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4/20)

외전 2. 에이든의 레이너드 관찰기

제국력 467년 봄, 레이너드 13세.

건성으로 책에 필기를 끼적이던 레이너드가 턱을 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교수님의 수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에이든은 그런 친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쟤 또 저러네.’

레이너드가 물 한 방울 못 마신 새싹처럼 생기를 잃고 축 늘어진 것도 오늘로 벌써 나흘째다.

틈만 나면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나 싶더니 에이든이 말을 걸거나 장난을 해도 듣는 척 마는 척 했다. 그동안은 시큰둥하기는 해도 대답은 꼬박꼬박 해 주었는데.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해서 안 그래도 갸름한 얼굴이 더욱더 해쓱해졌다. 이쯤 되니 친구로서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에이든은 레이너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레이너드뿐만 아니라 갑작스럽게 가족들과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된 어린 신입생들은 입학 후 하나같이 향수병에 걸려 우울해했다.

지금도 교실 안에 앉아 있는 아이들 반 이상이 잔뜩 그늘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건 매사에 긍정적인 에이든도 비슷했다.

줄곧 시골 영지에서 벗어나 수도에 항상 오고 싶었던 터라 낮에는 이곳저곳 신나게 돌아다니기 바빴지만, 감성적으로 되는 밤에는 가족들이 생각나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참새처럼 쫑알거리기만 하던 그 쪼끄만 동생 녀석들이 뭐가 그렇게 예쁘다고.

진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저 친구 녀석이 다시 기운을 차릴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가족 이야기부터 시시콜콜한 시골 영지 이야기까지 숨김없이 말해 준 에이든과 달리 레이너드는 개인적인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나마 처음 만났을 때 얼떨결에 말해 준 후원자 이야기가 고작이었다. 당연히 그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도 몰랐다.

‘친구라도 많이 사귀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향수병에 걸린 아이들은 최대한 친구들과 붙어 다니며 가족들 생각을 떨쳐 내려고 노력했고 에이든도 그런 편이었다.

좀 더 활발하게 친구들과 어울리면 좋을 것 같은데 레이너드는 친구를 사귀기는커녕 먼저 관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아이들에게도 무관심했다.

그러다 보니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는 친구는 에이든이 유일했다. 그나마도 에이든이 그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붙어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한때는 그의 유일한 친구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을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에이든이 보기에 레이너드에겐 더 많은 친구가 필요했다.

“야, 레이너드.”

에이든이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줄곧 창밖을 보던 레이너드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입을 여는 대신 눈짓으로 물었다. 뭐야, 왜 불러?

“수업 끝나고 간식 먹으러 가자. 네이선이 그러는데 카페테리아에서 파는 호두 파이가 그렇게 맛있대. 내가 안 먹어 봤으니 너도 분명히 안 먹어 봤을 거 아니야? 우리는 항상 같이 다녔으니까. 오늘은 그거랑 우유 마시자. 네이선도 같이 불러서 가자.”

“난 됐어. 너나 가.”

레이너드는 정말 관심이 없는 듯 손을 휘적휘적 저어 보이고는 책상에 엎어졌다.

“야, 야.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가자아아아.”

“거기, 수업 시간에 누가 잡담을 하나?”

듣기만 해도 잠이 오는 목소리로 자연 마나에 대해 설명하던 교수가 에이든을 보며 안경을 추켜올렸다. 에이든은 교수를 보며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가족 생각이 나서 조금 싱숭생숭해서요.”

“가족들이 생각날 때긴 하지. 그래도 떠들지 말고 집중하도록. 가족들과 떨어져서 고생하는데, 열심히 해서 얼른 졸업해야지.”

“알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에이든은 도무지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는 팔꿈치로 여전히 책상에 엎어져 있는 레이너드의 팔을 찌르며 작게 소곤거렸다.

“야, 야. 끝나고 같이 카페테리아에 가자니까.”

보통은 이렇게 끈질기게 조르면 귀찮아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데 오늘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버린다. 괜히 에이든 또한 마음이 울적해지는 것 같았다.

‘진짜 큰일인데.’

에이든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동안 기초 마법 이론 수업이 끝났다. 억지로라도 레이너드를 끌고 카페테리아로 가려고 했지만 레이너드는 에이든의 손을 뿌리치고 기숙사로 향했다.

힘없이 축 늘어진 그의 어깨를 보며 에이든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저 녀석, 봄 타나.’

어느새 날씨는 따뜻해지고 아카데미 곳곳에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색감의 꽃들이 잔뜩 피어났다. 이 좋은 계절에 친구도 없이 1인실에서 혼자 지내니 더욱 쓸쓸해할 법도 했다.

‘그러게 1인실 말고 다인실을 썼으면 좋았을 텐데.’

제법 거리가 멀어진 레이너드의 뒷모습을 쭉 바라보던 에이든은 문득 손뼉을 치며 미소를 지었다.

