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너, 나, 그리고 우리
리디아가 종적을 감추고 일주일 뒤. 수도에서 가장 큰 광장에서 데프론 후작의 공개 처형식이 있었다.
한때 제국에서 내로라하던 권력과 부를 자랑하던 그는 그렇게 허무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제자였던 이름 모를 흑마법사 소년 또한 함께 처형당했다.
원래는 데프론 후작 정도 되는 귀족이면 예우 차원에서 조용히 형을 집행하고는 하는데, 커티스가 그의 공개 처형을 강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아마 귀족들에게는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과시하고, 제국민들에게는 사악한 흑마법사를 물리쳤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지지를 얻으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유리나는 그의 처형식을 보러 가지 않았다.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주위 사람들이 방에서 꼼짝 못 하게 했을뿐더러 굳이 보러 가고 싶지도 않았다.
‘봐서 기분만 나빠질 텐데 뭐 하러 봐.’
그녀뿐만 아니라 카르티아가의 사람들과 레이너드 또한 아무도 가지 않았다. 다만 집행장에 다녀온 고용인들 몇몇을 시작으로 고용인들 사이에서 그날의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
집사장과 베시가 쉬쉬하며 고용인들을 단속했지만, 완벽하게 입을 막을 수는 없어 유리나도 어렴풋이 이야기를 들었다.
‘마지막까지 발악을 했다던가.’
그러나 이미 흑마법은 물론, 일반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력까지 차단당한 터라 데프론 후작이 할 수 있는 건 악을 쓰며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것밖에 없었다.
제국군이 열심히 수도를 비롯하여 인근 영지까지 수색하고 있지만 리디아 데프론은 여전히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말이 ‘열심히’ 수색 중이지 실제로 그들은 설렁설렁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나는 여태 가족들에게 레이너드와의 관계를 밝히지 못했다. 레이너드가 아직 더 기다려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유리나는 대충 그가 마음의 준비가 아직 덜 됐거나 해결할 일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짐작했다.
‘곧 작위를 받게 되니까.’
데프론 후작이 흑마법사였다는 것과 그가 제국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황태자, 커티스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밝혀낸 공로로 황제는 레이너드에게 남작의 작위를 내리기로 했다.
아직 레이너드의 후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카르티아 후작을 통해 의중만 언뜻 내비친 상태고, 준비할 것이 많은 것을 생각한다면 실제로 작위를 받는 건 한참 뒤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카르티아 후작은 직접 레이너드에게 교육을 하기 시작했고, 레이너드는 귀족 예법을 익히던 어릴 적 못지않게 바빠지기 시작했다. 아마 곧 그에겐 초대장이 쏟아질 것이고, 다양한 파티에 나가며 사람들과 안면을 틀 것이다.
유리나는 그것이 굉장히 반가웠다. 레이너드는 그녀가 제 세계의 모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그녀만 있으면 된다고 했지만, 유리나는 그가 더 넓은 세계를 보고, 다양한 것을 경험하기를 원했다.
어린 레이너드가 보드라운 빵을 먹고, 번화가에 나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놀랐던 것처럼 말이다.
꼭 그녀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생길 수 있도록.
‘그렇다면 난 뭘 하면 될까.’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미래.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는 책에선 보지 못했던, 온전히 자신들이 만들어 나갈 이야기다. 단편적이기는 했지만 조금이라도 미래를 알았던 과거와 달리 한 치 앞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조금 복잡했다.
유리나는 비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요 근래 날씨가 덥다 싶더니 며칠 전부터 장마기 시작됐다.
낮인지 밤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루 종일 하늘엔 시커먼 구름이 드리우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장대비가 쏟아졌다.
우울하기보다는 지금껏 갖고 있던 근심을 모두 씻어 버릴 것 같은 시원한 비였다. 그러나 유리나는 왠지 우울한 감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이 아니었다. 조금 마음이 복잡하기는 해도 우울하거나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그녀의 걱정은 순전히 레이너드에게서 비롯됐다.
유리나는 갑자기 서늘한 느낌에 손으로 팔을 문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촛불을 켜 놓아도 컴컴한 방 안에는 그녀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오늘도 레이너드는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레이너드는 가끔씩 밤에 몰래 그녀의 방에 찾아오고는 했다. 그런데 장마가 시작된 후엔 발길이 완전히 끊겨 버렸다.
요즘 일이 바쁘니 피곤해서 일찍 자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문득문득 어릴 적 보았던 레이너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와 어둠이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혼자 덜덜 떨고 있던 그 여린 모습이.
제 딴에는 저보다 나이가 어린 유리나를 지켜 주겠답시고 비와 어둠이 무섭지 않다고 귀여운 허세를 부렸지만, 겁에 질린 얼굴을 완전히 숨기지 못했다. 결국 실토하듯 비가 싫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날 이후로도 몇 번 유리나는 장마가 끝날 때까지 베시와 어른들 몰래 레이너드의 방에 숨어들었다.
처음엔 이불 속에서 달달 떨던 레이너드는 유리나가 밤마다 찾아온다는 것을 안 뒤로는 이불 속에서 얼굴만 쏙 내밀고 그녀가 올 때까지 문을 노려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꼭 유리나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런 주제에 달칵 열리는 문소리를 듣자마자 재빨리 침대에 누우며 자는 척을 했다. 유리나는 그가 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을 해 주었다.
그러면 레이너드는 자다가 깨어난 척 어설픈 연기를 하며 “네가 무서워하니까 같이 있어 주는 거야.” 하는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며 거드름을 피웠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어릴 적의 추억.
‘많이 걱정했었는데…….’
한 번도 내색한 적은 없어도, 편지에 묻지는 않았어도 유리나는 그다음 해부터 장마철이 되면 아카데미에서 혼자 있을 레이너드를 떠올렸다.
안 그래도 낯선 곳에서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빗소리에 잠을 설치는 건 아닐까. 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닫힌 문을 바라보며 그녀를 기다리지 않을까.
스스로가 생각해도 웃긴 생각이었지만 매 여름마다 늘 불안하고 미안했다. 그나마 크론 왕국에는 장마가 없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제 레이너드는 스무 살이다. 그런 그가 어릴 때처럼 빗소리에 잠을 설칠 거란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답답하고 무거웠다.
‘잘 자고 있을까.’
잠시 침대에 누웠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던 그녀는 가운을 걸치고 문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순간 멈칫했다.
‘괜찮을까?’
지금 그녀와 레이너드는 야밤에 같이 있는 모습을 들켜도 그저 귀엽다는 소리를 들을 열 살, 열두 살 꼬마가 아니었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을 비롯하여 몇몇 사람들이 두 사람의 사이에 대해 짐작을 하고 있다고 해서 밤에 서로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가끔, 그것도 레이너드가 마법을 써서 몰래 유리나를 찾아왔다. 이 시간이면 웬만한 사람들은 자고 있을 테지만 만에 하나라도 복도에 사람이 있으면 곤란하다.
‘어떡하지.’
잠시 고민하던 유리나의 시선이 문득 문고리를 잡기 위해 내밀었던 손으로 향했다.
스르륵 내려온 가운 사이로 언뜻 보이는 붉은 펜던트 팔찌. 레이너드가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자기에게 순간 이동을 하라고 직접 채워 줬던 팔찌다.
‘이런 곳에 쓰기는 좀 그렇기는 한데…….’
문고리와 팔찌를 몇 번 번갈아 보다가 그녀는 마침내 팔찌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팔찌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면서 주위의 마나가 요동쳤다.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유리나는 침대 위에 돌돌 말려 있는 커다란 이불을 발견할 수 있었다. 7년 전보다 크기는 훨씬 컸지만, 누에고치처럼 돌돌 말려 있는 모습이 그때와 똑같았다. 덕분에 그가 레이너드라는 것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일렁이는 마나의 기운을 느꼈는지 레이너드가 이불 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새 둥지처럼 삐쭉삐쭉 헝클어진 머리를 한 그는 방에 들어온 침입자의 정체를 가늠하듯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다 상대가 유리나라는 것을 발견했는지 반사적으로 웃다가 얼굴을 굳히며 이불 속에서 나왔다.
“유리나, 여긴 어쩐 일이야? 무슨 일 있어?”
질문과 동시에 유리나의 바로 옆에 나타난 작은 빛이 주위를 밝혔다. 혹시 어릴 때처럼 덜덜 떨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레이너드의 얼굴에서는 별다른 동요를 찾아볼 수 없었다.
눈물 자국도, 괴로워한 흔적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처음으로 먼저 자신을 찾아온 유리나의 행동에 기쁜 것처럼 보였다. 지금껏 늘 밤에 찾아온 건 레이너드였으니까.
‘내가 너무 과민 반응을 했나.’
뒤늦게 다 큰 성인인 레이너드가 비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건 아닐까 걱정했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의 장난이나 애정 행각을 받을 때도 느끼지 못한 부끄러움이었다.
유리나가 화끈거리기 시작한 볼을 가리며 이만 가 보겠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레이너드가 이불을 살짝 옆으로 치우더니 그녀를 향해 팔을 벌렸다.
“잠이 안 와? 여전히 비가 무서운 거야?”
그는 아직도 7년 전에 유리나가 비를 무서워해서 자신을 찾아왔던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작 비가 싫다며 덜덜 떨고 있던 건 본인이었으면서.
너 때문이잖아. 그날 비를 무서워했던 건 너였어. 오늘도 난 네가 걱정돼서 왔을 뿐이고.
유리나는 그렇게 퉁명스레 쏘아붙일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7년 전, 몸을 달달 떨면서도 자신을 지켜 주겠다며 씩씩한 척을 하던 꼬마 레이너드의 동심과 용기를 지켜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대로 비를 무서워한다는 오명은 뒤집어쓰기 싫어 제자리에서 망설이는데 그가 야살스럽게 웃으며 재촉했다.
“이리 와.”
정말로 야살스럽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유리나는 눈동자가 안 보일 정도로 예쁘게 휘어진 그의 눈웃음을 보다가 침을 꼴깍 삼키며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가운을 여미며 무릎으로 천천히 침대에 기어 올라가자 레이너드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천둥 번개를 무서워한다니. 아직도 애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유리나의 귀 뒤쪽에 진하게 입을 맞췄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이 내려와 유리나의 등허리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유리나는 더 아래로 내려가려는 그의 손을 찰싹 때렸다.
“아직도 애라면서 이건 뭐야?”
장난 반, 퉁명함 반을 담아 묻자 그가 말문이 막힌 듯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겨우 대답했다.
“그럼 비를 무서워하는 어른이라고 하자.”
말이나 못 하면. 유리나는 그를 샐쭉 흘기다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 오늘은 피곤해. 비가 와서 그런지 몸이 축축 처져.”
“괜찮아?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응. 몸은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햇빛을 못 봐서 그런가 봐. 장마가 얼른 끝나야 할 텐데.”
“그러게.”
그녀는 대답을 하면서 그의 얼굴을 흘끔 살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가 멀쩡하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역시 아직도 비를 싫어하나 봐.’
유리나를 본 순간부터 미소를 짓고 있기는 했지만 레이너드는 어딘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그냥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아는 유리나의 눈에는 미세한 차이도 잘 보였다.
“레이.”
비가 아직도 싫어? 대체 비가 왜 그렇게 싫은 거야?
누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그 질문들이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별것 아닌 질문인데 문득 이 질문이 그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레이너드는 7년 전, 카르티아 저택에 처음 왔을 때부터 비를 무서워하며 혼자 이불 속에서 덜덜 떨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열두 살이나 먹은, 아이와 소년의 경계에 있는 그가 비를 그토록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그가 별것 아닌 비를 싫어한다는 건 혹시 그녀가 모르는 우울한 과거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레이너드는 기껏 이름을 불러 놓고 말이 없는 유리나를 보며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왜 불러 놓고 아무 말도 안 해?”
“으응, 그냥. 나 피곤하다고.”
“그래? 그럼 얼른 자자.”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안은 채로 침대에 털썩 누웠다. 그러고는 그녀의 턱밑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아예 침대 헤드에 마법 수식을 그리더니 침대 주위에 보온 마법까지 걸었다.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것처럼 따뜻해진 공기에 유리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차자 레이너드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장마철에는 밤공기가 차.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렇게 쉽게…….”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대꾸하려던 유리나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걸릴 수도 있지.’
레이너드가 과민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지금껏 장마철을 보내 왔던 것을 떠올리면 충분히 감기에 걸릴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진짜로 감기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레이너드는 안절부절못하면서 그녀 옆을 떠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냥 지금 이렇게 과보호를 받는 것이 나았다. 유리나는 더 이상 그를 나무라지 않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맞닿은 그의 품은 보온 마법으로 따뜻해진 방 안 공기보다 더 따뜻하고 포근했다.
특별히 졸린 게 아니었는데도 잠이 솔솔 왔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방을 찾아온 소기의 목적도 까먹고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근데 나 여기서 자려고 온 거 아닌데…….”
빈말이 아니라 정말이었다. 유리나가 이 방에 온 건 혹시나 레이너드가 어릴 때처럼 겁을 먹고 덜덜 떨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지, 이 방에서 잘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딱히 지금 돌아가겠다는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레이너드가 그녀를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해 뜨기 전에 방에 데려다줄게. 그러니까 걱정 말고 자.”
귓가에 낮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꼭 자장가를 불러 주는 것처럼 감미로웠다. 유리나는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눈을 감았다.
조금은 빠르게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와 살짝 거친 숨소리 그리고 창가를 때리는 빗소리까지.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울려 자장가를 연주하는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안온함에 유리나가 막 잠에 빠지려고 할 때였다.
“유리나.”
살짝 갈라진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그 목소리가 방금까지 그녀를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이던 목소리와는 어쩐지 다르게 들려서 유리나는 힘겹게 눈을 뜨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응.”
그에게서 들은 말은 많다. 그러나 유리나는 구태여 어떤 말을 얘기하는 거냐고 되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가 싫다던 말?”
“응.”
작게 대답을 한 그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마치 쉴 새 없이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기 싫은 것처럼. 얼떨결에 그와 같이 이불 속으로 들어온 유리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에게선 말이 없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걸까.’
그녀는 자신이 언제나 옆에 있어 줄 거란 의미를 담아 두 다리로 그의 한쪽 다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제야 레이너드가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힘없이 웃었다.
“그때는 내가 왜 비를 싫어하는지 말 안 했었잖아.”
“지금도 힘들면 말 안 해도 돼.”
“아냐, 이젠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가 유리나의 다리에 잡힌 다리를 빼더니 역으로 그녀의 두 다리를 꽉 잡았다. 행여나 지금부터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유리나가 도망가려고 하더라도 절대로 보내 주지 않을 것처럼.
“별 이야기는 아니야. 사실 듣고 나면 시시하다고 할 수 있어.”
“그런 소리 안 할 거야.”
“시시하다고 해도 돼. 솔직히 조금 웃기잖아. 이 나이 먹고 비를 무서워한다는 게.”
유리나는 힘없이 웃는 그를 보다가 소리를 죽여 소곤거렸다. 둘밖에 없는 방 안에 이야기를 엿들을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데 비밀 얘기를 하는 것처럼.
“사실 난 벌레가 무서워.”
“벌레?”
“응. 지네처럼 다리가 많은 벌레들 있잖아. 독이 있다거나 날 공격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고 그래. 전에는 산책 나갔다가 벌레를 발견하고는 애처럼 소리를 지를 뻔했다니까.”
레이너드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는 듯 어깨를 떠는 그녀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건 처음 듣는 소린데.”
“벌레 싫어한다는 거? 내가 말 안 했으니까 당연하지. 자랑할 일도 아닌데 뭐 하러 말하겠어? 벌레가 싫다고 말하면 오빠들은 아직도 애라면서 놀려 댈 게 뻔한데.”
“앞으론 벌레가 나오면 내가 다 잡아 줄게. 아니, 아예 벌레를 다 없애 버릴까?”
그의 목소리는 진지하다기보다는 장난조였지만, 왠지 고개만 끄덕이면 진짜로 벌레를 없애겠다고 마법을 만들 것 같았다. 유리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함부로 없앴다가는 생태계에 혼란이 올 수 있어.”
“혼란?”
“응.”
사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유리나는 이야기가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기 전에 대충 마무리를 지었다.
“아무튼 나 같은 경우엔 그렇다고. 누구나 싫은 것은 있으니까 그걸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뜬금없는 벌레 이야기였지만 확실히 분위기가 조금 가벼워졌다. 레이너드는 굳었던 표정을 풀며 유리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부모님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에 돌아가셨어.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나는 부모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나도 하지 못했어.”
아,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유리나는 갑작스럽게 공격을 받은 사람처럼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래도 마리 아주머니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 마리 아주머니가 가져다준 빵을 먹으면서 낮에는 아버지가 가꿔 놓은 텃밭의 채소를 돌봤어. 아버지는 일손이 부족하다고 하시면서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에게 밭일을 시키지 않으셨거든? 크면 하기 싫어도 할 텐데 왜 벌써부터 하냐고 하시면서. 네 손을 빌릴 정도로 능력 없지 않다면서 화도 내셨고.”
“응.”
“서툴긴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어. 감자도 캐서 시장에 내다 팔고, 혼자 감자도 삶아 먹고. 아버지가 계신다면 칭찬을 들을 것 같았어. 그러다 장마가 시작됐어.”
뒷말을 듣지 않아도 유리나는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하루아침에 혼자가 된 열 살 아이. 그는 무서운 것도, 힘든 것도 꾹 참고 하루하루를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 봤자 어둠이 무섭고 혼자가 무서운 열 살 꼬마다.
“천둥 번개가 치고 비는 막 쏟아지는데 무서워도 찾아갈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아무리 울어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그때 깨달은 거야. 아, 난 정말로 혼자구나. 라고.”
“……”
“지금도 비가 오면 아무도 없던 그 캄캄한 집이 생각나. 비가 무서운 건 아닌데, 그냥 그때 기억이 생각나서 싫어.”
유리나는 그의 등을 조금 더 꽉 끌어안으며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정수리 위로 힘없이 웃는 그의 웃음소리가 맴돌았다.
“그래도 그날 네가 날 찾아와 준 게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사실은 내가 걱정돼서 왔던 거지? 오늘도 내가 걱정돼서 온 거고?”
차라리 감정을 좀 더 표출하면 좋을 텐데, 담담한 그의 목소리에 더욱 목이 멨다. 유리나는 대답 대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너드의 입술이 정수리에 닿았다 떨어졌다.
“유리나, 나랑 고향에 좀 같이 가 줄 수 있어?”
“고향?”
“전부터 한 번쯤은 가 보고 싶었어. 아버지에게도 한 번 가 보고 싶고, 혹시 마을에 마리 아주머니께서 아직도 살고 계신다면 아주머니께도 가 보고 싶었고. 그런데 가 볼 용기가 나지 않았어. 텅 비어 있는 집을 보면 정말로 혼자가 됐다는 걸 다시 실감할 것 같았거든. 사실 집이 온전히 남아 있지도 않겠지만…….”
“…….”
“근데 네가 같이 가 주면 갈 수 있을 것 같아.”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촉촉이 젖은 그의 목소리에서 유리나는 그가 울음을 애써 삼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의 젖은 눈을 닦아 주는 대신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라 사람의 온기일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알려 주는 온기.
“그래, 가자.”
유리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함께 가자.”
* * *
“그동안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고향에 가 보고 싶었나 봐요. 그렇지만 크론 왕국을 갔다 오느라 갈 시간이 없었고, 갔다 온 다음에도 이런저런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잖아요. 이제야 좀 여유가 생겨서 가고는 싶은데 혼자 가기는 조금 두렵다고 해서…….”
유리나는 차마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맞은편에 앉은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어릴 때와 달리 지금은 그녀에게 죄책감을 가지거나 그녀 앞에서 주눅 들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허락을 받을 수 있을까?’
레이너드에겐 같이 고향을 찾아 주겠다고 당당히 말했지만 사실 그리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귀족가의 딸, 그것도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막내딸이었다. 저택 안을 돌아다닐 때도 베시나 다른 하녀들이 따라왔고, 번화가에 나가려면 하녀는 물론, 호위 기사까지 달고 나가야 했다.
그런데 정확히 어딘지도 모르는 마을을 찾기 위해 여행을 가려고 하다니. 그것도 레이너드와 함께라니. 가족들이 허락을 해 주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허락을 해 준다고 해도 둘만 보내 줄 리도 없고…….’
분명 하녀와 기사들을 줄줄이 딸려 보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요란스럽게 다녀오고 싶지는 않았다. 카르티아가의 유리나와 그녀가 후원하는 레이너드가 그의 고향을 찾고 있다는 소문을 내고 싶지도 않았고.
레이너드가 귀족은 물론, 제국민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지금, 이 사실이 알려졌다간 허튼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접근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목이 타는 것 같아서 홍차를 홀짝이는데 잠시 고민을 하는 것 같던 후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말은 안 했어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 살았던 곳인데 그립지 않을 리가 없지.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네가 묻지 말라고 해서 레이너드에게 과거 일은 묻지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 무심했어. 레이너드는 내가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대요. 신경 많이 써 주셔서 고맙다고 하던걸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섭섭했을 거야.”
후작 부인의 얼굴에 약간 씁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레이너드를 어릴 적부터 봐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이 많은 성격 때문인지 후작 부인은 레이너드를 단순히 후원자를 넘어 가족처럼 생각했다.
지금도 그녀는 그런 그가 외로움을 타지는 않았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음, 그럼 어쩌면 좋을까. 네 오빠들이 알면 분명 안 된다고 할 텐데.”
팔짱을 끼고 고민을 하던 후작 부인의 얼굴에 이번에는 아이처럼 장난스러운 미소가 드리웠다.
“좋은 생각이 났단다.”
