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두 명의 베아투스
유리나는 리디아에게 대충 인사를 건네고 도망치다시피 홀을 빠져나왔다. 이 행동이 굉장히 무례하다는 사실과 잘못하면 데프론가에게 약점으로 잡힐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다.
하얘진 머릿속에는 빨리 그들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레이너드는 유리나를 대신하여 정중하게 대화를 마무리 짓고 서둘러 그녀를 뒤따라갔다.
유리나는 어느새 바로 뒤까지 쫓아온 그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가 인적이 드문 정원으로 나간 뒤에야 긴장이 풀렸는지 다리가 휘청거렸다.
“유리나!”
다행히 넘어지기 전에 레이너드가 그녀를 꽉 잡아 품에 안았다. 유리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숨을 헐떡였다. 특별히 어디가 안 좋은 게 아니었는데도 멀미가 난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관자놀이를 딱따구리가 콕콕 쪼는 것처럼 머리가 쾅쾅 울렸다.
“유리나,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얼굴이 창백해.”
레이너드는 유리나를 재빨리 위아래로 살폈다.
요즘은 코르셋을 꽉 조이지 않아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예전에는 코르셋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졸도하는 여성이 많다고 들었다. 게다가 유리나는 오늘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고 했으니 갑자기 몸이 좋지 않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는 주위를 살피다가 저 멀리서 연인들로 추정되는 남녀의 목소리를 듣고 재빨리 공간 분리 마법을 실행했다. 주위 풍경은 방금과 똑같았지만 주변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살랑거리던 봄바람도 사라졌다.
“코르셋 풀어 줄까?”
그는 가쁜 숨을 헐떡이는 유리나를 보다가 그녀의 등에 달린 단추에 손을 가져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유리나가 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코르셋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오늘 제대로 먹은 것도 없다면서. 그럼 갑자기 현기증이 날 수도 있어. 넌 괜찮다고 느껴도 안 괜찮을 수 있으니까 일단 코르셋 좀 풀자. 아무도 못 보니까 걱정 마.”
“그런 거 진짜 아니야.”
유리나는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그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는 붉은색 눈.
7년 전, 허름한 고아원 뒤편에서 이 눈을 가진 레이너드를 발견하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운명을 바꿨다는 희열감과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안도감. 그간 데프론 후작이 보인 적의에도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제 옆에 있는 레이너드 덕분이었다.
단 한 번도 그가 카리온이 아니라는 의심은 한 적이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레이너드와 춤을 추고 내려올 때만 해도 유리나는 당연히 그가 카리온인 줄 알았다.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밝은 금발, 수려한 외모, 열두세 살 정도 되는 나이, 무엇보다도 그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붉은색 눈. 그 모든 것이 그가 카리온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레이가 카리온이 아니면 어떻게 되는 거야?’
유리나는 자신에게 적대를 보였던 데프론 후작과 원작의 내용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간 잊고 지냈다고 생각했던 7년 전 사고가 떠올랐다.
얼굴을 세차게 때리는 날카로운 겨울바람과 하얀 눈송이, 차갑게 식어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리던 빨간 손가락, 흐려지던 시야와 끔찍한 고통, 그리고 외로움.
그 끔찍한 기억에서 드디어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잠깐 자취를 감추었던 죽음의 그림자가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고작 진짜 ‘카리온’일지도 모르는 남자 하나를 봤을 뿐인데.
‘한심해.’
그러나 냉정한 머리와는 달리 몸은 이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모양인지 서 있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거리자 레이너드가 깜짝 놀라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유리나, 유리나!”
유리나는 감은 눈을 뜨며 코앞에 다가온 그의 눈을 뚫어질 기세로 바라보았다. 자신을 구원해 줄 희망이라 믿었던 바로 그 눈.
‘아닐지도 몰라.’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붉은 눈과 카리온이란 이름은 꾸며 낼 수 있는 거다. 그게 아니라도 레이너드를 봤던 데프론 후작이 그간 제국을 이 잡듯이 뒤져 붉은 눈을 가진 새로운 아이를 찾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지난 7년간 수도를 떠나 있던 시간이 많았으니까.
그러니 아직까지는 레이너드와 카리온 중 누가 진짜 원작 속 서브 남주인공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일단 확인을 하는 것이 먼저였다.
유리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레이너드의 눈가를 매만졌다. 레이너드가 여전히 걱정이 된다는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가워.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유리나는 제 손에 입김을 불어 손을 데워 주는 그의 얼굴을 보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나가는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아까 데프론 영애가 소개해 준 남자, 눈이 붉은색이었지?”
단정 조로 물었지만 사실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부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들뜬 듯한 얼굴로 그녀가 원하지 않던 대답을 했다.
“응. 그 사람도 나와 같은 베아투스겠지? 나는 지금까지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어. 다음에 만나면 좀 더 대화를 해 보고 싶어.”
동지를 만났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붉은 눈 하나로 모진 일을 당하고 살아왔으니 저도 모르게 동질감을 느꼈을 테다.
그 남자의 옆에 있는 게 리디아 데프론만 아니었어도, 그의 이름이 카리온만 아니었어도 유리나도 기쁘게 레이너드의 말에 맞장구를 쳤을 것이다.
같은 베아투스니 이야기도 잘 통하고, 마법 연구도 같이 할 수 있을 거라면서, 오히려 그녀 쪽에서 먼저 나서서 상대 가문과 교류를 추진했을 테다.
그렇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유리나는 폭신한 빵을 처음 먹었을 때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그를 보며 입술을 짓씹다가 다시 물었다.
“그 남자 이름이 진짜 카리온이야?”
그는 유리나의 질문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 이름이었어. 그거 알아? 카리온은 고대어로 ‘승리자’라는 뜻이야. 고대어를 알고 지은 걸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원작대로라면 데프론 후작이 제 야욕을 드러내며 지어 준 이름이니까. 그는 카리온에게 그 이름을 지어 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드디어 카르티아가와 유리나를 누를 수 있다는 오만과 자만에 빠져 있지 않았을까.
유리나가 레이너드를 찾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카리온의 설정을 떠올려 보던 유리나는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나만 더 물어볼게.”
“뭔데 그렇게 힘들게 물어봐?”
“많이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어.”
진지한 유리나와는 다르게 레이너드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네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 외엔 어떤 말이든 상관없어.”
과연 그럴까. 유리나는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어렸을 때 네 어머니가 술집을 했어? 네가 고아원에 간 것도 어머니의 학대를 피하기 위해서야?”
순간, 유리나의 볼을 부드럽게 쓸어 주던 레이너드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는 유리나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되물었다.
“……뭐?”
“네 어머니가 술집을 하면서 혼자 널 키웠어? 아버지는 누군지 모르고?”
유리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역린이라도 건든 것처럼 그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유리나의 표정을 살피다가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오일을 발라 깔끔히 넘겼던 머리가 마구잡이로 헝클어졌다.
“지금 그게 무슨…….”
감정을 추스르기 힘든지 그의 가슴팍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레이너드가 카리온이 아니라면 저런 격한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럼 설마 레이가 진짜 카리온이야?’
유리나는 그의 그런 반응이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켜 수치스럽거나 잊고 싶은 과거를 끄집어낸 그녀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 말고는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면 레이너드 입장에서는 한순간에 유리나가 상처를 후벼 판 것밖에 되지 않았다. 민감한 질문이라고 미리 말해 두기는 했지만 그게 정당화될 수는 없었다.
“레이, 미안해. 내가 실언을 했…….”
유리나가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자 레이너드가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명백한 거부 의사였다.
그는 그새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유리나를 쳐다보다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도망이라도 가듯 긴 다리로 성큼성큼 몇 발자국 걸어갔다.
유리나는 파르르 떨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손을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다가가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둘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레이너드 쪽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몇 번 하다가 여전히 유리나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봐?”
“그건…….”
유리나는 바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만 달싹였다. 그에게 그 질문을 한 이유를 설명하려면 자신이 이곳에 온 이야기부터 털어놓아야 했다.
전생에서 이름도 기억나지 않은 로맨스 판타지 책을 읽은 이야기를 시작으로, 교통사고를 당해 유리나 카르티아가 되어 눈을 뜬 이야기, 유리나가 리디아와 황태자비 자리를 놓고 세력을 겨루다가 ‘카리온’에게 살해당할 운명에 놓여 그 운명을 바꾸기 위해 그를 찾아 나섰던 이야기까지.
지금 생각해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아니, 그건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유리나는 두려웠다.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레이너드를 데려다 후원해 주고 계획하에 그에게 따뜻하게 해 줬다는 것을 그가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상상이 되지 않아서 무서웠다.
―너야말로 몰라. 널 만나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그의 미소를 다시는 보지 못할까 봐.
그녀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고 있자 레이너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남자 이름이 진짜 카리온이냐고 물을 때부터 뭔가 이상했는데…….”
“…….”
“그렇잖아. 잘못 들어서 물어봤다면 그냥 카리온이냐고 묻거나, 그 남자 이름이 뭐였냐고 물어봤을 거 아냐. 근데 넌 ‘진짜 카리온’이냐고 물어봤어. 마치…….”
울컥 치솟는 감정을 다시 삼키는 것처럼 입을 닫고 마른침을 삼킨 레이너드가 주먹을 꽉 쥐고 뒤를 돌았다.
“마치 카리온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예리한 지적이었다. 그리고 그건 자신은 카리온이 아니라는 간접적인 대답이기도 했다.
“유리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엔 유리나가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유리나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서도 하나로는 정의되지 않는 복잡한 감정이 드러났다.
슬픔, 절망, 괴로움.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유리나가 생각했던 분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새 바짝 다가온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어깨를 잡았다.
“내 어머니가 술집을 하셨냐고? 아니. 우리 부모님은 평범한 농부였어. 집 주위에 있는 밭에서 감자나 당근 같은 채소를 키워 시장에 내다 팔고 하루하루를 먹고살았어.”
이로써 확실히 결정이 났다.
‘레이는 카리온이 아니야.’
가슴이 쿵쿵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비틀었다고 생각했던 원작이 다시 원래의 순리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리디아와 커티스와 엮여 데프론 후작이 야심 차게 데려온 카리온의 손에 죽게 되는 걸까.
그런데 그런 불안감이 드는 동시에 왜 레이너드가 이토록 괴로워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카리온이 아니라면 대체 그는 왜 그 말을 듣고 제 치부를 드러낸 것처럼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걸까.
그게 알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알고 싶지 않다는 모순적인 마음이 유리나의 마음속에서 싹텄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며 도망가려고 하자 레이너드가 아예 그녀의 뺨을 감싸 쥐고 시선을 마주했다.
“아카데미에 가기 전 너는 날 찾아다녔다고 했어. 우연히 내 재능을 알아보고 날 데려온 게 아니라 분명 날 찾아다닌 거라고 했어. 이 세상 어딘가에 내가 있을 거란 걸 알고 있다고 했어.”
레이너드의 붉은 눈이 흔들림 없이 유리나를 향했다. 레이너드가 허리를 굽혀 유리나와 눈높이를 맞추며 조용히 읊조렸다.
“사실 계속 궁금했어. 너는 나를 찾은 건지, 아니면 ‘베아투스’를 찾고 있던 건지. 그렇지만 현재 알려진 베아투스는 나 하나뿐이었으니까 별로 상관은 없었어. 톰을 찾고 있든, 베아투스를 찾고 있든, 네가 찾는 건 나였으니까.”
“…….”
“그런데 지금 널 보니까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
조용히 속삭이던 목소리가 조금씩 격양되기 시작했다. 그는 격해지는 호흡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시 눈을 뜨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네가 찾고 있던 게 내가 아니라 혹시 조금 전에 본 카리온, 그 자식이 아니었을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시가 되어 목에 박히는 것처럼 목이 따가워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유리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레이너드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기어코 시선을 다시 마주했다.
“술집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는 사람, 카리온 말하는 거 맞지?”
유리나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가 없었다. 부정을 하자니 그를 속이는 꼴이 되어 버리고, 긍정을 하자니 그에게 큰 죄를 짓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원하는 답을 찾았는지 레이너드가 얼굴을 울 것처럼 일그러뜨렸다. 유리나의 볼을 쥔 그의 손에 잠시 힘이 들어가나 싶더니, 그가 제 행동에 놀란 듯 서둘러 손을 거뒀다.
그는 손등의 핏줄이 튀어나오고,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나는 지금까지 그것도 모르고…….”
“레이.”
“내가 내 주제도 모르고,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레이, 내 말 좀 들어 봐. 나는…….”
“그런데 더 비참한 게 뭔지 알아?”
그가 손가락 사이로 유리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넌 내 말을 듣고도 아무런 부정도 하지 않는다는 거야. 어떻게 빈말이라도 아니라는 말을 안 할 수가 있어? 거짓말이라도 아니라고 해 줬으면, 네가 찾던 사람이 내가 맞다는 말, 그 한마디만 해 줬으면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숨소리가 가득했던 작은 웃음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유리나, 네가 찾던 사람은 내가 아니었던 거야. 그렇지?”
“레이, 나는…….”
“네가 원한 건 내가 아니라 그 자식이었던 거야.”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모든 말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아냐, 아닐 거야.”
레이너드가 이내 고개를 흔들며 유리나의 팔을 잡았다.
“아니지? 내가 잘못 안 거지? 그렇지?”
“…….”
“그렇다고 해 줘. 제발…….”
따지려는 듯 유리나의 팔을 흔들던 레이너드가 계속되는 유리나의 침묵에 꼭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두 손이 필사적으로 유리나의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날 찾아다녔다고 했잖아. 네가 만나서 기쁘다고 했잖아. 네가, 네가…….”
그의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무릎을 꿇고 앉은 그의 허벅지 위로 뚝뚝 떨어졌다.
“줄곧 날 기다렸다고 했잖아.”
열두 살, 로렌 부인에게 상처받고 유리나의 품에 안겨 울 때처럼 그는 뜨거운 눈물을 쏟아 냈다. 아니, 그때보다도 더 서러운 눈물이었다. 쉴 새 없이 흐른 투명한 눈물이 그의 바지를 금세 축축하게 적셨다.
그날 이후로 그는 이토록 제 감정을 가감 없이 쏟아 내며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기쁠 때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려도 이내 남들에게 자신이 우는 사실을 숨기며 감정을 추스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울음을 멈출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대체 왜 내가 아니라 그 자식이야, 대체 왜…….”
유리나는 애처로울 정도로 온몸을 떨고 있는 그를 도저히 볼 수 없어서 고개를 들며 눈을 감았다. 이미 머릿속에서 카리온의 존재는 잊힌 지 오래였다. 지금 이 순간, 감은 눈앞에 잔상처럼 남은 건 카리온이 아니라 레이너드의 우는 얼굴이었다.
자신을 만나 행복하다던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 같았다. 로렌 부인이 그에게 남겼던 상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큰 상처를.
지금껏 그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지 않도록 노력했는데, 정작 그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남긴 건 유리나, 바로 그녀였다.
유리나는 한참 숨을 고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제 드레스를 잡고 있는 레이너드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레이. 내가 미안해.”
그때까지도 계속 눈물을 쏟아 내던 레이너드가 그 사과 한마디에 유리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는 유리나의 목덜미에 축축해진 제 얼굴을 묻었다.
“유리나, 나 만났을 때 네가 위험에 빠지면 널 구해 달라고 했잖아. 그것 때문이야? 그것 때문에 카리온을 찾아다닌 거야?”
유리나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한층 더 떨리는 목소리로 묻었다.
“설마, 아직도 그 자식이 필요한 거야?”
그럴 리가 없었다. 유리나가 고개를 저으려 하자 차마 대답을 들을 수 없었는지 레이너드가 그녀의 뒤통수를 끌어안았다.
“나 그동안 열심히 마법 배웠어. 아카데미도 조기 졸업 하고 왔잖아. 내가, 내가 더 잘할 수 있어, 응? 내가 더 잘할게. 내가 부족하다면 더 열심히 할게. 그러니까 가지 마. 내 옆에 있어. 응?”
유리나는 손을 들어 달달 떨리는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이젠 누가 보더라도 그의 체격은 그녀보다 훨씬 컸는데, 품 안에 들어오는 그의 몸은 꼭 열두 살 아이처럼 작고 여렸다.
“내가 더 잘 지켜 줄 수 있어. 왜 카리온을 찾았냐고도 묻지 않을게. 그러니까 그냥 내 옆에 있어 줘. 응?”
“레이.”
“난 너 없으면 안 돼. 그러니까, 유리나. 제발…….”
“아무 데도 안 가. 내가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
레이너드가 고개를 들며 유리나의 표정을 살폈다. 유리나는 빨개진 그의 눈가를 살살 문지르며 어떡하면 그에게 더 상처를 주지 않고 설명을 할 수 있을지 생각을 골랐다.
“카리온을 찾았던 것은 맞아. 그런데 이젠 상관없어.”
몸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두 볼을 꽉 잡고 그와 눈을 마주했다. 여전히 그의 붉은 눈에는 버림받은 아이처럼 불안감이 가득했다. 뒤늦게 그의 입가에 묻은 붉은 피가 눈에 들어왔다.
초조함에 입술을 세게 짓씹기라도 한 걸까. 유리나는 쓴 약을 먹은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그의 입술을 닦아 주었다.
“레이, 난 죽는 게 많이 두려웠어.”
“알아. 그렇지만 죽는 건 다들 무서워해.”
“아니, 넌 몰라. 너는 죽을 때 어떤 느낌인지 절대로 몰라.”
유리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그의 아픔을 온전히 공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 또한 그녀의 공포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오든 날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어. 그래서 카리온을 찾으려고 했던 거야. 그런데 이젠 다 필요 없어.”
유리나는 그를 향해 최대한 밝게 웃어 보이려고 노력했다.
“네가 있잖아.”
레이너드가 눈을 크게 떴다가 울음을 참는 것처럼 핏기가 남아 있는 입술을 다시 꽉 깨물었다. 유리나는 깜짝 놀라 그의 뺨을 꽉 그러쥐었다.
“그러지 마. 피 나잖아.”
엄지로 입술을 훑어 내리자 그가 살짝 입을 벌렸다. 유리나는 상처가 남은 붉은 입술을 보다가 손끝에 마나를 끌어모았다. 손끝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오더니 터진 입술이 언제 다쳤냐는 듯 말끔해졌다. 동시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유리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을 하며 천천히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이 작은 마법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최대한 멀쩡한 척을 하며 속으로 스스로를 비웃는데, 그녀의 상태를 알아챘는지 레이너드가 그녀의 손을 쥐었다. 맞닿은 곳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더니 손끝에서부터 마나가 스며들어 왔다. 힘이 빠졌던 몸도 금방 쌩쌩해졌다.
“작은 상천데 그럴 필요 없어. 이렇게 금방 힘들어할 거면서.”
걱정하는 목소리 속에는 묘한 기쁨이 숨어 있었다. 고작, 그 치료 하나가 뭐라고 그는 기뻐하고 있었다.
레이너드는 한 손으로는 유리나가 치료해 준 입술을 더듬고, 다른 손으로는 유리나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유리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그날 그 자식 말고 날 데려온 걸 후회해?”
후회하나? 그 질문은 그녀가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카리온을 만나고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겁에 질린 건 사실이었다. 그건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이제 겨우 안심을 하고 있었는데 다시 한번 제 인생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셈이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왜 레이너드가 진짜 카리온이 아니라는 원망이나 어째서 카리온이 아니라 그를 데려온 것인지 하는 후회는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괴로워하는 그를 보며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이 질문을 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후회 안 해.”
“거짓말.”
“진짜야.”
“…….”
“그날 만난 게 너라서 기뻐.”
지난 7년 동안 레이너드와 함께 쌓았던 추억을 생각했다. 그녀가 만난 게 그가 아니라 ‘카리온’이었다면 어쩌면 쌓지 못했을 그 추억들을.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카리온’이 아니라도 전혀 상관없었다. 그녀가 지금껏 마음을 주고받은 남자는 카리온이 아니라 ‘톰’이었던 레이너드였다.
“시간을 거슬러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설령 운명을 바꾸지 못하고 원작처럼 내가 카리온의 손에 죽는다고 해도.
“난 널 만나러 갈 거야, 레이.”
“그거면 돼.”
레이너드가 힘겹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볼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한데, 그는 참 기쁘다는 듯이 웃었다. 그건 참 기묘한 광경이었다.
유리나가 그 처연해 보이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볼에 묻은 눈물을 닦아 주자 그는 그녀의 손바닥에 뺨을 기댔다.
“그거면 됐어.”
그가 눈을 감고 작게 중얼거렸다. 유리나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에 가까웠다.
7년 전, 눈이 오는 어느 겨울날에 그랬던 것처럼.
* * *
그 후로도 레이너드는 안심이 되지 못했는지 유리나를 품에 안고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리나가 눈앞에 있는데도 그는 꼭 그녀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신기루라도 되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잠자코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유리나가 가족들이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 뒤에야 그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유리나는 헝클어진 그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최대한 정리해 준 뒤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러니까 훨씬 낫네.”
마음 같아서는 불그스름하게 부어오른 눈도 치료해 주고 싶은데 레이너드에게 한 소리를 들을까 봐 차마 마법을 쓸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눈가를 더듬거리고 있자,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레이너드가 제 눈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뗐다.
“이제 됐지?”
언제 울었냐는 듯, 그의 얼굴이 말끔해졌다. 유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그녀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가자. 후작님께서 걱정하시겠어.”
“응.”
레이너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파티장으로 돌아가던 유리나는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유리나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던 레이너드는 갑자기 걸음을 멈춘 그녀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뒤늦게 앞을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두 사람을 발견한 카리온 또한 놀랐는지 잠시 흠칫하나 싶더니 이내 몸을 돌려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레이너드가 재빨리 유리나를 제 등 뒤에 숨겼다.
“무슨 일입니까?”
존대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날카로운 그의 목소리에서 명백한 적의가 느껴졌다.
카리온이 레이너드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유리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아까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으셔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조금 괜찮으십니까?”
“괜찮…….”
“신경 써 주는 건 감사하나, 신사분께서 관심을 보일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 파트너는 제가 잘 살필 터이니, 신사분께서는 데프론 영애께 가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완곡한 축객령을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닐 텐데도 카리온은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고 유리나를 끈덕지게 바라보았다.
“카르티아 영애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쪽은 할 이야기가 없으니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그건 경이 아니라 영애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제 파트너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렇지, 유리나?”
레이너드를 위해서라면 카리온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유리나는 즉각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사냥 대회 때 만난 수상한 남자가 ‘카리온’이란 것을 안 이상 그에게 물어야 할 것이 많았다.
‘날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고 했었나.’
그때는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 남자의 뻔하디뻔한 작업 멘트라고 생각했다.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멋대로 공간 분리 마법을 쓰고, 그녀가 카르티아가의 유리나라는 것을 알고 도망갔을 때에도 분명 이상하다 생각하고 아론 경에게 추적하라고 했었다.
그러나 데프론가의 ‘카리온’이 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왜 도망간 걸까.’
데프론 후작의 사주를 받고 그녀의 목숨을 노리고 접근했다고 한다면 그렇게 놀란 듯 도망간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그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유리나와 단둘이 분리된 공간에 있었다. 정말 그가 그녀를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그때 손을 썼을 것이다.
‘반대로 얘기하면 그때 날 죽일 수도 있었다는 소리잖아.’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생각에 소름이 돋아 어깨가 잘게 떨렸다.
그때 그렇게 놀라서 도망간 것을 생각하면 그녀가 정말로 유리나 카르티아라는 것을 모르고 접근했다는 소리가 되는데, 상대가 원작의 서브 남주인공인 카리온이라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그는 바로 제 옆에 그토록 사랑하던 여주인공 리디아 데프론을 두고, 왜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원작의 악녀였던 유리나에게 그런 소리를 했던 걸까.
게다가 왜 유리나를 보며 눈물을 흘렸던 걸까.
‘내가 카르티아가의 사람이란 것을 알면서도 계속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것도 이해가 안 돼.’
리디아도 그렇고, 카리온도 그렇고 왜 그녀에게 적대를 갖기는커녕 다가오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일까.
잔뜩 꼬인 실타래를 풀려고 할수록 더욱 꼬이는 것처럼, 하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아 해답을 얻으려고 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져만 갔다.
유리나의 침묵이 다소 길어지자 레이너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유리나?”
“죄송하지만, 제 파트너가 말했다시피 신사분과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 파트너와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었다. 레이너드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정리한 뒤에 행동에 옮겨도 늦지 않을 테다.
“하지만…….”
“싫다는 이를 붙잡아 두는 건 대체 어느 가문의 법도인지요? 신사분의 행동이 가문의 얼굴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셨으면 좋겠군요.”
너는 이미 내게 한 번 무례를 저질렀다. 가문 대 가문으로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으면 돌아가라.
말속에 담긴 말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는지 카리온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가 불편하게 해 드렸다면 사과드립니다. 다만 아까 급하게 사라지셔서 저희 아가씨께서 많이 걱정하셨는데, 혹시 전해 드릴 말이라도 있을까요?”
“아가씨?”
“리디아 데프론…… 아가씨 말입니다.”
“아…….”
유리나는 과하게 친하게 굴었던 리디아를 떠올렸다가 무너지려는 표정을 다잡았다.
“홀 안이 조금 더워서 현기증이 조금 나서 그랬어요. 지금은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말과 걱정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 주실래요?”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카리온은 몸을 돌렸다.
유리나는 멀어져 가는 카리온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카리온은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다가도 중간중간 그녀 쪽을 흘끔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시선을 피하면서도 유리나는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리디아와 마찬가지로 이것 모두 연기일까? 제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렇게 접근하는 것도 모두 후작이 시킨 대로 행동하는 걸까.
그런 거라면 조금 이해가 갔다. 아마 그녀가 환심을 갖게 되면 가차 없이 목을 노리겠지. 원작에서처럼.
하지만 유리나는 왠지 모를 꺼림칙한 기분을 털어 낼 수가 없었다. 자꾸만 사냥 대회 때 그가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유리나.”
그녀를 잠자코 지켜보던 레이너드가 그녀의 양 볼을 움켜쥐었다. 유리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고개를 돌려 그의 붉은 눈을 마주 보았다.
“나 여기 있어.”
“응?”
뜬금없는 말에 눈을 살짝 찡그리자 레이너드가 상체를 숙여 가까이에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유리나의 한 손을 내려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나는 여기 있는데 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 거야?”
“아…….”
“다른 곳 보지 마.”
그가 꼭 성난 고양이처럼 으르릉거렸다. 볼을 쥔 손은 행여나 그녀에게 상처라도 입힐까 두려운 듯 조심스러웠지만 눈빛은 매서웠다.
“그거 알아?”
“뭘?”
“널 살릴 수 있는 것도, 죽일 수 있는 것도 나뿐이야. 너는 내 곁에 있어야 해.”
분명히 협박이었는데도 유리나의 귀엔 그게 협박이 아니라 애원처럼 들렸다. 그러니 내 옆에 있어 달라는 아이 같은 투정.
그 불안감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엽게 느껴져서 웃음이 나왔다.
‘작전을 바꿔서 애원 대신 협박을 해 보겠다는 건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협박이 무서울 리가 없었다.
“날 죽일 수는 있고?”
태연하게 받아치는 유리나의 대답에 그는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유리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재차 입을 열었다.
“날 살릴 수 있는 게 너밖에 없다는 것은 일단 그렇다 치고, 내가 네 옆에 있어야 한다는 건 뭐, 그것도 그렇다 쳐. 그런데 날 죽일 수 있는 것도 너뿐이라고? 좀 이상하지 않아? 네가 날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레이너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니까 내 곁에 있으라는 거지. 세상에서 널 해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정작 나는 네게 손도 못 대니까. 내 곁만큼 안전한 곳이 어디 있어?”
“글쎄, 손도 못 대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유리나는 제 허리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을 톡 건드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 힘이 더욱 바짝 들어갔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그러니까 유리나, 죽는 게 두려워도 내 옆에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카리온이 아니라 내 곁에 있으면 돼. 알겠어? 앞으로 카리온은 쳐다보지도 마.”
“그런데 그거 알아?”
유리나는 까치발을 들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널 데리고 온 건 나야. 내가 네 곁에 있는 게 아니라 네가 내 곁에 있어야 하는 거지. 안 그래?”
유리나는 작게 속삭이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방금까지 짐짓 심각하게 협박 아닌 협박을 늘어놓던 레이너드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도 아닌데 왜 그렇게 놀라?”
입술을 댄 채로 중얼거리자 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일순 훅 들어왔다. 심장까지 덥힐 정도로 뜨거운 숨이었다.
“난 되게 진지한데.”
“나도 진지해.”
유리나가 심각한 척 눈에 힘을 주자 그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은근슬쩍 넘어가는 건 대체 어디서 배웠어?”
“은근슬쩍 넘어가는 거 아니야. 나도 진지해.”
“…….”
“그래서 싫어?”
