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6/20)

10. 바다 여행

유리나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카르티아 후작은 그날 밤 이후 데프론가를 예의 주시했다. 그러나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별다른 것은 찾아내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데프론가에서 문제의 백작과 접촉한 흔적을 아예 찾을 수가 없었다.

카르티아 후작과 오빠들이 기를 쓰고 찾았을 텐데도 찾지 못했다는 건 애초에 접촉이 없었다는 소리였다.

‘그럼 관련이 없는 걸까.’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유리나는 자신이 갖고 있던 의심을 어쩔 수 없이 털어 냈다.

그리고 그날 이후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걸 평화롭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카르티아 가문을 뒤흔들어 놓았던 사건들의 배후는 모두 처리되고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 정도면 평화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리나는 계속해서 이유 모를 불안감에 시달렸다. 입맛이 돋지 않아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고, 먹는다 하더라도 평소 양의 반도 채 먹지 못했다.

밤에는 깊이 잠들지 못하고 몇 번이나 깨는 통에 숙면을 취하지 못해 하루 종일 몽롱하게 지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체력도 받쳐 주지 않아 밖에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방 안에서만 보냈다.

‘병든 닭 같아.’

유리나는 제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며 자수를 놓고 있던 손수건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살폈다. 특별한 도안 없이 손 가는 대로 놓은 자수는 다소 기하학적이었다. 그녀 스스로도 이게 무슨 무늬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유리나는 온갖 색이 난무한 손수건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지루하네.’

딱히 자수를 좋아해서 놓는 것이 아니니 흥미가 금방 떨어졌다. 밖에 나가서 산책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내키지가 않았다.

유리나는 손수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아무도 없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레이너드의 빈자리가 그리웠다.

카르티아가의 사람들만 지내는 4층 방을 썼던 어릴 적과 달리, 수도로 돌아온 이후 레이너드는 3층의 손님방으로 방을 옮겼다. 혹시 모를 구설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어릴 때야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니 유리나와 레이너드가 한 가족처럼 지냈다고 하더라도 성인이 된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아마도 정식으로 기사 작위를 받으면 새로 저택을 얻어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예전처럼 하루 종일 같이 붙어 있을 수는 없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서로를 찾아가는 것도 자제했다.

고용인들의 입단속을 단단히 하면 예전처럼 가깝게 지내도 괜찮았지만, 문제는 가족들에게도 두 사람의 관계를 비밀로 했다는 점이다.

비밀로 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마음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연인 사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서로 마음이 준비가 되지 않았던 탓이다.

‘연인 사이가 된다고 해도 좀 곤란하기는 해.’

온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능력자지만, 아직까지 레이너드는 기사 작위도 받지 못한 평민이었다. 카르티아 후작 내외는 유리나가 좋다고 한다면 아마 반대는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어떻게든 제국 내에서 레이너드의 입지를 탄탄하게 만들어 그녀와 엮어 주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후작가의 딸과 능력 있는 평민. 세간에서 이 관계를 어떻게 떠들어 댈지 안 봐도 뻔했다.

‘서로 좋아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 같아 유리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그녀는 레이너드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에 비해 훨씬 작은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레이너드는 그녀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를 한 데 비해 그녀는 이제야 제 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기 시작한 단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며칠 떨어져 지내고 나니 조금 더 확실히 제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레이너드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그가 아카데미에 있을 땐 이 외로움을 어떻게 견뎠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다시 한번 한숨을 쉰 유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습관적으로 방을 나가 공부방으로 쓰던 응접실로 갔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레이는 어디 간 줄 알아?”

유리나는 뒤따라온 베시에게 물었지만 대충 나올 만한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응접실에 없으면 연무장에 있거나 데이브의 연구실에 있었다.

‘설마 또 검술 연습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유리나는 레이너드에게 아직 몸이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으니 검술 연습은 자제하라고 거듭 말했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가만히 있으면 회복이 더디다는 것이다.

유리나의 세 오빠들은 레이너드의 말에 동조를 하며 아예 그를 데리고 매일 대련을 했다. 상대가 될까 싶었는데 레이너드는 마법을 적절히 섞어서 대련을 이어 갔다. 일종의 마검사인 셈이었다.

제국에 마검사는 생각보다 드물었다. 마법에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은 마법에 집중하는 것도 바빠서 검술을 배울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 오빠, 특히 쌍둥이는 마검사와 대련을 하는 것이 신선하다며 그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리나는 목검이 거칠게 탁, 탁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놀라서 흠칫거렸지만, 레이너드가 괜찮다고 하니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걱정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라 가능하면 검술 대신 마법 연구를 하고 있기를 바랐다.

다행히 베시는 그녀가 원하던 답변을 주었다.

“아까 별관으로 가신다고 하셨어요.”

별관 맨 꼭대기에는 데이브의 연구실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데이브와 레이너드는 한창 마법 연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요즘 두 사람의 연구 주제는 ‘어째서 베아투스인 레이너드의 눈동자 색이 보라색으로밖에 변하지 않는가’였다.

필요에 의해 마법을 배우긴 했지만 크게 학구열을 느끼지 못하는 유리나는 그게 그렇게 중요한 연구 주제인가 싶었다.

그러나 마법사들 세계에서는 중요한 일인지 두 사람은 크론 왕립 아카데미에 편지까지 보내며 연구에 몰입했다.

“연구실로 가자.”

“네, 아가씨.”

유리나가 응접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가려는데, 하녀 하나가 유리나의 방 쪽에서 걸어오더니 그녀를 발견하고는 허리를 숙였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전속 하녀였다.

“방에 안 계셔서 어딜 가셨나 했는데 여기 계셨군요.”

“어머니께서 찾으시는 거니?”

“네.”

“지금?”

“별달리 일이 없으시다면 지금 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유리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하녀를 따라 후작 부인의 방으로 향했다. 후작 부인이 하녀를 보내 유리나를 부르는 일은 드문 일이기 때문에 급히 할 말이 있나 싶어서였다.

“어머니, 부르셨어요?”

유리나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테이블 주변에서 하녀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던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웃으며 유리나에게 다가왔다.

“유리나, 어서 오거라.”

그녀는 유리나의 손을 잡고 티 테이블에 앉았다. 미리 준비를 해 뒀던 것인지 티 테이블에는 홍차를 비롯하여 화려한 티 푸드들이 놓여 있었다.

유리나가 삼단 트레이 위에 놓인 스콘을 바라보고 있자 후작 부인이 하녀를 시키지 않고 직접 스콘을 유리나의 접시에 덜어 주었다. 갓 구웠는지 스콘에서는 뽀얀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넌 스콘을 가장 좋아했지. 여전하구나.”

유리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예전의 ‘유리나’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그녀는 간식 중 스콘을 가장 좋아했다. 이곳에 와서 잼을 듬뿍 발라 베어 물었던 그 첫 스콘의 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유리나는 테이블 위에 있는 간식들을 새삼 살폈다. 스콘, 초콜릿 케이크, 버터 쿠키, 연어 샌드위치 등, 많고 많은 티 푸드 중에서도 이곳에 와서 그녀가 유독 잘 먹던 간식들만 있었다.

그 세심한 배려에 목이 막혔다. 유리나는 태연하게 웃는 척을 하며 홍차로 입을 축였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뜨끈한 느낌에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유리나가 홍차만 홀짝일 뿐, 스콘에는 손을 대지 않자 후작 부인이 다시 스콘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김이 나는 스콘을 반으로 쪼개 유리나가 좋아하는 살구 잼과 크림을 듬뿍 발라 다시 접시 위에 놓았다.

“홍차만 마시지 말고 스콘도 좀 먹으렴.”

별로 입맛이 돋지는 않았지만 후작 부인의 정성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유리나는 스콘을 한입 베어 물었다. 새콤한 살구 잼의 맛에 그나마 식욕이 돋는 것 같았다. 유리나는 홍차를 곁들여 가며 천천히 스콘 반쪽을 모두 먹었다.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후작 부인이 나머지 반쪽에도 잼과 크림을 발라 건넸다. 유리나가 고개를 젓자 그녀는 한숨을 쉬며 스콘을 접시에 올려 주었다.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스콘 하나도 다 못 먹는 거니?”

“죄송해요. 그냥 입맛이 좀 없네요.”

“죄송할 게 뭐가 있니. 오히려 엄마가 미안하지. 나도 늙었더니 사람 보는 눈이 없어진 모양이야. 하녀들 하나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아니에요. 그건…….”

현혹 마법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유리나는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저택에서 피 묻은 리본이 발견된 그날, 유리나는 후작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모두 설명해 주었다.

후작 부인이 마음 쓰지 않도록 에밀리가 현혹 마법을 썼다는 것을 강조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에밀리의 속내를 미처 알아내지 못해 유리나가 큰일을 겪게 한 것을 자책했다.

유리나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녀 또한 머리로는 현혹 마법에 걸렸다는 것을 알아도 마음으로는 줄곧 자신을 책망했으니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유리나를 보던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며칠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그녀의 보드라운 손이 유리나의 뺨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지난 반년간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손은 이젠 따뜻했다. 유리나는 어린아이가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후작 부인의 손에 제 뺨을 살짝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금방 좋아질 거예요. 그것보다 어머니가 다시 건강해지셔서 다행이에요.”

피 묻은 리본이 정말 원인 모를 병의 이유였는지, 리본을 불태운 이후 후작 부인은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다. 고작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창백했던 얼굴엔 화색이 돌았고 안쓰러울 정도로 홀쭉했던 볼엔 살도 조금 올랐다.

그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이번 일을 꾸몄던 전 백작이 노린 건 유리나였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그 과정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오직 유리나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해야 했다.

잘못은 오로지 이번 일을 계획한 그 전 백작에게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죄책감을 가질 이유도, 그녀에게 미안해할 이유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리나는 후작 부인을 아무렇지 않게 대할 자신이 없었다.

안 그래도 그녀에게는 지은 죄가 많다. 그런데 또 죄가 하나 추가됐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이번에도 그 맑은 푸른 눈을 마주할 수가 없어 고개를 떨어뜨리자 후작 부인이 일어나 유리나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았다.

“네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 안단다.”

“…….”

“어린 네가 감당하기엔 힘든 일일 거야.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기분은 좋지 않지. 그게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고용인이라고 하더라도 충격은 클 테야. 넌 정이 많은 아이잖니.”

내가 정이 많았나?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실에 유리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지금껏 자신은 정이 별로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와서는 특히 그랬다.

“그런데 배신당한 것도 모자라 그런 큰일까지 당했으니 마음이 무거울 거야.”

“아니에요. 전 정말 괜찮아요.”

유리나는 애써 고개를 저어 보았지만, 후작 부인이 다 안다는 듯 그녀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래서 말인데, 유리나. 사교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영지에 한 번 다녀오는 게 어떠니? 날씨도 제법 따뜻해져서 바닷가에서 놀다 오면 좋을 거야.”

“영지요?”

“그래. 수도보다 공기도 좋아서 몸과 마음 추스르기에도 좋고, 수도와 다른 분위기니까 안 좋은 기억을 떨쳐 내기에도 좋지 않겠니?”

유리나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바닷가라…….’

끌리는 제안이기는 했다. 수도의 저택이 넓고 정원이 잘 꾸며져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적고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 카르티아 영지와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후작 부인의 말처럼 확실히 그곳에 가면 고민 없이 푹 쉬고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레이는 어쩌지.’

아무리 짧게 다녀온다고 해도 적어도 2, 3주는 떨어져 있어야 할 것이다. 하루에 몇 번 만나지 못하는 것도 참기 힘든데 그 시간을 또 떨어져 있으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머뭇거리는 유리나를 보던 후작 부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레이너드도 많이 다쳤다고 했었지.”

“네?”

유리나는 갑자기 나온 이름에 깜짝 놀라 다소 높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후작 부인이 유리나의 손을 계속 토닥거리며 말을 이었다.

“로드릭 말로는 다 나았으니 걱정 없다고 하는데, 엄마가 보기엔 아직 더 휴식이 필요할 것 같거든. 그런데 네 오빠들이 레이너드를 통 가만히 놔두지 않는 것 같더구나.”

“…….”

“검술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마법사인 애를 데리고 왜 그렇게 혹독하게 대련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어.”

“에드윈 오빠가 그러던데 레이와 대련을 하면서 마법사를 어떻게 상대할 수 있을지 배울 수 있어서 좋대요. 데이브나 다른 마법사들은 체력이 약해서 오빠들 상대가 되지 않잖아요.”

