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크론 왕립 아카데미
지난 일주일 동안 말없이 사라져 버린 친구 녀석을 하염없이 찾아다니던 에이든 테시는 눈앞의 광경에 놀라 두 눈을 비볐다.
‘뭐야?’
생일, 그것도 무려 성년이 되는 생일을 앞두고 종적을 감추었던 레이너드가 처음 보는 사람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처음 보는 사람이 무려 여자였다.
그것도 멀리서 봐도 예쁘고 귀여운 소녀!
지난 5년간 에이든이 봐 온 레이너드는 여자에게는 전혀 흥미가 없는 녀석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여학생들에게서 편지와 고백을 받는데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관심 없는 여자라도 그렇게 고백을 받으면 들뜬 티는 나는 법인데 그는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에이든은 이 친구 녀석의 취향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도 있었다. 이 녀석이 사실 여자가 아니라 남자에게 관심이 있는 건가…… 하고.
그런데 그런 레이너드가 여자? 여자아아? 그것도 예쁘고 귀여운 여자?
에이든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레이너드에게 다가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멀찍이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말도 없이 사라졌던 레이너드는 몸이 안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안색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았다. 그동안 에이든이 안절부절못하며 걱정을 했던 것이 민망할 정도였다.
“구경하고 싶은 곳 있어?”
“데이브가 그러던데, 여기 도서관이 그렇게 크다며? 한번 구경하고 싶어.”
“그래, 그러자.”
“그 전에 점심부터 먹자. 베시가 너랑 같이 먹으라고 아침부터 도시락을 싸 줬어.”
“도서관 앞에 넓은 잔디 광장이 있어. 오늘처럼 날이 좋으면 다들 카페테리아에서 안 먹고 거기서 밥 먹으니까 우리도 거기서 먹으면 돼. 도시락 먹고 도서관 구경 가자.”
“그래.”
레이너드가 자상하게 웃으며 소녀의 팔에 달랑달랑 들려 있던 도시락 바구니를 건네받았다. 다른 손으로 소녀의 하얀 손을 잡는 폼이 꽤나 자연스러웠다.
‘아니, 저게 누구야?’
자신에게 하는 것과는 영 다른 모습에 에이든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쩍 벌렸다. 그러다 레이너드가 소녀와 함께 기숙사 방을 빠져나가려는 것을 발견하고 재빨리 소리쳤다.
“레이! 너어어! 대체 그동안 말도 없이 어디를 갔다 온 거야? 옆에 그분은 누구시고?”
뒤늦게 그를 발견한 레이너드가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에이든을 못 본 체하며 반대쪽으로 걸어가려고 했지만, 그보다는 에이든이 빨랐다.
에이든은 쏜살같이 달려가 레이너드의 팔을 낚아챘다. 그 옆에 있던 소녀의 푸른 눈이 놀란 듯 동그랗게 커졌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이 녀석에게 볼일이 있어서…….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에이든은 소녀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여 사죄한 뒤 레이너드를 노려보았다.
“레이, 너 대체 지금껏 뭘 하다 온…….”
“레이너드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지금 그게 중요해?”
“중요해.”
에이든은 어이가 없었지만 순순히 그의 뜻대로 따르기로 했다. 이상하게도 레이너드 녀석은 가장 친한 에이든에게도 애칭만큼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 레이너드. 너 대체 뭘 하다 온 거야?”
그동안 내색은 많이 하지 않았지만, 에이든은 레이너드의 걱정에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레이너드는 가끔씩 수업을 빼먹는 에이든과 달리 모범생이었다. 죽을 정도로 아파서 거동이 힘들 정도가 아니면 수업을 절대 빼먹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일주일 전 받은 편지를 읽자마자 사색이 되어 뛰어나가더니 일주일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처음엔 급한 일이 있나 싶어 그러려니 했는데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그런데 멀쩡히, 그것도 여자애랑 같이 있는 레이너드를 보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아, 미안. 사정이 있어서.”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그렇지, 어떻게…….”
순간, 에이든은 레이너드의 팔 위에 손을 얹고 눈을 깜빡이던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멀리서 봤을 때도 알아봤지만 정말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분홍빛이 도는 금발, 햇빛 한 번 본 적 없는 것 같이 투명하고 하얗게 빛나는 피부, 멀리서 봐도 균형 잡히고 오밀조밀 예쁜 이목구비.
거기에 왕국의 유행하고는 다르지만 과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신경을 쓴 티가 나는 옷차림새까지.
눈앞의 소녀는 여러모로 에이든이 수도에 와서 본 여자들 중에 가장 미모가 빼어났다.
단순히 빼어난 정도가 아니다. 그녀는 외모로는 남녀노소 따라올 자가 없다고 소문이 자자한 레이너드 옆에서도 존재감을 빛낼 정도로 미인이었다. 에이든은 레이너드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 눈길이 가는 희한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에이든의 볼이 반사적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레이너드가 가늘어진 눈으로 에이든을 보다가 소녀를 제 뒤로 숨겼다.
“에이든?”
레이너드의 부름에 반응한 건 에이든이 아니라 레이너드의 등 뒤에 서 있던 소녀였다.
“에이든?”
그녀는 레이너드의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에이든을 관찰하다가 “아!” 하고 높은 탄성을 내질렀다.
“네 친구?”
“아마도.”
평소라면 ‘아마도라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듣는 친구 섭섭하게!’라고 되받아쳤을 에이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을 향해 빙긋 웃는 소녀를 보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던 탓이다.
어쩜, 목소리도 이렇게 예쁠까.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네요. 에이든 씨…… 맞으시죠? 레이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아카데미에 적응하는 데 도움을 많이 주셨다면서요?”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던 ‘레이’라는 애칭이 소녀의 입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왔다. 에이든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 소녀, 레이너드와 깊은 관계가 있구나. 혹은 레이너드가 이 소녀를…….
그는 저도 모르게 레이너드를 바라보며 씰룩 입꼬리를 올렸다. 레이너드가 못마땅한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저는 유리나 카르티아라고 해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유리나 카르티아. 낯선 듯하면서도 낯익은 이름이었다. 입 속으로 그 이름을 몇 번 되뇌던 에이든은 그게 레이너드가 일주일 전 받았던 편지에 적혀 있던 이름이라는 것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지난 5년간, 에이든은 레이너드의 많은 모습을 봐 왔다. 머나먼 제국에서 와서 왕국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던 레이너드는 향수병을 앓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곧잘 아카데미에 적응했다.
그러나 그를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에이든은 레이너드가 외로움을 많이 탄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그는 수업을 잘 듣다가도 한 달에 한 번씩 꼭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는 했다. 눈앞에 서 있는 유리나의 눈동자와 비슷한 푸른색 하늘을.
그럴 때면 수업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아무리 에이든이 그를 달래 보려고 찾아가서 농담을 던져도 레이너드는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꼭 그때쯤 레이너드에게 편지가 왔다. 향기로운 봄꽃 향기가 미미하게 배어 나오는 편지. 그 편지를 받은 다음 날이면 레이너드는 언제 우울했냐는 듯 기운을 차리고 멀쩡해졌다.
에이든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안심하면서도 저 편지의 발신인이 누굴까 궁금했다.
‘카르티아 영애의 편지였겠지.’
그동안 풀리지 않던 의문이 오늘에서야 풀렸다.
친구 녀석의 소중한 사람이면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도움이라뇨. 친구끼리 잘 지내는 건 당연한 일이죠. 저야말로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영애. 에이든 테시라고 합니다.”
에이든은 바지에 손바닥을 열심히 문지른 후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본적으로 왕국과 제국의 귀족 예법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유리나가 에이든이 내민 손바닥에 손을 얹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레이너드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끝에 입을 맞췄다.
그 낯간지러운 광경에 유리나의 눈이 동그래졌고, 에이든의 눈은 그것보다도 더 똥그래졌다.
‘저게 대체 누구야?’
그가 5년간 봐 왔던 레이너드와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얼굴만 같지, 표정이나 목소리, 말투, 행동 등 뭐 하나 같은 게 없었다.
원래 친구 앞에서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의 행동이 다른 법이라지만 이건 정도가 더 심했다. 차오르는 배신감에 에이든이 어깨를 부르르 떨 정도였다.
‘무슨 사이지?’
유리나가 말하는 모양새를 봐선 단순한 친구 같은데, 레이너드의 행동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건 뭐, 결혼식을 앞둔 약혼자로밖에 안 보이는데?
“얼른 가자, 유리나. 보여 주고 싶은 게 많아.”
“응? 그렇지만 친구는 어쩌고.”
“괜찮아.”
아니, 나는 안 괜찮은데!
그러나 에이든이 놀라서 입만 벙긋거리는 사이,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손을 잡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유리나는 그를 따라가면서도 완벽한 귀족 예법으로 에이든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한 에이든은 뒤늦게 레이너드에게 소리쳤다.
“야, 잠깐만! 레이! 너 수업은 어쩌고!”
어느새 저만큼 멀어진 레이너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에이든은 유리나의 손을 꽉 잡고 있는 레이너드의 손을 보며 혀를 찼다.
“너도 친구보다는 여자다, 이거냐?”
그런데 기분은 별로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피식피식 바람 소리를 내며 웃던 에이든은 복도를 지나다니는 아이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한바탕 웃다가 머리를 헝클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는 ‘아무리 급해도 말은 해 주고 갔어야지’라는 생각이 ‘저렇게 급한 일인데 말을 못 하고 사라질 수도 있지’로 바뀐 지 오래였다.
어쩐지 따사로운 햇살만큼이나 마음도 따뜻해지는 날이다.
* * *
유리나는 복도에 가만히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에이든을 어깨 너머로 흘끔 돌아보았다.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싶었는데.’
그녀의 걸음이 다소 느려지자 앞서가던 레이너드가 덩달아 걸음을 늦췄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아냐.”
유리나는 레이너드에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데리고 나오는 게 어디 있냐, 친구를 저렇게 혼자 놔두고 와도 되냐, 같은 질문은 넣어 두기로 마음먹었다.
어쩐지 아이처럼 신이 나 보이는 레이너드에게 차마 그런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유리나는 그냥 그가 이끄는 대로 졸졸 따라갔다. 대신 에이든의 얼굴을 다시 한번 뒤돌아보며 머릿속에 그의 얼굴과 에이든 테시라는 이름을 잘 새겨 두었다.
“저기가 마법과 수업이 있는 건물이야. 아카데미에서 가장 지어진 지 오래된 건물이라 많이 낡았지? 학생들이 새 건물을 지어 달라고 오래전부터 계속 항의하는데 고쳐 주질 않아. 역사와 전통이 살아 있는 건물이라 그럴 수가 없다나.”
“저렇게 금이 잔뜩 가 있는데 무너지지는 않아?”
“보존 마법이 걸려 있어서 무너질 일은 없어.”
“그건 참 다행이네.”
유리나에게 아카데미 이곳저곳을 소개해 주는 레이너드는 어쩐지 조금 들뜬 기색이었다. 유리나의 주관적인 생각이었지만 금빛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비친 불그스름한 귀가 그녀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그는 표정은 차분했지만 분명 들떠 있었다. 어쩌면 생일 때 처음으로 번화가에 나갔을 때보다 더.
한참을 아카데미를 돌아다니던 두 사람은 레이너드가 데려간 잔디밭에서 베시가 싸 준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레이너드는 오랜만에 카르티아 저택에서 먹는 음식 맛이 난다며 감격에 겨워했다. 유리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베시가 만든 음식을 먹은 적도 없으면서.’
베시는 한 번도 주방에서 일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만든, 그것도 재료만 사다 끼워 넣은 샌드위치에서 추억의 맛이 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레이너드는 열심히 샌드위치를 우물거렸다. 유리나 또한 구태여 진실을 말하지는 않았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주위에는 간단한 요깃거리를 먹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들은 다들 흥미가 가득한 얼굴로 유리나와 레이너드를 흘끔거렸다.
유리나를 보는 시선이 반, 레이너드를 보는 시선이 반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점심을 마저 먹었다.
“그러고 보니, 레이. 생일 파티는 따로 안 해도 돼?”
“생일 파티는 무슨. 내가 애도 아니고.”
유리나는 점심을 먹고 나온 쓰레기를 피크닉 바구니에 하나, 둘 담는 레이너드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툴툴거리는 듯한 말투와 달리 그의 얼굴은 딱히 꺼려 하는 기색은 없었다.
“원한다면 베시가 작게라도 준비해 준대. 아까 테시 군을 불러서 작게 파티할까?”
“됐어. 번거롭기만 해.”
바구니를 모두 정리한 그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돗자리 위에 있던 바구니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법을 사용하여 기숙사 방으로 옮겨 둔 것이라고 했다.
“파티는 됐고 받고 싶은 선물은 있는데.”
“그래? 필요한 거 있어?”
“전에 못 받았던 생일 선물을 받아도 될까?”
“전에 못 받았던 생일 선물?”
유리나는 제게 손을 뻗는 레이너드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지난 몇 년간의 기억을 더듬더듬 기억해 냈다. 하지만 레이너드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생일 때마다 유리나는 필기구나 책처럼 그가 필요할 만한 것들은 물론이고, 옷이나 장신구 등 그에게 어울릴 만한 것들을 마차에 잔뜩 실어 아카데미로 보냈다. 그러나 레이너드는 한 번도 먼저 그녀에게 받고 싶은 생일 선물을 특정 지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전에 못 받았던’ 생일 선물이 있을 리가 없는데.
심각하게 콧잔등을 찌푸리는 유리나의 코를 레이너드가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5년 전에 내가 갖고 싶다고 했던 선물 기억 안 나? 정확히는 선물이 아니라 소원이었지만.”
“아…….”
그제야 맞춰지는 기억에 유리나는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같이 놀러 가자고 했던 거? 그렇지만 놀러 나갔었잖아?”
“정확히는 말이야.”
레이너드가 멀찍이 떨어져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기사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카르티아 후작이 유리나의 호위로 딸려 보낸 기사들은 위험할 것이 하나도 없는 아카데미 내부에서도 유리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들을 잠시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레이너드가 유리나에게 몸을 숙이며 작게 속삭였다.
“‘우리 둘이서만’ 놀러 나가자고 했었지.”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손가락을 소리 나게 한 번 튕겼다. 그 순간, 그의 주위에 있던 마나가 빠르게 휘몰아쳤다.
이상함을 감지한 기사들이 유리나를 향해 뛰어오려고 했지만 유리나에게 채 다가가기도 전에 두 사람은 사라졌다.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엔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위해 펼쳐 놓았던 손수건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레이, 여긴 대체 어디야?”
갑자기 바뀐 풍경에 놀랐지만 유리나는 애써 덤덤하게 물었다. 학생들이 점심을 먹으며 한가로이 노닥거리던 잔디밭 대신 사람들이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번화가가 보았다.
이미 레이너드의 마법을 몇 번 보았지만 유리나는 볼 때마다 그의 실력에 새삼 감탄했다.
레이너드는 갑작스러운 이동 마법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유리나의 몸을 단단히 잡아 주었다.
“네스 거리. 크론 왕국 수도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이야. 가자. 케이크가 맛있는 곳을 알고 있어.”
“너 돌아가면 아론 경에게 혼날지도 몰라.”
레이너드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상관없잖아. 그때와 달리 이젠 내가 널 충분히 지켜 줄 수 있는데.”
* * *
“많이 먹어.”
직원이 테이블 위에 케이크 접시를 내려놓자마자 레이너드가 유리나 쪽으로 접시를 쭉 밀어 주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테이블은 꽤나 넓은 편이었는데도 정작 접시들은 유리나 앞에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유리나는 그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그의 앞쪽으로 다시 밀어 주었다. 그녀 못지않게 레이너드 또한 달달한 디저트를 좋아했다.
“너도 보고만 있지 말고 먹어. 생일 케이크야.”
“생일 케이크 하니까 생일 파티 한 거 생각난다. 그때 먹었던 생크림 케이크 정말 맛있었는데.”
추억에 잠긴 듯 레이너드가 과일이 듬뿍 올라간 케이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니 유리나는 문득 이 낯선 곳에서 그동안 그가 어떻게 생일을 보냈는지 궁금해졌다. 그에게서 한 번도 생일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해 주고 싶어서 유리나는 매년 그의 생일에 맞춰 선물과 축하 편지를 보냈다.
돌아오는 답장에 생일 때 무엇을 했는지, 뭐가 기뻤는지 써서 보내 주면 좋을 텐데 편지에는 늘 생일 선물이 고맙다는 말만 있을 뿐, 자세한 이야기는 당연한 것처럼 생략되어 있었다.
생일에 무엇을 했냐고 묻고 싶어도 편지가 오고 가는 시간이 길어 다시 편지를 보낼 때는 이미 그의 생일이 한 달은 훌쩍 지난 뒤여서 묻지를 못했다. 뒷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 번은 너무나 궁금해서 생일 축하 편지를 보낼 때 추신으로 생일 때 뭐 할지 미리 궁금하다는 말을 남겼다. 아마 레이너드가 열다섯 살 때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내면 조금이나마 생일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서 보낼 줄 알았더니만 돌아온 내용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담백했다.
[이번 생일엔 오랜만에 수도에서 유명한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어.]
유리나가 원한 건 그 저녁을 누구랑 어떻게 먹었는지 구구절절한 설명이었는데 말이다.
‘사적인 얘기를 너무 안 해서 적응하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하는 건 아닌가 했지.’
다행히 일 년에 두세 번씩 레이너드를 만나고 온 데이브가 걱정할 필요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해 준 뒤에야 유리나는 걱정을 지울 수 있었다.
‘그래도 편지에 좀 자세히 써 주면 얼마나 좋아.’
얼굴을 맞댄 지금에야 유리나는 묻고 싶었던 말을 물을 수가 있었다.
“그동안 생일에는 뭐 하고 지냈어?”
“음, 처음 생일을 맞이했을 때는 에이든이 아이들을 모아 놓고 깜짝 파티를 해 줬어. 아침을 먹으러 나왔는데 갑자기 에이든이 튀어나와서 내 눈을 가리고 어디론가 데려가길래 또 무슨 장난을 치나 했거든. 그런데…….”
“그때도 감동받아서 울었어?”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 높여 웃었다. 5년 전, 저택에서 고용인들이 준비했던 깜짝 생일 파티를 보고 감동받아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그때 귀여웠는데.”
유리나가 웃는 이유를 눈치챘는지 케이크를 쿡쿡 찌르던 레이너드의 귓가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그는 어릴 적부터 당황할 때면 얼굴보다도 먼저 귀가 붉어졌다.
이런 것을 보면 그가 변한 것 같으면서도 그대로인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안 울었어.”
“정말? 왠지 토끼처럼 눈이 새빨개져서 코를 훌쩍이며 울었을 것 같은데. 저택에서처럼 말이야. 나중에 베시가 얘기해 줬는데 그때 너 되게 귀여웠대.”
대답을 하는 대신 레이너드는 케이크를 듬뿍 퍼서 입에 넣었다. 묵비권 행사였다.
‘울었구나.’
본인이 불리한 주제를 회피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행동이었지만 유리나는 그 행동을 못 본 척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레이너드를 따라 한입 가득 케이크를 입에 넣으니 폭신폭신한 케이크 시트와 달콤한 생크림이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았다.
유리나가 콧소리와 함께 감탄사를 내뱉자 시선을 피하던 레이너드가 그녀를 보며 웃었다.
“맛있어?”
“응, 맛있어. 저택 주방장보다 솜씨가 더 좋은 것 같아.”
“그렇지? 내가 말했잖아. 여기는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라고.”
그는 꼭 자신이 칭찬을 들은 것처럼 흐뭇한 얼굴로 우쭐거렸다. 유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크로 케이크 위에 얹어진 딸기를 쿡 찔렀다.
“그리고 맛도 맛인데 그것보다는 이 과일이 더 신기해. 어떻게 이 계절에 케이크 위에 딸기랑 청포도가 잔뜩 올라갈 수 있어? 난 딸기 못 본 지 한참 됐는데.”
“크론 왕국이잖아. 과일에도 보존 마법을 걸어 놓아서 제철이 지나서도 먹을 수 있어. 가격이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제국에 비하면 훨씬 싸.”
“아, 이게 보존 마법을 걸어 놓은 과일이야? 황궁에서 과일에 보존 마법을 걸어 놓는다는 소리는 들어 봤지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이야.”
유리나는 포크에 꽂은 딸기를 요리조리 돌려 가며 관찰하다가 딸기를 입에 넣었다. 보존 마법을 걸어 놨다고 해도 신선한 딸기와는 차이가 있을 줄 알았는데 식감이나 맛이나 별로 차이가 없었다.
오랜만에 먹는 딸기에 신이 나서 곧바로 또 다른 딸기를 입에 넣자, 레이너드가 제 몫의 딸기를 유리나의 앞 접시에 덜어 주었다. 유리나가 다시 건네주려고 하자 그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말했잖아. 이곳에선 제국보다도 과일을 쉽게 먹을 수가 있어. 난 그동안 많이 먹었으니까 너 먹어. 과일 좋아하잖아.”
“그런 것도 아직 기억해?”
“당연하지.”
어깨를 한 번 으쓱한 그가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유리나의 만류에도 딸기가 잔뜩 올라간 타르트를 추가로 시켰다.
“뭘 그렇게 많이 시켜? 다 못 먹어.”
“다 못 먹을 것 같으면 과일만 집어 먹어.”
그는 뭐가 문제냐는 투로 대꾸하며 제 앞에 놓인 홍차 잔을 우아하게 들었다. 예전에는 쓴 것이 싫다며 우유, 그것도 꿀을 넣은 우유만 먹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아무것도 넣지 않은 홍차를 표정 변화 없이 잘만 마신다.
쓰지 않냐는 유리나의 물음에 그는 자기는 이제 애가 아니라고 대꾸했다.
유리나 또한 그를 따라 홍차를 홀짝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크론 왕국은 제국보다 연애가 활발하다고 들었는데, 실제로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내부에는 애인으로 보이는 남녀들이 많이 보였다.
그 가운데에 레이너드와 단둘이 앉아 있으려니까 그것도 참 기분이 이상했다. 며칠 전, 아무도 없는 들판에 단둘이 있던 것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무슨 생각 해?”
“응?”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레이너드가 상체를 숙여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나는 솔직한 생각을 말하는 대신 찻잔을 내려놓으며 곁눈질로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
“인기가 많나 봐, 레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저 소녀들이 널 아까부터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어.”
그는 그녀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처럼 그가 카페 내부로 들어올 때부터 그를 주시하고 있던 유리나 또래의 소녀 세 명이 그의 시선을 받고 얼굴을 붉혔다.
레이너드는 그녀들을 표정 없이 바라보다가 유리나를 보며 웃었다.
“내 눈 때문일 거야. 네가 ‘베아투스’에 대해서 고서를 찾아 준 뒤로 그에 관한 연구가 많이 있었거든.”
으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유리나는 얼굴을 붉히는 아가씨들의 표정을 살피다가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단것을 먹은 뒤에 먹어서 그런지 홍차가 평소보다 떫게 느껴졌다. 갑자기 케이크를 먹고 싶다는 생각도 사라져서 포크를 내려 두었다.
“그만 먹으려고? 조금 더 먹지.”
“천천히 먹으려고. 점심 먹고 바로 왔잖아.”
“하긴, 넌 어릴 적부터 먹는 양이 적었어.”
다행히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기분을 완벽히 알아채지는 못했는지 더 이상 옆 테이블에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생크림 케이크 위에 있는 과일들을 그녀에게 마저 덜어 주었다.
그와는 달리 유리나는 주변 시선에서 관심을 끊을 수 없었다.
‘인기가 많겠지.’
레이너드 같은 남자아이가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 그는 편지에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또래 여학생들에게 고백을 받은 적도 물론 많으리라.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을 새삼 깨달은 유리나는 미미하게 눈을 찌푸렸다.
“왜? 어디 안 좋아?”
그녀는 그 미세한 변화를 기민하게 포착하고 물어 오는 그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였다.
* * *
레이너드와 함께 여유롭게 디저트를 즐기고 카페를 나온 유리나는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꼭 누군가가 제 뒤를 쫓아오는 것 같았다.
“왜 그래?”
갑자기 길가에 멈춰 선 그녀를 레이너드가 걱정이 담긴 얼굴로 돌아보았다. 유리나는 다시 발걸음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냥 주위 구경 좀 하느라.”
“그래?”
“응. 자, 원하는 대로 케이크를 먹었겠다, 이제 뭐 할까? 선물 사러 갈까?”
“선물은 됐대도.”
“그럴 수는 없지. 앞으로는 예복 입을 일도 많으니까 커프스는 어때?”
유리나는 내켜 하지 않는 그의 팔을 끌고 상점가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적당한 가게를 찾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곳에서 한 남자가 다급하게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아가씨!”
“아론 경이네.”
아무래도 오싹한 느낌의 정체는 기를 쓰고 두 사람을 찾아다니던 카르티아가 기사들의 시선이었나 보다. 유리나가 사라진 후 줄곧 두 사람을 찾아다녔던 건지 단정했던 그의 머리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돌아가야 하나.’
미안한 생각에 아론 경에게 다가가려는데 옆에서 레이너드가 혀를 쯧, 찼다.
“생각보다 빨리 찾았네.”
레이너드가 남들보다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는 반경이 더 넓다고는 하지만 한계는 분명 있었다. 그가 아무리 빨리 유리나를 만나고 싶다고 해도 국경까지 한 번에 이동할 수 없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오늘 번화가에 쉽게 나올 수 있었던 건 아카데미가 수도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넓은 수도에서 이렇게 빨리 꼬리를 잡히지는 못할 텐데. 의아함을 느끼고 있는 그의 눈에 아론 경 뒤에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데이브의 모습이 들어왔다.
“데이브가 우릴 찾았나 봐. 마법으로 이동한 건 추적하기가 더 쉽다면서.”
“하는 수 없지.”
레이너드가 아론 경에게 걸어가려는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유리나, 뛰어.”
“응?”
유리나가 채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레이너드가 아론 경이 달려오는 반대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유리나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드레스를 움켜쥐며 그를 따라 뛰었다.
포크와 나이프보다 무거운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는 귀족 아가씨라면 누구나 그렇듯, 저택에서 과한 보호를 받으며 자라 온 유리나 또한 체력이 좋지 않았다.
금세 턱밑까지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떨려 왔다. 허파가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유리나는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리웠어.’
레이너드와 소소하게 보내던 이 시간이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아니, 정말 그리웠던 건 제 손을 잡고 있는 레이너드였다. 유리나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웃으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더 따라오다간 오히려 유리나에게 독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론 경과 데이브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어차피 레이너드와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들도 더 이상 걱정하지 않을 터였다.
뒤를 보며 그 사실을 확인한 레이너드가 속도를 줄였다. 유리나는 그의 팔뚝을 꽉 움켜쥐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유리나, 괜찮아?”
숨쉬기가 편하게 상체를 옹송그린 유리나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 진짜 돌아가면 아론 경에게 혼날 것 같아.”
레이너드가 몸을 들썩이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대수롭지 않게 맞받아쳤다.
“혼나면 되지.”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는 그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5년 전 생일날 유리나를 지켜 주겠다고 진지하게 손가락을 걸던 열세 살 레이너드보다 훨씬 더 듬직해 보였다.
* * *
데이브와 아론 경이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두 사람은 여유롭게 거리를 거닐었다.
유리나는 제국의 번화가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발을 옮겼다. 그다지 신기한 풍경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나오는 나들이라 그런지 기분이 들떴다.
그러다 문득 레이너드에게 고개를 돌렸던 유리나는 그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유리나가 열심히 거리 구경을 하는 중에도 그는 계속 그녀 쪽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는 그의 얼굴에 왠지 멋쩍어져서 유리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뜨거운 시선이 볼에 닿는 게 느껴졌지만 레이너드 쪽으로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주위를 구경하며 걷다 보니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분수가 있었고, 그 주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악단과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노는 아이들이 보였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던 레이너드가 품 안을 뒤적거리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손수건을 분명 갖고 나왔는데.”
“손수건은 왜?”
그가 대답 없이 분수대를 쳐다보았다. 유리나는 그의 뜻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웃었다.
“그냥 앉으면 돼. 손수건은 아까 잔디밭에 놓고 왔나 봐. 갑자기 이동 마법을 쓰는 바람에 미처 못 챙겼어. 아, 혹시 중요한 손수건이야?”
“아냐,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거야. 잠깐, 잠깐만. 앉으면 안 돼. 옷 더러워져.”
레이너드는 분수대에 앉으려던 유리나의 팔을 재빨리 잡았다.
“괜찮대도.”
손수건도 없이 분수대에 털썩 앉는 건 확실히 귀족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유리나는 진짜로 별 상관 없었다. 제국의 수도라면 주위의 이목을 신경 써서라도 안 그랬겠지만 어차피 이곳은 크론 왕국이다. 그녀를 알아보고 흉을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당사자가 괜찮다는데도 그는 완고했다.
“잠깐만 기다려 봐. 금방 구해 올게.”
“가긴 어딜 가려고 그래. 그냥 앉으면 돼.”
“아니면 내 옷 깔고 앉을래?”
진심으로 겉옷을 벗으려는 그의 모습에서 유리나는 그의 고집을 느꼈다.
“그럼 네 옷이 더러워지잖아. 그럴 거면 차라리 손수건을 사 와.”
“저기 바로 가게가 있으니까 금방 다녀올게. 다리가 아파도 잠깐만 서 있어. 알겠지? 그냥 앉지 말고. 분수대라 차가워.”
유리나는 꼭 어린애를 타이르는 듯한 그의 말투를 들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어. 안 앉을 테니까 얼른 다녀와.”
“응.”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그는 앉지 말고 꼭 기다리고 있으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 뛰어갔다.
‘유난이라니까.’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유리나는 갑자기 소름이 끼치는 듯한 느낌에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녀는 웬 아기 하나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아!”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던 아기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이 사라질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꺄아.”
많아 봐야 한두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기였다.
유리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똥글똥글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깜짝 놀랐네.’
어쩌면 이런 순한 아기의 시선에도 놀랄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모양이다.
유리나는 침을 흘리며 웃는 아기를 향해 상체를 숙이며 마주 웃어 주었다.
“안녕?”
무심코 제국어로 말을 걸었던 유리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아이에게 다시 왕국어로 말을 걸었다.
“안녕?”
그제야 알아들었는지 아기가 유리나의 손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작은 손을 흔들었다.
“빠아빠.”
“그건 헤어질 때 하는 인사잖아.”
유리나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자 신이 났는지 아이가 이번에는 양손을 흔들었다.
“빠빠아.”
유리나 또한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 안녕. 그런데 엄마는 어디 가고 혼자 있어?”
“마아?”
“응, 엄마. 엄마 어디 갔어?”
아기가 뒤뚱거리며 제 뒤를 돌아보았다. “마아, 마.”거리면서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기가 이내 시무룩해진 얼굴로 유리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아.”