“아니.”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바짝 끌어안았다. 맞닿은 그의 몸은 그의 숨결만큼이나 뜨거웠다.
“난 너라면 다 좋아.”
* * *
“유리나!”
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쌍둥이 중 한 명이 사람들 사이를 능숙하게 헤치며 뛰어왔다. 유리나는 살짝 처진 눈꼬리를 보고 그가 에드윈이란 것을 금방 알아챘다.
“대체 어디 갔던 거야? 엄청 찾았잖아.”
유리나는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미안해. 잠깐 머리가 어지러워서 바람 좀 쐬고 왔어.”
“머리가 어지러워? 그러고 보니 안색이 좋지 않은데. 많이 안 좋아?”
유리나는 열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제 이마를 만져 보는 에드윈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괜찮아. 신선한 공기를 마셨더니 좋아졌어.”
“정말?”
“응. 오빠들이랑 엄마 아빠가 같이 와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큰 파티는 처음이라 내 생각보다 긴장을 많이 했나 봐.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어머니, 아버지는 잠깐 휴게실에 가셨고, 릭스 형이랑 저스틴은 널 찾는다고 밖을 돌아다니고 있을 거야. 나는 홀 안을 찾기로 해서 여기에 남았고.”
“내가 애도 아니고 왜 그렇게 땀까지 흘리면서 찾아다녀? 혼자도 아니고 레이도 있는데.”
유리나는 일부러 툴툴거렸다. 세 오빠들의 애정이 유독 과하단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레이너드와의 연애도 방해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드윈은 유리나의 투정에도 표정을 풀지 못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정말이라니까.”
유리나는 괜찮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기 위해 두 팔을 들어 위아래로 살짝 흔들어 보이려고 했지만, 그 전에 에드윈이 심각하게 물었다.
“아까 데프론 영애와 무슨 얘기를 한 거야?”
“뭐?”
예상치도 못한 이름에 유리나는 두 팔을 든 채로 굳었다. 에드윈이 양손으로 유리나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아까 데프론 영애와 이야기하다가 뛰어나가는 걸 봤어. 대체 그 영애가 무슨 말을 한 거야?”
호칭은 ‘영애’였지만 꼭 더 심한 말을 내뱉은 것처럼 에드윈의 목소리는 살벌했다.
“아, 그래서 릭스 오빠랑 저스틴 오빠가 밖으로 나갔구나.”
그리고 두 사람을 보지 못한 건 레이너드의 공간 분리 마법 때문이었을 것이다.
레이너드에게는 카리온에 대해서 말했지만 가족들에게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유리나가 뭐라고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에드윈이 대신 입을 열었다.
“지금 데프론 후작이 모든 파티를 망쳐 놨어.”
“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베아투스…… 말이지?”
유리나의 앞에서도 붉은 눈을 감추지 않은 카리온이었다. 사냥 대회 때에는 보라색으로 눈을 바꿨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데프론 후작은 자신도 ‘베아투스’를 후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리디아까지 데리고 이 파티에 참가했을 것이다.
이미 베아투스로 소문이 자자한 레이너드가 기사 서임을 받는 파티에서 또 다른 베아투스의 존재를 밝히다니. 그 속내가 뻔히 보여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응. 아까 데프론 영애와 있는 걸 봤어.”
“역시나 마음에 안 들어.”
어금니를 꽉 깨물며 속삭인 에드윈이 유리나의 뒤쪽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를 따라 뒤를 돌아보았던 유리나는 리디아를 발견하고 딱딱하게 굳으려는 입꼬리를 겨우 들어 올렸다.
“카르티아 영애, 좀 괜찮으신가요?”
리디아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유리나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아까 먼저 홀로 돌아간 카리온은 어디로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유리나는 재빨리 제 앞을 막으려는 레이너드에게 티가 안 날 정도로 살짝 고개를 저어 보였다. 용케 그 행동을 눈치챈 레이너드가 한숨을 쉬면서도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제가 갑자기 현기증이 이는 바람에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무례를 저질렀네요.”
유리나가 최대한 선하게 웃어 보이자 리디아가 고개를 저으며 유리나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친밀한 행동에 유리나는 리디아의 손안에서 손가락을 빳빳하게 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저야말로 몸이 좋지 않은 분을 눈치 없이 잡아 둔 것은 아니었는지 죄송했답니다.”
“그런 거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게 아니라면 혹시 제가 말실수를 했나요?”
“아뇨, 그런 것도 아니에요.”
그제야 리디아가 후련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그녀는 유리나의 주변에 서 있는 에드윈과 레이너드의 눈치를 조금 살피더니 고개를 숙여 유리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제가 사실 쭉 영지에서 지내면서 다른 영애들과 교류를 한 적이 많지 않아서요. 혹시 제가 실수를 하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귀족가, 그것도 내로라하는 후작가의 사람에게는 구설수가 될 수 있는 말이었는데도 그녀는 꼭 친한 친구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상대가 리디아 데프론이란 것도 영 꺼림칙한데, 이젠 데프론가에 ‘카리온’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정말로 그녀의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유리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리디아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생각이 통했는지 레이너드가 리디아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 파트너를 데려가도 될까요?”
“아, 제가 몸도 좋지 않은 분을 너무 오래 잡아 두고 있었네요.”
리디아가 한 걸음 물러나며 멋쩍은 듯이 머리 장식을 매만지다가 수줍게 웃었다.
“앞으로 자주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조만간 카르티아가로 편지를 보낼게요. 그래도 되죠?”
딱히 거절할 명분은 없었기에 유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편지 기다릴게요.”
오늘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조금씩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데프론 후작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모르니, 무작정 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정보를 캐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리디아는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려 보이며 인사를 한 뒤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카리온을 향해 걸어갔다. 레이너드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유리나의 손을 꽉 쥐었다.
그는 유리나가 카리온 쪽을 보지 못하도록 재빨리 그녀를 이끌고 홀을 빠져나왔다.
* * *
오늘따라 레이너드는 그답지 않게 거칠었다. 유리나가 그의 애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면 그의 손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두 뺨에 닿는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몸이 뜨거웠다. 숨은 이미 턱밑까지 차올라서 숨을 들이쉬는 것도 힘들었다. 유리나는 두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베개를 꽉 움켜쥐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유리나.”
레이너드가 그녀의 귓불을 깨물며 한숨을 토해 내듯 그녀를 불렀다.
“나 봐.”
그의 말은 명령보다는 애원처럼 들렸다.
“나 좀 봐 줘.”
유리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이너드의 턱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땀방울이 유리나의 목덜미로 떨어졌다. 몸이 예민해져 있는 탓인지 땀이 목을 타고 흐르는 감각이 소름 끼칠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유리나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자 레이너드가 상체를 숙여 조금 더 바짝 다가왔다. 유리나는 밭은 숨이 흘러나오는 그의 입에 입을 맞췄다.
“나 여기 있잖아.”
“유리나.”
“나 여기 있……, 흣.”
갑작스럽게 밀어붙이는 강한 힘에 유리나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손끝을 세워 그의 어깨를 할퀴듯 쥐어 잡자 그의 입에서도 억눌린 듯한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잠시 멈칫했던 그가 유리나의 허벅지를 꽉 쥐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그의 애정과 동시에 그의 감정이 새어 나왔다. 그가 불안해한다는 것이 몸에서 몸으로 느껴졌다. 불안해하지 마. 그 한마디를 해 주고 싶은데 그가 쉴 틈 없이 밀어붙이는 바람에 유리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뜨끈하게 달아오른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자신의 진실한 마음이 그에게 닿기를 바라며.
* * *
유리나는 이불로 몸을 둘둘 말며 자꾸만 감기는 눈을 뜨려고 노력했다. 몇 번인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시달리고 나니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고 피곤해서 지금 당장 자고 싶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자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녀는 힘겹게 눈을 뜨며 팔베개를 해 주는 레이너드의 맨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레이너드가 팔베개를 해 준 쪽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었다.
“레이.”
“응?”
유리나는 그에게 바짝 다가가 안기며 웅얼거렸다.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
“네가 어릴 때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
레이너드의 손이 멈칫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터라 유리나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그의 표정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는 당황해하고 있을까, 괴로워하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화를 내고 있을까.
이젠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주제는 처음이라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차마 직접 확인할 자신도 없어 유리나는 이불 밖으로 팔을 꺼내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여전히 뜨겁게 달아오른 레이너드의 몸이 움찔했다.
‘하긴, 생각해 보니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
카리온이라고 굳게 믿었던 레이너드는 카리온이 아니었다. 결국 유리나가 그의 과거라고 알고 있던 이야기는 결국 다른 사람의 이야기였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가 자신을 만나기 전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 것이 말 그대로 하나도 없었다.
그에게서는 잠시 동안 대답이 없었다.
‘말하기 힘들 거란 거 알아.’
그는 카리온이 아니다. 술집 주인인 어머니의 학대, 손님들의 성희롱 모두 그의 과거가 아니었다.
그러나 유리나는 그의 삶이 카리온의 것 못지않게 파란만장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붉은 눈동자. 그것 하나만으로도 상처를 많이 받았을 텐데 그는 가족 하나 없이 고아원에서 홀로 지냈다.
고작 열두 살의 나이로 보호막 하나 없이 비난을 받던 인생이 과연 순탄할 수 있었을까. 카리온과는 다른 인생을 살았겠지만, 그가 받아 온 상처는 카리온의 상처보다 결코 작지는 않을 것이다.
“갑자기 그건 왜? 지금껏…….”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던 레이너드는 감정을 다스릴 수 없었는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유리나는 이번에도 그를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잖아.”
잠시 후 들린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유리나는 그 속에 담긴 책망을 읽었다.
그러나 그게 왜 이제야 뒤늦게 그걸 묻냐는 책망인지, 왜 그런 걸 굳이 묻냐는 책망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유리나는 가슴이 옥죄는 것 같은 느낌에 입술을 깨물다가 겨우 대답했다.
“지금까지는 물어볼 이유가 없었으니까.”
레이너드를 카리온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유리나는 그의 과거를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과거를 묻지 않은 건 그녀 나름의 배려였다. 괜히 물어보았다가는 그의 상처를 헤집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리온의 속사정을 모른다면 모를까, 알고서도 물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갑자기 물어보는 거야?”
“너에 대해서 다 알고 싶어.”
레이너드는 카리온이 아니다. 그럼 대체 그는 어떤 과거를 갖고 있길래 이렇게 상처받은 걸까. 그는 대체 왜 그 고아원에서 혼자 떨고 있었던 걸까.
이 질문이 레이너드에게 상처가 될 수 있겠지만 알고 싶었다. 그에게 직접 듣고, 그의 상처를 다시 감싸 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말하기 싫으면 안 해 줘도 돼. 싫은데 억지로 말할 필요는 없어.”
“말하기 싫은 건 아니야.”
레이너드가 다시 유리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의외로 편안한 것처럼 들려서 유리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말마따나 그에게선 딱히 지금 이 상황을 언짢아하거나, 싫은 내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지금까지 물은 적이 없다가 갑자기 물어서 조금 놀랐을 뿐이야. 난 네가 나에 대해 묻지 않길래 나에게 관심 없는 줄 알았어.”
“관심 없는 게 아니었어.”
“정말?”
“응.”
유리나는 아예 이불처럼 레이너드의 몸을 완전히 덮을 기세로 그의 위로 올라가 누웠다.
“괜히 물으면 네가 상처받을 거라 생각했어.”
“그렇지만 너뿐만 아니라 다들 묻지 않았어. 후작님도 후작 부인도, 스승님도…….”
“그거 내가 시켰어. 묻지 말라고.”
“왜?”
“말했잖아. 네가 상처받는 게 싫었다고.”
레이너드가 바람 소리 같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관심 없는 게 아니라 관심받고 있었던 거였네. 몰랐어.”
“그게 신경 쓰였어?”
“어릴 때는.”
그는 유리나의 맨 등을 이불로 덮어 주며 잠시 머뭇거렸다.
“네가 물은 건 이름밖에 없었잖아. 그래서 섭섭하기는 했어. 나를 정말 후원자로서만 데려가는 건가 싶어서.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네가 내 눈이 엄청 예쁘다고 말해 줬잖아.”
“음, 엄청 예쁘다고까지는 안 한 것 같은데.”
“뭐?”
레이너드의 손가락이 이불 속에서 유리나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유리나는 순간 비명을 질렀다가 그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그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꽉 안았다. 그의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유리나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아무튼 그때 그걸 들으니까 네가 나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나에 대해 묻지 않는 건 그럴 필요가 없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 과거 말고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다 물어봤으니까. 사실 물어보지 않았던 게 더 좋기는 했어.”
“말하기 싫었어?”
“아니, 그런 것보다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어.”
그 말을 내뱉자마자 그는 스스로의 말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아냐. 사실은 내 말을 듣고 네가 날 꺼려 할까 봐 무서웠던 것 같아.”
“내가 왜?”
“그게…….”
그는 유리나의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유리나가 하지 말라는 의미로 입술을 매만지다가 입을 쪽 맞추자 그제야 그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날 불길하다고 생각해서 피해 다닐까 봐. 난 늘 불행을 몰고 다녔거든.”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는데, 유리나는 오히려 그 담담한 모습이 더 마음이 아팠다. 상처받고, 상처받고, 또 상처받아서 무덤덤해진 것 같았기 때문에.
대체 저 말을 얼마나 많이 들어야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는 걸까.
그의 상처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는데도 유리나는 괜히 그의 왼쪽 가슴 위를 살살 문질러 주었다. 이렇게 해 주면 그의 마음속에 난 상처가 조금이라도 아물 것 같았다.
심각한 얼굴로 맨가슴을 매만져 주는 유리나를 보던 레이너드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 유혹하는 거야?”
“……어?”
“지금 손이 좀…….”
유리나는 그제야 제 행동이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난 좋은데, 더 하면 네가 힘들 것 같…….”
유리나는 두 손으로 재빨리 그의 입을 막았다.
“못하는 소리가 없어, 정말.”
핀잔을 듣는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레이너드가 눈으로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힘든데 억지로 웃는다기보다는 진짜로 자신을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유리나는 우울했던 기분을 떨치고 따라 웃고 말았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유리나의 손바닥에 소리 나게 입을 맞춘 레이너드가 그녀의 손을 떼어 내며 은근히 물었다.
“아니면 한 번 더 할까?”
“어림도 없어.”
유리나는 그의 어깨를 찰싹 때린 뒤 그의 몸에서 내려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시선을 내려 지난번보다 울긋불긋한 자국이 더 많이 남은 몸을 쳐다보다가 붉어진 얼굴로 침대맡에 두었던 가운을 집어 들었다.
서둘러 가운에 팔을 넣으며 가운을 걸쳐 입는데, 레이너드가 등 뒤에서 허리를 꽉 끌어안는 느낌이 났다.
그는 유리나를 대신하여 가운의 끈을 묶어 준 뒤 가운 속에 빨려 들어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꺼내 주었다.
유리나는 그의 품에 등을 기대며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표정을 보지 않아도 제 허리를 끌어안은 그의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에서 그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괜찮냐고 묻는 대신 그의 손등을 토닥이며 가만히 그를 기다렸다.
레이너드는 땀이 식어 서늘해진 유리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불안정한 호흡을 골랐다. 모두가 잠든 밤, 바람조차 숨죽인 방 안에는 그의 숨소리만이 크게 들렸다.
그 호흡이 조금 안정이 되었을 때,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있지, 유리나.”
“응.”
“내 친어머니는 날 낳고 사흘 만에 돌아가셨대.”
고작 한 문장. 이제 고작 이야기의 처음을 여는 한 문장을 들었을 뿐인데 유리나는 벌써 마음이 요동쳤다.
그녀는 제 아랫배 위에 놓인 그의 손등을 꽉 쥐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어머니를 끔찍이도 사랑하셨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며칠을 앉아 계셨대. 옆집 마리 아주머니가 날 돌봐 주지 않았다면 난 죽었을 거야. 마리 아주머니에겐 마침 내 또래의 아이가 있었거든. 나는 마리 아주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어.”
“응.”
“마리 아주머니의 재촉에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내가 꼴 보기 싫으셨나 봐. 그럴 만도 해. 나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까.”
자조적인 목소리였다. 유리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그가 아직도 어머니의 죽음에 죄책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네 탓이 아니야.”
“알아. 마리 아주머니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랬어. 어머니 말고도 아이를 낳다가 죽는 여자들이 적지 않게 있다면서. 그런데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
“…….”
“그런데 생각해 봐. 나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는데, 내 눈이 붉은색이기까지 해. 아버지는 그런 날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아버지라도 내가 싫었을 거야.”
레이너드는 생각해 보라고 했지만 유리나는 그가 겪었을 일을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아이. 그는 아마도 제 아버지에게 그런 비난을 받고 자랐을 것이다. 그게 그의 잘못이 아닌데도.
유리나는 붉은 눈을 불길하다며 손가락질하던 로렌 부인에게 상처를 받고 제 얼굴을 스스로 상처 입힌 열두 살 꼬마의 얼굴을 생각했다.
그때는 그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제 존재 자체부터 부정을 당했다.
―다들 내 생일은 신경 써 주지 않았으니까.
고작 작은 생일 파티 하나에 눈물을 뚝뚝 흘리던 여린 아이의 얼굴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그는 단순히 생일을 축하받지 못한 게 아니었다.
유리나와 저택의 사람들이 생애 처음으로 생일 파티를 해 주기 전까지 그는 생일날 축하는커녕 어머니를 죽였다는 원망만 받고 자란 것이다.
그에게 생일은 친어머니의 기일과 마찬가지였다.
―저 녀석은 생일 파티를 해 줄 때마다 운다니까요. 몇 번 해 줬으면 덤덤할 때도 됐는데.
어째서 나이가 든 뒤에도 친구들이 생일 파티를 해 줄 때마다 눈물을 훌쩍였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정상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테다. 오히려 어린 아들이 어머니의 부재를 느끼며 제 탓을 하지 않도록 두 배로 사랑을 주려고 노력했겠지.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아버지는 아내의 죽음을 애꿎은 아들에게로 돌렸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볼을 만지는 척을 하며 최대한 태연하게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냈다.
“그래도 아버지가 마냥 날 미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정말로 날 미워했다면 하나도 신경 안 쓰고 날 버렸겠지. 그래도 아버지는 날 굶기거나 방치하지는 않았어.”
거기까지 말한 레이너드가 잠깐 말을 멈추더니 혼잣말처럼 작게 무슨 말을 웅얼거렸다. 그는 유리나가 듣지 못하도록 말할 생각이었겠지만, 워낙 가까이 붙어 있던 터라 그녀는 그의 혼잣말을 똑똑히 들었다.
그는 분명 ‘날 사랑하지도 않았지만…….’이라고 말했다.
“쉽지 않았을 텐데도 내가 아기였을 땐 젖동냥을 다니고, 새어머니와 재혼하기 전까지는 손수 음식을 만들어 주셨어. 내가 씻을 수 있을 때까지는 목욕을 시켜 주고, 머리가 자라면 머리를 잘라 주고, 옷이 작아지면 새 옷도 사 주셨어.”
“응.”
“하지만 빈말이라도 좋은 아버지라고는 할 수 없었어. 날 때리지는 않았지만 가끔 술을 먹고 오면 나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다고 윽박지르고는 했거든. 근데 난 그게 너무 무서웠어. 다음 날 술이 깨면 미안하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지만 또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같은 일이 반복됐어. 그래서 난 아버지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이불 속에서 숨어 자는 척을 했어. 그러면 아버지가 화를 덜 낼 것 같았거든.”
유리나는 다시 새어 나오려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때리고 방치하는 것만이 학대는 아니다. 레이너드의 아버지는 그를 때리지도 않았고, 굶기지도 않았지만 분명 그를 학대했다.
비가 오던 어느 날, 이불 속에서 바들바들 떨며 괴로워하던 레이너드의 모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그 얇은 이불 속이 그의 유일한 도피처였으리라.
아버지의 고함 소리를 피해 방 한구석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을 어린 톰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그래도 아주 나쁜 아버지는 아니었어. 동네 아이들이 날 이유 없이 때리거나 놀리면 가서 아이들을 혼냈거든.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얼마나 든든했는지 몰라.”
진지하게 이야기를 이어 가던 레이너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로 재밌어서 웃는다기보다는 웃기지 않은 농담을 듣고 억지로 웃는 것 같은 인위적인 웃음이었다.
“참 웃기지? 아버지야말로 맨날 내 눈이 불길하다고 화를 냈으면서 정작 그 애들에게는 눈이 빨간 게 뭐가 그리 대수냐고 했어. 그런데 왜 나한테는 한 번도 괜찮다고 안 해 줬을까?”
유리나는 아무런 말을 해 줄 수가 없었다.
네 아버지는 차마 네게 말을 하지 못했지만 널 사랑하고 있었을 거야. 말은 불길하다고 했어도 실제로는 네 눈도 사랑했을걸.
그런 허울 좋은 거짓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은 이미 상처받은 레이너드의 마음을 더욱 후벼 파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딱히 대답을 원했던 것은 아닌지 그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상관은 없어. 난 너만 내 눈이 좋다고 해 주면 다른 사람이 다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
“아버지랑 새어머니는 지금 어디 있어?”
“없어.”
“없는 거야, 없는 셈 치는 거야?”
“진짜로 없어.”
그렇게 말한 레이너드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작게 덧붙였다.
“다들 죽었어.”
“…….”
유리나는 뒤를 돌아앉으며 잠시 생각을 골랐다. 얼굴을 보이기 싫었는지 레이너드가 유리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유리나는 그의 등을 쓸어 주며 생각을 고르다가 겨우 입술을 뗐다.
“어쩌다가?”
“마차 사고였어. 지나가던 귀족가의 마차에 치였거든.”
“마차 사고?”
“응. 마차에 부딪히기 전에 아버지가 날 밀어 버린 덕분에 나는 팔에 생채기만 조금 나고 멀쩡할 수 있었어. 그런데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유리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이 비슷한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일전에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까 널 만났을 때보다도 어렸을 때, 열 살 때쯤이었나. 사실 나도 마차 사고를 본 적이 있었어. 그래서 오늘 네가 그렇게 무서워한 것도 이해가 가.
그때 말했던 마차 사고가 설마 지금 말한 것과 같은 걸까. 그러나 차마 마차 사고로 죽은 사람이 네 부모님이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유리나는 얼굴이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는 것을 느끼며 최대한 돌려 물었다.
“몇 살 때 일이야?”
“열 살 때.”
티를 안 낸다고 했는데도 유리나가 알아챈 걸 눈치챘는지, 레이너드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으로 유리나의 뺨을 살살 문질렀다.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돼. 오래전 일이라 기억도 잘 안 나.”
거짓말. 그 단어가 돌멩이처럼 목 안쪽에 콱 박혔다. 그날, 유리나의 다리를 베고 누워 고해 성사를 하듯 과거를 털어놓던 그는 지금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었다.
―지금도 가끔 그때 생각이 나. 유리나, 만약 그때 내가 마법을 배웠더라면 그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을까? 가끔 너무 후회가 돼.
죽어 가던 가족을 살리지 못한 것마저 제 탓으로 돌릴 정도로 그는 가족의 죽음을 괴로워했다.
점점 더 굳어 가는 유리나의 얼굴을 살피던 레이너드가 화제를 바꾸기 위해 조금 더 밝게 입을 열었다.
“그 이후에는 집에서 혼자 살다가…….”
그러나 유리나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으며 눈물을 쏟아 냈다.
“미안해.”
무엇을 위한 사과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미안했다.
“미안해, 레이.”
“네가 왜 미안해.”
정작 당사자인 레이너드는 물기 없이 붉어진 눈으로 유리나의 눈물 젖은 뺨을 닦아 줄 뿐이었다.
“그냥 다 미안해.”
솔직히 말하자면 유리나는 자신이 어린 레이너드의 상처를 어느 정도 보듬어 주었다고 생각했다.
붉은 눈 때문에 늘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상처투성이가 된 그의 마음을 감싸 주고, 그의 곁에 머물러 친구가 되어 주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자신은 그의 아픔에 공감해 주고, 온기를 나눠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자만이었다.
그녀가 해 준 건 고작 그런 것들뿐이었다. 그깟 것이 대체 뭐라고,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생각했을까. 심지어 그 모든 것의 시작은 이기심이었다.
실상 그녀가 해 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상처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했는데 말끔히 치료해 줬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난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었어.”
“네가 왜 해 준 게 없어?”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몸을 끌어안고 침대에 누웠다. 그는 유리나에게 팔베개를 해 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마차 사고에 대해 말했던 날, 네가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잖아. 아버지가 죽을 때 옆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아버지가 고마워했을 거라고. 솔직히 그 전까지는 가끔씩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생각났는데, 네 말을 들은 후로는 괜찮았어. 진짜야.”
그래도 유리나가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하자 그는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괜찮다며 계속 말해 주었다. 당사자가 저렇게 태연한데 마냥 울고 있을 수는 없어서 유리나는 그의 가슴에 코를 묻고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머리는 안 아파? 많이 울면 머리 아프던데.”
유리나의 등을 토닥이던 레이너드가 울음을 그친 그녀의 붉은 눈을 보며 살짝 인상을 썼다. 그가 엄지로 눈가를 살살 문질러 주자 눈가가 시원해지며 따갑던 통증이 가라앉았다.
레이너드는 안 그래도 지친 데다가 울기까지 해서 진이 다 빠져 눈을 감고 있는 유리나를 보다가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갔다. 몸 위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에 유리나는 놀라 눈을 떴다.
“이젠 네 차례야.”
그가 그녀의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닦아 주며 낮게 속삭였다.
“내 얘길 했으니까 이젠 네 얘기를 들려줘.”
그는 유리나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잠깐 쉬었다가 은근히 물었다.
“너도 나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잖아. 그렇지?”
유리나는 복잡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놀라지는 않았다. 사실 그에게 그의 과거를 물어볼 때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해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각오가 무색하게도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다 말해도 되려나.’
레이너드가 자신을 사랑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제 편이 되어 줄 거라는 믿음은 있지만, 그 얘기를 믿어 줄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었다. 그만큼 사랑으로도 믿기 힘든 허무맹랑한 일이었다.
아니, 믿어 주지 않는 건 괜찮았다. 유리나가 정말로 걱정하는 건 다른 것이었다.
‘나에게 실망하면 어쩌지.’
7년 전, 그를 찾아다녔던 것도, 그를 후원해 주겠다고 한 것도, 그에게 계획적으로 잘해 주어서 환심을 사려고 했던 것도 모두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된 그가 어떤 눈빛을 할지 두려웠다.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털어놓아야 할 진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리나는 계속 망설였다.
그의 미움을 받기가 싫었다.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또 한 번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생각보다 깊었음을 깨달았다.
“대체 붉은 눈에 대해서 어떻게 안 거야?”
유리나의 침묵이 계속되자 레이너드가 몸을 더욱 밀착시키며 물었다. 유리나는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며 눈을 떴다. 레이너드의 붉은 눈동자가 불안함을 담은 채 그녀를 흔들림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레이도 나랑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녀가 찾고 있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카리온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유리나의 치맛자락을 잡고 아이처럼 울던 그도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고, 버림받고 싶지도 않았을 테다. 어쩌면 지금 그녀가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지만 더욱 절망적인 감정이었으리라.
이대로 유리나가 말을 해 주지 않는다면 그는 큰 충격을 받고 말 것이다. 그동안 보아 온 그의 성격상, 그는 말을 하지 않는 그녀를 원망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원망하며 안 그래도 아픈 제 상처를 할퀴고 다시 상처 낼 테다.
왜 내가 ‘카리온’이 아니었을까, 하는 자책을 하겠지. 그게 절대 그의 잘못이 아닌데도 그는 그것마저도 제 탓으로 돌리고도 남을 남자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자 유리나는 마침내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상처 줄 수는 없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손가락질하더라도 자신만은 그의 상처를 감싸 안아 주겠다고 이미 오래전에 다짐했다. 유리나는 코로 숨을 깊이 들이쉬며 웃었다.
설령 그가 이 모든 사실을 믿지 않더라도 솔직하게 말할 것이다.
‘아니, 믿을 거야.’
그리고 그녀를 향한 마음도 변치 않을 것이다.
유리나는 두 손으로 그의 뺨을 매만졌다. 레이너드가 더 해 달라는 듯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댔다. 손을 내려 목덜미를 살살 문질러 주자 그제야 그가 긴장을 푼 듯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예전에 했던 이야기 기억나? 아주 어릴 적에 했던 이야기인데.”
“어떤 이야기?”
“꿈 이야기. 꿈속에서 연인 사이였던 남자를 실제로 본 적이 있다고 했잖아.”
레이너드가 눈을 살짝 찌푸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 그 남자의 새로운 연인이 된 여자의 아버지에게 죽었다는 꿈 말이지?”
“어떻게……. 그걸 어떻게 기억해?”
기억이 나냐고 물어보기는 했지만 유리나는 그가 기억을 할 거라는 기대는 갖고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7년이나 된 이야기였다.
