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3/20)

외전 1. 네가 없는 세계에서는

톰은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하지 못한다기보다는 알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몸이 약했던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고 열병에 시달리다가 사흘 만에 숨을 거두었다. 열 달 동안 사랑으로 품었던 핏덩이에게 젖도 제대로 물려 보지 못한 채였다.

마을에서 사랑꾼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아버지는 제 탓을 하며 식음을 전폐했다.

―아이고, 이 사람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 언제까지 죽은 사람을 붙잡고 있을 건가? 애 우는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있을 참이야?

꼬물거리는 핏덩이가 배가 고파 악을 쓰며 우는 소리에 찾아온 이웃 아낙들이 대신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다그쳐도 그는 며칠 동안 넋을 잃은 것처럼 아내의 무덤 앞에서 지냈다.

실성하기 직전까지 가서야 그는 제 분노를 아이에게로 돌렸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어도!

일주일 만에 제대로 마주한 아이의 눈동자가 불길할 정도로 붉은색이었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아이. 뭘 해도 예뻐 보일 제 새끼였지만 그의 눈엔 곱기만 했던 아내를 닮은 아이가 마냥 예쁘게만 보이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는 제 핏줄을 외면할 정도로 모진 성격은 아니었다. 아이 때문에 아내가 죽었다고 원망을 하면서도 아이에게 마을에서 가장 흔한 ‘톰’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젖동냥으로 그를 길렀다.

가만히 누워 쌕쌕거리기만 하던 아이가 뒤집기를 하고 기어 다니고 알 수 없는 말을 옹알거릴 때면 기특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면서도 동시에 이 어여쁜 것을 보지도 못하고 먼저 간 아내 생각이 났다.

부끄럽게도 그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아들에게 온전히 애정을 베풀지 못했다. 그의 사랑은 건조했으며 한껏 비틀려 있었다.

과거에 얽매이면 안 된다는 마을 사람들에게 등 떠밀려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한 뒤부터는 그나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이따금씩 잊을 만하면, 술에 거하게 취해 톰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러 댔다.

―너 때문이야!

술이 깬 다음 날이면 미안하다 사과를 하긴 했지만 이미 그의 말이 칼날이 되어 톰의 마음을 너덜너덜하게 난도질한 지 오래였다.

톰은 가장 그를 사랑해야 하는 아버지에게서 모진 말을 듣고 나면 한동안 아버지를 피해 도망 다녔다.

사건이 일어났던 그날도 톰은 간밤에 술을 마시고 들어와 소리를 지르던 아버지를 피해 방구석에 몸을 옹송그리고 쥐 죽은 듯이 숨어 있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땐 뒤집어쓰고 있는 이불을 더욱 세게 움켜쥐며 몸을 달달 떨었다.

바람이라도 불면 쉽게 날아갈 법한 이 얇디얇은 이불이 우습게도 그를 보호해 줄 유일한 보호막이었다.

늘 그 속에 있으면 세상 어떤 것도 자신을 해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톰.”

이불 위로 머리를 어루만져 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톰은 최대한 몸을 웅크리면서도 본능적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그렇게 피하고 싶은 아버지인데도 마음 한구석에는 따뜻하게 대해 주길 바라는 우스운 미련이 남아 있었다.

“미안하다. 앞으로는 절대 그럴 말 하지 않을게.”

어젯밤 술에 잔뜩 취해 윽박지르던 목소리와 똑같이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그 속엔 원망 대신 미안함이 잔뜩 담겨 있었다.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새어 나오려고 했다.

그렇지만 톰은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 달콤한 말에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다.

“지난달에도 똑같이 말했잖아요.”

지난달에도, 지지난달에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말을 들었다. 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순진했던 톰은 아버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아버지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할 때면 늘 그랬듯 톰에게 제 모든 분노를 쏟아 냈다.

그 행동이 두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반복됐을 때쯤에야 비로소 톰은 아버지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고작 열 살, 세상 이치를 잘 모르는 나이였지만 톰은 미련이나 기대 따위는 갖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대가 없어야 실망도 없는 법이다.

“이번에는 진짜야.”

“거짓말.”

“약속할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또 저 말을 믿고 싶은 모순적인 마음이 톰의 마음속에서 싹텄다.

그는 이불 속에서 꼬물꼬물 기어 나와 아버지의 눈치를 보았다. 그를 제대로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잔뜩 주름진 아버지의 눈가가 촉촉했다.

“진짜예요?”

“응.”

“진짜 안 그럴 거예요?”

“그래. 술도 먹지 않으마.”

아버지의 투박한 손이 톰의 머리카락을 엉성하게 흩뜨려 놓았다. 새집 같은 우스꽝스러운 머리를 하고서 톰은 아버지의 어색한 미소를 보며 입가를 씰룩이며 웃었다.

뭐가 그리 웃긴지는 모르겠다. 그냥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는 입으로는 웃고 눈으로는 뚝뚝 눈물을 흘렸다.