“그건 그렇지.”

후작 부인이 작게 웃었다.

“그래도 저대로 놔뒀다가는 레이너드의 상태가 더 안 좋아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란다. 그래서 레이너드도 같이 영지에 가서 쉬면 어떨까 싶은데 네 생각은 어떠니?”

유리나는 이번에도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레이너드와 같이 휴양이라니.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는 좋은 제안이었는데 왠지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설마 눈치채셨나.’

숨긴다고 숨겼는데 꼭 후작 부인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채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유리나는 후작 부인의 표정만으로는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자상하고 온화한 성격을 지니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그녀도 귀족가의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능숙하게 표정을 감추는 법을 배워 좀처럼 생각이나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웃던 후작 부인이 유리나의 얼굴을 살피며 덧붙였다.

“참고로 엄마도 같이 갈 거란다.”

이번에도 유리나는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가 괜찮다고 한다면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단 하루 만에 영지행이 결정되었다.

* * *

마차 창 너머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섬 하나 없이 깔끔하게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 하늘과 맞닿을 것 같은 드넓은 바다는 카르티아 영지의 자랑거리였다.

귀족들은 물론, 평민들도 죽기 전에 한 번쯤 카르티아 영지에 놀러 오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마차 여행 동안 경치 대신 유리나만 바라보던 레이너드는 바다를 발견하자마자 탄성을 내질렀다.

“와아.”

책을 보고 있던 유리나는 그 소리에 실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황금빛 태양이 반짝이고 있었다. 파도가 칠 때마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햇빛에 반짝여 여러 색으로 반짝였다.

유리나는 매년 두세 번 정도 카르티아 영지로 와서 시간을 보냈다. 매년 올 때마다 질리도록 바다를 봤으니 이젠 별 감흥이 없을 법도 한데, 매번 볼 때마다 아름다운 광경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다보다는 창문에 매달려 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레이너드에게 더 시선이 갔다.

유리나는 창문으로 흘러들어 온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레이너드를 관찰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다던 그는 좀처럼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햇빛을 받은 붉은색 눈동자는 초롱초롱 빛났고, 하얀 뺨은 흥분으로 불그스름해졌다.

어릴 때처럼 감탄사를 크게 내뱉거나 유리나에게 저것 좀 보라며 호들갑은 떨지 않았지만 들떠 하고 있는 게 표정에서 다 보였다.

유리나는 입을 살짝 벌리고 바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때?”

“대단해. 강이나 호수하고는 전혀 달라.”

평소보다 한 톤 올라간 목소리로 대답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밖을 향해 있었다. 늘 유리나와 대화할 때는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는 걸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놀라운 일이겠지.

“바다에서도 물놀이를 할 수 있어?”

“하기는 하지. 이쪽 해안가는 수심이 그다지 깊지 않아서 아이들도 많이 뛰어놀아. 그런데 날이 덥지 않아서 물놀이는 힘들지 않을까?”

“아, 하긴. 그건 그렇겠네.”

레이너드가 살짝 아쉬움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유리나는 그가 바닷바람에 날리는 머리를 정리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반짝이는 황금빛 머리카락, 저 멀리서 들려오는 갈매기 소리, 코끝을 스치는 비릿하면서도 시원한 바다 냄새.

깨어나지 않는 그를 보며 마음을 졸이던 일이 불과 3주 전의 일인데, 이렇게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평화롭게 보냈다고 하기엔 영지까지 오는 길이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레이너드와 있으니 뭐든 잘 풀릴 것만 같았다.

유리나는 카르티아 후작 부인과 베시의 눈치를 살피다가 드레스 자락으로 그의 신발을 감췄다. 구두코로 그의 신발을 톡 때리자 그제야 레이너드의 시선이 유리나에게로 향했다.

그가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나 싶더니 이내 반격을 하듯 유리나의 구두 앞코를 신발로 톡 건드렸다. 은밀하고 긴장감 넘치는 장난과는 달리 얼굴에는 해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물놀이는 하지 못해도 바닷가에 나가 볼 수는 있겠지? 도착하면 산책하러 가자. 어때?”

드레스 속에서 그의 발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유리나가 서둘러 발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가 두 발로 유리나의 왼쪽 발을 꽉 잡았다.

스타킹도 신지 않은 맨 복사뼈에 그의 발목이 닿았다. 그가 발목으로 유리나의 복사뼈를 천천히 문질렀다. 그와 맞닿은 곳에 뜨끈하게 열기가 피어올랐다.

고작 발목이 닿은 것뿐인데 왜 입을 맞춘 것처럼 호흡이 달아오르고 얼굴이 뜨거워지는 건지 모르겠다. 그건 레이너드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단정한 셔츠 아래서 그의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다.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그녀를 보며 무언가를 갈구하듯 엄지손가락으로 제 아랫입술을 매만지는 것을 보다가 오른쪽 발로 그의 발을 탁 쳐 냈다. 레이너드가 눈을 찡그리며 그녀의 발을 놓아주었다.

“무슨 일이니?”

유리나의 옆에서 선잠을 자고 있던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소란을 느꼈는지 살짝 눈을 뜨며 물었다. 유리나는 손등으로 뜨끈해진 볼을 누르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몸이 뻐근해서 조금 움직이다가 레이의 발을 실수로 밟고 말았어요.”

“저런, 조심 좀 하지 그랬니. 레이너드, 괜찮니?”

“아, 괜찮습니다. 다리를 길게 뻗고 있던 제 잘못이죠.”

“다리가 길다는 자랑을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니.”

말은 그렇게 해도 레이너드의 대답이 유쾌했는지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곧 있으면 별장에 도착할 테니까 답답해도 조금만 참으렴.”

“네.”

유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너드를 살짝 노려보았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을 향해 부드럽게 웃던 레이너드가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후작 부인 몰래 입술을 벙긋거렸다.

‘네가 먼저 시작한 거잖아.’

대충 해석하니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또 틀린 소리는 아니라서 유리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산책은? 갈 거야?”

후작 부인이 다시 눈을 감는 것을 확인한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구두를 톡 쳤다. 유리나는 발을 최대한 뒤로 빼며 그의 시선을 피해 바다를 쳐다보았다.

“너 하는 거 봐서.”

“흐음.”

그가 불만스럽다는 듯 앓는 소리를 냈지만 유리나는 그의 표정을 못 본 척하며 눈을 감았다. 그의 발은 분명히 떨어져 있는데, 그와 맞닿았던 복사뼈 부근이 여전히 불이 붙은 것처럼 뜨끈했다.

* * *

보통 가족끼리 영지에 오면 카르티아 저택에서 머물지만, 요양 겸 여행차 온 만큼 이번에는 아담한 3층 별장에 머물기로 했다.

카르티아가 사람 외에 출입을 엄격하게 제한한 해안가에 지어진 별장은 앞으로는 푸른 바다를, 뒤로는 소나무 숲을 끼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유리나는 테라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는 3층 별장은 어느 방에서든 바다를 볼 수가 있었다.

그중 유리나가 쓰기로 한 서쪽 방은 가장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는 방이었다. 원래는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쓰던 방이었지만, 후작 부인이 유리나를 위해 양보해 주었다.

밝은 햇빛에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바다, 끼룩거리며 날아다니는 갈매기, 하늘 위에서 빛나는 황금빛 태양, 천천히 불어오는 바닷바람. 그 모든 풍경이 평화로웠다.

유리나는 눈을 감고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시원한 바다 공기에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이 순간만큼은 그동안 머릿속을 어지럽힌 고민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좋다.”

유리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등 뒤에서 베시가 그녀의 어깨에 숄을 덮어 주며 웃었다.

“아가씨께서 좋아하셔서 다행이에요.”

“베시는 좋지 않아?”

“저도 좋죠. 그런데 전 아가씨께서 좋아하시는 모습이 더 좋아요.”

“그게 뭐야.”

유리나가 어이없다는 듯 웃자 베시가 그녀의 팔을 잡고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요즘 아가씨께서 통 기운이 없으셨잖아요. 저는 사실 이곳까지 오는 것도 걱정이었어요.”

“왜?”

“수도에서 마차로 꽤 걸리잖아요. 요즘 몸도 안 좋으신데 더 나빠지는 건 아닌가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아가씨 표정을 보니 오기를 잘한 것 같아요.”

“내 표정?”

유리나가 볼을 더듬거리며 묻자 베시가 환하게 웃으며 제 입꼬리를 가리켰다.

“바다를 보시자마자 이렇게 웃고 계시잖아요.”

그랬나. 유리나는 베시를 따라 입가를 더듬거렸다. 딱히 미소를 짓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손끝에 닿는 입꼬리가 베시 말처럼 살짝 올라가 있는 것 같았다.

“피곤하실 텐데 오늘은 방에서 쉬실 건가요?”

베시가 유리나의 짐 가방에서 옷들을 꺼내며 물었다. 그녀가 손짓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들어와 베시가 건넨 옷들을 옷장에 착착 정리했다.

유리나는 바다를 한 번 돌아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피곤하기는 한데 산책 좀 갔다 오고 싶어. 날씨가 워낙 좋아서.”

“산책도 좋죠. 산책을 하고 오시면 밤에 잠도 더 잘 오실 거예요. 그렇지만 이제 막 도착하셨으니까 조금 쉬었다 나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일단 목욕물을 준비할 테니까 따뜻한 물에 여독 좀 풀고 나가세요.”

“응, 알겠어.”

유리나가 대답하자마자 베시가 욕실로 달려가 새하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기 시작했다.

마법이 있는 이 세계에서는 한국에서처럼 수도 시설이 발달되어 있어 일일이 물을 길으러 올 필요가 없었다. 욕실에 설치된 수도꼭지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물이 콸콸 쏟아졌다.

손을 넣어 물 온도를 살핀 베시는 짐 가방에서 향유를 꺼내 욕조에 넣었다. 별장의 하녀 하나가 말린 꽃잎까지 가져와 뿌리자 욕실에는 금방 향기로운 향기가 가득 찼다.

유리나는 베시의 도움을 받아 욕조 물에 몸을 담갔다. 순식간에 몸이 따끈하게 달아오르며 정신이 몽롱해졌다. 며칠 동안 마차를 타고 오며 쌓였던 피로가 금세 풀리는 것 같았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유리나는 아까부터 베시를 도와주던 검은 머리의 하녀에게 손짓했다. 유리나를 대신하여 베시가 물었다.

“이름이?”

“메리입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메리는 베시와 대화를 하면서도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유리나를 흘끔거렸다. 말로만 듣던 아가씨를 보게 되어 신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유리나는 최대한 그녀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별장에서 지내는 동안 마주칠 일이 많으니 간단한 대화라도 할 테지만, 에밀리와의 일 때문에 좀처럼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유리나는 메리에게 한 번 웃어 보인 뒤 용건만 간단하게 말했다.

“레이에게 좀 이따 같이 산책 가자고 전해 줄래?”

“네, 알겠습니다!”

다행히 메리는 유리나의 살갑지 않은 태도에도 별달리 실망한 기색 없이 밖으로 나갔다.

유리나의 머리를 다 말려 주고 오일까지 발라 준 베시는 옷장으로 가서 살펴보더니 새하얀 원피스를 꺼내 왔다.

“아가씨, 이건 어떠세요?”

“그건 너무 하얗지 않아?”

“괜찮아요.”

“모래가 잔뜩 묻으면 빨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건 제가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유리나는 거의 강제적으로 그 원피스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피스를 차려입고 거울을 보니 괜찮아서 베시에게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유리나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쳐다본 베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유리나의 머리를 하나로 땋아 리본으로 묶어 주었다. 바닷바람에 머리가 날리면 정돈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햇볕이 따갑지만 양산은 쓰기 힘들잖아요. 바람에 날아갈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양산보다는 모자가 나을 거예요.”

베시는 마지막으로 유리나의 머리에 모자를 씌어 준 뒤 턱밑에 리본을 묶었다. 봄꽃 향이 나는 향수를 목덜미에 뿌려 마무리하자마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베시가 유리나를 조심스럽게 일으키며 웃었다.

“자, 예쁘게 꾸며 드렸으니까 바다 구경 재밌게 하고 오세요.”

“어? 베시는?”

“저는 짐을 정리해야 해요. 최소한으로 챙겨 왔는데도 정리할 게 많아요.”

