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오지 않은 편지
유리나가 크론 왕국에 갔다 온 지도 벌써 1년 반이나 지났다. 어느새 레이너드는 열아홉 살이 되었고, 유리나는 몇 달 뒤 다가오는 봄이면 열일곱 살이 된다.
그동안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던 유리나의 두 쌍둥이 오빠가 마저 졸업을 하고 돌아왔다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일은 없었다.
레이너드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안 그래도 많던 과제가 더 많아져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았고, 유리나는 1년에 몇 번 영지에 다녀오거나 또래 귀족들과 종종 모임이나 티타임을 가지며 지냈다.
레이너드가 걱정했던 위험 따위는 전혀 없었다. 유리나의 습격 소식을 들은 뒤 더욱 걱정이 많아진 카르티아 후작 내외의 관심과 더욱 삼엄해진 경비 속에서 평화롭게 지냈다.
예전과 그대로인 것은 또 하나 있었다.
“아가씨.”
자수에 집중하고 있던 유리나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라고 말하자 시종 하나가 조심스럽게 걸어와 테이블 위에 편지를 내려 두었다.
유리나는 편지에 찍힌 인장을 보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화려한 장미 문양과 함께 찍혀 있는 ‘R’이라는 이니셜. 레이너드가 아카데미로 떠날 당시 유리나가 직접 선물해 주었던 인장이었다. 편지를 보낼 때마다 이걸 꼭 쓰라는 말과 함께.
유리나는 시종이 나가는 것을 완벽하게 기다렸다가 밀랍 봉인을 뜯었다.
여전히 단정했지만 어쩐지 다른 때보다 힘이 잔뜩 들어간 것처럼 살짝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나에게.
스승님께 네가 얼마 전에 감기로 엄청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올해 제국은 별로 춥지도 않다는데 대체 뭘 했기에 독한 열 감기에 걸린 거야?
대체 왜 그런 이야기는 편지에 안 썼어? 왜 난 그런 얘기는 늘 네가 아니라 스승님께 들어야 하는 거야? 스승님이 크론 왕국에 오지 않는다면 나는 그런 이야기는 전혀 모르는 거잖아.
작년에 크론 왕국에 왔다가 제국으로 돌아간 다음에 앓아누웠던 것도 다 스승님을 통해서 들었잖아. 맨날 내 안부만 묻지 말고 네 이야기 좀 써서 보내.
그건 그렇고 이제 몸은 좀 괜찮아졌어? 너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추위에 많이 약한 것 같아. 작년 겨울에도 감기에 걸려서 고생했잖아.
겨울엔 옷 좀 많이 껴입고 장작 좀 많이 때. 아니면 스승님께 말해서 보온 마법 좀 걸어 달라고 하든가.
이 편지가 도착할 때는 이미 많이 괜찮아졌겠지만 그래도 감기에 좋은 차를 동봉해서 보내. 에이든에게 물어보니까 크론 왕국 남부 지방 특산품이라더라. 테시 영지에서도 많이 난다면서 에이든이 특별히 자기 영지에서 나는 특상품을 준비해 줬어.
우유를 넣어 마시거나 간식과 같이 먹어도 좋은 차라니까 티타임 가질 때 틈틈이 마셔.
473년 고요의 달 7일
레이너드.
추신. 다음부터 몸이 조금 안 좋을 것 같으면 방에서 푹 쉬어. 요즘 너 너무 바쁜 것 같아. 아카데미에 있는 나보다도 바쁜 게 말이 돼?]
편지에서는 자연스럽게 레이너드의 목소리가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유리나는 툴툴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편지로 혼이 나고 있는데 혼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담백한 평소 말투와 달리 툴툴거리는 말투를 보니 그냥 웃겼다.
‘그렇게 화가 날 일인가.’
지난달 겨울이 막 시작될 무렵, 유리나는 그의 말처럼 열 감기를 호되게 앓았다. 예년보다 날씨가 따뜻해서 방심하고 밖을 돌아다녔던 것이 화근이었다.
날이 조금 포근해서 괜찮을 것 같아 정원에 조금 오래 앉아 있었더니 그날 저녁부터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온 저택이 호들갑을 떨며 비싼 약에 좋은 음식을 대령했지만, 워낙 몸이 약한 탓에 일주일가량을 빌빌거리며 침대에 누워 지냈다.
특별한 일도 아닐뿐더러, 괜히 걱정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아서 당연히 레이너드에게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굳이 구구절절하게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고.’
아팠다는 이야기 말고도 그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들은 많고 많았다. 편지에 쓸 수 있는 양은 적었고, 편지를 자주 보낸다고 해도 한 달에 고작 한 통씩 보낼 뿐인데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아카데미를 방문한 데이브에게 기어코 그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정작 자기는 아팠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으면서.’
유리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편지를 다시 읽었다. 편지를 기다리는 건 한 달인데 편지를 읽는 것은 고작 몇 분이면 끝난다. 그게 아쉬워 늘 편지를 몇 번이나 읽지만 역시 이 허전함은 사라지지가 않았다.
유리나는 편지를 세 번이나 더 읽은 뒤에야 의자에 나른하게 몸을 기대며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아직도 1년이나 남았구나.’
이제 1년만 더 있으면 레이너드가 졸업해서 돌아오고 원작의 이야기도 본격적으로 시작될 터다. 고작 1년. 지금껏 기다렸던 시간에 비하면 짧은 시간인데도, 여전히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유리나는 습관적으로 목에서 달랑거리는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다가 서랍에서 편지지와 깃펜을 꺼냈다.
[레이에게.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렇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데이브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심한 감기는 아니었어.
그리고 대체 누가 아팠다는 이야기를 편지에 써서 보내겠어? 어차피 너한테 편지를 보냈을 땐 이미 말끔히 다 나은 상태였는데.
그래서 편지에는 쓰지 않았던 거야.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빼먹은 건 아니었어.
그리고 이미 지난 이야기라서 이제야 말하기 뭐하지만, 그때 크론 왕국에 다녀와서 아팠던 것도 네가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어.
생각해 봐. 한 달 가까이 마차를 타고 여행을 했는데 아프지 않은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나뿐만 아니라 베시도 몸살이 나서 일주일 정도 일을 쉬었는걸. 데이브도 힘들다고 며칠 잠만 잤고.
그때 크론 왕국에 다녀왔던 사람들 중 멀쩡했던 사람은 기사들밖에 없었어. 보통 사람이라면 고된 여정에 아픈 건 당연한 일이야. 당연한 이야기에 화를 내는 네가 더 이상해.
그리고 이야기를 써서 보내라는 건 내가 하고 싶은 소리야. 너야말로 항상]
막힘없이 편지를 써 내려가던 유리나가 문득 손을 멈췄다.
‘내가 왜 이런 변명을 하고 있지?’
의식의 흐름대로 정신없이 쓴 문장들을 다시 읽어 보니 퍽 내용이 웃겼다. 꼭 잘못을 하다 걸린 사람이 구구절절 눈에 뻔히 보이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만 같았다. 이게 그렇게 지레 찔려 변명을 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결국 그녀는 쓰던 편지를 반으로 접어 치워 버린 뒤 새 편지지를 꺼냈다.
[레이에게.
데이브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심한 감기는 아니었어. 그래도 걱정해 줘서 고마워. 앞으로는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써서 보낼게.
보내 준 차는 잘 마실게. 향을 맡아 보니까 무척 좋더라. 테시 군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대신 전해 줘. 확실히 찻잎을 보니까 질이 좋아 보여. 많이 신경 써 주신 것 같아.
다음에 나도 카르티아 영지에서 나는 특산품을 보내 줘야겠어.
아직 날씨는 춥지만 충분히 따뜻하게 지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 누가 보면 내가 장작도 안 때고 지내는 줄 알겠다. 나보고 장작 좀 많이 때라고 걱정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너밖에 없을 거야.
너는 네 건강이나 생각해. 너는 검술 연습을 해서 몸이 튼튼해졌다고 늘 자랑하지만 과제에 치여서 잠을 제대로 못 자다 보면 체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잖아.
이제 곧 마지막 학년이 되고 논문을 쓰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너무 공부에만 매달리지 말고, 내 걱정도 하지 말고 네 생각만 해.
473년 보름달의 달 8일
유리나가.]
유리나는 편지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봉인을 한 뒤 습관처럼 향수를 듬뿍 뿌렸다. 레이너드가 어릴 적 좋은 향기가 난다며 좋아했던 꽃 비누 향기와 같은 향이었다.
좋은 향기가 솔솔 배어 나오는 편지를 부채처럼 팔랑이던 유리나는 종을 흔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시가 따뜻한 차와 함께 간단한 쿠키를 가져왔다.
“부르셨어요, 아가씨?”
유리나는 차 테이블에 찻잔을 세팅해 주는 베시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차가 필요한 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지금이 유리나가 보통 차를 마시던 시간대도 아니었다. 베시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를 잔에 따라 주며 웃었다.
“날씨가 추우니까요. 아직 감기 기운이 남아 있으시잖아요.”
“괜찮아. 다 나았어.”
태연하게 얘기했지만 유리나는 사실 조금 찔렸다. 얼마 전에 열 감기를 크게 앓은 탓인지 그 후로도 그녀는 자잘하게 감기를 달고 살았다.
사실 오늘 아침에도 머리가 묵직하고 몸도 근육통이 있는 것처럼 뻐근해서 침대에 잠시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베시에게 그런 내색을 하지도 않았는데 대체 어떻게 안 걸까.
유리나의 마음이 표정에서 드러났는지 베시가 그녀의 이마를 짚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제가 아가씨를 모신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걸 모를까요? 겨울철엔 아가씨 얼굴만 봐도 감기 기운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어요.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버거워하시던걸요. 다행히 열은 없으신 것 같네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아냐, 괜찮아. 기침도 없고, 목도 안 아파. 그냥 머리가 살짝 무거운 것뿐이니까 오늘 푹 쉬면 내일은 괜찮아질 거야.”
유리나는 벽난로에 장작을 두어 개 더 집어넣는 베시를 보다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늘 마시던 홍차 대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는 카모마일 차의 향기가 입 안에 진하게 감돌았다.
사소한 것 하나에서도 베시의 배려가 묻어 나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사소한 배려라…….’
그 단어 하나에 왜 레이너드의 얼굴이 떠올랐는지는 모를 노릇이다. 유리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틴케이스에 시선을 주었다. 레이너드가 편지와 함께 보내온 허브차였다.
말은 별것 아닌 것처럼 담백하게 했지만, 에이든 테시가 알아차리고 최고급 찻잎을 준비해 주었다는 건 레이너드가 남들 눈에 보일 정도로 열심히 감기에 좋은 차를 찾아다녔다는 소리였다.
“베시, 다음에는 저 차를 끓여 줘.”
저 차의 맛이 갑자기 몹시 궁금해졌다. 맛이 없다고 하더라도 저거라면 꿋꿋이 마셔 줄 마음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민트색 틴케이스를 들고 관찰하던 베시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크론 왕국산 찻잎이네요. 레이너드 님께서 보내 주신 건가요?”
“응. 지난번에 열 감기에 걸렸던 것을 데이브가 이번에 크론 왕국에 갔다 오면서 레이에게 이야기를 해 줬나 봐. 감기에 좋은 차라고 보내 줬어. 테시 영지 특산품이래.”
베시는 찻잎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 향을 맡았다.
“향도 좋네요. 그런데 무슨 차인지는 모르겠네요. 달콤한 향기가 나는데 처음 맡아 봐요.”
