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마음과 마음
유리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레이너드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레이너드는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가만히 누워 있었다.
몇 번이고 그의 코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유리나는 다시 한번 그의 코밑에 손을 대 보았다가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뱉었다. 안도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지 못할 정도로 레이너드의 숨이 약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죠?”
“네. 상처가 심하기는 했지만 황실 마법사들이 늦지 않게 치료해 준 덕분에 별문제는 없습니다. 피를 좀 많이 흘린 것이 걱정되기는 하는데, 레이너드 님께선 평소에 검술 연습을 즐겨 하셨을 정도로 체력이 좋으셔서 그것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카르티아가의 주치의, 로드릭이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유리나가 태어났을 적부터 그녀를 봐 온 그는 겁에 질린 손녀를 어르고 달래듯이 얘기했지만, 유리나는 머릿속이 복잡하여 그의 배려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후유증은 없을까요?”
“아무래도 찢어진 살과 근육을 마법으로 억지로 붙여 놨으니 며칠간은 통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유리나의 표정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자 그가 서둘러 덧붙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검술 연습을 과하게 한 다음 날 겪는 근육통 정도의 통증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근육통 정도라고 하더라도 어찌 됐든 통증이 있다는 소리였다. 유리나는 치솟아 오르는 복잡한 감정에 두 손을 꽉 쥐었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로드릭이 망설이다가 유리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유리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웃는다기보다는 우는 것에 가까운 미소였다.
“언제쯤 깨어날까요?”
“이르면 오늘 밤, 늦어도 내일 오전 중에는 깨어나실 것 같습니다.”
“내가…….”
목을 타고 올라오는 감정에 유리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코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을까요?”
로드릭은 유리나의 붉어진 눈시울을 보다가 여전히 미동 없는 레이너드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레이너드가 카르티아 저택으로 왔을 때부터 그를 봤다. 레이너드가 로렌 부인의 모진 소리에 상처를 받고 끙끙 앓았을 때도 진찰을 했던 것이 바로 로드릭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서로 하루 종일 붙어 다니며 사이좋게 지내던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손자, 손녀처럼 귀여워 보였다.
귀여운 아이들이 이렇게 번듯하게 큰 것을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나, 한쪽은 쓰러져 있고, 다른 한쪽은 자책하고 있는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는 유리나의 손을 쥐어 레이너드의 손 위에 올려 주었다.
“손을 잡아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겁니다.”
유리나는 푹 숙인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로드릭이 방을 나간 뒤에도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손을 놓지 않고 계속 잡아 주었다.
늘 그녀의 손을 잡아 줄 때마다 따뜻했던 그의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유리나는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손을 꽉 쥐었다. 보통 이러면 레이너드가 그녀의 손을 똑같이 꽉 쥐어 주는데 이번에는 아무 미동도 없었다.
그 사소한 변화에 왜 이리도 마음이 아린지.
올라오는 감정을 한 번 꾹 삼킨 유리나는 힘없이 펴져 있는 그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접었다. 원하던 대로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쥐어 주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괜찮아.’
그녀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다고 했잖아.’
그렇지만 그 위안이 무색하게도 감은 눈 위로 자꾸만 아까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상체가 붉은 피에 완전히 젖은 채로 쓰러져 있던 레이너드의 모습이.
로드릭은 그녀가 충격을 받을까 봐 걱정해서 최대한 순화해서 이야기해 주었지만, 레이너드의 부상은 가볍게 넘길 정도가 아니었다.
유리나는 끔찍한 광경에 계속 헛구역질이 나와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상처는 오른쪽 어깨뼈가 보일 정도로 깊었다. 예리한 칼날이 아니라 커다란 늑대의 이빨에 짓씹힌 살은 너덜너덜했다.
실력으로는 제국에서 따라올 자가 없다는 황실 마법사가 무려 셋이나 달라붙어서 겨우 치료했을 정도로 심각한 상처였다. 마법사들은 치료를 마친 뒤 식은땀을 흘리고 탈진했다.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는데 마음 놓고 있을 리는 당연히 없었다.
게다가 그가 다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면…….
유리나는 그의 손을 잡지 않은 손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울 자격도 없었다.
“아가씨.”
문이 달칵 열리며 베시가 안으로 들어왔다.
“레이너드 님은 제가 돌볼 테니까, 가서 쉬세요. 이러다가 아가씨도 쓰러지시겠어요.”
유리나는 여전히 손으로 눈을 누른 채로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있을게.”
“하지만…….”
“내가 있을게.”
단호한 유리나의 의지를 읽었는지 베시는 자신이 대신 있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옆방에 있을 테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세요.”
“베시.”
유리나의 부름에 방을 나가려던 베시가 다시 다가왔다.
“네, 아가씨.”
“아까 말이야, 레이너드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다고 했지? 어디서 달려온 게 아니라?”
“네. 마법을 쓰신 건지 갑자기 아가씨 앞에 나타나셨어요. 그리고…….”
베시는 유리나의 눈치를 보며 뜸을 들였다.
“괜찮아. 말해 봐.”
“늑대가 아가씨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뒤도 안 돌아보시고 아가씨를 껴안으셨어요.”
차분히 이야기하던 베시의 목소리도 잘게 떨렸다. 레이너드를 동생처럼 생각하던 베시에게도 이번 일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고 왔을까?”
“네?”
“레이 말이야. 사냥터에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걸까.”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손을 잡고 있는 제 손목을 바라보았다. 손목에는 전에 레이너드가 채워 준 루비 팔찌가 그대로 걸려 있었다. 위치 추적 기능이 있다고 했던 그 팔찌였다.
레이너드가 이것 덕분에 유리나가 있는 곳을 단숨에 알아냈다고 치더라도, 어떻게 그 정확한 때에 맞춰 왔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베시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비명 소리를 듣고 온 것이 아닐까요?”
유리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냥터와 막사는 꽤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숲이 우거지고 사냥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멀리서 들리는 비명 소리를 기민하게 알아채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베시의 말에 순간 유리나의 어깨가 흠칫했다.
“레이너드 님께서 다치시긴 했지만 그래도 두 분 모두 무사하시잖아요. 그렇지만 레이너드 님이 오지 않으셨다면…….”
“난 죽었겠지.”
“……네.”
레이너드 또한 쓰러지기 직전 속삭였다.
―다행이다.
진심으로 안도하던 그 목소리를 떠올리니 입 안이 썼다. 유리나는 혀로 입 안을 이리저리 훑다가 베시에게 손짓했다. 베시는 허리를 숙이고는 조심히 방을 나갔다.
넓은 방에 사람은 둘이나 있는데 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건 유리나로 하여금 레이너드가 아카데미로 떠난 뒤 늘 적막하기만 했던 공부방의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늘 레이너드와 함께일 때면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는 그 나이 대 아이답게 재잘재잘 말이 많았다. 사람들을 경계하여 다른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만큼 하고 싶은 말은 모두 유리나에게 쏟아 내는 것 같았다.
유리나는 말을 하기보다는 그의 말을 일방적으로 들으며 적당히 맞장구를 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 재잘재잘 떠드는 목소리가 싫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고 레이너드가 아카데미로 떠나고 난 뒤 혼자가 되었을 때 방 안에는 늘 적막감이 맴돌았다. 분명히 그를 만나기 전엔 늘 그 적막 속에서 살았는데 참새처럼 떠드는 목소리를 알고 나니 그 적막감이 얼마나 쓸쓸한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레이너드는 이 방에, 그녀의 눈앞에 있다. 그런데도 이 방은 그가 없던 그 싸늘한 공부방과 다를 것이 없었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손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며 그의 가슴팍에 귀를 갖다 댔다.
쿵, 쿵, 쿵. 심장이 뛰는 소리가 난다. 비록 느릿하고 희미하지만 확실히 뛰었다. 그 작은 소리가 대체 뭐라고, 불안하게 뛰던 제 심장이 차분히 제 속도를 찾아가는 게 느껴졌다.
귓가에 들리는 그의 심장 소리와 제 안에서 뛰는 심장 소리가 불협화음처럼 서로 엇나가다가 종국에는 하나처럼 속도를 맞춰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심장이 뛴다. 쉴 새도 없이 재잘거리던 낭랑한 목소리처럼 그 소리가 계속 유리나에게 속삭였다.
나는 살아 있노라고.
하지만 그가 눈을 뜨는 것을 직접 볼 때까지는 절대로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레이.”
유리나는 그 자세 그대로 눈을 감았다. 예민해진 청각에 레이너드의 심장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얼른 일어나.”
* * *
늦어도 다음 날 아침에는 깨어날 거라고 했던 레이너드는 다음 날 오후가 될 때까지도 일어나지 못했다. 상태가 나아지기는커녕, 저녁쯤엔 오히려 열까지 올랐다.
급하게 달려와 그를 살펴본 주치의, 로드릭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다.
“근육통이 있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문에 열이 오르는 겁니다. 앞으로 며칠간 미열이 있을 수는 있지만 상태가 심해진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가씨.”
“상태가 나빠지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을 하죠?”
“말씀드렸다시피 상처는 완벽하게 치료를 했습니다. 더 이상 나빠질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확언을 하며 유리나를 달랬다. 그러나 눈앞에 레이너드가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데 걱정하지 않으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유리나는 초조한 얼굴로 그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마음을 졸였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는 그녀를 보다 못한 베시가 유리나의 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아가씨, 이러다 진짜 큰일 나겠어요. 그러다가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레이너드 님께서 깨어나시고 무슨 생각을 하시겠어요. 수프를 끓여 왔으니 조금이라도 드세요.”
인형처럼 감정 없이 멍하니 앉아 있던 유리나는 ‘레이너드’라는 말에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순순히 베시를 따라 식사를 차린 테이블에 앉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게. 이 모습을 보면 확실히 레이가 깨어났을 때 놀라기는 하겠다.”
하지만 마음이 불안해서일까. 유리나는 묽게 끓인 수프를 몇 입 먹지 못하고 그만 헛구역질을 했다. 몇 번 더 먹어 보려고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녀는 미지근한 물만 한 컵 마시고 다시 침대 옆으로 가서 앉았다.
불안한 얼굴로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온 베시가 이번에도 기겁을 하고 유리나의 팔을 잡았다. 식사는 어쩔 수 없이 못 했다고 하더라도 잠은 자야 한다는 것이다.
유리나는 단호하게 버티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하지만 아가씨…….”
“자 봤자 악몽만 꿀 거야. 그냥 이렇게 있을게.”
지난 이틀 동안 침대에서 누워서 자지 않았을 뿐이지, 유리나는 침대 옆에 앉아 몇 번씩 꾸벅꾸벅 졸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별로 좋지 않은 체력을 가진 그녀가 멀쩡한 정신으로 밤을 꼴딱 새우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유리나는 악몽을 꾸었다. 악몽엔 하나같이 사고 당시 레이너드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모습이 나왔다. 고작 이틀 만에 유리나는 일 년 동안 꿀 악몽을 모두 꾼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선잠을 자도 이런데, 침대에서 편하게 자면 어떤 악몽에 시달릴지 끔찍했다.
유리나의 단호한 표정에 베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미지근해진 물을 갈아 오겠다며 물 대야를 갖고 방을 나갔다.
유리나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뻐근한 눈을 꾹꾹 눌렀다. 감은 눈 위로 자꾸만 부상을 입은 레이너드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한쪽 어깨가 늑대의 이빨에 찢겨 너덜너덜해지다 못해 하얀 뼈까지 드러나 있던 모습이.
‘이러다가 미칠 것 같아.’
유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니 그나마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손이 차가워질 때까지 세수를 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그러다 눈앞에 보인 광경에 놀라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분명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언제 일어났는지 레이너드가 침대에 앉아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유리나는 순간 선 채로 꿈을 꾸나 했다. 그만큼 레이너드가 깨어 있는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쉴 새 없이 주위를 살피던 레이너드는 유리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다급하게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유리나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의 몸을 보자마자 재빨리 그에게 뛰어갔다. 그를 부축할 요량으로 달려간 것인데, 레이너드가 꽉 끌어안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유리나.”
맞닿은 그의 몸은 아직도 미열이 남아 있어서 뜨끈했다. 목도 잠겨서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 유리나는 그의 이마를 짚어 보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이번에도 레이너드가 손을 낚아채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고작 이틀 만에 수척해진 레이너드의 눈이 유리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무언가 찾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집요한 시선이었다. 그에게 불순한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리나의 뺨이 살짝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시선이 맨 처음 유리나의 얼굴을 향했다가 목으로, 목에서 손목으로, 마지막에는 발목으로 향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그는 유리나의 소매를 걷어 올리며 유리나의 팔을 살폈다.
“다행이다. 다친 곳은 없네.”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웃는 레이너드의 모습에 또다시 부정적인 감정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그가 이렇게 눈을 뜨고 있는 것이 기쁘면서도 차마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 유리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궜다.
그가 깨어나면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구해 줘서 고맙다, 많이 아프지는 않았느냐, 몸은 좀 괜찮느냐, 대체 왜 나 대신 네가 그렇게 다친 것이냐 등등. 실제로도 누워 있는 그의 손을 잡고 반쯤 실성한 사람처럼 그 말들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 남은 것은 죄책감밖에 없었다.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그를 다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카르티아 후작도, 세 오빠들도, 아론 경도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고, 피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말했지만 유리나는 지난 이틀간 죄책감에 시달렸다.
“유리나.”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두 뺨을 조심스럽게 잡고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유리나는 그의 눈을 피하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레이너드가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기어코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왜 내 얼굴을 피해? 응?”
걱정을 해야 하는 건 그녀 쪽인데 오히려 그가 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더욱 속이 상해서 유리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감은 눈 위로 그가 당황해하며 허둥대는 모습이 그려졌다.
레이너드가 신음 소리 같은 것을 내더니 유리나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머리를 쓸어 주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많이 무서웠지? 늦게 가서 미안해.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그런 일을 안 당하게 했을 텐데.”
그의 말만 들으면 큰일을 당한 사람이 그가 아니라 그녀인 것처럼 들렸다. 그는 자신이 다쳤으면서 꼭 유리나가 다친 것처럼 그녀를 애지중지 대했다. 유리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는? 너는 괜찮아?”
“응. 괜찮아.”
“엄청 심하게 다쳤었잖아.”
“말끔히 치료했잖아. 지금은 멀쩡해. 한번 볼래?”
그가 다쳤던 오른쪽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나 유리나는 그가 처음 움직일 때 살짝 미간을 찌푸린 것을 보았다.