“그렇지만…….”

유리나가 잠깐 머뭇거리자 베시가 그녀의 등을 약하게 밀었다.

“얼른 가세요. 레이너드 님께서 기다리시겠어요.”

유리나는 그녀가 미는 대로 걸어가며 등 뒤를 살폈다. 눈이 마주치자 베시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설마 베시도…….’

그러나 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베시가 문을 확 열어 버린 것이다. 문 앞에 서 있던 레이너드는 유리나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손을 내밀며 웃었다.

“그럼 갈까?”

유리나는 얼른 가라고 손짓하는 베시를 보았다가 레이너드의 손바닥에 손을 얹었다.

“응.”

* * *

놀러 온 첫날부터 날씨가 좋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바람은 세지가 않아 파도가 그리 높게 치지 않았다. 기온도 포근해서 추위에 떨지 않고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모자를 누르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가 칠 때마다 반짝이는 바닷물에 눈이 부셨다.

“진짜 예쁘다.”

바닷가에 도착한 레이너드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유리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손을 잠깐 놓더니 신발을 벗었다. 그는 하얀 모래에 파묻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아이처럼 웃었다.

“느낌이 이상해.”

“그래?”

유리나가 구두를 벗으려고 하자 레이너드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잡아 주었다. 덕분에 유리나는 휘청거리지 않고 신발을 벗을 수 있었다.

레이너드를 따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니 발가락 사이에서 움직이는 모래의 감촉에 몸서리가 쳐졌다. 낯선 감각이기는 했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손을 잡고 나란히 바다로 걸어갔다. 투명한 바닷물이 두 사람의 발등을 적셨다가 물러났다. 또 한 번 밀려든 파도가 이번에는 종아리까지 적시고 사라졌다.

“바닷물은 짜다고 하던데.”

레이너드가 손가락을 바다에 담갔다가 쪽 빨았다. 그러더니 어깨를 움찔거리며 인상을 썼다.

“진짜 짜네.”

“그걸 꼭 직접 먹어서 확인해야 해?”

“안 먹어 보면 어떻게 알겠어. 너도 먹어 볼래?”

“아니, 나는 됐어.”

“한번 먹어 봐.”

레이너드가 다시 물에 손을 담갔다가 유리나를 향해 다가왔다. 유리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뒷걸음을 치다가 뒤를 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리나가 레이너드를 달리기로 따돌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몇 걸음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에게 잡히고 말았다. 레이너드가 등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어깨에 턱을 얹었다.

“아무도 없으니까 좋다.”

지난 2주간 사람들의 눈 때문에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레이너드가 그녀를 품에 가둘 것처럼 꽉 안았다. 유리나는 그의 가슴팍에 나른하게 등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머리 위에서 끼룩거리는 갈매기의 소리,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 나른한 레이너드의 숨소리.

그 모든 평화로운 소리에 유리나는 사냥 대회 이후로 곤두서 있던 신경이 안정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다 보고 싶다면서 바다는 안 보고 이러고만 있을 거야?”

“바다보다는 네가 더 보고 싶었어.”

“누가 들으면 몇 년은 떨어져 있다 만난 사람 같네.”

“실제로도 6년이나 떨어져 있었잖아.”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혼내듯 귀를 살짝 물었다 놓았다.

“그 공백을 채우려면 아직도 멀었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유리나는 눈을 감았다.

“그럼 여기에 머무는 동안 많이 보고 가자.”

* * *

오랜 마차 여행에 물놀이까지 했으니 금방 잠이 와야 하는데, 유리나는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꼬물거렸다. 사냥 대회 이후로 고질적으로 잠을 못 잔 데다가, 잠자리도 바뀌어서 불편했기 때문이다.

별장의 침대는 수도 저택의 침대 못지않게 폭신하고 아늑했지만 방 안에 맴도는 공기가 왠지 낯설었다.

‘조금 추운 것 같기도 하고.’

유리나는 이불로 몸을 둘둘 말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택에서 늘 보던 풍경 대신 어둠이 내려앉은 바닷가의 모습이 보였다. 쏴아아, 시원한 파도 소리도 들렸다.

환한 햇빛이 드리운 낮에는 분명 이 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편안했는데, 사위가 어두운 탓인지 기분이 심란했다. 대체 뭐가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한 건지. 유리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입술을 짓씹다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래도 자야지.’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을 때였다. 톡, 하고 무언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유리나는 이불을 내리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누구?”

대체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온 건가 싶어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뾰족하게 나갔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잘못 들은 건가.’

그렇게 결론지으며 다시 이불을 덮으려고 하는데 또 한 번 노크 비슷한 소리가 났다. 이번엔 조금 전보다 큰 소리였다.

한 번은 환청이라고 해도 두 번 모두 환청일 리가 없었다. 유리나는 이불을 치우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 밤중에 누가 찾아온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또다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정확히 들었다. 문 쪽이 아니라 테라스 쪽이었다.

‘뭐지?’

유리나는 베시가 의자에 잘 놓아 두었던 가운을 잠옷 위에 걸치고 테라스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발에 뭐가 밟혀서 내려다보았더니 새끼손톱만 한 돌멩이 몇 개가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거였다.

‘이게 뭐야?’

낮보다 차가운 바람에 몸을 떨던 유리나는 가운을 조금 더 잘 여미고 테라스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레이, 여기서 뭐…….”

뭐 하는 거야? 채 묻기도 전에 테라스 밑에 서 있던 레이너드가 재빨리 제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덩달아 손으로 입을 막은 유리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입 모양으로 물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3층이라 입 모양을 알아보기 힘들었는지 레이너드가 눈을 살포시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환하게 웃으며 유리나를 향해 양손을 흔들었다.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어두운 풍경과 마냥 해맑은 그 얼굴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아서 유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레이너드가 이번에는 유리나를 향해 내려오라는 듯 손짓했다.

어이가 없어서 유리나는 이번에도 소리 없이 물었다.

‘여기 3층이야. 어떻게 내려가?’

황당해하는 유리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레이너드가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가 주먹으로 제 왼쪽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자기만 믿으라는 소리인가.’

유리나는 테라스 난간에 매달려 가슴을 두드렸다가 내려오라고 손짓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레이잖아.’

그녀에게는 그가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을 거라는 근거 있는 믿음이 있었다. 유리나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가 난간 밖으로 다리를 옮겼다. 순간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리자 레이너드가 재빨리 그녀를 받을 것처럼 두 팔을 뻗었다.

다행히 유리나는 떨어지지 않고 난간 밖에 섰다. 레이너드가 여전히 팔을 벌린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휘청거려서 겁이 조금 났지만 유리나는 그를 믿고 손을 놓았다.

발이 허공에 붕 뜨는 소름 끼치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서늘한 바닷바람과는 달리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바람이었다.

그 바람 덕분에 유리나는 바닥으로 추락하지 않고 허공에 둥둥 떠서 천천히 이동했다.

‘레이의 마법이구나.’

안심이 되어 실눈을 뜨자 레이너드가 미소 띤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유리나가 손을 뻗자 그는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감싸 쥐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나만 믿으라고 했지?”

그는 유리나의 발을 제 발 위에 올려놓으며 웃었다. 유리나는 그를 따라 웃으며 그의 목에 손을 둘렀다. 맞닿은 그의 몸이 따뜻해서 찬 밤공기에 서늘해졌던 몸이 덩달아 따뜻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이 밤중에 갑자기 무슨 일이야?”

“산책하러 가자. 별이 예뻐.”

“그래. 밤에 보는 바다는 또 다를 거야.”

“그럼 가자.”

유리나를 바닥에 내려 주려던 레이너드는 그녀의 맨발을 보고 멈칫했다. 그는 여전히 유리나를 제 발 위에 올려놓은 채로 물었다.

“신발은 왜 안 신고 나왔어?”

“아, 밖에 나올 거란 생각은 못 해서……. 모래사장이니까 맨발로 걸어도 돼. 그냥 가자.”

“잠깐만.”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꽉 안은 채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유리나는 꼭 아빠의 발 위에 서서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그의 발이 걷는 대로 졸졸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레이너드는 1층 테라스 난간에 유리나를 조심스럽게 앉히더니 자신의 신발을 벗었다. 그러고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유리나의 발바닥을 조심스럽게 털어 주었다.

그의 손끝이 스칠 때마다 온몸이 간지러운 것 같은 느낌에 유리나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자 레이너드가 웃으며 발등 위에 입을 맞췄다.

“발이 차가워.”

그는 유리나의 발에 조심스럽게 제 신발을 신겨 주었다. 키 차이가 많이 나는 만큼 두 사람의 발 크기 또한 차이가 많이 났다. 신발이 헐거운 탓에 유리나가 발을 움직일 때마다 신발이 금방이라도 벗겨질 것처럼 덜거덕거렸다.

유리나는 괜히 발을 양옆으로 흔들어 보았다.

“어차피 모래사장을 걸을 거니까 필요 없대도 그러네.”

“바다까지 조금 걸어가야 하잖아. 혹시라도 뾰족한 걸 밟으면 어떡하려고.”

“그렇지만 신발이 이렇게 커서 오히려 넘어지겠는걸.”

“내가 꽉 잡아 줄 테니까 걱정 마.”

호언장담을 한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허리를 안고 그녀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너는?”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양말을 신었으니 맨발보다는 조금 낫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말이 뾰족한 물건을 막아 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유리나의 발에 상처가 날까 봐 걱정했지만 그라고 날카로운 것에 찔리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유리나의 걱정 어린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어깨만 살짝 으쓱여 보였다.

“괜찮아. 그리고 다치면 치료하면 되지. 마법이 있는데 뭔 걱정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잖아. 유리나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그가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중얼거렸다.

“치료를 할 수 있더라도 네가 다치는 건 보기 싫어.”

그러고는 유리나의 손을 꽉 잡고 걸음을 옮겼다. 허공에는 어느새 레이너드가 만든 빛 구체가 둥둥 떠다녔다.

유리나는 더 이상 뭐라고 하는 대신 그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신발이 헐거워 걸을 때마다 발에 신경을 써야 했지만 생각보다 불편하지는 않았다.

사위가 어두운 밤바다에는 유리나와 레이너드, 둘뿐이었다. 썰물 때인지 낮에 비해 바다가 저 멀리 밀려나 있었다.

바다만큼이나 어두운 하늘 위에는 아직 보름달이 채 되지 못해 찌그러진 달과 햇볕에 반짝이는 모래처럼 쉴 새 없이 빛나는 수많은 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멀리 가지 말고 여기서 구경하자.”

레이너드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모래사장 위에 깔았다. 그는 그 위에 유리나를 앉히고는 뒤통수에 손깍지를 끼며 모래사장 위에 털썩 누웠다.

“수도와 다르게 별이 많이 보인다. 쏟아질 것 같아.”

“주위가 어두우니까. 어두울수록 별이 잘 보여.”

“그래서 고향에서 별이 잘 보였던 거구나.”

“고향?”

유리나가 뒤를 돌아보며 되묻자 레이너드는 빙긋 웃고는 눈을 감았다. 마치 자신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유리나는 혹시 되묻는 질문을 못 들은 건가 싶어 다시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못 들을 리가 없지.’

이런 생각하기 좀 낯간지러웠지만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 놓치지 않고 듣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유리나가 먼저 고백을 한 후로는 작은 혼잣말도 귀신같이 알아들을 때가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듣고도 모른 척하는 것이다.

‘고향이라.’

무심코 입에 말하기는 했어도 회피하고 싶은 주제일 것이다. 술집 주인인 엄마, 술에 취해 희롱을 일삼던 손님들, 그걸 피해 도망가면 어김없이 날아드는 어머니의 손찌검, 남다른 생김새 때문에 그를 괴물 보듯이 보는 또래들.

고향이란 단어가 그에게 주는 기억이 좋을 리가 없었다.

유리나는 원작에 서술됐던 카리온의 성장 배경을 떠올려 보다가 레이너드를 따라 모래사장에 누웠다. 눈을 감고 있던 레이너드가 기척을 느낀 것인지 재빠르게 팔을 뻗어 유리나의 머리 뒤를 받쳤다.

검을 배웠다던 그의 팔은 꼭 돌덩이를 베고 있는 것처럼 단단했다. 그렇지만 그게 불편하지 않고 아늑하다는 게 이상한 일이다.