“안 나오고 뭐 해요? 시내 나가자면서요.”

두 남자가 짜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이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으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새어머니가 고개를 방 안으로 빼꼼 집어넣었다.

“톰, 너도 얼른 준비해라.”

“왜요?”

“왜긴 왜야. 아버지가 시내 나가자고 안 하던?”

“시내요?”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는 눈을 끔뻑이며 아버지를 바라보자 아버지가 손등으로 그의 축축한 볼을 거칠게 문질러 주었다.

“얼른 씻고 옷 입어. 오랜만에 나가서 맛난 거 먹고 오게.”

“아버지가 선물도 사 주신단다. 갖고 싶은 거 생각해 놔.”

“쓸데없는 소리!”

“뭐가 쓸데없어요? 아까만 해도 뭘 사 주면 좋을지 모르겠다며 날 달달 볶더니만. 직접 물어봐서 갖고 싶은 걸 사 주면 빠르고 좋잖아요?”

“선물?”

내 생일은 아직도 넉 달이나 남았는데 갑자기 웬 선물?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어 이번에도 눈만 깜빡이자 아버지가 얼른 준비나 하라며 뚱하게 말하고 방을 나갔다.

“그걸 말하면 어떡하나? 깜짝 선물을 해 줄 생각이었는데!”

“이상한 선물을 사 주는 거보다 갖고 싶은 거 사 주는 게 훨씬 낫잖아요.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아유, 그런 소리 할 거면 얼른 가서 옷이나 갈아입어요!”

톰은 방 밖에서 들리는 부모님의 대화를 잠자코 듣다가 뒤늦게 어머니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는 후다닥 일어나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깨끗한 옷을 꺼내 입었다.

찬물로 대충 눈가만 쓱쓱 닦는 고양이 세수를 한 뒤에 재촉하며 나가는 아버지의 뒤를 재빨리 쫓아 뛰어갔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한가운데서 뜨거운 여름 햇볕이 매섭게 내리쬐었다.

아버지는 시내에 내다 팔 채소 한 묶음을 들고 저 멀리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었고 어머니는 구멍이 숭숭 난 양산을 들고 톰의 바로 앞에서 걸었다.

톰은 눈이 부신 햇빛을 막기 위해 두 손을 눈썹 뼈에 붙여 손차양을 만들고는 열심히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음매에. 녹색 이파리가 잔뜩 우거진 나무 아래에 여유롭게 늘어진 젖소들이 파리를 쫓기 위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울었다. 그 위에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톰은 그 소리를 따라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며 어깨를 들썩였다.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에 기분이 들떴다.

‘아버지가 이제 진짜 약속했어.’

그의 약속을 지난달에도, 지지난달에도 들었다는 사실은 이미 톰의 머릿속에서 말끔히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아버지를 믿기로 했다.

아버지가 술도 마시지 않고 그를 원망하지 않으면 지금부터 정말 그를 사랑해 주리라. 그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몸이 하늘 위로 두둥실 날아갈 것 같았다.

“빨리 안 오고 뭐 해? 그러다 오늘 안에 갔다 오겠어?”

“아니, 글쎄. 당신이 걸음이 빠른 거라니까요.”

새어머니는 투덜거리면서도 속도를 높였다. 톰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달음박질쳤다. 새어머니를 지나쳐 소들이 노니는 들판을 지나가 아버지까지도 추월하며 뛰어갔다.

“얼른 오세요!”

톰은 뒤를 돌아 어머니와 아버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뒷걸음질로 뛰었다.

“얼른요, 얼른!”

아버지가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찼지만 이젠 아버지가 무섭지 않았다. 톰은 다시 뒤를 돌아 시내를 향해 있는 힘껏 달려갔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엄청 빠르게 뛰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를 움직였다.

이렇게 빨리 뛰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 * *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채소 가게에 들렀다 나온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당근이 다른 곳보다 굵고 싱싱하다며 평소보다 가격을 두둑이 챙겨 받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새어머니 또한 농사를 열심히 지은 보람이 있다며 흐뭇하게 웃었다.

행복해하는 부모님을 보며 톰은 말은 안 했지만 내심 내년부터는 더욱 열심히 농사를 도와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더욱 열심히’라는 말에는 조금 어폐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아버지가 ‘네 녀석은 비쩍 곯아서 일손을 도와주다가 약값이 더 나오겠다’라며 농사일을 거들지 못하게 했던 탓이다.

‘하지만 이제 나도 생일이 지나면 열한 살이야!’

열한 살은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지금도 보면 팔다리는 부쩍 길쭉해졌고 팔에 힘을 주면 보잘것없기는 해도 근육이 조금 튀어나왔다. 밭일 정도는 충분히 거들 수 있다는 소리다.

실제로도 톰 또래의 마을 아이들은 이미 부모님을 도와 밭일을 하고 있었다.

‘나도 내년부터는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도와 밭일을 할 거야!’

톰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모님이 알지 못하는 다짐을 했다.

