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사냥 대회
재회의 여운이 조금씩 가실 때쯤, 유리나는 고개를 퍼뜩 들며 아직도 자신을 안고 토닥여 주던 레이너드의 어깨를 밀었다.
“……유리나?”
레이너드가 당황한 얼굴을 했지만 유리나는 그에게 대답을 해 줄 정신이 없었다. 뒤늦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레이가 왜 여기 있지?’
레이너드는 올해로 7학년이 된다. 크론 왕립 아카데미의 정규 과정은 7년. 아무리 레이너드가 빨리 졸업한다고 해도 그가 제국으로 돌아오는 건 내년 봄이었다. 실제로 원작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아카데미의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은 졸업을 하기 전까지 크론 왕국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그가 이곳에 있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유리나는 제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오는 레이너드를 끌고 방을 나섰다. 코앞까지 다가온 사냥 대회 준비 때문에 복도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누가 오기 전에 재빨리 레이너드를 공부방으로 쓰던 작은 응접실에 집어넣었다. 그가 아카데미로 떠난 후로 한 번도 응접실로 쓴 적이 없는 이 방은 가끔 청소할 때 빼고는 아무도 오지 않아 비밀 이야기를 하기 딱 좋은 장소였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유리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뒤에야 겨우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게 의아하여 고개를 돌렸던 그녀는 멍한 얼굴로 공부방 안을 둘러보는 레이너드를 발견했다.
“레이?”
“여기는 그대로네.”
레이너드가 감회에 젖은 듯한 얼굴로 응접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안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의 눈시울은 그새 붉어져 있었다.
그가 손바닥으로 두 눈을 꾹꾹 누르며 희미하게 웃었다.
“난 다 바뀌었을 줄 알았어.”
유리나는 그제야 레이너드의 시선을 좇아 공부방을 쭉 훑었다.
“응, 그러게.”
그의 말처럼 모든 것이 7년 전 그대로였다.
모두 다 유리나가 그대로 두라고 고용인들에게 일러 둔 덕분이었다. 유리나의 말을 들은 고용인들은 레이너드가 떠난 뒤 이 공부방을 주기적으로 청소하기만 했을 뿐,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다.
그가 저녁마다 앉아서 열심히 숙제와 글씨 연습을 하던 아이용 책상, 공부에 지칠 때마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간식을 먹거나 게임을 하던 테이블과 소파, 유리나가 심심할 때마다 연주하던 피아노.
심지어 레이너드가 쓰던 책이나 너덜너덜한 연습장, 필기구마저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공부방 풍경만 본다면 시간이 그때 그대로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바뀐 것은 오로지 훌쩍 커 버린 두 사람뿐이었다. 그 사실을 새삼 되새기자 유리나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뭔가 기분이 되게 이상해.”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유리나도 그의 말에 충분히 공감했다. 진짜로 기분이 이상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곳에 레이너드와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동시에 가슴이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냄비처럼 서서히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6년 동안 그녀 혼자 머물던 추억에 장소에 둘이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너무나 뭉클해서.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리 벽난로에 불을 지펴도 시리게만 느껴졌던 공부방의 공기가 고작 레이너드 하나에 훈훈하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아서.
“설마 저 연습장 내가 쓰던 거야?”
뒤늦게 책상 위에 있는 책과 연습장들을 발견한 레이너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연습장을 들어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겼다.
보존 마법을 걸어 두지 않은 연습장에서는 그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오래된 책 특유의 냄새가 났다. 그는 그 냄새에도 불쾌하단 내색 하나 없이 안을 꼼꼼히 살폈다.
최근에 그가 보낸 편지에 쓰인 정갈한 글씨와는 확연히 다른 꼬부랑 글씨가 그가 펼치는 페이지마다 빼곡히 적혀 있었다. 레이너드는 그걸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 글씨 되게 못 썼네.”
유리나는 그가 펼친 페이지를 흘끔거리며 따라 웃었다.
“글씨만 못 쓴 게 아니잖아. 맞춤법 다 틀렸어.”
말근 날씨, 책을 익따, 입사귀, 꼿봉오리 등등. 맞은 단어를 찾는 게 있나 싶을 정도로 맞춤법이 엉망이었다.
“보지 마.”
레이너드가 멋쩍었는지 괜히 중얼거리며 연습장을 든 팔을 위로 쭉 들어 올렸다. 머리 하나는 차이 나는 키 차이 때문에 유리나는 더 이상 그의 글씨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구태여 까치발을 해서 보려고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 알고 있는걸.’
아무래도 레이너드는 저녁마다 글씨를 교정해 주고 맞춤법을 고쳐 주던 사람이 유리나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 했다. 심지어 그녀는 그가 매달 보내온 맞춤법이 엉망인 편지도 보관하고 있는데.
“이거 네가 쓴 거야?”
계속해서 연습장을 살펴보던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향해 연습장 한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그곳에는 꼬부랑글씨로 쓰인 ‘졸녀’라는 낙서와 그 옆에 동글동글하고 단정한 글씨로 쓰인 ‘바보’라는 낙서가 있었다.
“응, 내가 쓴 거야.”
“대체 언제 쓴 거야? 한 번도 못 봤는데.”
“아카데미에서 사람들이 온 날. 너랑 데이브가 아카데미 입학 설명을 듣는 동안 나는 여기서 혼자 있었잖아. 그때 구경하다가.”
“그래도 바보가 뭐야.”
“몇 번이나 가르쳐 줬는데도 틀렸으면 바보 맞지.”
“나보고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아카데미에서 내가 얼마나 교수님들의 관심을 받았는데.”
툴툴거리는 것 같았지만 그는 딱히 기분이 상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유리나가 낙서한 것이 더 있냐면서 아까보다 빠른 속도로 연습장을 착착 넘겨 댔다.
그러나 있을 리가 없었다. 유리나가 그의 연습장에 낙서를 한 것은 ‘바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뒤적거리던 레이너드는 결국 포기하고 연습장을 덮었다.
“없네.”
“내가 한 낙서는 그것뿐이니까.”
“그럼 갑자기 이건 왜 한 거야?”
“그냥…….”
유리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 눈만 깜빡였다.
‘왜 그랬지?’
그때를 떠올리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고요한 공부방의 분위기였다. 그래, 기억났다.
―‘졸녀’가 아니라 ‘졸려’지, 레이.
낙서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말에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어쩐지 심술이 났었다. 그러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해 주고 싶지가 않았다. 유리나는 일부러 평소보다 더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냥 네 낙서를 보니까 너무 바보 같아서.”
“그게 뭐야.”
기분이 나쁠 법한 말인데도 레이너드는 소리 내어 웃으며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유리나는 퍼뜩 그를 공부방에 데리고 온 소기의 목적을 떠올리고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왜?”
“그동안 연락은 왜 안 했어?”
그 말을 내뱉자마자 유리나는 제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게 아닌데.’
원래는 가장 먼저 아카데미는 어떡하고 여기에 왔는지부터 물어보려고 했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제멋대로 아카데미를 박차고 뛰어나온 거라면 얼른 돌아가라고 화를 내려고 했다.
하지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마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성적으로는 자초지종을 물어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 터져 버린 감정이 꾹꾹 눌러지지 않고 날것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팠던 것도 아닌 것 같고, 잘 지냈던 것 같은데 왜 편지 한번 하지 않았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마음과 달리 다행히 목소리는 차분하게 나왔다. 그러나 표정 관리는 좀처럼 되지 않아 자꾸만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만 갔다. 유리나는 결국 미소를 짓는 것을 포기하고 표정 없는 얼굴로 팔짱을 꼈다.
처음 만났을 때 기뻐하던 모습과 확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당황했는지 레이너드 또한 덩달아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겨울 동안 많이 바빴어.”
“아무리 바빠도 편지 한 통 보낼 시간이 없었다는 건 말이 안 돼.”
“그게…….”
“여기서 할 일 없이 지내는 나와 달리 바쁘단 거 알아. 하지만 바쁘면 바쁘다고 한 줄 써서 보낼 수도 있잖아. 아무리 바빠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었잖아. 나라면 아무리 바빠도 그랬을 거야.”
유리나는 그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 안 해 봤어? 매달 꼬박꼬박 오던 편지가 두 달째 안 오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할지 생각은 안 해 봤어? 여태껏 편지 한 통 없어서 사람을 애태우더니 졸업도 하기 전에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해 줘야 해?”
가능하면 차분하게 따지려고 했는데 뒤로 갈수록 감정이 폭발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높아졌다. 유리나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런 말을 하는 지금도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말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내가 얼마나…….”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의 안부를 많이 걱정했던 것 같다. 다들 괜찮을 거라고, 그저 바빠서 그런 걸 거라고 위로를 해 주고, 스스로도 그럴 거라고 애써 합리화를 시켰지만 실제로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혹시 진짜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글씨 한 자 못 쓸 정도로 아픈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시시때때로 마음속에 날카로운 돌멩이처럼 박혀 마음이 늘 무거웠다.
그러다 생각이 가장 부정적인 곳으로 치솟을 때면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레이너드를 그 먼 곳으로 쫓아 보냈던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냥 데이브에게 마법을 배우라고 할 걸, 왜 소식도 제대로 닿지 않는 크론 왕국으로 보냈을까. 그렇게 후회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내비치지 않았던 진심이 레이너드 앞에선 이상하게도 잘만 나왔다.
“왜 이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어. 네가 뭔데, 내가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거야.
하지만 아무리 제 속마음을 다 드러내 보였어도 차마 그 말까지는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정말 자신이 초라하고 볼품없이 느껴질 것 같았다. 더 이상 입을 열었다간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유리나는 입을 꾹 다물고 감정을 추스르려고 애썼다.
감은 눈 너머에서 레이너드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당황했을까, 어이없어하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미안해하고 있을까. 유리나는 그가 지금 짓고 있을 표정이 상상되지 않았다.
참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해 왔는데, 정작 그의 마음을 가장 알고 싶은 이 순간에는 그의 표정 하나 감은 눈앞에 그려 낼 수가 없었다.
그와 자신 사이의 거리가 이렇게나 멀었던 걸까.
그 어느 때보다 그는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지는 걸까.
말없이 거친 숨만 내뱉던 레이너드가 조심스레 얼굴을 감싸고 있던 유리나의 손을 떼어 놓았다.
“유리나.”
그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유리나의 두 뺨을 감싸 쥐었다.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울지 마.”
코앞에서 작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는 외려 그가 울먹이는 것처럼 잘게 떨렸다.
“안 울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이건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유리나는 촉촉해진 눈가를 소맷자락으로 닦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레이너드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대신 눈가를 닦아 주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속눈썹 사이사이를 문지르는 손길이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눈물 자국이 남은 볼을 조심스레 닦아 주는 그의 손바닥은 따뜻했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던 기분이 고작 그 손길 하나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미리 얘기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난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편지를 보내는 것보다 내가 직접 오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았거든.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면 보냈을 거야.”
유리나는 그의 사과를 곧바로 받아 줄 수가 없었다. 그가 아무리 다독여 주어도 그동안 그의 안부를 걱정하며 속을 끓였던 것을 생각하면 도무지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원래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건네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아카데미는 어쩌고.”
레이너드가 여전히 유리나의 얼굴을 문지르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꾸했다.
“졸업했어.”
정작 그걸 듣는 유리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제 귀를 의심하며 레이너드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기는. 말 그대로 졸업했다는 소리야.”
“아직 한 학년이 남았잖아.”
“조기 졸업했어.”
“그런 건 들어 본 적 없어.”
들어가는 것보다 나오는 것이 더 어렵기로 악명이 높은 크론 왕립 아카데미는 정규 과정인 7년 만에 졸업하는 사람도 손에 꼽힐 정도였다. 7년 만에 졸업한 데이브가 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황실의 관심까지 받은 것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1년이나 앞당긴 조기 졸업이라고?
‘원작에서도 읽은 적이 없어.’
그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라면 원작에서 분명 비중 있게 다뤘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믿지 못하는 유리나의 표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레이너드가 문득 손을 들어 유리나의 목에서 달랑거리고 있는 목걸이를 툭 건드렸다. 1년 반 전, 유리나가 크론 왕국을 떠나기 전 그가 주었던 목걸이였다. 그때 그가 당부했던 것처럼 유리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목걸이를 늘 착용했다.
“크론 왕국에서 있었던 일 기억나?”
“어떤 거? 생일 파티.”
“아니, 그것 말고. 습격당했던 거.”
기억 못 할 리가 없었다. 1년 반이나 지났지만 유리나는 그날 일을 어제 일처럼 똑똑하게 기억했다. 가끔 꿈자리가 사나운 날은 악몽처럼 그때 일을 꿈으로 꾸기도 했다.
‘어떻게 잊겠어.’
하마터면 죽을 수도 있는 날이었는데.
레이너드가 자책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그 당시에 그에게는 괜찮다며 그를 다독였지만, 실은 괜찮지 않았던 것이다.
유리나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 냈는지, 레이너드가 눈을 찌푸렸다.
“난 그날 이후로 계속 악몽을 꿨어.”
그는 유리나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꽉 쥐며 눈을 감았다.
유리나가 크론 왕국을 떠나 제국으로 돌아간 날, 레이너드는 악몽을 꾸었다. 악몽을 꾸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초조할 때나 신경이 곤두설 때면 종종 악몽을 꿀 때가 있었다.
카르티아 저택에 있을 때는 유리나가 자신을 쫓아내는 악몽을, 아카데미에서 지낼 때는 유리나가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악몽을 꾸었다.
그러나 그날 꾼 악몽은 그 전까지 한 번도 꾼 적이 없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자꾸만 네 마지막 모습이 꿈에 나와.”
듣는 유리나를 위해 최대한 순화해서 얘기했지만, 실제로 그가 본 광경은 훨씬 끔찍했다.
악몽 속에서 유리나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죽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외롭게. 그게 그렇게 원망스러웠는지 유리나는 눈도 채 감지 못한 상태였다.
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던 푸른 눈동자가 탁하게 흐려져 있는 광경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던가.
그리고 레이너드는 항상 뒤늦게 그녀에게 도착했다. 숨을 쉬지 않는 유리나의 싸늘하고 딱딱한 몸을 끌어안고 알고 있는 모든 마법을 써 보아도 그녀는 결코 다시 숨을 쉬지 않았다.
세상이 무너진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표정대로 그는 제 세상이 모조리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세상이 무너진다는 건 제 삶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유리나의 죽음 앞에서 그는 제 인생이 무의미하고,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느꼈다.