* * *
“정말 가야 돼?”
에드윈이 유리나의 손을 잡고 시무룩하게 물었다. 그 옆에선 마찬가지로 서운한 얼굴의 저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쌍둥이는 유리나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리나는 에드윈에게 잡힌 손을 슬그머니 뺐다.
“응. 좀 쉬고 싶어서.”
“저택에서 쉬면…….”
“저택은 사람들이 많아서 북적이잖니. 조용한 곳에서 마음 편히 쉬게 하려고 한단다.”
마차 안에서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말을 보탰다. 그제야 에드윈과 저스틴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유리나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속이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유리나는 두 오빠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저택 앞에 서 있는 레이너드를 향해 눈짓했다. 그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모두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의견이었다. 그간 마음고생하고 몸도 약해진 유리나의 요양을 위해 공기 좋고 조용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 그곳에서 유리나와 레이너드가 자유롭게 움직이면 된다는 계획이다.
지금도 카르티아 저택의 사람들은 유리나와 카르티아 후작 부인만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레이너드는 곧 마법으로 뒤따라올 예정이다.
마차가 출발할 때까지도 유리나는 계속해서 오빠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나 시선은 줄곧 그들 뒤에 있는 레이너드를 향해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빙긋 웃었다.
“많이 좋아 보이는구나.”
“네?”
후작 부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는 유리나의 머리에 꽂은 머리 장식을 똑바로 고쳐 주며 중얼거렸다.
“엄마는 네가 행복한 것 같아서 좋아.”
“아…….”
“늘 말했지만 넌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살렴.”
유리나는 후작 부인이 만져 준 머리 장식을 어색한 듯 매만지다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먼저 말을 꺼낸 것과 달리, 레이너드는 제 고향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고향을 떠난 지 10년 가까이 된 데다가, 고아원에 가기 전에는 줄곧 마을에서만 지내서 주변 지리를 알지 못했다고 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마을 사람들끼리 우리 마을을 강변 마을, 옆 마을을 염소 마을이라고 불렀는데 그게 정식 이름 같지는 않아.”
강변 마을, 염소 마을이라니. 척 듣기에도 지역 특징을 따서 간단히 부르는 명칭 같았다.
“어떤 영지에 있는지도 기억이 안 나?”
“응. 내가 기억하는 거라곤 마을에 강이 있었다는 것밖에 없었어.”
강. 진짜 막막한 단서였다.
넓디넓은 제노시안 제국에 있는 강만 하더라도 두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렇지만 유리나는 머릿속으로 차분히 자신이 갖고 있는 단어와 레이너드가 던져 준 단서를 조합해 보았다.
“네가 널 찾은 고아원은 제이논 남작령에 있었어. 넌 그것도 몰랐지?”
레이너드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도 기억하고 있었어? 벌써 8년이나 지났는데.”
“당연하지. 너에 관한 건 웬만한 건 다 기억하고 있어.”
찡그린 콧등에 살짝 입을 맞춰 주자 레이너드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웃으며 유리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유리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그의 허벅지 위에 마주 보고 앉으며 말을 이었다.
“마을에서 고아원까지 마차 타고 몇 시간 이동했다고 했지?”
“응. 아침에 출발했는데 점심이 지나서 도착했으니까.”
“귀족가의 마차라면 모를까, 일반 평민들이 보통 타는 삯마차는 그렇게 속도가 빠르지 않아. 몇 시간 이동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네 마을은 제이논 영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을 거야. 제이논 영지에 있거나 그 주위 영지에 있겠지. 그 근처에 강이 하나 있어. 봐 볼래?”
유리나는 지도를 올려 둔 테이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이 닿지 않아 레이너드의 다리에서 내려오려고 하자 그가 그녀의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반대쪽 손가락을 튕겼다.
돌돌 말아 놓은 지도가 둥둥 떠서 날아오더니 누가 잡고 있는 것처럼 허공에 저절로 펼쳐졌다.
유리나는 고맙다는 의미로 그의 입에 소리 나게 입을 맞춘 뒤 지도의 왼쪽 윗부분을 가리켰다.
“네 마을에 있던 강은 폭이 좁고, 수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심이 얕았다고 했잖아. 그럼 분명 강 상류 쪽일 거야.”
유리나의 하얀 손가락이 지도의 일부분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럼 대충 이 근방 어디쯤일 것 같은데……. 생각보다 범위가 넓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일일이 찾아다녀도 되지 않을까?”
레이너드가 지도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그래도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오래 걸리면 어때.”
“네가 힘들까 봐.”
그가 유리나의 눈치를 보다가 작게 덧붙였다.
“아니면 나 혼자 찾아다녀도 돼.”
유리나는 손바닥으로 그의 입술을 꾹 눌렀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레이너드가 뭐라고 항의를 했지만 입술이 꽉 눌린 터라 발음이 이상하게 뭉개졌다. 유리나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갈 거니까 걱정 마.”
* * *
“여기도 아니야.”
레이너드의 말에 유리나는 들고 있던 지도 한쪽에 가위표를 그려 넣었다. 지도에 그려진 가위표만 해도 벌써 열 개가 넘어가고 있었다.
레이너드의 이동 마법으로 움직이는 거라 체력 소모도 별로 없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심적으로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그저 같이 따라다니는 유리나도 이런데 당사자는 얼마나 초조할까.
‘이럴 줄 알았으면 고아원에서 만났을 때 고향에 대해 물어볼걸.’
그때 물어봤다면 기억하고 있던 정보가 더 많지 않았을까. 당시엔 레이너드가 어머니와 집이 싫어 도망쳐 나온 카리온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터라 그가 고향을 가고 싶어 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만약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는 걸 알았더라면 진작 그의 고향을 찾아봤을 것이다.
미안해하는 유리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레이너드가 그녀를 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쉽지가 않네. 내가 기억력이 좋았다면 금방 찾았을 텐데. 그렇지?”
제 기억력 탓으로 돌리는 것도 자신의 마음의 짐을 덜어 주는 것처럼 느껴져 그녀는 오히려 더 미안해졌다. 레이너드가 머리를 가볍게 헝클이더니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빵집을 가리켰다.
“배고프지? 여기서 점심 먹고 가자. 잠깐만 기다려.”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벤치에 앉혀 놓고는 저 멀리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빵집을 향해 서둘러 걸어갔다. 별장에서 미리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 올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이 밖을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가능하면 적으면 좋기 때문에 매 끼니마다 마을에서 사 먹기로 했다.
유리나와 레이너드가 지금 입고 있는 간편한 옷은 베시가 구해다 주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잠시 뒤 돌아온 레이너드가 유리나에게 가게에서 사 온 샌드위치를 건네주며 체념하듯 속삭였다.
“고향 같은 거 안 찾아도 돼.”
말과는 달리 그의 미소에는 씁쓸함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안 찾을 거야’가 아니라 ‘안 찾아도 돼’였다. 그 말은 즉, 아직도 고향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유리나는 샌드위치의 포장을 벗겨 내고 그의 입에 샌드위치를 물렸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간접적인 대답이었다.
그녀의 뜻을 알아챘는지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문 레이너드가 조용히 입 안의 샌드위치를 우물거렸다. 유리나도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샌드위치를 먹었다.
유리나는 그가 왜 돌아가자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고생하는 게 싫은 거겠지.’
그렇지만 정작 그녀는 힘들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이동은 레이너드의 마법으로 하고, 저녁엔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마련한 별장으로 돌아가 푸짐한 저녁을 먹고 푹 쉬었다.
그렇게 마법을 써 댔으니 피곤하다면 유리나가 아니라 레이너드가 피곤한 게 이론적으로 옳았다. 그런데도 그는 줄곧 유리나의 상태만 신경 썼다.
정작 고향을 찾는 건 그였는데.
“진짜로 안 찾아도 돼.”
어느새 샌드위치 반쪽을 다 먹은 레이너드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뻔뻔하게 중얼거렸다. 유리나는 이번에도 대답 대신 남은 샌드위치 반쪽의 포장을 뜯어 그의 입에 넣었다.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대며 조용히 입을 움직였다.
샌드위치를 다 먹은 뒤 유리나는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자. 이 옆에도 강을 낀 마을이 있대.”
레이너드가 자리에 앉은 채로 그녀의 치마를 잡았다. 유리나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자 그는 재빨리 그녀를 품에 안았다.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머리에 턱을 괴었다.
“진짜로 안 찾아도 돼.”
“나 때문에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마. 나 하나도 안 피곤해.”
“네가 걱정되는 것도 있기는 한데.”
레이너드의 팔이 유리나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유리나는 그의 품에 완전히 갇힌 모양새가 되었다.
“사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
유리나는 거기에 대고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지 않았다.
‘판도라의 상자 같은 건가.’
처음에 고향을 찾겠다고 나설 때도 그는 한참을 고민한 후에 겨우 입을 열었다. 그에게 고향은 애증과도 같은 존재였다.
다시 가 보고는 싶지만, 동시에 꼴도 보기 싫은 곳.
그는 지금껏 고향을 찾지 않은 가장 큰 이유가 찾기 어려워서라고 했지만 유리나가 보기에는 그는 그저 과거를 기억하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자신을 낳다가 죽은 친어머니, 그 때문에 제대로 애정을 주지 않은 아버지, 괴물이라며 그를 멀리하던 마을 아이들. 그것만으로도 고향이 꼴도 보기 싫을 텐데, 고향은 그의 부모님이 사고로 죽은 곳이기도 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죽음만을 기다리는 부모를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던 톰의 마음은 어땠을까. 유리나는 감히 그 심정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네가 싫으면 안 가도 돼.”
그녀는 레이너드에게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나도 강요하지 않을 거야. 지금 돌아갔다가 나중에 다시 찾고 싶으면 그때 오면 되잖아. 언제든지 네가 오고 싶다면 나도 따라올 테니까 지금은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자.”
대답 없이 거칠게 호흡하는 그에게 유리나는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야. 내 핑계를 대는 건 비겁해.”
“그래, 네 말이 맞아.”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마을로 가자.”
“그래.”
유리나는 그의 손을 꽉 쥐었다.
* * *
두 사람은 그 후로도 두 번이나 허탕을 더 쳤다. 오늘은 그만둘까 하다가 숙소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애매해서 마을 하나를 더 돌기로 했다.
지도를 꼼꼼히 살핀 레이너드는 다음 마을의 좌표를 잘 계산한 다음 이동 마법을 실행했다. 숫자를 세는 것도 그만두어 몇 번째인지도 모를 마을은 저녁인데도 북적거렸다.
유리나는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과 떠들썩한 거리를 훑어보았다.
“시장이 들어서는 날인가 봐. 사람들이 많…….”
그러다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여기…… 야?”
숨을 크게 들이쉰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몸이 으스러질 듯 꽉 끌어안으며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유리나는 축축해지는 목덜미의 감촉을 느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레이너드의 부모님은 거리 한복판에서 마차에 치여 죽었다고 했다. 이곳 풍경에서 그가 어떤 장면을 떠올렸을지 말을 하지 않아도 뻔했다.
길 한가운데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흘끔 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유리나는 그가 진정할 때까지 조용히 그를 다독여 주었다.
* * *
레이너드의 집은 작은 마을에서도 그나마 중심가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다. 두 사람은 그의 기억에 의존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중심가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소 떼가 돌아다니는 푸른 벌판이 나왔다.
시골 마을의 번화가는 수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길이 고르지 않았는데, 레이너드의 집으로 가는 길은 그것보다도 더 험난했다.
이게 정말 사람이 다니는 길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정돈이 되지 않은 흙길은 크고 작은 돌멩이가 굴러다니고 풀도 삐쭉삐쭉 나 있었다.
현재 유리나는 불편한 나들이 드레스 대신 베시가 구해다 준 간편한 원피스에 높은 구두 대신 편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래도 흙길을 걸어가는 것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들뜬 기색이 역력한 레이너드를 보고 있자니 차마 힘들다는 티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힘든 기색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는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던 레이너드가 걸음을 멈췄다.
“많이 힘들어?”
“아냐, 괜찮아.”
“잠시 쉬었다 가자.”
그는 유리나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준 뒤 바닥에 손수건을 깔고 유리나를 앉혔다. 그러고는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없는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리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주위 풍경을 여유롭게 살폈다.
파릇파릇한 초록 풀들이 자라 있는 너른 들판. 솜사탕처럼 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 있는 하늘은 장마가 끝난 뒤라서 그런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을 정도로 맑았고 내리쬐는 햇빛은 따사로웠다.
파리를 쫓기 위해 느릿하게 꼬리를 흔들며 풀을 뜯는 소들의 모습은 꽤나 느긋해 보여 조급했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어린 톰이 뛰어놀았을 들판. 그래서인지 주위를 둘러보는 레이너드의 얼굴이 조금은 들뜬 것 같기도 했다.
유리나는 종아리의 통증이 조금 가셨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가자.”
“그래.”
걷고, 걷고 또 걷고. 끊임없이 걸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발바닥과 종아리가 아파 올 때쯤 레이너드가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기억이 맞다면 우리 집은 이쪽일 거야.”
“그래?”
유리나는 손차양을 만들고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보이는 거라곤 들판과 소뿐이었다.
“근데 우리 집이 아직도 있을지는 모르겠어. 관리하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폐가가 되긴 했을 텐데, 무너진 건물을 그대로 놔둘 바에는 그냥 허물었을지도 모르니까. 어느 정도 형태라도 남아 있으면 마법으로 복구를 시킬 수는 있는데 아예 없어졌으면 힘들어.”
유리나는 제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그 곁에 더욱 바짝 붙었다.
“남아 있으면 좋겠다.”
“응.”
작은 희망을 가지고 몇십 분을 걷고 또 걸었다. 빨갛게 물들었던 하늘의 반 이상이 어둑어둑해졌을 때쯤 저 멀리에 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쭉 유리나의 손을 잡고 걷던 레이너드가 손을 놓고 뛰기 시작했다. 유리나도 그를 따라 뛰었다. 평소 입는 화려한 드레스와 달리 평민들이 주로 입는 가벼운 치마를 입어서 움직이기 편했지만, 레이너드의 속도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있는 힘껏 뛰었다. 레이너드는 그의 눈처럼 빨간 지붕이 인상 깊은 집에 서 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다 못해 넘쳐서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레이너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리나는 이곳이 그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녀는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집을 살폈다.
레이너드, 아니, 톰이 살았던 집은 허름한 오두막집이었다. 그간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많이 보던 형태로, 특별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집이었다.
그러나 특이할 게 없는데도 레이너드의 추억이 담긴 곳이라고 생각하니 왜인지 특별하게 느껴졌다.
“여기야.”
그가 집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손이 소중한 보물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벽돌 벽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우리 집이야, 유리나.”
또르륵. 기쁨과 그리움, 그리고 슬픔. 한 가지로는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담은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는데도 그는 뺨을 닦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울고 있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유리나는 베시가 챙겨 주었던 손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여기가 확실해? 비슷한 집일 수도 있잖아.”
“아냐. 틀림없어.”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손을 끌고 벽 구석으로 향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형태를 알 수 없는 낙서가 있었다. 그건 고양이처럼 보이기도 했고, 강아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그렸던 거야.”
“귀엽네. 뭐 그린 거야? 고양이?”
“응? 아니, 꽃을 그린 건데?”
“으음?”
유리나는 눈까지 찌푸리며 낙서를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도 그걸 느낀 걸까. 레이너드 또한 멋쩍게 웃으며 볼에 남은 눈물 자국을 문질렀다.
낙서 덕분에 분위기 전환이 된 것 같아서 좋았다.
“그나저나 사람이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유리나는 창문 안쪽을 흘끔거리며 물었다. 이 오두막집은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분명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 않은 것치고는 관리한 티가 났다.
톰이 이곳을 떠난 지 어느덧 8년. 그 정도 세월이라면 관리하지 않은 오두막이라면 진작 무너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오두막은 벽에 금이 가거나 창틀이나 문틈에 먼지가 앉아 있긴 했어도 방치한 느낌은 나지 않았다. 심지어 집 주변에 잡초도 없었다.
‘보통 폐가는 풀이 무성할 텐데?’
유리나가 의문을 갖는 사이에 레이너드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람이 오랫동안 안 산 것치고는 굉장히 관리가 잘 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뭔가 이상한데…….”
유리나는 혹시 주변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때, 저 멀리서 노을을 등지고 걸어오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여인은 집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놀란 듯 잠깐 걸음을 멈추나 싶었지만 이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누구신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갈색 머리와 주름진 눈가, 살집이 있는 허리와 두툼한 손. 밭일로 고생을 한 티가 나는 여인은 유리나의 어머니인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또래 정도로 보였다.
“아, 혹시 집주인이세요?”
“저는 예전에 여기서 살던…….”
중년 여인의 시선이 유리나를 지나 그녀의 뒤로 걸어오는 레이너드를 향했다. 지금 레이너드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눈동자를 보라색으로 바꾼 상태였다.
그러니 그를 희한하게 쳐다볼 이유가 없었는데도 여인은 꼭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 얼굴을 하면서도 그에게 시선을 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유리나가 말을 걸려고 할 때쯤, 여인의 입에서 낯익은 이름이 튀어나왔다.
“혹시…… 톰이니?”
“마리 아주머니?”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지만, 레이너드가 얼떨떨하게 중얼거린 이름에서 대답을 얻었는지 여인의 눈시울이 순식간의 붉어졌다.
유리나는 낯선 듯 낯익은 듯한 이름을 입 속으로 곱씹어 보다가 레이너드를 돌아보았다. 그는 간신히 그쳤던 눈물을 다시 흘리고 있었다.
* * *
우연히 만난 중년 여인의 이름은 마리. 처음 통성명을 했을 때 유리나는 그 이름이 굉장히 낯익게 느껴졌다. 마리라는 이름이 워낙 흔한 이름이기는 했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 낯익지?’
잠시 고민하던 유리나는 레이너드를 톰이라고 부르며 반갑게 맞이하는 그녀를 보며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해 냈다.
친어머니를 잃은 톰에게 젖을 물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혼자가 된 그를 아들처럼 돌봐 주었다던 마리 아주머니.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읜 레이너드, 아니, 톰을 돌봐 주었다던 마리 아주머니는 척 보기에도 사람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리나는 왠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레이를 돌봐 주었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가.’
붉은 눈동자 때문에 아버지마저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던 어린 톰을 유일하게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눴던 마리 아주머니. 그 사실만으로도 그녀를 평가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난 네가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마리 아주머니가 촉촉해진 눈으로 레이너드의 접시에 으깬 감자를 잔뜩 덜어 주었다.
유리나는 그녀를 만나고 레이너드가 미처 해 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부모를 잃고 혼자 씩씩하게 살던 중, 톰은 마리 아주머니에게서 마을에서 흉흉하게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 귀족가의 여인들이 어린아이들을 사들인다는 소문이었다.
―이 어린아이들을 노리개로 데려간다니. 말세야, 말세.
―노리개가 뭐예요?
마리 아주머니는 순진하게 되물어 오는 톰에게 너는 그런 건 몰라도 된다며 말을 돌렸다.
―넌 당분간 번화가에 나가지 말 거라.
―그럼 수확한 채소는 어떻게 해요? 때 지나면 시들시들해져서 제값을 못 받을 텐데.
―아줌마가 대신 팔아 줄 테니까 걱정 마.
부모님이 없는 이상 톰에게 마리 아주머니는 자신을 챙겨 주는 유일한 어른이었다. 그는 번화가에 나가지 말라는 아주머니의 말에 좀 의아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한동안 집에서 지냈다.
그러나 얼마 뒤 사건이 터졌다.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듣고 왔는지 톰의 집으로 사람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부모도 없이 혼자 사는 예쁘장하고 힘없는 남자아이. 누가 보더라도 좋은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집 뒤쪽 텃밭에서 땀을 흘려 가며 채소를 캐던 톰은 난데없이 찾아온 사람들에게 겁을 먹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달달 떨기만 했다.
―우리 애한테 뭐 하는 짓들이야!
다행히 뒤늦게 달려온 마리 아주머니 덕분에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마리 아주머니는 톰을 당분간 제집에서 데리고 있으려고 했지만, 이미 한 번 먹잇감이 된 이상 마리 아주머니네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다른 곳에 가 있는 게 나을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러나 톰에게는 친척이 없었다. 그렇다고 선뜻 그를 맡아 줄 사람도 없었다. 붉은 눈이 불길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마리 아주머니는 귀족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곳으로 톰을 보내기로 했다.
그리하여 톰은 오로지 여신의 전언만을 따르는 곳, 황제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신전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향하게 됐다.
떠날 때까지도 그는 부모님이 땀을 흘리면서 일구어 놓았던 밭과 추억이 담긴 집을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노리개 같은 단어를 어떻게 알고 있나 했더니 이런 사정이 있었나 보네.’
그 귀족인지, 부호인지 모를 여자의 관심이 완전히 끊긴 뒤에 마리 아주머니는 톰을 찾으러 다시 고아원을 찾아갔다. 무척이나 추워서 동사한 사람이 많던 그해 겨울이 지나고 다음 해 봄의 일이었다.
그러나 톰은 그 고아원에 있지 않았다. 마리 아주머니는 그곳에서 톰이 웬 귀족을 따라갔다는 소리에 당황한 것은 물론이고, 엄청 걱정을 했다고 했다.
“난 당연히 또 널 눈독 들인 이상한 여자가 널 데려간 줄 알았지. 어디로 갔는지 찾고 싶어도 고아원에선 널 데려간 귀족이 누군지 모른다고만 하고…….”
고아원에서 유리나의 정체를 모른다고 한 건 거짓이 아니라 사실일 것이다. 당시 유리나는 레이너드를 찾아 조용히 움직이기 위해 카르티아 가문의 사람인 것을 숨기고 구호 활동을 다녔다.
