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적과 동지, 그 사이 어딘가
데프론 후작은 희미한 촛불에 의지하여 책상 위에 놓인 초상화 하나를 내려다보았다. 직사각형 모양의 캔버스 위에 그려져 있는 건 앳된 얼굴의 소녀였다.
분홍빛이 도는 금발과 맑은 파란 눈동자. 열 살 무렵의 유리나였다.
그는 정면을 응시하는 그림 속 유리나의 눈을 노려보며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유리나 카르티아…….”
완벽한 줄만 알았던 모든 계획을 망친 건 바로 이 여우 같은 계집이었다. 그는 유리나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7년 전, 그는 리디아와 함께 나간 번화가에서 레이너드와 함께 있는 유리나를 처음 보았다. 그러나 그건 이번 생에서의 첫 만남이었다.
그가 유리나를 정말로 처음 본 것은 7년하고도 2년이나 더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이다. 당시 리디아가 성인을 2년 앞두고 있었으니 유리나 또한 열여섯 살이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데프론 후작은 그녀에게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리디아가 유리나와 연인인 황태자를 좋아하기 전까지는.
사랑스러운 딸 리디아는 그 누구보다도 황태자 옆에 있을 자격이 됐다. 황후 자리에 리디아 말고 유리나가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리디아와 황태자인 커티스를 엮어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유리나와 커티스의 사이는 굳건했고, 그녀가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하는 열여덟 살이 될 때는 약혼 이야기까지 나왔다.
유리나만 없다면, 그녀만 없었더라면…….
분노에 차서 그녀를 없애려는 시도를 했지만 그 시도는 유리나가 어릴 적 데려왔다던 베아투스에게 막히고 말았다. 그만 없었더라면 실패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데프론 후작은 처형당하기 직전, 황궁 지하에 있는 음습한 감옥 안에서 흑마법사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시간 마법 공식을 사용해 시간을 되돌렸다. 솔직히 그 마법을 쓸 때만 해도 시간이 정말로 되돌아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실제로 과거로 돌아왔다. 유리나가 베아투스를 찾기 전으로.
‘그 베아투스가 문제야.’
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유리나보다 먼저 그 베아투스를 손에 넣으면 모든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그는 유리나보다 먼저 베아투스를 찾아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중,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리디아의 생일 선물을 사 주기 위해 번화가에 나섰던 그날, 그는 붉은 눈의 소년과 함께 있는 유리나를 보았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분명 유리나가 베아투스를 찾았던 때는 겨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는 가을에 이미 그와 함께 있는 걸까.
의문 속에 잠겨 있는데 의외로 베아투스 소년이 실마리를 주었다.
―귀한 분을 몰라 봬서 인사가 늦었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후작님. 이미 들으셨다시피 저는 카르티아 가문의 은혜를 받고 있는 레이너드라고 합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가 과거에 들었던 베아투스의 이름은 분명 ‘레이너드’가 아니었다.
게다가 마법을 배운 적도 없는 유리나가 고대어로 희망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레이너드’라는 이름을 지어 주다니?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흘렀지만 데프론 후작은 자신을 보며 파르르 떨고 있는 유리나의 모습에서 결정적인 것을 눈치챘다.
‘가짜다.’
이 아이는 그가 알고 있던 원래의 ‘유리나’가 아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을 돌리는 과정에서 원래의 ‘유리나’가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았다.
‘게다가 뭔가를 알고 있군.’
유리나의 옆에 있는 붉은 눈을 가진 베아투스, 그러나 달라진 이름. 거기에 자세히 보니 그의 기억 속에 있던 아이와 얼굴이 달랐다.
과거, 귀족들의 앞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던 남자와 달리 제 앞에서 고양이 같은 눈을 똑바로 뜨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저 모습을 보라.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그녀가 데리고 있는 베아투스가 과거 진짜 유리나가 데리고 있던 그 아이가 아니라면, 수도 근방 어딘가에 과거의 그 아이가 남아 있다.
그 아이를 다시 데려온다면 이번엔 충분히 원하는 대로 미래를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다.
가짜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해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 계집아이일 뿐이다. 고작 그 아이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유리나와 그 레이너드라는 자식은 보란 듯이 그의 계획을 번번이 방해했다. 보란 듯이!
분노를 못 이겨 초상화를 꽉 쥐던 데프론 후작은 노크 소리에 서둘러 초상화를 감췄다. 잠시 후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건 리디아 데프론이었다.
* * *
리디아는 긴장을 한 얼굴로 아버지인 데프론 후작의 집무실 앞에 섰다.
‘아버지께서 왜 부르셨지?’
그녀의 아버지는 특별한 이유 없이 그녀를 부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특별한 이유란 그녀가 잘못을 했다든가, 심기가 불편할 때였다.
그러나 곰곰이 떠올려 보아도 오늘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유리나를 만나러 카르티아 저택을 다녀온 것밖에는.
‘아, 그건가.’
리디아는 오후 티타임 때 보았던 유리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유리나 카르티아.
데프론 후작은 리디아가 어릴 적부터 늘 유리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야기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열이면 열, 좋지 않은 이야기뿐이었다.
어리고 순진했던 리디아는 그런 아버지의 말을 모두 믿었다. 그녀의 상상 속에 유리나는 동화책에 나오는 마녀처럼 사악하고 자비가 없는 괴물이었다.
그런 리디아의 생각이 바뀐 것은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베아투스’에 대해 처음으로 알아낸 것이 유리나 카르티아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카리온을 만난 뒤로 리디아는 그가 제 붉은 눈을 싫어하는 것이 못내 안쓰러웠다. 그녀가 보기에 그의 눈은 무섭다기보다는 참 예뻐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저택의 고용인들이 그녀가 카리온과 같이 있으면 떼어 놓으려고 하는 건지, 아버지는 왜 카리온이 붉은 눈을 가졌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방 안에 가둬 놓다시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리나가 붉은 눈이 사실은 여신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는 내용을 알아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날 이후 유리나에 대한 리디아의 생각이 바뀌었다.
‘친구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이 나쁠 리가 없어.’
동시에 고마움도 느꼈다.
그 이후, 리디아는 아버지 몰래 유리나 카르티아에 대한 소식을 모았다. 수도에 가지 않고 영지에서만 지낸 터라 소식을 접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꽤 많은 말들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녀가 소문으로 들은 유리나 카르티아는 아버지가 말한 것과 전혀 달랐다.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호감을 느낄 정도로 사랑스러운 얼굴에 카르티아가 사람다운 당당함을 지니고 있다고 했던가. 리디아는 유리나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웃는 모습이 참 예쁜 또래 소녀를 상상했다.
그럴 때면 얼른 성인이 돼서 수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빨리 유리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가 되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베아투스와 친구처럼 지냈다는 것만으로도 남들은 공감할 수 없는 커다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으니 금세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리나가 후원하는 레이너드라는 소년과 카리온도 친구가 되면 참 좋을 것 같았다.
실제로 만난 유리나는 그녀가 늘 상상하던 것보다 더 예쁘고 당당한 소녀였다. 리디아는 그녀가 자신이 격식 없이 친근하게 굴 때마다 당황하는 것을 깨닫고 자제하려고 노력했지만,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자칫하면 무례해 보일 수 있는데도 상냥한 유리나는 그녀에게 잘 대해 주었다. 심지어 저택에 초대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아버지는 왜 카르티아 영애를 그토록 싫어하시는 거지.’
리디아는 엄습해 오는 공포감에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가 집무실 문고리를 돌렸다. 방 한가운데에 아버지인 데프론 후작과 빛이 잘 들지 않는 구석에 카리온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카리온을 발견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활짝 웃었던 그녀는 심각한 방 안 분위기를 느끼고는 얼굴을 굳혔다.
“아버지, 부르셨어요?”
문과 마주 보고 있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데프론 후작이 그녀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오늘 카르티아 저택에 다녀왔다고 들었다.”
“네, 그랬어요.”
“무슨 이야기를 했지?”
“별 이야기는 안 했어요. 그냥 요즘 사교계에 유행하는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 말 그대로였다. 리디아가 유리나와 한 이야기는 정말로 특별할 것이 없는 이야기였다. 사교계에 유행하고 있는 드레스나 장신구 이야기, 좋아하는 음식이나 간식 이야기 등, 평범한 십 대 소녀들이 친구들과 할 만한 이야기였다.
리디아는 그런 평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유리나와 정말로 친구가 된 것 같아서.
그런데 아버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평범한 이야기군.”
“그냥…… 가벼운 티타임이었으니까요. 친구끼리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그것 말고 또 있나요?”
데프론 후작이 코웃음을 쳤다.
“친구라니. 누가? 너랑 그 여우가?”
여우. 아버지는 늘 유리나를 여우라고 말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 계집이라고 지칭했다.
어느 쪽이든 리디아는 그 호칭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동안은 그냥 속으로만 꾹 삼켰을 뿐, 아버지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부모에게 대들지 않는 것은 자식의 미덕이라고 늘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 말을 가만히 들을 수가 없었다. 여우라니. 물론 여우도 예쁘기는 했다. 그렇지만 유리나는 아버지가 말하는 것처럼 간사한 여우가 전혀 아니었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탓인지 그녀는 귀여운 고양이 같거나, 혹은 목소리가 예쁜 카나리아 새 같았다.
그렇게 예쁘고 상냥한 소녀를 왜 아버지는 늘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까.
“카르티아 영애를 여우라고 하지 마세요.”
충동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리디아는 제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뒤늦게 깨닫고도 제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마음속을 답답하게 짓누르던 돌덩이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같이 후련한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께 그런 소리를 들을 사람이 아니에요.”
“뭐?”
고분고분하던 딸이 처음 내보이는 반항에 데프론 후작이 어이가 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는 책상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리디아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등 뒤에서 쏟아지는 오후의 햇빛이 땅바닥에 길게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리디아는 그 그림자의 끝이 제 신발 위를 덮치는 순간 겁에 질린 것처럼 뒷걸음질을 쳤다.
“방금 뭐라고 했지?”
데프론 후작이 한 걸음 더 내디딜 때였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있던 카리온이 재빨리 튀어나와 리디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늘이 져 더욱 서늘하게 느껴지는 후작의 시선이 리디아에게서 카리온에게로 옮겨 갔다. 그는 리디아가 자신에게 대들었을 때보다 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리디아는 그런 아버지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채고는 카리온의 앞에 나서려고 했지만, 카리온이 먼저 팔을 뻗어 그녀의 행동을 저지했다.
“누가 끼어들라고 했지?”
“아가씨께서 피곤하셔서 잠깐 실언을 하신 것 같습니다.”
“알겠으니 비켜라.”
“많이 피곤하신 것 같으니 아가씨를 방으로 모셔다…….”
순간, 짝 소리와 함께 카리온의 얼굴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후작에게 갑작스럽게 뺨을 맞고도 휘청거리지 않고 리디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리디아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햇빛을 많이 보지 못해 실핏줄이 보일 정도로 창백한 그의 뺨이 그새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입술은 터졌는지 언뜻 새빨간 피가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대체 왜. 잘못을 한 건 자신인데 대체 카리온이 왜!
“아가씨를 방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천한 것이 주제도 모르고 지금 누구 앞에서!”
데프론 후작이 또 한 번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순간, 리디아는 자신을 가로막는 카리온의 팔을 뿌리치고 그의 앞에 나갔다.
“아버지!”
그녀는 다가올 통증을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뺨에서는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질끈 감았던 눈을 살짝 뜨자 손을 올린 채로 씩씩거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리디아는 등 뒤에서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카리온의 손길을 느끼며 더듬거리듯 말했다.
“카이 말대로 제가 피곤해서 실언을 한 것 같아요. 죄송해요.”
그제야 데프론 후작이 굳혔던 표정을 조금이나마 풀었다. 그는 들었던 손을 그대로 내려 리디아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녀는 순간 놀라 어깨를 움츠리며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 그래야지. 네가 나한테 그럴 수는 없지.”
“피곤해서 그러니 이만 가 봐도 될까요?”
그녀는 데프론 후작의 시선이 제 뒤의 카리온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 서둘러 덧붙였다.
“몸이 좋지 않아서 카이가 방까지 데려다줬으면 해요.”
데프론 후작은 마뜩잖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거라.”
“그럼 가 볼게요.”
리디아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카리온의 팔을 잡고 집무실을 나왔다. 처음엔 안 가고 버티던 카리온은 리디아의 애원 어린 시선에 순순히 그녀를 따라 나왔다.
늘 그랬던 것처럼 카리온은 리디아의 옆이 아니라 한 발짝 뒤에 서서 그녀를 따라갔다. 리디아는 그런 그에게 옆으로 오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차마 그러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가벼운 대화조차 오고 가지 않았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리디아를 방까지 데려다준 카리온이 딱 그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는 그녀의 방에는 들어오지 않고 복도에 서서 문을 닫으려고 했다.
리디아는 점점 사라지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보다가 재빨리 문틈 사이로 손을 넣어 문이 닫히지 않도록 잡았다. 카리온이 깜짝 놀라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문을 닫고 있는데 그렇게 잡으시면 위험…….”
“왜 그랬어?”
리디아는 아까보다 더 심하게 부은 그의 뺨과 입술을 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쥔 채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울 것처럼 눈썹을 찌푸리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아버지가 때릴 거 뻔히 알면서 왜 끼어들었어?”
“그렇지 않으면 아가씨께서…….”
“아버지가 나한테 손찌검을 할 리가 없으시잖아.”
거짓말이었다. 아까 카리온의 앞을 가로막았을 때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의 뺨을 내려치지는 않을지 순간 겁을 먹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속내를 전혀 티 내지 않고 단호하게 일축하며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잠시 몸에 힘을 주고 버티던 카리온은 그녀가 재촉하듯 눈을 한 번 찡그리자 못 이긴 척 방 안으로 들어왔다.
리디아는 카리온을 소파에 앉히고 하녀에게 따뜻한 물과 수건을 가져오라고 시킨 뒤 그의 옆에 앉았다.
“카이.”
“네.”
“너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
“나는 아버지가 카르티아 영애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싫어. 전에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직접 카르티아 영애를 만난 뒤엔 정말 싫어졌어.”
“그렇지만 경솔하셨습니다.”
리디아는 차분히 대꾸하는 카리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보고 있으니 확실히 경솔했다는 생각이 들긴 들었다.
‘카이가 나서지 않도록 했어야 했는데.’
그녀는 입술을 깨물다가 때마침 하녀가 가져다준 수건에 따뜻한 물을 묻혀 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상처 위에 닿는 물이 따가운지 그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가 울 것 같은 리디아의 표정을 보더니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그래도 말이야, 나는 카르티아 영애와 정말로 친구가 되고 싶어.”
“…….”
“카르티아 영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정말 속상할 것 같아.”
리디아는 여전히 대꾸 없는 그를 보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도 내 첫 친구는 너야, 카이.”
리디아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7년 전, 유난히도 추웠던 어느 겨울날 아버지는 그녀를 오늘처럼 집무실로 불렀다. 당시 열 살이었던 그녀는 유모의 손을 잡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우습게도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옆에 서 있던 처음 보는 소년이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삐쩍 마른 소년은 리디아와 키가 엇비슷했다. 그는 겨울에는 어울리지 않는 아주 얇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이곳저곳에 구멍이 나고 너덜너덜해서 바람이 숭숭 들어올 것 같았다.
아버지는 리디아에게 한껏 몸을 움츠리고 있는 아이를 가리켰다.
―카리온이다. 앞으로 저택에서 지낼 거니 잘 봐 두거라.
―제 친구예요?
리디아는 신이 났다. 형제도, 자매도 없는 그녀는 늘 심심했다. 저택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모두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고, 그나마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하는 십 대 후반 하녀들은 리디아를 어려워했다. 아무도 그녀를 친구처럼 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친구처럼 지내라고 또래의 남자아이를 데려온 줄 알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순진무구한 그녀의 질문에 인상을 확 썼다.
리디아는 화들짝 놀라서 서둘러 뒷걸음을 치다가 넘어질 뻔했다. 유모가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실제로도 넘어졌을 것이다.
―친구라니. 이 애의 꼴을 보고도 어떻게 친구라는 소리가 나오지?
―그, 그럼요?
―시종이라고 해 두지.
리디아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내심 아이를 친구처럼 생각하며 같이 놀 생각에 들떴다.
―안녕?
아버지가 카리온이라고 소개한 소년은 말을 안 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는 리디아가 붉은 눈을 빤히 쳐다보자 눈을 가리며 방구석까지 도망쳤다. 정작 그녀는 그의 눈이 예뻐서 쳐다본 것이었는데.
그 후로 리디아는 아버지를 따라 영지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갇혀 지내다시피 지내다 보니 같이 놀 또래 친구라고는 아버지가 데려온 카리온이란 소년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그를 시종이라고 했지만 그는 확실히 다른 시종하고는 달랐다.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데프론 후작에게 마법을 배웠다. 유모에게 듣자 하니 마법사로 키울 생각으로 후원을 하는 거라고 했다.
후원자라면 친구처럼은 못 지내더라도 고용인과 피고용인 관계로 데면데면하게 지낼 필요는 없었다. 그가 시종이 아니란 것을 확인한 그날부터 리디아는 그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선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카리온’이라는 이름 대신 ‘카이’라는 애칭을 붙여 주고, 좋아하는 간식을 나눠 주고, 게임을 알려 주고, 같이 산책을 나가고.
작디작은 세계에서 그와 하루 종일 같이 지내다 보니 어느덧 그에게 마음을 주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현실적으로 그와 이어지기가 어렵다는 것은 알았다. 적어도 아버지인 데프론 후작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아버지에게 얻어맞는 것을 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속이 상했다.
“이 상처, 아직도 치료 못 하는 거야?”
리디아는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물었다. 언젠가 얼굴에 상처가 난 카리온을 보고 왜 치유 마법으로 치료를 하지 않는 건지 물은 적이 있었다.
리디아가 알기로는 그 당시 카리온은 넘어져서 다친 리디아의 무릎을 순식간에 치료해 줄 정도로 치유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가 있었는데, 그는 정작 제 상처는 치료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자기 자신은 치료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말에 치유 마법이 자기 자신은 치료할 수가 없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아버지인 데프론 후작이 카리온에게 무언가 제약을 걸어 스스로를 치료할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달려가려는 것을 카리온이 말려서 겨우 참았다.
카리온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에서 리디아는 긍정의 대답을 읽어 냈다.
‘너무하셔.’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하녀가 가져다 놓은 연고를 카리온의 상처에 조심스럽게 발랐다.
“아프지 마.”
“…….”
“네가 아프면 내가 더 속상하니까 아프지 마.”
그에게서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카리온은 보일 듯 말듯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네가 한 가정이 진짜라면 말이야.”
끄덕끄덕. 반쯤 졸고 있던 유리나는 대답할 기운도 없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뜨린 레이너드가 그녀의 정수리에 살짝 입을 맞췄다.
“많이 졸려?”
끄덕끄덕.
“그럼 내일 얘기할까?”
끄덕끄덕.
“유리나, 나 많이 사랑해?”
끄덕끄…….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유리나는 제대로 뜨이지 않는 눈을 간신히 뜨며 레이너드를 흘겨보았다.
“응? 왜 대답을 하다 말아?”
은근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아무리 들어도 괘씸했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꼬물꼬물 빠져나와 그에게서 등을 돌리며 누웠다. 레이너드는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나 싶더니 바로 그녀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유리나가 팔꿈치로 그의 단단한 배를 꾹꾹 밀어냈지만 그의 팔은 그녀의 허리를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자는 사람에게 그렇게 얼렁뚱땅 묻는 게 어디 있어?”
“그렇지만…….”
불안함이 섞인 그의 한숨이 유리나의 맨 어깨 위로 쏟아졌다.
“불안해.”
“…….”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아.”
유리나는 그의 품 안에서 다시 꼬물꼬물 몸을 돌렸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손바닥으로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자 불안하게 흐트러지던 그의 숨소리가 조금은 다른 의미에서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유리나는 그가 자신을 향한 그녀의 사랑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그를 향한 그녀의 마음은 매일 이렇게 시선을 맞대고 있는 그가 제일 잘 알았다.
다만 그냥, 그럴 때가 있다. 너무나 행복해서 가끔은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의심이 될 때가.
평생 애정에 굶주려 온 레이너드는 아마 유리나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사랑을 받아도 되는지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유리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또한 그에게 모든 사실을 가감 없이 성토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아도 되는 건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던가.
지금 초조해하고 있는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사랑해, 레이.”
유리나는 자신의 사랑이 늘 그에게 안정감을 주기를 바랐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자라야 했던 어린아이가 애정을 받지 못해 가진 그 공허함을 자신이 채워 줄 수 있기를 원했다.
이렇게 불안한 그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간절하게 사랑을 갈구하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남자였다.
“많이 사랑해.”
그러니 그가 안심만 할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진심을 담아 제 마음을 속삭여 줄 수 있었다.
“응, 나도 사랑해.”
레이너드가 그녀를 꽉 안았다. 귓가에 닿은 그의 왼쪽 가슴 아래에선 불규칙하던 심장 소리가 조금씩 느릿하고 안정적이게 바뀌어 갔다.
* * *
“그러니까 네가 한 가정이 사실이라면 말이야.”
레이너드가 여유롭게 홍차를 마시는 유리나를 보며 문득 화두를 돌렸다. 두 사람은 장미가 가득 핀 정원에서 여유롭게 티타임을 가지고 있는 중이었다.
잠을 충분히 자서 정신이 맑은 덕분에 유리나는 이번엔 그의 말을 경청할 수 있었다.
“데프론 후작이 절대로 널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유리나는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그간 보았던 데프론 후작의 눈빛을 떠올렸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찢어발기고 싶다는 듯한 적의 어린 시선.
어릴 때는 번화가에서 처음 만난 그의 시선에 왜 그렇게 겁을 먹었는지 뒤늦게 의아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가 카리온을 사주하여 ‘유리나’를 죽인 것은 소설 속의 일이었다. 아무리 그가 미래에 자신을 죽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 충분히 바꿀 수도 있는 데다가 당시에는 카리온이라고 굳게 믿었던 레이너드가 있었는데 왜 그렇게 겁을 집어먹었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아무리 죽음에 트라우마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정신은 열 살 아이가 아니라 스물두 살 성인이었는데 과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데프론 후작이 정말로 자신을 죽이고 싶다는 살의를 갖고 있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그렇게 강렬한 살의 앞에서 겁을 먹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데프론 후작이 회귀한 걸 몰랐을 땐 단순히 커티스만 피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의 목표가 단순히 리디아를 황태자비로 만드는 거였다면 황태자비가 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순탄하게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데프론 후작의 목표는 리디아를 황태자비로 만드는 것과 동시에 자신을 파멸로 이끈 카르티아가에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선수를 쳐야겠지.”
유리나의 목소리에는 단호함과 결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데프론 후작이 흑마법사인 걸 밝히면 될까?”
레이너드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밝혀내는 게 쉽지는 않을 거야. 밝혀낸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안 돼. 흑마법사가 과거에 탄압을 받았다고 해도 지금은 딱히 처벌을 할 근거가 없거든.”
“그럼?”
유리나는 포크를 들어 치즈 케이크의 가장 뾰족한 부분을 콱 잘라 냈다.
“다른 꼬리를 노려야지.”
* * *
“황태자 전하를 말이냐?”
갑작스러운 이름에 카르티아 후작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되물었다. 유리나의 주위에 앉아 있던 릭스 또한 그답지 않게 놀라서 입을 열었다.
“유리나, 황태자 전하는 갑자기 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설마…….”
유리나는 릭스의 생각을 기민하게 읽어 내고는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비가 되려는 게 아니야.”
그가 안도의 한숨 같은 것을 내쉬었다.
“그럼?”
“그 반대야. 황태자 전하께 황태자비가 될 마음이 없다고 확실하게 말하고 올 거야.”
유리나는 릭스와 카르티아 후작의 눈을 한 번씩 지그시 마주쳐 보인 후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제안을 하나 하고 올 거야.”
커티스 제노시안이 깔끔하게 유리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제안을.
그리고 그가 이 제안에 응한다면 데프론 후작과 2황자를 견제할 수 있는 동맹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 * *
유리나의 계획을 들은 카르티아 후작은 최대한 빨리 유리나가 커티스 제노시안을 알현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기로 했다. 동시에 릭스에게 크론 왕국에서 유리나를 습격했던 반역 세력과 데프론 후작이 손을 잡았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으라고 시켰다.
레이너드는 데이브와 함께 연구실에 틀어박혀 흑마법사를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모든 비밀을 알았으니 그 비밀을 밝히는 과정은 생각보다 순탄하게 풀리는 듯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흑마법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가 않았고, 공무에 바쁜 커티스를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얼른 만나야 하는데.’
유리나가 초조하게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챙, 하고 도자기와 도자기가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소라면 나지 않았을 이질적인 소리였다. 유리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베시가 건네준 찻잔을 바라보았다.
찻잔을 받침 위에 올려놓을 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살 놓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예법이었다.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 고용인이라면 모를까, 저택에서 능숙하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베시가 할 만한 실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베시는 자신의 실수를 눈치채지 못한 듯 당황한 기색이나 사과 한마디도 없이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꽃무늬가 그려져 있는 찻잔 안에 불그스름한 홍차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홍차가 차의 3분의 2 이상 담긴 뒤에도 베시는 멈추지 않았다.
“베시?”