동도 트지 않은 새벽녘에 식은땀에 온몸이 푹 젖은 채로 일어났을 때, 자신이 보았던 것이 꿈이란 것을 깨달았지만 레이너드는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머리로는 유리나에게 아무 일이 없을 거란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자꾸 불안했다.
한 달 뒤, 유리나에게서 편지가 올 때까지 그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렸다. 악몽에서 늘 유리나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져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악몽에서 깨어나 유리나의 웃는 모습을 떠올리려고 해도 자꾸만 악몽에서 본 모습밖에 생각나지 않아 그의 신경을 갉아 먹었다.
그만큼 자신이 없는 사이에 유리나가 아카데미에서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에게 충격적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한 번도 생각 못 했었지.’
레이너드는 유리나가 갖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잘 알았다. 그러나 솔직히 그녀의 죽음에 공감하지는 못했다. 부족한 것이 없고 많은 사람들의 보호 속에서 곱게 살아가고 있는 그녀와 죽음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탓이다.
유리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를 위해 노력하면서도 여전히 그런 일이 일어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악몽에 시달리면서 비로소 유리나의 마음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유리나는 아마도 늘 이런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내로라하는 카르티아 후작가의 사랑받는 막내딸이다. 남부러울 것 없는 위치에 있는 만큼 많은 사람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열두 살의 레이너드는 몰랐지만 열아홉 살의 레이너드는 알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리나에게 목걸이를 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
그 후 그는 하루라도 빨리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찾은 것이 조기 졸업.
“불안해서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레이.”
“내가 없는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았어.”
유리나는 눈을 감고 거친 숨을 내쉬는 레이너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구나.’
이렇게 죄책감을 가질까 봐 태연한 척을 했던 거였는데, 역시나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모양이다. 일부러 별일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도 그는 안심하지 못했나 보다.
‘하긴 그럴 만한가.’
그녀야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었으니 그가 돌아올 때까지 괜찮을 거란 걸 알았지만, 그걸 모르는 레이너드 입장에선 불안할 만도 했다.
유리나는 더 이상 원작에서 이런 이야기를 보지 못했느니, 어쨌느니 하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한 번 바뀌었는걸.’
이미 그녀는 레이너드를 데려온 대가로 아카데미에서 그를 노리던 사람에게 습격을 받았다. 그에 대한 여파로 레이너드가 조기 졸업을 하는 일 정도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깔끔하게 결론을 짓자 왠지 웃음이 나왔다. 유리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당겨 물며 파르르 떨리는 레이너드의 감은 눈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바닥에 어리광을 부리듯 제 뺨을 문댔다.
“그래서 이렇게나 일찍 온 거야?”
“네가 괜찮다는 걸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안심할 수가 없었어.”
“편지는 조기 졸업 준비하느라 바빠서 못 보낸 거고?”
레이너드가 실눈을 뜨고 유리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그녀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것도 있고, 얼굴 보고 직접 말해 주고 싶었어.”
유리나의 손을 놓은 레이너드가 조금 더 바짝 다가왔다.
“그것보다, 유리나.”
조금 전까지 안절부절못하며 유리나의 기색을 살피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유리나는 갑작스럽게 변한 그의 분위기에 놀라 미소도 지우고 눈만 깜빡였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거리는 주먹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가까워졌다. 갑자기 코앞에서 보이는 붉은색 눈동자에 놀라 유리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레이너드가 곧바로 그녀가 도망친 거리만큼 바짝 따라왔다.
도망가고, 따라오고, 도망가고, 따라오고. 의미 없는 추격전을 반복하던 유리나는 허벅지 뒤에 책상 모서리가 닿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재빨리 몸을 틀어 딴 곳으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그보다는 레이너드가 빨랐다. 그는 두 팔을 뻗어 유리나의 양옆 모서리를 짚었다. 뒤로는 책상, 앞으로는 레이너드. 유리나는 그에게 갇혀 버린 형국이 되어 버렸다.
유리나는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레이너드의 눈을 보며 몸을 최대한 뒤로 젖혔다. 허벅지가 책상에 꽉 짓눌리는 느낌이 났다.
그와 동시에 몸속에 자리 잡고 있는 심장도 보이지 않는 손에 터질 듯이 꽉 눌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슴께가 뻐근해서 숨을 쉬는 것이 힘들었다. 그와 자신 사이에 있는 공기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저기, 레이.”
유리나는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하지만 밀어낼 수는 없었다.
지금 이대로 그의 팔을 밀고 빠져나간다면 레이너드는 순순히 옆으로 물러날 것이다. 아니, 그냥 비켜 달라고 이야기만 해도 그는 분명 비켜 줄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그렇게 강압적으로 대할 성격이 되지 못했다.
그걸 아는데도 유리나는 비켜 달라는 말을 하지도, 그렇다고 그를 밀치고 도망가지도 못했다.
그저 코앞에서 보이는 그의 눈동자에 사로잡힌 것처럼 그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돌아오자마자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고 했지.’
왜 지금 이 순간 원작에서 묘사되었던 그의 외모가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는 그 묘사 그대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전에 크론 왕국에 갔을 때는 참 잘 자랐다고만 생각했는데 1년 반 사이에 그는 또다시 달라져 있었다. 이미 성장을 마친 터라 외적으로는 크게 변화가 없었다. 다만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는 여전히 자신만만했고, 그와 동시에 누구 앞에서든 주눅 들지 않는 여유까지 생겼다. 지금도 유리나를 보며 입술을 살짝 당겨 웃는 모습은 장난기가 있으면서도 어쩐지 여유로워서 나른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의 품에 갇혀 있어서 그런 걸까. 유리나는 그가 꼭 배가 불러 너그러워진 맹수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릴 때 구석에서 파들파들 떨 때는 맹수를 앞에 둔 여린 초식 동물 같았는데.
“유리나.”
말없이 유리나를 지켜보던 레이너드가 입을 열자 뜨거운 숨이 이마를 간질였다. 유리나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자 그가 상체를 숙여 기어코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유리나.”
“…….”
유리나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지금 말을 하면 어떤 목소리가 나갈지 상상이 되지가 않았다.
“내 편지 많이 기다렸어?”
처음 만났을 때 이 질문을 들었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까지 왔을지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응.”
레이너드가 잠깐 숨을 멈췄다. 마른침을 삼키는지 톡 튀어나온 그의 울대뼈가 위로 느릿하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잠시 후 그는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나는?”
고작 목적어 하나만 바뀐 질문이었다. 그러나 유리나는 이번엔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1년 반 전, 크론 왕국에서 그와 재회했을 때엔 보고 싶었노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그때랑 뭐가 달라졌다고? 내 편지를 기다렸냐는 질문과 뭐가 다르다고?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를 기다리지 않은 게 아니다. 오지 않는 소식에 답지 않은 화를 낼 정도로 그를 기다렸다. 그런데도 그랬노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 말에 담긴 의미의 무게를 깨달았기 때문에.
유리나가 대답을 하지 않자 불만스럽게 눈썹을 추켜세운 레이너드가 돌연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박았다. 오뚝하게 솟은 그의 코끝이 유리나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붉은 시선이 올곧게 유리나의 푸른 눈을 향했다.
“……나는 많이 기다렸어?”
고개를 저어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유리나의 침묵이 길어지자 레이너드가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며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안 보고 싶었어?”
“……으응.”
“보고 싶었다는 거야, 안 보고 싶었다는 거야?”
“나는…….”
“아가씨, 여기 계세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베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나는 재빨리 레이너드의 어깨를 밀었다.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레이너드가 순순히 멀어졌다. 왠지 아쉬움을 느꼈다면 머리가 어떻게 된 걸까.
방을 두리번거리던 베시가 유리나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여기 계실 줄 알았어요. 아가씨는 늘 방에 안 계시면 이 방에 계시잖……. 어?”
유리나의 앞에 있던 레이너드를 발견한 베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유리나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아가씨이이!”
* * *
“저, 저는 누가 들어와서 아가씨에게 해를 가하려는 줄 알고……. 레이너드 님인 줄 알았다면 안 그랬을 거예요.”
베시가 유리나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웅얼거렸다.
“괜찮아. 이해해. 나도 처음 레이를 봤을 때 놀랐는걸.”
유리나는 베시를 탓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유리나의 전속 하녀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다만, 그 행동이 불러온 여파가 조금 컸을 뿐이다.
유리나는 레이너드를 눈빛으로 불태울 기세로 관찰하는 에드윈과 저스틴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베시의 심상치 않은 고함 소리를 듣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큰일이 난 줄 알고 공부방으로 달려왔다. 그냥 고용인들뿐이었다면 유리나의 선에서 별일 아니었다며 돌려보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마침 저택으로 돌아온 쌍둥이 오빠들이 그 속에 끼어 있었다는 점이다.
에드윈과 저스틴은 레이너드를 보자마자 자객인 줄 알고 깜짝 놀라 유리나를 보호하며 그를 경계했다. 레이너드가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느라 두 사람은 그에 대한 이야기만 들었을 뿐,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유리나가 재빨리 레이너드를 소개해 주지 않았더라면 큰 사달이 났을지도 모른다.
오해를 푼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후로 상황이 조금 이상해졌다.
“대체 왜 아무런 소식도 없이 온 거지?”
에드윈과 저스틴은 레이너드가 조기 졸업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몰래 돌아온 것을 의심했다. 미리 연통을 보내지 않은 것은 그러려니 해도 그가 온 것을 저택의 그 누구도 몰랐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응접실에서 유리나와 단둘이 있었던 것도 퍽 수상하고.
‘유난이라니까.’
그러나 두 사람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더 이상 스스럼없이 지내던 어린이들이 아니었다. 레이너드는 이미 성인이었고, 유리나 또한 1년만 있으면 성인이 된다. 예전처럼 한방에 단둘이 있는 것조차 하기 힘들었다.
‘이해는 하는데…….’
솔직히 유리나는 이게 그렇게 유난을 떨 일인가 싶었다. 다른 남자였다면 그녀 또한 당연히 단둘이 있는 것을 꺼려 했겠지만, 상대는 어릴 적부터 친구처럼 지내던 레이너드다. 여전히 할 이야기가 많고, 같이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어쩐지 방해받은 느낌이 들었다.
유리나는 제 앞에 서 있는 쌍둥이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비켜 보라고 그들의 등을 밀어 보았지만 두 사람은 레이너드와 그녀의 사이를 꿋꿋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에드윈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직접 말해 주고 싶었대.”
“그럼 왜 몰래 저택에 숨어들었는데?”
“몰래 숨어든 거 아니야. 멀쩡하게 복도로 걸어와서 찾아왔어.”
유리나의 말에 레이너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에드윈과 저스틴은 미심쩍다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럼 왜 응접실에 단둘이 있었던 거야? 베시도 안 부르고.”
“내가 데려갔어. 둘이서만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거든.”
“뭐?”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그들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가 왜?”
“둘이서 무슨 할 얘기가 있는데?”
“무슨 오해를 하는 거야?”
유리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카데미에 있어야 할 애가 제국에 있으니까 놀라서 그랬지. 조기 졸업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혹시라도 무단이탈을 한 거라면 남들이 알지 못하게 몰래 돌려보내야 하니까 그랬지.”
저스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그것뿐이야?”
“당연…….”
태연하게 말을 이으려던 유리나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지레 찔려 입을 다물었다. 베시가 나타나기 전 마지막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 장면은 쌍둥이가 들으면 길이길이 날뛸 만한 장면이긴 했다.
“왜 말을 멈춰?”
유리나는 에드윈의 재촉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뿐이야.”
“정말인가?”
이번엔 저스틴이 레이너드를 쏘아보았다. 레이너드가 마찬가지로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뿐입니다.”
쌍둥이는 뭔가 석연치 않아 하는 것 같았지만, 완강한 유리나의 대답에 더 이상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대신 다시 레이너드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법과 학생이라고 하지 않았나? 데이브의 제자라고 들었는데.”
“마법과 맞습니다.”
“전혀 마법사처럼 보이지 않는데?”
“마법사가 비실거릴 거란 건 편견일 뿐이죠.”
유리나는 새삼 저스틴과 에드윈 사이에 껴 있는 레이너드를 관찰했다.
‘키가 크긴 크네.’
기사인 그녀의 세 오빠는 보통 남자들에 비해 체격이 컸다. 또래보다 살짝 작은 유리나는 세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면 종종 거인들 사이에 껴 있는 난쟁이가 된 것 같은 우습지 않은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레이너드는 그런 오빠들 사이에 껴 있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정도고 체격이 좋았다.
“편견이 아니라 대개 그렇던데.”
“대개가 그렇다고 해도 전부가 그런 건 아니니까요.”
그건 그렇고, 인사를 하라고 데려왔는데 왜 이 남자들은 신경전을 하고 있는 건지. 유리나는 그들 사이에서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며 팔짱을 꼈다. 굳이 끼어들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보고만 있는데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할지 막막했다.
다행히 이 미묘한 분위기는 의외의 인물에 의해 금방 깨졌다. 소식을 듣고 릭스 카르티아가 네 사람을 찾아온 것이다. 늘 차분한 그는 에드윈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도 쌍둥이처럼 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레이너드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는 여유로운 모습까지 보여 주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데이브의 제자라지? 제국에 소문이 자자하던데.”
후작가의 자제가 아직 작위도 받지 않은 피후원자에게 이렇게 살갑게 대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레이너드 또한 누그러진 기세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정도로 실력이 있지는 않습니다.”
눈에 뻔히 보이는 겸손에 릭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겸손을 떨 것 없어. 이미 데이브의 유일한 제자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실력이 입증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나는 데이브가 평생 제자도 안 두고 혼자 지낼 줄 알았어.”
“아마 저 말고 다른 제자는 없을 것 같긴 합니다.”
레이너드의 목소리에서는 ‘나를 뛰어넘을 사람은 앞으로 없을 것이다’라는 자부심이 은연중에 묻어 나왔다.
“저도 카르티아 경의 소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크론 왕국에서도 이름이 회자될 정도로 실력자라고 하더군요.”
릭스가 호오, 하고 감탄사를 흘리더니 조금 더 관심 있게 그를 살폈다.
“마법과 학생이 내 이름을 들을 일은 거의 없을 텐데 희한하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릭스가 악수를 위해 잡았던 레이너드의 손을 들어 그의 손바닥을 살폈다. 그는 손바닥과 손가락 이곳저곳에 나 있는 굳은살과 상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배웠나?”
“네. 부족한 실력이지만 기본은 할 줄 압니다.”
“그래서 내 이름을 들었나 보군. 근데 마법과 학생이 왜 굳이 검까지 배웠지?”