* * *

친구의 친구는 친구다.

또래가 적은 시골에서 자라온 에이든은 어릴 적부터 그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귀족이라고는 해도 거의 이름뿐인 시골 남작이라 딱히 귀족의 위엄 따위는 내세울 일도 없었다. 그는 햇빛이 좋은 날이면 들판에 나가 영지 아이들과 옷이 더러워질 때까지 뛰어놀았다.

또래 아이들이 잔뜩 모인 아카데미에서도 그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내 친구들이 곧 레이너드의 친구지.’

레이너드는 그가 이곳에 와서 가장 처음 사귄 소중한 친구, 그것도 무려 동갑내기 친구다. 같은 방을 쓰는 네이선과 알렉스 그리고 토마스는 나이가 그보다 조금 어리기는 해도 마음이 잘 통하니 어찌 됐든 친구다.

그러니 레이너드와 이 세 사람 또한 친구가 되어 친하게 지내면 얼마나 좋은가!

에이든은 네 사람이 사이좋게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을 상상만 해도 마음이 흐뭇해졌다.

물론, 이 이야기를 레이너드가 미리 들었다면 관심 없다고 콧방귀를 뀌며 휙 지나갔겠지만 안타깝게도 에이든은 이 모든 계획을 그 몰래 세웠다.

그 덕분에 예고도 없이 기숙사 방을 나오자마자 옹기종기 서 있는 아이들을 본 레이너드는 몸을 문밖으로 반쯤 빼다 말고 도로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완전히 문이 닫히기 전, 에이든은 다소 당황하는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듯이 볼 수 있었다.

“어, 어? 레이너드! 그냥 가 버리는 게 어디 있어!”

에이든은 다급하게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심드렁해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도망가 버릴 줄은 몰랐기 때문에 심히 당황스러웠다.

몇 번 더 방문을 두드린 뒤에야 문 너머에서 까칠한 레이너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이게 뭐야?”

“내 룸메이트들이야. 정식으로 소개해 주려고 데려왔어. 전에 얘기했던 거 기억나? 내 왼쪽에 서 있던 가장 어린 애가 그때 코를 너무 골아서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던 네이선이고…….”

에이든이 협조를 부탁하며 선물을 빙자한 뇌물로 주었던 막대 사탕을 쪽쪽 빨던 여덟 살 네이선이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나 코 안 골았어.”

“아냐, 에이든 형 말이 맞아. 너 코 엄청 크게 골았어. 어제도 골던걸.”

알렉스가 동조하는 말에 토마스마저 고개를 끄덕이자 네이선은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는 사탕 색을 따라 푸르스름하게 변한 입술을 불만스럽게 삐쭉이다가 입 안 가득 넓적한 막대 사탕을 물었다.

“레이너드, 나와 보라니까? 얘들 다들 착하고 좋아. 친하게 지내자. 응?”

문고리를 잡고 애원하는 에이든의 말에 다시 문이 열렸다. 레이너드는 밝아진 에이든의 표정을 보며 팔짱을 꼈다.

“우와, 눈이 빨개. 토끼 같아.”

사탕을 빨다 말고 네이선이 손가락으로 그의 눈을 가리키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네이선은 악의 없이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아이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감탄은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는 한다.

‘베아투스’에 관한 소문이 이미 아카데미에 자자해서 그를 놀리거나 따돌리는 일은 없었지만 여전히 마음의 상처를 갖고 있는 레이너드는 제 눈에 민감했다.

레이너드가 눈을 가리며 도로 방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던 알렉스가 주먹으로 네이선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아야! 왜 때려?”

“사람에게 그렇게 삿대질을 하면 못써. 그리고 ‘베아투스’라서 그렇다고 내가 전에 얘기했잖아.”

“베아투스?”

“그래. 여신의 축복을 받아서 눈이 빨간 거야.”

등 뒤에서 들리는 속삭임을 듣던 에이든은 뒤로 돌아서며 눈을 부라렸다.

“너네, 베아투스든 뭐든 눈에 대해서는 아예 이야기를 하지 마. 쟤도 똑같은 사람인데 왜 그래? 네이선, 네 눈이 파란 것처럼 레이너드의 눈도 그냥 빨간색일 뿐이야. 누가 네 눈을 보며 파란색이라고 신기해하지 않잖아. 그렇지?”

네이선이 사탕과 이가 부딪히며 딱딱 소리가 날 정도로 열심히 사탕을 먹으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처음 보는 붉은 눈을 왜 신기해하면 안 되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려서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그는 기숙사에서 대장 노릇을 하고 있는 에이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알겠어.”

“그리고 사탕 깨물어 먹지 말고 꼭 빨아 먹고. 잘못하다간 이 상해.”

“응.”

“먹고 꼭 방에 가서 양치질도 하고.”

“응.”

“으이구, 착하다.”