“귀족가에서 고생만 진탕 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이렇게 잘 큰 모습을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여.”
마리 아주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당시 상황상 직접 집에 데리고 있을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어린 톰을 거둬 키워 주지 못한 미안함과 그런 그를 잃어버렸다는 죄책감. 그녀는 지난 10년간 그런 복잡한 감정을 마음속에 품고 살았을 것이다.
물론 늘 죄책감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엔 그녀의 삶은 각박했고,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느라 톰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따금씩, 톰의 부모가 죽었다던 여름 장마철이 올 때면, 톰을 고아원에 보냈던 가을이 올 때면 그를 떠올리고는 마음이 먹먹해졌으리라.
레이너드는 마치 마리 아주머니와 헤어졌던 열한 살 꼬마로 돌아간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는 으깬 감자를 입 안 가득 욱여넣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에 선해서 테이블 밑으로 그의 손을 잡아 주려던 유리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차린 저녁이라 누추하지만 많이 들어요.”
고개를 드니 마리 아주머니가 인자한 얼굴로 접시에 으깬 감자는 물론, 삶은 완두콩, 구운 옥수수, 그리고 잘 구운 소시지를 두 개나 얹어 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맛있어 보여요.”
유리나는 진심을 담아 생긋 웃어 보인 뒤 포크를 들었다. 맛보다는 저장성에 집중한 소시지는 매우 짜고 말라서 퍽퍽했지만, 이 시골 동네의 형편을 생각한다면 특별한 날에나 먹는 고급 음식이었다.
버터를 잔뜩 넣어 입 안에서 풍미가 맴도는 카르티아가의 으깬 감자와는 달리 마리 아주머니가 만든 것은 버터가 거의 들어가지 않아 감자 맛만 났다. 그러나 감자 자체가 맛있어서 그런지 맛이 꽤나 좋았다.
레이너드의 얼굴을 살피며 식사를 계속하던 유리나는 앞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마리 아주머니가 식사를 전혀 하지 않고 그녀를 관찰하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어릴 적에 돌봐 주었던 톰이 건장한 청년이 되어 데리고 온 여자라서 관심이 있는 걸까.
그녀는 꽤나 궁금한 것이 많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묻고는 싶은데 식사를 방해할까 봐 차마 말은 못 하는 것 같았다.
유리나는 대충 식사를 마치고 그녀에게 말을 할까 싶었지만, 음식을 남기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아 묵묵히 접시 위에 있는 음식을 먹어 치웠다. 다 먹은 것을 본 마리 아주머니가 음식을 더 덜어 주려고 하길래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저는 괜찮아요. 아, 레이는 더 먹고 싶어 할 것 같은데…….”
“레이?”
“아, 그러니까 톰…… 이요. 이름을 바꿨거든요. 풀네임은 레이너드예요.”
그에게 직접 새 이름을 지어 준 건 유리나였다. 그게 나쁜 것도 아니었고, 레이너드 또한 새 이름을 마음에 들어 했지만 그녀는 혹시나 마리 아주머니가 그 낯선 이름에 거부감을 느끼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웃겼지만 꼭 마리 아주머니가 시어머니처럼 느껴졌다. 레이너드를 어머니처럼 돌봐 주었다던 사람이라 그런가.
다행히 입 안으로 레이라는 이름을 몇 번 되뇌던 마리 아주머니가 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웃었다.
“레이라, 잘 어울리네. 사실 네 얼굴에 톰은 좀 안 어울렸지.”
“그렇죠?”
그 후로도 어색한 식사가 계속 이어졌다. 식사가 끝날쯤 돼서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는지 레이너드가 마리 아주머니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주로 지난 7년 동안 있었던 이야기가 오고 갔다.
말하는 건 거의 레이너드 쪽이었고, 마리 아주머니는 간간이 맞장구를 치며 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자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아이처럼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만큼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가족 같은 사람을 만난 레이너드는 해맑은 아이 같았다.
오랜만에 순진무구했던 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귀족가의 후원을 받은 이야기, 마법의 재능을 인정받아 크론 왕립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한 이야기, 붉은 눈이 저주받은 게 아니라 사실은 여신의 축복을 받은 이야기까지 나왔다.
여신의 축복이란 대목에서 마리 아주머니는 꿋꿋하게 참았던 눈물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쏟아 냈다.
“역시 그렇지. 릴리가 그렇게 착하고 다정했는데 네가 저주를 받았을 리가 없지.”
릴리는 레이너드의 친모라고 했다. 마리 아주머니는 릴리와 어릴 적부터 둘도 없는 친구였는데, 그래서 릴리가 죽은 뒤에 레이너드를 제 아들처럼 돌봤다고 한다.
“그런데 옆에 있는 아가씨는 누구니?”
어느 정도 회포를 풀고 나자 마리 아주머니의 관심이 유리나에게로 향했다. 유리나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레이너드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유리나라고 해요.”
그러고는 유리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행복한 듯 웃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진다는 것같이 당연한 진리를 말하는 것 같은 어조였다.
들뜬 기색도 자랑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지만, 오히려 그 단조로운 어조가 더 낯간지럽게 느껴지는 것 같아 유리나의 뺨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귀여운 젊은 연인을 지켜보던 마리 아주머니는 잘 어울린다면서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 * *
“자주는 못 오겠지만 가끔씩 놀러 올게요.”
“네가 오면 좋겠지만 번거롭다면 오지 않아도 된단다.”
“제 집이 있는 곳인걸요. 그동안 집을 돌봐 주셔서 감사해요.”
아무도 살지 않는 톰의 집. 마리 아주머니는 혹시나 톰이 나중에라도 돌아오지는 않을까 기대하며 그 집을 돌봤다고 한다. 누가 살지 않는데도 관리한 티가 나는 이유는 다 그 때문이었다.
“며칠 동안은 또 올 거예요. 해야 할 것이 있어서요. 아, 아버지 묘는…….”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는지 레이너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리 아주머니가 그에게 바짝 다가가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꽉 쥐며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대로 있단다.”
“네.”
레이너드가 울듯이 웃었다.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그는 유리나의 손을 잡았다. 유리나가 마리 아주머니와 인사를 주고받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던 그는 천천히 왔던 길을 돌아 번화가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리 아주머니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쯤, 레이너드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난 몰랐어.”
“…….”
“마리 아주머니가 날 신경 써 주신 건 알았지만 나중에 날 찾으러 왔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어. 고아원에 있을 때, 난 평생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거든.”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야. 그렇지?”
“응.”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레이너드가 공간 이동 마법 스펠을 외웠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머물고 있는 별장의 좌표는 미리 알아 두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그녀의 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방에 딸린 응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방에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제 숙소로 돌아갔다.
공식적으로 별장에 놀러 온 것은 유리나와 카르티아 후작 부인밖에 없었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별장 근처에 있는 고급 여관에 따로 숙소를 구했다.
유리나는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침실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또 허탕을 쳤나 걱정하는 얼굴로 안으로 들어오는 유리나를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얼굴이 생각보다 밝은 것을 보고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찾았구나.”
“네. 레이의 고향도 찾고, 어릴 적부터 레이를 돌봐 주셨다는 분도 만났어요.”
유리나는 이불을 들추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읽던 책을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유리나의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것참 다행이구나. 레이너드는 어떠니?”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서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눈치였어요. 레이를 돌봐 주신 마리 아주머니는 레이의 친어머니의 오랜 친구셨대요.”
“그랬다면 레이너드를 아들처럼 생각했었을 수도 있겠구나.”
“네, 오늘 보니까 아마도 그랬던 것 같아요. 마리 아주머니에겐 딸밖에 없다고 하니까 더 아들처럼 여겼을 수도 있었겠죠.”
“어쩌면 딸과 레이너드를 이어 주려고 했을 수도 있었겠구나. 그렇지 않니?”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꼭 유리나를 놀리는 것처럼 물었다.
작은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끼리 결혼하는 일이 많으니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잠깐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던 유리나는 괜히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끼며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 올렸다. 있지도 않은 일에 속이 상하는 제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덩달아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랬을지도 모르죠.”
“어머나, 기분이 상했니?”
“아뇨, 그럴 리가요. 아무튼 마리 아주머니께선 나중에 레이를 다시 찾으러 고아원에 갔다가 레이가 사라진 것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었나 봐요. 그래도 언젠가 레이가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를 갖고 계셨는지, 아무도 살지 않는 레이의 옛집을 지금껏 돌봐 주셨대요. 혹시라도 성인이 되어 돌아온 레이가 아무것도 없는 빈 집터를 보고 허망해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세상에,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대단하신 분이구나.”
“그러게나 말이에요. 덕분에 레이가 고향 집을 찾아서 다행이에요.”
요 며칠간 긴장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긴장이 풀리니 잠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유리나는 하품을 하며 후작 부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싶었는데 지금은 손 하나 움직이기도 싫었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먼지가 묻었을 유리나의 머리카락을 아무렇지도 않게 매만졌다.
“그렇다면 답례를 해야겠구나.”
유리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후작 부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데프론 후작의 처형 이후로도 레이너드의 일이 걱정돼서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간만에 달콤한 잠을 잤다.
* * *
다음 날 아침. 유리나는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마리 아주머니에게 주라며 챙겨 준 선물 상자를 들고 방에서 레이너드를 기다렸다.
늘 오던 시간보다 조금 늦게 온 레이너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늘 가볍게 흐트러뜨렸던 머리는 오일을 발라 이마 뒤로 말끔히 넘긴 상태였다.
그를 보고 반가워서 웃던 유리나는 긴장감은 물론, 경건함까지 느껴지는 그의 모습에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러다 레이너드가 먼저 웃는 것을 보곤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따라 웃었다.
“오늘은 좀 늦었네.”
“챙길 게 좀 있어서. 근데 그건 뭐야?”
유리나는 그가 눈짓으로 가리킨 상자를 건네주려다가 그의 손에 들린 바구니를 보고 주춤했다.
“어머니가 마리 아주머니께 감사하다고 챙겨 주신 선물이야. 어머니도 널 많이 아끼시잖아. 그래서인지 마리 아주머니께서 네가 어릴 적에 잘못되지 않도록 돌봐 주신 것이 많이 고마우신가 봐. 여태껏 네 집을 관리해 주신 것도 고마우신 것 같고.”
“아, 난 미처 챙기지 못했는데.”
“그래서 내가 챙겼잖아. 그런데 그건 웬 바구니야?”
아무리 봐도 레이너드가 들고 있는 건 보통 피크닉을 갈 때 도시락을 싸 가는 피크닉 바구니였다. 지금껏 점심은 돌아다니는 마을에서 사 먹었는데 갑작스럽게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오니 조금 의아했다.
평소라면 자세히 설명해 주었을 레이너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아꼈다.
그가 왜 대답을 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얼굴에서 여러 감정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아서 유리나는 굳이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말끔하게 넘긴 그의 머리를 괜히 한 번 더 뒤로 넘겨 주었다.
“그럼 갈까?”
“잠깐만.”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까만 옷을 보다가 상자를 소파 위에 올려놓았다.
“나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
“옷? 지금 그 옷도 예쁜데.”
지금 유리나가 입고 있는 옷은 장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이보리색 원피스였다. 빈말이라도 예쁘다고 할 수는 없는 옷이었는데 아무래도 그의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쓰인 모양이었다.
유리나의 얼굴을 바라보는 눈은 금방이라도 꿀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달달했다.
“이것 말고 입어야 할 옷이 있어서. 잠깐만 기다려.”
그녀는 밖에서 서성이던 베시를 불러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유리나의 지시를 받은 베시가 옷장에서 검은색 드레스를 꺼내 왔다. 이런 일이 생길까 싶어 혹시 몰라 챙겨 왔던 드레스였다.
유리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충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베시는 침울한 얼굴로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고급스럽지만 화려한 장식 없이 단순한 까만색 옷을 입고 머리도 하나로 단정하게 땋고 다시 방에 딸린 응접실로 나가자, 미소를 지으려던 레이너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유리나는 선물 상자를 다시 들고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얼른 가자.”
“…….”
“늦겠다. 응?”
레이너드가 말없이 유리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주위의 마나가 요동치면서 주위 풍경이 바뀌었다.
이젠 제법 덥게 느껴지는 여름 바람이 부는 너른 들판과 빨간 지붕 집이 보였다. 톰의 집이었다.
어제 정확한 집의 위치를 알아 온 덕분에 두 사람은 순식간에 ‘톰’의 집 앞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마리 아주머니께 먼저 갈까?”
레이너드는 유리나가 품에 안은 상자를 들어 올리는 것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먼저 가고 싶은 곳이 있어.”
그는 유리나의 손에서 상자를 받아 들더니 집 안으로 들어가 상자를 놓고 나왔다. 그러나 자신이 가져온 피크닉 바구니는 여전히 들고 있었다.
유리나가 의아해할 새도 없이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들판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장마였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떠 있고 햇빛은 찬란하게 빛이 났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졸졸졸 흐르는 냇가도 나왔다.
‘이게 레이가 말했던 강인가 봐.’
유리나는 듣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지는 물소리에 집중하며 레이너드를 바짝 따라갔다.
이십여 분 정도 걸었을 때쯤, 낯선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 공동묘지라도 되는지,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아래 수많은 비석들이 놓여 있었다.
오랜만에 오는 것이라 기억이 가물거릴 법도 한데 레이너드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오른쪽 가장자리 쪽에 있는 비석 앞에 섰다.
풍족하지 않은 시골 동네라 하나같이 작고 단조로운 비석들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띌 정도로 허름한 비석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깨끗하게 관리한 태가 났다. 아마 마리 아주머니가 관리한 것일 테다.
레이너드는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세 개의 비석을 정성스럽게 닦았다.
두 개는 모양이 비슷했고 한 개는 모양이 조금 달랐는데, 그것을 보고 유리나는 모양이 다른 하나의 비석이 먼저 세상을 떠난 그의 친어머니의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마법으로 할 수 있는데도 레이너드는 이를 꾹 깨물고 닦은 것을 닦고 또 닦았다.
유리나는 턱을 지나 목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보다가 가져온 까만 양산을 펼쳐 그의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머리 위로 드리우는 그늘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는 집중했다.
손수건이 더러워질 정도로 비석을 닦은 뒤에도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비석을 보았다. 그러다 손끝으로 비석을 톡톡 두드렸다. 환한 빛이 터져 나오면서 평범했던 비석에 저절로 화려한 무늬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비석 세 개는 금세 눈에 띌 정도로 화려하게 변했다. 그제야 레이너드가 바닥에 두었던 바구니를 집어 들며 유리나를 돌아보았다.
“우리 부모님이야.”
“응.”
“어릴 적에는 비석이 되게 커 보였는데 지금은 되게 작다. 그렇지?”
어쩐지 울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녀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에 살짝 입을 맞춘 레이너드가 바구니를 열어 안에 든 내용물을 꺼내 비석 앞에 놓았다.
유리나는 그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가 가져온 건 화려한 꽃다발과 묘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동글동글한 빵이었다. 겉면이 까끌까끌하면서도 단단한 그 빵은 레이너드가 카르티아 저택에 처음 와서 먹었던 빵과 모양이 비슷했다.
“저 왔어요. 다시는 못 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또 오게 됐네요.”
비석에 대고 조용히 중얼거리던 그가 유리나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기분 되게 이상해.”
“내가 들을 테니까 하고 싶었던 말 다 해.”
“음……. 뭔가 많았던 것 같은데 막상 하려니까 생각이 안 나네. 아…….”
그가 작게 탄성을 내뱉더니 비석 앞에 놓은 빵을 내려다보았다.
“그거 아세요? 이것도 빵이래요. 저는 이게 빵인지도 몰랐어요. 빵은 딱딱하고 질긴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건 겉은 바삭한데 안은 부드럽고 쫄깃해요. 버터를 듬뿍 발라 먹으면 엄청 맛있어요.”
빵가루를 흘리며 햄스터처럼 빵을 오물거리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래전 일인데도 같이 먹는 첫 식사라 그런지 아직도 눈에 선연한 기억이었다.
그때 그는 이건 빵이 아니라면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다가도 이내 유리나의 말도 듣지 않을 정도로 빵을 양껏 먹었다.
고작 빵. 카르티아 저택에서 그간 먹은 고급 음식이 많은데도 제일 먼저 이걸 떠올릴 정도로 그에게 이 빵이 그렇게나 소중한 추억이었던 걸까.
“보시다시피 저는 잘살고 있어요. 하고 싶은 거 다 해 봤고, 마법도 배웠고, 더 이상 눈 때문에 손가락질당하지도 않아요. 곧 있으면 남작위도 받을 거예요. 소중한 사람도 만났고요.”
그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대목에서 유리나의 손을 꽉 쥐었다. 목소리는 담담했는데 맞닿은 그의 차가운 손은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걱정하고 계셨다면 걱정하지 마시라고요. 앞으로도 잘 지낼 테니까요.”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온기를 느끼며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간 잘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감정이 요동치며 잊고 지냈던 아버지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 아버지 사이엔 빈말이라도 부자의 정이나 사랑 같은 끈끈한 감정이 있었다고 할 수 없었다.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배를 곯지 않을 수 있도록 돌봐 주긴 했지만 그만큼 상처도 준 아버지였다.
그렇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은 있었다.
“보고 싶어요, 아버지.”
농사일을 하고 막 돌아온 당신의 새까만 손에서 나는 희미한 흙냄새가 코끝에 스치는 것 같다.
실없이 웃으면 사람들이 얕잡아 본다던 당신의 그 무뚝뚝한 잔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듣고 싶다.
그냥 당신의 모든 것이 그립다.
한참 동안 비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이너드는 모든 감정을 털어 버리고 진심을 담아 웃었다.
“가끔씩 찾아올게요.”
그러고는 유리나를 데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유리나는 어깨 너머로 비석을 돌아보았다. 찬란한 황금빛 햇빛 아래 빵과 꽃다발이 소중한 보물처럼 반짝 빛나고 있었다.
* * *
빨간 지붕 집으로 돌아온 레이너드는 우울한 기분을 말끔하게 털어 버리고 기운을 되찾았다.
마리 아주머니가 가끔씩 와서 청소를 한다고 해도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다 보니 집은 어수선하고 먼지가 앉아 있었는데, 그는 마법으로 말끔히 집 안을 청소했다.
그러자 새집처럼 집이 깨끗해졌다. 집에는 그가 떠나기 전에 쓰던 가구나 이불, 식기구들도 남아 있었다. 낡아서 쓸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가 마법을 한 번 쓰자 역시 새것처럼 보였다. 지금 바로 쓴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우리 별장으로 쓰면 되겠다. 보존 마법을 걸어 두면 가끔씩 온다고 해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할 테니까.”
만족스럽게 웃은 레이너드가 원래의 색을 되찾은 갈색 소파에 유리나를 앉혔다.
“잠깐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어디 가?”
“금방 올게.”
그는 유리나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돌아온 그의 품에는 큼지막한 감자가 잔뜩 담긴 바구니가 안겨 있었다. 씻지도 않아 흙이 잔뜩 묻은 감자 위엔 자세히 보니 주먹만 한 치즈도 한 덩이 놓여 있었다.
유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가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 들어갔다.
“그게 뭐야?”
“감자.”
“아니, 감자인 건 나도 아는데, 갑자기 감자는 왜?”
그는 의아하게 묻는 그녀의 코앞에 바구니를 들이밀었다. 바구니에서는 흙 특유의 냄새가 솔솔 났다.
감자는 씨알이 굵어 대부분 유리나의 주먹보다 컸고, 심지어 레이너드의 주먹보다 큰 것도 있었는데, 아무 조리도 하지 않은 날것의 상태였는데도 어쩐지 먹음직스러웠다.
배가 고파서 그런 걸까.
“오늘은 내가 점심 해 줄게.”
“웬 점심?”
여기서? 아무것도 없는데?
차마 말하지 못한 뒷말을 눈치챘는지 레이너드가 바구니를 흔들며 웃었다. 그 바람에 유리나의 치마 위로 떨어진 흙은 마법으로 말끔히 처리했다.
“이게 있잖아. 마리 아주머니께 좀 얻어 왔어. 우리 집 감자보다는 맛없지만 마리 아주머니네 감자도 맛있거든. 내가 직접 키운 감자를 못 보여 주는 게 좀 아쉽네.”
“요리는 할 줄 알고?”
“당연하지.”
그는 당당하게 말했지만 유리나는 그의 말에 다소 회의적이었다. 레이너드가 가족을 여의고 한때 혼자 생활했다고는 하나 모두 옛날 일이다.
그가 카르티아 저택으로 왔을 땐 열두 살이었고, 그 후로는 웬만한 귀족 못지않게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다. 남들이 해 준 요리를 먹기만 했지, 직접 요리를 해 본 적은 없다는 소리다.
아카데미에서도 카페테리아나 식당에서 식사를 했을 테니 요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리나는 이상한 모양새를 상상하며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요리 재료가 감자니 이상한 요리가 나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레이너드를 믿을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불신을 알아챘는지 레이너드가 그녀의 찡그린 콧등을 손끝으로 톡 치며 으스댔다.
“걱정하지 마. 내가 감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삶을 수 있거든.”
그 과한 자신감에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 그걸 요리라고 할 수 있어?”
“감자도 누가 삶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 믿어 보라니까. 정말 맛있게 삶아 줄게.”
유리나는 그 말에 한소리 덧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레이너드가 곧바로 덧붙인 말에 덩달아 진지해져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 혼자서 자주 해 먹었거든. 우리 집 감자가 다른 집 감자보다 훨씬 크고 맛있어서 그냥 삶아만 먹어도 맛있었어.”