“나도 처음 보는 차야. 크론 왕국에서만 생산되는 건가 봐. 우유를 넣어 마셔도 좋다고 하니까 밀크티로 마셔도 되겠어.”
다시 찻잔으로 손을 가져가는 유리나를 향해 베시가 얼른 말을 꺼냈다.
“아가씨, 잠깐만 기다리세요.”
“응?”
“제가 금방 이 차로 새로 끓여다 드릴게요!”
유리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럴 필요 없어. 그냥 다음에 끓여 주면 돼.”
“아니에요! 이 차가 더 좋을 것 같아요. 우유도 따뜻하게 데워서 가져다 드릴게요.”
정말로 괜찮은데. 하지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번거로울 텐데도 베시가 어째 즐거워 보여서 더 이상 괜찮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베시가 신이 난 표정으로 방을 나가려고 했다.
“아 참, 베시.”
유리나는 처음 그녀를 불렀던 이유를 상기하고는 다시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 편지, 크론 왕국으로 좀 보내 줘.”
“네, 아가씨.”
베시가 환하게 웃으며 편지와 틴케이스를 가지고 방을 나섰다.
* * *
레이너드가 선물해 준 차는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감기에 좋은 차라고 했지만 유리나의 취향 또한 고려했는지, 한 모금 마시자마자 그녀가 좋아하는 달콤한 과일 향이 풍겼다.
혀끝에 달달한 향이 맴돌지만 동시에 씁쓸한 향도 같이 느껴져 달콤한 디저트를 함께 곁들여도 전혀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감기에 좋다고 해서 약재 같은 맛을 생각했는데, 사시사철 가볍게 즐겨도 괜찮을 정도로 부담이 없었다. 맛이 없어도 정성이 갸륵하여 먹어 주려고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금방 주전자를 비울 정도로 유리나는 차가 마음에 들었다.
‘다음에 편지를 보낼 때 조금 더 보내 달라고 해야겠어.’
평소 친분이 있는 영애들에게 선물해 주면 좋을 것 같았다.
괜찮다는 베시를 맞은편에 앉혀 놓고 같이 티타임을 즐기고 난 뒤 유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하녀 하나가 찾아와 후작 부인이 유리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했기 때문이다.
고작 저택 내부에서 이동하는 건데도 베시가 뒤따라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아가씨, 그냥 가시면 어떡하세요?”
베시의 손에는 목도리와 장갑, 거기에 귀마개까지 들려 있었다. 유리나가 고갯짓으로 거절하자 베시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다 감기 걸리셔요.”
“잠깐 다녀올 거니까 괜찮대도 그러네.”
“안 돼요. 지난번에도 잠깐 나가시는 거라 괜찮다고 하셨으면서 감기에 걸리셨잖아요.”
그렇게 말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이미 전적이 있던 터라 유리나는 순순히 베시에게로 다가갔다.
“그럼 목도리만 할게. 밖에 나갈 것도 아닌데 귀마개와 장갑은 너무 심해.”
“네.”
빨간 목도리를 칭칭 감은 유리나는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방에 들어서며 방 안을 훑었다. 한낮인데도 커튼을 친 탓인지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방 안을 밝히는 것은 곳곳에 켜져 있는 촛불 몇 개가 고작이었다.
그녀는 늘 환하게 유지하는 제 방과 다른 분위기에 위화감을 느끼고 잠시 멈칫했다가 응접실을 지나 침실로 향했다.
후작 부인은 침대에 앉아 드레스를 하나, 둘 꺼내 오는 하녀들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유리나가 침대맡으로 다가가자 후작 부인은 그제야 유리나를 향해 시선을 주며 옅게 미소를 주었다.
“왔니?”
“어머니.”
유리나는 하녀가 침대 앞에 놓아 준 의자에 앉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겨울이지만 벽난로를 많이 때서 방 안에는 훈훈한 공기가 맴도는데 후작 부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몸은 좀 어떠세요?”
“어떻긴. 아주 좋아.”
나긋한 목소리로 여상히 대꾸하는 것과 달리 그녀의 안색은 어둠 속에서도 티가 날 정도로 창백했다.
여느 귀족가 부인들이 그러하듯 후작 부인은 원래 체력이 약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의외로 잔병치레는 거의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작년 가을부터 부쩍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가문의 주치의는 물론이고, 데이브까지 나서서 원인을 파악하려고 했지만 몇 달이 지난 지금도 딱히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특별히 앓는 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중독 증상 같은 것도 없었다.
주치의는 ‘원래 체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 나이가 들어 급격하게 몸이 안 좋아지는 경우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그 스스로도 별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후작 부인은 평년보다 유독 더웠던 지난여름에도 별 탈 없이 건강히 지냈으니까.
이상이 있었다면 그때부터 나타났어야 했다.
그냥 원인을 찾다 못해 겨우 둘러대는 핑곗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는 주치의도, 듣는 카르티아 가문의 사람들도 알았다.
온 저택 사람들이 달라붙어 그녀를 성심성의껏 간호했지만, 애초에 원인을 모르니 상태가 영 호전되지가 않았다. 지금으로써는 건강이 더 악화되지 않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나보다는 네 걱정을 더 해야겠구나. 어째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아. 혹시 또 열이 오르는 건 아니니?”
후작 부인이 차가운 손으로 유리나의 뺨과 이마를 더듬거렸다. 후작 부인은 유리나의 얼굴이 뜨겁다고 걱정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유리나가 보기엔 그녀의 뺨이 뜨거운 게 아니라 후작 부인의 손이 차가운 거였다.
유리나는 계속해서 제 얼굴과 목을 매만지는 그녀의 손을 잡고 호호 입김을 불어 주었다.
“제 걱정은 하지 말고 어머니 걱정 먼저 하세요. 방이 이렇게나 따뜻한데 손이 너무 차가워요. 정말 괜찮은 거 맞으세요?”
“그럼. 오늘은 간만에 몸이 가벼워. 기분도 상쾌하단다. 조금 이따가 같이 산책이라도 나가지 않으련?”
“햇살이 저렇게 좋아도 바람이 꽤 차요. 오늘은 방에서 쉬시고 다음에 날이 조금 더 따뜻해지면 나가요. 답답하셔도 곧 봄이 오니까 조금만 더 참으세요.”
“너희는 날 너무 환자 취급해서 탈이라니까.”
“너희요?”
“아까 릭스가 오더니 똑같은 소리를 하더구나.”
병색이 짙은 환자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후작 부인이 청아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유리나는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문질러 주며 후작 부인의 얼굴을 살폈다.
후작 부인은 예나 지금이나 청초한 붓꽃 같은 사람이었다. 네 아이, 그것도 성인인 아들이 셋이나 있는 엄마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곱고 여전히 소녀 같았다.
주름살도 거의 보이지 않고 하얗고 탱탱한 피부는 동년배의 부인들뿐만 아니라 유리나 또래의 소녀들에게도 부러움을 샀다.
해맑고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나 행동, 노래하는 것 같은 말투 또한 십 대 소녀처럼 느껴져서 유리나는 예전부터 그녀가 꼭 엄마가 아니라 친구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하고는 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요 몇 달 사이에 부쩍 수척해지고 눈 밑이 거뭇거뭇해졌다. 살도 많이 빠져 예전에 장만했던 드레스가 지금은 허리 부근이 많이 헐렁해졌다고 했다.
“마님, 이건 어떡할까요?”
“아, 그건 정말 아끼는 드레스인데……. 치수가 커져서 이제 입지는 못하겠고, 버리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옷장에 놔두기엔 왠지 속이 쓰리고.”
다시는 입지 못할 것 같으니까. 혼잣말처럼 덧붙인 후작 부인이 깃털이 달린 부채를 살랑거리며 하녀가 보여 준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최근 사교계에 유행하고 있는 치마가 잔뜩 부푼 드레스가 아니라 몸매의 굴곡이 드러날 수 있도록 허리와 엉덩이가 달라붙은 형식의 드레스였다. 몸에 맞지 않은 것을 입으면 볼품없어 보이기 딱 좋은 디자인이었다.
“네 아버지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사 준 거였는데.”
“정말요? 그렇게 오래된 것 같아 보이지 않는데.”
정말 아끼는 드레스였는지, 고급 천으로 만든 드레스는 관리를 잘해 아직도 새 옷처럼 보였다. 유리나는 드레스의 허리 부근을 보며 두 손으로는 제 허리둘레를 대충 가늠해 보았다.
“어머니 젊을 적 체형이 지금 저랑 비슷하지 않나요?”
“그랬지. 나도 너처럼 예쁠 때가 있었는데.”
“그럼 저 드레스 제가 입을게요.”
“네가?”
후작 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즘 유행하고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데.”
“뭐 어때요? 카르티아 정도 되면 유행은 만들어나가면 되는 거죠.”
유리나는 장난스레 웃으며 하녀에게 손짓했다. 눈치 빠른 하녀 하나가 유리나의 방에 갖다 놓겠다며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후작 부인이 수줍게 웃으며 유리나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역시 우리 딸밖에 없어.”
유리나는 순간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사람처럼 말문이 턱 막혀 버리고 말았다. 자신과 똑같은 밝은 하늘색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는 것을 보자 마음 한구석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던 죄책감이 다시금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당신의 진짜 딸이 아니에요. 당신이 마음을 다해 사랑하던 딸은 7년 전 고열에 시달리다가 죽었어요.
그 말이 생선 가시처럼 목에 걸려 껄끄럽게 느껴졌다.
“응? 왜 그러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예쁜 드레스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니 좋아서…….”
목이 멘 탓에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울먹이는 것처럼 들렸다. 다행히 후작 부인은 유리나가 감격에 겨워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인 것 같았다.
“얘도 참.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니? 아,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저 드레스에 어울리는 보석도 가져가렴. 어디 보자. 내가 저걸 입으면서 즐겨 하던 진주 세트가 있었는데.”
후작 부인이 손뼉을 가볍게 치자 드레스를 정리하던 하녀들이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분주하게 보석 상자들을 챙겨 왔다. 그녀는 상자들을 손수 하나씩 열어 유리나의 목과 귀에 일일이 대어 보았다.
“어쩜, 뭘 해도 예쁘니? 원래 부모 눈엔 제 자식이 제일 예쁘다지만 너는 내 딸이 아니어도 예뻐 보였을 거야. 진주도 어울리는데 이 다이아몬드 귀걸이도 잘 어울리네.”
유리나는 딱딱하게 굳으려는 입 주위 근육을 움직여 겨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고작 웃는 것뿐인데 커다란 바위를 드는 것보다도 더 힘겹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후작 부인은 유리나 옆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에게 상자 세 개를 건넸다.
“다 가져가렴. 나보단 네가 하는 게 더 낫겠어.”
유리나는 해사하게 웃는 그녀를 향해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7년 전, 이 낯선 세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나 지금이나 후작 부인은 그녀에게 한결같이 따뜻한 사랑을 주었다.
처음 이곳에 떨어져 혼란스러워하며 잠도 설치는 그녀를 위해 침대맡에서 밤새 손을 잡아 주며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얼마 전에도 가족과 고용인들의 만류에도 열 감기에 시달리는 그녀의 곁을 지키며 차가운 물수건으로 쉴 새 없이 그녀의 열에 들뜬 얼굴과 몸을 닦아 주었다.
그래서인지 유리나는 처음 이 세계에 와서 많이 혼란스러웠을 때 후작 부인에게 가장 많이 의지했다. 그녀를 어머니라고 인정하기까지는 꽤 오래 걸렸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서 가장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다.