“돈을 많이 받았으니 오늘은 비싼 밥이나 먹자.”

호탕하게 외친 아버지는 톰과 새어머니를 식당으로 데려갔다. 고급 식당은 아니지만 마을에서 음식이 맛있다고 제법 소문난 곳이었다.

“뭐든 골라.”

“정말로요?”

“그럼!”

톰은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눈을 또르륵 굴리다가 그동안 먹어 보고 싶었던 소고기 찜과 푸딩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비싼 것만 고른다는 타박이 들려오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아버지는 흔쾌히 그 메뉴를 시켜 주었다. 오늘 돈을 두둑이 받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수프와 곁들여 먹으라고 나온 통밀빵에서 돌이 씹히는 바람에 아버지가 주인에게 화를 내려고 했지만 톰은 괜찮다며 실실 웃었다.

“맛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맛있었다. 작은 돌멩이가 조금 씹히면 어떠랴. 이가 조금 아프기는 해도 마냥 좋았다.

아버지는 그런 그를 보며 그렇게 실없이 웃으면 남들이 얕잡아 본다고 한 소리를 했지만 그 잔소리마저 좋았다.

‘좋으면 웃을 수도 있는 거지.’

빵은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소고기 찜과 푸딩은 예상보다 훨씬 맛있었다.

와인을 넣고 오랫동안 뭉근히 조린 소고기는 포크로 살짝만 눌러도 살결이 풀어질 정도로 보드라웠고, 달콤한 푸딩은 다 먹고 난 다음에도 입 안에 바닐라 향이 맴돌 정도로 향이 풍부했다.

오랜만에 배가 터지도록 식사를 하고 나오니 아버지가 톰의 손을 끌고 상점가로 향했다. 생일도 아닌데 진짜 선물을 사 주는 건가 싶어 톰은 아버지의 뒤를 졸졸 따라가면서도 눈만 끔뻑였다.

“진짜로 사 주는 거예요?”

“그럼 진짜지, 가짜로 사 주겠어?”

톰의 뺨이 흥분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만으로도 좋은데 정말 선물이라니!

‘뭘 사 달라고 할까?’

톰은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발걸음도 가벼워져서 땅을 통통 뛰어다니는 참새처럼 통통 튀며 걸었다.

그림책? 나무 블록 장난감? 이웃집 마리 아주머니네 노라가 갖고 놀던 것을 떠올리며 고민을 할 때였다.

“톰!”

날카로운 아버지의 비명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톰은 누군가에게 힘껏 떠밀려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톰은 바닥에 엎어진 채로 눈을 깜빡였다.

뒤늦게 땅바닥에 쓸린 팔과 다리에서 화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져 반사적으로 눈가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울면 안 되는데.’

아버지는 늘 톰이 우는 것을 싫어했다. 눈물을 보일 때면 사내아이는 울면 안 된다고 날카롭게 화를 내는 통에 톰은 늘 눈물을 삼켜야 했다.

이번에도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참고 비틀거리며 일어날 때였다.

“에이, 재수가 없게 시리.”

날카로운 목소리가 톰의 뒤통수에 꽂혔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바닥에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말 소리와 함께 마차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별것 아닌 소리였는데도 톰은 온몸의 솜털이 쭈뼛쭈뼛 서는 것 같은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주위의 눈치를 보고 자라 온 톰은 눈치가 빨랐다. 이번에도 그는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뒤를 돌아야 하는데, 아버지한테 어서 가자고 해야 하는데 몸이 돌이 되어 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를 어째!”

“얼른 의원을 불러요, 얼른!”

“세상에, 어쩌다가 이런 일이…….”

탄식과 안타까움이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톰은 몸을 흠칫 떨었다.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만 아래로 떨궜다.

그러다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피?’

바닥에 무언가가 흥건하다 했더니 붉은 피가 돌바닥 틈 사이사이로 흘러가고 있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보였던 제 눈동자 색과 똑같은 붉은 색.

신발 밑창을 적시는 핏물을 피하기 위해 발을 옮겨 보았지만 어디를 가든 피할 수가 없었다. 바닥을 디딜 때마다 튀어 오른 핏방울이 그의 발등까지 적셨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숨만 가쁘게 헐떡이는 톰의 어깨를 누군가가 잡아 흔들었다.

“얘, 얘! 이러고 있으면 어떡하니!”

“아, 아…….”

그제야 그는 부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뒤를 돌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던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낡아 빠진 그들의 옷은 선홍색 피로 잔뜩 젖어 있었다.

톰은 다리가 후들거려 바닥에 철퍼덕 엉덩방아를 찧었다가 무릎으로 겨우 아버지에게 기어갔다. 미동도 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죽음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으되 죽음이 주는 공포감은 몰랐다. 주위에서 아무리 죽음에 대해 떠들어도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그 공포감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톰은 달달 떨리는 두 손으로 피가 퐁퐁 새어 나오는 상처를 막아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빗물이 새어 나오는 둑처럼 하얀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던 것이다.