유리나가 조심스럽게 부르자 그제야 베시가 놀라며 기울였던 손을 바로 세웠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넘칠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채워져 있는 찻잔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죄송해요, 아가씨! 제가 잠깐 딴생각을 했나 봐요. 새로 따라드릴게요!”
유리나는 찻잔을 가져가려는 베시를 고갯짓으로 만류했다.
“괜찮아. 안 넘쳤으니까.”
그녀는 찻잔을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그냥. 다른 건 실수하면서도 손잡이는 오른쪽에 놓은 것이 참 신기해서.”
찻잔을 소리 나게 놓고, 차를 넘칠 것처럼 따르는 와중에도 베시는 유리나의 편의를 위해 찻잔 손잡이를 그녀의 오른쪽으로 가게 두었다. 오랜 습관이라 몸에 배서 자연스럽게 나온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베시, 무슨 일 있어?”
“네?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베시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유리나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조금 전 베시답지 않은 실수도 실수였지만, 오늘따라 베시는 어딘가 굉장히 어수선했다.
유리나가 한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뒤늦게 뭐라고 하셨냐고 반문을 하지 않나, 스푼을 달랬더니 포크를 주지 않나, 걸어가다가 발목을 삐끗해서 넘어질 뻔하지 않나.
한 번이라면 순간적으로 실수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여러 번 반복되니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베시는 웃고는 있지만 평소에 티 없이 맑게 웃는 얼굴에 비하면 다소 기운이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다면 숨기지 말고 말해 봐.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
아무 일도 없다고 두어 번 더 고개를 젓던 베시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유리나의 얼굴을 보다가 한숨을 한 번 쉬었다.
“사실은 말이죠.”
“응.”
유리나는 급격하게 어두워진 그녀의 얼굴을 살피다가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베시는 앞치마를 매만지다가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유리나는 여분의 찻잔을 꺼내 손수 베시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오늘 아침 일찍 가족들로부터 편지를 받았어요.”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
베시가 홍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은 아니고요, 조카가 열 감기에 걸린 모양이에요. 원래 건강하던 애라 감기에 걸려도 금방 털고 일어났는데, 이번에는 상태가 좀 좋지 않나 봐요.”
베시의 조카라면 유리나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베시보다 두 살 어린 여동생의 아들로, 뛰어다니기를 좋아하는 사고뭉치 네 살 꼬맹이라고 했다. 베시는 휴가를 갈 때마다 주방에 부탁해서 조카에게 줄 간식거리를 챙겨 갈 정도로 조카를 제 아들처럼 예뻐했다.
‘그래서 정신이 없었구나.’
사랑하는 조카가 열 감기가 심하다면 온 신경이 조카에게로 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왜 별일이 아니야? 그걸 왜 이제 얘기해.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휴가를 줄 테니 얼른 집에 다녀와.”
베시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가씨를 두고 어딜 가요. 편지를 받고 넉넉히 돈을 부쳤으니 괜찮을 거예요.”
“그러지 말고 얼른 다녀와.”
“다녀와서 저도 감기가 옮으면 어떡해요. 아가씨에게도 옮길 수도 있는데.”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가족을 생각해야지.”
“그래도…….”
유리나는 읽던 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다소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행동에 베시가 잠깐 놀란 듯 멈칫했다.
“집중 못 하고 이렇게 실수하는 게 더 신경 쓰여.”
일부러 더 차갑게 건넨 말이란 것을 눈치챘는지 베시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다녀올게요.”
“당연히 그래야지.”
유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베시의 팔을 끌고 방을 나왔다. 집사장을 불러 베시에게 유급 휴가를 주라고 말해 두고, 베시가 짐을 꾸리러 방으로 간 사이 바쁘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주방이었다. 유리나는 난데없는 그녀의 등장에 깜짝 놀라는 주방 하녀들에게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간식과 음식 좀 챙기라고 일러둔 뒤 주치의인 로드릭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열병에 좋은 약재 좀 챙겨 달라 하자 로드릭이 유리나의 몸에 이상이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사정을 듣더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던 그녀는 퍼뜩 드는 생각에 복도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췄다.
‘다른 때도 아니고 하필 지금 열 감기에 걸렸어?’
지금은 봄에서 여름으로 슬금슬금 넘어가는 환절기로 날씨가 슬슬 더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날씨에 열 감기?
물론 아직 몸이 약한 어린아이다 보니 물놀이를 했다거나 밤에 잘 때 이불을 제대로 덮고 자지 않았다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아팠던 것이나 유리나를 노렸던 늑대 사건을 생각하니 단순한 열 감기도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베시는 유리나의 최측근 하녀다. 유리나를 노리는 거라면 그런 베시를 조카의 병으로 꾀어내어 무슨 수작을 꾸밀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었다.
잠시 복도에서 서서 생각을 하던 유리나는 방향을 틀어 데이브의 연구실로 향했다. 데이브가 아니라, 그와 함께 연구를 하고 있는 레이너드를 찾기 위해서였다.
“여기 이 부분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완전히 다른 결론이…… 유리나?”
데이브와 함께 황실 도서관에서 빌려 온 고서를 진지한 얼굴로 살펴보던 레이너드가 문 앞에 서 있는 유리나를 발견하자마자 웃으며 달려왔다.
“여긴 어쩐 일이야? 나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다른 일로 왔다고 하면 잔뜩 실망할 것 같은 얼굴이라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요 며칠 통 얼굴을 못 봤잖아.”
데프론 후작이 흑마법사라는 의심이 짙어지자 레이너드는 본격적으로 흑마법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유리나는 레이너드를 볼 시간이 없었다. 전에는 밤에 그가 방으로 몰래 찾아오고는 했는데, 요즘은 늦게까지 연구실에 있느라 그나마도 찾아올 시간을 내지 못했다.
베시 때문에 오기는 왔는데 막상 레이너드를 보니까 이곳에 온 소기의 목적을 잊어버릴 정도로 그가 반가웠다. 하지만 연구실 안에 데이브도 있던 터라 유리나는 차마 반가움을 표현하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차마 존경하는 스승님 앞에서 애정 표현을 할 수는 없었는지 레이너드 또한 유리나의 손만 잡고 말을 아꼈다. 유리나는 애꿎은 제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데이브, 주방에서 찾는 것 같던데? 새로운 찻잎이 들어온 모양이야.”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유리나는 아까 간식거리를 부탁하러 주방에 갔을 때 새로운 찻잎이 들어왔으니 기사들에게 배급해야겠다는 말을 얼핏 들었다. ‘지금’ 찾고 있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으니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도 레이를 닮아 가나 봐.’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이런저런 핑계로 둘만의 시간을 마련했던 것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작게 터뜨렸다. 데이브는 그런 유리나와 레이너드를 잠깐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습니까? 마침 찻잎이 다 떨어졌는데 잘 됐군요. 금방 다녀올 테니 잠깐 이야기 좀 나누고 계세요.”
데이브가 완전히 방을 나가는 것을 확인한 레이너드가 유리나에게 바짝 다가왔다.
“내가 그렇게 많이 보고 싶었어? 하녀를 시켜서 부르면 내가 갔을 텐데.”
입을 떼지 않은 채 물은 그는 유리나가 대답을 할 틈도 주지 않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유리나의 입에서 나오던 대답은 그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동안 제대로 보지 못한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그는 집요하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유리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맞춤에 응하다가 퍼뜩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해 냈다.
“잠깐만, 잠깐만, 레이.”
“응?”
대답을 하면서도 그는 새가 모이를 쪼듯 유리나의 입에 가볍게 쪽쪽거리며 입을 맞췄다. 유리나는 그의 어깨를 밀며 뒷걸음을 쳤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대로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놔뒀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았다.
레이너드가 의아하단 얼굴로 유리나에게 다시 다가가다가 그녀가 살짝 몸을 피하는 것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날 보러 온 게 아니구나?”
“으음, 겸사겸사 왔어.”
차마 부정을 할 수는 없어서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겸사겸사 뭘 하러 왔는데?”
“급하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부탁?”
“응. 베시네 조카가 열병이 심하대. 그래서 휴가를 주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요즘 데프론 후작가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서 좀 걱정이 돼. 혹시 만일의 경우 쓸 수 있는 마법 도구는 없을까? 전에 나한테 줬던 목걸이 같은 거.”
“음…….”
레이너드는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문지르다가 데이브가 마법 재료를 잔뜩 쌓아 둔 상자로 걸어갔다.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갔던 유리나는 상자 안에 담긴 재료들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이걸 이렇게 방치하다니.’
값비싼 재료들은 물론, 돈이 있어도 사기 힘들다는 희귀한 재료가 별다른 구분 없이 한데 섞여 뒹굴고 있었다. 데이브가 정리에 소질이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대충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지난번에 너한테 줬던 목걸이는 만드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기본적으로 마나 운용을 할 수 없으면 쓸 수가 없어. 마나 없이 쓸 수 있는 아티팩트를 찾아야 하는데, 마땅한 게 있을지 모르겠다.”
레이너드가 그 안을 뒤적거리더니 엄지손톱만 한 하늘색 돌멩이를 꺼냈다. 그는 돌멩이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려 살펴보다가 유리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건 뭐야?”
유리나가 돌멩이를 살피며 묻자 레이너드가 똑같이 생긴 돌멩이를 흔들어 보였다.
“음성 통신 마법구야.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지……. 이걸 나눠 가지면 서로 떨어져 있어도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어.”
아, 전화 같은 건가.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그런 게 가능하냐고 되물을 법했지만, 유리나는 금방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없이도 가능한 거야?”
“응. 다만 통신할 수 있는 거리가 제한적이기는 한데 카르티아 저택은 수도 중심에 있으니까 수도 내에서는 가능할 거야. 베시 집이 수도 안에 있댔지?”
“응. 왔다 갔다 하기 쉽도록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했다고 했어. 고마워.”
아직도 굳게 닫힌 문을 확인한 유리나는 까치발을 하고 그의 볼에 뽀뽀를 해 주었다.
* * *
“아가씨, 이게 다 뭐예요?”
시종들이 마차에 싣는 짐들을 보며 베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열병에 좋다는 약재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간식과 음식들, 옷가지까지. 쉴 새 없이 밀어 넣는 짐 때문에 마차가 금세 꽉 찼다.
“내가 주는 선물이야. 가서 동생들 줘.”
“이런 건 없어도 돼요.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실 필요는 없는데…….”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 베시 조카면 내 조카나 다름없어. 가서 잘 간호해 주고, 필요한 게 있다면 나에게 연락해. 휴가가 더 필요하면 얘기하고.”
유리나는 눈물을 글썽이는 베시의 손에 레이너드에게서 받은 아티팩트를 쥐여 주었다.
“이건 통신 마법구야. 가운데 부분을 꾹 누르고 얘기하면 내가 갖고 있는 아티팩트와 통신을 할 수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해. 알겠지?”
“네, 그럴게요.”
“몸 조심히 잘 다녀와.”
유리나는 베시의 등을 토닥여 준 뒤 등을 떠밀었다. 베시는 유리나가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보다 못한 유리나가 아예 팔을 잡고 태운 뒤에야 그녀는 겨우 마차에 올랐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창문을 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직 밤엔 공기가 차가우니까 이불을 꼭 덮고 주무셔야 해요. 저 없다고 식사 거르시지 말고 꼭꼭 챙겨 드세요. 아셨죠?”
“응, 알겠어. 걱정 말고 다녀와. 휴가가 처음도 아니면서 오늘따라 왜 그렇게 걱정을 해?”
“갑작스럽게 떠나니까 그렇죠. 이렇게 떠날 줄 알았더라면 진작 다른 애들에게 당부를 하고 오는 건데, 짐 챙기느라 바빠서 못 했어요.”
“난 걱정 말래도. 나 말고 조카 걱정만 하면 돼. 알겠지?”
“그래도…….”
“이러다간 오늘 내에 가지도 못하겠네. 얼른 출발해.”
유리나는 마부에게 손짓했다. 말의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휴가에 유리나가 계속 마음에 걸리긴 걸렸는지, 베시가 어쩐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최대한 빨리 올게요!”
“그럴 필요 없어. 휴가 다 쓰고 와.”
베시는 멀어지는 중에도 계속 유리나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점점 속도를 높이는 마차 뒤를 카르티아가의 기사 둘이 말을 타고 따라갔다.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고작 하녀 하나 외출하는 데에 가문의 호위 기사까지 딸려 보내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유리나도 그간 베시가 외출할 때 호위를 붙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남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더라도 호위를 붙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카르티아가를 향한 데프론 후작의 감정을 생각하면 기사 둘도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나.”
멀어지는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던 유리나는 등 뒤에서 들리는 레이너드의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레이너드가 검은 말의 고삐를 잡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웬 말이야?”
그가 턱짓으로 베시가 탄 마차를 가리켰다.
“걱정될 거 아냐. 따라가서 무슨 일이 없는지 확인하고 오자.”
“아…….”
유리나는 멀어지는 마차와 레이너드가 데려온 말을 보며 뒤늦게 탄성을 내뱉었다. 제 마음속에 들어갔다 온 것처럼 원하는 말만 쏙쏙 해 주는 레이너드에게 새삼 감동을 받았다.
유리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실 유리나는 말을 탈 줄 알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어릴 적에 배운 덕분이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레이너드가 이끄는 대로 말에 올라탔다.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몸에 제 몸을 바짝 붙여 앉은 뒤 말을 몰기 시작했다.
* * *
유리나는 감기가 옮을지도 모른다는 베시의 만류에도 괜찮다고 대꾸하며 침대맡에 앉았다. 침대 위엔 네 살배기 베시의 조카가 자고 있었다.
아직 통통한 젖살이 남아 있는 아이는 자면서도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뺨은 평소라면 귀여워 보였겠지만, 열에 들뜬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깝기만 했다.
유리나는 손을 들어 볼록한 아이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주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축축하고, 손바닥에 닿은 이마가 뜨거웠다.
이마를 만져 주는 손길이 간지러웠는지 아이가 거칠어진 입술을 오물거렸다. 유리나는 그 모습을 안타깝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직접 물수건을 꾹 짜서 아이의 이마에 얹어 주었다.
“어때? 마법의 흔적이 있어?”
그녀는 맞은편에 서 있는 레이너드를 향해 물었다. 혹시나 흑마법의 흔적이 있는 건 아닌지 차분히 아이와 방을 살펴보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이상이 없어.”
“그럼 그냥 열병이야?”
“그런 것 같아.”
“다행이네.”
유리나는 고맙다는 의미로 그에게 빙긋 웃어 보이고는 아이를 보았다. 열병 때문에 잠도 편히 못 자는 모습이 안타깝지만 흑마법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사정을 모르는 베시는 조금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무슨 일이냐고는 묻지 않았다. 유리나는 자신이 아픈 것처럼 울상을 짓는 베시를 안심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로드릭에게 열에 좋은 약을 처방받아서 왔으니까 금방 괜찮아질 거야.”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이렇게 하실 필요까지는 없으신데.”
“말했잖아. 베시의 조카라면 내 조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조카가 괜찮아져서 마음이 놓일 때까지 집에 있다가 와. 휴가가 부족하면 더 줄 테니까.”
베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하루, 이틀만 있다가 갈 거예요. 조카도 조카지만 아가씨 옆에 없으면 제가 불안해서 안 돼요.”
“나 이제 애 아니래도 그러네.”
유리나는 베시를 가볍게 흘겼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베시에게 받는 애 취급은 애정을 받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때 끙끙거리던 아이의 눈이 아주 살짝 뜨였다.
“엄마…….”
아이의 엄마이자 베시의 동생은 베시가 오는 것을 보고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처리하기 위해 잠깐 외출을 했다.
‘아플 때 엄마가 많이 보고 싶지.’
이제 고작 네 살 아이. 안 그래도 엄마 뒤를 새끼 오리처럼 졸졸 쫓아다닐 아이가 아파서 엄마를 찾는 모습에 마음이 조금 아팠다. 유리나는 아이에게 몸을 바짝 숙이며 뜨거운 작은 손을 잡아 주었다.
“목이 마르니? 물 줄까?”
낯선 목소리에 놀랐는지 아이가 끅, 딸꾹질을 하며 유리나에게 잡힌 손을 빼기 위해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이의 손을 놓아준 유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베시에게 눈짓을 했다. 베시가 물컵을 들고 침대로 다가갔다.
“엄마는 조금 이따가 올 거야.”
“베띠 이모?”
“응, 이모야.”
“이모오오오.”
아이가 부어서 제대로 뜨이지도 않는 눈을 비비적거리더니 베시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보고 시퍼쪄.”
베시가 아이를 품에 안고 등을 도닥거렸다.
“이모도 우리 토니가 많이 보고 싶었어.”
유리나는 베시가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조카를 다독이며 물을 조심스레 먹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베시를 잘 따르는지 아이는 더 이상 엄마를 찾지 않고 베시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베시의 가슴팍에 볼을 비비적대던 아이가 문득 유리나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 순간, 잘 뜨이지 않던 아이의 눈이 조금 더 크게 뜨였다.
“우와아.”
그는 베시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유리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천짜님?”
조금 전까지 아파서 끙끙거리던 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이의 갈색 눈이 호기심에 초롱초롱 빛났다. 레이너드가 끅 소리를 내더니 손으로 입을 막으며 웃음을 참았다. 하지만 들썩이는 어깨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유리나가 그를 잠깐 흘겨보는 사이 아이가 무릎으로 침대 가장자리까지 기어 왔다.
“천짜님, 마자여?”
“천사님 예쁘지?”
어쩐지 뿌듯함이 느껴지는 베시의 말에 아이가 고개를 위아래로 붕붕 끄덕였다.
“웅!”
“우리 토니가 엄마 말 잘 듣고 밥도 잘 먹어서 천사님이 토니 보러 온 거야. 천사님이 왔으니까 토니도 금방 나을 거야. 그렇죠?”
베시가 유리나를 향해 눈짓을 했다. 무언의 부탁이었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은 유리나는 토니에게로 다가가 땀 때문에 촉촉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약 잘 먹고, 밥 잘 먹으면 더 이상 아야 하지 않고 금방 나을 거야.”
“정말요?”
“응. 그러니까 약 잘 먹을 수 있지?”
“네!”
아이가 아픈 아이 같지 않게 우렁차게 대답했다. 시선은 유리나의 얼굴에 고정한 채였다.
“그래, 착하네. 예뻐.”
“천짜님, 천짜님.”
아이가 유리나를 향해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유리나가 그에게 바짝 다가가기가 무섭게 쪽 소리와 함께 아이의 입술이 유리나에 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천짜님, 어어엄청 예뻐요.”
그 말과 동시에 계속해서 웃고 있던 레이너드의 웃음소리가 쥐 죽은 것처럼 사라졌다.
* * *
“혹시나 열 감기가 옮을 수도 있으니까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바로 의원을 부르셔야 해요. 아셨죠?”
“응, 알겠어.”
“괜찮다고 참지 마시고 조금이라도 목이 따갑거나 몸이 무거우시면 바로 얘기하셔야 해요. 자기 전에 따뜻한 차 꼭 마시고 이불 제대로 덮고 주무세요. 곧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밤공기가 쌀랑해요.”
안 그래도 길었던 베시의 잔소리는 열 감기에 걸린 토니를 만나고 나오자 더욱 길어졌다. 유리나가 알겠다고 계속 말해도 그녀의 이야기는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알겠다니까.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바로 로드릭을 부를게. 걱정 마.”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한 유리나는 베시의 목에서 달랑이는 펜던트에 시선을 주었다.
“베시야말로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걸로 꼭 연락해.”
“저야 무슨 일이 생길까 싶지만……. 알겠어요.”
평소에는 하지 않았던 유리나의 과한 걱정이 이상할 법도 한데 베시는 그 연유를 묻지 않았다.
“그럼 얼른 들어가 봐. 토니가 찾겠다.”
토니는 약을 먹고 다시 잠들었지만 언제 깨어나 엄마나 이모를 찾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가씨.”
“응, 베시도 잘 지내.”
유리나는 베시가 집에 완전히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에 집 앞에 세워진 마차를 향해 몸을 돌렸다. 올 때는 레이너드와 말을 타고 왔지만 갈 때는 베시가 타고 왔던 마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마차에 앉아 멍하니 창밖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던 유리나는 강렬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쳐다봐?”
다리를 꼬고 앉은 레이너드가 맞은편에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유리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마냥 순진무구하게 웃었다.
“천사님이네.”
“……응?”
그의 말을 뒤늦게 이해한 유리나의 뺨이 의지와 상관없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아이의 목소리로 들을 땐 그저 귀엽기만 했던 말인데, 레이너드의 목소리로 들으니 왠지 낯간지럽게 들렸다.
“어어엄청 예쁘네.”
열에 들떠 중얼거리던 토니의 말을 따라 한 것이 분명한 말이었는데 유리나의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그에게서 직접적으로 예쁘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불시에 공격을 당한 사람처럼 유리나는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눈만 깜빡였다. 어릴 적부터 숱하게 듣던 말이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오니 특별하게 느껴졌다.
레이너드가 입만 벙긋거리는 그녀를 보다가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는 뜨끈해진 유리나의 뺨을 만지며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그새 열 감기가 옮았나?”
그의 입술이 뜨거워진 유리나의 뺨에 닿았다. 토니가 뽀뽀를 해 준 곳이었다. 설마 아이에게도 질투를 하는 건가 싶어 유리나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보다 레이너드가 빨랐다. 그는 유리나의 턱을 조심스레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덜컹덜컹. 평민들의 주택가가 많은 길이다 보니 길이 고르지가 않아 마차가 심하게 덜컹거렸다. 그럴 때마다 레이너드의 몸도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는 유리나에게 입술을 댄 채 두 손으로 그녀의 양옆 의자를 잡았다. 검을 배웠다던 그는 그것만으로도 단단히 중심을 잡았지만, 유리나는 괜히 불안했다.
그녀는 두 팔로 그의 몸을 좀 더 꽉 끌어안았다. 몸이 더욱 바짝 밀착되자 그의 혀가 조금 더 깊이 파고들었다. 유리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숨 가쁘게 따라가며 두 다리로 그의 다리를 꽉 감싸 안았다.
저도 모르게 종아리로 그의 허벅지를 쓸어내리자 레이너드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유리나.”
유리나가 힘겨워하는 것을 느낀 뒤에야 레이너드가 입술을 떼고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유독 심하게 번진 유리나의 입술연지를 닦아 주었다. 유리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입가에 잔뜩 묻은 붉은 화장품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혹시 모르니까 베시 말대로 오늘 돌아가서 자기 전에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넌 늘 감기를 달고 살았잖아. 옮을지도 몰라.”
“응, 알겠어.”
유리나의 대답에 레이너드가 만족한 듯이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쪽 입을 맞췄다. 화장이 다 지워져 맨 입술이나 다름없었던 유리나의 입술이 그가 입을 떼자마자 조금 전처럼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 * *
베시가 휴가를 떠나고 사흘 뒤, 크론 왕립 아카데미에서 허트슨 교수가 찾아왔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머리가 조금 빠진 허트슨 교수는 오랜 마차 여행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데이브를 보자마자 언제 피곤해했냐는 듯 활짝 웃으며 그를 껴안았다.
“몇 달 만에 보는 건데도 반갑네. 그간 잘 지냈나?”
연구실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달려 나온 데이브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의 등을 두드렸다.
“나야, 뭐 잘 지냈지. 논문과 학생들에 시달리는 자네에 비하면 편한 인생 아니겠나? 그나저나 얼마 전에 찾아온다는 서신을 받고 깜짝 놀랐어. 갑자기 무슨 일인가? 설마 날 보러 온 건 아닐 테고.”
“오랜만에 친구를 보러 온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허트슨 교수는 너스레를 떨었지만 데이브는 그 말을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이상하다고 대꾸하는 대신 팔짱을 끼고 허트슨 교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지레 찔렸는지, 허트슨 교수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제국에 일이 있어서 온 김에 부탁받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다네. 그 김에 자네도 보고. 레이너드가 졸업한 후로 자네가 크론 왕국에 오지를 않아서 얼굴을 본 지 오래되지 않았나. 그래도 좀 갑작스럽긴 했지?”
“갑작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반갑네.”
데이브와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은 허트슨 교수가 고개를 돌려 레이너드를 바라보았다.
“레이너드, 1년만 더 있다 가라는 것을 기를 쓰고 도망가더니 몇 달 사이에 신수가 아주 훤해졌구나.”
허트슨 교수는 반가움 반, 섭섭함 반이 섞인 얼굴로 레이너드를 끌어안았다. 레이너드가 키가 더 큰 탓에 허트슨 교수가 안긴 꼴이 되었지만, 교수는 아끼는 제자를 열세 살 어린 제자를 대하듯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란지 레이너드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레이너드는 헝클어진 머리를 가볍게 정돈하며 살짝 웃었다.
‘레이에게 볼일이 있는 건가?’
유리나는 감동의 재회를 보며 허트슨 교수가 아주 잠깐 레이너드에게 크론 왕국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설득을 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더 이상 아카데미 얘기는 일절 하지 않고 그저 편지 한 장을 건넸다. 편지는 단순한 안부 편지라고 하기엔 많이 두툼했다.
스쳐 지나가듯 본 편지에는 에이든 테시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활발한 성격답게 그의 글씨는 크고 시원시원했다.
갑작스럽게 건네진 편지에도 레이너드는 별로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동안 몸 건강히 지내셨습니까?”
“잘 지내기는. 에이든이랑 애들 잡으러 다니느라 바빴다.”