늘 옆에서 따뜻하게 웃어 주고 챙겨 주던 한국의 어머니가 생각났기 때문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외로워하다가 죽었겠지.’
특히 조금이나마 마음을 의지하던 레이너드가 떠난 뒤로 더더욱 그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7년. 처음에는 자상하고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로 느껴졌던 그녀가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되었고, 지금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사랑하는 엄마가 되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카르티아 후작은 엄격하면서도 다정한 아버지가, 그녀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아카데미에 있어서 제대로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세 오빠들은 너무 과한 애정을 줘서 귀찮지만 같이 있으면 편안한 오빠가 되었다.
지난 7년 동안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해 흔들리던 이방인은 비로소 온전히 ‘유리나 카르티아’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금처럼 아이같이 해맑은 그녀의 미소를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콕콕 찔렸다.
내가 당신의 진짜 딸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날 지금처럼 봐 줄까.
간절히 묻고 싶지만 결코 물을 수 없는 질문이다. 지금껏 한 번도, 실수라도 한 번도 그 말을 내뱉은 적이 없었다. 그 말을 하고 난 다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웠던 까닭이다.
유리나는 턱밑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며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아 참, 내 정신 좀 봐.”
후작 부인이 아직까지도 정신없이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정리하는 하녀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손뼉을 쳤다. 하녀들이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방문을 닫고 나갔다.
“심각한 이야기인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둘이서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후작 부인이 하녀들이 두고 간 찻주전자를 들어 직접 유리나의 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곧 있으면 사냥 대회잖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요.”
유리나는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날짜를 헤아려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에서 봄이 넘어가는 새싹의 달에 황실에서는 데인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제너스 산맥에서 사냥 대회를 주최한다. 벌써 두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이 이 사냥 대회의 기원은 제국 건국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마을을 보호하는 결계 마법이 지금만큼 발달하지 않았던 터라 봄이 시작될 무렵, 겨울잠에서 깨어난 동물들이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민가를 습격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영지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은 귀족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다. 이를 위해 온 제국에서 초봄이 되면 기사단을 꾸려 동물들이 인가를 습격하지 않도록 산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기 시작한 것이 사냥 대회의 기원이 되었다.
지금은 결계 마법이 워낙 잘 발달되어 굳이 사냥을 나갈 이유가 없었지만,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의 맥이 끊기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리안더 2세 황제는 처음으로 사냥 대회를 시행했다.
전통을 잇는다는 거창한 명분은 있었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사냥 대회는 제국 초기의 봄 사냥과는 많이 달라졌다. 일단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은 귀족이나 귀족가에 소속된 기사들뿐이었다.
‘귀족들의 야유회인 셈이지.’
게다가 예전에는 짐승에게 물어뜯기거나 뿔에 받혀 죽는 사람이 꽤 있어서 초봄이 되면 온 제국이 긴장감에 휩싸였다고 역사서에 전해지는데 지금은 달랐다.
미리 곰이나 늑대 같은 위험한 짐승은 전문 사냥꾼들이 처리하고, 실제로 귀족들이 참가할 때엔 사슴이나 여우 같은 동물만 뛰어다녔다. 위험할 게 전혀 없는 연례행사로 변한 지 오래다.
사냥 대회의 의미도 영지민을 지킨다기보다는 많은 사냥감을 잡아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냥 대회는 왜요?”
“너도 알다시피 내가 요즘 몸이 좋지 않잖니. 아무래도 사냥 대회까지는 몸이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을 것 같아.”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금방 좋아지실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알잖니. 이런 몸으론 사냥 대회에 나가 봤자 짐만 될 거야.”
유리나는 후작 부인을 더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도 사실 내색은 안 했지만 후작 부인의 건강이 좋아지지 않고 이대로 나빠지기만 하는 건 아닌지 초조했다.
“그래서 말인데, 올해는 나 대신 네가 사냥 대회에 참가하면 어떻겠니?”
갑작스런 제안에 유리나는 멍하니 눈만 깜빡이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네? 하지만 어머니, 저는…….”
“알아. 너는 아직 성인이 아니지. 그렇지만 곧 열일곱이야. 네 아버지의 허락만 있다면 충분히 우리 가문을 대표해서 사냥 대회에 참가할 수 있을 나이지.”
지금껏 유리나는 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식적인 사교 활동은 하지 않았다. 사적인 모임이나 생일 파티 같은 곳에는 참여했지만, 가문의 이름으로 나서는 활동은 전혀 없었다.
특별히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괜히 나섰다가 황태자인 커티스를 만나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원작 시작 전까지는 최대한 사교계에 노출되는 것이 내키지 않기도 했고.
사냥 대회 때도 공식적으로 얼굴을 비치지 않고 제너스 산맥에 별장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사냥 대회 내내 한 것이라고는 별장에 틀어박혀서 하녀들과 놀다가 시종들이 실시간으로 전해 주는 소식을 들은 것밖에 없었다.
‘내가 가도 괜찮을까?’
유리나는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커티스도 커티스지만, 원작 시작 전에 대외적으로 얼굴을 비친다는 것도 내키지가 않았다.
원작에서도 ‘유리나’가 이맘때쯤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지 안다면 좋을 텐데, 원작 시작 전 이야기라 전혀 나와 있지 않았다.
‘뭐, 상관없을까.’
그녀가 레이너드를 데려오면서 자잘한 사건은 바뀌었겠지만, 큰 흐름은 아직까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원작에서도 사냥 대회에 참가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유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대신 갈게요.”
어차피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사냥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귀족 여성들이 사냥 대회에서 하는 일은 사냥을 하러 떠나는 가문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는 것과 다른 가문과의 교류 활동이다.
특별히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은 없지만, 며칠 동안 햇빛 아래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몸이 건강하다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가능하면 실내에서 편히 지내야 하는 후작 부인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매정하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이제 유리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어머니니까.
‘뭐, 별일은 없겠지.’
유리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후작 부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 볼게요.”
“넌 내 딸이니까 잘할 수 있을 거야.”
유리나는 다시금 떠오르는 죄책감을 삼키기 위해 더욱더 환하게 웃어야만 했다.
* * *
사냥 대회 참가 결정은 다소 갑작스럽게 나긴 했지만, 그 후 유리나는 착실히 필요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베시를 비롯한 하녀들과 함께 사냥 대회 내내 입을 드레스와 그에 어울리는 장신구를 골랐고, 후작 부인에게서는 사냥 대회 때 사람들에게 대외적으로 보여야 할 모습을 교육받았다.
카르티아 후작에게서는 카르티아 가문과 교류가 잦은 가문과 앞으로 교류가 필요한 가문의 주요한 내용을 들었다.
준비 시간은 한 달이 넘게 있었는데도 유리나는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는 우습지도 않은 생각을 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중 유리나가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건 바로 사냥 대회 때 후작과 세 오빠들에게 줄 손수건이었다.
‘사냥 대회의 고전적인 이벤트지.’
최고의 사냥감을 잡아 와서 당신을 가장 빛나게 해 주겠다며 레이디 앞에서 기사의 맹세를 하는 영식과 그런 기사의 무사 귀환을 빌며 정성껏 만든 손수건을 건네주는 아가씨.
보통 이런 손수건은 연인이나 약혼자에게 주는 법이지만, 유리나처럼 연인도, 약혼자도 없는 사람은 가족들에게 주고는 했다.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면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기에 그녀는 아예 손수건을 네 개를 만들고 있었다. 자수 무늬도 다르게 만들면 또 싸움이 날까 걱정돼서 가문의 문장으로 통일해서 수놓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이렇게 힘들지는 몰랐지.’
유리나는 뻐근한 눈을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객관적으로 유리나의 자수 실력은 꽤 좋은 편이었다. 빈말이 섞였다고는 하나 자수 선생에게서 제국에서 손꼽힐 실력이라고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다만 가문의 문장이 너무나 어려웠다.
귀족가의 문장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가문의 위세가 대단하다는 선입견이 있어 카르티아 가문의 문장도 좋게 말하면 정교했고 나쁘게 말하면 쓸데없이 복잡했다.
누가 무가의 문장 아니랄까 봐 칼을 품고 있는 독수리라니. 하나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이걸 네 개나 만들려니 죽을 맛이었다.
‘언제 다 만들지?’
벌써 자수를 놓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손수건 하나도 채 완성하지 못했다. 유리나는 자수를 놓던 손수건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관찰하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럴 시간에 한 땀이라도 더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바늘을 집어 드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유리나, 뭐 해?”
“들어가도 돼?”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방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유리나는 재빨리 손수건과 자수 도구를 등 뒤로 숨겼다. 동시에 에드윈과 저스틴 카르티아가 그녀 앞에 바짝 다가왔다.
‘조금만 늦었어도 들킬 뻔했네.’
유리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어쩐 일이야?”
에드윈과 저스틴은 각각 유리나의 둘째, 셋째 오빠였다. 쌍둥이인 덕분에 유리나는 그들을 한데 묶어 ‘작은 오빠들’이라고 불렀다.
“그냥 얼굴 좀 보려고.”
“오늘 우리가 늦게 오는 바람에 저녁도 같이 못 먹었잖아.”
두 남자가 유리나의 맞은편에 앉으며 똑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유리나는 잠시 들여다본 뒤에야 왼쪽에 앉은 사람이 에드윈,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저스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족들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꼭 닮은 두 사람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에드윈의 눈꼬리가 저스틴보다 살짝 더 처졌다.
“어차피 내일 아침이면 볼 텐데 번거롭게 뭐 하러 왔어? 피곤할 텐데 방에 가서 쉬지.”
유리나는 외출복도 갈아입지 못한 두 사람이 걱정돼서 한 소리였는데, 오히려 그 둘은 충격을 받은 것처럼 눈이 동그래졌다. 카르티아 후작에게서 물려받은 청회색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마구 흔들렸다.
“유리나, 오빠가 안…… 반가워?”
“오빠가 귀찮아?”
어휴. 유리나는 무심코 소리 내어 한숨을 쉬려다가 뒤늦게 목 속으로 삼켰다.
‘누가 동생 바보들 아니랄까 봐.’
유리나의 세 오빠, 릭스, 에드윈, 저스틴 카르티아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여동생 바보 오빠들답게 막냇동생인 유리나를 정말 끔찍하게 아꼈다. 말 그대로 ‘끔찍하게’ 아꼈다.
그나마 성격이 차분한 릭스는 조금 덜했는데, 카르티아 가문 사람답지 않게 다혈질적인 에드윈과 저스틴은 유리나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애정이 넘쳤다.
어릴 적부터 유리나만 보면 귀엽다고 품에 안고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는가 하면, 아카데미에서도 일주일마다 편지와 선물을 보내왔다.
‘그땐 정말 난감했는데.’
지금이야 그들이 진짜 오빠들처럼 느껴진다고 하지만, 이곳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이 낯설었을 땐 그들의 애정이 그저 부담스럽게만 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유리나가 열 살이었을 당시, 릭스는 열여섯 살이고, 에드윈과 저스틴은 열세 살이었다.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리게 느껴지는 낯선 남자애들이 과한 애정 행각을 퍼붓는데 유리나로서는 그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오빠인지라 유리나는 양심상 대놓고 싫다는 내색은 못하고 슬슬 그들을 피해 다녔다. 하지만 기어코 쫓아온 에드윈이 입에다가도 뽀뽀를 해 주려고 했을 때, 결국 참지 못하고 진저리를 치며 빠르게 도망갔다.