“안 괜찮잖아.”
“정말 괜찮대도.”
“괜찮을 리가 없어. 이틀이나 못 깨어났단 말이야.”
레이너드가 멋쩍은 듯 웃었다.
“생각보다 오래 누워 있었네. 난 몇 시간 안 잔 것 같은데.”
“왜…….”
유리나는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날 일을 생각하니까 감정이 추스르기 힘들 정도로 요동쳤다.
“왜 그때 마법을 안 쓴 거야?”
그가 쓰러진 그 순간부터 묻고 싶은 말이었다. 레이너드는 유리나가 마법을 쓴 것을 알아챈 다음에 바로 정확하게 그녀가 있는 곳으로 공간 이동을 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그렇다면 마법을 썼으면 됐을 텐데, 왜 그녀를 감싸 안은 것일까.
“썼어.”
“뭐?”
“널 보자마자 물리 방어 마법을 썼었는데, 무슨 이유였는지 먹히지 않았어.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마법을 쓰기엔 시간이 촉박해서…….”
“그래서 일단 나부터 안고 상황을 파악했다는 거야?”
“응.”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네게 일어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레이너드가 얼굴을 찡그렸다. 유리나는 그의 말이 참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너는? 네가 죽을 수도 있었어.”
뾰족해진 그녀의 목소리를 느꼈는지 레이너드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유리나는 제 눈치를 살피는 그를 보며 말을 계속 이었다.
“결론적으로 운이 좋아서 살았지만 하마터면 죽을 수도 있었어. 그런데 왜 끼어들어? 너는 네 목숨이 안 소중해?”
“그 덕분에 네가 살았잖아. 나는 그게 가장 다행이야.”
다행이다.
유리나는 지난 이틀간 그 단어를 수도 없이 들었다. 카르티아 후작, 세 오빠들, 베시, 별장의 고용인들, 심지어 황태자에게서까지.
그들은 레이너드의 부상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 덕분에 유리나가 멀쩡해서 다행이라고 했다. 레이너드가 아니었다면 유리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라는 말도 함께.
정작 당사자인 유리나는 그게 왜 다행인 건지 궁금했다. 그녀는 그저 레이너드를 희생양 삼아 화를 면했을 뿐이다. 심지어 레이너드는 이틀째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건 다행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젠 레이너드마저 그런 소리를 하고 있다. 그것도 지난 이틀간 그의 옆에서 그의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지켜보던 유리나의 앞에서. 그게 유리나의 신경을 갉작갉작 갉아먹었다.
그는 그래선 안 되는 거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적어도 당사자인 그는 그런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유리나는 치솟는 감정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게 왜 다행이야? 너는 네 몸 다친 것보다 내가 무사한 게 더 중요해?”
유리나는 그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어떤 말인지 대충 예상이 갔기 때문이다.
“왜 거기서 네가 끼어들어. 왜 나 대신 네가 다쳐, 왜.”
“유리나.”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 내가 대체 뭐라고.”
힘겹게 참은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입술을 깨물며 참아 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레이너드에게서는 대답이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대답 대신 유리나에게 천천히 다가와 계속 볼을 닦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유리나가 벗어나려고 하자 그녀를 안고 있는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약속했잖아.”
“뭐?”
유리나는 그의 팔을 떼어 놓는 것도 멈추고 레이너드를 돌아보았다. 그가 유리나의 뺨을 닦아 주며 차분히 설명했다.
“기억 안 나? 내가 너 지켜 주겠다고 했잖아.”
한껏 격양된 유리나의 목소리와 다르게 레이너드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겨울이면 춥고, 봄이면 꽃이 핀다는 것처럼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유리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무슨 약속을 언급하고 있는지 그녀도 잘 알았다. 아마 그의 열세 번째 생일날 그가 했던 약속일 것이다.
―유리나, 넌 내가 지켜 줄게.
데프론 후작을 만나 덜덜 떨고 있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그가 속삭였던 말. 다만 이 상황에서 그 약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가 한 약속뿐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유리나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조건을 붙였다.
―오늘 일을 꼭 기억해. 그리고 훗날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넌 날 꼭 구해 줘야 해. 오늘 내가 널 구한 것처럼.
모든 게 어릴 적 두 사람이 했던 약속대로 흘러갔다. 그녀는 그의 목숨을 구해 준 대가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지켜 달라고 요구했고, 그는 그러겠노라고 했다.
당시 그녀가 말했던 말의 진짜 의미는 날 배신하지 말고, 데프론 후작에게서 지켜 달라는 뜻이었지만, 그가 그런 의미를 알 리가 없었다.
그 덕분에 유리나는 살아 있었다. 모든 것이 원하던 대로 됐는데 왜 이렇게 절망적인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란 생각은 못 했었나?’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레이너드에게 자신을 구해 달라고 말했을 때, 그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었나.
잠깐의 생각 끝에 결론이 나왔다.
“나는 한 번도 네가 잘못되는 것을 바란 적이 없어.”
위선자, 위선자, 위선자. 누군가가 머릿속에서 그렇게 외쳤다.
그래, 솔직히 레이너드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가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무려 정치적으로 엮인 일이었다. 데프론 후작이 후원할 ‘카리온’을 미리 빼앗아 온다고 해서 데프론 후작이 카르티아 가문이나 유리나의 최후를 노리지 않을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카리온’이 없어진다뿐이지, 데프론 후작의 위협은 아직 그대로였다. 만약 그가 유리나를 노린다면 그녀의 옆에 있는 방해물, 레이너드를 충분히 노릴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맹세코 그가 잘못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나 때문에 네가 잘못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그깟 약속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
“약속 때문만이 아니야.”
레이너드가 손을 내려 유리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가 유리나의 머리에 턱을 괴자 유리나는 완전히 그의 품에 폭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약속이 아니라도 난 똑같이 했을 거야. 너도 알잖아.”
“왜?”
“네가 죽는 건 상상할 수가 없으니까.”
“…….”
“유리나, 네가 없으면 나도 없어.”
낭만적인 말이었다. 네가 내 세계의 전부라는 헌신과 동시에 소유욕을 드러내는 말. 유리나의 또래 여자아이라면 듣자마자 설레며 얼굴을 붉혔을 그 말.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더라도 유리나 또한 저 말에 동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뭐 해.’
유리나는 저 말에 설레기는커녕 온몸에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저 말 속에 담긴 속뜻을 눈치챘기 때문에.
“그 말은 나만 무사하면 넌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뜻이야?”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응. 난 괜찮아. 너만 무사할 수 있다면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차라리 망설이는 척이라도 좀 했다면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텐데. 유리나는 입술을 짓씹다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다시 제게로 다가오는 레이너드의 어깨를 밀어내며 그를 노려보다시피 바라보았다.
“그럼 나는?”
고작 그 짧은 질문을 건넸을 뿐인데 다시금 감정이 요동쳤다. 유리나는 감정을 못 이겨 끅끅거리면서도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없으면 너도 없다고 그랬어? 나만 무사하면 그걸로 된다고? 그럼 나는?”
“…….”
“네가 없으면 난 멀쩡할 것 같아? 넌 지금 내가 괜찮은 걸로 보여?”
유리나는 결국 그의 셔츠를 꽉 움켜쥐고 고개를 떨궜다. 눈물이 다시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대답해 봐. 네 눈엔 지금 내가 괜찮은 걸로 보여? 내 꼴이 멀쩡해 보이냐고. 정말로 그렇게 보여?”
지난 이틀 동안 유리나는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생활을 했다.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넘길 수 없었고, 초조해서 잠도 잘 수 없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보고 살아 있는 거냐고 물어본다면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동안 유리나는 차라리 자기가 다쳤어야 했다는 자책을 수도 없이 했다. 그건 그녀가 지금껏 갖고 있던 생각과 전혀 상반된 생각이었다.
‘유리나’로 살아오면서 그녀는 줄곧 자신의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전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그녀에게 가장 끔찍했던 기억은 7년 전,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혼자 죽어 가던 기억이었다.
벌써 7년.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유리나는 이제 한국에서의 기억이 거의 생각나지 않았다. 그토록 사랑했던 엄마의 얼굴이나 목소리마저 희미해져서 떠올리고 싶어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죽는 순간의 기억은 달랐다. 잊으려고 노력하는데도 이따금씩 떠올라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 정도로 끔찍했던 기억이다.
그런데 피를 뒤집어쓰고 쓰러지는 레이너드를 보는 순간, 유리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누군가의 부재가 제 죽음보다도 두려울 수 있다는 것을.
텅 빈 공부방, 채워지지 않은 글씨 연습장, 먼지가 쌓여 가는 책 더미, 혼자 하는 식사, 혼자 갖는 다과, 잠들기 전까지 혼자 침실에서 보내는 시간.
그 공허함을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건, 언젠간 레이너드가 돌아올 거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5년만 기다리면, 3년만 기다리면, 앞으로 1년만 기다리면……. 그녀는 그가 떠난 이후로 줄곧 온기 하나 없는 공부방에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레이가 죽는다면?’
그건 상상만으로도 목이 조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끔찍했다. 만약 그가 자신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고통에 시달릴 것 같았다.
“네가 저렇게 된 후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가 죽는 악몽을 꿨어. 전에 네가 없는 곳에서 내가 죽는 악몽을 꿨다고 했지? 내 꿈에선 네가 나 대신 죽는 모습이 나와. 나 때문에 네가 죽어. 그런 모습을 보고서 넌 내가 멀쩡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유리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생각하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게 어떻게 다행이야. 그게 어떻게 날 위한 일이야. 어떻게…….”
“…….”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앞에서 넌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어!”
지난 이틀 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말이 수없이 쏟아졌다. 유리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레이너드는 그 자리에 유리나를 따라 시선만 내렸다. 많은 질문에도 그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내뱉은 속마음은 아니었기에 유리나는 그의 침묵에 화가 나거나 초조하지는 않았다.
레이너드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유리나를 바라보다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를 끌어안았다. 유리나는 이번에도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가 힘주어 안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더 이상 그녀가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작고 여린 아이가 아니었다. 유리나는 결국 그를 밀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는 절대 그런 말 안 할게.”
“약속해. 다음부터는 안 그러겠다고.”
“그건 약속 못 해.”
“왜…….”
“또다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난 똑같은 선택을 할 거니까.”
레이너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속삭였다. 그 대답에 망설임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유리나는 제 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지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유리나.”
“날 정말로 좋아한다면 그러지 마.”
순간, 레이너드가 놀란 듯 숨을 급하게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도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어, 어…….” 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내뱉다가 유리나의 어깨를 밀어내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은 물론,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레이너드는 손바닥으로 계속 눈물을 닦아 내는 유리나를 한 번, 제 발밑을 한 번, 또 유리나를 한 번, 발밑을 한 번 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지만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고 싶은 거겠지. 조금 전에만 해도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 같은 말을 한 주제에 정말로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모를 리가 없잖아.”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자신에게 갖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그가 그녀에게 보이는 표정, 말, 행동의 의미는 명백했다. 그건 단순히 어릴 적부터 친밀하게 지내고, 유일하게 따랐던 또래 아이에게 보이는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과했다.
그렇지만 유리나는 그가 은근히 제 속내를 내비칠 때마다 애써 그 감정들을 외면했다. 자신은 그의 애정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레이너드를 찾고, 그를 후원해 주겠다는 명목으로 데려왔다. 그때, 그녀는 그의 환심을 사겠다며 계획적으로 행동했다.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었고, 그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지원해 주고, 그를 교육시키고…….
그 모든 건 다 그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서였다.
처음 유리나가 원했던 대로 그는 착실히 그녀에게 마음을 열고, 종국에는 단순한 호감을 넘어선 감정을 가지게 됐다. 자신을 향한 그의 감정이 커질수록, 유리나의 죄책감도 커져 갔다.
이 모든 것을 이기심으로 시작한 자신이 순수하게 그의 마음을 받아도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를 향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도 꽉꽉 눌렀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조금 더 명확히 깨달았다. 레이너드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는 것을. 자신의 죽음보다 그의 죽음을 더 두려워할 정도로.
지금껏 그를 이용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도 외면해 왔다. 그렇지만 어차피 이기심으로 시작한 일, 조금 더 이기적이 된다고 해서 뭐가 문제일까 싶었다.
“정말로 날 위한다면 그러지 마.”
“…….”
“네가 너보다 내가 더 중요한 것처럼 나도 나보다 네가 더 소중해.”
“그 말은…….”
“좋아해, 레이.”
이 고백 또한 그녀의 이기심이었다. 네 마음이 나와 같다면, 그래서 정말 날 생각한다면 넌 내가 말하는 대로 해야 한다. 그런 족쇄를 또 한 번 그에게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지 마.”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이토록 이기적이었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지만, 이 고백은 순수하지 못했다.
빨개진 얼굴로 숨을 고르던 레이너드가 이번에는 숨을 멈췄다.
장작을 잔뜩 때어 더운 방 안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레이너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숨만 고르고 있었고, 유리나는 속에 계속 담아 두던 말을 모두 다 꺼낸 탓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여전히 볼이 불그스름한 레이너드가 유리나에게 한 발짝 다가오며 물었다.
“정말…… 이야?”
“응.”
“정말?”
“응.”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진하게 입을 맞췄다. 어찌할 바를 몰라 손만 꼼지락거리던 유리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가 밀어붙이는 힘이 강해 몸이 점점 뒤로 밀려났다.
레이너드에게 더욱 바짝 매달려 버텨 보려고 했지만, 결국 그녀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카펫 위에 눕게 되었다. 완전히 눕기 직전, 레이너드가 그녀의 뒤통수 뒤에 손을 갖다 대며 충격을 줄여 주었다.
호흡과 호흡이 거칠게 얽혔다. 미열이 남아 있는 레이너드의 몸은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유리나의 호흡이 거칠어지면 잠시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입을 맞췄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레이너드는 제 품 아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숨을 고르는 유리나의 코끝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좋아해, 유리나. 네가 날 좋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이기심으로 고백을 한 유리나가 또다시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행복한 얼굴로.
* * *
“유리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감은 눈을 뜨던 유리나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화들짝 놀라 몸을 굳혔다. 레이너드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의 들숨이 뺨에 닿을 정도로.
“잘 잤어?”
열 기운 때문에 말라 거칠어진 레이너드의 입술이 유리나의 이마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유리나는 이 모든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눈만 깜빡이다가 주위를 살폈다.