“에이든이요?”
“에이든 고 녀석이 네가 졸업하고 나니까 풀이 잔뜩 죽어서는 한동안 방에 처박혀서 나오질 않더군.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어. 그래도 지금은 좀 나아졌다만, 여전히 정신을 반쯤 놓고 돌아다니는 것 같아.”
유리나는 허트슨 교수의 말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그가 거짓말을 할 일은 없지만, 낯을 가리지 않고 활발하게 보이던 에이든의 모습이 너무 강렬하여 풀이 죽어 방에서 나오지 않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레이너드는 생각이 달랐는지, 진짜냐고 되묻지 않았다. 그저 다소 우울해진 얼굴로 손에 들린 편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친구들이 많이 그리운가.’
졸업을 하고 제국으로 돌아온 지 이제 고작 서너 달. 유리나와 레이너드가 7년이나 떨어져 있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7년간 매일 붙어 있던 사이란 걸 떠올리면 그 서너 달의 공백도 길었다. 친구와 떨어져 있는 그리움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유리나는 위로의 의미로 레이너드의 등을 조심스럽게 도닥여 주었다.
마음이 통했는지 그가 그녀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아. 평생 못 만나는 것도 아닌데.”
“응, 그건 그렇지. 나중에 졸업하면 다 같이 제국으로 놀러 오라고 하자. 내가 그 누구보다도 귀빈 대접을 하라고 일러 둘 테니까.”
레이너드가 진지하게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그 녀석들이 언제 졸업을 할지 몰라서.”
“그럼 우리가 크론 왕국으로 놀러 가면 되지.”
“응, 그거 좋다.”
두 사람이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 데이브는 보여 줄 것이 있다며 허트슨 교수를 데리고 연구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허트슨 교수는 레이너드에게 같이 가자고 했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잠깐 할 게 있어서요. 조금 이따 저녁 식사 때 봬요.”
그러고는 유리나의 손을 잡고 공부방으로 향했다. 원래라면 그 뒤를 베시가 졸졸 따라왔어야 했지만, 그녀의 부재로 다른 하녀가 뒤따라왔다.
공부방에 다다른 유리나는 심상치 않은 레이너드의 기색을 눈치채고는 하녀에게 간단한 다과를 내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무슨 일인데 그래?”
유리나는 살짝 열린 문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단순한 안부 편지였다면 그가 유리나를 급하게 끌고 오지 않았을 테니 저건 필시 그녀와 관련된 일이다.
‘흑마법에 관련된 일일까.’
레이너드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는 유리나를 의자에 앉히고 그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편지를 뜯어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편지는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안부로 시작됐다. 그동안 먼저 편지를 보내고 싶었는데 카르티아가로 정말 편지를 보내도 되는지 몰라서 못 보냈다는 말을 시작으로, 잘 지내고 있느냐, 우리는 잘 지내고 있다는 안부 인사가 나왔다.
‘이거 내가 들어도 되나?’
유리나는 천천히 편지를 읽어 나가는 레이너드를 보며 왠지 이상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당사자인 그가 직접 읽어 주는 건데도 왠지 모르게 타인의 편지를 멋대로 훔쳐보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편지에 쓰인 말투가 워낙 에이든다워서 레이너드가 아니라 에이든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는 탓도 있을 것이다.
유리나가 괜찮으니 더 이상 읽어 주지 않아도 된다고 입을 열 때였다.
“안 그래도 네가 간 뒤에 베아투스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어. 졸업 논문으로 베아투스에 대해 쓰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때마침 너한테서 편지가 온 거야. 그래서 그동안 내가 알아본 것에 대해 적어서 보내 봤어.”
베아투스? 레이너드가 편지를 보냈다고? 처음 듣는 소리에 유리나는 레이너드에게 바짝 붙으며 편지를 살폈다. 그다음 문장은 레이너드 대신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레이너드, 왜 붉은 눈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 줄 알아? 마법 실력이 엄청 뛰어나서?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그렇다면 왜 다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지 않겠어? 궁금하지? 궁금하지?”
그에 대한 답은 레이너드가 읽었다.
“데니스 왕국에서는 흑마법을 쓰는 사람을 불길하다고 생각했대. 뭐, 그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때는 흑마법사를 여신에 반하는 존재라고 여겼나 봐. 하지만 마법사(史) 시간에 배웠던 것처럼 흑마법은 마법의 원리가 달라서 일반 마법으로는 알아챌 수가 없잖아.”
차분하게 편지를 읽어 내리던 레이너드의 목소리가 잠시 주춤했다. 그는 유리나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처럼 붉은 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유일하게 흑마법을 알아챌 수 있는 힘을 타고났대. 마법 실력도 뛰어난 데다가 흑마법을 알아챌 수 있어서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흑마법사와 흑마법을 알아챌 수 있는 베아투스. 그제야 왜 사냥 대회에서 레이너드 혼자 흑마법을 알아챘는지 알 수 있었다.
‘데프론 후작이 레이가 돌아오기 전에 날 노린 것도 다 이것 때문이었던 거야.’
레이너드가 돌아오면 자신의 계획이 발각될 수 있기 때문에 이번 사냥 대회에 카르티아 후작 부인에게 저주를 걸어 사교계에 데뷔를 하지 않은 유리나를 사냥 대회에 참가하게 만든 것일 테다.
레이너드만 조기 졸업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뜻대로 늑대를 이용하여 유리나를 처리하고 카르티아가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없앴을지도 모른다. 아니, 데프론 후작이라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레이가 올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대비를 하려고 해도 전혀 할 수 없는 일이라 더욱 소름이 돋았다.
그와 동시에 카리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면 베아투스는 흑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거야?”
유리나의 물음에 레이너드가 여러 장의 편지를 착착 넘기며 빠르게 훑었다.
“그런 모양이야. 에이든이 발견한 고서에는 베아투스는 흑마법을 쓸 수가 없었대. 그래서 왕실 사람들이 베아투스를 더욱 곁에 뒀나 봐.”
“그럼 지난 사냥 대회 때는 카리온이 돕지는 않았다는 소리네. 에이든 군의 말대로라면 카리온은 흑마법을 쓸 수 없으니까.”
“늑대에 건 주술만 관여 안 한 걸지도 모르지. 방어막을 파괴한 건 그 자식일지도 몰라.”
편지를 쥐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두툼한 편지지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유리나가 놀라서 그의 손을 잡자 레이너드가 뒤늦게 구겨진 편지지를 확인하고는 손바닥으로 편지지를 쫙쫙 폈다. 그래도 잘 되지 않자 마법을 써서 원상 복귀시켰다.
“그럼 흑마법사도 알아볼 수 있는 거야? 데프론 후작이 흑마법사라는 것을 증명해서 사냥 대회 사건의 배후라는 것을 알 수 있어?”
그것만 알아낸다면 일단 데프론 후작의 목을 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황제는 당시 사냥 대회 사건의 주동자로 꼽혔던 백작을 반역죄로 처벌했다. 황태자인 커티스가 있는 곳에서 무분별하게 날뛸 수 있는 늑대를 풀어 놨으니 반역죄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그가 크론 왕국의 반역자와 손을 잡았다는 것만 증명할 수 있다면…….
그러나 편지를 끝까지 꼼꼼하게 읽어 본 레이너드가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평소에는 마법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기 때문에 흑마법사는 같은 흑마법사끼리만 알아볼 수 있나 봐. 마법을 조금이라도 써야 알 수 있대.”
“그럼 데프론 후작이 다시 마법을 써야 알 수 있다는 소리야?”
그가 다시 흑마법을 쓴다면 그건 유리나나 카르티아가의 사람들을 노리는 마법일 테다. 아무리 레이너드가 흑마법을 감지할 수 있다고는 해도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잘못하면 레이가 다칠 수도 있고…….’
레이너드가 편지를 내려놓고 살짝 창백해진 유리나의 뺨을 살며시 그러쥐었다.
“에이든이 알아낸 건 극히 일부분이야. 어딘가에 흑마법사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을 수 있어. 아니,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응.”
레이너드는 고개를 숙여 유리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그러나 입술이 이마에 채 닿기 전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서둘러 떨어져야 했다.
“차를 가져왔어요.”
레이너드는 차를 따라 주는 하녀를 원망스럽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가 유리나를 보며 얼굴을 찡그리듯 웃었다.
아쉬워.
그가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리며 말했다. 유리나도 입술을 움직였다.
‘나도.’
얼른 모든 일이 잘 해결되어서 레이너드와의 관계 또한 아무 걱정 없이 순탄하기만 한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 * *
일주일 뒤 저택으로 돌아온 베시는 갈 때보다 표정이 한결 밝아 보였다. 그간 내심 베시와 토니를 걱정했던 유리나도 그제야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 있었다.
“토니는 많이 괜찮아졌어?”
“네. 아가씨께서 주신 약이 효과가 좋았는지 금방 열이 떨어지더니 이젠 밥도 잘 먹고 집안 곳곳을 열심히 뛰어다녀요. 밖에 나가서 논다는 걸 아직 안 된다고 말리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다행이네. 아직도 많이 안 좋다면 로드릭을 보낼까 했는데.”
베시가 깜짝 놀라며 두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어떻게 로드릭 선생님께 부탁을 하겠어요. 이젠 진짜 좋아져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가씨께서 챙겨 주신 간식도 아주 잘 먹더라고요.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종종 챙겨 줄게.”
한다면 하는 유리나의 성격을 아는 베시는 그럴 필요 없다는 말 대신 고맙다며 웃어 보였다.
“그것보다 차나 한 잔 줄래? 그동안 베시가 없으니까 쓸쓸했어. 내 차는 늘 베시가 챙겨 줬잖아.”
“다른 애들이 안 챙겨 드렸나요?”
베시가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잔소리를 늘어놓을 기세였다. 유리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챙겨 주기는 챙겨 줬지. 그런데 다른 아이들이 끓여 주는 차는 맛이…….”
어쩐지 다른 하녀들을 험담하는 것 같아 그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속마음이 전달됐는지 베시가 당당하게 허리를 세웠다.
“역시 저처럼 차를 잘 끓이는 아이는 없죠?”
“응. 베시가 타 주는 차가 최고야.”
“곧바로 끓여 올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서둘러 방을 나갔던 베시는 이내 버터 쿠키와 홍차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녀가 트레이를 테이블에 올려놓자마자 향긋한 과일 홍차의 향이 방 안 가득히 풍겼다. 유리나는 두 눈을 감고 코로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향기가 좋네.”
“이번에 새로 들어온 홍차래요. 아가씨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서 가져와 봤어요.”
베시가 트레이에 잔을 올려놓고 차를 따랐다. 그러자 홍차의 향이 더욱 진하게 풍기기 시작했다.
베시는 유리나의 앞에 찻잔 받침을 놓아 준 뒤 오른손으로 잔을 들어 찻잔 위에 올려놓았다.
“홍차 향이 좋긴 하지만 조금 강해서 쿠키와 어울릴지 모르겠네요. 드셔 보시고 별로면 얘기해 주세요. 바로 다른 차를 끓여다 드릴게요.”
“아냐, 괜찮아. 이것으로도 충분해.”
웃으며 오른손을 들던 유리나는 테이블 위를 보고 잠깐 손을 멈칫했다.
‘뭐지?’
찻잔의 손잡이가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을 향해 놓여 있었다. 순간, 엄습해 오는 불길한 느낌에 등줄기가 서늘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유리나가 차를 마시지 않고 가만히 있자 베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리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숨기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 여자는 베시가 아니다.
유리나는 최대한 동요를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베시를 살폈다. 주근깨 가득한 코와 볼, 단정하게 땋은 갈색 머리, 선하게 웃는 얼굴. 얼굴만 본다면 눈앞의 여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베시였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내려 다시 한번 찻잔의 모양새를 살폈다.
베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찻잔의 손잡이가 유리나의 오른쪽에 가도록 놓았다. 조카가 아프다는 소식에 정신이 없어 실수를 할 때도 그것 하나만은 실수하지 않고 지켰다. 오랫동안 해 온 일이라 몸에 습관처럼 배어 있어서 머리보다는 몸이 먼저 반응한 결과였다.
그런데 조카의 상태가 많이 좋아진 상황에서 이런 실수라고?
‘그럴 리가 없지.’
그럼 답은 하나였다. 이 여자는 베시가 아니다.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진짜 베시는 어디 있는 걸까. 왜 이 상황이 되도록 연락을 하지 않은 걸까. 호위 기사들은 대체 뭘 한 것이지?
이건 데프론 후작의 짓일까? 그가 베시를 납치해 간 걸까? 베시에 이어 나까지 납치를 하려는 걸까?
유리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애써 떨치며 찻잔을 앞으로 살짝 밀었다. 진짜 베시가 아니라면 그녀가 주는 홍차를 마실 수는 없었다.
“아가씨?”
“베시, 시원한 음료 좀 가져다줄 수 있겠어? 날이 더워서 그런지 뜨거운 차를 마시기 싫네.”
“오늘 덥기는 하죠. 바로 가져다 드릴게요.”
“응, 고마워.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제가 먼저 시원한 음료를 챙겼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어요.”
유리나는 멀어지는 베시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녀가 완벽하게 복도로 나간 뒤에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마나를 불어 넣어 레이너드에게 호출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눈치가 굉장히 빠르시네요?”
등 뒤에서 갑자기 뻗어 나온 손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분명 매일같이 듣던 베시의 목소리였는데, 방금 들려온 목소리는 어딘가 오싹한 구석이 있었다. 엄습해 오는 공포감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유리나는 손끝에 마나를 흘려 보내려고 했지만,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는 손에서 뻗어 나온 검은색 마나가 그녀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제발, 제발, 제발.
유리나는 입술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깨물고 억지로라도 마나를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손이 불에 닿은 것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꽉 다문 잇새 사이로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발, 제발, 제발. 이렇게 당할 수는 없어. 제발!
“이렇게 마법도 쓰시려고 하고. 쉽지 않을 거란 소리는 들었는데, 역시 고분고분하지는 않으시네요. 그래도 역시 이렇게 반항하는 사냥감이 사냥하기엔 더 재미…… 악!”
그 순간, 유리나의 손에서 터져 나온 흰색 빛이 ‘베시’의 손등을 콱 찔렀다. 동시에 ‘베시’의 손에서 뻗어 나온 검은색 마나가 유리나의 목에 매달려 있던 목걸이 줄을 잘라 냈다. 반동으로 인해 목걸이가 튀어 나가 방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유리나는 데구루루 구르는 목걸이를 보다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갑자기 등을 짓누르는 무거운 기운에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바닥에 처박혔다.
이번에는 손목에 걸고 있는 팔찌로 마나를 모으려고 했지만, 눈치 빠르게도 ‘베시’가 구둣발로 손목을 짓밟았다.
“쥐새끼도 궁지에 몰리면 손을 문다더니 제법이시네요.”
유리나의 손목뼈를 산산조각 낼 것처럼 ‘베시’가 발목을 비틀어 그녀의 손목을 뭉갰다. 유리나는 튀어나오는 신음 소리를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렇지만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
‘베시’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녀가 채 말을 끝내기 전에 폭발음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베시’의 몸이 날아가 벽에 처박힌 것이다.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베시’의 몸이 벽 중간에 매달리듯 고정되어 있었다. 충격이 꽤나 컸는지 그녀는 울컥 피를 토해 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던 유리나는 빠른 속도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레이너드를 발견했다.
“레이?”
“유리나.”
그는 유리나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 잠깐 사이에 빨갛게 부어오르고 생채기가 난 그녀의 손목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는 유리나의 상처를 치료한 뒤 벽에 붙어 허우적대고 있는 ‘베시’를 노려보았다. 눈빛만으로도 그녀를 찢어 죽일 수 있을 것처럼 그의 눈빛이 살벌했다. 유리나는 이렇게 냉정한 그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어떻게 알고 왔어?”
“마나의 흐름이 이상해서 달려왔지. 그런데…….”
어금니를 꽉 깨물고 읊조린 레이너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베시’에게로 향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목을 사정없이 졸랐다. ‘베시’가 그의 손등과 팔을 긁으며 캑캑거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목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 더러운 낯짝을 들이밀어?”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낮고 차분했지만, 언성을 높이고 화를 내는 것보다 더 분노가 드러났다.
“누구 짓이야? 데프론 후작, 그 자식 짓인가?”
‘베시’는 대답 없이 벌게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순간 쾅, 소리가 다시 한번 들리더니 그녀의 몸이 벽에 조금 더 파묻혔다.
“말 안 해도 뻔하지. 목적이 뭐야? 유리나를 납치라도 하려고 했나? 데려가서 무슨 짓을 하려고?”
‘베시’가 분노를 못 이겨 손까지 덜덜 떠는 레이너드를 보며 낄낄 웃었다. 아까 피를 토한 탓에 피범벅이 된 입술이 찢어질 것처럼 웃는 모습은 굉장히 기괴했다.
“얼굴을 보니 날 찢어 죽이고 싶은 모양인데…….”
“잘 아네.”
“그런데 그렇게 못 하는 것을 보니 그 하녀의 행방이 신경 쓰이나 보지?”
레이너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손끝에 마나를 모았다. 그의 손에서 터져 나온 빛이 ‘베시’의 몸에 스며들었다. ‘베시’가 귀가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며 괴로운 듯이 몸을 비틀었다.
가뭄 때문에 갈라진 땅처럼 ‘베시’의 얼굴에 쫙쫙 금이 가더니 부스러기 같은 것이 아래로 떨어졌다. 볼을 시작하여 코, 턱, 이마의 부스러기가 모두 떨어지고 나타난 건 생각보다 앳된 소년의 얼굴이었다.
“베시가 어디 있는지 말해.”
“그 하녀를 찾고 싶으면…….”
소년이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입가에 묻은 피를 핥았다.
“저 여자 보고 직접 찾아오라고 해. 그럼 돌려줄 테니까.”
소년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소년의 발을 감싸더니 그의 발끝부터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놓치면 안 돼!”
다급하게 소리친 유리나의 목소리에 소년의 검은 눈이 그녀를 향했다.
“얼른 오는 게 좋을 거야. 늦으면 그 하녀의 목숨은 장담할 수가 없거든.”
어느새 그의 하체는 사라지고 상체만 남았다. 그 순간, 레이너드가 한쪽 입꼬리를 비쭉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 전에 네 걱정이나 하는 게 어때?”
“뭐?”
레이너드가 소년의 목을 잡고 있던 팔을 휘두르자 소년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동시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라지고 없던 소년의 다리가 다시 돌아왔다. 땅에서 솟아난 천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의 몸을 칭칭 감았다.
“이, 이게 무슨…… 읍!”
하얀 천이 이번에는 소년의 입을 틀어막았다. 레이너드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가 소년 앞에 섰다. 그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로 소년의 손목을 꽉 눌렀다. 조금 전, 소년이 유리나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비딱하게 고개를 젖힌 레이너드의 냉담한 시선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소년의 얼굴 위로 꽂혔다.
“너희들이 계획을 세우는 동안 이쪽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언제까지 흑마법의 원리를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소년의 손목을 짓누르는 힘이 강해졌다. 입을 막고 있는 천 틈 사이로 고통스러워하는 소년의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유리나를 노린 대가는 톡톡히 치를 각오를 해야 할 거야.”
문이 벌컥 열리며 아론 경을 비롯한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방으로 순간 이동을 하는 사이, 기사단 건물로 순간 이동을 해서 상황을 알린 데이브는 기사들의 맨 뒤꽁무니에서 힘없이 걸어왔다.
유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이자를 가두고 자결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감시해요. 그리고…….”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가 겨우 말했다.
“몇 명은 절 따라오세요.”
* * *
“베시 언니요? 언니는 오늘 아침에 기사님들이랑 돌아간다고 나갔는데…….”
베시가 집에 있냐는 레이너드의 질문에 베시의 여동생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베시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날카롭게 생긴 눈매가 전후 사정을 파악하려는 듯 유리나와 레이너드를 훑어보며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토니가 유리나를 보며 아는 척을 했다.
“어? 천짜님! 엄마, 천쨔님이야!”
토니는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아파서 잘 먹지 못했는지 볼이 조금 홀쭉해져 있었지만, 네 살 아이답게 반짝반짝 빛나는 눈은 충혈된 기미 하나 없이 맑았고, 입술은 열에 들떴을 때와 달리 거칠지 않고 촉촉했다.
‘나아서 다행이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베시를 떠올리니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유리나가 베시를 떠올리며 살짝 울상을 짓자 토니가 금방 울 것처럼 울먹였다.
“천짜님, 울디 마여.”
그는 유리나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얼떨결에 손을 뻗자 토니가 엄마가 말릴 새도 없이 유리나의 목을 끌어안고 품에 안겼다.
“천짜님이 울면 토니도 슬퍼여.”
이젠 열이 내렸다는 아이의 몸은 유리나나 레이너드의 것보다도 뜨거웠다. 유리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베시의 여동생에게 괜찮다는 듯 웃어 준 뒤 토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며칠 전 베시가 토니에게 그러했듯이.
아이에게서는 달콤한 코코아 냄새가 났다. 아마도 코코아를 먹다가 옷에 흘린 모양이었다.
목에 숨이 닿자 간지러운지 토니가 몸을 비틀며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천짜님, 근데 베띠 이모는 어디 가써여?”
“…….”
“웅? 지난번에는 이모랑 가치 왔짜나여.”
천진난만한 물음에 목이 멨다.
“베시 이모는 나중에 올 거야.”
“몇 밤 자고 와여?”
“몇 밤?”
토니가 유리나의 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드는 유리나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열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이모가 열 밤 자면 온댔는데. 토니는 열 개 셀 줄 알아여.”
“그래? 열 개도 셀 줄 알아? 똑똑하네.”
“이모도 똑또카다고 해써여!”
의기양양한 표정이 꼭 어릴 적 레이너드를 보는 것 같았다. 유리나는 짤막한 손가락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열 밤 자면 올 거야.”
“천짜님도 열 밤 자면 올 꺼에여?”
“응.”
“정말여?”
“그래. 베시 이모랑 같이 열 밤 자면 올게.”
“쪼아여!”
유리나는 신이 나서 다리를 앞뒤로 동동 흔드는 토니를 베시의 여동생에게 안겨 주었다.
베시의 여동생은 천사님을 봐서 신이 난다며 난리가 난 토니를 달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불안한 얼굴로 레이너드와 유리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별일은 아닙니다. 아마 이곳에서는 마차를 구하는 것이 힘들어서 좀 늦게 오는 것 같습니다. 호위 기사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명하는 레이너드의 모습에 베시의 여동생이 안도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특별할 게 없는 하녀를 누가 데려가겠어요. 기사님이 두 분이나 계셨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베시에게서 연락이 오면 이 돌멩이 가운데 부분을 꽉 눌러 주세요.”
그는 저택에서 챙겨 온 호출용 아티팩트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베시의 여동생은 관심을 보이며 자기에게 달라고 보채는 토니의 손을 능숙하게 피하며 아티팩트를 주머니에 넣었다.
“알겠어요. 그런데…… 정말 별일 없겠죠?”
“네. 걱정 마시고 들어가세요. 아직 토니가 완전히 낫지도 않은 것 같은데.”
“아, 네. 토니, 인사해야지.”
“천짜님 잘 가여! 열 밤 자면 또 와야 해여!”
“응. 잘 가.”
토니에게 손을 흔들어 주던 유리나는 두 사람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최대한 마음을 다스리려고 해도 더 이상 태연한 척을 하기가 힘들었다. 지금껏 울지 않고 버틴 것만으로도 기력을 다 소진한 느낌이 들었다.
오빠만 셋인 그녀에게 늘 언니 같았던 베시. 고용인과 고용주라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지만 유리나도 베시도 서로를 단순히 계약 관계로 묶인 사이가 아니라 진심으로 가족처럼 생각했다.
무사할 거라고 믿고 있지만 자꾸만 머릿속에 최악의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베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유리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말에는 힘이 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최악의 상황을 입 밖에 내놓으면 진짜로 그렇게 될 것 같아서 무서웠다.
레이너드가 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별일 없을 거야. 기사들도 찾고 있으니까 곧 찾을 수 있을 거야. 베시가 살아 있어야 널 유인할 수 있으니까 데프론 그 자식도 베시를 어떻게 하지는 못했을 거야. 그렇다고 데프론 후작가로 데려가지는 않았겠지. 나는 여기서부터 추적을 할 테니까 넌 저택으로 돌아가 있어.”
“나도…….”
“나 혼자 움직이는 게 더 빠르고 편해서 그래.”
따라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나 유리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면 방해만 돼.’
일 분 일 초가 급한 상황이니 레이너드 혼자 가는 것이 나았다.
“저택에 가면 스승님한테 가서 꼭 붙어 있어. 알겠지?”
레이너드는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나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 순간, 마나의 흐름이 요동쳤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유리나는 베시의 집이 있던 거리 대신 자신의 침실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천천히 침실을 훑어보았다. 아주 잠깐 베시가 돌아오지는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침실엔 사람이 들어온 흔적이 전혀 없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여기서 꾸물거릴 게 아니라 레이너드의 말처럼 데이브에게 가야 했다. 유리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침실에서 응접실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흠칫 놀랐다.
“베시?”
사라졌던 베시가 소파 위에 죽은 듯이 늘어져 있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왼팔은 소파 밖으로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유리나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입 속으로 삼키며 베시에게 달려갔다.
