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전조
험준한 산악 지대로 이루어진 제국 북부의 데프론 후작령. 사시사철 추운 기온을 유지한다는 후작령은 봄이 왔는데도 추위가 가시지 않았다.
산자락 아래 위치한 데프론 후작 저택의 분위기는 싸늘한 공기보다도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사냥 대회에 다녀온 후로 성의 주인인 데프론 후작의 심기가 그 어느 때보다 언짢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는 후작의 심기를 거스른 마구간지기 하나가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채찍질을 당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졌다.
집사장이 고용인들을 소집해서 헛소문을 퍼트리지 말라고 단호하게 일축했지만, 그의 성정을 아는 고용인들은 오히려 그 태도에서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로 성의 고용인들은 매일매일 살얼음 위를 걷는 심정으로 발소리까지 죽이고 돌아다녔다. 마음이 편안해야 하는 숙소에서조차도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오늘도 3층에 위치한 그의 집무실에서는 노기가 가득한 음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 계집이 기어코!”
얼굴이 시뻘게진 데프론 후작이 두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두드렸다. 그 반동으로 테이블 위에 있던 잉크병이 엎어져 데구루루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리디아 데프론은 말없이 떨어진 잉크병을 주워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딸인 그녀라도 아버지가 저렇게 혼자 분을 삭이고 있을 땐 가만히 있는 게 좋다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알았다. 데프론 후작은 딸인 그녀를 혼내지는 않았지만, 그 불똥이 어디로 튈지는 뻔했다.
리디아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숨을 고르는 데프론 후작의 모습을 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따라 유독 심하시네.’
데프론 후작은 ‘그 계집’이 누군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리디아는 그게 누구인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유리나 카르티아. 카르티아 후작이 끔찍이도 아낀다는 고명딸.
데프론가와 카르티아가가 전부터 사사건건 부딪치며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리디아도 익히 알고 있었다. 물과 기름처럼 두 가문이 절대 한데 섞일 수 없다는 사실은 귀족이라면 다들 아는 이야기다.
굳이 두 가문이 아니더라도 원수처럼 지내는 가문이 많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데프론 후작은 조금 달랐다. 가문으로는 엮일지언정, 리디아나 그녀의 형제들에게 사적인 관심이 없는 것 같은 카르티아 후작과 달리 데프론 후작은 사적으로도 카르티아가에 앙심이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리디아가 보기엔 그랬다.
이상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왜 저렇게 카르티아 영애에게 집착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카르티아 후작이라거나, 이미 검술로 제국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카르티아 후작의 세 아들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다못해 사교계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라면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유리나 카르티아라니. 지금 제국에서 유명한 ‘베아투스’니 뭐니 하는 마법사를 후원하기로 결정한 것이 유리나라고는 하지만, 그것 외에 특별한 것은 없는 소녀였다. 심지어 아직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를 하지도 않았다.
다들 그 카르티아 가문이 아낀다는 고명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긴 했지만 데프론 후작의 관심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훨씬 전부터 카르티아 영애에게 관심을 보였지.’
리디아는 아버지가 갑자기 유리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날을 떠올려 보았다. 워낙 오래전 일이었지만 인상이 깊었던 탓에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당시 리디아는 아버지와 함께 보석을 구경하기 위해 번화가에 있는 한 가게에 방문했던 참이었다.
갖고 싶은 것은 모두 사라고 웃으며 리디아를 가게 안으로 에스코트해 주던 아버지는 안에 있던 한 소년을 보고 알 수 없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그때는 그 생소한 단어가 뭔지 몰랐지만 지금은 알았다.
‘베아투스라고 했지.’
온 제국이 관심을 갖고 떠들어 대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그의 어깨를 잡고 마법을 배워 볼 생각이 없냐고 흥분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년이 괜찮다고 정중히 거절하고 가게를 나가자 아버지는 서둘러 그를 따라갔다. 리디아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리디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멀어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다가 유모의 손에 이끌려 다시 마차로 돌아갔다. 그때 마차 안에서 유리나를 보았다. 멀리서 보아도 하얀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이던 소녀였다.
이름 모를 소년과 유리나와 한참을 대화를 하고 돌아온 아버지는 리디아를 향해 웃어 주었지만, 리디아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빛이 처음으로 선뜩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카르티아 가문에 노골적인 적의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것도 모자라서 그는 리디아에게 황후가 되어야 한다며 매일같이 속삭였다.
황태자인 커티스 제노시안의 사랑을 받을 여자는 그 계집이 아니라 리디아, 바로 너라고 세뇌라도 할 것처럼 계속 말했다. 가끔은 무서울 정도였다.
하루는 그게 너무나 궁금하여 아버지에게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 대체 카르티아 가문을 왜 그렇게 싫어하시는 건가요?
그 질문을 듣자마자 그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더니 갚아 줄 빚이 있노라고 대답해 주었다.
‘대체 그 갚아 줄 빚이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아버지가 카르티아가에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건가 싶어 어머니나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특별히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리디아.”
갑작스러운 부름에 리디아는 생각에서 퍼뜩 벗어나 책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네, 아버지.”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은 많다. 하지만 리디아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았다.
“황후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죠.”
“그래. 카르티아의 그 여우 말고 네가 황후가 되어야 한다.”
“…….”
“그게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다, 리디아.”
“…….”
“그 계집은 가짜야. 황후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건 너뿐이야. 알겠느냐?”
또 저 소리. 아버지는 유리나 카르티아를 늘 가짜라고 표현했다. 왜 그런 말을 쓰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는 황후가 될 재목이 아니니 진짜는 너뿐이노라고 오늘처럼 늘 세뇌하듯 말해 주었다.
“……아버지.”
대답 대신 그는 말해 보라는 듯 리디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선 딸을 향한 애정보다는 카르티아를 향한 적의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위협을 느낀 리디아는 진짜로 하고자 하는 말을 목 안으로 삼켰다.
“잉크병이 떨어져서요. 다행히 깨지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래.”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나가 볼게요.”
리디아가 손에 쥐고 있던 잉크병을 도로 책상 위에 올려 두고 몸을 돌릴 때였다. 등 뒤에서 들린 데프론 후작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조만간 수도로 돌아갈 테니 준비하거라.”
“정말요?”
리디아는 저도 모르게 살짝 들뜬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녀는 몇 년 전 영지로 온 이후로 한 번도 수도로 간 적이 없었다. 아버지인 데프론 후작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는 줄곧 그녀가 열여덟 살,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하는 해에 수도에 데리고 가겠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그런데 벌써 수도로 돌아간다니! 혹시 아버지가 수도 생활을 그리워하던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준 것일까.
리디아가 조금은 감동받은 얼굴로 데프론 후작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험악한 얼굴로 종이를 구기고 있었다.
“그래. 이번에 황실에서 성대한 파티가 열릴 예정이다. 너도 거기에 참가하는 거다.”
“하지만, 아버지. 저는 아직 열일곱…….”
“분명 카르티아의 그 여우도 이번 파티에 참석하겠지. 베아투스인 그 아이의 파트너를 해야 할 테니까. 그동안 카르티아에서 공들여 키워 온 아이를 선보이는데 그 정도는 하지 않겠나.”
“그럼…….”
“온 제국이 카르티아를 떠받드는 꼴은 볼 수 없지. 리디아, 그 계집이 1년 일찍 데뷔하는데 너라고 못 할 리가 없지 않느냐. 제대로 준비해서 그 날 주인공은 네가 되어야 한다.”
결국 또 유리나 카르티아인가. 리디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버지는 눈앞의 하나밖에 없는 딸을 두고도 광기 어린 눈으로 저 먼 곳에 있는 무언가를 좇고 있었다.
유리나 카르티아, 유리나 카르티아, 유리나 카르티아. 대체 그 소녀가 뭐길래.
‘진정해. 카르티아 영애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리디아는 애써 그렇게 합리화를 하며 데프론 후작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는 보고 있지 않았지만, 진심을 담아.
“오랜만에 가는 수도라 떨려요. 열심히 준비해서 아버지의 기대에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후작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에 리디아는 멋쩍게 미소를 짓다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후작의 무관심 속에서 리디아가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세상에, 아가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하녀의 시선을 따라 제 손을 내려다본 리디아는 흠칫 놀랐다. 잉크병을 꽉 쥐고 있던 손바닥이 까만 잉크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잉크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하녀가 손을 닦아 줄 때마다 따끔거리는 것을 보니 상처도 난 것 같았다.
‘잉크병이 깨졌었나.’
리디아는 아무리 닦아도 손금 사이에 남아 있는 까만색 잉크를 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우스워서 웃는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어서 나온 헛웃음에 가까웠다.
잉크병이 깨져서 잉크가 새어 나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다니. 게다가 손이 베이기까지 했는데.
“정신이 없었나 봐.”
어쩌면 포식자를 앞에 둔 사슴처럼 겁에 질렸던 걸지도 모르지. 리디아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하녀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의원을 불러올게요.”
“아냐. 가벼운 생채기가 난 것뿐인걸. 소란 피울 필요는 없단다. 그것보다 마리, 새 드레스를 장만해야겠어. 와이트 부인을 불러와.”
“아, 그러게요. 봄이니까 조금 더 가벼운 드레스가 필요할 것 같아요. 와이트 부인에게 바로 연통을 넣을게요.”
“아니, 그런 드레스 말고, 조금 더 화려한 드레스가 필요해. 곧 황실에서 큰 행사가 있을 모양이야. 와이트 부인에게도 그렇게 전해 주렴.”
“네? 그럼 수도로 가시는 건가요?”
리디아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어보는 하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준비가 되면 바로 갈 것 같아. 그러니 와이트 부인에게 서둘러 달라고 말해 줘.”
“네, 아가씨!”
리디아는 쪼르르 달려 나가는 하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방문 옆을 바라보았다.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방 한구석에 남자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아버지에게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카르티아 영애의 일로 화가 단단히 나셨거든. 괜히 가면 너한테 불똥이 튈지도 몰라.”
“…….”
“알겠다는 뜻이지?”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흔히 있는 일이라 리디아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카이. 사냥 대회는 재밌었어? 듣자 하니 그때 카르티아 영애에게 큰일이 생길 뻔했다던데 너도 봤어?”
“…….”
“제너스 산맥에 다녀온 뒤로 통 말이 없네. 아버지께 많이 혼났어?”
얼마 전 아버지의 집무실을 지나던 중 리디아는 아버지가 남자에게 불같이 화내던 목소리를 들었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도 났던 것을 보면 그를 향해 물건을 던지거나 손찌검을 했던 것도 같았다.
뭐 때문에 혼이 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버지가 사냥 대회니 뭐니 하는 말을 하는 것으로 봐서는 사냥 대회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싶었다.
리디아는 집무실 앞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남자는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시선을 잠깐 주었다가 도망치듯 사라졌다. 얼핏 보았던 그의 뺨이 빨갛게 부어오른 것 같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나.’
평소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원래 말수가 워낙 적어 이쪽에서 다섯 마디 정도는 건네야 겨우 한 번 대답이 돌아올까 말까 했다.
그러나 얼마 전 아버지인 데프론 후작을 따라 사냥 대회를 다녀오더니 안 그래도 적은 말수가 급격하게 적어졌다.
후작에게 혼나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후작에게 혼나는 데에 이골이 났다. 그 정도쯤은 가볍게 치부하며 넘어갔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리디아는 일부러 뾰로통하게 되물었다.
“이젠 나와 말도 안 섞을 거야?”
“……아닙니다.”
“이제야 목소리 좀 듣네.”
“…….”
또, 또 입을 다물지. 그러나 그 모습에 화가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고집스러운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리디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큰 남자가 겁에 질린 초식 동물처럼 몸을 살짝 움츠리더니 뒤로 물러났다.
“생각보다 빨리 수도로 돌아가게 됐어. 드디어 말로만 듣던 카르티아가의 유리나 양을 실제로 볼 수 있을 것 같네.”
기분 탓일까. ‘카르티아의 유리나’라는 대목에서 남자가 잠깐 움찔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워낙 미미한 변화라서 리디아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수도는 오랜만에 가는 거라 떨리면서도 많이 긴장돼. 네가 같이 가 주면 조금 나을 것 같은데…….”
리디아는 은은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게 내밀어진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소 거칠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건 언제…….”
리디아는 그제야 제 손바닥에 상처가 났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뒤늦게 밀려오는 민망함과 창피함에 손을 거두려고 했지만 남자가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제 손을 살피는 남자의 정수리를 보다가 멋쩍게 웃었다.
“바보같이 깨진 잉크병에 베였지 뭐야. 칠칠치 못하지?”
“…….”
그는 여전히 말없이 손끝으로 리디아의 손바닥을 쓸었다. 그녀가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그의 손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오더니 손바닥 위에 자리 잡고 있던 붉은 생채기가 금세 사라졌다.
“고마워.”
“아닙니다.”
그는 그것으로 할 일을 마쳤는지 손을 놓으려 했지만 그보다는 리디아가 양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는 것이 더 빨랐다.
“카이.”
“…….”
리디아는 여전히 조용히 눈만 깜빡이는 그를 보며 수줍게 웃었다.
“수도에 같이 가 줄 거지?”
그 말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는 꿈에도 모르고.
* * *
레이너드는 체스 판에 구멍이라도 뚫을 기세로 체스 판을 빤히 바라보았다. 유리나는 눈까지 찌푸려 가며 고민을 하는 그를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얼른 해. 그렇게 본다고 해서 갑자기 없던 수가 떠오르는 게 아니야.”
유리나의 농담에도 그는 웃지 않았다. 원래라면 생각할 시간을 제한해야 했지만 유리나는 미지근하게 식은 홍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그를 기다려 주었다.
어차피 급한 것도 아닌 데다가 레이너드의 표정이 웃겼던 탓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그의 표정을 구경하는 것이 체스 게임보다 더 재미있었다.
유리나가 홍차를 한 잔 다 비울 때쯤에야 동상처럼 가만히 있던 레이너드가 손을 움직여 하얀색 비숍으로 까만색 나이트를 잡아먹었다. 그가 까만색 나이트를 살랑살랑 흔들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 봐. 천천히 생각하니까 방법이 떠오르잖아. 너는 너무 생각을 안 하고 게임을 하는 게 문제야.”
누가 듣는다면 유리나가 레이너드에게 번번이 지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유리나의 체스 실력이 레이너드보다 훨씬 뛰어났다.