부모를 잃은 열 살 꼬마. 안 그래도 풍족하지 않은 살림에 어린아이가 손수 해 먹을 만한 음식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기껏 해 봐야 야채를 삶거나 구워 먹는 정도가 전부였을 테다.
그러니까 이 삶은 감자는 열아홉 살의 레이너드가 아니라 열 살의 톰이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요리인 셈이다.
‘추억을 공유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네.’
혼자 지냈던 기억이 계속 떠올라 고향 집에 오고 싶어도 차마 오지 못했다던 레이너드. 그는 유리나가 같이 가 주겠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고향에 올 용기를 냈다.
어쩌면 그는 이곳에서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안 좋았던 추억 위에 좋은 추억을 덧칠하려는 것은 아닐까.
유리나는 주방에서 홀로 동동거리며 감자를 삶았을 어린 톰의 모습을 상상했다. 힘들 텐데도 애써 태연하고 씩씩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떠올리자 안쓰러움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감자를 삶는 일이 아무리 쉽다고 해도 어린아이가 쉽게 해낼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부모님이 죽기 전까지는 한 번도 직접 요리를 해 본 적이 없을 텐데 그는 혼자서 얼마나 동동거렸을까.
그러나 자신에게 요리를 해 줄 생각에 신이 난 그를 안쓰러워할 수는 없었다. 유리나는 간신히 마음을 다스리며 일부러 더욱 퉁명스럽게 이야기했다.
“맛없기만 해 봐. 맛없으면 앞으로 네가 만든 음식은 안 먹을 거야.”
“걱정 마. 맛있을 거라니까.”
유리나는 제 속도 모르고 티 없이 웃는 레이너드를 보다가 부엌을 돌아보았다.
없는 살림이라 식기구며 테이블이며 모두 보잘것없이 초라했지만 이미 마법으로 대청소를 한 덕분에 부엌은 깨끗했다.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허리를 감싸 안아 그녀를 먼지 한 톨 없는 테이블 위에 앉혔다.
분명히 테이블 주변에 의자가 있었는데도 굳이 테이블 위에 앉히는 그의 태도가 영 이상했다.
그러나 이미 레이너드가 감자 바구니를 들고 아궁이 앞으로 가 버린 바람에 차마 그 이유를 묻지는 못했다.
유리나는 다리를 앞뒤로 조금씩 흔들며 그가 요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요리라고 하기는 조금 뭐하지만.’
마법으로 하면 간단할 텐데도 레이너드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모든 것을 손수 했다.
흙 묻은 감자를 씻고, 껍질을 칼로 조심스럽게 깎고, 뽀얀 감자를 물이 가득한 냄비에 넣어 소금 간까지 하는 모습.
어렸을 때 많이 해 먹었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그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 듬직한 뒷모습에 괜히 마음이 요동쳤다. 어렸던 톰은 혼자 이곳에서 눈물을 훌쩍였을 것 같아서.
그래서일까. 저 넓은 등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유리나는 테이블에서 훌쩍 뛰어내려 등 뒤에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때마침 마법으로 장작에 불을 붙이던 레이너드가 놀란 기색도 없이 제 배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돼. 생각보다 금방 익어.”
“응.”
“감자가 익을 때쯤 치즈도 녹여서…….”
그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에게 잡힌 손 위로 뚝뚝 눈물이 흘러내렸다.
유리나는 그의 얼굴을 살펴보려고 했지만, 레이너드가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유리나를 돌아보지 않고 유리나에게 안긴 자세 그대로 잠시간 가만히 있었다. 우는 모습을 숨기고자 하는 것 같았지만 손 위로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까지는 미처 숨길 수가 없었다.
그는 오랜만에 마주한 부모님의 묘지 앞에서도 제 감정과 눈물을 숨겼다. 아마도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참아 왔던 눈물이니,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참아 온 눈물이니 감정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가 났다. 숨죽여 우는 레이너드의 울음소리가 그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지만 유리나는 맞닿은 그의 등에서 느껴지는 떨림에 그가 아직도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유리나가 우는 일은 많지 않지만, 가끔씩 그녀가 울 때면 레이너드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의 눈물을 멈추려고 노력했다. 그는 꼭 그녀가 울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유리나는 달랐다. 오히려 그녀는 레이너드의 울음에 안도했다. 이렇게 한 번 울고 나면 그가 더 이상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슬퍼하지 않을 것 같았기에.
눈물을 숨기지 않고 흘릴 수 있다는 건 참 기쁜 일이다. 그 옆에서 우는 사람을 달래 주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다.
과거의 톰은 이 자리에서 슬픔을 나눠 가져 줄 사람 없이 혼자 눈물을 삼켰지만, 지금 그는 같은 자리에 유리나와 함께 서 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가 우는 일이 생긴다면 이렇게 아무 말 없이 그를 품에 안고 다독여 줄 거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그의 옆에 이렇게 꼭 붙어 있어야지.
* * *
금방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던 삶은 감자는 시간이 꽤 지난 뒤에야 먹을 수 있었다.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생각보다 더 길게 울었기 때문이다.
유리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를 호호 불어 식히는 레이너드를 보며 일부러 더 킥킥거렸다.
“눈이 붕어 눈 같아.”
그가 마법을 써서 부은 눈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실제로 그의 얼굴에는 울었던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러니 이건 그냥 그를 놀리는 것이다.
제가 생각해도 멋쩍었는지 레이너드는 민망한 듯 웃다가 적당히 식은 감자를 유리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유리나는 제 두 주먹을 합쳐 놓은 것 같은 커다란 감자 크기에 잠시 놀랐다가 앞니로 겉 부분을 살짝 베어 물었다.
포슬포슬한 햇감자는 다른 것을 곁들여 먹지 않아도 감자만으로 충분히 맛이 있었다. 감자 자체에서 나는 단맛과 적당한 소금의 맛이 입 안에서 잘 어울렸다.
이게 대체 뭐라고, 긴장한 얼굴로 유리나가 감자를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레이너드는 그녀가 엄지를 치켜세워 준 뒤에야 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가 감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삶는다고 말했지?”
“그것보다는 마리 아주머니네 감자가 맛이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감자 자체가 맛있으면 누가 삶아도 맛있잖아.”
“다른 사람이 삶으면 이 맛이 안 난다니까.”
유리나는 아이처럼 으스대는 그를 보며 웃다가 그를 따라 감자를 크게 한 입 베었다. 레이너드는 노릇노릇하게 녹인 치즈를 포크로 돌돌 말아 그녀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기름진 치즈와 담백한 감자의 조화는 카르티아가에서 먹는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도 맛이 좋았다.
아니, 어쩌면 음식보다는 레이너드가 주는 이 안온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좋은 걸지도 몰랐다.
‘그동안은 줄곧 신경이 곤두서 있기는 했지.’
‘유리나 카르티아’가 된 지 어언 7년. 처음엔 낯선 환경과 사람들 속에서 힘들고 외로웠지만, 레이너드를 만나고 새로운 삶을 진짜 제 삶이라고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웃을 일도 많고, 행복한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이따금씩 생각나는 원작의 내용과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온전히 행복을 누리지는 못했었다.
데프론 후작이 처형당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다 끝났음에도 끝나지 않은 것 같은 불안함과 미처 되짚어 보지 못한 레이너드의 과거 때문에 요 며칠 동안에도 마음껏 쉬지 못했다.
그런데 소 떼와 양 떼 울음소리가 들리는 이 한적한 시골 마을에 레이너드와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앉아 감자를 먹고 있다니.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고 있으니 이젠 정말로 근심 없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이 들었다.
‘레이도 그럴까?’
유리나는 커다란 감자를 하나 다 해치우고는 레이너드의 옆얼굴을 흘끔거렸다. 그녀가 감자 한 개를 먹는 사이 어느새 세 번째 감자를 먹던 그가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봐?”
“어때?”
“뭐가?”
“아직도 고향을 떠올리면 외로울 것 같아?”
“아니.”
“그럼?”
그가 남은 감자 조각을 입에 털어 넣으며 웃었다. 먹이를 잔뜩 넣은 햄스터처럼 볼이 불룩 튀어나온 모습이 꽤 웃겼는데도 그 미소가 우스꽝스럽기보다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행복할 것 같아.”
“정말?”
“응. 이 집에는 생각보다 추억이 많거든. 게다가 이젠 이 집을 떠올리면 네 모습이 떠오를 것 같아.”
그가 유리나의 손을 끌어 제 볼에 갖다 댔다.
“그래서 말인데,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
“보여 주고 싶은 거?”
“응. 사실 아직 우리 집에서 안 보여 줬던 게 있거든.”
그런 게 있었나? 유리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집 안을 살폈다.
아까 레이너드가 마법으로 집 청소를 할 때 유리나는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같이 집을 관찰했다.
부엌, 거실, 큰방, 그리고 작은 방 하나. 분명 레이너드는 그게 전부라고 했다.
의아한 유리나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레이너드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눈짓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우리 집은 농사를 지었다고 했잖아. 밖에 넓은 밭이 있어. 나가자. 보여 줄게.”
밭이라면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땅 아닌가? 가 봤자 볼 게 없을 것 같았지만 레이너드가 워낙 들뜬 얼굴로 재촉하는 바람에 유리나는 드레스 자락에 묻은 감자 부스러기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 한구석에 밭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 레이너드는 문고리를 잡으려다 말고 유리나를 돌아보았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검은 옷차림이었던 그는 눈 깜짝할 새에 흰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가 옆얼굴로 흘러내린 유리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는 순간, 유리나의 검은 드레스 또한 하얀색으로 바뀌었다.
진주 가루를 뿌린 것처럼 은은하게 빛이 나는 하얀색 드레스는 레이너드의 정장과 맞춘 것처럼 닮아 있었다.
그때부터 유리나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눈치가 없었다면 차라리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갈까?”
유리나가 차마 대답을 못 한 사이, 레이너드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에게 끌려가다시피 걸음을 내디딘 유리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와아.”
세상이 온통 황금빛이었다. 하늘에는 붉게 물들고 있는 노을이 보였고, 땅에는 온통 노란색으로 물든 밭이 보였다. 언젠가 크론 왕국에서 레이너드와 단둘이 갔던 노란 꽃밭과 똑같은 꽃밭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물결을 만들어 냈다. 코끝까지 다가온 바람에서는 향긋한 꽃 내음이 났다.
레이너드가 좋은 냄새가 난다고 으스댔던,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기라고 좋아했던 바로 그 꽃향기.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손을 잡고 꽃밭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예전 생각 나지 않아?”
예전이라면 분명 크론 왕국 때의 일일 것이다. 유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2년 전의 일이지만 그날 일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오랜만에 그를 만나서 벅찬 마음과 근사한 남자로 자란 그에게 느껴지는 어색함.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어색함 대신 애정이 가득하다는 것일 테다.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손을 놓고 주위의 꽃을 하나, 둘 꺾었다. 그러고는 능숙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금세 화관을 하나 만들어 냈다.
유리나와 마주 보고 선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 주었다.
유리나는 그를 향한 제 마음과,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을 자각한 후로 그와 단둘이 있는 것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금 이 순간, 한동안 잊고 지냈던 어색함이 다시 느껴졌다.
그래서 괜히 이 민망함을 떨쳐 내기 위해 중얼거렸다.
“나 네가 예전에 만들어 주었던 화관 아직도 갖고 있어.”
“정말?”
그가 기쁜 듯이 반문했다.
“응. 내가 안 보여 줬었나? 내 방에 있는데.”
“난 왜 못 봤지? 음, 그럼 화관 말고 다른 걸 만들어 줘야겠다.”
그가 이번에도 꽃을 꺾었다. 화관을 만들 때 꽃을 잔뜩 꺾은 것과 달리 이번에 그가 꺾은 건 단 두 송이뿐이었다.
유리나는 그가 손가락을 움직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뒤 그가 완성한 것은 작은 반지였다.
“손 줄래?”
그의 목소리에 마법이라도 깃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유리나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문득 새끼손가락에 그가 예전에 주었던 반지가 끼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두 사람에게는 보이는 루비 반지.
레이너드는 하얀 새끼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보다가 약지에 꽃반지를 끼워 넣었다.
“내가 우리 사이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잠깐 기다려 달라고 해서 네가 걱정한 거 알고 있어. 그 이유를 말해 주고 싶었는데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차마 말하지 못했어.”
손가락 끝까지 들어간 반지에서 흰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하고 싶었거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노란 꽃반지의 모습이 변했다. 손가락에서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느껴진다 싶었는데, 약지에는 어느새 루비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반지였지만, 약지에 끼운 반지는 누가 보더라도 청혼 반지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화려했다.
유리나는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서 반지를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반지와 똑같은 색을 띠고 있는 붉은 눈동자가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레이너드가 그녀의 눈을 맞바로 쳐다보며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붉은 석양이 그의 금색 머리카락마저 그의 눈동자처럼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
“유리나.”
그가 루비처럼 영롱하게 빛이 나는 붉은 눈으로 웃었다.
“앞으로도 계속 내 곁에 있어 주지 않을래?”
툭, 눈물을 흘린다는 자각도 하지 못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늘 그녀가 울면 안절부절못하던 레이너드는 이번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을 더욱 빤히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그녀가 자신에게 홀려 원하는 답을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리나는 이 행복한 순간에 덜컥 눈물부터 흘려 버린 것이 민망해서 조용히 투덜거렸다.
“대답도 듣기 전에 반지부터 끼워 주는 게 어디 있어?”
레이너드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거절 못 하게 하려고.”
그러나 말과 달리 그는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웃고는 있지만 얼굴 근육이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이번엔 웃음이 나왔다. 피식 웃음을 흘린 유리나는 제 대답을 기다리는 레이너드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켰다.
“당연하…….”
대답이 채 끝나기 전에 그가 입을 맞춰 왔다. 유리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눈을 감았다.
“사랑해, 유리나. 많이 사랑해.”
그가 입술을 댄 채로 중얼거렸다.
나도 많이 사랑해. 대답하던 유리나의 목소리는 깊숙하게 입을 맞추는 레이너드의 입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열 살 유리나의 몸으로 눈을 떴을 당시, 유리나는 존재하는지조차 미지수인 신을 계속 원망했다.
차라리 죽이면 죽였지, 왜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고 이 낯선 땅에서 날 눈 뜨게 하였나.
그것으로도 모자라 왜 죽어야 하는 운명을 가진 유리나 카르티아인가.
원망을 해 보고, 텅 빈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애걸복걸도 해 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레이너드를 찾은 뒤에도 그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왜 많고 많은 사람 중 나였을까.
그런데 이젠 가슴에 한으로 남아 있던 의문이 풀렸다.
눈앞에서 웃고 있는 이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이 여린 아이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본편 完, 4권에서 계속
에필로그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황금빛 들판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머물고 있는 별장으로 돌아왔다. 레이너드는 유리나를 방으로 데려다준 뒤 정식으로 찾아오겠다며 잠시 제 숙소로 돌아갔다.
방에 혼자 남은 유리나는 침대에 앉아 손에 낀 반지를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타오르는 촛불을 받은 루비가 영롱하게 빛이 났다.
‘예쁘네.’
이걸 보고 있자니 아까의 감동이 떠올라 목이 메었다. 들판에서는 갑작스럽게 청혼을 받은 터라 조금 얼떨떨했는데, 다시 한번 레이너드의 청혼을 되새겨 보니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가슴이 뛰었다.
이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 오늘 일은 생일날 레이너드와 함께 보냈던 밤처럼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지 않을까.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유리나는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루비 반지에 살짝 입을 맞췄다.
지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최고로 치는 보석은 다이아몬드였다. 그 때문에 귀족들은 약혼반지로 다이아몬드를 선호했다.
재력이 있는 귀족들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귀족들도 약혼반지만은 무리를 해서라도 다이아몬드 반지를 구매했다.
레이너드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루비를 선택했다.
유리나는 그가 선뜻 다이아몬드 반지를 살 수 있는 재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다이아몬드 대신 루비 반지를 선택한 것이 여건이 안 돼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어릴 적에도 그는 유리나에게 선물이라며 루비 팔찌를 선물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장신구처럼 착용하는 아티팩트에도 모두 붉은색 마법석을 넣었다.
그에게 빨간색은 애증의 상징이었다. 사람들이 제 붉은 눈을 보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유리나만은 자신의 눈을 사랑해 주기를 원했다.
내가 없어도 이 반지를 보며 늘 내 생각을 해 줘. 그런 욕망과 간절함이 깃든 루비 반지.
호사가들은 카르티아의 딸이 천재 마법사라고 불리는 베아투스에게 고작 루비 반지를 받았다고 입방아를 찧을지도 모르겠지만, 유리나는 그 어떤 반지보다 이 루비 반지가 마음에 들었다.
“아가씨, 안에 계세요?”
노크 소리와 함께 들린 목소리에 유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문밖에서 들리는 베시의 목소리는 어쩐지 들뜬 것 같았다.
의아해하며 들어오라고 말했는데,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잔뜩 들뜬 얼굴로 안으로 들어오던 베시가 유리나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마법으로 바꾼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베시가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쥐며 작게 소리를 질렀다. 유리나의 약지에 끼워져 있는 루비 반지를 봤을 땐 조금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아가씨, 정말로…….”
베시는 묻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웃었다.
“레이너드 님께서 찾아오셨어요. 마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그 말을 하는 베시의 시선은 줄곧 유리나의 루비 반지를 향해 있었다. 왠지 멋쩍은 느낌에 유리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레이는 지금 어디 있어?”
“일단 응접실로 안내해 드렸어요.”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베시는 유리나에게 바짝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였다.
“왠지 아가씨를 불러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왔는데, 오길 잘했네요.”
“고마워. 그럼 응접실로 가자.”
“잠깐만요, 아가씨. 그대로 가시면 어떡해요?”
이게 왜? 유리나는 새삼 제 차림새를 둘러보았다. 레이너드가 마법으로 만들어 준 드레스는 화려한 장식은 없었지만 은은하게 빛이 나서 충분히 예뻤다.
그러나 베시는 유리나를 화장대 앞에 앉히고 서둘러 화장을 고쳐 주기 시작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유리나의 머리를 하나로 가지런하게 땋아 한쪽 어깨에 내린 뒤 머리 장식을 꽂아 주었다.
“자, 이제 됐어요. 이럴 줄 알았다면 아침에 조금 더 예쁘게 꾸며 드리는 건데!”
“아침에도 충분히 예쁘게 꾸며 줬어. 고마워, 베시.”
유리나는 아쉬움에 시무룩해하는 베시를 데리고 응접실로 향했다.
긴장된 얼굴로 제대로 의자에 앉아 있지도 못하던 레이너드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벌떡 일어났다.
상대가 후작 부인이 아니라 유리나라는 것을 알아챈 그는 잠깐 긴장을 풀고 한숨을 쉬나 싶더니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다시 뻣뻣하게 굳었다.
베시는 그를 보고 소리 죽여 웃다가 차를 내온다며 응접실을 나갔다. 원래는 둘만 두면 안 된다며 어디를 갈 때마다 문을 살짝 열어 놓았는데 지금은 문을 굳게 닫았다.
유리나는 일어난 자세 그대로 눈도 제대로 깜빡이지 못하는 레이너드 앞에 다가가 섰다.
“레이.”
마른침을 삼키는지 그의 목울대가 살짝 올라갔다 내려갔다. 유리나는 그를 이끌고 소파에 앉았다.
“예쁘다.”
레이너드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유리나의 두 뺨을 조심스럽게 쥐어 잡고 몸을 숙였다. 유리나는 응접실 문을 흘끔 바라보았다가 입술이 닿기 직전에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여기선 안 돼.”
“아…….”
그제야 자신이 있는 곳을 다시 자각했는지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잘근잘근 깨무는 입술, 초조한 듯 쥐었다 펴는 손, 간헐적으로 내뱉는 한숨. 지금 그는 유리나에게 청혼을 할 때보다 더 긴장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유리나는 기분이 묘했다.
“나한테 청혼할 때는 이렇게까지 긴장 안 했잖아. 내가 당연히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놓았던 거야?”
유리나가 그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장난스럽게 샐쭉 흘겨보자 레이너드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얼마나 긴장했는데. 티 안 내기 위해 엄청 노력했어.”
“정말?”
“응. 근데 음. 확실히 지금이 더 긴장되는 것 같아.”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어떻게 안 할 수가 있어? 허락을 못 받을 수도 있는데. 게다가 순서도 틀렸잖아.”
그가 말한 순서란 청혼 순서를 말했다. 정략결혼이든, 연애결혼이든 귀족가에서는 청혼을 하기 전에 보통 어른들에게 먼저 허락을 맡는다. 결혼이 단순히 여자와 남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문과 가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칙적으로 한다면 유리나에게 청혼을 하기 전에 먼저 카르티아 후작 부부에게 말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레이너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먼저 유리나에게 가장 먼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단다.
그는 안 그래도 카르티아 후작 부부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로 단단히 미운털이 박히는 건 아닌지 고민하고 있었다.
정작 유리나는 평온했다.
‘어머니는 좋아하실 거야.’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대놓고 두 사람의 사이를 알고 있다는 티를 내거나 둘을 지지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리나와 레이너드가 바닷가의 별장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고, 유리나에게 넌지시 약혼 이야기를 꺼냈던 것을 보아 이미 두 사람의 사이를 알고 더불어 지지해 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대했다면 진작 떼어 놓으셨겠지.’
아버지인 카르티아 후작이나 세 오빠들은 어떻게 반응할지 솔직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이 소식을 반겨 줄 것이다. 더 나아가 네 남자가 반대를 한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그들을 설득시켜 줄 것이다.
유리나가 그 말을 레이너드에게 해 주었지만 그래도 그는 긴장을 놓지 못했다. 유리나는 그를 더 달래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긴장을 안 하는 게 더 이상하지.’