그때 세 오빠들은 무척이나 충격받은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굉장히 못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유리나 또한 충격에 휩싸여 그들을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건 말도 안 돼!
그 모습을 지켜본 에드윈은 아카데미를 다니느라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해서 유리나가 자신의 얼굴을 잊어버린 게 분명하다며 성난 망아지마냥 날뛰었다. 급기야 아카데미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는 바람에 고용인들이 쩔쩔맸다.
당시 유리나는 정말 객관적인 시선에서 그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결국 유리나가 보다 못해 에드윈의 볼에 뽀뽀를 해 준 뒤에야 그는 만족한 얼굴로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그 후로 세 남자는 아카데미에서 더욱더 열심히 편지와 선물을 보내고, 기회가 될 때마다 자주 저택에 찾아왔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유리나는 정말 세 오빠들이 낯설지 않고, 친오빠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과한 애정은 좀 낯설긴 하지만.’
유리나는 여전히 충격에 빠진 두 남자를 달래 주기 위해 자연스럽게 웃어 보였다.
“오빠들이 귀찮기는. 오빠들 피곤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지.”
그제야 두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전혀 안 피곤해!”
“맞아. 이 정도로 훈련했다고 지치면 기사라고 할 수 없지. 오늘 아침에도 못 봤는데 지금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었어.”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건 그렇고 유리나, 이번 사냥 대회 때 에스코트는 누가 해?”
“에스코트?”
유리나는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준비할 것이 워낙 많아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조금 전 에드윈의 질문을 들은 뒤에야 ‘맞다, 에스코트도 생각해야지.’ 하고 뒤늦게 아차 싶었다.
“아버지가 해 주시지 않을까?”
“아버지가 해 주신다고 하셨어?”
“아니, 그건 아닌데…….”
사냥 대회뿐만 아니라 대외적인 곳에서 에스코트는 보통 연인이나 약혼자가 해 준다. 만약 연인도, 약혼자도 없는 경우에는 가족이 해 주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유리나는 둘 다 없으니 가족이 해 줘야 하는데, 가장 연장자인 아버지가 해 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에드윈이 미간을 모으며 턱을 문질렀다.
“으음, 그렇단 말이지?”
그가 묘한 얼굴로 저스틴을 흘끔거리자, 저스틴 또한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표정으로 에드윈을 마주 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거야?”
“별거 아니야.”
“응.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넘어가기에는 그들의 미소는 더없이 수상해 보였다. 하지만 유리나는 차마 더 이상 그 까닭을 묻지 않았다.
* * *
“아가씨.”
벌써 손수건 두 개를 완성하고 세 번째 손수건을 만들던 유리나는 고개를 들어 문가를 바라보았다. 시종 하나가 문 앞에서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작은 도련님들께서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유리나는 시종을 따라 방을 나섰다. 고용인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복도를 걸어가는데 문득 의아함이 들었다.
‘왜 날 찾아?’
그녀의 오빠들은 할 말이 있으면 직접 오면 왔지 유리나 보고 오라 가라 하지는 않았다. 우리 예쁜 동생 힘들다는 게 이유였다.
유리나가 그 의아함을 내비치자 시종이 멈춰 서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가 보시면 아실 겁니다, 아가씨.”
유리나는 더 추궁하는 대신 얼른 안내하라고 손짓했다. 그를 따라 연무장에 도착하고 난 뒤에야 그녀는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를 불렀다던 에드윈과 저스틴이 기사들의 응원을 받으며 대련을 하고 있던 것이다.
‘날 불렀다며?’
유리나가 말없이 시종을 바라보자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연무장 한구석에 의자를 놓아 주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유리나는 더 토를 달지 않고 그가 마련해 준 의자에 앉았다. 대체 왜 오빠들이 번거롭게 기다리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급한 일도 없으니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시종은 그제야 안도한 얼굴로 허리를 숙이고는 서둘러 저택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금방 끝날 테니까.’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치열한 대련을 이어 갔다. 목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숨을 죽이고 있던 기사들에게서 억눌린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그들과 달리 유리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련을 지켜보았다. 검에 전혀 관심이 없는 그녀는 보기만 해도 배울 점이 많다는 쌍둥이의 대련보다는 폴폴 날리는 연무장의 모래가 더 신경 쓰였다.
게다가 뙤약볕 아래서 십 분이 넘게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죽을 맛이었다. 아직 겨울 끝자락이라 햇빛은 그리 따갑지는 않았지만, 늘 조금이라도 햇빛을 쬐면 안 된다고 베시가 호들갑을 떨며 양산을 씌워 줬더니 그거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보는 눈이 많아 웃는 얼굴로 화끈해진 얼굴을 꾹꾹 누르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베시인가?’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천천히 뒤를 돌아본 유리나는 빙긋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를 보고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빠.”
릭스 카르티아였다. 유리나의 첫째 오빠인 그는 연습을 하러 연무장에 나왔다가 그녀를 발견한 모양인지 연습복 차림이었다.
“여기서 뭐 해?”
“오빠들 대련을 구경 중이었어.”
릭스가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사냥 대회가 가까워지니까 관심이 생겼어?”
유리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고, 오빠들이 날 찾았다고 해서 나왔는데 대련 중이라 기다리고 있었어.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안 끝나네.”
“으음, 그래?”
릭스가 별 감흥이 없는 눈으로 에드윈과 저스틴을 흘끔거렸다. 그는 곧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유리나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놓았다. 유리나는 일부러 뾰로통한 얼굴로 그를 흘겨보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다혈질 기질이 있는 쌍둥이와는 다르게 릭스 카르티아는 누가 봐도 카르티아가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차분했다.
어릴 때부터 쉴 새 없이 유리나에게 붙어 다니며 뽀뽀를 하고 껴안던 쌍둥이와 달리 애정 표현도 담백했다. 그는 지금처럼 유리나가 귀여워 보일 때 살짝 볼을 꼬집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전부였다.
유리나를 생각보다 아끼지 않는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언젠가 그가 방학을 맞아 저택에 돌아왔을 때 유리나가 열병을 크게 앓은 적이 있는데, 그는 우리 동생 죽으면 안 된다고 유리나의 옆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의 나이 열여섯 살 때 일이다.
물론 눈물 콧물을 몽땅 빼내며 대성통곡을 하던 쌍둥이에 비하면 차분했으나 유리나는 그때 그의 애정을 충분히 느꼈다.
‘이렇게 담백한 게 차라리 낫지.’
지금이야 친오빠들처럼 느껴지지만 당시 완전히 유리나가 되지 못했던 그녀는 차분한 릭스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마음을 연 것도 릭스였다.
“오빠, 다리 아프지는 않아? 의자 가져오라고 할까?”
“괜찮아. 끝나면 바로 연습하러 갈 거야. 그건 그렇고 사냥 대회 준비는 잘하고 있어?”
“잘되고 말게 뭐가 있어. 내가 할 게 뭐가 있다고.”
“그런가.”
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성숙한 얼굴과 다르게 소년처럼 청량한 웃음이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 유리나도 덩달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다 릭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문득 물었다.
“아 참, 그렇지. 에스코트는 누가 하기로 했어?”
“아버지가 해 주는 거 아니야?”
특별히 카르티아 후작이 해 준다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유리나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를 보며 그녀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니야?”
“아버지가 말씀 안 해 주셨어?”
“뭘?”
“네 에스코트는 우리 중에서 한 명이 하라고 하셨는데. 아버지는 어머니를 보려 일찍 별장으로 돌아가실지도 모르신다고,”
“아, 그래?”
별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나를 보던 릭스가 허리를 조금 더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고는 눈으로 웃었다.
“유리나, 오빠가 에스코트를 해 줄까?”
“좋아.”
“좋기는 한데 너무 대답을 빨리 하는 거 아니야?”
누구든지 상관이 없는 거였냐며 장난스럽게 투덜거리는 그를 향해 유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정말 오빠가 좋아.”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셋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면 유리나는 망설임 없이 릭스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승부가 나지 않은 쌍둥이를 보며 어깨를 떨었다.
‘작은 오빠들은 감당할 자신이 없어.’
그들의 성격으로 보건대, 에스코트를 맡겨 두면 하라는 사냥은 안 하고 유리나를 지킨답시고 곁에 머무르며 졸졸 따라다닐 것 같았다. 과한 걱정인가 싶지만 두 사람이면 진짜로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리나가 느낀 걸 릭스도 느꼈는지 그가 동조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쟤들은 널 가만히 안 놔둘 것 같기는 해,”
“그렇지?”
“응. 아, 에드윈이 이겼다.”
그 말에 재빨리 고개를 돌린 유리나는 실망감이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잖아.”
여전히 두 사람의 치열한 대련은 계속되고 있었다. 릭스는 속았다고 뾰로통하게 투덜거리는 유리나의 뺨을 살짝 꼬집으며 차분히 속삭였다.
“잠깐만 기다려 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드윈의 목검이 저스틴의 목을 노리고 뻗어져 나갔다. 저스틴이 뒤늦게 두 손으로 검을 수직으로 들어 막으려고 했지만 그보다는 에드윈이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검이 저스틴의 목덜미에 닿았다. 진검이었다면 아마도 그대로 목을 베어 냈을 것이다.
쥐 죽은 것처럼 조용하던 연무장에 열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유리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릭스를 물끄러미 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한순간이지만 저스틴의 움직임이 둔해졌어. 그 틈을 놓친다면 카르티아가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
그게 보여? 설명을 들었는데도 유리나가 여전히 얼떨떨해하는 사이, 릭스가 에드윈과 저스틴을 향해 손을 흔들며 휘파람을 불었다. 검을 정리하던 두 사람은 릭스에게 고개를 돌렸다가 그 옆에 앉아 있는 유리나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특히 에드윈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저스틴을 가리켰다. ‘내가 이겼어!’라고 자랑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저스틴이 제법 거친 손길로 에드윈의 목검을 밀었다.
‘못 말려, 정말.’
두 남자는 시종에게 얼른 목검을 건네고 유리나를 향해 뛰어왔다. 그 바람에 메마른 연무장에 모래가 폴폴 휘날리자 유리나는 인상을 쓰며 손부채를 저었다.
“먼지 날리잖아.”
“미안, 급하게 오느라.”
먼저 유리나 앞에 다가온 저스틴이 미안한 얼굴로 유리나의 뺨에 묻은 미세한 모래 알갱이를 털어 주었다. 에드윈이 그의 어깨를 제 어깨로 툭 밀치며 유리나의 앞에 섰다.
“유리나, 봤어?”
“응.”
“내가 이겼어.”
“응, 그것도 봤어.”
“나 잘했지?”
“응.”
건성건성 대답하는 유리나의 모습도 마냥 좋은지 에드윈의 얼굴엔 여전히 싱글벙글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반면 저스틴은 그런 에드윈을 흘기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왜 저래?’
단순히 대련에서 져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과한 반응이었다. 실제로도 두 사람은 늘 대련을 할 때마다 승패에 상관없이 웃으며 좋은 대련이었다고 서로를 칭찬하기 바빴다.
상반되는 둘의 모습이 의아하긴 했지만 유리나가 더 관심을 갖지 않고 연무장 한구석에 있던 시종을 향해 손짓했다. 부름을 받은 시종이 준비해 두었던 수건과 시원한 음료를 가져와 에드윈과 저스틴에게 건네주었다.
두 사람은 거친 손길로 범벅이 된 얼굴과 목덜미를 닦아 냈다.
“그런데 왜 부른 거야?”
“유리나, 네 첫 에스코트는 내가 해 줄게.”