레이너드의 심신 안정을 위해 쳐 둔 두툼한 커튼 사이로 언뜻 불그스름한 햇빛이 보였다. 베시나 다른 하녀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왜 여기 있어?’
레이너드를 혼자 놔둘 수 없었던 까닭에 그녀는 지난밤 그와 베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침대맡에서 자리를 지켰다. 레이너드가 깨어난 것을 보았다고는 해도 완벽하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이틀이나 잠을 제대로 못 잔 데다가 레이너드가 깨어났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렸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에 얼굴을 묻고 잠을 청했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런데 왜 침대에 누워, 그것도 레이너드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자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레이너드와 한 침대에서 자 본 적이 예전에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그건 7년 전, 그것도 열두 살, 열 살 꼬맹이들의 이야기다.
사실, 아무리 어렸다고 하더라도 귀족가에서 열 살은 그다지 어리지가 않았다. 7년 전 어렸을 적이라고 해도 가족이 아닌 이상 그와 한 침대에서 자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그녀는 그를 애 취급했고, 그녀를 말려야 할 부모는 가능하면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놔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소식에 후작 부인은 ‘벼락이 치면 엄마에게 오더니 이제는 친구에게 가는구나.’라고 서운해하기는 했어도 두 사람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물론 천둥 번개를 무서워한 것이 유리나가 아니라 레이너드라는 것까지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크고 난 다음에도 허울 없이 지내긴 했다. 레이너드는 그녀만 보면 반가워서 품에 안거나 이마나 손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했다.
그래, 솔직히 유리나는 그동안 레이너드와 격식 없이 지내 왔던 걸 인정했다.
그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껴안거나 손이나 이마에 입을 맞추는 행동은 허물없이 지낸 소꿉친구의 행동이라고 하기엔 조금 과했다. 그래도 그것이 싫지가 않아서 그냥 놔뒀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선은 지켜야 하지 않나. 아무리 허물없이 지냈다고 하더라도 이 나이를 먹고 한 침대라니.
놀란 눈과 마주친 레이너드가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더 재우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오면 네가 곤란할까 봐 어쩔 수 없이 깨웠어.”
두 사람이 같이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이면 곤란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가 왜 여기서 자고 있어? 난 분명히…….”
“불편해 보여서 내가 침대로 옮겼어.”
그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사람마냥 여상하게 말했다.
“침대에 눕히는데도 깨지 않고 곤히 자는 걸 보니까 많이 피곤했던 것 같아. 대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안 자고 뭐 했어?”
“네가…….”
안 깨어나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레이너드에게 말릴 뻔하던 유리나는 다시 한번 상황을 깨닫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레이너드가 허리를 감싸 안는 바람에 그의 몸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충격이 있었을 텐데도 그는 아프다는 기색 없이 그저 웃었다. 오히려 그의 상태를 보며 전전긍긍한 건 유리나였다.
“괜찮아? 아프진…….”
“괜찮아. 이 정도는 별거 아냐.”
“그렇다면 다행인데, 이것 좀 놔 봐.”
유리나는 제 허리에 감긴 그의 손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레이너드는 보란 듯이 그녀를 제 품에 꽉 끌어안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아예 긴 다리로 그녀의 다리를 옭아맸다.
“조금만 더.”
그가 어리광을 부리듯 유리나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레이너드가 늘 그녀에게 하던 행동이었다.
어렸을 적에도, 어느 정도 커서 재회했을 때에도. 그가 그럴 때면 유리나는 어린아이 달래 주듯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거나 등을 토닥여 주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행동을 더 이상 소꿉친구의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어젯밤, 좋아한다고 먼저 고백을 할 때는 덤덤했는데 이렇게 레이너드와 마음이 통하고, 마주 보고 있으니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평생 살며 남자에게 부끄러워할 성격이 아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목까지 붉어진 유리나를 발견한 레이너드가 소리 내어 웃었다.
“토마토 같아.”
레이너드가 진짜 토마토를 먹는 것마냥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을 때, 유리나는 그가 환자라는 것도 잊고 어깨를 홱 밀었다. 그러고는 레이너드가 잡을 새도 없이 후다닥 침대를 빠져나갔다.
서둘러 방을 나가는 그녀의 등 뒤로 레이너드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 * *
레이너드는 문이 꽝 닫히는 것을 보며 소리 내서 웃었다. 귀족가에서 나고 자란 탓인지 예법에 철저한 유리나는 문 하나도 소리 내서 닫는 일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나 크게 소리를 냈다면 평소 그녀답지 않게 당황했다는 뜻일 것이다.
같이 침대에 누워서 잠 좀 잔 게 뭐라고…… 라고 하기엔 이미 그의 두 귀도 빨개져 있었다. 유리나는 아마 경황이 없어서 못 알아챈 것 같았지만 사실 그도 유리나와 누워 있는 동안 꽤 긴장을 했다.
긴장을 했다 뿐인가. 유리나를 옆에 눕힌 뒤로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이처럼 무방비하게 쌕쌕 잠들어 있는 말간 얼굴을 앞에 두고 어떻게 잘 수 있을까. 자려고 눈을 감아도 자꾸 신경이 유리나의 숨소리나, 따뜻하고 보드라운 몸으로 향하여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희미한 촛불에 어른거리는 부어오른 입술과 하얀 목덜미. 꿈속에서도 가끔 나왔던 얼굴이지만, 이제 제 것이라 생각하니 배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본능적인 욕심을 참기 힘들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행여나 자고 일어났다간 모든 것이 꿈처럼 사라질까 두려워 잠을 청할 수 없었다. 그에게 그 모든 것은 꿈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좋아한다고 속삭이던 목소리도, 숨이 가쁠 때까지 물고 빨던 그 보드라운 입술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다급하게 입을 맞추고, 유리나가 숨 가빠하면 잠시 입술을 떼어 냈다가 숨을 고르면 다시 입을 맞추고, 그걸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유리나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한참을 웃던 그는 오른쪽 어깨의 통증을 느끼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유리나에게는 괜찮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근육통이 심했다. 의원에게 말해 진통제라도 받으면 좀 나아질 테지만 그랬다간 유리나가 자책하며 그럴 수가 없었다.
‘유리나가 나가서 다행이네.’
만약 계속 옆에서 그를 살피고 있다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또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안절부절못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유리나는 우는 모습도 뭇 남성의 심금을 울릴 정도로 예뻤지만, 가급적이면 우는 모습은 보고 싶지가 않았다.
레이너드는 숨을 고르며 통증을 참다가 침대 헤드에 나른하게 몸을 기댔다. 잘 익은 토마토처럼 빨개졌던 유리나의 얼굴을 떠올리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귀엽다니까.’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이 좋아한다는 말을 먼저 꺼냈으면서, 유리나는 그 후 그를 다르게 대했다. 정확히는 그가 붙잡고 입맞춤을 한 다음부터였을 것이다.
레이너드는 좋아한다고 고백하던 유리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이 조금 전 유리나 못지않게 빨개졌을 거란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두 뺨이 화끈거렸다.
* * *
한 시간 정도 뒤에 돌아온 유리나는 따뜻한 물에 씻고 단장을 했는지 나갈 때보다 혈색이 돌았다. 그녀는 침대맡에 앉으면서도 레이너드의 눈을 보지 않겠다는 양 쭉 고개를 내리고 있었다.
레이너드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야 아무 거리낌 없이 저 얼굴을 볼 수 있게 됐는데. 이제야 마음이 통했는데.
“유리나.”
“왜?”
대꾸를 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아래를 향해 있었다.
“나 좀 봐.”
그래도 그녀는 고집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불만스럽게 쳐다보던 레이너드가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식사 가져왔어요.”
베시의 목소리였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손을 확 쳐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와.”
꽤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유리나는 베시가 들어오기도 전에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주방에서 특별히 신경 써서 아침을 준비했어요. 레이너드 님도 레이너드 님이지만, 아가씨께서도 꼭 드셔야 해요.”
두 사람의 사정을 모르는 베시는 유리나와 레이너드의 식사가 담긴 트레이를 방 한구석에 있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레이너드는 다소 뚱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베시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럼 전 옆방에 가 있을게요.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부르세요, 아가씨.”
베시는 눈시울이 붉어진 눈으로 레이너드를 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을 완전히 둘만 놔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문은 살짝 열어 놓았다.
사실 제대로 한다면 베시가 한쪽 구석에서 지키고 있어야 했지만 그녀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이미 두 사람이 어떤 관계가 되었는지 몰랐으니 가능한 일일 것이다.
“유리나.”
레이너드는 여전히 딴청을 피우는 유리나와 눈을 마주치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지만, 그녀는 본 척도 하지 않고 테이블에서 수프 그릇을 가져왔다.
“뭐 좀 먹어야지. 그래야 빨리 나아.”
“너는? 너도 통 못 먹은 것 같은데. 잠도 못 잔 것 같더니 식사도 안 한 거지?”
묻는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뾰족해졌다. 그가 쓰러진 게 걱정된다고 하더라도 식사도 거르고 잠도 안 자다니. 조금이라도 늦게 깨어났다가 유리나가 쓰러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눈앞이 아찔했다.
“계속 먹었어. 착실히 식사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먹어.”
레이너드는 부쩍 날카로운 유리나의 턱선을 보며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유리나는 수프 그릇과 함께 스푼을 레이너드에 건네주려다 말고 눈을 살짝 찌푸렸다.
“많이 뜨거운데 괜찮겠어?”
“식혀 줘.”
“응?”
“뜨거울까 봐 걱정되면 식혀서 줘.”
괜한 투정이었다. 원래라면 ‘네가 식혀서 먹으면 되잖아’라며 퉁명스럽게 말했을 유리나가 잠시 입술을 오므리더니 수프 접시 뚜껑을 열어 스푼으로 수프를 뒤적였다.
레이너드는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채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유리나는 그 시선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집중해서 수프를 식혔다. 결 좋은 금빛 머리칼은 그녀의 가느다란 옆얼굴을 타고 흘러내렸고, 고운 이마는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후, 후 수프에 바람을 불 때마다 작게 오므라드는 도톰한 입술이 예뻐 보이면서도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목이 탄다. 물로는 채워지지 않을 갈증이 일었다. 레이너드는 혀로 마른 입술을 쓸었다.
“좀 식은 것 같아. 이제 먹어도 될 것…… 왜 그렇게 봐?”
그에게 수프 그릇을 내밀던 유리나가 그의 표정을 살피며 눈을 살포시 찌푸렸다. 아무래도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쓰인 모양이다. 유리나가 어떤 표정을 지어도 마냥 귀엽게 보이는 것을 보면.
하긴, 처음 봤을 때도 유리나는 그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을 정도로 예쁘기는 했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가 않았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유리나는 수프 그릇을 내려놓고 레이너드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레이너드는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쥐며 계속 그의 이성의 끈을 건드리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유리나는 처음엔 당황해하며 몸을 경직시키는 듯했지만 이내 그의 입맞춤에 응했다. 레이너드는 그녀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깨물고 빨아들이다가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다급하게 혀를 집어넣었다.
아까 초콜릿을 몇 개 집어먹은 유리나에게서는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이 났다. 유리나의 허리를 안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잠시 후 그에게서 떨어진 유리나가 숨을 할딱이며 그에게 수프 그릇을 내밀었다. 두 볼은 분홍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얼른 먹어.”
이따가 먹어도 되는데. 레이너드는 입 안에 맴도는 말을 꾹 참고 그릇을 받아 드는 대신 입을 벌렸다.
“아.”
“응?”
“먹여 줘.”
유리나의 얼굴에 잠깐 당혹스런 빛이 지나갔다.
“나 오른쪽 어깨를 다쳤잖아. 먹기 힘들 것 같아. 먹여 줘.”
유리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오른쪽 어깨를 바라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 나았다고 하지 않았어?’라고 묻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욱신거리는 근육통이 있다고는 하지만 직접 식사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릇을 들고 먹기에는 힘들 것 같아. 그러니까, 아.”
유리나는 난감하다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아프다는 말에 걱정을 하는 걸까. 걱정을 끼치는 건 싫어서 레이너드가 직접 먹겠다며 그릇을 가져오려고 할 때, 유리나가 스푼을 들었다. 그녀는 스푼으로 양송이 수프를 떠서 다시 한번 호호 불더니 그에게 내밀었다.
“아, 해.”
아, 안 되겠다. 레이너드는 스푼을 무는 대신 유리나의 입술을 다시 베어 물었다.
* * *
이튿날 점심 무렵 별장으로 데이브가 찾아왔다. 사고가 일어난 날, 마법 통신구로 후작의 연락을 받고 바로 제너스 산맥으로 달려온 데이브는 가문을 대표하는 마법사로서 사고 현장을 다녀왔다고 했다.
레이너드에게 줄 빵에 버터를 바르고 있던 유리나는 방으로 들어오는 데이브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색하며 그를 반겼다.
“아가씨.”
“데이브, 어서 와.”
유리나는 여분의 의자를 침대 옆으로 끌어와 데이브에게 자리를 권했다.
“아버지에게 다녀오는 길이야?”
“네. 후작님과 릭스 도련님께 먼저 보고를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수도에서 제너스 산맥까지 정신없이 달려왔는지 그의 턱은 수염을 제대로 깎지 못해 거뭇거뭇했다. 데이브는 식사를 권하는 유리나의 말에 정중히 거절하며 레이너드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도 레이너드의 안색은 하루 만에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아끼는 제자의 큰 부상에 걱정을 많이 한 것인지 데이브의 눈에 금방 눈물이 고였다. 수프 접시를 옆으로 치우며 레이너드가 멋쩍은 듯 볼을 매만졌다.
“그렇게 보실 필요 없어요.”
“못난 것.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마법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다치기나 하고. 난 그렇게 가르친 적 없는데, 아카데미에서 순 헛배우고 왔어.”
“언제는 저 같은 천재는 없다고 하셨잖아요. 조기 졸업까지 했는걸요.”
“하여튼, 입만 살아서.”
투덜대는 말과는 달리 데이브는 어두운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차마 레이너드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는지 양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로 물었다.
“몸은? 많이 다쳤다고 들었는데 어때?”
“보다시피 멀쩡해요. 정말 괜찮은데 유리나도 그렇고, 왜 다들 그렇게 걱정하는지 모르겠어요.”
레이너드는 다쳤던 오른쪽 팔을 들어 올리며 너스레를 떨다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사소한 변화였지만 유리나는 그 표정을 기민하게 눈치채고 그의 몸을 살폈다.