유리나는 그의 팔을 치우는 대신 몸을 조금씩 움직이며 눕기 편한 자세를 찾았다. 레이너드도 그녀를 따라 몸을 움직이다가 아예 그녀 쪽으로 몸을 돌아누웠다.

“안 불편해?”

편한 자세를 잡고 눈을 감은 유리나에게 레이너드가 물었다. 유리나는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조금 딱딱하긴 한데 괜찮아.”

“그럼 다행이네.”

정작 그는 모래 위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에 고운 모래알이 다닥다닥 달려 있었다.

“씻을 때 고생 좀 하겠다. 머리에 모래가 한가득 묻었어.”

“나보다는 네가 더 고생할 것 같은데.”

레이너드가 팔베개를 해 준 쪽 손으로 유리나의 머리를 매만졌다. 뒤통수가 직접적으로 모래에 닿지 않았지만 사방으로 뻗어 있는 웨이브 진 머리카락에는 레이너드 것 못지않게 묻어 있었다.

까끌거리는 머리카락을 만져 본 유리나가 허탈하게 웃었다.

“이걸 어떻게 다 씻지? 모래가 고와서 잘 씻기지도 않겠는데.”

“걱정 마. 마법으로 다 털어 줄게.”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내가 뭘 못하겠어. 사실 내가 발명한 건 아니고, 목욕 마법이라고 아카데미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마법이야.”

“목욕 마법이 가장 많이 쓰인다니. 다들 안 씻고 다니는 거야?”

“과제가 쏟아지거나 졸업 논문에 치일 때는 씻고 먹는 시간도 아까우니까. 그렇게 보지 마. 목욕 마법이 실제로 씻은 것처럼 깨끗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꼬박꼬박 씻었어. 목욕 마법은 에이든이 잘 썼지.”

어째 점점 자세해지는 이야기에 유리나가 콧등을 찌푸렸다.

“어째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까지 들은 것 같은데.”

“아무튼 모래 걱정은 하지 말고, 지금은 별 구경이나 하자.”

유리나의 이마에 입을 맞춘 다시 레이너드가 손으로 동쪽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저 별자리 보여? 항아리 모양 별자리.”

“어디?”

“저기, 저거.”

그래도 유리나가 찾지 못하자 그는 손가락으로 하늘 위를 덧그리듯 허공에 항아리를 그렸다.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유리나는 그가 말하는 별자리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보여.”

“그 옆에는 물병을 들고 물을 길으러 간 소녀 별자리가 있어.”

유리나는 터져 나오는 하품을 참느라 조금 이상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아카데미에서 배웠거든. 고대 마법이 천문학과 관련이 있어서.”

그 후로도 레이너드는 별자리 이야기나 아카데미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려주었다. 조곤조곤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자장가처럼 들려서, 유리나는 눈을 뜨려고 노력했는데도 어느 순간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 * *

다음 날 아침, 유리나가 깨어나자마자 본 것은 푸른 바다나 하늘이 아니라 하얀 캐노피였다.

‘꿈이었나.’

레이너드와 함께 모래사장에 누워 쏟아질 것 같은 별을 구경하던 것이 실제 일이었는지 꿈이었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잠시 눈을 깜빡이며 생각을 정리하던 유리나는 베개 옆에 놓여 있는 소라 껍데기를 발견했다. 분명 어제 자기 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꿈이 아니었구나.’

그렇다면 레이너드가 모래사장에서 잠든 그녀를 방까지 데려다주고, 이 깜짝 선물도 남긴 모양이다. 호언장담했던 대로 마법으로 머리에 묻은 모래도 털어 주었는지 머리나 몸이 막 목욕을 하고 나온 것처럼 모래 한 톨 없이 보송보송했다.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두고 간 소라 껍데기를 귀에 갖다 댔다. 파도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걸 듣고 있으니 어젯밤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머리를 받쳐 주던 단단한 팔과, 서늘해진 몸을 감싸주는 따뜻한 품, 나지막이 속삭이던 부드러운 목소리와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던 입술.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풍경이었다.

유리나는 소라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관찰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내 도로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아파.’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머리는 딱따구리가 관자놀이를 쪼는 것처럼 아팠고, 목은 숨만 쉬어도 타들어 갈 것처럼 뜨거웠다. 혹시나 해서 작게 “아, 아.” 하고 중얼거려 봤더니 통증이 더 심해졌다.

유리나는 손등으로 평소보다 조금 뜨끈한 것 같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에 옷을 제대로 입지 않고 바닷바람을 맞았더니 감기가 오려는 모양이다.

‘고작 바람 좀 맞았다고 감기라니.’

체력이 약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약할 줄은 몰랐다. 유리나는 누운 채로 마른세수를 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조금만 움직여도 욱신거리는 통증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감기에 걸렸다는 것을 레이너드가 알면 분명 스스로를 책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럴 필요 없는데.’

레이너드가 나가자고 제안하기는 했지만 억지로 끌고 간 것도 아니고 유리나가 자의적으로 나간 것이었다. 누구의 책임도 아닌 일인데 레이너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꽤 이성적인 것 같으면서도 그는 유리나의 관한 일이라면 이성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사냥 대회 때도 유리나를 구하겠답시고 무작정 달려들지 않았던가.

유리나는 조금이라도 바람을 막기 위해 이불로 몸을 둘둘 감싸며 어제 일을 떠올렸다.

레이너드와 나란히 누워 올려다보던 밤하늘. 온몸 위로 쏟아질 것처럼 반짝이던 별들. 머리를 든든하게 받쳐 주던 팔과 서늘해진 몸을 감싸 안아 주던 따뜻한 몸.

“아가씨, 일어……. 어? 어디 안 좋으세요?”

밝게 웃으며 방으로 들어온 베시가 식은땀을 흘리는 유리나의 얼굴을 보고 놀라서 달려왔다. 그녀는 유리나의 이마와 목에 손을 대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열이 살짝 있으신 것 같은데. 간밤에 추우셨나요?”

“춥지는 않았는데 좀 피곤했던 모양이야.”

차마 레이너드와 함께 밖에 나갔다 왔다고 말할 수는 없어 유리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다행히 베시는 그녀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긴, 피곤하셨을 텐데 도착하자마자 바다에 가서 산책을 하셨으니 감기가 올 법도 해요. 의원을 불러오라고 할게요.”

유리나는 허겁지겁 방을 나가려는 베시의 팔을 덥석 잡았다.

“의원을 부르려면 저택까지 다녀와야 하잖아.”

늘 의원이 상주해 있는 카르티아 저택과는 달리 별장에는 의원이 없었다. 그래서 별장에 상주하며 관리하는 고용인들은 아프면 마을로 나가 의원을 방문한다.

그러나 카르티아가의 사람들이 아플 경우에는 카르티아 저택에서 가문의 주치의를 불러와야 하는데, 별장에서 저택까지는 가는 데만 말로 한 시간이 족히 걸렸다. 크게 아픈 것도 아닌데 번거롭게 의원을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번거롭기도 하고, 레이너드가 걱정할 것 같다는 이유도 있지만 아픈 것을 알리지 않는 데엔 또 다른 있었다.

“그렇게 심한 것도 아닌데 괜히 의원을 불러서 어머니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

“그래도…….”

“오전에 푹 쉬면 괜찮아질 거야. 그래도 심해지면 그땐 의원을 꼭 부르라고 할게.”

베시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유리나의 머리와 목을 만져 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심해지시면 바로 말씀하셔야 해요. 아셨죠?”

“응.”

“별장에도 하인들이 쓰는 상비약이 있기는 있을 거예요. 약하고 따뜻한 차를 가져다 드릴게요. 아침 식사도 방에서 하실 건가요?”

“응. 어머니와 레이에게는 피곤해서 좀 더 자겠다고 전해 줘.”

베시는 알겠다며 서둘러 방을 나갔다. 유리나는 문이 닫히는 것을 보다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마른기침이 계속 나왔다.

‘금방 나아야 할 텐데.’

곧 베시가 간단한 아침거리와 약을 가져왔지만, 입맛이 돌지 않아 약만 겨우 먹고 눈을 감았다. 약 덕분인지 금방 잠에 들 수 있었다.

* * *

최대한 감기에 걸린 것을 숨기려고 했지만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아침 식사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걸렀지만, 문제는 점심 식사였다.

점심 식사까지 거르면 레이너드나 후작 부인이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유리나는 점심 식사 때엔 식당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모래를 퍼먹은 것처럼 입 안이 텁텁하고 입맛도 없었다. 눈치를 보며 수프를 조금 떠먹어 보았지만 목이 깔끄러워서 그것도 제대로 넘길 수가 없었다.

결국 수프를 몇 입 먹지 못하고 스푼을 내려놓는 유리나를 보며 레이너드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리나,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유리나는 최대한 아픈 기색을 숨기며 물을 홀짝였다.

“입맛이 없어서 그래.”

“안색도 안 좋아 보이는데.”

유리나는 계속해서 자신을 살피는 레이너드에게 괜찮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노릇노릇하게 구운 치즈 토스트를 한입 베어 물었다. 입맛이 없어서 그런지 고소한 치즈를 씹는 게 아니라 퍼석한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다.

그렇게 천천히 턱을 움직이고 있자니, 문득 이렇게까지 애를 쓰고 있는 스스로가 웃겼다.

‘내가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어릴 때였다면 ‘내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 먹어.’라고 받아쳤을 것이다. 그 전에 굳이 아픈 것을 감추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레이너드가 알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라니.

제 모습이 낯설면서도 왠지 명치 안쪽이 간질거렸다. 감기 때문에 열이 오르는지 두 뺨이 뜨거워졌다. 유리나는 입 안에 있는 토스트를 넘기기 위해 주스를 마셨다. 목을 찌르는 것 같은 통증과 함께 기침이 터져 나왔다.

한 번 터진 기침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자,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레이너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감기 기운 있는 거 아냐?”

“아냐. 그냥 사레가 걸려서 그래.”

“기침을 그렇게 하는데.”

“괜찮대도.”

유리나의 불그스름한 볼을 살피던 레이너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안 되겠어.”

그는 유리나의 손을 잡고 서둘러 방으로 걸어갔다. 그의 지시를 받은 시종 하나가 의원을 부르러 가기 위해 별장을 나섰다.

* * *

“피로가 누적된 데다가 바닷바람을 쐬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날씨가 제법 따뜻해지긴 했어도 바닷바람이 은근히 차거든요. 미열이 있긴 하지만 심하지는 않으셔서 약을 드시고 푹 쉬시면 금방 괜찮아지실 겁니다.”

카르티아가 사람들의 건강을 맡을 정도로 유능한 중년의 의사는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며 카르티아 후작 부인을 안심시켰다. 유리나가 열이 난다는 소리에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긴장을 했던 후작 부인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어머니, 제가 뭐랬어요. 괜찮다고 했죠? 그렇게 초조해하실 것 없대도요.”

“그건 아는데, 네가 열이 난다는 소리만 들으면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걸 어쩜 좋니.”

유리나는 후작 부인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녀의 걱정은 유리나가 열 살 때 사경을 헤맬 정도로 심한 열병을 앓았을 때부터 이어지는 고질적인 것이었다.

그때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씁쓸해져서 유리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짓다가 이불을 끌어 올렸다.

“안색이 많이 창백한데. 정말 괜찮아? 춥지는 않고?”

마음을 놓은 후작 부인과 달리 안심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레이너드는 의원의 말에도 여전히 걱정 어린 얼굴로 침대 옆에서 서성였다.

“나보다 레이너드의 걱정이 더 심한 모양이구나.”

레이너드를 가만히 지켜보던 후작 부인이 조금은 황당했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없어도 충분하겠네.”

그녀는 얼른 나으라며 유리나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방을 나갔다. 늘 유리나가 조금이라도 아플 때면 방에서 간병을 하다가 가던 모습과는 다소 달랐다.

후작 부인이 나간 뒤에도 레이너드는 한시를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바쁘게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두툼한 담요를 이불 위에 덮어 주지를 않나, 벽난로에 장작을 한가득 집어넣지 않나, 유리나가 심심해할까 봐 게임이나 책을 가져오지를 않나.

급기야 방 안 공기가 생각보다 따뜻해지지 않는다며 침대 주변에 보온 마법까지 걸었다.

보온 마법은 계속해서 마나를 잡아먹는 마법으로, 보통은 마나 결정체를 이용해서 쓰는 마법이다. 마나 결정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시전자의 체내 마법을 쪽쪽 빨아먹는 마법이었다.