후작 부인의 입장에서도 레이너드가 당당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보다 잔뜩 긴장하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보기 좋을 것이다.
게다가 드물게 긴장을 하는 그의 모습이 꽤 귀엽기도 했고.
유리나가 한숨을 쉬는 그를 보며 웃음을 입 속으로 삼키는데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레이너드가 소파에서 튕겨 나가듯 벌떡 일어났다.
유리나는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거라.”
안으로 들어온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표정 없이 근엄한 얼굴로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후작 부인은 늘 유리나의 앞에선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이렇게 무표정한 얼굴은 본 기억이 없었다.
‘왜 그러시지?’
유리나는 조금 당황했다. 당연히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지금 이 분위기는 이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지 않나?
유리나가 느낀 것을 레이너드도 느꼈는지 그는 더욱 바짝 긴장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의 넓은 어깨가 직각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유리나도 덩달아 살짝 긴장을 하며 왼손으로 오른손에 낀 약혼반지를 슬쩍 가렸다.
다과를 가져온 베시는 예상과는 다른 분위기에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유리나의 눈치를 살피다가 얼른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아무 말 없이 베시가 따라 주고 간 홍차를 마셨다. 레이너드는 다과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마른침만 꼴깍 삼켰다. 유리나는 후작 부인의 생각을 살피기 위해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홍차를 홀짝였다.
아무런 대화도 없이 응접실 안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홍차 한 잔을 다 비운 뒤에야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차에는 손도 대지 않는구나. 혹시 차를 싫어하니?”
“아닙니다. 좋아합니다.”
책을 읽듯 딱딱한 어조로 대꾸한 레이너드가 어색한 손놀림으로 찻잔을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얼굴 한 번 찌푸리지도 않고 꼴깍꼴깍 들이켰다.
그가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자 달그락, 하고 도자기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원래 찻잔을 내려놓을 땐 소리 없이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것이 예의다. 어릴 적 예법 수업을 배운 레이너드 또한 평소엔 작은 소리 하나 내지 않는데, 어지간히 긴장을 한 모양이었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에게 잘 보이기는커녕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레이너드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저기, 어머니. 그러니까…….”
과하게 긴장한 레이너드가 안쓰러워 분위기 좀 풀어 보려고 유리나가 입을 연 순간이었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입술 사이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서로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멍하니 후작 부인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짓던 근엄한 표정을 얼굴에서 완전히 지운 후작 부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유쾌하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저 긴장한 표정 좀 보렴. 어쩜 어릴 때와 이렇게 똑같니. 네가 처음 날 보러 왔을 때 쿠키를 마구 집어 먹다가 뒤늦게 내 눈치를 보던 표정하고 똑같네.”
“네?”
“어릴 때부터 넌 늘 그랬어.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나면 유리나의 눈치를 보기 바빴지. 다 큰 것 같으면서도 어릴 적과 똑같으니 참 신기하지.”
후작 부인은 감회에 젖은 눈으로 두 아이를 쳐다보았다. 꼭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잔뜩 긴장해서 자신의 말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것이 참 귀여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이 아이들은 자신들이 다 컸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사랑으로 돌봐 줘야 하는 작고 여린 아이들로만 보였다.
그녀는 처음 유리나가 레이너드를 데리고 왔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도 두 아이는 지금처럼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다.
유리나는 레이너드를 소개하면서도 혹시나 후작 부인이 그를 내치진 않을까 걱정하는 얼굴이었고, 레이너드는 당당한 척을 하면서도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다.
어찌나 귀엽고 예쁘던지. 아직도 그때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나왔다.
그 조그만 아이들이 벌써 이렇게나 컸다.
컸기만 했을 뿐인가. 이젠 자신들의 인생을 찾아 발돋움하려 하고 있었다. 그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지만 두 아이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좋았다.
이 아이들의 웃음소리,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목소리, 예쁜 미소를 그리는 입술. 그것을 지켜 줄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할까.
다만 이 아이들을 떠나보낼 생각을 하니 조금은 섭섭했다.
‘조금은 내 품에 더 있어도 되는데.’
하지만 어쩌겠나. 이것 또한 이 아이들의 선택이라면 들어주는 수밖에.
그러나 어쩐지 이 귀여운 아이들을 조금 더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며 다시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았는지 여유를 되찾은 유리나와 달리 레이너드는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며 긴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만남을 청해 놓고는 아무 말이 없구나. 내게 할 말이 있어서 온 게 아니었니?”
“아…….”
레이너드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분명 오기 전에 머릿속으로 할 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었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은 새하얬고 눈앞은 깜깜했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처음 그를 본 날부터 그에게 다정하게 대했다. 붉은 눈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않았을뿐더러, 그를 단순히 피후원자를 넘어 가족처럼 대했다.
언뜻 보면 마리 아주머니와 비슷했지만 그녀하고는 확연히 달랐다. 마리 아주머니는 레이너드의 어머니와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으니 그를 제 아들처럼 대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날 때부터 귀족이었다. 좋은 것만 보고, 듣고 자란 사람. 고용인들에게 다정다감하게 대한다고 하지만 평민들 틈에 섞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아끼는 딸인 유리나의 부탁이라고는 하지만 레이너드를 가족처럼 대한 것 자체가 이미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유리나와 자신의 결혼까지 허락해 줄 수 있을까. 솔직히 그건 자신이 없었다.
가족처럼 대하는 것과 진짜 가족이 되는 것은 다르다. 아무리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지금 자신을 허물없이 대한다고 해도 유리나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순간 매몰차게 그를 내쫓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리나는 그럴 일이 없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솔직히 레이너드가 보기엔 손쉽게 허락하는 것보다 내쫓을 가능성이 더 큰 것 같았다.
레이너드는 곧 남작위를 받고 귀족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커티스는 자신이 황제에 즉위하면 더 높은 작위를 내려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대대로 명망 있는 카르티아가의 사람들에겐 이제 막 귀족이 되는 평민 출신 레이너드가 마음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뭐?’
그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카르티아가의 사람들이 반대한다고 해서 포기할 건가. 그건 절대 아니었다. 어떻게든 허락을 받도록 노력해야지.
만약 끝까지 허락을 받지 못하면 유리나만 데리고 카르티아가 쫓아오지 못할 곳으로 숨어 버리면 된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레이너드는 유리나만 있으면 되고, 그녀가 제 세계의 전부였지만 유리나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그녀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속이 쓰리긴 하지만 유리나에게 가족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대로 도망가서 고향 집에서 유리나와 단둘이 살아도 행복할 자신이 있지만 유리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정정당당하게 가족들의 허락을 받고 싶었다. 모두의 축복 속에서 유리나가 웃게 해 주고 싶었다.
레이너드는 루비 반지를 낀 유리나의 손을 꽉 잡으며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갑작스러운 말씀이란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인, 저는 오랫동안 유리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긴장하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떨림 없이 깨끗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년 봄, 유리나의 생일이 지나고 나면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후작 부인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아무 얘기도 못 들은 사람처럼 빈 찻잔에 차를 따르더니 다시 차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레이너드는 긴장감에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는 손을 유리나가 꽉 잡아 주었다. 고개를 돌리자 유리나가 괜찮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기가 났다.
“뻔한 말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유리나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유리나를 지켜 줄 자신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리나와 손깍지를 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유리나도 제가 아니면 안 될 겁니다.”
그 말과 동시에 달그락, 하고 찻잔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후작 부인이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낸 소리였다.
예절 하나만큼은 깐깐하게 교육시키는 후작 부인이 낸 소리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아 레이너드는 하려던 말도 잊고 그녀를 주시했다.
그때였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 더 크고 유쾌한 웃음이었다. 동시에 굳었던 분위기가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하게 풀어졌다.
레이너드는 후작 부인이 손가락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웃음을 참기 위해 심호흡을 하는 후작 부인의 표정은 평소처럼 온화하고 따뜻했다.
좀 전까지 짓고 있던 싸늘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어휴, 정말. 결혼 허락을 받으려는 거니, 자기 자랑을 하는 거니? 그것도 너답긴 하지만.”
내용만 들으면 핀잔을 주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야 괜찮지만, 저택에 돌아가서 다른 가족들에게 말할 때는 마지막 말은 빼는 게 좋을 거야. 가뜩이나 그 남자들에게 허락받기가 쉽지 않은데 그런 말까지 하면 미운털 박힐지도 모른단다. 아직 유리나가 자기들을 제일 좋아한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 말을 꺼내면 질투할지도 몰라. 뭐, 나는 그런 말도 귀엽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조언을 머릿속에 새겨 넣던 레이너드는 마지막 말에 눈을 번쩍 떴다.
“그러면…….”
“그 전에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네.”
“왜 하필 내년 봄이니? 너도 작위를 받으면 바쁠 테고, 유리나도 성인이 되면 사람들을 사귀고 이리저리 다니느라 바쁠 텐데……. 약혼식만 치르고 결혼은 여유롭게 해도 되지 않니?”
유리나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아직 둘 다 어리고 시간은 많으니까 하고 싶은 거 더 하다가 조금 더 늦게 해도 되지 않냐고.
레이너드는 그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었다. 지금도 그 대답을 똑같이 할 수 있었다.
“유리나와 하루라도 빨리 가족이 되고 싶습니다.”
지금도 유리나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남들이 두 사람의 사이를 부정할 수 없도록 조금 더 끈끈한 사이가 되고 싶었다. 다른 남자들이 유리나를 노리는 것도 걱정이 되었고.
그 대답이 의외였는지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놀란 듯 눈을 떴다가 두 팔을 벌렸다.
“이리 와 보렴. 한번 안아 보자.”
레이너드는 유리나를 보았다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는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유리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유리나, 너도.”
레이너드의 뒷모습을 보며 웃고 있던 유리나 또한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후작 부인은 체격이 작은 편이었다. 유리나 한 명도 아니고 레이너드까지 한 번에 안기엔 버거워 보였지만 그녀는 팔을 최대한 뻗어 두 사람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래, 행복하니?”
그렇게 묻는 그녀의 목소리엔 물기가 젖어 있었다. 어깨를 토닥여 주는 손길에 왠지 울컥 감정이 치솟아 유리나는 감정을 애써 목 뒤로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많이 행복해요.”
만족스럽게 웃은 후작 부인이 이번엔 레이너드에게 물었다.
“넌 어떠니?”
“저도 행복해요.”
“그래, 그럼 된 거야.”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니. 너희만 좋다면 난 그걸로 좋단다.”
마침내 떨어진 허락이었다. 레이너드는 믿어지지 않아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가 다짐하듯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 * *
레이너드가 돌아간 뒤 유리나는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침실에 남았다. 후작 부인이 내일 저택으로 돌아가기 전 같이 잠을 자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편안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카르티아 후작 부인과 달리 유리나는 선뜻 침대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녀가 이제 진짜 제 어머니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왠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자려니 조금 어색했다.
어렸을 때도 한 침대에서 잔 적이 없었던 터라 더 어색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침대 옆에서 머뭇거리던 유리나는 어서 들어오라는 후작 부인의 재촉에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웠다.
“어릴 땐 이렇게 종종 같이 자곤 했었는데 벌써 네가 결혼할 나이가 되었구나.”
후작 부인이 유리나에게 이불을 덮어 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가 말하는 ‘어릴 때’란 유리나가 열 살 전, 그러니까 ‘유리나 카르티아’에 빙의하기 전을 말하는 것일 테다. 이곳에 와서 한 번도 그녀와 같이 잔 적이 없었으니까.
“많이 어색하니?”
“아니에요.”
태연하게 말한다고 했는데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후작 부인이 살포시 웃었다.
“많이 어색한 모양이구나. 그래도 이해해 주렴. 저택에 돌아가면 이제 결혼 준비로 바빠질 테니 돌아가기 전에 이렇게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단다.”
“아직 내년 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는걸요.”
“지금이야 그렇게 보이지만 막상 준비를 하다 보면 내년 봄도 빠르다고 생각할 거야.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시간이 지나간단다.”
그녀가 바짝 다가와 유리나에게 팔베개를 해 주었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팔베개는 레이너드의 팔베개와 사뭇 달랐다.
분명 크고 다부진 그의 팔이 더 안정감이 있고, 넓고 따뜻한 그의 품이 더 안기기 편했는데도 이상하게 후작 부인의 팔과 품이 훨씬 포근하게 느껴졌다.
유리나는 어색함을 떨쳐 내고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던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문득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내일이 벌써 걱정되는구나.”
“왜요?”
“네 오빠들 말이야. 이 소식을 들으면 분명 충격을 받을 텐데……. 특히 쌍둥이들이 얼마나 날뛸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구나.”
갑자기 몰려온 졸음에 눈을 감고 있던 유리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후작 부인에게 인정받았다는 것에 안심하고 있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미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빠들…….’
벌써부터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워졌다.
유리나와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탄 마차가 저택에 도착했을 즈음, 에드윈과 저스틴 쌍둥이는 저택 뒤편에 있는 연무장에서 대련 중이었다.
체격도 비슷하고 실력도 고만고만한 데다가 있는 힘을 다해 대련을 하지 않은 덕분에 대련은 끝날 듯 끝나지 않고 있었다.
모래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제대로 닦지도 못하고 대련에 몰입하던 두 사람을 멈춘 건 급히 달려온 시종의 목소리였다.
“도련님들! 마님과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더 이상 대련은 필요 없었다. 아니, 진짜 대련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목검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정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기사라면 목숨보다도 더 소중히 여겨야 하는 목검이 모랫바닥에 처참하게 뒹굴었지만, 두 사람은 앞만 보고 달리는 황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쌍둥이로 태어나 날 때부터 서로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에드윈과 저스틴.
똑같이 돌 같은 성격을 지니고 같은 기사의 길을 걸어오면서 사사건건 부딪칠 일이 많았지만, 카르티아 후작 부부의 우려와는 다르게 두 사람은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기보다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생각했다.
그런 두 사람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막냇동생 유리나였다.
보통 동생이 태어나면 질투하는 아이도 많다지만 에드윈과 저스틴은 유리나를 한 번도 미워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서로 유리나와 붙어 있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동생은 하나인데 오빠는 셋이니 유리나를 독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했다.
그나마 나이가 조금이라도 많고 차분한 편인 릭스는 덜했지만 다혈질이고 동갑인 두 쌍둥이는 살벌한 경쟁을 했다.
어릴 땐 유리나와 같이 자겠다고 서로 유리나의 침대에 가서 뒹굴었고, 아카데미에 있을 땐 유리나가 자신들을 잊으면 안 된다고 서로 마차에 한가득 선물을 실어 보냈다.
유리나가 다 큰 지금은 그녀가 어디 갈 때마다 자신이 에스코트를 하려고 노력했다.
지금도 두 사람은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유리나를 에스코트를 해 주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하고는 전속력으로 뛰는 중이다.
두 사람 중 승자는 에드윈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먼저 도착한 에드윈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련복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분하다는 얼굴로 이를 꽉 깨무는 저스틴을 보니 고소했다.
그러나 유리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마차로 다가가려던 그는 자신보다 먼저 튀어나온 사람을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언제 왔는지 모를 레이너드가 마차 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카르티아 후작 부인을 에스코트했다.
그 뒤로 유리나 또한 레이너드의 손을 잡으며 마차에서 내려왔다. 단순히 마차에서 내려온 것뿐만 아니라 그의 손을 계속 잡은 채로 저택으로 걸어왔다.
그것에 의아한 생각을 가질 새도 없이 에드윈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는 유리나를 보며 따라 웃었다.
언제 보아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동생이었는데, 일주일 넘게 못 보다 봐서 그런지 더욱 귀엽게 보였다. 유리나는 성인이 다 된 동생이 뭐가 그렇게 귀엽냐며 퉁명스럽게 받아치고는 했지만 두 사람의 눈에는 여전히 어리고 여린 동생으로만 보였다.
곧 성인이 되는 게 뭐가 어때서! 유리나의 나이가 어떻든 간에 그녀가 그들보다 동생인 건 변함이 없었다.
그러던 중 에드윈은 유리나의 손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약지에 끼워져 있는 루비 반지.
분명 그녀가 저택을 나설 때만 해도 없었던 것이다. 그제야 뒤늦게 유리나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레이너드의 팔이 눈에 들어왔다.
종이 한 장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밀착한 두 사람, 행복한 듯 웃고 있는 유리나, 그녀의 약지에 끼워져 있는 루비 반지. 그리고 루비를 닮은 레이너드의 붉은 눈.
눈치가 없는 에드윈과 저스틴이라도 상황을 파악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얼떨떨한 듯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뻘게진 얼굴로 레이너드를 향해 소리쳤다.
“당장 연무장으로 따라와!”
* * *
레이너드는 금방이라도 자신의 목덜미를 잡고 끌고 갈 기세로 펄펄 날뛰는 두 쌍둥이를 따라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는 가기 전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서 쉬라며 유리나를 달랬지만, 정작 유리나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오빠들이 날뛸 줄은 알았지만 오자마자 이럴 줄은 몰랐지.’
원래 유리나는 저택에 돌아와서 가족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오빠들이 기분이 좋을 때 얘기를 넌지시 꺼낼 생각이었다. 이렇게 오자마자 들킬 줄은 몰랐다. 특히 눈치 없는 쌍둥이에게 들킬 줄이야.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오기 전 카르티아 후작 부인과 함께 나름대로 네 남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셋이 의견을 주고받은 결과, 청혼 이야기를 알리면 제일 반대를 하고 나설 사람은 아버지인 카르티아 후작이 아니라 쌍둥이일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쌍둥이에게 가장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데……. 어쩐지 던전에 들어가자마자 최종 보스 몹부터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반지에 투명 마법을 걸어 둘걸.’
사실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넌지시 꺼냈을 때 레이너드가 굉장히 섭섭해하는 얼굴로 정말 숨길 거냐며 되물어 오는 바람에 차마 마법을 걸어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반지 때문에 들킨다면 그때 솔직하게 말해야지. 그렇게 막연히 생각했는데 다짜고짜 연무장으로 따라오라니. 다른 곳도 아니고 연무장에 가서 뭘 하려고?
좋게 생각하면 대련, 나쁘게 생각하면 구타밖에 더 있나. 대련이라고 해도 순수한 검술 실력만 따지면 레이너드는 쌍둥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과는 뻔하지 않나.
초조한 듯 레이너드와 두 오빠들이 사라진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유리나를 보며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별일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놔두렴. 네 오빠들이 설마 별짓이야 하겠니?”
그러나 유리나는 두 오빠들이 ‘별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오싹했다.
어서 들어가자는 후작 부인의 재촉에도 꼼짝 안 하던 그녀는 이내 저택이 아니라 연무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뒤를 베시가 마찬가지로 초조한 얼굴로 따라갔다.
연무장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기사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그 사이로 목검이 맞부딪히는 둔탁한 소리도 들렸다. 유리나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연무장 주위를 둘러싼 기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유리나는 에드윈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받고 있는 레이너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실력 차이가 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공격 한 번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당할 실력은 아닌데, 그는 묵묵히 에드윈이 내리치는 목검을 방어하기만 했다.
얼마 전 두 쌍둥이와 대련을 할 때만 해도 적극적으로 공격을 했던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이상하기는 했다.
에드윈이 봐주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몰아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화를 풀어 주기 위해 레이너드가 일방적으로 당해 주고 있는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리나는 별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왜 레이가 저런 꼴을 당해야 하지? 그가 싫다는 유리나에게 결혼을 강요한 것도 아니고 서로가 좋아서 결정한 결혼이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해도 당사자인 두 사람이 좋다는데 왜 저 난리를 치는 거지?
어릴 적부터 ‘우리 동생이 제일 예쁘다, 우리 유리나가 최고다!’라고 그녀를 아껴 주었던 동생 바보 오빠들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지!
그래서 오빠들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유리나는 머리끝까지 치솟는 화를 한 번 꾹 참고 두 사람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나 분노 어린 에드윈의 목검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레이너드가 비틀거리며 넘어졌을 때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오빠아!”
앙칼진 목소리에 얼른 일어나라며 레이너드를 재촉하던 에드윈이 목검을 들어 올린 채로 굳어 버렸다. 유리나는 서둘러 달려가 넘어진 레이너드를 꽉 끌어안았다.
“괜찮다니까. 얼른 들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제 몸부터 챙기는 레이너드의 모습이 어찌나 안쓰러운지.
얘는 이럴 취급을 받을 애가 아닌데.
유리나는 손수건으로 땀에 젖은 그의 이마를 닦아 주다가 에드윈을 돌아보았다. 유리나를 바라보는 에드윈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오빠가 기사지, 시정잡배야? 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해야지, 정식 기사도 아닌 사람을 데려다가 대련을 빙자해서 이렇게 몰아붙이는 게 어디 있어?”
“유리나, 오빠는…….”
에드윈은 뭐라고 변명하려다가 유리나의 단호한 얼굴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툭, 하고 둔탁한 소리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에드윈이 놓친 목검이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모래가 폴폴 날리는 연무장에 또 한 번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상황을 지켜보던 저스틴이 목검을 떨어뜨리는 소리였다.
* * *
에드윈은 유리나의 침실에 딸린 응접실 소파에 앉아 단호하게 팔짱을 꼈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유리나는 침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어 에드윈을 쳐다보았다.
“정말 안 갈 거야?”
“안 가.”
“나 잘 건데, 진짜 거기 있을 거야? 어서 가서 자.”
“여기 있을 거라니까.”
단호한 표정을 보니 정말로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이렇게 유리나의 방을 지키는 이유는 단순했다. 혹시라도 유리나와 레이너드가 모두가 잠든 밤에 몰래 만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연무장에서 유리나에게 한 소리를 듣고도 그는 여전히 두 사람의 사이를 인정하지 못했다.