좀 전까지만 해도 해맑게 웃던 똥그란 푸른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마아…….”
아이가 앵두 같은 입술을 오므리더니 이내 땅에 털썩 주저앉아 울먹이기 시작했다.
‘곧 오겠지.’
유리나는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많고 복잡한 광장에서 설마 아이의 엄마가 한눈을 팔았을 것 같지 않았다. 아이가 우는 것을 보면 곧장 달려올 것이다.
그러나 금방 달려올 줄 알았던 아기의 가족은 아기가 와앙 소리 내어 울 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마아아!”
유리나는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아이를 난감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기는 급기야 유리나의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고 다리를 동동거렸다.
시끌벅적한 광장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주위의 시선이 유리나와 아이에게로 쏠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유리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내가 아이 엄마처럼 보이지는 않잖아.’
황당하기는 했지만, 아이가 찬 바닥에 앉아 우는 모습을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어서 얼른 아이를 품에 안았다.
“괜찮아. 엄마는 금방 올 거야.”
유리나는 아이를 다루는 법을 몰랐다. 사실 아이를 좋아한다고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설프지만 아이의 뜨끈한 등을 토닥여 주며 괜찮다고 속삭여 주니 아이가 금세 울음을 그쳤다.
흘리다 만 눈물을 눈가에 그렁그렁 단 채로 아이가 히죽 웃었다. 유리나는 손끝으로 아이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며 최대한 부드럽게 속삭였다.
“엄마는 곧 올 거니까 걱정 마.”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해도 아이의 엄마는 이 광장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어쩌면 지금쯤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열심히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잠깐 직접 가서 아이의 가족을 찾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유리나는 아이를 어르며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이의 엄마를 찾아 주는 것도 중요했지만 레이너드와 했던 말도 중요했다.
그리고 괜히 가족을 찾아 주겠다고 돌아다니다 엇갈리는 것보다는 이 자리에서 가족이 오기를 기다리는 편이 더 나았다. 어차피 이 작은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왔다면 이 근처에 있을 테니까.
‘정말 못 찾으면 레이보고 찾아보라고 하면 되지.’
유리나는 할 줄 모르지만 마법으로는 추적 마법도 쓸 수 있었다. 아이가 걸어온 길을 추적하다 보면 집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만일을 대비하여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웬 청년 하나가 그녀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왔다.
“제인!”
레이너드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일 것 같은 청년이었다.
“빠빠!”
유리나의 품에 얌전히 안겨 주먹을 쥐었다 펴며 놀던 아기가 방실방실 웃으며 그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가족 맞겠지?’
유리나가 아이를 건네주자 청년이 가쁜 숨을 내쉬며 아기를 안았다.
“분명 잘 보고 있었는데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잃어버린 줄 알고 엄청 놀랐잖아!”
“꺄아.”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 누나에게 잘 돌보겠다고 약속하고 나왔는데. 그새 다친 건 아니지? 안 넘어졌지?”
그는 아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훑었다.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는 유리나를 뒤늦게 인식했는지 그녀를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어, 그러니까…….”
유리나는 혹시나 괜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먼저 입을 열었다.
“혼자 울고 있길래 가족을 잃어버린 건가 싶어서 데리고 있었어요. 그냥 놔뒀다가는 더 멀리 갈 것 같아서요.”
다행히 그는 의심하는 기색 없이 유리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놀고 있는 걸 계속 보고 있었는데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사라져 버렸지 뭡니까. 하마터면 큰일 날 뻔…….”
빠르게 말을 늘어놓던 남자가 유리나와 제대로 눈이 마주치자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는 유리나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금세 뺨을 붉게 물들였다.
“저기, 그게, 그러니까…….”
유리나는 목까지 빨개진 그를 보다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쉴 새 없이 옹알거리는 아기의 볼을 살살 문질렀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더 늦기 전에 아빠를 찾아서요.”
“아빠! 아닙니다!”
“우!”
갑작스러운 고함에 놀랐는지 아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남자는 아이를 달래는 대신 유리나에게 급하게 변명 같은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빠가 아니라 삼촌입니다. 제 누나의 딸이에요. 누나가 오늘 할 일이 있어서 대신 봐 달라고 하길래 오늘만 혼자 돌보고 있었던 겁니다. 집에만 있으려니까 저도 답답하고, 제인도 답답해해서 잠깐 나온 거고요.”
“…….”
“진짜입니다. 삼촌 맞아요.”
누가 뭐라고 했나. 혼자 열을 내며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는 모습이 오히려 더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저기, 그러니까…….”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웃고만 있는 유리나의 눈치를 살피던 남자가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제인을 찾아 준 것도 고맙고, 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괜찮다면 저녁을 대접해 드려도 될까요?”
“네?”
“누나도 오늘 일을 들으면 당연히 저녁에 초대하라고 할 겁니다. 은혜를 입었는데 그냥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어?”
남자의 목소리 사이로 평소보다 낮은 레이너드의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분명 남자의 목소리가 훨씬 컸는데도 이상하게 유리나의 귀에는 레이너드의 목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남자의 뒤쪽에서 다가온 레이너드가 재빨리 유리나의 옆에 서며 남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웃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매섭게 느껴지는 눈초리에 여전히 불그스름한 남자의 얼굴이 긴장을 한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제인이란 아기는 새로운 얼굴에 흥미가 돋았는지 레이너드의 얼굴을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아?”
“아기네. 안녕?”
아이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미소를 지은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향해 다시 물었다.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이 아기는 누구야?”
“아, 엄마를 잃고 울고 있길래 잠깐 데리고 있었어.”
“이분은?”
“아이 삼촌이래.”
“그렇구나.”
레이너드가 남자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딱히 통성명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라 제 소개를 하지는 않았다. 남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마주 까딱였다.
삼촌과 달리 제인은 방실방실 웃으며 레이너드에게 손을 뻗었다. 레이너드는 작디작은 통통한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며 유리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많이 늦어서 스승님이 걱정하겠다. 슬슬 돌아가자.”
유리나는 그의 손에 들린 아이보리색 손수건을 보며 물었다.
“벌써 가려고?”
“응. 생각해 보니 곧 저녁 식사 시간이잖아. 가서 스승님이랑 같이 저녁 먹자.”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귓속말을 들으며 하늘을 살폈다. 확실히 어느새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유리나는 남자와 아기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 레이너드를 잠깐 말린 뒤 남자의 앞에 섰다.
“죄송하지만 저녁 식사 초대는 거절해야 할 것 같네요. 일이 있어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우는 아이를 봤다면 가족을 찾아 주려고 했을 테니까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아, 네. 그래도 감사했습니다.”
남자는 유리나의 옆에 서 있는 레이너드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아기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제인, 언니에게 잘 가라고 인사해. 안녕.”
“빠빠아.”
“응, 안녕.”
유리나는 손을 흔드는 아기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상하게 아기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어서 남자가 인사를 하고 돌아 걸어갈 때까지도 그 뒷모습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가끔씩 아기가 남자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유리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유리나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자 옆에서 레이너드가 물었다.
“아기 좋아해?”
“음……. 좋아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아. 사실 아기를 볼 일이 별로 없으니까. 그런데 쟤는 웃는 게 되게 귀여워서 자꾸 보게 되네.”
유리나는 아기에게 손을 흔들어 주느라 레이너드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충 대답했다.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옆에 바짝 다가왔다.
“그건 그렇고 웬 저녁 식사?”
“아이를 찾아 줘서 고맙다면서 식사에 초대하고 싶었대.”
“그것참…… 별일이네.”
“그러게. 별일이야.”
“……혼자 두는 게 아니었나 봐.”
조용히 낮게 읊조린 말은 유리나에게 한 말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더 가까웠다. 순간, 손을 흔들던 유리나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이내 태연하게 손을 흔들었다.
“유리나.”
“응.”
“유리나.”
그는 기껏 불러 놓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유리나는 그제야 의아함을 느끼고 레이너드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아기를 보고 있는 동안 그는 줄곧 유리나만 바라보고 있던 모양인지 고개를 들자마자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부드럽게 눈웃음을 짓던 그의 두 눈이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사소한 변화였는데도 그 변화가 주는 충격은 꽤 컸다.
유리나는 어쩐지 차갑게 느껴지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왜 불러 놓고 말이 없어?
왜 그런 얼굴로 보는 거야?
대체 무엇을 묻고 싶었던 걸까.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워낙 가깝게 서 있었기 때문에 레이너드도 분명 그 짧은 질문을 들었을 터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대신 유리나의 손등 뒤로 다가온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평소 부드럽게 잡던 것에 비하면 다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그는 유리나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손깍지를 꼈다. 유리나가 아무리 손을 빼려고 해도 뺄 수 없을 정도로 꽉.
* * *
안 그래도 유리나의 곁에 내내 붙어 있던 레이너드는 네스 거리에 다녀온 이후 잠시라도 그녀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아침 식사를 같이하는 것을 시작으로, 잠을 자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함께 붙어 다녔다.
심지어 밤에도 레이너드가 직접 유리나를 숙소까지 데려다주었다.
하루는 거리 구경을 하고, 하루는 도서관에서 책 구경을 하고, 또 하루는 아카데미 안에서 한가롭게 노는 평화로운 날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처음 만나서 같이 여행한 날까지 포함하면 이렇게 농땡이를 부리는 날이 일주일을 훌쩍 넘었다. 결국 유리나는 참다못해 레이너드에게 물었다.
“레이, 수업 안 들어가도 돼?”
“응?”
다 먹은 도시락 바구니를 정리하던 레이너드가 제대로 듣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어쩐지 진짜로 못 들은 게 아니라 못 들은 척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여 유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업 안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어. 벌써 일주일이 넘게 빠졌잖아.”
처음에야 오랜만에 만났으니 이 정도 일탈은 눈감아 주려고 했다. 지난 5년간 성실히 아카데미 생활을 했다고 하니 일주일 정도 빠진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수업을 빼먹는 데에 죄책감을 전혀 못 느끼고 태연자약한 레이너드의 모습을 보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수업에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지내야 한다, 뭐, 이런 모범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 일이 가져올 후폭풍이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유리나야 이대로 그와 있다가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레이너드는 앞으로도 2년이 넘게 이곳에 남아 생활해야 한다. 행여나 이번 일로 실력만 믿고 자만한다고 교수나 주위 학생들에게 미운털을 사서 생활이 고달파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레이너드가 이 생각을 듣는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상관없겠다고 했겠지만, 유리나는 그렇게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복잡한 유리나의 마음과 달리, 레이너드는 별로 신경 쓰는 기색 없이 다 정리한 바구니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빛이 반짝이나 싶더니 잔디 위에 놓여 있던 바구니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경 안 써도 돼. 괜찮아.”
그가 가볍게 웃어 보인 뒤 유리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늘은 어디 갈까? 구경하고 싶은 곳 있어?”
벌써 만난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들뜬 기색이 역력해서 유리나는 그에게 더 이상 수업에 들어가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대신 순순히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도서관에 또 가 보자. 찾아보고 싶은 책이 있어.”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하지만 도서관에 채 들어가기도 전에 두 사람을 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야, 레이너드!”
웬 남학생 하나가 두툼한 책을 품에 안고 달려왔다.
“어, 패트릭.”
“너 학교에 있었냐? 그런데 왜 수업에는 안 들어왔어? 교수님이 너 엄청 찾으시던데.”
책만큼이나 렌즈가 두툼한 안경을 추켜올리던 남학생이 레이너드의 옆에 서 있던 유리나를 발견하고는 “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애인 생겼냐? 우리 아카데미 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어디서…….”
“대체 용건이 뭐야? 할 말 있어서 부른 거 아냐?”
“아, 그렇지. 허트슨 교수님이 너 불러.”
“날? 왜?”
“왜긴 왜야. 네가 무단으로 수업을 빼먹으니까 그러시겠지.”
“에이든은 한 번도 찾으신 적 없잖아.”
“걔는 워낙 많이 빼먹어서 부를 가치도 없어서 그런 거 아냐? 너는 교수님이 엄청 아끼잖아.”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그가 레이너드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아무튼 가 보는 게 좋을걸. 너 만나면 수업에 들어오라고 전하라고만 하시다가 오늘 수업에선 널 보면 잡아서라도 데리고 오라고 하셨거든. 제때 졸업하려면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괜히 교수님 눈 밖에 났다가 졸업 논문 계속 반려당하는 수가 있어.”
“…….”
“아무튼 난 분명히 말했어. 아까 보니까 에이든은 널 진짜로 밧줄로 묶어서라도 데려갈 생각 하더라. 마법으로는 상대가 안 되니 몸으로라도 잡아야겠다면서.”
그는 킥킥 웃고는 도서관을 향해 걸어갔다. 유리나는 입을 꾹 다물고 진지하게 생각을 하고 있는 레이너드의 팔을 툭 쳤다.
“갔다 와. 허트슨 교수님이라면 전에 저택에 왔던 그분 맞지? 데이브의 친구라던.”
“맞기는 맞는데…….”
“데이브 말을 들어 보니까 널 되게 아끼는 것 같던데 얼른 가 봐. 말도 없이 수업에 빠졌으니 아마 엄청 걱정하고 계실 거야.”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음…….”
레이너드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얘기가 길어질지도 모르니까 숙소로 가 있어. 끝나면 그리로 갈게. 도서관은 내일 구경하고 오늘은 공원에 놀러 가자. 가을이라 꽃이 많이 폈을 거야.”
“그래, 그럴게. 그럼 끝나고 그리로 와.”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등을 가볍게 밀어 주고는 망설임 없이 뒤로 돌았다. 아주 잠깐 등 뒤로 레이너드의 시선이 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레이너드는 이런 그녀를 보며 냉정하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이건 그녀만의 배려였다. 괜히 뒤를 돌아보았다가는 레이너드가 교수에게 가지 못하고 망설일지도 모르니까.
“아가씨, 어디 가세요?”
유리나가 레이너드에게서 떨어지자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베시가 다가왔다.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아론 경도 근처에서 따라오고 있겠지.
“레이에게 일이 생겨서 일단 숙소로 갈 거야.”
주위가 시끌벅적했다. 학생들이 많은 아카데미에서 느낄 수 있는 생기였다. 그동안 귀족 저택에서 가정 교사와 단둘이 수업을 듣던 유리나는 느끼지 못했던 공기.
‘오랜만이네.’
기묘한 기시감. 친구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대학 캠퍼스 광장을 가로지르던 기억이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벌써 5년.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마차 사고를 목격할 때 예전의 기억이 떠오른 탓인지 가슴이 뭉클했다.
유리나는 도서관 앞에 펼쳐진 넓은 잔디 광장 가운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삼삼오오 모여서 웃고 떠드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함께 책을 보며 열심히 토론하는 모습, 서로의 점심을 나눠 먹는 모습.
그런데 이상하게 그 학생들의 얼굴 위로 제 얼굴 대신 어렸던 레이너드의 얼굴이 두둥실 떠올랐다.
대화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문화도, 공기마저도 낯선 이곳에서 홀로 지냈을 레이너드의 얼굴이.
유리나는 처음 아카데미에 왔을 때 기숙사에서 스쳐 지나가듯 보았던 에이든 테시의 얼굴을 떠올렸다.
‘만나 보고 싶은데.’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있었다. 하지만 레이너드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건네도 그는 신경 쓸 것 없다며 일축하며 에이든을 불러 주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아가씨? 어딜 그렇게 보세요?”
“아무것도 아냐. 그것보다 베시, 오늘 점심도 맛있었어. 레이도 맛있다고 좋아하더라.”
“내일도 또 만들어 드릴게요.”
“응, 고마워.”
유리나는 방금까지 하던 생각을 떨쳐 버리고 베시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발을 옮겨 아카데미 정문으로 향했다.
베시는 그동안 유리나가 레이너드와 지낸 탓에 얘기를 많이 못 했던 것이 아쉬웠는지 평소답지 않게 재잘재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던 유리나는 순간 주위의 마나가 일렁이는 것을 느끼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아가씨!”
동시에 조용히 따라오던 아론 경이 재빨리 달려와 유리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유리나는 가까스로 손을 뻗어 바로 옆에 서 있던 베시의 어깨를 거칠게 밀었다.
중심을 잃은 베시가 뒤로 밀려나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아가씨!”
동시에 주위가 반짝이며 유리나와 아론 경 주위에 희미한 막이 생겼다. 다급하게 유리나를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베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유리나는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베시를 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가 주위를 살폈다.
나뭇잎을 흔들어 놓던 가을바람도 더 이상 불어오지 않았다. 나뭇잎이 흔들릴 때마다 들리던 경쾌한 소리도 없었다.
재잘재잘 떠들며 주위를 돌아다니던 사람도 없다. 보이는 거라곤 오로지 그녀를 안고 있는 아론 경뿐이었다.
아론 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유리나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공간 분리 마법이야.’
직접 해 본 적은 없었지만 데이브에게서 들은 적은 있었다.
마나로 인위적인 벽을 만들어 주위의 공간과 완벽하게 분리된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마법.
안에 있는 사람은 주위에 벽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지나다닐 수 있기 때문에 마나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마법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좋게 쓰인다면 비밀 얘기를 나누거나, 연인끼리 밀회를 하는 용도로 쓰이지만, 좋지 않은 쪽으로 쓰인다면…….
“물러나십시오, 아가씨.”
아론 경이 유리나를 품에서 떼어 놓으며 제 등 뒤로 잡아당겼다. 등골이 오싹했다. 유리나는 아론 경에게서 최대한 떨어지며 그의 어깨 너머를 흘끔거렸다. 얼굴을 턱까지 가린 건장한 사내 다섯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은데.’
유리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쓸며 검집에서 검을 꺼내는 아론 경의 뒷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카르티아 후작이 먼 길 떠나는 막내딸의 호위를 걱정 없이 맡길 정도로 아론 경의 실력은 뛰어났다. 황실 기사단에 입단할 수도 있는 실력인데, 어릴 적부터 후원해 준 카르티아 후작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후작가에 남았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단순히 5 대 1로 싸우는 것도 힘든데 유리나를 안전하게 지키며 싸우는 것은 더욱 힘들 것이다.
게다가 공간 분리 마법을 썼으니 상대 쪽에 마법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더욱더 승산이 없는 싸움이 된다.
잔뜩 긴장한 것 같은 아론 경의 뒷모습을 보던 유리나는 상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등 뒤를 더듬거렸다.
마법으로 만든 이 인위적인 공간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전한 사람이 마법을 취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마나 벽을 깨부숴 버리는 방법이다.
상대가 마법을 알아서 취소할 일은 없으니 마나 벽을 부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마나 벽은 밖에서는 찾기가 힘들다. 레이너드나 데이브처럼 마나에 예민한 마법사라면 금방 찾을 수 있겠지만…….
‘레이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결계 밖에 남은 베시는 지금쯤 상황을 알아차리고 데이브나 레이너드를 찾으러 달려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그렇다면 안쪽에서 자신이 직접 벽을 부수는 수밖에 없었다. 결계 안쪽에서는 손으로 만지다 보면 딱딱한 벽 같은 걸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문제는 찾을 때까지 아론 경이 버틸 수 있냐는 건데.’
유리나는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혀로 훑으며 계속 상황을 주시했다.
아론 경도, 상대도 모두 검을 뽑은 채로 서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특히 상대 쪽에서는 아론 경의 뒤에 있는 유리나를 흘끔거리며 자기들끼리 눈짓하기도 했다.
유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들은 그녀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저들이 방심한 틈을 노린다면 딱 한 번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유리나는 천천히 뒤로 움직이며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능력 없는 귀족 아가씨 하나가 움직여 봤자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상대는 유리나의 돌발 행동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반응을 확인한 유리나는 더욱더 대범하게 발을 움직였다. 겁을 먹은 듯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척을 하며 손을 움직인 것도 잠시, 손끝에 단단한 벽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야.’
기뻐할 새도 없었다. 가만히 주위를 살피던 유리나는 손끝에 마나를 모아 빠르고 강하게 벽을 내리쳤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동시에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더니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마법사라는 이야기는 없었잖아!”
“저 계집애를 잡아, 얼른!”
이상함을 감지한 적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론 경이 재빨리 검을 수평으로 하여 그들의 검을 막았다.
유리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균열이 간 곳을 계속해서 내리쳤다. 깨진 유리 조각에 찔린 것처럼 하얀 손이 금방 피범벅이 되고 허공에 생긴 균열에도 피가 묻었지만 멈추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오로지 머릿속에는 이 결계를 빨리 부수지 않으면 죽을 거라는 공포감밖에 없었다.
등 뒤에서는 남자들의 고함 소리와 칼과 칼이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결계를 부수는 소리보다 작았는데도 유리나의 귀에는 그 싸움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체내 마나가 부족한 탓인지 금방 부서질 거라 생각했던 결계는 생각보다 오래 버텼다. 유리나는 이를 악물고 온몸의 마나를 다 긁어모아 주먹을 내리쳤다.
‘조금만, 제발 조금만 더…….’
쿵, 쿵, 쿵. 심장 소리가 제 귀로도 들릴 정도로 소리를 키워 갔다. 그 사이로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벌어진 틈 사이로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다리가 보였다.
유리나는 구멍으로 두 손을 집어넣고 천을 찢듯이 마나 벽을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아가씨!”
다급한 아론 경의 목소리에 그녀는 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뱀처럼 번뜩이는 사나운 눈동자였다. 아론 경을 상대하고 있던 남자 중 하나가 어느새 그녀 앞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 뒤로 나머지 세력을 모두 베고 피를 흠뻑 뒤집어쓴 아론 경이 빠르게 달려왔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남자가 더 빨랐다.
남자의 검이 햇빛을 받으며 하늘 높이 들어 올려졌다.
유리나는 마나를 휘감은 팔을 머리 위로 들었다.
팔은 심하게 다치겠지만, 한 번만, 공격 한 번만 버티면…….
다가올 고통을 상상하자 등골이 오싹했다. 유리나는 자신을 향해 빠르게 내려오는 검을 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고통은 없었다. 대신, 무언가가 세게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뒷전을 때렸다.
유리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바로 코앞에서 흠집이 많은 목검이 보였다.
‘목…… 검?’
의아할 새도 없이 빠르게 다가온 아론 경이 남자의 등을 베었다. 남자는 울컥 붉은 피를 토하며 유리나 쪽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그 육중한 몸이 그녀의 몸을 덮치기 전에 다부진 팔이 남자의 어깨를 잡아 바닥에 내팽개쳤다.
“괜찮으십니까?”
머리 위에서 낯선 듯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나는 뜀박질을 한 것처럼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오늘 일은 레이너드에게 잘 좀 말해 주세요.”
며칠 전에 보았던 에이든 테시가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며 그때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 * *
“이 녀석,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에이든 테시는 아카데미 안을 돌아다니며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벌써 2주째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못난 친구 녀석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래, 지금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 친구…… 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몇 년 만에 제국에서 온 친한 친구를 만났으니 수업에 빠질 법도 했다. 사실 에이든도 동생들이 수도에 놀러 올 때면 수업을 빠지고 동생들과 함께 놀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허트슨 교수님이 레이너드가 한 번이라도 더 말없이 수업에 빠진다면 수업에 받아 주지 않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허트슨 교수님은 레이너드를 아끼는 만큼 그에게 엄격했다. 홧김에 한 소리겠지만 가볍게 넘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에이든은 친구 녀석을 잡아다가 교수에게 데려갈 생각이었다. 수업에 빠지더라도 교수님께 허락부터 받아라, 뭐 이런 의도로 말이다.
허구한 날 수업을 빼먹는 그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는 당당했다.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에이든은 레이너드가 카르티아 영애와 함께 자주 출몰한다는 도서관 근처를 서성였다. 가기 싫다고 저항한다면 기절이라도 시켜서 데려갈 생각으로 목검도 챙겨 왔다.
한참을 잔디밭을 훑어보던 그의 눈에 흔치 않은 분홍빛 금발이 들어왔다. 얼마 전에 보았던 유리나였다. 그녀는 하녀와 함께 잔디밭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레이너드 녀석은 어디 갔지?’
분명 유리나와 같이 있어야 할 친구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피던 중에 그녀는 저 멀리 멀어졌다.
뭐, 카르티아 영애 곁에 있으면 곧 나타나겠지. 그때까지 카르티아 영애와 인사하고 간단한 이야기를 좀 하고 있자.
에이든은 목검을 어깨에 짊어지고 그 뒤를 빠르게 쫓아갔다.
“아가씨!”
그런데 정문에 다다랐을 무렵, 갑자기 웬 기사가 튀어나오더니 유리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 주위의 마나가 요동쳤다. 두 사람은 순간 이동 마법을 쓴 것처럼 한순간에 에이든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 아가씨!”
마지막에 유리나에게 밀쳐져 바닥에 넘어진 하녀만이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에이든은 그 갑작스러운 광경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이거 위험한 거 아냐?’
농땡이를 부리고 마법보다 검술 연습을 더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는 어찌 됐든 마법과 학생이었다. 잠깐 사이에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본인을 제외한 타인만 순간 이동을 시키는 마법은 일반 순간 이동 마법보다 훨씬 고위 마법이었다. 조금 전 마나 파동은 그 정도로 정교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가정은 단 하나.
“공간 분리 마법.”
어쩐지 목이 타는 것 같아 바짝바짝 말라 오는 아랫입술을 혀로 쓸었다.
친구 녀석이 좋아하는 여자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단둘이 있기 위해 마법을 쓴 게 아니라면 이건 심각한 상황이었다.
에이든은 애타는 목소리로 “아가씨!”를 외치는 하녀에게 다가갔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주위의 이목이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레이너드 어디 있는지 알아요?”
“네?”
하녀는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경계하듯 몸을 움츠리다가 뒤늦게 되물었다.
“레, 레이너드 님이요?”
“그 녀석 어디 있는지 알아요?”
“모, 모르겠어요. 잠깐 교수님을 뵈러 간다고만 들었는데…….”
낭패다. 에이든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공간 분리 마법인 것까지는 알아냈지만, 그의 실력으로는 저 벽을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레이너드나 교수 정도의 실력자가 와야 가능한데.
그렇다고 자기가 직접 그들을 찾으러 직접 갈 수는 없었다. 그는 일말의 가능성을 가지고 이곳에서 마법의 흔적을 찾아야 했다.
“교수 연구실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모르는……. 아! 데이브 님을 불러오면 될 것 같아요!”
에이든은 그게 누구냐, 실력이 뛰어나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저 하녀를 정중히 일으켜 서둘러 내뱉었다.
“얼른 가세요.”
하녀는 젖은 얼굴을 소매로 문지르며 아카데미 안쪽을 향해 뛰어갔다.
에이든은 그녀가 앉아 있던 곳에서 정신을 집중했다. 대충 이곳에 벽이 있으려니, 하고 마나를 휘둘러도 소용없었다. 정확하게 공간을 분리하고 있는 마나를 찾아내서 마나를 불어넣어야 했다.
초조함에 자꾸만 정신이 흐트러졌다. 목검을 쥐고 있는 손에서 땀이 났다.
고작 한 번 봤을 뿐인 타국의 귀족 영애. 그런 그녀의 위험에 이렇게까지 긴장이 되는 건 그녀가 레이너드의 친한 친구이기 때문이리라.
혹시라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간, 모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실실 웃고 다니는 그 녀석이 어떻게 될지 두려워서.
‘제발…….’
마나가 읽히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 좀 열심히 할 걸 그랬다. 모범생처럼 공부했어도 힘들었겠지만, 그래도 후회가 들었다.
주위에 지나다니는 안면 있는 마법과 학생들도 불러 찾아보았지만 아무도 찾지 못했다.
1초, 2초가 아까운 와중에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에이든은 초조한 얼굴로 하녀가 사라진 방향을 흘끔거렸지만 하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레이너드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에이든이 분풀이를 하듯 목검을 허공에 휘두를 때였다.
마법 실험이 실패했을 때처럼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주위에 마나가 휘몰아치며 허공에서 빛이 반짝였다. 놀란 학생들이 뒷걸음을 쳤다.
유일하게 제자리를 지키던 에이든은 쩍쩍 갈라지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작게 난 틈 사이로 피투성이가 된 하얀 손이 언뜻 보였다.
찾았다.
에이든은 마나를 불어넣어 빛이 나는 목검을 곧바로 금이 간 허공에 찔러 넣었다.
“아가씨!”
아까도 들었던 다급한 기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유리나를 노리고 내려치는 검을 목검으로 막았다.
손목이 충격에 시큰거렸지만 밀리지 않으려고 버텼다.
에이든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유리나의 푸른 눈을 보면서 씨익 웃었다.
“오늘 일은 레이너드에게 잘 좀 말해 주세요.”
그제야 긴장을 놓았는지 유리나가 설핏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데 예쁘기는 진짜 예쁘다. 특히 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저 푸른 눈동자가 예뻤다.
지난 5년간 여자라고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친구 녀석이 반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 * *
에이든이 나타난 후로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진검이 아니라 목검을 들고 있었지만, 에이든은 적당히 마법을 써 가며 습격자를 상대했다. 혼자서 힘겹게 다섯 명을 상대하던 아론 경은 도와주는 사람이 생기자 조금 더 여유롭게 남은 이들을 상대했다.
다섯 명 중 세 명이 죽고 두 명은 큰 부상을 입고 붙잡혔다. 배후를 추적해야 했기 때문에 아론 경은 에이든이 구해 온 밧줄로 살려 둔 두 남자를 포박했다. 독약을 먹는 것을 막기 위해 입에 재갈도 물렸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나고 나서야 아론 경이 다급하게 유리나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그의 시선이 피투성이가 된 유리나의 두 손으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잘 살폈어야 했는데.”
아론 경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드러났다. 카르티아 후작의 후원을 받아 검술의 뜻을 펼칠 수 있게 된 아론 경은 황실 기사단에 입단할 수 있는 실력을 가졌음에도 후작가에 남았다. 그 정도로 그는 카르티아 후작가를 각별하게 생각했다.
그는 유리나를 다치게 했다는 사실에 퍽 괴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작 본인도 팔과 허리를 베어 피를 철철 흘리고 있으면서.
“전 괜찮아요. 데이브가 오면 이 정도는 금방 치료해 줄 텐데요. 그것보다 경의 상처가 더 걱정되네요. 경이야말로 괜찮으세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보다 아가씨, 지혈을…….”
“아, 영애는 제게 맡기시고 경께서는 경의 상처를 돌보세요.”
중간에 끼어든 에이든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유리나에게 다가왔다. 아론 경은 뭐라고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였으나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나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짜 많이 다치시긴 하셨네요. 정말 괜찮으세요?”
에이든은 손수건으로 피투성이가 된 유리나의 두 손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칼에 깊게 베인 것처럼 갈라져 뻘건 속살이 드러난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솟아났다. 연한 빛의 손수건이 금방 피로 축축해졌다.