릭스를 응시하고 있던 레이너드의 시선이 그의 옆쪽에 서 있던 유리나에게로 흘끔 향했다. 덩달아 사랑스러운 막냇동생을 보며 미소를 지어 준 릭스가 창밖을 향해 턱짓했다.
“그렇다면 실력이나 한번 보지.”
“어? 대련하는 거야? 좋아. 형 다음엔 내가 상대해 줄게.”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하고 대련을 하니 신선하겠는걸.”
레이너드의 대답을 채 듣기도 전에 대련을 기정사실화시킨 에드윈과 저스틴이 각자 어깨를 돌리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몸을 풀었다. 레이너드는 세 남자를 차례대로 훑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기사들끼리는 무언가 통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속에서 홀로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 유리나만 얼떨떨했다.
‘갑자기 웬 대련이야?’
한 명은 오늘 긴 여정에서 막 돌아왔고 나머지 셋은 사냥 대회 준비를 위해 체력을 아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유리나가 어이없어하든 말든, 세 남자는 유리나에게 손짓을 하고는 방을 나섰다. 유리나는 빠르게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유리나가 양산을 들고 느지막이 연무장으로 나갔을 때, 연무장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릭스 카르티아의 대련이었다.
유리나는 검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뛰어난 사람의 대련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고 들었다.
하물며 대련 상대가 정식 서임을 받은 기사도, 카르티아가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견습 기사도 아닌, 마법사였다. 그것도 마법 쪽에서는 릭스 못지않은 실력자라고 소문이 난 마법사.
“아니, 마법사면 마법사지, 왜 검을 휘두른다고 난리랍니까?”
유리나가 크론 왕국에 놀러 갔을 때 호위로 나섰던 아론 경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견습 기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카데미에서 배웠다고 하잖아.”
“배워 봤자 얼마나 하겠습니까? 뭐, 그래도 비실거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마법사들은 다 힘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 말, 데이브 님 앞에서 하면 혼쭐날걸. 아무리 마법사가 힘이 없어도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쥐도 새도 모르게 파이어 볼을 얻어맞는 수가 있어.”
아론 경의 또래의 기사가 끼어들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견습 기사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지만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는 없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론 경은 애정 어린 손길로 다시 한번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굳이 기사들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는 충분했다. 유리나는 고용인들까지 한구석에서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다가 하인이 갖다준 의자에 앉았다.
목검을 쥔 릭스와 레이너드가 연무장 한가운데에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여유만만한 릭스와 달리 레이너드는 멀리서 보더라도 긴장한 것이 티가 날 정도로 얼굴이 굳어 있었다.
‘괜찮을까?’
유리나는 에이든에게서 레이너드가 검을 배웠다는 소리를 이미 들었다.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생각보다 레이너드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도 들었다.
‘에이든 군과 대련을 하면 반 이상 이긴다고 했지.’
연습을 더 많이 하는 건 자신인데, 어느 순간부터 레이너드 녀석을 이기기가 힘들다고 에이든은 한탄했다. 그걸 들으며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실력이 제 생각보다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으로서의 이야기다. 릭스는 전문적으로 검을 배운, 그것도 또래에서는 최고로 손꼽히는 실력자였다. 레이너드의 실력이 좋든 나쁘든, 애초에 대련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한 합은 버틸 수 있을까.’
혹시 저러다가 다치는 것은 아닐까.
유리나의 걱정 속에서 대련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레이너드는 릭스의 공격을 곧잘 받아 냈다. 검술에 문외한인 유리나가 보기에도 릭스가 봐 주고 있다는 것이 티가 났지만, 수준 차이를 생각한다면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해 보였다.
목검이 맞부딪히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기사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베시를 비롯한 고용인들은 아예 손뼉까지 치며 구경을 즐겼다.
하지만 대련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공격 속도를 높이던 릭스가 손을 고쳐 쥐며 힘껏 목검을 내리치는 순간, 레이너드가 쥐고 있던 목검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어, 어어?”
목검이 자신들 쪽으로 날아오는 것을 보던 고용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그들에게 떨어지기 직전, 목검이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레이너드의 마법이었다.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목검이 날아가 그의 손안에 들어갔다. 레이너드가 목검을 정리하며 기사의 예로 릭스에게 인사를 하자 고용인들 사이에서 다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기사가 아닌 고용인들에게는 대련보다는 레이너드의 마법이 더 진귀한 구경거리였나 보다.
“레이너드 님 진짜 대단하신 것 같아요.”
베시도 들뜬 얼굴로 유리나에게 속삭였다. 유리나는 동조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대련을 마무리한 릭스와 레이너드가 유리나 쪽으로 다가왔다. 그 잠깐 사이에 두 사람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유리나는 베시에게 건네받은 수건과 물을 둘에게 건네주었다.
“둘 다 잘했어.”
“견습 기사가 아닌데도 실력이 꽤 뛰어나더군.”
땀을 닦은 릭스가 레이너드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사냥 대회에 참가해 볼 생각은 없나?”
“사냥 대회?”
말을 꺼낸 건 릭스였는데 레이너드의 시선은 유리나를 향했다. 그제야 유리나는 그에게 곧 사냥 대회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맞다. 깜빡했어. 오빠 말처럼 곧 사냥 대회가 있을 거야. 전에 역사 시간에 배웠지? 봄이 오기 전에 황실에서 사냥 대회를 주최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라고.”
“응, 기억나. 편지에도 썼었잖아. 매년 이맘때쯤에 제너스 산맥에 있는 별장에 놀러 간다고.”
“맞아. 이번에는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내가 어머니 대신 참가하기로 했어. 그래서…….”
잠깐만. 유리나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이 설명, 했던 것 같은데.’
같은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이너드에게 했던 것이 똑똑히 기억났다. 잠시 이 기시감에 대해 생각해 보던 유리나는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유리나?”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응?”
레이너드는 물론, 세 오빠들마저 의아한 얼굴로 물었지만 유리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 일이 꼬여 버렸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에드윈과 저스틴이 앵무새처럼 “왜, 왜?” 하고 계속 물어 왔다. 유리나는 이내 표정을 풀고 별것 아니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아냐, 아무것도. 가져가려고 했던 짐을 깜빡하고 안 실었지 뭐야. 가서 베시에게 얘기해 둬야겠어.”
저택 쪽으로 몸을 돌리며 유리나는 레이너드에게 눈짓했다. 그는 예리하게 그녀의 신호를 눈치채고 릭스를 향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오랜만에 이런 격한 대련을 해서 그런지 피곤하군요. 괜찮으시다면 먼저 들어가 봐도 괜찮을까요?”
“아, 그러고 보니 여독이 채 풀리지도 않은 사람을 잡고 내가 너무 심했군. 사냥 대회에 참가할 거라면 체력을 회복해야 할 테니 얼른 가 보는 게 좋겠어.”
“그럼 조금 이따가 뵙겠습니다.”
그는 어느새 저만큼 멀어진 유리나를 향해 빠른 보폭으로 걸어갔다.
“유리나, 무슨 일이야? 뭔 일 있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레이너드는 유리나를 끔찍이 아끼는 세 오빠들보다 그녀의 기분에 더 예민한 것 같았다. 그가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유리나를 돌려세웠다.
“뭔 일 있는 거지? 혹시 몸이 안 좋아? 사냥 대회에 참여하기 힘들 것 같아?”
“아냐, 그런 거.”
그래도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는지 그는 유리나의 이마와 뺨에 손바닥을 대 보았다.
“뜨거운데? 열 있는 거 아냐?”
“연무장에 있었잖아. 더워서 그래.”
조금 전까지 대련을 한 탓에 그의 손은 유리나의 얼굴보다 뜨거웠다. 대체 이렇게 뜨거운 손으로 누가 누구에게 열이 있다고 하는 건지 우스웠다.
“그게 아니라 열이 있는 것 같은데. 얼른 방에 가자. 가서 쉬어야겠어.”
“그런 거 아니래도.”
“그럼 대체 왜?”
유리나는 귓불을 매만지며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네가 돌아오기 전에 아카데미로 편지를 보냈어.”
“편지? 아, 그거라면 내가 다 가져왔는데.”
“그거 말고.”
“그럼?”
유리나는 이 이상 어떻게 설명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다시 머뭇거렸다. 네게서 편지가 오지 않아서 기다리다 못해 다시 편지를 보냈어…… 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이기는 한데 어쩐지 그렇게 말하기가 꺼려졌다. 이미 그와 재회를 했을 때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아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밑바닥까지 보여 주었는데 참을성 없이 굴었다는 것을 새삼 덧붙이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꼴이 우스워질까.
만약 그 편지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편지였다면 이런 내색 따위 전혀 하지 않고 앞으로도 입을 꾹 다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리나는 마음을 다잡고 또다시 걱정스레 제 볼을 매만지는 레이너드의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너한테 하도 답장이 안 와서 뭔 일이 있나 싶어 며칠 전에 편지를 다시 보냈어. 아마 편지를 가진 파발꾼은 아직 제국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야.”
“정말?”
“응.”
“괜찮아. 에이든한테 편지 보내서 여기로 다시 부쳐 달라고 하면 돼. 어차피 그 녀석은 내가 말 안 해도 알아서 챙겨서 보내 줄걸.”
심각한 유리나와 달리 레이너드는 그녀를 달래는 듯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러고선 두 손으로 유리나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웃었다.
“내 걱정 정말 많이 하긴 했구나.”
그게 어쩐지 애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유리나는 그의 손을 재빨리 떼어 냈다.
“그리고 손수건도 보냈어.”
“손수건? 무슨 손수건?”
“사냥 대회 때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무사 귀환을 기원하면서 직접 수놓은 손수건을 선물하잖아. 이번에 오빠들 거 만들면서 네 것도 만들었는데, 얼마 전에 보낸 편지에 같이 보냈단 말이야.”
그제야 태평하게 웃고 있던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뭐, 그것도 에이든 군에게 같이 보내 달라고 하면 되겠지. 한 달 뒤에야 오겠지만.”
“그럼 사냥 대회가 끝나잖아.”
“어쩔 수 없지. 그러게 누가 편지도 없이 오랬어?”
유리나는 가볍게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베시에게 양산을 넘기며 방으로 향했다. 손수건이 아예 증발해 버릴까 봐 걱정이었는데 에이든이 다시 보내 준다면 걱정이 없었다.
저택으로 들어서던 그녀는 문득 레이너드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레이너드가 아까 그 자리에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 생각하고 있었다.
“뭐 해? 안 와?”
“아, 갈 거야.”
그렇게 말하고도 그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 * *
그날 저녁, 레이너드는 외출했다가 돌아온 카르티아 후작 내외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인사를 나눴다.
카르티아 후작은 조기 졸업 했다는 그의 말에 크게 기뻐하며 그가 제국에 잘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힘껏 도와주겠다 약속했고, 레이너드를 아끼던 후작 부인은 그를 아들처럼 안아 주며 방을 새로 꾸며야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레이너드는 후작 부인의 다정한 환대에 처음에는 어색해했지만 이내 아이처럼 웃으며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연구실에 처박혀 있다가 유리나의 부름에 응접실로 찾아온 데이브는 레이너드를 보자마자 길길이 날뛰었다.
“너,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야? 당장 안 돌아가?”
들어올 때도 힘들지만 나갈 땐 더 힘들다는 크론 왕립 아카데미의 지옥을 몸소 체험한 데이브는 조기 졸업 했다는 레이너드의 말을 순순히 믿지 않았다.
조기 졸업하는 사람이 몇십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데 아무리 레이너드라도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순순히 가지 않겠다면 억지로라도 데려가겠다며 레이너드를 잡아끌었다.
‘데이브가 그렇게 잔소리를 많이 하는 건 처음 봤어.’
레이너드도 잔소리를 듣다 지쳤는지 결국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던 졸업장을 데이브에게 자랑스럽게 보여 주었다.
데이브는 그것마저 믿지 않았다. 위조된 것이 분명하다며 날뛰던 그는 서류 위조 검사 마법을 세 번이나 쓴 뒤에야 인정했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어.”
그는 힘 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나밖에 없는 제자가 자랑스럽지 않냐고 유리나가 넌지시 물어보자 그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랑스럽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허탈하기도 합니다.”
스승으로서 레이너드가 대견한데, 같은 마법사로서는 약간 자격지심이 든다는 거였다. 마법사들이란.
“설마 데이브가 널 견제하는 거야?”
유리나는 데이브가 나가자마자 레이너드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현재 공부방으로 쓰던 응접실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어릴 때는 종종 단둘이 있고는 했는데 지금은 베시가 한쪽에 앉아 있었다.
에드윈과 저스틴이 감시 역으로 붙여 놓은 거지만 베시는 유리나 편이었다. 그녀는 유리나와 레이너드의 대화에 관심도 주지 않고 묵묵히 책을 읽었다.
“견제하는 건 아니고 승부욕이 생기신 거겠지. 마법사들은 원래 그래.”
“이해할 수가 없어.”
“나도 이해가 안 돼.”
“승부욕은 네가 더 많을 것 같은데.”
레이너드는 소리 내어 웃을 뿐이었다. 긍정의 의미였다.
“그런데 유리나, 아까 그 편지 말이야. 언제 보냈어?”
“편지?”
유리나는 콧등을 찌푸리며 날짜를 되짚어 보다가 베시의 무릎을 흔들었다.
“베시, 내가 레이에게 언제 마지막으로 편지 보냈는지 기억나?”
베시는 생각도 않고 금방 대답했다.
“일주일 정도 됐어요.”
“그럼 파발꾼은 지금쯤 국경 근처에 도착하겠네.”
레이너드가 턱을 문지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유리나, 이번에도 편지에 향수를 뿌렸어?”
유리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향수 이야기에 다소 놀랐다. 그가 한 번도 향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서 모른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알고 있었냐고 묻기엔 멋쩍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응. 늘 뿌리니까. 왜?”
“그런 게 있어.”
가볍게 대꾸한 그는 오랜 시간 여행했더니 피곤해서 일찍 자야겠다며 공부방을 나갔다.
“대체 뭘까? 자러 가는 것 같지는 않은데.”
유리나는 오랫동안 그를 봐 와서 그의 생활 습관을 잘 알았다. 그는 아무리 피곤해도, 심지어 앉아서 꾸벅꾸벅 졸 때도 열 시 전에는 자지 않겠다고 버티던 꼬맹이였다. 유리나와 같이 공부하는 시간이 아깝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데 오랜만에 돌아와 놓고서는 이렇게 그냥 자러 간다고? 아직 그간의 회포도 다 풀지 못한 채였다. 게다가 그가 나가기 전 건넸던 질문도 참 뜬금없으면서도 의미심장했다.
