝클어질 뿐이다.

“아…….”

난감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레이너드가 콧잔등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유리나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해 줄게. 가만히 있어 봐.”

능숙하게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준 레이너드가 꽃을 하나 꺾어 유리나의 귀에 꽂아 주었다.

“자, 다 됐다.”

유리나는 귓가를 곁눈질하며 인상을 썼다. 머리에 꽃이라니. 왠지 이상한 조합이다.

“이게 뭐야.”

“꽃.”

“이상하잖아.”

“안 이상해. 걱정 마.”

만족스럽다는 듯 웃는 그가 유리나의 손을 잡아끌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유리나의 치맛자락에 소복이 쌓인 꽃들을 가져와 꽃을 하나, 둘씩 엮어 나가기 시작했다.

몇 번 해 보지는 않았는지 가끔 꽃을 잘못 엮어 버벅거릴 때가 있었지만 제법 그럴싸한 화관이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던 유리나는 그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보기에는 쉬워 보였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자꾸 손가락 사이로 꽃잎이 삐쭉삐쭉 튀어나왔다.

잔뜩 찌그러진 꽃잎을 내려다보며 레이너드가 킥킥 웃었다.

“생각보다 손재주가 없구나? 어릴 때는 뭐든 잘하는 줄 알았는데.”

“처음 하는 거라 그래.”

“나는 처음에도 이것보다 훨씬 잘했는데.”

유리나가 뭐라고 변명을 하기 전에 레이너드가 만들던 것을 내려놓고 그녀의 손가락을 잡았다.

“이렇게 안 빠져나가게 잘 쥐고 해야지.”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을 대신 움직이며 꽃들을 하나둘 엮어 나갔다. 두 사람의 손안에서 제법 그럴싸한 모양의 화관이 완성되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레이너드가 풀물이 든 유리나의 손가락을 제 손바닥으로 쓱쓱 닦은 뒤 만들다 만 화관을 마저 완성했다. 찌그러진 구석이 있는 유리나의 화관과는 달리 매끈하고 동글동글한 모양이었다.

“다 됐다. 어때? 예쁘지?”

“응. 꽃이 노란색이라 그런지 진짜 왕관 같아.”

“원한다면 보호 마법을 걸어 줄까? 마법을 걸어 두면 시들지도 않고 더 이상 구겨지지도 않을 거야.”

“그런 것도 할 수 있어?”

“아주 기본적인 마법 중에 하나야.”

유리나는 제 손에 들린 못생긴 화관과 레이너드가 들고 있는 예쁜 화관을 두어 번 번갈아 보았다.

“그럼 네가 만든 것에 걸자. 내 건 모양도 안 예쁘고 이미 너무 많이 구겨졌어.”

“알겠어.”

레이너드가 손끝으로 화관을 쓸자 태양처럼 환한 빛이 꽃을 휘감고 사라졌다. 완성된 화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려 바라보던 레이너드가 햇빛에 눈이 부신지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유리나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유리나는 그를 밀어내는 대신 손을 들어 그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햇빛을 가려 주었다.

“어릴 적에 말이야.”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레이너드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의 눈 위로 그늘을 만들어 주기 위해 열심히 손의 위치를 조절하던 유리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널 만났을 때보다도 어렸을 때, 열 살 때쯤이었나. 사실 나도 마차 사고를 본 적이 있었어. 그래서 오늘 네가 그렇게 무서워한 것도 이해가 가.”

예상치도 못한 말에 유리나는 그늘을 만드는 것도 잊어버리고 손을 내렸다. 레이너드가 그녀의 손을 끌어와 제 눈 위를 덮었다.

“그때도 귀족이 타던 마차에 사람이 치였는데 마차를 몰고 가던 마부는 내려서 쓰러진 사람을 보더니 욕을 하고 금화 몇 개를 던져 주더라. 그러고는 다시 가 버렸어. 안에 타고 있던 귀족은 밖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심각한 이야기와 달리 그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유리나는 제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바닥에 피는 흥건하고 사람은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데 아무도 선뜻 도움을 주지 못했어. 그럴 수밖에 없었지. 그 정도 부상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마법사뿐인데 귀족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마법사를 부르겠어. 부른다고 해도 올 사람들도 아니고 말이야.”

덤덤하던 그의 목소리도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보고 있지 않았지만 유리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말 안 해도 돼. 힘든 기억이잖아.”

“아냐, 들어 줘.”

마음속에 담아 두던 응어리 같은 것일까. 유리나는 더 이상 그를 만류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그가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가만히 들어 줄 수 있었다.

“그때는 나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내 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데 나는 그냥 죽지 말라고, 살아만 달라고 빌면서 우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어. 한심하지?”

“아니, 한심할 리가 없잖아.”