“베시, 베시! 정신이 들어? 베시, 일어나 봐!”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베시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녀의 코에 손가락을 갖다 댄 유리나는 베시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잠깐 긴장을 풀었다. 그러다 이내 이상함을 느끼고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베시가 혼자 왔을 리가 없어.’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주었던 목걸이에 마나를 불어 넣은 뒤 꼼꼼히 방 안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빛이 들지 않는 그림자 속에 서 있는 인영을 발견했다.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는 금발과 안광이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 분명 매일 마주치는 눈과 같은 색인데도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유리나는 순간 겁에 질린 동물처럼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레이너드가 주었던 목걸이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유리나를 납치하려면 아무도 없는 지금이 적기일 텐데도 카리온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태도에서 그가 자신을 노리는 것이 아니란 것을 확신한 유리나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당신이 베시를 데려온 거예요?”
말없이 그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왜죠? 데프론 후작이 베시를 납치하라고 시킨 게 아니었나요?”
이번엔 아예 대답이 없었다.
“혹시 데프론 영애도 이 사실을 알아요? 데프론 영애가 시킨 거예요?”
소리 없이 카리온의 고개가 양옆으로 움직였다. 유리나는 그에게 더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러나 주위 마나가 요동치는 순간, 카리온이 예고도 없이 사라졌다.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녹아 들어간 것처럼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유리나, 무슨 일이야?”
순간 이동을 해서 방으로 돌아온 레이너드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유리나는 대답할 기운도 없어 눈짓으로 베시를 가리켰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레이너드는 베시를 보고 놀라 얼굴을 굳히더니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밝은 빛이 베시의 팔을 타고 지나갔다.
“베시는 괜찮은 거야?”
“응. 특별한 이상은 없어. 그런데 베시는 누가 데려온 거야?”
“카리온.”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레이너드의 얼굴에 동요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유리나는 카리온이 서 있었던 자리를 응시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꼭 우릴 도와준 것 같아.”
* * *
“네가 감히!”
데프론 후작이 빨개진 얼굴로 카리온의 무릎을 걷어찼다. 카리온은 순간 터져 나오는 신음을 입 속으로 삼켰지만 몸이 크게 휘청거리는 바람에 비틀거리며 바닥에 넘어졌다. 상처가 난 그의 이마에서 흐른 붉은 피가 그의 뺨을 타고 흘러 턱 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네가 주제도 모르게 내 뜻을 거슬러?”
데프론 후작이 들고 있던 지팡이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굳게 잠긴 문고리가 재빠르게 움직이며 달칵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버지, 아버지!”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리디아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데프론 후작은 목을 조르고 있던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며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을 향해 소리쳤다.
“뭣들하고 있나. 어서 리디아를 방으로 데려가지 않고!”
“이거 놔! 놓으란 소리 안 들려? 아버지!”
비명에 가까운 리디아의 목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카리온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두 손을 꽉 쥐었다.
―카르티아 영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정말 속상할 것 같아.
데프론 후작의 뜻을 거스르고 유리나의 하녀를 빼돌려 카르티아가로 돌려보낸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렇게 목이 쉴 것처럼 소리를 지르는 리디아의 모습에 마음이 쓰렸다. 이게 모두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세운 계획이었는데.
이젠 아예 소매까지 걷어붙인 데프론 후작이 다시 한번 지팡이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둔탁한 무언가가 문을 내리치는 소리가 났다. 그러면 안 된다고 말리는 고용인들의 소리와 계속해서 문을 때리는 소리가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쾅, 쾅, 쾅. 둔탁한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이윽고 문에 금이 가며 나무가 쪼개지기 시작하더니 작은 파편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숨을 내쉰 데프론 후작은 지팡이를 바닥에 던지다시피 내버린 뒤 손가락을 까딱였다. 달칵 소리와 함께 잠겨 있던 문고리가 열렸다.
문고리가 돌아가며 리디아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피를 흘리고 있는 카리온을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얼른 다가가 그의 팔을 제 어깨에 둘렀다.
“얼른 가자. 일어나.”
눈앞에 서 있는 데프론 후작을 분명 봤을 텐데도, 그녀는 그를 못 본 척하며 카리온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키가 한 뼘은 족히 차이 나는 건장한 사내를, 그것도 기운이 없어 축 늘어진 남자를 곱게만 자란 귀족 아가씨가 부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리디아는 넘어지다시피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눈물 고인 리디아의 눈이 데프론 후작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그녀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눈을 치켜뜨는 데프론 후작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카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러시는 거예요!”
“아가씨, 그만…….”
카리온은 여느 때처럼 리디아의 앞을 가로막으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바람에 리디아의 몸 위로 쓰러졌다. 리디아는 행여나 그가 통증을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팔에 힘을 풀고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이러실 수는 없어요!”
데프론 후작은 표정 없는 얼굴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리디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보다가 문밖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는 고용인들에게 손짓했다. 부름을 받은 고용인들이 재빨리 달려와 카리온과 리디아를 부축했다.
“아가씨, 얼른 방으로 돌아가세요.”
“카이는 내 방으로 데려와.”
하녀의 손길을 뿌리친 리디아는 데프론 후작의 뒷모습을 쏘아보았다가 집무실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방에 돌아와서 살펴본 카리온의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리디아는 하녀들이 카리온의 얼굴과 몸에 묻은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는 것을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지 마세요.”
실눈을 뜨며 중얼거린 카리온의 시선이 피가 묻은 리디아의 손으로 향했다. 아까 잠긴 문을 부수기 위해 꽃병으로 문을 내려치다가 난 상처였다. 리디아는 제 손을 향해 손을 뻗는 카리온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재빨리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야? 그 몸으로 어떻게 이걸 치료하려고 그래.”
태연하게 얘기하려고 했는데 자꾸만 눈물이 차올라 눈앞이 흐려졌다. 리디아는 손바닥에 묻은 피를 대충 드레스에 쓱쓱 닦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무력했다. 아버지가 종종 화가 날 때면 카리온에게 폭언을 퍼붓고 손찌검을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릴 때는 카리온을 옷장 속에 숨겨 보기도 했고, 데려가지 말라며 그를 안고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아버지는 늘 카리온을 그녀에게서 빼앗아 갔다.
카리온이 대체 무엇 때문에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너무한 처사 아닌가. 리디아는 울음을 참기 위해 코로 숨을 깊게 들이쉰 뒤 하녀에게 물었다.
“조셉은 왜 안 와?”
데프론가의 주치의인 조셉은 치유 마법도 쓸 줄 아는 유능한 인재였다. 다급한 리디아의 물음에도 하녀는 쭈뼛거리며 대답을 아꼈다. 리디아가 그녀답지 않게 사납게 재촉하자 하녀는 그제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주인님께서 치료를 해 주지 말라고…….”
“뭐?”
리디아는 순간 자신이 하녀의 말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하녀의 입에서 재차 흘러나온 말은 방금 들은 것과 똑같았다.
“카리온이 반성하고 잘못을 빌기 전까지는 치료를 해 주지 말라고…….”
리디아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직접 주치의를 데리러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리디아의 의도를 눈치챈 카리온이 그녀의 팔을 잡고 도로 앉혔다.
리디아의 눈을 빤히 응시하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가지 말라는 의도가 워낙 확고하게 드러나서 리디아는 차마 그의 손을 뿌리치고 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찢어져서 부은 그의 눈가와 입술을 느릿하게 훑었다. 카리온은 갈비뼈 부근을 움켜쥐고 있었다. 숨도 가쁘게 쉬는 것을 보니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상처가 더 큰 것 같았다.
어떡하지, 이대로 그냥 놔둘 수는 없는데. 입술을 짓씹으며 고민하던 리디아의 머리에 순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 * *
유리나는 차를 내오는 베시를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좀 쉬어도 되는데.’
하루 만에 깨어난 베시의 얼굴은 열병을 앓고 난 사람처럼 창백했다. 불그스름했던 입술도 살짝 색이 사라져 보랏빛을 띠었다.
베시를 진찰한 카르티아의 주치의는 그녀의 건강에 별 이상이 없다고 했고, 레이너드 또한 그녀에게서 흑마법의 흔적이 보이지 않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려다가 베시의 눈치를 보며 입을 가렸다. 마음 같아서는 주치의의 진료를 받으며 며칠 푹 쉬었으면 좋겠는데 베시가 그럴 수 없다며 한사코 사양하는 바람에 더 이상 강요를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토니의 병이 데프론 후작의 짓이 아닌 게 다행이네.’
베시를 찾기 위해 토니의 집에 갔을 때, 레이너드는 혹시 자신이 잘못 살펴본 것이 아닌가 하여 토니와 집 주변을 다시 탐색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흑마법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는 건 이 일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 아니라 베시가 휴가를 갔다는 정보를 입수한 데프론 후작이 뒤늦게 꾸민 짓이라는 소리였다.
‘하긴, 사냥 대회 일을 들켰는데 토니에게 술수를 썼다면 멍청한 것이지.’
그래서 데프론 후작은 좀 더 숨을 죽이고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 더 만반의 준비를 했을 테고.
그러니 이번 일은 토니가 흑마법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라는 것과 베시에게 아티팩트를 건네고 호위를 붙였다고 해서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았던 레이너드와 유리나의 잘못이었다.
“미안해, 베시.”
유리나가 사과를 내뱉자마자 주전자에서 쪼르르 흘러내리던 홍차의 흐름이 멈췄다. 놀란 듯 손을 멈췄던 베시는 다시 홍차를 따라 왼손으로 찻잔을 건넸다. 찻잔의 손잡이가 여느 때처럼 유리나의 오른쪽으로 향했다.
“아가씨께서 왜 사과를 하세요?”
“그냥. 나 때문에 그런 일을 겪게 한 것 같아서.”
운이 좋아서 베시가 데프론 후작 손에 넘어가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지만 만약 일이 잘못됐었다면 무슨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운이 좋다고 할 수는 없지.’
이미 베시는 한 번 저들의 손에 납치되었으니까.
기절했다가 깨어난 베시와 토니의 집 근처 야산에서 기절한 채 발견된 기사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날의 일은 꽤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이뤄졌다고 했다.
베시가 탄 마차를 호위하며 주위를 철저하게 경계하던 두 기사는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나 살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갑자기 멈춘 마차와 난폭하게 울어 대는 말 울음소리를 듣고 이상함을 느낀 베시는 유리나가 건네준 아티팩트를 이용하여 연락을 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기절했다고 했다.
‘정확히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나.’
그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유리나는 카리온이 베시를 납치한 흑마법사를 공격하여 그녀를 빼돌린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 혹은 애초에 마차를 습격한 것이 카리온 본인일 수도 있고.
카리온이 베시를 데려간 줄도 모르고 베시로 위장한 흑마법사가 카르티아가에 숨어들어 온 것을 봐서는 꽤나 이번 계획에 자신이 있었던 듯했다.
레이너드 덕분에 흑마법사에게 납치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베시를 찾지 못했다면 유리나는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미친 사람처럼 베시를 찾아 나섰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잘 풀려서 다행이었다. 오싹한 공포를 경험했지만 이번 일로 흑마법사 한 명을 잡았으니 데프론 후작이 흑마법사라는 것을 밝혀내기 쉬워졌다.
다만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카리온은 왜 베시를 데려다준 거지?’
리디아가 시킨 것인가 싶었지만 분명 그는 리디아가 이번 일은 모른다고 답했다. 데프론 후작의 또 다른 계획이라고 하기엔 베시가 돌아옴으로써 그 계획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베시가 제 손에 들어오는 것이 훨씬 좋았을 텐데.
‘그럼 왜…….’
한참 고민을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앳된 얼굴의 시종이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 데프론 영애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유리나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녀의 방문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게다가 사전 약속도 없이 찾아오는 건 예법을 중시하는 귀족이라면 웬만해서는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설마 약속도 없이 찾아올 정도로 친한 사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럴 리가.
“무슨 이유로 날 보자고 해?”
“아가씨께 부탁하실 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탁?”
이건 대체 또 무슨 수작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꺼림칙해서 유리나는 망설이지도 않고 손을 저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다른 귀빈을 만나고 있으니 다음에 먼저 연락을 주고 찾아오시라고 전해 주렴.”
“알겠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은 다시 유리나를 찾아왔다. 아까와 달리 난처한 얼굴이었다.
“아가씨, 데프론 영애께서…….”
“내 말을 전하지 않았니?”
“전했는데 그게…….”
“왜 말을 못 하는 거야?”
우물쭈물하던 그는 베시의 매서운 눈빛에 겨우 말을 열었다.
“아가씨를 지금 당장 꼭 좀 만나 봬야 한다면서 눈물을 흘리셔서……. 도무지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울어?”
유리나는 뜻밖의 말에 잠깐 놀랐지만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무슨 부탁을 하려고 이렇게 예의 없이 찾아왔는지는 모르나 리디아가 울면서 부탁을 하든, 치맛자락을 붙잡고 부탁을 하든 그녀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고.’
게다가 상대는 어찌 됐든 리디아 ‘데프론’이었다. 그녀가 유리나에게 호의를 보이고, 그녀를 따르는 카리온이 베시를 데려왔다고 해도 리디아와 데프론가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시종에게 다시 가서 거절의 말을 전하라고 입을 열 때였다. 복도에 애달픈 리디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르티아 영애! 제발, 제발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유리나의 방은 4층에 있었는데도 시종이 방 안에 들어오지 않고 복도에 서서 얘기를 하고 있던 탓에 그 소리가 잘 들렸다. 그 뒤로 이러면 안 된다고 말리는 고용인들의 목소리가 리디아의 것보다는 작게 복도를 울렸다.
‘이게 웬 소란이야.’
유리나는 소파에 앉은 채로 복도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리디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카르티아 영애! 무례한 거 저도 알아요. 그렇지만 제발, 제발!”
유리나는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리디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불청객이 쳐들어온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지만 상대가 후작가의 영애인 만큼 고용인들이 강제로 내쫓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유리나나 다른 가족들이 상대를 해서 돌려보내야 하는데, 지금 카르티아 후작과 세 오빠들은 저택에 없었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저택에 있었지만 그녀가 리디아를 상대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유리나는 옆에 선 베시를 한 번 보았다가 시종에게 부탁했다.
“데이브의 연구실에 레이가 있을 거야. 가서 레이 좀 불러 줄래? 최대한 빨리 가서 전해 줘.”
“알겠습니다!”
시종이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의 마나의 흐름이 흐트러지더니 레이너드가 나타났다. 이번엔 데이브는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시종에게 자초지종은 듣지 못했는지 그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리디아가 왔어. 그냥 보내려고 했는데 도무지 갈 생각을 하지 않아서 무슨 일인지 확인해야 할 것 같아.”
“그런 거라면 나 혼자 갔다 올게.”
“아냐, 같이 가. 어차피 너랑 있으면 괜찮잖아.”
유리나는 그의 팔을 잡고 현관으로 향했다. 계단을 한 층 한 층 내려갈수록 울음 섞인 리디아의 목소리가 커졌다. 마침내 1층에 다다랐을 때 집사장인 로버트의 팔을 잡고 애원하는 리디아의 모습이 보였다.
“제발요. 제발……. 부탁할 사람이 카르티아 영애밖에 없어서 그래요. 시간이 없어요. 제발…….”
리디아의 차림새는 단정했으나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유리나가 빠르게 다가가자 그녀를 발견한 리디아가 로버트의 팔을 놓고 유리나에게로 달려왔다.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앞을 재빨리 막아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맹목적이다시피 유리나를 바라보던 리디아가 레이너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하얀 손이 그의 팔을 필사적으로 꽉 쥐었다. 레이너드가 팔을 빼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녀는 만만치 않았다.
리디아는 레이너드가 움직이는 대로 질질 끌려가면서도 그의 팔을 놓지 않았다. 레이너드가 그녀를 배려해서 강하게 뿌리치지 않았다고 해도, 저 가느다란 팔 어디에서 그런 초인적인 힘이 나왔는지 놀라운 일이었다.
“레이너드 경!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흑…….”
눈물을 흘리며 제발 도와 달라는 말만 반복하는 리디아는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해 보였다. 이 상황에서 연락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온 무례를 지적해도 들을 것 같지 않아 유리나는 그녀가 뭘 이렇게 간절히 부탁하는지부터 들어 보기로 했다.
“데프론 영애.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흑, 카이가…… 카이가…….”
“카리온 씨가요?”
리디아가 말한 건 고작 그 이름 하나였지만 유리나는 그녀가 뭘 부탁하고자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데프론 후작이 베시를 구한 카리온을 가만히 둘 리가 없지.’
데프론 후작의 입장에서는 유리나와 카르티아가에 복수하기 위해 기껏 찾아 키운 후원자가 뒤통수를 친 꼴이었다. 게다가 그는 전생에서 유리나를 위해 데프론 후작을 죽음으로 몰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성에 차지 않던 사냥개가 자신의 손을 문 꼴일 테다.
‘데프론 후작이 카리온을 때리기라도 했나?’
그런 거라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가능성은 충분했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리디아가 자신을 찾아와 사정하는 건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치료 마법은 충분히 자기 자신에게도 쓸 수 있었다. 타인을 치료할 때보다 마나가 더 필요하다거나 완벽히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등의 제약은 전혀 없었다.
‘기절해서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하지만 아무리 데프론 후작이라도 카리온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상태라면 그를 치료하지 않고 방치할 리가 없었다.
유리나가 잠깐 생각을 하느라 머뭇거리는 사이 리디아는 진이 빠졌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우는 것을 넘어 거의 오열을 하고 있었다. 빨갛게 충혈된 눈과 부어오른 눈두덩만 봐도 그녀가 운 지 한참 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관 앞 상황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고용인들은 리디아의 귀족답지 않은 행동에 저마다 수군거렸다. 오랫동안 카르티아가의 집사로서 이런저런 일을 다 겪은 로버트만이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했다.
유리나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가 리디아를 향해 다가갔다. 레이너드가 막는 바람에 가까이 가지 못하는 사이, 리디아가 무릎으로 기어 와 유리나의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카르티아 영애, 카이를 좀 치료해 주세요. 카이만 치료해 주신다면 뭐든 할게요. 영애, 제발…….”
유리나는 승낙도 거절도 선뜻 내놓지 못하고 멍하니 리디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거절하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처럼 위태로운 리디아의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연기로는 보이지 않았다.
만약 리디아가 데프론가의 사람만 아니었더라면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그러겠노라고 대답을 했을 정도로. 아마 길을 가다가 모르는 사람이 이런 부탁을 했으면 선택이 쉬웠을 것이다.
‘왜…….’
왜 다른 사람을 놔두고 하필 당신의 아버지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나를 찾아왔느냐는 질문이 잠깐 혀끝에 맴돌았지만 끝내 묻지는 못했다.
‘부탁할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거겠지.’
몇 번 보지 않은 자신에게 달려올 정도로.
“유리나.”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레이너드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가 마법을 이용하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돌려보내.
‘그렇지만…….’
그는 유리나가 하는 생각을 듣지 못한다. 그러나 꼭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낮은 음성이 바로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저쪽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몰라. 만약 진짜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저 부탁을 들어줄 수 없어.
냉정한 답이었지만 사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옳았다. 그럼에도 치마를 잡고 달달 떨고 있는 저 여린 손을 뿌리치지 못하는 건 리디아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데프론 후작이 베시를 어디에 감췄는지 안다면 제발 알려 달라고 무릎을 꿇고 간절히 비는 모습.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만약 카리온이 베시를 데려다주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레이너드와 기사들이 베시의 종적을 찾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졌다면 그녀 또한 리디아에게 이렇게 애원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카리온은 베시를 구해 준 대가로 저렇게 된 것이 아니던가.
유리나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저 멀리서 후드를 입은 건장한 남자가 뛰어와 리디아의 팔을 잡았다.
“아가씨, 이러지 마시고…….”
카리온이었다. 후드로 잘 싸맨다고 싸맨 것 같았지만 유리나는 언뜻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며칠 전 자신을 찾아왔던 말끔하고 수려한 외모를 지닌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은 눈을 비롯하여 입술, 광대, 콧대 등이 심하게 상처가 나거나 부어 있었다. 옷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걸음걸이가 다소 어색한 것을 보아하니 몸 상태도 성치 않은 것 같았다.
유리나는 리디아를 억지로라도 데려가려는 카리온과 끌려가지 않으려는 리디아를 보다가 레이너드의 손을 잡았다.
“레이.”
그가 거절하는 듯 유리나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다. 유리나는 그의 손을 꽉 잡으며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레이.”
카리온에겐 빚이 있다. 리디아 때문이 아니라 카리온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이다.
유리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레이너드가 한숨을 쉬면서도 그녀의 손을 마주 꽉 잡았다.
* * *
치료를 해 주겠다는 레이너드의 말에 처음에 카리온은 괜찮다며 몇 번이나 거절했다. 그러나 리디아가 울먹이며 얼른 치료를 받으라는 말에 입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레이너드를 따라갔다.
유리나는 멀어지는 카리온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리디아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온몸의 수분을 모두 쏟아 낸 것처럼 울던 리디아는 기운이 없는지 푹신한 소파에 축 늘어지듯 쓰러지며 눈을 감았다. 자신이 카르티아 저택에 불청객으로 와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이 빠져 보였다.
“차 좀 드세요. 마음이 조금이나마 안정이 될 거예요.”
유리나는 캐모마일 차를 리디아 앞에 놓아 주었다. 그러고 보니 리디아는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살짝 수척했다. 리디아가 겨우 실눈을 뜨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바라보다가 힘겹게 자세를 바로 하며 앉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꽉 쥐고 찻잔을 바라보기만 할 뿐, 차를 들지는 않았다. 원래 이렇게 조용할 때는 가벼운 화제라도 던지는 것이 집주인의 도리였지만, 유리나는 그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던 리디아가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었다.
“죄송해요. 다시 한번 제 무례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유리나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빈말이라도 우리 사이에 그런 사과는 필요 없다는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툭. 겨우 울음이 그친 리디아의 눈에서 다시 흘러내린 눈물이 찻잔으로 톡 떨어졌다. 유리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그렇게 감사하실 필요는 없어요. 영애의 부탁 때문이 아니라 카리온 씨에게 갚을 빚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요.”
“네?”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리디아의 충혈된 초록색 눈이 크게 뜨였다.
“갚을 빚이라뇨?”
“카리온 씨께서 제 하녀를 구해 주셨어요.”
리디아가 더욱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저 정도로 순진한 아이였다. 유리나는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얼굴로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그녀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말을 해야 하나.’
지금 상황을 보면 리디아는 데프론 후작이 꾸민 짓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가 흑마법사라는 것도, 자신을 황태자비 자리에 앉히기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심지어 베시를 납치하여 유리나를 꾀어내려고 했다는 사실도.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아무리 카리온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태연히 유리나를 찾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유리나는 그녀를 비난하거나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머리와는 달라서 솔직히 그녀가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나는 오로지 살겠다는 다짐 하나로, 내가 사랑하는 이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지금껏 달려왔는데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게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하나. 당신의 아버지가 내게 한 짓을 알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나.
그녀를 비난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감정이 요동쳤다. 차라리 리디아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는 것이라면 죄책감 없이 비난을 했을 텐데.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도 될까?’
유리나가 계획하고 있는 일은 데프론 가문을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이 일은 리디아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일. 그런데 당사자인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라도 될까?
순간 데프론 후작이 베시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낱낱이 알려 줄까도 싶었지만 그럴 필요까지야 있을까 싶었다. 사실, 모든 사실을 알면 리디아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선뜻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데프론 후작에게 동조할까, 아니면 그에게 반기를 들까.
해서 유리나가 말할 수 있는 정보는 아주 단편적인 것밖에 없었다.
“카리온 씨가 제가 가장 아끼는 하녀를 구해 주셨어요. 카리온 씨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제 하녀는 끔찍한 일을 당했을지도 몰라요.”
“카이가요?”
리디아의 성격이라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카이가 도움이 돼서 다행이에요. 그 아이는 참 착하거든요.’ 등의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러세요?”
“아뇨,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녀는 어딘가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다가 유리나와 시선이 딱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차를 홀짝였다.
“이미 차가 식었을 거예요. 새로 따라드릴게요.”
“아, 네. 감사해요.”
유리나가 건네준 새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리디아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도 감사해요. 영애마저 거절하셨더라면 누구한테 가야 할지 막막했거든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카리온 씨라면 충분히 치료 마법을 쓸 수 있었을 텐데요.”
“…….”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 속사정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더 캐묻는다고 대답해 줄 것 같지는 않았기에 유리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동안 티타임을 가질 때마다 리디아가 참새마냥 재잘재잘 떠들어 대서 대화가 끊기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참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야 할 리디아는 제 발밑을 바라보며 차만 홀짝였다.
“그럼 잠깐만 계세요. 치료가 마무리되고 있는지 잠깐 살펴보고 올게요.”
“저도 같이…….”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신 것 같은데 쉬고 계세요. 그 모습으로 가셨다간 카리온 씨가 걱정만 더 하실 거예요.”
카리온의 이야기에 리디아는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못했다. 유리나가 하녀에게 리디아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문고리를 잡을 때였다.
“카르티아 영애.”
“네?”
“영애께서 황태자 전하를 사모한다는 소리는 들었어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유리나는 갑작스러운 공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내가 커티스를 좋아한다니?’
그런 소문이 날 일을 하지도 않았거니와 왜 리디아가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무런 걱정하지 마세요. 전 황태자 전하께 아무 관심이 없어요. 황태자비 자리에도 관심이 없고요. 그러니까…….”
“잠깐, 잠깐만요.”