“괜찮아?”
“괜찮대도. 살짝 근육통이 있어서 그런가 봐.”
레이너드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유리나의 눈가에 입을 한 번 맞춘 뒤 데이브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아직도 손에 얼굴을 묻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 유리나의 입에도 입을 맞췄다.
레이너드는 자신을 혼내듯 눈썹을 치켜세우는 유리나에게 웃어 보인 뒤 데이브에게 물었다.
“사냥 대회 장소에 다녀오신 거죠? 뭐 좀 알아낸 게 있어요?”
“맞아, 데이브. 알아낸 것 좀 있어? 아버지 말로는 마법이 개입되었다고 하던데.”
유리나는 오늘 아침, 카르티아 후작과 릭스에게서 들은 상황을 떠올렸다. 그들은 처음엔 유리나를 배려해 주겠답시고 말을 안 해 주다가 그녀가 끈기 있게 묻자 간략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마법진이 훼손됐다고 했지.’
사냥 대회가 이뤄지는 사냥터와 달리, 가문의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는 막사 주변은 방어 마법진으로 철저하게 통제가 된다. 황태자도 머무는 곳이라 황실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치는 만큼 지금껏 위협적인 요소가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간혹 몸집이 작은 쥐나 토끼 같은 동물이 들어오는 경우는 있다고 하지만 늑대나 곰 같은 짐승은 절대 들어오지 못한다. 그런데 그 마법진을 뚫고 늑대가 한 마리도 아니고 다섯 마리나 들어오다니.
황실 마법사가 늑대가 최초로 목격된 곳을 자세히 살펴본 결과 그 주위에 마법진이 인위적으로 훼손된 흔적이 있다고 했다. 그걸 황실 소속 마법사들이 눈치채지 못한 것을 보면 꽤 실력 있는 마법사의 짓이라고 했다.
‘게다가 늑대가 날 노리고 있었다고 했어.’
이건 아직 확실히 결론이 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아론 경의 말에 따르면, 다섯 마리나 되는 늑대 떼가 오로지 유리나를 향해 돌진했다고 증언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과 함께.
유리나가 몸집이 작고 약해 보인다고 하더라도, 기세등등하게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이 있는데 그들을 무시하고 유리나에게 달려드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마법진이 훼손된 곳으로 보란 듯이 늑대 떼가 달려든 것도 퍽 수상하다고 했다.
‘레이의 마법이 먹히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하고.’
그래서 카르티아 후작은 조심히 늑대도 마법에 걸려 있던 것은 아니었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몇몇 마법사들은 말이 안 된다며 코웃음을 쳤지만, 황태자인 커티스는 그 의견을 제법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결국 커티스의 명령하에 황실 기사단은 마법진을 훼손한 배후를 추적하면서도, 늑대에게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인지도 조사하고 있었다.
베시가 가져다준 주스로 목을 축인 데이브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알아낸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알아낸 게 아무것도 없다니.”
황실 기사단은 제국에서도 가장 인재들만 입단할 수 있는 기사단이다. 그들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리나도, 카르티아 후작도 배후를 금세 잡아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여태껏 알아낸 게 아무것도 없어?
레이너드 또한 의아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알아낸 것이 아무것도 없다뇨? 황실 기사단이 조사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법진에는 확실히 흔적이 남아 있는데, 늑대에는 별다른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어.”
“스승님이 직접 확인하셨습니까?”
데이브가 굳은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어. 황실 기사단의 일이라며 아예 출입 자체를 못하게 하더군. 그나마 기사단 쪽에 아는 얼굴이 있어서 이 정도 정보도 겨우 듣고 온 거야.”
레이너드가 심각한 얼굴로 잠시 고민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제가 직접 가 보겠습니다.”
“안 돼.”
베시에게 접시를 치우라고 지시하던 유리나가 침대를 나오려는 그의 팔을 잡았다.
“그 몸으로 어딜 가려고 그래?”
“이제 다 나았어. 의원도 이제 움직이는데 전혀 이상이 없다고 그랬잖아.”
“그래도 안 돼.”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다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놓았다.
“잠깐 가서 보고만 올게. 마법도 안 쓰고, 무리도 안 할게.”
“데이브에게 맡기면 되잖아.”
“내가 직접 가서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그래.”
유리나는 그의 손에 깍지를 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나와 같이 가.”
“넌 여기 있어.”
“레이.”
“같이 가면 내가 불안해서 그래. 넌 그냥 여기 있어. 응?”
그의 목소리와 표정은 부탁이라기보다는 애원 조에 가까웠다. 유리나는 제 볼을 문지르며 웃어 보이는 레이너드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데이브를 번갈아 보다가 하는 수 없이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 * *
마차를 타고 사고 현장으로 향하는 내내 레이너드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유리나와 떨어진 지 고작 삼십 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계속해서 그녀가 생각났다.
‘괜찮겠지?’
현재 카르티아 저택은 사고 이후로 더욱더 철저히 경계를 하고 있었다. 침입자를 대비하여 데이브가 저택을 나서기 전 별장 주변에 알람 마법을 걸어 놓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유리나의 옆에 있고 싶었는데 상황이 돌아가는 꼴을 보니 도무지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배후를 찾아 싹을 잘라 내지 않으면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이번 일이 유리나를 노린 일이었다면, 배후를 잡지 못한다면 언제고 다시 그녀를 노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레이너드는 살짝 떨리는 두 손을 꽉 쥐었다. 머리로는 안전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편안하지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브가 넌지시 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냐?”
레이너드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괜찮을 이유가 있나요. 다치자마자 치료를 받았는데.”
“후유증은?”
“없어요. 어제만 해도 근육통이 살짝 있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손을 떨고 있는 것 같은데…….”
데이브의 시선이 레이너드의 무릎 위에 놓인 손으로 향했다. 레이너드는 재빨리 손을 등 뒤로 감췄다.
“부상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이건 그냥…….”
그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부상 후유증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이건 그저 초조해서 그런 것이다.
레이너드는 데이브를 향해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이고는 목에 차고 있던 목걸이를 꺼내 살폈다. 유리나에게 주었던 것과 똑같이 생긴 붉은 펜던트 목걸이였다. 며칠 전만 해도 투명했던 펜던트였는데 지금은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처럼 금이 잔뜩 가 있었다.
이걸 보니 유리나와 마음이 통해 들떴었던 기분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분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유리나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1년 반 전 유리나에게 주었던 목걸이에는 한 가지 기능이 더 있었다. 바로 알람 기능. 유리나가 목걸이에 새겨져 있는 마법을 쓰면 바로 그의 목걸이로 신호가 오는 방식이었다.
크론 왕국에서 있던 지난 1년 반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목걸이를 확인했다. 목걸이가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안심할 수 있었다. 유리나가 죽는 악몽을 꾸고 새벽에 깨어나더라도 이 목걸이를 보면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슴을 쫓던 도중 전혀 예상치 못하게 알람이 왔을 때 숨이 턱 멎는 것 같았다. 다른 생각 할 것도 없이 바로 유리나에게 순간 이동을 하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얼마나 놀랐던가.
유리나가 그가 제국으로 돌아왔다고 이 목걸이를 풀어놓고 왔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그나저나 아카데미에서 뭘 배운 거냐? 늑대 하나 처리하지 못해서 이틀이나 쓰러지다니. 어디 가서 내 제자라고 하지 마.”
심각하게 인상을 쓰고 있는 레이너드를 보던 데이브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일부러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레이너드는 그 농담에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뭐가?”
“저는 분명 공간 이동을 해서 늑대가 유리나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고 물리 방어 마법을 썼어요. 워낙 급한 상황이라 늑대에게 공격 마법을 쓰기보다는 일단 유리나를 무사히 구해 놓고 늑대를 처리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물리 방어 마법이 먹히지 않았어요.”
데이브의 얼굴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입을 꾹 다물고 안경테를 매만지던 그는 앓는 소리를 한 번 낸 뒤 입을 열었다.
“짐승이 달려들면 당연히 물리 방어 마법을 써야지. 아카데미에서도 그렇게 가르쳤고.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네가 실수를 할 리는 없으니 확실히 뭔가 이상하긴 이상하네.”
“더 이상한 건 뭔지 아세요? 늑대에게 물리고 난 뒤 혹시나 해서 마법 방어 마법을 펼치니까 통했어요.”
“뭐?”
“물리 방어 마법이 아니라 마법 방어 마법이 통했다고요! 세상에, 그 자리에 어떤 마법사가 늑대에게 마법 방어 마법을 쓰겠어요? 늑대가 유리나만 노리던 것도 그렇고, 물리 방어 마법이 통하지 않도록 수를 쓴 것도 그렇고, 외부적인 요소가 개입된 것이 분명해요. 그런데 황실 기사단은 왜 아직도 찾아내지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숨을 가쁘게 쉬며 씩씩거리는 레이너드의 어깨를 데이브가 조심스럽게 잡았다.
“흥분하지 마.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는데.”
“제가 어떻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유리나가 하마터면 다칠 뻔했는데! 제가 조금만 늦었어도……!”
레이너드는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눈앞에 있는 남자가 존경하는 스승인 데이브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무거워진 마차 안에는 레이너드의 거친 숨소리와 요란스러운 바퀴 소리만이 잠시 울려 퍼졌다.
‘다 큰 줄 알았는데, 여전히 아이 같군.’
데이브는 레이너드의 어깨를 토닥이며 어릴 적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레이너드는 처음 마법을 배우기 시작할 적 마법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는다며 종종 스스로에게 화를 냈다.
―얼른 마법을 익혀서 유리나를 지켜 줘야 한단 말이에요!
바라던 대로 자신의 마법으로 유리나를 지켜 냈으면서도 그는 이 위험을 원천 차단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레이너드가 마음을 추스르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을 달리던 마차가 멈췄다. 데이브는 마차 밖을 바라보다가 문을 열었다.
“레이너드, 가서 뭘 봐도 흥분하지 말거라.”
레이너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이미 한 차례 정리된 상태였는데도 막사 근처 풍경은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처참했다. 늑대의 손톱에 찢어져서 너덜너덜해진 막사, 이곳저곳에 굳어 있는 검붉은 선혈, 조사를 위해 남겨 놓은 늑대의 사체.
레이너드가 늑대를 노려보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데이브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레이너드.”
데이브가 레이너드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눈동자 색, 조금 더 평범하게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
레이너드의 눈 색은 사냥 대회 날과 마찬가지로 보라색이었다. 여전히 그가 ‘베아투스’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유리나와 카르티아 후작은 상황이 진정되고 다음 사교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라색도 눈에 너무 띄어. 가능하면 눈에 안 띄는 게 좋아.”
레이너드는 괜히 제 눈가를 더듬거리며 피식 웃었다. 데이브가 보라색 눈을 보면 난리가 날 거라고 했던 유리나의 말이 떠오른 탓이다.
“어쩔 수가 없어요. 보라색으로밖에 변하지 않는걸요.”
아니나 다를까, 데이브가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마법을 거부하는 건가?”
“그런 것 같아요. 조금만 방심하면 그나마 마법이 풀려 버리거든요.”
“재밌네. 돌아가면 한번 알아봐야겠어.”
“스승님께서 관심을 보일 것 같았어요.”
레이너드는 피식 웃어넘겼다. 데이브는 따라 웃으며 제 로브를 벗어 레이너드에게 입혀 주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얼굴을 가리는 게 좋겠다. 지난번에 네 얼굴을 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순간 이동을 쓴 것을 봤으니 마법사라는 것을 눈치챘을 거야.”
레이너드는 순순히 로브의 모자를 뒤집어썼다. 그것으로는 모자란 것 같아서 앞머리로 눈을 가리자 보라색 눈동자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데이브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레이너드를 이끌었다.
황실에서 주최한 행사에서 일어난 사고인 만큼, 조사 또한 황실 기사단에서 담당했다. 데이브와 레이너드가 사건 현장으로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자 황실 기사단 정복을 입은 기사 하나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죄송하지만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데이브가 발끈해서 입을 열려는 레이너드의 앞을 막으며 대신 대답했다.
“카르티아가에서 나왔습니다. 카르티아 후작님께서 조사가 진전됐는지 알고 싶어 하십니다.”
카르티아라는 말에 흉흉했던 기사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단호한 표정으로 길을 막았다.
“아직까지 특별히 발견한 건 없습니다. 조사가 진전되면 카르티아가로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제가 한번 가서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외부인은 출입하실 수가 없습니다.”
“카르티아가 사람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저희도 함께 조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말과 달리 기사에게선 미안하다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레이너드는 데이브를 밀치며 기사 앞에 섰다. 뒤에서 데이브가 나서지 말라며 팔을 잡아끌었지만 그는 꿋꿋하게 기사를 쳐다보았다.
“사고가 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알아낸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지체하다가 배후 세력이 무슨 짓을 벌일지 누가 압니까?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마냥 기다린다고 해서 원하던 소식을 들을 거란 생각도 들지 않고요. 들여보내 주십시오.”
기사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그 말은 지금 황실 기사단의 능력을 의심한다는 말입니까?”
“배후를 찾아낼 능력이 있었다면 이미 찾아내고도 남았겠지요.”
기사가 적의를 숨기지 않고 레이너드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는 곧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니 그런 말을 잘도 하는 거겠지. 황실 기사단의 능력을 의심하기 전에 실력부터 키우고 오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지금…….”
“그만.”
데이브가 억지로 레이너드의 팔을 끌고 기사에게서 멀어졌다. 뿌리친다면 뿌리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스승님을 욕보일 수가 없어 레이너드는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 기사에게서 어느 정도 떨어진 뒤에야 레이너드는 데이브의 손을 떼어 냈다.
“스승님!”
“황실 기사단을 자극할 필요는 없어. 자칫하면 황실 모독죄로 끌려갈 수 있다는 걸 몰라서 그러는 거야?”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상관있지. 네가 끌려가면 널 후원하고 있는 카르티아가에 무슨 해가 갈 줄 알고? 널 데려온 아가씨에게 아무런 영향이 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유리나의 이야기까지 나오자 레이너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이 사그라지는 건 아니라서 두 주먹을 꽉 쥐고 숨을 고르자 데이브가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네 심정 이해해. 그렇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그렇지만 충분히 기다렸어요. 누가 봐도 마법이 연루된 사건인데, 아직도 그 흔적을 찾지 못했다면 황실 기사단의 능력을 의심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니면 제대로 수사할 생각이 없거나!”