에이든은 지혈을 위해 손수건으로 손을 꾹 눌렀다. 유리나는 순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눈을 찌푸렸다.
좀 전까지는 상황이 급박해서 통증을 느끼지 못했는데 긴장이 풀리자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올 정도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머리도 살짝 어지러웠다.
“죄송해요. 제가 치료 마법은 못 해서, 교수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베시가 데이브를 부르러 갔다면서요. 데이브가 치료해 줄 거예요.”
“데이브란 분 실력이 좋은가 봐요.”
“네. 크론 아카데미를 7년 만에 졸업했으니까요.”
“우와.”
에이든의 입에서 진심 어린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는 유리나의 손에 손수건을 꽉 묶어 주면서 재잘거렸다.
“대단하신 분이네요. 저는 언제 졸업할지 벌써부터 걱정이에요. 아, 너무 아팠죠? 죄송해요. 그런데 이렇게 안 하면 상처가 더 벌어질 수가 있어서.”
그가 유리나의 눈치를 보며 손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마법 실력이 없어서 치료 마법을 못 쓴다고 했던 것에 비해 상처를 싸매는 솜씨는 꽤 능숙했다.
“마법과…… 아니셨나요?”
“마법과 맞아요. 치료 마법도 못 쓰는 게 좀 한심하죠?”
“치료 마법은 꽤 고위 마법이잖아요. 못 쓴다고 이상한 게 아니란 거 알아요. 그냥 상처를 묶는 솜씨가 능숙해서요.”
“아, 검술 연습 하다 보면 자잘하게 다칠 때가 많아서요. 혼자 매일 치료하다 보니 전문가가 다 됐죠.”
유리나는 새삼 에이든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에이든은 호리호리한 체형보다는 레이너드처럼 적당히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겉만 본다면 전혀 마법과 학생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마법도 공부하고, 검술까지 공부하시려면 엄청 힘드셨겠네요.”
“별로 안 힘들었어요. 저는 마법 공부 별로 안 했거든요. 뭐, 레이너드 녀석은 시간 쪼개느라 힘들었겠지만요.”
“레이요?”
유리나는 검술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레이너드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떨떨한 감정이 목소리에도 묻어 나왔는지, 줄곧 그녀의 손을 보며 집중하고 있던 에이든이 의아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처음 들으세요? 걔도 저랑 검술 연습 열심히 했는데.”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간 주고받은 편지에서 그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근육이 있어 탄탄해 보이는 그의 몸을 보며 마법사가 아니라 기사 같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검을 배웠으리라고는…….
“아뇨, 들었어요.”
이상한 자존심 때문에 유리나는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아, 하긴. 모르셨을 리가 없죠.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으셨는데. 그래도 그 녀석이 검술 연습하는 건 직접 보신 적은 없으시죠? 여기 와서 처음 배웠다던데 생각보다 금방 늘어서 지금은 웬만한 귀족들보다도 더 잘해요.”
“그렇군요.”
“언제 한번 보여 달라고 하세요. 구경하시는 김에 아예 그 녀석을 연무장까지 끌고 와 주시면 더 감사할 것 같고요.”
“얘기는 해 볼…… 게요.”
유리나는 어쩐지 목이 메는 것 같아 말하는 중간에 침을 한 번 삼켜야 했다. 이상하게 들렸을 것 같은데 에이든은 이상해하는 기색 없이 유리나의 상처에 집중했다.
유리나는 손에 꼼꼼하게 붕대를 감는 에이든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왜 말을 안 해 준 거지.’
레이너드가 편지에 시시콜콜한 얘기를 해 주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게 못내 섭섭할 때도 있었지만 그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편지가 오고 가는 건 고작 한 달에 한 번뿐. 한 달 동안 일어난 일을 모두 담기엔 편지지는 너무나 작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 레이너드에게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다만…….
‘대체 내가 모르는 게 얼마나 될까.’
자신은 모르고, 눈앞의 소년은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레이너드와 보낸 시간은 고작 6개월 남짓이었다. 그나마도 두 사람은 6개월 내내 그 작디작은 공부방이나 서로의 침실을 오고 가며 지냈다. 매일 했던 일이라고는 기본 수업과 간단한 게임 정도였다.
그들의 세계는 작았고, 특별할 게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레이너드는 5년간 이 아카데미에서 지냈다.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작은 저택에선 배우지 못한 많은 것들을 직접 보고 배웠다.
그의 세계는 그만큼 넓고 다양해졌다. 그리고 그의 세계에는 유리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인데도 왜 패배감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입 안이 썼다.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려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듯 느껴지는 아픔에 재빨리 손가락을 빳빳하게 폈다.
“그렇게 움직이면 안 돼요!”
에이든이 재빨리 유리나의 손을 살폈다. 기껏 지혈했던 상처에서는 조금씩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큰일이네요. 얼른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에이든이 다시 붕대를 풀어 지혈을 하려고 할 때였다.
“아가씨!”
저 멀리서 울음기가 섞인 베시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베시와 데이브가 유리나를 향해 뛰어왔다. 베시는 좀처럼 뛰지 못하는 데이브의 팔을 질질 끌고 유리나의 앞에 섰다.
얼마나 빨리 뛰어왔는지, 가까이에서 본 두 사람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유리나는 괜히 농담을 건넸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데이브. 연구만 하지 말고 운동 좀 하라고 했지?”
“아가씨, 지금 농담이 나오세요?”
베시가 울먹거리며 에이든 옆에 앉아 유리나의 손을 살폈다. 그녀는 생각보다 깊은 상처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마법사님, 얼른! 얼른 치료요! 얼른!”
거친 숨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데이브가 유리나의 손을 잡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숨을 헐떡이면서도 착실하게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그의 손끝에서 새어 나온 하얀빛이 유리나의 상처 사이로 스며들었다. 가장 깊은 곳부터 서서히 아물기 시작한 상처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흉터 하나 없이 치료되었다. 소맷자락에 묻은 피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다친 줄도 모를 정도로 완벽했다.
안 그래도 힘들어했던 데이브는 마법을 다 쓰자마자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골랐다. 유리나가 미안하다고 할 새도 없이 베시가 그녀의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쏟아 냈다. 뜨거운 눈물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처투성이였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으허엉, 전 아가씨께서 진짜 잘못되시는 줄 알고……. 아가씨께서 잘못되면 저도 못 살아요.”
유리나보다 열 살 많은 베시는 늘 다정하고 차분한 언니 같았다. 정신 연령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자신보다 어린 그녀를 언니처럼 따르게 된 것도 그녀의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베시가 아이처럼 울었다. 남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도 않고, 유리나의 손을 잡고 꺽꺽 소리까지 내 가면서. 유리나는 지난 5년간 베시와 함께 지내면서 그녀가 이렇게 통곡을 하며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괜히 덩달아 코끝이 찡해지는 것 같아 유리나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베시, 울지 마. 나 이렇게 멀쩡하잖아.”
“그게 어떻게 멀쩡한 거예요? 상처가 그렇게 심하게 났는데.”
“데이브가 치료해 줬잖아. 이젠 멀쩡해.”
“지금 멀쩡해도 안 다치신 게 아니잖아요.”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그만 울어, 응?”
유리나는 소맷자락으로 베시의 젖은 뺨을 닦아 주려다가 피딱지가 묻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멈췄다. 데이브가 숨을 고르는 중에도 눈치 좋게 제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베시의 뺨을 닦아 주는 유리나에게 물었다.
“아가씨, 대체 무슨 일입니까? 베시 양은 아가씨께서 갑자기 사라지셨다고만 하던데.”
“그것보다 숨 좀 골랐으면 아론 경 좀 치료해 줄래? 나보다는 아론 경이 많이 다쳤거든.”
뒤늦게 제 뒤쪽으로 시선을 던진 데이브가 한쪽 팔이 피투성이가 된 아론 경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론 경을 치료해 주면서 그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속닥거려서 무슨 말인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번 습격과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의논하는 것 같았다.
‘이제 다 끝난 건가.’
유리나는 여전히 울먹이는 베시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귓가에 닿는 베시의 울음소리는 이렇게나 생생한데, 조금 전 일이 마치 꿈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유리나가 치료를 받는 내내 물러나 있던 에이든이 다시 한번 유리나의 손을 살폈다.
“네, 덕분에요. 와 주시지 않았다면 큰일을 당할 뻔했어요. 상처를 지혈해 주신 것도 감사해요. 꼭 답례할게요. 손수건도요.”
유리나는 에이든 손에 들린 피에 전 손수건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닙니다. 어차피 이건 검술 연습할 때 쓰는 거라 비싼 것도 아니에요. 그런 상황에서 도와 드리는 건 당연하죠. 사실 제가 뭐, 도와 드린 게 있나요? 영애의 마법이 아니었다면 저도 도와 드리지 못했을 거예요.”
에이든이 고개를 저으며 뒷머리를 멋쩍은 듯 긁적였다.
“그리고 영애께서 큰 화를 입으셨다면 레이너드 녀석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요.”
그가 주위를 살피다가 소리를 죽였다.
“사실 그동안 영애께서 어떤 분인지 궁금했어요.”
“저를요?”
유리나는 갑작스러운 말에 조금 얼떨떨해졌다.
‘날 대체 어떻게 알고?’
레이너드는 그녀에게 에이든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그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이든에게는 자신의 얘기를 했던 걸까.
베시의 울음에 잠시 잊고 있던 씁쓸한 패배감이 다시 마음을 짓눌렀다.
유리나의 어두운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에이든이 태연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네. 레이너드 녀석이 의외로 자기 얘기는 하지 않아서 말해 준 적은 없지만, 걔가 알게 모르게 티가 많이 나거든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레이가…… 얘기해 준 게 아니라요?”
“걔가요? 걔는 자기 얘기 별로 안 해요. 저는 걔가 아카데미에 오기 전에 제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잘 몰라요. 가족 얘기도 하나도 안 해 주던걸요.”
에이든의 얼굴에 조금 전까지 유리나가 짓고 있던 씁쓸한 표정이 잠깐 떠올랐다.
“아무튼 그 녀석이 말은 한 번도 안 했지만 매달 초조하게 편지를 기다리더라고요. 맨날 기운 없이 밥도 제대로 먹지 않는 녀석이 그 편지만 받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을 차리며 돌아다니더라고요. 그 편지를 보내신 게 영애 맞죠?”
유리나는 소리 내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영애 덕분에 그 녀석이 여기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모든 게 처음 듣는 이야기투성이였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에게서 이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편지를 기다렸다는 내색을 비친 적도 한 번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영애.”
잠깐 사이에 눈시울이 붉어진 에이든이 유리나의 손등에 정중하게 입을 맞췄다. 유리나는 여전히 그가 하는 말이 온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저야말로 감사드려요.”
에이든의 한마디에 계속해서 마음을 짓누르던 묵직한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 * *
유리나를 숙소로 데려다준 아론 경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아가씨를 공격한 사람들, 왕국 사람인 것 같습니다.”
내심 그들이 제국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던 유리나는 조금 놀랐다. 자신을 노렸으니 당연히 카르티아 가문에 원한을 갖고 있는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카르티아 후작은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서 영지민이나 많은 기사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강직하다는 게 늘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황실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로서 일을 처리하다 보면 반감을 갖는 이들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예전에 유리나의 첫째 오빠였던 릭스 카르티아는 방학 때 저택에 방문했다가 아카데미에 돌아가는 길에 오늘 유리나처럼 습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비리를 저질러 기사단에서 쫓겨난 기사가 원한을 갖고 한 일이었다.
그런데 제국민이 한 짓이 아니라니?
“확실합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데이브가 묻자 아론 경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확실합니다. 그들이 쓰던 검술이 완벽하게 왕국식 검술이었습니다. 제국과 왕국은 검술이 많이 달라 제국 사람이 완벽하게 따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 아가씨를 대체 왜 노렸던 걸까요.”
유리나 옆에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던 베시가 유리나를 보호하듯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유리나는 제 어깨 위에서 달달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맞잡았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조사를 조금 더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레이너드 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갑작스러운 데이브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전에도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레이너드 군의 실력이 뛰어난 데다가 베아투스라는 상징적인 위치까지 있으니 노리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날 이용해서 레이너드를 포섭하려고 했다는 소리야?”
“지금으로써는 그럴 가능성이 큰 것 같습니다.”
“날 죽이려고 했는데?”
유리나의 물음에 이번엔 아론 경이 대답했다.
“어쩌면 아가씨의 목숨을 노린 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얼떨결에 따라온 아론 경에게는 죽일 듯이 달려든 것에 비해 유리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 유리나가 마지막에 느꼈던 그 살의는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현재 나온 가설 중에서는 유리나를 인질로 삼아 레이너드를 노렸다는 것이 가장 신빙성이 있었다.
그래도 일단 조사를 해 봐야 하니 아론 경은 아카데미와 크론 왕실 측에 협조를 요청하겠다고 했다. 레이너드가 크론 왕립 아카데미의 학생인 만큼, 정말로 레이너드를 노린 일이었다면 크론 왕국에서도 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그렇게 해.”
아론 경은 유리나의 대답을 듣자마자 왕실에 연락을 넣어 보겠다며 방을 나갔다. 데이브는 그를 따라 나가다 말고 다시 돌아와 유리나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아가씨께 그게 무슨 짓이냐는 베시의 잔소리를 들은 뒤에야 그는 손을 거뒀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그동안 마법을 배운 게 이렇게 도움이 되는군요.”
“그러게. 재능이 없어서 과연 쓸모가 있을까 싶었는데.”
데이브는 힘없이 웃는 유리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언가 하고자 하는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인사를 한 뒤 방을 나섰다.
유리나는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이 대충 무슨 말이었을지 짐작이 갔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겠지.’
데이브는 유리나가 어릴 적부터 그녀를 동생처럼 아꼈다. 아마 그는 유리나가 그런 일을 당할 때 옆에 없었던 것을 미안해하고 있을 것이다.
‘미안해할 일이 아닌데.’
유리나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소파에 축 늘어지듯 앉아 오늘 일어난 일을 곱씹어 보았다. 뒤늦게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정말로 레이를 노린 일일까.’
그동안은 제 목숨만 위태롭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역으로 자신의 존재가 레이너드에게 걸림돌이 될 줄은 몰랐다.
“유리나.”
통증이 없는 손을 의미 없이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던 유리나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레이너드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유리나.”
성큼성큼 유리나의 앞에 다가온 레이너드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뛰어온…….”
유리나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레이너드가 굳은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을 샅샅이 훑어보는 그의 시선에서 유리나는 그가 사건에 대해 들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쩐지 심각한 이야기가 이어질 것 같아서 눈짓으로 베시를 내보냈다.
“레이.”
“…….”
“레이.”
듣고도 못 들은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못 들은 건지 그는 여전히 대답 없이 유리나의 상처 없는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 가며 살폈다.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이 뺨을 타고 내려와 턱에 고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뛰어온 걸까.’
레이너드는 공간 이동 마법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많이 발전했다. 그런 그가 마법을 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뛰어왔다는 건 그만큼 정신이 없었다는 소리인 걸까.
“여기만 다친 거야?”
“이쪽도.”
유리나가 순순히 반대쪽 손을 내밀자 그가 아예 두 손을 겹쳐 쥐었다. 유리나는 얼떨결에 양손을 모은 자세로 그의 손에 감싸 안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레이너드의 손은 그녀의 손등을 모두 덮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많이 컸네.’
진지한 그와 달리 유리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뼈마디가 앙상하고 여기저기 상처가 나 있던 그의 손은 지금은 뼈마디가 굵어지고 굳은살이 군데군데 박여 있었다. 아마도 검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유리나는 손끝으로 굳은살이 박인 그의 손끝을 톡톡 건드렸다. 레이너드가 하지 말라는 듯 손을 한 번 꽉 쥐었다가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그의 얼굴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뛰어왔어?”
유리나가 손을 뻗어 앞머리를 매만져 주자 레이너드가 한 걸음 살짝 물러나는 것으로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갈 곳을 잃은 흰 손이 허공에서 의미 없이 방황했다. 유리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던 레이너드가 뒤늦게 다시 다가왔다.
“미안. 피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
그가 상체를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더니, 유리나의 손을 잡고 제 이마 쪽으로 끌어당겼다.
계속해 줘.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동이, 얌전히 눈을 감고 있는 그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리나는 촉촉한 그의 앞머리를 쓸어 이마를 뒤로 넘겼다.
“교수님이 뭐라고 하셔?”
레이너드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유리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유리나가 순간 당황할 정도로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 그게 중요해?”
“…….”
그가 유리나의 손을 잡고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왜 이렇게 태연해?”
“태연?”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유리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했다.
“내가?”
“응.”
“왜 그렇게 생각해?”
“나는 네가…….”
감정이 치솟는지 그는 눈을 감고 숨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죽을 뻔했어.”
“응, 알아.”
유리나의 차분한 대답에 레이너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유리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베시와 데이브에게 했던 것처럼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멀쩡하잖아.”
“유리나.”
“이것 봐. 조금 다치기는 했어도 데이브가 말끔히 치료…….”
태연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감정이 치솟아 목이 멨다.
유리나는 목으로 올라오는 부정적인 감정을 애써 삼키고 레이너드에게 웃어 보였다.
“나는…… 괜찮아.”
레이너드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것이란 걸 안다. 그는 더 이상 순진한 열두 살 아이가 아니었다. 유리나 또한 지금껏 그에게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여기서 괜찮지 않다고 하면 안 그래도 괴로워하고 있을 그가 더욱 괴로워할 테니까. 그의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었다.
“나 정말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레이너드가 한마디, 한마디 짓씹듯이 내뱉었다.
“너는 괜찮을지 몰라도 내가 안 괜찮아. 내가 안 괜찮다고. 에이든에게서 네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끝으로 갈수록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는지 그의 언성이 올라갔다. 본인이 말하고도 놀랐는지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한숨을 토해 내듯 말을 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여기 아카데미에서, 내가 없는 제국도 아니고 이곳에서 네가 죽을 뻔했어.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마법을 배운 건데, 내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한 건데, 내가 대체 왜…….”
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유리나를 끌어안았다. 유리나는 그의 가슴에 뺨을 기댔다.
두근, 두근, 두근. 듣는 사람이 숨 가쁠 정도로 빠른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가 얼마나 가슴을 졸이고 있었는지 그 소리가 말해 주고 있었다.
“유리나.”
한참의 침묵 끝에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얼른 제국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하루라도 그녀와 더 있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게 너한테 더 나을 것 같아.”
아직까지는. 혼잣말 같은 속삭임으로 그가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 * *
유리나를 습격했던 배후는 생각보다 금방 잡혔다. 현 왕실에 반대를 하는 반역 분자로, 이미 크론 왕실에서는 이 세력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은 좀처럼 잡히지 않아서 애 좀 먹었는데, 아론 경이 잡은 남자들 덕분에 꼬리를 잡을 수 있다고 했다.
덕분에 유리나는 조금 더 안심하고 원래 예정했던 기간만큼 왕국에 머물 수 있었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에게 데이브에게 간다고 말하고 기숙사 쪽으로 향했다. 베시를 통해 미리 쪽지를 받은 에이든이 먼저 기숙사 입구에 나와 있었다.
“카르티아 영애.”
그가 정중히 유리나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해 주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네, 덕분에요.”
“그 못된 녀석들은 곧 잡힐 테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유리나는 감사의 뜻을 담아 그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에이든이 살짝 불그스름해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준비는 대충 했어요. 영애가 계셔서 정말 파티다운 파티를 할 수가 있겠군요!”
에이든이 곧 있을 레이너드의 생일 파티를 떠올리며 흥분된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생일 파티를 같이 준비하자고 먼저 제안한 것은 에이든이었다. 그는 그나마 친하게 지내는 친구 몇몇을 제외하면 왕국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레이너드를 위해 매년 생일 파티를 준비했다.
처음에는 눈물을 펑펑 쏟았던 레이너드는 그다음 해부터는 뭘 이런 것을 준비했냐고 툴툴거렸다. 하지만 싫어하는 기색은 전혀 아니라서 에이든을 비롯한 그의 친구들은 그 퉁명한 목소리를 들으며 실실 웃었다.
‘저러니 생일 파티를 안 준비해 줄 수 있나.’
게다가 올해는 레이너드가 성년이 되는 해. 특별한 날인 만큼 다른 때보다 더 정성 들여서 준비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제국에 있다는 후원자를 초대해 볼까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레이너드는 후원자가 제국 귀족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그 덕분에 레이너드를 만난 지 5년이나 되었는데도 에이든은 그의 후원자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주 기본적인 가문의 이름조차 모르니 초대장을 보낼 수조차 없었다.
‘어차피 보낸다고 해도 오지 않았을 테지만.’
에이든은 눈치가 꽤 빠른 편이었다. 레이너드가 시시콜콜 개인사를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에이든은 그의 후원자가 상당한 재력가인 데다가 제국에서 꽤 영향력 있는 귀족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레이너드에게 오는 선물들 중 돈이 있어도 아무나 쉽게 구할 수 없다는 귀중품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귀족에게 왕국의 일개 학생이 생일 초대장을 보낸다고? 오지 않는 것은 물론 애초에 편지를 읽지 않을 확률이 훨씬 더 컸다. 괘씸하다고 화를 내지 않는다면 다행이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제국식 음식을 준비하는 거였다. 에이든은 그동안 모아 둔 용돈을 탈탈 털어 수도에서 제국식 디저트로 유명한 베이커리에 제국식 생일 케이크를 미리 주문했다.
이왕이면 가장 크고 화려한 케이크로!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먹을 거니까!
그렇게 만만의 준비를 하던 에이든의 눈앞에 유리나가 나타난 것이다.
제국에 왔다는 그녀는 누가 봐도 레이너드와 친해 보였다. 아니, 친해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레이너드가 그녀에게 단순히 우정을 넘어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에이든이 생일 파티에 초대하고 싶어 했던 레이너드의 소중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초대해야지!’
에이든은 유리나를 처음 본 날부터 그녀를 파티에 초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레이너드 이 녀석이 그녀를 친구들에게 소개해 주기는커녕 수업까지 빠지며 놀러 다니는 통에 그녀의 머리카락 하나 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유리나를 도와주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레이너드 또한 에이든이 유리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그렇게 기회를 노리다가 그는 유리나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건넸다.
“레이너드의 생일 파티를 할 건데 오실래요? 애들끼리 준비하는 거라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재미는 있을 거예요.”
한편 유리나는 그 제안을 들었을 때 내심 놀랐다. 그녀가 이 먼 곳까지 고생을 하며 온 것도 다 레이너드에게 파티를 해 주기 위해서였다. 이 먼 타지에서 그가 외롭지 않도록.
파티는 자고로 사람이 많을수록 즐거운 법이다. 하지만 저택에서 고용인들이 솔선수범해서 파티를 준비했던 것과 달리 왕국에 데려올 수 있는 고용인의 수는 한정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카데미에서 레이너드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레이너드가 친구들을 제대로 소개해 주지 않아서 고민하던 차에 에이든의 제안을 들은 것이었다.
안 그래도 원했던 바라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좋아요. 같이 준비해요.”
그렇게 된 일이었다.
* * *
파티 장소는 에이든의 기숙사 방으로 결정됐다. 레이너드의 방 바로 맞은편이라 들키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유리나의 걱정을 들은 에이든이 코웃음을 치며 호언장담했다.
“걔는 절대로 이 방에 먼저 안 와요.”
참고로 레이너드는 지금쯤 허트슨 교수의 수업을 듣고 있을 것이다. 또다시 무단으로 빠지면 졸업 논문을 통과 안 시키겠다고 엄포를 놓는 통에 레이너드는 유리나를 걱정하면서도 수업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세 시간 정도는 시간이 있어요.”
에이든이 기숙사 방으로 들어가며 팔을 걷어붙였다. 사실 에이든은 레이너드와 같은 수업을 들어가야 했는데 생일 파티 준비로 빠지게 됐다. 유리나는 그가 수업에 빠지는 게 미안했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오늘 마침 수업도 듣기 싫었는데 잘 됐죠. 어차피 제가 원래 수업을 많이 빠져서 레이너드 녀석도 별 의심을 안 하더라고요.”
입꼬리를 잔뜩 들어 올리는 모습이 얼마 전 성인이 되었다는 남자답지 않게 아이처럼 개구지기만 했다. 유리나는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좋은 친구를 뒀네.’
그동안 레이너드와 에이든이 어떻게 지냈는지 듣지 않아도 대충 그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삼십여 분 정도를 베시와 에이든의 도움을 받아 방을 꾸미고 있을 때 방문이 열렸다. 혹시 레이너드가 온 건 아닌가 걱정하며 뒤를 돌아봤던 유리나는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낯선 아이의 눈과 마주쳤다.
“어?”
아이가 푸른 눈을 깜빡이며 들어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도로 나가지도 못한 채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를 발견한 에이든이 굽혔던 허리를 펴며 짐짓 진지하게 허리에 손을 얹었다.
“수업 시간인데 왜 여기 있어?”
“나도 도와주고 싶단 말이야.”
아이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씰룩였다. 에이든이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한 번 쉬더니 그의 손을 끌어와 유리나 앞에 섰다.
“여기 이 꼬맹이는 네이선이에요. 네이선, 여기는 레이너드 친구인 카르티아 영애야. 인사해”
네이선은 통통한 볼살이 귀여운 소년이었다. 올해로 열세 살이라는 그는 레이너드와 닮은 점을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유리나는 이상하게 그가 레이너드와 닮았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레이너드가 저택을 떠났을 때 나이도 열세 살이라 그랬을까.
“누나, 안녕! 나는 네이선이야. 누나라고 불러도 되지?”
“예절 시간에 배웠잖아. 카르티아 영애라고 불러야지.”
에이든이 꿀밤을 아프지 않게 한 대 쥐어박자 네이선이 맞은 곳을 문지르며 씩씩거렸다.
“여기는 아카데미잖아.”
귀족과 평민이 함께하는 크론 왕립 아카데미에서는 원칙적으로 모든 학생은 평등했다. 학생들은 적어도 아카데미 내부에서만큼은 신분에 상관없이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며 친구처럼 지낸다.
암암리에 귀족의 지위를 내세우며 평민 출신 학생을 억압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발견 즉시 처벌을 받는다. 최악의 경우 퇴학이다.
신분뿐만이 아니라 출신 지역에 따라 차별하는 것도 엄히 금하고 있다. 그런 차별들이 학업 분위기에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이선의 주장은 어찌 보면 타당했다. 유리나가 이곳 학생이 아니란 게 문제라면 문제일 뿐.
유리나는 네이선에게 뭐라고 하려는 에이든에게 고개를 저어 보인 뒤 무릎을 굽혀 네이선과 눈높이를 맞췄다.
“혹시 레이에게도 형이라고 해?”
“레이너드 형? 응!”
“그럼 누나라고 불러도 돼. 레이가 형이면 나도 누나지. 친구니까.”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네이선이 이내 “으응?” 하고 눈을 찌푸렸다.
“왜 그래?”
“누나는 왜 레이너드 형을 레이라고 불러?”
“그거야 애칭이니까.”
“그렇지만 나한테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는걸.”
유리나는 뜻밖의 지적에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레이. 그건 그녀가 처음부터 레이너드에게 이름 지어 줄 때 아무 생각 없이 말했던 애칭이었다. ‘레이너드’라는 이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를 ‘레이’라고 부르는 건 유리나 하나였지만, 정작 그녀는 그에 대해 특별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방금 네이선의 말을 들으니 새삼 깨달은 것이다.
‘레이는 특별하게 생각했었나.’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뜨끈하게 달아오른다. 유리나는 마찬가지로 화끈거리기 시작한 얼굴을 감추기 위해 네이선에게 한 번 웃어 보이고는 베시를 도와 테이블 위를 꾸몄다.
“우와, 우리 방 같지가 않아!”
에이든을 비롯하여 같이 다니는 무리 속에서 예쁨만 받고 컸는지 네이선은 생각보다도 더 순수하고 귀여운 면이 있었다.
그는 베시의 도움을 받아 파티 준비를 하는 유리나의 뒤를 새끼 오리마냥 졸졸 따라다녔다. 레이너드에게 깜짝 파티를 해 줄 생각에 신이 난단다.
“누나, 내가 도와줄 건 없어? 나 파티 준비하는 거 되게 잘해!”
“그래?”
“응! 그동안 레이너드 형 생일 파티 준비하는 것도 다 내가 했어.”
네이선이 자부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제 가슴팍을 탁탁 두드렸다. 이 쪼그만 애가 도와줘 봤자 얼마나 도와줬겠나 싶었지만 유리나는 웃으며 맞장구를 쳐 줬다.
“그럼 어디 한번 솜씨 좀 볼까?”
“응!”
네이선이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테이블에 디저트를 놓는 베시를 향해 뛰어갔다. 가자마자 도와주기는커녕 베시가 건네준 마카롱 하나를 입에 넣고 베시시 웃는다. 유리나는 맛있다며 눈을 똥그랗게 뜨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귀엽네.’
겉모습을 본다면 유리나와 네이선은 또래처럼 보였다. 지금은 유리나가 더 키가 커 보이지만 높은 구두를 벗는다면 실제로는 그녀가 살짝 더 작을 수도 있었다.
나이도 두 살밖에 차이가 안 나니 누가 누구를 귀여워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귀여워 보이는 걸 어쩌겠는가.
네이선 또한 유리나를 꼭 대여섯 살은 많은 누나처럼 대했다. 아마 곧 성인이 되는 레이너드의 친구라고 하니 덩달아 그녀가 성인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아무리 봐도 레이랑 닮은 점은 없는데.’
비쩍 말랐던 그와 달리 네이선은 보통 체격이었다. 아직 젖살이 안 빠졌는지 볼은 다소 통통하기까지 했다. 성격도 낯을 가리는 레이너드와 달리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살갑게 대할 정도로 붙임성도 좋았다.
그 어디에서도 레이너드와 닮은 점을 찾아볼 수 없는데 유리나의 눈에는 자꾸 네이선의 얼굴 위로 열세 살 레이너드의 얼굴이 보였다.
“누나, 이거 레이너드 형이 좋아하는 거야! 역시 친구라서 잘 아나 봐!”
한참을 고민하던 유리나는 신이 난 표정으로 생크림이 잔뜩 올라간 컵케이크를 흔드는 네이선을 보며 비로소 해답을 얻었다.
가식이라고는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아이답게 순수한 저 모습이 닮았다. 저 해맑은 모습이 예쁘다는 점이 비슷하다.
‘레이가 좋은 친구들을 뒀네.’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이 틈 속에서 어울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네이선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왕국에서 남은 일정은 단 사흘. 이 아이들이 있다면 아무 걱정 없이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 * *
“레이너드, 어디 가?”
수업을 마치고 나오던 레이너드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던 길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에이든이 실실 웃으며 서 있었다.
에이든이 뛰다시피 달려와 레이너드의 팔에 매달렸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급한 일이라도 있어?”