다짜고짜 저스틴이 말하자 에드윈이 그의 어깨를 다시 한번 자신의 어깨로 쭉 밀었다.
“저스틴, 약속이 다르잖아. 분명 대련에서 내가 이겼는데. 유리나, 저 녀석 말은 듣지 마. 내가 해 줄게.”
유리나는 아직도 얼굴이 빨갛게 익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불같은 성격답지 않게 눈꼬리가 살짝 처진 순한 눈망울로, 그것도 두 사람이 동시에 간절하게 내려다보는 건 퍽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뭐야, 이건?’
그러다가 그들의 대화 속에 담긴 의미를 뒤늦게 깨닫고는 물었다.
“설마 에스코트 신청을 내기로 대련을 한 거야?”
왜 그렇게 결투라도 하는 것처럼 죽을 듯이 달려드나 했더니 그런 속내가 숨어 있었던 걸까. 설마,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유리나는 이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두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그건 릭스도 동의하는 바였는지 그는 당연하다는 투로 쌍둥이 대신 대답했다.
“왜 아니겠어. 저 녀석들이라면 그럴 법도 하지.”
이미 유리나의 에스코트 승낙을 받아 낸 그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미소가 드리워 있었다. 그는 조용히 유리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에드윈과 저스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미안하지만 유리나의 에스코트는 내가 하기로 했어.”
“뭐? 언제?”
“잠깐만, 형! 그런 게 어디 있어!”
에드윈과 저스틴의 청회색 눈동자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릭스에게로 향했다.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두 사람의 얼굴은 비슷한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이건 예의가 아니지! 우리는 유리나에게 에스코트 신청하려고 대련까지 했는데!”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저스틴. 넌 대련에서 졌잖아. 억울하면 내가 억울하지 왜 네가 억울해해? 너야말로 지금 예의 없게 약속을 무시하고 에스코트 신청을 하고 있잖아. 그리고 형, 저스틴 말처럼 이건 도리가 아니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릭스가 팔짱을 꼈다.
“너희가 대련을 한 건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억울하면 조금이라도 빨리 신청을 하지 그랬어?”
그는 굳어 가는 쌍둥이의 얼굴을 지켜보다가 마지못해 덧붙였다.
“뭐, 정 억울하다면 나랑 다신 정정당당하게 대련을 하든지. 그 정도까지는 양보해 줄 수 있는데.”
언뜻 들으면 대련으로 정정당당히 승부를 보자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속뜻을 아는 에드윈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욱 일그러졌고, 유리나는 작게 혀를 찼다.
‘못됐다니까.’
레이너드가 어릴 적부터 마법 수재라는 말을 들어 왔다면, 걸음마를 시작하고 장난감 목검을 쥐었을 때부터 될성부른 인재 소리를 꾸준히 들어 왔던 것이 릭스 카르티아였다.
그는 5년 전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돌아오자마자 열여덟의 나이로 황실 주최 검술 대회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면서 제국에서 손꼽히는 기사로 소문이 났다.
에드윈과 저스틴 또한 무예로 유명한 카르티아 가문 사람답게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지만 릭스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고 언젠가 릭스가 유리나에게 자랑스럽게 말한 적이 있었다.
부드럽지만 어딘가 단호한 릭스의 표정을 보던 쌍둥이는 목표를 바꿨는지 유리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리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봐도 어쩔 수 없어. 릭스 오빠가 가장 먼저 왔는걸. 그렇게 하고 싶었으면 조금 더 일찍 왔어야지.”
유리나가 보란 듯이 릭스가 내민 손 위에 손을 얹자 에드윈과 저스틴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괜히 젖은 머리만 헝클었다.
“사냥 대회 앞두고 괜히 기운만 뺐네. 씻기나 해야지.”
“나도.”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릭스를 밉지 않게 흘기며 저택으로 향했다. 유리나는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다가 작게 웃었다.
* * *
“아가씨, 그건 대체 무슨 손수건이에요?”
한참 자수에 집중하고 있던 유리나는 베시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베시가 그녀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보며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주인님이랑 도련님들 주실 손수건은 이미 완성하셨잖아요.”
“아, 이거?”
유리나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베시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었다.
“비밀.”
“네?”
“비밀이야, 베시.”
그녀는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유리나가 대답을 해 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는지 베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피곤하실 테니 차 좀 가져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유리나는 베시가 나가기 전에 미소를 지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다음에야 유리나는 다시 손수건을 살펴보았다.
베시의 말처럼 카르티아의 네 남자에게 줄 손수건은 지난주에 이미 완성했다. 이건 아카데미에 있는 레이너드에게 보낼 손수건이었다.
하지만 사냥 대회에 참가하지도 않는 그에게 손수건을 준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어서 베시에게도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유리나는 아이보리색 손수건 귀퉁이에 수놓은 노란색 꽃을 보며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꽃을 보니까 재작년 가을에 아카데미에서 레이너드와 함께 구경했던 꽃이 가득 핀 들판이 생각났다.
―네가 그리울 때마다 종종 이곳에 왔어. 이곳에 오면 늘 너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을 그에게 조금이라도 추억을 주고 싶어서 그때 보았던 노란색 꽃을 수놓아 주고 싶었다. 마침 그가 그때 만들어 주었던 꽃 화관이 남아 있으니 도안을 만드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유리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노란 꽃 화관을 보며 다시 바늘을 움직였다. 레이너드의 마법 덕분에 꽃 화관은 오늘 아침에 만든 거처럼 싱싱했다. 모양뿐만 아니라 향기 또한 갓 딴 꽃처럼 싱그러웠다.
‘얼른 완성해야지.’
사냥 대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냥 대회가 시작되면 바빠서 자수를 놓을 시간이 없을 테니 그 전까지 완성해서 아카데미에 보내고 싶었다. 편지에 꽃 향수를 뿌려서 같이 보내면 완벽할 것 같았다.
‘잠깐만.’
편지를 생각하던 유리나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허공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가씨, 차를 갖고 왔어요. 아가씨가 놓고 계신 자수를 보니까 꽃차가 좋을 것 같아서 꽃차로 준비해 봤어요. 향기가 좋지 않나요?”
“…….”
“아가씨?”
베시가 차를 따라 줄 때까지도 멍하니 있던 유리나는 그제야 겨우 입을 열었다.
“베시, 그러고 보니 오늘이 며칠이지?”
“오늘요? 음…….”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베시는 손가락을 하나, 둘 접어 가며 날짜를 세어 보며 착실히 답을 주었다.
“새싹의 달 4일이네요.”
새싹의 달은 일 년 중 세 번째 달로, 보통 사계절 중 봄의 시작인 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베시는 제가 말하고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벌써 새싹의 달이라니, 시간 참 빨라요. 사냥 대회 준비에 정신이 없다 보니 시간 가는지도 몰랐어요. 곧 제너스 산맥으로 출발하겠네요. 조금 더 서둘러서 준비를 해야겠어요. 아직 가져갈 드레스를 다 고르지 못했잖아요. 아가씨?”
유리나는 그녀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재빨리 책을 보거나 편지를 쓰는 데 주로 사용하는 책상으로 향했다.
‘이상해.’
그녀는 책상에 딸린 서랍장을 열어 그 안에 잔뜩 담긴 편지 중 가장 위에 있는 것을 꺼내 펼쳐 보았다.
[유리나에게.
얼마 전에 스승님께 네가 감기로 엄청 고생하고 있다고 들었어. 올해 제국은 별로 춥지도 않았다는데 대체 뭘 했길래 독한 열 감기에 걸린 거야?]
가장 최근에 레이너드에게서 온 편지였다. 유리나는 내용은 죄다 건너뛰고 가장 마지막 부근을 확인했다.
[473년 고요의 달 19일
레이너드.]
고요의 달은 열두 달 중 가장 마지막 달이다. 정확히 이 편지를 언제 받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크론 왕국에서 제국까지 편지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빠르면 열흘, 늦으면 보름 정도 걸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1월 해당하는 눈의 달 초에 받았을 것이다.
유리나는 ‘고요의 달 19일’ 부근을 구멍이 낼 기세로 노려보았다.
‘지금이 새싹의 달인데?’
그걸 인지하는 순간, 지금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깨달음이 찾아왔다.
“뭐야?”
6년 동안 늘 빠지지 않고 매달 오던 레이너드의 편지가 벌써 두 달째 오고 있지 않았다.
* * *
“그러고 보니 테슨 가문에서 후원하고 있는 학생이 이번에 황립 아카데미에서 수석을 했다지요?”
“맞아요, 저도 들었어요. 아버지께서 테슨 백작님께서 참 좋은 안목을 가지셨다고 칭찬을 하시더라고요.”
“그분께선 졸업하면 바로 황실 기사단에 입단하시는 건가요?”
달콤한 디저트가 놓인 테이블 위로 소녀들의 이야기가 도란도란 오고 갔다.
카르티아 가문과 정치적 노선을 같이하는 가문의 영애들만 모인 만큼 티타임 분위기는 초지일관 화기애애하기만 했다. 견제나 눈치 싸움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이야기의 주제가 각 가문이 후원하고 있는 인재로 넘어갔다. 훈훈한 분위기답게 다들 서로의 가문의 피후원자의 능력과 그런 인재를 발굴해 낸 안목을 칭찬했다.
유리나는 이제는 거의 습관적으로 지을 수 있는 귀족적인 미소를 지으며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사실 그녀는 다른 상념에 사로잡혀 주위의 이야기가 제대로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후원자 이야기에 생각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
비단 지금뿐만이 아니었다. 며칠 전 레이너드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 그녀는 툭하면 그의 생각을 했다.
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 봐도 집중력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질 때면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그의 얼굴이 두둥실 떠올랐다.
“어머, 카르티아 영애.”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유리나는 얼른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언제 걱정을 했냐는 듯이 그녀의 얼굴에는 반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네, 바론 영애.”
“못 보던 장갑인데 어느 가게의 디자인인가요? 참 예뻐요.”
바론 영애의 갈색 눈동자가 초조함에 꼼지락거리고 있던 유리나의 손으로 향했다. 의례적으로 한 칭찬은 아니었는지, 바론 영애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말을 시작으로 한 테이블에 같이 앉은 소녀들의 시선이 초조함에 꼼지락거리고 있던 유리나의 손으로 향했다.
“그러게요. 특이한 디자인인데 정말 예쁘네요.”
“왜 저는 지금껏 보지 못했을까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어느 가게에서 주문한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 이거요?”
유리나는 새삼 자신이 끼고 있는 장갑을 살펴보았다. 영애들이 모두 처음 봤다고 할 법했다.
‘특이하긴 하지.’
이건 지난가을, 레이너드가 유리나가 보내 준 생일 선물에 대한 답례로 보내 준 선물이었다. 최근 크론 왕국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장갑이라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유리나도 처음 이 장갑을 보았을 때 색다른 디자인에 놀랐다. 요즘 제국 사교계에서 유행하는 긴 장갑과 달리 이건 손목만 살짝 덮는 짧은 길이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특이한 건 천의 재질이었다.
불투명한 천에 화려한 자수를 수놓은 제국식 장갑과 달리 이건 피부가 비치는 재질의 천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별다른 장식은 없지만 중간, 중간 들어가 있는 레이스 장식이 돋보였다.
마법을 이용해서 조금 더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서 크론 왕국 이외의 국가로 유행이 퍼져 나가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거라고 레이너드는 편지 말미에 스쳐 지나가듯이 덧붙였다.
“선물 받은 거예요. 크론 왕국에서 최근 유행하고 있는 디자인이라고 해요.”