레이너드가 소리를 지르자 멀찍이서 돌아다니던 황실 기사단 소속 기사 몇몇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데이브는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한 번 들어 올려 주고는 레이너드를 다독였다.
“이번 조사의 책임을 맡은 제라드 경은 현재 제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마법사야. 황태자 전하께서도 이번 사건을 신경 써서 조사하고 있다는 소리야.”
“그렇지만…….”
레이너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스승님 말이 맞아.’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신의 사랑을 받는 베아투스니, 마법 천재니 하는 소리를 들으며 마법을 배웠지만 지금 그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제국에서 지금 그는 그저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못한 일개 마법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심지어 지금은 제 정체마저 숨기고 있지 않은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저 기사들을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을 가졌지만 그 뒷감당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아무것도 없었다. 마법사라면 모두 받는 기사 서임도 받지 못했으니까.
그렇지만…….
‘이대로 가만히는 못 있어.’
다른 것도 아니고 유리나와 관련된 일이다. 최대한 빠르게, 후환 없이 모든 일을 해결하고 싶었다.
‘베아투스라는 것을 밝히면 순순히 이야기를 들어 줄까?’
레이너드는 황실의 문장이 그려진 마법사 로브를 입고 있는 제라드 경을 노려보며 제 눈가를 더듬거렸다. 지금의 그라면 아무도 그의 말에 집중하지 않을 테지만 ‘베아투스’의 말이라면 들어 줄 수도 있다.
그런 마음에 눈동자 색을 바꾼 마법을 풀려고 하자 데이브가 그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안 돼.”
“스승님.”
“참아.”
“하지만, 스승님!”
“지금 네 이름을 밝혀 봤자 아무런 도움도 안 돼. 오히려 일만 복잡해질 거야.”
레이너드는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억누르기 위해 다시 한번 이를 꽉 깨물었다. 으득, 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럼 저 보고 이대로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으란 말입니까?”
“자만하지 말거라. 네가 나선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스승님!”
냉정한 평가에 레이너드가 배신이라도 당한 것 같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데이브는 여전히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네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저들의 실력을 얕봐서는 안 돼. 제라드 경도 나와 마찬가지로 크론 왕립 아카데미를 7년 만에 졸업하고 온 수재야. 게다가 너는 아직 경험이 부족해. 네가 찾을 수 있는 단서라면 저들도 찾을 수 있다는 걸 왜 몰라?”
데이브가 제 분을 못 이겨 거친 숨을 내뱉는 레이너드의 어깨를 눌러 그를 간이 의자에 앉혔다.
“믿고 기다려. 이 일이 마법과 관련이 있다면 제라드 경이 꼭 찾을 거야.”
레이너드는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데이브는 아이처럼 몸을 옹송그리고 있는 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여 주었다.
“걱정되는 건 알아. 당연히 걱정될 거야. 그렇지만 아가씨는 네 덕분에 무사하잖아.”
어릴 때 마법 구현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낙심하고 있던 어린 레이너드를 달랠 때 그랬던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
레이너드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런 것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지켜 준다고 약속했어요.”
레이너드의 목소리가 우는 것처럼 잘게 떨렸다.
“날 살려 준 대가로 지켜 주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상처 하나 없이 지키겠다고 맹세했어요. 그런데…….”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무사히 지켜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그가 이번에 할 수 있었던 건 고작 마지막 순간에 그녀의 몸을 끌어안은 것밖에 없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덜덜 떨던 그 마음까지는 지켜 내지 못했다. 미리 헤아렸어야 했는데.
레이너드는 얼굴을 덮은 손가락 틈으로 아직도 사람들이 서성이는 막사 주변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대체 유리나는 그 상황에서 얼마나 두려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죽는 게 무서웠을까. 안 그래도 죽는 것이 두렵다며 이미 몇 번이나 그의 앞에서 벌벌 떨던 그녀였는데.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황실 기사단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레이너드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터뜨리며 고개를 들었다.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도 방금에서야 알았다.
제라드 경의 앞에 유독 화려한 옷을 입은 흑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제대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레이너드는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황태자…….’
아까 데이브가 알려 주었던 제라드 경이 굳은 표정의 황태자를 향해 차분히 보고를 하고 있었다.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지만, 몰래 도청 마법을 쓴 덕분에 바로 옆에서 대화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원래 실력대로라면 도청 마법을 알아챘을 테지만, 다른 곳에 신경 쓰느라 바쁜지 제라드 경은 그에 대해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늑대 떼가, 그것도 카르티아 영애를 집중적으로 노린 것을 봐서 분명 누군가가 사주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런 흔적이 없습니다.”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늑대에도, 막사 주변에도 딱히 마법의 흔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고로 봐야 하나? 늑대 떼가 카르티아 영애만 노렸는데도?”
“그게…… 아마 카르티아 영애의 몸집이 가장 작으니 가장 만만하게 여기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분노가 섞인 커티스의 음성이 굳이 도청 마법을 쓸 필요도 없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레이너드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며칠 전 유리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커티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음에 들지 않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감정을 알게 된 후로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이의 표정과 시선이 어떤지 대충 알 수 있었다.
혹자는 그 눈빛을 꿀이 떨어지는 것같이 달콤하다고 표현했는데, 레이너드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볼 때 사람들의 눈빛에선 숨길 수 없는 따뜻한 애정이 묻어 나왔다. 이런 생각을 하긴 조금 낯간지럽지만, 그를 보는 유리나의 눈빛도 다정하고 따뜻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고백에도 레이너드가 그녀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그 눈빛 때문이었다.
그런데 커티스는 달랐다.
분명 유리나가 보냈던 편지에 따르면 커티스는 그녀에게 이성으로서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레이너드는 유리나에게 가급적 그를 만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때는 왜 그런 이야기를 편지에 썼는지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아마 질투였던 것 같다.
며칠 전, 유리나가 커티스와 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 들면서, 당장 달려가 두 사람을 떼어 놓고 싶었다. 간신히 이성을 다잡지 않았더라면 진짜로 그랬을지도 모른다.
유리나를 위해 충동을 억누르면서 커티스를 관찰하는 동안, 레이너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는 유리나를 호기심 있게 쳐다보면서도 딱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아마도 유리나를 이용하려는 거겠지.’
여러모로 불쾌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레이너드는 이번만은 이번 일이 단순 사고라는 말이 말도 안 된다는 커티스의 말에 동의했다.
“맞아요. 이건 말이 안 돼요, 스승님.”
레이너드는 데이브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차분히 정리했다.
“사냥 대회에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어요. 짐승들은 자신에게 위협적인 사람을 더 잘 알아요. 그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호위 기사들을 먼저 덮쳤어야죠. 그런데 왜 기사들을 지나치고 유리나를 공격했을까요? 심지어 유리나 말고는 다친 사람도 없다면서요!”
“레이너드, 진정 좀 해. 목소리가 너무 커.”
“대체!”
레이너드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까지 참고만 있으라는 소리세요? 유리나가 죽을 뻔했는데!”
그깟 타인의 시선, 그게 뭐가 중요해서!
목소리가 큰 탓에 사람들의 시선이 레이너드에게로 꽂혔다. 데이브는 서둘러 그를 등 뒤로 숨기려고 했지만 레이너드는 꿋꿋하게 막사 쪽을 바라보았다.
조사를 위해 늑대의 사체 또한 막사 옆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보존 마법을 쓴 것인지 늑대는 부패한 곳 하나 없었다.
레이너드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동시에 주먹을 세게 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손톱의 감각에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자 아까까지만 해도 미처 느끼지 못했던 기운이 느껴졌다. 아니, 정확히는 아까부터도 느끼고는 있었다.
안 그래도 불안하고 초조한 신경을 갉작갉작 긁는 듯한 느낌. 벌레가 맨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소름 끼치는 감각과도 비슷한 이 느낌은 분명 이 막사 옆에 왔을 때부터 계속됐다.
다만 아까는 제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니다. 이 기분 나쁜 느낌은 그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눈도 못 감고 죽은 저 늑대의 사체에서부터.
“스승님, 저 늑대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여기까지 내려온 게? 그걸 조사하느라 이러고 있잖아.”
“그게 아니라…….”
스승님은 못 느낀다고? 레이너드는 잠시 머리가 멍했다.
“저 늑대에서 이상한 기운이 나와요.”
그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늑대를 향해 걸어갔다. 데이브가 등 뒤에서 잡으려고 하고, 늑대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기사들이 제지하려고 들었지만 그는 가볍게 그 손길들을 뿌리치고 가장 몸집이 큰 늑대 앞에 섰다.
“전하, 아가씨가 걱정이 돼서 그런데 괜찮다면 제가 잠시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어느새 뒤따라온 데이브가 커티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커티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경계를 하던 기사들이 데이브와 레이너드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행동을 조심하라고 했는데, 갑자기 이러면 어떡해. 적어도 내게 말은 하고 움직여야지.”
데이브가 바짝 붙어 귓가에 속삭였지만 레이너드는 그의 말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늑대 앞에 서자 형태 없는 무언가가 더욱더 신경을 갉아먹는 것 같아서 정신이 없었다.
‘기분 나빠.’
본능이 그에게 외치고 있었다. 저 늑대가 원인이라고.
레이너드는 허리춤을 매만지다가 검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어 들었다. 놀란 기사들이 일제히 시퍼런 날이 선 검을 그에게 겨누었다.
“당장 검을 내려놓지 못하겠나!”
그러나 레이너드는 무심한 얼굴로 빠르고 정확하게 검 끝을 늑대의 배에 찔러 넣었다. 가장 불쾌한 흐름이 느껴지는 곳에.
가죽과 살갗이 찢어지는 불쾌한 느낌과 함께 흘러나온 피가 잔디를 적셨다. 그러자 파릇하던 연두색 잔디가 끝부분부터 노랗게 말라 가기 시작했다.
레이너드는 늑대의 배 속에 칼을 찔러 넣은 채로 팔을 휘두르며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 순간, 무언가 반발하듯 검을 세게 때렸다.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은 감각에 레이너드는 이를 악물고 마나를 조금 더 세게 불어넣었다.
마나를 밀어내는 보이지 않는 벽을 부수는 순간, 피가 레이너드를 향해 튀어 오르며 무언가가 데구루루 굴러와 그의 신발 끝에 닿았다. 엄지손가락 반절만 한 크기의 구슬이었다.
레이너드는 붉은색 피로 범벅이 된 구슬을 집어 들어 셔츠로 대충 닦고는 구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투명한 구슬 속에선 정체 모를 검은 연기가 회오리처럼 마구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거야.’
계속 신경을 건드리던 이상한 흐름이 이 구슬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레이너드는 마나를 불어넣은 손에 힘을 주어 구슬을 깨트렸다. 깨진 구슬 속에서 나온 건 여성의 귀걸이였다. 귀걸이의 침 부근에는 검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레이너드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유리나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스승님, 혹시 이 귀걸이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데이브를 향해 던진 질문이었는데 정작 대답을 한 건 호위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커티스 제노시안이었다.
“무엇을 찾아냈지?”
그는 놀라서 만류하는 기사들을 제지하며 레이너드에게 다가왔다. 레이너드는 그에 대한 예의의 뜻으로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피가 묻은 장신구입니다. 이게 원인이었던 것 같군요.”
커티스가 신중한 얼굴로 레이너드가 쥐고 있는 귀걸이를 보았다.
“그게 이번 일과 무슨 연관이 있지? 늑대가 삼킨 것일 수도 있지 않나.”
“물론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레이너드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아카데미에서 이론으로 배우기는 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100퍼센트 장담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흑마법입니다.”
커티스가 미미하게 눈을 찌푸렸다.
“흑마법?”
“네. 체내 마나와 자연 마나를 이용하는 일반 마법과 달리 흑마법은 자연 마나 대신 체내 마나와 매개체로 피를 사용합니다. 이 귀걸이가 카르티아 영애의 것이라면 늑대 떼가 눈이 먼 것처럼 카르티아 영애만 노린 것이 말이 됩니다.”
레이너드는 늑대의 머리 쪽으로 걸어가 발로 늑대의 입을 들춰 보았다. 늑대의 이빨 윗부분이 독이라도 바른 것처럼 살짝 까맣게 변해 있었다.
‘물리 마법이 안 통해서 이상했는데.’
늑대 이빨에 마법을 걸어 뒀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마나를 휘감은 검을 단순히 물리 방어 마법으로 방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로써 다시 한번 깨달았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모든 일을 꾸민 사람은 유리나를 이번에 완전히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데이브의 말대로 그 말고 다른 마법사가 있었더라도 유리나에게 달려드는 늑대에게 결코 마법 방어 마법을 쓰지는 않았으니까.
게다가…….
‘아무리 늑대에게 물렸다고 해도 이틀이나 기절해 있었다는 게 이상했는데…….’
레이너드는 아직도 근육통이 남아 있는 어깨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는 기사는 아니지만 지금껏 계속 검술 연습을 하고 몸을 단련해 왔다. 기사만큼은 아니어도 웬만한 장정보다는 체력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치료 마법으로 상처를 완벽히 치료하고도 열이 나고 깨어나지 못했다는 게 스스로도 조금 이상했다.
그런데 늑대의 이빨에 저주나 독 같은 것이 발라져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마도 그는 쓰러져 있는 동안 본능적으로 자연 치유를 한 모양이지만…….
‘유리나가 물렸다면 진짜로 죽었을지도 몰라.’
유리나가 운이 좋게 늑대에게 물리고도 죽지 않았더라도, 독인지 저주인지 모를 것에 당했다면 상처를 치료하고도 시름시름 앓다가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다.
유리나가 늑대에 물리지는 않았어도 이빨에 살짝 스치기라도 했더라면…….
최악의 가정에 레이너드는 눈앞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흑마법이라……. 거기서부터 말이 되지 않는군. 흑마법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어. 그런데 아직도 흑마법이 남아 있다는 소리인가?”
그의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백여 년 전, 흑마법을 이용하여 반역을 도모했던 세력이 발견되면서 제국에서는 대대적으로 흑마법사를 잡아들였다. 안 그래도 피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때 흑마법사들이 완전히 뿌리가 뽑힌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자취를 감춘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 후로 흑마법은 발견되지 않았다.
피를 매개로 한다는 것과 관련된 간단한 몇 가지 이론이 남아 있을 뿐이다.