“너야말로 수업은 안 듣고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날씨가 좋잖아. 산책 좀 다녀왔지. 그래서 이제 뭐 할 거야?”
“알아서 뭐 하게?”
일부러 퉁명스레 대꾸한 레이너드는 에이든의 팔에서 팔을 빼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평소라면 에이든의 장단에 어울려 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머릿속엔 오로지 한 사람 생각뿐이었다.
‘유리나는 스승님하고 있는다고 했는데.’
유리나와 떨어지는 것을 꺼려 하는 레이너드를 향해 그녀는 데이브와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웃었다.
데이브는 보통 아카데미에 오면 도서관이나 교수 연구실에 처박혀 있었다. 그럼 유리나도 그곳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곳에 가 있을까.
레이너드가 고민하고 있는데 에이든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카르티아 영애 찾아? 나 영애가 어디 있는지 아는데.”
“어디 있는데?”
“와,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카르티아 영애 얘기를 하니까 관심을 보이냐? 섭섭하네.”
“모르면 됐어.”
저 녀석이 알 리가 없지. 미련을 버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에이든이 다급하게 달려와서 그의 팔을 잡았다.
“잠깐만, 진짜 알아. 안다고!”
“어디 있는데?”
“나만 따라와.”
레이너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에이든의 표정을 살폈다. 자꾸 피식피식 웃는 게 수상쩍기는 했지만 거짓말을 꾸며 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그는 과하게 활동적이고 말이 많은 게 단점이기는 했지만 거짓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레이너드는 순순히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내 에이든이 기숙사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걸음을 멈췄다. 무언가 이상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카르티아 영애 만나러.”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
“잔말 말고 따라와. 친구도 못 믿어?”
마법 실력보다 힘이 더 좋은 에이든은 그를 질질 끌고 가다시피 기숙사 안으로 걸어갔다. 레이너드는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에이든이 향하는 곳은 레이너드의 기숙사 방이었다. 아니, 레이너드의 방인 줄 알았다. 그러나 에이든은 떨떠름한 표정의 그를 한 번 돌아본 다음 제 방 앞에 섰다.
“여긴 네 방이잖아.”
“응, 내 방이지.”
“여기에 유리나가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에이든은 그저 실실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열어 봐.”
그래도 레이너드가 문을 열 생각을 하지 않자 직접 그의 손을 끌어와 문고리 위에 얹었다.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말고, 속는 셈 치고 열어 봐.”
대체 또 무슨 꿍꿍인지. 그의 말처럼 레이너드는 속는 셈 치고 문고리를 돌렸다.
“야, 야! 네이선 가만히 있어. 곧 올 거란 말이야.”
“나 심장이 너무 두근두근 대서 가만히 못 있겠어.”
“그럴 땐 코로 숨을 깊숙이 들이쉬면 조금 나아져요.”
“베시, 정말? 알겠어. 흡!”
열린 문틈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하지만 이곳에서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 이질적으로 들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뒤로 꿈에서도 듣고 싶었던 가벼운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유리나의 웃음소리였다.
레이너드는 문틈으로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늘 어지러웠던 에이든의 기숙사 방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늘 옷이나 책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던 방 한가운데에는 못 보던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아기자기한 제국식 디저트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규모는 확연히 작아졌지만, 5년 전 카르티아가 사람들이 그에게 해 주었던 생일 파티와 아주 흡사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유리나가 서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훌쩍 컸지만, 그의 품 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은 그녀가 문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레이.”
그러고는 눈을 접어 웃으며 그를 향해 사뿐히 다가온다.
“생일 축하해. 이 말, 꼭 해 주고 싶었어.”
이 말을 해 주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만 작게 이야기하며 미소 짓는 그 얼굴이 예나 지금이나 참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작고 하얀 손에서 흩뿌려진 종잇조각이 레이너드의 위로 쏟아졌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색종이 틈 사이로 보였다 사라지는 유리나의 미소가 감질나게 느껴졌다.
레이너드가 저도 모르게 유리나를 끌어안으려 팔을 뻗을 때였다. 등 뒤에서 에이든이 팔로 그의 목을 감싸며 그의 등에 매달렸다.
“야, 레이너드! 생일 축하해! 그 쪼그만 녀석이 이렇게나 컸어!”
“레이너드 형, 생일 축하해!”
유리나 옆으로 쪼르르 달려온 네이선이 똥그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생일 축하드려요!”
“형, 축하해!”
그 뒤로 베시와 토마스, 알렉스가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울고 싶은 기분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눈치도 없는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다시 한번 흘러내렸다.
“여전히 울보네.”
소매 끝으로 그의 볼을 닦아 주며 중얼거리는 유리나의 목소리에도 언뜻 물기가 배어 있었다.
* * *
에이든 녀석이 쟤는 생일 파티 해 줄 때마다 항상 운다며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네이선은 레이너드가 좋아하는 컵케이크를 들고 쫄래쫄래 다가와 그에게 내밀었다.
그걸 또 에이든이 대신 받아 잔뜩 얹어진 하얀 크림을 레이너드의 볼에 덕지덕지 묻혔다.
“야, 넌 어째 크림을 묻혀도 미모가 죽질 않아?”
레이너드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에이든의 볼에 똑같이 크림을 묻혀 준 뒤 얼굴을 정리하기 위해 제 방으로 향했다.
“에이든 형! 이거 되게 맛있어!”
“그래, 그래. 많이 먹어. 제국식 디저트라서 오늘이 아니면 먹기 좀 힘들 거야. 그나저나 카르티아 영애는 저 녀석을 언제부터 알고 지내신 거예요?”
“5년 전부터요. 레이가 열두 살 때.”
“와, 그때 저 녀석 성격 장난 아니었는데. 친해지기 힘들지 않았어요?”
다시 돌아온 방은 아까보다도 훨씬 시끌벅적했다. 레이너드는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난 5년간 매일같이 들락날락하던 곳인데 유리나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웃음이 가득한 광경은 창을 타고 들어오는 가을의 황금빛 햇빛보다 더 황금빛 색채를 띠고 있었다.
아끼는 친구들과 그보다도 더 아끼는 그녀가 같이 있는 광경을 보니 마음 어딘가에서 뜨끈하게 열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레이, 거기서 뭐 해? 얼른 와.”
네이선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 주던 유리나가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을 때, 레이너드의 심장은 점점 세차게 뛰었다.
쿵, 쿵, 쿵, 쿵, 쿵.
심장에서 시작된 기분 좋은 울림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에 미약하게 멀미가 일었다.
이상한 일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레이너드는 저를 바라보는 유리나의 웃음을 보며 자신이 울고 싶은 건지 웃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입꼬리는 주체할 수 없이 자꾸 올라갔다.
레이너드는 사랑을 몰랐다. 세상을 가르쳐 줘야 할 부모는 그에게 한 번도 사랑한다는 소리를 해 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가 그 감정이 뭔지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남녀 간의 사랑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제 감정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유리나를 볼 때마다 마음속에 움트는 감정은 있었다.
유리나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다. 그녀의 보드라운 손을 잡고 둘만의 산책을 즐기고 싶다. 그 작고 따뜻한 몸을 품 안 가득히 끌어안고 미소를 짓는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다.
꿀처럼 달콤할 따뜻한 숨을 집어삼키고 제 숨을 나눠 주며 그녀와 몸도 마음도 하나가 되고 싶다.
그녀와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다. 그녀의 모든 것을 갖고 싶다.
그리고 그 또한 그녀의 모든 것이 되고 싶다.
이게 바로 사랑일까. 모르겠다. 차라리 누가 속 시원히 알려 주면 좋겠다.
“레이?”
그러나 제 눈을 바라보는 유리나의 푸른 눈을 보는 순간, 그리고 저 눈이 다른 곳을 향하지 않고 줄곧 제게 향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드는 순간, 레이너드는 깨달았다.
이게 사랑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나는…….
“유리나.”
줄곧 너를 내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있었던 것 같다.
* * *
다 같이 모여 생일 파티를 즐긴 그날 이후,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아카데미 일상을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부쩍 그녀를 잘 따르는 네이선은 묻지 않아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유리나에게 해 주는 아주 좋은 정보원이었다.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낮에는 같이 수업을 듣고 수업이 없는 저녁에는 번화가에 나가 돌아다니며 같이 저녁을 먹었다. 특별할 게 없는 일정이었지만, 유리나는 결코 그 시간이 지루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어릴 적 그와 함께 보냈던 추억이 생각나 좋기만 했다.
‘레이가 달라진 모습을 찾는 것도 꽤 재밌었고.’
유려한 필기체로 필기를 하는 모습, 교수의 말에 집중하며 곧잘 대답하고 역으로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는 모습, 오랜 수업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 잠 하나 담기지 않은 또렷한 눈으로 교수를 바라보는 모습.
그 사소한 변화 하나하나가 마음에 크게 와닿았다.
쉴 새 없이 터지는 하품을 참아 가며 금방이라도 엎드릴 것 같은 자세로 꼬불거리는 글씨를 쓰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게 대견해서 괜히 웃음이 나오다가도, 수업 중간마다 그가 눈을 마주하며 웃을 땐 배 속 어딘가가 간지러운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유리나는 괜히 책을 보는 척하며 그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수도를 떠나기 전 마지막 날에는 이대로 떠나보내기는 아쉽다는 에이든의 성화에 다 같이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그날 유리나는 저녁을 먹는 내내 레이너드와 에이든을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레이너드는 방학 때 제국에 갈 수가 없으니까 아카데미에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하는 신세잖아요? 그래서 몇 년 전에 한 번 레이너드를 졸라서 같이 저희 영지에 간 적이 있거든요. 그때 제 동생 중 하나가 레이너드를 보고 반해서 결혼을 하겠다고 난리를…….”
“에이든, 얘기 그만하고 식사나 해. 유리나, 신경 쓰지 말고 얼른 먹어. 음식 식겠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살갑게 사람들을 챙겼다고 그래? 카르티아 영애, 제가 이 녀석의 장단을 맞춰 주기 위해 이렇게 힘들게 삽니다.”
레이너드를 계속 신경 쓰며 대화를 이끌어 나가려고 노력하는 에이든과 그를 다소 귀찮아하면서도 빠짐없이 대꾸해 주는 레이너드. 언뜻 보면 극과 극인 성격을 지닌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은 퍽 죽이 잘 맞았다.
레이너드가 그 생각을 들으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겠지만 적어도 유리나가 보기엔 그랬다.
에이든은 말이 많고 오지랖이 넓긴 했지만 레이너드의 신경을 긁지 않을 정도로 선을 지켰고, 레이너드 또한 그를 귀찮아하긴 해도 진심으로 그를 밀어내지는 않고 제 곁을 내어 주었다.
오히려 레이너드가 방 안에서만 홀로 지내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이끌어 주고 있었기 때문에 에이든은 레이너드에게 꼭 필요한 친구라고 할 수 있었다.
‘다행이야. 레이에게 좋은 친구가 있어서.’
유리나는 처음 레이너드가 아카데미에서 보냈던 편지를 되짚어 보았다. 편지라기보다는 쪽지에 가까울 정도로 짧고 서툰 답장이었지만 아직도 그 꼬불거리던 글씨가 머릿속에 선명했다.
[사람드리 다들 조아.]
어쩌면 그 좋다는 사람이 에이든이 아니었을까. 지금처럼 그에게 에이든이 있다면 그를 두고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서도 조금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야속한 시곗바늘은 하염없이 흘러가 어느덧 유리나가 왕국을 떠날 날이 다가왔다. 유리나는 수도에서 작별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레이너드는 국경까지 그녀를 마중 나갔던 것처럼 이번에도 국경에서 그녀를 배웅하고 싶다고 했다.
유리나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국경까지 가는 마차 안의 분위기는 올 때와는 많이 달랐다. 레이너드는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말없이 유리나를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고, 간간이 대화를 이어 가려고 노력하던 유리나 또한 국경에 가까워질수록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야.’
오늘만 지나면 이제 진짜로 레이너드와 헤어져 제국으로 떠나게 된다. 레이너드와 재회를 했던 곳에서 머물게 된 유리나는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참을 할 일 없이 방 안을 서성거리던 유리나는 문득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까만 하늘 위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별들을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내미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유리나?”
레이너드였다. 그는 유리나와 마찬가지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레이, 안 자고 뭐 해? 내일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하잖아.”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너야말로 내일 제국으로 떠나야 하는데 왜 여태 안 잤어? 나야 아카데미까지 금방이지만 너는 수도까지 가려면 아직도 일주일이 넘게 걸리잖아.”
“잠이 안 와서……. 그리고 나는 졸리면 마차에서 자면 되는걸. 그런데 넌 아카데미까지 말 타고 가잖아. 얼른…….”
얼른 자야지. 그 단순한 말이 입에서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건 레이너드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그도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아꼈다.
유동 인구가 많은 낮과 달리 밤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없어 마을을 밝히는 불이 거의 없었다. 달빛도 희미한 어두운 밤.
유리나는 그늘이 져 잘 보이지 않는 레이너드의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무심코 상체를 숙였다. 그러자 레이너드가 창틀에 손을 짚고 창문 밖으로 뛰어나올 것처럼 몸을 쑥 내밀었다.
“유리나, 위험해!”
모두가 잠든 고요한 마을에 다급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유리나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멍멍멍, 어디선가 놀란 개가 우렁차게 짖는 소리가 들렸다. 숙소 밑에선 미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며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유리나는 방망이질을 하는 것처럼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깊숙이 들이쉬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겠지만 레이너드에게 태연하게 미소도 지어 보였다.
사람들을 모조리 깨워 버릴 듯한 큰 소리로 위험하다고 소리를 지른 주제에 그는 여전히 몸을 반쯤 내민 채로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안 떨어져. 걱정 마. 내가 애도 아니고.”
농담을 해 보아도 그늘진 그의 얼굴은 심각했다.
“너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애잖아. 안 떨어졌으니 다행이지 자칫하다가 떨어졌으면 어쩔 뻔했어?”
“이 정도로는 안 떨어져. 나보다 3년 일찍 성인이 됐다고 지금 잔소리하는 거야? 그리고 떨어지면 네가 구해 주면 되지. 공중 부양 마법 같은 것도 할 수 있지 않아?”
“할 수는 있지. 그렇지만 내가 마법을 채 쓰기도 전에 네가 땅에 떨어지면 어떡해.”
“그럴 일 없어. 난 널 믿어. 네가 나 지켜 준다고 했잖아.”
그의 말마따나 근거 없는 믿음일 수도 있었다. 30층도 아니고 고작 3층에서 떨어지는 속도는 아마도 레이너드가 상황을 인지하고 마법 스펠을 외우는 것보다 빠를 것이다.
운이 좋아 다치기만 한다면 그가 치료 마법을 써 줄 테지만 운이 나빠서 그대로 즉사한다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지켜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어릴 때 그가 했던 맹세의 말.
―유리나, 넌 내가 지켜 줄게.
마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열세 살 소년의 치기 어린 약속이었는데도 그 약속을 줄곧 마음속에 새겨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를 향한 신뢰는 더욱 두터워졌다.
그는 그녀를 보호해 줄 것이다. 그녀가 그를 만났을 때부터 늘 바랐던 대로.
‘기뻐해야 하나?’
저도 모르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아니, 분명 기뻐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기쁘기보다는 마음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유리나는 이 묵직하고 언짢은 감정의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이기적으로 굴어도 될까.’
5년 전, 눈을 맞으며 했던 고민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어리고 많이 서툴던 그를 이 먼 곳까지 내쫓아 놓고서는 이젠 죽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순수하게 기뻐해도 되는 걸까.
처음에 그를 만나 제안을 할 때만 해도 전혀 들지 않았던 미약한 죄책감이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유리나?”
걱정스런 목소리에 그녀는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길래 소리도 못 들었어?”
“미안해. 잠깐 잠이 와서 멍해졌나 봐. 무슨 얘기 했어?”
“별 구경 가자고 했는데……. 졸리면 얼른 들어가서 자. 많이 늦었어.”
“아냐. 별 구경 가자.”
유리나는 그가 다시 자라고 재촉하기 전에 얼른 방으로 들어가 잠옷 위에 겉옷을 걸쳤다.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한 번 정돈한 뒤 문을 열자 그녀와는 달리 외출복 차림의 레이너드가 보였다.
“잠옷이 아니네?”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미처 옷을 못 갈아입었어. 그럼 가자.”
“어디로 가려고? 생각해 둔 곳 있어?”
“시간이 늦었으니까 멀리는 못 갈 것 같고, 대신 지붕 위로 올라가면 여기보다는 더 잘 보이지 않을까? 어때?”
“좋아. 그러자.”
유리나는 그가 내민 손을 힘 있게 움켜쥐었다. 사실 어디서 보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별을 보러 가자고는 했지만 사실 별 구경보다는 그와 함께 시간을 더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레이너드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예고도 없이 풍경이 변했다. 눈 한 번 깜빡일 새도 없이 지붕 위에 앉게 된 유리나는 갑자기 불어오는 찬바람에 어깨를 떨었다.
“겉옷을 입었는데도 춥네.”
“이럴 줄 알고 담요도 가져왔지.”
레이너드가 그녀의 코앞에 담요를 달랑달랑 흔들어 보이더니 유리나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유리나는 담요로 몸을 둘둘 말며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조금만 잘못 움직였다가는 아래로 떨어지겠는데. 괜찮을까?”
“나 믿는다며.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아까 그녀가 떨어질까 봐 노심초사했던 기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그는 슬금슬금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다부진 그의 팔은 정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놓지 않을 것처럼 든든하게 느껴졌다. 유리나는 몸을 감쌌던 담요 한쪽을 그의 어깨에 둘러 주며 가볍게 하품을 했다.
“졸려?”
“아니.”
“졸리면 자도 돼. 잠들면 내가 방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믿음직스럽긴 하지만 안 잘 거야.”
하지만 다짐하듯 말한 것이 무색하게도 또다시 하품이 나왔다.
“방에 있을 때만 해도 안 졸렸는데…….”
멋쩍게 중얼거리는 유리나를 보며 레이너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고요한 밤이라 그런지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유독 자장가를 듣는 것처럼 감미로웠다.
유리나는 꾸벅꾸벅 조는 아이처럼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유리나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레이너드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걱정 말고 자.”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흐트러졌다. 유리나는 그의 뜨거운 숨결에 흠칫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레이너드가 놀란 그녀의 머리 위로 제 머리를 기댔다.
“내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온몸을 묵직하게 감싸 안는 감각이 익숙하면서도 생소했다. 그의 무게에 심장이 짓눌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가 않았다.
익숙한 품,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감정.
유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레이너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으로 웃으며 유리나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박았다.
또 한 번 기분이 좋은 듯한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 웃음은 해맑은 소년의 것 같기도 했고, 부드러운 청년의 것 같기도 했다.
유리나는 그녀와 이마를 맞대고 웃는 레이너드를 보며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순간,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그가 다시 낯설게 느껴졌다.
남자의 태가 나는 그의 얼굴이, 단단한 그의 품이, 허리를 감싸고 있는 그의 팔이.
오늘 밤 따라 왜 이리도 낯설고 어색한 건지.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서 물러나며 그의 손을 떼어 냈다. 그 바람에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미끄러질 뻔한 걸 레이너드가 재빨리 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괜찮아?”
그의 손이 다독이듯 유리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유리나는 그를 또다시 밀어낼까 하다가 그의 어깨에 코를 묻고 눈을 감았다.
어쩐지 볼이 화끈거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아마 기분 탓일 것이다.
* * *
한동안 레이너드의 품에 안긴 유리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는지 몸을 축 늘어뜨렸다. 쌕쌕거리는 기분 좋은 숨소리가 고요한 새벽에 울려 퍼졌다.
레이너드는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유리나의 고개를 조심스런 손길로 감싸 쥐었다. 유리나가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 보았지만 영 괜찮은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불편함을 느꼈는지 유리나가 잠결에 끙끙거리며 미간을 찌푸렸을 때, 그는 결국 유리나의 어깨와 무릎 뒤쪽을 안고 그녀의 방으로 이동했다.
유리나가 조금 더 편안한 자세를 찾아 몸을 옹송그리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얼굴이 새삼스레 조금 뜨거워졌다.
어쩌면 품 안을 가득 채우는 온기가 따뜻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카르티아 저택을 떠나 왕국에 온 이후로 이렇게 누군가와 가까이 맞닿은 적이 없었으니까.
문득 열세 살 생일 때 일이 기억났다. 언젠가 지친 유리나를 가볍게 안고 가던 기사를 보며 아쉬움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이젠 이렇게나 가볍게 그녀를 품에 안고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뿌듯했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요.
석양을 보며 빌었던 소원대로 이제 그는 원하던 대로 지키고자 하는 이를 지킬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그 어떤 누가 유리나를 위협하더라도 보호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껏 줄곧 이 낯선 타지에서 노력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머리로는 유리나에게 별일이 없을 거라는 것을 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제 목을 조를 것처럼 유리나가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지만, 그녀의 옆에는 그가 유일하게 실력을 인정한 데이브가 있고 카르티아 후작이 붙여 준 실력 있는 호위도 많았다.
이번에 왕국에 올 때 그녀를 따라온 기사들의 기백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레이너드가 없는 동안 그녀를 잘 지켜 줄 것이다.
‘알고는 있는데.’
레이너드는 유리나를 침대에 눕히며 굳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이대로 보내기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냥 아카데미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내일 유리나와 같이 제국으로 돌아가 그녀 옆에 머무른다면 이 불안감이 사라질까.
“유리나.”
그 잠깐 사이에 잠이 깊게 들었는지 그녀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만이 대답처럼 귓가에 닿았다. 규칙적이면서도 나른한 숨소리에 어쩐지 기분이 편안해져 레이너드는 굳은 얼굴을 풀고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예쁘게 볼록 솟은 유리나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대며 유리나의 온기를 느끼자 꾹꾹 눌러두었던 이기심이 다시 싹텄다.
“조금만 기다려.”
막상 말로 꺼내고 나니 목이 메어 왔다. 다시 입을 여는 그의 목소리에는 살짝 울음기가 배어 있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갈게.”
사실은 네가 계속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레이너드는 가장 하고픈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 * *
다음 날, 유리나는 쉽게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원래 잠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정신은 맑은데 이상하게도 몸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어쩌면 얼른 떠나야 한다는 생각보다 떠나기 싫다는 마음이 더 강렬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이불을 뒤집어쓴 유리나는 한참을 침대에서 꾸물거리다가, 이제 정말 일어나야 한다는 베시의 재촉에 겨우 몸을 일으켰다.
베시의 손에 이끌려 오일을 넣은 물에 목욕을 하고, 간단한 준비를 마칠 때까지도 몸에 모래주머니라도 달린 것처럼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정말 떠나는 걸까.’
유리나는 건물 밖으로 나오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싱숭생숭한 마음과 다르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흐리고 비가 왔다면 마음이 덩달아 울적해졌을 테니 차라리 맑은 것이 낫겠다 싶다가도 또 속없이 환한 햇살을 보니 이상하게 심사가 꼬였다.
유리나는 밝은 햇살에 한껏 눈을 찌푸리다가 자신을 부르는 베시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양산을 가져왔어요. 가을이라 볕이 따가우니까 얼른 쓰세요. 그러다가 피부 상해요.”
“아냐, 괜찮아. 금방 마차를 탈 텐데.”
“잠깐이라도 쓰셔야 해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작별 인사가 금방 끝나지 않을 것 같아요.”
음, 확실히 그건 그럴 것 같았다. 유리나는 베시의 마지막 말에 설득당해 순순히 양산을 건네받았다.
화려한 자수가 수놓아진 양산을 펴며 옆으로 시선을 주자 멀찍이 떨어져서 애꿎은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레이너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표정은 멀리서 봐도 표정이 잔뜩 굳어 있는 게 느껴질 정도로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레이, 나 배웅 안 해 줄 거야?”
유리나는 부러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하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고개를 돌린 그가 힘없이 미소를 짓더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인사가 길어질 거라 생각했는지 베시와 데이브는 마차 안을 정돈한다며 마차로 향했다.
유리나 앞에 선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유리나 또한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의 손에 잡힌 제 손을 바라보며 말을 아꼈다.
잘 지내라는 인사를 건네고 얼른 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술이 밀랍으로 봉인이라도 된 것처럼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유리나.”
침묵을 유지하던 레이너드가 숨을 깊게 들이쉰 뒤 겨우 먼저 입을 열었다.
“마나 잘 쓸 수 있어?”
“응. 데이브가 그러는데 체내 마나 양이 적어서 그렇지 마나 친화력은 괜찮은 편이랬어. 그런데 그건 왜?”
“정말 잘 쓸 수 있어?”
“얼마 전에 공간 분리 마법을 찢고 나왔다는 소식 들었잖아. 잘 쓸 수 있다니까.”
농담으로 한 소리였는데 레이너드는 가볍게 받아넘길 수 없었는지, 안 그래도 어두웠던 그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그 얘기는 괜히 꺼냈나.’
유리나는 뒤늦게 후회하며 분위기를 바꿔 보기 위해 손바닥에 마나를 집중했다.
손끝에서 튀어나온 손톱만 한 빛 덩어리가 여전히 그녀의 손가락을 매만지는 레이너드의 손등 위로 톡 떨어졌다.
레이너드가 힘없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응, 잘하네.”
“칭찬 같지가 않은데?”
“칭찬이야.”
“정말?”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인 레이너드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유리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유리나는 손을 펴 제 손바닥 위에 놓인 물건을 확인했다.
그가 건넨 건 한눈에 보기에도 다소 투박해 보이는 목걸이였다.
목걸이 줄은 금속이 아니라 얇은 가죽끈이었고, 새끼손톱만 한 붉은 보석 펜던트는 별다른 장식 없이 원석 그대로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유리나는 티 없이 투명한 붉은 펜던트를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루비야?”
“루비는 아니고 내 마나를 응축해 놓은 거야.”
유리나의 손에서 다시 목걸이를 가져간 레이너드가 직접 유리나의 목의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내가 돌아갈 때까지 이거 꼭 하고 있어.”
“이게 뭔데?”
“마법 펜던트. 호신용으로 준비했어.”
“호신용? 이게?”
유리나는 목에서 달랑거리는 펜던트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관찰했다. 아무리 보아도 그저 평범한 펜던트였다.
“내가 졸업하고 돌아갈 때까지는 네 옆에 있을 수가 없잖아. 그 전에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준비했어.”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손안의 펜던트를 손끝으로 톡 건드리자 투명한 보석에서 밝은 빛이 반짝였다 사라졌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이걸 손바닥으로 쥐고 마법을 쓴다면 딱 한 번, 강한 마법을 쓸 수 있을 거야. 거리만 많이 멀지 않다면 카르티아 저택으로 이동 마법도 쓸 수 있을 거야. 아니면 스승님께 이동을 해. 스승님이라면 널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난 그렇게 고위 마법을 쓸 줄 모르는걸.”
배워도 쓸 수가 없으니 순간 이동 같은 마법은 애초에 스펠을 익혀 두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 없어 하는 유리나와 달리 레이너드는 별 동요 없이 그녀의 손에 펜던트를 쥐여 주었다.
“걱정하지 마. 그냥 이렇게 펜던트를 쥐고 원하는 마법을 떠올리면 돼. 마법에 필요한 마나는 물론이고 마법진까지 이 안에 다 있으니까.”
“그런 게 진짜 가능해?”
“시중에서 볼 수 있는 마법 도구들도 다 같은 원리로 만들어져 있어. 다만 다른 마법 도구들은 이 정도로 강한 마법을 쓸 수 없을 뿐이야.”
펜던트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구경하는 유리나를 향해 그는 다시 한번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알겠지, 유리나?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 잘 때도 목욕을 할 때도 이거 빼지 마.”
“응, 약속할게.”
유리나는 진지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레이너드의 얼굴을 확인하고 덧붙였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는 마. 그런 일 없을 거야. 항상 호위 기사가 따라다니는걸. 조금 먼 곳으로 갈 때면 이번처럼 데이브랑 같이 다닐 텐데.”
그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 건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애초에 유리나는 그를 데려올 때 훗날 그녀가 위험에 처했을 때 구해 줘야 한다는 것을 조건을 붙였다.
게다가 레이너드는 그동안 유리나가 죽음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을 몇 번 지켜보았다. 아마도 그 또한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표정 풀고 좀 웃어. 진짜 괜찮을 거야.”
원작이 시작할 때까지는 안전할 거야.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배우가 없어질 리는 없으니까.
유리나는 본심을 숨기며 그저 웃었다. 과하게 걱정을 하는 레이너드와 달리 태연하게 아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다 그녀가 미래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리나와 리디아가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되는 것도, 그녀가 데프론 후작과 ‘카리온’에게 죽음을 맞이한 것도 모두 성년식을 치르고 난 후의 일.
즉, 그가 걱정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그건 그가 졸업하고 제국을 돌아온 다음에나 일어날 테다.
“아가씨,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해요. 더 늦으면 노숙을 하기에도 애매한 곳에서 멈출 수밖에 없대요.”
등 뒤에서 들리는 베시의 재촉에 유리나는 여전히 목걸이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을 살살 달래며 떼어 냈다.
“가자. 마차까지 데려다줄게.”
레이너드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
긴장을 했는지 차갑게 식은 레이너드의 손끝과 맞닿은 순간, 고요했던 수면에 파장이 이듯 마음이 요동쳐 왔다.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레이너드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처음에는 당황한 듯 몸을 딱딱하게 굳히던 레이너드는 이내 그녀의 키에 맞춰 무릎을 살짝 굽히며 대답하듯 그녀의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유리나는 들었던 뒤꿈치를 다시 땅에 붙이며 그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많이 보고 싶을 거야, 레이.”
“나도…….”
레이너드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무너지듯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를 허리를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닿는 그의 뺨은 분명히 메말라 있었지만 어쩐지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만 같았다.
유리나는 배 속에서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감정을 삼키며 애써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없다고 울지 말고.”
농담으로 한 소리였는데 레이너드가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마자 편지 할게. 너도 앞으로 답장을 보낼 땐 자세히 써서 보내 줘. 네이선이랑 테시 군 이야기도 적어 주고.”
“응.”
한 번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쉬울 거라 생각했던 이별은 외려 처음보다 더욱 힘들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얼마나 외로운지, 그리고 함께 있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유리나는 그의 등을 톡톡 두드려 준 뒤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순순히 그녀를 놓아준 레이너드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유리나의 손을 잡고 그녀가 마차에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마부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마차가 굴러가기 시작했을 때, 유리나는 창문을 열고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잘 있어, 레이.”
순식간에 멀어진 그가 손가락으로 목 근처를 가리켰다. 유리나는 목에서 달랑거리는 목걸이를 손에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안 풀게.”