그날 원작의 남주인공인 커티스를 만나고 온 것이 그녀에게는 큰 충격이었지만 레이너드에게는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그는 그날 꿈이어도 무서운 것은 당연하다고 진심을 담아 위로를 해 주었지만, 유리나는 시간이 지나며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은 물론, 위로를 해 줬다는 사실도 까먹었을 거라 여겼다.
레이너드는 놀란 토끼마냥 크게 뜬 눈을 깜박이는 유리나를 보며 작게 웃다가 그녀의 코끝에 입을 맞췄다.
“어떻게 잊겠어. 너한텐 심각한 이야기인데. 너한테 중요한 이야기는 나에게도 중요해.”
“그렇지만 오래전 이야기인데…….”
“오래전 일도 다 기억해.”
그렇다는 건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유리나가 그를 진심으로 대했던 것처럼 그녀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던 걸까.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새삼 알게 된 그의 마음에 유리나는 솔직히 감동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감동에 허우적댈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꿈 이야기는 왜?”
유리나는 잠자코 제 대답을 기다리는 그를 보며 혀로 입술을 쓸었다. 레이너드의 시선이 잠시 그녀의 입술로 향하나 싶더니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을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흑심이 있는 건지. 어느 쪽이든 그의 모습이 귀여워 보여 그녀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입술을 뗐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네가 안 믿을지도 몰라.”
“네가 날 싫어한다는 소리만 아니면 뭐든 믿을 거야.”
“그런 소릴 할 리가 없잖아.”
유리나는 감정을 담아 손가락으로 볼을 꾹 눌렀다. 방금 제 말이 너무 갔다 생각했는지, 레이너드가 애교를 부리듯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유리나는 그가 아직도 예민한 목에 입술을 꾹 누르는 것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때 말했던 건 사실 단순한 꿈이 아니야.”
“그럼?”
목덜미에 닿는 뜨거운 숨에 그녀는 그의 어깨를 움켜쥐며 숨을 골랐다.
“난 미래를 봤어.”
레이너드가 고개를 들며 시선을 마주했다. 차마 그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유리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눈을 보고 얘기해 줘.”
유리나는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고개를 바로 세웠다.
“그때 말했던 연인은 황태자 전하였어.”
그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가 턱이 경직될 정도로 이를 꽉 물었다. 그와 가까이 있던 탓에 유리나는 이와 이가 맞부딪치며 마찰하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어쩐지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안 든다고 했어. 그 자…….”
유리나는 재빨리 그의 입을 막았다.
“조심해. 상대는 황태자 전하야. 아무리 방음 마법을 걸었다고 해도 조심해야 해.”
그는 불만스럽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나가 손을 치우기가 무섭게 그가 되물었다.
“그래서? 그 남자가 황태자 전하면 그 여자는 누구야?”
“리디아 데프론.”
“설마 아까 봤던, 그……?”
“맞아. 백금발에 초록색 눈을 가진 영애.”
“너에게 그렇게 친하게 대했는데?”
“그건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유리나는 마냥 해맑기만 했던 리디아의 얼굴을 떠올려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잔상을 떨쳐 냈다. 레이너드가 괜찮다고 위로해 주듯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래서 널 죽인 사람이 그때 봤던 데프론 후작, 그 사람이야?”
유리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니. 정확히는 데프론 후작이 아니야.”
“그럼?”
이 이름을 말해도 되는 걸까. 유리나는 카리온의 이름을 들었을 때 레이너드가 보일 반응이 상상되지 않아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재촉하는 것처럼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그의 행동에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카리온.”
손가락에 유리나의 머리카락을 빙빙 돌리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레이너드가 숨을 급하게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즉각 반응을 보이지 않고 눈만 깜빡이며 유리나의 표정을 살폈다.
유리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내가 리디아의 앞길에 방해가 될 거라 생각했나 봐. 그래서 데프론 후작이 카리온을 시켜 날 죽였어.”
“그럼…….”
긴장을 했는지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레이너드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뒤 다시 물었다.
“그럼 나를 카리온, 그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찾은 이유가…….”
“맞아. 난 카리온을 데프론 후작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어. 데프론 후작이 카리온을 데려간다면 다시 죽을지도 모르니까.”
감정이 치솟는 것처럼 레이너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유리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두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손을 살살 떼어 내 손가락 깍지를 끼더니 그녀의 손을 침대 위에 눌렀다.
“그럼, 넌 내가 널 죽일까 봐 무서워서 날 후원한 거야?”
유리나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내가 카리온에 대해 아는 단서는 밝은 금발과 붉은 눈, 그리고 집을 떠나 고아원에서 지낸다는 것밖에 없었어. 그래서 고아원을 찾아다녔던 거야. 붉은 눈은 흔치 않으니까 당연히 네가 카리온이라고 생각했어.”
“그럼 날 볼 때마다 내가 널 죽일까 봐 무서웠던 거야?”
이번에는 고개를 재빠르게 저었다.
“그런 적 한 번도 없어. 데프론 후작을 만날 때 겁이 나기는 했지만, 네가 날 해칠 거란 생각은 한 적 없어. 정말이야.”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던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감은 눈 위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됐어.”
유리나는 실눈을 뜨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유리나가 찾던 사람이 실은 자신이 아니라 카리온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와 달리 그는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미래는 어떻게 안 거야? 꿈을 꾼 거야? 아니, 꿈을 꾸었다고 해서 그게 정말 미래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 꿈에서 보았던 데프론 후작이나 황태자 얼굴이 똑같아서 그랬다고 해도 조금 이상해. 넌 그 전에 날 찾았잖아.”
이제부터가 진짜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유리나는 제 손을 누르고 있는 그의 손가락에 깍지를 단단히 끼며 마음을 다잡았다.
“뭘 듣더라도 놀라지 마.”
“안 놀라.”
정말 안 놀랄까. 유리나는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부터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단순히 미래를 봤다는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미래를 봤다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은 레이너드도 그녀가 다른 차원에서 왔고, 이곳이 사실 그녀가 읽은 책 속 세계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유리나가 계속해서 망설이자 레이너드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웃어 보였다.
“진짜야. 안 놀랄게.”
그러나 유리나는 그 후로도 그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아꼈다. 그녀가 심각한 것을 깨달았는지 레이너드 또한 재촉하는 대신 묵묵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한참의 고민 끝에 유리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야.”
레이너드의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였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리나는 왠지 그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것처럼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제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내가 살던 곳은 여기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어. 왕도, 귀족도, 마법도 없는 곳이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레이너드가 놀란 기색은 있어도 그녀를 미친 사람 보는 것 같은 얼굴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어 유리나는 조금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마법 대신에 다른 문명이 발달해서 마차보다 빠른 이동 수단이 있고, 이동 마법은 없지만 대륙을 반나절 만에 이동할 수 있었어. 여기서 크론 왕국의 수도까지 몇 시간이면 도착할걸. 아무리 멀리 있어도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그곳이었다면 네가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언제든 통신구를 쓰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얼굴도 볼 수 있었을 거야.”
레이너드에게선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유리나는 묵묵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처음에는 간략하게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고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데, 부정적인 감정이 치솟아서 목이 멨다. 감정을 추스르느라 말을 하지 못하고 숨만 고르는 그녀를 보다가 레이너드가 그녀를 일으켜 앉힌 뒤 조심스럽게 물을 먹여 주었다.
유리나는 시원한 물 한 컵을 다 비운 뒤에야 다시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곳에서 난 사고를 당해 죽었어.”
“사고?”
“응. 여기로 따지면 마차에 치여서 죽었어. 눈이 오던 겨울밤이었는데, 사고를 낸 사람은 날 길바닥에 버려두고 그냥 도망가 버렸어. 인적이 드문 곳이라 다른 사람이 발견했을 땐 이미 늦어서…….”
“그만, 그만해도 돼.”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의 얼굴이 닿은 목덜미가 금세 축축하게 젖어 갔다.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몇 분을 숨죽여 흐느끼던 그는 유리나의 목에 젖은 뺨을 문지르며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미안해.”
조금 전 유리나가 그의 과거를 들었을 때 한 것과 똑같은 사과였다. 유리나는 그가 저 대신 우는 것은 이해했지만, 왜 사과를 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레이너드에게 사과를 한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야 그를 보살펴 주겠답시고 그를 데려와 놓고 그를 제대로 살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가진 거였지만, 레이너드는 그녀에게 미안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모두 다 그를 만나기 전에 일어난 일인 데다가 그가 미리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네가 왜 미안해?”
“옆에, 못 있어, 줘서. 많이 괴로웠을 것, 같아.”
그는 감정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서 끅끅거리느라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사고를 당해 죽어 가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던 윤세나의 모습에서 마차 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의 모습을 발견한 것일까.
유리나는 일부러 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밝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옆에 있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그게 뭐가 미안해.”
“그래도 미안해.”
“미안해할 필요 없어. 이미 다 지난 일인걸.”
피식 웃으며 대답한 유리나는 이 대화가 조금 전 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똑같이 흘러간다는 것을 느꼈다.
‘나와 같은 마음일까.’
자신의 아픔보다 상대의 아픔을 더 크게 받아들이고 같이 아파한다. 이게 바로 진짜 사랑인가 싶었다.
유리나가 어깨를 토닥여 주었지만, 좀처럼 진정을 할 수 없었는지 레이너드는 계속 몸을 파르르 떨었다. 잠시 뒤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그는 고개를 들어 유리나를 한 번 보다가 그녀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내 말을 다 믿어?”
“응.”
“내가 이상한 소리만 했는데도?”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린가 했어. 그런데 네 말을 듣고 나니까 그동안 이상했던 점이 다 이해가 가.”
레이너드의 입술이 유리나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떨어졌다. 동시에 화한 느낌이 나면서 무형의 기운이 몸을 타고 흘러들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유리나는 대번에 그가 치유 마법을 썼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의 입술이 이번에는 목덜미에 닿았다. 똑같은 화한 느낌이 목덜미를 따라 느껴졌다.
“넌 처음 만났을 때도 열 살 아이 같지 않고 꼭 다 큰 어른을 보는 것 같았어. 그냥 그때는 귀족이라서 다른 건가 했는데, 아카데미에서 에이든이나 다른 아이들을 만나고 나니까 귀족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란 것을 알았어.”
“응.”
“게다가 네가 죽는 것을 과하게 무서워하는 것도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사람들은 모두 죽는 걸 두려워하잖아. 지금도 난 죽는 게 두렵거든. 그런데 넌…….”
다시 감정이 울컥 치미는 듯 그가 이를 악물고 숨을 고르다가 여민 가운 사이로 살짝 드러난 유리나의 맨살을 손끝으로 더듬거렸다. 지금의 몸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고의 흉터를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다정한 손길이었다.
“유독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어. 고작 열 살짜리 애가 막연한 죽음이 뭐가 두려울까 싶었거든. 나처럼 주위에 죽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
“그런데 크론 왕국에서 공격을 받은 걸 보고 네가 늘 위험 속에서 살아왔다고 생각했어. 어릴 땐 몰랐지만, 어느 정도 큰 다음엔 귀족가에서 태어난 것이 마냥 좋은 건 아니란 것을 알았거든. 특히 카르티아가 정도 되면 적도 많을 테니까. 물론, 후작님이나 후작 부인이 나쁘단 소리는 아니야. 두 분 모두 좋은 분이셔. 그렇지만 싫어하는 사람이 어딘가에는 있을 수도 있잖아.”
“응.”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그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의 얼굴이 지나간 자리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자국을 만들어 냈다.
레이너드가 잘게 떨리는 입술로 유리나의 배 위에 입을 맞췄다. 치유 마법 특유의 화한 느낌이 나면서 몸 전체로 충만한 마나의 기운이 퍼져 나갔다. 뜨거운 숨결이 닿았던 자리 위로 그보다 더 뜨거운 감정을 담은 눈물이 톡톡 떨어졌다.
“많이…… 아팠을 것 같아.”
유리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제 위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괜찮아. 벌써 7년이나 된 일인걸.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기억 하나도 안 나.”
그를 달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은 뒤에야 그녀는 아까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괜찮다고 말했던 레이너드의 말이 역시나 거짓말이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아까 그도 지금 그녀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었을 테다. 자신의 몸속에서 이미 곪고 곪아 썩어 버린 상처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이 더 끔찍했다.
“진짜 괜찮아.”
사실 괜찮지는 않다. 그래도 그를 안심시킬 수만 있다면 이 선의의 거짓말도 몇 번이고 말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유리나의 위로에도 그는 계속해서 그녀의 몸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며 치유 마법을 썼다.
마치 그렇게 하면 7년 전 끔찍한 사고의 상처가 말끔히 씻길 수 있다는 듯이.
* * *
“그러니까 네가 본 미래가 전에 살던 곳에서 읽던 책의 이야기라는 거지?”
어느새 진정이 됐는지 레이너드가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으며 유리나에게 팔베개를 해 주었다. 그는 더 이상 울지는 않았지만 하도 운 탓에 그의 흰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가가 붉었다.
유리나는 알량한 실력으로나마 그의 부은 눈가를 치료해 주고 싶었지만, 눈가를 만지기도 전에 그에게 손이 잡히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아이를 혼내는 것처럼 유리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 표정이 너무나 단호해서 유리나는 치유 마법을 쓰는 대신 그의 붉은 눈가에 입을 맞춰 주었다.
레이너드가 다른 쪽도 해 달라며 고개를 돌려 반대쪽 눈을 보여 주었다. 유리나는 그의 오른쪽 눈에도 쪽쪽 입을 맞췄다.
만족스럽게 웃은 레이너드가 보답하듯 유리나의 눈두덩 위에 입술을 길게 눌렀다 뗐다.
“넌 사고를 당해서 죽었는데 깨어나니 유리나 카르티아가 되어 있었고.”
“응.”
“책에서 봤던 내용 때문에 이대로 가다간 카리온이 널 죽일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데프론 후작보다 먼저 카리온을 찾아 고아원을 돌아다닌 거야. 그러다가 금발에 붉은 눈을 가진 날 카리온으로 착각하고 데려온 거고. 맞아?”
“응, 맞아.”
“그래도 불안하니까 황태자비에 간택되지 않도록 황태자 전하를 철저하게 피했던 거라는 거지?”
울먹이느라 유리나가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는데 그의 요약은 완벽했다. 유리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카리온도 내가 데리고 있으니 황태자 전하와 엮이지만 않으면 모든 것이 잘 될 거라 생각했어. 데프론 후작이 원하는 건 자기 딸이 황태자비가 되는 거였으니까. 날 라이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굳이 힘을 들여 가며 날 죽일 이유가 없잖아.”
“그런데 알고 봤더니 네가 읽었다는 소설책 내용처럼 카리온이 데프론 후작가의 후원을 받고 있었어. 그래서 그렇게 놀랐던 거지? 카리온이 그 소설에서 그랬던 것처럼 널 죽일까 봐.”
“그렇기는 한데…….”
유리나는 말을 흐리며 레이너드의 표정을 살폈다.
‘왜 이렇게 차분하지?’
처음 카리온을 보았을 때 평정심을 잃었던 모습과 달리 지금 그는 끔찍한 고통을 겪은 유리나를 안쓰러워할 뿐,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리나는 과할 정도로 차분한 그의 모습이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진짜로 다 믿는 거야?”
“믿는다고 했잖아.”
그는 그런 걸 왜 새삼 묻느냐는 투로 대꾸했다. 그러나 유리나는 여전히 얼떨떨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아?’
그는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 있는 유리나의 말을 모두 믿는다고 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과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적어도 자신이 살던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 그것도 책 속 세계라는 것을 알면 동요를 할 법도 한데 말이다.
“무섭지 않아? 내가 다른 곳에서 오고 미래를 다 알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게 왜 무서워? 그걸 알고 있던 덕분에 네가 날 만나러 온 거잖아.”
“그렇지만…….”
유리나는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푹 묻었다.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가장 마음속 깊이 담아 두고 있던 말은 아직 꺼내지 않았다.
늘 자신을 보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웃는 그를 볼 때마다 마음을 쿡쿡 찔러 대던 그 마음을.
‘말해도 될까.’
이대로 모른 척 넘어가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유리나는 초조함에 근육이 잡힌 그의 등을 괜히 더듬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난 널 이용하려고 했어.”
그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안 이후로,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것을 안 이후로 늘 마음속에 자리 잡던 죄책감이었다. 이기심으로 그를 후원하기로 한 자신은 그의 순수한 애정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그런 죄책감.
서로의 마음을 온전히 안 뒤에도 그가 이 모든 사실을 알면 전처럼 자신을 순수하게 사랑할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널 데려온 것도, 네게 잘해 준 것도 모두 날 위해서 그런 거야. 그런데 넌 괜찮아?”
그런데 레이너드는 이번에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게 뭐가 어때서?”
“…….”
“애초에 너도 날 순수하게 후원하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기억 안 나? 네가 날 데려온 건 처음부터 거래였어. 네가 날 그 지옥에서 꺼내 준 대가로 난 널 지켜 주기로 한 거야.”
레이너드가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때 한 번 말했잖아. 널 지켜 달라는 약속 따위 지키지 않으면 그만이야. 내가 그 약속 다 무시하고 크론 왕국에 남거나 작정을 하고 숨어 버린다면 네가 날 찾을 수 있었겠어?”
“아니.”
“그렇지?”
그가 가볍게 웃었다.
“난 네게 이용당하려고 돌아온 거야.”
이용. 그 단어가 주는 의미는 분명 가볍지 않았는데 그는 참 별것 아닌 것처럼 가볍게 이야기했다.
“나는 네가 원했던 것처럼 너에게 이용당하면서라도 네 옆에서 나란히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네가 날 사랑하기까지 한대. 세상에서 나만큼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넌 아니었던 거야?”
유리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나도 엄청 행복해.”
“그럼 된 거잖아. 안 그래?”
웃음기 섞인 그 말 하나에 그녀는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쩐지 이젠 정말로 순수하게 그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안도감과 자신감이 들었다.
유리나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자 레이너드가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그건 그렇고, 네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네가 당했던 일들이 자꾸 마음에 걸려.”
“나도 그래.”
유리나는 사냥 대회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내가 읽었던 소설에서 난 분명 무사히 성년식을 치렀어. 크론 왕국에서의 일은 소설과 달리 내가 널 만나러 갔기 때문에 변할 수 있다고 치지만 사냥 대회에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걸까. 네가 조기 졸업을 하고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아니, 내가 진짜 카리온을 찾았더라면 난 죽었을 거야.”
“뭐?”
레이너드가 처음으로 동요를 보였다.
“이야기가 변했다고.”
처음엔 레이너드가 조기 졸업을 하고 온 것부터 이야기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원작 내용과 달리 조기 졸업을 하고 돌아온 것은 카리온과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유리나가 레이너드가 아니라 카리온을 데리고 왔더라면 이번 사냥 대회 때 꼼짝없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체 그 일을 누가 꾸몄을까. 유리나가 그날 죽었다면 가장 이득을 볼 사람은 누구였을까.
생각의 생각을 해 보아도 결론은 같았다.
“아무래도 자꾸 데프론 후작이 마음에 걸려.”
“데프론 후작과 카리온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거야?”
유리나는 적의가 가득 담긴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잘 몰라. 그러나 지난번 배후로 꼽혔던 백작의 뒤에 진짜 배후가 있다면 데프론 후작일 가능성이 커. 사실 아버지에게 사냥 대회 이후 데프론 후작가가 수상하다는 말을 드렸어. 그런데 오빠랑 아버지가 그동안 조사를 했지만 데프론 후작가에서는 그때 그 백작과 연관성을 찾지 못했대.”
그래서 유리나는 정말로 데프론가가 이번 일에 연루되지 않은 건가 싶었다.
오늘, 카리온을 만나기 전까지는.
“카리온이 있었다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연락이 가능했을지도 몰라.”
레이너드가 심각하게 덧붙였다.
“아니면 흑마법을 이용했을지도 모르지. 흑마법은 황실 마법사들도 알아채지 못했으니까.”
유리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쪽이든 다시 조사를 해 봐야 할 것 같아.”
순간, 찬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지나간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유리나가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떨자 레이너드가 그녀의 몸을 이불로 둘둘 감쌌다. 그러나 외부적인 요소가 아니라 심리적인 요소 때문인지 여전히 몸이 싸늘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레이너드가 이불 위로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말했잖아. 널 살릴 수 있는 것도, 죽일 수 있는 것도 나뿐이야. 아무도 널 못 건드려.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자식들이 널 못 건드리게 할 거야.”
분명 유리나에게 처음 말했을 때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지금 그의 목소리에선 적의를 넘어 살기마저 느껴졌다. 오싹할 법도 한데 이상하게 그의 으름장에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아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든든하네.”
레이너드라면 진짜로 모든 위험으로부터 그녀를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7년 동안 감추려고 애쓰고 혼자서만 끙끙 앓았던 비밀을 공유한 사람이 생겨서일까. 머리가 조금 맑아진 것 같았다. 그러고 나니 아까는 카리온의 존재에 놀라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의문이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레이, 아까 봤던 카리온 말이야.”
“그 자식은 갑자기 왜?”
유리나는 그를 달래기 위해 그의 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렇게 반응할 필요 없대도.”
“알아. 근데 네가 그 자식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싫어.”
“이번 한 번만 이해해 줘. 응?”
유리나가 눈을 접으며 웃자 그의 표정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가 엄지로 반달처럼 휜 유리나의 붉은 눈가를 살살 매만졌다.
“내가 네 웃음에 약하다는 걸 알고 이렇게 써먹는 거지?”
“아냐. 네가 좋아서 웃는 거야. 너만 보면 웃음이 나와.”
예전에 그가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돌려주자 그가 그녀를 샐쭉 흘겼다. 그렇지만 마냥 싫지는 않은지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서 카리온은 왜?”
“얼굴 기억나지?”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유리나가 찾고 있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카리온이라는 사실이 엄청 충격적이긴 했나 보다.
“아카데미에서 그 남자를 본 적 있어? 아카데미를 다녔다면 너랑 동급생이었을 거야.”
그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렇게 바로 대답하지 말고 생각 좀 해 봐.”
“음…….”
그는 이번에는 한 5초 정도 뜸을 들이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없어. 왜 묻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아카데미 학생이 아냐.”
“정말? 네가 못 본 건 아니고?”
“크론 왕립 아카데미는 너도 알다시피 정원이 다 차지 않아도 실력이 되지 않는 사람은 뽑지 않기로 유명해. 마법과는 교수님들의 눈이 워낙 높다 보니 정원 미달이 유독 심해서 한 학년당 학생 수가 많이 적어. 7년 동안 겹치는 수업이 많기 때문에 학년에 상관없이 웬만하면 다들 얼굴 정도는 알고 지내. 동급생이라면 더더욱 모를 리가 없어. 확실해. 우리 아카데미 학생이 아니야.”
“그렇단 말이지.”
유리나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이자 레이너드가 재촉하듯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없기 때문에 유리나는 순순히 털어놓았다.
“내가 봤던 이야기에서 카리온은 분명 크론 왕립 아카데미를 다녔어. 내가 널 거기로 보낸 것도 사실 그 때문이야.”
그녀는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서둘러 덧붙였다.
“아, 물론 개인적으로도 널 거기로 보내는 것이 너한테 낫다고 생각했어.”
이미 다 지난 일이긴 하지만 유리나는 어린 레이너드를 제 이기심 때문에 그 먼 땅에 혼자 보낸 것에 아직도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카리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까. 그가 꼭 그곳에 갈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에 더 마음이 쓰렸다.
그때 하얀 눈을 맞으며 가기 싫다며 울먹이듯 웃던 그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유리나가 또르르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보자 레이너드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코끝에 입을 맞췄다.
“다 지난 일이잖아. 신경 쓸 것 없어. 그리고 그때 말했듯이 난 네가 어떤 이유에서 그랬든 내 말을 들었을 거야. 결과적으로 크론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것이 나에게 낫기도 했고.”
“정말?”
“응. 에이든이랑 아이들을 만났으니까.”
에이든을 귀찮아하긴 해도 마음속으로는 세상에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카리온이 원래라면 크론 왕립 아카데미에 다녔다는 거지?”
“응.”
유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너드가 심각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없었지?”
“내 말이 그 말이야. 데프론 후작은 왜 카리온을 아카데미에 보내지 않은 걸까. 아니, 그 전에 왜 카리온의 존재를 밝히지 않았던 걸까? 보통 능력 있는 후원자를 후원하게 되면 다들 자랑하느라 바쁘단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분명 아카데미 가기 전에도 유명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원작에서는 붉은 눈이 여신의 상징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지만 카리온의 천재성은 데프론 후작이 그를 데려왔을 때부터 이미 알려졌다. 데프론 후작이 성대하게 파티를 열어 대대적으로 카리온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카리온을 시기한 사람들이 그의 붉은 눈을 갖고 이죽대는 것을 보며 리디아가 나서서 한 소리 했던 회상 에피소드도 읽은 기억이 났다.
레이너드를 보았을 때 베아투스를 찾았다며 기뻐하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카리온을 찾았을 때 당연히 사교계에 떠들썩하게 소문을 냈어야 옳았다.
그런데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데프론 후작은 카리온을 꼭꼭 숨겼을까?
‘설마 레이 때문에?’
유리나는 지금껏 원작과 조금씩 바뀐 내용들이 레이너드와 관련이 있다고 추측했다. 데프론 후작 또한 레이너드를 만난 적이 있으니 그로 인해 이야기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고작 그것 때문에 그럴 리는 없어.’
데프론 후작이 단순히 레이너드를 만났다고 해서 카리온의 존재를 숨겼을 리가 없었다.
“레이, 만약 네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새로운 마법 이론을 발견했다고 해 봐. 그럼 넌 그걸 아무도 모르게 숨겼다가 나중에 밝힐 거야, 아니면 발견하자마자 밝힐 거야?”
뜬금없는 유리나의 질문에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그는 착실히 대답을 해 주었다.
“당연히 발견하자마자 밝혀야지.”
“역시 그렇지?”
“응. 사람들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마법사들은 유독 더 그래. 내가 남들보다 잘났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이거든.”
“그럼 왜 데프론 후작은 카리온의 존재를 숨긴 걸까?”
마법 이론과 카리온은 개념이 좀 다르지만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데프론 후작은 카르티아 가문을 적대적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경쟁하듯 카리온의 존재를 드러내야 하지 않았을까?
‘아카데미에 보내지 않은 건 더 수상해.’
카리온의 존재 자체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을 수는 있어도 마법사들에게 최고로 꼽히는 아카데미를 포기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의외였다.
유리나는 예전에 레이너드와 데프론 후작이 마주쳤던 날을 떠올렸다. ‘베아투스’를 발견했다며 기쁜 듯이 웃던 후작.
‘잠깐만.’
거기서부터 이미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당시에 유리나는 어떻게 그가 베아투스를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만 갖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카르티아가에서 후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레이를 데려가려고 했었어.’
그거야 데프론 후작이 카르티아가에 갖고 있는 적대감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유리나는 그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레이너드를 데려갈까 봐 두려워했다.
카리온이 원작에서 크론 왕립 아카데미를 다니기도 했지만, 레이너드를 필사적으로 아카데미에 보내려고 했던 것도 그가 데프론 후작과 리디아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데프론 후작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를 데려가려고 수를 쓰거나, 하물며 그를 만나러 오지도 않았다.
‘대체 왜?’
전에는 그저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상했다. 그렇게 깔끔하게 포기할 거였다면 애초에 레이너드가 이미 귀족가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 데프론 후작은 대체 그 짧은 사이에 무슨 마음의 변화가 있어서 레이너드를 포기한 것일까?
유리나는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며 눈을 찌푸렸다.
―귀한 분을 몰라 봬서 인사가 늦었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후작님. 이미 들으셨다시피 저는 카르티아 가문의 은혜를 받고 있는 레이너드라고 합니다. 제 능력을 높이 사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지금 제 처지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레이너드?
―그렇습니다.
―레이너드, 그래, 레이너드라…….
분명 데프론 후작은 그 대화 이후 더 이상 레이너드에게 데프론가로 오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당사자인 레이너드가 직접 거절을 해서 그랬던 걸까.
‘그럴 리가 없지.’
고작 그런 걸로 포기할 남자였다면 애초에 다른 가문의 후원을 받고 있을 때 미련을 버렸어야 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유리나는 제 얘기만 줄줄 늘어놓던 데프론 후작이 유독 레이너드의 이름에 반응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자네 부모가 이름의 뜻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나? 고대어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면 마법사였을 것 같은데.
―제 부모님은 마법사가 아니셨습니다. 제 이름 또한 그분들이 지어 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지어 준 이름이지?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가리키자 데프론 후작은 예의 그 소름 끼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영애는 정말 훌륭한 보석을 얻었군. 정말 재밌게 됐어. 그대가 손에 쥔 인재가 어떤 인재인지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그녀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을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 순간,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너 말고 베아투스가 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나 봐.”