유리나가 왜 그런 것에 마나를 낭비하냐고 핀잔을 주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이 정도는 거뜬해. 내 몸에 남아도는 게 마나인걸.”

아, 하긴. 데이브가 처음 봤을 때 놀랄 정도로 엄청난 체내 마법을 갖고 태어났다고 했다. 뭔가 더 혼을 내야 할 것 같은데 딱히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서 유리나는 그냥 반박을 포기했다.

‘과보호라니까.’

유리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중에도 그는 계속해서 쫑알거렸다.

“방 온도를 좀 더 올릴까? 아까 점심을 거의 못 먹었는데 배는 안 고파? 뭐 좀 먹어야 약을 먹지.”

간병을 하겠다는 건지, 소란을 떨겠다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베시.”

결국 유리나는 베시에게 레이너드를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얘 좀 쫓아내 봐.”

레이너드가 배신당한 것 같은, 혹은 버림받은 것 같은 얼굴을 했지만 유리나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 * *

‘아, 목말라.’

약을 먹고 기절하듯 잠들었던 유리나는 목이 타는 것 같은 통증에 눈도 뜨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베시, 나 물…….”

그러다 자기 전 자기는 괜찮으니 얼른 가서 자라고 베시를 방에서 내보냈던 것이 떠올랐다. 측근 하녀인 베시도 없으니 방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유리나는 직접 물을 가지러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약을 먹었는데도 감기 기운이 더 심해졌는지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의 근육이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아팠다.

‘그냥 다시 잘까.’

베시가 바로 옆 사이드 테이블에 물병을 올려놓았을 테지만 그걸 집는 것도 힘들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유리나는 힘겹게 손을 들어 옆을 더듬거렸다. 목으로 숨을 쉴 때마다 목 안쪽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서 물을 먹지 않고선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유리나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였다.

“목말라? 물 줄까?”

옆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너드의 목소리였다.

‘얘가 왜 여기에 있지?’

유리나의 기침 한 번에도 야단을 떨며 제가 아픈 것처럼 끙끙거리기에 베시보다도 먼저 방에서 쫓아냈었다. 분명 자기 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언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목이 아파 그걸 물을 정신도 없었다. 유리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너드가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키더니 입에 물컵을 갖다 대 주었다. 그가 물컵을 기울여 천천히 흘려보내는 물을 모두 받아 마신 뒤에야 정신이 들었다.

“약도 한 번 더 먹고 자. 자느라고 저녁 약은 못 먹었잖아.”

레이너드가 입 안에 동글동글한 약을 몇 개 넣어 주고는 다시 물컵을 갖다 댔다. 혀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쓴맛에 인상을 살짝 찌푸리다가 유리나는 얼른 물과 함께 약을 삼켰다.

레이너드가 곧바로 입에 무언가를 넣어 주었다. 달달한 캐러멜이었다. 유리나는 깨물어 먹는 대신 혀로 살살 굴리며 녹여 먹었다. 혀끝에 남아 있던 쓴맛이 사라지며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캐러멜의 향이 입 안에 맴돌았다.

‘애가 된 것 같네.’

그렇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레이너드가 이끄는 대로 다시 침대에 누운 유리나는 눈을 뜨고 침대맡을 바라보았다. 식은땀을 닦아 주고 있었는지 테이블에는 물 대야와 젖은 수건이 놓여 있었고, 레이너드의 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져 있었다.

“레이.”

“응, 더 필요한 거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왜 여기 있어?”

“당연히 네가 걱정돼서.”

그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투로 대꾸했다. 그러더니 손바닥으로 유리나의 이마를 짚었다. 차가운 물에 몇 번이고 담갔을 게 분명한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냉기가 불쾌하다기보다는 얼굴의 열기가 식는 것 같아서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아직도 열이 있다.”

“네 손이 차가운 거야.”

“알아. 그걸 감안해도 뜨거워.”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오늘 푹 자고 나면 나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는데.”

레이너드의 손등이 이번에는 유리나의 뺨에 닿았다.

“시원해. 좋아.”

등골이 오싹하면서도 기분 좋은 느낌에 유리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레이너드가 피식 웃었다.

“그래? 더 해 줄게.”

그는 찬물에 한 번 담근 손을 수건으로 닦고는 다시 유리나의 뺨을 감싸 쥐었다. 시원한 그의 손이 목덜미를 쓸어내리다가 쇄골 밑으로 향했다. 유리나의 열을 식혀 주겠다는 생각 외에 다른 엉큼한 생각은 없었겠지만, 손의 위치가 영 좋지가 않았다.

유리나는 두 손을 엑스 자로 꺾어 가슴 부근을 가리며 그를 흘겼다.

“대체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베시도 없고, 다른 하녀들도 없는데 내가 자는 사이에 무슨 짓을 하려고?”

장난기가 어린 목소리였지만 반쯤은 진심이었다. 물론,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를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아무리 걱정이 된다고 하더라도 밤중에 몰래 들어온 것은 혼날 만했다.

가슴을 가린 유리나의 손을 보던 레이너드가 재빨리 손을 위로 올려 다시 그녀의 뺨을 매만졌다. 마냥 순진하기만 했던 어릴 때라면 날 무슨 파렴치한으로 보는 거냐며 날뛰었을 텐데,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태연하게 받아쳤다.

“자고 있는 사람에겐 아무 짓도 안 해. 깨어 있다면 모를까.”

유리나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깨어 있다면 뭘 할 생각인데?”

“글쎄, 이런 거?”

그가 고개를 숙여 유리나의 입에 살짝 입을 맞췄다. 입술 위에 닿는 그의 숨결은 열 때문에 화끈거리는 볼보다도 더 뜨거웠다.

그는 잠깐 입술을 떼고 유리나의 표정을 살폈다가 이번에는 좀 더 길게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유리나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고, 그의 혀가 열에 들떠 건조한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며 촉촉하게 적셔 주었다. 안 그래도 열 때문에 머리가 멍한데, 뇌가 흐물흐물하게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유리나는 가쁜 숨을 내뱉다가 그의 어깨를 밀었다.

레이너드는 순순히 밀리는 것 같았지만 이내 유리나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댔다. 코끝과 코끝이 입을 맞추는 것처럼 맞닿고, 입술은 조금만 고개를 내리면 닿을 만한 위치에서 머물렀다.

그가 느릿하게 숨을 내쉴 때마다 뜨거운 숨이 계속해서 유리나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캐러멜 향이 나.”

“이러려고 캐러멜 먹인 거야?”

“당연히 아니지. 그런데 향이 엄청 좋다.”

“그냥 나라서 좋은 게 아니고?”

“그건 그래. 너라서 좋아.”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뺨에 코를 대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감기 옮아.”

유리나는 손에 힘을 줘서 그의 어깨를 다시 밀었지만, 그는 더 이상 밀리지 않았다.

“안 옮아. 내가 얼마나 건강한데 고작 이 정도로 감기가 옮겠어?”

“그러다 옮으면 어쩌려고.”

“옮으라고 해.”

그가 유리나의 뺨을 아주 부드럽게 매만지며 속삭였다.

“차라리 옮았으면 좋겠어. 에이든이 그러는데, 다른 사람에게 감기를 옮기면 감기가 낫는대. 그래서 에이든은 동생들이 감기가 걸렸을 때 일부러 동생 옆에 가서 뽀뽀도 하고 잠도 자고 그랬대.”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레이너드나 유리나 모두 그런 말을 믿을 나이도 아니었고, 애초에 그런 걸 믿을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바로 코앞에서 보이는 레이너드의 눈빛은 진지했다. 믿는다기보다는 믿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유리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웃는 대신에 덩달아 진지하게 물었다.

“효과는 좀 있었대?”

“에이든 말로는 그렇다고 하더라. 감기가 옮으면 동생들은 신기하게 싹 나았는데, 정작 동생들은 에이든이 감기 걸리면 옮는다고 근처에도 안 왔대.”

“그것참 눈물겨운 내리사랑이네.”

유리나가 작게 웃자 따라 웃던 레이너드가 다시 입술을 꾹 눌렀다.

“에이든처럼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아프고 싶어.”

“그럴 필요 없어. 고작 가벼운 감기잖아.”

“감기라도 싫어.”

“이 정도에도 이 유난을 떠는 것을 보니 앞으로 난 아프면 안 되겠네.”

“응, 그러니까 아프지 마. 네가 아픈 건 싫어.”

유리나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꽉 꼬집었다.

“그건 그렇고, 에이든 군의 말을 핑계로 아픈 사람에게 은근슬쩍 입 맞추고 그러는 거 아냐. 얼른 떨어져. 나 잘 거야.”

잔다는 말 한마디에 레이너드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불을 잘 덮어 주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유리나는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안 가고 뭐 해?”

“너 자는 거 보고 갈게.”

“피곤하잖아. 얼른 가서 자. 네가 옆에 있으면 신경 쓰여서 잠이 안 와.”

“나야말로 네가 걱정돼서 잠이 안 와. 조금만 더 옆에 있을게. 응?”

도저히 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유리나는 단호한 그의 표정을 보다가 하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이마에 다시 차가운 손이 닿았다. 유리나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편안하게 표정을 풀었다.

잠에 빠져드는 순간까지도 얼굴과 목에서 시원한 감촉이 끊임없이 느껴졌다.

* * *

유능하다는 의원의 약 덕분인지, 아니면 밤늦게까지 간병을 해 주던 레이너드의 정성 덕분인지 유리나는 다음 날 아침, 아주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열이 완전히 떨어진 것은 물론, 조금만 움직여도 욱신거리던 근육통도, 가장 괴로웠던 목의 통증도 전혀 없었다. 가벼운 감기라고 하더라도 하루 만에 씻은 듯이 나을 일은 거의 없을 텐데 참 희한한 일이었다.

“열이 완전히 내리셨네요. 다행이에요.”

유리나의 이마를 짚어 본 베시가 기분 좋게 웃었다.

“푹 쉬어서 그런가 봐. 열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다 괜찮아졌어.”

“안색도 많이 좋아지셨어요. 확실히 수도보다 공기가 좋기는 좋은가 봐요. 아 참, 식사는 방으로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많이 좋아졌으니까 식당으로 가서 할게.”

베시의 도움을 받아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고 보송한 옷으로 갈아입은 유리나는 식당으로 향했다. 먼저 와서 앉아 있던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반색을 하며 일어났다.

“유리나, 안 그래도 주방장에게 영양식 좀 만들어서 올려 보내라고 한 참인데 내려왔구나. 몸은 좀 괜찮니?”

“네, 약이 좋았는지 지금은 많이 괜찮아요. 그런데 레이가 안 보이네요?”

유리나는 자리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소 생활 습관대로라면 벌써 와 있어야 할 레이너드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게. 올 때가 지났는데 안 오는구나. 혹시 네가 괜찮은지 보러 간 것은 아닐까?”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 거라면 곧 내려오겠네요.”

유리나와 카르티아 후작 부인 앞에 따뜻한 양송이 수프가 놓였다. 원래 예법대로라면 레이너드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시장할 테니 얼른 먹으라는 후작 부인의 권유에 유리나는 스푼을 들었다.

안 그래도 어제 점심 이후로 먹은 것이 없어서 허기가 진 참이었다.

정말 몸이 괜찮아진 것인지 입맛이 없던 어제와 달리 고작 수프인데도 군침이 돌았다. 껄끄러운 목의 통증도 사라져서 유리나는 금세 수프를 모두 비울 수 있었다.

시종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믈렛 접시를 유리나의 앞에 내려놓을 때쯤, 레이너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상석에 앉은 카르티아 후작 부인에게 먼저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유리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앞에도 따끈한 양송이 수프가 놓였다.

“방에 갔더니 아무 대답도 없어서 깜짝 놀랐어.”

수프는 거들떠보지 않은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보며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안 좋아진 줄 알고 걱정했는데, 얼굴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열도 떨어지고 몸도 가벼워. 다 나은 것 같아.”

“그렇다면 다행이다.”

가볍게 웃은 레이너드가 수프를 먹기 위해 스푼을 들 때였다. 그의 입에서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유리나는 포크로 오믈렛을 찍다 말고 그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괜찮…….”

말을 채 다 잇지도 못하고 그가 다시 한번 마른기침을 했다. 시종이 얼른 따라 준 물을 마시고도 그는 몇 번이고 더 기침을 내뱉었다.