손안에 들어온 펜던트는 레이너드의 손을 잡은 것처럼 뜨끈거렸다. 유리나는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차 밖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날따라 유독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가을 하늘에선 눈물이 날 정도로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2권에서 계속
6. 크론 왕립 아카데미
지난 일주일 동안 말없이 사라져 버린 친구 녀석을 하염없이 찾아다니던 에이든 테시는 눈앞의 광경에 놀라 두 눈을 비볐다.
‘뭐야?’
생일, 그것도 무려 성년이 되는 생일을 앞두고 종적을 감추었던 레이너드가 처음 보는 사람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처음 보는 사람이 무려 여자였다.
그것도 멀리서 봐도 예쁘고 귀여운 소녀!
지난 5년간 에이든이 봐 온 레이너드는 여자에게는 전혀 흥미가 없는 녀석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여학생들에게서 편지와 고백을 받는데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관심 없는 여자라도 그렇게 고백을 받으면 들뜬 티는 나는 법인데 그는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에이든은 이 친구 녀석의 취향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도 있었다. 이 녀석이 사실 여자가 아니라 남자에게 관심이 있는 건가…… 하고.
그런데 그런 레이너드가 여자? 여자아아? 그것도 예쁘고 귀여운 여자?
에이든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레이너드에게 다가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멀찍이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말도 없이 사라졌던 레이너드는 몸이 안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안색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았다. 그동안 에이든이 안절부절못하며 걱정을 했던 것이 민망할 정도였다.
“구경하고 싶은 곳 있어?”
“데이브가 그러던데, 여기 도서관이 그렇게 크다며? 한번 구경하고 싶어.”
“그래, 그러자.”
“그 전에 점심부터 먹자. 베시가 너랑 같이 먹으라고 아침부터 도시락을 싸 줬어.”
“도서관 앞에 넓은 잔디 광장이 있어. 오늘처럼 날이 좋으면 다들 카페테리아에서 안 먹고 거기서 밥 먹으니까 우리도 거기서 먹으면 돼. 도시락 먹고 도서관 구경 가자.”
“그래.”
레이너드가 자상하게 웃으며 소녀의 팔에 달랑달랑 들려 있던 도시락 바구니를 건네받았다. 다른 손으로 소녀의 하얀 손을 잡는 폼이 꽤나 자연스러웠다.
‘아니, 저게 누구야?’
자신에게 하는 것과는 영 다른 모습에 에이든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쩍 벌렸다. 그러다 레이너드가 소녀와 함께 기숙사 방을 빠져나가려는 것을 발견하고 재빨리 소리쳤다.
“레이! 너어어! 대체 그동안 말도 없이 어디를 갔다 온 거야? 옆에 그분은 누구시고?”
뒤늦게 그를 발견한 레이너드가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에이든을 못 본 체하며 반대쪽으로 걸어가려고 했지만, 그보다는 에이든이 빨랐다.
에이든은 쏜살같이 달려가 레이너드의 팔을 낚아챘다. 그 옆에 있던 소녀의 푸른 눈이 놀란 듯 동그랗게 커졌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이 녀석에게 볼일이 있어서…….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에이든은 소녀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여 사죄한 뒤 레이너드를 노려보았다.
“레이, 너 대체 지금껏 뭘 하다 온…….”
“레이너드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지금 그게 중요해?”
“중요해.”
에이든은 어이가 없었지만 순순히 그의 뜻대로 따르기로 했다. 이상하게도 레이너드 녀석은 가장 친한 에이든에게도 애칭만큼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 레이너드. 너 대체 뭘 하다 온 거야?”
그동안 내색은 많이 하지 않았지만, 에이든은 레이너드의 걱정에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레이너드는 가끔씩 수업을 빼먹는 에이든과 달리 모범생이었다. 죽을 정도로 아파서 거동이 힘들 정도가 아니면 수업을 절대 빼먹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일주일 전 받은 편지를 읽자마자 사색이 되어 뛰어나가더니 일주일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처음엔 급한 일이 있나 싶어 그러려니 했는데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그런데 멀쩡히, 그것도 여자애랑 같이 있는 레이너드를 보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아, 미안. 사정이 있어서.”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그렇지, 어떻게…….”
순간, 에이든은 레이너드의 팔 위에 손을 얹고 눈을 깜빡이던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멀리서 봤을 때도 알아봤지만 정말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분홍빛이 도는 금발, 햇빛 한 번 본 적 없는 것 같이 투명하고 하얗게 빛나는 피부, 멀리서 봐도 균형 잡히고 오밀조밀 예쁜 이목구비.
거기에 왕국의 유행하고는 다르지만 과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신경을 쓴 티가 나는 옷차림새까지.
눈앞의 소녀는 여러모로 에이든이 수도에 와서 본 여자들 중에 가장 미모가 빼어났다.
단순히 빼어난 정도가 아니다. 그녀는 외모로는 남녀노소 따라올 자가 없다고 소문이 자자한 레이너드 옆에서도 존재감을 빛낼 정도로 미인이었다. 에이든은 레이너드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 눈길이 가는 희한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에이든의 볼이 반사적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레이너드가 가늘어진 눈으로 에이든을 보다가 소녀를 제 뒤로 숨겼다.
“에이든?”
레이너드의 부름에 반응한 건 에이든이 아니라 레이너드의 등 뒤에 서 있던 소녀였다.
“에이든?”
그녀는 레이너드의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에이든을 관찰하다가 “아!” 하고 높은 탄성을 내질렀다.
“네 친구?”
“아마도.”
평소라면 ‘아마도라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듣는 친구 섭섭하게!’라고 되받아쳤을 에이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을 향해 빙긋 웃는 소녀를 보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던 탓이다.
어쩜, 목소리도 이렇게 예쁠까.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네요. 에이든 씨…… 맞으시죠? 레이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아카데미에 적응하는 데 도움을 많이 주셨다면서요?”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던 ‘레이’라는 애칭이 소녀의 입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왔다. 에이든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 소녀, 레이너드와 깊은 관계가 있구나. 혹은 레이너드가 이 소녀를…….
그는 저도 모르게 레이너드를 바라보며 씰룩 입꼬리를 올렸다. 레이너드가 못마땅한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저는 유리나 카르티아라고 해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유리나 카르티아. 낯선 듯하면서도 낯익은 이름이었다. 입 속으로 그 이름을 몇 번 되뇌던 에이든은 그게 레이너드가 일주일 전 받았던 편지에 적혀 있던 이름이라는 것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지난 5년간, 에이든은 레이너드의 많은 모습을 봐 왔다. 머나먼 제국에서 와서 왕국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던 레이너드는 향수병을 앓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곧잘 아카데미에 적응했다.
그러나 그를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에이든은 레이너드가 외로움을 많이 탄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그는 수업을 잘 듣다가도 한 달에 한 번씩 꼭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는 했다. 눈앞에 서 있는 유리나의 눈동자와 비슷한 푸른색 하늘을.
그럴 때면 수업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아무리 에이든이 그를 달래 보려고 찾아가서 농담을 던져도 레이너드는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꼭 그때쯤 레이너드에게 편지가 왔다. 향기로운 봄꽃 향기가 미미하게 배어 나오는 편지. 그 편지를 받은 다음 날이면 레이너드는 언제 우울했냐는 듯 기운을 차리고 멀쩡해졌다.
에이든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안심하면서도 저 편지의 발신인이 누굴까 궁금했다.
‘카르티아 영애의 편지였겠지.’
그동안 풀리지 않던 의문이 오늘에서야 풀렸다.
친구 녀석의 소중한 사람이면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도움이라뇨. 친구끼리 잘 지내는 건 당연한 일이죠. 저야말로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영애. 에이든 테시라고 합니다.”
에이든은 바지에 손바닥을 열심히 문지른 후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본적으로 왕국과 제국의 귀족 예법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유리나가 에이든이 내민 손바닥에 손을 얹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레이너드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끝에 입을 맞췄다.
그 낯간지러운 광경에 유리나의 눈이 동그래졌고, 에이든의 눈은 그것보다도 더 똥그래졌다.
‘저게 대체 누구야?’
그가 5년간 봐 왔던 레이너드와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얼굴만 같지, 표정이나 목소리, 말투, 행동 등 뭐 하나 같은 게 없었다.
원래 친구 앞에서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의 행동이 다른 법이라지만 이건 정도가 더 심했다. 차오르는 배신감에 에이든이 어깨를 부르르 떨 정도였다.
‘무슨 사이지?’
유리나가 말하는 모양새를 봐선 단순한 친구 같은데, 레이너드의 행동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건 뭐, 결혼식을 앞둔 약혼자로밖에 안 보이는데?
“얼른 가자, 유리나. 보여 주고 싶은 게 많아.”
“응? 그렇지만 친구는 어쩌고.”
“괜찮아.”
아니, 나는 안 괜찮은데!
그러나 에이든이 놀라서 입만 벙긋거리는 사이,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손을 잡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유리나는 그를 따라가면서도 완벽한 귀족 예법으로 에이든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한 에이든은 뒤늦게 레이너드에게 소리쳤다.
“야, 잠깐만! 레이! 너 수업은 어쩌고!”
어느새 저만큼 멀어진 레이너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에이든은 유리나의 손을 꽉 잡고 있는 레이너드의 손을 보며 혀를 찼다.
“너도 친구보다는 여자다, 이거냐?”
그런데 기분은 별로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피식피식 바람 소리를 내며 웃던 에이든은 복도를 지나다니는 아이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한바탕 웃다가 머리를 헝클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는 ‘아무리 급해도 말은 해 주고 갔어야지’라는 생각이 ‘저렇게 급한 일인데 말을 못 하고 사라질 수도 있지’로 바뀐 지 오래였다.
어쩐지 따사로운 햇살만큼이나 마음도 따뜻해지는 날이다.
* * *
유리나는 복도에 가만히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에이든을 어깨 너머로 흘끔 돌아보았다.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싶었는데.’
그녀의 걸음이 다소 느려지자 앞서가던 레이너드가 덩달아 걸음을 늦췄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아냐.”
유리나는 레이너드에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데리고 나오는 게 어디 있냐, 친구를 저렇게 혼자 놔두고 와도 되냐, 같은 질문은 넣어 두기로 마음먹었다.
어쩐지 아이처럼 신이 나 보이는 레이너드에게 차마 그런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유리나는 그냥 그가 이끄는 대로 졸졸 따라갔다. 대신 에이든의 얼굴을 다시 한번 뒤돌아보며 머릿속에 그의 얼굴과 에이든 테시라는 이름을 잘 새겨 두었다.
“저기가 마법과 수업이 있는 건물이야. 아카데미에서 가장 지어진 지 오래된 건물이라 많이 낡았지? 학생들이 새 건물을 지어 달라고 오래전부터 계속 항의하는데 고쳐 주질 않아. 역사와 전통이 살아 있는 건물이라 그럴 수가 없다나.”
“저렇게 금이 잔뜩 가 있는데 무너지지는 않아?”
“보존 마법이 걸려 있어서 무너질 일은 없어.”
“그건 참 다행이네.”
유리나에게 아카데미 이곳저곳을 소개해 주는 레이너드는 어쩐지 조금 들뜬 기색이었다. 유리나의 주관적인 생각이었지만 금빛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비친 불그스름한 귀가 그녀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그는 표정은 차분했지만 분명 들떠 있었다. 어쩌면 생일 때 처음으로 번화가에 나갔을 때보다 더.
한참을 아카데미를 돌아다니던 두 사람은 레이너드가 데려간 잔디밭에서 베시가 싸 준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레이너드는 오랜만에 카르티아 저택에서 먹는 음식 맛이 난다며 감격에 겨워했다. 유리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베시가 만든 음식을 먹은 적도 없으면서.’
베시는 한 번도 주방에서 일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만든, 그것도 재료만 사다 끼워 넣은 샌드위치에서 추억의 맛이 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레이너드는 열심히 샌드위치를 우물거렸다. 유리나 또한 구태여 진실을 말하지는 않았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주위에는 간단한 요깃거리를 먹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들은 다들 흥미가 가득한 얼굴로 유리나와 레이너드를 흘끔거렸다.
유리나를 보는 시선이 반, 레이너드를 보는 시선이 반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점심을 마저 먹었다.
“그러고 보니, 레이. 생일 파티는 따로 안 해도 돼?”
“생일 파티는 무슨. 내가 애도 아니고.”
유리나는 점심을 먹고 나온 쓰레기를 피크닉 바구니에 하나, 둘 담는 레이너드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툴툴거리는 듯한 말투와 달리 그의 얼굴은 딱히 꺼려 하는 기색은 없었다.
“원한다면 베시가 작게라도 준비해 준대. 아까 테시 군을 불러서 작게 파티할까?”
“됐어. 번거롭기만 해.”
바구니를 모두 정리한 그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돗자리 위에 있던 바구니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법을 사용하여 기숙사 방으로 옮겨 둔 것이라고 했다.
“파티는 됐고 받고 싶은 선물은 있는데.”
“그래? 필요한 거 있어?”
“전에 못 받았던 생일 선물을 받아도 될까?”
“전에 못 받았던 생일 선물?”
유리나는 제게 손을 뻗는 레이너드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지난 몇 년간의 기억을 더듬더듬 기억해 냈다. 하지만 레이너드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생일 때마다 유리나는 필기구나 책처럼 그가 필요할 만한 것들은 물론이고, 옷이나 장신구 등 그에게 어울릴 만한 것들을 마차에 잔뜩 실어 아카데미로 보냈다. 그러나 레이너드는 한 번도 먼저 그녀에게 받고 싶은 생일 선물을 특정 지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전에 못 받았던’ 생일 선물이 있을 리가 없는데.
심각하게 콧잔등을 찌푸리는 유리나의 코를 레이너드가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5년 전에 내가 갖고 싶다고 했던 선물 기억 안 나? 정확히는 선물이 아니라 소원이었지만.”
“아…….”
그제야 맞춰지는 기억에 유리나는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같이 놀러 가자고 했던 거? 그렇지만 놀러 나갔었잖아?”
“정확히는 말이야.”
레이너드가 멀찍이 떨어져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기사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카르티아 후작이 유리나의 호위로 딸려 보낸 기사들은 위험할 것이 하나도 없는 아카데미 내부에서도 유리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들을 잠시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레이너드가 유리나에게 몸을 숙이며 작게 속삭였다.
“‘우리 둘이서만’ 놀러 나가자고 했었지.”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손가락을 소리 나게 한 번 튕겼다. 그 순간, 그의 주위에 있던 마나가 빠르게 휘몰아쳤다.
이상함을 감지한 기사들이 유리나를 향해 뛰어오려고 했지만 유리나에게 채 다가가기도 전에 두 사람은 사라졌다.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엔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위해 펼쳐 놓았던 손수건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레이, 여긴 대체 어디야?”
갑자기 바뀐 풍경에 놀랐지만 유리나는 애써 덤덤하게 물었다. 학생들이 점심을 먹으며 한가로이 노닥거리던 잔디밭 대신 사람들이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번화가가 보았다.
이미 레이너드의 마법을 몇 번 보았지만 유리나는 볼 때마다 그의 실력에 새삼 감탄했다.
레이너드는 갑작스러운 이동 마법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유리나의 몸을 단단히 잡아 주었다.
“네스 거리. 크론 왕국 수도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이야. 가자. 케이크가 맛있는 곳을 알고 있어.”
“너 돌아가면 아론 경에게 혼날지도 몰라.”
레이너드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상관없잖아. 그때와 달리 이젠 내가 널 충분히 지켜 줄 수 있는데.”
* * *
“많이 먹어.”
직원이 테이블 위에 케이크 접시를 내려놓자마자 레이너드가 유리나 쪽으로 접시를 쭉 밀어 주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테이블은 꽤나 넓은 편이었는데도 정작 접시들은 유리나 앞에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유리나는 그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그의 앞쪽으로 다시 밀어 주었다. 그녀 못지않게 레이너드 또한 달달한 디저트를 좋아했다.
“너도 보고만 있지 말고 먹어. 생일 케이크야.”
“생일 케이크 하니까 생일 파티 한 거 생각난다. 그때 먹었던 생크림 케이크 정말 맛있었는데.”
추억에 잠긴 듯 레이너드가 과일이 듬뿍 올라간 케이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니 유리나는 문득 이 낯선 곳에서 그동안 그가 어떻게 생일을 보냈는지 궁금해졌다. 그에게서 한 번도 생일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해 주고 싶어서 유리나는 매년 그의 생일에 맞춰 선물과 축하 편지를 보냈다.
돌아오는 답장에 생일 때 무엇을 했는지, 뭐가 기뻤는지 써서 보내 주면 좋을 텐데 편지에는 늘 생일 선물이 고맙다는 말만 있을 뿐, 자세한 이야기는 당연한 것처럼 생략되어 있었다.
생일에 무엇을 했냐고 묻고 싶어도 편지가 오고 가는 시간이 길어 다시 편지를 보낼 때는 이미 그의 생일이 한 달은 훌쩍 지난 뒤여서 묻지를 못했다. 뒷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 번은 너무나 궁금해서 생일 축하 편지를 보낼 때 추신으로 생일 때 뭐 할지 미리 궁금하다는 말을 남겼다. 아마 레이너드가 열다섯 살 때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내면 조금이나마 생일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서 보낼 줄 알았더니만 돌아온 내용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담백했다.
[이번 생일엔 오랜만에 수도에서 유명한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어.]
유리나가 원한 건 그 저녁을 누구랑 어떻게 먹었는지 구구절절한 설명이었는데 말이다.
‘사적인 얘기를 너무 안 해서 적응하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하는 건 아닌가 했지.’
다행히 일 년에 두세 번씩 레이너드를 만나고 온 데이브가 걱정할 필요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해 준 뒤에야 유리나는 걱정을 지울 수 있었다.
‘그래도 편지에 좀 자세히 써 주면 얼마나 좋아.’
얼굴을 맞댄 지금에야 유리나는 묻고 싶었던 말을 물을 수가 있었다.
“그동안 생일에는 뭐 하고 지냈어?”
“음, 처음 생일을 맞이했을 때는 에이든이 아이들을 모아 놓고 깜짝 파티를 해 줬어. 아침을 먹으러 나왔는데 갑자기 에이든이 튀어나와서 내 눈을 가리고 어디론가 데려가길래 또 무슨 장난을 치나 했거든. 그런데…….”
“그때도 감동받아서 울었어?”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 높여 웃었다. 5년 전, 저택에서 고용인들이 준비했던 깜짝 생일 파티를 보고 감동받아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그때 귀여웠는데.”
유리나가 웃는 이유를 눈치챘는지 케이크를 쿡쿡 찌르던 레이너드의 귓가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그는 어릴 적부터 당황할 때면 얼굴보다도 먼저 귀가 붉어졌다.
이런 것을 보면 그가 변한 것 같으면서도 그대로인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안 울었어.”
“정말? 왠지 토끼처럼 눈이 새빨개져서 코를 훌쩍이며 울었을 것 같은데. 저택에서처럼 말이야. 나중에 베시가 얘기해 줬는데 그때 너 되게 귀여웠대.”
대답을 하는 대신 레이너드는 케이크를 듬뿍 퍼서 입에 넣었다. 묵비권 행사였다.
‘울었구나.’
본인이 불리한 주제를 회피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행동이었지만 유리나는 그 행동을 못 본 척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레이너드를 따라 한입 가득 케이크를 입에 넣으니 폭신폭신한 케이크 시트와 달콤한 생크림이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았다.
유리나가 콧소리와 함께 감탄사를 내뱉자 시선을 피하던 레이너드가 그녀를 보며 웃었다.
“맛있어?”
“응, 맛있어. 저택 주방장보다 솜씨가 더 좋은 것 같아.”
“그렇지? 내가 말했잖아. 여기는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라고.”
그는 꼭 자신이 칭찬을 들은 것처럼 흐뭇한 얼굴로 우쭐거렸다. 유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크로 케이크 위에 얹어진 딸기를 쿡 찔렀다.
“그리고 맛도 맛인데 그것보다는 이 과일이 더 신기해. 어떻게 이 계절에 케이크 위에 딸기랑 청포도가 잔뜩 올라갈 수 있어? 난 딸기 못 본 지 한참 됐는데.”
“크론 왕국이잖아. 과일에도 보존 마법을 걸어 놓아서 제철이 지나서도 먹을 수 있어. 가격이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제국에 비하면 훨씬 싸.”
“아, 이게 보존 마법을 걸어 놓은 과일이야? 황궁에서 과일에 보존 마법을 걸어 놓는다는 소리는 들어 봤지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이야.”
유리나는 포크에 꽂은 딸기를 요리조리 돌려 가며 관찰하다가 딸기를 입에 넣었다. 보존 마법을 걸어 놨다고 해도 신선한 딸기와는 차이가 있을 줄 알았는데 식감이나 맛이나 별로 차이가 없었다.
오랜만에 먹는 딸기에 신이 나서 곧바로 또 다른 딸기를 입에 넣자, 레이너드가 제 몫의 딸기를 유리나의 앞 접시에 덜어 주었다. 유리나가 다시 건네주려고 하자 그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말했잖아. 이곳에선 제국보다도 과일을 쉽게 먹을 수가 있어. 난 그동안 많이 먹었으니까 너 먹어. 과일 좋아하잖아.”
“그런 것도 아직 기억해?”
“당연하지.”
어깨를 한 번 으쓱한 그가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유리나의 만류에도 딸기가 잔뜩 올라간 타르트를 추가로 시켰다.
“뭘 그렇게 많이 시켜? 다 못 먹어.”
“다 못 먹을 것 같으면 과일만 집어 먹어.”
그는 뭐가 문제냐는 투로 대꾸하며 제 앞에 놓인 홍차 잔을 우아하게 들었다. 예전에는 쓴 것이 싫다며 우유, 그것도 꿀을 넣은 우유만 먹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아무것도 넣지 않은 홍차를 표정 변화 없이 잘만 마신다.
쓰지 않냐는 유리나의 물음에 그는 자기는 이제 애가 아니라고 대꾸했다.
유리나 또한 그를 따라 홍차를 홀짝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크론 왕국은 제국보다 연애가 활발하다고 들었는데, 실제로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내부에는 애인으로 보이는 남녀들이 많이 보였다.
그 가운데에 레이너드와 단둘이 앉아 있으려니까 그것도 참 기분이 이상했다. 며칠 전, 아무도 없는 들판에 단둘이 있던 것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무슨 생각 해?”
“응?”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레이너드가 상체를 숙여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나는 솔직한 생각을 말하는 대신 찻잔을 내려놓으며 곁눈질로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
“인기가 많나 봐, 레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저 소녀들이 널 아까부터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어.”
그는 그녀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처럼 그가 카페 내부로 들어올 때부터 그를 주시하고 있던 유리나 또래의 소녀 세 명이 그의 시선을 받고 얼굴을 붉혔다.
레이너드는 그녀들을 표정 없이 바라보다가 유리나를 보며 웃었다.
“내 눈 때문일 거야. 네가 ‘베아투스’에 대해서 고서를 찾아 준 뒤로 그에 관한 연구가 많이 있었거든.”
으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유리나는 얼굴을 붉히는 아가씨들의 표정을 살피다가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단것을 먹은 뒤에 먹어서 그런지 홍차가 평소보다 떫게 느껴졌다. 갑자기 케이크를 먹고 싶다는 생각도 사라져서 포크를 내려 두었다.
“그만 먹으려고? 조금 더 먹지.”
“천천히 먹으려고. 점심 먹고 바로 왔잖아.”
“하긴, 넌 어릴 적부터 먹는 양이 적었어.”
다행히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기분을 완벽히 알아채지는 못했는지 더 이상 옆 테이블에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생크림 케이크 위에 있는 과일들을 그녀에게 마저 덜어 주었다.
그와는 달리 유리나는 주변 시선에서 관심을 끊을 수 없었다.
‘인기가 많겠지.’
레이너드 같은 남자아이가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 그는 편지에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또래 여학생들에게 고백을 받은 적도 물론 많으리라.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을 새삼 깨달은 유리나는 미미하게 눈을 찌푸렸다.
“왜? 어디 안 좋아?”
그녀는 그 미세한 변화를 기민하게 포착하고 물어 오는 그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였다.
* * *
레이너드와 함께 여유롭게 디저트를 즐기고 카페를 나온 유리나는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꼭 누군가가 제 뒤를 쫓아오는 것 같았다.
“왜 그래?”
갑자기 길가에 멈춰 선 그녀를 레이너드가 걱정이 담긴 얼굴로 돌아보았다. 유리나는 다시 발걸음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냥 주위 구경 좀 하느라.”
“그래?”
“응. 자, 원하는 대로 케이크를 먹었겠다, 이제 뭐 할까? 선물 사러 갈까?”
“선물은 됐대도.”
“그럴 수는 없지. 앞으로는 예복 입을 일도 많으니까 커프스는 어때?”
유리나는 내켜 하지 않는 그의 팔을 끌고 상점가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적당한 가게를 찾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곳에서 한 남자가 다급하게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아가씨!”
“아론 경이네.”
아무래도 오싹한 느낌의 정체는 기를 쓰고 두 사람을 찾아다니던 카르티아가 기사들의 시선이었나 보다. 유리나가 사라진 후 줄곧 두 사람을 찾아다녔던 건지 단정했던 그의 머리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돌아가야 하나.’
미안한 생각에 아론 경에게 다가가려는데 옆에서 레이너드가 혀를 쯧, 찼다.
“생각보다 빨리 찾았네.”
레이너드가 남들보다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는 반경이 더 넓다고는 하지만 한계는 분명 있었다. 그가 아무리 빨리 유리나를 만나고 싶다고 해도 국경까지 한 번에 이동할 수 없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오늘 번화가에 쉽게 나올 수 있었던 건 아카데미가 수도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넓은 수도에서 이렇게 빨리 꼬리를 잡히지는 못할 텐데. 의아함을 느끼고 있는 그의 눈에 아론 경 뒤에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데이브의 모습이 들어왔다.
“데이브가 우릴 찾았나 봐. 마법으로 이동한 건 추적하기가 더 쉽다면서.”
“하는 수 없지.”
레이너드가 아론 경에게 걸어가려는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유리나, 뛰어.”
“응?”
유리나가 채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레이너드가 아론 경이 달려오는 반대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유리나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드레스를 움켜쥐며 그를 따라 뛰었다.
포크와 나이프보다 무거운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는 귀족 아가씨라면 누구나 그렇듯, 저택에서 과한 보호를 받으며 자라 온 유리나 또한 체력이 좋지 않았다.
금세 턱밑까지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떨려 왔다. 허파가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유리나는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리웠어.’
레이너드와 소소하게 보내던 이 시간이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아니, 정말 그리웠던 건 제 손을 잡고 있는 레이너드였다. 유리나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웃으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더 따라오다간 오히려 유리나에게 독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론 경과 데이브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어차피 레이너드와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들도 더 이상 걱정하지 않을 터였다.
뒤를 보며 그 사실을 확인한 레이너드가 속도를 줄였다. 유리나는 그의 팔뚝을 꽉 움켜쥐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유리나, 괜찮아?”
숨쉬기가 편하게 상체를 옹송그린 유리나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 진짜 돌아가면 아론 경에게 혼날 것 같아.”
레이너드가 몸을 들썩이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대수롭지 않게 맞받아쳤다.
“혼나면 되지.”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는 그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5년 전 생일날 유리나를 지켜 주겠다고 진지하게 손가락을 걸던 열세 살 레이너드보다 훨씬 더 듬직해 보였다.
* * *
데이브와 아론 경이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두 사람은 여유롭게 거리를 거닐었다.
유리나는 제국의 번화가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발을 옮겼다. 그다지 신기한 풍경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나오는 나들이라 그런지 기분이 들떴다.
그러다 문득 레이너드에게 고개를 돌렸던 유리나는 그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유리나가 열심히 거리 구경을 하는 중에도 그는 계속 그녀 쪽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는 그의 얼굴에 왠지 멋쩍어져서 유리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뜨거운 시선이 볼에 닿는 게 느껴졌지만 레이너드 쪽으로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주위를 구경하며 걷다 보니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분수가 있었고, 그 주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악단과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노는 아이들이 보였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던 레이너드가 품 안을 뒤적거리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손수건을 분명 갖고 나왔는데.”
“손수건은 왜?”
그가 대답 없이 분수대를 쳐다보았다. 유리나는 그의 뜻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웃었다.
“그냥 앉으면 돼. 손수건은 아까 잔디밭에 놓고 왔나 봐. 갑자기 이동 마법을 쓰는 바람에 미처 못 챙겼어. 아, 혹시 중요한 손수건이야?”
“아냐,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거야. 잠깐, 잠깐만. 앉으면 안 돼. 옷 더러워져.”
레이너드는 분수대에 앉으려던 유리나의 팔을 재빨리 잡았다.
“괜찮대도.”
손수건도 없이 분수대에 털썩 앉는 건 확실히 귀족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유리나는 진짜로 별 상관 없었다. 제국의 수도라면 주위의 이목을 신경 써서라도 안 그랬겠지만 어차피 이곳은 크론 왕국이다. 그녀를 알아보고 흉을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당사자가 괜찮다는데도 그는 완고했다.
“잠깐만 기다려 봐. 금방 구해 올게.”
“가긴 어딜 가려고 그래. 그냥 앉으면 돼.”
“아니면 내 옷 깔고 앉을래?”
진심으로 겉옷을 벗으려는 그의 모습에서 유리나는 그의 고집을 느꼈다.
“그럼 네 옷이 더러워지잖아. 그럴 거면 차라리 손수건을 사 와.”
“저기 바로 가게가 있으니까 금방 다녀올게. 다리가 아파도 잠깐만 서 있어. 알겠지? 그냥 앉지 말고. 분수대라 차가워.”
유리나는 꼭 어린애를 타이르는 듯한 그의 말투를 들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어. 안 앉을 테니까 얼른 다녀와.”
“응.”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그는 앉지 말고 꼭 기다리고 있으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 뛰어갔다.
‘유난이라니까.’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유리나는 갑자기 소름이 끼치는 듯한 느낌에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녀는 웬 아기 하나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아!”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던 아기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이 사라질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꺄아.”
많아 봐야 한두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기였다.
유리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똥글똥글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깜짝 놀랐네.’
어쩌면 이런 순한 아기의 시선에도 놀랄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모양이다.
유리나는 침을 흘리며 웃는 아기를 향해 상체를 숙이며 마주 웃어 주었다.
“안녕?”
무심코 제국어로 말을 걸었던 유리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아이에게 다시 왕국어로 말을 걸었다.
“안녕?”
그제야 알아들었는지 아기가 유리나의 손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작은 손을 흔들었다.
“빠아빠.”
“그건 헤어질 때 하는 인사잖아.”
유리나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자 신이 났는지 아이가 이번에는 양손을 흔들었다.
“빠빠아.”
유리나 또한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 안녕. 그런데 엄마는 어디 가고 혼자 있어?”
“마아?”
“응, 엄마. 엄마 어디 갔어?”
아기가 뒤뚱거리며 제 뒤를 돌아보았다. “마아, 마.”거리면서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기가 이내 시무룩해진 얼굴로 유리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아.”