그것 말고도 상처가 너무 많아 도무지 혼자서는 막기 힘들 것 같았다.

톰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으…….”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제대로 된 단어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톰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짐승이 울부짖는 것과 비슷한 소리밖에 없었다.

“아아…….”

누가, 누가 좀 도와주세요.

“아빠아…….”

누구라도 좋으니까 우리 아빠 좀 살려 주세요. 제발요, 제발.

분명 살가운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톰의 눈을 손가락질하며 야유를 보내면 그에게 달려가 욕설을 퍼부어 주었다.

가끔 술을 못 이겨 원망의 말을 늘어놓았어도 우습게도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그나마 그를 지켜 주는 유일한 울타리였다.

선물 같은 건 안 사 줘도 돼요. 그러니까 제발 눈만 떠 줘요. 제발, 제발.

“아빠.”

나 혼자 두고 가지 말아요. 나 무섭단 말이에요.

뚝, 뚝, 뚝. 간절함을 담은 눈물이 쉴 새 없이 아버지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사내 녀석이 울면 안 된다는 잔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게 톰의 마음을 더욱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아버지의 무서운 잔소리가 싫었지만, 지금은 차라리 그 잔소리가 듣고 싶었다.

“이걸 챙겨 두거라.”

그때, 한 노파가 톰을 향해 무언가를 건넸다. 붉은 피가 묻어 있는 금화 세 개. 그게 뭘 의미하는지 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톰은 주름진 손에 놓인 금화를 보며 더욱 서럽게 흐느끼다가 고개를 돌렸다.

“싫어요.”

저걸 받으면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정말로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 같아서.

“넣어 둬.”

노파는 톰의 손을 잡고 금화를 억지로 쥐여 주었다.

“이거라도 있어야 네 부모님 장례는 치를 거 아니냐.”

그 말을 들으니 금화를 내던지고 싶어도 내던질 수가 없었다. 톰은 안 그래도 하얀 손이 더욱 하얗게 질릴 정도로 금화를 꽉 쥐었다.

작은 마을의 소작농이 평소엔 손에 쥐어 보기도 힘든 금화가 무려 세 개.

값비싸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고작 이것밖에 주지 않는 거냐고 따져야 하는 걸까.

내 부모님의 목숨값인데…….

푸르스름한 핏줄이 비치는 손등에 서러운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 * *

다음 날,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치러진 장례식은 보잘것없었다. 톰이 사는 작은 마을에는 신전도 따로 없어 장례식을 치러 줄 신관을 부를 수 없었던 탓이다.

그저 마을 아저씨들의 도움을 받아 공동묘지에 부모님의 관을 묻었다. 관 앞에는 부모님의 이름과 기일만 겨우 새겨 넣은 조잡한 비석을 세웠다.

부모님이 생전에 가깝게 지냈던 마을 이웃 몇 명만이 우울하게 두 사람의 명복을 빌어 주는 것으로 조촐한 장례식은 끝났다.

톰은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서도 부모님의 비석 앞에 앉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여름 햇빛에 눈이 부셔 자꾸만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톰은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박박 문질렀다. 그러다 멈칫하며 제 눈가를 더듬거렸다.

‘정말 내 눈은 저주받은 걸까.’

남들과는 다른 붉은 눈동자. 가끔 낯선 사람들을 만날 때면 저주를 받았다느니, 악마라느니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소리를 듣고 톰이 우울해할 때면 아버지는 네가 악마면 네 아비인 나도 악마냐며 화를 냈다. 그러고는 집을 나가더니 한참 만에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돌아왔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어머니도, 유일하게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아버지와 새어머니도 모두 자신을 구하다가 죽었다. 이쯤 되니 톰은 제 눈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싫어졌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여신의 미움을 받아서 이렇게 태어난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에게만 이런 불행이 연달아 일어날 리가 없었다.

“톰.”

저도 모르게 손끝을 세워 눈가를 긁으려고 했던 톰은 갑자기 손을 낚아채는 힘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웃집 마리 아주머니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마리 아주머니는 톰을 낳아 준 어머니의 오랜 친구였다. 운이 좋게도 톰이 태어났을 무렵, 그녀에게도 젖먹이 딸이 있어 어미를 잃은 톰에게 젖을 물린 젖어미이기도 했다.

그제야 톰은 이미 마을 사람들이 다 떠나간 공동묘지엔 마리 아주머니와 그녀의 남편인 론 아저씨만이 남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녀는 꼭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네 잘못이 아니란다. 나쁜 건 그 마차를 몰았던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그러지 말렴.”

마리 아주머니가 톰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톰은 어찌할 바를 몰라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품속에서 두 손을 꼼지락거리기만 했다.

“이제 집에 가자꾸나.”

“조금만 더 있을게요.”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잖니. 배고플 텐데 오늘은 돌아갔다가 내일 다시 오렴. 알겠지?”