이유나 근거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데프론 후작은 어쩌면 우연히 고아원에서 카리온을 발견한 게 아니라, 유리나처럼 카리온을 찾아 고아원을 돌아다닌 거라고.
원작을 보았을 때 유리나는 고아원을 돌아다니던 데프론 후작이 우연히 재능이 있는 카리온을 발견하고는 후원했다고 생각했다. 붉은 눈이 여신의 상징이며, 붉은 눈을 가진 이들은 모두 마법에 재능을 타고났다는 건 나중에 밝혀지는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데프론 후작은 7년 전, 유리나를 만났을 당시에 이미 ‘베아투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뿐만 아니라 ‘베아투스’를 찾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런 사람이 우연히 카리온을 발견했다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계획적으로 찾아다녔다는 것이 옳을까.
‘그런데 카리온이 고아원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머릿속에 의심이 가는 가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걸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었다.
그래서 떠오른 것이 카리온이었다.
그녀를 만나자마자 만난 적이 없냐며 눈물을 흘리고, 계속해서 할 말이 있다며 그녀에게 다가오던 카리온.
그는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레이, 오해하지 말고 들어.”
“뭔데?”
“카리온을 만나 봐야 할 것 같아.”
유리나는 그가 이상한 생각을 하기 전에 재빨리 덧붙였다.
“사실 전에 카리온을 만난 적이 있었어.”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던 그의 팔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언제?”
“사냥 대회 때. 바람 좀 쐴 겸 산책을 갔다가 잠깐 마주쳤었어. 그런데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고.”
“무슨 소리?”
“나보고 자기를 어디서 본 적이 없냐고 물었어.”
레이너드가 그녀의 몸에 몸을 바짝 붙이며 속삭였다.
“귀담아들을 필요 없어.”
“그런데 날 보고 울더라고. 진짜로 꼭 아는 사람을 본 것처럼.”
“…….”
“네가 달가워하지 않는 건 알아. 그런데 그때 했던 말도 그렇고, 아까 잠깐 이야기하고 싶다는 말이 마음에 걸려. 데프론 후작에 대해서 좀 더 조사하려면 카리온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아.”
유리나는 딱딱하게 굳은 그의 등을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단둘이 만나겠다는 소리가 아니야. 나도 카리온과 혼자서 만나고 싶지 않아. 너만 괜찮다면 너랑 같이 만나 보고 싶어. 어떻게 생각해?”
“…….”
“그때 리디아 데프론이 한 말 들었지? 곧 서신이 올 것 같아. 그때 넌지시 카리온과 네가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하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고민을 하는 듯 한참을 말이 없던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게 널 위한 거라면 그래야지.”
* * *
며칠 뒤 유리나의 앞으로 편지와 함께 선물이 왔다. 발신자는 예상했던 대로 리디아 데프론이었다.
‘그다지 반갑지는 않네.’
유리나는 베시가 테이블 위에 놓아 준 편지와 선물 상자를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살짝 인상을 쓰고 바라보았다. 리디아가 편지를 보낼 것이란 것은 짐작했지만, 막상 또 편지를 받으니 그녀의 속내가 짐작이 가지 않아 꺼림칙했다.
유리나가 원수를 보듯 편지를 노려보자 차를 준비하고 있던 베시가 덩달아 심각해져서 물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럼 정신이 드실 수 있도록 시원한 차를 준비해 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 번거롭잖아.”
“번거롭기는요. 그냥 주방에 한 번 다녀오면 되는걸요.”
“그게 번거로운 거지. 말만이라도 고마워.”
베시에게 살짝 웃어 보인 유리나는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나 이내 검지와 엄지 끝으로 편지 끄트머리를 살짝 잡았다. 열흘은 빨지 않아 고약한 냄새 나는 걸레라도 잡는 듯한 모양새에 베시는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베시가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나는 최대한 손을 멀리 뻗으며 편지에 적힌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리디아 데프론]
단아하게 생긴 외모와 어울리는 깔끔하고 단정한 글씨체였다. 그 반대편에는 분홍색 밀랍 위에 백합이 그려져 있는 데프론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겉보기에는 수상할 게 없는 모양새였지만 유리나의 눈에는 더 없이 수상하게 보였다.
유리나가 리디아의 이름과 데프론가의 인장을 번갈아 보며 수상한 점이 없나 살펴보고 있을 때, 베시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홍차를 따른 찻잔을 왼손으로 들어 유리나의 앞에 놓아 주었다. 오른손잡이인 유리나가 오른손으로 바로 찻잔 손잡이를 잡을 수 있도록 해 준 배려였다.
그 사소한 것 하나에서 베시의 배려와 능숙함이 엿보였다. 일에 서툰 하녀들은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으로 잔을 들었다가 잔을 내려놓고 뒤늦게 손잡이를 오른쪽 방향으로 옮겨 놓는 일이 빈번히 있었다.
유리나는 베시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눈웃음을 지어 준 뒤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상큼한 과일 향이 입 안 가득 퍼지자 복잡했던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베시.”
“네, 아가씨.”
“레이랑 데이브 좀 불러 줄래? 아마 둘 다 지금 데이브의 연구실에 있을 거야.”
“금방 다녀올게요!”
베시는 유리나의 앞에 쿠키가 담긴 접시를 밀어 준 뒤 재빨리 방을 나갔다. 유리나는 리디아의 편지를 최대한 멀찍이 밀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해.’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편지와 선물 상자지만, 보낸 사람이 리디아 데프론이다 보니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저것들에 이상한 마법이라도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능하면 아예 버리고 싶지만 카리온과 대화를 하고 데프론 후작과 데프론 후작가의 미스터리를 풀려면 리디아와의 교류가 꼭 필요하니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유리나가 여유로운 척을 하며 홍차 한 잔을 모두 비울 때였다. 방 안의 마나가 일렁이더니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레이너드, 데이브 그리고 베시가 나타났다.
“와! 이게 공간 이동 마법이에요? 저 공간 이동 마법은 처음이에요! 신기해라!”
베시가 아이처럼 들뜬 얼굴로 손뼉을 쳤다. 레이너드를 흘끔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경외감과 함께 마치 부모가 훌륭하게 자란 아이를 보며 감격스러워하는 것 같은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연구실에서 유리나의 방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고는 하지만, 무려 두 명을 데리고 공간 이동을 하고도 레이너드는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 멀쩡한 얼굴을 살피던 베시가 옆에 서 있던 데이브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런데 데이브 님은 공간 이동 마법을 못 하시나요?”
“할 수 있습니다!”
베시의 질문이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그는 다소 굳은 얼굴로 콧잔등에 흘러 내려온 안경을 위로 밀어 올렸다.
“그렇지만 전에 아카데미에서 아가씨가 위험에 처했을 땐 이동 마법을 쓸 수 없으니 뛰어가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잘 뛰지도 못하시는 분이…….”
베시는 원래 남의 잘못이나 약점을 끄집어내는 편이 아니었다. 아마 이렇게 지적을 하는 건 그 당시 유리나가 위험에 처했을 때 엄청 가슴을 졸였기 때문이리라.
“그때, 그건! 좌표가 정확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연구실에서 이곳으로 이동하는 건 정확한 좌표를 알고 있기 때문에…….”
“제가 분명 정문 근처라고 말씀드렸었는데요!”
“아가씨께서 갑자기 사라지셨다고 하셨잖습니까. 아론 경과 아가씨 둘을 데리고 잠깐 사이에 순간 이동을 했을 가능성이 적으니 공간 분리 마법을 썼다는 소린데, 그럼 주위의 마나가 어그러져서 공간 이동 마법을 잘못 쓰면 큰일이 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래도 베시가 미심쩍은 얼굴로 바라보자 데이브가 오른손으로 왼쪽 팔꿈치를 툭 쳤다.
“잘못하다가는 이렇게 팔다리가 분리되는 수가 있어요.”
베시가 꺅 소리를 지르며 입을 막았다.
“어, 어, 어떻게요? 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좌표가 잘못되면 몸은 이곳에, 팔은 저곳에, 다리는 또 다른 곳으로 각각 이동을 하는 수가 있어서…….”
베시는 베시 나름대로, 데이브는 데이브 나름대로 몇 년간 말하지 않고 쌓여 있던 감정이 있었는지 두 사람은 이러쿵저러쿵 사소한 말다툼을 이어 갔다.
레이너드는 두 사람을 꼭 소꿉장난을 하다 싸우는 다섯 살 아이들을 보는 것처럼 귀엽다는 듯 웃었다.
정작 유리나는 그런 그가 가장 웃겼다.
‘베시랑 데이브가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데.’
레이너드는 자기 자신이 다 자랐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마 저 두 사람 눈에는 아직도 애로 보일 테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불렀어? 베시가 네가 나와 데이브를 찾는다고 하길래 큰일인가 싶어서 마법으로 왔는데.”
얼른 표정을 갈무리한 유리나는 잔을 내려놓고 그를 향해 편지와 선물 상자를 가리켜 보였다.
“거기에 혹시 마법 같은 게 걸려 있는지 확인 좀 해 줄래?”
“이 편지? 누가 보낸 거길래 그래?”
“리디아 데프론.”
편지를 집어 살펴보던 레이너드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냥 태워 버릴까?”
“음,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뭐라고 쓰여 있는지는 확인을 해 봐야…… 안 돼! 태우면 안 된다니까!”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손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손에 마나를 모으던 레이너드가 재빨리 마나를 갈무리했다.
“불길한데.”
“일단 확인해 보고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태울게. 그럼 되지?”
그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도 차분하게 손끝에 마나를 모았다. 그의 손끝에서 터져 나온 빛이 편지와 선물 상자를 감싸 안더니 초록색 빛을 띠며 사라졌다.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아.”
“혹시 흑마법으로 저주 같은 건 걸려 있지 않아?”
아직까지 사냥 대회에서 처음 발견된 흑마법이 데프론가와 관련되어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여전히 데프론가를 의심하고 있었다.
다행히 레이너드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이상한 게 있다면 불쾌한 느낌이 있을 텐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그럼 편지를 열어 봐도 될까?”
“응. 그렇지만 혹시 모르니까 내가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도 돼?”
“응.”
유리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조심스럽게 편지의 인장을 뜯었다. 유리나는 내심 긴장을 했지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레이너드는 눈으로 편지를 한 번 쓱 훑더니 천천히 편지를 읽었다.
[친애하는 카르티아 영애께.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그때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셔서 그날 이후로 계속 걱정했답니다. 사실 그다음 날 바로 편지를 보내고 싶었는데,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편지를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이제야 겨우 보내네요.
그날 제 행동에 영애께서 당황해하셨을 거란 생각이 뒤늦게 들었어요. 영애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영애와 앞으로 교류를 하며 친하게 지내고 싶답니다.
저희뿐만 아니라 레이너드 경과 카리온 또한 서로 교류하면서 지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같은 베아투스니 서로 통하는 게 있지 않을까요?]
여기까지 읽은 레이너드가 손을 파르르 떨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통하는 게 있을 리가.”
“그건 나도 동의해. 통할 리가 없지.”
사실 통하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금 했지만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눈치를 보며 태연하게 거짓말을 내뱉었다.
그녀가 손을 토닥여 주자 레이너드가 조금 진정을 하고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주말에 영애를 저희 저택에 초대를 하고 싶어요. 저희 저택 뒤뜰에 있는 정원의 장미가 참 탐스럽게 피었답니다. 그곳에서 함께 티타임을 가지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갑작스러운 제안인 거 알아요. 내키지 않으시다면 부담 갖지 마시고 거절하셔도 상관없어요.
그럼 영애의 답장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제국력 473년 장미의 달 7일
리디아 데프론.
추신. 편지와 함께 보내 드리는 건 저희 데프론 영지의 특산품인 찻잎과 찻잔이에요. 부디 영애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편지를 다 읽은 레이너드는 편지를 반으로 접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가지 마.”
그러나 유리나는 그러겠다고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뜸을 들이는 그녀를 보다가 레이너드가 의자를 끌어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분명 무슨 일을 꾸미는 게 분명해.”
“나도 좀 수상하기는 한데 리디아와 카리온을 만나긴 해야 하잖아.”
“그래도 안 돼.”
레이너드는 단호하게 일축했다. 유리나 또한 딱히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호랑이 굴에 멍청하게 내 발로 들어갈 필요는 없어.’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가 직접 가는 거 말고, 리디아를 저택으로 초대하는 건 어때?”
“음…….”
그것도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는지 레이너드가 말을 아꼈다.
“정말로 리디아가 데프론 후작저에서 일을 꾸미고 날 초대한 거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날 데프론 저택에 오도록 설득하지 않을까? 반응을 보면 정말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내게 호의를 갖고 그러는 건지 대충은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그렇지.”
“만약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리디아가 우리 저택으로 오면 더 좋지. 네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 아냐. 대화도 할 수 있고.”
여전히 그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기는 하지.’
레이너드가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기에 유리나는 그를 재촉하지 않고 그가 먼저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솔직히 그녀도 레이너드를 믿기는 했지만 유리나도 리디아를 선뜻 저택에 초대하는 게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불안하다고 해서 마냥 데프론가와 카리온을 피할 수는 없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레이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내가 아무 탈이 없도록 준비를 잘 해 둘게.”
“고마워.”
그에게 웃어 보인 유리나는 재빨리 서랍장에서 편지지와 깃펜을 꺼내 답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귀족가의 사람들이 편지를 보낼 때 그러하듯 형식적인 안부 인사를 적고, 자신도 리디아와 친해지고 싶다는 말을 슬쩍 흘렸다.
“장미는 저희 저택의 장미가 아름답다고 수도에서 소문이 자자하답니다. 영애의 초대는 감사하나, 영애께서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영애를 초대하고 싶습니다. 오신다면 분명 같이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유리나는 유려한 글씨체로 써 내려간 편지를 선생님에게 검사라도 받는 것처럼 레이너드에게 내밀었다. 그는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직접 데프론 후작저로 가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괜찮을지 모르겠어.”
유리나는 편지를 접어 밀랍으로 봉인한 뒤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있을 텐데 뭔 걱정이야. 그리고 만약 카리온이 따라온다면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으니 좋은 일이지.”
그녀는 불만스럽게 입술을 달싹이는 그를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보고 새끼 오리라더니 정말 오리는 여기 있었네.”
유리나는 여전히 순간 이동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데이브와 베시를 보다가 레이너드의 팔을 잡고 옷장 뒤로 숨었다. 두 사람이 자신들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한 후 레이너드의 입에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카리온의 이야기에 불쾌하단 표정을 짓고 있던 레이너드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유리나는 입을 한 번 더 맞춘 뒤 서랍장으로 다가가 습관적으로 향수를 꺼냈다.
“뭐 해?”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온 레이너드가 물었다.
“편지에 향수 좀 뿌리려고.”
한 손에는 편지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향수를 조준하는 유리나의 손을 그가 그녀의 등 뒤에서 손을 뻗어 급하게 잡았다. 유리나가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레이너드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왜? 안 돼?”
“안 되는 건 아닌데…….”
그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싫어.”
싫을 게 뭐가 있나. 편지에 향수를 뿌리는 건 사교계 영애들이라면 다들 하는 건데. 의아하게 생각하며 향수와 레이너드의 얼굴을 두어 번 번갈아 보던 유리나의 머릿속에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 편지에 향수를 뿌리는 게 싫어?”
레이너드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유리나는 그 침묵이 긍정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한테 보내는 건데도?”
“그래도 싫어.”
이게 대체 뭐라고 그의 귓가가 살짝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유리나는 피식피식 웃음을 삼키다가 편지 대신 그의 목덜미에 향수를 뿌렸다.
“너한테서 좋은 냄새가 난다.”
유리나가 코로 숨을 들이쉬며 속삭이자 레이너드가 향수를 들고 있는 유리나의 손을 잡았다. 그는 유리나에게 향수를 뿌리는 대신, 유리나가 향수를 뿌린 목덜미에 그녀의 손등을 문질렀다.
그러고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너한테서 나랑 같은 냄새가 난다.”
유리나는 샐쭉 그를 흘기며 그의 어깨를 한 번 꾹 누른 뒤 옷장 뒤에서 나가며 베시를 불렀다. 데이브의 말에 반쯤은 설득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베시가 쪼르르 달려왔다.
“시키실 일 있으세요?”
“이것 좀 파발꾼에게 전해 줄래?”
베시는 유리나가 건네준 편지를 받고 재빨리 방을 나갔다.
그날 저녁, 리디아 데프론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
초대에 기쁘게 응하겠다는 답장이었다.
리디아 데프론이 저택을 방문하기로 한 날, 오전. 며칠 전부터 데이브의 연구실에 처박혀서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레이너드가 주먹만 한 주머니를 가지고 유리나를 찾아왔다.
그는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는 유리나의 볼에 입을 한 번 맞춘 뒤 주머니에서 갖가지 액세서리를 꺼냈다. 정확히는 액세서리를 빙자한 마법 아티팩트였다.
“이거 기억나지? 그때 줬던 목걸이랑 같은 거야. 지난번과 똑같이 사용하면 돼.”
레이너드가 빨간 펜던트가 달린 가죽끈 목걸이를 유리나의 목에 조심히 걸어 주었다. 간단한 간식거리를 준비하며 그 모습을 보던 베시가 아는 체를 했다.
“그거 사냥 대회 때 아가씨께서 하고 계셨던 목걸이와 같은 거 맞죠?”
그녀는 펜던트가 달랑거리는 유리나의 목을 살피다가 울상을 지었다. 아직도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감정이 요동치는 모양이었다.
베시는 유리나와 레이너드를 보며 눈시울을 붉히다가 소매로 눈가를 톡톡 두드리며 목걸이에 어울리는 드레스를 찾겠다며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레이너드는 그런 베시의 뒷모습을 조금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주머니에서 붉은 보석이 달린 팔찌를 꺼내 유리나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지난번, 사냥 대회 시작 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손수건을 찾으러 가면서 유리나에게 채워 줬던 위치 추적 아티팩트였다.
사냥 대회가 끝나고도 줄곧 유리나가 갖고 있었는데, 리디아가 초대에 응하는 편지를 보낸 날 그는 유리나에게서 그 팔찌를 다시 받아 갔다.
유리나는 조금 꺼림칙한 얼굴로 그가 팔찌의 고리를 푸는 것을 바라보았다. 레이너드가 얼른 팔을 달라는 듯 눈치를 주었지만 그녀는 두 손을 등 뒤로 감추며 버텼다.
“자꾸 이상한 거 채울래?”
지난번에는 내키지는 않아도 추적 마법 팔찌를 찰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순순히 찼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기껏 해 봤자 정원에서만 계속 있을 텐데 위치 추적이 필요할 리가.
그러나 레이너드는 자기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듯한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유리나에게 다가오더니 그녀의 등 뒤에 있는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이상한 거 아니라고 했잖아.”
“이상한 곳에도 쓴다는 건 네가 그랬어.”
“그렇기는 한데.”
그는 유리나를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손목 안쪽을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그의 손가락이 스친 곳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래.”
“무슨 이유?”
“그냥 위치 추적 아티팩트가 아니라 기능을 조금 강화했거든.”
“무슨 기능을 추가했길래 같은 저택 안에 있는데도 이걸 주려고 하는 거야?”
“공간 이동 마법.”
“정말? 그런 게 가능해?”
유리나는 놀라움 반, 의심 반의 감정을 담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그가 제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를 보여 주었다.
“그냥 이동 마법은 안 되고, 내가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이야. 거리가 멀면 안 되지만, 같은 저택 내에서는 충분히 쓸 수 있을 거야. 다만 목걸이보다는 조금 마나를 더 많이 써서 한 번 쓰면 완전히 지칠지도 몰라.”
그는 그러니까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리나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너드가 그녀의 팔에 팔찌를 채워 주웠다.
그러고도 뭔가 아쉬운지 유리나의 흰 손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제야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저렇게도 좋을까.’
유리나는 이번엔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는 그를 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늘 자신을 소중히 다루고, 금방이라도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보는 그를 보고 있자면 이 큰 사랑에 보답을 할 수는 있을지 초조함이 들고는 했다.
“그러고 이건…….”
위치 추적 기능이 담긴 무서운 팔찌를 채워 줄 때만 해도 태연하던 레이너드가 어쩐 일인지 주머니 안을 더듬거리며 머뭇거렸다. 유리나는 잘못을 한 아이 같은 그의 태도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대체 뭔데 그렇게 망설여? 위치 추적 기능보다 더한 게 있어? 이상한 거야?”
“아냐. 이상한 건 절대 아닌데…….”
아무래도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하는 자신의 모습이 많이 이상하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유리나는 계속 그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바짝 다가가 주머니 안을 살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레이너드가 두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는 바람에 내용물을 확인할 수 없었다. 까치발을 하고 손을 뻗어 보아도 근본적인 키 차이 때문에 손이 도무지 닿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레이너드의 팔을 잡고 다른 쪽 팔을 최대한 늘려 겨우 주머니의 밑 부분에 손끝이 닿았을 때, 얄밉게도 레이너드가 똑같이 까치발을 했다. 겨우 닿았다 싶었던 주머니가 다시 멀어졌다.
“대체 뭔데 그래?”
거듭되는 재촉에도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유리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팔을 놓으며 뒤로 물러났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나한테 주려는 게 아니라면 굳이 캐물을 생각이 없어. 그럼 나는 가서 준비나 해야…….”
“잠깐, 잠깐만, 유리나.”
그가 서둘러 유리나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며 무슨 일이냐고 묻는 그녀의 말에도 여전히 머뭇거렸다.
“나 진짜로 갈 거야. 시간이 없어.”
유리나가 기다리다 못해 단호하게 말한 뒤에야 그는 침을 삼키며 주머니 안쪽에 있던 것을 꺼냈다. 아무 무늬나 꾸밈이 없는 단순한 실반지였다. 그나마 중앙에 작은 붉은 보석이 장식이라고 박혀 있었는데, 그가 그녀에게 준 목걸이와 팔찌에 있는 보석과 비슷해 보였다.
목걸이도, 팔찌도 아니고 무려 반지의 등장이었다. 반지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사뭇 달랐기 때문에 유리나는 살짝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갑자기 웬 반지야?”
“그러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닌데, 조금 의아하기는 해.”
“이것도 아티팩트야. 독이나 마법 기운을 감지해 주는 아티팩트.”
그가 한 손으로는 반지를, 다른 손으로는 유리나의 오른손을 잡았다.
“데프론 저택으로 가지 않고 리디아 데프론을 이리로 불렀지만 혹시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 너나 베시가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차에 독을 탈 수도 있고, 흑마법으로 저주를 건 물건을 네게 건넬지도 모르고.”
“그건 그렇지.”
“내가 옆에 있으면 바로 감지할 수 있지만 여자 둘이 갖는 시간에 베시도 아니고 남자인 내가 끼어들 수는 없으니까 준비했어.”
“그런데 왜 하필 반지야?”
한국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반지가 갖는 의미는 남달랐다. 한국에서는 다소 편하게 연인끼리도 커플링을 주고받거나 단순한 액세서리로 반지를 많이 착용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곳에서 반지가 갖는 무게가 더 무거웠다.
이성이 주는 반지는 더더욱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연인이나 약혼자 사이에서도 다른 액세서리 선물은 해도 반지는 보통 청혼을 할 때나 줬다.
레이너드는 이것이 아티팩트이니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말했다. 유리나도 이 반지에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다만, 이것을 착용하고 나갔을 때 사람들이 보일 반응이 조금 두려웠다.
‘특히 작은 오빠들.’
레이너드가 단순히 파티 때 유리나를 에스코트해 줬다는 이유만으로도 굉장히 기분 나빠 했는데, 이 반지를 낀다면, 그것도 레이너드가 주었다는 것을 안다면…….
‘상상하기도 싫어.’
이럴 땐 동생 바보 오빠를 두었다는 게 한스러웠다. 가족으로서 에드윈과 저스틴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지만, 그들의 과한 애정이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어색하지 않고 재빠르게 물건을 살펴보려면 아티팩트를 손에 착용하고 있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어. 물건을 목이나 귀에 갖다 대는 건 좀 이상하잖아. 팔목만 해도 조금 어색하고. 그래서 생각하다 보니까 반지밖에 없더라.”
“으음, 그래도 이건…….”
유리나가 망설이는 기미를 보이자 그가 재빨리 덧붙였다.
“투명화 마법을 걸어 줄게. 그럼 너와 내 눈에만 보일 거야. 어때?”
“그럼 정말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 거야? 데이브에게도?”
“아무래도 마나 흔적이 남으니까 스승님은 네 손에 마법이 걸려 있다는 건 눈치채실 수도 있어. 그래도 무효화 마법을 쓰지 않으면 보지는 못할 거야. 네 손에 마법을 건 사람이 나인 걸 아실 테니 굳이 무효화 마법을 쓰시진 않을 텐데 그럼 괜찮지 않아?”
“음…….”
그의 차분한 설명에도 유리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레이너드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다 그가 약지에 반지를 끼우려는 것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손가락을 오므렸다.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약지에 끼는 반지는 약혼반지나 결혼반지뿐이었다. 아무리 다른 사람의 눈에 안 보인다고 해도 왠지 약지에 반지를 끼는 건 조금 망설여졌다.
‘싫은 건 아닌데…….’
솔직히 유리나는 지금이라도 레이너드가 반지를 내밀며 청혼을 하더라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녀의 인생에 레이너드 말고 다른 남자는 없었다.
결혼을 아예 안 하면 모를까, 그 말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자신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의미 없는 반지를 약지에 끼고 싶지는 않았다.
유리나의 행동에 레이너드가 순간 실망한 듯한 얼굴을 하며 그녀의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상처 입은 동물 같은 표정에 유리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그를 잘 달래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그녀는 장난스럽게 약지를 흔들어 보였다.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는 건 청혼할 때나 하는 거야. 혹시 지금 여기서 이렇게 청혼하는 거야?”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던 그의 두 눈이 이번에는 놀란 듯 크게 뜨였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그냥……. 지금은 아니야. 이런 반지 말고 나중에 더 좋은 걸로…….”
횡설수설하던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검지는 어때?”
그렇게 물으면서도 뭔가 아쉬운지 그의 시선은 유리나의 검지가 아니라 약지에 향해 있었다.
“검지 말고 새끼손가락에 끼워 줘. 검지에 끼면 불편할 것 같아.”
“응.”
유리나가 다시 손가락을 펴자 레이너드가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엄지에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헐렁했던 반지는 그가 손가락 끝까지 밀어 넣자마자 빛을 내며 서서히 크기가 줄어들더니 유리나의 손가락에 맞게 크기가 조절되었다.
레이너드가 행여나 약지에 끼우는 건 아닌지 주의 깊게 살피던 유리나는 미리 치수를 재서 만든 것처럼 딱 맞는 반지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마법은 아무리 봐도 신기한 것 같아.”
“더 신기한 것도 많아.”
“정말?”
“응. 나중에 하나씩 보여 줄게.”
레이너드는 반지를 낀 유리나의 새끼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반지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동시에 반지의 붉은 보석 부근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유리나는 눈치껏 그가 반지에 투명화 마법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정말로 마법이 걸린 것인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빛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반지가 멀쩡히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과 레이너드 눈에는 보일 거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살짝 흐릿하게 보이거나, 어딘가 다르게 보일 거라 섣불리 짐작했는데 진짜 그대로였다.
“이거 정말 마법 걸린 거 맞아?”
“응. 걸렸어.”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
유리나는 작은 흠집이라고 찾아낼 기세로 반지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다가 이내 포기하고는 베시가 있는 드레스 룸으로 갔다.
“베시!”
“네, 아가씨!”
유리나의 드레스를 살펴보던 베시가 먼지도 묻지 않은 깨끗한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다가왔다.
“이거 어때?”
유리나가 오른손을 흔들자 베시가 조금 더 가까이 걸어와 그녀의 손목을 살폈다.
“이것도 전에 사냥 대회 때 착용했던 팔찌 아닌가요?”
“응, 맞아. 기억하고 있네?”
“당연하죠. 아가씨의 일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기억을 못 하면 어떡하나요?”
유리나는 꽤 자부심이 느껴지는 얼굴로 대답하는 베시를 향해 새끼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럼 이건 어때?”
살짝 웃고 있던 베시의 얼굴에 살짝 난감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곧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손뼉을 쳤다.
“아가씨의 손가락은 언제 봐도 희고 곱죠. 어릴 적부터 저랑 다른 아이들이 얼마나 관리를 했는데요. 물론, 아가씨는 원래도 손가락이 가늘고 길어서 예쁘셨어요.”
“그것 말고, 다른 건?”
“어, 음…….”
베시의 얼굴에 또 한 번 당혹감이 서렸다. 잠시 망설임이 있었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곧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역시 우리 아가씨는 손톱도 예쁘세요.”
유리나는 그 대답을 듣자마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예상했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베시의 대답이 귀여웠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그 말을 하며 수줍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베시,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면 다들 이상하게 볼 거야.”
“이상하게 볼 게 뭐가 있나요! 진짜 아가씨는 손도 예쁘시다니까요!”