레이너드도 사실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흑마법의 기본 이론을 배웠다고는 하나 한 번도 흑마법을 본 적이 없었다. 본 적이 없으니 이 기분 나쁜 느낌이 흑마법 때문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황상, 그것밖에 말이 되지 않았다.
“황실 마법사들이 알아채지 못한 것을 보면 일반적인 마법이 아닌 게 분명하지요.”
커티스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말처럼 황실 마법사들이 알아채지 못한 걸 자네는 어떻게 바로 눈치챈 것이지? 그 말은 즉, 자네도 흑마법사라는 소리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또한 다른 이가 눈치채지 못한 걸 혼자 알아낸 것인지 의아했다. 그러나 짐작하건대 ‘베아투스’라는 점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전하, 저자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흑마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것보다는 저자가 진범이라는 사실이 더 신빙성이 있지 않습니까.”
대화를 지켜보던 마법사 하나가 다가오며 소리쳤다.
“진범이기 때문에 바로 알 수 있었겠지요.”
“제가 진범이면 왜 여기까지 와서 아는 척을 하겠습니까?”
“전하의 눈에 띄어서 능력을 인정받고자 하려는 수작일 테지. 가만 보자, 카르티아가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나. 늑대가 카르티아 영애를 덮치기 직전 나타난 마법사가 있다고 하던데 그게 혹시 자네 아닌가.”
마법사가 레이너드의 코앞까지 다가와 후드를 벗기려고 했다. 레이너드가 한 손으로 후드를 누르며 다른 손으로 마법사의 손을 탁 쳐 냈다. 마법사가 그것 보라는 양 의기양양하게 커티스를 바라보았다.
“저것 보십시오. 수상하지 않습니까. 솔직히 어떻게 그 위급한 순간에 딱 맞춰 올 수 있었는지 솔직히 의아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리는군요. 저자의 자작극이니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 기회에 카르티아가와 황실에 잘 보이려고 했던 것이죠!”
그가 코웃음을 쳤다.
“흑마법이라니. 고작 생각해 낸 핑계가 그것밖에 되지 않나. 어리석군.”
“어리석은 건 제가 아니라 그쪽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지 않고 어째서 남의 능력을 깎아내리려고 하십니까? 며칠 동안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이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뭐, 뭐야?”
빈정거리던 마법사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게졌다.
“전하, 이자의 오만방자한 꼴을 보십시오. 이건 황실을 기만하는…….”
“그만.”
커티스가 여전히 냉정한 얼굴로 손을 들어 마법사를 제지했다. 그러고는 레이너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자네는 어떻게 흑마법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내가 납득할 만한 증거를 내놓아야 할 것이야.”
레이너드는 망설임 없이 눈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한순간에 붉은색으로 돌아온 그의 눈동자가 사납게 마법사를 향했다. 그는 레이너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숨을 급하게 들이쉬며 눈을 크게 떴다.
레이너드의 시선이 이번엔 커티스에게로 향했다.
“어떠십니까?”
레이너드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다시 물었다.
“이젠 믿으실 수 있으십니까?”
* * *
유리나는 손안에 든 목걸이와 팔목에 찬 팔찌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이상해.’
오늘 오전까지는 레이너드의 걱정이 더 커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석연찮은 구석이 많았다.
유리나가 사고를 당하던 그날, 세 오빠들과 함께 사냥 중이던 레이너드는 걸고 있던 목걸이가 깨지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그래서 곧바로 위치 추적 팔찌를 쫓아 그녀가 있는 곳으로 있는 이동 마법을 썼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발견한 건 늑대의 사체에 둘러싸여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눈을 꽉 감고 있던 유리나와, 그녀에게 달려드는 거대한 늑대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물리 방어 마법이 통하지 않아 그는 본능적으로 유리나를 끌어안았다고 했다.
검술을 배운 그는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급소를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하며 늑대에게 마법을 썼다고 했다.
아론 경의 말에 따르면 만약 그대로 그녀가 늑대에게 물렸더라면 아마 머리를 물려 그 자리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손에 땀이 날 정도로 아찔한 상황이었다. 유리나의 가족들이나 레이너드는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유리나가 레이너드를 데려온 덕분에 행운이 찾아온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러나 단 한 명, 유리나만은 단순히 이걸 행운이라고 치부하며 넘어갈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래를 아는 사람이었다. 소설 내용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적어도 자신이 열여덟 살,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할 때까지는 무사할 걸 알았다.
그래야 소설이 시작할 수 있으니까.
유리나는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목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우리 가문을 노린 거라고 했지.’
카르티아 후작은 이번 일을 카르티아가를 노리는 이가 꾸몄다고 추측했다. 카르티아 후작은 다른 귀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흠이 없었지만, 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사냥터에 나가 있는 카르티아 후작이나 세 오빠들을 노리기는 힘드니 막사에 있는 유리나를 노린 것 같다고 했다. 만약 유리나가 아니라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참가했더라면 이번 사고를 당하는 것이 후작 부인이 됐을 거라는 말도 들었다.
유리나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을 노렸다기보다는 카르티아가를 노렸다는 말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죽을 뻔한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레이 덕분에 살았지.’
그 말은 반대로 말한다면 레이너드가 없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만약 원작에서처럼 데프론 후작이 레이너드를 데려갔다면, 그래서 그녀의 곁에 그가 없었다면…….
아니, 하다못해 레이너드가 조기 졸업을 하지 않고 아직도 아카데미에 있었더라면…….
‘그럼 난 어떻게 됐을까?’
그 가정을 생각하자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유리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몇 번 하다가 다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녀가 읽었던 빙의물에서는 보통 원작을 바꾸는 대가가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내용을 바꿨기 때문에 이야기가 원작과는 다르게 흘러 이야기를 잘 안다고 자신만만했던 주인공이 미래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경우가 나왔다.
‘나도 당했지.’
1년 반 전, 유리나는 크론 왕국에서 습격을 당했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건 원작에는 없었던 내용일 것이다. 원작의 ‘유리나’는 그 시기에 크론 왕국에 갈 일도 없었고, 레이너드를 포섭하려는 세력에게 납치당할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때 죽을 뻔했지만 유리나는 그 사건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야기가 바뀔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레이너드를 데려와 원작을 바꾼 대가려니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분명 레이너드를 데려온 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데 왜 이 난리가 난 것일까. 설마 원작에서도 ‘유리나’는 사냥 대회에서 늑대의 습격을 받았던 걸까? 다만 다른 방법으로 그 위험을 피했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이번 일도 레이와 연관이 있는 걸까?’
유리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원작을 바꿔 레이너드를 데려온 여파로 이야기가 바뀐 거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대체 어떤 부분에서 이야기가 바뀌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유리나가 복잡한 마음으로 목걸이와 팔찌를 노려보다시피 보고 있는데, 문이 달칵 열렸다. 데이브와 같이 나갔던 레이너드가 혼자 방 안으로 들어왔다.
“데이브는?”
“황실 마법사와 이번 일로 할 얘기가 있나 봐. 아카데미 동기라서 이야기가 잘 통할 거라던데. 그래서 나 혼자 먼저 왔어.”
“몸은? 피곤하지는 않아?”
유리나의 옆에 앉은 레이너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애도 아니고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이젠 정말 괜찮아. 체력을 키우려고 검술까지 배웠는걸.”
“그래도…….”
레이너드가 말을 늘어뜨리는 유리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런 식으로 말이 가로막힌 건 처음이라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레이너드가 혀로 제 입술을 쓸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아주 능청스러워졌어.”
“봐줘. 오래 기다렸잖아.”
그가 유리나의 어깨에 코를 문지르다가 향기를 맡듯 코로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여전히 그 행동 하나하나가 낯간지럽고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거북하다거나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의 행동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잘 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넘기기가 힘든 것뿐이다. 그의 애정과 소유욕.
‘그렇지만 익숙해져야겠지.’
유리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제 허리를 끌어안는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레이너드가 기분이 좋은 듯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괜찮다면서 왜 그렇게 얼굴이 어두워?”
“내가? 안 그런데.”
“고민 있잖아. 내가 네 표정 하나 못 읽을 것 같아?”
유리나는 그의 머리에 제 머리를 콩 박았다. 아프라고 한 행동이었는데 정작 그는 아무렇지도 않고 애꿎은 그녀의 머리만 아팠다. 레이너드는 눈을 찌푸리며 옆머리를 문지르는 유리나를 보며 킥킥 웃었다.
“그러게 왜 그랬어.”
“네가 아무 말도 안 하니까 그렇지. 조사 가서 뭐 좀 찾은 거 맞지?”
“……역시 넌 속일 수가 없다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레이너드가 겉옷 안쪽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유리나에게 건넸다.
“유리나, 혹시 이거 본 적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그가 건넨 물건을 살피던 유리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알이 굵은 에메랄드 귀걸이. 핀에는 피로 추정되는 검붉은 액체가 말라붙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에 유리나의 손이 덜덜 떨렸다.
유리나의 표정을 살피던 레이너드 또한 덩달아 심각해졌다.
“알아?”
단순히 아는 수준이 아니었다.
“내 귀걸이야.”
그것도 에밀리가 잃어버렸다고 했던 바로 그 귀걸이였다.
* * *
유리나는 방 한가운데 있는 소파에 앉아 에밀리가 아론 경의 손에 이끌려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평소 쾌활한 성격과는 다르게 에밀리는 입을 꽉 다물고 눈동자를 또르륵 굴렸다. 그러다 유리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녀에게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아, 아가씨!”
“그래, 무슨 일로 불렀는지 아니?”
“아뇨, 모르겠어요.”
유리나는 제 눈치를 보면서도 고개를 휙휙 젓는 에밀리를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표정 관리를 하고 싶었는데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았다.
‘레이라도 있었으면 조금 나았을까?’
웃을 상황이 아닌데, 초조한 순간에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베시도, 카르티아 후작 부인도 아니라 레이너드란 게 우스웠다. 그만큼 알게 모르게 그를 많이 의지하고 있었나 싶었다.
그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이제야 겨우 인정하고 받아들였지만, 실은 꽤 오랫동안 그녀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나의 미소에 희망을 본 것인지 에밀리가 무릎으로 기어 와 그녀의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유리나는 에밀리를 떼어 놓으려고 달려드는 아론 경에게 나가라고 손짓해 보였다.
“하지만, 아가씨…….”
거부 반응을 보이던 아론 경은 단호한 유리나의 표정에 기사들을 이끌고 방을 나갔다. 위협하듯 방 구석에 서 있던 건장한 기사들이 사라지자 에밀리가 조금 더 편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아가씨, 저는 왜 부르신 건지 모르겠어요. 저, 저는 정말…….”
“네가 그랬니?”
“네?”
말이 중간에 막히자 에밀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였다. 그 잠깐 사이에 울기라도 한 것인지 충혈된 눈이 촉촉했다. 자세한 설명을 바라는 눈치였지만 유리나는 그저 조금 전 한 말을 되물었을 뿐이다.
“네가 한 짓이냐고 물었어.”
“저, 저는 아가씨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지 하나도……. 하나도 모르겠어요.”
“에밀리.”
유리나는 소파 옆 테이블 서랍에 넣어 두었던 귀걸이를 꺼냈다. 레이너드에게 받은 상태 그대로 놔뒀던 터라 귀걸이 침에는 여전히 검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그걸 에밀리의 눈앞에 흔들어 보이자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때? 익숙한 물건이지?”
“아가씨, 저는…….”
유리나는 에밀리를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에밀리는 유리나의 표정과 귀걸이를 번갈아 보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아가씨,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그 외에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유리나는 제 드레스가 유일한 희망이라도 되는 양 꽉 쥐고 오열하는 에밀리를 보며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진짜였어.’
아론 경을 시켜 에밀리를 데려오라고 할 때까지도 유리나는 아주 작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
에밀리가 정말로 실수로 귀걸이를 잃어버렸고, 때마침 그것을 노리던 누군가가 그것을 주워 간 것이라고.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에밀리의 주머니에서 귀걸이를 훔쳐 간 것이라고.
남들이 들으면 말도 안 된다며 비웃을 가정에 희망을 품었던 것은 에밀리가 진범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작 6개월. 에밀리와 같이한 시간은 짧았지만, 유리나는 그녀가 퍽 마음에 들었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는 것도, 힘든 일을 해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며 늘 웃었던 것도 좋았다. 편찮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었다.
그 순수함이 거짓으로 꾸며 낸 것이라고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에밀리의 반응을 보아하니 정말로 제 가정이 터무니없었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믿음의 대가가 배신이라니.’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유리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에밀리의 손을 거칠게 떼어 놓았다. 유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려고 하자 에밀리가 필사적으로 그녀의 드레스에 매달렸다.
“아가씨, 아가씨!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네 말을 더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니?”
“제발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유리나는 다급한 그녀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바닥에 쓰러진 에밀리가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녀에게 끌려가다시피 바닥에 끌렸다. 묵직한 무게에 유리나는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이대로 에밀리를 거칠게 발로 차서 떼어 놓고 갈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론 경을 불러 에밀리를 끌고 가라고 명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던 건 어쩌면 아직도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리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유리나가 돌아보자 바닥에 엎어져 있던 에밀리가 무릎을 꿇으며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았다.
“저도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유리나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에밀리는 유리나의 표정이 더욱더 싸늘하게 굳어 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횡설수설 말을 이어 갔다.
“협박, 협박당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네, 네! 사냥 대회 전까지 아가씨의 피가 묻은 물건을 가져오랬어요!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와 동생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언제부터?”
“그게…….”
에밀리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카르티아 저택에 오기 전에…….”
“그렇다면 6개월이나 됐네. 그런데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6개월이나 시간이 있었는데.”
“말하면 가족들이…….”
“나한테 사실대로 말하면 내가 네 가족들을 보호해 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니? 내가 내 사람을 챙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 그런 게 아니에요.”
에밀리가 유리나의 드레스를 더욱 꽉 움켜쥐었다.
“아가씨께서 손을 쓰시기도 전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웠어요. 저도 많이 망설였어요.”
“알아. 그러니까 그 많은 시간을 놔두고 사냥 대회 아침에 일을 벌였겠지. 그런데 말이야.”
유리나는 드레스를 거칠게 잡아당겨 에밀리를 떼어 놓았다.
“결국에는 내게 끝까지 숨기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니?”
“저는 맹세코 아가씨에게 해가 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고작 그런 물건으로 이런 일을 벌일 줄은…….”
“너도 꺼림칙하니까 지금껏 망설였겠지. 아니니?”
정곡을 찔렸는지 에밀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순간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유리나는 입술을 아플 정도로 한 번 깨물었다 놓았다.