유리나가 테이블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개 올려놓자 소녀들이 상체를 숙이며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자신이 끼고 온 장갑을 번갈아 가며 비교해 보기도 했다.
“크론 왕국이요? 어쩐지 처음 보는 스타일이라고 했어요.”
“크론 왕국의 장갑을 어떻게 구하셨나요?”
마법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크론 왕국에 앞서 있는 제국 사람들은 당연히 문화나 복식 또한 제국의 것이 왕국보다 뛰어나다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다. 유행의 선도 주자는 당연히 제국이 되어야 하고 크론 왕국을 비롯한 타국은 그런 제국을 뒤따라온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크론 왕국의 유행을 눈여겨보는 이는 제국에 별로 없었다. 하지만 크론 왕국의 디자인이라고 예쁘고 특이한 게 왜 없겠는가.
거기다 그걸 착용한 사람이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사람도 아니고 유리나 카르티아였다. 그녀들이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유리나가 뜬금없이 크론 왕국의 장갑을 착용하고 온 것은 조금 의외였나 보다.
눈을 깜빡이며 유리나의 대답을 기다리던 영애 중 한 명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유리나에게 향해 있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갑자기 주목된 이목에 영애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웅얼거렸다.
“카르티아 가문에서 후원하고 있는 분이 크론 왕립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라고 들었어요. 혹시 그분께서 보내 주신 건가요?”
“네, 맞아요. 종종 크론 왕국의 물건을 선물로 보내 줘요.”
“어쩜, 안목이 좋기도 하시지.”
유리나는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했다. 레이너드가 선물해 준 장갑은 분명 예뻤지만 그가 안목이 좋다고? 글쎄다.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저택에서 지내면서 얼마나 패션에 무지한지 몸소 겪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이 장갑 또한 발이 넓은 에이든이나 사교계에 빠삭한 네이선이 잔소리하며 같이 골라 줬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유리나의 미소를 긍정적으로 해석했는지 영애들이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레이너드로 화제를 옮겨 갔다.
“안 그래도 소문 들었어요. 요즘 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유명하다면서요?”
“제 사촌 오빠가 크론 왕립 아카데미에서 유학 중이라서 실제로 봤는데 엄청 대단하대요. 마법을 숨 쉬는 것보다 쉽게 쓸 수 있어서 놀랐다던데 정말인가요?”
형식적인 칭찬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감탄사가 여기저기에서 새어 나왔다. 유리나는 특별히 첨언하지 않고 계속해서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들의 말처럼 요 근래 레이너드는 제국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아카데미에서 보여 준 실력이 워낙 뛰어난 것도 있지만, 그가 ‘베아투스’라는 이유도 컸다.
유리나가 여신의 사랑을 받은 붉은 눈을 타고난 ‘베아투스’의 존재에 관한 고서를 찾은 이후로 데이브가 동료 마법사와 함께 연구를 계속 이어 갔다. 그러다가 ‘베아투스’가 존재했다는 가설을 뒷받침해 줄 추가적인 고서를 찾아 ‘베아투스’에 대해 발표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1년 반 전 그가 크론 왕국에서 보인 활약 때문이었다.
“저는 다른 것보다 크론 왕실을 도와 반역 세력을 잡았다는 것이 더 멋진 것 같아요. 실력도 있고, 용기도 있다는 뜻 아닌가요?”
1년 반 전, 크론 왕국에서 유리나를 습격한 사람이 크론 왕실에 대항하는 반역 세력이라는 것을 안 레이너드는 그 세력을 추적하는 데 자원했다. 그러고는 잔당 하나 남기지 않고 소탕하는 데 성공했다.
크론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그의 공을 인정함으로써 그의 소문이 제국에까지 퍼졌다.
눈앞에 있는 어린 영애들이야, 그가 멋지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유리나는 그 소문을 처음 듣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할지 몰랐지.’
착실히 공부를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도 없이 그런 짓을 벌이다니.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 일에 참여했는지 이해는 하지만 가만히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답지 않게 편지로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었다.
어찌 됐든 그 이후로 제국인들은 한 번도 본 적도 없으면서 여신의 사랑을 받았다던 레이너드에게 막연한 호감을 품고 그가 얼른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소문에는 황태자 전하께서도 눈여겨보고 계신다던데…….”
레이너드 이야기에 또다시 기분이 심란해졌던 유리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태자라니. 달갑지 않은 주제였다.
아마도 황태자를 입에 담은 영애는 레이너드를 황태자도 눈독 들일 만큼 훌륭한 인재라고 유리나를 띄워 줄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유리나는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도록 입꼬리를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커티스 제노시안.’
지난 일들을 생각하니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그가 원작의 남주인공이라는 사실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지만 지금은 달랐다. 유리나는 이제는 그에게서 두려움 대신 짜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7년 전, 황궁에서 우연히 마주한 뒤로 유리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사사로이 돌아다닐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황태자였다. 그나마 그가 얼굴을 내비칠 만한 공식적인 자리에는 유리나가 일부러 가지 않았다.
그렇게 원작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를 잘만 피할 수 있을 줄만 알았다.
몇 년 전, 커티스가 데이브에게 유리나가 자신의 성년식에 와 줬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표시하기 전까지는.
‘웃겨, 정말.’
유리나가 기억하기로는 그쯤에 ‘베아투스’에 대한 이야기를 발표했다. 그와 맞물려 레이너드가 아카데미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는 소문까지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황태자인 커티스의 입장에서 레이너드는 먹음직한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그는 크론 왕국에 있어서 직접적인 접근이 힘들었다. 아마도 그래서 유리나를 택한 것일 테다. 그녀를 잡으면 카르티아 후작가와 레이너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으니까.
데이브와 그의 이야기를 들은 카르티아 후작 또한 그 사실을 깨닫고는 심각하게 걱정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서로 열렬히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해도 견디기 힘든 곳이 황궁이었다. 카르티아 후작이 권력욕에 눈이 먼 자라면 냉큼 유리나를 커티스와 이어 주려고 했겠지만, 그는 권력보다는 딸의 행복이 더 중요한 아버지였다.
그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유리나에게 힘겹게 말을 건넸다.
―황태자 전하께서 네게 관심이 있으신 것 같구나. 네 생각은 어떠니, 유리나?
그는 커티스가 유리나에게 이성으로 관심이 있는 것처럼 꾸며 말했지만 유리나는 그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단박에 알아챘다. 그리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저는 황태자비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요, 아버지.
카르티아 후작은 유리나의 대답에 그저 알았다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며칠 뒤 유리나는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간다는 핑계로 남부에 있는 영지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레이너드가 크론 왕국에서 큰 공을 세운 뒤로 유리나를 향한 커티스의 관심은 노골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데이브나 후작을 통해 유리나와 만나고 싶다는 관심을 표현한 것이다.
카르티아 후작이나 유리나의 세 오빠들은 커티스가 유리나를 이용하여 레이너드를 얻으려는 속셈을 빠르게 눈치채고 철저하게 유리나를 보호했다.
‘웃기지도 않지.’
레이너드에 이어 커티스의 이야기까지 나오니 평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유리나는 미소를 겨우 유지하며 오른쪽 귀에 착용한 귀걸이를 가볍게 매만졌다.
남들이 보기엔 평범한 귀걸이였지만, 사실 이건 데이브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만든 마법 도구였다. 이걸 가볍게 매만지며 마나를 불어넣으면 베시가 갖고 있는 목걸이가 웅웅 울리며 신호를 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를 위해 마련된 대기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베시가 양해를 구하고 다가와 유리나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마차를 준비할까요?”
유리나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베시가 뒷걸음으로 물러나며 티타임이 한창이던 정원을 빠져나갔다. 유리나는 의아한 눈길을 보내는 영애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택에 일이 생겨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네요. 괜찮다면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양해를 구하는 말투였지만 실제로는 통보에 가까웠다. 거짓말이 얼마나 능청스러웠는지 아무도 유리나의 말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큰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그들이 말하는 ‘큰일’이란 아마도 몸이 좋지 않은 카르티아 후작 부인과 관련된 일을 뜻할 것이다. 유리나는 그들의 염려에 감사하다는 말을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즐거웠어요. 장갑에 관심을 보이시는 것 같으니 크론 왕국으로 한번 연락을 보내 보도록 할게요.”
유리나는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저택 하녀의 안내를 받아 정원을 나섰다.
* * *
“저택에만 있을 때는 몰랐는데 레이너드 님께서는 이제 정말 유명 인사가 되셨네요.”
마차를 타기가 무섭게 베시가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네! 하녀들이 온통 저보고 레이너드 님 이야기만 하더라니까요!”
그녀는 마치 제가 칭찬을 받은 것처럼 흥분한 기색으로 대기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둘씩 풀어놓았다.
주로 레이너드의 실력과 외모에 관한 이야기였다. 유리나는 창문 밖을 바라보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처음부터 데이브가 눈독을 들일 만한 인재였으니까. 아마 졸업하고 돌아오면 더 난리가 날 거야.”
“그럴 것 같아요. 그런데 외모도 잘생기셨다고 덧붙였는데 그건 다들 안 믿더라니까요!”
베시는 어지간히 분한지 붉어진 볼로 씩씩거렸다. 처음에 잘생겼다고 했을 때만 해도 관심을 보이던 하녀들이 베시가 ‘내가 지금껏 본 남자들 중 가장 잘생겼어!’라고 하자마자 코웃음을 쳤다는 것이다.
“귀족 태생처럼 귀티가 난다고 해도 못 믿겠대요.”
아무리 잘생겨도 귀족 태생이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잘생길 수 있냐는 것이다. 아마도 베시가 늘 보는 유리나의 오빠들이 워낙에 외모가 뛰어나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카르티아 영랑들이 있는데 어떻게 지금껏 본 남자들 중 가장 잘생길 수 있냐는 거겠지.
‘억울하긴 억울하겠네.’
레이너드의 얼굴을 아는 유리나는 베시의 분노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유리나는 진정하라는 듯이 베시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너무 화내지 마. 나중에 레이를 실제로 보면 아무도 그런 소리를 하지 않을 테니까.”
“그때는 제가 비웃어 줄 거예요. ‘내가 뭐랬어? 가장 잘 생겼댔지!’라고요!”
“응. 코를 납작하게 해 줘.”
유리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는 베시를 보며 진심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레이너드와 커티스 생각에 마음이 심란했는데 베시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유리나의 웃음소리를 들은 베시가 뒤늦게 멋쩍게 웃으며 흥분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두 뺨을 꾹꾹 눌렀다. 조금 전 들떠서 이야기하던 것과 달리 그녀는 다소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어릴 땐 마냥 동생 같은 분이었는데 이젠 진짜로 귀하신 분이 된 것 같아요. 돌아오시면 전처럼 대하지는 못하겠죠?”
“레이는 별 신경 안 쓸걸? 오히려 베시가 거리를 두며 높은 사람 대하는 듯이 하면 불편해할 거야. 그냥 전에 그랬던 것처럼 동생 대하듯이 대해.”
“그래도…….”
“크론 왕국에 갔을 때도 레이는 베시를 스스럼없이 대했잖아. 여전히 그럴 거야. 베시가 레이를 동생처럼 대하는 것처럼 레이도 아마 베시를 누나처럼 생각하고 있을걸?”
‘아마’라고 하긴 했지만 유리나가 보기에 레이너드는 베시를 진짜로 누나 대하듯 자연스럽게 대했다. 베시가 레이의 눈동자에 편견을 가지지 않고 진심으로 대해 주었으니, 그에 보답하듯 그녀에게 마음을 연 것이다.