레이너드가 돌아온 후로 쌍둥이 오빠들이 자주 유리나를 방문하며 베시와 이야기를 나눈 탓인지 베시는 요즘 들어 두 남자와 조금 비슷해진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유리나를 아끼는 점이.
‘베시도 팔불출이 다 됐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유리나의 입가엔 살짝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확인한 그녀는 드레스 룸을 나와 레이너드에게 다가갔다.
“정말 안 보이나 봐.”
“그렇지? 내가 뭐랬어.”
“근데 이건 어떻게 쓰면 돼?”
“혹시라도 수상쩍은 게 있으면 반지에 살짝 갖다 대 봐. 보석에서 흰빛이 나면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거고, 검은빛이 나면 무언가 수상한 게 있다는 뜻이야. 독이든, 흑마법이든. 그러니까 수상한 게 있으면 꼭 확인해.”
“응, 알겠어.”
고개를 끄덕인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손을 끌어와 제 팔에 걸려 있는 팔찌와 똑같은 팔찌를 차고 있는 그의 손목 안쪽에 마찬가지로 입을 맞췄다.
“조금 이따가 말이야.”
“응.”
“만약 카리온이 리디아를 따라오면 그때 말했던 것처럼 카리온과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야.”
유리나의 손등을 간지럽히던 레이너드의 손가락이 순간 멈칫했다. 유리나는 그의 팔찌를 괜히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만약 카리온이 오늘 오지 않는다면 다음에 같이 놀러 오라고 리디아에게 말할 거야.”
레이너드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를 꽉 깨물었는지 잔뜩 힘이 들어간 턱을 보면 분명 싫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간 한 이야기가 있으니 차마 내색을 못 하는 듯했다.
그렇다고 선뜻 알겠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유리나는 그의 손바닥을 제 뺨에 갖다 대며 슬며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나 믿지?”
그가 엄지로 유리나의 뺨을 조심스레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믿어.”
“정말 믿지?”
“응, 정말 믿어. 그런데…….”
그가 말끝을 흐리며 유리나에게 한 걸음 바짝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얼굴은 조금 더 그늘이 져 있었고, 근심이 가득했다.
“그런데?”
유리나의 재촉에 그는 겨우 다시 입술을 뗐다.
“그 자식을 못 믿겠어.”
“그건 나도 그래. 그래서 너랑 같이 만나기로 했잖아. 네가 있으면 아무리 카리온이라도 날 위협하지는 못할 거야.”
유리나가 과거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려준 그날 이후, 레이너드는 데프론 후작가와 카리온에게 적대감을 보였다. 처음 카리온을 보았을 때 같은 베아투스라며 막연히 가졌던 호감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유리나는 데프론 후작이나 카리온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날이 선 그의 모습에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 생겨 좋았다.
그러나 레이너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는 작게 앓는 소리를 내다가 유리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때 그 자식이 네게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려.”
“날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말?”
“응.”
레이너드가 불안한 듯 유리나의 목덜미에 제 뺨을 살살 문질렀다. 유리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나 믿는다고 했잖아. 혹시라도 나한테 수작을 부리려고 하면 내가 카리온 무릎을 확 차 줄게.”
유리나라면 정말로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레이너드가 킥킥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지만 만약 카리온이 데프론 후작의 사주를 받고 일부러 접근을 한 거라면 네가 날 보호해 줘야 돼. 알겠지?”
“응.”
그는 대답을 하면서도 계속 유리나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유리나는 베시가 부를 때까지 몇 번이고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 * *
“카르티아 영애!”
데프론가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린 리디아가 마중을 나온 유리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기껏 해 봐야 허리를 살짝 숙이는 귀족적인 인사를 할 준비를 했던 유리나는 드물게 당황하며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렸다. 갈 곳을 잃은 두 손이 허공에서 어색하게 멈췄다.
‘얘 진짜 왜 이래?’
격식을 차리는 사교계에서 포옹으로 친밀함을 표현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유리나는 지금껏 꽤 많은 또래의 영애와 교류를 했지만, 만날 때 허물없이 포옹을 하는 건 가장 친한 친구인 클로이 데오노라 정도였다.
지난 파티에서 만났을 때부터 과하게 친하게 굴어서 오늘도 그럴 거라 생각을 하기는 했는데, 지금 리디아의 행동은 유리나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혹시 뭔가를 하려고 하나?’
옷에 독을 바른다든가, 흑마법을 쓰기 위해 뭔가 수작을 부린다든가? 갑자기 오싹한 기분이 들어 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러나 빠르게 리디아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떼어 놓았다.
유리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그녀의 옆으로 다가온 레이너드가 리디아에게 인사를 하며 손등으로 유리나의 손을 톡 건드렸다.
레이너드의 마나 특유의 따뜻한 느낌이 유리나의 손등을 시작으로 팔로 번져 나갔다. 그 느낌이 사라지자마자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이상도 없다는 뜻이다.
유리나는 그를 보며 반사적으로 환하게 웃으려다가 표정 관리를 하고 리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레이너드를 볼 때 짓는 환한 웃음 대신 형식적인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렇게 다시 뵈니 좋네요.”
유리나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예의상의 말을 건네자 그제야 제 무례를 깨달았는지 리디아가 멋쩍은 듯 고개를 살짝 움츠리며 웃었다. 흰 두 뺨은 살짝 발그레해졌다.
“죄송해요. 너무 반가워서 그만……. 그간 잘 지내셨나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오는 동안 불편하시진 않으셨나요?”
카르티아 저택과 데프론 후작 저택은 두 가문의 사이를 대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같은 수도 내에서도 꽤 떨어져 있었다. 마차를 타고 왔어도 2, 30분은 족히 걸렸을 테다.
“전혀 불편하지 않았어요. 수도는 어릴 때 오고 정말 오랜만이라 창밖 구경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요. 특히 이쪽은 올 일이 거의 없어서 새로운 것이 잔뜩 있다 보니 볼 게 많았어요.”
대체 왜 리디아는 그간 수도에서 지내지 않고 영지에서만 지냈을까. 유리나처럼 수도에 주로 머물며 가끔씩 영지에 내려가는 귀족도 있지만,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은 어린 귀족들이 영지에서 지내는 일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영지에서 주로 지낸다고 하더라도 일 년에 몇 번 정도는 수도에 와서 지낸다. 수도 사교계의 유행을 알고, 좀 더 나은 교육 등을 받기 위해서다.
아카데미에 가지도 않은 리디아는 왜 지난 몇 년간 영지에서 다른 귀족과 교류도 많이 하지 않고 숨다시피 지낸 걸까.
‘설마 카리온 때문에?’
카리온의 정체를 숨긴다고 해서 리디아가 수도에 오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데프론 후작만 해도 수도를 왔다 갔다 하지 않았던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정문에서 서서 할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유리나는 진심을 담은 척 환하게 웃으며 에스코트를 하듯 리디아의 팔을 잡았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우리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할까요? 정원에 자리를 마련해 놨어요.”
리디아가 유리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좋아요. 편지를 받은 날부터 카르티아 저택의 장미는 얼마나 예쁜지 기대를 많이 했답니다.”
유리나는 리디아를 자연스럽게 정원 쪽으로 안내를 하며 뒤쪽에 서 있는 레이너드에게 흘끔 시선을 주었다. 그는 그녀를 보며 당부하듯 팔찌를 찬 제 팔목을 매만졌다.
유리나는 그를 향해 팔찌를 찬 손을 흔들어 보인 뒤 리디아를 안내하며 정원으로 향했다.
유리나가 오늘 리디아와의 만남에서 알아내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왜 리디아가 자신에게 이렇게 과한 호의를 보이는가’였고, 다른 하나는 ‘왜 그동안 리디아와 카리온이 수도에 오지 않고 숨어 지내다시피 영지에서만 지냈는가’였다.
“그런데 카리온 씨…… 는 오늘 오지 않았나요?”
유리나는 집사, 로버트의 안내를 받아 대기실로 이동하는 데프론가의 기사와 고용인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그 어디에도 밝은 금발을 지닌 남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 저택에 있어요.”
“왜요? 지난번에 레이랑 친하게 지냈으면 하시는 것 같던데.”
유리나의 은근한 말에 리디아가 “흐음…….” 하는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순진무구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같이 와도 되는 거였나요? 저는 영애께서 따로 말씀이 없으시기에 달가워하시지 않은 건가 싶었어요.”
“그럴 리가요.”
유리나는 미소를 유지한 채로 태연하게 거짓말을 내뱉었다. 달가워하지 않는 건 사실이나 카리온을 만나야 했다.
“레이도 같은 베아투스를 만났다며 좋아하던걸요. 서로 통하는 게 있을 것 같다고 오늘 혹시 영애와 같이 오면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다고 기대했어요. 좀 아쉽네요.”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저는 영애께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줄도 모르고 폐가 될 거라고만 생각해서…….”
리디아가 아랫입술을 살짝 내밀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양쪽 눈썹이 살짝 처진 것이 애처로워 보여서 괜히 유리나가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렇게 상심하실 것 없어요. 다음에도 기회는 있으니까요.”
“정말요? 다음에도 저와 또 티타임을 가져 주실 건가요?”
리디아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환하게 웃었다. 진한 초록색 눈이 꼭 햇빛에 반짝이는 보석처럼 초롱초롱한 것처럼 보였다.
‘강아지 같네.’
저 멀리 던진 공을 물어 와서 꼬리를 흔들며 주인의 칭찬을 바라는 것 같은 강아지. 리디아의 두 눈이 살짝 처져서 그런지 진짜로 순한 강아지처럼 보였다.
유리나와 동갑인 데다가 그녀보다 키가 살짝 더 큰 것을 생각하면 어려 보일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꼭 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유리나는 당혹감을 능숙하게 숨기며 리디아의 손을 한 번 꽉 잡았다 놓았다.
“그럼요.”
때마침 두 사람은 정원에 다다랐다. 정원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장미 특유의 강한 향이 풍겼다.
“어머나.”
리디아가 갖가지 색의 장미가 피어 있는 정원을 보며 탄성을 지르더니 유리나의 손을 놓고 장미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그녀는 장미에 코를 묻고 향기를 맡으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영애께서 말씀하신 대로 정말 장미가 예쁘네요. 저는 저희 저택의 장미가 제일인 줄 알았는데, 이곳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네요. 영애께 자랑하며 초대를 한 게 부끄러워질 정도예요.”
겸손의 말이 아니라 정말로 부끄럽게 느꼈는지 리디아의 두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유리나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서 새삼스럽게 리디아를 살폈다.
저번 파티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갑작스럽게 마주친 데다가 카리온까지 만나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데, 그간 마음을 추슬렀더니 이젠 리디아를 보고도 별다른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리디아의 진짜 속내를 파악하겠다는 승부욕마저 들었다.
‘예쁘긴 예쁘네.’
소설의 여주인공답게 리디아는 멀리서도 눈에 띄는 외모를 갖고 있었다.
황금빛 햇빛을 받으면 금방이라도 그 속에 녹아 없어질 것처럼 결 좋은 밝은 백금발, 핏줄이 비칠 것처럼 티 없이 맑고 깨끗한 흰 피부, 쌍꺼풀이 진한 순한 눈, 우수에 차 있는 것처럼 촉촉하게 물기가 남아 있는 진한 초록색 눈동자,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장밋빛 입술.
‘백합 같다고 했었는데…….’
원작에서 비유된 말 그대로 리디아 데프론은 희고 가녀린 백합처럼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묘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웃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새침한 고양이처럼 보이는 유리나와는 여러모로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같은 금발이라도 유리나의 분홍빛이 도는 진한 금발은 리디아의 백금발과 비교하면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확실히 장미와 백합에 비유한 것처럼 두 사람은 정반대의 매력이 있었다.
“그렇게 서 계시지 말고 이리 오세요.”
유리나가 슬쩍 재촉을 해도 리디아는 여전히 장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장미가 보고 싶으시다면 몇 송이 꺾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을까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유리나는 리디아의 손을 이끌어 자리에 앉고 그 맞은편에 앉았다. 베시에게 최대한 신경을 써서 준비하라고 미리 일러둔 덕분인지 테이블 위에는 제철 과일을 사용한 호화스러운 디저트들이 다양하게 놓여 있었다.
유리나는 리디아가 디저트를 보며 감탄을 하고 있는 사이 손뼉을 가볍게 두어 번 쳤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원사가 기민하게 장미 몇 송이를 꺾어 그럴싸하게 가다듬어 테이블 중앙에 올려 두었다. 안 그래도 화려했던 테이블이 장미 장식에 더욱 보기가 좋아졌다.
베시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차를 유리나와 리디아의 찻잔에 조심히 따라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디아가 불현듯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탄성을 내뱉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맞다. 영애께 초대의 답례로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그녀의 말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데프론가의 하녀가 손바닥만 한 상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리디아는 상자를 열어 그 안에 있는 머리 장식을 하나 꺼내 유리나에게 다가왔다.
“이 머리 장식은 어떤가요? 얼마 전 에반 거리에 갔더니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액세서리들이 많더라고요. 확실히 저희 영지에서 보던 것과는 달라서 저도 모르게 이것저것을 사고 말았어요.”
“아, 그렇군요. 에반 거리는 구경할 게 많이 있어서 저도 갈 때마다 지나치게 물건을 사고 온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었군요? 다행이에요. 전 저만 과소비를 하는 건가 싶어서 조금 걱정했어요.”
유리나가 보기엔 고민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별것 아니었는데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리디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들고 있는 붉은색 머리 장식을 유리나의 머리에 갖다 대려고 했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유리나는 놀라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살짝 젖혔다. 큰 움직임은 아니었는데, 그 작은 기척을 눈치챘는지 리디아가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리디아의 초록색 눈동자가 불안한 듯 잘게 흔들렸다.
“별로…… 인가요?”
별로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지금 유리나의 눈에는 리디아가 들고 있는 장신구 따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정신은 오로지 리디아의 저 친밀한 태도에 쏠려 있었다.
‘다시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
원작에서 묘사되기를, 리디아는 본디 성정이 착하고 다정하여 모든 이와 스스럼없이 친해지고, 고용인에게도 친구처럼 상냥하게 지낸다고 했다.
데프론가의 사람이라는 색안경을 끼지 않고, 원작에서 나온 묘사 그대로를 믿는다고 치자. 그래도 그녀의 행동은 어딘가 위화감이 있었다.
모든 이와 스스럼없이 쉽게 친해진다는 말은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을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친밀하게 대한다는 말과는 달랐다.
그렇다면 혹시 저 머리 장식에 뭔가가 있는 건 아닐까?
“죄송해요. 저는 영애께 어울리는지 한번 보고 싶어서 그런 건데 너무 격식이 없었죠?”
유리나는 표정 관리를 하며 그녀가 들고 있는 머리 장식을 보다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잠깐 살펴봐도 될까요? 가까이에서 먼저 보고 싶어요.”
“아, 네! 여기요.”
유리나는 리디아가 건네준 머리 장식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쥐며 레이너드가 주었던 반지에 갖다 댔다. 반지가 살짝 진동을 하더니 이내 희게 빛났다. 의심스러웠던 것과 달리 머리 장식에는 별다른 이상은 없다는 소리다.
‘진짜로 호의로 주려고 했던 걸까.’
유리나는 제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리디아를 흘끔 보았다. 그 모습은 꼭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주인에게 먹으라는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며 낑낑거리는 강아지와 비슷해서 기분이 묘했다.
보면 볼수록 리디아는 데프론 후작과 달리 자신에게 특별한 악의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무슨 짓을 할지는 모르니까.’
유리나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베시에게 머리 장식을 넘겼다. 머리 장식에는 이상이 없다고 해도 리디아의 손이나 옷 등에 무슨 수작을 부렸을 수도 있다.
베시가 유리나의 머리에 장식을 해 주는 것을 들뜬 얼굴로 지켜보던 리디아가 손뼉을 딱 쳤다.
“역시 영애께 잘 어울리네요!”
“그런가요?”
“네! 이건 붉은색이라 그런지 보자마자 카이가 생각나서 샀는데 색이 진해서 제 머리에는 생각보다 안 어울리더라고요. 저보다는 영애에게 더 어울릴 것 같아서 가져와 봤어요. 저보다 더 진한 금발을 지니셨잖아요. 마침 레이너드 경의 눈동자도 붉은색이라 나중에 두 분께서 파트너로 파티에 참가하실 때 이걸 하면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서…….”
“카이요?”
유리나는 리디아의 말에서 낯선 이름을 집어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지난 파티에서도 카리온을 ‘카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유리나가 레이너드를 레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리디아 또한 카리온을 애칭으로 부르는 것일 수도 있는데도 조금 이상했다.
원작 소설에서 딱히 그 애칭을 본 기억이 없었던 것이다.
다시 의자에 앉던 리디아가 유리나의 물음에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카리온 말이에요. 카이는 제가 지어 준 애칭이거든요.”
그녀는 비밀 얘기를 하는 것처럼 유리나에게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줄였다.
“사실 그 애에게 카리온이라는 이름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조용하고 자상한 아이인데 카리온은 너무 거창하고 딱딱하지 않나요? 고대어로 승리자라는 뜻이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 안 어울려요.”
유리나는 그때 보았던 카리온의 얼굴을 떠올렸다. 유리나와 리디아를 비교했을 때 리디아 쪽이 더 순한 인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레이너드에 비해 카리온은 차분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갖고 있었다.
유리나가 저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리디아가 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께서 생각하시기에도 그렇죠? 아버지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라 뭐라고 하지는 못했는데 전 사실 그 이름이 너무 싫거든요. 그래서 저라도 카이라고 불러 주기로 했어요. 카리온보다 훨씬 억양이 부드럽잖아요. 카이도 내색은 하지 않지만 그 애칭을 굉장히 좋아해요. 전 그 아이가 말을 안 해도 다 알 수가 있어요.”
유리나는 새삼 원작 속 카리온과 리디아의 관계를 생각했다. 리디아가 이렇게 다정다감하게 대하니 카리온이 그녀에게 마음을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레이너드가 유리나에게 제 온 마음을 준 것처럼.
이 짧은 대화에서 유리나는 잘만 하면 리디아가 카리온에 대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해 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방어적인 자세를 풀고 상냥한 척 웃었다.
“영애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두 분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영애께서는 카리온 씨를 어떻게 만난 건가요?”
“7년 전에 한 고아원에서 만났어요. 정확히는 저 말고 아버지께서 만나신 거지만요. 그해 겨울 엄청 추웠잖아요. 혹시 기억나세요?”
“네, 기억나요. 너무 추워서 벽난로 앞에서 담요를 두르고 있어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죠.”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었다. 유리나의 맞장구에 신이 났는지 리디아는 아이처럼 본격적으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고아원에 물품이 부족하여 아이들이 얼어 죽는다는 소리를 들으시고는 고아원에 구제 활동을 다니셨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영애께서도 다녔다고 들었어요.”
“아, 네. 저도 어머니와 함께 다녔었죠.”
처음에는 레이너드가 있던 고아원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었는데, 추위에 하릴없이 덜덜 떠는 아이들을 안쓰럽게 여긴 후작 부인이 좀 더 본격적으로 고아원을 돌아다니며 물품을 갖다주었다.
“아, 후작 부인과요. 부럽네요. 제 어머니께서는 제가 여덟 살 때 돌아가셔서 추억이 많지가 않거든요.”
씁쓸하게 웃던 리디아가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하고 손을 저었다.
“이런 우울한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아무튼 아버지께서 그렇게 고아원을 다니시다가 한 곳에서 카이를 발견하셨대요. 처음엔 붉은 눈이 특이하여 관심을 가지셨다가 카이가 마법 재능을 타고난 것을 알고 후원하시기로 바로 결정하셨어요.”
리디아의 말에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붉은 눈이 특이해서 관심을 가졌다고?’
분명 데프론 후작은 7년 전 유리나와 레이너드를 만났을 때 ‘베아투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리디아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저는 친구가 생긴 것 같아서 좋았는데 아무래도 카이는 저를 많이 낯설어하더라고요. 영애께서도 레이너드 경과 지내셨으니 아시겠지만, 아무래도 붉은 눈 때문에 사람들에게 안 좋은 시선을 받고 자랐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누가 다가오면 도망가고 그랬어요.”
카리온도 그랬구나. 유리나는 앙칼진 새끼 고양이 같았던 열두 살 레이너드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냥 같이 놀고 싶어서 다가가는 건데도 도망가서 방에 숨어 버리고, 간식을 줘도 안 먹고 그랬어요. 대체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영지에 소문이 퍼진 거예요.”
“무슨 소문이요?”
“붉은 눈이 여신의 상징이며, 그 붉은 눈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여신의 사랑을 받아 마법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이요. 그걸 영애께서 직접 고서에서 발견하셨다고 들었어요.”
아무리 들어도 뭔가 이상했다.
“후작님께서는 아무런 말씀을 안 하시던가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특별히 기뻐하시지는 않으셨어요. 여신의 사랑을 받든 받지 않든 카이의 재능은 변함이 없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전에 베아투스에 대해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냐는 이야기예요.”
리디아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였다.
“그럴 리가요. 그건 영애께서 가장 먼저 발견하셨잖아요.”
유리나는 리디아의 말을 속으로 곱씹으며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왜 숨겼지?’
대외적으로 카리온의 존재를 숨긴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왜 가족인 리디아에게마저 베아투스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던 걸까. 단순히 말을 않은 게 아니라 정황상 자신이 카리온의 붉은 눈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숨기려고 했던 것 같았다.
‘자기가 베아투스를 알고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이 질문의 끝이 보일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뿌옇게 무언가가 어른거리기는 하는데 그 형태가 선명히 보이지 않아서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카르티아 영애?”
유리나는 걱정스러운 리디아의 말을 들은 뒤에야 다시 정신을 다잡고 웃었다.
“그래서 베아투스라는 것이 알려지고 좀 달라졌나요?”
“네.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달라지고, 자신의 눈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았는지 카이도 조금씩 마음을 열었어요. 그래도 가까워지는 건 쉽지 않았지만 시간은 많았으니까요. 하루 종일 같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어요.”
리디아가 팔을 쭉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나의 손을 잡았다. 유리나가 손을 빼려고 하자 그녀가 유리나의 손을 조금 더 꽉 쥐었다.
“제가 그동안 영애께 너무 격식 없이 굴었죠?”
그걸 알긴 아나 보네요. 그러나 차마 그 말까지는 꺼낼 수 없어서 유리나는 그저 대답을 회피하며 미소를 지었다.
“영애께는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영애를 보니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영애께서는 카이의 마음의 짐을 덜어 주고, 저와 카이가 지금처럼 지낼 수 있게 해 주신 은인이신걸요. 영애께서 찾으신 자료가 아니었다면 카이는 아직까지도 마음을 닫고 제게 곁을 내어 주지 않았을 거예요.”
“그걸 찾은 건 다 절 위해서였는걸요.”
“알아요. 그래도 고맙다는 말 꼭 드리고 싶었어요. 이 말을 전해 드리기 위해 몇 년간 기다렸어요.”
담담하게 얘기하는 목소리에서는 살짝 물기가 어려 있었다. 유리나를 보는 눈은 어느새 조금 붉어져 있었는데, 정말로 악의나 가식이라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말로 나한테 호감만 가지고 있었던 걸까.’
유리나는 리디아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보았다. 만약 이곳이 소설 속 세계라는 것을 모르고, 우연히 레이너드를 만났을 경우를 가정했다.
붉은 눈 때문에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매일 상처를 받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에게 손가락질을 한 사람을 벌하고, 넌 저주받은 게 아니라고 그를 다독여도 그녀 또한 레이너드 못지않게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누가 붉은 눈이 사실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낸다면? 그래서 레이너드가 더 이상 자신의 눈을 싫어하지 않고 당당해질 수 있다면?
‘엄청 고맙긴 하겠지.’
기쁘면서도 지금 눈앞에 있는 리디아처럼 그 사람을 만나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을 정도로 고마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리디아의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그녀의 호의가 낯설고 거북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만약 리디아가 데프론가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달랐을까?
데프론 후작을 생각하니 리디아에게 공감했던 마음이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유리나는 리디아의 손에 잡힌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빼냈다. 리디아는 비어 버린 제 손을 다소 허망하게 내려다보다가 제 두 손을 맞잡았다.
“영애께서는 절 이제 겨우 두 번 보는 거니 제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앞으로 이렇게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제가 수도 생활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도움이 많이 필요해요. 저 좀 많이 도와주실 거죠?”
“그럼요.”
“든든한 친구가 생긴 것 같아서 좋아요. 저와 영애가 자주 만나면서 카이와 레이너드 경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분명 두 사람도 좋은 친구가 되겠죠?”
“아마도요. 레이도 같은 베아투스인 카리온 경을 보니까 좋다고 하던걸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카이는 저 말고 친구가 없어서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았거든요.”
유리나는 찻잔을 들며 리디아의 표정을 살폈다.
말하는 중에도 계속 머금고 있는 미소,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 살짝 달아오른 두 뺨, 들뜬 목소리. 유리나를 볼 때도 그녀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지만, 카리온 이야기를 할 때는 또 달랐다.
유리나는 저 표정이 어떤 표정인지 잘 알았다. 레이너드가 그녀를 볼 때마다 짓던 표정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저 얼굴은 분명 사랑에 빠진 이의 얼굴이었다.
카리온이 아카데미에 가지 않고 지난 7년 동안 영지에서 리디아와 지낸 탓일까.
리디아 데프론은 남자 주인공인 커티스 제노시안이 아니라 서브 남주인공이었던 카리온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 * *
레이너드는 정원이 보이는 창가에 서서 유리나와 리디아가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창문을 닫고 있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조금 답답했지만 생글생글 웃는 리디아와 특별히 동요를 보이지 않는 유리나를 보니 별일은 없는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갑자기 리디아가 유리나에게 다가갈 땐 놀라서 이동 마법을 쓸 뻔했지만 유리나가 잘 대응하는 덕분에 당장 달려가 리디아의 팔을 꺾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별일 없겠지?’
정 답답하면 도청 마법도 쓴다면 쓸 수는 있었지만, 유리나의 동의도 없었는데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유리나가 자신을 믿어 주는 만큼 그녀에게 신뢰를 주고 싶었다.
‘책 속 세계라…….’
재잘재잘 떠드는 리디아의 말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나를 보던 레이너드는 창문에 이마를 기대며 얼마 전 유리나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곳과는 다른 세계, 책 속 이야기, 황태자비가 되지 못하고 죽을 운명에 처한 유리나 카르티아, 또 다른 베아투스 ‘카리온’.
솔직하게 말하자면 유리나에게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황당무계하고 믿기 힘든 것투성이였다.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레이너드는 사실 적잖이 당황했다.
자신이 살던 이 세계가 사실은 단 한 명에 의해 만들어진 책 속 세계라는 것도 많이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눈물을 삼키다가 종국에는 몸을 떨며 눈물을 흘리는 유리나를 보며 그게 모두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이 세계도 여신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 믿고 자랐는데 여신이나 책을 쓴 사람이나 뭐가 다를까.
게다가 유리나가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그녀가 읽은 책 속 이야기라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됐다.
만약 유리나가 그 책을 읽지 않았다면, 그래서 유리나를 만날 수 없었더라면…….
상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한 가정이다.
다만, 주위 사람들의 운명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건 여전히 충격이다.
저렇게 따뜻한 카르티아 후작 내외와 유리나의 세 오빠들, 베시 그리고 제 목숨보다 사랑하는 유리나가 사실은 모두 처참하게 죽을 운명이었다니.
‘데프론 후작가와 흑마법이라…….’
그가 아카데미에서 흑마법에 대해 배운 건 아주 기초적인 이론밖에 없었다. 그만큼 흑마법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었다. 마법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황실 마법사들이 늑대에 걸려 있던 흑마법을 발견하지 못한 것만 봐도 흑마법이 얼마나 잊혔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레이너드는 용케 흑마법을 느꼈지만, 흑마법의 원리를 모르니 누군가가 흑마법으로 다시 유리나를 공격하거나 또다시 저주를 시도한다면 미리 막을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데.’
레이너드는 슬슬 자리를 정리하는 두 사람을 보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깃펜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편지지에 서둘러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수신인은 에이든 테시였다.
* * *
“그런데, 왜 그간 영지에서만 지내신 건가요? 보통은 수도에 왔다 갔다 하면서 생활하잖아요. 수도에 계셨다면 그동안 친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요. 물론, 지금부터라도 자주 교류하면 되지만 왜 진작 영애를 만나지 못했을까 조금 아쉬워서요.”
리디아를 배웅해 주기 위해 정문 쪽으로 이동하며 유리나가 아쉽다는 표정과 함께 물었다. 유리나의 말에 공감을 하는지 리디아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카이가 계속 영지에서 지냈으니까요. 수도에 왔다가 영지로 돌아가려면 적어도 두세 달은 걸릴 텐데 그동안 카이는 친구도 없이 영지에 혼자 있어야 하잖아요. 붉은 눈동자가 불길한 게 아니라고 밝혀졌어도 고용인들이 그에게 살갑지만은 않았으니까요.”