말끝을 잘린 리디아가 겁에 질린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릿속으로 그녀가 한 말을 정리해 보던 유리나는 왜 그녀가 그런 소리를 하는지 뒤늦게 알 것 같았다.
‘데프론 후작이 그렇게 말했나.’
황태자비에 집착하고, 유리나가 이번 생에서 지난 생처럼 커티스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럴 법도 했다. 아마도 리디아에게 유리나 대신 네가 황태자비가 되라고 강요라도 했을지 모른다.
“무언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전 황태자 전하를 사모하지 않아요. 몇 번 만난 적도 없고, 사적으로는 더더욱 만난 적도 없거든요.”
안 그래도 동그랬던 리디아의 눈이 더욱 동그랗게 커졌다.
“하지만…….”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애께 그 말을 전해 주신 분이 무언가 잘못 아시고 계신 것 같아요. 그러니 영애께서 황태자 전하께 관심이 없다는 얘기는 굳이 제게 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리나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서 몸을 돌려 카리온과 레이너드가 있는 다른 응접실로 향했다.
“레이, 들어가도 돼?”
살짝 노크하며 묻자 레이너드가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오려고?”
유리나는 들어오지 말라고 표정과 몸동작으로 말하는 것 같은 레이너드에게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
“할 말이 있어서 그래.”
그는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유리나의 손을 잡고 직접 안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유리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옷매무시를 정리하는 카리온에게 다가갔다.
레이너드에게는 카리온이 베시를 구해 줬으니 그를 이번 한 번만 치료해 달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를 저택에 불러들인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유리나가 다가가자 카리온이 감사를 표현하듯 고개를 숙였다.
“리디아 아가씨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다른 응접실에 있어요. 많이 지치신 것 같기에 잠깐 쉬고 계시라고 했어요.”
“실례를 끼쳐 죄송합니다. 더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 아가씨를 모시고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잠깐만요.”
유리나의 부름에 발걸음을 옮기려던 카리온이 멈춰 섰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유리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제 손을 꽉 잡는 레이너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살금살금 움직여 유리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순식간에 카리온의 뒷모습이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눈에 뻔히 보이는 질투였지만 상황이 심각한지라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유리나는 소리 없이 입술만 벙긋거리며 레이너드에게 물었다.
‘어때?’
그가 마법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음성을 흘려 보냈다.
―네 예상대로야. 흑마법인지는 모르겠는데 무언가 마나의 흐름을 방해하는 제약 같은 게 걸려 있는 것 같아.
그래서 평소보다 치료하는 데 힘이 들었다며 그가 덧붙였다. 담담하게 말했지만 어쩐지 그게 칭찬을 해 달라는 아이의 투정처럼 들려 유리나는 그에게 살짝 웃어 주었다.
―아마 스스로 치료하지 못하고 이곳까지 온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아.
역시 그런 걸까.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말에 자신이 했던 가정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카리온은 데프론 후작의 후원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데프론 후작은 카르티아가와 유리나를 완전히 무너뜨릴 정도로 그들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유리나를 위해 자신을 잡아들였던 카리온에게 악의를 갖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를 찾아 후원하긴 했지만 카르티아 후작 부부가 진심으로 레이너드를 대했던 것과는 달리, 데프론 후작은 그를 곱게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학대를 하고 상처 치료를 못 하게 막기까지 했을 줄은 몰랐지만.’
아이들은 감정에 예민하다.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작은 호의에 마음을 연 것처럼 어린 카리온도 데프론 후작이 자신에게 갖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을 테다.
그런 그가 무너지지 않고 데프론가에서 버틸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바로 리디아. 카리온이 얌전히 데프론가에 머무른 것도 바로 그녀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데프론 후작을 배신하고 유리나에게 유리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면 그건 모두 리디아 때문이 아닐까. 원작에서도 그는 리디아를 위해 목숨도 내어 줄 정도로 그녀에게 헌신적이었으니까.
카리온이 데프론 후작의 편에 선다고 해도 그녀는 충분히 데프론 후작을 무너뜨릴 자신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 카르티아 후작도, 세 오빠들도, 레이너드도, 그녀 자신도 차근차근 정보를 수집하며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카리온이 자신의 편에 서 준다면…….’
목적이 보이는 사람만큼 구슬리기 쉬운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유리나는 카리온이 원하는 것을 충분히 줄 수 있었다.
유리나는 레이너드를 살짝 지나가 카리온에게로 향했다.
“그날, 베시를 왜 구해 준 거예요?”
“…….”
“보아하니 베시를 데려다주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대체 왜 데프론 후작의 뜻을 따르지 않고 베시를 데려다준 거죠?”
카리온에게서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특별히 대답을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기에 유리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베시를 데려다주었을 때 돌아올 후폭풍을 모르진 않았겠죠. 당신은 당신의 힘으로 충분히 그걸 감당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겠지만 과연 뜻대로 될까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데프론 후작은 당신의 힘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보아하니 제약이 걸려 있는 것 같은데.”
내내 뒤돌아 있던 카리온이 그제야 몸을 돌렸다. 말없이 유리나를 응시하는 모습이 이걸 파악하기 위해 치료를 해 주었냐고 되묻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유리나는 태연하게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였다.
“처음에 내게 할 말이 있다며 찾아와서 꿈 이야기를 했을 때 이걸 원한 게 아니었나요?”
“…….”
“아니라고는 부정하지 못하겠죠.”
실제로도 그는 부정을 하지 않았다. 유리나는 그에게 한 발자국 더욱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
“나와 손을 잡아요. 그럼 당신이 지키고자 한 거 내가 지켜 줄게요.”
“…….”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오늘 밤, 후문으로 와요.”
미끼는 던져졌다. 이제 그가 미끼를 무는 것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 * *
데프론 후작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 리디아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달달 떨리는 두 손을 힘 있게 맞잡았다. 최대한 태연한 척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버지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자꾸만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심호흡도 몇 번이나 해 보았지만 쿵쿵 세게 뛰는 심장은 진정되지 않았다.
‘괜찮아.’
그녀는 벌써 스스로에게 그 말을 네 번이나 되뇌었다.
‘후회하지 않아.’
이번 일로 아버지에게 혼나기는 하겠지만, 다시 선택을 하라 그래도 그녀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었다. 카리온만 괜찮다면 아버지의 분노쯤은 얼마든지 받아 낼 자신이 있었다.
카리온의 상처는 심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금방이라도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다. 며칠만 지나면 데프론 후작도 노여움을 풀고 의원에게 그의 상처를 살펴보라고 할 터였다.
그렇지만 리디아는 그 며칠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카리온의 상처를 보고 있자니 꼭 자신이 다친 것처럼 속이 쓰리고 아픈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의 퉁퉁 부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제게 화를 낼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찮다는 카리온을 끌고 유리나를 찾았다.
도움을 청할 곳이 만난 지 얼마 안 된 유리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새삼 슬프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도움을 요청할 곳이 또 있었다고 해도 유리나를 찾아갈 것 같았다.
레이너드를 아끼는 그녀라면 제 심정을 이해해 줄 것 같았기에.
“아버지.”
리디아는 등지고 서 있는 데프론 후작에게서 약간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리디아.”
고작 이름 하나를 불렀을 뿐인데 데프론 후작의 목소리에서는 채 숨기지 못한 노기가 드러났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온 게냐? 내가 분명 가만히 놔두라고 했거늘!”
그가 몸을 돌려 그녀를 노려보다시피 바라보았다. 리디아는 그의 서슬 퍼런 눈빛에 잠깐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이내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그냥, 그냥 놔두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뭐?”
“카이, 아니, 카리온의 상처가 심각해 보여서 그냥 놔둘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무심코 카리온의 애칭을 말했던 그녀는 재빨리 호칭을 정정했다. 데프론 후작은 그녀가 그를 애칭으로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
그렇게 격식 없이 지내면 카리온이 제 분수도 모르고 오만방자해질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친구처럼 지내는 게 뭐가 어때서. 데프론 후작이 아무리 뭐라 그래도 카리온은 그녀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다.
하지만 괜히 카리온에게 불똥이 튈까 봐 데프론 후작 앞에서는 말조심을 하는 편이다.
“그 아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몰라요. 그렇지만 그렇게 심하게 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카르티아를 찾아가다니!”
“카르티아 영애는 제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짝! 순간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왼쪽 뺨에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통증이 느껴졌다. 리디아는 화끈거리는 볼을 감싸 쥐며 앞에 선 데프론 후작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충격으로 잘게 흔들렸다.
“아…… 버지?”
카리온을 치료해 주었다는 소식을 들은 데프론 후작이 단단히 화가 나서 혼을 낼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뺨을 맞다니. 지난 17년 동안 리디아는 누군가에게 맞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때릴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 순간적으로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러셨을 거야. 곧 미안하다고 하시겠지.
그러나 그런 리디아의 생각이 무색하게도 데프론 후작은 사과 대신 사납게 그녀를 윽박질렀다.
“카르티아라니! 네가 지금 정신이 있는 게야?”
“아, 아버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카르티아라니. 내가 카르티아는 경계하라고 얼마나 얘기했지? 그동안 네가 계속 그 여우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줄 알고 가만히 놔뒀는데 대체 생각이 있는 게냐?”
리디아는 서슬 퍼런 그의 눈을 보다가 주춤주춤 뒷걸음을 쳤다. 다행히 그는 따라오지 않았지만 노을이 지는 창문을 등지고 있는 그의 몸은 거대해 보여 위압적이었다.
“저, 저는…….”
계속해서 후작과 거리를 벌리던 그녀는 문득 제자리에 서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유리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카리온 씨가 제가 가장 아끼는 하녀를 구해 주셨어요. 카리온 씨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제 하녀는 끔찍한 일을 당했을지도 몰라요.
참 이상한 말이었다. 데프론 후작은 어릴 적부터 카리온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면 안 된다고 저택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가능하면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적어야 한다면서 저택 안에서도 그의 행동반경을 제한했다.
카리온이 마법을 익혀 눈동자 색을 바꿀 수 있게 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수도에 따라와 리디아를 에스코트하며 파티장에 가긴 했지만, 그 후로 그는 저택에서만 지냈다.
오늘을 제외한다면 최근 그가 외출을 한 건 딱 두 번. 한 번은 리디아를 따라 카르티아 저택에 방문하기 위해서, 다른 한 번은 데프론 후작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카리온이 유리나의 하녀를 구했다니. 그렇다면 데프론 후작의 심부름을 하러 나간 날 있었던 일이란 것인데, 심부름하기도 바빴을 그가 어떻게 우연히 그런 선행을 했을까.
‘게다가 그날 아버지는 카이에게 엄청 화가 나셨었어.’
데프론 후작은 이상하게 카리온에게 엄격해서, 그가 잘못을 하면 고용인들을 혼내는 것보다 더 심하게 혼을 냈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유독 심하게 그를 때린 데다가 치료도 못 받게 하지 않았던가.
리디아의 마음속에서 불안감이 싹텄다. 불길한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에게 물을 수가 없었다. 그의 입에서 나올 진실이 두려웠다. 그래서 비겁하게 도망치듯이 집무실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 * *
카리온은 데프론 후작의 집무실 맞은편 복도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복도를 지나가는 고용인들이 그를 흘끔흘끔 쳐다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오로지 집무실 문에만 향해 있었다.
방음 마법이라도 걸어 놓았는지 굳게 닫힌 집무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잔뜩 진노한 데프론 후작의 고성도, 리디아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도 전혀 없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리디아는 혼자 덜덜 떨고 있지 않을까. 늘 웃으며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는 리디아지만, 사실 마음이 많이 여리고 겁이 많은 사람인데.
안에서 일어나고 있을 최악의 가정을 머릿속으로 상상할 때마다 카리온은 집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실제로도 아까 문을 닫고 들어가는 리디아를 따라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문고리를 잡는 순간, 손바닥을 시작으로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강한 통증에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카리온은 제 오른쪽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베아투스인 그의 눈에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손바닥을 가득 채운, 정체 모를 검은색의 문양. 이건 데프론 후작이 그를 고아원에서 데프론 저택으로 데려왔을 때 새겨 넣은 것이었다.
당시에 카리온은 이게 뭘 뜻하는 건지 몰랐다. 그저 자신을 후원해 주고 마법도 가르쳐 준다고 했으니 그에 대한 증표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법을 어느 정도 배운 십 대 중반 무렵에 어렴풋이 이 문양이 가진 의미를 알았다.
이건 그의 행동을 제약하기 위해 카리온 후작이 채워 둔 족쇄였다. 이것 때문에 카리온은 제 몸을 스스로 치료할 수가 없었다.
한 번도 이것에 불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후작에게 맞은 곳을 치료하지 못하는 건 번거롭기는 했지만, 그는 그 정도 고통에는 익숙했으니 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실신할 것처럼 오열하는 리디아의 모습을 보니 처음으로 이 제약이 난감하게 느껴졌다.
카리온은 주먹을 꽉 쥐며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은 리디아의 눈물을 떨쳐 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기는커녕 더욱더 눈앞에 선명해졌다.
제까짓 게 주제도 모르고. 스스로에게 조소를 던진 그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신이 욕심을 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안다. 그와 그녀는 태생부터가 달랐다. 가까이에 있어도 투명한 벽이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왜 자꾸만…….
생각을 가다듬던 카리온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차분한 리디아답지 않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꽤 거칠었다.
입가를 가리고 집무실을 나오던 리디아는 그 앞에 서 있던 카리온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그러나 이내 그를 못 본 척하며 도망치다시피 방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카리온의 얼굴에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지만, 실제로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어릴 적,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리디아는 과할 정도로 관심을 보이며 그에게 살갑게 굴었다. 그와 대화를 할 때면 늘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통에 오히려 카리온이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내려야 했다.
그것이 그와 그녀 사이의 거리였다. 그는 후원을 받고 있다고 하지만 일개 고용인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었고 리디아는 저택에서 가장 귀한 아가씨였으니까.
리디아는 늘 그것을 못마땅해했다. 그래서 그녀는 카리온이 제 시선을 피할 때마다 일부러 더 집요하게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먼저 시선을 피하다니?
왠지 모를 불안감에 카리온은 충동적으로 그녀의 팔을 잡았다. 말 그대도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평소에 그는 그녀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일이 없었다.
“아가씨.”
“카르티아 저택을 다녀왔더니 피곤해. 얼른 방에 가서 쉬고 싶어.”
그 말을 하는 중에도 리디아는 꼭 의식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아이처럼 펑펑 울었으니 진이 빠져 피곤할 법도 했다. 그러나 카리온은 그녀를 이대로 방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아가씨.”
“피곤하대도.”
“후작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
그러나 그는 말을 채 끝마칠 수가 없었다. 언뜻 본 리디아의 얼굴에 놀라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울먹이는 듯이 또르륵 흘러내리는 눈물과 발갛게 부은 뺨과 터진 입술. 누가 보아도 데프론 후작에게 맞은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아가씨.”
“…….”
“후작님께서 아가씨께 손을 대셨습니까?”
복도에 싸늘하게 내려앉는 침묵이 긍정으로 들려 카리온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화가 치솟아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을 보던 리디아가 재빨리 변명을 하듯 중얼거렸지만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카리온은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걸 눈치챘는지 리디아가 그의 팔을 잡고 그를 제 방으로 끌고 가다시피 갔다.
뿌리친다면 뿌리칠 수 있었지만 카리온은 그녀에게 포획된 짐승처럼 힘없이 그녀에게 끌려갔다. 마법에 전혀 재능이 없는 리디아에게 그를 구속할 수 있는 힘 따위는 없을 텐데도 그는 늘 그녀를 거역할 수가 없었다.
리디아의 방으로 와서 본 그녀의 얼굴은 어두운 복도에서 볼 때보다 더욱 심각해 보였다.
분명 제 몸에 났던 상처는 이미 다 흔적도 없이 치료를 한 상태였는데도, 카리온은 리디아의 터진 입술을 보며 꼭 자신이 다친 것처럼 쓰라린 아픔을 느꼈다.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이라기보다는 왼쪽 가슴 부근에서 느껴지는 둔통에 가까웠다.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자꾸만 제게서 상처를 감추려는 리디아의 얼굴을 잡고 상처 위로 마나를 흘려보냈다. 터졌던 입술과 부었던 볼이 빠르게 치료되며 원래의 말끔한 얼굴로 돌아왔다.
카리온은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붉은 리디아의 입술 위를 쓸었다.
닿는 것조차도 죄스러워서 늘 닿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했던 사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데 데프론 후작은 어찌하여 리디아에게 손을 댄 것인가.
―리디아는 황후가 되어야 해. 그게 리디아가 행복해지는 길이야. 알겠나?
카리온은 데프론 후작이 제게 입버릇처럼 말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릴 적에는 그도 그 말에 내심 동의를 했었다. 리디아는 그가 보았던 사람 중 가장 빛이 나는 사람이었고, 그런 그녀는 제일 높은 자리에 올라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 그에게 그 말을 하던 당시, 데프론 후작 또한 순수하게 그렇게 해야만 그녀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처럼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의 눈동자엔 광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특히 사냥 대회 이후로는 그 증세가 더 심해져 리디아의 행복을 바라기보다는 그냥 그녀를 황후로 만드는 것에 집착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데프론 후작의 행동이 리디아를 위한 것이 맞는 걸까. 정말로 그가 딸을 사랑한다면 오늘처럼 리디아에게 손을 대는 일은 없어야 했다.
게다가 리디아는 어느 날부터인가 데프론 후작의 앞에 설 때면 포식자 앞에 선 초식 동물처럼 잔뜩 긴장하기 시작했다.
혹시 데프론 후작이 리디아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이 아닐까. 만약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데프론 후작은 리디아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다. 과연 황후가 된다고 해서 그녀가 행복할 것인가.
그동안 데프론 후작의 곁에서 모든 것을 참고 견뎌 냈던 것도 다 리디아를 위해서였다. 자신의 행동이 다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리나 카르티아의 하녀인 베시를 납치해 오라는 데프론 후작의 명령과 유리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리디아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선택이 지금껏 틀렸더라면? 데프론 후작의 행동이 리디아를 갉아먹고 있다면?
―나와 손을 잡아요.
―그럼 당신이 지키고자 한 거 내가 지켜 줄게요.
그렇다면 답은 정해졌다.
* * *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오늘 밤, 후문으로 와요.
카리온은 유리나의 말을 떠올리며 저택을 몰래 빠져나와 카르티아가의 후문으로 향했다. 그곳엔 레이너드가 서 있었다. 전부터 그랬지만 카리온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전쟁터에서 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날카롭고 경계심이 가득했다.
“대답은?”
짧은 물음에 카리온은 마찬가지로 짧게 대답했다.
“수락하지.”
* * *
“유리나.”
레이너드가 그답지 않게 경직된 얼굴로 유리나의 손을 잡았다.
“꼭 네가 가야 해?”
그녀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유리나는 차갑게 식은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그의 손을 마주 꽉 잡았다.
“걱정하지 마.”
바로 어제, 카르티아 후작을 통해 황태자인 커티스가 알현을 허락한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비밀 유지를 위해 알현 장소는 수도 외곽에 있는 커티스 소유의 별장에서 변장을 하고 만나기로 했다. 카르티아 후작을 대신하여 첫째 오빠인 릭스와 데이브가 동행을 할 예정이지만 레이너드는 알현을 허락받지 못했다.
유리나는 차라리 그게 다행으로 느껴졌다. 혹시라도 커티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레이너드가 상처를 받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저택에 남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며 레이너드는 별장 근처까지 동행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불안한 기색을 간신히 숨기나 싶었지만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는지 그는 유리나가 마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그녀를 말렸다.
“네가 꼭 안 가도 되잖아. 릭스 님과 스승님께서 뜻을 전하고 와도 충분하지 않아?”
유리나는 먼저 마차에서 내려 밖에서 대기하는 데이브에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손짓했다. 데이브가 말을 타고 온 릭스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더니 작게 속삭였다.
“알현을 요청한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지만 혹시 모르니 금방 마무리 짓고 나오세요.”
그는 유리나와 레이너드를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았다가 마차 문을 닫았다. 마차 문이 완벽하게 닫히기가 무섭게 레이너드가 후드를 뒤집어쓴 유리나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후드 밖으로 튀어나온 유리나의 머리카락이 그의 몸 위에 흐트러졌다.
“불안해할 거 없어. 나 믿지?”
저도 모르게 그의 귓가에 속삭인 유리나는 뒤늦게 자신이 한 말의 뜻을 깨닫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 말이 꼭 한량이나 할 법한 대사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웃음에도 그는 표정을 풀지 못했다.
“나는 믿지만 황태자 전하는 믿지 못한다는 거야?”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두툼한 후드에 가로막히자 불만스럽게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천천히 그녀의 후드를 뒤로 넘겼다. 레이너드는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언뜻 보이는 그녀의 흰 목덜미를 보다가 맨살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유리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주다가 재촉했다.
“레이, 나 가야 해.”
“혹시라도 황태자 전하가 널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럴 일은 없어.”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확신했다.
유리나는 지금 레이너드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커티스 제노시안은 유리나가 어릴 적부터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고, 레이너드가 활약을 보인 뒤로는 더욱 노골적으로 그녀를 원했다.
카르티아가는 황실에서 혼사를 멋대로 강행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가문은 아니었다. 만약 황제가 커티스와 유리나의 혼담을 추진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카르티아 후작이 거절을 하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황제는 제국의 주인. 만약 커티스가 데프론 후작과 손을 잡은 2황자에게 위협을 느껴 유리나와의 혼사를 강하게 추진한다면 카르티아 후작도 완벽하게 유리나를 보호할 수는 없었다.
레이너드는 그걸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유리나를 커티스에게 빼앗길까 봐. 카리온을 경계하는 것이 단순히 질투 때문이었다면, 커티스를 향한 경계는 좀 더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유리나는 자신 있었다. 지금 커티스를 만나는 것도 다 그가 걱정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니까.
“그럴 일 없어.”
유리나는 그의 고개를 조심스럽게 들어 붉은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곁에 있을 거니까 걱정 마.”
그러기 위해서 어릴 적부터 커티스를 피해 다녔으니까.
속으로 삼킨 뒷말을 읽었는지 레이너드가 조금 안심을 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믿을게.”
유리나는 그에게 다시 입을 맞춘 뒤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내리자마자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에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녀는 손차양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색이 진해진 나뭇잎 사이로 황금빛 태양이 내리쬐었다.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가는 바람은 선선하다기보다는 살짝 열기가 있었다.
계절은 어느새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7년 전 레이너드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날씨였다. 여름은 그녀에게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계절이자 희망이었다.
그러니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마지막 승부수를 던질 때가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 * *
“다들 어서 오게. 이렇게 보니 반갑군.”
다리를 꼬고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 있던 커티스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는 세 사람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살짝 더워진 날씨에도 소름이 일 정도로 서늘한 그의 목소리는 딱히 그들을 반기는 느낌은 아니었다.
유리나는 릭스가 커티스 앞에서 기사의 예로 인사를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후드를 벗었다.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보던 커티스가 마뜩잖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매만졌다.
“내가 알던 카르티아 영애가 아닌데.”
그는 그것이 데이브의 마법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고 데이브를 향해 눈짓했다. 유리나의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이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커티스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그 모습이 훨씬 낫군.”
유리나는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마법으로 모습을 바꿨을 때 레이너드는 이 모습도 예쁘다고 말해 주었다.
색다른 유리나를 보는 그의 시선은 마치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몽롱했다. 그가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눈빛만으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원래의 모습이 훨씬 낫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커티스가 그녀에게 가지는 감정은 호기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원작의 유리나가 왜 커티스를 좋아했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유리나는 커티스 앞으로 가서 예를 갖춰 허리를 숙였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이 머리 위로 꽂히는 것 같았다.
몇 달 만에 마주한 황태자, 커티스는 사냥 대회 때 본 것보다 더욱 날카로운 인상을 하고 있었다. 날 때부터 황좌에 오르기 위해 태어난 남자. 원작에선 그를 그렇게 표현했다.
그 말대로 그의 날카로운 금색 눈동자는 제국의 모든 이를 제 발아래에 두고 내려다보는 것처럼 차갑고 오만하게 유리나를 향했다.
멋모르는 어릴 적에는 저 시선에 저도 모르게 덜덜 떨면서 동요한 적이 있었다.
그게 그가 원작 속 남주인공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그가 가진 위압감 때문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냥 당시에는 고작 네 살 차이가 나는 그가 무척이나 거대하고, 위협적으로 느껴졌다는 기억만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달랐다. 신분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기는 했지만, 유리나는 더 이상 그의 시선이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에 왜 그를 그렇게 무서워하며 피해 다녔나 우습기만 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군. 몸이 좋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이제 조금 괜찮나?”
“전하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걱정해 준 덕분은 무슨. 유리나가 몸이 안 좋았던 건 무리하게 마법을 썼던 사냥 대회 직후의 일이다. 몇 달이 지난 지금에 와서 안부를 물어볼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건 오히려 그동안 그가 그녀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기도 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곁눈질로 커티스를 보았다. 황궁 알현실과는 달리 이 별장의 응접실 바닥은 별도의 단이 없이 평평했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의 눈높이는 분명 그녀의 것보다 낮은데도 꼭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게 바로 황태자의 위엄이라는 거겠지.’