“그럴까요?”
유리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되묻는 그녀에게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응. 베시는 레이가 저택에 처음 왔을 때부터 봤잖아.”
“그건 그렇죠.”
“그러고 보니 처음에 목욕도 시켜 주려고 하지 않았어?”
“아, 맞아요. 저 그때 있었어요. 레이너드 님께서 손도 못 대게 하셔서 결국 그냥 나가긴 했지만…….”
유리나는 새삼 그때를 떠올리며 코로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 타고 있는 마차는 그때 고아원에서 레이너드를 데려올 때 타고 갔던 바로 그 마차였다. 냄새가 날 리가 없는데도 고약한 썩은 치즈 냄새가 풍기는 것만 같았다.
“그때 냄새도 엄청 났는데.”
“으음…….”
베시가 뒷말을 흐리며 웃었다. 부정할 수는 없지만 차마 긍정할 수도 없는 모양이다. 유리나는 그녀를 향해 괜히 코를 틀어막는 시늉을 한번 해 보였다가 다시 마차 밖을 내다보았다.
베시와 이야기를 하며 괜찮아졌던 기분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추락한 것처럼 갑자기 우울해졌다. 레이너드의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배 속이 묵직하니 불안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유리나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챘는지 베시가 높였던 목소리를 한층 낮추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그냥 조금 피곤한가 봐. 요즘 사냥 대회 준비를 하느라 바빴잖아.”
유리나는 태연하게 대꾸했지만 그녀를 오랫동안 바로 옆에서 보아 온 베시는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주인에게 섣불리 질문을 건네지 않는 것이 하녀의 미덕이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여자 형제가 없는 유리나는 베시를 친언니처럼 여겼고, 그녀가 다소 과하게 참견하는 것을 불쾌해하지 않았다.
베시는 그저 유리나가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에 구태여 묻지 않았을 뿐이다. 대신 혼잣말처럼, 그러나 유리나에게는 충분히 들릴 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레이너드 님이 보고 싶네요.”
유리나는 몸을 움츠리며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 * *
유리나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집사인 로버트에게 편지가 온 게 없냐고 물어봤다. 요즘 들어 매일같이 하는 일이었다.
늘 부정적인 답만 돌아왔는데 오늘은 어쩐 일로 로버트가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있습니다. 마침 시종을 시켜서 아가씨 방에 갖다 놓은 참입니다.”
유리나는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서둘러 방으로 향했다. 저택에서도 품위 있게 천천히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평소보다 계단을 빠르게 오른 탓에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유리나는 멈추지 않고 방까지 걸어갔다.
로버트가 말한 편지는 방에 딸린 응접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서둘러 편지를 집어 든 유리나는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실망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클로이 데오노라]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서 온 편지였다. 클로이는 지난가을부터 영지에서 지내고 있던 터라 얼굴을 본 지 오래됐다. 분명 반가운 편지였는데도 반가운 마음보다는 아쉬움이 컸다.
유리나는 그걸 뒤늦게 깨닫고 클로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스스로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자괴감과 비슷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텄다. 유리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데오노라 가문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뜯었다.
클로이의 시원시원한 필체를 보자마자 복잡했던 생각이 싹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역시 친구가 좋긴 좋은가 봐.’
유리나는 느긋함을 되찾고 소파에 앉아 차근히 편지를 읽었다. 그간의 안부를 묻는 인사말을 시작으로,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해서 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곧 있을 사냥 대회에 조심히 다녀오라는 격려의 말도 있었다.
마지막에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쾌차를 빈다는 말까지 들어간 완벽한 편지였다.
유리나는 당장 편지지를 꺼냈다. 답장을 작성하는 동안에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봉인한 편지지에 향수를 뿌리고 편지를 시종에게 전달하고 난 뒤에는 다시 우울한 감정이 온몸을 덮쳐 왔다.
외면하려고 노력했지만 자꾸만 시선이 레이너드의 편지를 넣어 둔 서랍장으로 향했다.
‘조급해하지 마.’
분명 데이브 또한 어떻게 졸업 학년을 지냈는지 기억이 없다고 그랬다. 더구나 새 학기 아니던가. 안 그래도 바쁜데 이제 막 졸업 학년을 시작했으니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다. 그러니 편지가 좀 안 오더라도 이해를 해 줘야 했다.
그러다 유리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는 자기 자신이 퍽 한심하게 느껴졌다. 편지가 좀 오지 않은 게 어디가 어때서. 그냥 차분하게 기다리면 되는데 편지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스스로가 보기에도 우스웠다.
‘알아. 아는데…….’
마음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늘 자신은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꾸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다.
유리나는 한숨을 한 번 쉬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곧 있을 사냥 대회 준비를 해야 하는데 별로 의욕이 나지 않았다.
* * *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났다. 내일이면 오겠지, 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기다렸던 편지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그동안 유리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레이너드의 마지막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혹시나 편지에 바쁘다는 말이나, 당분간 편지를 보내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이 있지는 않을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없던 글씨가 몇 번 본다고 갑자기 생겨날 리가 없었다. 여전히 편지에는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고 유리나는 매번 실망을 채 감추지 못한 얼굴로 편지를 접어야 했다.
“진짜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유리나는 집게로 홍차에 각설탕을 집어넣으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딱히 질문을 건넨 게 아니라 혼잣말 비슷한 거였는데 생각보다 소리가 컸다. 뒤늦게 아차 싶어서 대답을 하려는 베시를 향해 서둘러 덧붙였다.
“그냥 혼잣말이었어.”
하지만 베시는 애초에 유리나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각설탕을 추가로 넣는 유리나의 손에 집중하고 있었다. 평소 유리나는 달달한 차가 싫다며 홍차에 우유를 넣어도 설탕은 넣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베시는 뒤늦게 유리나가 한 말을 깨닫고 “네?” 하고 반문했다.
“혼잣말이었다고.”
“어떤 말이요?”
“못 들었으면 됐어.”
유리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찻잔의 각설탕을 녹이기 위해 열심히 스푼을 저었다. 베시는 집중하느라, 혹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콧잔등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유리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탄성을 내뱉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레이너드 님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네요.”
갑작스러운 이름에 깜짝 놀라 유리나는 스푼을 떨어트리다시피 내려놓았다. 평소라면 나지 않았을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태연한 척 찻잔을 들었다.
“그러게. 안 온 지 한참 됐네.”
마치 지금 깨달은 것처럼 이야기하려고 노력했지만 베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왜 그런 표정으로 보는 거야?”
유리나는 계속해서 미소를 짓고 있는 베시에게 저도 모르게 뾰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베시는 원래 아가씨를 볼 때마다 이렇게 웃는다며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유리나는 여전히 웃고 있는 그녀를 보다가 아직도 설탕 알갱이가 남아 있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달달한 찻물이 혀끝에 닿자마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달아.”
“각설탕을 네 개나 넣으셨으니까요. 다시 따라 드릴게요.”
베시는 여분의 찻잔에 새로 차를 따르며 유리나의 눈치를 살폈다.
“레이너드 님께서 많이 바쁘신가 봐요.”
유리나는 뜨끈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용기를 얻었는지 베시가 유리나의 맞은편에 앉으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원래 이맘때가 가장 바쁠 때라고 했잖아요. 레이너드 님이 이번에 졸업 학년이 되셨으니 다른 때보다 더 바쁘셔서 편지를 하실 시간이 없으실 거예요. 조금 여유가 생기면 바로 편지를 보내실 거예요. 진짜로 무슨 일이 있었다면 아카데미 측에서 저택으로 연락을 보냈겠죠.”
“하지만…….”
“아니면 데이브 님께 여쭤보시는 건 어떠세요? 최근에 레이너드 님을 만나고 오셨으니 뭔가 아시는 게 있지 않을까요?”
“데이브는 얼마 전에 마법 재료를 구하러 간다고 제국 남부로 갔어. 그리고 레이를 만난 것도 몇 달 전 일이라 알 것 같지 않아. 그리고…….”
중간에 말을 하다 만 그녀를 보며 베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유리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어 보였다.
데이브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데이브에게 물어봤을 때 그가 레이너드의 상황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속이 상할 것 같았다.
‘나는 모르는데 데이브가 아는 상황이라니.’
레이너드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싶으면서도 데이브가 모르길 바라는 모순된 욕심이 마음속에서 싹텄다.
유리나는 테이블에 엎드리며 한숨을 쉬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베시의 말이 맞았다. 유리나 또한 지난 몇 주 동안 레이너드가 바빠서 시간이 없을 거라고 애써 합리화를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리나는 이 세상에서 레이너드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만할 만큼 그를 잘 알았다. 레이너드라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잠깐 짬을 내서 유리나에게 바빠서 편지가 늦어질 거라는 한 줄 쪽지에 가까운 편지라도 보냈을 것이다.
실제로도 유리나가 크론 왕국을 방문했을 때 모든 것을 다 제쳐 놓고 국경으로 마중을 나오지 않았던가.
레이너드의 성격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만약 유리나 또한 레이너드의 입장에 있었다면, 밤잠을 줄여서라도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니 오지 않는 편지에 더욱 마음이 쓰였다.
차라리 바빠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자꾸 생각이 안 좋은 쪽으로만 흘러갔다. 아카데미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지만 무슨 일이 있는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차를 채 비우지 못하고 찻잔을 내려놓는 유리나를 보며 베시가 은근히 속삭였다.
“그렇게 걱정되시면 편지를 다시 한번 보내시는 게 어떠세요? 지난번에도 편지를 쓰셨다가 보내지 않으셨잖아요.”
“하지만 편지를 보내자마자 답장이 오면 무슨 창피야.”
“곧 있으면 사냥 대회가 있잖아요. 어차피 사냥 대회에 참가하면 당분간은 편지를 못 부치실 텐데 미리 부치면 어떤가요? 레이너드 님께 주시려고 손수건도 만드셨잖아요. 답장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손수건도 못 부치고 떠날 수도 있어요.”
“음…….”
유리나는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민은 금방 끝났다. 베시의 말이 꽤 그럴싸했기 때문이다.
곧 있으면 사냥 대회 때문에 제너스 산맥에 있는 별장으로 떠날 것이다. 겸사겸사 후작 부인의 요양도 할 겸 한 달가량은 그곳에 있을 것 같았다.
‘답장은 못 받았지만 한동안 바쁠 것 같아서 미리 편지를 보낸다고 하면 되겠지.’
좋은 핑계다.
유리나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베시에게 손짓했다.
“찻잔은 치워 주고 편지지와 펜 좀 갖다줘.”
“네, 아가씨.”
심각하게 고민하던 유리나를 보며 내내 미소를 짓고 있던 베시가 한층 더 밝아진 표정으로 테이블을 치웠다. 깨끗해진 테이블에 앉아 유리나는 차분히 펜을 들었다.
[레이에게.
레이, 잘 지내고 있어? 답장이 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 네가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편지를 보내지 않은 건 처음이잖아.
며칠 전에 네가 지난번에 선물해 준 장갑을 끼고 티 파티에 갔는데 영애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더라. 아마 네 덕분에 조만간 사교계에 크론 왕국풍 장갑이 유행하지 않을까 싶어. 앞으로 크론 왕국 쪽 유행을 눈여겨봐야겠어.
너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너도 알다시피 너는 이쪽으로는 그다지 안목이 없잖아? 노란색이 섞인 빨간색이랑 파란색이 섞인 빨간색도 구분 못 했으니까 말이야. 지금은 나아졌다는 말은 하지 마. 내가 보기엔 하나도 안 나아졌으니까.