오늘도 이미 세 번이나 게임을 했는데 모두 유리나가 이긴 참이다. 참고로 어제도 유리나가 네 판을 모두 이겼다.
네 번째 경기인 지금 경기도 유리나가 더 우세한 상황이었다.
코웃음을 한 번 친 유리나는 체스 판을 흘끔 보았다가 고민도 하지 않고 까만 룩을 옮겼다. 유리나가 휘두른 까만 룩에 맞은 흰색 퀸이 체스 판 위에 툭 쓰러졌다. 의기양양하던 레이너드의 얼굴이 한순간에 굳었다.
유리나는 방금 레이너드가 했던 것처럼 흰색 퀸을 그의 눈앞에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내가 너무 생각을 안 하고 게임을 한다고?”
“아, 이번에는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레이너드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다시 체스 판을 노려보았다. 간식을 들고 안으로 들어오던 베시가 웃음을 한 번 삼키고 테이블 위에 삼단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는 샌드위치와 스콘 그리고 디저트로 먹을 수 있는 달달한 쿠키, 케이크가 종류별로 담겨 있었다.
“몇 판째 하시는 거예요?”
베시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홍차를 유리나와 레이너드의 찻잔에 따라 주며 물었다. 베시는 두 번째 판을 유리나가 이기는 것까지 보고 간식을 준비한다고 주방으로 향했었다.
“네 판째야.”
“세 번째가 아니라요? 그럼 세 번째 판은 누가 이기셨어요?”
유리나가 대답 없이 웃기만 하자 베시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가씨께서 이기셨군요.”
“응. 그리고 이번 판도 내가 이길 것 같아.”
아니라는 소리가 들려올 법도 한데 집중하느라 듣지 못한 것인지 레이너드에게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유리나는 그를 흘끔 보다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에도 체스를 하면 항상 아가씨께서 이기셨잖아요.”
“응, 그랬지.”
“아가씨는 게임을 같이 하실 분이 없어서 실력이 그대로일 텐데 어째서 레이너드 님은 여전하신 걸까요?”
“그러게.”
게임을 하는 동안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말에 유리나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레이너드가 여전하다고만 생각했지, 의문은 가지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했다.
아카데미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면 게임 정도는 하지 않나? 설마 얘 매일 공부와 검술 연습만 한 걸까?
“레이.”
“응?”
여전히 체스 판을 보며 생각하면서도 그는 착실히 대답했다. 유리나와 베시의 대화는 못 들었으면서 유리나가 자신을 부르는 것은 금방 알아듣는 것이 조금 신기했다.
“아카데미에서는 게임 안 했어? 에이든 군이라면 게임 하자고 했을 것 같은데.”
‘에이든’라는 이름 하나에 레이너드가 굳었던 표정을 풀더니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에이든을 몇 번 보지도 않았으면서 되게 잘 아네.”
“몇 번 안 봐도 잘 알 수 있는 성격이잖아.”
유리나는 2년 전 보았던 에이든을 떠올리며 웃었다. 레이너드가 사람들을 경계하는 고양이 같았다면 에이든 테시는 낯선 사람에게도 꼬리를 흔들며 친근하게 다가가는 강아지 같았다.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지만, 오히려 정반대이기 때문에 둘이 친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긴 그렇긴 하지.”
유리나를 따라 웃은 레이너드가 체스 말을 하나 옮기고는 소파에 늘어지듯이 앉았다.
“크론 왕국에서는 체스를 잘 안 해.”
“그럼?”
“주로 카드 게임을 했어. 사실 나는 카드 게임도 별로 하고 싶지 않았는데 에이든이 심심할 때마다 나랑 애들 모아 놓고 하자고 조르는 바람에 할 수밖에 없었어.”
“근데 넌 카드 게임도 못하잖아.”
유리나가 툭 던진 한마디에 레이너드가 바로 반박했다.
“무슨 소리야. 나 잘해. 에이든이랑 하면 대부분 내가 이겼는걸.”
“나한테는 항상 졌잖아.”
유리나는 아직도 레이너드가 한밤중에 찾아와서 카드 게임을 했던 그날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때 되게 힘들었는데.’
한밤중에 찾아와서 잠을 깨운 것으로도 모자라 이길 때까지 카드를 붙잡고 있을 기세길래 일부러 져 주느라 애 좀 먹었었다. 게다가 그는 이기고도 제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리나의 침대에서 꼼지락거렸었다.
그때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그것도 다 추억이었다. 레이너드도 같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아니라고 반박하는 대신 그저 기분 좋게 웃었다.
“체스는 지겨우니까 카드 게임 하자.”
유리나는 체스 판과 그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게임 도구들을 넣어 둔 상자를 살폈다. 가장 밑에 있던 카드를 찾아 다시 자리에 앉자 레이너드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녀의 손에 들린 카드를 바라보았다.
유리나는 상자에서 카드를 꺼내 능숙하게 섞으며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럼 어디 실력이 많이 늘었나 볼까?”
“좋아.”
어릴 때 하던 게임 말고 이번에는 조금 더 난이도가 있는 포커를 하기로 했다. 레이너드는 아카데미에서 많이 해 봤다고 자신만만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첫판을 유리나에게 지고 말았다.
생각보다 레이너드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는 유리나와 달리, 좋은 패가 들어오면 유리나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별로 티는 나지 않았지만 유리나는 기민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
“카드 실력도 별로 안 는 것 같은데?”
“다시 해. 다음 판에는 내가 이길 거야.”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유리나가 레이너드를 놀리기 위해 생글생글 웃으며 카드를 섞을 때였다. 차분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베시가 문을 열어 주자, 시종 하나가 조심스럽게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유리나는 앳된 얼굴의 시종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익숙한 얼굴의 시종은 별장이 아니라 수도의 카르티아 저택에서 일하는 소년이었다. 주로 편지나 소포를 담당하는 시종이었는데, 하는 일이 그런 쪽이다 보니 별장에는 데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곳에 있지?’
유리나는 그의 손에 들린 편지를 보며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굳이 수도에서 사람까지 보내 그녀에게 급한 편지를 보낼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니?”
유리나가 시종에게 손을 뻗으며 묻자 시종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편지를 대신 받으려고 다가오는 베시를 보았다가 고개를 돌려 레이너드를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아니라 레이너드 님께 온 편지입니다.”
“나에게?”
시종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던 레이너드가 그제야 반응했다.
“편지를 보낼 사람이 없는데.”
“혹시 에이든 군이 보낸 거 아닐까?”
“음…….”
그는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모를, 미묘하게 입술을 비튼 얼굴로 시종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 하겠다고 하기는 했는데.”
편지에 찍힌 인장을 살피던 레이너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아카데미의 인장이 아닌데.”
그 말에 흘끔 시선을 주었던 유리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거 좀 봐 봐.”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건네준 편지를 자세히 살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독수리가 그려진 황금색 인장. 이것은 분명…….
“황실의 인장이야.”
초대 황제의 눈동자 색이었던 황금색은 황실을 대표하는 색으로, 황금색 인장은 오로지 황실 사람들만 쓸 수 있었다.
더군다나 황실을 상징하는 독수리라니. 이건 의심할 여지 없이 황실에서 보낸 편지였다.
“대체 황실에서 왜 너한테 편지를 보낸 걸까?”
“글쎄.”
“그것보다 네가 제국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아직 비밀이잖아.”
인장을 뜯던 레이너드가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는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유리나의 눈치를 보다가 실토했다.
“사실 베아투스라는 걸 밝혔어.”
“뭐? 언제?”
“늑대에 대해서 조사하러 간 날. 정확히는 붉은 눈동자인 걸 알린 거지만, 스승님과 함께 있었으니 나라는 걸 알았겠지.”
“그걸 말하면 어떡해?”
“어쩔 수가 없었어. 흑마법사의 짓이라는 걸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거든. 오히려 잘못하면 내가 덤터기를 쓸 수 있었던 상황이라…….”
이어지는 설명에 유리나는 더 이상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하긴, 레이의 말을 순순히 들어 줄 리가 없지.’
황실 마법사들도 알아내지 못한 것을 이제 고작 성인이 된 애송이가 알아챘다면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천재성을 타고난 ‘베아투스’의 말 정도는 되어야 신빙성이 있었겠지.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팔을 찰싹 때렸다.
“그런데 왜 나한테 말 안 한 거야? 미리 말을 했어야지!”
“미안, 워낙 경황이 없다 보니 깜빡했어. 그때는 배후를 잡는 것에 열중하다 보니까.”
별로 아프지도 않을 텐데 레이너드가 보란 듯이 맞은 곳을 문지르며 유리나의 눈치를 살폈다. 유리나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그에게 도로 편지를 넘겼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편지부터 읽어 봐. 무슨 얘기인지 보자.”
“알겠어.”
제아무리 레이너드라도 황실에서 온 편지는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는지,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인장을 뜯었다. 다른 사람의 편지를 함부로 보는 것은 결례인지라 유리나는 그가 먼저 이야기해 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흐음.”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리던 레이너드가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안 좋은 이야기야?”
황실이 레이너드에게 호의적이면 호의적이지, 적대적일 리는 없는데. 유리나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레이너드가 설명해 주는 대신 편지를 건넸다.
“직접 읽어 봐.”
그는 유리나의 손에 편지를 쥐여 주고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대체 뭔데 그러지?’
유리나는 제 일인 것처럼 긴장한 채로 편지를 훑었다.
편지의 내용은 레이너드의 반응과 달리 안 좋은 내용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게 좋은 이야기뿐이었다.
“기사의 작위를 내리고 축하 파티를 열겠다, 라.”
조금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황실에서 레이너드가 돌아왔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면 놀랄 게 없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작위 수여식을 하는 데다가 축하 파티까지 연다는 것을 봐선 황실에서도 그만큼 레이너드를 귀한 인재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왜 반응이 저러지?’
이상해하던 유리나는 마지막에 적힌 문장을 보고 나서야 레이너드가 왜 저런지 알 수 있었다.
‘다음 달?’
파티의 날짜가 다음 달 말이었다. 그렇다면 준비 기간이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수도에 있었다면 조금 더 일찍 소식을 접하고 더 빨리 준비를 하기 시작했을 텐데, 영지에 있느라 소식이 늦었다.
오늘 당장 챙기고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수도까지 가는 시간을 빼면 정말 촉박했다.
“조금 더 있다가 가고 싶었는데.”
유리나가 편지를 반으로 접는 것을 본 레이너드가 작게 한탄했다.
그건 유리나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라면 2, 3주 정도 더 푹 쉬었다가 사교계 시즌이 무르익었을 때쯤 돌아갈 예정이었다.
어차피 유리나는 사교계 데뷔를 하지 않아서 파티에 다닐 필요가 없었으니 가능한 계획이었다.
유리나와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사교 시즌이 무르익었을 때 돌아가서 느긋하게 파티를 열어 레이너드를 사람들에게 소개해 줄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게.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더 좋잖아. 원래는 어머니가 파티를 열어 널 사교계에 데뷔시켜 줄 생각이었는데, 황실 주최 파티라니. 정말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두 참가하는 파티야. 안 그래도 유명 인사였는데, 더 유명해지겠어. 이러다 얼굴 보기 힘들어지는 거 아냐?”
유리나의 농담에도 레이너드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그는 눈썹을 늘어뜨리고 유리나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그런 것보다 너랑 여기서 더 지내는 게 더 좋아.”
“그런 거라니. 남들이 들으면 황실 모독이라고 하겠어.”
유리나는 어쩐지 풀이 잔뜩 죽은 것 같은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레이너드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얼굴을 유리나의 목덜미에 문질렀다.
유리나는 그 광경을 못 본 척해 주며 고개를 돌리는 베시의 눈치를 봤다가 레이너드의 볼을 잡고 그의 얼굴을 떼어 놓았다.
“나도 아쉽기는 해. 이번에 돌아가서 수도에서 지내다가 여름에 또 오자. 그때는 날이 더워서 바다에 들어가서 놀 수 있을 거야. 여름이면 오빠들도 휴가를 내서 같이 올 수 있으니까 북적거려서 더 재미있을 거야.”
여름에 또 오자는 말에 잠깐 화색이 돌았던 레이너드의 얼굴이 다시 심각해졌다.
“이번처럼 둘이 오는 게 좋은데.”
뜬금없이 오빠들은 왜 끼워 넣느냐고 툴툴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라 유리나는 웃고 말았다.
“그래, 오빠들 떼어 놓고 우리 둘이 오자. 그럼 괜찮은 거지?”
“그래도 아쉽다.”
“응, 나도 아쉬워. 그렇지만 어쩔 수 없잖아. 안 갈 수도 없고.”
“가지 말까?”
유리나의 손이 레이너드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장난으로 가볍게 때린 것이 아니라 꽤나 힘이 들어갔다.
“큰일 날 소리 하지 마. 황실 모독죄로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너뿐만 아니라 나까지 줄줄이 끌려갈걸.”
“그럼 안 되지. 당연히 갈 거야.”
“진작 그렇게 말했어야지.”
유리나는 기지개를 한 번 켠 뒤 소파에서 일어났다.
“준비할 게 너무 많아. 당장 내일 아침에 수도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오늘 자기 전에 돌아갈 준비를 끝내 놔. 알겠지?”
베시에게 손짓한 유리나가 짐을 정리하기 위해 방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레이너드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다시 자리에 앉혔다.
“왜? 할 얘기 있어?”
“카드 게임, 한 판 더 하자.”
“아직 낮이잖아. 딱 한 판만 더 하자.”
오늘 계속 진 것이 그렇게도 분한 건가 싶었는데, 그의 눈은 승부욕으로 불탄다기보다는 어딘가 간절해 보였다. 유리나는 자신을 보며 눈을 깜빡이는 레이너드의 얼굴을 살피다가 별수 없이 다시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딱 한 판만 더 하는 거야.”
“알겠어.”
레이너드는 능숙하게 카드를 착착 섞었다. 아카데미에서 많이 해 봤다더니 카드를 섞는 손놀림이 꽤 자연스러웠다. 유리나는 카드를 매만지는 길고 하얀 손가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우리 내기할까?”
그 바람에 레이너드의 말을 한 박자 늦게 알아들었다.
“……응? 내기?”
“응. 그냥 하면 재미없잖아. 마지막 게임이니까 긴장감 있게 하자.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때? 대신 소원은 들어줄 수 있는 것으로.”
“음…….”