좀 전까지만 해도 해맑게 웃던 똥그란 푸른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마아…….”
아이가 앵두 같은 입술을 오므리더니 이내 땅에 털썩 주저앉아 울먹이기 시작했다.
‘곧 오겠지.’
유리나는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많고 복잡한 광장에서 설마 아이의 엄마가 한눈을 팔았을 것 같지 않았다. 아이가 우는 것을 보면 곧장 달려올 것이다.
그러나 금방 달려올 줄 알았던 아기의 가족은 아기가 와앙 소리 내어 울 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마아아!”
유리나는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아이를 난감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기는 급기야 유리나의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고 다리를 동동거렸다.
시끌벅적한 광장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주위의 시선이 유리나와 아이에게로 쏠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유리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내가 아이 엄마처럼 보이지는 않잖아.’
황당하기는 했지만, 아이가 찬 바닥에 앉아 우는 모습을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어서 얼른 아이를 품에 안았다.
“괜찮아. 엄마는 금방 올 거야.”
유리나는 아이를 다루는 법을 몰랐다. 사실 아이를 좋아한다고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설프지만 아이의 뜨끈한 등을 토닥여 주며 괜찮다고 속삭여 주니 아이가 금세 울음을 그쳤다.
흘리다 만 눈물을 눈가에 그렁그렁 단 채로 아이가 히죽 웃었다. 유리나는 손끝으로 아이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며 최대한 부드럽게 속삭였다.
“엄마는 곧 올 거니까 걱정 마.”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해도 아이의 엄마는 이 광장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어쩌면 지금쯤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열심히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잠깐 직접 가서 아이의 가족을 찾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유리나는 아이를 어르며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이의 엄마를 찾아 주는 것도 중요했지만 레이너드와 했던 말도 중요했다.
그리고 괜히 가족을 찾아 주겠다고 돌아다니다 엇갈리는 것보다는 이 자리에서 가족이 오기를 기다리는 편이 더 나았다. 어차피 이 작은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왔다면 이 근처에 있을 테니까.
‘정말 못 찾으면 레이보고 찾아보라고 하면 되지.’
유리나는 할 줄 모르지만 마법으로는 추적 마법도 쓸 수 있었다. 아이가 걸어온 길을 추적하다 보면 집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만일을 대비하여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웬 청년 하나가 그녀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왔다.
“제인!”
레이너드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일 것 같은 청년이었다.
“빠빠!”
유리나의 품에 얌전히 안겨 주먹을 쥐었다 펴며 놀던 아기가 방실방실 웃으며 그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가족 맞겠지?’
유리나가 아이를 건네주자 청년이 가쁜 숨을 내쉬며 아기를 안았다.
“분명 잘 보고 있었는데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잃어버린 줄 알고 엄청 놀랐잖아!”
“꺄아.”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 누나에게 잘 돌보겠다고 약속하고 나왔는데. 그새 다친 건 아니지? 안 넘어졌지?”
그는 아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훑었다.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는 유리나를 뒤늦게 인식했는지 그녀를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어, 그러니까…….”
유리나는 혹시나 괜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먼저 입을 열었다.
“혼자 울고 있길래 가족을 잃어버린 건가 싶어서 데리고 있었어요. 그냥 놔뒀다가는 더 멀리 갈 것 같아서요.”
다행히 그는 의심하는 기색 없이 유리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놀고 있는 걸 계속 보고 있었는데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사라져 버렸지 뭡니까. 하마터면 큰일 날 뻔…….”
빠르게 말을 늘어놓던 남자가 유리나와 제대로 눈이 마주치자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는 유리나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금세 뺨을 붉게 물들였다.
“저기, 그게, 그러니까…….”
유리나는 목까지 빨개진 그를 보다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쉴 새 없이 옹알거리는 아기의 볼을 살살 문질렀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더 늦기 전에 아빠를 찾아서요.”
“아빠! 아닙니다!”
“우!”
갑작스러운 고함에 놀랐는지 아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남자는 아이를 달래는 대신 유리나에게 급하게 변명 같은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빠가 아니라 삼촌입니다. 제 누나의 딸이에요. 누나가 오늘 할 일이 있어서 대신 봐 달라고 하길래 오늘만 혼자 돌보고 있었던 겁니다. 집에만 있으려니까 저도 답답하고, 제인도 답답해해서 잠깐 나온 거고요.”
“…….”
“진짜입니다. 삼촌 맞아요.”
누가 뭐라고 했나. 혼자 열을 내며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는 모습이 오히려 더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저기, 그러니까…….”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웃고만 있는 유리나의 눈치를 살피던 남자가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제인을 찾아 준 것도 고맙고, 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괜찮다면 저녁을 대접해 드려도 될까요?”
“네?”
“누나도 오늘 일을 들으면 당연히 저녁에 초대하라고 할 겁니다. 은혜를 입었는데 그냥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어?”
남자의 목소리 사이로 평소보다 낮은 레이너드의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분명 남자의 목소리가 훨씬 컸는데도 이상하게 유리나의 귀에는 레이너드의 목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남자의 뒤쪽에서 다가온 레이너드가 재빨리 유리나의 옆에 서며 남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웃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매섭게 느껴지는 눈초리에 여전히 불그스름한 남자의 얼굴이 긴장을 한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제인이란 아기는 새로운 얼굴에 흥미가 돋았는지 레이너드의 얼굴을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아?”
“아기네. 안녕?”
아이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미소를 지은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향해 다시 물었다.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이 아기는 누구야?”
“아, 엄마를 잃고 울고 있길래 잠깐 데리고 있었어.”
“이분은?”
“아이 삼촌이래.”
“그렇구나.”
레이너드가 남자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딱히 통성명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라 제 소개를 하지는 않았다. 남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마주 까딱였다.
삼촌과 달리 제인은 방실방실 웃으며 레이너드에게 손을 뻗었다. 레이너드는 작디작은 통통한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며 유리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많이 늦어서 스승님이 걱정하겠다. 슬슬 돌아가자.”
유리나는 그의 손에 들린 아이보리색 손수건을 보며 물었다.
“벌써 가려고?”
“응. 생각해 보니 곧 저녁 식사 시간이잖아. 가서 스승님이랑 같이 저녁 먹자.”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귓속말을 들으며 하늘을 살폈다. 확실히 어느새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유리나는 남자와 아기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 레이너드를 잠깐 말린 뒤 남자의 앞에 섰다.
“죄송하지만 저녁 식사 초대는 거절해야 할 것 같네요. 일이 있어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우는 아이를 봤다면 가족을 찾아 주려고 했을 테니까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아, 네. 그래도 감사했습니다.”
남자는 유리나의 옆에 서 있는 레이너드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아기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제인, 언니에게 잘 가라고 인사해. 안녕.”
“빠빠아.”
“응, 안녕.”
유리나는 손을 흔드는 아기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상하게 아기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어서 남자가 인사를 하고 돌아 걸어갈 때까지도 그 뒷모습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가끔씩 아기가 남자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유리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유리나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자 옆에서 레이너드가 물었다.
“아기 좋아해?”
“음……. 좋아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아. 사실 아기를 볼 일이 별로 없으니까. 그런데 쟤는 웃는 게 되게 귀여워서 자꾸 보게 되네.”
유리나는 아기에게 손을 흔들어 주느라 레이너드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충 대답했다.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옆에 바짝 다가왔다.
“그건 그렇고 웬 저녁 식사?”
“아이를 찾아 줘서 고맙다면서 식사에 초대하고 싶었대.”
“그것참…… 별일이네.”
“그러게. 별일이야.”
“……혼자 두는 게 아니었나 봐.”
조용히 낮게 읊조린 말은 유리나에게 한 말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더 가까웠다. 순간, 손을 흔들던 유리나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이내 태연하게 손을 흔들었다.
“유리나.”
“응.”
“유리나.”
그는 기껏 불러 놓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유리나는 그제야 의아함을 느끼고 레이너드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아기를 보고 있는 동안 그는 줄곧 유리나만 바라보고 있던 모양인지 고개를 들자마자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부드럽게 눈웃음을 짓던 그의 두 눈이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사소한 변화였는데도 그 변화가 주는 충격은 꽤 컸다.
유리나는 어쩐지 차갑게 느껴지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왜 불러 놓고 말이 없어?
왜 그런 얼굴로 보는 거야?
대체 무엇을 묻고 싶었던 걸까.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워낙 가깝게 서 있었기 때문에 레이너드도 분명 그 짧은 질문을 들었을 터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대신 유리나의 손등 뒤로 다가온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평소 부드럽게 잡던 것에 비하면 다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그는 유리나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손깍지를 꼈다. 유리나가 아무리 손을 빼려고 해도 뺄 수 없을 정도로 꽉.
* * *
안 그래도 유리나의 곁에 내내 붙어 있던 레이너드는 네스 거리에 다녀온 이후 잠시라도 그녀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아침 식사를 같이하는 것을 시작으로, 잠을 자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함께 붙어 다녔다.
심지어 밤에도 레이너드가 직접 유리나를 숙소까지 데려다주었다.
하루는 거리 구경을 하고, 하루는 도서관에서 책 구경을 하고, 또 하루는 아카데미 안에서 한가롭게 노는 평화로운 날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처음 만나서 같이 여행한 날까지 포함하면 이렇게 농땡이를 부리는 날이 일주일을 훌쩍 넘었다. 결국 유리나는 참다못해 레이너드에게 물었다.
“레이, 수업 안 들어가도 돼?”
“응?”
다 먹은 도시락 바구니를 정리하던 레이너드가 제대로 듣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어쩐지 진짜로 못 들은 게 아니라 못 들은 척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여 유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업 안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어. 벌써 일주일이 넘게 빠졌잖아.”
처음에야 오랜만에 만났으니 이 정도 일탈은 눈감아 주려고 했다. 지난 5년간 성실히 아카데미 생활을 했다고 하니 일주일 정도 빠진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수업을 빼먹는 데에 죄책감을 전혀 못 느끼고 태연자약한 레이너드의 모습을 보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수업에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지내야 한다, 뭐, 이런 모범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 일이 가져올 후폭풍이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유리나야 이대로 그와 있다가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레이너드는 앞으로도 2년이 넘게 이곳에 남아 생활해야 한다. 행여나 이번 일로 실력만 믿고 자만한다고 교수나 주위 학생들에게 미운털을 사서 생활이 고달파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레이너드가 이 생각을 듣는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상관없겠다고 했겠지만, 유리나는 그렇게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복잡한 유리나의 마음과 달리, 레이너드는 별로 신경 쓰는 기색 없이 다 정리한 바구니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빛이 반짝이나 싶더니 잔디 위에 놓여 있던 바구니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경 안 써도 돼. 괜찮아.”
그가 가볍게 웃어 보인 뒤 유리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늘은 어디 갈까? 구경하고 싶은 곳 있어?”
벌써 만난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들뜬 기색이 역력해서 유리나는 그에게 더 이상 수업에 들어가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대신 순순히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도서관에 또 가 보자. 찾아보고 싶은 책이 있어.”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하지만 도서관에 채 들어가기도 전에 두 사람을 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야, 레이너드!”
웬 남학생 하나가 두툼한 책을 품에 안고 달려왔다.
“어, 패트릭.”
“너 학교에 있었냐? 그런데 왜 수업에는 안 들어왔어? 교수님이 너 엄청 찾으시던데.”
책만큼이나 렌즈가 두툼한 안경을 추켜올리던 남학생이 레이너드의 옆에 서 있던 유리나를 발견하고는 “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애인 생겼냐? 우리 아카데미 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어디서…….”
“대체 용건이 뭐야? 할 말 있어서 부른 거 아냐?”
“아, 그렇지. 허트슨 교수님이 너 불러.”
“날? 왜?”
“왜긴 왜야. 네가 무단으로 수업을 빼먹으니까 그러시겠지.”
“에이든은 한 번도 찾으신 적 없잖아.”
“걔는 워낙 많이 빼먹어서 부를 가치도 없어서 그런 거 아냐? 너는 교수님이 엄청 아끼잖아.”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그가 레이너드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아무튼 가 보는 게 좋을걸. 너 만나면 수업에 들어오라고 전하라고만 하시다가 오늘 수업에선 널 보면 잡아서라도 데리고 오라고 하셨거든. 제때 졸업하려면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괜히 교수님 눈 밖에 났다가 졸업 논문 계속 반려당하는 수가 있어.”
“…….”
“아무튼 난 분명히 말했어. 아까 보니까 에이든은 널 진짜로 밧줄로 묶어서라도 데려갈 생각 하더라. 마법으로는 상대가 안 되니 몸으로라도 잡아야겠다면서.”
그는 킥킥 웃고는 도서관을 향해 걸어갔다. 유리나는 입을 꾹 다물고 진지하게 생각을 하고 있는 레이너드의 팔을 툭 쳤다.
“갔다 와. 허트슨 교수님이라면 전에 저택에 왔던 그분 맞지? 데이브의 친구라던.”
“맞기는 맞는데…….”
“데이브 말을 들어 보니까 널 되게 아끼는 것 같던데 얼른 가 봐. 말도 없이 수업에 빠졌으니 아마 엄청 걱정하고 계실 거야.”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음…….”
레이너드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얘기가 길어질지도 모르니까 숙소로 가 있어. 끝나면 그리로 갈게. 도서관은 내일 구경하고 오늘은 공원에 놀러 가자. 가을이라 꽃이 많이 폈을 거야.”
“그래, 그럴게. 그럼 끝나고 그리로 와.”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등을 가볍게 밀어 주고는 망설임 없이 뒤로 돌았다. 아주 잠깐 등 뒤로 레이너드의 시선이 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레이너드는 이런 그녀를 보며 냉정하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이건 그녀만의 배려였다. 괜히 뒤를 돌아보았다가는 레이너드가 교수에게 가지 못하고 망설일지도 모르니까.
“아가씨, 어디 가세요?”
유리나가 레이너드에게서 떨어지자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베시가 다가왔다.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아론 경도 근처에서 따라오고 있겠지.
“레이에게 일이 생겨서 일단 숙소로 갈 거야.”
주위가 시끌벅적했다. 학생들이 많은 아카데미에서 느낄 수 있는 생기였다. 그동안 귀족 저택에서 가정 교사와 단둘이 수업을 듣던 유리나는 느끼지 못했던 공기.
‘오랜만이네.’
기묘한 기시감. 친구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대학 캠퍼스 광장을 가로지르던 기억이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벌써 5년.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마차 사고를 목격할 때 예전의 기억이 떠오른 탓인지 가슴이 뭉클했다.
유리나는 도서관 앞에 펼쳐진 넓은 잔디 광장 가운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삼삼오오 모여서 웃고 떠드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함께 책을 보며 열심히 토론하는 모습, 서로의 점심을 나눠 먹는 모습.
그런데 이상하게 그 학생들의 얼굴 위로 제 얼굴 대신 어렸던 레이너드의 얼굴이 두둥실 떠올랐다.
대화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문화도, 공기마저도 낯선 이곳에서 홀로 지냈을 레이너드의 얼굴이.
유리나는 처음 아카데미에 왔을 때 기숙사에서 스쳐 지나가듯 보았던 에이든 테시의 얼굴을 떠올렸다.
‘만나 보고 싶은데.’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있었다. 하지만 레이너드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건네도 그는 신경 쓸 것 없다며 일축하며 에이든을 불러 주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아가씨? 어딜 그렇게 보세요?”
“아무것도 아냐. 그것보다 베시, 오늘 점심도 맛있었어. 레이도 맛있다고 좋아하더라.”
“내일도 또 만들어 드릴게요.”
“응, 고마워.”
유리나는 방금까지 하던 생각을 떨쳐 버리고 베시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발을 옮겨 아카데미 정문으로 향했다.
베시는 그동안 유리나가 레이너드와 지낸 탓에 얘기를 많이 못 했던 것이 아쉬웠는지 평소답지 않게 재잘재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던 유리나는 순간 주위의 마나가 일렁이는 것을 느끼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아가씨!”
동시에 조용히 따라오던 아론 경이 재빨리 달려와 유리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유리나는 가까스로 손을 뻗어 바로 옆에 서 있던 베시의 어깨를 거칠게 밀었다.
중심을 잃은 베시가 뒤로 밀려나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아가씨!”
동시에 주위가 반짝이며 유리나와 아론 경 주위에 희미한 막이 생겼다. 다급하게 유리나를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베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유리나는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베시를 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가 주위를 살폈다.
나뭇잎을 흔들어 놓던 가을바람도 더 이상 불어오지 않았다. 나뭇잎이 흔들릴 때마다 들리던 경쾌한 소리도 없었다.
재잘재잘 떠들며 주위를 돌아다니던 사람도 없다. 보이는 거라곤 오로지 그녀를 안고 있는 아론 경뿐이었다.
아론 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유리나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공간 분리 마법이야.’
직접 해 본 적은 없었지만 데이브에게서 들은 적은 있었다.
마나로 인위적인 벽을 만들어 주위의 공간과 완벽하게 분리된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마법.
안에 있는 사람은 주위에 벽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지나다닐 수 있기 때문에 마나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마법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좋게 쓰인다면 비밀 얘기를 나누거나, 연인끼리 밀회를 하는 용도로 쓰이지만, 좋지 않은 쪽으로 쓰인다면…….
“물러나십시오, 아가씨.”
아론 경이 유리나를 품에서 떼어 놓으며 제 등 뒤로 잡아당겼다. 등골이 오싹했다. 유리나는 아론 경에게서 최대한 떨어지며 그의 어깨 너머를 흘끔거렸다. 얼굴을 턱까지 가린 건장한 사내 다섯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은데.’
유리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쓸며 검집에서 검을 꺼내는 아론 경의 뒷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카르티아 후작이 먼 길 떠나는 막내딸의 호위를 걱정 없이 맡길 정도로 아론 경의 실력은 뛰어났다. 황실 기사단에 입단할 수도 있는 실력인데, 어릴 적부터 후원해 준 카르티아 후작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후작가에 남았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단순히 5 대 1로 싸우는 것도 힘든데 유리나를 안전하게 지키며 싸우는 것은 더욱 힘들 것이다.
게다가 공간 분리 마법을 썼으니 상대 쪽에 마법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더욱더 승산이 없는 싸움이 된다.
잔뜩 긴장한 것 같은 아론 경의 뒷모습을 보던 유리나는 상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등 뒤를 더듬거렸다.
마법으로 만든 이 인위적인 공간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시전한 사람이 마법을 취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마나 벽을 깨부숴 버리는 방법이다.
상대가 마법을 알아서 취소할 일은 없으니 마나 벽을 부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마나 벽은 밖에서는 찾기가 힘들다. 레이너드나 데이브처럼 마나에 예민한 마법사라면 금방 찾을 수 있겠지만…….
‘레이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결계 밖에 남은 베시는 지금쯤 상황을 알아차리고 데이브나 레이너드를 찾으러 달려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그렇다면 안쪽에서 자신이 직접 벽을 부수는 수밖에 없었다. 결계 안쪽에서는 손으로 만지다 보면 딱딱한 벽 같은 걸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문제는 찾을 때까지 아론 경이 버틸 수 있냐는 건데.’
유리나는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혀로 훑으며 계속 상황을 주시했다.
아론 경도, 상대도 모두 검을 뽑은 채로 서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특히 상대 쪽에서는 아론 경의 뒤에 있는 유리나를 흘끔거리며 자기들끼리 눈짓하기도 했다.
유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들은 그녀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저들이 방심한 틈을 노린다면 딱 한 번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유리나는 천천히 뒤로 움직이며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능력 없는 귀족 아가씨 하나가 움직여 봤자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상대는 유리나의 돌발 행동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반응을 확인한 유리나는 더욱더 대범하게 발을 움직였다. 겁을 먹은 듯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척을 하며 손을 움직인 것도 잠시, 손끝에 단단한 벽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야.’
기뻐할 새도 없었다. 가만히 주위를 살피던 유리나는 손끝에 마나를 모아 빠르고 강하게 벽을 내리쳤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동시에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더니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마법사라는 이야기는 없었잖아!”
“저 계집애를 잡아, 얼른!”
이상함을 감지한 적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론 경이 재빨리 검을 수평으로 하여 그들의 검을 막았다.
유리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균열이 간 곳을 계속해서 내리쳤다. 깨진 유리 조각에 찔린 것처럼 하얀 손이 금방 피범벅이 되고 허공에 생긴 균열에도 피가 묻었지만 멈추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오로지 머릿속에는 이 결계를 빨리 부수지 않으면 죽을 거라는 공포감밖에 없었다.
등 뒤에서는 남자들의 고함 소리와 칼과 칼이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결계를 부수는 소리보다 작았는데도 유리나의 귀에는 그 싸움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체내 마나가 부족한 탓인지 금방 부서질 거라 생각했던 결계는 생각보다 오래 버텼다. 유리나는 이를 악물고 온몸의 마나를 다 긁어모아 주먹을 내리쳤다.
‘조금만, 제발 조금만 더…….’
쿵, 쿵, 쿵. 심장 소리가 제 귀로도 들릴 정도로 소리를 키워 갔다. 그 사이로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벌어진 틈 사이로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다리가 보였다.
유리나는 구멍으로 두 손을 집어넣고 천을 찢듯이 마나 벽을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아가씨!”
다급한 아론 경의 목소리에 그녀는 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뱀처럼 번뜩이는 사나운 눈동자였다. 아론 경을 상대하고 있던 남자 중 하나가 어느새 그녀 앞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 뒤로 나머지 세력을 모두 베고 피를 흠뻑 뒤집어쓴 아론 경이 빠르게 달려왔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남자가 더 빨랐다.
남자의 검이 햇빛을 받으며 하늘 높이 들어 올려졌다.
유리나는 마나를 휘감은 팔을 머리 위로 들었다.
팔은 심하게 다치겠지만, 한 번만, 공격 한 번만 버티면…….
다가올 고통을 상상하자 등골이 오싹했다. 유리나는 자신을 향해 빠르게 내려오는 검을 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고통은 없었다. 대신, 무언가가 세게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뒷전을 때렸다.
유리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바로 코앞에서 흠집이 많은 목검이 보였다.
‘목…… 검?’
의아할 새도 없이 빠르게 다가온 아론 경이 남자의 등을 베었다. 남자는 울컥 붉은 피를 토하며 유리나 쪽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그 육중한 몸이 그녀의 몸을 덮치기 전에 다부진 팔이 남자의 어깨를 잡아 바닥에 내팽개쳤다.
“괜찮으십니까?”
머리 위에서 낯선 듯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나는 뜀박질을 한 것처럼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오늘 일은 레이너드에게 잘 좀 말해 주세요.”
며칠 전에 보았던 에이든 테시가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며 그때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 * *
“이 녀석,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에이든 테시는 아카데미 안을 돌아다니며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벌써 2주째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못난 친구 녀석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래, 지금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 친구…… 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몇 년 만에 제국에서 온 친한 친구를 만났으니 수업에 빠질 법도 했다. 사실 에이든도 동생들이 수도에 놀러 올 때면 수업을 빠지고 동생들과 함께 놀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허트슨 교수님이 레이너드가 한 번이라도 더 말없이 수업에 빠진다면 수업에 받아 주지 않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허트슨 교수님은 레이너드를 아끼는 만큼 그에게 엄격했다. 홧김에 한 소리겠지만 가볍게 넘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에이든은 친구 녀석을 잡아다가 교수에게 데려갈 생각이었다. 수업에 빠지더라도 교수님께 허락부터 받아라, 뭐 이런 의도로 말이다.
허구한 날 수업을 빼먹는 그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는 당당했다.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에이든은 레이너드가 카르티아 영애와 함께 자주 출몰한다는 도서관 근처를 서성였다. 가기 싫다고 저항한다면 기절이라도 시켜서 데려갈 생각으로 목검도 챙겨 왔다.
한참을 잔디밭을 훑어보던 그의 눈에 흔치 않은 분홍빛 금발이 들어왔다. 얼마 전에 보았던 유리나였다. 그녀는 하녀와 함께 잔디밭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레이너드 녀석은 어디 갔지?’
분명 유리나와 같이 있어야 할 친구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피던 중에 그녀는 저 멀리 멀어졌다.
뭐, 카르티아 영애 곁에 있으면 곧 나타나겠지. 그때까지 카르티아 영애와 인사하고 간단한 이야기를 좀 하고 있자.
에이든은 목검을 어깨에 짊어지고 그 뒤를 빠르게 쫓아갔다.
“아가씨!”
그런데 정문에 다다랐을 무렵, 갑자기 웬 기사가 튀어나오더니 유리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 주위의 마나가 요동쳤다. 두 사람은 순간 이동 마법을 쓴 것처럼 한순간에 에이든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 아가씨!”
마지막에 유리나에게 밀쳐져 바닥에 넘어진 하녀만이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에이든은 그 갑작스러운 광경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이거 위험한 거 아냐?’
농땡이를 부리고 마법보다 검술 연습을 더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는 어찌 됐든 마법과 학생이었다. 잠깐 사이에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본인을 제외한 타인만 순간 이동을 시키는 마법은 일반 순간 이동 마법보다 훨씬 고위 마법이었다. 조금 전 마나 파동은 그 정도로 정교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가정은 단 하나.
“공간 분리 마법.”
어쩐지 목이 타는 것 같아 바짝바짝 말라 오는 아랫입술을 혀로 쓸었다.
친구 녀석이 좋아하는 여자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단둘이 있기 위해 마법을 쓴 게 아니라면 이건 심각한 상황이었다.
에이든은 애타는 목소리로 “아가씨!”를 외치는 하녀에게 다가갔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주위의 이목이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레이너드 어디 있는지 알아요?”
“네?”
하녀는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경계하듯 몸을 움츠리다가 뒤늦게 되물었다.
“레, 레이너드 님이요?”
“그 녀석 어디 있는지 알아요?”
“모, 모르겠어요. 잠깐 교수님을 뵈러 간다고만 들었는데…….”
낭패다. 에이든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공간 분리 마법인 것까지는 알아냈지만, 그의 실력으로는 저 벽을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레이너드나 교수 정도의 실력자가 와야 가능한데.
그렇다고 자기가 직접 그들을 찾으러 직접 갈 수는 없었다. 그는 일말의 가능성을 가지고 이곳에서 마법의 흔적을 찾아야 했다.
“교수 연구실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모르는……. 아! 데이브 님을 불러오면 될 것 같아요!”
에이든은 그게 누구냐, 실력이 뛰어나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저 하녀를 정중히 일으켜 서둘러 내뱉었다.
“얼른 가세요.”
하녀는 젖은 얼굴을 소매로 문지르며 아카데미 안쪽을 향해 뛰어갔다.
에이든은 그녀가 앉아 있던 곳에서 정신을 집중했다. 대충 이곳에 벽이 있으려니, 하고 마나를 휘둘러도 소용없었다. 정확하게 공간을 분리하고 있는 마나를 찾아내서 마나를 불어넣어야 했다.
초조함에 자꾸만 정신이 흐트러졌다. 목검을 쥐고 있는 손에서 땀이 났다.
고작 한 번 봤을 뿐인 타국의 귀족 영애. 그런 그녀의 위험에 이렇게까지 긴장이 되는 건 그녀가 레이너드의 친한 친구이기 때문이리라.
혹시라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간, 모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실실 웃고 다니는 그 녀석이 어떻게 될지 두려워서.
‘제발…….’
마나가 읽히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 좀 열심히 할 걸 그랬다. 모범생처럼 공부했어도 힘들었겠지만, 그래도 후회가 들었다.
주위에 지나다니는 안면 있는 마법과 학생들도 불러 찾아보았지만 아무도 찾지 못했다.
1초, 2초가 아까운 와중에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에이든은 초조한 얼굴로 하녀가 사라진 방향을 흘끔거렸지만 하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레이너드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에이든이 분풀이를 하듯 목검을 허공에 휘두를 때였다.
마법 실험이 실패했을 때처럼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주위에 마나가 휘몰아치며 허공에서 빛이 반짝였다. 놀란 학생들이 뒷걸음을 쳤다.
유일하게 제자리를 지키던 에이든은 쩍쩍 갈라지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작게 난 틈 사이로 피투성이가 된 하얀 손이 언뜻 보였다.
찾았다.
에이든은 마나를 불어넣어 빛이 나는 목검을 곧바로 금이 간 허공에 찔러 넣었다.
“아가씨!”
아까도 들었던 다급한 기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유리나를 노리고 내려치는 검을 목검으로 막았다.
손목이 충격에 시큰거렸지만 밀리지 않으려고 버텼다.
에이든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유리나의 푸른 눈을 보면서 씨익 웃었다.
“오늘 일은 레이너드에게 잘 좀 말해 주세요.”
그제야 긴장을 놓았는지 유리나가 설핏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데 예쁘기는 진짜 예쁘다. 특히 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저 푸른 눈동자가 예뻤다.
지난 5년간 여자라고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친구 녀석이 반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 * *
에이든이 나타난 후로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진검이 아니라 목검을 들고 있었지만, 에이든은 적당히 마법을 써 가며 습격자를 상대했다. 혼자서 힘겹게 다섯 명을 상대하던 아론 경은 도와주는 사람이 생기자 조금 더 여유롭게 남은 이들을 상대했다.
다섯 명 중 세 명이 죽고 두 명은 큰 부상을 입고 붙잡혔다. 배후를 추적해야 했기 때문에 아론 경은 에이든이 구해 온 밧줄로 살려 둔 두 남자를 포박했다. 독약을 먹는 것을 막기 위해 입에 재갈도 물렸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나고 나서야 아론 경이 다급하게 유리나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그의 시선이 피투성이가 된 유리나의 두 손으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잘 살폈어야 했는데.”
아론 경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드러났다. 카르티아 후작의 후원을 받아 검술의 뜻을 펼칠 수 있게 된 아론 경은 황실 기사단에 입단할 수 있는 실력을 가졌음에도 후작가에 남았다. 그 정도로 그는 카르티아 후작가를 각별하게 생각했다.
그는 유리나를 다치게 했다는 사실에 퍽 괴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작 본인도 팔과 허리를 베어 피를 철철 흘리고 있으면서.
“전 괜찮아요. 데이브가 오면 이 정도는 금방 치료해 줄 텐데요. 그것보다 경의 상처가 더 걱정되네요. 경이야말로 괜찮으세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보다 아가씨, 지혈을…….”
“아, 영애는 제게 맡기시고 경께서는 경의 상처를 돌보세요.”
중간에 끼어든 에이든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유리나에게 다가왔다. 아론 경은 뭐라고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였으나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나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짜 많이 다치시긴 하셨네요. 정말 괜찮으세요?”
에이든은 손수건으로 피투성이가 된 유리나의 두 손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칼에 깊게 베인 것처럼 갈라져 뻘건 속살이 드러난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솟아났다. 연한 빛의 손수건이 금방 피로 축축해졌다.