유리나의 질문에 베시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 * *
다음 날 아침. 아침을 먹자마자 레이너드는 외출 준비를 하고는 유리나를 찾아왔다.
“어디 가?”
“잠깐 갔다 올 곳이 있어서.”
그는 가볍게 대꾸를 하며 유리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목에 팔찌 하나를 채워 주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손목에도 똑같은 모양의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이게 뭐야?”
유리나가 손목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며 묻자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레이너드가 잠시 머뭇거렸다. 어딘가 많이 수상해 보이는 모습에 유리나는 그의 팔을 쿡 찌르며 재촉했다.
“뭐냐니까?”
“……위치 추적 아티팩트.”
뭐? 유리나의 얼굴 위에 아주 잠깐 당황함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대체 뭘 채운 거야.”
그녀가 재빨리 팔찌를 풀어내려고 하자 레이너드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오해하지 마. 이상한 거 아냐.”
“오해한 거 아니고, 이상한 건 맞는 것 같은데.”
레이너드는 눈을 가늘게 뜨는 그녀를 보며 멋쩍은 듯 유리나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사이로 얽혀 들어오는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것보다 길고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남자의 느낌이 완연하게 나는 손이었다. 분명 예전에는 스스럼없이 잡았던 것 같은데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져서 유리나는 얼른 손을 뺐다.
레이너드가 비어 버린 제 손을 잠시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다시 팔찌를 풀려는 유리나를 만류했다.
“진짜 이상한 거 아냐. 물론 이상한 목적으로 쓰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뒷말은 안 하는 게 좋았을 거야.”
“잠깐 다녀올 곳이 있는데 네가 저택을 떠나는 날까지 못 돌아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 뒤늦게 합류하려면 네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 내가 갔다 올 때까지만 하고 있어. 어차피 멀리 있을 때는 효과도 없어서 기껏 해 봐야 제너스 산맥에서 카르티아가 별장을 찾는 것 정도만 가능할 거야.”
“대체 어디 가는 건데?”
레이너드는 유리나가 기어코 푼 팔찌를 다시 손목에 채워 주며 장난스레 웃었다.
“비밀.”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유리나는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으려다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설마.
* * *
금방 돌아올 줄 알았던 레이너드는 유리나가 수도를 떠날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왜 안 오지?’
유리나는 제너스 산맥으로 향하는 마차에서 틈틈이 그가 채워 주었던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하면 레이너드가 금방 돌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사냥 대회 날 아침이 될 때까지도 그는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베시를 비롯한 하녀들의 손에 이끌려 치장을 하면서도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무슨 일 때문인지 속 시원히 알려 주고 갔다면 걱정이라도 안 했을 텐데, 그냥 그렇게 사라져 버리고 소식이 없으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의 실력에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다.
저도 모르게 얼굴까지 찌푸려 가며 고민을 하던 유리나는 갑자기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아!”
그녀 스스로가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사실 그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는데 딴생각을 했더니 놀라서 반사적으로 소리가 튀어 나갔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하녀들은 유리나의 목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했다. 특히 유리나의 오른쪽에서 치장을 도와주던 에밀리는 아예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유리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에메랄드 귀걸이를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금방 눈치챘다.
‘아까부터 긴장을 많이 하더니만…….’
손이 미끄러져 귀걸이 침으로 목을 긁은 모양이었다. 에밀리는 눈치를 보며 달달 떨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해요, 아가씨!”
“잠깐 비켜 봐.”
베시는 앵무새마냥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에밀리를 옆으로 밀어내고 유리나의 상처를 손수건으로 꾹 눌렀다.
“얼른 가서 의원을 불러오지 않고 뭐 하니?”
베시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고도 잠시 어버버 입술만 달싹이던 에밀리가 그녀의 재촉에 방을 뛰어나갔다. 베시는 방문도 닫지 못하고 달려가는 에밀리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더니 유리나의 상처를 보며 울상을 지었다.
“아가씨, 많이 아프시죠?”
유리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로.”
“거짓말하지 마세요.”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진짜 안 아파.”
“안 아플 리가 없잖아요.”
베시가 상처를 누르고 있던 손수건을 살짝 떼어 내고 상처를 살피더니 더욱 울상이 되었다. 유리나는 그저 웃어 보였다.
아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안 그래도 제가 다친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베시에게 아프다는 티를 내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아프다고 투정 부려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고.
유리나는 여전히 울상인 베시를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다친 건 난데 왜 베시가 울려고 해? 누가 보면 베시가 다친 줄 알겠다.”
“속상하니까 그렇죠. 저는 아가씨께서 찔리시기만 해도 속상해요.”
“바늘도? 에이, 그건 너무했다. 베시는 날 너무 애 취급하는 것 같아.”
“애 취급이 아니라…….”
속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는 듯 베시가 코를 훌쩍였다.
“아가씨를 그만큼 아끼는 거예요.”
좋아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리나는 그 말에 속없이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아껴 준다는 건 이렇게나 좋은 일이다.
“그래도 에밀리를 너무 혼내지는 마. 에밀리도 많이 놀랐을 거야.”
“혼을 내긴 내야 해요.”
“아직 어리잖아. 이런 큰 행사가 처음이라 에밀리도 긴장했을 거야.”
에밀리는 6개월 전 카르티아 저택에 고용된 신입 하녀로, 열일곱 살인 유리나보다도 한 살이나 어린 열여섯 살이었다.
몸이 편찮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열두 살부터 하녀 일을 시작했다던 에밀리는 그간 경력 덕분인지 열여섯 살인데도 손이 야무져서 일을 잘했다.
그런 그녀를 눈여겨보았던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에밀리를 유리나의 말동무를 시킬 겸 얼마 전 유리나의 전속 하녀로 배정했다.
유리나는 쾌활하고 붙임성이 좋은 데다가 일까지 잘하는 에밀리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번 사냥 대회에도 그녀를 망설임 없이 데리고 왔다.
하지만 아직 어리긴 어린 건지, 에밀리는 사냥 대회가 열리는 오늘 아침, 평소와 다르게 유독 긴장한 얼굴을 하더니 이 사달을 내고 말았다.
유리나는 에밀리에게 별로 화가 나지는 않았다. 사람은 언제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에밀리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 크게 혼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다른 하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녀의 티를 벗지 못한 아이라서 더 너그러워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유리나와 달리 베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지, 그녀는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가씨는 에밀리에게 너무 무르세요.”
“무르다니. 딱히 무른 적도 없는걸. 그간 에밀리는 잘했잖아.”
“아무튼 저는 이번 일은 그냥 못 넘어가겠어요. 따끔하게 혼낼 거예요.”
평소 베시는 유리나의 말은 웬만하면 잘 따랐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온다는 건 그만큼 화가 났다는 뜻이리라.
아무리 에밀리를 아낀다고 해도 유리나는 결국 몇 년을 같이 지낸 베시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너무 심하게 혼내지는 마.”
“네.”
고개를 끄덕인 베시가 유리나의 상처를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많이 심해?”
“심하지는 않은데…… 티가 조금 날 것 같아요. 벌써 부어올랐어요. 드레스를 입으면 상처가 다 보일 텐데, 데이브 님도 안 계신데 어쩌면 좋죠?”
유리나는 따끔한 통증이 느껴지는 목을 만져 보다가 거울에 살펴보았다. 베시의 말마따나 다행히 상처는 가는 귀걸이 침에 긁힌 탓에 심하지는 않았지만 귓불 아래쪽이라 눈에 띄는 자리였다. 안 그래도 피부가 하얀 편인데 상처가 발갛게 부어오르니 더욱 도드라졌다.
평소라면 아무 문제가 없을 상처였다. 상처가 그다지 깊지가 않으니 약을 바르고 며칠만 지나면 금세 아물 상처였다. 흉터도 남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다만 오늘은 사흘간 열리는 사냥 대회의 첫날이었다. 안 그래도 소문만 무성하던 유리나 카르티아가 참가한다는 소리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목에 상처가 난 모습을 보인다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하다못해 옷으로 가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떻게든 가려 봤을 텐데 목이라서 난감했다.
‘가져온 드레스도 다 목이 보이는 디자인인데.’
평소라면 데이브에게 부탁해서 마법으로 말끔히 치료했을 테지만 불행히도 데이브는 이번 사냥 대회에 따라오지 않았다. 사냥 대회에는 마법사가 참가할 수 없는 데다가 부상 치료는 보통 의원들이 담당한다. 간혹,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부상을 입은 경우에는 대기하고 있던 황실 소속 마법사들이 치료를 맡게 된다.
굳이 가문에서 마법사를 데려올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데이브는 지금껏 한 번도 사냥 대회에 따라온 적이 없었다. 필요도 없는 곳에 시간을 낭비하느니 수도에 남아서 하던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나, 뭐라나.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어.’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앉아 아쉬워할 수만은 없었다. 유리나는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거울을 보다가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렸다.
“일단 화장으로 가리자.”
“화장이요?”
의아하다는 듯이 반문하던 베시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잘못하다간 상처가 덧날 거예요.”
“괜찮아. 상처가 별로 크지 않으니까 덧날 일은 거의 없을 거야. 덧나더라도 심하지 않을 테고. 어차피 이번에는 어머니가 같이 오지 않으셔서 사냥 대회 끝나자마자 돌아갈 텐데 가서 데이브에게 바로 치료해 달라고 하지 뭐.”
그래도 베시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거듭 주장했다. 때마침 에밀리가 의원을 데리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심각한 표정으로 유리나의 상처를 살핀 의원은 시원한 허브 향이 나는 약을 발라 주며 긍정적인 답을 내놓았다.
“가능하면 약을 바르고 그대로 놔두는 게 좋습니다만, 어쩔 수 없죠. 다녀오셔서 제대로 다시 약을 바르고 치료를 하면 덧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의원의 답변에 베시는 머뭇거리면서도 더 이상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상처에 약이 어느 정도 스며든 뒤 다른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상처 위에 분을 발랐다.
하지만 이곳에는 한국처럼 잡티나 흉터를 완벽하게 가려 주는 화장품은 아직 없어서 여전히 목에 붉은 기가 보였다.
유리나는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거울을 보다가 다시 베시를 불렀다.
“베시, 상처가 좀 보이는 것 같지?”
베시에게 한 질문이었는데, 옆에서 계속 안절부절못하던 에밀리가 반응했다. 그녀는 눈동자를 불안하게 이리저리 굴리다가 유리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머, 머리 모양을 바꾸면 어떨까요, 아가씨?”
“머리 모양?”
별생각 없이 반문한 것이었는데, 그걸 책망 조로 느꼈는지 에밀리가 겁먹은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괜찮아. 말해 봐.”
“그게…… 상처가 난 쪽으로 머리를 땋아 내리면 상처가 덜 보일 것 같아요. 땋은 머리 사이사이에 화려한 핀으로 장식을 하면 시선도 분산돼서 상처는 눈에 잘 안 띄지 않을까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사실 유리나도 머리 모양을 바꿔 볼까 내심 생각하고 있었는데, 에밀리가 아예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해 주니 해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럼 그렇게 해 줄래?”
“제가요? 그렇지만 또 실수를 하면 어떡해요, 아가씨.”
“괜찮아. 계속 잘했잖아. 네가 생각한 것처럼 해 봐. 베시는 어떻게 생각해?”
베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반 묶음으로 묶어 두었던 유리나의 머리를 풀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베시의 동의까지 얻자 에밀리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녀는 머뭇머뭇하면서도 유리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머리 땋는 건 자신 있어요,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걔는 땋은 머리를 가장 좋아해서 매번 제가 땋아 줬거든요.”
자신 있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는지 에밀리는 동생 이야기를 하면서도 능숙하게 머리를 땋았다. 상처를 가리기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촘촘하기보다는 느슨하게 땋아 한쪽으로 늘어뜨렸다. 하녀들은 유리나의 액세서리 상자를 가져와 화려한 핀을 위주로 머리에 장식했다.
다 완성되고 난 뒤 거울을 보자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완벽했다. 머리카락이 완벽하게 상처를 가려 주어서 가까이에서 보지 않으면 티가 안 나는 데다가, 원래 하려고 했던 반 묶음 머리보다 눈에 훨씬 띄었다. 굳이 상처 때문이 아니더라도 유리나는 이 머리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고마워. 훨씬 낫네.”
“아니에요, 아가씨. 도움이 돼서 다행이에요.”
에밀리가 주근깨가 가득한 뺨을 불그스름하게 붉혔다. 만족한 얼굴로 유리나의 머리를 마무리하던 베시도 에밀리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에밀리는 평소 유리나의 하녀 중 가장 경력이 많은 베시를 언니처럼 따르고 존경해 왔다. 그런 베시의 인정을 받아 감정이 북받쳤는지 에밀리가 다시 울 것처럼 코을 훌쩍이며 옷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정말 애라니까.’
유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베시에게 손짓했다.
“베시, 다들 기다리겠다. 얼른 마무리를 해야겠어. 귀걸이는 어디 있어?”
“아, 그건 제가 가지고 있어요!”
하얀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적거리던 에밀리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두 손을 넣어 휘적거리다가 아예 앞치마를 벗어 거꾸로 탈탈 털었다.
“이, 이상하다. 분명히 여기에 넣어 뒀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하녀가 조용히 속삭였다.
“설마 잃어버린 거야?”
“아니, 난 정말 주머니에 넣어 뒀는데……. 진짠데…….”
유리나도 아까 에밀리가 피 묻은 귀걸이를 그대로 들고 방을 나가는 것을 보았다. 사색이 되어 나가더니 귀걸이를 어디다 흘린 모양이다.
‘저런 애가 아닌데 왜 오늘따라 저렇게 덜렁거리지.’
유리나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한쪽 귀에 걸려 있는 귀걸이를 빼냈다. 눈치 빠른 베시가 별다른 말 없이 귀걸이가 담긴 상자를 열어 유리나에게 보여 주었다.
“머리 장식이 화려하니까 귀걸이는 조금 수수한 것이 낫겠어.”
“그럼 이게 좋겠어요, 아가씨.”
베시는 다른 장식 없이 뽀얀 진주알만 달려 있는 귀걸이를 꺼내 보였다. 진주알의 크기가 손톱만 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다지 수수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유리나가 가져온 귀걸이 중에서는 그나마 단조로웠다.
유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베시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귀에 귀걸이를 걸어 주었다.
“잃어버린 귀걸이 한 짝은 저택에 남아 있는 애들에게 찾아보라고 할게요.”
“응, 고마워.”
“그것보다 아가씨, 목 안 따가우세요?”