유리나는 황태자로서의 커티스의 모습을 잘 모른다. 그녀가 지금껏 바라보았던 커티스의 모습은 연인과 남편으로 삼기에는 탐탁지 않은 구석이 많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많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과 한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은 달랐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었던 커티스 제노시안은 남주인공답게 어릴 적부터 머리가 영특하고 검술 실력이 남달라서 장래가 기대되는 황태자라고 했다.
실제로도 이곳에서도 그는 든든한 배후가 없어서 아쉽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황태자로서의 자질을 의심받지는 않았다.
누구에게나 냉정하고 쉽게 마음을 주지 않은 성격조차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냉정하게 제국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했다.
‘남편으로서는 최악이지만.’
반면 2황자의 평판은 커티스와 달랐다. 그는 든든한 세력이 있지만 능력은 영 없었다. 2황자를 따르는 귀족들이 선뜻 그를 밀어주지 못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황제 또한 2황자보다는 능력 있는 커티스를 더 지지했다.
아마도 남주인공인 커티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설정했을 것이다.
‘세력도 있는데 능력도 좋으면 그게 남주인공이지.’
그러니 어차피 차기 황제는 커티스의 것이라는 소리였다. 게다가 데프론 후작이 2황자와 손을 잡았으니 커티스가 마음에 안 들어도 그를 밀어줄 수밖에 없었다. 원래 카르티아가가 커티스를 지지하기도 했고.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영애가 직접 날 찾아온 거지?”
유리나는 일단 릭스에게 눈짓을 하고 뒤로 살짝 물러났다. 커티스와의 만남을 청한 것은 엄밀히 따지면 그녀였지만,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일단 릭스가 말문을 트는 것이 훨씬 나았다.
‘내 말보다는 오빠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겠지.’
인정하기 싫지만 그랬다. 겉으로 보기에 릭스 카르티아는 카르티아 가문을 이어 갈 후계자지만, 유리나는 그저 사랑만 받고 자란 막내딸일 뿐이니까.
괜히 그녀가 이야기를 한다고 나섰다가는 커티스의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최근 들어 데프론 후작가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전하께서도 느끼셨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릭스가 말을 꺼내는 순간, 커티스의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발톱을 숨긴 맹수처럼 나른한 척이라도 하고 있던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진 것이다.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은 카르티아 후작의 뜻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비롯하여 카르티아 모두를 대표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릭스를 위아래로 훑던 커티스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삐딱하게 앉아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어디 한번 들어 보지. 대체 어떤 정보가 카르티아 후작을 움직였는지 나도 듣고 싶군.”
“지금껏 데프론 후작은 황제 폐하를 충실하게 모셨고, 황제 폐하께서 정한 후계자이신 전하께도 충성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사냥 대회에서 사고가 있고 나서부터 행보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가?”
커티스는 마치 처음 듣는다는 듯 관심을 보이는 듯했지만, 이미 그도 데프론 후작과 제2황자가 손을 잡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를 움직이려고 한다면 그 이상의 정보를 주어야 했다.
유리나는 자신을 향해 시선을 주는 릭스에게 가볍게 고객을 끄덕여 주었다. 릭스가 말을 이었다.
“카르티아가에서는 지난 사고 이후 다른 흑마법사 세력이 남아 있는 건 아닌지 계속 추적해 왔습니다. 흑마법은 본디 마법사들도 알아볼 수 없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냥 대회 때 보았다시피 레이너드 경을 비롯한 베아투스들은 알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흑마법사? 그 얘기가 왜 갑자기…….”
별 감흥 없이 대꾸하던 커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그대는 데프론 후작이…….”
“네,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카르티아에서는 그가 사냥 대회 때 습격의 배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리나가 릭스의 말에 이어 말했다.
“이미 황제 폐하께서는 전하께서 참가한 사냥 대회를 습격한 흑마법사 세력을 반역자로 간주하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내리셨습니다. 만약 배후 세력이었던 데프론 후작과 2황자 전하께서 손을 잡았다면 그다음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유리나의 말까지 들은 커티스는 다소 복잡해 보이는 얼굴을 했다. 그는 기다리라는 듯 손짓을 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리나는 차분히 그가 생각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머리가 아프겠지.’
유리나와 카르티아가의 사람들이 몇 주에 걸쳐 정리한 생각이었다. 게다가 유리나는 어릴 때부터 원작의 내용과 더불어 데프론 후작이 자신에게 갖고 있는 적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이 사실들을 받아들이기 쉬웠다.
그러나 커티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일 테다.
“내가 그대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대들의 말은 다소 믿기 어려운 구석이 있군. 데프론 후작은 지금껏 카르티아 후작과 더불어 황실에 충성을 다했다. 그런 그가 흑마법사라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2황자와 손을 잡고 나를 노리려고 한다?”
커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느린 발걸음으로 유리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대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이미 전하께서는 저희 가문에서 후원하고 있는 레이너드가 흑마법을 찾아낸 것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질문을 달리하지.”
어느새 그는 유리나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데프론 후작이 흑마법사라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흑마법을 이용하여 늑대를 조종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늑대가 공격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대였지. 정말로 다른 흑심이 있었다면 그때 나를 노렸어야지. 그대들이야말로 확실치 않은 정보로 나와 2황자의 사이를 모함하려고 하는 건가?”
이 말이 나올 줄 알았다. 그의 말은 얼핏 들으면 릭스와 유리나의 말을 믿지 않고 화를 내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이미 커티스 또한 2황자가 제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이 소리는 조금 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는 소리였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유리나의 단호한 말에 커티스가 동요하는 기색 없이 말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역시나 정보를 더 내놓으라는 소리였네.’
정말로 2황자를 믿었더라면 이렇게 태연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저는 예전에 크론 왕국을 방문했을 때 반역 세력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었지요.”
“그건 나도 들은 적이 있지. 내 또 다른 조국이나 다름없는 크론 왕국에서 영애가 큰 화를 입을 뻔하다니, 유감이야.”
“오래전 일인 데다가 결과적으로 별일 없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제 아버지께선 그들이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타국의 귀족인 저를 노렸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으셨고 지금까지 그들의 행적을 쫓으셨습니다.”
“그래서 찾았는가?”
“네.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마침내 그 배후를 찾았습니다.”
뒤에 나올 이야기를 예상하기라도 했는지 커티스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유리나는 그의 표정에서 이 대화가 잘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저를 습격했던 반역 세력을 부추긴 것 또한 데프론 후작이었습니다.”
커티스의 어머니인 선황후의 고향은 크론 왕국이었다. 커티스가 크론 왕국을 제 또 다른 조국이라고 칭할 정도로 그와 크론 왕실 간의 사이는 각별했다.
데프론 후작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가 크론 왕국의 반란 세력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커티스를 위협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가뜩이나 제2황자와 데프론 후작이 손을 잡은 것도 거슬릴 텐데, 데프론 후작이 과거 크론 왕국의 반란 세력과 손을 잡은 데다가 흑마법사다?
커티스로서는 두 사람의 결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확실한가?”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커티스가 딱딱한 음성으로 물었다.
“확실하지 않다면 감히 이 자리에 나서지 못했겠지요.”
순간, 고요했던 응접실 안에 호탕한 커티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식적이라기보다는 진심으로 유쾌해하는 웃음소리였다.
제 외가가 되는 크론 왕국을 위협하는 세력과 데프론 후작이 손을 잡았다는 데도 그는 별로 불쾌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앓던 이를 뺀 것처럼 후련해 보였다.
“그래, 신중한 카르티아 후작이 확실한 정보 없이 섣불리 움직일 리가 없지.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정보를 캐낸 것을 보면 데프론 후작이 그대를 노린 것에 어지간히 앙심을 품은 모양이군.”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유리나는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특별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커티스가 제 턱을 문지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데프론 후작이 흑마법사라. 안 그래도 오스틴과 데프론 후작의 동태가 거슬리던 참이었는데 참 재밌게 됐어. 아바마마께서는 사냥 대회 이후 제국 어딘가에 남아 있을 흑마법사를 색출하겠다고 벼르고 계시거든. 이 사실도 모르고 내 아우는 데프론가를 얻었다고 기세등등해 있겠지.”
유리나와 카르티아 가문이 노린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흑마법으로 먼저 난리를 친 것은 데프론 후작이었으니, 그걸 그대로 이용해서 돌려주는 것.
“그렇다면 내가 2황자와 데프론가가 손을 잡았다는 명확한 증좌를 찾아 주면 그대들이 데프론 후작을 끌어내리겠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릭스가 대답했다.
즐거워하던 그가 돌연 표정을 굳혔다. 서늘한 눈빛이 유리나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군.”
“…….”
“카르티아가 내게 원하는 건 무엇이지?”
커티스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유리나의 턱을 살며시 그러쥐며 시선을 마주했다.
“황태자비 자리라도 원하는 것인가? 그대가 원한다면 내어 줄 수도 있어. 아니, 오히려 카르티아가 나를 지지하겠다면 그편이 나을 수도 있겠군.”
지금부터가 가장 중요한 이야기였다. 유리나는 최대한 커티스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카르티아가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비록 정치적 기반이 약하다고는 하나, 커티스는 충분히 제힘으로 황좌에 오를 능력이 있었다. 데프론 후작이 2황자와 손을 잡고 위협을 한다고 해도 카르티아가와 레이너드 없이 그 위기를 극복할 능력도 있었다.
설령, 위기가 오고 카르티아가와 레이너드가 큰 도움을 준다고 해도 그걸 티를 내서는 안 된다.
커티스는 날 때부터 타인 위에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 남자.
이쪽이 그를 도와준다는 느낌을 주기보다는 도움을 받는 느낌을 주는 것이 좋았다.
“제국의 태양을 모시는 이로서 황실을 교란시키려는 불온한 이들을 색출해 내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런 결속이 없더라도 카르티아는 황실을 지키는 검으로서 늘 그랬듯 언제나 전하의 뒤를 지켜 드릴 겁니다. 다만…….”
유리나는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커티스의 눈을 맞바로 쳐다보았다.
“다만?”
“레이너드 경이 흑마법사를 추적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는 것은 꼭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일개 기사로는 둘 수 없다?”
역시나 이런 쪽에서 그는 머리가 빨리 돌아갔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리나를 살피다가 흔쾌히 입을 열었다.
“그런 인재를 제국에 잡아 두려면 단순히 기사 작위만으로는 부족하겠지. 레이너드 경의 공헌은 나도 이미 알고 있는 바, 꼭 잊지 않고 그의 공을 치하하도록 하지.”
커티스가 움켜쥐었던 유리나의 얼굴을 놓았다. 유리나와 릭스는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하고 응접실을 나서기 위해 등을 돌렸다.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등 뒤에서 커티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카르티아에서는 아무것도, 심지어 황태자비도 원하지 않는다라……. 그렇다면 내가 그대를 원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지?”
유리나는 몸을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커티스는 어쩐지 제 목숨을 노리는 흑마법사일지도 모르는 데프론 후작의 이야기를 할 때보다 더 진지해 보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다소 뜨겁게 느껴졌다.
‘전생의 기억은 없어도 몸이 기억을 하는 걸까.’
‘유리나’와 연인 사이였던 커티스.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카리온을 얻기 위한 계획된 연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에 갖고 있던 감정의 찌꺼기가 기억이 없는 그의 몸에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지금 그녀는 ‘유리나’도 아니었고, 그녀가 사랑하는 건 커티스가 아니라 레이너드였다. 데프론 후작에게 맞서기 위해 최대한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그에게 맞춰 주었다고 해서 이것마저도 어영부영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건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레이너드에 대한 예의였다.
“전하께서 절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카르티아는 황실의 충실한 신하로서 황명을 거역할 수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유리나는 자신을 빤히 보는 커티스의 시선 속에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했다.
“그렇게 하신다고 한들 제 마음을 얻으실 수는 없을 겁니다. 전하께서는 그걸 원하십니까?”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는 건 곧 카르티아의 마음도 얻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이건 가만히 있어도 카르티아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데 왜 굳이 그런 선택을 할 거냐는 질문이다.
유리나는 재밌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그의 표정을 보며 확신했다.
그가 앞으로 유리나를 황태자비로 삼을 일은 없을 것이다. 황좌를 굳건히 하기 위해선 그녀를 황태자비로 삼는 것보다는 카르티아라는 뒷배를 얻는 것이 더 중요할 테니까.
이로써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사냥뿐이다.
* * *
모두가 잠든 깊은 밤, 레이너드는 남들 몰래 유리나의 침실로 공간 이동을 했다. 그가 올 것을 예상했는지, 유리나는 잠옷 위에 가벼운 카디건을 걸친 채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갔지만, 미세하게 요동치는 마나의 흐름을 느낀 모양인지 유리나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의 푸른 눈이 잠깐 커지더니 이내 예쁜 호선을 그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레이너드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유리나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예뻤다.
평소에는 새침한 고양이 같다가 웃을 때는 선하게 휘어지는 저 쌍꺼풀 진한 눈도, 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저 푸른 눈동자도, 늘 그가 듣고 싶은 말만 해 주는 저 입술도. 안 예쁜 곳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그녀는 참 예뻤다.
분명 보고만 있어도 같이 따라 웃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였는데, 이상하게 레이너드는 울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녀를 향한 제 감정을 자각했을 때 가슴이 벅차오르고 기뻐서 울고 싶은 기분하고는 달랐다.
초조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불안함. 분명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데도 그녀는 꼭 닿지 않는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멀어질 것만 같은 그런 불안함이 해일처럼 그의 몸을 덮쳤다.
그 불안감을 떨쳐 내기 위해 유리나를 꽉 끌어안아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품 안 가득히 온기가 느껴지고 꽃향기가 맡아지는데도 그녀가 멀게만 느껴졌다.
얼마 전, 카리온이 이야기해 준 꿈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생긴 증상이었다. 유리나는 그가 알고 있는 ‘유리나’가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니 제 마음이 변할까, 자신이 그를 떠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였다.
레이너드는 그녀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를 자극하는 건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카리온을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이유 없는 불안감이 아니라, 애처롭게 그녀를 바라보는 카리온의 시선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의 신경줄을 갉아먹는 건 그것 말고 다른 것이었다.
그는 유리나가 이미 다른 세계에서 왔고, 이곳은 그녀가 그 전에 읽었다던 소설 속 세계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에 한 번도 의문을 품은 적은 없었다.
죽음의 고통을 겪었을 유리나를 안타까워하기만 했지,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이 알지 못하는 원래의 ‘유리나 카르티아’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카리온을 보며 의문이 들고 만 것이다.
‘유리나가 계속 내 옆에 있을 수 있을까?’
유리나는 왜 자신이 죽지 않고 이곳에 왔는지, 그것도 왜 하필 ‘유리나 카르티아’의 몸으로 눈을 떴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녀는 이제 와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웃고 말았지만 그는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이유도 없이 왔다는 건 이유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거 아닐까. 어느 날 갑자기 원래의 ‘유리나 카르티아’가 돌아오는 건 아닐까. 유리나와 똑같은 얼굴과 눈으로 누구냐고 물어보며 자신을 밀어내는 건 아닐까.
그게 너무 걱정돼서 불안하여 요즘 계속 신경이 곤두선 느낌이었다.
“거기서 뭐 해? 이리 와.”
돌처럼 굳어서 가만히 있는 그를 향해 유리나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긋하고 부드러웠는데도 레이너드의 귀에는 그 말이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여신의 명령처럼 들렸다. 머리가 채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의 몸이 먼저 반응하여 그녀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옆에 앉는 대신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탔다. 조심스럽게 어깨를 밀자 유리나가 천천히 침대 위에 누웠다. 하얀 시트 위에 흐트러지는 금색 머리카락이 그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유리나가 싫다고 하여 불 하나 밝히지 않은 깜깜한 어둠 속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하얗게 빛이 나는 그녀의 피부가 햇빛 아래서 보는 것처럼 아주 잘 보였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열꽃처럼 피어난 붉은 자국이 그녀의 몸에 남았다. 하지만 아무리 새겨 넣어도 부족한 것 같았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고, 닿고 있어도 더 닿고 싶었다.
그녀가 어디에도 가지 못하도록 손목과 손목을 묶어 두면 이 갈증과 초조함이 사라질까.
“레이.”
그의 아래에서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던 유리나가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나 여기 있으니까 불안해하지 마. 난 네 곁에 있어. 어디에도 안 가.
레이너드는 그녀가 그런 식의 말을 건넬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초조해서 달려드는 그를 달래 주기 위해 유리나가 늘 하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가 예상한 것과는 달랐다.
“이번 일이 끝나면 가족들에게 우리 사이에 대해 다 말할 거야.”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쇄골에 입을 맞추다 말고 고개를 들어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방금 그녀가 한 말을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언젠가 유리나와의 관계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지만 그녀가 먼저 그 말을 해 줄 줄은 몰랐다. 그래서인지 기쁘다거나 마음이 벅차오른다기보다는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 대꾸를 하지 못하는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유리나가 레이너드의 목에 팔을 두르며 웃었다.
“그러니까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
그 한마디에 숨통이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멀게만 느껴졌던 유리나가, 잡힐 듯 잡히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던 유리나가 이제야 다시 제 품 안에 안겨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응.”
레이너드는 눈물을 삼키며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역시나 그녀는 늘 그가 원하는 말만 속삭여 준다. 마치 그의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 * *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마법으로 만든 작은 빛 구체가 뿜어내는 희미한 불빛에 의존하며 창살 너머의 소년을 살폈다. 얼마 전 베시로 위장하여 그녀의 방에 숨어들었던 흑마법사 소년은 두 팔과 두 다리를 마법 구속구로 결박당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자고 있는 걸까, 기절한 걸까.’
불순한 목적을 가진 침입자였지만 카르티아 후작은 그를 꽤 인도적으로 대했다. 그의 배후가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내기 위해 그를 고문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아직도 솜털이 남아 있는 듯한 소년의 하얀 얼굴이나 쭉 뻗은 팔다리에는 구속구에 쓸린 상처 외에는 상처나 멍이 없었다.
그렇다고 딸의 목숨을 노린 이에게 호화스러운 대접을 해 줄 리는 없었다. 며칠 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잔뜩 기운이 빠진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기절할 리가 없지.’
그렇다고 사방이 적인 곳에서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태평하게 자고 있을 리도 없었다. 유리나는 창살에 조금 더 다가가 겉모습만 보면 참 앳되고 약해 보이는 소년을 보았다.
‘대체 어쩌다가 흑마법을 배우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리나는 그를 보며 카리온이 레이너드에게 했다던 말을 떠올렸다.
―카르티아에서 잡아 두고 있는 그 아이가 데프론 후작의 발목을 잡게 될 겁니다.
카리온의 말에 따르면 이 아이는 데프론 후작이 아끼는 아이로, 꽤나 실력 있는 흑마법사라고 했다. 흑마법도 일반 마법처럼 타고난 사람들이 있어서 아무나 배울 수 없다고 한다.
원래 데프론 후작은 카리온에게 흑마법을 가르치려고 한 모양이었지만, 베아투스인 탓인지 그의 몸에선 흑마법을 거부했다. 그 후 데프론 후작은 제자를 찾기 위해 한동안 열심히 돌아다닌 듯했지만 찾아낸 것은 이 아이 하나뿐이었다.
‘일반 마법보다 흑마법에 재능을 갖고 태어난 아이가 더 적다고 했나.’
게다가 남들 이목을 피해 조심히 움직여야 했으니 한 명을 찾은 것도 꽤 큰 수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가 바로 사냥 대회 때 늑대에게 주술을 건 장본인이었다. 이건 레이너드와 데이브가 늑대의 몸에서 나온 흑마법의 매개체와 소년의 마나를 비교해서 알아낸 것이었다.
‘데프론 후작이 엄청 초조하기는 했나 보네.’
아끼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어찌 됐든 하나밖에 없는 제자를 보낼 정도면 이번 계획을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2황자하고도 이야기가 끝났을 터.
남은 건 기다리느냐, 아니면 먼저 공격하느냐의 선택이었다.
‘시간이 없어.’
커티스 또한 공격당하는 것보다는 먼저 공격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니 지금은…….
유리나는 창살 앞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레이너드가 위험하다며 급하게 말렸지만 그녀는 제 팔을 잡은 그의 손을 떼어 내며 창살 앞에 바짝 섰다.
“안 자고 있는 거 다 알아.”
소년의 머리가 움찔거렸다. 그 바람에 그의 팔도 조금 움직이며 쇠사슬이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이렇게 입을 다물고 있어 봤자 네게 도움이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이제 그만 누가 시켰는지 이야기를 하는 게 어때?”
“…….”
“네가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데프론 후작의 짓인 걸 모를 것 같니?”
감겨 있던 소년의 눈이 순간 번쩍 뜨였다. 사지만 결박되지 않았더라면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조를 것 같은 기세였다.
‘이런 건 데프론 후작이랑 비슷하네.’
유리나는 적의를 가득 담은 시선이 제 얼굴에 송곳처럼 꽂히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들어 올렸다.
“네가 아무리 그래 봤자 해결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이제 그만 포기하고 모든 걸 말하는 게 어때?”
“웃기지 마!”
앙칼진 목소리가 습하고 어두운 감옥 안에 울려 퍼졌다.
“네까짓 게 뭘 안다고! 네가 뭘! 고작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유리나는 발끈해서 마법을 쓰려는 레이너드의 팔을 재빨리 잡으며 차분히 반문했다.
“그럼 너는?”
“뭐?”
“늑대를 이용하고, 죄 없는 사람까지 납치해 가면서 날 노렸던 너는? 너야말로 얼마나 잘났다고 그렇게 큰 소리야?”
차마 이 말에까지는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는지 소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그 기세가 죽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전히 날카로운 시선이 유리나를 향했다.
“그러니 선택해.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말하고 조금이라도 선처를 바랄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죽을 건지.”
소년이 유리나에게 달려들기 위해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러나 팔을 결박하고 있던 쇠사슬 길이가 짧은 탓에 얼마 움직이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는 팔을 등 뒤로 뻗으며 얼굴을 최대한 앞으로 내밀었다.
“웃기지 마. 내가 여기에서 나가기만 하면!”
뿌득, 이 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너네 같은 것들은 한 방에 처리할 수 있어어어!”
“싫다면 어쩔 수 없네.”
유리나는 레이너드에게 눈짓했다. 레이너드는 발악하는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유리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순식간의 주위 풍경이 바뀌면서 두 사람은 유리나의 침실 한가운데에 도착했다.
“정말 괜찮겠어?”
“응.”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준 아티팩트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무슨 마법이든 한 번 쓸 수 있는 목걸이와 레이너드에게 이동을 할 수 있는 팔찌, 그리고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반지까지. 목욕을 할 때도 잘 때도 빼먹지 않고 하고 있던 탓에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난 어머니에게 가 있을 거야.”
유리나는 흑마법사 소년을 보러 가기 위해 걸쳤던 외출용 코트를 벗은 뒤 실내용 가운을 집어 들었다. 레이너드가 가운을 입는 것을 도와줬다. 그의 입술이 초조한 듯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떨어졌다.
“다른 데 가지 말고 꼭 후작 부인 침실에 붙어 있어.”
“알겠어. 너야말로 조심해야 해.”
유리나는 뒤를 돌아 까치발을 하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가능하면 데프론 후작과 접점을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레이너드를 처음 데려왔던 순간부터 최악의 경우 그가 자신에게 오는 위험을 막아 줄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길 바랐는데.’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늘 그랬던 것처럼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비비적거렸다. 레이너드의 손이 슬금슬금 올라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유리나.”
낮은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경직되어 있었다. 유리나는 덩달아 그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긴장했다.
“정말 이번 일 끝나면 우리 사이 다 발표할 거야?”
얘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지금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 건가 싶어 유리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레이너드가 잔뜩 굳은 얼굴로 그녀의 허리를 더욱 바짝 끌어당기더니 다시 물었다.
“정말…… 그럴 거야?”
이 심각한 상황에서 신경 쓰고 있는 게 데프론 후작과 흑마법사가 아니라 자신들의 관계라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레이너드의 얼굴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유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니까 무사히 돌아오기만 해.”
“알겠어.”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입에 살짝 입을 맞춘 뒤 방을 나왔다.
어두컴컴한 복도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오늘 밤에는 방에서 나오지 말라는 집사장의 지시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카르티아 후작과 유리나의 세 오빠들은 지금쯤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그녀는 후작 부인의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한 것인지 후작 부인이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경계를 했다.
유리나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그녀의 품에 안겼다.
“어머니.”
“유리나니?”
보드랍고 따뜻한 손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느낌이 났다. 7년 전에는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던 손. 그러나 지금은 이 손이 어색하기는커녕 영원히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자신이 ‘유리나’에 빙의를 하지 않았더라면 싸늘하게 굳어 버렸을 이 다정한 손.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녀는 아이처럼 후작 부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악몽을 꾸었나 보구나.”
악몽이라면 악몽일 것이다. 유리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엄마가 있잖니. 네 아버지도, 오빠도, 그리고 레이너드도 있고.”
네. 목이 막히는 느낌이 나서 고작 그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오늘은 엄마랑 자자꾸나.”
그리고 잠시 뒤, 저택에 귀가 따가울 정도로 커다란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흑마법사 소년이 감옥에서 탈출했다는 신호였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유리나의 몸을 이불로 덮어 주며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후작 부인의 손도 조금씩 떨렸다.
“아무래도 잠들기 힘든 밤이 될 것 같구나.”
* * *
자려고 침대에 누운 지 벌써 한 시간이 넘게 지났지만 리디아는 좀처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비단 오늘만의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며칠 전, 정확히는 다친 카리온과 함께 카르티아 저택에 다녀온 뒤부터 제대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자려고 노력하려면 할수록 자꾸만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아버지가 그런 걸까?’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묻지는 못했던 말.