너무 뜬금없는 제안이라 유리나는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 가득한 눈으로 레이너드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꿍꿍이야?”
“아무 꿍꿍이도 없어. 그냥 좀 더 재밌게 하자는 거지. 애들하고는 식사 내기를 걸고 게임 했거든. 싫으면 하지 말고.”
분명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또 말하는 표정이나 목소리는 담백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넘겨주는 카드 패를 받으며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자.”
지금까지 승률로 본다면 이번 판도 유리나가 이길 가능성이 컸다. 진다고 하더라도 레이너드가 이상한 소원을 빌지는 않을 테니 나쁠 것이 없었다.
“소원 들어줄 준비나 해.”
마음을 다잡은 유리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카드를 펼쳤다. 카드 패가 나쁘지 않은 것을 보니 이길 자신이 더욱 생겼다.
그리고 정확히 십 분 만에 유리나는 황당한 눈으로 레이너드가 테이블에 내려놓은 카드 패를 쳐다보았다.
“이건 말도 안 돼.”
빨간 하트 무늬의 카드가 5부터 10까지 쭈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포커에서 최고의 패인 로열플러시였다.
유리나의 패는 볼 필요도 없었다. 어떤 패를 내놓아도 이길 수 없는 완벽한 패였으니까.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지금껏 내내 지기만 했는데 내기를 하자마자 이런 패를 내놓는다고?
“속임수를 쓴 거 아냐?”
“속임수라니. 날 그렇게 못 믿는 거야?”
“그렇지만 어떻게 이런…….”
“말했잖아. 내가 카드 게임은 잘한다고.”
레이너드가 으스대며 유리나의 손에 들린 카드를 흘끔거렸다.
“투 페어? 내가 이겼네.”
“아니, 잠깐만. 이건 말도 안 된다니까.”
“말이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속임수 같은 거 안 썼어.”
그가 소맷자락 안쪽과 주머니를 차근차근 보여 주었다. 그 어디에도 교체한 카드는 없었다.
그래도 어딘가 찝찝한 구석이 남아 있어서 유리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레이너드의 카드를 흘겨보는데, 그가 유리나의 옆으로 와서 속삭였다.
“내기는 내기잖아. 내 소원 들어줘.”
유리나는 이 기이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을 포기하고 한숨을 쉬었다. 레이너드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행여나 그가 속임수를 썼더라도, 그가 그만큼 유리나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겠거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무슨 소원인데? 네가 말했다시피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만 들어줄 거야.”
“이번 파티 때 내 파트너로 같이 가 줘.”
“파트너?”
“응, 파트너.”
그가 유리나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유리나는 바로 대답할 수가 없어서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뜸을 들였다.
“안 돼?”
“안 되는 건 아닌데…….”
카르티아 후작 부인을 대신하여 사냥 대회라는 공식 행사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아직 유리나는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았다.
보통 사교계의 데뷔하는 나이가 성년이 되는 열여덟 살이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도 유리나와 리디아는 열여덟 살에 데뷔했다.
만약 이번 파티에 레이너드의 파트너로 참가하게 된다면, 유리나 또한 이번이 데뷔 파티가 된다.
카르티아 후작의 고명딸이 데뷔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크게 관심을 받을 만한 일인데, 그 상대가 크론 왕립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하고, 여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베아투스’인 레이너드라니.
두 사람이 같이 홀에 들어서면 누가 더 많이 주목을 받는지 내기도 할 수 있을 정도고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게다가 남녀 상관없이 첫 데뷔 파티의 파트너는 큰 의미가 있었다. 보통은 가족이 해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연인인 레이너드의 부탁이라고 하더라도 유리나가 일방적으로 정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같이 상의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유리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레이너드의 표정을 살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초조한지 그는 자꾸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녀는 엄지로 그의 아랫입술을 살살 문질렀다.
“하지 마. 왜 물어뜯고 그래.”
“긴장돼서.”
이젠 시선도 마주할 자신이 없는지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유리나는 파르르 떨리는 그의 눈꺼풀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레이 말고 다른 사람이 내 파트너가 되어도 괜찮을까?’
그건 아닐 것 같았다. 부모님의 반대로 세 오빠들이 첫 데뷔 파티의 파트너가 된다고 하면, 그것도 나름대로 기쁘겠지만 아쉬움이 남을 터다. 더군다나 레이너드가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 홀에 들어간다고 하면…….
‘기분 나쁜데.’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기 자신이 우스울 정도로.
만약 이번에 두 사람이 파트너가 되어 파티에 참가한다면 관심을 받는 것과 동시에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갈 것이다. 두 사람이 단순한 후원자, 피후원자 관계를 넘어 연인 아니냐는 소문과 함께, 어쩌면 입에 담기도 힘든 소문이 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사실인걸.’
연인인 것은 사실이고, 이후 레이너드 말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나온 것 아닐까.
“좋아. 나랑 가자.”
느릿하게 눈을 뜬 레이너드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유리나의 표정을 살폈다.
“정말?”
“그럼 가짜겠어?”
“정말 괜찮겠어?”
“뭐야, 그 반응은? 내가 거절할 거라 생각한 거였어?”
“솔직히 말하자면…… 그랬어.”
“너무 당당하게 말해서 몰랐네.”
유리나는 여전히 얼떨떨해하는 레이너드의 코끝을 톡 때렸다.
“그럼 이제 솔직히 말해 봐. 속임수 쓴 거지?”
“음, 글쎄.”
“글쎄?”
“시간이 없다며. 얼른 가서 돌아갈 준비 하자.”
레이너드가 다소 급하게 유리나를 일으켜 세우며 문 쪽으로 향했다.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던 유리나는 어깨 너머로 베시가 치우고 있는 카드를 흘끔거렸다.
분명 레이너드가 내려놓을 때까지만 해도 모두 붉은색이었던 카드에 언뜻 검은색이 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 * *
“이거 어때?”
베시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입고 나온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앞에서 한 바퀴 핑그르르 돌았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에게서 물려받은 드레스였다.
가슴과 허리는 몸 선에 맞게 꽉 조이고 허리 아래로 드레스가 풍성하게 늘어진 디자인이라 유리나가 움직일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허공에 하늘거렸다.
남성용 예복 디자인이 그려진 책을 보고 있던 레이너드는 넋 놓고 유리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많은 것처럼 입술은 달싹이는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알 것 같았지만, 유리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
“이상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드레스라 나한테는 안 어울리나…….”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목소리에도 여전히 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얼어붙은 그의 표정을 살피던 베시가 유리나의 뒤에서 숨죽여 웃었다.
“레이?”
유리나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그제야 레이너드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예뻐.”
그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몽롱한 얼굴로 일어나 유리나의 주위를 천천히 돌며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진짜 예쁘다.”
그의 미소를 본 순간 유리나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원했던 반응이기는 한데, 생각했던 것보다 과한 반응이라 조금 낯부끄러웠다.
그녀는 침을 한 번 삼켰다가 가까이 다가오려는 레이너드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이번 파티에 이 드레스를 입고 나가려고 해.”
“이걸? 왜?”
되묻는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게다가 왜냐니. 왜 하필 이런 드레스를 입으려고 하냐고 묻는 건가.
유리나는 못마땅한 듯이 눈을 찌푸리는 레이너드를 보다가 다시 물었다.
“왜? 예쁘다면서. 안 예쁜 거야?”
설마 거짓말을 한 거야? 질문 속에 담긴 속뜻을 알아챘는지 그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냐, 예뻐. 예쁘긴 예쁜데…….”
“그럼 대체 뭐가 문제야? 옛날 디자인이라서?”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유리나는 딱히 그가 디자인 때문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 드레스가 요즘 사교계에서 유행하는 드레스와 조금 다르기는 했다.
목과 손등 주변에 레이스 장식을 넣고 진주 가루를 뿌려 은은하게 반짝이기는 했지만, 다소 밋밋한 감이 없지 않았다. 실제 보석을 이용하여 최대한 화려하게 장식하는 최근 유행과는 확실히 동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아마 이번에 이 드레스를 입고 간다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그러나 유리나는 그 반응이 부정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카르티아가의 사람이 입고 나온 드레스다. 게다가 카르티아 후작 부인에게서 물려받았다는 의미 있는 드레스였다.
그렇지만 레이너드가 언제부터 유행을 신경 썼다고? 그는 신체 능력이나 마법 능력이 뛰어난 것에 비해 미적 감각이 조금 떨어졌다. 게다가 지난 7년간 제국의 사교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현재 드레스가 유행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아냐. 디자인도 예쁘고, 너한테도 잘 어울리는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던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드레스를 다시 한번 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걸로 해. 네가 좋다면 나도 좋아.”
“정말 괜찮아? 이번 파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너야. 네가 싫다면 다른 드레스를 입을게.”
빈말이 아니라 유리나는 진짜로 그럴 의사가 있었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에게서 물려받은 드레스를 언젠가 사교계에 입고 나갈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게 꼭 이번 파티일 필요는 없었다.
말했다시피 이번 파티는 오로지 레이너드를 위한 파티였다. 유리나는 드레스뿐만 아니라 그가 원하는 대로 뭐든 맞춰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다소 난감한 기색을 보였던 것과 달리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손을 잡으며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정말 괜찮아. 나도 이 드레스가 마음에 들어. 예뻐.”
유리나는 잠시 그의 얼굴을 살피며 그의 생각을 읽으려고 했다. 그러나 정말로 그에게선 더 이상 난감하다는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말 괜찮은 거겠지?’
조금 찝찝한 마음이 남기는 했지만 예쁘다는 말까지 들었는데 굳이 다른 드레스를 입겠다고 하기에도 민망했다. 유리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앤더슨 부인을 불렀다.
선한 인상의 앤더슨 부인이 안으로 들어오며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예전에 로렌 부인 사건 이후로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더욱 꼼꼼하게 알아보고 고용한 사람이었다.
신경 쓴 보람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제국 사교계에 붉은 눈을 꺼려 하는 풍조가 사라져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레이너드를 보는 앤더슨 부인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이는 앤더슨 부인을 잠시 보다가 물었다.
“이 드레스에 어울릴 만한 예복을 맞추고 싶은데 괜찮은 게 있을까요?”
앤더슨 부인이 조금 전까지 레이너드가 보고 있던 디자인 책을 가져와 유리나에게 디자인을 하나, 둘 보여 주었다.
“영애의 드레스가 수수한 편이니 레이너드 님의 예복은 조금 화려하게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화려해도 좋아요.”
“나는 수수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레이너드의 말에 유리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주인공이잖아. 돋보여야지.”
그냥 파티도 아니고 황실에서 주최하는 파티였다. 남자고 여자고 다들 사람들의 눈에 띄기 위해 최대한 화려한 옷을 입고 올 것이다. 그 속에서 수수하게 입으면 주인공이라고 할지라도 눈에 띄지 못할 것이다.
‘물론 레이는 얼굴만으로도 이목을 사로잡을 테지만.’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얼굴을 살피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가벼운 셔츠와 바지 차림에 머리카락은 특별히 정돈하지 않고 흩트려 놓았는데도 레이너드의 미소는 여전히 돋보였다.
저 모습 그대로 파티에 내보낸다고 해도 관심을 한 몸에 받을 테다.
그러나 유리나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지금 현재 제국에서 ‘베아투스’의 존재가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하지만 귀족들 사이에서는 평민 출신의 레이너드를 고깝게 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붉은 눈이 어떻게 여신의 상징일 수 있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리 분별을 할 줄 안다면 카르티아 가문의 후원을 받고, 크론 왕립 아카데미까지 졸업하고 온 레이너드를 대놓고 비난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얕보일 필요는 없었다.
최대한 화려하게 꾸며서 그들이 아무 소리도 못 하게 미리부터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것이 좋았다.
다행히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의견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앤더슨 부인이 추천해 준 세 가지 디자인 중 화려한 자수가 들어간 디자인을 택했다.
자수가 들어가서 화려하지만 레이스나 보석 장식은 배제해서 너무 과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럼 치수를 재겠습니다.”
유리나가 말한 요구 사항을 수첩에 적은 앤더슨 부인이 줄자를 들고 레이너드에게 다가갔다. 미소 띤 얼굴로 얘기를 나누던 레이너드가 갑자기 굳은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앤더슨 부인이 의아한 얼굴로 한 걸음 더 다가가자 그는 또다시 뒤로 물러났다.
명백한 거부 의사에 앤더슨 부인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유리나는 두 사람 사이에 맴도는 어색한 분위기를 읽고는 베시에게 손짓했다.
“베시, 베시가 해 줄 수 있겠어?”
“네, 네? 저요?”
난데없이 지목을 당한 베시가 화들짝 놀라며 앤더슨 부인의 눈치를 보았다. 유리나는 직접 앤더슨 부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미안해요. 베시가 어릴 적부터 레이의 시중을 들어 주어서 더 편할 것 같아서 그런데, 괜찮을까요?”
유리나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까지 나왔는데 앤더슨 부인이 더 이상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유리나에게 줄자를 건네준 뒤 뒤로 물러났다.
유리나에게서 줄자를 건네받은 베시는 여전히 유리나와 레이너드의 눈치를 살피다가 레이너드가 다가오자 그제야 팔을 벌렸다.
“저는 치수를 한 번도 재 본 적이 없는데 괜찮을까요?”
“앤더슨 부인께서 알려 주실 거야.”
유리나의 말에 앤더슨 부인이 바로 어디를 어떻게 재야 하는지 말로 설명을 해 주었다. 베시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버벅거릴 때는 손으로 제 몸을 직접 가리키며 알려 주었다.
레이너드는 미소를 지으며 앤더슨 부인이 시키는 대로 팔을 벌리거나 뒤로 돌거나 했지만, 유리나는 그가 다소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녀만이 알 수 있는 아주 미세한 차이였다.
그를 이만큼이나 알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직도 상처가 남아 있는 걸까.’
아카데미에서 붉은 눈에 대한 편견 없이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눈동자에 대한 상처가 많이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릴 적, 로렌 부인에게서 받은 상처는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 뾰족한 돌멩이가 되어 남아 있었나 보다. 그의 눈을 보고서도 별 반응이 없던 앤더슨 부인이 다가가는 것도 꺼릴 정도면.
“그럼 다음 주까지 가봉을 완성해서 방문하겠습니다.”
“시간이 촉박해요. 최대한 빨리 부탁할게요.”
“노력하겠습니다.”