유리나를 위아래로 살피던 베시가 유리나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가리켰다.
“상처가 따가울 수 있으니까 목걸이는 안 하시는 게 어떠세요?”
“없으면 목이 허전하잖아. 그리고 목걸이가 상처를 가려 줘서 오히려 티가 덜 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면 다른 걸 하시는 게 어떠세요? 그 목걸이도 예쁘기는 한데 입고 계신 옷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일단 가죽끈이잖아요.”
베시가 억지로 목걸이를 빼내려고 한 것도 아닌데 유리나는 반사적으로 펜던트를 꽉 움켜쥐었다.
“아냐, 괜찮아.”
유리나는 손안에 들린 목걸이 펜던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영롱하게 빛나는, 루비처럼 투명하고 붉은 이름 모를 보석. 이건 1년 반 전, 레이너드가 크론 왕국 국경에서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주었던 바로 그 목걸이였다.
―알겠지, 유리나?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 잘 때도 목욕을 할 때도 이거 빼먹지 마.
나지막하게 속삭이던 레이너드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리는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유리나는 지금껏 한 번도 목걸이를 풀은 적이 없었다. 목욕을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항상 착용했고, 티타임처럼 다른 가문의 사람들과 교류를 할 때도 늘 이 목걸이를 했다.
레이너드의 당부도 있었지만, 굳이 그의 당부가 아니었어도 유리나는 이 목걸이를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하고 있으면 레이너드가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가도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 목걸이를 보면 꼭 레이너드의 눈을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의외로 편했지.’
그녀는 투박한 가죽끈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목걸이에 가죽끈이 웬 말이냐고 레이너드의 미적 감각을 의심했는데, 실제로 지내 보니 금속으로 된 목걸이보다 이게 더 편했다.
목걸이를 하고 자도 머리카락이 엉킬 일이 없었고, 더운 날 쓸려서 목에 상처가 날 일이 없었다. 게다가 보존 마법을 걸어 놓았는지 이걸 하고 목욕을 해도 가죽끈은 물기 하나 묻지 않고 보송하게 유지됐다.
이런 것 하나에서도 레이너드의 배려가 묻어 나오는 것 같아서 좋았다.
유리나가 늘 이 목걸이만 하고 다니는 것을 본 사람들은 특별한 사연이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유리나는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었다.
이건 그녀와 그만의 비밀이다.
‘이젠 레이가 돌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풀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레이너드가 옆에 없기도 했고, 그와의 추억쯤으로 남겨 주고 싶었다.
유리나는 펜던트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다가 베시의 눈앞에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손목에서 목걸이 펜던트와 비슷하게 생긴 붉은 보석이 달린 팔찌가 찰랑거렸다.
이건 며칠 전에 레이너드가 반강제적으로 채워 준 위치 추적 팔찌였다. ‘위치 추적’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과는 달리 생김새는 평범한 팔찌처럼 예뻐서 드레스에 착용하고 가기에 무리가 없어 보였다.
“이거랑 세트 같지 않니?”
“어머, 정말이네요. 예뻐요. 그런데 저는 처음 보는 건데 무슨 팔찌예요?”
“비밀.”
“네?”
유리나는 베시에게 가볍게 웃어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긴장이 조금 됐었는데, 이 펜던트와 팔찌를 의식하고 나자 어쩐지 레이너드가 옆에서 에스코트를 해 주는 것처럼 마음이 든든해졌다.
* * *
지리학적으로 제노시안 제국은 북부로 갈수록 날씨가 추워진다. 특히 겨울에는 웬만한 성인 여성의 키만큼 눈이 쌓이는데, 겨울이 길다 보니 수도에서 꽃이 필 때까지도 산에 쌓인 눈이 녹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여신의 가호를 받는다는 제너스 산맥만은 이상하게 사시사철 온화한 날씨를 자랑했다. 겨울에도 기온이 그렇게 낮지 않아 눈이 오는 일이 극히 드물었고, 봄도 찾아오는 덕분에 수도보다 꽃이 더 일찍 핀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사냥 대회 철마다 제너스 산맥에 있는 별장에 놀러 온 유리나는 가지가 앙상한 수도와 달리 별장 정원에 꽃이 잔뜩 피어 있는 광경에 매번 놀랐다. 여신의 가호니 뭐니 하는 것은 믿지 않아서 과학적인 다른 이유가 있겠거니 했지만 책을 찾아봐도 별다른 건 찾지 못했다.
‘진짜로 여신이 있는 모양이지.’
책 속 인물에 빙의도 하는데 여신이라고 있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주위에 만개한 꽃을 보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던 유리나는 베시가 건네준 양산을 펴며 사람들을 살폈다.
수도 귀족의 사교 활동은 겨울이 시작될 즈음 끝나서 꽃이 피는 봄 무렵에 다시 시작된다. 그런고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에 열리는 사냥 대회는 일 년 중 가장 처음으로 열리는 사교 활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귀족들에게는 정식으로 사교계가 시작되기 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새로운 인맥을 쌓을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한쪽에서는 각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제복을 입고 대기하고 있는 기사들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회포를 나누고 있었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유리나의 눈길을 끈 것은 그녀의 오른쪽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한 연인이었다. 한껏 차려입고 연인에게 수줍게 손수건을 건네는 한 아가씨와, 그 앞에서 허리에 검을 찬 채로 활짝 웃고 있는 청년. 기껏 해 봐야 유리나나 레이너드의 또래밖에 되지 않은 젊은 한 쌍이었다.
손수건을 건네받은 기사는 기쁜 얼굴로 손수건에 입을 맞추더니 검 손잡이에 손수건을 묶었다. 금발의 아가씨는 그런 그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풋풋하네.’
유리나는 줄곧 머릿속으로 이런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식상한 소설 속 이벤트라고 생각했다. 오빠들에게 줄 손수건을 만들면서도 그녀는 그 손수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저 세 오빠들에게 공평하게 손수건을 주지 않으면 삐친 오빠들을 달래 주는 것이 더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풋풋하면서도 꿀이 떨어질 것처럼 달달한 연인을 보고 있으니 우습다기보다는 어쩐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워?’
그 생각의 정체를 파악할 새도 없이 그녀는 손안에 들고 있던 손수건 세 장을 내려다보았다. 에스코트를 해 줄 첫째 오빠 릭스와 에스코트를 해 주지 못해 서운해하고 있을 두 쌍둥이 오빠들에게 줄 손수건.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리나는 하나같이 똑같이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세 장의 손수건을 보며 손안에 있지도 않은 다른 손수건을 떠올렸다.
이세 장의 손수건보다도 더욱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서 만들었던 특별한 손수건, 그와 함께했던 추억이 담긴 노란색 꽃이 수놓아진 손수건 말이다.
‘아쉽기는 아쉽네.’
에이든 테시가 다시 보내 줄 거란 걸 알아서 크게 아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미련이 조금 남아 있었다. 직접 주지는 못하더라도 사냥 대회쯤에는 레이너드가 받았으면 하고 보냈던 건데. 지금 그 손수건은 어디쯤 있으려나.
마음속에서 퐁퐁 솟아나는 아쉬움에 유리나는 괜히 아까 그 연인을 흘끔거렸다. 어느새 남자는 여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손등 위에 하는 입맞춤의 의미는 존경과 헌신.
―유리나, 넌 내가 지켜 줄게.
순간, 유리나는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제 얼굴과 레이너드의 얼굴이 떠오르는 환각을 보았다. 그러고는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에게 놀라 고개를 저었다.
‘미쳤나 봐.’
손으로 괜히 뺨을 톡톡 두드리던 그녀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꼭 잘못을 한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유리나.”
왼쪽 가슴에 카르티아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사냥복을 입은 릭스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 앞에 섰다.
“뭘 그렇게 집중해서 보고 있었어?”
“아, 그냥 사람들 좀 보고 있었어. 다들 좋아 보이길래.”
유리나는 눈짓으로 아까 보았던 남녀를 가리켰다. 유리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릭스가 그 장면을 보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사냥 대회의 꽃은 누가 뭐래도 손수건을 주고받는 연인이지.”
그러더니 그답지 않게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저게 부러우면 오빠도 해 줄까?”
“에이, 그건 좀 그래. 오빠에게 기사의 맹세를 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고개를 재빨리 저은 유리나는 릭스의 이름이 적힌 손수건을 그에게 건넸다.
“자, 여기 손수건.”
그가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손수건도 만들었어?”
“당연하지. 사냥 대회에 손수건이 빠지면 되겠어?”
“잘 만들었네.”
“신경 좀 썼지.”
유리나는 으스대듯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릭스는 화려하게 수놓아진 가문의 문장을 보며 감탄사를 흘리다가 제 손목에 손수건을 묶었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기사의 예를 표하는 대신 유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리나가 헝클어진다고 뾰족하게 말하자 금방 손을 거뒀지만.
“손수건의 답례로 오빠가 널 최고의 레이디로 만들어 줄게.”
최고의 레이디는 사냥 대회에서 우승한 사람이 기사의 예를 표한 여성에게 주어지는 칭호였다. 유리나는 그 단어가 낯간지럽다고 생각하지만 그녀 또래의 소녀들에게는 최고의 영광이었다.
‘최고의 기사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매력 있는 소녀라는 거겠지.’
그렇지만 친오빠에게 그런 관심을 받아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잠시 그런 삐딱한 생각이 들었지만 유리나는 그 생각을 마음에만 담아 두며 그저 웃었다.
“응. 기대할게. 많이 잡아 와.”
릭스는 작년도 사냥 대회 우승자였다. 유리나는 그가 올해도 우승할 거라는 근거 있는 믿음이 있었다.
“그렇지만 몸조심해야 해. 하나도 못 잡더라도 부상 없이 돌아오는 게 훨씬 좋아.”
“아, 누구는 좋겠다. 손수건도 받고. 나도 사슴 잡아 줄 수 있는데.”
“그러게 말이야. 나도 최고의 레이디 만들어 줄 수 있는데.”
두 사람의 대화 사이로 불청객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느새 왔는지 에드윈과 저스틴이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여튼, 입만 살아서. 어차피 릭스 오빠에게 검술로 한 번도 이기지 못했으면서.’
유리나는 뚱한 그들의 표정을 보고 웃다가 가볍게 손짓했다. 두 쌍의 청회색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왜? 왜? 오빠한테 할 얘기 있어?”
“유리나, 손에 그거 뭐야? 그 손수건 누구 줄 손수건이야?”
손수건에 떡하니 이름이 수놓아져 있는데도 두 남자는 짐짓 놀라는 체하며 능청을 떨었다.
“글쎄, 이게 무슨 손수건일까?”
왠지 그들을 놀려 주고 싶다는 생각에 유리나는 허공에 손수건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두 사람의 고개가 그녀의 손을 따라 휙휙 움직였다. 어쩐지 고기로 맹수를 조련하는 조련사가 된 것 같았다.
유리나가 각각 손수건을 나눠 주자 에드윈과 저스틴은 재빨리 손수건을 검 손잡이에 둘둘 말았다.
“역시, 자수가 예쁘니까 검의 외관이 살아나네.”
“자수는 제국에서 우리 동생을 따라갈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진짜로 좋은 건지 두 남자의 살짝 그을린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 유리나는 잔뜩 흥분한 두 오빠의 팔을 토닥여 주었다.
“오빠들도 몸 조심히 다녀와. 괜히 사슴을 잡아 오네 뭐네 하다가 다치지 말고.”
“여우 잡아 줄게.”
뭐? 여우? 이 사람들이 지금 충고를 듣고는 있는 건가 싶어 눈을 치켜뜨자 에드윈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꼬리로 목도리를 만들면 따뜻할 거야.”
“겨울 다 지나갔잖아. 그리고 그런 거 필요 없어.”
여우 꼬리 목도리라니. 왠지 모르게 여우 한 마리를 통째로 목에 두르고 다니는 모습이 머릿속에 둥실 떠올랐다. 갑자기 소름이 돋아 유리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럼 토끼 잡아 올게.”
“토끼는 왜?”
“산 채로 잡아 오면 애완용으로 키울 수 있지 않아?”
“정원에 있는 꽃잎을 다 뜯어먹을걸. 키울 자신도 없어.”
“사슴은? 머리를 박제해서…….”
“아, 정말. 오빠.”
어쩐지 시작도 전에 진이 빠지는 것 같아 유리나는 단호하게 그들의 말을 끊었다. 늘 차분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데, 어째서 쌍둥이 앞에서는 현실 여동생처럼 잔소리만 나가는지 모르겠다.
“그냥 내 생각하지 말고 오빠들 하고 싶은 거나 해. 여우 꼬리나 사슴 머리 같은 거 갖고 오기만 해 봐. 쫓아낼 거야.”
말하는 중에도 소름이 돋아 어깨를 파르르 떠는 유리나를 보고 두 남자는 알겠다고 웃고 말았다.
“오늘 머리 예쁘네. 땋은 머리 어울려.”
릭스가 스쳐 지나가듯 내뱉은 말에 뒤늦게 깨달은 듯 에드윈이 가까이 다가와 유리나의 머리를 살폈다.
유리나는 머리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혹시나 상처가 보일까 걱정돼서 한 행동이었는데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정말이네. 풀어 내린 것도 예쁜데 이것도 예쁘네.”
“그래?”
“응.”
“그럼 자주 해야겠다.”
유리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세 남자가 상처를 알아보지 못하자 유리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밀리나 베시에게는 괜찮다고 했어도 내심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유리나, 너도 조심해.”
유리나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저스틴이 문득 중얼거렸다.
“내가 조심할 게 뭐가 있어? 어차피 여기 막사에 있는데.”
대기 인원이 머무는 막사가 모여 있는 곳은 황실 소속 마법사들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는 곳이었다. 원리는 알 수 없었으나 동물들의 접근을 막아 주어 안전하다고 했다. 황실의 일원도 참가하는 만큼 안전 하나는 보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스틴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유리나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니, 동물들 말고.”
그를 따라 뒤를 돌아본 유리나는 그제야 그의 뜻을 파악할 수 있었다.
‘커티스 제노시안.’
원작의 남주인공이자 제국의 황태자가 황실 대표로 단상 위에 서 있었다. 전에 커티스가 유리나를 제 성년식에 초대하려고 한 이후로 세 오빠들은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유리나가 원한다면 모를까, 원하지도 않는데 황궁으로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알겠지? 오빠들 없는 동안 잘 피해 있어.”
저스틴의 충고에는 교묘하게 주어가 빠져 있었다. 그의 충고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려던 순간, 유리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커티스와 눈이 마주쳤다. 멀리서 보더라도 눈에 띄는 그의 금빛 눈동자가 못 박힌 것처럼 유리나를 향해 머물렀다.