저스틴도 인정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 정도로 유난을 떨지는 않았는데…….
유리나는 한숨을 한 번 푹 쉬었다.
“그렇게 내 방 앞을 지키고 있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니까.”
“알아. 그래도 있을 거야.”
“알겠어. 오빠 마음대로 해. 난 들어가서 잘 테니까.”
유리나는 그를 설득하는 대신 침실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에드윈은 굳게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도 유리나와 레이너드의 사이를 믿을 수가 없었다.
감히 레이너드 따위가 유리나를 넘보다니, 같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평민에 고아 출신이긴 하지만 에드윈은 그런 편견을 가지고 레이너드를 보지 않았다.
같은 남자가 봐도 그는 충분히 매력 있는 남자였다.
누구나 보고 반할 정도로 훤칠한 키와 수려한 외모, 들어가기도 어렵고 나오기는 더 어렵다는 크론 왕립 아카데미를 무려 조기 졸업한 천재 마법사. 게다가 반역자를 잡은 공로를 인정받아 곧 남작위를 받게 된다.
유서가 깊은 카르티아 후작가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작위지만 그깟 작위가 무슨 상관인가. 누군가가 수군거린다고 해도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줄 정도의 능력을 가졌는데.
거기에 유리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 어느 남자에게도 뒤처지지 않았다. 그러니 조건만 따지고 본다면 유리나에게 완벽한 신랑감이었다.
그러나 에드윈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우리 애기가 결혼이라니…….’
에드윈은 아직도 어릴 적 유리나의 모습이 머릿속에 생생했다.
남자 형제, 그것도 기운차서 온 저택을 마구잡이로 헤집고 다니던 아이들만 득실거리던 저택에 나타난 조그만 여자아이.
어머니를 닮은 유리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 사랑스러웠다.
젖살이 통통한 볼을 씰룩거리며 간식을 먹는 모습도, 짧은 팔다리를 휘저으며 오빠들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모습도,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는 모습도…….
지금은 다 커서 예전처럼 오빠들을 쫓아다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종종 시간을 내어 티타임을 가져 주는 예쁜 동생.
중간에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가 이제 겨우 만났는데 벌써 가족을 떠나 독립하려고 하다니.
유리나는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동생이지만 가족의 품에 있는 것과 결혼을 해서 한 가정을 꾸리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그렇지만 마냥 반대할 수는 없고…….’
더 기분 나쁜 건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유리나를 위해서라면 축하를 해 줘야 할 텐데…….
심란한 마음에 에드윈은 한숨을 푹푹 쉬다가 눈을 감아 버렸다.
* * *
자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막상 잠은 오지 않았다. 아직도 침실 밖에서 죽치고 앉아 있을 에드윈 때문이었다.
‘정말 신경 쓰이게.’
마지막에 보았던 그의 얼굴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유리나가 레이너드의 편을 든 뒤로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좌절하다가, 삐친 티를 내며 그녀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믿었던 주인에게 배신당한 대형견처럼 시무룩해했다.
그게 늘 우리 동생 예쁘다며 헤죽헤죽 웃던 모습과 비교가 돼서 심란했다.
‘반대를 할 때는 하더라도 가서 잠은 잘 것이지 왜 버티고 있는 거야.’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유리나는 결국 침대에서 나와 에드윈에게로 향했다. 그는 소파에 축 늘어진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분명 자신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오빠인데 오늘따라 왜 이리 작아 보이는 걸까.
유리나의 기척을 느꼈는지 에드윈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나 싶었는데 이내 팔짱을 끼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애도 아니고.’
아기들은 엄마에게 삐치면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것으로 삐쳤다는 티를 낸다고 한다.
아이처럼 행동하는 에드윈을 보니 그만큼 순수한 것 같으면서도 또 아기가 엄마를 따르는 것만큼 맹목적으로 자신을 사랑해 주는 것 같았다.
“어둡지도 않아?”
현재 테이블 위에는 촛불 하나만 덜렁 켜져 있었다. 워낙 방이 넓어서 에드윈의 모습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유리나는 여분의 초를 더 가져와 불을 옮겨 붙인 뒤 그의 옆에 앉았다.
에드윈이 유리나를 흘끔 보았다가 등을 돌리고 앉았다. 지금은 너와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티가 팍팍 났다.
‘정말 애도 아니고.’
유리나는 한숨을 푹 쉬며 그의 등에 머리를 기댔다.
“오빠.”
그러고 보니 저택에 오자마자 그 사달이 나는 바람에 에드윈과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다. 유리나는 지금이라도 그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레이가 마음에 안 들어?”
“당연하지!”
에드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
호기롭게 말한 주제에 그는 유리나의 눈치를 살피다가 소리를 죽였다.
“혹시 몰라서 말하는 거지만, 그 녀석이 평민 출신이라거나 가문에서 후원하던 아이라서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야.”
“그럼?”
“그냥 마음에 안 들어.”
“그렇지만 좋아했잖아. 대련도 곧잘 재밌게 하더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그 녀석이 아니라 누굴 데려와도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야! 마음에 차는 남자들이 세상에 하나도 없어!”
에드윈이 몸을 휙 돌렸다. 그 바람에 유리나가 휘청거리자 그가 사색이 되어 유리나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
“응.”
“미안.”
그 사과를 끝으로 그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맴돌았다.
유리나는 잠시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다가 침실에서 담요를 하나 가져와 그의 무릎에 덮어 주었다. 그러자 에드윈이 담요를 다시 유리나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자러 들어갔으면 자지 왜 나왔어?”
“오빠가 여기 있는데 어떻게 자겠어. 내가 걱정된다면 오빠도 얼른 가서 자. 그럼 들어갈게.”
그에게선 또다시 대답이 없었다. 유리나는 제 어깨에 걸쳐진 담요 한쪽을 에드윈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다행히 담요가 큰 덕분에 두 사람이 충분히 같이 덮어쓸 수 있었다.
“이런다고 내 마음은 안 바뀔 거야. 오빠도 알잖아. 나 고집 센 거.”
“알지. 아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에드윈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우물거리는 목소리가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
“대체 뭐가 그리 급해서 벌써 결혼을 하려고 해?”
그의 말만 들으면 유리나와 레이너드가 굉장히 결혼을 빨리 추진하는 것 같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가문의 이해관계가 얽힌 정략결혼의 경우엔 성인이 되자마자 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연애결혼이라고 치면 빠른 편에 속하기는 한다. 연애결혼의 경우 보통 성년이 된 후 다른 가문과 교류를 하면서 연애를 하기 때문에 성년이 되고 1, 2년 정도 뒤에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유리나가 지난봄에 이례적으로 사교계에 일찍 데뷔를 한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빠르다고 할 수도 없었다.
“뭐가 빠르다고 그래? 오히려 릭스 오빠가 늦게 하는 편이지. 스물두 살인데도 아직 약혼녀도 없잖아. 오빠들도 늦은 편이고.”
“그건 그렇지만…….”
에드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힘겹게 덧붙였다.
“혹시 우리가 싫은 거야?”
“뭐?”
예상치 못한 말에 유리나는 다소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이 올라갔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거야?”
“이 저택이 싫어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아, 이제야 에드윈의 의중을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는 유리나가 결혼을 하면 자신들과 멀어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땅이 넓고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는 이곳에서는 결혼을 하고 새 가정을 꾸리게 되면 원래의 가족들과 교류가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지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엔 일 년에 한두 번 얼굴 보기도 힘든 경우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족이 싫은 귀족들은 결혼을 도피처로 삼았던가.’
로판에서도 자주 나왔던 단골 소재다. 천덕꾸러기로 가족과 고용인들에게 구박을 받던 여주인공이 그 생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주와 계약 결혼을 하는 그런 이야기.
그런 걸 생각한다면 에드윈이 착각한 것도 이해가 가긴 하지만 조금 억울했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레이너드가 영지를 하사받는다고 하더라도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대부분의 시간을 수도에서 보낼 것이다. 두 사람에게 가족이라고는 카르티아가 사람들뿐이니 당연히 카르티아 저택에 자주 드나들 것이고.
그래서 유리나는 결혼을 하고 난 뒤에도 가족들과 멀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당연히 오빠들이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도 안 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난 결혼을 하더라도 오빠들을 자주 보러 올 거야. 여기도 내 집인걸.”
“정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무룩했던 그의 목소리가 다소 밝아졌다.
“당연하지. 왜 내가 오빠들을 싫어하고 안 볼 거라고 생각해? 설마…….”
유리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팔짱을 꼈다.
“오빠는 결혼하면 나 안 보려고 했어?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그의 기분을 좀 풀어 주려고 농담조로 이야기한 것인데, 진담으로 받아들였는지 에드윈이 펄쩍 뛰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된 거잖아. 그렇지 않아??”
“그래도 너무 빠른 것 같아. 대체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야? 넌 이제 겨우 성인이 되는 거야. 이제야 겨우 가족들의 보호에서 벗어나 더 큰 세계를 보러 나가는 거라고.”
에드윈이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 나갔다. 유리나는 그의 말을 끊지 않고 묵묵히 들어 주었다.
“네 마음이 굳건한 것 같으니까 사교계에 다니다 보면 그 녀석보다 더 좋은 남자가 나타날 거란 소린 안 할 거야. 솔직히 더 괜찮은 녀석이 나타날 것 같지도 않고.”
싫다고 말은 하면서도 막상 레이너드가 그렇게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카르티아가의 유리나로서 사교계에 드나드는 것과 남작 부인으로서 드나드는 것은 달라. 신분 차이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카르티아를 등에 업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유리나 카르티아와 달리 남작 부인은 한 가문을 이끌어 가는 웃어른으로서 생각할 것도 많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많아.”
“응, 알아.”
“왜 굳이 벌써부터 그러려고 해? 꼭 그 녀석이어야만 한다면 지금은 약혼만 하고 결혼은 한 2, 3년 후에 해도 되잖아.”
왜 내년 봄일까.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말을 상기했다.
하루라도 빨리 자신과 가족이 되고 싶다고 하던 레이너드. 그에게 가족이란 존재가 어떤 건지 잘 알기 때문에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레이는 혼자잖아.”
유리나는 덤덤히 덧붙였다.
“나에겐 오빠들이나 부모님, 심지어 베시를 비롯한 카르티아 저택의 사람들이 있어. 모두 날 위해서라면 뭐든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야. 그런데 오빠, 레이에게는 아무도 없어.”
부모님의 무덤 앞에서 애써 태연하게 행동하려던 레이너드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기쁜 기억도, 슬픈 기억도 있는 부엌에서 숨죽여 울던 그의 모습도 떠올렸다.
더 나아가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고아원 뒤뜰에 홀로 앉아 있던 어린 톰을 생각했다.
그때 그에게 손을 내밀었던 건 유리나가 유일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고향에 가면 그를 아들처럼 아껴 주는 마리 아주머니도 있고, 수도에는 하나밖에 없는 제자를 가족처럼 아끼는 데이브도 있고, 크론 왕국에는 그의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 친구도 있다.
그들 모두 진심으로 레이너드를 아낀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들에게 레이너드는 제1순위가 아니었다.
마리 아주머니나 에이든에겐 레이너드보다 더 소중한 제 가족이 있고, 데이브에겐 우선적으로 명을 들어야 하는 카르티아 가문이 있다.
유리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고 많지만, 슬프게도 그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유리나,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그의 곁에 있어 줘야 하지 않을까.
7년 전, 그날과 마찬가지로.
“작위를 받고 나면 레이는 더 이상 이 저택에서 우리의 후원을 받으면서 지내지 못하잖아. 그럼 또다시 낯선 저택에서 혼자 지내게 될 텐데 혼자 두고 싶지 않았어.”
유리나는 에드윈의 커다란 손을 꽉 잡았다.
“그러니까 오빠, 내가 독립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레이가 우리의 가족이 된다고 생각하면 안 돼?”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유리나는 조급하지 않았다. 에드윈이 이 말을 받아들일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무 갑작스러우니까.’
그러나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제 목숨보다도 더 아끼고 사랑해 주는 오빠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는 것처럼 그 또한 결국 유리나의 편을 들어줄 것이다.
에드윈이 손을 들어 유리나의 두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잡아당겼다.
“으이구, 이 못난이.”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유리나는 그 단어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에드윈은 늘 유리나를 우리 예쁜 동생, 우리 귀염둥이, 우리 막내 등등의 호칭을 사용하며 애정 표현을 했다. 그런 그가 삐쳤다는 건 평소와 다른 단어에서 절실히 묻어 나왔다.
“언제는 예쁘다면서 이젠 못난이야?”
“오빠 말 안 들으니까 못난이야.”
그가 이번에는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손으로 유리나의 코를 잡아당겼다.
유리나의 얼굴이 조금 우스꽝스럽게 변했지만 그는 웃는 대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꽉 당겨 무느라 턱은 호두처럼 찌글찌글해졌고, 파르르 떨렸다.
유리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턱을 꾹 눌렀다.
“오빠야말로 못난이야. 이게 뭐야.”
대체 이 말 어디가 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그 말을 듣자마자 솟아오르는 감정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예쁜 내 동생.”
울음기 섞인 목소리에 갑자기 덩달아 감정이 일렁였다.
언제였을까. 동생 바보 오빠들의 과한 애정 표현이 낯설거나 거북하지 않고 살갑게 느껴지기 시작한 건.
“행복해?”
갑작스러운 물음이었지만 유리나는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응, 행복해.”
“그럼 됐어.”
그가 유리나의 코를 놓아주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럼 된 거야.”
그러고는 유리나의 몸에 담요를 칭칭 둘러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자러. 그러니까 너도 얼른 들어가서 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유리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에드윈이 나간 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바닥에선 식은땀이 났다. 레이너드는 최대한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앞에 앉은 네 남자를 바라보았다.
카르티아 후작과 유리나의 세 오빠들. 평소엔 상대가 남들은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귀족이든, 제국에서 손꼽히는 기사든 상관없이 긴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리나의 가족들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유리나가 같이 따라오겠다며 나섰지만, 방에서 기다리라는 카르티아 후작의 말에 차마 따라오지 못했다. 사실 후작이 아니었더라도 레이너드가 그녀를 돌려보냈을 것이다.
‘이건 내가 할 일이야.’
이 정도도 각오하지 않고 청혼을 한 게 아니다.
쌍둥이인 에드윈과 저스틴은 금방이라도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유리나가 설득을 한 덕분이다.
물론 그를 완전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반대하지 않는 게 어딘가.
진짜 문제는 나머지 둘이다.
근엄한 표정으로 레이너드를 살피는 카르티아 후작과 정말로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앉아 있는 릭스 카르티아.
―아버지보다는 릭스 오빠를 더 설득하기 힘들 거야.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응접실로 들어가기 전에 조용히 귓속말로 속닥였다.
―릭스 오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를 때가 많거든. 그리고 한 번 화가 나면 무서워. 그래서 작은 오빠들도 릭스 오빠의 성질은 안 건드리려고 해.
실제로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
주먹을 꾹 쥔 레이너드가 결혼에 관해 입을 열 때였다.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있던 릭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습니까, 아버지?”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후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레이너드는 절도 있는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가는 릭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뒤를 쌍둥이들이 신이 난 표정으로 따라갔다.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거절당했다.
즉, 이야기를 들을 가치도 없다는 뜻이다.
* * *
카르티아 후작을 설득하는 건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이미 설득을 한 모양인지 그는 차분하게 레이너드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레이너드가 후작 부인에게 했던 이야기들, 유리나를 향한 마음이 진심이라든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안전하게 지키겠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차분히 듣던 카르티아 후작은 그 후 몇 가지 질문을 건넸다.
작위를 받으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거취는 어디에 둘 것인지 같은 질문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황실 기사단에 입단을 하는 게 어떠냐고 말씀하셨지만 전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아카데미에 교수로 들어가 연구를 하며 후학을 키우고 싶습니다.”
아마 커티스는 제 호위를 맡아 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레이너드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황실과 엮여 정치적으로 휘말리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커티스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가 않았다.
다만 이야기를 하면서 걱정은 됐다. 대대로 황실에 충성한 카르티아가와 다른 노선을 간다는 점을 탐탁지 않게 여길까 봐.
그러나 우려와 달리 카르티아 후작은 별로 신경을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후학 양성이라, 좋지. 안 그래도 제국에선 마법 발전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자네 실력이라면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제국에 도움이 되겠지. 괜한 일에 휘말릴 일도 없고.”
오히려 그의 결정을 반기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수도에 저택을 마련할 계획입니다. 영지를 하사받는다고 해도 대부분 시간은 수도에서 보낼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을 들은 후 카르티아 후작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는 이야기를 잘 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끝이었다. 찬성도, 반대도 없었다.
레이너드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를 설득해야 하나 싶었지만 카르티아 후작 부인과 유리나가 괜찮다며 그를 달랬다. 이미 카르티아 후작은 허락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릭스 카르티아뿐이었다.
그러나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애초에 이야기를 듣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차라리 에드윈과 저스틴처럼 안 된다고 펄펄 날뛰었다면 설득이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이야기를 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니 설득을 할 수가 있나.
레이너드는 그날 이후 릭스를 만나려고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그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자리를 피했다.
그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보낼까도 했지만 유리나가 반대했다.
―뇌물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럼 더 반대할걸.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레이너드는 목검을 들고 연무장을 찾았다.
기사들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릭스가 웅성거리는 주위의 소리에 레이너드를 바라보았다.
목검을 들고 찾아온 그가 의외였는지 릭스는 레이너드를 무시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가 다가오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기사들은 검으로 대화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에이든이 했던 말이었다. 마법과인 애가 기사의 자격을 운운하며 대련을 하자고 조르던 것이 그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의 말이 쓸모가 있는 것 같았다.
“많은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레이너드의 진지한 얼굴을 잠시 응시하던 릭스는 시종을 시키지 않고 직접 가서 목검을 들고 왔다.
쌍둥이를 비롯한 가문의 기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련이 시작되었다.
레이너드는 이를 꽉 깨물고 릭스가 내리치는 검을 받아 냈다. 릭스의 검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휘둘렀던 에드윈의 검하고는 달리 차분하고 정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겉보기와는 달리 검에 감정이 실린 모양인지 내리치는 힘은 에드윈보다도 강했다.
전에 몇 번 대련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이다. 한 번 받아치는 것만으로도 손목이 저릿할 정도였다.
며칠 전 에드윈과 대련할 때는 그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일부러 반격을 하지 않고 그의 검을 받아 내기만 했다. 오늘은 그날과 달리 적극적으로 대련에 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릭스는 반격할 틈을 한 번도 주지 않고 그를 몰아세웠다. 같은 기사를 상대할 때보다도 더 적극적인 것 같았다. 검을 간신히 받아 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오르고 벅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레이너드는 이를 악물고 힘으로 맞부딪힌 검을 밀어내는 릭스의 푸른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켜보는 구경꾼들도 숨을 죽인 가운데 연무장에는 목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소식을 듣고 달려왔는지 유리나가 저스틴과 에드윈의 사이에 껴서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레이너드는 그녀를 보며 반사적으로 웃다가 허리를 노리고 공격을 하는 검을 받아 냈다. 끼기긱, 부딪힌 목검이 미끄러지며 오싹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흐르는 땀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뜨이지 않을 때쯤, 빈틈이 보였다. 레이너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목검을 찔러 넣었다.
릭스의 반응이 느렸다. 그는 서둘러 옆구리를 방어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레이너드의 목검 끝이 그의 옆구리에 닿았다.
쥐 죽은 것처럼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믿기지 않는 결과에 다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그러나 딱 한 명.
“근성 하나는 인정할 만하군. 하긴 그러니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타지에서 버티다가 조기 졸업까지 하고 왔겠지.”
릭스만이 검을 거두며 기사의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잘 부탁한다.”
그는 레이너드의 어깨를 툭 친 뒤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사실 직접 대련을 한 레이너드를 비롯하여 지켜보던 기사들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이건 레이너드가 이긴 경기가 아니었다. 릭스가 그를 봐준 것이다.
레이너드는 멍하니 멀어지는 릭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에이든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내가 뭐랬어?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대련이 더 진심이 느껴지는 법이라니까! 내 말대로 검을 배우길 잘했지?
아마 에이든이 이 광경을 보고 있었더라면 그렇게 으스댔을 것이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유리나가 달려와 소맷자락으로 레이너드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보며 사랑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왔던 에드윈과 저스틴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형도 참. 이렇게 쉽게 져 줄 거면 지금까지 뭣하러 시간을 끌었대?”
“내 말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대련을 할 걸 그랬어. 그때 너 때문에 난 저 녀석이랑 대련도 못 해 봤잖아. 사실 지금도 분이 풀리지 않아.”
유리나가 말없이 돌아보자 두 남자는 지레 찔려 머리를 긁적였다.
“날씨가 좋네.”
“그러니까. 대련이나 하고 있기엔 너무 좋은걸.”
그러고는 릭스를 따라 서둘러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 * *
[이 녀석아, 축하한드아아아! 여기까지 소식이 들리더르아아아!]
난데없이 에이든 테시의 목소리가 방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결혼식 피로연 때 내놓을 디저트를 종류별로 맛보던 유리나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인상을 잔뜩 구긴 레이너드가 들고 있던 카드를 탁, 덮었다. 그와 동시에 “좋겠!”까지 울리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방금 그건…… 뭐였어?”
“아카데미에서 이상한 걸 발명했나 봐. 내가 있을 때만 해도 이런 건 없었는데.”
“뭔데 그래? 그거 에이든 군이 보낸 편지 아니야?”
옆으로 다가간 유리나가 카드를 집어 들자 레이너드가 기겁을 하며 그녀의 손에서 카드를 꺼내 갔다.
“열지 마. 목소리가 또 들릴 거야.”