유리나는 괴로워하는 그를 보며 제 손을 잡고 오열하던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린 레이너드가 그랬던 것처럼 죽어 가는 그녀 옆에서 무력하게 미안하다는 말만 속삭이던 엄마의 모습을.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귓가에 쉴 새 없이 속삭여 주던 목소리에서 유리나는 엄마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때의 엄마 목소리는 지금 레이너드의 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리나는 한 번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엄마를 원망하거나, 한심해한 적이 전혀 없었다.

그저, 이런 일을 겪게 해서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죽어 가는 사람도, 그것을 힘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람도 똑같이 고통스럽고 힘들다. 어쩌다 어린 레이너드는 그렇게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을까.

“지금도 가끔 그때 생각이 나. 유리나, 만약 그때 내가 마법을 배웠더라면 그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을까? 가끔 너무 후회가 돼.”

“네 잘못이 아니야.”

“알아.”

그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알고는 있는데 그냥 자꾸 후회가 돼. 지금은 내 눈앞에서 그런 일이 생기면 그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그 귀족을 잡아다가 죗값을 치르게 할 수 있으니까. 오늘도 스승님이 없었다면 널 두고 바로 달려갔을지도 몰라.”

“응, 알아. 이해해.”

“…….”

고해 성사 같은 말을 끝으로 레이너드는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하면 그의 마음의 짐을 덜어 줄 수 있을지 잠시 고민하던 유리나는 허리를 숙여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부딪쳤다.

“있지, 레이. 그 사람은 네가 죽지 말라고, 살아만 달라고 속삭여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을 거야.”

이건 죽는 순간을 기억하는 그녀만이 해 줄 수 있는 위로였다. 레이너드에게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허울 좋은 소리로만 들리겠지만, 이건 그녀의 진심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네가 옆에 있어 준 거잖아. 그거면 충분했을 거야.”

내가 그랬어. 횡단보도에 혼자 쓰러져 있을 땐 너무 외롭고 힘들었는데, 그래도 마지막에는 엄마가 옆에 있어서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어.

유리나는 마지막 진심은 입 속으로 삼키며 웃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를 꽉 물고 있던 레이너드의 턱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눈 위를 덮고 있던 유리나의 손바닥도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유리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의 가슴을 토닥여 주었다.

노란 꽃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넓은 들판엔 그렇게 잠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유리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위로가 됐을까.’

그건 모르겠다. 그래도 자신의 진심이 그에게 닿으면 좋겠다.

그동안 꾹꾹 억눌러 왔던 마음을 한꺼번에 토해 내는 것인지 레이너드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유리나는 아까 그가 그녀를 달래 주었던 것처럼 괜찮다고 쉴 새 없이 속삭여 주었다.

그의 떨림이 잦아들고, 그의 호흡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쯤, 유리나는 그의 귓가에 작게 중얼거렸다.

“레이, 네 말처럼 지금 네겐 그런 일을 해결할 힘이 있어. 그러니까 아까 그 귀족 찾아서 다시는 못 그러도록 하자.”

“응?”

유리나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몸을 일으키는 레이너드의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꽃잎을 떼어 주며 그에게 웃어 주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널 위해서도, 날 위해서도. 그리고 똑같은 고통을 받았던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그녀의 속내를 읽었는지 레이너드가 조금은 가벼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그는 제 다리 위에 올려 두었던 꽃 화관을 유리나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머리 위로는 황금빛 태양, 땅에는 온 대지를 물들인 황금빛 꽃잎. 모든 곳이 반짝이는 세계에서 그 어떤 것보다 반짝이는 미소를 머금으며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이마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 * *

“아가씨!”

붉은 석양이 하늘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일 즈음에야 숙소 앞에 나타난 유리나를 발견하자마자 베시가 서둘러 달려왔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촉촉한 눈시울로 유리나의 몸을 살피던 베시는 그녀가 다친 곳이 하나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사라지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데이브 님께서 아가씨가 레이너드 님과 있을 테니 걱정 말라고 하셨지만…….”

또다시 감정이 치솟는지 베시가 옷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이미 한 차례 눈물을 흘렸는지 가까이에서 바라본 베시의 흰자위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유리나는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등을 돌리는 베시를 졸졸 따라가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난 괜찮아. 미안해. 많이 걱정했지?”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갑자기 어디 다치기라도 하신 것처럼 덜덜 떠시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가 있겠어요?”

빈말이라도 괜찮다는 말을 안 하는 걸 보니 정말로 걱정을 많이 했나 보다. 웃을 일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왠지 웃음이 나왔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고마워할 일이 아니란 거 아시잖아요.”

“그래도 고마워.”

차분한 유리나의 목소리에 감정을 갈무리했는지 베시가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재잘재잘 말을 이었다.