정말 아버지께서 카르티아 영애의 하녀를 해코지하려고 했던 건가요?
데프론 후작을 볼 때마다 매번 갈등을 했지만 리디아는 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묻고자 하던 말이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리디아는 전부터 아버지인 데프론 후작이 카르티아가에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이유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늘 자신에게 황후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유리나는 황후가 될 인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정치적인 일에 관련됐다고 생각했다.
최근 들어 데프론 후작의 행동을 보면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리디아는 그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냥 이대로 모른 척하고 지나가도 될 일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차라리 못 본 척을 하고 넘어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유리나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그녀가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눴던 또래 친구. 그동안 카리온이 있기는 했지만 동성 친구가 주는 느낌은 달랐다.
유리나가 그녀를 친구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리디아는 유리나와 지내는 그 짧은 시간이 좋았다.
그러니…….
리디아가 결심을 하고 침대에서 빠져나올 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리디아는 순간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그보다는 먼저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깜짝 놀라서 몸을 비틀며 손을 떼어 내려고 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리디아는 저항하던 것을 멈추고 눈만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입을 막고 있는 손길이 익숙했다.
그녀의 얼굴을 반 이상 가릴 수 있을 정도로 큰 손이었지만 거친 기사의 손과 달리 부드럽고 따뜻한 손.
‘카이?’
확인을 위해 조심히 몸을 돌리자 입을 가리던 손이 사라졌다. 어느덧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카리온의 얼굴이 들어왔다. 깊은 밤인데도 그는 실내복 차림이 아니라 외출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어디 급하게 나가기라도 하는 걸까. 그래서 인사를 하러 오기라도 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보다는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가 그만큼 자신을 신경 써 주고 있는 것 같아서.
“어디 가는…….”
차분히 입을 열었던 리디아는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는 카리온의 행동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제야 그녀는 그가 가벼운 마음으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상해.’
카리온은 어릴 적부터 늘 그녀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녀가 한 발자국 다가가려고 하면 두 발자국 멀어지는 것이 바로 그였다.
7년 가까이 한 저택에서 지냈으면 벽을 허물고 친해지는 것이 정상인데도 그는 그녀에게 옆자리를 내어 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사적으로 둘만 있는 일도 드물었다. 이렇게 밤에 함께 있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그랬던 카리온이, 이 밤중에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의 방에 다른 사람 몰래 오다니?
상대가 카리온이라 해코지를 당할까 봐 겁이 나지는 않았지만, 다른 의미로 느낌이 이상했다. 왠지 등줄기가 서늘하고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카리온의 얼굴이 불길할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원래도 표정이 거의 없어서 저택 사람들에게 서늘하다거나 무섭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적어도 리디아만은 미세하게 변하는 그의 표정에서 그의 기분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은…….
리디아는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소리 죽여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아가씨.”
아가씨 말고 리디아라고 불러 달라는 말은 목 속으로 꿀꺽 삼켰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할 생각은 아니지만 그녀는 늘 카리온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지 상상하고는 했다.
친밀함과 애정을 담아 내뱉는 이름.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그렇게 부를 때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무슨 일인데 그래?”
“절 믿으십니까?”
그 말에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당연히 믿지.”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카리온이 언성을 잠깐 높였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리디아는 그를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그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녀가 해 줄 답은 똑같았다.
그녀는 그를 믿는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강하게. 아버지인 데프론 후작조차 이렇게까지 의지하고 믿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고요하던 복도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밤중에 하녀들이 일어나 복도를 걸어 다니는 소리나 수다를 떠는 일상적인 소리와는 달랐다.
사람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다급한 발소리와 무언가를 급히 지시하는 목소리. 분명 문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도 리디아는 그들의 긴장감이 피부에 와닿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흔치 않은 어수선함과 마찬가지로 더더욱 흔치 않은 카리온의 긴장한 모습. 리디아가 심장이 빠르게 뛰어오는 것을 느끼며 그의 팔을 잡았을 때였다.
“아가씨, 리디아 아가씨!”
문고리가 달칵달칵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전속 하녀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문을 잠가 두지 않았는데 문은 열리지 않고 애꿎은 문고리만 계속 달칵거렸다.
리디아가 문을 열어 주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카리온의 손이 그녀의 차갑게 식은 손을 덥석 잡았다.
“카이?”
“리디아.”
복도에서 일어나는 소란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찌르르 울렸다. 그러나 그 점을 기뻐할 새도 없이 카리온이 다시 물었다.
“절 믿으십니까?”
“아가씨! 안에 계세요?”
꼭 그녀의 대답을 막기라도 하듯 하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리디아는 쉴 새 없이 노크 소리가 들리는 문을 한 번, 진지한 카리온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머리와는 달리 입은 다른 말을 내뱉었다.
“응, 믿어. 카이니까.”
생각도 거치지 않고 나온 그 말이 아마 그녀가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진심이었을 테다. 좀처럼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카리온이 어쩐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더 바짝 다가왔다.
아니, 실제 그의 표정은 크게 변화가 없었다. 그럼에도 리디아의 눈에는 그가 마치 마른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어디로 갈 거냐는 질문도 필요 없었다. 리디아는 그가 내민 손을 망설임 없이 잡았다.
* * *
카르티아 저택에서 빠져나온 소년은 달리고 또 달렸다. 분명 구속구를 부수고 카르티아 저택을 나서자마자 이동 마법을 썼는데 은신처가 아니라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을 하고 말았다.
또다시 마법을 쓰려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자꾸만 의도했던 곳과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직접 달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구속구를 깨는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혹은 그가 구속구를 부술 때를 대비하여 구속구에 흑마법을 교란할 수 있는 마법 같은 것을 걸어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기분 나쁜 낯짝을 가진 베아투스가 제 몸에 무언가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흑마법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했으니까.
‘망할…….’
소년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쉴 새 없이 달렸다.
그리 오래 달리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가슴 밑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쓰리고 아팠다. 어릴 적부터 마법에만 치중하여 체력 단련 같은 건 하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이미 그가 경계와 구속구의 마력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감옥을 빠져나왔을 때부터 카르티아 저택에선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시끄러운 경보가 울렸다. 지금쯤 카르티아가의 기사들이 말을 타고 그를 추격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더라면 진작 체력 좀 길러 놓는 건데. 마법만 믿고 산 탓에 이 꼴이 되었다. 젠장, 젠장, 젠장. 그는 입 속으로 욕지거리를 곱씹었다.
지난 초봄에 있었던 사냥 대회에서 늑대에 찢긴 베아투스를 보며 얼마나 비웃었던가.
흑마법사인 자신은 사람들 앞에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하는데 그 베아투스 녀석은 크론 왕국에서나 제국에서나 천재니, 세기의 마법사니 칭송받는 게 같잖고 눈꼴 시렸던 참에 참 즐거운 구경거리였다.
넌 그냥 그렇게 내 먹잇감이나 되어 버려. 그렇게 낄낄거렸는데 어쩌다 제 신세가 이렇게 되었나.
‘가만 안 둬.’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잠시 뒤로 물러나는 것뿐이다.
지금은 비록 마력을 억제당해서 이렇게 빌빌거리고 있지만, 잠시 은신처에서 몸을 숨기고 기력을 회복한 뒤에 그 망할 베아투스 녀석의 목을 갈기갈기 찢어 줄 거다. 그리고 사냥 대회 때 처리하지 못했던 그 여자의 목도 부러뜨려야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도 다 그 여자 때문이니까.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마치 자신을 벌레 보듯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던 레이너드의 시선을 떠올리며 은신처로 발을 옮기던 소년은 문득 앞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속도를 늦췄다. 언뜻 말발굽 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설마 벌써 여기까지 왔나.’
은신처까지 가는 길은 여기 말고도 있다. 소년은 제 앞을 가로막은 인기척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할 새도 없이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소년은 또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다시 방향을 틀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서너 번 정도 더 반복된 다음에야 그는 은신처가 포위당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심지어 카르티아가에서 추격을 한 것인지 등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먼 곳에서 언뜻 들리는 말 울음소리에 소년은 하는 수 없이 은신처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일단은 어디든 가서 몸을 숨기며 마법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추격해 오는 속도를 보아하니 도무지 뜀박질로는 도망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거기는 가고 싶지 않았는데.’
이대로 다시 잡히느냐, 아니면 가능하면 가지 않으려고 했던 곳으로 이동을 하느냐.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감금만 당했지만, 이번에 잡히면 배후를 말하라며 모진 고통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는 아예 입술을 짓씹다가 다시 마법을 썼다. 역시나 이번에도 원했던 곳으로 이동하지는 못했다.
소년은 거대한 나무가 빽빽이 자란 숲을 한번 둘러보다가 이곳은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 뛰고 호흡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부엉이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울려 퍼지는 캄캄한 숲속에서 숨을 고르다가 어느 정도 진정 됐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원했던 곳은 아니었지만 꽤 가까운 곳으로 이동을 한 모양이었다. 터벅터벅 걸어가던 소년은 저 멀리 보이는 작은 별장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저곳은 데프론 후작의 별장이었다. 대외적으로는 데프론 후작의 소유라고 알려지지 않은 데다가 사람이 거의 오지 않는 숲속에 있어 이곳을 아는 사람은 데프론 후작가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능하면 이곳으로 오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가 있나. 게다가 별장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아하니 이곳은 들키지 않은 듯싶었다.
별장에는 간단히 지낼 수 있는 생필품이 준비되어 있다고 들었으니 당분간 이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다음에 데프론 후작에게 연락을 넣자.
그리고 그다음엔…….
‘두고 봐.’
레이너드의 얼굴을 떠올린 소년이 씩씩거리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던 순간이었다. 그는 안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을 보고 얼굴을 와락 구겼다.
“생각보다 늦게 왔네.”
달빛이 은은하게 흘러들어 오는 창가에 서서 남자가 웃었다. 고생이라고는 전혀 해 본 적이 없는 것같이 곱상하게 생긴 얼굴로, 그러나 전혀 순수하지 않은 섬뜩한 눈빛으로.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좀 더 일찍 오지 그랬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와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오는 날카로운 금속의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더라도 중무장한 기사들에게 포위당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눈동자를 보며 소년은 이번엔 소리 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할…….”
이 모든 것이 카르티아의 함정이란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증거는 이걸로 충분하군. 그러나 계기가 필요해.
카르티아가에서 넘긴 자료를 훑은 커티스는 그렇게 말했었다. 누가 제국을 이끌어 나갈 황태자 아니랄까 봐 오만한 목소리였다.
―이런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아나? 증거? 증언? 다 틀렸어. 가장 중요한 건 명분이다.
그러니 황실의 기사들, 더 정확하게는 커티스의 수하들이 데프론 후작가의 대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갈 명분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그간 카르티아가에서 교육을 받고 크론 왕립 아카데미에서 에이든, 네이선을 비롯한 귀족들과 함께 생활을 하며 자랐어도 레이너드는 커티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미 증거는 있으니 잡아들이면 되는데 왜 그런 수고까지 해야 하나. 눈앞에 뻔히 진실이 보이는데도 그깟 명분이 필요한가. 그냥 증거를 들이밀며 잡아 오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커티스가 덧붙였다.
―제국 역사상 반역으로 처형된 사람들이 정말로 모두 반역을 꾀했다고 생각하나? 실제로 반역을 꾀한 사람보다는 정쟁의 희생양들이 더 많겠지. 사실이 어떤가보다는 귀족들을 설득할 수 있는 명분이 중요하다.
추가 설명을 들었는데도 레이너드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었다. 솔직히 그는 마음 같아서는 혼자라도 데프론 후작가에 쳐들어가서 후작의 목을 비틀고 오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유리나를 지킬 수만 있다면, 그녀가 안심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만약 제멋대로 굴었다가 일이 잘못되면 유리나의 곁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본능대로 데프론 후작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가 도망자 신세가 되면 어떡하겠는가. 쫓기는 건 상관없었지만 유리나의 얼굴을 못 보는 것과, 자신 때문에 그녀에게 피해가 가는 건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그러니 유리나의 곁에 계속 남아 있으려면 이 귀족 사회에 완벽하게 적응을 해야지 어떡하겠나.
그래서 레이너드는 커티스의 말에 의문을 표하는 대신 그가 말한 ‘계기’를 만들기 위해 유리나를 비롯한 카르티아가의 사람들과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때 의외의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 카리온이었다.
―카르티아에서 잡아 두고 있는 그 아이가 데프론 후작의 발목을 잡게 될 겁니다.
카리온의 말에 따르면 유리나를 노렸던 그 아이는 데프론 후작의 유일한 흑마법사 제자라고 했다. 사냥 대회 때 유리나를 노렸던 늑대에게 흑마법을 건 것도 바로 그였다.
실력은 꽤 뛰어나지만 아직 어리고 자만심이 많은 데다가 어릴 적부터 숨어 지낸 탓에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고 했다. 좋게 말하면 순진하고, 나쁘게 말하면 어리석은 아이.
데프론 후작은 회심의 습격이라고 생각하고 숨겨 두었던 아이를 유리나에게 보낸 모양이지만, 카르티아가에서 그를 포획하고 있는 한 승기는 이쪽에 있었다.
과연 데프론 후작이 하나밖에 없는 제자를 구하기 위해 움직일까. 유리나도 레이너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데프론 후작의 성격이라면 차라리 소년을 죽여 증거를 없애려면 없앴지 그를 구해서 꼬리를 잡힐 빌미를 주지 않았을 테다.
그래서 데프론 후작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소년을 이용하여 그가 후작의 지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자 한 것이다.
데프론 후작가의 사정을 잘 아는 카리온이 없었다면 힘든 계획이었을지 모르나, 카리온의 도움 덕분에 비교적 순탄하게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토끼 사냥을 하듯 소년이 머무는 은신처를 포위하고 그가 데프론 후작가와 관련되어 있는 장소로 이동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가는 것이 주된 계획이었다.
카리온이 미리 언질을 준 덕분에 데프론가에서 이목을 피해 마련한 별장의 위치를 파악해 두었다.
그 별장의 주인이 데프론가의 집사라는 것과 그 집사가 데프론 후작의 지시를 받고 별장을 구입했다는 내용은 커티스가 파악했다.
커티스가 신호를 보낸 오늘 밤, 레이너드는 유리나와 함께 소년을 찾아갔을 때 그의 마력을 억제하던 구속구를 미세하게 조정했다. 소년이 의심하지 않도록 소년이 최대치로 마법을 끌어 써야 간신히 부술 정도로.
소년을 황실 기사단으로 넘기지 않고 아직까지 카르티아 저택에 두었던 것도 다 이번 일을 위해서였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소년은 레이너드가 의도한 대로 움직였다. 구속구를 부수고 도망치더니 황실 기사단이 대기 중인 은신처로 이동 마법을 썼다가 그나마도 여의치 않자 레이너드와 카르티아가의 기사들이 숨어 있던 별장으로 왔다.
그가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덜미를 잡을 수 있었을 테지만 멍청한 소년 덕분에 일을 좀 더 쉽게 처리할 수 있게 됐다.
“너, 너, 너어! 이 자식!”
덫에 빠졌다는 것을 눈치챈 소년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손에 마나를 모았다. 레이너드가 마법을 쓸 때와 달리 불길한 느낌을 주는 검은 회오리가 소년의 손바닥 위에서 휘몰아쳤다.
위험함을 감지한 기사들이 소년에게서 떨어져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오로지 레이너드만이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가 한 발자국씩 다가갈 때마다 소년의 손에 모인 마력이 약해지더니 코앞에 다다랐을 땐 아예 검은색 회오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레이너드는 눈을 부릅뜨는 소년을 향해 고저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말했을 텐데. 너희의 마법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고.”
“이 자식이!”
마법이 통하지 않자 소년은 직접 레이너드에게 달려들었다. 레이너드는 제 목을 조를 기세로 뻗은 소년의 팔을 잡고 그대로 그를 바닥에 내던졌다.
소년의 가슴을 발로 꽉 누르자 소년이 얼굴을 구기며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소년은 손톱을 세워 바닥을 긁으며 몸부림을 쳤다. 그럴 때마다 레이너드는 소년의 가슴을 밟고 있는 발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마나를 불어넣자 상처가 남은 소년의 손목과 발목에 다시 구속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구속구가 완전히 채워졌을 때 레이너드는 소년에게서 물러났다. 그사이 소년은 마력이 충돌한 충격 때문에 기절하고 말았다.
레이너드는 소년을 결박하라고 지시하는 에드윈에게 눈짓을 해 보인 뒤 별장 밖으로 나와 마법으로 검은 하늘을 향해 빛을 쏘아 올렸다.
이제 남은 건 데프론 후작이었다. 그는 저 멀리 데프론 후작가가 위치한 곳을 바라보다가 이동 마법을 썼다.
* * *
카르티아 후작 저택에는 쥐 죽은 것처럼 고요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유리나와 베시, 그리고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있는 침실에도 정적이 감돌았다.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당부한 대로 후작 부인의 침실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곳은 카르티아 저택에서 유일하게 레이너드가 흑마법이 통하지 않는 방어 마법을 쳐 준 곳이었다.
저택 전체에 방어 마법을 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흑마법에 저항할 수 있는 마법이 쉽지가 않아서 이 침실에만 보호 마법을 걸어 놓았다.
유리나는 초조한 듯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잘 하고 있을까.’
시간상 아마도 레이너드는 지금쯤 흑마법사 소년을 다시 포획하고, 커티스가 보낸 황실 기사단은 데프론 후작가로 향했을 것이다. 이미 계획을 철저하게 세운 만큼 특별히 무언가가 잘못되지 않는다면 별 탈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레이너드를 비롯한 그녀가 아끼는 사람들은 무사할 것이다.
유리나는 황실 기사단과 함께 작전에 참여한 릭스와 에드윈, 카르티아 저택에 남아 기사들을 통솔하고 있는 카르티아 후작과 저스틴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이고 있는데 자신은 레이너드가 방어 마법을 쳐 둔 후작 부인의 침실에서 안전하게 있다는 사실이 참 한심했다.
‘내가 더 능력이 있었더라면.’
검술이나 마법 실력이 좋아 이번에도 레이너드를 도와 같이 움직였다면 좋았을 텐데. 자꾸만 그런 아쉬움이 들었다.
사실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도 레이너드와 다른 가족들이 그녀가 움직이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데프론 후작이 가장 노리는 게 바로 그녀였다. 만약 그가 최후의 발악을 한다면 제일 먼저 노리는 건 그녀일 테다.
그러니 괜히 나섰다가 데프론 후작에게 잡혀 인질이 되거나 해코지를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곳에서 얌전히 있는 것이 더 나았다.
머리로는 그걸 아는데 밖에서 움직이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에 돌덩이가 앉은 것처럼 무거우면서 자꾸만 생각이 부정적으로 흘러갔다.
“괜찮을 거란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유리나의 등을 애정 어린 손길로 문질렀다.
“엄마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열일곱 살. 아직 성인은 아니지만 부모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닌데도 후작 부인은 유리나를 어린아이 다루듯이 다독였다. 그녀는 어머니로서 딸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유리나는 오히려 자신이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다시는 잃지 않을 거야.’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평화로운 일상. 7년 전,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놓쳤던 그 소중한 보물을 이번엔 잃고 싶지 않았다.
“네. 괜찮을 거예요.”
유리나는 애써 그녀에게 웃어 보이며 다시 창밖을 살폈다. 카르티아 후작 저택과 데프론 후작 저택은 같은 수도 안에 있지만 저택에서 서로의 저택이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데프론 후작 저택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데도 왠지 밖이 소란스러운 것 같았다. 유리나는 살짝 땀이 배어난 손바닥으로 목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레이너드는 모든 일이 끝나면 그녀에게 돌아온다고 했다. 그러니 그가 돌아올 때까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주위 상황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고요했던 저택에 폭발음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났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데 유리나는 꼭 무언가에 확 밀쳐진 것처럼 충격을 받고 침대에서 떨어졌다.
“유리나!”
후작 부인의 새된 비명을 시작으로 저택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유리나는 바닥에 깔린 카펫을 꽉 움켜쥐었다. 온몸이 거대한 돌멩이에 짓눌린 것 같은 압박감이 들면서 내장이 비틀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목 안쪽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올라오는 느낌이 드나 싶더니 입술 사이로 울컥 피가 흘러나왔다.
“유리나!”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달려와 유리나를 안아 들었다. 코앞에 있는 그녀의 얼굴이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보였다.
“베시, 얼른! 얼른 사람들을 불러오렴!”
“네? 하지만…….”
유리나를 보며 발만 동동 굴리던 베시는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재촉에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레이너드가 이곳으로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 말라던 유리나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리나는 베시를 보며 간신히 고개를 살짝 저었다. 몸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칼로 몸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베시가 나가지 못하도록 말려야 했다.
혹시라도 나갔다가 베시가 봉변이라도 당하면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은 움직임이었는데도 그녀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베시가 입술을 꽉 깨물며 그녀 옆에 주저앉았다. 유리나의 손을 잡아 주는 베시의 손은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잠깐 사이에 이마와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눈을 뜨려고 노력해 보아도 자꾸만 눈앞이 흐려졌다. 유리나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불길할 정도로 바람이 휘몰아치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마법진이 있을 텐데…….’
아무리 레이너드가 이곳에 없다고 하더라도 이렇게나 쉽게 마법진을 뚫고 들어올 수는 없을 텐데. 게다가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이 멀쩡한 것을 보니 데프론 후작이 직접 온 것 같지도 않았다.
‘설마 저주인가.’
데프론 후작의 사주를 받고 제 피를 가져갔던 에밀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때 피 묻은 귀걸이 말고도 다른 것을 넘겼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하는 중에도 계속해서 울컥울컥 피가 목을 타고 넘어왔다. 이대로 가면 정말 끝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도 손가락 하나 제 뜻대로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 언젠가 느꼈던 죽음의 그림자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흐릿한 시야에 걱정스러운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얼굴 대신 다른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죽음의 공포보다 그 아이를 혼자 둘 수 없다는 공포가 더 강렬해졌을 때, 유리나는 간신히 목걸이를 쥘 수 있었다.
눈이 저절로 찌푸려질 정도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는 순간 무언가 툭 끊기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 * *
황실 기사단이 점령한 데프론 후작가는 이미 어수선했다. 이곳저곳에서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리고, 저택이 불에 타들어 가는 매캐한 냄새가 났다.
커티스가 보낸 기사단은 작정을 하고 왔는지 맹렬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육안으로 보더라도 데프론 후작가의 기사들이 밀리는 것이 훤히 보였다.
후작가로 이동한 레이너드는 이런 어수선함을 뒤로한 채 저택 안으로 향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데프론 후작.
언젠가 보았던 그 얼굴을 생각하니 저절로 이가 갈렸다. 그가 그동안 유리나에게 해 온 짓을 생각하면 그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려도 부족할 것 같았다.
레이너드는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있지?’
데프론 저택으로 이동하자마자 흑마법을 볼 때처럼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 데프론 후작은 분명 이 저택에 남아 있다. 남아서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설마 또 시간을 돌리려고?’
이번 일을 시작하기 전, 유리나와 했던 이야기가 있었다. 자신의 계획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것을 깨달은 데프론 후작이 또다시 시간을 돌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곁에서 그녀를 지키고 싶었음에도 직접 데프론 후작을 찾기 위해 이곳을 온 것이다.
혹시라도 그가 시간을 돌리려고 한다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레이너드, 혼자였으니까.
그런데 상황을 보아하니 우려가 현실이 되어 가고 있는 듯했다.
‘절대로 그렇게 못 해.’
레이너드는 유리나가 원래 살던 곳에서 죽고 이 세계로 온 것이 데프론 후작이 시간을 되돌렸기 때문은 아닌가, 하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런데 만약 이대로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혹시 유리나와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레이너드는 끔찍한 가정에 몸을 떨며 저 멀리 보이는 릭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불길한 흑마법의 기운을 쫓아 도착한 곳은 저택의 지하였다.
귀족가 저택의 지하는 보통 식료품 등을 저장하는 창고로 쓰인다. 그러다 보니 고용인들이 멋대로 식료품을 훔쳐 가지 않도록 입구에 걸쇠를 걸어 놓고 출입을 제한한다.
그런데 데프론가 저택의 지하 풍경은 달랐다. 문이 잠겨 있긴 했지만 열쇠로 풀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레이너드는 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기운을 느끼고 문에 손바닥을 댄 채 마나를 불어 넣었다.
문에 깃들어 있던 마나와 그가 내보내는 마나가 충돌하며 끼기긱 소리와 함께 문에서 불꽃이 튀었다. 조금 더 마나를 불어 넣자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데이브의 연구실이나 아카데미의 교수 연구실에서 맡아 보던 약초와 약품 냄새가 확 풍겼다. 그러나 훨씬 더 강한 향에 레이너드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미미하게 굳히며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기분 나쁜 느낌이 더 강해졌다.
본능을 따라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에 들어갔을 때, 레이너드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바닥에 가득 그려져 있는 마법진이었다. 피를 이용하여 그리기라도 한 듯 마법진은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데프론 후작은 그 마법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가 올 것이라고 예상했는지, 데프론 후작이 갑작스러운 레이너드의 등장에도 놀라지 않고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군.”