“이 카드에서 난 소리야?”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는데 그가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음성을 전달하는 카드인가 봐. 원리는 모르겠는데 펼치자마자 목소리가 들리네.”
“아, 나 그런 거 봤어.”
레이너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봤어? 어디서?”
“아, 그게 실제로 본 건 아니고 소설에서…….”
유리나는 전생에서 보았던 마법 학교 판타지 소설을 생각하며 말꼬리를 흐리다가 말을 돌렸다.
“근데 그거 안 읽어 봐도 돼? 들어 보니까 우리 결혼 소식을 들은 것 같은데.”
“으음…….”
고민하는 것을 보아하니 읽고는 싶은데 또다시 펼쳐질 음성 마법 때문에 꺼리는 모양이다. 유리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난 이러고 있을게. 이럼 귀가 좀 덜 아플 거야. 그러니까 얼른 열어 봐. 나도 궁금해. 다른 사람들 소식도 있을 수 있잖아.”
“걔가 다른 애들의 소식을 전해 줄 만큼 꼼꼼한 애는 아니긴 한데…….”
레이너드는 귀를 꽉 누르고 있는 유리나를 흘끔 보았다가 카드를 펼쳤다. 그러곤 카드를 방 한구석으로 던졌다.
또다시 쩌렁쩌렁한 에이든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이 녀석아, 축하한드아아아! 여기까지 소식이 들리더르아아아! 좋겠드아아아! 나는 논문을 쓰느라 이렇게 고생을 진탕 하고 있는데 너만 행복할 수 있느야아아아!]
[아, 정말! 에이든 형! 축하를 해 주는 거야, 저주를 하는 거야? 아, 좀! 입 좀 다물어 봐.]
에이든의 목소리 사이로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나가 레이너드를 보며 눈썹을 들어 올려 보이자 그는 네이선의 목소리라고 대답해 주었다. 변성기가 와서 목소리가 변했단다.
열세 살 아이의 맑고 높은 목소리만 기억하던 유리나로서는 다소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하긴, 그럴 나이기는 하지. 남자애들은 사춘기 때 참 많이 변하니까.”
“응. 열다섯 살이니까.”
“키도 많이 컸겠다.”
“내가 졸업할 때 쑥쑥 크기 시작했으니 지금은 많이 컸을 거야.”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구들을 생각하는 건지 레이너드가 조금은 아련한 눈으로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바라보았다.
[느으슨, 으그 느!]
어째 조금 조용해졌다 싶었더니, 네이선이 에이든의 입을 막고 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토마스 형, 진짜로 이렇게 편지에 대고 말하면 레이너드 형한테 우리 목소리가 전달되는 거야? 그게 진짜 가능해?]
[뭐, 발명반 애들 말로는 그렇다고는 하던데, 아직 실험 단계인 제품이라 나도 확신할 수는 없어.]
[에이, 뭐야. 그럼 빈 카드만 갈 수도 있다는 거잖아.]
[그래도 속는 셈 치고 한번 말해 봐. 우리가 이렇게 떠드는 말도 다 저장될 것 같으니까, 본론만 간단히 얘기해. 걱정되면 따로 편지를 써서 같이 보내면 되지.]
[아, 그렇지! 레이너드 형, 내 말 들려?]
해맑게 묻는 목소리에 레이너드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 야! 통신 마법도 아닌데 그렇게 물어서 뭐하냐. 답도 못 들을 텐데.]
[그냥 한번 물어본 거지! 아, 정말! 토마스 형, 에이든 형 좀 데리고 나가 봐. 에이든 형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겠어!]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읍!]
레이너드가 저 녀석은 아직도 저런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토마스 형, 에이든 형 꽉 잡고 있어! 어디까지 했더라. 아, 맞다! 레이너드 형, 봄에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어. 아카데미 전체가 형 결혼 소식으로 난리가 났어. 그때 봤던 그 엄청 예쁜 누나와 결혼하는 거 맞지?]
이번엔 유리나가 네이선이 보는 눈이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형 결혼식에 가고 싶은데……. 형, 알다시피 우리는 형과 달리 똑똑하지 않아서 이번에 졸업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다들 열심히 졸업 논문을 쓰고 있기는 한데 교수님들 반응이 별로 좋지는 않아. 그래도 이번에 졸업하는 사람이 있으면 꼭 갈게.]
유리나는 머릿속으로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지금은 고요의 달 중순이었다. 7학년을 마친 레이너드의 친구들은 한창 졸업 논문에 시달리고 있을 시기였다.
[그러게 1년만 늦게 하지 그랬어! 나이도 어린데 왜 벌써 결혼을 하고 그래!]
[내년에 졸업은 할 수 있고? 지금 형 하는 걸 봐선 내년에 한다고 해도 못 갈 것 같거든!]
네이선과 에이든의 가벼운 말다툼이 다시 시작됐다.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도 그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유리나는 저도 모르게 즐겁게 웃으며 레이너드의 얼굴을 살폈다.
처음에 시끄럽다고 카드를 덮을 땐 언제고, 그는 이 시끄러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이 촉촉했다.
유리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허벅지 위에 놓인 그의 손을 토닥여 주었다.
레이너드가 손을 뒤집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아, 우리 아카데미는 대체 왜 졸업 전까지 왕국 밖에를 못 나가게 하는 건지 모르겠어. 아무튼 레이너드 형, 결혼 축하해! 가지 못하더라도 여기서 축하해 줄 테니까 우리가 못 간다고 해서 너무 섭섭해하지는 않았으면 해. 우리 진짜 열심히 논문 쓰고 있다고! 형처럼 능력이 좋지 않아서 그렇지.]
[형, 축하해!]
[나도 축하해! 행복해야 해!]
네이선 목소리에 이어 알렉스와 토마스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끝났나?”
“음, 글쎄…….”
가장 중요한 에이든 군의 인사가 빠졌는데? 유리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진 음성 편지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레이너드가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에이든 녀석은 시끄럽다고 진짜로 밖으로 쫓겨났나 봐. 그걸 깜빡하고 편지를 마무리 지었나 보지.”
코로 숨을 한 번 들이쉰 레이너드가 태연하게 중얼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던져두었던 편지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허리를 숙여 편지를 집으려던 때였다.
[야, 레이너드. 듣고 있냐? 설마 내 축하도 듣지 않았는데 벌써 끈 건 아니겠지?]
아까의 까랑까랑한 목소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차분한 에이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에이든 형. 아까 내가 그렇게 물을 때는 통신 마법이 아니니, 어쩌니 하더니만.]
[이 형이 오랜만에 진지하게 말하는데 조용히 좀 해 봐, 네이선.]
[흥.]
어느새 레이너드는 편지를 들어 땅에 닿았던 부분의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어 냈다.
유리나는 그의 뒤로 바짝 다가가 등 뒤에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야, 내가 너 예전부터 카르티아 영애와 잘 될 줄 다 알고 있었어. 카르티아 영애 만나겠다고 우리 버리고 조기 졸업도 하더니 행복하냐? 너도 우정보다는 사랑이다 이거지?]
“…….”
[이 나쁜 자식아. 너 못 본 지 이제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엄청 보고 싶다아! 너 없으니까 같이 대련할 애도 없어. 검술과 애들은 치사하게 맨날 진다면서 나랑 대련도 안 해 줘. 넌 맨날 져도 나랑 대련을 해 줬는데 말이지. 내 동생들도 너 언제 또 놀러 오냐고 편지로 계속 물어. 나쁜 꼬맹이들. 내가 언제 오냐고는 한 번도 물은 적 없으면서.]
레이너드가 어깨를 떨며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사라는 네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펑펑 울 거야. 지난 겨울 방학 때에도 너랑 결혼하겠다며 노래를 부르는 거 있지? 테시 영지는 소식이 늦어서 아직 네 결혼 소식을 못 들었을 거야. 조만간 들으면 난리 나겠다.]
그 말을 끝으로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유리나는 그 틈을 타서 까치발을 하고는 레이너드의 어깨에 턱을 괴며 물었다.
“사라가 누구야?”
레이너드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에이든네 첫째 동생.”
“그런데 결혼 얘기는 뭐야? 나한테는 황태자 전하 만나지 말라고 했으면서, 넌 나 몰래 무슨 짓을 하고 다녔어?”
“그러니까…….”
때마침 구세주처럼 카드에서 에이든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레이,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야. 레이라고 불러도 되지? 안 되면 네가 어떡할 거야. 불만 있으면 이리로 오든가!]
[애도 아니고.]
네이선이 혀를 쯧쯧 차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 결혼 진심으로 축하해. 앞으로는 혼자 외롭지 말고 카르티아 영애와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해. 가지는 못하더라도 이곳에서 축하해 줄게.]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유리나는 그가 울먹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만큼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앞으로 넌 쭉 제국에서 살 텐데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졸업하자마자 너네 집부터 쳐들어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올해는 힘들겠지만 내가 내년엔 꼭 졸업해서 갈 테니까, 꼭 기다려!]
[내년에 졸업할 수는 있고? 형, 그냥 지금이라도 검술과로 전과하는 게 어때? 내가 보기엔 검술과 7년 더 다니는 게 마법과 졸업 논문 통과하는 것보다 훨씬 쉬울 것 같은데!]
[네이선, 좀 조용히 해! 내가 교수님들을 협박해서라도 내년에는 졸업할 거니까! 여기서 더 썩을 수는 없어! 아니다! 못 갈 게 뭐야?]
에이든이 갑작스럽게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깟 졸업 논문 따위가 우리 우정을 가로막을 수는 없지! 너 딱 기다리고 있어! 내가 국경을 넘다가 끌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네 결혼식에는 꼭 가고 만드아아아!]
[형, 그러다가 걸리면 졸업 못 할 수도 있어!]
[넌 좀 조용히 해! 국경 넘다 졸업 못 하든, 졸업 논문 때문에 졸업을 못 하든 매한가지니까! 내가 아주, 논문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 교수들을 부숴 버려, 정말! 지들이 교수면 다야!]
[형, 형! 목소리 좀 줄여! 그러다 누가 듣겠어!]
[들으라고 해! 들으나 안 들으나 졸업 못 하는 건 어차피 똑같다니까!]
진지해졌던 분위기가 금세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역시 에이든 군이라니까.’
울음기 섞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음성 편지가 끝이 났다.
에이든의 목소리가 진지해졌을 때부터 거칠게 호흡을 하던 레이너드는 편지가 끝이 나자마자 편지에 얼굴을 묻었다. 유리나는 위아래로 들썩이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많이 보고 싶을 테지.’
레이너드는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줄곧 그들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6년간 매일같이 붙어 다니던 친구들인데 정이 안 들었을 수가 없었다.
특히 에이든은 레이너드가 낯선 곳에서 외로워하지 않도록 그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심지어 방학 땐 갈 곳이 없는 그를 자신의 저택에 데려가기도 했다.
그런 우정을 잘 알았기에 유리나는 결혼을 내년에 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에이든의 말처럼 올해 졸업하는 건 힘들어도 내년에는 할 수 있을 테니 조금 더 기다려서 에이든이 참석하기를 기다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지금 결혼한다면 레이너드 쪽의 하객은 아무도 없었다. 부모도, 친척도, 들러리를 서 줄 친구들도 전혀 없이 그 혼자였다.
유리나는 그게 마음에 쓰였지만 정작 레이너드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네이선의 주장처럼, 내년으로 미룬다고 해서 네 친구가 다 올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너와 좀 더 빨리 가족이 되고 싶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유리나는 더 이상 결혼을 미루자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레이너드를 보니 속이 상했다.
이제 와 결혼을 미룰 수는 없었다. 레이너드도 미루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레이, 우리 크론 왕국으로 놀러 갈까?”
한동안 손에 얼굴을 묻고 있던 레이너드가 그 한마디에 고개를 돌려 유리나를 쳐다보았다.
유리나는 그의 뺨에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을 닦아 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에이든 군이 못 오는 거지, 우리가 못 가는 건 아니잖아. 에이든 군이 결혼식에 참석 못 하는 건 아쉽지만, 얼굴은 보러 갈 수 있어.”
“…….”
“여름 방학에 맞춰서 가면 테시 영지에도 가 볼 수 있지 않을까? 나, 에이든 군이 말했던 시골 영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
“그러니까 가자.”
멍한 얼굴로 유리나를 바라보던 레이너드가 복잡한 얼굴을 했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우울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결혼식 준비는 할 게 많다.
한국에 있을 때도 결혼식 준비가 쉽지 않다는 것을 들었지만, 이곳에서는 특히 더 복잡했다.
귀족가, 그것도 제국에서 손꼽히는 귀족가의 경사로서 온 가문이 결혼식 준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레이너드는 그 나름대로 준비를 한다고 바빴다. 얼마 전 작위를 하사받으면서 영지와 수도의 저택을 같이 받은 그는 카르티아 후작의 도움을 받아 가문을 꾸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카르티아 저택에서 독립해 자신의 저택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유리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정식으로 찾아오려고 하면 쌍둥이들이 어딜 오냐며 쫓아냈고, 마법으로 몰래 찾아오는 것은 혹시라도 들켰다가 괜히 미운털만 박히는 건 아닌가 싶어 자제했다.
덕분에 유리나는 간간이 그와 편지를 주고받거나 통신 마법 도구를 이용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온 저택이 바쁜데도 정작 당사자인 유리나는 한가했다. 가족들, 특히 쌍둥이 오빠가 나서서 그녀의 몫까지 대신 준비를 해 주고 있는 덕분이었다. 이 저택에 있을 시간도 얼마 안 남았을 텐데 그냥 푹 쉬면서 추억이나 더 쌓으라나 뭐라나.
하지만 유리나가 보기에는 사실 이 오빠들이 나랑 시간을 보내려고 그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두 오빠들은 준비를 핑계로 그녀를 계속 찾아와 이야기를 하다 돌아갔다.
그렇게 여유롭게 지내던 그녀에게도 결혼식에 관해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결혼식 하객 명단을 정리하던 유리나가 문득 깃펜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너무 적은데…….’
유리나의 하객과 레이너드의 하객 수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카데미를 다니지도 않고, 제대로 사교 활동을 하기 전이라 유리나도 사적으로 초대할 사람은 별로 없었다.
고작해야 어릴 적부터 가문끼리 교류를 하며 친해진 친구 몇 명. 그래도 카르티아 가문의 명성 때문에 결혼식에 올 사람은 차고 찼다.
어떤 이들은 초대받고 싶어서 안달이 날 정도로 하객의 수가 많아서 후작 부인의 도움을 받으며 명단을 추리고 추려야 했다.
반면 레이너드의 하객은 머리를 싸매고 곰곰이 고민해 보아도 그 수가 열 손가락을 넘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그를 돌봐 준 마리 아주머니네 가족과 아카데미 친구들 그리고 허트슨 교수를 비롯하여 그를 아꼈다던 교수 몇 명. 그게 전부였다.
‘아카데미 친구들이 올 거란 보장은 없고…….’
얼마 전 온 편지를 보아하니 못 올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했다. 아니, 99.9 퍼센트의 확률로 못 올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도 100퍼센트라고 생각하지 않은 건 0.1 퍼센트의 희망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허트슨 교수 또한 확실히 올 수 있을 거란 장담은 하지 못했다. 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워낙 바빠 시간을 내는 것이 힘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유리나는 그의 사정을 이해했다.
‘오고 가는 데만 한 달이 걸리니.’
아카데미 방학 때라면 모를까, 강의와 연구가 겹치면 시간을 내기가 힘들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리 아주머니를 만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처음 소식을 전했을 때 그녀는 어떻게 자신 같은 평민이 그런 곳에 갈 수 있겠냐며 한사코 거절했지만, 유리나의 끈질긴 설득 덕분에 꼭 오겠다고 약속을 해 주었다.
유리나는 에이든을 비롯한 아카데미 학생들의 이름을 적어 놓은 곳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레이도 기대 안 하는 것 같던데.’
기대를 안 한다고 해서 실망을 안 한다는 건 아니었다. 유리나는 한참 고민한 끝에 제 쪽에 적혀 있던 데이브의 이름을 지우고 레이너드의 하객 명단에 데이브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래도 여전히 빽빽한 유리나 쪽 명단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적은 숫자였다. 이마저도 다 못 온다면…….
‘제발 한 명이라도 올 수 있기를.’
유리나는 유독 크게 써넣은 에이든의 이름을 보며 진심으로 응원했다.
교수를 협박해서라도 졸업 논문을 통과시키든, 몰래 국경을 넘든, 어떻게 해서라도 와 줬으면 좋겠다.
* * *
유리나는 베시가 발 앞에 놓아 준 하얀 구두 다섯 켤레를 보며 의아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 마음에 들었던 건데…….’
한창 결혼 드레스 준비로 바쁠 때 쌍둥이들은 수도에서 유명한 디자이너들을 수소문해서 데려왔다.
예식에 쓸 구두는 한 켤레면 된다는 유리나의 만류에도 두 사람은 우리 동생은 최고로만 꾸며야 한다는 둥, 유리나에겐 뭐든 어울려서 하나만 고를 수 없다는 둥 궤변을 늘어놓으며 우겼다.
원래도 유리나라면 사족을 못 쓰긴 했지만, 유리나가 결혼 의사를 밝힌 이후로 쌍둥이는 그녀에게 뭐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가족을 떠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거라고 유리나가 거듭 강조해도 두 사람은 그녀를 저 멀리, 몇 년은 족히 만나지 못할 곳으로 떠나보내는 것처럼 굴었다.
그 결과가 이거다. 각각 다른 사람이 만든 구두 다섯 켤레.
쌍둥이들이 최고의 구두를 만들라고 닦달을 하여 탄생한 구두들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참 예뻤다. 유리나 또한 디자이너들이 가져왔던 시안을 봤을 때 퍽 마음에 들었었다.
개중 한두 개는 완성품이 기대될 정도였다. 실제로도 완성품이 하나둘 도착했을 때 베시와 카르티아 후작 부인과 함께 살펴보며 감탄사를 흘리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드레스를 입고 직접 구두를 신으려고 보니 어딘가 탐탁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분명 예쁘고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쏙 드는 것도 아니었다.
구두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생각을 읽어 냈는지 베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에 안 드세요?”
“아냐, 마음에 들어. 예뻐.”
유리나는 베시를 향해 웃어 보인 뒤 그녀의 도움을 받아 구두를 하나하나 신으며 거울을 살폈다. 그러나 오히려 직접 신어 보니 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의외로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나도 그럴 때가 있었단다.”
“어머니도요?”
“그럼. 나도 결혼식이 다가올수록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였단다. 드레스도, 액세서리도, 구두도……. 이것 말고 더 예쁘고 나한테 어울리는 것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기억을 되짚었다. 안 그래도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외모로 저런 미소를 짓고 있으니 결혼을 앞둔 이십 대 여인처럼 보였다.
유리나는 문득 결혼을 앞뒀을 때 그녀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어머니는 어떠셨는데요?”
“설렜지.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고.”
유리나가 알고 있기로는 카르티아 후작 내외는 연애결혼과 별다를 바가 없는 정략결혼을 했다.
가문 어른들에게 이끌려 어쩔 수 없이 만나기는 했는데 서로 잘 통하고 잘 맞아서 결혼할 때쯤엔 눈만 마주쳐도 불타는 연인 사이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랬던 후작 부인도 결혼 전에 생각이 많았던 걸까.
“가족들의 보호 속에서 살아온 내가 또 다른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과연 난 이 사람을 평생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선택에 정말 후회는 없을까.”
“음…….”
유리나는 그녀의 말에 공감이 잘되지 않았다. 그녀가 나열한 생각들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그래도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떠세요? 그 선택에 후회를 하세요?”
“어때 보이니?”
그녀가 찻잔을 들며 웃었다. 그늘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표정이다.
“좋아 보이세요.”
후회를 한다면 저런 얼굴을 하지 못하리라.
“그렇지? 물론, 늘 좋았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후회는 없어. 이렇게 예쁜 딸도 있고 말이야. 그러니까 너도 괜찮을 거란다.”
단순히 구두 이야기가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로 흘러갔는지 알 수가 없어 유리나는 뭐라 반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웃고 말았다.
그녀의 어색한 미소를 보던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구두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지? 마음에 드는 것을 찾기 힘들다면 엄마랑 같이 고르지 않으련?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 사람이 필요할 테니까. 베시는 뭐든 다 예쁘다고 했지?”
보지도 않았는데도 마치 눈앞에서 모든 것을 구경한 사람처럼 정확한 지적이었다. 유리나는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베시는 유리나가 다섯 켤레를 모두 신어 보는 동안 아가씨에게 정말 잘 어울린다며 영혼을 다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더 고르기 힘든 것도 있었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과 살펴보며 유리나는 구두 하나를 골랐다.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새하얀 구두. 최고는 아니었지만 최선의 선택이라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구두에 대한 것은 잊고 다른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이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쌍둥이들이 업무 때문에 수도를 떠난 틈을 타서 레이너드가 오랜만에 카르티아 저택을 찾아온 날이기도 했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과 레이너드와 함께 응접실에서 간단한 담소를 나누던 유리나에게 집사장인 로버트가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손바닥 네 개를 합쳐 놓은 것보다도 큰 상자가 들려 있었다.
“방금 아가씨께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일 처리가 깔끔한 그답지 않게 말을 흐리는 게 영 수상했다.
“무슨 일이지?”
유리나 대신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묻자 로버트가 난감한 얼굴로 대꾸했다.
“발신인이 없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레이너드가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유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버트가 레이너드에게 상자를 건네주었다.
로버트의 말마따나 레이너드가 가져온 상자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보통 선물을 보낼 때면 편지를 동봉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가문의 인장이라도 찍어 보낼 텐데 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았다.