톰은 마리 아주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오솔길을 느릿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어깨 너머로 묘지를 돌아보았다. 오래되어 색이 바랜 비석들 사이에서 참 이질적으로 보이는 깨끗한 비석 두 개.

햇빛 아래서 사이좋게 서 있는 그 비석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톰은 제 손을 잡고 있는 마리 아주머니의 손을 꽉 잡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 * *

“혼자는 무서울 텐데 아줌마 집에 안 갈래?”

집으로 돌아갔던 마리 아주머니가 톰을 다시 찾아와 물었다. 톰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여기 있을래요.”

“곧 장마가 시작될 텐데, 여기 혼자 있을 수 있겠어? 고집부리지 말고 아줌마랑 가자.”

“우리 집에 있을래요.”

우리 집.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가 참 무거웠다.

마리 아주머니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뀌면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톰은 그녀가 주고 간 빵과 스튜를 부엌에 대충 갖다 놓고 거실에 벌러덩 누웠다.

―거실이 네 방이야? 누가 거실에서 그렇게 누우래? 잠을 자려면 방에 들어가서 자.

늘 들려오던 아버지의 잔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데 그 고요함이 바늘이 되어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톰은 쭉 뻗었던 팔과 다리를 다시 웅크리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아빠…….”

하도 울어서 말라 버린 줄만 알았던 눈물이 또다시 새어 나왔다. 안 울 거라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톰은 훌쩍훌쩍 소리 내어 울었다.

* * *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톰은 바닥에 몸이 붙어 버린 사람처럼 하루 종일 거실에 누워서 지냈다.

하루에 한 번씩, 정말 배가 고파서 배가 아플 지경이 되었을 때만 겨우 비척비척 일어나 마리 아주머니가 주고 간 빵을 새가 모이 쪼아 먹는 만큼만 뜯어 먹었다.

아주머니가 주고 간 빵은 딱딱하고 질기기는 했어도 고소하니 맛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돌멩이가 씹히는 것처럼 입 안이 껄끄럽게 느껴졌다.

마리 아주머니는 아침저녁으로 톰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집에 찾아왔다.

그녀는 올 때마다 빵과 음식을 가져왔는데, 매번 음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고작 며칠 사이에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톰의 얼굴은 안쓰러울 정도로 초췌했다.

“밥은 왜 안 먹었어?”

“배가 안 고파요.”

“안 고플 리가 있나. 일어나. 수프를 막 끓여서 따뜻해. 따뜻할 때 좀 먹어.”

톰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마리 아주머니는 바닥에 누워 눈만 깜빡이는 그를 번쩍 안아 올려 식탁에 앉혔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수프를 떠서 강제로 먹이려고 했지만 톰은 입을 꾹 다물고 도리질을 했다.

여러 번의 실랑이 끝에 그녀는 결국 포기하고 혀를 쯧쯧 찼다.

“쪼끄만 게 무슨 고집이 이렇게도 센지, 원. 이러다가 너까지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래?”

톰은 그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멍하니 부엌에 난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을 똥그랗게 뜨며 자리에서 번쩍 일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끼던 밭에 몹쓸 잡초들이 자라 있었다.

쓸모라고는 하나도 없는 잡초들은 쓸데없이 자라는 속도가 빨라 고작 며칠만 솎아 내지 않아도 비쭉비쭉 고개를 내민다.

장례식 이후 며칠이나 지났더라?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톰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신발도 신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등 뒤에서 마리 아주머니가 부르며 쫓아왔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쁜 잡초.’

잡초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중에 수확물은 작고 비실비실하다. 아버지는 잡초가 많은 밭의 주인은 게으른 농부라면서 늘 톰에게 바지런하게 살라고 강조했다.

톰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밭에 쪼그려 앉아 두 손으로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나쁜 잡초, 나쁜 잡초, 나쁜 잡초! 너네가 있으면 채소들이 못 자란단 말이야!

뽑고 뽑아도 잡초는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그다지 넓지도 않은 밭인데 잡초는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톰은 흙 범벅이 된 손으로 그 잠깐 사이에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땀과 모래가 섞여 얼굴이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머릿속에 있는 건 저 잡초 생각뿐이었다.

“톰, 톰!”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마리 아주머니가 톰의 손을 낚아챈 뒤에야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세상에, 장갑도 안 끼고 손으로 그러면 어떡하니! 이 피 좀 봐.”

톰은 아주머니의 손에 잡힌 제 손을 보며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그는 지금껏 한 번도 잡초를 뽑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일손이 모자랄 때면 밭일을 도우라며 등을 떠밀었지만 정작 밭에 나가면 아버지가 들어가라고 성화를 냈기 때문이다.

―저도 도울래요.

톰이 그렇게 말하면 아버지는 크면 하기 싫어도 하게 될 건데 뭘 지금부터 고생을 사서 하려고 하냐고 되레 화를 냈다.

―네 도움받을 만큼 일손이 모자라지 않아. 그 손으로 대체 뭘 하겠다고.