치수를 다시 한번 확인한 앤더슨 부인이 도구들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레이너드가 조금 후련해진 얼굴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유리나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의 이마에 살짝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날이 따뜻하다고는 해도 땀이 날 정도로 더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가 식은땀이 날 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이 남았구나.’
유리나가 눈짓을 하자 베시가 눈치 빠르게 시원한 음료를 가져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유리나는 베시가 열어 놓고 간 문을 보다가 레이너드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많이 피곤하지?”
“많이는 아니고 조금. 그래도 끝났으니 괜찮아.”
“안타깝지만, 이것 말고도 할 거 많아. 옷에 맞춰서 벨트나 신발도 맞춰야 하고, 머리 모양도 고민해야 하고, 또…….”
감은 눈 위에 손등을 얹고 있던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말을 듣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넌 정말 피곤하게 사는 것 같아.”
정말로 지친 목소리라 유리나는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식은땀에 젖은 건지 그의 앞머리가 살짝 촉촉했다.
“너도 이제 피곤하게 살아야 해. 어쩌면 나보다 더 피곤하게 살아야 할걸? 나보다 더 유명해지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니까.”
“그런 관심 별로 필요 없는데.”
“그래도 나보다는 나을 수 있어. 난 여기서 코르셋도 해야 해. 무도회 전날에는 굶어야 할지도 몰라.”
“코르셋도 모자라서 굶어야 해? 왜?”
“제국에서는 가는 허리가 미의 기준이니까.”
그가 눈을 덮었던 손을 들며 유리나를 흘끔 보더니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유리나는 살짝 열려 있는 문밖을 살피다가 그가 이끄는 대로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레이너드가 뒤로 젖혔던 고개를 들며 유리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니까 왜?”
그의 손가락이 유리나의 옆구리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코르셋 같은 거 안 해도 충분히 가는데.”
그의 손이 이번에는 유리나의 등허리를 아래서 위로 쓸어 올렸다. 피아노를 치듯 척추를 천천히 누르는 그의 손가락의 감촉을 느끼며 유리나는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나른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감이 넘치고 여유로워 보였던 평소 모습과 달리 지금 그는 묘하게 색정적으로 보였다.
“베시는 언제 오려나.”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날개 뼈를 손바닥으로 슬며시 문지르며 물었다. 유리나는 그가 혀로 아랫입술을 살짝 쓰는 것을 바라보다가 그의 등 뒤에 있는 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베시가 오는지 확인하려기보다는 그의 시선을 피하려는 의도가 더 강했다. 어쩐지 오늘따라 그의 눈빛이 뜨거워서 목이 타는 것 같았다.
“곧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으음.”
그가 불만스럽게 눈을 찡그리자 문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소리 없이 닫혔다. 철컥, 하고 문이 저절로 잠기는 소리가 났다.
유리나가 깜짝 놀라 일어서려고 하자 레이너드가 팔에 힘을 주며 그녀를 도로 그의 다리 위에 앉혔다.
“베시가 오면 어쩌려고 그래.”
“베시는 늦게 올 거야.”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유리나가 눈썹을 치켜세우자 레이너드가 나른하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다른 심부름을 갔다 올 거거든.”
레이너드가 태연하게 대답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시선이 유리나의 목을 지나 가슴, 그리고 허리로 향했다. 분명히 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유리나는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그녀는 손바닥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그런데 진짜로 내가 이 드레스 입어도 돼?”
유리나는 방 안에 맴도는 미묘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말을 돌리며 그의 다리에서 내려오려고 했지만, 레이너드가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그냥. 아까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길래.”
“그런 건 아냐. 진짜 예뻐. 마음에 들어. 그냥…….”
“그냥?”
“너무 예뻐서…….”
레이너드의 입술이 유리나의 귀밑에 닿았다. 그는 유리나의 목덜미를 따라 입술을 움직이며 조용히 속삭였다.
“다른 남자들에게 안 보여 주고 나만 보고 싶어.”
이번에는 쇄골 위에 말캉한 입술이 닿는 느낌이 났다. 그의 날숨이 간지러워 유리나는 몸을 비틀었다.
레이너드가 제 눈을 가리고 있는 유리나의 손을 떼어 내며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눌렀다 뗐다. 유리나를 빤히 바라보는 붉은색 눈동자에서는 진득한 소유욕이 묻어 나왔다. 지금껏 그에게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감정이었다.
유리나는 내심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그의 이 소유욕이 싫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기쁘기까지 했다. 왠지 목이 메는 것 같아 그녀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일부러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다른 드레스를 입을까?”
“다른 드레스를 입어도 마찬가지야. 그냥 누가 널 보는 게 싫어. 내 눈에도 이렇게 예쁜데 다른 사람들 눈에도 예쁠 거 아냐. 다들 네게 반하면 어떡해.”
“다들 반하긴 뭘 반해.”
유리나가 헛웃음을 터뜨리자 그는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 있어. 넌 모르겠지만, 네가 아카데미에 다녀간 후로 널 본 애들이 너에 대해 얼마나 물어봤는지 몰라.”
“정말?”
“응.”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유리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조금 흥미가 돋았다. 누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 흥미로운 게 아니라 레이너드가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했다.
그때 그와 그녀는 연인은커녕,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않은 상태였으니까.
“뭐라고 하긴 뭐라고 했겠어. 너네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했지.”
왠지 그 새침하면서도 퉁명한 얼굴이 떠올라 유리나가 작게 소리 내어 웃자 레이너드가 불만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유리나는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하며 그의 어깨를 살살 쓸어 주었다.
“반하면 어때. 어차피 난 너만 볼 건데.”
“그래도 싫어.”
그가 꼭 아이가 투정 부리는 것처럼 유리나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싫으면 어떡할 건데? 날 아무도 못 보는 곳에 가두기라도 할 거야?”
유리나가 예상한 답은 ‘그럴 일은 없다’ 정도였다. 그런데 그에게서 나온 대답은 참 기가 막혔다.
“할 수만 있으면 그러고 싶어.”
“뭐?”
유리나는 도끼눈을 하며 레이너드의 뺨을 꼬집었다. 정신 차리라는 의미를 담아 꼬집은 거라 아플 텐데도 그는 아픈 내색 따위 전혀 하지 않았다. 그게 유리나의 화를 더욱 부채질했다.
유리나는 그의 볼을 옆으로 쭉 잡아당겼다. 보드랍고 말랑한 그의 볼이 꼭 밀가루 반죽처럼 늘어났다.
“못하는 소리가 없어. 대체 나 없는 동안 아카데미에서 뭘 배우고 온 거야? 어릴 때는 보자마자 노리개니 뭐니 하더니 지금은 감금이라도 하겠다는 소리야?”
“그냥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로 그렇게 한다는 소리가 아니잖아.”
유리나는 아예 그의 다른 볼을 마저 잡아당겼다. 레이너드의 입이 가로로 쭉 늘어났다. 표정이 진지하니 안 그래도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더욱 웃겼다.
“그런 마음도 먹으면 안 돼. 그거 집착이야.”
“집착이면 어때.”
볼을 늘린 탓에 그의 발음이 조금 뭉개졌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찌푸리는 유리나를 보다가 웃어 보였다.
“얼른 작위를 받고 우리 사이를 사람들에게 알리면 좋겠다. 사람들 눈치 볼 필요 없이 늘 같이 있고 싶어.”
그건 유리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녀는 더 이상 뭐라고 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기다려.”
“기다리기 힘들어.”
한숨을 한 번 내쉰 레이너드가 작게 속삭였다.
“유리나, 키스해 줘.”
“너 하는 거 봐서.”
왠지 놀리고 싶은 마음에 유리나는 괜히 새침하게 대꾸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데?”
“으음, 글쎄. 내 말 잘 들으면?”
“잘 듣고 있잖아. 난 네 말만 듣는걸. 요즘 계속 네가 원하는 대로 파티에 갈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잖아. 오늘도 옷도 맞췄고.”
“음, 그렇긴 한데…….”
“응?”
그래도 유리나가 바라만 볼 뿐 입을 맞춰 주지 않자, 레이너드가 재촉하듯 톡 튀어나온 그녀의 날개뼈를 손바닥으로 뭉근하게 문질렀다.
“말 잘 들으면 해 줄 거래도.”
유리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그의 볼을 꼬집었던 손으로 뺨을 살살 문질렀다. 확실히 세게 꼬집긴 꼬집었는지 하얀 뺨이 빨개져 있었다.
“아프지 않았어?”
“하나도 안 아파.”
레이너드가 즉각 대꾸하며 얌전히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유리나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대신 오뚝한 콧대에 쪽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그의 콧잔등에 불만스럽다는 듯이 주름이 잡혔다.
“으음, 거기 말고.”
“싫어?”
“싫은 건 아닌데 여기에 해 주면 더 좋을 것 같아.”
레이너드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손끝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유리나는 이번에도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엄지로 그의 입술 위를 살살 문질렀다. 간지러웠는지 그의 감은 눈이 움찔거리며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작게 웃은 유리나가 계속해서 입술을 간질이자 레이너드가 실눈을 뜨더니 입술 위를 왔다 갔다 하는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놀린 것에 대한 복수였는지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살짝 따끔했다.
유리나가 손가락을 빼려고 하자 그는 오히려 손가락을 더 깊숙이 삼켰다.
“레이. 장난치지 마.”
“네가 먼저 했어.”
그가 여전히 그녀의 손가락을 입에 문 채로 웅얼거렸다. 그럴 때마다 혀가 손끝에 닿는 바람에 간지러워서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레이너드가 반쯤 뜬 눈으로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이를 세워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뜨끈한 숨결이 닿는 손가락보다도 그의 시선을 오롯이 받는 얼굴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 유리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그의 이마에 이마를 콩 박았다.
“내가 잘못했어. 장난 안 칠게.”
그제야 레이너드가 그녀의 손을 놓아주고 다시 눈을 감았다. 유리나는 닫힌 문을 흘끔 보았다가 몸을 숙여 그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다시 상체를 일으키는데 레이너드가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쥐며 다급하게 입술을 부딪쳐 왔다.
당황해할 새도 없이 입술을 가르고 뜨거운 혀가 입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가 밀어붙이는 힘이 강해 자꾸 몸이 뒤로 밀렸다. 유리나는 그의 목을 안으며 눈은 감고 그에게 응했다.
순간, 몸이 기우뚱하는 느낌이 났다. 유리나는 깜짝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레이너드에게 매달렸다. 등에 푹신한 소파가 닿는 느낌이 나서 눈을 떠 보니 어느새 레이너드가 그녀의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목을 조이던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며 물었다.
“계속 해도 돼?”
유리나는 몸을 일으키며 그의 어깨를 밀었다.
“안 돼. 베시 올 때 됐잖아.”
“아…….”
레이너드가 아쉽다는 듯이 혀로 입술을 쓸며 유리나를 일으켜 주었다. 유리나는 거울 앞에 서서 흐트러진 머리와 드레스를 정리했다.
레이너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달칵, 하고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닫혔던 문이 살짝 열렸다.
옷매무시를 잘 정리한 유리나는 레이너드에게 다가가 그의 크라바트를 매만져 주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서 떨어지기 무섭게 시원한 음료가 담긴 쟁반을 든 베시가 안으로 들어왔다.
“늦게 와서 죄송해요. 가던 길에 마님께서 심부름을 시키시는 바람에.”
진짜 다른 심부름을 하고 온 거였구나. 유리나는 테이블에 음료를 내려놓는 베시를 보다가 레이너드에게 흘끔 시선을 주었다.
‘네가 한 거야?’
입만 벙긋거리며 묻자 레이너드는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유리나는 베시에게 고맙다고 웃으며 인사한 뒤 음료를 마시는 레이너드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카드 게임 사건 때처럼 그가 마법으로 일을 만든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베시와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대화를 마법으로 엿들은 것인지는 미궁 속에 빠졌다.
* * *
유리나는 제 앞에서 살짝 허리를 숙이며 정중하게 손을 내미는 레이너드를 뚱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저에게 영애와 춤 한 곡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어릴 때 그를 가르쳤던 깐깐한 가정 교사가 와서 본다고 해도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자세였지만, 그것이 춤 신청이라고 한다면 조금 꺼림칙한 것은 사실이었다.
유리나는 아직도 그에게 발등을 꾹꾹 밟히던 어릴 때를 똑똑히 기억했다.
열심히 하는 레이너드가 기특해서 그때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사실 그에게 발등을 밟힐 때마다 표정 관리를 하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 작고 왜소하다고 해도 그는 열두 살 사내아이였고, 제힘을 다스릴 줄을 몰랐다.
‘지금은 더 컸으니까.’
유리나는 큼지막한 그의 발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올려 그의 체격을 살폈다. 실수로 발을 한 번 밟힌다면 뼈가 괜찮은지 걱정을 해야 하지 않을까.
유리나가 바라만 볼 뿐, 손을 잡을 생각을 하지 않자 그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이젠 진짜 안 밟을 수 있어.”
유리나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아는 듯했다. 그러나 말한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믿을 리가 없다. 유리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다소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카데미에서도 춤을 췄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잘 안다. 아카데미에서도 연말이나 졸업식 때 파티가 열린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참석하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에이든의 손에 이끌려 참석을 했다고 해도 그의 성격에 파트너를 데려가지 않았을 거고 친하지도 않는 여자와 춤은 더더욱 추지 않았을 테다.
그렇다면 7년 전 저택을 떠나기 전에 춰 본 것이 마지막이라는 소리인데, 그때도 실수가 잦은 것을 생각하면 지금 실력은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스텝은 기억이나 할까?’
레이너드를 좋아하긴 하지만 저 큼지막한 발에 발등이 밟히는 건 사양이다.
유리나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팔짱을 끼려고 하자 레이너드가 재빨리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춤은 추지 않았지만 진짜 안 밟을 수 있어. 나 검술 배운 거 알잖아.”
얼떨결에 홀 가운데까지 졸졸 끌려온 유리나는 태연한 그의 말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춤 연습하는데 검술 얘기가 왜 나와?”
그가 유리나의 허리를 잡으며 으스댔다.
“운동 신경이 생겼다는 소리지. 어릴 땐 몰랐는데 춤추는 것도 결국 몸을 쓰는 거라 운동 신경이 없으면 힘들겠더라고.”
유리나의 옆구리에 있던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더듬으며 위로 올라왔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던 유리나는 재빨리 그의 손을 낚아채 다시 옆구리에 갖다 댔다.