“협박이라고? 협박당하고 있었겠지. 설마 협박도 없이 혼자 간 크게 그런 일을 벌였을 리가 없잖아.”
“…….”
“소중한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네 마음은 이해해.”
“아가씨…….”
“그렇지만 그런 네 행동 때문에 나야말로 소중한 것을 잃을 뻔했어.”
이 상황에서 내가 죽을 뻔한 게 아니라 소중한 것을 잃을 뻔했다는 말이 튀어 나간 것이 우습기도 하고 조금 놀라웠다. 정말로 자신이 죽을 뻔했던 것보다 레이너드를 잃을 뻔한 것이 더 충격으로 남았나 보다.
유리나는 헛웃음을 한 번 터뜨렸다가 방으로 들어와 상황을 주시하는 아론 경에게 손짓했다.
“아론 경, 끌고 가요.”
아론 경은 그녀에게 묵례를 한 번 한 뒤 에밀리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에밀리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났지만 유리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애써 그 목소리를 떨치려고 노력했다.
지켜야 할 것이 있었던 에밀리.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이해한다고 해서 그녀를 용서할 생각도, 동정할 생각도 없었다.
다만, 속은 조금 쓰렸다.
* * *
“아가씨, 아가씨!”
에밀리는 문고리를 잡고 버텼지만 아론 경이 그녀의 손을 거칠게 떼어 놓으며 그녀를 끌고 갔다. 유리나의 손을 떠났으니 에밀리는 본격적인 심문을 받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이너드는 멀어지는 에밀리의 뒷모습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표정은 무심했지만 눈빛은 살벌했다.
실제로 그는 에밀리에게 달려들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아직도 유리나에게 닥쳤던 일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절차대로 해야지.’
겨우 발걸음을 떼서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는 문득 몸을 돌려 에밀리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그의 기척을 눈치챈 아론 경이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십니까?”
“잠깐만…….”
레이너드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바닥에 엎어져 있는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살벌한 눈과 마주친 에밀리가 울다 말고 딸꾹질을 했다.
“괴…….”
그녀는 손으로 제 입을 턱 막았지만 레이너드는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눈치챘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제 붉은 눈을 보고 악의적인 말을 쏟아 내는 사람들에게 주눅이 들 정도로 어리지도 않았다.
레이너드가 표정의 변화 없이 에밀리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제 목을 조를 기세로 다가오자 에밀리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사, 살려…….”
“그런 짓을 하고도 살려 달라는 소리가 잘도 나오나 보지?”
유리나 앞에서는 한 번도 내뱉은 적이 없는 싸늘한 목소리였다. 에밀리는 몸을 달달 떨었다. 레이너드는 그녀를 보다가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쥐어뜯다시피 잡아당겼다.
“악!”
갑작스러운 통증에 에밀리가 목 뒤쪽을 부여잡았다. 레이너드는 그녀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손안의 목걸이를 확인했다. 평범하게 생긴 목걸이였다. 딱 그 나이 대의 하녀가 하고 다닐 만한 예쁜 돌멩이로 만든 목걸이.
그러나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흑마법에 걸린 늑대에게서 봤을 때처럼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느끼며 레이너드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동안 풀리지 않던 의문이 이제야 풀렸다.
‘대체 어떻게 카르티아가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이런 짓을 벌였나 했는데…….’
그는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목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현혹 마법을 썼나 보네.”
이렇게까지 해서 유리나를 노리는 자가 누구인가.
* * *
에밀리가 나간 후 유리나는 창문에 서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으로는 정원에 핀 꽃들을 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딴생각을 하느라 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딴생각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정신이 몽롱했다.
‘피곤해서 그런 걸 거야.’
유리나는 애써 그렇게 합리화를 하며 뻐근한 눈 위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렇지만 울렁거리는 속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창문에 이마를 박았다.
이마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 몇 번 더 이마를 박는데, 어느 순간 창문의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 대신 따뜻하고 포근한 감촉이 느껴졌다.
“왜 그러고 있어.”
언제 들어온 것인지 레이너드가 그녀를 돌려세웠다. 그는 화가 난 것처럼 굳은 얼굴로 유리나의 빨개진 이마를 살살 문질렀다. 그가 몇 번 문지르자 이마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레이너드는 다시 하얘진 이마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그러지 마. 상처 나잖아.”
“…….”
“네 잘못 아니야.”
그는 꼭 유리나의 마음을 읽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정작 당사자인 유리나는 제가 어떤 마음인지 스스로 알지 못했는데 말이다.
“6개월 동안 내 옆에 있었어. 그런데 난 한 번도, 한 번도 에밀리를 의심한 적이 없어.”
유리나는 원래 사람을 잘 믿는 편이 아니었다. 믿는다는 표현이 조금 거창하기는 하지만, 조금 덜 거창하게 표현한다면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여는 편이 아니었다.
사람을 잘 믿는 편이 아니라는 말은 사람을 잘 의심한다는 말하고는 조금 달랐다. 유리나는 줄곧 사람들을 특별히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주위 사람들을 의심했어야 했다. 한 번이라도 의심을 했다면 이번 일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레이너드는 꽉 깨물어서 하얗게 질린 유리나의 입술을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그러지 마. 왜 자꾸 그래.”
내 무능력 때문에 네가 그렇게 될 뻔했어. 유리나는 그 말을 속으로 한 번 삼켰다.
“그리고 네 잘못이 아니야.”
레이너드가 손에 쥐고 있던 목걸이를 보여 주었다. 특별할 게 없는 목걸이였다.
“이게 뭐야?”
“에밀리라는 하녀가 차고 있던 거야. 이 목걸이에 현혹 마법이 걸려 있었어. 너는 물론이고, 카르티아가의 사람들이 그 하녀를 의심하지 못했던 것이 당연해. 그러니까 그렇게 자책할 필요가 없어.”
유리나는 조용히 목걸이를 집어 그걸 살폈다. 현혹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알고 봐도 딱히 마법의 기운을 느낄 수가 없었다.
‘흑마법이라고 했던가.’
데이브도 눈치채지 못했으니 그녀가 알아내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죄책감이 덜어지는 건 아니었다. 유리나는 목걸이를 한 번 꽉 쥐었다가 외면하듯 레이너드에게 다시 넘겼다.
“데이브에게 전해 줘. 배후 추적에 도움이 될 거야.”
“알겠어. 너무 걱정하지는 마. 이미 추적하고 있다고 했어. 생각보다 단서를 빨리 찾아서 도망갈 시간이 적었…….”
“잠깐만. 레이. 잠깐만.”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손에 있는 목걸이를 다시 가져왔다. 아까 에밀리와 대화할 때는 잔뜩 화가 난 상태라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다.
―협박, 협박당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네, 네! 사냥 대회 전까지 아가씨의 피가 묻은 물건을 가져오랬어요!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와 동생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언제부터?
―그게…… 카르티아 저택에 오기 전에…….
분명, 카르티아 저택에 오기 전에 협박당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것도 유리나의 물건을 가져오라는 협박을…….
“유리나?”
“어떻게 준비를 한 걸까?”
“응?”
“내가 사냥 대회에 나가기로 결정 난 건 올해 초야. 어머니의 건강이 괜찮았다면 내가 사냥 대회에 나갈 일이 없었을 거야. 그런데 왜 에밀리에게 내 물건을 가져오라고 시켰을까.”
에밀리가 저택에 온 것은 작년 가을. 그리고 후작 부인이 이유도 없이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한 것도 작년 가을.
거기까지 마쳤을 때, 유리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유리나? 왜 그래?”
유리나는 걱정스럽게 물어 오는 레이너드의 팔을 잡고 서둘러 외쳤다.
“수도로 돌아가야 해.”
“갑자기?”
유리나는 그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 * *
제너스 산맥에서 수도까지 말로는 하루, 마차로는 사흘이 걸린다.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함께 말을 타고 가는 중간중간마다 공간 이동 마법을 쓰며 그 반나절 만에 수도의 카르티아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리나? 혼자 어쩐 일이니?”
레이너드와 단둘이 돌아온 유리나를 본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네 아버지와 오빠들은 어쩌고 왔어? 무슨 일이라도 있니?”
유리나는 태연하게 묻는 그녀의 태도에서 그녀가 사냥 대회에서 있었던 일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긴, 말할 수가 없었겠지.’
심약한 후작 부인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충격을 받고 혼절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유리나는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는 대신 대충 얼버무렸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요. 더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약간의 투정을 담아 중얼거리자 레이너드가 웃음을 참느라 끅 소리를 냈다. 유리나는 손톱을 세워 그의 손등을 꽉 눌렀다.
“나도 보고 싶었단다. 안 그래도 네가 없으니까 적적해서 얼른 오기를 기다리던 참이란다. 레이도 어서 오렴. 오랜만에 저녁 시간이 시끌벅적하겠구나. 그 전에 들어가서 같이 차나 한잔하자.”
두 사람은 이제 다 큰 성인이나 다름없었는데 후작 부인은 여전히 그들을 어린아이 대하듯 했다.
“차는 나중에요.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해야 할 일? 그럴 거라 생각하기는 했는데 급하게 달려온 이유가 따로 있었구나? 그래도 이렇게 바로 말을 바꾸는 건 너무한 거 아니니?”
후작 부인이 장난스럽게 유리나를 흘겨보았다.
“죄송해요. 한시가 급한 일이라서요. 어머니, 혹시 어머니 방 좀 살펴볼 수 있을까요?”
그제야 후작 부인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니?”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서요. 조금 더 확실해지면 말씀드릴게요.”
이렇게 애매모호하게 말해도 후작 부인은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챌 것이다. 지금도 그녀는 애써 웃는 유리나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심각한 일이니?”
어차피 걱정할 거, 정말 그녀를 위해서라면 이렇게 얼버무리는 것보다 사실대로 털어놓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리나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더 컸다.
당신 딸이 얼마 전에 죽을 뻔했노라. 그런데 당신 또한 위험 속에 있는지도 모르겠노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유리나는 후작 부인을 보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몰라요. 나중에, 다 정리되면 말씀드릴게요.”
* * *
“넌 여기 앉아 있어.”
레이너드는 후작 부인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유리나를 소파에 앉혔다. 유리나가 다시 일어서려고 하자 그는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앉아 있어. 나 혼자 할게.”
“혼자서 이 넓은 방을 다 어떻게 뒤지려고? 그러다 무리해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레이너드가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피식 웃었다.
“고작 그걸로 쓰러질 체력이라면 이미 수도에 왔을 때 쓰러졌어야지.”
하긴, 그건 그렇다. 제너스 산맥에서 수도까지 달려온 여정을 생각하며 유리나는 더 이상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얌전히 다시 자리에 앉는 유리나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레이너드가 방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으로 서랍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 그는 서랍장을 열어 보는 대신 서랍장 밑을 살펴보았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뻔히 보이는 곳에 숨기지는 않았을 테지.”
그는 아예 주먹만 한 빛 구체까지 만들어 수색에 열중했다. 액자 뒤, 꽃병 안, 침대 밑, 카펫 아래, 창문 틈. 유리나는 그가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다가 물었다.
“정말 어머니의 병도 저주일까?”
창문 바깥쪽을 확인하던 레이너드가 소맷자락으로 이마를 닦으며 대꾸했다.
“아직까지는 확신할 수는 없어.”
땀이 눈에 들어갔는지 레이너드가 눈을 찡그렸다. 유리나는 후작 부인의 옷장에서 촉감이 유독 보드라운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다가갔다. 날이 그다지 덥지도 않은데 그의 얼굴과 목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많이 더워?”
땀이 맺힌 그의 턱을 살살 닦아 주자 레이너드가 무릎을 굽히며 눈높이를 맞춰 주었다. 그는 유리나의 손길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웃으며 눈을 감았다.
“많이 덥지는 않은데 정신없이 돌아다녀서 그런가 봐.”
“그러게 좀 쉬엄쉬엄하지.”
레이너드가 실눈을 뜨고 유리나를 살피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제 목으로 가져갔다.
“여기도 땀났어.”
유리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목덜미를 닦아 주다가 문득 손을 멈추고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지금 어리광 피우는 건가?’
레이너드의 어리광이야 어릴 적부터 늘 봐 오던 것이었다. 그는 저택에서 유리나를 가장 잘 따랐던 만큼,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굳은살이 박인 제 손을 보여 주거나 키가 컸다며 유리나를 금을 그어 놓은 벽으로 끌고 가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뭔가 느낌이 달랐다.
어릴 때는 그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면, 지금은 워낙 자연스러워서 어리광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가 없었다.
그게 꽤 신선하고 신기해서 유리나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레이너드가 다시 실눈을 살짝 뜨더니 유리나의 손목을 톡톡 두드렸다.
“왜 닦아 주다가 말아?”
유리나는 상념을 깨고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목과 뒷덜미를 닦아 주었다. 레이너드가 느른하게 웃으며 목을 조이고 있던 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풀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단추 두어 개를 톡톡 풀었다.
유리나는 그가 셔츠 손목을 조이고 있던 커프스 버튼까지 풀어내는 것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역시 내가 도와줄까?”
“나 혼자로도 충분하대도.”
레이너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유리나의 손바닥 위에 루비 커프스 버튼을 올려놓은 뒤 다시 드레스 룸 서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유리나는 수도로 오면서 자신이 생각한 가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후작 부인의 병이 자연적인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말에 레이너드는 동의했다.
이번 일이 없었다면 모를까, 현혹 마법까지 써 가며 이번 일을 꾸몄는데 후작 부인에게 손을 쓰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레이너드는 만약 후작 부인의 병이 인위적인 힘에 의한 것이라면 후작 부인이 주로 생활하는 방 어딘가에 매개체가 되는 물건이 있을 거라고 했다. 현재 상황에서는 고용인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고용인들에게 시킬 수도 없었다.
“저주를 걸었다고 하더라도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닐 거야. 기껏 해 봐야 몸을 쇠약하게 만드는 것 정도겠지.”
“그럼 어머니의 건강이 돌아올 수 있다는 거지?”
“응. 발견하지 않았더라도 큰일이 나지는 않았겠지만, 발견해서 없애면 다시 건강해지실 거야.”
대답을 하는 중에도 수색을 멈추지 않았던 레이너드가 마법으로 육중한 캐비닛을 살짝 들어 올렸다.
“여기가 조금 수상한데.”