“걱정 마. 별거 아니야.”

그렇지만 말과는 달리 그는 식사 도중 계속해서 간헐적으로 기침을 했다. 음식을 천천히 입에 넣기는 했지만 평소에 비하면 먹는 양이 적었다. 감기에 걸린 것은 아니냐며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진지하게 걱정을 할 정도였다.

그는 사레가 들렸을 뿐이라며 변명했지만 유리나가 보기에도 감기 증상 같았다.

“감기 맞지?”

결국 식당을 나오며 유리나가 물었다. 레이너드는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고개를 젓자마자 기침이 터져 나오는 바람에 그 말은 별로 신빙성이 없었다.

“건강해서 감기 같은 건 안 옮는다더니.”

“감기 아냐. 그냥 목이 좀 칼칼해서 그래.”

“그게 감기지. 목감기.”

“아니래도.”

그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 유리나가 열이 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의 이마로 손을 뻗자 레이너드가 손을 재빨리 낚아채며 손끝에 입을 맞췄다.

복도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늘 유리나 옆에 붙어 다니는 베시는 식사를 끝마치기 전 따뜻한 차를 준비한다며 주방으로 향했었다.

“희한해. 나는 하루 만에 이렇게 멀쩡해졌는데, 감기에 걸릴 일이 없다고 했던 너는 감기에 걸리고. 어제 네가 들려준 이야기가 허무맹랑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근거가 있는 말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습긴 한데,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기엔 상황이 신기했다.

“그러게. 에이든의 말이 맞을 때도 있었네.”

“긍정하는 걸 보니 감기에 걸린 건 맞구나.”

“으음…….”

레이너드가 멋쩍은 듯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유리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에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런데, 레이. 네 감기가 얼른 나으려면 내가 다시 감기를 가져와야 하는 거 아니야?”

장난스럽게 웃은 유리나가 까치발을 들고 입을 맞추려는 시늉을 해 보이자, 레이너드가 재빨리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유리나는 얼떨결에 그의 입술 대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레이너드가 웃으며 유리나를 돌려세우더니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밀었다.

“당분간 내 옆에 오지 마.”

그래도 유리나가 꿋꿋하게 뒤를 돌아보자 그는 서둘러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 * *

별장에 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유리나는 그날 이후로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했고, 유리나에게 감기가 옮았던 레이너드 또한 하루 만에 멀쩡해졌다.

하지만 유리나는 지난 며칠간 밖에는 제대로 나가 보지 못하고 방에 거의 감금되다시피 지냈다. 감기에 걸렸던 이후로 레이너드가 유리나가 밖에 나가려고만 하면 옆에 딱 달라붙어서 안절부절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나갈 거야? 밖에 추운데.

―재밌는 게임을 배웠는데, 나가지 말고 게임하자.

―나 피곤한데 오늘은 안에서 놀자.

핑계는 다양했지만 결론은 유리나가 감기에 걸리는 것이 걱정되니 안에만 있으라는 소리였다. 유리나가 끝까지 나간다고 우기면 바람 하나 맞을 수 없도록 그녀의 몸을 옷으로 둘둘 말지언정 못 나가게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감기 하나에도 쩔쩔매며 대신 아프고 싶다고 속삭이던 얼굴이 생각나 유리나는 못 이긴 척 실내에서 지냈다. 두 사람은 주로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이야기하거나 게임을 하며 보냈다.

그렇다고 아예 외출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유독 날이 따뜻했던 이틀 전에는 바다 구경을 하다가 번화가에 있는 카페에 가서 놀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잊고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유리나는 어느새 마음을 짓누르던 고민거리를 모두 떨쳐 낼 수 있었다. 감기가 다 나은 이후로는 식사도 잘했고, 밤에 잠을 설치지 않고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데면데면하게 대했던 고용인들에게도 조금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전과 달리 마음을 열지는 못했다.

마음이 편안해지자 뒤늦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유리나는 테라스에서 혼자 책을 읽다 말고 베시를 유심히 관찰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베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어딘가 잔뜩 들뜬 것처럼 보였다.

“베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네? 아뇨.”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아가씨 덕분에 이렇게 좋은 곳에 와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죠.”

유리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수도에서 바쁘게 지내던 베시 또한 이곳에 와서 여유가 생겼으니 기분이 좋을 법도 하지만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난 몇 년간 가장 가까이에서 그녀를 봐 온 유리나의 눈까지는 속일 수 없었다.

유리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베시를 보다가 은근슬쩍 물었다.

“베시, 혹시 연애해?”

“네? 아뇨,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아가씨를 두고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팔짝 뛰며 과하게 부정하는 모습이 오히려 더 수상했다. 원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다.

“왜 그렇게 부정을 해? 베시도 언제까지 나만 챙길 수는 없잖아. 나야 베시가 계속 옆에 있어 주면 좋겠지만, 베시도 베시의 인생을 찾아야지.”

“제가 아가씨를 두고 어디 간다고 그러세요. 전 아가씨가 가장 중요해요.”

울컥했는지 눈썹을 축 늘어뜨리던 베시가 아무도 없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유리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런 게 아니라, 사실 별장에서 파티를 준비하고 있어요.”

“파티? 무슨 파티?”

갑작스러운 단어에 유리나가 조금 큰 목소리로 대꾸하자 베시가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아가씨, 목소리가 커요.”

“아무도 없는걸.”

“그래도요. 누가 들을 수도 있잖아요.”

“듣긴 누가 듣는다고 그래? 파티 준비를 하고 있다면 어차피 다들 아는 거 아니야?”

“저희 말고 레이너드 님이요.”

“레이?”

“네.”

왜 레이가 들으면 안 된다는 거지? 유리나는 잠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가 되물었다.

“깜짝 파티야?”

“네.”

그냥 슬쩍 던져 본 말인데 긍정적인 대답이 들려오자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무슨 깜짝 파티? 레이에게 파티를 해 줄 일이 있나?”

“레이너드 님의 졸업 축하 파티요!”

신이 났는지 목소리를 높였던 베시가 당황한 얼굴로 다시 속삭였다.

“1년이나 빨리 조기 졸업을 하고 오셨잖아요. 솔직히 저는 아카데미에 대해 잘 모르지만 데이브 님께 들으니 엄청 대단한 일이라면서요?”

“응, 그건 그래. 조기 졸업은커녕 제때 졸업하는 사람이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문 곳이니까.”

유리나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주자 베시는 꼭 자기가 칭찬을 받은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대단한 일인데 당연히 축하 파티를 해 드려야죠! 아, 근데 오해는 하지 마세요, 아가씨. 조기 졸업이 아니더라도 원래 내년에 졸업을 하고 돌아오시면 졸업 축하 파티를 열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갑작스럽게 돌아오신 데다가 사냥 대회까지 겹쳐서 늦어졌어요. 진작 해 드렸어야 했는데. 그리고 또 사냥 대회가 끝난 뒤에는 경황이 없었고…….”

사냥 대회 때 사고를 생각했는지 들떴던 베시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웃으며 유리나의 빈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아무튼 이제 조금 여유가 생겼잖아요. 파티를 준비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런 거라면 수도로 돌아가서 해도 되지 않아? 이미 늦어졌으니 조금 더 늦어져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레이도 이곳보다는 수도에 더 아는 사람들이 많잖아.”

유리나는 예전에 레이너드가 어릴 적 그의 생일 파티 준비를 했던 얼굴들을 떠올렸다.

7년 전의 일이라 그만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저택에 남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지금 수도에 있고 별장에는 레이너드가 모르는 얼굴이 많았다.

그래서 이왕이면 좀 늦더라도 수도에서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었는데 베시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졸업하고 오신 지 꽤 됐잖아요. 최대한 빨리 해 드리고 싶어요. 여기서도 하고 수도에 가서 또 한 번 하면 되죠!”

번거롭게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베시가 워낙 신이 나 있어서 유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좋은 일도 아니고 좋은 일인데 두 번 해서 나쁠 것이 뭐가 있을까 싶었다.

“아 참, 그리고 이미 마님께도 허락도 받았어요. 최대한 신경 써서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머니에게?”

유리나는 의아하단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보니 단순히 생각만 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얘기 안 했어? 오늘도 내가 안 물어봤으면 얘기 안 해 줬을 거 아냐.”

레이너드를 위한 파티를 연다는 것을 알았다면 가장 신이 나서 준비할 사람이 유리나였다. 그런데 온 별장의 사람들이 다 아는데 정작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가씨가 아시면 레이너드 님이 아시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아가씨에게도 말씀 안 드리고 있었던 거였어요. 그렇지만 이제 아셨으니 레이너드 님께는 비밀이에요.”

베시가 다시 한번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쉿, 소리를 냈다. 유리나는 덩달아 검지를 제 입술에 갖다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레이너드의 조기 졸업 축하 파티는 다음 날 오후에 하기로 결정이 났다. 베시를 비롯한 별장의 고용인들은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오로지 카르티아가 사람들의 휴식을 목적으로 지어진 별장은 파티를 할 만한 홀이 없었다. 손님이 올 일도 거의 없어서 넓은 응접실도 없었기 때문에 파티는 바다가 보이는 정원에서 하기로 했다. 야외 파티였다.

유리나는 파티 준비를 돕는 대신 레이너드가 정원으로 나가거나 정원 쪽을 쳐다보는 것을 막기 위해 아침부터 그의 옆을 졸졸 쫓아다녔다. 유리나가 감기에 걸렸던 이후로 레이너드가 밖에 잘 나가지 않아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잠깐 책을 가지러 서재에 가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바람 좀 쐬러 테라스에 나갈 때도 쫓아가자 참다못한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두 뺨을 꾹 눌렀다. 그는 볼이 눌리는 바람에 톡 튀어나온 그녀의 입술을 보며 크게 웃었다.

“새끼 오리 같아.”

“웅?”

볼이 잡혀 있는 탓에 발음이 조금 샜다.

“새끼 오리는 엄마 오리 뒤를 졸졸 쫓아다니잖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거야? 입술도 이렇게 튀어나오니까 정말 오리 같네.”

그는 방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유리나의 입술에 쪽, 쪽 소리 나게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내가 오리연 오리를 죠아하는 넌 워야?”

똑바로 말하려고 애를 썼는데도 이번에도 발음이 샜다. 레이너드는 그걸 듣고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리더니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럼 나도 오리 하면 되지.”

우스꽝스러운 표정이었는데 유리나의 눈엔 그 모습이 마냥 멋있게만 보였다.

‘콩깍지가 쓰였나.’

유리나는 헛웃음을 터뜨리다가 그의 톡 튀어나온 입술을 꽉 잡아당겼다.

“앉아서 책이나 봐.”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응접실에 앉아 한가로이 책을 보거나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유리나는 베시가 언제 올까 문을 계속 살피면서도 레이너드가 창문 쪽으로 다가가기만 하면 얼른 달려가 그를 다시 소파에 앉혔다.

솔직히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 티가 나나 싶었는데, 다행히 레이너드는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유리나가 제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을 보며 새끼 오리니 강아지니 하면서 즐거워했다.

베시가 응접실을 찾아온 건 저녁 식사를 할 때쯤이었다.

“아가씨, 레이너드 님. 저녁 식사 준비가 다 됐어요.”

파티 준비가 다 되었다는 신호였다. 유리나는 꾸물거리는 레이너드의 팔을 잡고 재빨리 방을 나왔다.

“어딜 가는 거야?”

유리나가 식당이 아니라 밖으로 향하자 레이너드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유리나는 웃음을 삼키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날씨가 좋잖아.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기로 했어. 바다를 보면서, 어때?”

“좋네.”

저택을 나오자 저 멀리서부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유리나는 마지막까지 표정 연기를 하며 레이너드를 정원까지 안내했다.

“오늘 저녁은 야외 바비큐래. 신선한 해산물, 맛있겠지?”

“응.”

“수도에서는 먹기 힘드니까 많이 먹고 가.”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자 잔뜩 들뜬 표정을 한 고용인들이 정원 입구에 쪼르르 달려와 섰다. 유리나는 그들의 뒤로 언뜻 보이는 파티 장식을 곁눈질하다가 레이너드의 등을 밀었다.

아니, 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레이너드가 먼저 그녀의 어깨를 잡고 고용인들 앞에 세웠다.

“응?”