그러고선 진짜로 혼자서 묵묵히 밭일을 했다. 아버지의 손은 거칠고 투박해졌지만 톰의 손은 귀하게 자란 귀족처럼 하얗고 반질반질했다.

온 동네 아이들은 다들 밭일을 돕느라 상처가 나고 손톱에 흙이 꼈는데.

그런 여린 손이 거친 흙과 돌멩이에 찍혀 상처가 나고 피가 흘렀다. 톰은 엉망이 된 손을 본 뒤에야 손가락이 아프다는 걸 느꼈다.

“아파.”

눈물이 났다. 이깟 손가락 좀 아픈 게 뭐가 대수라고. 아버지는 맨날 했는데.

하지만 한 방울씩 툭툭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후드득 떨어졌다.

* * *

바지런하게 살아야 한다. 바지런하게 살아야 큰 사람이 되지.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본 다음부터 톰의 머릿속에 아버지가 늘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콱 박혔다.

그 후로 톰은 아침에 일어나 얼굴을 빡빡 문지르며 세수를 하고 마리 아주머니가 챙겨 준 음식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혀에 닿는 음식이 영 껄끄럽기만 하고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지만 살기 위해 열심히 쑤셔 넣었다.

배를 두둑이 채우고 난 뒤에는 아버지가 쓰던 밀짚모자를 쓰고 밭에 나가 못된 잡초들을 열심히 골라냈다. 처음에는 잡초와 농작물을 잘 구분할 수가 없어서 애먼 새싹도 뽑아냈지만 마리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농사일을 차근차근 배워 나갔다.

날씨는 점점 더 더워지고 뙤약볕 아래서 쪼그리고 흙을 파헤칠 때마다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지만 톰은 꿋꿋하게 매일 밭에 나갔다.

“와아.”

조심스럽게 땅을 파헤치던 톰은 흙 사이로 고개를 내민 알 감자를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매일 물을 준 보람이 있는지 감자는 그의 주먹보다도 훨씬 컸다.

‘오늘은 감자를 삶아 먹어야지.’

포슬포슬한 감자의 식감을 상상하자 입 안에 군침이 돌았다. 많이 삶아서 마리 아주머니에게도 드려야지. 맨날 받기만 해서 미안했는데 이제 보답을 조금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아졌다.

동시에 마음이 급해졌다. 톰은 해가 지기 전에 감자를 하나라도 더 캐기 위해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바지런하게 움직인 덕분에 바구니 하나 가득 감자를 수확할 수 있었다. 톰은 바구니를 부엌 한구석에 내려놓고 일단 바람을 후후 불어 가며 장작에 불을 붙였다.

감자를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끗이 씻어 물을 가득 담은 냄비에 퐁당퐁당 넣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전에 새어머니가 하던 것을 기억해 내고 소금도 한 스푼 넣었다. 왠지 물에 비해 소금이 적은 것 같아서 소금을 두 스푼 더 넣었다.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가 편안하게 들렸다. 톰은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즐겼다. 감자가 맛있게 익는 냄새가 나자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땔감으로 쓸 장작을 패고, 새어머니는 저녁 준비를 위해 부엌을 바삐 돌아다녔다.

그런 부모님을 도와 드리기 위해 마당으로 나가 아버지에게 시원한 물을 드리다가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서 음식 간을 보고 접시를 나르던 그 단조로운 일상들.

그 별것 없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던 건지는 그때는 몰랐다. 알았더라면 조금 더 감사하며 살았을 텐데.

“우씨.”

잠깐 사이에 눈이 다시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톰은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거칠게 쓱쓱 문지르고는 다시 부엌으로 뛰어갔다. 냄비에서는 뽀얀 연기가 새어 나오고 부엌은 열기로 가득했다.

“앗, 뜨거!”

급하게 뚜껑을 열던 톰은 손가락을 얼른 차가운 귓불에 갖다 댔다. 새어머니가 요리하다가 뜨거울 때 하던 행동이었다.

어느 정도 손가락의 열을 식힌 뒤 부엌을 뒤져 장갑을 끼고 다시 뚜껑을 열었다. 포크로 감자를 콕 찌르자 서걱거리는 느낌 없이 포크가 쑥 들어갔다.

“다 됐다.”

톰은 잘 익어 껍질이 톡톡 터져 있는 감자를 꺼내 마리 아주머니가 음식을 담아 가져왔던 접시에 반절, 집에 있던 접시에 반절 담았다.

지금 당장 감자를 먹고 싶었지만 그것보다는 마리 아주머니께 가져다 드리는 게 먼저였다. 그는 애써 감자에서 시선을 거두며 문을 나섰다.

“세상에, 이게 다 뭐니?”

“삶은 감자예요! 제가 오늘 캐서 삶은 거예요!”

마리 아주머니는 해맑게 웃는 톰을 보며 순식간에 눈시울을 붉혔다. 톰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접시를 아주머니 눈높이에 맞춰 조금 더 높이 들었다.