유리나가 이게 무슨 짓이냐는 의미를 담아 눈썹을 치켜세워 보이자 레이너드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허리를 빳빳하게 세워 스탠딩 자세를 취했다.
그가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피아노를 보며 고개를 까딱이자 피아노 건반이 저절로 눌리기 시작했다. 느릿한 왈츠곡이 작은 홀에 울려 퍼졌다.
레이너드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박자를 세더니 능숙하게 유리나를 리드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몸놀림이라 유리나는 긴장을 살짝 풀었다.
그러나 여유로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유리나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짓던 레이너드의 시선이 조금씩 아래로 향하더니, 유리나가 턴을 하고 다시 그의 곁으로 다가갈 때 그의 발이 유리나의 구두를 꾹 눌렀다.
묵직한 무게와 함께 아릿한 둔통이 발등에서 느껴졌다. 유리나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레이너드가 먼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발등을 살살 문질러 주었다. 그의 손에서 나온 하얀빛이 유리나의 발을 보드랍게 감싸 쥐더니 이내 통증이 사라졌다.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올려다보며 멋쩍은 듯 웃었다.
“괜찮아?”
“응.”
“그럼 다시 갈까? 이번엔 진짜로 안 밟을게.”
유리나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다가 그의 손바닥에 다시 손을 얹었다.
‘어쩔 수 없지.’
기사 서임식 날 파티에서 레이너드는 파트너인 유리나와 적어도 한 곡은 춰야 했다. 파티의 주인공이니 피곤하다거나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도망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파티 당일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실수하고 창피를 당하느니 차라리 지금 발을 밟히는 게 나았다.
그러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나는 또 그에게 발을 밟히고 말았다.
“미안해. 괜찮아?”
한 번.
“이번엔 조금 세게 밟은 것 같은데, 많이 아프진 않아?”
두 번.
“이번엔 진짜로 안 밟을게.”
세 번.
“…….”
네 번.
처음에 밟힌 것까지 포함하면 총 다섯 번이었다. 그 모든 일이 곡 하나가 끝나기 전에 일어난 것을 생각하면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쯤 되니 입이 있어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는지 레이너드는 춤을 계속 추자는 말을 하는 대신 유리나의 발을 내려다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유리나는 그가 마법으로 치료를 해 줘서 통증이 전혀 없는 발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계속해도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그렇다고 연습을 안 할 수는 없잖아.”
“그날 춤을 안 추면 안 되겠지?”
“당연히 안 되지.”
그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발과 유리나의 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잠시 그렇게 가만히 서 있던 그는 유리나에게 바짝 다가가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그녀를 살짝 들어 올려 제 발 위에 올렸다.
“이렇게 하자. 이렇게 하면 스텝 연습은 할 수 있을 거야.”
“이러면 네가 아프잖아. 그냥 하던 대로 해.”
유리나가 그의 발등에서 내려오려고 하자 레이너드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유리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연습하는 게 더 좋기도 하고.”
“뭐?”
유리나는 그의 팔을 찰싹 때렸다. 그래도 그는 꿈쩍하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유리나는 그를 설득하는 대신 오른발을 살짝 들어 신고 있던 구두를 벗었다. 그러고는 왼쪽 구두를 마저 벗어 던졌다.
“이러면 좀 낫지?”
“응, 그러네.”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댔다. 그가 유리나의 입에 입을 맞추자 또다시 아무도 없는 피아노가 저절로 눌리기 시작하며 연주를 시작했다.
“계속 느꼈는데, 넌 참 마법을 쓸데없는 곳에 쓰는 것 같아. 그러라고 아카데미에 보낸 게 아닌데.”
유리나의 투덜거림에도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른 것에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지. 전에 네게 주었던 호신 마법 도구보다 훨씬 좋지 않아?”
“누가 봐도 호신 마법 도구가 더 좋지 않아?”
“아니지.”
레이너드가 피아노 소리에 맞춰 천천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갑자기 몸이 기우뚱하는 느낌에 유리나는 그의 목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몸을 밀착시켰다.
“호신 마법 같은 건 안 쓰는 게 좋은 마법이잖아. 그러니까 그런 거 말고 이런 마법이 훨씬 좋은 거지.”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
“응, 궤변이긴 하지만.”
레이너드가 소리 내어 웃었다. 유리나는 그를 따라 웃었다.
한동안 작은 홀 안에는 느린 피아노 선율과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니?”
레이너드의 기사 서임식 당일. 거울 앞에 앉아 베시를 비롯한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치장을 하고 있던 유리나는 문 쪽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들어온 것인지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다가왔다. 유리나에게 붙어 있던 하녀들이 뒤로 물러났다.
후작 부인이 유리나의 뒤에 서서 거울에 비친 유리나의 모습을 살폈다.
“역시 젊은 게 좋구나. 조금만 꾸며도 피부에서 빛이 나네.”
제 나이보다 열 살은 족히 어려 보이는 그녀가 할 소리는 아니었다. 저주가 걸린 리본을 불태운 지도 어언 한 달 반. 이제 완벽히 건강을 회복한 후작 부인은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좋아 보였다.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저랑 나란히 서 있으면 어머니랑 저를 자매로 볼걸요. 저는 나중에 어머니처럼 나이 들고 싶어요.”
“얘는. 띄워 주는 것도 정도껏 해야 상대가 기쁘게 받아들인단다. 너무 과해도 못 써.”
“그렇지만 다들 그렇게 생각할걸요. 그렇지?”
유리나가 하녀들을 돌아보며 묻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말씀이 맞아요!”
“마님께서도 아직 충분히 젊어 보이세요!”
고용인의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아부라기보다는 진심이 반 이상 묻어 나오는 말이었다. 그 말이 마냥 싫지는 않은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린 후작 부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그것보다 뭐 좀 먹어야 하지 않니? 음식엔 손도 대지 않았구나. 예뻐 보이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굶는 것도 좋지 않아. 파티장에서 내내 서 있어야 하는데.”
후작 부인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간식으로 향했다. 치장하는 동안 간편하게 먹을 수 있게 비스킷 위에 훈제 연어나 햄, 치즈 등을 올려 만든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치장을 하기 전에 베시가 가져다준 것이지만, 유리나는 하나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나 후작 부인의 말처럼 몸매를 위해서 먹지 않은 건 아니었다.
“긴장을 해서 그런지 통 입맛이 없네요. 괜히 먹었다가 탈이 날 것 같아서 안 먹고 있었어요.”
“긴장을 많이 했나 보구나. 하긴, 엄마도 처음 사교계 데뷔하던 날 엄청 긴장했었어.”
“정말요?”
“그럼. 그때는 지금보다 허리를 더 조이는 것이 유행이었을 때라, 예쁘게 보이겠다고 코르셋을 잔뜩 조였는데 먹었던 것을 다 게워 내는 줄 알았단다. 음식을 먹지 말 걸 후회했어. 지금은 코르셋을 별로 조이지 않아서 괜찮겠지만, 긴장이 된다면 네 말처럼 안 먹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 같구나.”
유리나는 거울을 통해 후작 부인과 시선을 맞추며 웃어 보였다. 자연스럽게 웃는다고 한 거였는데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미소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유리나는 괜히 입꼬리를 만지작거렸다.
사실 유리나가 긴장하는 건 첫 데뷔 파티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주목을 받으며 선다는 건 분명 부담이 되는 일이었지만, 유리나는 의외로 사람들 앞에서도 떨지 않았다. 많은 사람 앞에서 발표를 할 때도 목소리 하나 떨지 않고 태연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불안해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데프론 후작.
지난 며칠간 유리나는 진지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 걸까.’
원작에서 ‘유리나 카르티아’는 열여덟 살에 사교계에 데뷔한 이후 리디아 데프론과 끊임없이 부딪치며 황태자비를 두고 겨루기까지 했다. 원작에서 유리나는 황태자의 옛 연인이었으니 황태자에게 마음이 있었을 테고, 황태자비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황태자가 유리나에게 계속해서 마음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는 리디아 데프론을 선택했다. 리디아를 물론 사랑하기도 했겠지만, ‘베아투스’인 ‘카리온’을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커티스는 날 통해서 레이를 만나려고 했으니까.’
그리고 유리나 카르티아는 황태자를 포기하지 못하다가 서브 남주인공인 ‘카리온’에게 최후를 맞이한다.
그 비극적인 결말을 피하기 위해 유리나는 레이너드를 찾아 제 편으로 만들고 황태자의 눈에 들지 않기 위해 그를 필사적으로 피했다.
그녀가 바꿔 버린 시나리오에서 걱정했던 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위의 등쌀에 밀려 황태자비 후보에 거론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 데프론 후작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카리온’이 없어도 데프론 후작은 카르티아 가문을 공격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유리나의 목숨을 위협할지도 몰랐다. 그에 대비하기 위해 레이너드에게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구해 달라는 거래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뜬금없이 레이너드는 조기 졸업을 하고 돌아왔고, 얼떨결에 유리나는 원작보다 1년 빠른 열일곱 살에 사교계 데뷔를 하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리디아가 사교계에 데뷔하기도 전에 레이너드와 연인 사이라는 것을 공표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황태자비 후보에서 완전히 멀어지게 되는 꼴이니 염려했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아야 옳았다. 황태자가 원하는 건 유리나가 아니라 레이너드였으니, 유리나가 황태자를 지지하면 그도 유리나에게 사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을 테다.
그러니 앞으로 우려했던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녀 앞에 펼쳐진 것은 희망찬 미래였다.
‘그런데도 왜 자꾸 불안한지 모르겠어.’
유리나는 손바닥으로 왼쪽 가슴 위를 꾹 눌렀다. 심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빠르게 뛰는 심장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기 위해 한 행동이었지만 먹힐 리가 없었다.
유리나가 별장에 가 있는 동안 카르티아 후작과 세 오빠들은 계속해서 데프론 가문을 주시했다. 그러나 여전히 데프론 후작가가 사냥 대회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고, 그 후로도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고 했다.
데프론 후작은 사냥 대회 이후로 영지로 돌아가 조용히 지냈다고 한다.
‘그냥 데프론 후작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런 건가.’
유리나는 예전에 보았던 그의 번뜩이는 금빛 눈동자를 떠올렸다가 몸을 떨었다.
어쩌면 그냥 그날 그를 보고 받은 충격이 워낙 커서 그 이후로 데프론 후작을 떠올리면 별다른 이유 없이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나저나 나이상으로는 아직 성년이 아닌데, 사교계에는 데뷔를 하게 됐으니 일이 애매하게 됐구나.”
상념에 잡혀 있던 유리나는 갑작스럽게 귓속을 파고드는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뭐가 애매한가요?”
“약혼은 보통 데뷔탕트를 치르고 난 뒤에 하잖니. 네 약혼 발표를 올해 해도 될지 아니면 내년 네 생일이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해야 할지 고민이야.”
그녀는 꼭 ‘오늘 날씨가 참 좋네.’라고 말하는 것처럼 가볍게 말했지만, 듣는 유리나는 가볍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불시에 허를 찔린 유리나의 두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네?”
“뭘 놀라고 그러니? 나도 네 아버지와 열아홉 살 때 약혼을 했는걸.”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장난기 담긴 얼굴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오늘 정식으로 얼굴을 보였으니 네게도 혼담이 들어오지 않겠니? 그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긴 한데…….”
그녀가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보였다.
“앞으로 파티에 자주 나가고 하면 너도 언젠가 사랑을 하게 될 테고, 사랑하는 사람과 더 많은 미래를 꿈꾸게 될 테지. 그러니 부모로서 미리 걱정하고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니?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렴. 엄마와 네 아버지는 정략결혼은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까, 네가 원할 때, 네가 원하는 사람과 혼담을 추진할 거야.”
“아, 그 소리였군요.”
레이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나. 뜨끈해진 볼을 꾹꾹 누르며 마음을 놓던 유리나는 곧이어 들려온 후작 부인의 말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뭐, 사랑하는 사람이 이미 있을 수도 있고.”
“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니.”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그녀를 보며 유리나는 후작 부인이 자신과 레이너드의 사이를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지만 그걸 언짢아하기보다는 의외로 반기는 느낌이라 그저 웃고 말았다.
“그러게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그렇지. 아, 준비를 해야 하는데 내가 너무 시간을 많이 끌었구나. 이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었는데.”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살짝 열린 문을 보며 손뼉을 쳤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그녀의 하녀 하나가 진한 보라색 상자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유리나의 앞에서 상자를 열어 보였다.
“어? 이건…….”
상자 안에 든 것은 카르티아 가문의 상징인 장미꽃이 붙어 있는 머리 장식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후작 부인이 중요하거나 의미 있는 파티를 갈 때마다 착용하던 머리 장식이기도 했다.
유리나는 머리 장식을 차마 집지는 못하고 손끝으로 장미 장식을 조심스럽게 쓸어 보았다.
“이걸…….”
제가 해도 돼요? 그 말이 목에서 걸려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동안 그녀에게서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가문의 상징을 받는 건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유리나가 머리 장식을 바라만 볼 뿐 꺼내지를 않자, 후작 부인이 직접 그것을 꺼내 유리나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꽂아 주었다.
후작 부인의 머리는 유리나와 같은 분홍빛이 도는 금발이었다. 그런 후작 부인에게 맞춰 제작한 머리 장식은 유리나에게도 잘 어울렸다.
“이제 다 됐다.”
거울을 보며 만족한 얼굴로 웃은 후작 부인이 유리나의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역시 젊은 게 좋다니까. 나보단 너한테 훨씬 잘 어울리네. 이렇게 보니 엄마 젊었을 때가 생각나네.”
“…….”
“마음에 드니?
유리나는 그녀의 입술이 닿은 뺨에 손을 갖다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는 장미 머리 장식을 하고 웃고 있는 거울 속의 제 얼굴을 보며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엄청 마음에 들어요.”
지난 7년 동안, 유리나는 후작 부인과 엄마와 딸로서 진지한 대화를 할 때마다 묵직한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씁쓸한 죄책감 대신 마음 한구석이 가벼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미 그녀에게서 많은 애정을 받기는 했지만 진짜로 친딸이라고 인정을 받은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야말로 이제야 후작 부인을 진정한 제 어머니로 인정한 것 같았다.
* * *
“으음, 꼭 유리나가 파트너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레이너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오르려던 유리나를 보며 에드윈이 못마땅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의 옆에서 저스틴 또한 에드윈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얼굴로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에게 양해를 구하고 두 남자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왜 그래? 이미 끝난 얘기잖아.”