유리나가 얼떨떨해하며 레이너드를 돌아보는데, 뒤쪽에서 베시를 비롯한 고용인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생일 축하드려요!”

“생일 축하드려요!”

응? 생일? 얼마나 당황했는지 순간 ‘레이의 생일이었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생뚱맞게 느껴지는 단어에 유리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레이너드를 올려다보았다.

정작 그녀가 속이려고 했던 레이너드는 안에서 펼쳐진 요란스러운 광경에도 놀랐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유리나, 생일 축하해.”

“어?”

“아가씨, 얼른 촛불 끄셔야죠!”

베시가 과일로 화려하게 장식을 한 삼단 케이크를 가지고 유리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케이크에 꽂혀 있는 초는 모두 열일곱 개였다. 레이너드가 손가락을 튕기자 꺼져 있던 초에 동시에 불이 붙었다.

‘아…….’

유리나는 그 케이크를 본 뒤에야 뒤늦게 오늘 날짜를 헤아렸다. 꽃의 달 21일. 그녀의 생일이었다.

한동안 날짜를 잊고 지냈더니 생일이 온지도 모르고 있었다.

유리나가 멍하니 케이크를 바라만 보고 있자, 레이너드가 베시에게서 케이크를 받아 그녀 앞에 갖다 댔다.

“촛불 안 끄고 뭐 해?”

“어?”

“소원 빌고 촛불 꺼야지.”

그 태연한 모습을 보니 레이너드 또한 이 파티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환하게 웃고 있는 레이너드의 얼굴과 그가 들고 있는 케이크가 흐릿하게 보였다.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볼을 타고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서둘러 볼을 닦아 보았지만, 눈물이 닦이기는커녕, 눈물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말…….”

오늘에야 비로소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왜 깜짝 생일 파티만 해 주면 눈물을 흘렸는지 알 것 같았다.

레이너드도 분명 이렇게 심장이 터질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으리라.

유리나는 레이너드를 보며 우는 듯이 웃다가 열일곱 개 촛불을 한 번에 불어 껐다. 불기 전에 소원도 확실히 빌었다.

‘앞으로도 이대로 행복한 일만 가득하면 좋겠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행복하길.

* * *

“아가씨께서는 눈치가 워낙 빠르시잖아요.”

레이너드를 위한 파티가 아니었냐는 유리나의 물음에 베시는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유리나의 접시에 케이크를 잘라 주며 레이너드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눈빛에서 유리나는 레이너드도 이 깜짝 파티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아까 놀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케이크를 받아 드는 모습에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이 모든 계획을 주도한 두 사람은 깜짝 파티를 성공해서 기쁘다는 듯이 웃었다.

“아가씨라면 저희가 몰래 준비해도 뭔가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셨을 것 같았어요. 실제로도 눈치채셨고요. 그러니 차라리…….”

“차라리 숨길 게 아니라 속여 버리자?”

“그런 거죠. 아무 일 없다고 잡아떼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효과가 좋잖아요.”

왠지 모를 배신감에 유리나가 혀를 차자 레이너드에게도 케이크를 잘라 주던 베시가 레이너드를 곁눈질했다.

“그렇게 배신자 보듯이 보지 마세요. 이건 레이너드 님 의견이었거든요.”

유리나의 시선이 이번에는 태연하게 홍차를 홀짝이는 레이너드에게로 향했다. 그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유리나의 손에 포크를 쥐여 주었다.

“케이크 먹어. 네가 좋아하는 과일이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야.”

“날 속이자고 한 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계획이었단 말이지?”

“속였다고 하니까 내가 되게 나쁜 짓을 한 거 같잖아. 속인 게 아니라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해 줘. 몰랐던 덕분에 더 감동받았잖아. 미리 눈치챘다면 이렇게 기쁘지 않았을 거야. 안 그래?”

“그렇기는 한데…….”

“그러니까 얼른 먹어.”

유리나가 먹을 생각을 하지 않자 레이너드가 아예 포크로 케이크를 크게 잘라 유리나의 입에 넣어 주었다. 얼떨결에 입을 벌려 케이크를 받아먹은 유리나는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맛있지?”

레이너드가 손가락으로 유리나의 입술에 묻은 생크림을 닦아 주며 웃었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손가락에 묻은 생크림을 혀로 살짝 핥았다.

“응, 맛있어. 그런데, 베시. 과일은 어디서 난 거야?”

생크림 케이크에는 유리나가 평소 좋아하는 딸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베리 종류가 올라가 있었다. 설탕을 잔뜩 넣어 졸인 것이 아니라 생과일이었다. 계절상 아직 제국에서는 수확할 수 없는 과일이다.

“보존 과일이에요. 레이너드 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미리 크론 왕국에서 소포로 부치셨대요.”

“레이가?”

레이너드가 크론 왕국을 떠난 것은 지난달 초였다. 그럼 그는 그때부터 유리나의 생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이 깜짝 파티가 단순히 별장에 온 뒤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유리나는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참기 위해 케이크를 한 번 더 입에 넣고 열심히 턱을 움직였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은 몇 되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후끈 달아오르고 떠들썩했다.

저택에서 온 주방장은 야외 그릴에서 싱싱한 해산물과 고기, 야채를 구웠고, 고용인들은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특별히 내어 준 와인을 마시며 왁자지껄 떠들었다.

후작 부인은 생일 선물이라며 유리나의 귀에 진주 귀걸이를 걸어 준 뒤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수도에 돌아가면 다시 파티를 해 줄 테니 아버지도, 오빠들도, 친구들도 부르지 못했다고 너무 실망하지 말 거라. 오늘은 그냥 다 같이 웃고 즐긴다고 생각해.”

“실망이라뇨. 전혀요. 지금 너무 좋아요.”

지금까지의 생일 파티를 생각하면 후작 부인이 왜 실망하지 말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카르티아 후작 내외는 매년 아끼는 막내딸의 생일을 성대하게 치러 주었다.

또래의 아이들을 불러 모아 화려하게 생일 파티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린아이에게 과분한 선물을 안겨 주었다. 아카데미에 있는 세 오빠들은 학업 때문에 오지는 못했지만 매년 축하 편지와 함께 선물을 산더미처럼 보냈다.

객관적으로만 본다면 유리나의 생일은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날이었다.

그러나 정작 유리나는 지난 7년간 제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생일에 들뜰 나이는 지났을뿐더러, 어차피 자신의 진짜 생일이 아니라서 마음에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생일을 잊고 살았다. 부모님이 생일 파티를 할 거라고 알려 주면 그제야 ‘아, 생일이 또 오는구나.’ 하고 꼭 남 일을 생각하는 것처럼 건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생일 파티의 규모로만 따지면 매년 수도에서 카르티아 후작 내외가 준비해 주었던 것에 비할 바가 못 됐다. 나름대로 신경 써서 준비했다고는 하지만,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은 수도의 주방장 솜씨에 못 미쳤고, 후작 부인의 말처럼 아버지와 세 오빠들도 없었다.

그런데도 유리나는 오늘 생일이 정말 자신의 생일처럼 특별하게 느껴졌다. 웃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계속 웃음이 나올 정도로.

수도에서도 쉽게 먹을 수 없는 해산물을 아낌없이 넣은 음식도, 베시가 월급을 모아 샀다는 리본도, 진심 어린 고용인들의 환한 미소도 모두 좋았다.

가장 좋은 건 옆에서 손을 꽉 잡아 주는 레이너드의 존재였다.

생각해 보니 그는 유리나의 생일 때 늘 곁에 없었다.

떠들썩한 파티가 끝난 후 이상하게 자기 전에 마음이 허전하고는 했는데, 돌이켜 보니 레이너드가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파티가 끝나도 허전하지 않을 것 같았다.

“레이.”

유리나는 그에게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밝게 웃었다.

“고마워.”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다 다른 사람이 준비했는데.”

“그래도 그냥 고마워.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고마워.”

레이너드가 따라 웃으며 바닷바람에 살짝 차가워진 유리나의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

“난 네가 기쁘다면 그걸로 됐어.”

* * *

초저녁에 시작된 파티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시작은 유리나의 생일 파티였지만 뒤로 갈수록 고용인들의 파티가 되었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저녁만 먹고 방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와 함께 와인 한 잔씩 나눠 먹고 춤추며 노래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사람들의 열정과 그릴 요리를 위해 피워 두었던 불이 아직도 남아 서늘한 밤공기를 따뜻하게 데웠지만 여전히 어깨에 닿는 공기는 차가웠다. 유리나가 양팔을 교차하여 팔을 문지르자 레이너드가 겉옷을 벗어 어깨에 걸쳐 주었다.

“춥다. 시간도 늦었으니까 그만 들어가자. 또 감기 걸리면 큰일 나.”

“그럴까?”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파티의 흥이 깨지지 않도록 몰래 조용히 정원을 빠져나왔다.

어둑한 복도는 아무도 없었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때문에 적막하지는 않았다. 유리나는 주위를 살피다가 레이너드의 손을 잡았다. 응답하듯 레이너드가 그녀의 손을 한 번 꽉 쥐었다가 느슨하게 잡았다.

“재밌었어?”

유리나를 방문 앞까지 데려다준 레이너드가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쥐며 물었다. 찬 공기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와인을 마신 탓인지 유리나의 볼은 살짝 뜨끈했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손 위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재밌었어.”

“생일 선물 갖고 싶은 거 있어?”

“이미 줬잖아. 과일 케이크.”

“그건 선물이라고 할 수 없지.”

“나는 충분히 좋았는걸.”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라 유리나는 그 과일 선물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과일을 좋아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챙겨 준 레이너드의 진심이 좋았다.

“그래도 내가 아쉬워서 그래. 조금 더 좋은 걸 선물해 주고 싶어.”

“음…….”

생일 선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유리나는 눈동자와 머리를 또르르 굴리며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그렇지만 특별히 갖고 싶은 건 없었다. 그저 레이너드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 그건가.’

뒤늦게 깨달음이 찾아와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갖고 싶은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걸 생일 선물로 받고 싶다고 말하기엔 갑작스럽고, 조금은 민망하기도 해서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왜? 말하기 힘들어? 표정을 보니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물건이 아니라 소원이어도 돼?”

“그거 내가 열세 번째 생일 선물로 말했던 거 아니야?”

유리나의 뺨에서 손을 뗀 레이너드가 팔짱을 끼고 다소 거만하게 중얼거렸다.

“일단 들어 보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해 줄게. 무리한 소원이라면 아무리 네 생일이라고 해도 들어줄 수 없어.”

유리나는 장난기가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고 작게 킥킥거리다가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렇게까지 예외 조항을 붙여야 해?”

“당연하지. 도장 한 번 잘못 찍었다간 한 집안이 망하는 수가 있어. 가뜩이나 난 가진 것도 없는데 잘못되면 어떡해?”

“설마 내가 너한테 그런 부탁을 할 것 같아?”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계속 단호하게 말하던 레이너드가 팔짱을 풀며 웃고 말았다.

“그래서 소원이 뭐야? 네가 원하는 거면 뭐든지 다 들어줄게.”

“네가 열세 번째 생일 선물로 나한테 뭘 해 달라고 했는지도 기억나?”

“당연하지. 둘이서만 놀러 가자고 했잖아.”

“내 소원도 똑같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우리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싶어.”

“그럼 내일 사람들을 따돌리고 놀러 나갈까? 지난번에 갔던 카페의 디저트 괜찮던데, 거기 어때?”

둘만의 외출은 은근히 바라고 있던 모양인지 레이너드가 망설임도 없이 작게 속삭였다. 유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좋았지만 그녀가 진짜로 원하는 건 다른 거였다.

“내일 말고, 지금.”

“지금? 둘이서 바다 구경하러 갈래? 감기가 걱정되긴 하지만 옷을 두툼하게 입으면 괜찮을 거야.”

“아니, 그것도 말고.”

유리나는 레이너드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녀의 손이 셔츠 위로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은근히 매만졌다. 레이너드가 놀라서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유리나가 그의 팔을 잡았다.

유리나의 손이 가슴을 지나 복근이 자리 잡고 있는 배를 느릿하게 쓸어내리자 레이너드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너와 함께 있고 싶어.”

“…….”

레이너드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유리나의 눈을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피하며 숨을 골랐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지 그의 숨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멀리서 아득히 들리는 노랫소리보다 그의 숨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유리나가 천천히 매만지는 그의 가슴도 눈에 띄게 오르락내리락했다.