제 뒤에 서 있는 보좌관의 말에도 계속해서 유리나를 주시하던 커티스의 입술이 느릿하게 호선을 그렸다. 유리나는 서둘러 저스틴 뒤에 숨으며 커티스의 시선을 피했다.
‘골치 아프게 됐네.’
공식 행사인 만큼 커티스와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일찍 볼 줄은 몰랐다. 게다가 혹시나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그가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면 했는데 방금 표정을 보아하니 그는 그녀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커티스를 보고 있던 릭스가 그답지 않게 살짝 격양된 어조로 쐐기를 박았다.
“저스틴 말 들어, 유리나. 가능하면 숨어 있어.”
유리나는 자기보다 더 진지한 세 오빠들을 보며 얼굴을 풀고 웃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오빠들이나 잘하고 와.”
* * *
하지만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카르티아 영애.”
세 오빠들을 배웅하고 서둘러 막사로 도망가려고 했던 유리나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분명 저 멀리 있는 걸 봤는데 언제 온 건지 커티스의 발걸음 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무시하고 갈까?’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안 될 소리였다. 어쨌든 상대는 이 나라의 황태자였다. 제 아무리 카르티아가의 사랑받는 고명딸이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상대다.
유리나는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하고 뒤로 돌며 허리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들게.”
굽혔던 허리를 들었던 유리나는 바로 코앞에서 보이는 커티스의 얼굴에 흠칫 놀라며 순간 숨을 죽였다. 그가 놀라서 살짝 크게 뜨인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서서히 미소를 지었다.
“그대의 얼굴은 참 보기가 힘들군.”
“귀한 분을 제가 어찌 자주 볼 수가 있겠습니까? 제게 내주실 시간이 없으실 만큼 바쁘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답니다.”
“나보다는 그대가 더 바쁜 것 같던데.”
말에 뼈가 있었다. 그의 말처럼 그와의 만남을 피한 쪽은 유리나였으니까.
7년 전, 우연히 황실 도서관에서 마주친 뒤로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한 건 두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유리나가 그가 나타날 만한 곳은 애초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작과 달리 황태자비가 될 생각은 전혀 없지만 혹시나 하는 가능성은 전혀 배제하고 싶었다. 원작에서 ‘유리나’와 커티스가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나는 오랜만에 그대 얼굴을 봐서 기쁜데 그대는 기쁘지 않은 것 같군.”
말만 들으면 참 그럴싸했다. 그러나 유리나는 그의 표정이나 목소리에서 다정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그린 것처럼 아름다운 그의 미소 또한 차갑기 그지없었다.
‘제 입지를 단단히 굳혀 줄 세력이 필요한 것뿐이면서.’
만약 그가 자신에게 한눈에 반하기라도 해서 이성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삐딱하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정하게 대하지는 못해도 인간으로서의 호의는 가졌을 테지.
그러나 그의 목적은 유리나가 아니라 오로지 레이너드였다.
‘차라리 레이를 원하는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내면 그나마 봐줄 만할 텐데.’
황제의 장자이자 황태자인 커티스 제노시안은 황좌를 이을 정당성과 정통성은 충분했지만 한 가지 흠이 있었다. 그에게는 힘을 실어 줄 외가가 없었다.
그가 여덟 살 때 서거한 에일린 황후는 크론 왕국의 공주였다. 유리나가 듣기로는 현 황제가 십 대 때 크론 왕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열렬한 연애 끝에 국혼을 치렀다.
제국 황실 역사상 드물게 연애결혼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결혼이 당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왕국과 제국 간에 우호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에일린 황후는 자애로운 성정으로 황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황제에 총애를 받아 장자인 커티스를 낳았지만 정치적인 기반이 없었다. 그녀가 서거한 뒤엔 크론 왕실이 제국의 정치에 관여할 일말의 명분마저 사라져 버렸다.
반면, 그녀가 죽은 뒤 황비에서 황후가 된 제니스 황후는 제국에서도 넷밖에 없는 공작가의 사람이었다. 그런 제니스 황후가 커티스와 세 살 터울이 나는 황자를 낳았을 때 공작가에서는 그를 황제로 만들려고 얼마나 기를 썼을까.
그녀가 황비일 때도 공작가와 뜻을 같이 하는 귀족들은 제2황자인 필립의 총명함을 칭송하느라 바빴는데, 황후가 된 후로는 조금 더 노골적이고 적극적이 되었다.
그 속에서 커티스는 살아남기 위해 어렸을 때도, 성년이 된 지금도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암살 시도도 수없이 있었다고 들었다. 아마도 냉철하고 타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성격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유리나는 참 좋은 먹잇감이었다. 카르티아 가문의 유일한 딸이라는 것과 세기의 천재라는 레이너드의 후원자라는 점에서.
‘원작에서 커티스가 연인이었던 유리나를 배신하고 리디아를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겠지.’
사랑하는 연인과 제게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카리온’의 존재. 커티스의 성격이라면 후자를 선택했다고 해도 전혀 놀라울 게 없었다.
그는 정말 재수가 없을 정도로 제 야망 밖에 모르는 사내였다.
‘대체 원작의 유리나는 이런 남자가 뭐가 좋아서 쫓아다닌 거지?’
자신을 끔찍하게 아끼는 가족에, 남부럽지 않은 명성과 재력에 누구나 사로잡을 수 있는 외모에……. 생각하다 보니 어째 자화자찬이 된 것 같은 우습지도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진짜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연인이었을 때 커티스가 잘 대해 주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 또한 오랜만에 전하를 뵙게 돼서 기쁘답니다.”
“그대의 가문에서 후원하는 이에 대한 이야기는 잘 들었네.”
갑작스럽게 나온 레이너드의 이야기에 유리나는 슬며시 주먹을 꽉 쥐었다.
“크론 왕실에 큰 도움이 되었다지. 그대도 알다시피 내 모후께선 크론 왕국 출신이시라 나도 크론 왕국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지. 기회가 된다면 그자를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듣자 하니 아직 졸업을 하려면 1년이나 남았다더군.”
레이너드가 조기 졸업을 하고 돌아온 것은 아직까지 대외적으로 비밀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그대가 나와 차 한잔하며 대신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어떤가.”
제안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실상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정말로 급한 일이 있더라도 다 미루고 들어야 하는 것이 황태자의 명이었다. 하물며 유리나에게는 그럴싸한 거절의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럴 때는 거절의 이유를 상대방에게 돌리면 그만이다.
“말씀만이라도 영광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감히 제가 전하의 시간을 뺏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와의 다과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여기에 있는 내로라하는 귀족이 몇인데 어떻게 너는 일개 영애인 나와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려고 하니?
그런 속뜻을 그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커티스는 여전히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그의 뒤에 서 있던 보좌관으로 보이는 청년이 헛기침으로 주의를 끌었다.
“전하, 외람되오나 아까부터 독대를 청한 이들이 많습니다.”
역시 황태자의 보좌관이다. 유리나가 던진 기회를 흘려보내지 않고 이렇게나 잘 활용할 줄이야.
유리나는 그제야 한숨 놓고 더욱더 곧게 허리를 세웠다.
‘그래도 커티스가 사리 분별을 할 줄은 알지.’
보좌관까지 이렇게 나오는데 여기서 다 제쳐 두고 유리나와 차를 마시겠다고 할 멍청이는 아니라는 소리다. 예상대로 그는 못마땅하는 듯 인상을 살짝 쓰면서도 유리나에게 한 걸음 물러났다.
“차는 다음에 한잔하도록 하지.”
유리나는 예를 갖춰 허리를 숙였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물론 그런 기회는 오지 않도록 만들 생각이다.
감사의 인사라도 하려고 했는지 보좌관이 유독 정중하게 유리나에게 인사를 해 보인 뒤 커티스를 안내했다.
“데프론 후작께서 먼저 기다리고 계십니다.”
뭐? 예고도 없이 튀어나온 낯익은 이름에 유리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오늘 이곳에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아버지처럼 기사들을 이끌고 사냥 대회에 나간 줄 알았다.
‘아, 그래. 마법사였지.’
유리나는 이내 그 사실을 깨닫고 납득했다.
과거 마법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을 때 사냥은 오로지 검, 창, 활 등 실질적인 무기만 사용하여 이뤄졌다. 그런 기사도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법이 발전한 지금도 사냥 대회에서는 마법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마법사들은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대신에 막사 주변이 안전할 수 있도록 마법진을 펼치고,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막사에서 대기한다.
어차피 와 봤자 대회에 참가하지도 못하고, 황실 기사단 소속 마법사들과 의미 없는 기 싸움에 지친다고만 했다. 그럴 시간에 실험을 하나 더 하는 게 낫다며 데이브는 사냥 대회 기간에 수도에 남았다.
데프론 후작 또한 귀족의 소양으로 검을 배우긴 했겠지만 근본적으로 마법사였다. 젊었을 적에야 가문의 기사들을 이끌고 나갔겠지만 지금은 그러기 쉽지 않을 터다. 아마도 그래서 대회에 참가하지 않고 막사에 머물고 있는 거겠지.
‘왜 여기까지 와서 커티스를 보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이런 곳에서는 평소에 황태자를 자주 볼 수 없는 귀족들이 알현 신청을 하고는 한다. 데프론 후작이라면 수도에서도 얼마든지 커티스는 물론이고, 황제까지 알현할 수 있었다.
‘다른 가문을 견제라도 하는 건가.’
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유리나는 데프론 후작에게 더 이상 크게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저 사람 누구야?”
커티스의 뒷모습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던 유리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눈앞에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레이? 언제 온 거야?”
며칠간 보이지 않던 레이너드가 그녀를 향해 넓은 보폭으로 걸어왔다. 유리나는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을 보고 두 번 놀랐다.
“갑자기 웬 보라색이야?”
붉은색이던 그의 눈이 보라색이 되어 있었다. 보라색 눈도 잘 어울렸지만, 늘 붉은 눈만 봐서 그런지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레이너드가 제 눈가를 더듬으며 웃었다.
“아직 내가 돌아온 건 대외적으로 비밀이잖아. 그래서 바꿔 봤어. 붉은 눈을 보면 다들 나인 줄 알 거 아냐.”
“그건 그렇지. 붉은 눈을 가졌다는 베아투스에 대한 소문은 이미 제국에도 파다하게 퍼졌으니까.”
유리나는 까치발을 들고 그의 눈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얼핏 붉은색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왕 바꾸려면 조금 더 평범한 색으로 바꾸지 그랬어? 붉은색보다는 낫지만 보라색도 튀잖아.”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보라색으로밖에 바뀌지 않아. 파란색으로 바꿔도 보라색, 갈색으로 바꿔도 보라색. 그나마도 잠깐 방심하면 다시 붉은색으로 돌아와. 붉은 눈이 여신의 상징이라고 하잖아. 그래서 마나를 거부하는 무언가가 있나 봐.”
“그건 처음 듣는 소리네. 데이브가 들으면 연구해 보겠다고 널 달달 볶을지도 몰라.”
레이너드가 장난스레 어깨를 떨었다.
“스승님이 사냥 대회에 안 오셔서 다행이야. 네 말처럼 이걸 보셨다면 사냥 대회고 뭐고 연구실에 갇혀서 같이 연구를 했어야 했을걸.”
가볍게 웃은 유리나는 이번엔 그의 옷에 시선을 주었다. 그는 카르티아가의 기사들이 입는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왼쪽 가슴에는 카르티아가의 문장인 칼을 품은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다.
“그 옷은 대체 언제 입은 거야? 대체 언제 왔어?”
“조금 전에 도착했어. 옷은 베시가 챙겨 주던걸.”
베시가? 그러고 보니 어제저녁부터 베시는 레이너드 님은 사냥 대회에 참가하지 않는 거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온다고 했었다는 말을 건네자 알겠다고 대답했는데, 남들 몰래 레이너드의 용품을 준비해 두었나 보다.
“그건 그렇고 저 사람은 누구야?”
레이너드가 이젠 제법 멀어진 커티스의 뒷모습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
그 단어를 작게 중얼거리던 그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분이 대체 널 왜 찾아온 거야? 전에 성년식에 와 달라고 했던 그분 맞지? 네가 편지에 썼었잖아.”
“별일은 아니야.”
“사람도 많은데 굳이 널 일부러 찾아왔는데 별일이 아닐 리가 없잖아.”
“널 만나고 싶었나 봐.”
“날?”
이해가 되지 않는지 그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별로 비밀로 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유리나는 솔직하게 말해 주기로 했다. 당사자인 레이너드가 알 필요가 있는 문제기도 했고.
레이너드는 유리나가 간략하게 해 주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유리나는 이야기를 마치고 가볍게 덧붙였다.
“복잡한 이해관계 생각하지 말고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 음…….”
유리나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해 주었다.
“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네 인생을 내가 좌지우지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난 네가 가급적이면 황태자 전하와 엮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니, 그거 말고.”
그가 유리나에게 바짝 다가왔다. 햇빛을 등지고 있는 그의 그림자가 유리나의 머리 위에 드리웠다.
“황태자 전하를 어떻게 생각해?”
“응?”
“넌 황후가 되고 싶은 거야?”
얘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그걸 피하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데.
그러나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퉁명스럽게 받아치지 못한 건 그 질문을 하는 레이너드의 얼굴이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했기 때문이리라. 역광 때문에 어둡게 그림자가 진 탓에 그의 얼굴이 더 진지하게 보였다.
레이너드의 손이 유리나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긴 그의 손가락이 파고들어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건 대답을 종용하라고 하는 것 같기도,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고 말리는 것 같기도 했다.
“전에 편지에 썼잖아. 난 그분이랑 엮이는 건 싫어.”
“…….”
“황후는 더더욱 싫고. 난 황후 자리에 관심 없어.”
레이너드가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터트리며 웃었다. 유리나는 그제야 그가 숨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됐어. 네가 싫으면 나도 엮이기 싫어.”
유리나는 다시 여유로움을 찾은 그의 얼굴을 보며 화제를 돌렸다.
“이번엔 내가 물을 차례야. 대체 어딜 갔다가 이제야 온 거야?”
“아, 맞다.”
레이너드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유리나는 그가 주머니에서 꺼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손에 들린 건 손수건이었다. 그것도 그녀가 얼마 전 레이너드에게 보냈던 바로 그 손수건.
“진짜로 그걸 가지러 간 거야?”
그가 떠나던 날, 유리나는 설마 손수건 때문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반응을 보일 만한 것이 손수건밖에 없었던 탓이다. 그렇지만 이내 그 말도 안 되는 가정을 머릿속에서 떨쳐 냈다.