“아직 먹어 보지 않아서 맛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리 집 감자는 원래 맛있으니까 맛있을 거예요!”

“그래. 맛있게 생겼네. 잘 삶았어.”

톰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마리 아주머니의 손길을 느끼다가 헤헤거리며 웃었다.

“이왕 왔으니 들어와서 같이 먹고 갈래?”

“괜찮아요! 집에도 감자 많아요. 많이 삶았어요! 집에 가서 먹으면 돼요.”

“그래, 그럼 수프 좀 줄 테니까 가져가서 같이 먹어.”

“네!”

마리 아주머니가 준 수프와 빵을 들고 쫄래쫄래 집으로 돌아온 톰은 거실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접시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여전히 열기가 느껴지는 감자에서는 하얀 김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톰은 입김을 호호 불어 접시에 담긴 감자를 식혔다. 감자가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식었을 때 껍질도 벗기지 않고 조심스럽게 한 입 깨어 물었다.

“뜨그, 뜨그!”

입 속뿐만 아니라 한순간에 얼굴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쉬자 사나운 드래곤처럼 입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톰은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거리다가 부엌으로 뛰어가 시원한 물을 들이켰다.

“뜨거워 죽는 줄 알았네.”

―찐 감자 잘못 먹었다가 목구멍까지 다 데는 수가 있어. 식혀서 먹어야지. 대체 누굴 닮아서 저리 칠칠치 못한지.

“응?”

어디선가 아버지가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톰은 찬물 덕분에 급격하게 식은 감자를 목 뒤로 꿀떡 넘기며 눈을 깜빡였다.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톰은 코를 훌쩍이다가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감자가 확실히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포슬포슬한 감자가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것처럼 혀 위에서 뭉개졌다. 소금 간이 잘 배었는지 감자는 짭조름하니 감칠맛이 있었다.

“감자 맛있어요, 아빠.”

이 감자는 아버지가 정성 들여 심고 돌봤던 감자였다. 톰이 한 것이라고는 땅이 마르지 않도록 물을 주고 수확 철까지 기다린 것밖에 없었다. 고작 이 감자 한 알에도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겨 있었다.

“진짜 맛있다.”

입 안에 맴도는 짭짤한 맛이 소금의 맛인지, 소리 없이 흘린 눈물의 맛인지는 잘 모르겠다. 톰은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짭조름한 감자를 네 알이나 먹어 치웠다.

* * *

혼자였지만 며칠 부지런하게 움직인 덕분에 감자를 모두 수확할 수 있었다.

톰은 창고에 내년까지 먹을 감자만 조금 남겨 두고 나머지 감자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시장에 내다 팔기로 했다.

그 말을 마리 아주머니에게 자랑스럽게 늘어놓자, 그녀는 걱정이 된다는 얼굴을 했다.

“아줌마랑 같이 가자꾸나.”

“괜찮아요! 별로 안 무거워서 혼자 할 수 있어요!”

두 눈에 힘을 주며 진지하게 말하는 그를 보다가 마리 아주머니는 작게 혀를 찼다.

“너 같은 꼬맹이가 혼자 가면 제값도 다 못 받을 가능성이 커. 아줌마 말 들어.”

톰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그렇지만…… 너무 죄송한데.”

“죄송할 필요 없어. 어차피 나도 조만간 시장에 갈 생각이었으니까.”

톰은 또 한 번 망설이다가 겨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마리 아주머니의 선견지명은 대단했다.

“이건 너무 적어요.”

톰은 채소 가게 아주머니가 건네준 돈주머니를 펼쳐 보며 구시렁거렸다. 그는 지금껏 아버지에게 채소 가격을 셈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감자를 얼마에 팔아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너무 적어!’

전에 아버지가 감자 한 자루를 내다 팔았을 때 받은 돈주머니는 이것보다 훨씬 더 두둑했다. 그제야 그는 왜 마리 아주머니가 혼자 가면 안 된다고 했는지 깨달았다.

이런 일을 당할 게 뻔하니까! 눈 뜨고도 코를 베이는 것 같았다.

톰의 불만스러운 얼굴을 내려다보던 주인아주머니가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적기는! 감자 씨알이 너무 작아. 이것도 우리 아들 보는 것 같아서 많이 쳐주는 거야. 다른 가게에선 이 정도도 안 줘.”

“아닌데!”

톰은 자루에 담긴 흙투성이 감자를 보며 씩씩거렸다. 아버지는 다른 건 몰라도 감자 하나만은 이 근방에서 우리 집 감자가 가장 씨알도 굵고 맛이 좋다고 입버릇처럼 자랑을 늘어놓았다.

톰이 보기에도 마리 아주머니나 강 건너 잭슨 아저씨네 감자보다 그의 집 감자가 훨씬 크기도 크고 맛나 보였다. 올해 캔 감자도 여느 때와 비슷한 크기였으니, 씨알이 작다는 말은 순 뻥이다!