에이든은 지혈을 위해 손수건으로 손을 꾹 눌렀다. 유리나는 순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눈을 찌푸렸다.
좀 전까지는 상황이 급박해서 통증을 느끼지 못했는데 긴장이 풀리자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올 정도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머리도 살짝 어지러웠다.
“죄송해요. 제가 치료 마법은 못 해서, 교수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베시가 데이브를 부르러 갔다면서요. 데이브가 치료해 줄 거예요.”
“데이브란 분 실력이 좋은가 봐요.”
“네. 크론 아카데미를 7년 만에 졸업했으니까요.”
“우와.”
에이든의 입에서 진심 어린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는 유리나의 손에 손수건을 꽉 묶어 주면서 재잘거렸다.
“대단하신 분이네요. 저는 언제 졸업할지 벌써부터 걱정이에요. 아, 너무 아팠죠? 죄송해요. 그런데 이렇게 안 하면 상처가 더 벌어질 수가 있어서.”
그가 유리나의 눈치를 보며 손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마법 실력이 없어서 치료 마법을 못 쓴다고 했던 것에 비해 상처를 싸매는 솜씨는 꽤 능숙했다.
“마법과…… 아니셨나요?”
“마법과 맞아요. 치료 마법도 못 쓰는 게 좀 한심하죠?”
“치료 마법은 꽤 고위 마법이잖아요. 못 쓴다고 이상한 게 아니란 거 알아요. 그냥 상처를 묶는 솜씨가 능숙해서요.”
“아, 검술 연습 하다 보면 자잘하게 다칠 때가 많아서요. 혼자 매일 치료하다 보니 전문가가 다 됐죠.”
유리나는 새삼 에이든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에이든은 호리호리한 체형보다는 레이너드처럼 적당히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겉만 본다면 전혀 마법과 학생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마법도 공부하고, 검술까지 공부하시려면 엄청 힘드셨겠네요.”
“별로 안 힘들었어요. 저는 마법 공부 별로 안 했거든요. 뭐, 레이너드 녀석은 시간 쪼개느라 힘들었겠지만요.”
“레이요?”
유리나는 검술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레이너드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떨떨한 감정이 목소리에도 묻어 나왔는지, 줄곧 그녀의 손을 보며 집중하고 있던 에이든이 의아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처음 들으세요? 걔도 저랑 검술 연습 열심히 했는데.”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간 주고받은 편지에서 그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근육이 있어 탄탄해 보이는 그의 몸을 보며 마법사가 아니라 기사 같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검을 배웠으리라고는…….
“아뇨, 들었어요.”
이상한 자존심 때문에 유리나는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아, 하긴. 모르셨을 리가 없죠.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으셨는데. 그래도 그 녀석이 검술 연습하는 건 직접 보신 적은 없으시죠? 여기 와서 처음 배웠다던데 생각보다 금방 늘어서 지금은 웬만한 귀족들보다도 더 잘해요.”
“그렇군요.”
“언제 한번 보여 달라고 하세요. 구경하시는 김에 아예 그 녀석을 연무장까지 끌고 와 주시면 더 감사할 것 같고요.”
“얘기는 해 볼…… 게요.”
유리나는 어쩐지 목이 메는 것 같아 말하는 중간에 침을 한 번 삼켜야 했다. 이상하게 들렸을 것 같은데 에이든은 이상해하는 기색 없이 유리나의 상처에 집중했다.
유리나는 손에 꼼꼼하게 붕대를 감는 에이든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왜 말을 안 해 준 거지.’
레이너드가 편지에 시시콜콜한 얘기를 해 주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게 못내 섭섭할 때도 있었지만 그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편지가 오고 가는 건 고작 한 달에 한 번뿐. 한 달 동안 일어난 일을 모두 담기엔 편지지는 너무나 작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 레이너드에게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다만…….
‘대체 내가 모르는 게 얼마나 될까.’
자신은 모르고, 눈앞의 소년은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레이너드와 보낸 시간은 고작 6개월 남짓이었다. 그나마도 두 사람은 6개월 내내 그 작디작은 공부방이나 서로의 침실을 오고 가며 지냈다. 매일 했던 일이라고는 기본 수업과 간단한 게임 정도였다.
그들의 세계는 작았고, 특별할 게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레이너드는 5년간 이 아카데미에서 지냈다.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작은 저택에선 배우지 못한 많은 것들을 직접 보고 배웠다.
그의 세계는 그만큼 넓고 다양해졌다. 그리고 그의 세계에는 유리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인데도 왜 패배감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입 안이 썼다.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려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듯 느껴지는 아픔에 재빨리 손가락을 빳빳하게 폈다.
“그렇게 움직이면 안 돼요!”
에이든이 재빨리 유리나의 손을 살폈다. 기껏 지혈했던 상처에서는 조금씩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큰일이네요. 얼른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에이든이 다시 붕대를 풀어 지혈을 하려고 할 때였다.
“아가씨!”
저 멀리서 울음기가 섞인 베시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베시와 데이브가 유리나를 향해 뛰어왔다. 베시는 좀처럼 뛰지 못하는 데이브의 팔을 질질 끌고 유리나의 앞에 섰다.
얼마나 빨리 뛰어왔는지, 가까이에서 본 두 사람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유리나는 괜히 농담을 건넸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데이브. 연구만 하지 말고 운동 좀 하라고 했지?”
“아가씨, 지금 농담이 나오세요?”
베시가 울먹거리며 에이든 옆에 앉아 유리나의 손을 살폈다. 그녀는 생각보다 깊은 상처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마법사님, 얼른! 얼른 치료요! 얼른!”
거친 숨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데이브가 유리나의 손을 잡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숨을 헐떡이면서도 착실하게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그의 손끝에서 새어 나온 하얀빛이 유리나의 상처 사이로 스며들었다. 가장 깊은 곳부터 서서히 아물기 시작한 상처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흉터 하나 없이 치료되었다. 소맷자락에 묻은 피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다친 줄도 모를 정도로 완벽했다.
안 그래도 힘들어했던 데이브는 마법을 다 쓰자마자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골랐다. 유리나가 미안하다고 할 새도 없이 베시가 그녀의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쏟아 냈다. 뜨거운 눈물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처투성이였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으허엉, 전 아가씨께서 진짜 잘못되시는 줄 알고……. 아가씨께서 잘못되면 저도 못 살아요.”
유리나보다 열 살 많은 베시는 늘 다정하고 차분한 언니 같았다. 정신 연령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자신보다 어린 그녀를 언니처럼 따르게 된 것도 그녀의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베시가 아이처럼 울었다. 남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도 않고, 유리나의 손을 잡고 꺽꺽 소리까지 내 가면서. 유리나는 지난 5년간 베시와 함께 지내면서 그녀가 이렇게 통곡을 하며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괜히 덩달아 코끝이 찡해지는 것 같아 유리나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베시, 울지 마. 나 이렇게 멀쩡하잖아.”
“그게 어떻게 멀쩡한 거예요? 상처가 그렇게 심하게 났는데.”
“데이브가 치료해 줬잖아. 이젠 멀쩡해.”
“지금 멀쩡해도 안 다치신 게 아니잖아요.”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그만 울어, 응?”
유리나는 소맷자락으로 베시의 젖은 뺨을 닦아 주려다가 피딱지가 묻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멈췄다. 데이브가 숨을 고르는 중에도 눈치 좋게 제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베시의 뺨을 닦아 주는 유리나에게 물었다.
“아가씨, 대체 무슨 일입니까? 베시 양은 아가씨께서 갑자기 사라지셨다고만 하던데.”
“그것보다 숨 좀 골랐으면 아론 경 좀 치료해 줄래? 나보다는 아론 경이 많이 다쳤거든.”
뒤늦게 제 뒤쪽으로 시선을 던진 데이브가 한쪽 팔이 피투성이가 된 아론 경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론 경을 치료해 주면서 그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속닥거려서 무슨 말인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번 습격과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의논하는 것 같았다.
‘이제 다 끝난 건가.’
유리나는 여전히 울먹이는 베시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귓가에 닿는 베시의 울음소리는 이렇게나 생생한데, 조금 전 일이 마치 꿈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유리나가 치료를 받는 내내 물러나 있던 에이든이 다시 한번 유리나의 손을 살폈다.
“네, 덕분에요. 와 주시지 않았다면 큰일을 당할 뻔했어요. 상처를 지혈해 주신 것도 감사해요. 꼭 답례할게요. 손수건도요.”
유리나는 에이든 손에 들린 피에 전 손수건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닙니다. 어차피 이건 검술 연습할 때 쓰는 거라 비싼 것도 아니에요. 그런 상황에서 도와 드리는 건 당연하죠. 사실 제가 뭐, 도와 드린 게 있나요? 영애의 마법이 아니었다면 저도 도와 드리지 못했을 거예요.”
에이든이 고개를 저으며 뒷머리를 멋쩍은 듯 긁적였다.
“그리고 영애께서 큰 화를 입으셨다면 레이너드 녀석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요.”
그가 주위를 살피다가 소리를 죽였다.
“사실 그동안 영애께서 어떤 분인지 궁금했어요.”
“저를요?”
유리나는 갑작스러운 말에 조금 얼떨떨해졌다.
‘날 대체 어떻게 알고?’
레이너드는 그녀에게 에이든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그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이든에게는 자신의 얘기를 했던 걸까.
베시의 울음에 잠시 잊고 있던 씁쓸한 패배감이 다시 마음을 짓눌렀다.
유리나의 어두운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에이든이 태연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네. 레이너드 녀석이 의외로 자기 얘기는 하지 않아서 말해 준 적은 없지만, 걔가 알게 모르게 티가 많이 나거든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레이가…… 얘기해 준 게 아니라요?”
“걔가요? 걔는 자기 얘기 별로 안 해요. 저는 걔가 아카데미에 오기 전에 제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잘 몰라요. 가족 얘기도 하나도 안 해 주던걸요.”
에이든의 얼굴에 조금 전까지 유리나가 짓고 있던 씁쓸한 표정이 잠깐 떠올랐다.
“아무튼 그 녀석이 말은 한 번도 안 했지만 매달 초조하게 편지를 기다리더라고요. 맨날 기운 없이 밥도 제대로 먹지 않는 녀석이 그 편지만 받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을 차리며 돌아다니더라고요. 그 편지를 보내신 게 영애 맞죠?”
유리나는 소리 내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영애 덕분에 그 녀석이 여기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모든 게 처음 듣는 이야기투성이였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에게서 이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편지를 기다렸다는 내색을 비친 적도 한 번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영애.”
잠깐 사이에 눈시울이 붉어진 에이든이 유리나의 손등에 정중하게 입을 맞췄다. 유리나는 여전히 그가 하는 말이 온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저야말로 감사드려요.”
에이든의 한마디에 계속해서 마음을 짓누르던 묵직한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 * *
유리나를 숙소로 데려다준 아론 경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아가씨를 공격한 사람들, 왕국 사람인 것 같습니다.”
내심 그들이 제국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던 유리나는 조금 놀랐다. 자신을 노렸으니 당연히 카르티아 가문에 원한을 갖고 있는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카르티아 후작은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서 영지민이나 많은 기사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강직하다는 게 늘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황실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로서 일을 처리하다 보면 반감을 갖는 이들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예전에 유리나의 첫째 오빠였던 릭스 카르티아는 방학 때 저택에 방문했다가 아카데미에 돌아가는 길에 오늘 유리나처럼 습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비리를 저질러 기사단에서 쫓겨난 기사가 원한을 갖고 한 일이었다.
그런데 제국민이 한 짓이 아니라니?
“확실합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데이브가 묻자 아론 경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확실합니다. 그들이 쓰던 검술이 완벽하게 왕국식 검술이었습니다. 제국과 왕국은 검술이 많이 달라 제국 사람이 완벽하게 따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 아가씨를 대체 왜 노렸던 걸까요.”
유리나 옆에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던 베시가 유리나를 보호하듯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유리나는 제 어깨 위에서 달달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맞잡았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조사를 조금 더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레이너드 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갑작스러운 데이브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전에도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레이너드 군의 실력이 뛰어난 데다가 베아투스라는 상징적인 위치까지 있으니 노리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날 이용해서 레이너드를 포섭하려고 했다는 소리야?”
“지금으로써는 그럴 가능성이 큰 것 같습니다.”
“날 죽이려고 했는데?”
유리나의 물음에 이번엔 아론 경이 대답했다.
“어쩌면 아가씨의 목숨을 노린 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얼떨결에 따라온 아론 경에게는 죽일 듯이 달려든 것에 비해 유리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 유리나가 마지막에 느꼈던 그 살의는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현재 나온 가설 중에서는 유리나를 인질로 삼아 레이너드를 노렸다는 것이 가장 신빙성이 있었다.
그래도 일단 조사를 해 봐야 하니 아론 경은 아카데미와 크론 왕실 측에 협조를 요청하겠다고 했다. 레이너드가 크론 왕립 아카데미의 학생인 만큼, 정말로 레이너드를 노린 일이었다면 크론 왕국에서도 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그렇게 해.”
아론 경은 유리나의 대답을 듣자마자 왕실에 연락을 넣어 보겠다며 방을 나갔다. 데이브는 그를 따라 나가다 말고 다시 돌아와 유리나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아가씨께 그게 무슨 짓이냐는 베시의 잔소리를 들은 뒤에야 그는 손을 거뒀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그동안 마법을 배운 게 이렇게 도움이 되는군요.”
“그러게. 재능이 없어서 과연 쓸모가 있을까 싶었는데.”
데이브는 힘없이 웃는 유리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언가 하고자 하는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인사를 한 뒤 방을 나섰다.
유리나는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이 대충 무슨 말이었을지 짐작이 갔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겠지.’
데이브는 유리나가 어릴 적부터 그녀를 동생처럼 아꼈다. 아마 그는 유리나가 그런 일을 당할 때 옆에 없었던 것을 미안해하고 있을 것이다.
‘미안해할 일이 아닌데.’
유리나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소파에 축 늘어지듯 앉아 오늘 일어난 일을 곱씹어 보았다. 뒤늦게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정말로 레이를 노린 일일까.’
그동안은 제 목숨만 위태롭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역으로 자신의 존재가 레이너드에게 걸림돌이 될 줄은 몰랐다.
“유리나.”
통증이 없는 손을 의미 없이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던 유리나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레이너드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유리나.”
성큼성큼 유리나의 앞에 다가온 레이너드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뛰어온…….”
유리나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레이너드가 굳은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을 샅샅이 훑어보는 그의 시선에서 유리나는 그가 사건에 대해 들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쩐지 심각한 이야기가 이어질 것 같아서 눈짓으로 베시를 내보냈다.
“레이.”
“…….”
“레이.”
듣고도 못 들은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못 들은 건지 그는 여전히 대답 없이 유리나의 상처 없는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 가며 살폈다.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이 뺨을 타고 내려와 턱에 고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뛰어온 걸까.’
레이너드는 공간 이동 마법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많이 발전했다. 그런 그가 마법을 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뛰어왔다는 건 그만큼 정신이 없었다는 소리인 걸까.
“여기만 다친 거야?”
“이쪽도.”
유리나가 순순히 반대쪽 손을 내밀자 그가 아예 두 손을 겹쳐 쥐었다. 유리나는 얼떨결에 양손을 모은 자세로 그의 손에 감싸 안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레이너드의 손은 그녀의 손등을 모두 덮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많이 컸네.’
진지한 그와 달리 유리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뼈마디가 앙상하고 여기저기 상처가 나 있던 그의 손은 지금은 뼈마디가 굵어지고 굳은살이 군데군데 박여 있었다. 아마도 검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유리나는 손끝으로 굳은살이 박인 그의 손끝을 톡톡 건드렸다. 레이너드가 하지 말라는 듯 손을 한 번 꽉 쥐었다가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그의 얼굴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뛰어왔어?”
유리나가 손을 뻗어 앞머리를 매만져 주자 레이너드가 한 걸음 살짝 물러나는 것으로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갈 곳을 잃은 흰 손이 허공에서 의미 없이 방황했다. 유리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던 레이너드가 뒤늦게 다시 다가왔다.
“미안. 피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
그가 상체를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더니, 유리나의 손을 잡고 제 이마 쪽으로 끌어당겼다.
계속해 줘.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동이, 얌전히 눈을 감고 있는 그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리나는 촉촉한 그의 앞머리를 쓸어 이마를 뒤로 넘겼다.
“교수님이 뭐라고 하셔?”
레이너드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유리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유리나가 순간 당황할 정도로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 그게 중요해?”
“…….”
그가 유리나의 손을 잡고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왜 이렇게 태연해?”
“태연?”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유리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했다.
“내가?”
“응.”
“왜 그렇게 생각해?”
“나는 네가…….”
감정이 치솟는지 그는 눈을 감고 숨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죽을 뻔했어.”
“응, 알아.”
유리나의 차분한 대답에 레이너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유리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베시와 데이브에게 했던 것처럼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멀쩡하잖아.”
“유리나.”
“이것 봐. 조금 다치기는 했어도 데이브가 말끔히 치료…….”
태연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감정이 치솟아 목이 멨다.
유리나는 목으로 올라오는 부정적인 감정을 애써 삼키고 레이너드에게 웃어 보였다.
“나는…… 괜찮아.”
레이너드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것이란 걸 안다. 그는 더 이상 순진한 열두 살 아이가 아니었다. 유리나 또한 지금껏 그에게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여기서 괜찮지 않다고 하면 안 그래도 괴로워하고 있을 그가 더욱 괴로워할 테니까. 그의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었다.
“나 정말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레이너드가 한마디, 한마디 짓씹듯이 내뱉었다.
“너는 괜찮을지 몰라도 내가 안 괜찮아. 내가 안 괜찮다고. 에이든에게서 네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끝으로 갈수록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는지 그의 언성이 올라갔다. 본인이 말하고도 놀랐는지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한숨을 토해 내듯 말을 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여기 아카데미에서, 내가 없는 제국도 아니고 이곳에서 네가 죽을 뻔했어.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마법을 배운 건데, 내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한 건데, 내가 대체 왜…….”
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유리나를 끌어안았다. 유리나는 그의 가슴에 뺨을 기댔다.
두근, 두근, 두근. 듣는 사람이 숨 가쁠 정도로 빠른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가 얼마나 가슴을 졸이고 있었는지 그 소리가 말해 주고 있었다.
“유리나.”
한참의 침묵 끝에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얼른 제국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하루라도 그녀와 더 있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게 너한테 더 나을 것 같아.”
아직까지는. 혼잣말 같은 속삭임으로 그가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 * *
유리나를 습격했던 배후는 생각보다 금방 잡혔다. 현 왕실에 반대를 하는 반역 분자로, 이미 크론 왕실에서는 이 세력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은 좀처럼 잡히지 않아서 애 좀 먹었는데, 아론 경이 잡은 남자들 덕분에 꼬리를 잡을 수 있다고 했다.
덕분에 유리나는 조금 더 안심하고 원래 예정했던 기간만큼 왕국에 머물 수 있었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에게 데이브에게 간다고 말하고 기숙사 쪽으로 향했다. 베시를 통해 미리 쪽지를 받은 에이든이 먼저 기숙사 입구에 나와 있었다.
“카르티아 영애.”
그가 정중히 유리나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해 주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네, 덕분에요.”
“그 못된 녀석들은 곧 잡힐 테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유리나는 감사의 뜻을 담아 그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에이든이 살짝 불그스름해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준비는 대충 했어요. 영애가 계셔서 정말 파티다운 파티를 할 수가 있겠군요!”
에이든이 곧 있을 레이너드의 생일 파티를 떠올리며 흥분된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생일 파티를 같이 준비하자고 먼저 제안한 것은 에이든이었다. 그는 그나마 친하게 지내는 친구 몇몇을 제외하면 왕국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레이너드를 위해 매년 생일 파티를 준비했다.
처음에는 눈물을 펑펑 쏟았던 레이너드는 그다음 해부터는 뭘 이런 것을 준비했냐고 툴툴거렸다. 하지만 싫어하는 기색은 전혀 아니라서 에이든을 비롯한 그의 친구들은 그 퉁명한 목소리를 들으며 실실 웃었다.
‘저러니 생일 파티를 안 준비해 줄 수 있나.’
게다가 올해는 레이너드가 성년이 되는 해. 특별한 날인 만큼 다른 때보다 더 정성 들여서 준비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제국에 있다는 후원자를 초대해 볼까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레이너드는 후원자가 제국 귀족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그 덕분에 레이너드를 만난 지 5년이나 되었는데도 에이든은 그의 후원자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주 기본적인 가문의 이름조차 모르니 초대장을 보낼 수조차 없었다.
‘어차피 보낸다고 해도 오지 않았을 테지만.’
에이든은 눈치가 꽤 빠른 편이었다. 레이너드가 시시콜콜 개인사를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에이든은 그의 후원자가 상당한 재력가인 데다가 제국에서 꽤 영향력 있는 귀족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레이너드에게 오는 선물들 중 돈이 있어도 아무나 쉽게 구할 수 없다는 귀중품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귀족에게 왕국의 일개 학생이 생일 초대장을 보낸다고? 오지 않는 것은 물론 애초에 편지를 읽지 않을 확률이 훨씬 더 컸다. 괘씸하다고 화를 내지 않는다면 다행이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제국식 음식을 준비하는 거였다. 에이든은 그동안 모아 둔 용돈을 탈탈 털어 수도에서 제국식 디저트로 유명한 베이커리에 제국식 생일 케이크를 미리 주문했다.
이왕이면 가장 크고 화려한 케이크로!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먹을 거니까!
그렇게 만만의 준비를 하던 에이든의 눈앞에 유리나가 나타난 것이다.
제국에 왔다는 그녀는 누가 봐도 레이너드와 친해 보였다. 아니, 친해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레이너드가 그녀에게 단순히 우정을 넘어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에이든이 생일 파티에 초대하고 싶어 했던 레이너드의 소중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초대해야지!’
에이든은 유리나를 처음 본 날부터 그녀를 파티에 초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레이너드 이 녀석이 그녀를 친구들에게 소개해 주기는커녕 수업까지 빠지며 놀러 다니는 통에 그녀의 머리카락 하나 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유리나를 도와주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레이너드 또한 에이든이 유리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그렇게 기회를 노리다가 그는 유리나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건넸다.
“레이너드의 생일 파티를 할 건데 오실래요? 애들끼리 준비하는 거라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재미는 있을 거예요.”
한편 유리나는 그 제안을 들었을 때 내심 놀랐다. 그녀가 이 먼 곳까지 고생을 하며 온 것도 다 레이너드에게 파티를 해 주기 위해서였다. 이 먼 타지에서 그가 외롭지 않도록.
파티는 자고로 사람이 많을수록 즐거운 법이다. 하지만 저택에서 고용인들이 솔선수범해서 파티를 준비했던 것과 달리 왕국에 데려올 수 있는 고용인의 수는 한정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카데미에서 레이너드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레이너드가 친구들을 제대로 소개해 주지 않아서 고민하던 차에 에이든의 제안을 들은 것이었다.
안 그래도 원했던 바라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좋아요. 같이 준비해요.”
그렇게 된 일이었다.
* * *
파티 장소는 에이든의 기숙사 방으로 결정됐다. 레이너드의 방 바로 맞은편이라 들키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유리나의 걱정을 들은 에이든이 코웃음을 치며 호언장담했다.
“걔는 절대로 이 방에 먼저 안 와요.”
참고로 레이너드는 지금쯤 허트슨 교수의 수업을 듣고 있을 것이다. 또다시 무단으로 빠지면 졸업 논문을 통과 안 시키겠다고 엄포를 놓는 통에 레이너드는 유리나를 걱정하면서도 수업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세 시간 정도는 시간이 있어요.”
에이든이 기숙사 방으로 들어가며 팔을 걷어붙였다. 사실 에이든은 레이너드와 같은 수업을 들어가야 했는데 생일 파티 준비로 빠지게 됐다. 유리나는 그가 수업에 빠지는 게 미안했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오늘 마침 수업도 듣기 싫었는데 잘 됐죠. 어차피 제가 원래 수업을 많이 빠져서 레이너드 녀석도 별 의심을 안 하더라고요.”
입꼬리를 잔뜩 들어 올리는 모습이 얼마 전 성인이 되었다는 남자답지 않게 아이처럼 개구지기만 했다. 유리나는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좋은 친구를 뒀네.’
그동안 레이너드와 에이든이 어떻게 지냈는지 듣지 않아도 대충 그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삼십여 분 정도를 베시와 에이든의 도움을 받아 방을 꾸미고 있을 때 방문이 열렸다. 혹시 레이너드가 온 건 아닌가 걱정하며 뒤를 돌아봤던 유리나는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낯선 아이의 눈과 마주쳤다.
“어?”
아이가 푸른 눈을 깜빡이며 들어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도로 나가지도 못한 채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를 발견한 에이든이 굽혔던 허리를 펴며 짐짓 진지하게 허리에 손을 얹었다.
“수업 시간인데 왜 여기 있어?”
“나도 도와주고 싶단 말이야.”
아이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씰룩였다. 에이든이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한 번 쉬더니 그의 손을 끌어와 유리나 앞에 섰다.
“여기 이 꼬맹이는 네이선이에요. 네이선, 여기는 레이너드 친구인 카르티아 영애야. 인사해”
네이선은 통통한 볼살이 귀여운 소년이었다. 올해로 열세 살이라는 그는 레이너드와 닮은 점을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유리나는 이상하게 그가 레이너드와 닮았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레이너드가 저택을 떠났을 때 나이도 열세 살이라 그랬을까.
“누나, 안녕! 나는 네이선이야. 누나라고 불러도 되지?”
“예절 시간에 배웠잖아. 카르티아 영애라고 불러야지.”
에이든이 꿀밤을 아프지 않게 한 대 쥐어박자 네이선이 맞은 곳을 문지르며 씩씩거렸다.
“여기는 아카데미잖아.”
귀족과 평민이 함께하는 크론 왕립 아카데미에서는 원칙적으로 모든 학생은 평등했다. 학생들은 적어도 아카데미 내부에서만큼은 신분에 상관없이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며 친구처럼 지낸다.
암암리에 귀족의 지위를 내세우며 평민 출신 학생을 억압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발견 즉시 처벌을 받는다. 최악의 경우 퇴학이다.
신분뿐만이 아니라 출신 지역에 따라 차별하는 것도 엄히 금하고 있다. 그런 차별들이 학업 분위기에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이선의 주장은 어찌 보면 타당했다. 유리나가 이곳 학생이 아니란 게 문제라면 문제일 뿐.
유리나는 네이선에게 뭐라고 하려는 에이든에게 고개를 저어 보인 뒤 무릎을 굽혀 네이선과 눈높이를 맞췄다.
“혹시 레이에게도 형이라고 해?”
“레이너드 형? 응!”
“그럼 누나라고 불러도 돼. 레이가 형이면 나도 누나지. 친구니까.”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네이선이 이내 “으응?” 하고 눈을 찌푸렸다.
“왜 그래?”
“누나는 왜 레이너드 형을 레이라고 불러?”
“그거야 애칭이니까.”
“그렇지만 나한테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는걸.”
유리나는 뜻밖의 지적에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레이. 그건 그녀가 처음부터 레이너드에게 이름 지어 줄 때 아무 생각 없이 말했던 애칭이었다. ‘레이너드’라는 이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를 ‘레이’라고 부르는 건 유리나 하나였지만, 정작 그녀는 그에 대해 특별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방금 네이선의 말을 들으니 새삼 깨달은 것이다.
‘레이는 특별하게 생각했었나.’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뜨끈하게 달아오른다. 유리나는 마찬가지로 화끈거리기 시작한 얼굴을 감추기 위해 네이선에게 한 번 웃어 보이고는 베시를 도와 테이블 위를 꾸몄다.
“우와, 우리 방 같지가 않아!”
에이든을 비롯하여 같이 다니는 무리 속에서 예쁨만 받고 컸는지 네이선은 생각보다도 더 순수하고 귀여운 면이 있었다.
그는 베시의 도움을 받아 파티 준비를 하는 유리나의 뒤를 새끼 오리마냥 졸졸 따라다녔다. 레이너드에게 깜짝 파티를 해 줄 생각에 신이 난단다.
“누나, 내가 도와줄 건 없어? 나 파티 준비하는 거 되게 잘해!”
“그래?”
“응! 그동안 레이너드 형 생일 파티 준비하는 것도 다 내가 했어.”
네이선이 자부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제 가슴팍을 탁탁 두드렸다. 이 쪼그만 애가 도와줘 봤자 얼마나 도와줬겠나 싶었지만 유리나는 웃으며 맞장구를 쳐 줬다.
“그럼 어디 한번 솜씨 좀 볼까?”
“응!”
네이선이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테이블에 디저트를 놓는 베시를 향해 뛰어갔다. 가자마자 도와주기는커녕 베시가 건네준 마카롱 하나를 입에 넣고 베시시 웃는다. 유리나는 맛있다며 눈을 똥그랗게 뜨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귀엽네.’
겉모습을 본다면 유리나와 네이선은 또래처럼 보였다. 지금은 유리나가 더 키가 커 보이지만 높은 구두를 벗는다면 실제로는 그녀가 살짝 더 작을 수도 있었다.
나이도 두 살밖에 차이가 안 나니 누가 누구를 귀여워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귀여워 보이는 걸 어쩌겠는가.
네이선 또한 유리나를 꼭 대여섯 살은 많은 누나처럼 대했다. 아마 곧 성인이 되는 레이너드의 친구라고 하니 덩달아 그녀가 성인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아무리 봐도 레이랑 닮은 점은 없는데.’
비쩍 말랐던 그와 달리 네이선은 보통 체격이었다. 아직 젖살이 안 빠졌는지 볼은 다소 통통하기까지 했다. 성격도 낯을 가리는 레이너드와 달리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살갑게 대할 정도로 붙임성도 좋았다.
그 어디에서도 레이너드와 닮은 점을 찾아볼 수 없는데 유리나의 눈에는 자꾸 네이선의 얼굴 위로 열세 살 레이너드의 얼굴이 보였다.
“누나, 이거 레이너드 형이 좋아하는 거야! 역시 친구라서 잘 아나 봐!”
한참을 고민하던 유리나는 신이 난 표정으로 생크림이 잔뜩 올라간 컵케이크를 흔드는 네이선을 보며 비로소 해답을 얻었다.
가식이라고는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아이답게 순수한 저 모습이 닮았다. 저 해맑은 모습이 예쁘다는 점이 비슷하다.
‘레이가 좋은 친구들을 뒀네.’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이 틈 속에서 어울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네이선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왕국에서 남은 일정은 단 사흘. 이 아이들이 있다면 아무 걱정 없이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 * *
“레이너드, 어디 가?”
수업을 마치고 나오던 레이너드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던 길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에이든이 실실 웃으며 서 있었다.
에이든이 뛰다시피 달려와 레이너드의 팔에 매달렸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급한 일이라도 있어?”