“제가 아가씨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래도 아가씨께서 괜찮으시다니 다행이에요. 저도 그렇게 많은 피는 처음 봐서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아가씨는 더 놀라셨겠죠. 그래도 너무 걱정 마세요, 아가씨. 데이브 님께서 바로 마법으로 치료해 주셨거든요! 실력이 대단하시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큰 상처를 말끔하게 치료하실 줄은 몰랐어요!”

묻고 싶지만 차마 먼저 묻지 못했던 말이 베시의 입에서 줄줄 나왔다. 아까 부상을 입었던 사람이 무사하다는 말에 유리나는 그제야 온전히 긴장을 풀고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진짜 무사하구나.’

데이브의 실력을 의심했던 건 아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혹시나 하는 걱정이 남아 있었나 보다. 그녀 또한 의학이 발전했다는 곳에서도 교통사고를 당해 죽는 사람을 많이 목격했으니까.

“그나저나 데이브는 어디 있어?”

“아까 사고를 당한 분과 함께 의원에게 가신 뒤로 아직 돌아오시지 않으셨어요.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처는 치료했어도 완벽하게 치료한 게 아니라고 하셨어요. 아, 맞아!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어요.”

“아, 피……. 그렇구나.”

유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베시가 이끄는 대로 숙소로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레이너드 님은 어디 가셨어요? 아까 같이 가신 거 아니에요?”

유리나가 건네준 꽃잎을 따뜻한 목욕물에 뿌리던 베시가 문득 물었다. 처음 유리나를 만났을 때부터 레이너드는 이미 없었는데 유리나에게 신경을 쓰다 보니까 이제야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레이는 볼일이 있어서 잠깐 어디 좀 갔어.”

“아가씨만 혼자 두고 가실 정도면 급한 일인가 봐요.”

“뭐, 그렇지.”

유리나는 자신을 숙소 앞에 데려다주고 홀연히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같이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혼자 빠르게 추적하는 것이 편하다며 그녀를 안심시키고는 마차 사고가 났던 곳으로 향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려고 노력할 거지만 늦을 수도 있으니 밤까지 오지 않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먼저 자라는 말과 함께.

‘별일이 없으면 좋겠는데.’

그의 실력은 믿으니 신체적으로 해를 당하는 것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유리나가 걱정하는 건 정신적인 것이었다.

작은 말에도 상처를 입고 움츠리던 그가 혹시라도 모진 말이라도 듣고 오는 건 아닌지. 그가 극구 말렸어도 따라가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목욕 준비를 마친 베시가 시무룩한 유리나의 표정을 보고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욕실로 향했다.

꽃향기가 참 좋다는 베시의 들뜬 목소리와 함께 목욕을 마친 유리나는 쉬어야 한다는 베시의 만류에도 의원을 찾아갔다.

의원과 이야기를 하던 데이브가 안으로 들어오는 유리나를 발견하고는 놀라서 뛰어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응, 나는 괜찮아. 내가 안 괜찮을 일이 뭐가 있겠어. 사고를 당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유리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 대꾸를 하며 데이브의 어깨 너머를 흘끔거렸다.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데이브가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유리나는 그에게 웃어 보인 뒤 환자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많이 봐 줘야 이십 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은 여자는 창백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사실 잠을 자고 있는 것인지 의식이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눈치 빠른 데이브가 “주무시고 계십니다.”라고 설명을 해 준 덕분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유리나는 조금 더 꼼꼼히 그녀의 몸을 살폈다. 이불을 덮고 있어서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이불 밖으로 내민 팔이나 얼굴, 머리 등에는 자잘한 상처 하나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까 그 많은 피를 흘렸던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상태는 어때?”

데이브에게 물었던 질문이었는데 계속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중년의 의원이 다가와 설명을 해 주었다.

“다행히 마법사님께서 늦기 전에 치료를 해 주셔서 이제 괜찮으십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저렇게 얼굴이 창백한 거죠?”

이번에는 데이브가 대답을 해 주었다.

“출혈량이 워낙 많아서 그렇습니다. 마법으로는 외상은 치료해도 흘린 피를 보충할 수 있는 방법이 없거든요. 지금 하루 종일 주무시는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외상은 다 치료했다고 해도 피가 부족하면 상태가 더 나빠지지는 않을까?”

과다 출혈로 죽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유리나가 걱정스런 표정을 짓자 데이브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지금 당장 피를 보충할 수 있는 마법은 없지만 도움을 줄 수 있는 약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이 마을에서는 구할 수가 없어서 근처 마을로 사람을 보낸 참입니다.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약을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그는 그래도 안심하지 못하는 유리나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걱정 마세요, 아가씨. 잘 먹고 푹 쉬면 금방 괜찮아지실 겁니다. 그건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서 마지막 확답까지 받은 뒤에야 유리나는 힘없이 웃을 수 있었다.

‘진짜 다행이야.’