“아니기는. 눈이 있다면 감자 크기 좀 봐 봐라. 네 쪼그마한 주먹보다 겨우 조금 크잖니?”

“아닌데요! 아닌데!”

톰은 제 두 주먹을 갖다 붙인 뒤 가게 주인아주머니에게 보여 주었다.

“이것 봐요! 이만하잖아요! 큰 걸로만 가져왔는데!”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아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들은 창고에 놔두고 크기가 크고 모양도 동글동글하니 예쁜 것으로만 골라 왔다. 개중 큰 것들은 그의 주먹 두 개를 붙여 놓은 것보다 큰 것도 있었다.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톰의 기세에 당황했는지 주인아주머니가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그것보다는 더 못 줘. 다른 곳 가도 똑같아.”

“아이고, 할 짓이 없어서 애 코 묻은 돈을 떼어먹으려고 하나, 이 사람아! 나 같으면 이 쪼그만 게 열심히 일한 게 기특해서 돈을 더 쳐주지는 못할망정!”

멀찍이서 상황을 지켜보던 마리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그녀는 처음부터 도와주면 톰의 사회성을 기르지 못한다고 일단 톰에게 혼자 해 보라고 일을 맡긴 터였다.

이왕이면 잘 풀리기를 바랐는데, 역시 많은 것을 바란 모양이다.

마리 아주머니는 자루에서 감자를 꺼내 들었다.

“그쪽이야말로 눈이 없어? 이 주변에 이만한 감자가 나오는 거 봤어? 내가 보기엔 그것보다 두 배는 쳐줘야 할 것 같구먼.”

“아니……. 감자가 시들시들하고…….”

사나운 마리 아주머니의 기세에 주인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시들시들? 이제 막 캔 감자가 어디가 시들시들하다고 그래?”

톰은 얼굴이 새빨개진 마리 아주머니를 보며 속으로 응원했다. 아주머니, 최고야!

“아니, 그쪽은 왜 갑자기 끼어들고 난리래? 채소 팔 게 아니라면 가던 길 가면 되지, 왜 갑자기 끼어들어요?”

“왜냐고?”

마리 아주머니가 톰의 어깨를 끌어안고 제 옆으로 바짝 잡아당겼다.

“내가 얘 엄마야! 흥정하는 법 좀 가르치려고 혼자 하게 내버려 뒀더니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있어야지!”

주인아주머니의 갈색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아들이라고?”

“그래!”

“안…… 닮았는데?”

“내가 아들을 좀 예쁘게 낳긴 했지. 우리 바깥양반이 좀 곱상하게 생겼거든!”

톰은 마리 아주머니의 남편인 론 아저씨의 얼굴을 무심코 떠올리다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론 아저씨는 빈말이라도 곱상하다는 말은 절대 나오지 않을 정도로 험상궂게 생겼다. 뺨에는 큰 상처가 있어서 안 그래도 험상궂은 얼굴이 더욱 무서워 보였다.

그가 다가가기라도 하면 아이들은 무섭다며 하나같이 울음을 터뜨렸다.

어릴 적 이야기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마리 아주머니의 말로는 톰 또한 론 아저씨를 처음 봤을 때 잡아가지 말라며 와앙 울음을 터뜨렸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론 아저씨가 곱상하게 생겼다고? 마리 아주머니는 거짓말도 잘하시지.

주인아주머니도 별로 믿기지는 않았는지, 톰을 홱 돌아보았다.

“얘, 정말 네 엄마 맞아?”

“아니, 내가 내 아들이라는데 뭔 의심이 그렇게 많아?”

“믿을 걸 믿으라고 해야죠! 하나도 안 닮았는데!”

톰은 저를 바라보는 두 쌍의 눈을 보다가 재빨리 마리 아주머니의 푸근한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이래 봬도 눈치는 꽤 빠른 편이다.

“우리 엄마 맞아요!”

그 말을 하자마자 마리 아주머니가 바닥에 쪼그려 앉으며 그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 순간, 가슴이 왜 그렇게 뭉클했는지는 평생 모를 일이다.

* * *

“흥, 흥흥! 흐으응!”

톰은 두둑한 돈주머니를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쥐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쁜 아줌마 맞잖아.’

한참의 실랑이 끝에 주인아주머니가 다시 내민 돈주머니는 처음 줬던 것보다 두 배는 컸다. 무게도 엄청 무거워서 받는 순간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만약 마리 아주머니가 없었다면 영락없이 제값도 못 받고 왔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톰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마리 아주머니가 그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놓았다.

“고맙기는. 그래도 앞으론 아까처럼 하면 안 되고 조금 더 독하게 달라붙어야 해. 이젠 악바리가 돼야 살아남을 수 있어.”

“악바리?”

“조금 더 당당하게 살라는 소리야.”

“저는 충분히 당당하게 살고 있어요.”

마리 아주머니가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너 정도면 충분히 악바리지. 그 뙤약볕에서 감자를 혼자 다 캐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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