“후회…… 안 해?”

그 짧은 문장을 말하기도 힘든지 그는 숨을 고르며 눈을 찌푸렸다.

“후회를 왜 해?”

“그렇지만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야.”

유리나는 손을 올려 톡 튀어나온 레이너드의 목울대를 매만지며 생각을 더듬었다.

그녀가 레이너드와 더 진지한 관계를 생각하게 된 것은 영지로 온 뒤였다. 그와 마음을 공유하고 전보다 더 가까이 지내는 동안, 그를 향한 마음은 빠르게 커져 갔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욕망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금은 빠르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향한 마음은 지난 7년간 차곡차곡, 천천히 쌓인 감정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결코 빠르지 않았다.

“널 원해, 레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마치자마자 레이너드가 다소 거칠게 유리나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는 한 손으로는 유리나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 재빨리 방문을 열었다. 쾅, 요란하게 방문이 닫히자마자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허벅지를 잡고 들어 올렸다.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느낌에 유리나는 재빨리 그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레이너드의 혀가 조급하게 유리나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치열을 훑고 머뭇거리는 혀를 옭아맸다. 부드러웠던 키스와 달리 숨을 모두 앗아 갈 것처럼 거칠고 농밀했다.

유리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본능에 충실하여 그를 탐했다.

희미한 노랫소리 사이로 질척한 소리와 달뜬 숨소리와 억누른 듯한 신음 소리가 섞여들었다. 입을 떼고, 숨을 제대로 들이쉴 틈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몰아붙였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고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솟는 것처럼 오싹한 희열감이 들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입을 뗐을 때, 두 사람은 어느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유리나는 제 위에 올라탄 레이너드를 보며 숨을 골랐다. 복도에서부터 몰아붙였던 것과 달리 그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어깨만 들썩였다.

갈 곳을 잃은 그의 시선은 유리나에게 닿지 못하고 그 주위에서만 맴돌았다.

목이 타오르는 것 같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던 유리나는 굳은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레이너드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렇게 긴장해.”

사실 그녀 또한 그의 품에 안겨 침실로 들어온 후로 긴장이 돼서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런데 자신보다 더 긴장을 하고 있는 그를 보니 숨이 탁 트이며 긴장이 조금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어.”

그녀는 레이너드의 손을 잡고 굳은살이 박인 그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쪽, 쪽, 쪽. 일부러 소리 내어 몇 번 입을 맞추자 레이너드가 숨을 멈추며 입술을 깨물었다.

유리나는 사납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그의 가슴을 보며 그의 손을 제 뺨에 갖다 댔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아래로 움직였다.

그녀의 흰 손에 잡힌 레이너드의 손이 유리나의 목덜미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분명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인데도 유리나는 그의 손길을 받은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레이너드는 침을 삼키며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유리나는 눈으로 웃으며 손을 점점 아래로 내렸다.

레이너드의 시선이 유리나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그녀의 뺨에서 목으로, 목에서 쇄골로, 쇄골에서 더 밑으로.

이런 게 가학심일까. 긴장한 얼굴로 침만 꿀꺽 삼키는 그를 보고 있자니 조금 더 괴롭히고, 애태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읏.”

그 순간, 레이너드가 이를 세워 유리나의 목덜미를 물었다. 유리나가 손톱을 세워 그의 어깨를 꽉 쥐었지만 그는 아픔을 느끼지도 못한 것처럼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오고, 그의 손은 유리나의 가슴팍에 달린 리본을 뜯다시피 풀어헤쳤다.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느낌에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유리나는 차근차근 그의 단추를 하나, 둘 풀었다.

하지만 레이너드가 손바닥으로 예민해진 맨 허리를 쓸어 올리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 같은 느낌에 그의 셔츠를 꽉 움켜쥐었다.

레이너드는 빠르게 숨을 몰아쉬며 직접 단추를 풀어 셔츠를 벗었다. 구겨진 흰 셔츠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고, 그 위로 유리나의 원피스도 힘없이 떨어졌다.

어느새 장작을 땐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방 안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몸을 두 다리 아래에 가두며 속삭였다.

“평생 기억에 남을 생일로 만들어 주고 싶어.”

“만들어 주면 되잖아.”

유리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그의 귓불에 입을 맞췄다. 그것으로 부족해 살짝 깨물어 주자 레이너드가 허겁지겁 숨을 들이쉬었다.

고작 그 작은 행동에 눈을 질끈 감고 몸을 흠칫 떠는 그의 모습이 귀여웠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남자를 보고 귀엽다고 느낀다면 머리가 이상해진 걸까.

‘그렇지만 귀여운걸.’

그러나 그를 애태우며 괴롭힐 여유도 없었다. 그녀 또한 맞닿은 레이너드의 체온에 슬슬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유리나는 땀이 촉촉하게 배어 나온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댄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해 줄 거지?”

* * *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뜬 레이너드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직 방 안 공기는 싸늘했고, 두툼한 캐노피 너머로 언뜻 보이는 창밖은 깜깜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

‘조금 더 있을 수 있겠네.’

그는 유리나의 보드라운 몸을 이불로 꼼꼼하게 여며 준 뒤 품 안 가득히 끌어안았다. 이불을 덮고 있는데도 맨살에 닿는 새벽 공기는 아직 차가웠다. 반면 유리나를 안고 있는 품은 따뜻하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이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맨몸으로 찬바람을 맞았다가 또다시 열병이 도지면 큰일이다.

일단 급한 대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제 셔츠라도 입힐까 싶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자는 줄 알았던 유리나가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벌써 가게?”

밤새 그의 이름을 부르던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레이너드는 미안함을 느끼며 그녀의 허리를 살살 문질러 주었다. 근육통이 오지 않도록 손바닥에 마나를 실어 근육을 풀어 주니 유리나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정말 갈 거야?”

갈 생각이 원래 없었지만, 갈 생각이 있었더라도 이렇게 예쁘게 묻는다면 발걸음이 전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볼록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직. 베시가 올 때까지는 시간 좀 있으니까 더 있다가 갈 거야.”

“그런데 왜?”

레이너드는 제 허리를 감싸 안은 유리나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추울까 봐 옷 좀 주려고.”

“안 그래도 되는데.”

“내가 안 괜찮아.”

레이너드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떼어 놓은 뒤 셔츠를 들고 왔다. 아직도 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는 유리나를 살살 달래 소매에 두 팔을 껴 넣은 뒤 단추를 잠가 주었다.

사실상 보온 효과는 그리 크지 않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키 차이가 워낙 많이 나는 탓에 유리나는 꼭 어른 옷을 입은 아이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옷소매에 가려 손은 보이지도 않았고, 셔츠 자락에 허벅지는 반 이상 가려졌다.

레이너드는 무심코 그녀의 하얀 허벅지로 시선을 옮겼다가 재빨리 그녀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불에 채 가려지지 않은 하얀 목덜미는 열꽃처럼 울긋불긋한 자국이 가득했다. 마법으로 자국을 지워 주기 위해 목덜미를 매만지던 레이너드는 아쉬운 마음에 마법을 쓰지 못했다.

‘가기 전에 지워 줘야지.’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못하겠지만,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흔적을 남겨 주고 싶었다. 이건 그녀가 그의 것이라는 소유욕과 집착을 담은 흔적이었다.

“옷이 너무 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가 없는 유리나는 긴 소매가 불편한지 소매를 접으려고 꼼지락거렸다. 아직도 잠에 취해 마냥 풀어진 모습이었다. 레이너드는 이렇게 무방비한 유리나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도 어린아이답지 않게 완벽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같은 아이인 그의 앞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성인에 가까워진 지금은 더욱더 사람들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모습은 그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그 생각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레이너드는 마냥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웃음을 흘리다가 소매를 대신 접어 주었다.

소매 사이로 삐쭉 드러난 하얗고 예쁜 손가락을 살짝 깨물자 유리나가 그에게 뾰족한 시선을 던졌다. 레이너드는 그녀가 뭐라고 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예뻐서 그랬어.”

“근데 왜 그렇게 웃어?”

“네가 예쁘니까 그렇지. 보고만 있어도 자꾸 웃음이 나와.”

레이너드가 작게 웃음을 흘리자 유리나가 계속해서 뾰족한 시선을 던졌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녀만 보면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눈을 가늘게 뜨며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것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도, 마주 보며 예쁘게 웃어 주는 것도 다 사랑스러워서.

“우스운 일 아니야.”

“알아. 그냥 좋아서 그래.”

레이너드는 여전히 뚱한 그녀의 이마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춘 뒤 소매를 마저 접어 주었다. 잠에서 덜 깨서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유리나가 소맷자락을 킁킁거리며 들으란 듯이 말했다.

“좋은 냄새가 나. 네 냄새.”

놀리는 것이 분명한 말인데도 어쩐지 부끄럽게 들려 레이너드의 귀가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제 옷을 괜히 입힌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유리나의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유리나가 꼬물거리며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레이너드는 반쯤 감긴 그녀의 눈 위에 쪽쪽 입을 맞췄다.

“더 자. 피곤하잖아.”

안 그래도 잠이 많으면서. 그 말을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또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흘겨보았다.

“그걸 알면서 늦게까지 안 재운 사람이 누군데.”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런 소리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레이너드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레이너드가 옆에 눕자, 유리나가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미안하면 팔베개 해 줘.”

이렇게 귀여운 투정도 처음 듣는 것 같았다.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머리 밑으로 팔을 집어넣으며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얼마든지.”

품 안에서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있잖아, 유리나.”

“……응.”

다시 잠이 쏟아지는 건지 유리나가 그의 가슴팍에 코를 박고 웅얼거렸다.

“나 너무 행복해.”

유리나는 하품을 하다 말고 레이너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레이너드가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환하게 웃었다. 행복하다는 말이 없어도 표정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는 게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 한마디, 그 표정에 유리나는 마음이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난 내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지 몰랐어.”

“…….”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건 꿈에도 상상 못 했어. 나는 늘 그 고아원에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네 말처럼 그해 겨울에 얼어 죽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든. 널 따라올 때만 해도 내 삶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줄 몰랐어. 나는 그냥 널 따라가면 뭐든 얻어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그때는 너무 배가 고파서.”

“레이.”

“그날, 널 따라오길 잘했어.”

유리나는 그의 단단한 등을 괜히 손으로 더듬으며 말을 아꼈다. 레이너드가 이런 말을 할 때면 조금씩 후회가 된다. 내가 정말로 유리나 카르티아였다면, 그래서 그날 고아원에 있는 레이너드를 보고 순수하게 돌봐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를 데려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전에 말이야, 네가 날 만나서 얼마나 기쁜지 나는 평생 모를 거라고 그랬지?”

“응.”

“너야말로 몰라.”

그가 유리나의 손을 끌어다가 제 뺨에 갖다 댔다.

“널 만나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그는 눈을 중얼거리며 유리나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유리나, 넌 날 만나서 행복해?”

조심스레 묻는 목소리를 들으며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없는 인생을 상상해 보았다.

행복했을 거다. 이 말을 들으면 레이너드가 분명 실망할 테지만, 그가 없다고 해서 불행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머니와 아버지, 세 오빠들, 베시, 데이브, 그리고 그 외에 그녀를 위하는 많은 사람들. 그들이 주는 애정 속에서 그녀는 분명 과거를 잊고 유리나로서 나름대로의 인생을 찾아 잘 살아갔을 것이다.

그래, 레이너드 한 명이 빠진다고 해서 그 행복이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닐 테다.

그러나 그 행복의 정도가 지금과 같겠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닐 것 같았다. 한 명 몫이 빠진 행복이겠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레이너드 한 명이 주는 행복과 안온함은 분명 그들 모두가 주는 것을 합친 것보다도 컸다.

그러니,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응, 행복해.”

유리나는 그의 맨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이 세계에 와서 그 말을 처음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유리나?”

유리나가 멍한 표정을 짓자 레이너드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유리나는 그의 품에 더욱 깊이 파고들며 환하게 웃었다.

“응, 행복해.”

유리나는 심호흡을 하듯 숨을 폐부 깊숙이 들이쉬었다가 다시 입술을 뗐다.

“레이, 사랑해.”

유리나의 머리를 쓰다듬던 레이너드의 손이 멈칫했다. 호흡도 멈췄다. 잠시 그렇게 시간이 멈춘 것처럼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가만히 있던 레이너드는 유리나를 꽉 끌어안으며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나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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