이상할 정도로 여유로운 태도였다. 밖에서는 지금 황실 기사단들이 제 숨통을 틀어쥘 기세로 달려오고, 바로 눈앞에는 레이너드가 서 있는데 그는 긴장하거나 당황한 기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태연자약한 태도에 오히려 레이너드가 긴장을 해서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수작이지?’
아무리 봐도 제 계획이 틀어진 사람의 태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또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소린가.
레이너드가 데프론 후작이 갖고 있는 패가 무엇일지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살피는데 데프론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그러게 예전에 내가 손을 내밀었을 때 나한테 왔으면 이런 일은 당하지 않았을 것을.”
“허튼수작 부리지 마. 그날 당신을 따라가지 않은 건 후회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레이너드는 7년 전 보았던 데프론 후작의 눈빛을 아직도 기억했다. 유리나는 자신이 고아원에서 그를 찾았던 것이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거였다며 미안해했다.
하지만 레이너드의 생각은 달랐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유리나는 기뻐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건 자신이 레이너드를 만나 기쁜 게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바꿨다는 기쁨이었겠지만, 적어도 그녀는 아이처럼 순수하게 기뻐했다.
반면 데프론 후작은 달랐다. 레이너드를 처음 보았을 때, 귀족답지 않게 우악스러운 손길로 그의 얼굴을 잡고 살피던 데프론 후작의 얼굴엔 탐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번뜩이는 황금빛 눈동자에는 정체 모를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당시 열세 살밖에 되지 않았던 어린 레이너드는 그 감정의 정체를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를 따라가면 유리나가 주었던 아늑하고 평화로운 삶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러니 제 선택에 한 번도 후회하지 않는다. 감정이 동요하지 않으니 레이너드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아직 시간이 필요한가 보네.’
기껏 마법진까지 다 그려 놓고 이렇게 영양가 없이 시시덕거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마법을 쓰는 데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었다.
릭스가 어느 정도 상황을 정리하고 쫓아왔는지 사람들이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레이너드는 서서히 데프론 후작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데프론 후작이 섬뜩할 정도로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
“네 주인에게 가 보지 않아도 되겠나.”
주인? 설마 유리나를 말하는 건가. 유리나의 이야기에 잠시 동요를 하긴 했지만 레이너드는 심호흡을 하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그를 교란하기 위한 데프론 후작의 수작일 테니까.
그러나 그다음 순간 일어난 일에 레이너드는 도무지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정말 가 보지 않아도 되겠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툭,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의 끈이 끊어지며 밑으로 떨어졌다. 카르티아 저택에 남아 있는 유리나가 마법을 썼다는 신호였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잔뜩 금이 가 있는 팬던트를 보자마자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등 뒤에서 릭스가 이끄는 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레이너드는 릭스가 들고 있는 검을 빼앗아 데프론 후작에게 달려들었다.
여유롭던 데프론 후작의 얼굴이 한순간에 평정심을 잃고 일그러졌다. 레이너드가 그의 어깻죽지에 검을 박아 넣는 순간 검에서 퍼져 나온 밝은 빛이 어두컴컴한 지하실 안을 채웠다.
* * *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엄마는 차갑게 식은 손을 잡으며 그 말만을 계속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정신이 흐려지는 중에도 세나는 엄마가 왜 그렇게 미안해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가 왜 미안해, 내가 미안하지. 난 괜찮아.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
그 말이 머릿속에 어렴풋이 맴돌았으나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이라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괜찮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밖에 없었다.
괜찮아, 괜찮아. 난 정말 괜찮아.
그 한마디가 엄마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러나 ‘유리나’가 되어 새로운 세계에 온 뒤에도 가끔 엄마에게 괜찮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지 못한 것이 내심 마음에 응어리로 남았었다.
“……리나? 유리나, 눈 좀 떠 보렴.”
아, 전에 들었던 것과 비슷한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목소리는 달랐는데 그 속에 담긴 애정과 안타까움은 지난 생의 엄마의 목소리와 별다를 것이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목이 콱 막힌 것처럼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안해. 미안해, 유리나.”
이번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부드러운 청년의 목소리. 동시에 툭, 툭, 툭. 무언가가 얼굴 위로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차갑게 식은 손에도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손이 닿았다.
왠지 저 목소리의 주인을 혼자 놔두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없어도 어떻게든 살아가겠지만 자신이 세상의 전부라는 그 여린 아이를 혼자 두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유리나는 계속해서 얼굴 위로 쏟아지는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며 힘겹게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본 것은 붉게 충혈된 눈이었다.
얼마나 운 것인지 안 그래도 토끼 같던 레이너드의 붉은 눈이 완전히 붉어져 있었다. 눈동자뿐만 아니라 부은 눈두덩과 눈 주위가 불그스름했다.
보기만 해도 안쓰러워서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는데 팔이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레이너드가 그녀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제 뺨을 갖다 댔다.
“유리나, 정신이 들어?”
“……응.”
목소리가 잔뜩 갈라지고 소리도 작았다. 그러나 그 작은 대답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는지 레이너드가 한숨을 토해 내듯 긴 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네가 잘못되는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아카데미에서 레이너드는 종종 악몽에 시달렸다. 악몽에서 유리나는 늘 잔인하게 죽음을 맞이했고, 그는 꼭 한 박자씩 늦어 싸늘한 그녀의 몸을 안고 절망해야 했다.
목걸이가 끊어지는 순간 바로 달려오고 싶었지만 혹시나 데프론 후작이 마법진을 발동시킬까 봐 바로 올 수도 없었다.
데프론 후작의 마나를 억제하고 그가 그려 놓은 마법진까지 무효화시킨 뒤에야 릭스에게 마무리를 맡기고 카르티아 저택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품에서 죽은 듯이 축 늘어져 있는 유리나를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유리나는 무사하고, 그녀가 기절한 건 갑작스럽게 그녀의 몸이 감당하기 힘든 큰 마법을 쓴 탓이란 것을 안 뒤에야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침실에 걸어 놓은 마법진은 외부에서 공격해 오는 흑마법을 방어할 수 있는 마법진이었다. 그래서 유리나에게 절대로 모든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유리나를 노리고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이 방에만 있으면 마법이 마법진을 뚫고 들어올 수 없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보아하니 데프론 후작은 미리 유리나의 몸에 저주의 씨앗 같은 것을 심어 두고 이번에 저주를 발현시킨 것 같았다. 아마 지난번 베시의 모습을 하고 온 소년이 걸어 놓은 저주였던 것 같다.
당시에 유리나를 납치하고 그녀의 몸을 병들게 하여 카르티아가를 협박할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실패한 뒤로 일부러 저주를 걸지 않은 채로 상황을 살피고 있던 건 아닐까.
흑마법사가 아닌 레이너드는 흑마법이 실제로 실현되기 전에는 잘 느낄 수가 없었다.
예전에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방에서 발견된 피 묻은 리본이나 늑대의 몸에서 발견된 유리나의 귀걸이는 이미 저주가 시작된 후라 흑마법을 느낄 수 있었지만, 유리나의 몸 속에 있는 씨앗은 저주가 시작되기 전이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이미 유리나의 몸에 마법의 수단이 있었기 때문에 마법진을 그려 놓았어도 유리나가 저주에 걸릴 수 있었을 테다.
데프론 후작은 아마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걱정해서 지하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파괴할 생각도 못 하고 정신없이 돌아갈 것을 예상했을 것이다. 아마 유리나에게 목걸이를 주지 않았더라면 레이너드도 이성을 잃고 돌아왔을지 모른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주었던 목걸이의 힘과 유리나가 그걸 알맞게 사용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를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지만 막상 와서 유리나가 쓰러진 모습을 보니 미안함과 죄책감이 들었다. 조금 더 살펴보았다면 이런 일을 겪게 하진 않았을 텐데.
유리나가 정신을 잃은 건 고작 한 시간.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레이너드는 그 잠깐 사이에 천국과 지옥을 몇 번이나 오고 갔다.
그리고 유리나가 다시 눈을 뜨고, 별처럼 빛나는 눈을 다시 마주치는 순간 늘 원망만 했던 여신에게 처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레이.”
“응. 응. 나 여기 있어.”
유리나는 그를 보며 힘겹게 웃었다.
“나 괜찮아.”
그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러니까 울지 마. 나 정말 괜찮으니까. 네가 준 목걸이 덕분에 괜찮았어. 네 덕분이야.”
“응.”
레이너드는 계속해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미안하다는 말 외에 그녀에게 해 줘야 하는 말이 있었다.
그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속삭였다.
“다 끝났어.”
그가 얼떨떨해하는 유리나의 얼굴을 보며 차분히 다시 말해 주었다.
“다 끝났어, 유리나.”
유리나는 그의 말을 듣고도 한참 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어떤 대답을 해 줘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잠시 후 그녀는 레이너드와 비슷한,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르는 얼굴을 하며 작게 속삭였다.
“응, 다 끝났네.”
꼭 오늘은 많이 피곤한 하루였다고 말하는 것처럼 편안한 목소리였다.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이마에 제 이마를 조심스럽게 갖다 댔다.
서로의 온기와 애정을 느끼며 두 사람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 * *
범죄자 중에서도 흉악한 범죄자만 가두어 놓는다는 지하 감옥은 어두침침하고 스산한 기운이 가득했다. 오물 냄새인지 살이 썩는 냄새인지 모를 이상한 냄새도 났다.
카리온과 함께 이곳으로 이동한 리디아는 도착하자마자 풍기는 불길한 기운에 지레 겁에 질려 카리온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카리온은 재빨리 코와 입을 막는 리디아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리디아는 속에서 올라오는 구역질을 꾹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을 열면 속을 모두 게워 낼 것 같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더 하얗게 질린 것을 확인한 카리온이 리디아의 팔을 잡았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만 돌아가는 게…….”
“아냐.”
리디아는 그에게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우며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보고 갈 거야.”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 카리온으로부터 아버지인 데프론 후작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어렴풋이 들었다.
흑마법사, 크론 왕국의 반역자, 사냥 대회 때의 사고, 반역.
카리온은 그녀가 충격을 받을까 봐 걱정을 하며 최대한 순화해서 간략하게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리디아는 그 요약된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충격받았다. 최대한 간추려서 이야기해 준 게 이 정도인데 실제로는 얼마나 더 끔찍할까.
리디아는 다른 사람도 아니라 제 아버지가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것에 한 번, 그가 노린 사람이 유리나 카르티아라는 것에 두 번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가 유리나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숨을 노릴 정도로 그 감정이 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게다가 반역이라니. 어릴 적부터 늘 자신에게 황후가 되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서 황후 자리에 집착을 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반역이라니.
만약 이 모든 낌새를 눈치챈 카리온이 그녀를 미리 피신시키지 않았더라면 그녀 또한 잡혀서 이 감옥에 갇혔을 것이다.
사실 카리온은 만일의 상황을 걱정해서 오지 말자고 그녀를 설득했지만 리디아가 꿋꿋하게 오겠다고 우겼다. 일이 틀어져서 사람들에게 들키더라도 데프론 후작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부터 묻고 싶었던 그 이야기를.
‘내가 말렸다면 그만두셨을까.’
카리온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다음부터 리디아는 계속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동안 마음속에만 담아 두었던 말을 아버지께 미리 했었더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자신은 황후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고, 카르티아 영애와 진심으로 친구가 되고 싶어요. 그러니 아버지도 미련을 버리세요.
그 말을 했다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성격상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마음이 무거웠다.
어쩐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그녀는 입 안쪽 살을 꽉 깨물었다. 이미 이곳에 오기 전 카리온의 품에 안겨 눈물을 펑펑 쏟아 내서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또다시 눈이 촉촉해졌다.
리디아는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카리온에게 겨우 말했다.
“아버지에게 가자.”
카리온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리디아에게 망토를 씌워 주고는 그녀를 이끌었다. 리디아는 발밑에서 들린 생쥐 소리에 깜짝 놀라 잠깐 움찔거렸지만 이내 카리온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카리온이 무슨 마법이라도 부렸는지 복도를 가로지르고 지나가는데도 아무도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카리온은 끊임없이 걷고 또 걸었다. 이윽고 더 이상 걸어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곳에 이르러서야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리디아는 창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안쪽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불빛에 언뜻언뜻 비치는 붉은 머리의 남자. 남자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사지가 결박당한 상태였다.
그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리디아는 순간 다리에서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카리온이 깜짝 놀라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더러운 바닥에 그대로 나뒹굴 뻔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
“리디아?”
소란을 느꼈는지 죽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던 남자가 움직였다. 리디아는 위험하다는 카리온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창살 가까이 다가갔다.
“아버지.”
가까이에서 본 데프론 후작의 모습에 다시 눈물이 났다. 리디아는 더러운 것도 느끼지 못하고 한 손으로는 창살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창살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닿지도 않는데 그렇게 하면 데프론 후작에게 닿을 수 있다는 듯이.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카리온도 같이 왔느냐?”
데프론 후작이 리디아의 주위를 살폈다. 한쪽 눈은 퉁퉁 부어 있고, 다른 눈도 반쯤 감겨 있는 터라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얼른 날 여기서 꺼내다오.”
“얼른 가야 합니다.”
데프론 후작의 말에 무심코 대꾸하려던 리디아는 재촉하듯 속삭이는 카리온의 말에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카르티아 영애께 왜 그런 짓을 하신 거예요? 사냥 대회 때 카르티아 영애를 노린 것도, 영애의 하녀를 납치하라 지시한 것도 다 아버지가 한 게 맞아요?”
이미 카리온에게 들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리디아는 굳이 그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긍정적인 대답을 바라는지 아니면 부정적인 대답을 바라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묻고 싶었다. 아마도 그건 그간 아버지가 두려워 한 번도 제대로 묻지 못한 자기 자신에게 내는 화였을 것이다.
데프론 후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겁게 이어지는 침묵에서 리디아는 모든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그러셨어요? 카르티아 영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 여우가 없어야 네가 황후가 될 수 있어.”
울컥. 참았던 무언가가 배 속에서 끓어올랐다. 리디아는 저도 모르게 높아진 목소리로 따져 묻듯 말했다.
“전 한 번도 황후가 되고 싶단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뭐야?”
데프론 후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내가,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감히, 감히 어떻게 나를! 내가 왜 이런 짓을 했는데!”
“제 탓이라고 하지 마세요. 전 단 한 번도 황후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황태자 전하를 연모하지도 않고, 감히 황태자비가 되고자 하는 꿈을 꾼 적도 없어요. 모든 건 다 아버지께서 제게 강요하신 일이시잖아요.”
리디아는 볼을 잔뜩 적신 눈물을 거칠게 닦으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데프론 후작이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리디아! 이 아비를 버릴 셈이냐! 내가 널 어떻게…….”
“아버지, 정말로 절 위하신다면…….”
그녀는 떨리는 몸을 숨기기 위해 카리온의 손을 잡았다. 카리온의 손은 크고 따뜻해서 힘이 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인정하시고 그 죗값을 치르세요. 저도 평생 아버지의 죄를 짊어지고 속죄하면서 살 테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리디아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나 냉정하게 등을 돌리는 것과 달리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분명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위한다는 핑계하에 황후가 되어야 한다며 어린 그녀를 학대했고, 마찬가지로 어리고 갈 곳 없던 카리온을 학대했다.
그러나 어찌 됐든 그는 그녀의 아버지였다. 지금이라도 당장 카리온에게 부탁해 그를 살려 달라고 하고 싶은 충동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이번 일로 가장 피해를 받았을 유리나 카르티아를 비롯하여 데프론 후작에게 상처를 입었을 사람들에게 속죄하는 일일 테니까.
* * *
유리나가 기절을 한 것은 데프론 후작이 건 흑마법 때문이 아니라 마법을 쓴 후유증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한 데다가 저주 때문에 살짝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능력 이상의 마법을 썼으니 몸에 무리가 올 만도 했다.
하지만 마법을 쓰자마자 레이너드가 바로 달려와 마나를 진정시켜 준 덕분에 더 큰 내상을 입는 건 막을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제때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마나가 체력을 더 갉아먹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저주에 걸린 상태에서 과도한 마법을 쓴 것치고는 몸 상태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레이너드와 데이브, 그리고 카르티아가의 주치의가 상태를 확인한 결과, 며칠 푹 쉬면 금방 나을 거라고 했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도움을 받아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몸살이 난 것처럼 몸이 무겁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더 심각해질 수 있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이 정도로 그친 것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무거운 몸과 달리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아마 그동안 고민하던 일이 완전히 해결돼서 그런 걸 테다.
‘이제 데프론 후작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어.’
레이너드가 마지막까지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발악을 하던 데프론 후작을 저지하고, 데프론 후작은 지금 모든 마력을 봉인 당한 채 감옥에 갇혀 있다.
그와 손을 잡은 제2황자는 신분이 신분인지라 감옥에 갇히지는 않았지만 기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제 방에 감금당했다.
커티스는 모든 일을 빠르게 해결하고 싶을 테니 곧 2황자는 유배를 갈 것이고 데프론 후작은 처형당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제 걱정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7년 동안 괴롭혀 온 고민. 카리온 덕분에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린 것 같아 허탈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제야 겨우 죽을지도 모르는 운명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숨이 탁 트였다.
그러나 레이너드는 생각이 다른지, 줄곧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유리나가 그를 비롯하여 가족들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쉬는 동안 그는 한시도 쉬지 못했다. 유리나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의 모습이 못내 안타까웠다.
“가서 좀 쉬어.”
“너 자는 거 보고.”
“나 지금껏 푹 잤는걸. 베시가 있으니까 그만 가서 좀 자.”
그래도 그는 꿋꿋하게 고개를 저으며 유리나의 이마에 손을 대며 열이 나는지 확인했다. 지난 초봄, 유리나가 바닷가에 갔다가 열감기에 걸렸을 때보다 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유리나는 그런 그를 보며 주인 뒤를 낑낑거리며 쫓아다니는 작은 강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니 그가 꽤 귀엽게 느껴져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미소에 조금 안심을 했는지 레이너드가 심각했던 표정을 조금 풀었다.
“더 안 좋을 수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다행이지.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그는 말끝을 흐리며 유리나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자책할 필요가 없다고 유리나가 몇 번이나 달래 주었는데도 그는 그녀가 이렇게 된 것을 미리 눈치채지 못한 제 탓이라고 여겼다.
“그건 그렇고…….”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방 안을 훑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가족들과 하녀들이 가득했던 방은 어느새 아무도 없었다. 넓은 방에 있는 사람이라곤 침대 위에 앉은 그녀와 그 옆에 앉은 레이너드뿐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이미 다들 잘 시간이 지난 한밤이라는 것을 생각하더라도 조금 의아했다.
그러고 보니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방을 나가기 직전 의미 모를 미소를 짓긴 했었다. 전에도 그녀와 레이너드의 관계를 아는 것처럼 계속 이야기하더니 이젠 적극적으로 이어 줄 생각인 걸까.
“레이, 얼마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무슨 말?”
여전히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레이너드가 고개를 들었다. 유리나는 그의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머리 뒤로 쓸어 넘기며 웃었다.
“가족들에게 우리 사이를 알리겠다는 말.”
도망친 흑마법사 소년을 잡으러 가기 직전까지도 그는 그녀에게 그 말을 다시 물어볼 정도로 둘 사이를 공표하는 것에 관심을 보였다. 모든 상황이 끝난 지금은 더 적극적으로 나설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이 많은 것처럼 말없이 유리나를 바라보다가 그냥 멋쩍은 듯 웃고 말았다.
“왜 그래?”
“사람들에게는 좀 나중에 말하자.”
“나중에? 갑자기 왜?”
그가 웃는 얼굴 그대로 유리나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대체 왜?’
유리나는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이 바뀌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그동안 그가 그녀에게 보인 애정은 쉽게 변할 수 있을 정도로 가볍지 않은 데다가 지금 그가 그녀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애정이 담뿍 묻어 나왔다.
다만 대체 갑자기 왜 그의 심경이 변했는지는 궁금했다. 혹시 이번 일로 그가 자책하여 유리나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유리나는 시선을 피하려는 그의 양 뺨을 감싸 쥐며 시선을 마주했다.
“설마 이제 와서 내가 싫어졌다는 건 아니겠지?”
장난스럽게 건넨 말에 그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왜?”
“그냥,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줘.”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이 굉장히 진지했기 때문에 유리나는 일단 그를 기다려 주기로 했다.
“알겠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릴게.”
“응. 그것보다 좀 더 자.”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다시 침대에 눕히려고 할 때였다. 침실 안의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유리나도 느낄 정도로 강한 파동이었다. 이런 강한 파동을 일으킬 만한 마법은 공간 이동 마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레이너드는 유리나를 보호할 듯 감싸 안기만 했을 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몸을 움츠리고 있던 유리나는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보고서야 왜 그가 가만히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카르티아 영애.”
늘 보던 화려한 드레스 대신 간편한 복장을 한 리디아가 카리온의 부축을 받으며 서 있었다. 그녀는 살짝 툭 건드리기만 해도 금방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이미 발갛게 충혈된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께서 영애께 한 짓을 다 들었어요.”
리디아가 카리온의 품에서 벗어나 유리나에게 다가오더니 그녀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유리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이런다고 이미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 말을 꼭 전해 드리고 싶었어요.”
쉴 새 없이 흐른 눈물이 카펫 위로 툭툭 떨어졌다.
유리나는 과거에 리디아를 의심해 본 적도 있었다. 종종 빙의물에서 갑자기 흑화를 해 버리는 원작의 여주인공처럼 리디아도 결국 아버지인 데프론의 후작을 따라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건 아닐까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녀를 오래된 친구처럼 대하고, 스스럼없이 대하는 행동 하나하나도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제 앞에서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을 대신 사과하며 눈물을 흘리는 리디아를 보니 별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원래라면 한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행복할 운명을 맞이해야 했을 리디아 데프론.
하다못해 데프론 후작이 현생에는 일어나지 않은 과거의 일에 집착하여 이 모든 일을 꾸미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자신의 삶의 주인공으로서 환하게 빛날 수 있었을 것이다.
“저는 진심으로 영애와 친구가 되고 싶었어요.”
한때는 그녀의 진심을 의심했지만 지금은 안다. 데프론 후작의 욕심 때문에 또래들과 교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영지에 갇혀 지내다시피 지냈던 리디아는 제 처지와 비슷한 유리나를 보고 정말로 호감을 느꼈을 것이다.
상처를 가진 베아투스를 어릴 적부터 가까이에서 봐 오고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된 두 사람. 어쩌면 정말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영애께서 용서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저는 무슨 죄든 달게 받을 거예요.”
“그만 일어나세요.”
유리나는 리디아를 조심스럽게 일으키며 뒤쪽에 있는 카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 고목나무처럼 조용히 리디아를 쳐다보던 그가 고개를 돌려 유리나를 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리나는 마치 그가 약속을 지키라고 강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이젠 자신이 리디아가 잘못되는 걸 가만히 볼 수 없었다.
“가세요.”
“네?”
“카리온과 함께 떠나세요.”
“그게 무슨…….”
리디아가 멍하니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 사이사이에 맺힌 눈물이 톡톡 떨어졌다. 유리나는 서랍장에서 손수건을 하나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영애께서 제게 사과하실 이유는 없어요. 제가 영애를 용서할 필요도 없고요. 영애께선 제게 잘못하신 게 없으시니까요.”
유리나는 그녀에게 진심을 다해 웃어 주었다. 그간 그녀에게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미소였다.
“지난번에 주신 머리 장식 예쁘게 잘 쓸게요. 그리고 저도 친구가 생긴 것 같아서 좋았어요.”
“아…….”
유리나는 울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모를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무는 그녀를 꽉 껴안았다가 카리온에게 눈짓했다. 카리온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리디아, 가야 합니다.”
늘 마음을 감추기만 하더니 이젠 리디아를 향한 제 마음을 인정한 것일까. 유리나는 애정을 숨기지 않고 리디아를 살피는 그를 보며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여주인공인 리디아의 사랑을 응원하며 그림자 속에서 숨어 살던 비운의 서브 남주인공이 아니다.
유리나는 애달픈 두 사람의 모습을 잠시 보다가 조용히 입을 뗐다.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머지않아 다시 수도로 돌아오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게요.”
현 황제는 모르지만 황태자인 커티스는 이번 작전에서 카리온의 공을 인정했다. 지금은 대외적인 이목 때문에 리디아를 잡으려는 척하지만, 곧 그녀는 사망 처리될 것이다.
그간 영지에 숨어 지내다시피 산 덕분에 그녀의 얼굴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으니, 그녀가 원한다면 추후 머리 색이나 눈 색을 바꾸고 다시 돌아오는 것도 가능할 테다.
“그러니 지금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얼른 가세요.”
카리온의 손을 잡고 머뭇거리던 리디아가 유리나가 준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움켜쥐며 물었다.
“그럼 저희 친구인 건가요?”
전이라면 이 질문에 망설이며 에둘러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확실히 대답할 수 있었다.
“네.”
리디아가 다시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이내 그럴싸한 미소를 그려 냈다.
“앞으로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
“영애도요.”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유리나는 어쩐지 무거운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뒤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레이너드의 품을 느끼곤 그의 가슴팍에 나른하게 몸을 기댔다.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레이.”
고작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레이너드가 몸을 움찔거렸다.
“진짜 다 끝났네.”
“응. 그러네.”
“그래서 정말로 아직 가족들에게 말 안 할 거야?”
넌지시 물은 질문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는 대답을 회피하는 것처럼 조용히 그녀의 목에 입술을 꾹 눌러 입을 맞춰 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