그런데 레이너드는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냈다.
“파발꾼이 생각보다 멀리 가서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렸어. 향수를 뿌려 놔서 다행이야. 향으로도 추적 마법을 쓸 수 있었거든.”
그가 여전히 얼떨떨해하는 유리나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네가 직접 줘.”
“…….”
“얼른.”
유리나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고 있는 그의 손바닥 위에 손수건을 올려 주었다. 레이너드가 멀어지는 유리나의 손을 잡아 그 손끝에 입을 맞췄다. 잠깐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다른 때보다 오래 머무는 입맞춤이었다.
그가 유리나에게 눈으로 웃어 보이며 입술로 손끝을 살짝 물었다가 놓아주었다. 그의 따뜻한 입김이 닿은 건 손끝이었는데, 유리나는 어쩐지 두 뺨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유리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눈을 돌렸다가 이쪽을 보고 있는 릭스를 발견하고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얼른 가야겠다. 오빠가 너 보고 손짓한다.”
“그러게.”
“어, 음……. 조심해서 다녀와. 사슴 머리나, 여우 꼬리나 살아 있는 토끼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다치지만 말고 와.”
레이너드가 대체 그게 뭐냐고 작게 킥킥거렸다. 유리나는 오빠들이 해 준 이야기라며 그를 따라 웃었다.
“근데 그 전에.”
손수건을 접어 품 안에 넣은 그가 허리를 숙여 유리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손이 단정하게 땋아 내린 유리나의 머리를 한쪽으로 치우더니 그녀의 목을 더듬거렸다.
갑자기 상처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느낌에 유리나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이거 치료 좀 하고. 대체 언제 다친 거야.”
그가 의원이 고정해 준 붕대를 떼어 내고 상처 주위를 살살 문질렀다. 화한 느낌이 목에 퍼져 나가나 싶더니 이내 따끔거리던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체 어떻게 본 거야? 잘 감춘다고 감췄는데.”
말끔해진 유리나의 목덜미를 손등으로 매만지던 레이너드가 다소 거만하게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관심을 갖고 보는데 못 볼 리가 없잖아.”
* * *
레이너드와 오빠들이 사냥터로 떠나는 것을 배웅하고 난 뒤, 유리나는 카르티아 후작가에 배정된 막사로 갔다. 막사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여럿 와 있었다. 이게 바로 그녀가 이번 사냥 대회에 온 이유였다.
애초에 유리나가 사냥 대회에 참가한 목적은 몸이 편찮은 어머니를 대신하여 다른 가문의 사람들과 교류를 하는 것.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님들을 맞이했다.
찾아온 손님들의 나이 대는 다양했다. 유리나 또래의 영애들도 있었고, 부모뻘인 중년 귀족이나 조부모뻘인 노년 귀족들도 있었다.
그들을 만나 간단한 안부 인사 정도 나눴을 뿐인데도 유리나는 완전히 지쳤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상대한 적은 오늘이 처음이라 그런지 점심이 되기 전인데도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손님들을 물리겠습니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손님들의 기세에 유리나가 조금 지친 기색을 보이자 아론 경이 눈치껏 손님들을 돌려보냈다. 그 덕분에 유리나는 한숨 돌릴 수가 있었다.
베시의 도움을 받아 화장이나 옷매무시를 다시 점검하던 유리나는 문득 막사 구석으로 시선을 주었다.
‘아직도 저러고 있네.’
에밀리가 우울한 얼굴로 구석에서 혼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아침에 유리나의 목에 상처를 낸 후로 줄곧 저 상태였다. 땋은 머리로 상처를 가려 줄 때는 그래도 들뜬 기색이 있었는데, 정작 사냥 대회에 오더니 풀이 잔뜩 죽었다.
‘사냥 대회 많이 기대하던데.’
수도에서 나고 자랐다던 에밀리는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수도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고 했다. 당연했다. 에밀리 같은 평민이 단순히 야유 목적으로 마차를 타고 수도 밖을 나갈 일은 드물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돌봐야 하는 가족들이 있었으니 시간적 여유도, 재정적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수도 외곽에 위치한 레만 호수도 가족들과 가 본 적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에밀리는 이번 사냥 대회에 유리나가 자신을 데려갈 거라고 말한 뒤부터 잔뜩 신이 났다. 그 나이 대 소녀답게 사냥 대회에 출전할 멋진 기사님들을 볼 걸 상상하며 얼굴을 붉히는 모습은 꽤 귀엽기마저 했다.
불과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들떠 있었는데 저렇게 풀이 죽은 모습이라니.
“에밀리.”
유리나가 부르자 두 무릎을 끌어안고 축 늘어져 있던 에밀리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네? 부르셨어요, 아가씨?”
그녀는 서둘러 달려와 유리나의 옆에 섰다.
“머리를 다시 땋아 드릴까요? 아직은 괜찮은 것 같기는 한데.”
“머리는 괜찮아. 예쁘기만 한걸. 그것보다 조금 답답하지 않니?”
“네?”
유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밀리에게 손짓했다.
“안에만 있으니까 답답하네. 가서 산책 좀 하고 오자.”
유리나의 의도를 눈치챈 베시가 에밀리의 손을 잡고 유리나를 따라 나섰다. 에밀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베시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세 사람이 나오자 망을 보고 있던 아론 경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산책 가시려고 하십니까?”
“네. 안에만 있으려니 답답해서요. 맨날 별장에만 있었지, 제너스 산맥에 직접 나온 건 처음이라 구경도 하고 싶고요. 가 볼 만한 곳이 있나요?”
“저쪽으로 가면 산책로가 있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가씨.”
아론 경은 막사 주변에 흩어져 호위를 하던 다른 기사들을 불러 발걸음을 옮겼다.
말했다시피 사냥 대회는 사교의 장이다. 가문끼리의 교류가 주목적이다 보니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가 않았다.
유리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녀의 얼굴을 모르고 있기는 하지만, 카르티아 가문의 문장을 보고 다가왔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제복에 달린 문장을 눈에 띄지 않게 요령껏 가렸다.
수풀이 우거진 산책길을 조금 걷다 보니 오른편으로 계곡이 보이기 시작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맑고 깨끗한 계곡물을 보자마자 유리나의 옆을 졸졸 따라오던 에밀리가 잔뜩 흥분했다.
“와! 아가씨, 저것 좀 보세요! 저게 그, 계곡…… 맞죠?”
유리나는 활기를 되찾은 그녀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응. 계곡 맞아.”
“세상에, 저 계곡은 말만 들어 봤지 처음 봐요! 레만 호수하고는 많이 다르네요?”
흥분해서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에밀리는 산책로 가장자리까지 걸어가 나무를 잡고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계곡물에 발이라도 담그고 싶어 하는 기세였지만 마땅히 내려갈 만한 길이 없었다.
유리나는 에밀리의 뒷모습을 보다가 옆에 바짝 붙어 따라오는 아론 경에게 물었다.
“아론 경, 저기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을까요?”
“조금 더 가다 보면 아마 있기는 할 겁니다.”
“그럼 계곡에 잠깐 내려가서 쉬었다 가도 될까요?”
“저쪽 계곡 맞은편까지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으니 괜찮습니다. 안내해 드릴까요?”
“그래 주면 고맙겠어요.”
아론 경은 호위를 하고 있는 기사들에게 대열을 지키며 잘 따라오라고 지시한 뒤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에밀리가 뺨을 감싸 쥐며 꺅! 소리를 질렀다.
“아가씨, 감사합니다! 계곡에 한번 가 보고 싶었거든요!”
“뭘 이런 걸 가지고 고맙기는. 나도 더워서 계곡에 가고 싶었어.”
“그래도 감사합니다, 아가씨! 역시 아가씨를 모시게 되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에밀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아론 경의 뒤를 깡충깡충 뛰며 따라갔다. 유리나는 베시와 눈을 마주하며 웃다가 천천히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론 경이 계곡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하고 유리나에게 다가왔다.
“돌이 많으니 조심하십시오, 아가씨.”
양쪽으로 기사들의 손을 잡고 계곡가로 내려가자 아론 경이 넓고 평평한 돌을 향해 에스코트를 해 주었다. 유리나는 바위 위에 베시가 올려 준 손수건에 앉았다.
“와아, 아가씨! 계곡물이 정말 맑아요!”
또래 기사의 손을 잡고 내려온 에밀리가 계곡으로 쪼르르 달려가 신발을 벗었다. 그녀는 잠깐 주위의 눈치를 보나 싶었지만 이내 치맛자락을 무릎까지 올리고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첨벙첨벙, 듣기만 해도 시원한 소리가 났다. 그녀를 에스코트해 주었던 또래 기사는 순식간에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 그렇게 물에서 뛰어다니시면 위험합니다.”
“앗, 괜찮아요. 천천히 걸어 다닐 거니까요.”
에밀리는 배시시 웃으며 물속을 살금살금 걸었다. 그러다 중심을 잃고 몸이 휘청거리자 또래 기사가 서둘러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등의 말이 오고 가는 것이 들렸다.
‘귀여워라.’
유리나는 풋풋한 소년과 소녀를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는지, 유리나의 옆에서 양산을 받쳐 주던 베시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꼭 어릴 적 아가씨와 레이너드 님을 보는 것 같네요.”
“응?”
“아가씨와 레이너드 님도 저렇게 귀여우셨으니까요. 아, 그렇다고 지금은 아니라는 소리는 아니에요. 지금도 귀여우셔요!”
“내년이면 성인인 사람에겐 안 어울리는 말 아니야? 심지어 레이는 성인인데.”
“그래도 제 눈에는 아직도 아이 같으세요.”
열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베시는 꼭 유리나를 아기 적부터 키워 온 유모 같은 말을 했다. 그래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베시라 그런지 유리나는 별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유리나를 이렇게 아이 취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과 베시 그리고 데이브가 유일했으니까.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옆에 앉아. 양산도 안 씌워 줘도 돼. 팔 아프잖아.”
베시는 순순히 옆에 앉으면서도 양산을 접지 않았다. 유리나가 괜찮다고 또 한 번 말해도 그녀는 고운 피부가 상하면 안 된다고 꿋꿋하게 양산을 고집했다.
‘어쩔 수 없나.’
베시는 유리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제 고집을 꺾지 않았다. 유리나는 한 번 한숨을 쉰 후 주위를 돌아보았다. 잔뜩 긴장을 한 기사들도 잠깐 편히 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아론 경이 먼저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그래도 조금 쉬는 게 어때요?”
“괜찮습니다.”
그는 기사 둘을 유리나 옆에 놔두고 나머지 기사를 데리고 유리나가 조금 전 내려왔던 길을 다시 올라갔다. 그러고는 꼭 입구를 봉쇄라도 하는 것처럼 둘러쌌다. 유리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위를 관찰했다.
‘평화로운 날이네.’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뜨거운 햇빛, 졸졸졸 흘러가는 계곡물, 짹짹거리는 새 소리, 첨벙첨벙 물장난을 치는 에밀리, 옆에서 작게 소리 내어 웃는 베시, 유리나를 호위하면서도 에밀리를 흘끔거리며 얼굴을 붉히는 어린 기사.
저 밖에서는 치열한 사냥 대회가 열리고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한가로운 시간이었다.
주위를 꼼꼼히 살펴본 유리나는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을 했다. 치장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난 데다가 이렇게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니 몸이 나른해졌다. 그걸 눈치챈 베시가 살짝 귓속말을 속삭였다.
“피곤하시면 잠깐 주무셔도 돼요. 양산으로 가려 드릴게요.”
“응, 고마워.”
유리나가 베시의 어깨를 베고 눈을 감자 베시가 사람들에게 유리나의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양산으로 가려 주었다. 유리나는 이내 선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죄송하지만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꾸벅꾸벅 졸던 유리나는 갑작스럽게 들리는 날이 선 목소리에 눈을 뜨며 양산을 살짝 치웠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아론 경이 검집째로 검을 들어 누군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그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지만, 유리나는 평소와 다르게 날이 선 그의 목소리에서 그가 엄청 경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론 경이 막고 서 있는 남자는 단 한 명이었다. 그것도 검이나 창 같은 무기는 들고 있지도 않은, 딱히 기사로도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무슨 일이지?’
평화롭기만 한 이곳에서 아론 경이 저토록 날을 세울 만한 상황이 뭐가 있을까 싶었다. 아론 경의 기세가 하도 흉흉하기에 위험한 상황인가 했는데, 딱히 그래 보이지도 않았다.
“왜 들어갈 수 없다는 겁니까? 이곳은 사유지도 아니지 않습니까?”
나지막이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유리나는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기사들이 다가와 유리나를 막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손을 들어 저지한 뒤 아론 경에게 다가갔다.
“아론 경 무슨 일이에요?”
이곳에서 다른 가문의 사람과 마찰이 생긴다면 카르티아 가문의 사람인 그녀가 나서는 것이 옳았다. 더군다나 낯선 남자의 말처럼 이곳은 카르티아가의 사저가 아니니 누군가의 출입을 통제할 권리가 아론 경에게는 없었다. 유리나의 신변이 걱정된다면 양해를 구할 일이지, 지금처럼 강압적으로 나갈 일은 전혀 아니었다.
“오지 마십시오, 아가씨.”
“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
눈치를 살피던 베시 또한 유리나를 보호할 것처럼 그녀 앞에 섰다. 아론 경은 유리나의 뒤쪽에 있는 기사들에게 눈짓을 보낸 뒤 다시 낯선 이를 쳐다보았다.
“신원을 밝혀 주십시오.”
유리나는 아론 경이 경계하며 막고 있는 남자를 살폈다. 햇살에 반짝 빛이 나는 금발이 인상 깊었지만 그것보다는 수려한 외모가 인상 깊은 남자였다. 키가 크기는 했지만 살짝 마른 편이라 기사 같지는 않았다.
외모가 별로 비슷하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 그를 보고 있으니 지금쯤 오빠들과 함께 한창 사냥 대회에 열을 올리고 있을 레이너드가 떠올랐다. 선이 고운 얼굴과 밝은 금발 때문에 그랬을까.
레이너드 생각에 조금 더 호기심을 갖고 남자를 살피던 유리나는 문득 주위의 마나 흐름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살짝 찌푸렸다.
‘마법사?’
이제야 왜 아론 경이 이토록 남자를 경계하는지 알 것 같았다. 주위에 요동치는 마나를 보니 남자는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론 경을 바라보던 남자가 두 손을 살짝 들었다.