“그렇기는 한데, 막상 둘이 붙어 있는 모습을 보니…….”
에드윈이 유리나의 뒤쪽에 서 있는 레이너드를 노려보다시피 보며 말을 흐리더니 팔꿈치로 저스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냥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단 말이지.”
“맞아, 내 말이 그 말이었어.”
“나쁘긴 뭐가 나빠. 지금 오빠들이 이러는 게 더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는 걸 알아 둬.”
유리나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젓자 에드윈과 저스틴이 도움을 청하는 것처럼 릭스를 바라보았다. 잠자코 서 있던 릭스가 유리나를 한 번, 레이너드를 한 번 보았다.
표정으로는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그였는데, 이상하게 유리나는 그가 쌍둥이 못지않게 언짢아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쌍둥이의 편을 들어주는 대신 유리나의 편을 들어주었다.
“첫 파티에, 그것도 주인공으로 참석하는 파티에서 파트너를 데려가지 않는 게 유리나가 레이너드의 파트너로 참가하는 것보다 더 구설수에 오를 일이라는 것을 너희도 잘 알지 않나. 레이너드는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누구보다 더 신경 써서 보살핀 아이잖아. 후원자보다는 가족 같은 존재지.”
“맞아.”
“게다가 레이너드의 실력과 베아투스에 관한 이야기가 알려지고 호의를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탐탁지 않게 보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 그런 사람들에게 레이너드의 뒤에 카르티아가 있다는 걸 보여 줘서 기를 죽여 놓는 것이 좋아. 그러려면 카르티아가의 사람이 파트너로 참가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어. 하지만 어머니가 하실 수는 없는 노릇이니 유리나가 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
“그렇기는 하지만…….”
쌍둥이가 릭스을 보며 웅얼거리다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도저히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 이제 이야기 다 끝난 거지? 릭스 오빠, 나 대신 설명해 줘서 고마워.”
그러나 릭스는 유리나를 보며 다정하게 웃어 주는 대신,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내미는 레이너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유리나는 애써 그의 표정을 모른 척하며 레이너드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카르티아가의 일원이 모두 참가하기 때문에 마차는 총 세 대가 움직였다. 카르티아 후작 내외가 같은 마차, 세 남자들이 같은 마차, 그리고 유리나와 레이너드가 같은 마차를 썼다.
황궁으로 가는 내내 유리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없이 후작 부인이 준 머리 장식을 더듬어 보거나 드레스를 만지작거렸다.
“왜 그렇게 긴장해?”
초조하게 두 손을 매만지던 유리나는 앞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말끔하게 뒤로 넘긴 레이너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날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유리나의 얼굴을 살피던 레이너드가 살포시 웃었다. 나지막한 그의 웃음소리가 마차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때까지도 불안하게 입술을 깨물던 유리나는 그를 따라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 하나에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게. 주인공은 넌데 왜 내가 긴장을 하고 있는 걸까.”
“큰 파티는 처음이라 긴장하는 거야? 긴장 같은 거 안 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레이너드가 손을 뻗어 차갑게 식은 유리나의 손을 꽉 잡아 제 입가로 가져갔다.
“손이 차가워.”
“긴장해서 그런가 봐.”
그가 따뜻한 입김을 불고 유리나의 손을 조물거리며 손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유리나는 가만히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느 정도 손이 따뜻해지자 그가 손끝에 입을 맞추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제 좀 낫다.”
“응, 그러게.”
힘없이 대꾸한 유리나는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위로 당황해하고 있을 레이너드의 얼굴이 그려졌지만, 지금은 태연히 그를 보며 웃을 자신이 없었다.
‘한심해.’
아침부터 그렇게 불안해했으면서 아직까지도 이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 내지 못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비웃는데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이 꽉 맞잡은 두 손을 조심스럽게 쥐는 느낌이 났다. 고개를 드니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레이너드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갈까?”
신기하게도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까 쿵쿵 뛰던 심장이 조금은 느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리나는 목이 졸렸다가 풀려난 사람처럼 숨을 한꺼번에 내뱉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주인공이 가면 어떡해.”
“말했잖아. 난 다른 것보다 네가 가장 중요해.”
고개만 끄떡이면 정말로 돌아갈 기세라 유리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난 괜찮으니까.”
“그럼 다행인데.”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그가 유리나의 손을 살살 주물렀다.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긴장하지 않아도 돼. 무슨 일 있으면 내가 다 처리할 테니까.”
그 말에 유리나는 왠지 안심이 됐다. 설령 데프론 후작이 자신에게 해코지하겠다고 덤벼도 레이너드가 다 막아 줄 것 같아서.
“든든해서 좋네.”
유리나는 제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등에 뺨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불안하게 요동치던 배 속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 * *
주인공은 원래 늦게 나타나는 법이다.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관심을 집중해서 받을 수 있도록 시간을 계산해서 어느 정도 파티가 무르익었을 때 파티장에 도착했다.
“카르티아 영애와 레이너드 경께서 입장하십니다!”
아직 정식으로 귀족 작위를 받지도 않았는데 레이너드를 지칭하는 호칭이 ‘경’이었다. 그 호칭 하나에서 황제가 그를 얼마나 관심 있게 보는지 알 수 있었다.
시종이 소리 확대 마법을 통해 외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시끄러웠던 홀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유리나는 홀을 둘러보았다가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놀라거나 긴장할 법도 한데 레이너드는 태어날 때부터 많은 이의 관심을 받은 사람처럼 긴장한 기색 하나 없이 태연했다. 낯선 사람이 다가올 때마다 날카롭게 벽을 세우던 톰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유리나는 새삼 그게 대견했다.
‘많이 힘들었을 텐데.’
유리나를 만나서 삶이 이전에 비해 많이 윤택해졌다고 해도, 카르티아 저택에서 적응하는 것이 절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카데미 입학을 위해 그 짧은 시간에 예법과 다양한 지식을 배우면서도 그는 크게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유리나가 칭찬의 의미로 손을 꽉 쥐자 레이너드가 대답하듯 그녀의 손등을 살살 문질렀다.
“그럼 갈까?”
“응.”
카르티아 후작 내외와 유리나의 세 오빠들은 친분이 있는 이들을 만나기 위해 홀 안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유리나 또한 그간 생일 파티나 티 파티에서 안면을 익힌 영애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제국에서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레이너드는 그런 유리나의 옆을 졸졸 따라다녔다.
“어머, 오늘 파티에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정말 여기서 볼 줄이야.”
예의상 미소를 짓고 있던 유리나는 오랜만에 듣는 친구의 목소리에 환하게 웃었다.
“클로이!”
검은 머리에 진한 파란색 눈을 가진 클로이 데오노라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유리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소식 들었어. 지난 사냥 대회 때 큰일 날 뻔했다며! 한번 찾아가려고 했는데 소식을 듣고 수도에 올라오니까 영지에 갔다고 하더라. 몸은 좀 어때? 괜찮은 거야?”
“내가 안 괜찮을 일이 뭐가 있겠어? 다치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충격은 받았을 거 아냐. 그래도 괜찮아 보이니 다행이다. 오늘 참석하는 건 왜 말 안 해 줬어?”
“미안해. 영지에 있다가 수도에 올라와서 급하게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첫 파티라 준비할 게 많았거든.”
클로이가 호탕하게 웃으며 유리나의 어깨를 툭 쳤다. 유리나는 클로이의 이렇게 가식 없고 유쾌한 모습을 좋아했다.
“미안하면 옆에 계신 분 좀 소개해 주지 않을래?”
“아, 맞아. 인사해, 레이. 이쪽은 내 오랜 친구인 클로이 데오노라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데오노라 영애.”
레이너드가 흠잡을 곳 없이 반듯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그는 데오노라가 내민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겉보기엔 손등에 맞춘 것 같지만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제 엄지 위에 입을 맞춘 것이다.
손등에 입맞춤을 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친분이 두텁지 않은 사이에서 종종 이런 인사를 하고는 했다. 그게 조금 아쉬웠는지 클로이가 살짝 혀를 찼다. 솔직함 하나는 최고인 아이다.
그러나 정작 유리나는 시늉마저도 못마땅했다.
‘못마땅하다니.’
제가 생각하고도 우스웠다. 그저 예법일 뿐이고, 상대는 가장 친한 친구인 클로이 데오노라인데. 레이너드가 그녀의 손등에 직접 입을 맞췄다면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
클로이는 그간 못했던 이야기를 하다 다른 친구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떴다. 그 후로 유리나를 아는 사람은 물론이고, 레이너드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벌써부터 지친 것 같은 기분에 유리나는 레이너드를 이끌고 인적이 드문 구석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살짝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기 위해 손부채를 부치고 있자 레이너드가 말했다.
“마실 것 좀 갖다줄게.”
“아냐, 괜찮아.”
“금방 다녀올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옆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준 뒤 몸을 돌렸다.
“카르티아 영애?”
레이너드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유리나는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오늘 여기서 영애를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말을 건 사람은 평범한 갈색 머리에 파란 눈을 한 남자였다.
나이는 유리나의 또래로 보였고, 키는 레이너드보다 살짝 작았다. 기사보다는 학자 쪽이었는지 레이너드에 비교하면 살짝 체격이 작았다. 목소리는 레이너드보다 낮은 저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유리나는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뭐든지 레이에게 비교하네.’
생각해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남자들을 볼 때마다 늘 레이너드와 비교를 하기 시작했다. 아마 크론 왕국에서 성인이 된 그를 보고 온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도 레이너드는 그녀의 마음속에 친구가 아니라 남자로 자리 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애?”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유리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허리를 숙이며 귀족의 예법으로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레이너드가 다른 사람에게 그랬던 것과 달리 입술이 직접 손등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오랜만에 보니 많이 달라지셔서 몰라볼 뻔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자세히 보니 어릴 적 얼굴이 보이는군요.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남자의 선한 눈매가 꼭 아이처럼 해맑게 휘어졌다. 레이너드처럼 누가 봐도 미남인 얼굴은 아니었지만, 웃는 모습이 꽤 귀엽고 매력 있게 생긴 얼굴이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친근한 말에 유리나는 새삼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분명 만난 기억이 없는 남자인데 이상하게 저 웃는 눈매가 마냥 낯설지는 않았다.
‘어디서 봤지?’
속 시원히 물어보고 싶은데 귀족의 예법이란 건 참 골치 아파서, 이런 질문을 직접적으로 하는 것도 큰 실례가 된다.
보통 이럴 때는 대충 기억하는 척 맞장구를 치며 능숙하게 넘어가야 하는데, 기억을 되짚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유리나는 바로 대꾸하지 못했다.
유리나의 침묵이 다소 길어지자 남자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마 최근에는 뵌 적이 없어서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킨셀라 가문의 루퍼트입니다.”
“아…….”
그제야 기억났다. 얼굴은 기억 못해도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다. 루퍼트 킨셀라. 킨셀라 백작의 차남이었다. 어릴 적 유리나는 그와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루퍼트 킨셀라라고?’
유리나는 새삼 남자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남자가 누군지 알고 보니까 확실히 예전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유리나는 부채를 펼쳐 입매를 가리며 눈으로 웃어 보였다.
“예전과 많이 달라지셔서 바로 못 알아봤네요. 아카데미에 입학하셨다고 들었는데 졸업을 하셨나 봐요.”
“네, 이번 겨울에 졸업했습니다. 그동안 영애를 다시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아직 정식 데뷔를 하지 않으셔서 오늘 파티에 참석하실 거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는데 예상치도 못한 선물을 받은 느낌입니다.”
남자의 목소리에서는 호감이 뚝뚝 묻어 나왔다. 딱히 감정을 숨길 생각도 없는지 내내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도 호감이 담겨 있었다.
‘아직도 날 좋아하나?’
유리나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열 살 생일 때였다.
유리나에겐 그때가 첫 만남이었지만, 사실 두 사람은 그 전에도 이미 교류가 있었다. 킨셀라 백작이 카르티아 후작의 친한 벗인 데다가 가문끼리 교류도 활발했기 때문이다. 루퍼트의 형 또한 릭스 카르티아와 친했다.
킨셀라 백작 내외와 함께 유리나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루퍼트는 유리나를 보자마자 굉장히 수줍어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걸 보는 순간 유리나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얘, 유리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진짜 열 살의 유리나라면 눈치를 못 챘을 수도 있으나 그 속에 들어 있는 건 스물두 살 윤세나였다. 코흘리개 아이의 속마음을 읽는 것은 쉬웠다.
그걸 킨셀라 백작 내외도 이미 알고 있었는지, 그들은 수줍어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루퍼트를 은근슬쩍 유리나에게 밀었다. 아이들끼리 재밌게 놀라는 말과 함께.
유리나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대충 장단을 맞춰 줄 요량으로 루퍼트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제 선택을 후회하고 말았다.
유리나보다 한 살 많던 그는 정말로 아이 같았다. 열한 살이면 아이긴 아이지만, 그는 좋아하는 여자애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할 정도로 순진한 아이였다. 유리나가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장단을 맞춰 주려고 해도 그녀가 무슨 말만 하면 시선을 피하며 부끄러워하니 좀처럼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루퍼트와 비교해 보면 레이는 상대하는 재미가 있었지.’
당시 유리나의 눈에는 열한 살 루퍼트나 열두 살 레이너드나 똑같이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어린애였지만, 그래도 레이너드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바락바락 반응하는 게 재밌어서 그런지 대화하는 게 즐거웠다.
그러나 루퍼트는 아니었다. 그래서 유리나는 루퍼트가 저택에 찾아올 것 같은 날에는 온갖 핑계를 대며 방에 처박혀 있었다.
그 후 루퍼트가 아카데미에 입학을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방학 때마다 저택으로 돌아왔으니 자연스럽게 유리나는 그를 만날 일이 없었다.
‘그때는 진짜 싫었는데.’
이제는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겨서인지, 아니면 눈앞에 있는 게 꼬맹이가 아니라 어엿한 성인이라 그런지 루퍼트에게 예전처럼 거부감이 생기지는 않았다.
“5년 만에 뵙는 건가요?”
“네, 아마도 그쯤 된 것 같습니다.”
“킨셀라 백작님을 따라 정치학 쪽을 공부하시고 온 건가요?”
“맞습니다.”
그러나 유리나의 생각은 그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바뀌고 말았다.
‘그때와 똑같아.’