“카리온 씨도 수도에 같이 오면 되지 않나요?”
리디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버지께서 말리셨어요. 영애 덕분에 붉은 눈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붉은 눈에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면서요. 수도에는 영지보다 사람들이 더 많을 텐데 카이가 불편하지 않겠냐면서요.”
얼핏 듣기에는 그럴싸한 이유였다. 게다가 데프론 후작이 카리온을 끔찍하게 아끼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원작의 내용을 아는 유리나에게는 그 말이 영 꺼림칙하게만 들렸다.
데프론 후작은 원작에서 카리온이 베아투스라는 것이 밝혀지기 전에도 그와 함께 수도에서 지냈다. 그런데 정작 베아투스라고 밝혀졌는데 카리온을 걱정하여 영지에서만 지냈다?
‘반대로 사람들이 베아투스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 자신이 베아투스를 데리고 있다는 것을 들키기 싫었다고 생각하는 게 더 일리가 있지.’
이로써 더 확실해졌다. 데프론 후작은 카리온의 정체를 숨기려고 했다. 원작과 달리 크론 왕립 아카데미에 보내지 않았던 것도 그 연장선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다만 문제는 ‘왜’ 그 사실을 숨기려고 했냐는 것이다.
‘그건 다음에 카리온을 만났을 때 알아보자.’
유리나는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리디아에게 식사도 하고 가라고 넌지시 제안했지만 리디아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차를 마시면서 티 푸드를 많이 먹었더니 배가 많이 불러요. 게다가 오늘은 식사 초대가 아니라 티타임에 초대를 받은 거니 더 머물면 폐만 될 것 같아요.”
어차피 예의상 건넨 말이라 유리나도 그녀의 거절이 아쉽지는 않았다.
“다음에는 저희 저택에 오세요. 오늘 영애께 과분한 대접을 받았으니 저도 보답을 하고 싶어요.”
원래 한 번 초대를 받아 대접을 받으면 답례를 하는 것이 예의였다. 그러나 유리나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제안을 건네는 리디아가 순수하다고 해도 데프론 후작을 믿을 수는 없었다.
미리 정문에 나와 있었던 레이너드도 유리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카리온도 보지 못했는데 이대로 거절을 하고 연을 끊을 수는 없는 법. 그녀는 지난 며칠간 레이너드와 함께 상의했던 방법을 쓰기로 했다.
“저도 데프론 저택의 장미를 보고 싶어요. 영애께서는 저희 정원의 장미가 더 아름답다고 하셨지만 분명 데프론가의 장미가 더 탐스럽고 예쁘…….”
불현듯 말을 멈춘 유리나가 오른쪽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기침을 했다. 콜록콜록거리는 기침이 끊이지 않고 잠시 이어지자 리디아의 얼굴에 순식간에 근심이 어렸다.
“카르티아 영애,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
콜록. 유리나는 다시 한번 기침을 하며 옆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레이너드를 흘끔 곁눈질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별로야?’
눈빛으로 묻자 그가 눈빛으로 대답했다. 안 통할 것 같은데.
‘어릴 때는 잘 통했는데.’
유리나가 괜히 머쓱해져서 목을 매만질 때였다. 리디아가 안절부절못하며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베시에게 의원 좀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어젯밤에 주무실 때 방 공기가 차가웠나 봐요.”
베시는 유리나를 살피며 발을 동동거리다가 의원을 대기시키겠다며 서둘러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유리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얼굴을 찡그리듯 웃었다.
“죄송해요. 사냥 대회 마치고 영지까지 다녀온 터라 무리를 했는지 요즘 체력이 좀 안 좋아졌나 봐요.”
“역시 그날 몸이 안 좋으신 것 같더니…….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들어가서 잠깐 쉬면 괜찮을 거예요. 사실 어제 밤잠을 좀 설쳤더니 좀 피곤했나 봐요.”
“왜 그러셨어요. 잠은 푹 주무셔야 체력이 좋아지지요.”
유리나는 수줍게 웃으며 살짝 들뜬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지만 영애께서 오신다니 들떠서 잠이 오지 않는걸요. 영애와 대화를 할 땐 피곤한 것도 싹 잊었는데 가신다고 하니까 몸이 말썽인가 봐요. 그래도 영애를 이렇게 뵈었는데 그깟 잠 좀 설친 게 뭐가 문젠가요?”
“카르티아 영애…….”
감정이 북받치는 듯 리디아가 코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유리나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영애께서 절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계신지 몰랐어요. 저는 영애께서 절 피하시는 것 같길래 고민했었는데 아니었군요.”
“피하긴요. 제가 낯을 조금 가려서 그런 거지 영애를 피한 건 절대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아, 몸이 안 좋으신데 저희 저택까지 오시라고는 할 수 없죠. 혹시 괜찮다면 제가 다음에 카이와 함께 다시 놀러 와도 될까요?”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당연히 제가 레이와 함께 데프론가를 방문할게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리디아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부디 제 성의를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저 때문에 영애의 몸이 더 안 좋아진다면 전 너무 걱정돼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거예요.”
“저야말로 영애께 걱정을 끼칠 수는 없죠. 그렇다면 다음에도 또 저와 함께 차를 마셔 주시겠어요? 영애와 카리온 씨라면 언제 오시든 환영이에요.”
“그럼요! 카이도 분명 좋아할 거예요!”
유리나는 신이 나서 제 손을 잡고 흔드는 리디아를 보다가 레이너드에게 다시 눈짓했다.
‘통하는데?’
그가 팔짱을 끼며 가늘게 뜬 눈으로 리디아의 표정을 살폈다. 유리나의 연기가 통할 리가 없으니 리디아가 알고도 속아 넘어가는 척한다고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리디아가 마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도 의심 가득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 * *
기사단 일이 늦게 끝나 저녁 시간이 지나서야 저택으로 돌아온 쌍둥이는 리디아 데프론이 저택에 왔다 갔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전해 들었다. 소식을 미리 알았다면 두 남자가 리디아가 오기 전부터 난리를 칠 것이 분명하여 유리나가 일부러 말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나 리디아와 카리온이 며칠 뒤 카르티아 저택을 방문할 거라는 이야기까지는 숨길 수가 없었다. 릭스에게서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쌍둥이는 기사단 제복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유리나의 방에 쳐들어오다시피 달려왔다.
“유리나!”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베시와 가볍게 차나 한잔 마시고 있던 유리나는 성난 소 떼처럼 방으로 들어오는 두 오빠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오빠들 왔어?”
이런 반응을 이미 예상했기 때문에 보일 수 있는 태연한 반응이었다. 정작 쌍둥이들은 그런 그녀의 반응이 당황스러워 동시에 멈칫했다.
그러나 바로 정신을 차리고 유리나의 앞까지 다가왔다. 얼마나 빨리 뛰어온 것인지 더운 날이 아니었는데도 두 사람의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유리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며 웃다가 베시에게 손짓했다. 눈치 빠른 베시는 차를 더 내오겠다며 서둘러 방을 나갔다.
“일단 좀 앉아.”
유리나가 앉아 있는 티 테이블에는 의자가 두 개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중앙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쌍둥이는 그녀의 뒤를 졸졸 쫓아가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유리나는 터져 나오는 하품을 입 안으로 삼키며 등받이에 나른하게 등을 기댔다. 이미 저녁을 먹은 지도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안 그래도 피곤한 시간인데 리디아를 만나면서 신경을 곤두세운 탓인지 평소보다 더 피로가 몰려왔다.
가능하면 빨리 이야기를 마치고 쌍둥이를 돌려보내고 싶었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두 사람은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거야?”
두 남자가 무슨 일로 왔는지 뻔히 알면서도 유리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저스틴과 에드윈은 그녀의 속내를 파악하려는 듯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대답을 아꼈다.
유리나와 쌍둥이 사이에서 잠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유리나는 이 상황이 새삼 놀라웠다.
‘오빠들이 이럴 때도 있네.’
어릴 적부터 유리나라면 껌뻑 죽는 동생 바보 쌍둥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의 편이 되어 주었다. 유리나가 특별히 가족들의 꾸중을 들을 정도로 큰 잘못을 한 적도 없지만, 큰 잘못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감싸 줄 것 같았다.
만약 카르티아 후작 내외가 유리나를 야단친다면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차라리 자기를 혼내라며 부모에게 대들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쌍둥이였다.
그런 두 남자가 이토록 심각하게 그녀를 대하는 건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그래서 가볍게 생각하고 있던 유리나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당황했다.
‘이게 그렇게 심각한 일인가?’
원작의 내용을 아는 그녀와 레이너드라면 모를까, 쌍둥이들이 이토록 과한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카르티아 후작과 릭스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물론, 다소 놀란 반응을 보이며 굳이 리디아와 만남을 가져야 하냐고 묻기는 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유리나는 일부러 더 과장해서 눈을 접으며 웃었다. 쌍둥이의 표정이 그나마 조금 풀어졌다.
에드윈과 저스틴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쌍둥이끼리는 무언가 통하는 것이 있는 모양인지 두 사람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도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에드윈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유리나, 오빠들이 그때 데프론가는 물론이고, 리디아 데프론하고도 멀리 지내라고 했던 말 기억해?”
“응, 기억해.”
“기억하는데도 이러는 거야?”
저스틴이 끼어들었다. 에드윈이 시선을 주자 그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유리나는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을 하며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데프론 후작이 수상한 일을 꾸미는 것 같으니 리디아를 통해서 상황을 파악하겠다?
만약 그렇게 말했을 때 쌍둥이들이 데프론 후작이 수상한 짓을 꾸미고 있는지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라면 그런 일은 오빠들에게 맡기고 넌 가만히 있으라고 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어.”
“뭐?”
“나도 우리 가문이 데프론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알아. 그렇다고 해서 데프론 영애와 척을 지고 살 이유는 없잖아. 내가 데프론 영애와 사이좋게 지내고 교류를 많이 하다 보면 카르티아가와 데프론가의 사이도 좋아지지 않을까?”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야.”
유리나는 나른하게 앉아 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에드윈과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다.
“아버지께서도 데프론가와 정치적인 것 외에 별 감정은 없다고 하셨어. 그럼 되지 않아?”
“데프론 후작이 무슨 짓을 꾸미는 줄 알고!”
에드윈이 갑작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유리나는 순간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늘 다정다감했던 그가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보다는 그가 이렇게 과민 반응을 보인 것에 더 놀랐다.
“야, 야. 왜 그래. 유리나 놀랐잖아.”
저스틴이 재빨리 에드윈의 팔을 잡고 그를 말렸다. 그러나 그 태도가 어쩐지 유리나를 걱정한다기보다는 이 이야기를 재빨리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유리나는 다시 등을 소파에 기대며 팔짱을 꼈다.
“오빠, 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는 거 있어?”
“없어!”
“아냐, 그런 거 없어!”
두 사람을 보는 유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거 이상한데?’
그녀가 아는 쌍둥이라면 그녀가 이런 질문을 건넸을 때 ‘오빠가 우리 동생한테 숨기는 게 뭐가 있겠어?’나 ‘왜 그런 생각을 해? 혹시 오빠한테 기분 상한 일 있었어?’ 같은 말을 하며 그녀가 이런 말을 한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그녀를 살살 달랬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숨기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파티에서도 데프론가를 굉장히 경계했지.’
그때는 별다른 의심 없이 카르티아가와 데프론가가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단순히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유리나는 작전을 바꿔 헤실헤실 웃던 얼굴을 풀고 표정을 굳혔다. 쌍둥이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나한테 숨기는 게 뭐야? 데프론가와 관련된 일이지?”
“그런 거 없대도.”
“나한테 이렇게 필사적으로 숨기는 거라면 데프론가뿐만 아니라 나하고도 관련이 있는 일이겠고. 맞지?”
“그런 거 아…….”
“오빠.”
딱 한 단어를 말했을 뿐인데 목소리에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처음 듣는 그녀의 목소리에 당황했는지 에드윈과 저스틴이 자세를 바로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 열일곱 살이야. 아직 성인이 아니기는 하지만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까지 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
“나 더 이상 어리지 않아. 어릴 때야 부모님이랑 오빠들이 날 아이 취급하고 가문의 일을 말 안 해 줬다고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나도 우리 가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권리 있고, 가문을 위해 행동을 할 수 있어.”
더 이상 설명은 필요 없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딱 한마디만 더 건넸다.
“무슨 일이야?”
쌍둥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나는 두 사람을 재촉하는 대신 고개를 살짝 삐딱하게 기울인 채로 침묵을 유지했다.
잠시 눈빛을 주고받던 쌍둥이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저스틴이 입을 열었다.
“유리나, 너 전에 레이너드를 만난다고 크론 왕국에 갔던 일 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지.”
순순히 대답을 하면서도 그녀는 꺼림칙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데프론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웬 크론 왕국 이야기?’
그러다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혹시 그때 내가 반란 세력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걸 얘기하고 싶은 거야?”
가만히 있던 에드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아직 말도 안 했는데.”
“이 상황에서 나올 이야기가 그것밖에 없잖아. 내가 크론 왕국에서 재밌게 논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닐 테니까. 그래서?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와?”
“네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네가 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계속 그 사건을 조사하셨어.”
“반란군의 소행이라고 이미 결론 났었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유리나도 그 습격에 대해 조금 의문을 품기는 했었다. 당시 반란 세력에게서 들었던 말 때문이었다.
―이런, 젠장! 마법사라는 이야기는 없었잖아!
그들은 꼭 유리나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을 했다. 그게 조금 이상했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생일을 맞이하여 다소 갑작스럽게 크론 왕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제국이라면 모를까, 왕국에서는 레이너드가 카르티아가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반란 세력이 레이너드의 주위에 맴돌다가, 갑자기 나타난 유리나를 보고 계획을 세웠다면 모를까, 그들이 미리 유리나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러나 유리나의 말을 들은 카르티아 후작은 이미 종결이 난 일이나 걱정할 필요 없다며 그녀를 다독였다.
‘그런데 조사를 하고 있었다고?’
그렇다면 카르티아 후작이 어리고 여린 막내딸을 걱정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소리가 된다.
“아버지께선 네가 무서워할까 봐 비밀로 하셨던 거야.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마, 응?”
“당연히 안 해. 그래서 계속 조사를 했는데 뭐가 나온 거야?”
“정확히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는 아직 밝히지 못했어. 그런데…….”
“그런데?”
망설이는 저스틴을 대신하여 에드윈이 말을 이었다.
“그때 그 반란 세력이 제국 쪽과 연락을 주고받았었다는 흔적이 나왔어.”
예상치도 못하는 말에 유리나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사주했다는 거야?”
“응. 어느 가문인지까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데프론 가문일 확률이 높다는 거지?”
“응.”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옆에서 저스틴이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까 리디아 데프론하고 가까이 지내지 마.”
* * *
에드윈과 저스틴의 이야기에 유리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체 언제부터 준비했던 거야?’
사냥 대회 사고의 배후가 데프론 후작이라는 건 밝혀지지 않았지만, 만약 진짜 그가 꾸민 일이라고 해도 조금이나마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레이너드가 왕국에서 활약을 보인 이후로 그는 물론 유리나에게 관심을 보인 황태자. 만약 유리나가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면 진작 그녀를 황태자비로 맞이하겠다는 말이 나올 법한 상황이었다.
원작에서처럼 리디아를 황태자비로 만들려고 했다면 유리나가 눈엣가시였을지도 모른다. 원작하고는 달리 그녀에게는 레이너드가 있기 때문에 그녀를 죽이고자 했다면 그가 졸업을 하고 돌아오기 전에 노리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변수가 있었다.
‘분명 리디아는 카리온을 좋아하는 것 같았어.’
그동안 영지에서만 지내서 커티스를 만날 일이 없으니 그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리디아가 커티스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녀를 황태자비로 만든 원작의 내용과 달랐다.
이렇게 이야기가 바뀌었는데 왜 데프론 후작은 예전부터 유리나를 노린 것일까?
유리나는 파티 때 들었던 쌍둥이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데프론 후작이 2황자 전하와 접촉을 했다는 것 같아.
리디아가 커티스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그는 왜 하필 커티스도 아닌 2황자를 만난 걸까.
그동안 몰랐던 단서가 조금씩 모이는데, 오히려 단서가 모이면 모일수록 더 이야기가 꼬여 가는 것만 같았다.
‘역시 카리온을 만나야겠어.’
쌍둥이들은 사정이 이러니 리디아와 절대로 만나지 말라고 했지만 유리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리디아와 카리온은 원래 예정대로 며칠 뒤에 카르티아 저택에 올 것이다.
* * *
레이너드는 리디아가 혼자 저택에 왔을 때보다 더 긴장을 했다. 그는 유리나가 그가 지난번에 준 아티팩트를 모두 착용했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도 안심하지 못했다.
유리나는 그를 안심시키다가 데프론가의 마차가 오고 있다는 시종의 말을 듣고 방을 나왔다.
유리나가 정문을 나가자 때마침 데프론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정문 앞에 멈춰 섰다. 마차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카리온이 내렸다.
마차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던 터라 유리나는 그가 고개를 드는 순간 그의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카리온은 잠깐 멈칫했다가 유리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 보이고는 마차 안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고 내린 리디아가 유리나를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카르티아 영애!”
카리온이 있어서 그런가, 그녀의 표정은 전에 왔을 때보다 더 밝았다. 어쩌면 두 번째 초대에 유리나와 더 친해졌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또 뵙게 되어서 정말 좋아요. 며칠 만에 보는 건데 그간 영애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어요.”
다행히 리디아는 지난번처럼 유리나를 와락 끌어안지는 않았다. 대신 마차를 같이 타고 온 하녀에게 손짓했다. 하녀는 유리나에게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만 한 붉은색 상자를 내밀었다.
“몸이 좋지 않다고 하셔서 몸에 좋은 약초를 좀 가져와 봤어요. 피로에 좋다고 해요. 차처럼 끓는 물에 우려먹으면 된대요.”
“챙겨 주셔서 고마워요.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친구끼리 챙겨야죠.”
언제 리디아와 자신이 친구가 됐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유리나는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베시에게 손짓했다. 그러나 베시가 상자를 받기 전에 레이너드가 먼저 상자를 가져갔다. 그는 상자를 만지작거리다가 베시에게 건넸다.
유리나는 그가 상자를 확인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마나를 느꼈는지 카리온이 레이너드를 위아래로 살짝 훑었다. 유리나는 노려보다시피 카리온의 눈을 쳐다보는 레이너드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정원으로 가죠.”
“좋아요. 카이, 얼른 가자. 여기 장미가 그렇게 예쁘더라.”
“네.”
유리나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보다가 레이너드에게 미소를 지었다. 표정을 푼 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와 걸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장미가 활짝 핀 정원에 마련된 다과 테이블에는 미묘한 기류가 맴돌았다. 사람은 분명 넷인데 말하는 건 오직 한 사람뿐이고 나머지 셋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재잘재잘 떠드는 한 사람은 당연하게도 리디아 데프론이었다. 유리나는 말하기보다는 그녀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가볍게 맞장구를 쳤고, 카리온은 리디아를 살피는 중간중간에 유리나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레이너드는 가볍게 웃고는 있었지만 카리온에게 못마땅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전부터 이렇게 네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종종 상상하고는 했어요. 그런 날이 실제로 올 줄은 몰랐는데 너무 기뻐요. 제 상상보다 더 보기 좋네요.”
리디아가 테이블 주위에 맴도는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밝은 얼굴로 말했다.
‘정말로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지.’
이제 고작 두 번 보았을 뿐인데 유리나는 그녀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른 또래 귀족들과 교류가 별로 없던 탓인지 그녀는 좋게 말하면 순진했고, 살짝 덜 좋게 말하자면 눈치가 없었다. 그녀는 꼭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만 보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이 연기가 아니라 진짜 모습을 보여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잠깐만 실례해도 될까요?”
카리온과 영지에서 지냈던 이야기, 데프론 영지 이야기 등을 하던 리디아가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한 뒤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금방 오겠다며 사뿐사뿐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줄곧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걱정하는 부모처럼 리디아의 곁에 붙어 있던 카리온은 의외로 자리에 남았다.
‘정말로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나 보네.’
유리나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올곧게 바라보는 그의 붉은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은 레이너드와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색채를 띠고 있었다.
색이 다르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같은 색의 눈이라도 명도나 채도 등이 조금씩 다르기 마련인데, 그의 눈은 꼭 레이너드의 눈을 보는 것처럼 색이 같았다.
‘같은 베아투스라서 그런 걸까.’
다만,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달랐다. 어릴 때부터도 레이너드는 사람들을 경계하기는 했지만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고작 목욕 한 번에 좋은 냄새가 난다며 뻐길 정도로 저가 잘난 줄 알아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했다. 아카데미를 마치고 온 지금은 더욱 성장하여 귀족들의 수군거림이나 차디찬 시선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카리온의 눈은 어쩐지 생기가 없고, 불안한 것처럼 보였다. 리디아와 있을 땐 그래도 좀 나았는데 그녀가 사라지자 그나마 있던 감정마저 사라졌다.
‘분명 원작에서는 다정다감한 성격이라고 나왔는데.’
누구에게나 친절한 리디아처럼 카리온도 잘 웃고 모두에게 친절하다고 나왔다. 그런데 눈앞의 카리온은 원작에서 읽은 ‘카리온’과는 다른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아카데미에 가지 않고 데프론 영지에서만 지낸 탓에 성격이 변하기라도 한 것일까.
사냥 대회에서 그가 다짜고짜 공간 분리 마법을 걸고 귀족의 예법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사과했을 땐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어쩌면 그는 진짜로 예법에 익숙지 않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고도 좀 웃기기는 하지만.’
유리나가 카리온을 바라보는 시간이 다소 길어지자 옆에 앉은 레이너드가 헛기침을 했다. 그녀는 불안해하는 그의 손을 테이블 밑에서 한 번 잡았다가 놓으며 입을 뗐다.
“지난번에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나요?”
그녀의 말이 다소 의외였는지 카리온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미미한 차이였지만 워낙 표정 변화가 없던 사람인 터라 그 사소한 변화도 크게 보였다.
“네.”
“오늘 그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저도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고요.”
카리온의 시선이 천천히 레이너드에게 향했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유리나가 빠르게 덧붙였다.
“레이도 같이 들을 거예요.”
“…….”
“레이가 들을 수 없는 이야기라면 듣지 않을 생각이니 자리를 비켜 달라는 소리는 미리 거절하겠어요.”
유리나는 솔직히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는 둘이서 대화를 하고 싶다고 덜컥 공간 분리 마법부터 쓰던 남자였다. 그 정도로 비밀로 하고 싶은 이야기인데 레이 앞에서 과연 속내를 털어놓을까?
‘안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러나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는 곧 입을 열었다.
“들어서 안 될 것은 없는 이야기이긴 합니다.”
“그럼 들을 수 있을까요? 보아하니 레이는 들어도 되지만 데프론 영애는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 같은데 데프론 영애께서 돌아오기 전에 얼른 끝내죠.”
리디아는 조금 늦을 것이다. 오늘 그녀가 저택에 오기 전에 이미 유리나가 베시에게 혹시나 리디아가 잠깐 자리를 비우게 된다면 시간 좀 끌어 달라고 부탁을 해 두었다. 베시는 의아해하면서도 맡겨만 달라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베시가 장담한 일이니 믿을 수 있다.
“그때, 사냥 대회 날 저보고 당신을 본 적 없냐고 물은 적이 있었죠?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인가요?”
카리온이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당신을 그날 처음 봤어요. 데프론가의 후원을 받고 있는 마법사라는 것과 레이와 같은 베아투스라는 사실은 얼마 전 레이의 기사 서임식에서 처음 알았고요.”
“네.”
“그런데 왜 제가 당신을 만난 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데프론 영애께 듣자 하니 그간 줄곧 데프론 영지에서 지내셨다던데, 저는 데프론 영지에는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목이 타는지 카리온은 찻잔에 담긴 차를 한 번에 들이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꿈에서 영애를 본 적이 있습니다.”
순간, 테이블 아래서 유리나의 손을 잡고 있던 레이너드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깨어나서도 꿈인지, 아니면 직접 겪었던 일인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꿈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이 생긴 영애를 봐서 놀랐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그토록 생생하게 꿈에 나올 수 있을까 싶어 언젠가 본 적이 있지는 않은지 여쭤보았던 겁니다.”
“꿈에서 깨어난 바로 다음이라면 모를까, 꿈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꿈에 나온 사람이 저라는 것을 어떻게 믿으시죠? 게다가 꿈에서 나온 얼굴이 저와 똑같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실 수 있으시죠? 기억은 있었던 일 그대로 남아 있지 않아요. 종종 자신이 원하던 대로 변형시켜서 기억하기도 해요.”
카리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 번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애의 꿈을 여러 번 꾸었습니다.”
유리나는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혹은 데프론 후작이 시킨 일은 아닌지 알아내기 위해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선 동요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데프론 후작이 시킨 일이 아닌 것일까.
‘이게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라면 카리온은 어떻게 내 꿈을 꾼 거지?’
데자뷰 같은 것일까. 그렇다면 꿈의 내용이 중요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유리나는 다시 물었다.
“단순히 꿈에서 절 봤다는 것만으로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지는 않았겠죠. 대체 꿈이 어떤 내용이었기에 계속 저 만나려고 했나요?”
카리온이 레이너드에게 한 번 시선을 주었다가 입을 열었다.
“영애께서 절 후원해 주셨습니다.”
그 말이 가져온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잠자코 듣고 있던 유리나와 레이너드도, 그 말을 한 카리온도 말을 잇지 못했다. 장미 향이 가득한 테이블 주위에는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특히 레이너드는 테이블 아래서 손이 하얘질 정도로 유리나의 손을 꽉 쥐었다. 유리나는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압력보다는 가슴을 꽉 죄는 것 같은 느낌이 더 아팠다.
안 그래도 원래 그녀가 찾고 있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카리온이었다는 사실에 충격과 상처를 받은 레이너드였다. 유리나는 당장이라도 그를 꽉 안아 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럴 수가 없었다.
‘혹시 이건 데프론 후작의 수작인가?’
그녀와 레이너드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그렇게 생각하자 카리온의 발언이 더욱 괘씸해졌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손을 마주 꽉 쥐며 카리온을 향해 다소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꿈속에서 영애께서 고아원에 있는 절 발견하고 후원해 주셨습니다.”
“그게 꿈의 전부인가요?”
“아뇨. 꿈은 더 길었습니다.”
그는 레이너드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리디아가 오기 전에 이야기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말은 다소 빨랐다. 그의 말 중간중간 끼어들 곳을 찾지 못해 유리나는 맞장구나 질문을 하지 않고 묵묵히 들었다.
그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운 것투성이였다.
카리온의 꿈속에 나온 ‘유리나 카르티아’는 차분하면서도 다정했다고 했다. 유리나는 그 말을 들으며 카르티아 후작 부인을 떠올렸다.
‘유리나’가 카리온을 발견했을 때는 눈이 많이 오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그녀는 구제 활동을 나간 카르티아 후작 부인을 따라 고아원을 방문했다가 구석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카리온을 발견했다.
그녀는 귀족인 그녀를 발견하고 도망가려는 카리온의 팔을 잡고 따끈따끈한 빵을 건넸다. 누구나 보면 흠칫하며 놀라는 붉은 눈을 보고도 놀라거나 울지 않았다. 오히려 왜 추운데 여기에 혼자 있냐고 다정하게 묻기까지 했다.
카리온은 살갑게 구는 그녀가 당황스러웠지만 제 팔을 잡고 있는 그녀의 보드라운 손이 따끈한 빵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져 더는 뿌리치지 않았다. 그러나 딱히 할 말은 없어서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빵을 뜯어 먹으며 딴청을 피웠다.
‘유리나’는 그런 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대신 그의 옆에 쪼그려 앉아 그가 빵을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러다 한 마법사가 영애를 찾아 서둘러 뛰어 왔습니다.”
“마법사? 데이브를 말하는 건가요?”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그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유리나’를 찾기 위해 그 추운 겨울날에도 땀을 흘리며 뛰어온 데이브는 유리나의 옆에 있는 카리온을 보고는 그가 단번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데이브는 눈을 빛내며 유리나에게 카리온을 꼭 제자로 키우고 싶다며 간청했다.
“영애께서 그 마법사의 말을 받아들여 카르티아 후작 부인께 저를 데려가고 싶다고 하셨고, 후작 부인께서 절 후원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카리온은 수도의 카르티아 저택으로 왔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레이너드가 표정을 숨기지 않고 카리온을 노려보았다. 눈빛만으로도 그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그 기세가 살벌했다.
유리나의 손을 꽉 잡고 있는 그의 손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 달달 떨리고 있었다. 거친 숨을 내뱉는 그의 가슴팍이 사납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유리나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유리나를 돌아본 그의 얼굴에 그나마 평정심이 조금 돌아왔다.