팔과 다리에 달려 있던 무거운 쇠고랑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몸에서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갈 수 있을 것처럼 자유로운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떨어져 나간 것은 그동안 그녀의 마음을 소리 없이 옭아매던 과거의 상처였을지도 모른다.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홀로 몸부림 치던, 결코 스물셋이 될 수 없었던 스물두 살 윤세나는 5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치유받았다.

유리나는 이름 모를 여인의 손을 잡고 혼잣말처럼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살아 줘서 고마워요.”

* * *

제국보다 북쪽에 위치한 크론 왕국은 날씨도 제국보다 쌀쌀할 뿐만 아니라 해도 짧았다.

석양이 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작은 마을에는 어느새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았다. 길에는 돌아다니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이 잠에 든 것처럼 고요했다.

베시는 오늘따라 유독 피곤해했던 유리나를 위해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를 챙겨 주었다.

“아가씨, 많이 피곤하시죠? 오늘은 이만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일도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한대요.”

“응.”

“그리고 데이브 님께 들었는데 모레 오후쯤에는 수도에 도착할 수 있을 거래요.”

“응.”

창문 옆에 앉아 있던 유리나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손으로는 레이너드가 만들어 준 꽃 화관을 만지작거렸다. 보존 마법을 걸어 둔 덕분에 힘 조절을 하지 않고 조물거려도 꽃잎은 다행히 전혀 상하지 않았다.

‘언제 오려나.’

사고를 낸 마차를 찾아 떠났던 레이너드는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제 자신 옆만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가 아닌데도 유리나는 어쩐지 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엄마 같은 심정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초조함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가씨, 이만 주무세요.”

이번에도 고개를 저으려고 했던 유리나는 피곤이 가득한 베시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침대로 향했다.

그녀는 아이가 아니니 잠들기 전까지 누가 옆에 있어 줄 필요가 없는데도 가끔 베시는 유리나가 잠드는 것을 보고 나가겠다고 버텼다. 지금도 표정을 보아하니 유리나가 잠을 자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잘게. 이제 가도 돼.”

“아가씨가 주무시는 걸 보고 갈게요.”

“피곤하잖아. 얼른 가서 자.”

“안 피곤해요.”

그 말이 무색하게도 베시는 말을 마치자마자 터져 나오는 하품을 참지 못하고 입을 가렸다. 소리 내어 한 번 웃은 유리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베시가 나갈 때까지 잠을 자는 척만 하려고 했는데 피곤하기는 했는지 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여전히 한밤중이었다. 그나마 방을 밝히던 촛불마저 베시가 끄고 나갔는지 사방이 빛 한 점 찾을 수 없이 깜깜했다.

유리나는 침대를 더듬거리며 일어나 마법으로 빛 구체 하나를 만들어 허공에 띄웠다.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은 유리나는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하품을 하며 레이너드가 만들어 준 화관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도 촉촉하게 물기가 남아 있는 꽃에선 기분이 편안해지는 향이 났다.

‘레이는 돌아왔을까.’

유리나는 잠옷 위에 겉옷을 챙겨 입고 레이너드의 방으로 향했다. 다시 잠들기 전에 확실히 확인해 두고 싶었다.

똑, 똑, 똑. 가볍게 노크하자 문이 열리더니 외출복을 채 갈아입지 못한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발견하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유리나?”

그가 주위를 몇 번 살피더니 목소리를 줄였다.

“대체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했어? 먼저 자라고 했잖아.”

“자다가 깬 거야.”

“자다가 깼으면 다시 자야지, 왜 왔어?”

“왔는지 확인만 하고 가려고. 언제 왔어?”

“조금 전에.”

레이너드가 방문을 활짝 열며 옆으로 비켜섰다.

“날씨가 쌀쌀한데 들어와서 얘기할래?”

“아니, 괜찮아. 늦었잖아. 나도 내 방 가서 자야지.”

“그럼 얼른 얘기해 줘야겠네.”

말과는 달리 문에 등을 기대며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푸는 그는 약간 심각해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유리나는 찬바람에 시린 팔을 문지르며 그를 기다려 주었다.

“그 사람, 귀족은 아니고 제국에서 온 무역상이었어. 내가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니까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고 화를 내더라.”

‘뭘 그런 걸 가지고’라니. 직접 만나 보지는 않았어도 유리나는 저 말을 했을 당시의 그 무역상의 표정과 목소리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화가 나서 한 소리를 하려고 했던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레이너드의 표정을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치솟는 화를 참느라 애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도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걸까.’

유리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듯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뺨을 살살 문질렀다. 그제야 그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표정을 풀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짓을 못 하도록 잘 타이르고 왔어.”

유리나는 부러 장난스럽게 눈을 가늘게 뜨며 팔꿈치로 그의 팔을 꾹꾹 찔렀다.

“말로만?”

“글쎄…….”

말을 흐리며 웃는 그에게 유리나는 더 이상 자초지종을 물어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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