“산책을 하다가 계곡을 보러 내려가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왕족도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위협을 하며 신원을 밝히라고 종용하는 건 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곳은 사유지도 아닌데.”
“그렇지만…….”
“아론 경, 그분의 말이 맞아요.”
유리나는 베시의 도움을 받아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뒤 아론 경의 옆으로 다가섰다.
“우리가 저분을 막을 권리는 없죠. 어차피 돌아갈 때가 됐으니 우리는 이만 돌아가죠.”
“아가씨, 하지만…….”
“소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어요. 어서 돌아가요.”
“알겠습니다.”
유리나는 고개를 숙이는 아론 경을 보다가 낯선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표정이 없던 남자의 눈이 살짝 커져 있었다. 그는 유리나가 귀족의 예를 갖춰 인사를 하는데도 굳어 버린 것처럼 그 표정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유리나는 언짢은 내색을 하지 않고 웃었다.
“제가 사냥 대회가 처음이라 그런지 아론 경이 평소보다 더 신경 쓰느라 그랬던 것 같아요.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
이번에도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유리나는 눈만 깜빡이는 그를 보다가 알 만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한 외모기는 하지.’
스스로 말하기에는 민망했지만 확실히 그녀의 외모는 원작에서 리디아 데프론과 함께 제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뛰어났다.
어릴 때도 예쁘장했는데 성인을 앞둔 지금은 스스로가 보기에도 가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외모가 두드러졌다. 유리나를 처음 보는 남자들은 간혹 저 남자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어찌 됐든 덕분에 큰 마찰 없이 상황이 마무리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유리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인사를 해 보인 뒤 아론 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론 경, 돌아가요. 슬슬 얼굴을 비쳐야죠.”
“모시겠습니다, 아가씨.”
“그럼.”
유리나가 아론 경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등을 돌릴 때였다. 등 뒤에서 다급한 말소리가 들렸다.
“저기, 혹시 저희 예전에 어디서 만난 적 없습니까?”
아니, 이게 대체 언제 적 작업 멘트야. 의도가 뻔히 보이는 말에 유리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에서는 저런 말이 아직도 통하나?’
뻔하긴 한데 또 그런 만큼 신선하게 들리기는 했다. 그래서인지 평소라면 그냥 웃고 지나갔을 텐데 저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 나갔다.
“글쎄요. 저는 처음 보는…….”
가볍게 받아치며 뒤를 돌아보던 유리나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당황하여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가 멍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와 턱 아래에서 뚝뚝 흐르는데도 그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듯했다. 당황하지도, 그렇다고 눈물을 닦지도 못했다.
낯선 남자의 갑작스러운 눈물에 당황한 유리나가 눈만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자, 남자가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유리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을 쳤지만 이내 그보다 더 빠르게 다가온 남자에게 팔목이 잡히고 말았다.
눈물이 잔뜩 고인 그의 보라색 눈이 유리나를 향했다. 유리나는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은 보라색 눈을 보다가 뒤늦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아론 경!”
호위 기사를 향해 몸을 돌렸던 그녀는 주위 광경을 보고 말을 잃었다. 분명 계곡이 흐르는 숲속 풍경은 아까와 다를 바가 없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호위 기사와 하녀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유리나는 이런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공간 분리 마법.’
다만 아무런 마나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크론 왕국에서도 공간 분리 마법을 경험했을 때 마나의 흐름은 기민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때보다 마법을 더 배운 것을 생각하면 더 잘 알아챘어야 했는데.
‘설마 그때보다 더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인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남자를 피해 뒷걸음을 치며 주위를 더듬거렸다. 한 번 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조금 더 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내 제 등 뒤에 닿는 벽을 찾아내고 손에 마나를 끌어모으고 벽을 부수려고 하는데, 빠르게 다가온 남자가 그 전에 먼저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마법을 풀지 않았는데도 손에 모였던 마나가 저절로 흩어졌다. 남자가 한 짓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진정하십시오. 위해를 가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남자는 차분히 말했지만 듣는 유리나는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동의도 없이 공간 분리 마법을 써 놓고 나더러 그걸 믿으라는 소리인가요?”
“정말입니다. 영애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호위 기사가 있으면 도저히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유리나는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남자는 그녀에게서 몇 발자국 물러났다.
“호위 기사가 낯선 이로부터 날 보호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대화를 나누고 싶었으면 이런 방법이 아니라 가문에 정식으로 대화를 청해야죠.”
그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귀족가의 예법에 익숙하지 않아 그만 실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걸 알았다면 얼른 마법을 푸세요. 아니면 내가 직접 결계를 깨고 나갈까요?”
“곧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딱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었다. 유리나는 다시 손에 마나를 모으고 결계를 향해 다가갔다.
남자가 다급하게 외쳤다.
“정말, 저를 만난 적이 없으십니까?”
유리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없습니다. 하지만 만난 적이 있다고 해도 이런 무례가 용납될 수는 없는 일이죠.”
유리나는 마나를 모으던 것을 멈추고 남자를 뒤돌아보았다.
“그쪽은 어느 가문의 사람이죠?”
아까 아론 경과 마찰이 있었을 때는 굳이 그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때는 과하게 경계를 하며 신분을 밝히라고 종용하는 아론 경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 행동은 단순히 무례하다고 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
게다가 마법이라니. 결과적으로 큰 화를 입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가 마법으로 그녀를 묶어 놓고 큰 위해를 기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유리나는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역시 순순히 대답해 주지 않네.’
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유리나는 강경하게 나가기로 했다.
“나는 카르티아 가문의 사람이에요. 나를 욕보인 것은 카르티아가를 욕보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고 가문 차원에서 항의를 하겠어요.”
카르티아 가문의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주는 위압감이 있었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남자의 보라색 눈동자가 동요하듯 흔들렸다.
“카르티아…….”
유리나가 그의 이름을 다시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
“혹시 유리나 카르티아…… 영애입니까?”
유리나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수도 사교계에서 카르티아 가문의 막내딸, 유리나 카르티아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었다.
유리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미묘하게 입술을 뒤틀었다. 아마도 제 행동을 후회하고 있으리라.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묻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할 때, 남자가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마나가 흩어지는 느낌이 났다. 남자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가씨!”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베시가 유리나에게 다가왔다.
“저, 저는 또 아가씨께서 무슨 일이 생기신 줄 알고.”
그녀는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끅끅거렸다. 유리나는 베시를 달랠 새도 없이 검을 빼 들고 있는 아론 경을 향해 외쳤다.
“아론 경, 아까 그 남자 얼굴 기억하죠.”
“그렇습니다.”
“그 남자 누구인지 당장 알아봐 주세요.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누구인지요. 당장.”
자신에게 행했던 무례에 대한 항의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그저 본능이 그를 찾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 * *
유리나의 명을 받고 주변을 돌아보고 막사로 돌아온 아론 경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찾지 못했습니다.”
아론 경은 아까 그 정체불명의 사내가 마법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정도로 마나에 민감했다. 그런 그가 기를 쓰고 찾았는데도 못 찾았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했다.
하나. 그 마법사가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고 돌아갔다.
둘. 그 마법사가 정체를 숨기기 위해 마나를 감추고 있다.
어느 쪽이 됐든 그가 유리나의 추적을 피해 종적을 감췄다는 사실 하나는 분명했다.
“계속 찾아볼까요?”
유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지금껏 못 찾았다면 더 찾는다고 해서 찾을 수 있을 건 같지 않아요. 고생했어요.”
아론 경이 마나에 민감하다고 해도 그는 기사였다. 마법사가 작정을 하고 마나를 감춘다면 같은 마법사가 아닌 이상 마나를 추적하기가 힘들었다.
“그럼 저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유리나는 아론 경이 막사 밖으로 나간 뒤에 손을 까딱이며 생각을 더듬었다.
‘대체 뭐지?’
공간 분리 마법을 써 놓고도 그는 진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고작 자신을 본 적이 없냐고 다시 한번 되묻는 것뿐이었다.
고작 그 질문 하나. 그런데 고작 그것 때문에 그런 마법을 썼다고?
물론 공간 분리 마법이 마법사들 사이에서 비밀 얘기를 하기 위해 쓰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 낯선 사람이 처음 보는 그녀에게 그 마법을 써서라도 얘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보다는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 접근했다가 카르티아의 이름을 듣고 도망쳤다는 편이 옳지 않을까.
‘근데 왜 그렇게 울었을까.’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소리 없이 울던 남자의 보라색 눈동자가 눈앞에 계속 어른거렸다. 연기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연기인 것 같지도 않았다.
유리나는 사람들의 표정을 읽어 내는 데 그렇게 소질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의 눈물이 인위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연기라고 하면 더 이상하지.’
그가 그녀에게 보인 반응이 모두 거짓이라면, 그는 애초부터 유리나에게 일부러 접근했다는 소리가 됐다. 그녀가 누구인지도 다 알고.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답이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쩐지 두통이 이는 것 같아 유리나는 간이 소파에 널브러지다시피 누웠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지만 이상하게 몸이 무겁고 나른한 탓에 예의를 갖추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단장하시느라고 많이 피곤하셨나 보네요. 잠시 눈 좀 붙이세요, 아가씨. 아론 경께 말씀드려서 손님들을 잠시 돌려보내라고 할게요.”
베시가 유리나에게 담요를 덮어 주며 속삭였다.
“응, 그래야겠어.”
유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 * *
“아가씨! 아가씨!”
다급한 베시의 목소리에 선잠을 자고 있던 유리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에 베시가 팔을 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베시, 무슨 일이야?”
“얼른, 얼른요!”
굳은 얼굴의 베시가 유리나의 팔을 잡아끌고 막사 입구로 향했다. 막사 입구에서 밖을 살피던 에밀리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유리나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얼른, 얼른 가셔야 해요!”
“무슨…….”
“빨리요!”
베시의 재촉에 서둘러 막사로 나온 유리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이게 뭐야?’
한가롭던 막사 밖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막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고 있었고, 호위 기사들은 그들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아가씨.”
막사 밖을 지키고 있던 아론 경이 검을 빼 들고 다가왔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더라도 전속력으로 사냥터를 빠져나가시는 겁니다. 마부를 찾아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십시오.”
“대체 무슨…….”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수풀 사이에서 크릉, 거리는 짐승의 낮은 포효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유리나는 수풀 속에서 새빨갛게 빛나는 몇 쌍의 눈을 보고 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가씨, 절대 뒤돌아보지 마시고 무조건 뛰십시오.”
아론 경의 말을 끝으로 베시가 유리나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유리나는 나풀거리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며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빨리 달렸다.
등 뒤에서 늑대의 울음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현실감이 없어 머리는 멍한데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세차게 뛰어 오기 시작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정도로 전속력으로 뛰는데도 평소에 뛸 일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속도가 나지 않았다.
재빨리 이곳을 벗어나기는커녕 사나운 늑대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안 돼.’
이를 더 악물고 달렸지만 야속한 다리에서 힘이 빠지며 유리나는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베시와 에밀리가 소리를 빽 지른 것과 동시에 유리나는 중심을 잃고 쓰려져 바닥을 굴렀다.
유리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늑대 떼가 카르티아가의 호위 기사들을 지나쳐 그녀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날 죽일 거야.’
주위에 사람이 많았지만, 유리나는 어쩐지 그 늑대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망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일어날 수가 없었다. 베시가 옆에서 그녀의 팔을 잡고 일으켰지만 몸이 자꾸 기우뚱했다.
그 와중에도 늑대는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유리나에게 달려왔다. 그 급박한 상황이 느린 화면처럼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죽는 걸까. 이렇게 갑작스럽게,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이렇게 허망하게? 이런 죽음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눈앞에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고 했다. 하얗게 변한 유리나의 눈앞에 그동안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노리개로 데려가는 거냐고 날카롭게 되묻던 레이너드, 눈가와 마음에 상처를 입고 서럽게 울던 레이너드, 생일 케이크를 먹으며 코를 훌쩍이던 레이너드, 지켜 주겠다며 손가락을 걸던 레이너드, 널 위해서라면 그 먼 크론 왕국에 기꺼이 가겠노라고 속삭이던 레이너드.
그리고.
―내가 돌아갈 때까지 이거 꼭 하고 있어.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 잘 때도 목욕을 할 때도 이거 빼먹지 마.
울음을 참는 듯한 얼굴로 겨우 속삭이던 레이너드.
그걸 떠올리자마자 유리나는 재빨리 제 팔을 잡고 있는 베시를 옆으로 밀었다. 그러고는 줄곧 목에 걸고 있었던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마나를 불어넣는 순간 목걸이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오더니 동시에 그녀를 향해 달려오던 늑대들이 날카로운 칼에 찔린 것처럼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리나는 바로 코앞에서 죽어 있는 늑대를 보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 났다. 갑자기 마법을 써서 그런지 머리가 어지럽고, 안 그래도 힘이 없던 몸이 축 늘어지는 것 같았다.
‘살았나?’
뒤늦게 왼쪽 가슴 아래서 쿵쾅쿵쾅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유리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유리나가 미는 바람에 옆에 넘어져 있던 베시가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아가씨!”
무리에서 떨어져 있던 늑대 한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달려왔다. 아론 경이 검을 빼들고 늑대 앞을 가로막았지만, 늑대는 그를 가뿐히 뛰어넘고 유리나를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펜던트를 움켜쥐고 마나를 불어넣어 보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뒤늦게 마법은 딱 한 번 쓸 수 있다던 레이너드의 말이 떠올랐다.
‘아…….’
유리나는 목걸이를 꽉 쥔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늑대의 울음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렸다.
“아가씨!”
그러나 곧 닥칠 거라 생각했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단단하고 따뜻한 품이 느껴졌다. 뒤통수와 허리를 꽉 끌어안는 단단한 팔의 감촉도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뜨끈한 액체가 어깨를 적시는 느낌이 났다.
그 순간, 모두가 숨을 죽인 것처럼 주위가 조용해졌다. 아니, 분명 주위가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유리나는 고요한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들리는 거라곤 거칠게 몰아쉬는 제 숨소리와…….
“유리나, 괜찮아?”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레이너드의 목소리뿐이었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리는데도 그녀는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을 뜨는 순간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펼쳐져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리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그의 몸을 더듬더듬 끌어안았다. 주체 없이 떨리는 손 위로 뜨끈한 액체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유리나는 입술을 덜덜 떨며 살짝 눈을 떴다. 붉은색으로 돌아온 그의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서 보였다. 유리나와 눈이 마주치자 레이너드가 거친 숨을 내쉬며 웃었다.
“다행이다.”
그 말을 끝으로 레이너드의 몸이 그녀의 위로 힘없이 축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