‘그만할까?’
유리나가 입 모양으로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웅웅 울렸다.
―괜찮아. 아직 들을 이야기가 남았잖아.
그래도 그녀가 망설이자 그가 그녀를 재촉하듯이 그녀의 손등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유리나는 힘겹게 미소 짓는 그 얼굴을 보다가 다시 카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다.
사실 그 뒤는 예상 가능한 뻔한 이야기였다. 유리나가 레이너드에게 그러했듯, 리디아가 카리온에게 그러했듯 ‘유리나’는 성심성의껏 카리온을 돌봤다.
친구처럼, 동생처럼, 어떨 때는 누나처럼 그의 부족함을 탓하지 않고 다정하게 그를 가르치며 그가 귀족 문화에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그 과정에서 카리온이 그녀에게 사적인 감정을 품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이라기엔 풋내 나고 우정이라기엔 좀 더 욕망이 담긴 감정. 열두 살, 아이와 청소년의 경계에 있던 그는 제 감정의 이름을 끝내 밝혀내지 못하고 크론 왕립 아카데미로 떠났다.
데이브는 레이너드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카리온을 계속 가르치기를 원했지만, ‘유리나’도, 카르티아 후작 내외도 카리온에게 좀 더 넓은 세계를 보여 주고 싶어 했고, 다양한 사람을 접할 수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실력 위주로 평가하는 크론 왕립 아카데미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조금 덜 하기는 했지만, 카리온은 여전히 붉은 눈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받거나 외면을 받았다. 그럴수록 그는 이를 더 꽉 깨물고 학업에 매진했다.
동시에 붉은 눈에 대해 조사를 했다. ‘유리나’에게 조금 더 떳떳해지고 싶었던 까닭이다. 자신은 저주받은 것이 아니고, 자신이 ‘유리나’의 곁에 머물러도 그녀에게 저주가 옮지 않을 거라는 답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 곁에 있고 싶은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는 여전히 알고 싶었다.
그렇게 7년이 지나고 졸업을 할 시기가 다가왔다. 그쯤 그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붉은 눈에 대해 서술되어 있는 고서를 간신히 발견했다. 지금은 멸망한 데니크 왕국에서 붉은 눈은 여신의 축복을 받은 것으로 여겼으며 ‘베아투스’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담긴 고서를.
그리고 성년이 된 그는 동시에 ‘유리나’를 향한 자신의 감정도 눈치챘다. 이것이 호사가들이 그토록 떠들어 대던 사랑이라는 감정이라고.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나오는 건 더욱 어렵다는 크론 왕립 아카데미를 정규 과정인 7년 만에 졸업하고 온 그는 이제 ‘유리나’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원하던 그녀 곁에 이미 다른 사람이 있었다.
“영애께서는 이미 황태자 전하와 연인 사이셨습니다.”
이번에는 유리나가 흠칫 놀랐다.
‘유리나가 커티스랑 연인 사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원작 소설에서 커티스가 리디아를 사랑하기 전, 유리나와 연인 사이였다는 사실이 방금 카리온이 말한 내용과 겹쳐졌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찝찝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했나요? 유리나를 사랑하고, 그녀 곁에 있기 위해 돌아왔는데 화가 나거나 허탈하지 않았나요? 유리나의 마음을 얻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유리나는 일부러 ‘나’라는 호칭 대신 ‘유리나’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카리온이 말하는 사람과 자신을 분리시켰다.
“아뇨. 저는 그저 영애가 정말로 황태자 전하를 사랑하신다면 무사히 황태자비가 되고,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황후까지 되는 걸 바랐습니다.”
리디아의 행복을 위해 제 사랑을 포기했던 원작의 카리온을 생각하면 그의 반응이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정말로 욕심 같은 건 없었어요?”
“저 같은 게 어떻게 영애를 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제가 기사의 작위를 받았다고 해도 저는 마법 좀 쓸 줄 아는 일개 기사고, 영애는 후작가의 고명딸에 황태자 전하의 총애를 받고 계신데. 저는 제 주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카리온의 시선이 유리나에게서 떠나 레이너드에게로 향했다. 그는 그저 담백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뿐인데도 상황이 겹치다 보니 마치 레이너드를 힐난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레이너드 또한 그걸 느꼈는지 그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테이블에 놓인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유리나는 빨개진 레이너드의 목을 바라보다가 카리온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걸 판단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나예요. 당신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거고요.”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욕심낸 게 아니라, 그녀가 그를 욕심냈다는 간접적인 말이었다. 레이너드의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고, 카리온은 고개를 가볍게 숙여 사죄의 표시를 보였다.
“그런데 당신의 다짐과 달리 유리나가 황태자비로 책봉되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겠죠.”
“네.”
줄곧 말을 잘해 오던 그가 입을 다물고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유리나는 그가 침묵하며 망설이는 이유를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리디아 데프론.”
카리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맞죠?”
그의 흔들리는 시선이 유리나를 향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그 표정은 친근감을 표시하는 리디아처럼 연기라고 보기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유리나는 가늠을 하듯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그의 진심을 알아낼 리가 없었다.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마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마법은 없었다. 리디아를 만난 뒤 데이브와 레이너드에게 이미 확인했다.
아마 카리온은 지난 7년간 자신을 보살펴 준 리디아를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원작과는 달리 아카데미에 가지 않고 줄곧 그녀와 붙어 있었으니 원작에서 느꼈던 감정과는 비교도 안 되게 그 크기가 클 것이다.
그런 리디아의 이야기가 나오니 그는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보다 못한 유리나가 재촉했다.
“시간이 이미 많이 지났어요. 슬슬 데프론 영애께서 돌아올 거예요. 말할 각오가 없으면 이쯤에서 그만두고, 모든 것을 감수하고 말할 거라면 뜸을 들이지 않고 말을 하는 게 좋을 거예요.”
협박이나 다를 것 없는 재촉이었다. 카리온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영애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가씨…… 그러니까 데프론 영애께서도 황태자 전하에게 호감을 품으셨습니다.”
원작과 비교를 해 보았을 때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유리나가 원작에서 읽었던 것과 전혀 달랐다.
리디아 데프론은 어느 날 황태자인 커티스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유리나 카르티아의 연인이었다. 공식적으로 약혼을 한 사이는 아니지만 온 제국이 유리나가 황태자비가 될 거라고 떠들어 대고 있던 상황이었다.
모든 이에게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원작의 묘사대로 리디아는 이미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된 커티스를 뺏을 정도로 모질거나 악랄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멀리서 커티스를 쳐다보기만 할 뿐, 그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인 데프론 후작은 달랐다. 안 그래도 카르티아 가문과 척을 지고 있던 그는 유리나만 없다면 리디아에게도 기회가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데프론 후작은 영애를 해치려고 했습니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독살 같은 평범한 방법이 아니었다. 그는 사고로 위장하여 유리나를 해치려고 했다.
황태자가 유리나에게 정식으로 약혼을 한 뒤, 약혼 축하 파티가 황실에서 한 번, 카르티아 저택에서 한 번 열렸다. 제아무리 데프론 후작이라고 하더라도 황실에서 일을 꾸밀 수는 없었으니, 카르티아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를 노렸다.
“파티가 무르익었을 무렵, 영애께서 카르티아 후작과 춤을 추러 홀 중앙으로 걸어갔을 때 천장에 걸려 있던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파티가 열리는 홀의 샹들리에는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장식품으로, 부와 영예가 있는 가문일수록 더욱 크고 화려하게 꾸민다. 그런 만큼 무게가 무거워서 그게 떨어진다면 그 밑에 깔린 사람은 당연히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보통은 고정 마법을 이용하여 단단히 고정을 해 놓는다. 모양새뿐만 아니라 고급 마법인 고정 마법을 정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니 그야말로 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데이브의 도움을 받아 설치를 했을 샹들리에가 공교롭게도 하필 유리나가 지나가는 순간 예고도 없이 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샹들리에가 흔들릴 때부터 이상함을 눈치챈 카리온이 마법으로 그녀를 구했다.
“마법이 제대로 먹히지 않아 영애를 데리고 순간 이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유리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상하게 오로지 그녀만을 노리던 늑대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필 그녀만을 노렸다는 점도 비슷했지만, 마법이 먹히지 않았다는 점도 같았다.
―널 보자마자 물리 방어 마법을 썼었는데, 무슨 이유였는지 먹히지 않았어.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마법을 쓰기엔 시간이 촉박해서…….
다른 점이 있다면 유리나와 떨어져 있어서 사고에 즉각 대처하지 못했던 레이너드와 달리 카리온은 처음부터 현장에 있어서 다치지 않고 조금 더 빠르게 행동할 수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카리온은 그게 데프론 후작의 짓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흑마법에 걸린 늑대 또한 데프론 후작의 간계일까?
“샹들리에가 떨어진 게 우연이었을 수도 있잖아요. 데이브가 실수를 했을 거라 생각은 하지 않지만 고정 마법이 잘못되어서 사고가 난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 어떻게 그게 사고가 아니라 모략이었다는 걸 알았죠?”
“샹들리에에 이상한 마나 흔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 외에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더군요. 물론 바로 배후를 잡지는 못했습니다.”
배후를 찾지 못했을뿐더러, 그는 자신이 알아낸 것에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상황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가 이상한 점을 알았다는 점을 알아채지 못한 데프론 후작은 또다시 비슷한 방법으로 유리나를 노리려고 했다. 그때 카리온은 확실히 데프론 후작의 짓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당시 유리나는 공식적으로 황태자와 약혼을 한 데다가 국혼 날짜까지 거론되던 상태였다. 그런 그녀를 노린 건 황실을 노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반역이었다.
데프론 후작을 비롯하여 데프론가의 모든 식솔이 황실 기사단에게 끌려갔다. 데프론 후작은 리디아만이라도 도망시키려고 했지만, 유리나의 오빠인 릭스 카르티아에게 막혀 결국 실패했다.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던 유리나는 머리가 어지러운 것을 느끼고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터뜨렸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이야기가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들어오니 정신이 몽롱했다.
게다가 카리온이 말한 내용은 그녀가 원작에서 읽었던 내용과 정반대였다.
유리나가 황태자비가 된 리디아를 질투하여 결국 카리온의 손에 죽는 게 아니라, 리디아를 황태자비로 만들고자 했던 데프론 후작이 카리온의 손에 죽게 되다니.
“그럼 데프론 후작과 데프론 영애는 처형당했나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은 유리나의 질문에 카리온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처형당하는 모습은 꿈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마지막을 본 건 황실 감옥에서 저를 저주하며 모든 것을 똑같이 갚아 주겠다고 악을 쓰며 이야기하던 데프론 후작의 얼굴이었습니다.”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꿈을 어릴 적부터 여러 번 꾸었지만, 그는 한 번도 그 이후의 일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다. 유리나는 방금 들은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쉽게 정리할 수가 없었다.
믿지 않자니 걸리는 게 있었고, 그렇다고 이대로 믿자니 데프론 후작의 간악한 수작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그러니 일단 확인이 필요했다. 이 이야기가 후작이 지어내지 않았다는 확인이.
“그런데 내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뭔가요?”
“그 꿈이 단순히 꿈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꿈이라면 이토록 생생할 일도, 매번 다르지 않고 똑같은 내용을 꾸는 일도 없을 테니까요.”
“꿈이 아니라면?”
“마치 한 번 겪어 본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카리온의 눈가가 금방 붉어졌다. 처음 유리나를 만나 눈물을 흘렸을 때처럼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묘한 낌새를 눈치챈 레이너드가 의자를 움직여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한 번 겪어 본 일 같다면 환생이라든가 회귀라도 했다는 소리야?’
책 속에 빙의도 하는 마당에 그가 회귀를 했다고 해도 우스울 것이 없었다. 다만, 지금은 데프론가의 후원을 받고, 리디아에게 분명 마음이 있을 그가 굳이 유리나를 찾아와서 시시콜콜 이 이야기를 털어놓는지가 마음에 걸렸다.
유리나를 사랑했다는 꿈을 여러 번 꿔서 그녀에서 특별한 감정이라도 느끼는 걸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데프론 후작의 계략일까.
분명 데프론 후작은 이곳에 없는데 유리나는 왠지 그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위험한 외줄 타기를.
‘일단 이게 정말 꿈 이야기인지, 데프론 후작이 꾸민 이야기인지부터 확인해야 해.’
유리나는 데프론 후작은 모르고, 꿈을 꾸었다던 카리온은 알 법한 이야기를 떠올리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꿈을 얼마나 자세하게 기억해요?”
“꽤 자세하게 기억합니다.”
“그럼 꿈에서 춤도 배웠나요?”
“네. 배웠습니다.”
“작은 홀에서?”
“작은 홀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춤을 배울 때 어땠어요?”
“정확히 어떤 것을 물으시는 겁니까?”
“뭐든지요. 기억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해 주세요.”
유리나가 그 말을 마치자마자 또 한 번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은 레이너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피아노가 고장 났던 걸 말하는 거야?
유리나는 긍정의 의미로 그의 손을 꽉 쥐었다.
작은 홀은 말이 작은 홀이지, 실제로 파티가 열리기보다는 유리나나 그녀의 오빠들이 춤 연습을 하거나, 가볍게 가족들이 놀이 삼아 춤을 출 때 사용했다.
그런데 세 오빠들이 모두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유리나가 레이너드를 만나기 전 겨울에 크게 앓은 이후로 그녀는 딱히 춤을 출 일이 없어졌다.
이미 춤의 기본 스텝은 익혀서 조금 더 성장할 때까지 특별히 춤 연습을 할 필요가 없었던 데다가 그녀의 키에 맞는 파트너가 없었으니 춤을 출 수도 없었다.
그녀의 세 오빠들은 방학 때 올 때마다 유리나와 다른 것을 하기도 바빠 작은 홀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그동안 작은 홀에 있던 피아노를 제대로 조율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유리나와 레이너드가 처음 춤을 배우려던 날, 피아노 건반의 한 부분이 소리가 다소 이상했다.
유리나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로 그가 주장한 대로 유리나와 함께 지낸 꿈을 꿨다면 그 부분도 알고 있을 테니까. 데프론 후작은 모를 만한 그 일을.
뭉뚱그려 작은 홀에서 있었던 일을 물어본 건 혹시라도 이상한 건 없었냐고 물으면 그가 대충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춤 선생은 다슨 자작 부인이었습니다. 제가 춤을 배울 때 영애께서 제 파트너가 되어 주셨고…….”
‘파트너’라는 단어에서 레이너드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굳었다.
“제가 발을 밟을 때마다 영애께서는 괜찮다며 절 다독여 주셨습니다. 제가 익숙지 않아서 춤을 배우는 건 꽤 오래 걸렸고요. 악기는 주로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거기까지 말한 카리온이 눈을 한 번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피아노 소리가 조금 이상했던 것 같습니다.”
유리나의 다소 놀란 시선과 레이너드의 질투 어린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데프론 후작이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야?’
그러나 고작 그것 하나만으로는 그의 이야기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아는 사람이 몇 안 되는 고장 난 피아노 이야기를 ‘고작’으로 치부하기엔 조금 그랬지만, 그만큼 카리온의 이야기는 유리나가 책 속 인물에게 빙의를 했다는 말만큼이나 터무니없었다.
“제 이야기가 믿기 힘들다는 건 저도 압니다. 저 또한 영애를 처음 본 날부터 이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으니까요.”
유리나와 레이너드가 바로 앞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데도 카리온은 기분이 상한 내색을 하지 않고 덤덤히 말했다.
“더 물어보고 싶으신 게 있으시다면 물어보셔도 괜찮습니다.”
유리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유리나가 가장 좋아했던 디저트는 뭔가요?”
“초콜릿이 들어간 디저트를 자주 드셨습니다. 그중에서 브라우니를 가장 좋아했죠. 갓 구워 따뜻한 브라우니 위에 아이스크림을 얹어 먹으면 맛있다면서 제게 주신 적도 있습니다.”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옆에서 코웃음을 쳤다.
―더 들을 것도 없네. 넌 따뜻한 스콘에 크림과 잼을 발라서 홍차랑 마시는 걸 제일 좋아하잖아. 초콜릿은 너무 달아서 싫다고 잘 안 먹고.
그의 말은 맞았다. 유리나는 스콘을 제일 좋아했다.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건 제철 과일이 잔뜩 들어간 케이크나 타르트를 좋아했다.
반면 초콜릿이나 초콜릿을 사용한 디저트류는 잘 먹지 않았다. 오히려 의외로 레이너드가 초콜릿이 잔뜩 들어간 디저트를 좋아했다.
그러나 유리나는 카리온의 말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베시가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아가씨께선 브라우니를 안 찾으시네요. 전에는 브라우니를 좋아하셨잖아요.
그 말에 유리나는 놀란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곧 여유를 되찾고 어린아이마냥 뾰로통하게 “그렇게 달달한 디저트는 어린아이나 먹는 거야. 나 봐. 이젠 디저트에 우유 대신 홍차도 마시잖아.”라고 대꾸했다.
그 말을 들은 베시는 그녀를 투정 부리는 귀여운 동생 보듯이 웃으며 어른인 자신도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한다며 유리나에게 브라우니와 우유를 가져다주었다.
덕분에 유리나는 베시가 가져다준 큼지막한 브라우니를 맛있게 먹는 척을 하며 다 해치웠다. 그 뒤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르티아 후작과 후작 부인 앞에서도 한두 번 정도 아이스크림이 잔뜩 올라간 브라우니를 먹었다.
그 후로 아이가 아니니 더 이상 브라우니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덕분에 어릴 적 그녀가 브라우니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극히 적었다.
아마 지금 베시에게 ‘베시, 내가 무슨 디저트를 가장 좋아해?’라고 물어도 그녀는 자신 있게 ‘아가씨는 잼을 바른 스콘을 가장 좋아하시잖아요!’라고 대꾸할 것이다.
만약 데프론 후작이 조사를 하고 카리온을 보냈다면 그는 분명 스콘을 이야기했어야 했다.
그런데 왜 그는 망설임 없이 브라우니를 이야기한 것일까.
‘혹시 꿈속의 유리나가 내가 아니라 원작의 유리나라서?’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카리온에 대한 의심이 풀리는 동시에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가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카리온이 꿈으로 미래를 본 걸까?’
동시에 데프론 후작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녀에게 과도한 적의를 갖고 있던 얼굴과 레이너드를 보고 베아투스를 발견했다며 환희에 차 있던 얼굴을.
어쩌면 그도…….
“데프론 후작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요?”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던 그의 무표정이 순간 무너지며 갈무리되지 않은 날것의 표정이 드러났다. 표정이 나타난 건 아주 잠깐이었고, 바로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간 터라 유리나는 그가 내보인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아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데프론 후작을 처음 만났던 그날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유리나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며 행복하다며 울듯이 웃던 레이너드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드디어…… 찾았다고 하셨습니다.”
카리온이 물기 어린 눈빛과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데프론 후작이 ‘베아투스’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이유, 그가 레이너드 말고 또 다른 베아투스인 ‘카리온’이 어딘가 있다는 것을 알고 기가 막히게 고아원에서 그를 찾을 수 있었던 이유.
‘미래를 알고 있었던 거야.’
미래를 알고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소설로 미래를 알게 된 유리나처럼 어떠한 방법으로든 미래를 보았거나, 아니면.
‘미래에서 왔거나.’
머릿속을 가득 메우던 물음표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건 앞으로 알아내야 하는 일이다.
지금은 그것보다 먼저 확인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나에게 해 주는 이유가 대체 뭔가요? 당신은 데프론가의 후원을 받고 있잖아요. 혹시라도 오늘 일 때문에 데프론 후작님의 눈 밖에 나는 건 아닌가요?”
“눈 밖에 나는 건 상관없습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당장 데프론 가문을 떠나도 괜찮으니까요.”
“그럼 왜?”
“지켜야 할 것이 있어서…….”
그 말을 하는 카리온의 시선이 유리나의 얼굴에서 살짝 빗나가 그녀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유리나가 뒤를 돌아보자 베시의 안내를 받으며 정원으로 들어오던 리디아가 환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 구경할 게 많아서 보다 보니 시간 가는지도 몰랐네요.”
리디아 데프론. 카리온이 유리나에게 찾아와서 이야기를 해야 할 정도로 지키고 싶어 하던 것.
카리온이 그녀에게 마음이 있을 거란 건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그런데 왜 나에게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한 가지 의문이 풀리며 또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 느낌이었다.
“카르티아 영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그러나 유리나는 생각을 잠시 접으며 제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디아를 향해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었다.
* * *
저녁 식사를 하고 가라는 유리나의 말에 리디아는 오늘도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다며 사양했다. 대신 오늘도 즐거웠다는 말과 함께 다음에도 또 초대를 해 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유리나는 예의상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띤 얼굴로 리디아를 배웅했다.
리디아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도와준 카리온은 속을 알 수 없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꽤 오랫동안 유리나를 보았다. 꼭 먼 길을 떠나기 전, 사랑하는 연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는 남자처럼.
표정 없는 그의 얼굴은 덤덤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치솟은 감정을 꾹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반면 유리나는 여전히 그를 경계하는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바로 쳐다보았다.
유리나를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던 카리온. 만약 그가 오늘 한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의 마음속에는 꿈을 꿀 때 유리나에게 느꼈던 감정의 잔재가 남아 있는 걸까.
유리나는 그토록 생생한 꿈을 반복해서 꾼 적이 없으니 지금 그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을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도무지 속을 모르겠어.’
이미 그와의 대화에서 그가 해 준 이야기가 데프론 후작이 꾸민 짓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더 조사를 하기 전에는 그의 이야기가 진실하다고 100퍼센트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의심할 이유도 없었다.
다만 왜 그가 리디아를 지켜야 한다고 운운하며 자신을 찾아와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묻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물어도 답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답을 줄 거였다면 진작 말했을 테다.
유리나와 카리온이 서로를 보는 시간이 길어지자 유리나의 옆에 서 있던 레이너드가 은근슬쩍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저택까지 편안히 돌아가실 수 있도록 마법을 걸어드리죠.”
완곡한 축객령이었다. 그제야 카리온이 유리나에게서 시선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마법은 제가 걸면 됩니다. 그럼 이만.”
그는 유리나와 레이너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마차에 올랐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건강이 좋아지시면 저희 저택에도 꼭 놀러 오세요!”
리디아가 달리는 마차 창문을 열고 창밖으로 손수건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유리나는 마차가 작아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레이너드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레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테다. 카리온이 오늘 한 이야기는 레이너드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충격적이고, 어쩌면 잔인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였다.
아마도 그는 이야기 중간에 유리나의 손을 잡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은 충동을 꾹 억누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맘껏 털어놓기에는 주위에 보는 눈이 많았다.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건 모두가 잠든 밤뿐이었다. 그걸 아는 레이너드는 이를 악물고 유리나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유리나는 불안해 보이는 그의 눈을 보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데이브에게 가자.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레이너드는 대답 대신 유리나의 손을 잡고 데이브의 연구실이 위치한 별관으로 걸어갔다.
* * *
레이너드는 그렇다 치더라도, 갑자기 찾아온 유리나를 본 데이브는 조금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는 연구를 하느라 마구 헝클었던 머리를 정돈하고, 옷에 묻은 정체불명의 끈적끈적한 액체를 닦아 낸 뒤에야 유리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이 시간에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아가씨?”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레이너드, 너는?”
“저도 유리나와 마찬가지로 묻고 싶은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데이브는 먼지가 잔뜩 묻은 안경 너머로 두 사람을 살피다가 안경을 벗어 옷에 대충 쓱쓱 닦았다.
“연구 중이라 안이 많이 어지럽습니다. 오신다고 말씀을 해 주셨으면 미리 좀 치웠을 텐데…….”
정리를 해도 늘 어지러웠는걸.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진심을 삼키며 그가 급하게 정리한 소파에 앉았다.
레이너드는 그녀 옆에 앉았다. 데이브는 유리나가 앉은 주변을 부산스레 정리하느라 쉽게 자리에 앉지 못했다.
“신경 쓰지 않으니까 걱정 말고 앉아.”
유리나가 소파를 가리킨 뒤에야 그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녀를 통해 말씀 주셨으면 아가씨께서 이렇게 직접 오실 필요 없이 제가 내일 아가씨를 찾아뵀을 텐데요.”
데이브는 원망 조인지 사과 조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 급히 묻고 싶은 게 있었어.”
데이브가 유리나의 옆에 앉은 레이너드에게 시선을 한 번 주었다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뭐가 그렇게 궁금하셨습니까?”
“미래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미래를 알 수 있는 방법이요?”
질문이 갑작스러웠는지 데이브가 잠깐 놀란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대답 대신 그녀에게 되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아가씨?”
예상했던 질문이라 유리나는 동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그냥 미래를 알고 싶어졌어.”
유리나의 가정은 이랬다.
카리온이 꿨다던 꿈은 원래 일어났어야 하는 미래다. 혹은 이미 일어났던 일이다.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 내용을 데프론 후작이 이미 알고 있을 거라는 가정이었다.
그 가정이 진짜라는 확인이 필요했다.
그러나 데이브는 유리나와 레이너드를 바라보다가 영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음, 요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왜?”
“아무런 걱정이나 불안 없이 현재에 만족한다면 미래를 알고 싶다는 고민 같은 건 하지 않으니까요.”
여전히 겉모습은 영락없이 이십 대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는 꼭 세상을 다 산 노인네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겉모습이 젊어 보여도 삼십 대는 삼십 대인 모양이었다.
“세상에 고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당장 다음 주에 있을 티 파티에 무슨 드레스를 입고 갈지부터도 고민인데.”
유리나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고민이 없다고 잡아떼면 오히려 더 수상해 보일 테다. 한참 사교계에 데뷔해서 걱정할 것도 많고, 신경 쓸 것도 많은 열일곱 살 귀족 영애가 고민이 없을 리가.
“그래서 그냥 궁금해졌어. 미래를 안다면 조금 더 마음을 놓고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안 그래?”
그러니 얼른 대답이나 하라는 무언의 강요였는데, 데이브는 대답 대신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한 잔 드시겠습니까?”
“아니, 괜찮아.”
데이브의 차는 예의상으로도 마셔 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맛을 자랑했다. 유리나가 그 떫고 쓴 차 맛을 생각하며 고개를 젓자 그는 더 묻지 않고 옆방으로 향했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양손에는 각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이 들려 있었다. 데이브는 고개를 살짝 젓는 레이너드의 손에 거의 강제적으로 머그잔을 들려 준 뒤 자리에 앉았다.
레이너드는 그가 건네는 찻잔을 받으며 미미하게 눈을 찌푸렸다가 데이브의 시선을 받고 겨우 한 모금 홀짝였다. 그는 차를 마시자마자 큽, 하고 터져 나오는 기침을 간신히 삼켰다. 은근슬쩍 머그잔을 내려놓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데이브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다시 머그잔을 입에 가져갔다.
‘귀엽네.’
심각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유리나는 입을 가리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억지로 홍차를 먹는 얼굴 위로 먹기 싫은 채소를 먹는 어린 레이너드의 모습이 겹쳐 보였던 것이다.
데이브는 그런 레이너드의 모습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유리나에게 말을 건넸다.
“고민이 있으시다면 혼자 끙끙 앓지 마시고 저에게 말해 보세요. 가족들에게는 가족이라서, 친구에게는 친구라서 못 하는 말도 타인에게는 할 수 있는 법이죠.”
미래를 볼 수 있는 마법에 대해 물었는데 왜 갑자기 마법 시간이 상담 시간으로 바뀐 거지? 게다가 그는 가족과 친구를 예로 들었지만 사실상 유리나에게 데이브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데이브의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 그를 살폈다. 그러나 표면적인 뜻 외에 별다른 뜻은 없었는지 그는 유리나가 입을 열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렸다.
“정말 별걱정 없어. 그냥, 누구나 미래에 대해 알고 싶은 날이 있지 않아? 데이브도 아카데미 다닐 때 그런 생각 안 해 봤어? 이번 시험에는 교수가 어떤 문제를 낼지, 과연 내 담당 교수가 이번에 졸업 논문을 통과시켜 줄지.”
차를 마시던 데이브가 ‘졸업 논문’에서 살짝 헛기침을 했다. 유리나가 갖고 있던 손수건을 건넸지만 그는 거절하며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아가씨의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긴 하군요. 아카데미 다닐 때 제발 교수님의 생각이나 미래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절규하던 동기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
“아무리 생각해도 아가씨께서 말을 돌리시려고 졸업 논문 이야기를 꺼낸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지만요.”
그는 안경을 벗어 옷으로 대충 닦은 뒤 다시 안경을 쓰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미래를 보는 방법은 없습니다.”
솔직히 유리나는 내심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현실을 생각하자면 미래를 본다는 게 터무니없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미 그녀에겐 그 못지않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일어나지 않았나.
자신이 읽은 책 속 인물에 빙의되었다는 것보다는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말이 훨씬 현실적으로 들렸다.