부끄러워서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예전에 비하면 루퍼트는 훨씬 자연스럽게 유리나를 쳐다보고 말도 능숙하게 이어 갔다. 그러나 계속해서 관심사나 이야기의 주제가 미묘하게 엇나갔다.
별것 아닌 사소한 것이었는데도 유리나는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레이너드와 있을 땐 한 번도 느끼지 못한 불편함이다.
마음 같아서는 적당히 이야기를 끊고 가고 싶었는데, 루퍼트는 오랜만에 만난 유리나가 반가웠는지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레이는 왜 안 오지?’
레이너드가 걸어갔던 방향을 흘끔 보았던 유리나는 잔을 들고 걸어오는 그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아, 파트너가 저기 오네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유리나는 그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후 레이너드에게로 향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술이 안 들어간 걸 찾느라. 생각보다 많이 없더라.”
유리나는 그가 넘겨준 초록색 칵테일로 목을 축였다. 달달한 멜론 향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유리나가 다시 한번 칵테일을 홀짝이자 레이너드가 만족한 듯이 웃었다.
“맛있어?”
“응. 달달해서 마음에 들어.”
“다행이네. 그나저나 누구랑 대화하고 있었어?”
유리나에게 유리잔을 건네준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뒤쪽에서 여전히 그녀를 보고 있는 루퍼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루퍼트 킨셀라. 아마 넌 모를 거야.”
“루퍼트?”
“왠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이름인데.”
“아, 맞아.”
유리나가 탄성을 내뱉자 레이너드가 재촉하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 놓았다.
“예전에 저택에 온 적이 있었어. 네가 아카데미로 가기 전에. 한 번 봤었지?”
유리나는 그때 일을 생각하며 그를 놀리듯 웃었다.
“네가 살금살금 몰래 왔었잖아.”
레이너드를 데려오고 시간이 지났을 때, 루퍼트가 카르티아 저택에 한 번 찾아왔었다. 킨셀라 백작이 카르티아 후작을 만나러 오며 데려왔던 것인데, 유리나는 백작이 루퍼트와 자신을 만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택까지 찾아왔는데 아예 안 만날 수는 없어서 레이너드를 공부방에 놔두고 잠깐 루퍼트를 만나러 갔었다. 그때 레이너드는 어느 정도 저택에 적응해서 사람들을 멀리하거나 유리나가 없어도 불안해하지는 않았는데, 그때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유리나와 루퍼트가 있던 응접실에 찾아왔다.
글씨 연습을 하다가 모르는 게 생겨서 물어보려고 왔다고 했는데 유리나는 불안하게 눈동자를 또르륵 굴리는 그의 모습에서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아, 그 킨셀라.”
레이너드가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유리나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도 마음에 안 들었어.”
그는 유리나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넣으며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어쩔 수 없나.’
레이너드는 주위에서 유리나를 쳐다보는 남자들을 바라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몇몇은 그와 눈이 마주치고는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지만, 몇몇은 그의 소리 없는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리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유리나의 손을 꽉 잡고 있는 그를 보며 비웃음을 짓는 이도 있었다.
네가 카르티아가의 후원을 받으니 오늘은 유리나의 파트너로 올 수 있었겠지만, 평민 출신 마법사인 네가 그녀를 정말로 가질 수 있겠냐는 속마음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능력을 인정받아 기사의 작위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들과 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너희가 그래 봤자 지금 유리나의 곁에 있는 건 나야.’
레이너드가 그런 마음을 담아 한쪽 입꼬리를 올려 보이자 비웃음을 짓던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세울 거라고는 귀족으로 태어난 것밖에 없는 주제에 자존심 하나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다니.
레이너드는 이번에야말로 진심을 다해 그를 비웃었다. 그는 원래 귀족이라는 지위 하나로 남들을 누르려는 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레이.”
유리나의 다정한 목소리에 레이너드는 얼굴을 풀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응?”
“신경 쓰지 마. 저들은 네가 신경을 쓸 가치도 없는 이들이야.”
티를 내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떻게 눈치챈 걸까. 분명 조금 전까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레이너드는 꼭 제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제 생각을 읽은 유리나가 신기했다.
동시에 그만큼 그녀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요동쳤다.
“신경 안 써.”
“이젠 카르티아가가 없어도 넌 누구의 무시를 받을 위치가 전혀 아니야. 그러니까 상처받지 마.”
“안 받아. 내가 애도 아니고.”
“그럼 다행이고.”
유리나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언제 보아도 사랑스럽게 예쁜 미소였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우니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도 당연했다.
‘혼자만 보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겠지.’
레이너드는 왠지 갈증이 나는 것 같아 마른 입술을 혀로 쓸었다.
유리나가 다른 남자와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서 마음이 변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른 남자들이 그녀에게 마음을 두는 건 싫었다.
그러나 이런 제 음험한 마음 때문에 유리나를 다그치거나 그녀의 행동을 제약하는 건 싫었다. 유리나는 자유롭게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가 가장 그녀답고 아름다웠다.
그러니 다른 남자들이 못된 마음을 먹고 다가오지 않도록 자신이 더 열심히 쳐 내는 수밖에.
* * *
홀 여기저기로 흩어졌던 유리나의 세 오빠들이 그녀를 찾아 돌아왔다.
“아카데미 친구들하고 얘기 많이 나눴어?”
“뭐, 그럭저럭.”
“그럭저럭이라고 하기엔 즐거워 보이는걸.”
에드윈을 보며 키득거리던 유리나는 문득 저 멀리서 보이는 백금발의 소녀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홀에 들어온 순간부터 줄곧 귀족적인 미소를 짓던 그녀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유리나, 왜 그래?”
그녀의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채고 레이너드가 귓가에 속삭였지만 유리나는 그의 말을 들을 정신이 없었다. 그녀의 신경은 오로지 저 멀리 있는 백금발의 소녀에게 향해 있었다.
‘리디아…… 데프론?’
유리나가 소설의 여주인공 리디아의 얼굴을 본 것은 어릴 적에 딱 한 번뿐이었다. 그나마도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 본 것이 아니라 마차 안에 있는 모습을 멀찍이서 본 거라 얼굴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제국에서 백금발이 흔치 않다는 것을, 그것도 황실이 주최하는 파티에 초대될 만한 귀족 중 백금발 소녀가 드물다는 것을 떠올리면 리디아일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그녀의 근처에는 붉은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데프론 후작이었다.
‘근데 왜 여기에 있지?’
리디아는 유리나와 동갑으로 열일곱 살이었다. 나이상으로도 그렇고, 원작의 내용상으로도 그렇고 그녀는 아직 사교계에 정식 데뷔를 할 때가 아니었다. 유리나야 레이너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열일곱의 나이로 1년 일찍 데뷔를 한다 치지만, 리디아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유리나는 멀리 보이는 리디아의 옆얼굴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불현듯 리디아가 유리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과 시선이 맞부딪혔다. 유리나를 발견한 리디아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리디아가 처진 눈매를 곱게 휘며 활짝 웃었다. 아이처럼 티 없이 해맑은 미소였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보고 있나?’
리디아의 반응이 영 이상하여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녀의 주위엔 레이너드와 세 오빠들뿐이었다. 그 어디에도 리디아가 반가워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유리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리디아를 보았다. 그때까지도 유리나를 응시하고 있던 리디아가 또다시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어 입술만으로는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영앤데, 아는 사람이야?”
유리나의 등 뒤에서 에드윈이 물었다.
“아니. 처음 보는 사람이야.”
“그래? 널 엄청 반가워하는 것 같길래 친구인 줄 알았어.”
유리나는 리디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에드윈에게 물었다.
“날 보고 반가워하는 거 맞지?”
“그런 것 같은데. 설마 나나 저스틴을 보고 반가워하지는 않을 거 아냐.”
에드윈의 대답으로써 확실해졌다.
‘대체 왜?’
유리나가 리디아와 마주친 건 7년 전 딱 한 번뿐이었다. 그나마도 유리나는 데프론 후작과 대화 중이었고, 리디아는 조금 떨어져 있던 마차에서 그녀를 흘끔거렸을 뿐이다.
그나마 유리나는 그때에도 데프론 가문과 리디아를 신경 쓰고 있었으니 그 짧은 만남에도 그녀를 기억하는 거지, 리디아가 그녀를 기억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카르티아가와 데프론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리디아가 유리나에게 적대를 가지면 가졌지, 호의를 가질 일은 없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잠깐만, 뭐야. 저기 데프론 후작 아니야?”
뒤늦게 데프론 후작을 발견한 것인지 저스틴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을 가늘게 뜨며 저스틴이 보는 곳을 본 에드윈이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러네. 그럼 유리나를 아는 척을 한 사람이 리디아 데프론이야?”
“그런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유리나를 저렇게 반가워해?”
저스틴의 물음에 에드윈이 코웃음을 쳤다.
“사람을 착각했나 보지. 리디아 데프론이 친분도 없는 유리나에게 반가운 척을 할 리가 없지.”
그때, 리디아가 유리나에게 다가오려는 듯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몇 걸음 채 걷지 못하고 다른 영애가 말을 거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말았다.
안면이 있는 사이였는지 리디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영애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유리나에게서 관심을 거둔 듯했다.
그 모습을 죄다 보던 저스틴이 혀를 찼다.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을 수도 있지. 유리나, 가급적이면 데프론가와 엮이지 마.”
“저스틴 말이 맞아. 유리나, 리디아 데프론이 친한 척을 하더라도 적당히 맞장구나 쳐 주고 적당히 거리를 둬.”
“왜?”
두 오빠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유리나는 부러 물었다. 데프론 가문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였다.
“사냥 대회 일 때문에 그래? 그렇지만 데프론가와 아무 상관도 없다며. 그리고 데프론 영애는 웃는 모습을 보니까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데. 원래 웃는 인상이 좋은 사람들 중에 나쁜 사람들은 없잖아. 일단 대화를 해 보고 친해질지 거리를 둘지 정해도 되지 않아?”
“이렇게 순진해서 험난한 사교계에서 어떻게 버티려고 해? 인상만으로 사람을 평가했다가 큰일 당하는 수가 있어. 더구나 너는 카르티아가의 유일한 여자잖아. 널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앞으로 많이 접근할 텐데, 웃으면서 다정하게 대한다고 무작정 마음을 주면 안 돼.”
에드윈이 한탄하듯 중얼거리며 유리나의 양 볼을 꾹 눌렀다.
“역시 아버지께 조금 더 강하게 말씀드려서 내년에 데뷔시키는 거였는데.”
그 옆에서는 저스틴이 작게 중얼거렸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유리나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유리나는 화장이 번진다며 그의 손을 툭 쳐 냈다.
“열일곱 살이나, 열여덟 살이나 뭔 차이가 있다고 그래. 그래도 오빠들의 충고는 잘 새겨들을게. 그건 그렇고 왜 데프론 영애와 친해지면 안 되는 거야? 데프론 영애도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했잖아. 딱히 성격이나 행실이 좋지 않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는걸.”
“데프론 영애에겐 별다른 유감은 없어. 그런데 데프론이잖아.”
“그게 왜?”
“우리 가문과 데프론가가 사이가 별로 안 좋은 거 알고 있지?”
“응, 그건 알고 있어. 그런데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은 거야?”
“그냥 오래전부터 사사건건 부딪쳐 왔으니까 그렇지. 우리 가문은 대대로 검을 잡았고, 데프론가는 마법사를 키웠잖아. 지금이야 사이가 조금 좋아졌다고 하지만 원래 기사랑 마법사랑 사이가 많이 안 좋았잖아.”
그건 그랬다. 아예 분야가 다르니 특별히 사이가 안 좋을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기사와 마법사는 오래전부터 서로 으르렁거렸다. 마법사는 기사를 ‘머릿속에 든 것 없이 무식하게 검만 휘두를 줄 안다’고 이죽거렸고, 기사는 마법사를 보며 ‘주먹 한 방이면 나가떨어지는 약골’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유리나가 보기엔 현재 두 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은 건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설마 그게 다야?”
“그건 아니고…….”
에드윈이 릭스의 눈치를 보며 뜸을 들였다. 말해 줘도 될지 고민하는 기색이라 유리나는 재빨리 그의 팔을 흔들었다.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거야?”
“데프론 후작의 동태가 수상해.”
대답을 해 준 건 지금껏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릭스였다.
“수상하다니?”
유리나는 릭스가 자신이 느낀 것을 똑같이 느낀 건 줄 알았다. 데프론 후작에게서 강한 적의를 느꼈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정작 그는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데프론 후작이 2황자 전하와 접촉을 했다는 것 같아.”
“2황자라고?”
“그래. 아버지가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 만약 정말로 데프론 후작이 2황자 전하를 지지한다면 앞으로 힘들어질지도 몰라.”
“그렇구나.”
유리나는 작게 웅얼거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카리온이 아니라 2황자라고?’
이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전개였다. 아직까지 리디아와 커티스 간에 접점이 없어서 그녀를 황태자비로 만들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도 제2황자는 뜬금없었다.
단순히 카르티아가와 다른 노선을 가기 위해서인 걸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걸까.
유리나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가정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도회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유리나는 꽉 쥔 주먹을 펴며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제로 보이는 검은 머리의 중년 남자가 지팡이를 짚고 걸어왔다. 보석으로 한껏 장식을 한 지팡이는 본래의 용도보다는 과시용인 것처럼 보였다.
그 옆에는 요즘 유행에 맞게 치맛자락을 탐스러운 꽃잎처럼 부풀린 진한 에메랄드빛 드레스를 입은 중년 여인이 황제의 팔에 손을 얹은 채로 같이 걸어왔다.
그의 뒤로는 정복을 차려입은 커티스 제노시안와 제2 황자로 추정되는 적갈색 머리의 청년과 밝은 금발의 소녀가 따라 들어왔다.
황제를 비롯한 황실 사람들이 단상 위에 놓인 의자에 자리 잡고 앉자 홀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예법에 맞춰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다들 일어나거라.”
황제의 목소리는 따로 목소리 증폭 마법을 쓰지 않아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범접할 수 없는 중후함과 위압감이 있었다. 황태자인 커티스에게도 나이답지 않은 위엄이 있었는데, 확실히 황제는 또 다른 모양이었다.
유리나는 고작 그 한마디에 몸이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허리를 폈다. 옆을 살펴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태평해 보였던 레이너드가 다소 긴장을 했는지 입가가 굳어 있는 것이 보였다.