아 참, 이 이야기를 하려고 펜을 든 게 아닌데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새어 버렸네.
한동안 수도에 없을 것 같아서 답장이 오기 전에 먼저 편지를 쓰게 됐어. 곧 있을 사냥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며칠 뒤에 별장으로 떠날 것 같거든.
봄마다 제국에서 황실이 주최하여 사냥 대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는 전에 저택에서 수업 들을 때 배운 적 있었지? 기억하고 있어? 이때 영애들이 기사들의 무사 귀환을 빌며 손수건을 준다는 전통이 있다는 것도 배웠지?
그동안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사냥 대회 근처에 가지도 못했는데 이번에는 어머니 대신 내가 참가하게 되었어. 그 덕분에 오빠들에게 줄 손수건을 만드느라 요 몇 주를 정신없이 보냈다니까.
오빠들 줄 손수건을 만드는 김에 네 손수건도 만들었어. 편지를 보낼 때 같이 동봉할게.
아마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땐 나는 사냥터에서 오라버니들을 응원하고 있을 거야. 오빠들 사냥 솜씨는 제국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좋으니까 분명 이번에도 좋은 성과를 얻을 거라고 믿어. 다들 날 최고의 레이디로 만들어 주겠다고 벼르고 있거든. 신나고 기대돼.
네 답장은 사냥 대회를 갔다 온 다음에나 받을 수 있겠다. 갔다 와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줄게.
473년 새싹의 달 15일
유리나가.
추신. 동봉한 손수건은 엄청 열심히 만들었으니까 돌아올 때까지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간직해야 해. 졸업하고 돌아오면 갖고 있는지 꼭 확인할 거야. 만약 잃어버린다면 저택에 한 발자국도 들어오지 못하게 할 거니까 각오해.]
유리나는 마치 연습장에 몇 번 써 본 사람처럼 막힘없이 편지를 쓴 뒤 다시 한번 편지 내용을 살폈다.
‘좋아.’
특별히 거슬리는 내용도 없었고, 동글동글한 글씨 또한 오늘따라 유독 가지런해 보였다.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밀랍으로 편지를 봉인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베시가 건네주는 향수를 받아 편지 뒷면에 듬뿍 뿌렸다.
유리나는 순식간에 방 안에 차오르는 진한 향기에 손부채를 저었다. 잠깐 동안 팔랑거리던 편지를 베시에게 넘긴 뒤 서랍장으로 다가갔다. 그 속에서 곱게 접어 두었던 손수건을 꺼내 자수를 살피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뒤따라온 베시가 “아가씨, 그렇게 얼굴을 찡그리시면 주름 생겨요.”라고 웃음 섞인 잔소리를 했지만 표정을 풀 수가 없었다.
‘마음에 안 들어.’
아이보리색 손수건 한쪽 구석에 수놓아진 노란 꽃과 그 밑에 갈색 실로 새겨진 레이너드의 이름. 편지에 언급한 것처럼 엄청 열심히 만든 손수건이었다. 어쩌면 가족들에게 줄 손수건보다 시간이 더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손수건이 마냥 밉게만 보였다.
꽃잎은 왜 이렇게 찌그러져 보이고, 레이너드의 이름을 수놓은 자수는 왜 또 그가 처음 글씨를 배웠을 때처럼 삐뚤빼뚤해 보이는 건지.
그렇다고 유리나의 자수 솜씨가 안 좋은 건 아니었다. 그녀는 칭찬에 인색한 자수 선생에게서 ‘제가 가르친 학생 중 카르티아 영애께서 가장 솜씨가 좋아요’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 그리고 유리나 또한 객관적으로 제 자수 실력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레이너드에게 줄 손수건만은 만족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에게나 세 오빠들에게 줄 손수건은 그럭저럭 만족했는데 이상한 일이다.
자수를 한참 노려보다시피 바라보던 유리나가 눈살을 찌푸리자 베시가 재빨리 손뼉을 짝짝 쳤다.
“와아, 아가씨! 손수건이 엄청 예뻐요. 역시 아가씨의 자수 실력은 제국 최고예요.”
“그래? 나는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에이,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니신가요? 분명 레이너드 님께서도 좋아하실 거예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한 베시가 괜히 아무도 없는 주위를 살피더니 소리를 죽여 소곤거렸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세 도련님들께 드릴 손수건보다 이게 훨씬 예쁜 것 같아요.”
베시가 이렇게까지 유리나의 기분을 띄워 주기 위해 노력하는데 더 이상 아니라고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유리나는 그녀에게 한번 빙긋 웃어 주고는 손수건을 건넸다.
“지난번에 사 둔 선물이랑 같이 보내 줘. 손수건이 빠지지 않도록 잘 일러 두고.”
“네!”
행여나 유리나의 마음이 바뀔까 걱정했는지 베시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방을 나섰다. 유리나는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저 레이너드가 이 자수를 보고 비웃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 * *
사냥 대회에 실제로 참가하는 것은 세 오빠들이라고는 하지만 유리나 또한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그들에게 줄 손수건을 만드는 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사교 활동이 시작되기 전, 1년 중 가장 먼저 귀족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인 사냥 대회에서는 많은 이야기와 정보가 오고 간다.
지금껏 제게 우호적인 또래 영애들과 티 파티를 가진 것이 전부인 유리나는 사냥 대회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얕보이지 않고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덧 사냥 대회 날짜가 훌쩍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도 카르티아 저택은 며칠 뒤 떠날 채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가씨, 여기는 저희에게 맡겨 두시고 올라가서 좀 쉬세요. 어제도 제대로 못 주무셨잖아요.”
베시는 마차에 짐을 싣는 것을 감독하던 유리나의 팔을 조심스럽게 끌었다.
“괜찮겠어?”
“그럼요. 저 못 믿으세요?”
“당연히 믿지. 베시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자, 그렇다면 얼른 들어가세요.”
유리나는 베시의 재촉에 못 이긴 척 방으로 향했다. 복도에서 인사를 하는 고용인들에게 가볍게 웃으며 마주 인사를 해 준 그녀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서랍장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었다.
서랍장 속에 넣은 레이너드의 편지가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습관적으로 편지를 집어 들던 유리나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서랍장을 닫고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벽에 걸려 있던 노란색 꽃 화관이 눈에 들어왔다. 크론 왕국에서 레이너드가 만들어 주었던 바로 그 화관이다. 그가 걸어 준 보존 마법이 얼마나 강력한지, 오늘 아침에 꽃을 꺾어 만든 것처럼 꽃이 싱싱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꽃다발에 코를 묻고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는데 지금은 보기도 싫었다.
꽃 화관뿐만이 아니었다. 방 안 어디를 보아도 레이너드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아카데미를 가자마자 그가 용돈을 모아 처음으로 샀다던 인형부터 시작하여 머리 장식, 부채, 모자 등등, 레이너드가 편지를 보낼 때마다 같이 보냈던 선물들이 시선을 주는 곳마다 있었다.
유리나는 방에서 그가 보낸 선물들을 보고 있을 때마다 그의 부재를 잊고 웃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기분 좋게 웃기는커녕 자꾸만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대체 왜…….’
그동안에도 레이너드에게 편지는 오지 않았다. 그에게 보낸 편지도 아직 국경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이대로 그의 편지를 받지 못하고 떠난다면 적어도 한 달 뒤에나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냥 대회 때문에 별장에 가 있는 동안 그의 편지가 온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동안 그가 편지를 보낼 거란 장담은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처럼 오지 않을 수도 모르지.
유리나는 속에서 일렁이는 이름 모를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바쁘다는 건 알아.’
유리나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왜 이렇게 초조하고 짜증이 나는 건지 스스로도 알 길이 없어 더욱 화가 났다.
그깟 연락, 조금 안 오면 어때서. 7년이 넘도록 매달 주고받았으니 이제는 그만 주고받아도 그만인 편지잖아. 그게 대체 뭐라고 하루 종일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건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
왜, 왜, 왜, 대체 왜. 고작 이게 뭐라고.
연락이 없는 레이너드에게도 짜증이 나지만 그보다는 이렇게 초조해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제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유리나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진정하려고 애를 쓰는데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나중에.”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 앞에서 표정 관리를 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노크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방금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답을 하려 했던 유리나는 문밖에서 들려오는 말에 눈을 번쩍 떴다.
“레이너드 님의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처음 듣는 시종의 목소리였다. 소년이라고 하기엔 낮고, 청년이라고 하기엔 부드러운 목소리. 그러나 유리나는 이상하다 여길 새도 없이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 하나에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레이라고?’
그녀는 문을 열자마자 제 키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큰 시종이 건네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편지 뒷면에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레이너드’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입꼬리가 씰룩였다.
‘드디어 왔어.’
더 기다리지 못하고 레이너드에게 편지를 보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편지가 오면 창피하거나 민망할 줄 알았다. 하지만 민망하거나 창피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반갑기만 했다.
“가져다줘서 고마워.”
편지를 소중히 품에 안고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려던 유리나는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저택에 이렇게 키가 큰 시종이 있었던가.’
주로 하녀들과 생활하다 보니 시종들과 마주칠 일은 별로 없었지만 이렇게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들고 봐야 하는 시종은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의문이 들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그가 입고 있는 옷이 눈에 들어왔다. 별다른 무늬 없이 깔끔하고 단정한 셔츠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장식 없는 바지였지만 고급 천으로 만든 옷이었다.
시종이 입기에 꽤나 값이 나가 보인다는 것은 둘째 치고 카르티아가의 시종이 일하는 동안 입는 복식이 아니었다. 거기에 얼굴을 반 이상 가리고 있는 모자.
“누구야?”
좋지 않은 예감에 유리나는 뒤로 물러나며 저도 모르게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상하게도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유리나가 이 상황에 묘한 기시감을 느끼기도 전에 시종 행세를 하던 남자가 문을 닫으려던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는 소리를 지르려는 그녀의 입에 검지를 갖다 대며 다른 손으로 재빨리 모자를 벗었다.
“유리나, 나야.”
귓가에 스치는 낯선 목소리에 유리나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돌아왔어.”
아까까지만 해도 소식이 없다고 원망을 했던 레이너드가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를 원망했던 마음이 햇빛에 녹아 버린 초콜릿처럼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대체 어떻게…….”
유리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말고 충동적으로 그의 목덜미를 와락 끌어안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져 묻기부터 해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반가운 마음이 더 커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굳어 버린 것처럼 눈만 깜빡이던 레이너드가 이내 그녀의 허리를 마주 안았다.
“나 정말 돌아왔어.”
유리나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레이너드는 제 목을 끌어안고 가쁜 숨만 쌕쌕거리는 유리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결 좋은 머리카락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아카데미를 떠나 이곳까지 오는 동안 울렁거렸던 배 속이 오히려 유리나를 보니까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돌아왔어.’
꿈속에서만 보던 유리나가 진짜로 제 눈앞에, 제 품속에 있었다. 꾹꾹 눌러 왔던 욕망이 몸속 어딘가에서 새싹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이젠 정말 그녀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있을 것이다. 유리나의 마음이 제 마음과 같아질 수 있도록 늘 옆에 붙어 있어야지. 만약 뭣 모르는 것들이 유리나에게 접근한다면…….
‘그때는 어떡하면 좋을까.’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그냥 유리나와 함께 있는 시간을 만끽하자. 레이너드는 작게 웃으며 그녀의 정수리 위에 제 뺨을 눌렀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렇게 서로와 맞닿아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는 무언가가 이미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