그는 바닥에 엎드려 캐비닛 아래를 살펴보다가 그 안으로 손을 뻗었다. 잠시 후 일어나는 그의 손에는 먼지가 잔뜩 묻은 하얀 리본이 들려 있었다.
“찾았다.”
순결함의 상징인 하얀색 리본엔 불길할 정도로 검붉은 핏자국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사냥 대회에서 노리고 있던 것이 단순히 카르티아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 유리나 카르티아였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 * *
레이너드가 리본을 발견한 후 저택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뒤늦게 수도로 돌아온 카르티아 후작은 고용인들을 모두 심문해 범인을 색출했다. 에밀리와 같은 목걸이를 걸고 있던 하녀 둘과 시종 하나가 범인이었다.
레이너드와 데이브는 황실 기사단과 함께 배후를 쫓았다. 이 모든 일의 배후는 남부 지역의 한 백작이었다. 정확히는 백작이었던 남자였다.
그러나 그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황실 기사단에게 잡혀 감옥에 갇힌 바로 그날 밤, 그가 독을 먹고 자결했기 때문이다.
그의 배후에 있는 누군가가 입막음을 하기 위해 백작을 죽인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지만 조사 결과 자살로 결론이 났다. 침입자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백작의 죽음으로 정확한 이유는 찾지 못했지만, 그가 카르티아 후작에게 앙심을 가지고 이번 일을 벌였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는 작년 이맘때쯤 카르티아 후작이 황제에게 건의한 안건 때문에 제 비리가 탄로 나서 귀족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왜 카르티아 후작을 직접 노리지 않고, 애먼 유리나를 노렸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딸을 사랑하는 카르티아 후작에게 죽는 것보다 끔찍한 고통을 안겨 주기 위해 그런 일을 벌인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죽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을 보는 게 더 고통스럽다는 걸까.’
시원찮은 결말이었지만, 그동안 유리나가 속을 끓인 것에 비해 사건은 그렇게 쉽게 종결이 되는 것 같았다.
‘정말로 다 된 건가?’
모든 사실을 전해 들은 날 밤, 유리나는 좀처럼 잠에 들지 못했다. 카르티아 후작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이젠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베시가 불을 끄고 나간 뒤에도 자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이던 유리나는 침대에서 나와 카르티아 후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다행히 그는 그동안 배후를 추적하느라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는지, 닫힌 집무실 문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한발 늦게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나는 뒤척이느라 구겨진 잠옷을 손으로 몇 번 팡팡 털어 낸 후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나?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찾아온 사람이 유리나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카르티아 후작이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그는 창백한 유리나의 얼굴을 보다가 안쓰럽다는 듯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아직도 잠이 오지 않는 것이냐?”
“네.”
“숙면에 좋은 차라도 한 잔 가져오라고 할까?”
유리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 시간에 한가로이 그와 차나 마시자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유리나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 냈는지 카르티아 후작은 더 이상 차를 권하지 않고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 그는 평소처럼 유리나와 마주 보고 앉는 대신 그녀 옆에 앉아 차갑게 식은 손을 꽉 잡아 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구나.”
그게 그렇게 티가 나나. 유리나는 괜히 볼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이 시간에 잠도 못 자고 이 아비를 찾아온 게냐?”
유리나는 진지한 후작의 얼굴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뭐가 말이냐?”
“이번 사건의 배후요.”
이번 사건의 결말에 의심을 품는 건 사실 유리나뿐만이 아니었다. 카르티아 후작은 물론, 유리나의 세 오빠들 또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으니 조사를 더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황실에서는 모든 혐의를 백작에게 뒤집어씌우고 일을 마무리하기로 결정을 지었다. 백작이 카르티아가를 노릴 만한 계기가 충분한 데다가 그의 거주지에서 흑마법에 대한 자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냥 대회 주최자 입장에서 사건을 적극적으로 조사하기는 했지만, 황실 입장에서는 반역도 아닌 일에 더 이상 공력을 낭비하기 싫을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황실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카르티아 후작가의 일이라도 말이다.
카르티아 후작은 황실의 협력이 없이도 자체적으로 조사를 이어 나가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황실 기사단을 총동원해서 찾지 못했는데, 후작이 실마리를 쉽게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네가 걱정할 필요가 없단다. 나와 네 오빠들이 신경 쓰고 있으니 넌 마음 놓거라.”
유리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제 일이에요.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게다가 그녀는 이 막다른 길에 서 있는 것 같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실마리를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유리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겨우 말을 내뱉었다.
“데프론 후작.”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후작을 향해 다시 한번 똑똑히 말했다.
“데프론 후작가를 조사해 보세요.”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
당황스러울 법한데도 되묻는 카르티아 후작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유리나는 그의 손을 꽉 움켜쥐며 눈을 감았다.
“어릴 때, 데프론 후작을 만나고 왔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죠? 그때 봤던 데프론 후작의 얼굴이 잊히지가 않아요.”
침대에서 뒤척이면서 유리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들은 배후에 관한 의심만 했지만, 그녀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야기가 왜 바뀐 거지?’
원작의 이야기가 몽땅 바뀌면서까지 그녀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러다 보니 생각나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원작에서 유리나 카르티아를 죽였던 데프론 후작.
하지만 데프론 후작의 짓이라고 가정한다면 의문이 남았다.
원작에서 유리나는 황태자의 전 연인이었고, 그에게 미련을 갖고 리디아와 황태자비 자리를 놓고 대립을 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유리나는 황태자의 연인이기는커녕, 그와 별다른 접점이 없고 리디아 데프론 또한 커티스와 이렇다 할 관계가 없었다. 유리나가 알고 있기로 리디아는 7년 전 수도를 떠나 데프론 후작 영지로 간 이후로 줄곧 그곳에서 생활했다.
그런데도 자꾸만 데프론 후작이 마음에 걸리는 이유는 7년 전, 번화가에서 보았던 그의 표정 때문이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릴 정도로 데프론 후작이 카르티아 가에 갖고 있는 적대감.
그래서 일종의 가설을 세웠다.
‘데프론 후작이 유리나를 죽인 건 리디아의 라이벌 때문만은 아닐지도 몰라.’
카르티아 후작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두 가문 사이에는 이미 서로의 목을 노릴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은 것은 아닐까.
어쩌면 데프론 후작은 유리나와 리디아가 커티스를 두고 대립하기 전부터 카르티아 가를 멸문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황태자비는 그 계획을 실현시킬 계기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그럼 왜 갑자기 원작하고는 달리 1년이나 빨리 일을 계획한 것인데?’
머리를 끙끙 싸매다가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설마 레이 때문에?’
이미 유리나는 2년 전 크론 왕국에서 레이너드 때문에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를 데려온 대가로 이야기가 바뀐 것이다.
데프론 후작 또한 예전에 레이너드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게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그 생각을 하면서도 유리나는 제 생각에 의심을 품었다. 그를 의심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데다가, 데프론 후작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크게 일을 벌일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유리나를 노리고 있었다면, 이렇게 요란스럽게 일을 벌이는 것보다는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깔끔했을 것이다. 에밀리를 의심 없이 잠입시키기까지 했으니, 차라리 유리나의 먹을 것에 독약을 타는 것이 훨씬 쉬웠으리라.
그런데도 원작에서 유리나가 데프론 후작에게 죽었다는 설정 때문인지, 그녀는 맹목적으로 그를 의심했다.
장난기 없이 진지한 유리나의 표정을 보며 카르티아 후작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는 유리나에게 왜 데프론 후작을 의심하느냐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비판도 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을 하던 후작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이 아비 또한 데프론 가문을 주시하겠다.”
데프론 후작이 실제 배후라고 하더라도 카르티아 후작이 무언가를 찾아낼 확률은 적었다. 그러나 유리나는 그 대답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믿어 주셔서 고마워요, 아버지.”
* * *
후작의 집무실을 나온 뒤, 유리나는 바로 방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녀는 텅 빈 복도를 잠시 쳐다보다가 발걸음을 옮겨 저택 뒤편에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따뜻해서 꽃이 활짝 피어 있던 제너스 산맥과 달리 수도는 이제야 겨우 새싹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조금은 황량한 정원은 밤이 되니까 더욱 삭막해 보였다.
유리나는 정원 한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차.”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레이너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두툼한 무언가가 어깨를 덮었다. 고개를 내려 살펴보니 레이너드의 것이 분명한 큼지막한 외투였다.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그냥, 감으로.”
그가 작게 웃으며 유리나의 옆에 앉았다.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안 들어갈 거지?”
유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두 번 권하지 않고 유리나의 어깨에 걸쳐 준 외투 단추를 꼼꼼히 잠가 주었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잠깐 사이에 서늘해진 유리나의 몸과 달리 그의 몸은 따뜻했다. 유리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작게 중얼거렸다.
“따뜻해.”
“네 몸이 차가운 거야.”
레이너드가 손바닥을 비벼 유리나의 뺨을 감싸 쥐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느라 잠도 못 자고 나와 있어?”
“모르겠어.”
유리나는 눈을 감고 어리광을 부리듯 그의 손바닥에 제 뺨을 문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듯 레이너드가 손을 잠깐 빼는 듯했지만 이내 그녀의 뺨을 더욱 꾹 눌렀다.
“많은 일이 있었잖아. 마음이 복잡할 거야. 사실 나도 아직도 얼떨떨해.”
“그런 것도 있지만…….”
유리나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있지, 레이. 난 지금까지 자만하고 있었던 것 같아.”
“자만?”
“응, 자만. 안일했던 것 같기도 해.”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냥…….”
유리나는 더 이상 설명할 수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유일하게 외부에서 온 존재로서,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래를 아는 존재로서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다. 레이너드를 찾았을 때엔 제 손으로 운명을 바꿨다는 성취감도 가졌다.
이대로 모든 것이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고작 데프론 후작보다 레이너드를 먼저 찾아냈다는 사실 하나에.
그런데 실제로는 어떠한가. 아무리 현혹 마법 탓이라고는 하나 믿었던 하녀에게 뒤통수를 맞고, 어머니가 저렇게 저주에 걸려 말라 가고 있었는데 알아보지 못하고, 늑대 떼에 물려 죽을 뻔했다. 심지어 레이너드는 그녀를 구하다가 크게 다쳤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그녀는 무기력했다. 배후 세력을 쫓을 때조차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그녀가 성취해 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 7년간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이래서 데프론 후작이 날 노릴 때 제대로 대응이나 할 수 있을까?’
설령 이번 일이 데프론 후작의 수작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앞으로 언젠가는 실제로 그와 대치하게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때 그걸 자신이 막아 낼 수 있을까?
물론, 제 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유리나에게는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소중한 사람이 많아.’
부모님, 세 오빠들, 베시, 데이브 그리고 레이너드까지. 제 목숨보다도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다. 그 사람들을 보호하며 모든 것을 잘 해결할 수 있을까?
이젠 자신이 없었다. 무기력한 것 같기도 하고, 미래가 다가오는 것이 두려운 것 같기도 했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아.”
“유리나.”
레이너드가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모아 왼쪽 어깨 위로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드러난 흰 목덜미에 입술을 꾹 눌렀다.
“좀 더 자만해도 돼.”
그가 입술을 누른 채로 중얼거리자 뜨거운 입김이 목덜미 위에 내려앉았다. 유리나는 순간 깜짝 놀라 제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그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너는 남들이 절대 갖지 못하는 걸 가졌잖아.”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귓불에 스치듯이 닿았다. 그의 말캉한 입술이 유리나의 귓불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그게 뭔데?”
“나.”
자랑스럽다는 듯 말한 그가 유리나의 귓가에 작은 웃음소리를 흘려보냈다.
“넌 날 찾아서 후원했잖아. 그거 하나만으로도 넌 자만해도 돼.”
널 찾은 것도 내 능력이 아니었노라는 말을 들으면 레이너드는 어떤 생각을 할까. 유리나는 그 말을 꾹 삼켰다.
“난 네가 처음 데려왔던 능력 없고 성질만 나쁜 꼬맹이가 아냐. 이젠 뭐든 해 줄 수 있어. 그러니까 아무런 걱정 안 해도 돼. 네 덕분에 내가 지금 이렇게 네 앞에 있는 거잖아.”
“…….”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그럼 나랑 하나만 약속해.”
유리나는 그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레이너드는 반사적으로 그 손에 손가락을 걸려다 말고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약속?”
“앞으로는 그런 일 절대 안 하겠다고 약속해.”
“그런 일?”
“나 때문에 네 목숨을 내놓지는 마.”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던 그의 얼굴이 다소 굳었다. 유리나는 쐐기를 박듯 단호한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약속해. 다시는 그렇게 네가 죽을 생각으로 달려들지 않겠다고.”
“……노력은 해 볼게.”
“노력이 아니라 약속하라니까.”
그러나 레이너드는 끝내 손가락을 걸지 않았다. 그는 유리나의 새하얀 새끼손가락을 말없이 쳐다보다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움켜쥐며 그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노력은 할게. 그렇지만 약속은 못 해.”
“레이.”
“또다시 그런 상황이 오게 된다면 나는 널 택할 수밖에 없어. 너도 알고 있잖아. 왜 알면서 자꾸 그래.”
“레이.”
“응, 나도 사랑해.”
그는 정말로 유리나에게서 사랑 고백을 들은 것처럼 기쁘게 웃었다. 능청스럽게 웃는 척한다기보다는 유리나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 기분 좋은 듯했다.
화제를 돌리는 것이 명백했지만 유리나는 그의 그 뻔뻔한 말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 지금 되게 바보 같은 거 알아?”
“응, 알아.”
“지금 표정 되게 웃긴 거 알아?”
“그것도 알아.”
“고집 엄청 센 거 알아?”
“고집이야 어릴 때부터 셌는걸.”
“나도 너 많이 좋아하고 있는 것도 알아?”
“…….”
처음 듣는 것이 아닌데도 그는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유리나는 밤바람에 차가워진 그의 볼을 감싸 쥐고 먼저 입을 맞췄다.
분명 이기심으로 한 고백이었다. 치사한 줄 알면서도, 어린아이의 생떼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널 좋아하니 너도 진정으로 날 좋아한다면 내가 말하는 대로 해 달라, 이런 의미로 한 고백이었다.
하지만 유리나는 그가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소리를 들어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아무리 그녀가 그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자신보다 그녀를 택할 남자였다.
알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고백을 한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이기심이 아니라, 그저 이기심을 핑계로 내보인 속마음이다. 그 핑계가 아니면 죄책감 때문에 좀처럼 말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