“너야말로 수업은 안 듣고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날씨가 좋잖아. 산책 좀 다녀왔지. 그래서 이제 뭐 할 거야?”
“알아서 뭐 하게?”
일부러 퉁명스레 대꾸한 레이너드는 에이든의 팔에서 팔을 빼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평소라면 에이든의 장단에 어울려 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머릿속엔 오로지 한 사람 생각뿐이었다.
‘유리나는 스승님하고 있는다고 했는데.’
유리나와 떨어지는 것을 꺼려 하는 레이너드를 향해 그녀는 데이브와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웃었다.
데이브는 보통 아카데미에 오면 도서관이나 교수 연구실에 처박혀 있었다. 그럼 유리나도 그곳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곳에 가 있을까.
레이너드가 고민하고 있는데 에이든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카르티아 영애 찾아? 나 영애가 어디 있는지 아는데.”
“어디 있는데?”
“와,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카르티아 영애 얘기를 하니까 관심을 보이냐? 섭섭하네.”
“모르면 됐어.”
저 녀석이 알 리가 없지. 미련을 버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에이든이 다급하게 달려와서 그의 팔을 잡았다.
“잠깐만, 진짜 알아. 안다고!”
“어디 있는데?”
“나만 따라와.”
레이너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에이든의 표정을 살폈다. 자꾸 피식피식 웃는 게 수상쩍기는 했지만 거짓말을 꾸며 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그는 과하게 활동적이고 말이 많은 게 단점이기는 했지만 거짓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레이너드는 순순히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내 에이든이 기숙사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걸음을 멈췄다. 무언가 이상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카르티아 영애 만나러.”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
“잔말 말고 따라와. 친구도 못 믿어?”
마법 실력보다 힘이 더 좋은 에이든은 그를 질질 끌고 가다시피 기숙사 안으로 걸어갔다. 레이너드는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에이든이 향하는 곳은 레이너드의 기숙사 방이었다. 아니, 레이너드의 방인 줄 알았다. 그러나 에이든은 떨떠름한 표정의 그를 한 번 돌아본 다음 제 방 앞에 섰다.
“여긴 네 방이잖아.”
“응, 내 방이지.”
“여기에 유리나가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에이든은 그저 실실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열어 봐.”
그래도 레이너드가 문을 열 생각을 하지 않자 직접 그의 손을 끌어와 문고리 위에 얹었다.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말고, 속는 셈 치고 열어 봐.”
대체 또 무슨 꿍꿍인지. 그의 말처럼 레이너드는 속는 셈 치고 문고리를 돌렸다.
“야, 야! 네이선 가만히 있어. 곧 올 거란 말이야.”
“나 심장이 너무 두근두근 대서 가만히 못 있겠어.”
“그럴 땐 코로 숨을 깊숙이 들이쉬면 조금 나아져요.”
“베시, 정말? 알겠어. 흡!”
열린 문틈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하지만 이곳에서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 이질적으로 들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뒤로 꿈에서도 듣고 싶었던 가벼운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유리나의 웃음소리였다.
레이너드는 문틈으로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늘 어지러웠던 에이든의 기숙사 방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늘 옷이나 책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던 방 한가운데에는 못 보던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아기자기한 제국식 디저트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규모는 확연히 작아졌지만, 5년 전 카르티아가 사람들이 그에게 해 주었던 생일 파티와 아주 흡사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유리나가 서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훌쩍 컸지만, 그의 품 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은 그녀가 문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레이.”
그러고는 눈을 접어 웃으며 그를 향해 사뿐히 다가온다.
“생일 축하해. 이 말, 꼭 해 주고 싶었어.”
이 말을 해 주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만 작게 이야기하며 미소 짓는 그 얼굴이 예나 지금이나 참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작고 하얀 손에서 흩뿌려진 종잇조각이 레이너드의 위로 쏟아졌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색종이 틈 사이로 보였다 사라지는 유리나의 미소가 감질나게 느껴졌다.
레이너드가 저도 모르게 유리나를 끌어안으려 팔을 뻗을 때였다. 등 뒤에서 에이든이 팔로 그의 목을 감싸며 그의 등에 매달렸다.
“야, 레이너드! 생일 축하해! 그 쪼그만 녀석이 이렇게나 컸어!”
“레이너드 형, 생일 축하해!”
유리나 옆으로 쪼르르 달려온 네이선이 똥그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생일 축하드려요!”
“형, 축하해!”
그 뒤로 베시와 토마스, 알렉스가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울고 싶은 기분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눈치도 없는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다시 한번 흘러내렸다.
“여전히 울보네.”
소매 끝으로 그의 볼을 닦아 주며 중얼거리는 유리나의 목소리에도 언뜻 물기가 배어 있었다.
* * *
에이든 녀석이 쟤는 생일 파티 해 줄 때마다 항상 운다며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네이선은 레이너드가 좋아하는 컵케이크를 들고 쫄래쫄래 다가와 그에게 내밀었다.
그걸 또 에이든이 대신 받아 잔뜩 얹어진 하얀 크림을 레이너드의 볼에 덕지덕지 묻혔다.
“야, 넌 어째 크림을 묻혀도 미모가 죽질 않아?”
레이너드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에이든의 볼에 똑같이 크림을 묻혀 준 뒤 얼굴을 정리하기 위해 제 방으로 향했다.
“에이든 형! 이거 되게 맛있어!”
“그래, 그래. 많이 먹어. 제국식 디저트라서 오늘이 아니면 먹기 좀 힘들 거야. 그나저나 카르티아 영애는 저 녀석을 언제부터 알고 지내신 거예요?”
“5년 전부터요. 레이가 열두 살 때.”
“와, 그때 저 녀석 성격 장난 아니었는데. 친해지기 힘들지 않았어요?”
다시 돌아온 방은 아까보다도 훨씬 시끌벅적했다. 레이너드는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난 5년간 매일같이 들락날락하던 곳인데 유리나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웃음이 가득한 광경은 창을 타고 들어오는 가을의 황금빛 햇빛보다 더 황금빛 색채를 띠고 있었다.
아끼는 친구들과 그보다도 더 아끼는 그녀가 같이 있는 광경을 보니 마음 어딘가에서 뜨끈하게 열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레이, 거기서 뭐 해? 얼른 와.”
네이선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 주던 유리나가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을 때, 레이너드의 심장은 점점 세차게 뛰었다.
쿵, 쿵, 쿵, 쿵, 쿵.
심장에서 시작된 기분 좋은 울림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에 미약하게 멀미가 일었다.
이상한 일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레이너드는 저를 바라보는 유리나의 웃음을 보며 자신이 울고 싶은 건지 웃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입꼬리는 주체할 수 없이 자꾸 올라갔다.
레이너드는 사랑을 몰랐다. 세상을 가르쳐 줘야 할 부모는 그에게 한 번도 사랑한다는 소리를 해 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가 그 감정이 뭔지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남녀 간의 사랑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제 감정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유리나를 볼 때마다 마음속에 움트는 감정은 있었다.
유리나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다. 그녀의 보드라운 손을 잡고 둘만의 산책을 즐기고 싶다. 그 작고 따뜻한 몸을 품 안 가득히 끌어안고 미소를 짓는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다.
꿀처럼 달콤할 따뜻한 숨을 집어삼키고 제 숨을 나눠 주며 그녀와 몸도 마음도 하나가 되고 싶다.
그녀와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다. 그녀의 모든 것을 갖고 싶다.
그리고 그 또한 그녀의 모든 것이 되고 싶다.
이게 바로 사랑일까. 모르겠다. 차라리 누가 속 시원히 알려 주면 좋겠다.
“레이?”
그러나 제 눈을 바라보는 유리나의 푸른 눈을 보는 순간, 그리고 저 눈이 다른 곳을 향하지 않고 줄곧 제게 향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드는 순간, 레이너드는 깨달았다.
이게 사랑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나는…….
“유리나.”
줄곧 너를 내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있었던 것 같다.
* * *
다 같이 모여 생일 파티를 즐긴 그날 이후,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아카데미 일상을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부쩍 그녀를 잘 따르는 네이선은 묻지 않아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유리나에게 해 주는 아주 좋은 정보원이었다.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낮에는 같이 수업을 듣고 수업이 없는 저녁에는 번화가에 나가 돌아다니며 같이 저녁을 먹었다. 특별할 게 없는 일정이었지만, 유리나는 결코 그 시간이 지루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어릴 적 그와 함께 보냈던 추억이 생각나 좋기만 했다.
‘레이가 달라진 모습을 찾는 것도 꽤 재밌었고.’
유려한 필기체로 필기를 하는 모습, 교수의 말에 집중하며 곧잘 대답하고 역으로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는 모습, 오랜 수업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 잠 하나 담기지 않은 또렷한 눈으로 교수를 바라보는 모습.
그 사소한 변화 하나하나가 마음에 크게 와닿았다.
쉴 새 없이 터지는 하품을 참아 가며 금방이라도 엎드릴 것 같은 자세로 꼬불거리는 글씨를 쓰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게 대견해서 괜히 웃음이 나오다가도, 수업 중간마다 그가 눈을 마주하며 웃을 땐 배 속 어딘가가 간지러운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유리나는 괜히 책을 보는 척하며 그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수도를 떠나기 전 마지막 날에는 이대로 떠나보내기는 아쉽다는 에이든의 성화에 다 같이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그날 유리나는 저녁을 먹는 내내 레이너드와 에이든을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레이너드는 방학 때 제국에 갈 수가 없으니까 아카데미에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하는 신세잖아요? 그래서 몇 년 전에 한 번 레이너드를 졸라서 같이 저희 영지에 간 적이 있거든요. 그때 제 동생 중 하나가 레이너드를 보고 반해서 결혼을 하겠다고 난리를…….”
“에이든, 얘기 그만하고 식사나 해. 유리나, 신경 쓰지 말고 얼른 먹어. 음식 식겠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살갑게 사람들을 챙겼다고 그래? 카르티아 영애, 제가 이 녀석의 장단을 맞춰 주기 위해 이렇게 힘들게 삽니다.”
레이너드를 계속 신경 쓰며 대화를 이끌어 나가려고 노력하는 에이든과 그를 다소 귀찮아하면서도 빠짐없이 대꾸해 주는 레이너드. 언뜻 보면 극과 극인 성격을 지닌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은 퍽 죽이 잘 맞았다.
레이너드가 그 생각을 들으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겠지만 적어도 유리나가 보기엔 그랬다.
에이든은 말이 많고 오지랖이 넓긴 했지만 레이너드의 신경을 긁지 않을 정도로 선을 지켰고, 레이너드 또한 그를 귀찮아하긴 해도 진심으로 그를 밀어내지는 않고 제 곁을 내어 주었다.
오히려 레이너드가 방 안에서만 홀로 지내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이끌어 주고 있었기 때문에 에이든은 레이너드에게 꼭 필요한 친구라고 할 수 있었다.
‘다행이야. 레이에게 좋은 친구가 있어서.’
유리나는 처음 레이너드가 아카데미에서 보냈던 편지를 되짚어 보았다. 편지라기보다는 쪽지에 가까울 정도로 짧고 서툰 답장이었지만 아직도 그 꼬불거리던 글씨가 머릿속에 선명했다.
[사람드리 다들 조아.]
어쩌면 그 좋다는 사람이 에이든이 아니었을까. 지금처럼 그에게 에이든이 있다면 그를 두고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서도 조금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야속한 시곗바늘은 하염없이 흘러가 어느덧 유리나가 왕국을 떠날 날이 다가왔다. 유리나는 수도에서 작별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레이너드는 국경까지 그녀를 마중 나갔던 것처럼 이번에도 국경에서 그녀를 배웅하고 싶다고 했다.
유리나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국경까지 가는 마차 안의 분위기는 올 때와는 많이 달랐다. 레이너드는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말없이 유리나를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고, 간간이 대화를 이어 가려고 노력하던 유리나 또한 국경에 가까워질수록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야.’
오늘만 지나면 이제 진짜로 레이너드와 헤어져 제국으로 떠나게 된다. 레이너드와 재회를 했던 곳에서 머물게 된 유리나는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참을 할 일 없이 방 안을 서성거리던 유리나는 문득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까만 하늘 위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별들을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내미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유리나?”
레이너드였다. 그는 유리나와 마찬가지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레이, 안 자고 뭐 해? 내일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하잖아.”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너야말로 내일 제국으로 떠나야 하는데 왜 여태 안 잤어? 나야 아카데미까지 금방이지만 너는 수도까지 가려면 아직도 일주일이 넘게 걸리잖아.”
“잠이 안 와서……. 그리고 나는 졸리면 마차에서 자면 되는걸. 그런데 넌 아카데미까지 말 타고 가잖아. 얼른…….”
얼른 자야지. 그 단순한 말이 입에서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건 레이너드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그도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아꼈다.
유동 인구가 많은 낮과 달리 밤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없어 마을을 밝히는 불이 거의 없었다. 달빛도 희미한 어두운 밤.
유리나는 그늘이 져 잘 보이지 않는 레이너드의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무심코 상체를 숙였다. 그러자 레이너드가 창틀에 손을 짚고 창문 밖으로 뛰어나올 것처럼 몸을 쑥 내밀었다.
“유리나, 위험해!”
모두가 잠든 고요한 마을에 다급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유리나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멍멍멍, 어디선가 놀란 개가 우렁차게 짖는 소리가 들렸다. 숙소 밑에선 미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며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유리나는 방망이질을 하는 것처럼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깊숙이 들이쉬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겠지만 레이너드에게 태연하게 미소도 지어 보였다.
사람들을 모조리 깨워 버릴 듯한 큰 소리로 위험하다고 소리를 지른 주제에 그는 여전히 몸을 반쯤 내민 채로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안 떨어져. 걱정 마. 내가 애도 아니고.”
농담을 해 보아도 그늘진 그의 얼굴은 심각했다.
“너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애잖아. 안 떨어졌으니 다행이지 자칫하다가 떨어졌으면 어쩔 뻔했어?”
“이 정도로는 안 떨어져. 나보다 3년 일찍 성인이 됐다고 지금 잔소리하는 거야? 그리고 떨어지면 네가 구해 주면 되지. 공중 부양 마법 같은 것도 할 수 있지 않아?”
“할 수는 있지. 그렇지만 내가 마법을 채 쓰기도 전에 네가 땅에 떨어지면 어떡해.”
“그럴 일 없어. 난 널 믿어. 네가 나 지켜 준다고 했잖아.”
그의 말마따나 근거 없는 믿음일 수도 있었다. 30층도 아니고 고작 3층에서 떨어지는 속도는 아마도 레이너드가 상황을 인지하고 마법 스펠을 외우는 것보다 빠를 것이다.
운이 좋아 다치기만 한다면 그가 치료 마법을 써 줄 테지만 운이 나빠서 그대로 즉사한다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지켜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어릴 때 그가 했던 맹세의 말.
―유리나, 넌 내가 지켜 줄게.
마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열세 살 소년의 치기 어린 약속이었는데도 그 약속을 줄곧 마음속에 새겨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를 향한 신뢰는 더욱 두터워졌다.
그는 그녀를 보호해 줄 것이다. 그녀가 그를 만났을 때부터 늘 바랐던 대로.
‘기뻐해야 하나?’
저도 모르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아니, 분명 기뻐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기쁘기보다는 마음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유리나는 이 묵직하고 언짢은 감정의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이기적으로 굴어도 될까.’
5년 전, 눈을 맞으며 했던 고민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어리고 많이 서툴던 그를 이 먼 곳까지 내쫓아 놓고서는 이젠 죽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순수하게 기뻐해도 되는 걸까.
처음에 그를 만나 제안을 할 때만 해도 전혀 들지 않았던 미약한 죄책감이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유리나?”
걱정스런 목소리에 그녀는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길래 소리도 못 들었어?”
“미안해. 잠깐 잠이 와서 멍해졌나 봐. 무슨 얘기 했어?”
“별 구경 가자고 했는데……. 졸리면 얼른 들어가서 자. 많이 늦었어.”
“아냐. 별 구경 가자.”
유리나는 그가 다시 자라고 재촉하기 전에 얼른 방으로 들어가 잠옷 위에 겉옷을 걸쳤다.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한 번 정돈한 뒤 문을 열자 그녀와는 달리 외출복 차림의 레이너드가 보였다.
“잠옷이 아니네?”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미처 옷을 못 갈아입었어. 그럼 가자.”
“어디로 가려고? 생각해 둔 곳 있어?”
“시간이 늦었으니까 멀리는 못 갈 것 같고, 대신 지붕 위로 올라가면 여기보다는 더 잘 보이지 않을까? 어때?”
“좋아. 그러자.”
유리나는 그가 내민 손을 힘 있게 움켜쥐었다. 사실 어디서 보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별을 보러 가자고는 했지만 사실 별 구경보다는 그와 함께 시간을 더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레이너드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예고도 없이 풍경이 변했다. 눈 한 번 깜빡일 새도 없이 지붕 위에 앉게 된 유리나는 갑자기 불어오는 찬바람에 어깨를 떨었다.
“겉옷을 입었는데도 춥네.”
“이럴 줄 알고 담요도 가져왔지.”
레이너드가 그녀의 코앞에 담요를 달랑달랑 흔들어 보이더니 유리나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유리나는 담요로 몸을 둘둘 말며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조금만 잘못 움직였다가는 아래로 떨어지겠는데. 괜찮을까?”
“나 믿는다며.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아까 그녀가 떨어질까 봐 노심초사했던 기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그는 슬금슬금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다부진 그의 팔은 정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놓지 않을 것처럼 든든하게 느껴졌다. 유리나는 몸을 감쌌던 담요 한쪽을 그의 어깨에 둘러 주며 가볍게 하품을 했다.
“졸려?”
“아니.”
“졸리면 자도 돼. 잠들면 내가 방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믿음직스럽긴 하지만 안 잘 거야.”
하지만 다짐하듯 말한 것이 무색하게도 또다시 하품이 나왔다.
“방에 있을 때만 해도 안 졸렸는데…….”
멋쩍게 중얼거리는 유리나를 보며 레이너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고요한 밤이라 그런지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유독 자장가를 듣는 것처럼 감미로웠다.
유리나는 꾸벅꾸벅 조는 아이처럼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유리나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레이너드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걱정 말고 자.”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흐트러졌다. 유리나는 그의 뜨거운 숨결에 흠칫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레이너드가 놀란 그녀의 머리 위로 제 머리를 기댔다.
“내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온몸을 묵직하게 감싸 안는 감각이 익숙하면서도 생소했다. 그의 무게에 심장이 짓눌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가 않았다.
익숙한 품,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감정.
유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레이너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으로 웃으며 유리나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박았다.
또 한 번 기분이 좋은 듯한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 웃음은 해맑은 소년의 것 같기도 했고, 부드러운 청년의 것 같기도 했다.
유리나는 그녀와 이마를 맞대고 웃는 레이너드를 보며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순간,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그가 다시 낯설게 느껴졌다.
남자의 태가 나는 그의 얼굴이, 단단한 그의 품이, 허리를 감싸고 있는 그의 팔이.
오늘 밤 따라 왜 이리도 낯설고 어색한 건지.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서 물러나며 그의 손을 떼어 냈다. 그 바람에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미끄러질 뻔한 걸 레이너드가 재빨리 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괜찮아?”
그의 손이 다독이듯 유리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유리나는 그를 또다시 밀어낼까 하다가 그의 어깨에 코를 묻고 눈을 감았다.
어쩐지 볼이 화끈거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아마 기분 탓일 것이다.
* * *
한동안 레이너드의 품에 안긴 유리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는지 몸을 축 늘어뜨렸다. 쌕쌕거리는 기분 좋은 숨소리가 고요한 새벽에 울려 퍼졌다.
레이너드는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유리나의 고개를 조심스런 손길로 감싸 쥐었다. 유리나가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 보았지만 영 괜찮은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불편함을 느꼈는지 유리나가 잠결에 끙끙거리며 미간을 찌푸렸을 때, 그는 결국 유리나의 어깨와 무릎 뒤쪽을 안고 그녀의 방으로 이동했다.
유리나가 조금 더 편안한 자세를 찾아 몸을 옹송그리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얼굴이 새삼스레 조금 뜨거워졌다.
어쩌면 품 안을 가득 채우는 온기가 따뜻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카르티아 저택을 떠나 왕국에 온 이후로 이렇게 누군가와 가까이 맞닿은 적이 없었으니까.
문득 열세 살 생일 때 일이 기억났다. 언젠가 지친 유리나를 가볍게 안고 가던 기사를 보며 아쉬움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이젠 이렇게나 가볍게 그녀를 품에 안고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뿌듯했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요.
석양을 보며 빌었던 소원대로 이제 그는 원하던 대로 지키고자 하는 이를 지킬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그 어떤 누가 유리나를 위협하더라도 보호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껏 줄곧 이 낯선 타지에서 노력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머리로는 유리나에게 별일이 없을 거라는 것을 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제 목을 조를 것처럼 유리나가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지만, 그녀의 옆에는 그가 유일하게 실력을 인정한 데이브가 있고 카르티아 후작이 붙여 준 실력 있는 호위도 많았다.
이번에 왕국에 올 때 그녀를 따라온 기사들의 기백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레이너드가 없는 동안 그녀를 잘 지켜 줄 것이다.
‘알고는 있는데.’
레이너드는 유리나를 침대에 눕히며 굳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이대로 보내기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냥 아카데미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내일 유리나와 같이 제국으로 돌아가 그녀 옆에 머무른다면 이 불안감이 사라질까.
“유리나.”
그 잠깐 사이에 잠이 깊게 들었는지 그녀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만이 대답처럼 귓가에 닿았다. 규칙적이면서도 나른한 숨소리에 어쩐지 기분이 편안해져 레이너드는 굳은 얼굴을 풀고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예쁘게 볼록 솟은 유리나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대며 유리나의 온기를 느끼자 꾹꾹 눌러두었던 이기심이 다시 싹텄다.
“조금만 기다려.”
막상 말로 꺼내고 나니 목이 메어 왔다. 다시 입을 여는 그의 목소리에는 살짝 울음기가 배어 있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갈게.”
사실은 네가 계속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레이너드는 가장 하고픈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 * *
다음 날, 유리나는 쉽게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원래 잠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정신은 맑은데 이상하게도 몸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어쩌면 얼른 떠나야 한다는 생각보다 떠나기 싫다는 마음이 더 강렬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이불을 뒤집어쓴 유리나는 한참을 침대에서 꾸물거리다가, 이제 정말 일어나야 한다는 베시의 재촉에 겨우 몸을 일으켰다.
베시의 손에 이끌려 오일을 넣은 물에 목욕을 하고, 간단한 준비를 마칠 때까지도 몸에 모래주머니라도 달린 것처럼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정말 떠나는 걸까.’
유리나는 건물 밖으로 나오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싱숭생숭한 마음과 다르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흐리고 비가 왔다면 마음이 덩달아 울적해졌을 테니 차라리 맑은 것이 낫겠다 싶다가도 또 속없이 환한 햇살을 보니 이상하게 심사가 꼬였다.
유리나는 밝은 햇살에 한껏 눈을 찌푸리다가 자신을 부르는 베시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양산을 가져왔어요. 가을이라 볕이 따가우니까 얼른 쓰세요. 그러다가 피부 상해요.”
“아냐, 괜찮아. 금방 마차를 탈 텐데.”
“잠깐이라도 쓰셔야 해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작별 인사가 금방 끝나지 않을 것 같아요.”
음, 확실히 그건 그럴 것 같았다. 유리나는 베시의 마지막 말에 설득당해 순순히 양산을 건네받았다.
화려한 자수가 수놓아진 양산을 펴며 옆으로 시선을 주자 멀찍이 떨어져서 애꿎은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레이너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표정은 멀리서 봐도 표정이 잔뜩 굳어 있는 게 느껴질 정도로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레이, 나 배웅 안 해 줄 거야?”
유리나는 부러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하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고개를 돌린 그가 힘없이 미소를 짓더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인사가 길어질 거라 생각했는지 베시와 데이브는 마차 안을 정돈한다며 마차로 향했다.
유리나 앞에 선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유리나 또한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의 손에 잡힌 제 손을 바라보며 말을 아꼈다.
잘 지내라는 인사를 건네고 얼른 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술이 밀랍으로 봉인이라도 된 것처럼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유리나.”
침묵을 유지하던 레이너드가 숨을 깊게 들이쉰 뒤 겨우 먼저 입을 열었다.
“마나 잘 쓸 수 있어?”
“응. 데이브가 그러는데 체내 마나 양이 적어서 그렇지 마나 친화력은 괜찮은 편이랬어. 그런데 그건 왜?”
“정말 잘 쓸 수 있어?”
“얼마 전에 공간 분리 마법을 찢고 나왔다는 소식 들었잖아. 잘 쓸 수 있다니까.”
농담으로 한 소리였는데 레이너드는 가볍게 받아넘길 수 없었는지, 안 그래도 어두웠던 그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그 얘기는 괜히 꺼냈나.’
유리나는 뒤늦게 후회하며 분위기를 바꿔 보기 위해 손바닥에 마나를 집중했다.
손끝에서 튀어나온 손톱만 한 빛 덩어리가 여전히 그녀의 손가락을 매만지는 레이너드의 손등 위로 톡 떨어졌다.
레이너드가 힘없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응, 잘하네.”
“칭찬 같지가 않은데?”
“칭찬이야.”
“정말?”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인 레이너드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유리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유리나는 손을 펴 제 손바닥 위에 놓인 물건을 확인했다.
그가 건넨 건 한눈에 보기에도 다소 투박해 보이는 목걸이였다.
목걸이 줄은 금속이 아니라 얇은 가죽끈이었고, 새끼손톱만 한 붉은 보석 펜던트는 별다른 장식 없이 원석 그대로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유리나는 티 없이 투명한 붉은 펜던트를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루비야?”
“루비는 아니고 내 마나를 응축해 놓은 거야.”
유리나의 손에서 다시 목걸이를 가져간 레이너드가 직접 유리나의 목의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내가 돌아갈 때까지 이거 꼭 하고 있어.”
“이게 뭔데?”
“마법 펜던트. 호신용으로 준비했어.”
“호신용? 이게?”
유리나는 목에서 달랑거리는 펜던트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관찰했다. 아무리 보아도 그저 평범한 펜던트였다.
“내가 졸업하고 돌아갈 때까지는 네 옆에 있을 수가 없잖아. 그 전에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준비했어.”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손안의 펜던트를 손끝으로 톡 건드리자 투명한 보석에서 밝은 빛이 반짝였다 사라졌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이걸 손바닥으로 쥐고 마법을 쓴다면 딱 한 번, 강한 마법을 쓸 수 있을 거야. 거리만 많이 멀지 않다면 카르티아 저택으로 이동 마법도 쓸 수 있을 거야. 아니면 스승님께 이동을 해. 스승님이라면 널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난 그렇게 고위 마법을 쓸 줄 모르는걸.”
배워도 쓸 수가 없으니 순간 이동 같은 마법은 애초에 스펠을 익혀 두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 없어 하는 유리나와 달리 레이너드는 별 동요 없이 그녀의 손에 펜던트를 쥐여 주었다.
“걱정하지 마. 그냥 이렇게 펜던트를 쥐고 원하는 마법을 떠올리면 돼. 마법에 필요한 마나는 물론이고 마법진까지 이 안에 다 있으니까.”
“그런 게 진짜 가능해?”
“시중에서 볼 수 있는 마법 도구들도 다 같은 원리로 만들어져 있어. 다만 다른 마법 도구들은 이 정도로 강한 마법을 쓸 수 없을 뿐이야.”
펜던트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구경하는 유리나를 향해 그는 다시 한번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알겠지, 유리나?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 잘 때도 목욕을 할 때도 이거 빼지 마.”
“응, 약속할게.”
유리나는 진지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레이너드의 얼굴을 확인하고 덧붙였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는 마. 그런 일 없을 거야. 항상 호위 기사가 따라다니는걸. 조금 먼 곳으로 갈 때면 이번처럼 데이브랑 같이 다닐 텐데.”
그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 건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애초에 유리나는 그를 데려올 때 훗날 그녀가 위험에 처했을 때 구해 줘야 한다는 것을 조건을 붙였다.
게다가 레이너드는 그동안 유리나가 죽음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을 몇 번 지켜보았다. 아마도 그 또한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표정 풀고 좀 웃어. 진짜 괜찮을 거야.”
원작이 시작할 때까지는 안전할 거야.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배우가 없어질 리는 없으니까.
유리나는 본심을 숨기며 그저 웃었다. 과하게 걱정을 하는 레이너드와 달리 태연하게 아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다 그녀가 미래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리나와 리디아가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되는 것도, 그녀가 데프론 후작과 ‘카리온’에게 죽음을 맞이한 것도 모두 성년식을 치르고 난 후의 일.
즉, 그가 걱정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그건 그가 졸업하고 제국을 돌아온 다음에나 일어날 테다.
“아가씨,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해요. 더 늦으면 노숙을 하기에도 애매한 곳에서 멈출 수밖에 없대요.”
등 뒤에서 들리는 베시의 재촉에 유리나는 여전히 목걸이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을 살살 달래며 떼어 냈다.
“가자. 마차까지 데려다줄게.”
레이너드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
긴장을 했는지 차갑게 식은 레이너드의 손끝과 맞닿은 순간, 고요했던 수면에 파장이 이듯 마음이 요동쳐 왔다.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레이너드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처음에는 당황한 듯 몸을 딱딱하게 굳히던 레이너드는 이내 그녀의 키에 맞춰 무릎을 살짝 굽히며 대답하듯 그녀의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유리나는 들었던 뒤꿈치를 다시 땅에 붙이며 그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많이 보고 싶을 거야, 레이.”
“나도…….”
레이너드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무너지듯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를 허리를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닿는 그의 뺨은 분명히 메말라 있었지만 어쩐지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만 같았다.
유리나는 배 속에서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감정을 삼키며 애써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없다고 울지 말고.”
농담으로 한 소리였는데 레이너드가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마자 편지 할게. 너도 앞으로 답장을 보낼 땐 자세히 써서 보내 줘. 네이선이랑 테시 군 이야기도 적어 주고.”
“응.”
한 번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쉬울 거라 생각했던 이별은 외려 처음보다 더욱 힘들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얼마나 외로운지, 그리고 함께 있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유리나는 그의 등을 톡톡 두드려 준 뒤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순순히 그녀를 놓아준 레이너드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유리나의 손을 잡고 그녀가 마차에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마부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마차가 굴러가기 시작했을 때, 유리나는 창문을 열고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잘 있어, 레이.”
순식간에 멀어진 그가 손가락으로 목 근처를 가리켰다. 유리나는 목에서 달랑거리는 목걸이를 손에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안 풀게.”
손안에 들어온 펜던트는 레이너드의 손을 잡은 것처럼 뜨끈거렸다. 유리나는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차 밖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날따라 유독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가을 하늘에선 눈물이 날 정도로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