레이너드가 상자에 마법을 흘려 보냈지만 특별한 반응도 없었다. 그는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거 내가 열어 봐도 돼?”
유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상자를 열려고 했다. 그러나 상자는 힘으로 열리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법을 이용하여 열자 그제야 상자가 열렸다. 레이너드가 눈을 찌푸렸다. 놀란 건 유리나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을 이용해서 상자를 봉인하다니?’
흔히 쓰이지 않는 마법이다.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마법을 쓸 수 있어야 가능한 방식이라 어지간히 기밀이 아니고서야 굳이 쓸 일이 없었다.
당연히 유리나에게 선물이랍시고 기밀문서를 보낼 사람도 없었고.
“여기 편지가 있는데?”
안을 살펴보던 레이너드가 상자 안에서 편지를 꺼내 마법으로 확인했다. 몇 가지 마법으로 꼼꼼히 살핀 끝에 편지에 해가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 뒤에야 그가 유리나에게 편지를 건넸다.
밀랍으로 봉인된 편지엔 상자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인장이 없었다. 그저 초록색 밀랍 인장 위에 갓 꺾은 것처럼 싱싱한 노란 꽃이 하나 붙어 있었을 뿐이다.
왠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유리나는 편지를 뜯었다.
[친애하는 카르티아 영애에게.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레이너드 경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제국 밖에서도 영애의 결혼 이야기로 떠들썩하더군요.
이 편지가 달갑지 않을 거란 걸 알아요. 제가 영애께 이럴 편지를 보낼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수차례 망설이다가 염치도 없이 이렇게 펜을 들었답니다.
이 편지가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가 될 거예요.
결혼 진심으로 축하해요.
결혼식에 참석할 수는 없겠지만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신부일 거라고 생각해요.
꼭 행복하길 바랄게요. 나쁜 기억은 제가 모두 가져가서 속죄하고 살 테니 영애께선 행복하기만 하세요.
그리고 고마워요.]
수신인은 있는데 발신인은 없는 편지였다. 그러나 유리나는 그 발신인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쓰고 싶었을 테지만 쓸 수 없었을 그 이름.
리디아 데프론.
이젠 그 어디서도 사용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어쩐지 입 안이 쓴 것 같아 유리나는 발신인이 적혀 있어야 했던 편지지 하단의 여백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주인공으로 찬란하게 빛났어야 할 당신의 인생이 어쩌다 이리되었는지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당신의 인생을 바꿔 버려서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은 있었다.
‘당신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모든 것을 다 잃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 오로지 카리온만 가진 그 삶이 불행할지 행복할지 솔직히 모르겠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다. 당신이야말로 이런 날 위선자라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이건 진심이다.
우울한 기분으로 편지를 접은 유리나는 레이너드에게서 상자를 건네받았다.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건 새하얀 구두였다.
‘대체 언제 이런 걸 마련한 걸까.’
유리나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구두 한 짝을 집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진주 가루를 뿌린 것처럼 은은하게 빛이 나는 구두는 그녀의 취향에 쏙 맞았다.
그녀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구두를 신었다. 신자마자 그녀의 발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는 큰 구두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레이너드가 깜짝 놀라 마법을 쓰려고 했지만 유리나는 차분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 왠지 이 마법이 자신에게 해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빛을 뿜어내던 구두가 서서히 작아지더니 이내 유리나의 발에 착 달라붙었다. 유리나는 마법으로 크기를 맞춘 구두를 신고 베시가 가져다준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구두를 살폈다.
“어때?”
“예쁘네.”
“그렇지?”
유리나는 구두를 좀 더 살펴보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결혼식 때 이걸 신을래요.”
지금 입고 있는 초록색 드레스에는 조금 튀긴 하지만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으면 잘 어울릴 테다.
“그래, 예쁘구나. 그런데 누가 보낸 건지 알겠니?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할 텐데.”
카르티아 후작 부인의 걱정 어린 말에 유리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오랜 친구에게서 온 선물이에요.”
유리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열린 창틈 사이로 따뜻한 바람이 흘러들어 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에는 꽃들이 가득 피고 나무에는 연녹색 이파리들이 돋아났다.
완연한 봄이었다.
열여덟 살의 봄. 원래라면 기나긴 겨울 동안 땅속에서 움츠리고 있던 새싹이 돋아나듯, 오래 기다렸던 원작 소설이 시작될 시간.
하지만 이제 그녀가 읽었던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 * *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결혼식 아침.
새벽부터 일어나 베시의 손에 이끌려 정신없이 움직인 유리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도 초조한 듯 꼼지락거리자 뒤에서 머리를 말려 주던 베시가 거울을 통해 눈을 맞추며 웃었다.
“많이 긴장되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사실 말은 안 했지만 저는 엄청 긴장돼요.”
그 말 그대로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베시의 얼굴을 보며 유리나는 굳었던 표정을 풀고 웃었다.
“결혼을 하는 건 난데 베시가 왜 긴장을 해?”
모르는 사람이 두 사람의 표정만 본다면 베시가 결혼을 한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건 그렇지만 왠지…….”
베시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입술을 삐죽였다.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지만 그래도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는지 그녀는 유리나에게서 등을 돌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베시의 어깨가 위아래로 심하게 들썩이며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별 내색 없이 유리나의 치장을 도와주던 다른 하녀들도 베시의 울음을 시작으로 눈물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울음바다 한가운데에서 당사자인 유리나만 멀쩡한 기이한 광경이 잠시 연출되었다.
잠시 뒤 진정을 한 베시가 코를 훌쩍이며 유리나의 머리카락을 땋아 주었다.
“그냥 왠지 아가씨가 멀리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렇지만 나랑 같이 갈 거잖아.”
오랫동안 유리나의 전속 하녀로 일해 온 베시는 같이 가 줄 수 있느냐는 유리나의 제안에 기다렸다는 듯이 승낙했다.
“그건 아는데 왠지 기분이 그렇다는 거예요. 우리 아가씨께서 벌써 이렇게 크시다니…….”
“나도 사실 실감이 안 나기는 해.”
작게 대꾸한 유리나는 창밖을 보며 화제를 돌렸다.
“혹시 아직도 크론 왕국에서는 아무도 안 도착했니?”
기껏 감정을 가라앉힌 베시가 다시 울상이 되었다.
“네. 오셨다면 진작 오셨어야 했는데.”
“그렇지.”
어쩔 수 없이 긍정하면서도 유리나는 미련을 떨쳐 내지 못해 계속 창문을 바라보았다.
* * *
단장이 마무리되어 갈 즈음이었다. 복도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장 로버트가 들어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냐고 채 묻기 전에 그의 등 뒤에서 웬 앳된 소년 하나가 고개를 삐쭉 내밀었다. 분명 처음 보는데도 이상하게 낯이 익은 듯한 얼굴이었다.
유리나와 시선이 마주친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환히 웃었다.
“누나!”
누나?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부르는 건가? 유리나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방으로 흘러들어 왔다.
“야, 야! 예의 없게 굴면 어떡해! 집사가 먼저 소식을 전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뭐래, 형이 더 예의 없거든. 엄청 시끄러워.”
유리나는 눈을 살짝 찌푸리며 소년의 얼굴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폈다.
“아…….”
아는 얼굴이다.
“네이선?”
이름을 들은 소년이 유리나에게로 다시 시선을 주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누나!”
* * *
아카데미에서 온 사람은 총 네 명이었다. 에이든, 네이선, 알렉스, 토마스.
“대체 어떻게 온 거예요?”
네 사람이 모두 오기를 바라긴 했지만 진짜로 다 올 줄은 몰랐던 터라 유리나는 다소 의아한 듯 물었다.
“음. 그게…….”
말을 아끼는 에이든을 보던 유리나는 문득 그가 음성 마법 편지에서 쩌렁쩌렁 외쳤던 말을 떠올렸다.
“진짜로 졸업도 하지 않고 불법으로 국경을 넘은 건…….”
“졸업을 한 거냐고 물어보는 게 먼저 아닌가요?”
유리나는 에이든의 대답에 멋쩍게 웃었다. 졸업을 못 할 거라고 단정하고 있다 보니 이렇게 와도 졸업을 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에이든은 유리나의 질문에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졸업을 한 거예요? 네 사람 모두?”
“에이, 설마요. 제가 어떻게 한 번에 졸업을 하겠어요.”
그가 손사래를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 진짜 몰래 온 거예요?”
“에이든 형이라면 그럴 법도 하지만, 저를 에이든 형이랑 같은 취급하지 말아요, 누나.”
네이선이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몸을 떨었다. 무려 3년 만에 보는 건데도, 친화력이 좋은 그는 줄곧 알고 지낸 사람처럼 유리나를 누나라고 부르면서 살갑게 굴었다.
솔직히 유리나는 아이의 태를 벗은 네이선에게서 누나 소리를 듣는 것이 다소 어색했다. 그래서인지 반말 대신 존댓말이 튀어 나갔다.
“그럼 어떻게 오신 거예요? 크론 왕국을 벗어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게 말이죠.”
에이든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마치 대외 비밀을 유리나에게만 특별히 알려 주는 것처럼 비장하게 속삭였다.
“특별 허가를 받았습니다.”
“특별 허가요?”
“레이너드는 아카데미의 자랑이자, 크론 왕국의 자랑 아니겠습니까?”
글쎄, 아카데미의 자랑은 그렇다 치더라도, 제국에서는 제국의 자랑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 이 말을 황실에서 들으면 외교적인 문제로 번질 수도 있겠다는 우습지도 않은 생각을 하며 유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죠. 그래서요?”
“그런 레이너드가 결혼을 한다는데 왕국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죠. 게다가 레이너드의 친구들은 다 왕국에 있잖아요. 왕국 차원에서 특별 축하단을 보내지는 못하더라도 친구들이 들러리로 가야 하는 것은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어요.”
“그렇군요.”
“사실 그건 대외적인 이야기고, 제가 교장님께 건의를 드렸습니다.”
“건…… 의요?”
대체 무슨 건의?
떨떠름한 유리나의 목소리를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에이든이 당당하게 자랑을 이어 갔다.
“레이너드의 가장 친한 친구는 바로 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제가 결혼식에 참석 못 하는 게 말이 되나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를 포함해서 레이너드와 친했던 애들 중에 이번에 졸업한 애들이 아무도 없어서……. 그렇다고 안면이 없는 사람들을 하객이라고 보낼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레이너드와 크론 왕국의 친분을 과시하고, 앞으로도 인연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 하객을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졸업생이 없어서 아무도 보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우스우면서도 슬픈 이야기였다.
“그래서 이번에 특별히 제국 나들이를 허락받았습니다! 사실 제가 논문 쓰는 건 자신이 없어도 사람 하나 설득하는 덴 자신이 있거든요!”
에이든은 눈물 나는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 일이다. 그때 그는 레이너드의 결혼식에 참가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한창 이를 악물고 졸업 논문을 쓰고 있었다.
에이든은 20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늘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여정이 힘들기는 해도 꼭 하겠다 마음먹고 이를 악물고 노력한다면 제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언젠가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졸업 논문을 쓰기 시작한 지 넉 달 만에 그는 지난 20년간 굳게 믿어 왔던 제 신념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안 되는 것도 있어.’
그래, 인정하기는 싫지만 세상만사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는 법은 아니다.
그걸 깨달은 그날 밤, 에이든은 몇 년 전 테시 영지를 방문했다가 자신에게 마법사의 재능이 있다며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보라고 권유했던 이름 모를 마법사를 저주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대충 비쩍 마르고 눈이 퀭한 전형적인 마법사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씨근덕거렸다.
그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순간 졸업 논문 때문에 이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둘도 없는 친구의 결혼식에 가지 못한다는 불안감도 느끼지 못했을 텐데. 그 마법사만 없었더라면, 검술과에 입학을 했더라면!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문득 그 마법사가 없었더라면 아예 수도로 오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조금 화를 가라앉히고 보던 참고 자료를 다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써지지 않는 논문이 써질 리가 없었다. 그는 도서관을 박차고 나가 교장실로 향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에이든의 모습에 아카데미 교장은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에이든은 굴하지 않고 그에게 자신이 제국으로 가야 하는 일을 하나둘 조목조목 따지기 시작했다.
―레이너드는 아카데미를 드물게 조기 졸업한 수재로서 크론 왕국에서뿐만 아니라 제국이나 다른 왕국에서도 눈여겨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미 크론 왕국에도 레이너드의 결혼 소식이 쫙 퍼져 있고요.
결혼 이야기를 하는데 왠지 그간 졸업 논문을 쓰면서 받았던 울분까지 토해져 나와 그의 언성이 높아졌다.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있는데 정작 아카데미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무슨 이야기가 퍼져 나오겠습니까? 사실 아카데미에서 레이너드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 왕국이나 아카데미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레이너드가 조기 졸업까지 해서 제국으로 돌아간 것이 사실 그런 부당한 대우 때문은 아니냐는 말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레이너드가 조기 졸업을 해서 하루라도 빨리 돌아간 이유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에이든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는 뻔뻔하게 계속 주장했다.
그 와중에 에이든은 자신과 룸메이트들의 졸업 논문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졸업 논문을 못 쓸 것 같아서 이런 제안을 하러 달려왔다는 이야기를 하면 논점이 흐려질 것 같았던 탓이다.
얼굴까지 새빨갛게 물들이며 열변을 토하는 에이든의 말을 듣던 교장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의 말에 긍정했다.
레이너드와 친했던 학생들과 교수를 중심으로 축하단을 꾸려 선물과 함께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졸업 논문이 통과하지 않더라도 이번만은 특별히 왕국 국경을 벗어나는 것을 허락받았다.
“레이너드, 그 녀석은 당연히 저희가 못 오는 걸로 알고 있었겠죠.”
유리나는 차마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었다.
“레이가 여러분들이 오면 좋겠다고 했어요.”
오면 좋겠다고 했지, 올 거라고 기대했다고는 안 했다. 그 말에 담긴 속뜻을 읽었는지 에이든이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말도 안 하고 조용히 온 거예요. 그 녀석 좀 놀래 줄려고. 사실 수도에도 며칠 전에 도착했는데 일부러 당일에야 찾아온 거예요. 그 녀석이 절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가 되네요!”
“또 우는 거 아냐?”
에이든의 등 뒤에서 네이선이 키득키득거렸다. 알렉스와 토마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모든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뒤에야 유리나는 마음 놓고 웃을 수가 있었다. 비록 졸업 논문은 통과하지 못했지만 국경을 몰래 넘은 것도, 교수를 협박한 것도 아니고 정식으로 찾아온 것이니 얼마나 좋나.
여전히 자신의 하객석과 비교하면 수가 적겠지만 레이너드의 하객석에도 사람이 찰 거라고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게다가 저 4인조라면 유리나 쪽 하객들보다도 더 열렬하게 그를 축하해 줄 것이다.
“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진심이 담긴 그녀의 말에 에이든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었다.
“당연한걸요. 그나저나 인사가 늦었네요. 결혼 축하드립니다.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아무렇지 않게 칭찬을 늘어놓은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레이너드 녀석 곁에 있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때마침 집사장 로버트가 시간이 다 되었다고 알려 왔다. 유리나는 베시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게 대답했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 * *
유리나와 달리 레이너드는 준비할 것이 많지가 않았다.
카르티아 저택의 하녀들과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결혼 준비를 일찌감치 마친 그는 유리나의 세 오빠들, 특히 쌍둥이에게 붙잡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란 대부분이 잔소리나 불평불만이었다.
“우리가 자주 찾아간다고 해서 불청객 취급하지 말고, 유리나가 이곳에 놀러 오고 싶다고 하면 막지 말고 보내 줘야 한다.”
“그게 불만이면 결혼하지 말든가. 아직 식을 치르기도 전이니 지금이라도 취소할 수 있는데.”
싫다고 하면 정말로 결혼식을 엎을 것처럼 보이는 쌍둥이를 향해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
쌍둥이를 상대하면서도 그의 정신은 오로지 유리나가 있을 방으로 향해 있었다.
제국에는 신랑이 결혼식 전에 신부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면 부부가 불행해진다는 속설이 있었다.
결혼식 시작 전 신부를 보고 미의 여신보다 예쁘다고 말했다가 여신의 저주를 받았다던 신랑에 대한 신화가 예로부터 전해져 오고 있던 탓이다.
레이너드는 그 속설을 믿지는 않았지만 유리나와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카르티아가 사람들도 결혼식까지 참으라고 말을 보탠 까닭에 하루 종일 유리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사실, 오늘뿐만 아니라 그간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이런저런 방해 때문에 유리나를 제대로 볼 수가 없던 터라 그녀를 향한 갈증이 남아 있었다.
오늘 이후로 누구의 방해도 없이 제 본능과 욕심대로 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괴롭다.
이제 결혼식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왜 이리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건지.
결혼식장 앞에서 유리나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레이너드는 문득 베시의 도움을 받고 걸어 나오는 유리나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옆에서 계속해서 레이너드에게 말을 하던 쌍둥이들은 막냇동생의 모습에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레이너드가 쌍둥이를 지나쳐 유리나에게 손을 뻗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노란 꽃다발을 들고 있는 유리나의 모습은 그가 하루 종일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예쁘다.”
유리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몽롱한 얼굴로 감탄사를 흘리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뒤쪽을 가리켰다.
“내가 준비한 선물이 있는데.”
그녀의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레이너드! 내가 왔다아아아!”
레이너드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단번에 알아챘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유리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본 레이너드는 낯익은 적갈색 머리의 청년을 발견했다. 털털하게 다녔던 아카데미 시절 때와 달리 잘 차려입은 에이든이 달려오다시피 그에게로 다가왔다.
“표정 좀 봐. 누가 보면 유령이라도 본 줄 알겠어!”
이 상황이 바로 이해가 가지 않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이너드를 향해 에이든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쪼르르 따라온 네이선, 알렉스, 토마스 또한 에이든 뒤에 서서 레이너드의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 관찰했다.
“레이너드 형이 잘생겼다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까 확실히 다르네.”
“그러게.”
“제국이 왕국보다 훨씬 좋긴 좋나 봐. 아카데미에 있을 때보다 얼굴이 더 환해졌어.”
“그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런 거겠지!”
유리나를 보며 대답한 네이선이 제 대답에 스스로 만족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리나와 아카데미 4인조를 번갈아 보던 레이너드가 힘겹게 입을 뗐다.
“아니, 대체 어떻게 왔어?”
“어떻게 오기는! 졸업하고 왔지!”
“그럴 리가 없잖아.”
즉각적인 대답에 에이든이 충격받은 듯한 얼굴로 혀를 찼다.
“야, 너무한 거 아니냐? 내가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해야겠어?”
“특별 허가를 받고 왔대. 네 결혼식에 꼭 와야 한다면서.”
유리나가 덧붙인 설명에 레이너드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뭐라고 했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온다고 했지? 어때? 이 정도 했으면 반겨 줘야 하는 거 아냐? 그만 놀라고 기쁜 척이라도 좀 해 봐. 울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왔냐니.”
에이든이 레이너드를 향해 두 팔을 쫙 벌렸다.
“자, 자. 이리 와. 오랜만에 보는데 좀 안아 보자.”
레이너드가 망설이자 에이든이 손뼉을 두어 번 짝짝 치고는 다시 팔을 벌렸다.
“팔 떨어지겠다. 얼른.”
그의 채근에도 레이너드는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보다 못한 유리나가 등을 가볍게 떠밀어 주자 그제야 그는 걸음을 옮겨 에이든을 꽉 끌어안았다.
“잘 왔어. 와 줘서 고마워.”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뜸 들이기는.”
에이든이 레이너드의 등을 두드리며 눈짓하자 지켜보고 있던 나머지 삼인방이 두 사람에게 매미처럼 꽉 달라붙었다.
“축하해, 잘 살아!”
멀대같이 큰 남자 다섯이 옹기종기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은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훈훈했다. 하객들의 시선을 받으며 레이너드를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던 에이든은 집사장 로버트의 헛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를 놓아주었다.
“반갑기는 하지만 오늘은 내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얼른 가 봐.”
네 사람은 로버트의 안내를 받아 하객석으로 향했다. 데이브와 마리 아주머니네 가족들이 앉아 있던 하객석에 네 사람과 아카데미 교수까지 앉자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레이너드는 유리나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럼 갈까?”
유리나는 말끔한 얼굴로 웃는 그를 보다가 문득 고개를 내려 햇빛에 은은하게 반짝이는 하얀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레이너드를 축하해 주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리디아…….’
그녀와 특별히 우정을 나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녀를 보지 못해 슬프거나 섭섭하지는 않았다. 다만 불쑥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궁금하기는 했다.
유리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역시나 리디아나 카리온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옆에서 웃고 있는 레이너드와 의자에 앉아 기뻐하는지 슬퍼하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가족들, 눈물을 훌쩍이는 베시와 마리 아주머니, 제 일처럼 기뻐하는 아카데미 아이들.
원작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던 이야기.
황태자와 사랑을 꿈꿨던 여주인공도, 그런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서브 남주인공도, 연인을 뺏기고 분노하던 서브 여주인공도, 유독 추운 겨울날 홀로 고아원에서 덜덜 떨며 사람들의 온기를 갈구했을 고아 소년도 이제는 없다.
그러나 다들 자신만의 방식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응, 가자.”
유리나는 레이너드와 함께 흰 구두를 신은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아니, 내디디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레이너드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춰 왔다.
경악하여 목이 졸린 듯한 소리를 내는 쌍둥이의 목소리와 감탄사를 내뱉는 에이든의 목소리를 들으며 유리나는 눈을 감았다.
시작은 죽을 운명에 처했던 원작의 악녀와 원작엔 거론도 되지 않았던 인물이었지만 이제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앞으로 펼쳐 나갈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온전히 자신들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