손을 뻗어 손을 잡아 주자 그가 그녀를 돌아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긴장하지 마.”
“긴장 안 해.”
“내가 여기서 응원해 줄게.”
“그럼 더더욱 긴장할 일이 없겠네.”
레이너드가 웃으며 유리나의 손을 꽉 쥐던 순간이었다.
“레이너드 경은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목소리 증폭 마법을 쓴 시종의 목소리가 홀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럼 다녀올게.”
언제 긴장을 했냐는 듯, 그는 태연한 얼굴로 단상으로 다가갔다. 뒤늦게 그의 눈동자를 발견한 사람들이 저마다 소곤대기 시작했다.
“정말 눈이 붉네요. 소문으로 들을 땐 긴가민가했는데.”
“지금 당장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도 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다던데 사실인가요?”
“크론 왕립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 하고 돌아왔다잖아요. 듣자 하니 지난 사냥 대회 때 일어났던 사건의 배후도 찾아냈다고 하더군요. 황실 마법사들도 찾아내지 못하고 애를 먹었다던데 대단한 실력이지 않나요?”
“흑마법이라고 그랬죠? 그런데 어떻게 흑마법을 알아본 걸까요?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소리가 정말일까요?”
호의적인 사람이 있으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카르티아가와 친분이 없는 사람들 쪽에서는 벌써부터 레이너드의 능력을 폄하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근데 정말 저 붉은 눈이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상징이 맞나요? 아무리 봐도 불길해 보이는데. 오히려 흑마법사의 표식이라고 하는 게 더 말이 될 것 같아요.”
“맞아요. 내로라하는 마법사도 못 찾아냈는데 혼자만 알아낸 것도 이상해요. 혹시 카르티아가에서 꾸며 낸 일은 아닐까요?”
“쉿. 말조심해요. 아무리 그래도 카르티아가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요.”
유리나는 그 모든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점점 멀어지는 레이너드의 뒷모습을 살폈다.
‘모두가 호의적이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어.’
뛰어난 이를 경외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만큼 시기하는 사람도 나타나는 법이다. 그래도 숫자로 따진다면 그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많을 테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무심코 던진 말들에 레이너드가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조금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상에 올라선 레이너드는 황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시종이 건넨 화려한 장식용 검을 집어 그의 어깨에 갖다 댔다.
“그대는 제국과 황실에 충성을 맹세할 수 있는가?”
황제의 목소리는 다시 들어도 가슴을 찌르르 울릴 정도로 무게감과 힘이 있었다.
“맹세하겠습니다.”
“나, 요한 알렉산드로 제노시안은 그대의 능력과 제국과 황실에 세운 공로를 인정하여 그대에게 기사의 작위를 내리노라.”
황제가 선언과 함께 들고 있던 장식용 검을 레이너드에게 내밀었다. 레이너드가 두 손으로 공손히 그 검을 받자 홀 이곳저곳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둘러보며 한 번 웃어 보인 뒤 시종에게 검을 맡기고 유리나를 향해 다가왔다. 이제 본격적인 파티의 시작이었다.
“카르티아 영애.”
유리나의 코앞까지 다가온 레이너드가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오늘도 영애와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손을 내밀며 다정하게 말을 건넨 레이너드는 유리나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재빨리 덧붙였다.
“오늘은 진짜로 발 안 밟도록 노력할게.”
유리나는 결연함까지 깃든 그의 얼굴을 보며 그의 손을 잡았다.
“믿어 볼게.”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손을 이끌고 홀 중앙으로 걸어갔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각자 파트너의 손을 잡고 나오며 두 사람을 흘끔거렸다. 유리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며 스탠딩 자세를 취했다.
바이올린 선율을 시작으로 저택에서 레이너드가 마법으로 연주한 피아노 소리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풍부한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연습을 많이 한 덕분인지 레이너드는 며칠 전보다 더 부드럽게 유리나를 리드해 나가기 시작했다.
유리나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치맛자락이 레이너드의 다리를 감싸 안고, 시선과 시선이 계속해서 맞닿았다. 분명 사람들이 많은 곳인데 유리나는 꼭 그와 단둘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곡이 끝났다.
“봐, 안 밟았지?”
레이너드가 방금 막 춤을 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게 물었다. 그와 달리 유리나는 가쁘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네.”
그녀가 그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려고 하던 참이었다.
“유리나.”
레이너드가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도리어 몸을 밀착시켰다.
“한 곡 더 추자.”
“갑자기 왜?”
유리나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며칠 전 유리나와 특훈에 가까운 춤 연습을 한 후로 레이너드는 오늘 딱 한 곡만 추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나야 별 상관은 없지만…….’
왜 그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는지는 궁금했다.
“지금 내려가면 다른 남자들이 네게 춤 신청을 할 것 같거든.”
레이너드가 주위를 둘러보며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싫네, 어쩌네 하더니만 진짜로 다른 남자들을 신경 쓰고 있던 모양이다.
유리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춤 좀 추면 어때서 그래? 예전에 배웠잖아. 춤은 그저 사교 활동의 하나야. 원래 연인끼리 파티에 와도 다들 다른 사람과 춤을 춰. 그리고 오빠들하고도 춰야 하는데.”
“그래도 안 되겠어. 네가 다른 남자들이랑 손잡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끔찍해.”
유리나는 낮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역으로 다른 영애와 춤을 추는 레이너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음, 확실히 좋지는 않네.’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웃겼지만, 그가 다른 여자의 옆구리에 손을 얹고 친밀하게 바짝 달라붙은 모습을 상상하니 짜증이 날 것 같았다. 그가 상대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다는 걸 알아도 마찬가지였다.
‘남 말 할 처지가 아니네.’
자신이 존재하지도 않는 누군가를 이렇게 질투할 수 있을지 예전에는 몰랐다.
“게다가 황태자 전하도 널 보고 있는 것 같고.”
레이너드가 이번에는 왼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던 유리나는 단상 위에 앉아 있던 커티스와 딱 눈이 마주쳤다. 진짜로 커티스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유리나와 눈이 마주친 커티스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본 레이너드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걱정 마. 춤 신청을 하더라도 다 거절할게. 그럼 됐지?”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대답을 하기 전에 농담처럼 재빨리 덧붙였다.
“아, 그런데 황태자 전하가 춤 신청을 하면 거절하기 조금 난감할 수는 있겠네.”
유리나를 따라 커티스의 동태를 살핀 레이너드가 한쪽 입꼬리를 비쭉 들어 올렸다.
“그럴 땐 어떻게 하면 되는 줄 알아?”
“어떻게 하면 되는데?”
때마침 바이올린 선율이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 살짝 빠른 춤곡이었다.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허리에 손을 얹으며 자연스럽게 스탠딩 자세를 취했다.
“춤 신청을 할 틈이 없도록 나랑 계속 춤을 추면 돼. 아예 황태자 전하가 갈 때까지 추자.”
“그것도 궤변인 거 알아?”
유리나는 헛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착실히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좋아, 네 말대로 계속 추자.”
“응.”
만족스럽게 웃은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천천히 리드해 나가기 시작했다.
* * *
세 곡을 연속으로 추고 댄스 플로어를 벗어났을 때였다. 한 여성이 레이너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걸어 나오는 유리나를 향해 다가왔다. 유리나는 그 여성의 얼굴을 보고 살짝 얼굴을 굳혔다.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가워요. 카르티아 영애 맞으시죠? 그 옆에 계신 분은 이번에 기사 작위를 받으신 레이너드 경이고요. 소문 많이 들었어요.”
소설에서 백합으로 묘사되었던 선한 여주인공답게 리디아는 악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다정한 얼굴로 웃었다. 아까 멀리서 보았던 그녀의 친근함이 착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까와 달리 유리나는 그런 리디아의 태도보다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레이너드의 이름이 더 신경 쓰였다.
‘레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거야?’
어렸을 때,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리디아를 만나는 것을 극도로 꺼려 했다. 원작의 당위성대로 레이너드가 여주인공인 리디아에게 첫눈에 반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원작은 완전히 바뀌었다. 레이너드는 제 목숨보다 유리나를 더 소중히 여길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리디아를 본다고 해서 그 마음이 한순간에 바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유리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레이너드의 앞을 막아섰다. 그를 못 믿는 것이 아니라 리디아와 데프론가를 믿지 못하는 것이었다.
‘레이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유리나는 7년 전, 레이너드의 열세 번째 생일날 보았던 데프론 후작을 아직도 기억했다.
그는 카르티아 가문을 향한 적대감을 보이면서도 레이너드를 향한 욕심을 드러냈다. 다른 가문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데려가려고 할 정도로.
솔직히 유리나는 데프론 후작이 그 후에도 레이너드에게 접근을 할 줄 알았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그를 데려가려고 수를 쓰거나, 연락을 하는 일 따위는 없었지만.
레이너드의 단호한 거절에 아직도 데프론가에서 그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리디아가 나에게 친한 척을 하는 것도 레이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걸지도 몰라.’
그러나 그런 유리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레이너드는 리디아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유리나의 옆으로 오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유리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 자상한 모습에 유리나는 긴장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러고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리디아를 바라보았다. 의외였던 것은 리디아 또한 레이너드 말고 줄곧 유리나를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 죄송해요. 제가 제 소개도 안 하고 너무 갑작스럽게 인사를 드렸죠? 내년이나 돼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만나 뵙게 돼서 기뻐서 그랬나 봐요. 저는 데프론가의 리디아라고 해요.”
리디아가 예를 갖춰 무릎을 굽혔다 폈다.
나긋나긋한 그녀의 목소리만 들으면 꼭 그녀는 오랜 벗을 만난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 호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유리나는 무릎을 굽혔다 펴면서도 리디아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다.
‘레이가 목적이 아니라면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데프론 후작은 카르티아가에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 남자 밑에서 자랐다면 리디아 또한 카르티아 가문과 유리나에게 적의를 갖고 있어야 옳았다.
아버지의 생각을 딸이 그대로 가질 필요는 없으니 적의를 갖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만난 적도 없는 그녀에게 이렇게 호감을 품을 리가 없었다.
‘무슨 생각이야?’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데프론 후작이 리디아에게 자신과 친해지게 시켜 카르티아 가문에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는 정보를 캐 오라고 한 걸까?
그러나 눈앞의 리디아는 그런 의심을 한 것이 미안할 정도로 해맑았다. 꼭 팬이 오랫동안 좋아하는 연예인을 실제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흥분해서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보고 있으니 죄책감마저 들었다.
리디아가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정말로 유리나를 흑심 없이 반가워하거나.
‘아니면 이런 표정도 꾸며 낼 수 있을 정도로 연기에 능숙하거나.’
유리나는 일단 후자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며 리디아를 따라 웃었다.
“저도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저도 오늘 파티에서 영애를 뵐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답니다.”
“모든 준비는 영지에서 하고 수도엔 며칠 전에 올라와서 아마 제가 왔다는 소문이 퍼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나저나, 영애. 저희가 초면이 아니라는 거 아시나요?”
모를 리가 없다. 어떻게 기억하지 못할까. 데프론 후작과 만난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만큼 유리나는 그날 보았던 리디아의 모습도 기억했다. 레이너드를 그녀에게 보이면 안 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다만 리디아가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 의외였다.
‘역시 데프론 후작이 무슨 말을 한 건가.’
유리나가 속으로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리디아가 유리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사실 그날 영애와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아버지께서 나오지 못하게 하시는 바람에 인사를 하지 못했답니다.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요. 그날부터 줄곧 영애를 만날 날을 고대해 왔는데 그간 기회가 없었네요. 제가 수도에 있었다면 티 파티나 영애의 생일 파티 때 만나 뵐 수 있었을 텐데.”
아니, 리디아가 수도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럴 일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유리나가 그녀를 초대하지 않았을 테니까. 원작의 유리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카르티아가와 데프론가의 사이가 물과 기름처럼 좋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리디아는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건가.’
저쪽에서 자신을 이용할 생각이라면 이쪽에서도 상대를 이용하면 된다. 유리나는 제 손을 잡은 리디아의 손을 꽉 쥐었다.
“안 그래도 그날 데프론 후작님께서도 영애께서 저와 또래니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셨답니다. 그래서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아쉬웠어요. 대체 왜 영지에서만 지내셨던 건가요? 수도에 계셨다면 자주 만날 수 있었을 텐데요.”
“아, 그게…….”
리디아가 처음으로 난감한 기색을 내비치며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그녀는 아예 몸을 돌려 파티장을 두리번거렸다.
“제가 곤란한 질문을 한 모양이네요.”
“아, 그런 건 아니에요. 설명하자면 길어서 직접 소개해 드리고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아, 저기 오네요. 카이, 이쪽이야.”
리디아가 저 멀리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한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까 음료를 가지러 갔던 것인지, 그는 양손에 칵테일이 담긴 잔을 들고 있었다. 리디아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는데 남자는 용케 그녀를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안 그래도 영애와 레이너드 경께 소개해 드리고 싶었답니다. 저와 영애가 친구가 되고, 카이와 레이너드 경도 서로 친하게 지내면 어떨까 싶어서.”
“그거 괜찮네요. 그동안 아카데미에서 지낸 탓에 레이는 제국에 아는 사람이 없거든요. 친구가 생긴다면 저도 좋은…….”
유리나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여전히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충분히 얼굴을 구분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왔다.
“영애?”
그녀는 의아하게 묻은 리디아에게 괜찮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남자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기억이 맞다면 한 달 전 사냥 대회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금발과 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였다. 그녀를 보고 어디서 만난 적이 없냐는 구닥다리 작업 멘트를 하고 눈물까지 흘리던 바로 그 수상한 남자.
‘데프론가의 사람이었어?’
그제야 왜 그가 그녀가 유리나 카르티아라는 것을 알고 도망치듯 사라졌는지 이해가 갔다. 데프론가의 사람으로서 괜히 카르티아가와 엮이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보라색 눈을 생각했던 유리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 갔다.
마침내 그가 리디아의 옆에 섰을 때, 리디아가 남자가 건네준 잔을 유리나에게 건네주며 웃었다.
“아마 영애께 처음으로 소개해 드리는 걸 거예요. 이쪽은 저희 가문에서 후원하고 있는 마법사입니다.”
남자는 마치 유리나를 처음 본 것처럼 태연하게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리온이라고 합니다.”
그와 제대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배 속부터 갑자기 올라오는 욕지기에 유리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남자의 눈이 레이너드와 똑같은 붉은색이었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