게다가 그녀가 읽었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서는 신력이나 마법을 이용하여 미래를 보는 장면이 종종 나왔다.
그런데 없다니. 유리나는 다소 실망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없어? 마법으로 공간 이동도 하고 별 걸 다 하는데 왜 미래를 볼 수는 없는 거야?”
“공간과 달리 시간은 여신의 영역입니다. 여신의 영역을 일개 인간이 탐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여신?”
“네. 한낱 인간이 미래를 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가씨. 부자가 된다거나 짝사랑하던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같이 좋은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사람에게 늘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닙니다. 극단적으로 내일 당장 죽는 미래를 보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제정신일 수가 있을까요?”
그는 별생각 없이 말한 예시였을 텐데도 유리나는 그의 말에 꽤 충격을 받았다.
죽는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 데이브의 말처럼 제정신일 수는 없었다. 유리나는 원작의 서브 남주인공이라고 믿었던 레이너드를 찾아 제 미래가 바뀔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갖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를 찾지 못했었다면 어땠을지 그녀 스스로조차 장담할 수가 없었다.
‘진짜로 미쳤을지도 몰라.’
끔찍한 가정에 갑자기 소름이 돋는 것 같아 그녀는 몸을 잘게 떨었다.
“그러니 미래를 볼 수 없는 건 여신의 배려이자 축복입니다.”
아냐. 미래를 몰랐다면 난 원작에 쓰인 그대로의 길을 걸어 커티스를 사랑하고, 종국에는 데프론 후작과 카리온 손에 죽었을 거야. 미래를 모른다는 건 축복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기도 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데이브에게 따질 일은 아니었다. 따진다고 하더라도 그가 이해할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유리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며 어지러운 머릿속을 진정시켰다. 그러고 나니 이상한 게 있었다.
‘데이브가 저런 말도 해?’
이 세계에서 마법사는 가장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데이브는 그런 마법사 중에서도 특히 더 이성적이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여신의 영역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유리나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자 그가 알아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이건 고리타분한 신전에서 하는 말이고, 마법 학계에서는 의견이 다릅니다.”
역시 그렇지. 유리나는 다시 흥미를 갖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어떻게 다른데?”
데이브가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찻잔 안에는 홍차가 반 정도 남아 있었다.
“아가씨, 제가 이 차를 더 마실까요, 안 마실까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유리나는 이상하다는 의심을 갖지 않았다. 데이브와 수업을 할 때면 이렇게 수업과는 관련이 없는 질문을 종종 했지만, 나중에 보면 그 어이없는 질문도 다 수업과 연관이 있었다.
“마실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직 많이 남았잖아. 데이브는 늘 차를 남기지 않고 마시니까.”
유리나의 대답을 들은 그가 미련 없이 찻잔을 테이블 구석으로 밀었다.
“틀렸습니다. 오늘따라 차 맛이 이상해서 더 이상 안 마실 겁니다.”
그 차는 항상 이상했는데.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가려던 속마음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구나. 그런데 그게 왜?”
“그럼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제가 저 차를 더 마실까요, 안 마실까요?”
“안 마신다면서.”
“아뇨, 마실 겁니다.”
“뭐?”
“생각해 보니 아까워서요. 저 찻잎 한 스푼이 얼마짜린데 그냥 이렇게 버리겠습니까?”
아니, 그 비싼 찻잎으로 왜 그렇게 이상한 차를 우리는 건데? 유리나가 진저리를 치는 사이 그는 밀어 두었던 찻잔을 들고 차를 마셨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유리나는 뒤늦게 홍차에서 시선을 떼고 데이브의 말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미래는 바뀔 수 있다?”
“그렇습니다. 만약 미래를 볼 수 있는 마법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제가 처음에 차를 안 마신다고 했을 때 미래를 본다면 제가 아가씨께서 가신 다음에 이 차를 버리는 장면이 나왔겠지요. 실제로 저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질문을 다시 건넸을 때 미래를 본다면 데이브가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소리지?”
“네. 역시 하나를 알려 드리면 열을 아시는군요.”
그가 이렇게 별것 아닌 것에 칭찬을 할 때마다 유리나는 그러지 말라며 뾰로통하게 대꾸하고는 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데이브는 재촉하지 않고 그녀가 충분히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렇지만 운명은 늘 여신이 주어진 대로 흘러간다고 하잖아.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다 여신의 뜻이라고 들었어.”
“고리타분한 신전에서 하는 말을 말씀하시는 거죠?”
데이브가 듣기 싫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그렇게 말해야 사람들을 다스리기 쉬우니까요. 여신의 뜻대로 난 귀족으로 태어났고, 넌 평민으로 태어났으니 불만을 갖지 말라는 거죠. 이렇게 세뇌를 해 두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건 그렇네.”
“하지만 저를 비롯하여 마법사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아가씨의 말씀처럼 공간 이동도 하는 마당에 미래가 고정되어 있는데 미래를 보지 못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하다못해 대신관들이 여신에게서 정확한 예언이라도 받아야 하는데, 예언은 늘 애매모호해서 신관들마다 해석이 다르고요.”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어쨌든 결론은 미래를 볼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럼 데프론 후작이 미래를 알고 있다는 건 틀린 가정이었나?’
그러나 포기하기는 일렀다. 유리나에게는 다른 가정이 있었다.
“그럼, 데이브.”
“네, 아가씨.”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마법은 있어?”
“과거로 돌아가요?”
“응. 공간 이동 마법처럼 일종의 시간 이동 마법…… 같은?”
질문을 하는 유리나가 보더라도 미래를 본다라는 가정과 시간 이동을 한다는 가정만 놓고 본다면 사실 후자 쪽이 더 허황된 것처럼 들리기는 했다.
그런데 의외로 데이브에게서는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유리나를 빤히 보다가 이미 식어 버린 홍차를 모조리 마셨다.
유리나는 데이브가 무언가 실마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그의 입에서 나올 말에 집중했다. 그러나 잠시 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좀 뜬금없었다.
“아가씨, 역사 공부 좋아하십니까?”
“응? 역사?”
주제가 갑자기 다른 곳으로 튄 것 같았지만 유리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마법과 역사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데이브를 믿기로 했다.
“뭐, 싫어하는 편은 아니야.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시군요.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습니다. 그 전에 잠깐 차를 한 잔 더 타 와도 될까요?”
유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금방 새로운 차를 끓여 왔다.
“저는 역사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번엔 역사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군요. 아가씨, 약 150여 년 전에 제국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십니까? 역사 시간에 분명 배우셨을 텐데.”
“150년 전?”
유리나는 기억을 되짚었다. 역사를 배운 지 오래됐지만 데이브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반란이 있었던 걸 말하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금방 기억해 내셨습니까? 역사 수업은 오래전에 들었을 텐데요.”
진심으로 놀란 듯 묻는 그를 향해 그녀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아카데미를 가려고 공부를 했었으니까.”
“아, 그랬었죠.”
레이너드가 크론 왕국으로 떠나고 난 뒤, 고요하고 쓸쓸한 저택의 분위기에 적응할 수 없었던 유리나는 시간을 빨리 보내기 위해 아카데미에 입학을 할까 고민했었다.
그러나 카르티아 후작 부부는 몸이 약한 그녀를 기숙사제 아카데미에 보낼 수 없다고 반대를 했다. 특히 후작 부인의 반대가 유독 심했다.
유리나는 그래도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었지만, 때마침 열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데이브에게 마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반란은 왜?”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57년 전, 아치볼드 황제 서거 후 그의 맏아들이자 황태자였던 콘래드가 황위에 올랐다.
그가 황태자로 책봉될 때부터 그를 반대하던 이들이 많았다. 콘래드가 황좌에 욕심이 많은 것에 반해 한 제국을 통치할 만한 능력도, 신하와 제국민들을 감싸 줄 인품도 없다는 것이었다.
콘래드가 황위에 오를 때도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그는 제게 반대하는 이들은 모두 칼로 베고 피로 물든 황좌에 올랐다.
그로부터 3년 뒤, 간이고 쓸개고 모두 줄 기세로 콘래드 앞에 납작 엎드려 목숨을 부지했던 3황자, 에드가가 제국 동부에 있는 그의 영지를 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콘래드의 폭정에 지친 귀족과 제국민들이 에드가의 반란에 동참했지만, 아쉽게도 치열한 접점 끝에 그의 반란은 진압됐다.
그 후, 에드가는 처형당해 수도 한복판에 머리가 효수되었고, 그의 반란에 가담했던 이들 모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때 제일 탄압을 받은 게 흑마법사들이었다.
“아가씨도 이미 아시지만, 흑마법은 일반 마법과 달리 피를 매개체로 쓰는 마법입니다. 사람들은 흑마법사들을 불길하게 여겼고, 흑마법사들은 차별을 견디다 못해 점점 더 음지로 몸을 감췄습니다. 그렇지만 제국 차원에서는 그들을 탄압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도, 계기도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반란이 계기가 됐지.”
“네, 그렇습니다.”
콘래드 황제는 안 그래도 눈엣가시였던 흑마법사들을 반란을 계기로 모두 잡아들였다. 그게 지금 흑마법사들이 사라진 이유였다. 음지에서는 아직도 존재할지도 모르나, 적어도 표면적으로 드러나진 않았었다.
얼마 전, 사냥 대회에서 발견된 늑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왜 하는 거지?’
이미 다 아는 이야기라 데이브가 새삼 말할 이유가 없었다. 유리나의 의아한 시선을 받던 데이브가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목을 가다듬었다.
“여기까지가 대외적으로 알려진 제국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아가씨, 이 역사를 배우면서 혹시 이상한 점을 느끼신 적이 없으십니까?”
“음…….”
유리나는 잠시 머뭇거리며 생각을 더듬거렸다. 사실 그동안 역사 선생님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부분을 배우며 조금 의아한 점이 있기는 있었다.
“조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었어.”
“어떤 부분이요?”
데이브가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칠 때처럼 은근하게 물었다. 그는 유리나에게나 레이너드에게나 내용을 직접 가르쳐 주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수업을 유도했다.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은데…….”
“괜찮습니다. 아무도 못 들으니까요.”
유리나는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그동안 이상하게 여겼던 부분을 조심스럽게 꺼내 놓았다.
“흑마법사들 말이야, 아무리 반역에 가담했다고 해도 이때다 싶어서 모조리 잡아다가 처형한 게 조금 이상했거든. 반역에 가담한 건 일부일 거 아니야.”
기사가 반역에 가담했다고 해서 제국의 모든 기사를 처벌하지 않는다. 어떤 영지의 귀족이 불순한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그 귀족 영지의 모든 사람들을 잡아가지는 않는다.
흑마법사가 반역에 가담했다고 해도 그 반역에 가담한 사람과 그와 연관이 있는 사람 정도만 처형하는 것이 순리에 맞았다. 그런데 콘래드 황제는 아예 흑마법을 뿌리 뽑을 것처럼 반역과 연관이 없는 마법사들을, 그것도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악착같이 찾아 처형했다.
아무리 흑마법이 불길하다고 여겨진다고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러나 이 말이 자칫하면 제국 황실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봐 유리나는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원하는 대답을 얻었는지 데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의 말씀이 맞습니다. 흑마법사가 반역에 가담을 했다고 해서 흑마법을 통째로 뿌리 뽑을 이유는 없습니다. 콘래드 황제도 처음에는 반역과 관련된 마법사만 처형했습니다. 모든 흑마법사를 잡아들인 건 몇 달 뒤의 일이지요.”
“그 이유가 뭡니까?”
유리나의 얼굴만 살피며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레이너드가 불쑥 끼어들었다.
“흑마법사(史)를 배울 때 그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다들 쉬쉬하기 때문이지.”
데이브는 방음 마법을 걸었으면서도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콘래드 황제가 흑마법사들을 탄압하기 시작한 건 흑마법사들이 처형된 3황자를 다시 되살리려고 하는 계획이 발각됐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까? 그건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데이브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시에 물었다.
삶과 죽음은 대표적인 신의 영역이었다. 부상을 크게 입어 곧 죽을 것 같은 사람을 살릴 수는 있어도 이미 죽은 사람은 살릴 수가 없었다.
“네, 마법으로 죽은 사람은 살릴 수가 없죠. 더군다나 이미 3황자의 시체는 불태워지기까지 한 상태니까요.”
“그럼?”
“흑마법사들은 3황자가 살아 있던 때로, 그러니까 반역을 일으키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려고 했습니다.”
순간, 시간을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싸늘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레이너드가 들고 있던 머그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면서 침묵이 깨졌다.
“그래서 성공했습니까?”
그는 유리나가 묻고 싶은 질문을 대신 물었다. 데이브가 고개를 저었다.
“성공했다면 잡혀서 처형당할 리가 없지. 그래도 그런 정황이 포착되었으니, 콘래드 황제는 흑마법사들이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마법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모조리 잡아 처형했습니다.”
“그럼 정말로 흑마법으로 시간을 돌리는 게 가능한 거야?”
다소 조급하게 묻는 유리나의 질문에 데이브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도 모르지요. 아가씨께서 물어보셔서 그저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일을 말씀드린 겁니다. 사실 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요.”
그는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이 불가능한 이유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마법을 깊이 배우지 않은 유리나가 듣기에도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정작 유리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정반대의 생각을 했다.
흑마법사,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
흑마법사로 추정되는 데다가 미래를 알고 있는 데프론 후작.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데프론 후작이 시간을 돌린 거였어.’
이 모든 이야기를 설명할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 * *
가뜩이나 리디아와 카리온이 온다는 소리에 잔뜩 흥분했던 쌍둥이는 평소보다 일찍 집에 와서 유리나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유리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며 그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누가 다혈질 아니랄까 봐 두 사람은 성난 망아지마냥 진정을 하지 못했다.
그 둘을 상대하다가 지친 나머지 유리나는 저녁도 먹지 않고 방으로 올라왔다. 가뜩이나 정신이 없는 데다가 저녁 시간에도 두 사람의 잔소리를 들으면 속이 얹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쌍둥이가 저녁도 포기하고 따라오려고 하길래 베시를 시켜 방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다행히 에드윈과 저스틴은 노크를 조금 하더니 문틈 사이로 오빠들이 난리를 쳐서 미안하니 화 풀라는 쪽지를 집어넣고는 돌아갔다.
유리나는 필체가 조금 다른 두 오빠의 쪽지를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보지는 않아도 식사를 하며 우울해하고 있을 두 오빠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아 웃겼다.
잠시 오빠들의 쪽지로 기분 전환을 한 그녀는 힘없이 소파에 널브러졌다. 아까 데이브의 연구실에서 나오던 레이너드의 굳은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마음이 심란할 텐데.’
충격적인 카리온의 이야기와 데이브의 이야기를 들은 뒤에도 유리나는 레이너드와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데이브의 연구실을 나와 본채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쌍둥이들이 달려온 탓이었다. 그래서 유리나는 그에게 자신이 떠올린 가정을 말해 줄 새도, 내색은 하지 않아도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고 있을 그를 달래 줄 새도 없었다.
레이너드는 유리나가 원래 자신이 아니라 카리온을 찾아 후원하려고 했었다는 말만으로도 그녀가 자신을 떠나는 건 아닌지 초조해하며 카리온을 경계했다.
그런데 ‘유리나 카르티아’가 카리온을 후원하고, 카리온이 그녀를 좋아했었다니.
레이너드가 지금 어떤 마음을 갖고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 괴로웠다.
“아가씨, 정말 식사를 안 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가져올까요?”
유리나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자 옆에서 다른 하녀들에게 목욕물을 가져오라고 지시하던 베시가 다가왔다.
“응, 따뜻한 수프랑 빵 좀 가져다주면 좋겠어.”
사실 아무 생각이 없어 입맛도 없었지만, 뭐라도 좀 먹어야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베시가 챙겨다 준 저녁을 먹고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한 유리나는 평소보다 일찍 침대에 누웠다. 베시는 유리나의 부탁으로 숙면에 좋은 따뜻한 차를 한 잔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유리나의 몸에 이불을 잘 덮어 주고는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유리나는 베시가 확실히 나간 것을 확인한 뒤에 침대에서 내려왔다. 베시가 사이드 테이블에 둔 차를 들고 침실 옆에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카리온과 유리나라…….’
따뜻한 차를 마시며 그녀는 카리온과 데이브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의 가정은 이랬다.
‘내가 읽었던 원작은 회귀 소설이었던 거야.’
그리고 카리온은 꿈에서 미래를 본 것이 아니라 데프론 후작이 시간을 돌려 회귀하기 전 있었던 과거의 일, 즉 원작 소설이 시작하기 전의 과거를 본 것일 테다.
데프론 후작이 잡히는 것은 보아도 그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건 처형당하기 전에 그가 흑마법으로 시간을 돌렸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카리온 혼자서만 과거의 일을 본 것인지가 조금 의아했지만 그가 베아투스라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 납득이 갔다.
‘사냥 대회 때도 흑마법사의 짓이라는 것을 레이 혼자 알았으니까.’
흑마법으로 시간을 돌렸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기억하지 못해도 베아투스인 카리온은 어렴풋이 기억이 남아 있는 걸 테다.
왜 지금껏 데프론 후작이 회귀를 했을 거란 사실을 몰랐나 스스로가 한심스러웠지만 돌이켜 보면 모를 법도 했다.
원작 소설은 철저하게 주인공인 리디아 데프론의 시점에서 쓰였다. 리디아가 회귀를 했다면 모를까, 데프론 후작이 회귀를 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 사실을 리디아가 몰랐다면 당연히 책 속에서 서술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결말 부분에는 모든 것이 밝혀지고 끝났겠지만 그녀는, 그러니까 유리나에게 빙의하기 전 윤세나는 원작 속 ‘유리나 카르티아’가 죽는 것을 보고 흥미가 떨어져 결말 부분을 보지 않고 책을 덮었다.
그래서 원작 소설이 주인공의 아버지였던 데프론 후작이 회귀한 소설이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데프론 후작이 회귀했다’라는 가정을 끼워 넣자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의문과 궁금증이 모두 풀렸다.
‘유리나 카르티아’를 없애고 자신의 딸을 황태자비에 앉히려고 했던 계획을 세웠다가 카리온에게 모든 계획을 들키고 처형당할 위기에 놓인 데프론 후작.
과거로 돌아온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유리나’보다 먼저 카리온을 찾는 것이었을 테다. 카리온에게 죽지 않기 위해 데프론 후작보다 먼저 그를 찾으려고 했던 유리나처럼 말이다.
아마 처음엔 카리온을 죽일까 말까 고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르티아가와 대립하고 있던 그의 입장에서는 어렵게 찾은 붉은 눈의 아이를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제 편으로 만들어서 리디아가 황태자비에 오를 수 있도록 이용하는 것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승리자’라는 뜻의 카리온이란 이름을 지어 주고 그를 저택으로 데려와 후원을 해 주었다. 과거와는 달리 아마도 그는 그때부터 ‘유리나’와 카르티아가를 이겼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을 테다.
그의 뜻대로 카리온은 데프론 저택에서 리디아와 지내면서 그녀를 마음에 품고 그녀를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리디아가 순탄히 커티스와 약혼을 하고 황태자비가 될 수 있도록 ‘유리나’와 카르티아가를 제거했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편에서 쓰인다. 주인공인 리디아의 입장에서는 제 목숨을 걸고 회귀하여 그녀를 살려 내고 황태자비까지 만든 아버지, 데프론 후작은 영웅이었을 것이다.
원작 소설은 그렇게 ‘유리나’와 카르티아가 사람들을 악역으로 만들고, 리디아에게 해피 엔딩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여기서 변수가 하나 생겼다.
‘그게 나야.’
윤세나가 원작 소설의 내용을 안 채로 유리나에 빙의를 하면서 미래를 아는 사람이 둘이 되어 버렸다.
데프론 입장에서는 유리나가 후원한 카리온이 자신의 덜미를 잡아 처형당할 운명에 처한 것이 앞으로 일어날 미래였지만, 유리나의 입장에서는 책에서 보았던 것처럼 데프론 후작이 후원한 카리온의 손에 죽는 것이 미래였다.
실제로도 원작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더라면 회귀한 데프론 후작이 의도했던 대로 카리온의 손에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유리나와 데프론 후작. 두 사람이 알고 있는 미래는 각각 다른 것이었지만 목적은 같았다.
자신을 죽일 운명인 붉은 눈의 아이를 고아원에서 찾아 제 편으로 만드는 것, 그래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
그리하여 두 사람은 각자 그 아이를 찾기 위해 수도와 그 주변 영지의 고아원을 물색하고 있었을 테다.
데프론 후작이 번화가에서 레이너드를 보았을 때 반색을 했던 것도 다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다 유리나가 후원하는 아이라는 것을 깨달은 뒤에 자신이 한발 늦었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데려가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런 그가 레이너드가 카리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건 그의 이름을 들은 직후였다.
―레이너드라고?
유리나는 원래의 ‘유리나’가 지어 준 카리온의 이름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나 분명 레이너드는 아니었을 것이다.
데프론 후작은 그 이름을 듣자마자 그가 ‘유리나’가 원래 데리고 있던 아이, 즉 자신이 찾고 있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레이너드를 포기하고 카리온을 다시 찾기로 결정했을 테다.
동시에 어쩌면 유리나가 원래의 ‘유리나’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카리온을 찾은 뒤에도 철저하게 그 사실을 숨기고, 그를 아카데미에도 보내지 않고 자신의 영지에서 숨겨서 길렀다. 그러면서 유리나와 레이너드를 없앨 계획을 차근차근 세웠을 것이다.
‘2황자와 접촉을 한 것도 커티스가 나에게 이미 관심을 보여서 그런 거겠지.’
그는 회귀할 때만 해도 리디아가 사랑하는 남자, 커티스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을 테다. 그러다 보니 그의 목표는 리디아를 커티스와 결혼시켜 황태자비로, 더 나아가 황후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리나와 카르티아가에 대한 증오는 그의 눈을 멀게 하여 회귀의 이유는 잊고 맹목적인 목표만 보고 달려가게 만들었다. ‘리디아가 사랑하는 남자와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리디아를 황태자비로 만드는 것’만 마음속에 남았다.
그런데 황태자인 커티스가 리디아에게는 관심이 없고, 되레 자신이 증오하는 유리나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렇다면 그가 리디아를 황태자비로 만들기 위해 한 선택은 무엇일까.
‘리디아를 2황자와 결혼시키고, 2황자를 황태자로 만들려고 한 거야.’
다만,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은 남는다.
원작에서는 데프론 후작이 시키는 대로 리디아를 황태자비로 만들기 위해 유리나를 죽이기까지 한 카리온이 왜 그녀를 찾아와 이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일까. 지금까지 상황으로 본다면 원작에서도 그는 분명 꿈에서 과거를 보았을 것이다.
‘리디아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어.’
그럼 원작과는 달리 리디아를 배려하지 않고 그녀를 황태자비로 만들려고 하는 데프론 후작의 행동이 그녀를 위협하고 있다는 소리일까.
“유리나.”
한참 생각을 하던 유리나는 바로 코앞에서 들리는 레이너드의 목소리에 감은 눈 위에 얹었던 손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가벼운 실내복 차림을 한 레이너드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종종 이렇게 남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공간 이동 마법을 이용하여 유리나를 찾아오고는 했다.
촛불에 희미하게 비치는 그의 얼굴이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늘 유리나만 보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는 것과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다.
“언제 왔어?”
“조금 전에.”
“그럼 말을 하지.”
그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유리나는 마치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듯한 그의 경직된 턱을 보다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와.”
굳은 것처럼 선 채로 가만히 있던 레이너드는 유리나가 가볍게 재촉하며 손을 흔든 뒤에야 발걸음을 뗐다.
넓은 보폭으로 몇 걸음 만에 그녀의 코앞에 선 그가 유리나의 허벅지 옆에 한쪽 무릎을 갖다 대며 몸을 숙였다. 그러고는 유리나의 옆에 두 손을 짚으며 그녀를 품 안에 가두었다.
안 그래도 어둑어둑했던 방이 어깨가 넓은 그가 다가오자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유리나는 눈썹을 한껏 찌푸리고 있는 그의 두 뺨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얼굴이 잘 안 보여. 보고 싶은데.”
그 한마디가 끝나기가 무섭게 테이블 위에 놓았던 촛불이 그의 옆쪽으로 천천히 날아왔다.
“이제 보여?”
그의 눈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유리나는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촛불에 빛나는 탓일까. 안 그래도 붉은 그의 눈동자가 꼭 불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의 눈동자는 실제로도 온갖 감정으로 타오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질투, 불안, 그리고 유리나를 향한 욕망. 농도 짙은 감정이 그녀의 몸 위로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날것 그대로의 감정에 심장이 마구 짓눌리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었어?”
“아까 카리온과 데이브에게 들었던 내용.”
카리온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유리나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유리나는 그가 더 괴로워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알아낸 게 있어.”
그녀는 그에게 자신이 조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가정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카리온이 꾸었던 꿈은 과거에 그가 겪은 이야기라는 것을 시작으로 리디아를 황태자비에 앉히기 위해 유리나를 죽이려고 했던 데프론 후작은 흑마법으로 시간을 돌렸다는 것과, 그래서 그가 카르티아가와 유리나에게 적의를 갖고 카리온을 찾았다는 이야기까지.
이곳이 책 속 이야기라는 것과 그녀가 ‘유리나 카르티아’에 빙의했다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이야기였는데도 레이너드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묵묵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황태자 전하가 아니라 2황자 전하와 접촉을 했다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단순히 나와 널 노리는 게 아니라 더 큰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아.”
차분한 유리나의 설명에도 그의 굳은 표정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리나는 그의 눈을 물끄러미 보다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어 보였다.
“레이.”
“응.”
“카리온을 후원했다는 ‘유리나’는 내가 아니야.”
또다시 나온 카리온의 이름에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카리온이 기억하는 것도 내가 아냐. 그 사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브라우니라고 했는데 내가 초콜릿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건 너도 알잖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네가 말한 것처럼 스콘이야. 잼과 크림을 바른 따뜻한 스콘.”
“…….”
“내가 후원을 한 것도 너뿐이야. 그러니까 아까 들은 이야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알아.”
그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아는데, 그 자식이 널 보는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아.”
“레이…….”
유리나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레이너드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따뜻한 숨과 입술이 목에 닿는 느낌이 나더니 따끔한 느낌이 느껴졌다. 아프다기보다는 다른 느낌을 주는 통증이었다.
레이너드가 고개를 좀 더 내리며 그녀의 목에 차근차근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지나간 자리마다 따끔한 감각과 함께 붉은 자국이 남았다.
유리나는 얼굴과 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어찌할 바를 몰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그의 셔츠를 꽉 움켜쥐었다.
힘을 주어 그의 가슴을 살짝 밀어 보았지만 단단한 그의 몸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유리나가 움직일 때마다 안 그래도 단단한 그의 가슴 근육이 성이 난 것처럼 움찔거렸다.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흰 목덜미에 남은 붉은 자국을 손끝으로 더듬거렸다. 특별할 것 없는 신체 접촉이었는데도 유리나는 긴장감에 숨을 확 들이쉬었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붉은 자국을 혀로 핥았다. 욕망을 숨기지 않은 행동이었다.
유리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지만 그는 오히려 보란 듯이 고개를 좀 더 아래로 내리며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작은 소리였는데도 숨소리도 생생하게 들릴 정도로 방이 조용했던 터라 입맞춤 소리가 크게 들렸다.
레이너드가 느슨하게 묶인 리본 끝을 입으로 물며 유리나의 옷 안쪽으로 엄지를 집어넣었다. 리본을 잡아당기며 손을 움직이자 유리나의 맨 어깨가 금방 그의 앞에 드러났다.
그는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더듬거리다가 부드러운 선을 그리는 그녀의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레이…….”
“다른 남자가 널 보는 것도 싫은데.”
그의 혀끝이 이번에는 쇄골 위의 움푹 파인 곳을 훑었다.
“카리온 그 자식이 널 보는 건 더 참을 수 없어.”
그가 이를 세워 유리나의 쇄골을 살짝 아플 정도로 물었다. 꼭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씹어 삼키는 것처럼 쇄골 위에서 입술을 움직이며 잘근잘근 깨물었다. 유리나는 터져 나오는 소리를 참기 위해 손등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난 너만 있으면 돼. 내가 원하는 것도, 내가 가진 것도 너뿐이야.”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소파에 눕혔다. 그는 그녀의 몸을 모조리 덮을 것처럼 그녀의 몸 위에 올라갔다.
“너도 나만 있으면 되는 거지?”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질투나 소유욕으로 물들어 있기보다는 애처로워 보였다. 유리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제야 그가 안심한 듯 유리나의 위에 축 늘어졌다. 몸을 누르는 그의 무게가 묵직했지만 유리나는 내색하지 않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니까 유리나, 아무런 걱정 마.”
“응.”
“절대로 누가 널 해치게 놔두지 않을 거니까.”
카리온이든 데프론 후작이든. 그는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이를 꽉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