에이든은 사탕을 물고 있느라 볼록 튀어나온 네이선의 볼을 애정 가득한 손길로 살짝 꼬집었다가 놓아준 뒤 다시 레이너드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세 꼬맹이들이 낯선지 그는 그들을 살짝 굳은 얼굴로 보고 있었지만 방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에이든은 그가 잠자코 기다려 주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기뻤다.

“자, 정식으로 소개할게. 아까 말했듯이 지금 사탕을 먹고 있는 저 꼬맹이는 네이선. 얘도 귀족인데 나랑 달리 수도에서 나름 이름 있는 백작가의 삼남이야. 여덟 살이라 아직 우리가 잘 돌봐 줘야 해.”

“형아, 안녕! 난 네이선이야! 네이트라고 불러 줘도 돼! 우리 가족은 다 그렇게 부르거든.”

네이선이 그사이에 많이 작아진 막대 사탕을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을 흔들어 보였다. 레이너드는 가볍게 손을 들었다가 내리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있지, 형아! 레이 형아라고 불러도 돼?”

네이선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가자 움찔거리며 두 걸음 물러난 레이너드가 미간을 좁혔다.

“그건 안 돼. 레이너드라고 불러.”

“왜? 형아 이름은 너무 길어서 어렵단 말이야. 그럼 형아 가족들은 형아를 뭐라고 부르는데?”

에이든은 ‘가족’이라는 단어에 깜짝 놀라 네이선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지금 그가 보기엔 붉은 눈보다도 더 민감한 주제가 바로 가족이었다.

네이선이 도리질을 하며 “으그 느! 느!”라고 소리 지를 때마다 손바닥에 끈적끈적하게 녹은 사탕 잔여물이 묻었지만 에이든은 상관하지 않고 레이너드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과는 달리 그는 언짢아하는 기색 없이 팔짱을 끼더니 네이선과 에이든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에이든 같은 애가 한 명 더 있었어.”

에이든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발끈해서 소리 지를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왜? 내가 왜?

“내 주위 사람들은 다들 레이너드라고 불러.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불러야 돼.”

에이든의 손을 입 아래로 끌어 내리며 네이선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다음으론 알렉스와 토마스를 소개해 줬다.

레이너드는 그나마 가장 차분한 성격의 토마스를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이었다. 에이든의 주관적인 평가에 따르면 말이다.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해 봤자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어서 실제로 어쨌는지는 미궁에 빠졌다.

그 후로 다섯 명은 늘 같이 우르르 몰려다녔다. 에이든이 일부러 레이너드를 혼자 두지 않으려고 모임을 결성한 이유가 컸다.

그들은 늘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도 같이하고 수업도 같이 듣고 도서관에서 과제도 같이했다.

혹시 저녁 식사를 하고 레이너드가 방에 혼자 들어가면 또 우울해할까 봐 일부러 늦게까지 붙잡았다가 금방이라도 잘 것처럼 하품을 할 때야 헤어졌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레이너드는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아이들이 익숙해졌는지 어색해하는 기색은 많이 사라졌지만 잠깐이라도 신경을 쓰지 못하면 또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는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다섯 사람은 도서관에 모여 교수님이 내준 과제를 가지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너무 어려워.”

이해력이 가장 약한 네이선이 가장 먼저 포기 선언을 하며 책상에 엎어졌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마법 이론은커녕 제국어를 읽는 것 자체도 서툴렀다.

사실 그건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제국 공통어를 배우긴 했지만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특별히 제국어를 접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제국 출신인 레이너드에게 희망을 걸어 보았다. 그는 네 사람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그렇다고 능숙하게 읽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는 네 사람 중 에이든이 가장 마지막에 포기 선언을 할 때까지도 끈질기게 책을 보며 종이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글씨는 잘 쓰네.’

레이너드의 글씨체는 왠지 여자애들이 쓴 것같이 동글동글 귀엽게 생겼다.

글자를 가르쳐 준 선생님이 여자였던 걸까. 에이든이 그런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아카데미에서 편지 배달을 해 주는 아이였다.

“여기 다 모여 있으니까 좋네. 한 번에 줄 수 있겠다.”

그는 가장 먼저 네이선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엄마의 이름을 보자마자 네이선은 코를 씰룩이며 금세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가족들이 모두 수도에 있어서 얼마 전에도 가족들을 봤으면서 역시 아기는 아기인가 보다.

그다음으로는 토마스가 받았다. 그는 발신자를 살피더니 덤덤히 인장을 뜯고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나는? 내 거는 없어?”

다급하게 물으며 소년의 손에 들린 마지막 편지의 주인을 확인한 에이든은 김이 샜다는 표정으로 턱을 괬다.

‘형제애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들.’

매일같이 붙어 있던 오빠, 혹은 형이 머나먼 수도를 떠났는데 못난 동생들은 몇 달 동안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았다. 이번 방학 때 저택으로 돌아가면 눈물이 날 때까지 간지럼을 태워 줄 테다.

“레이너드, 받아.”

글을 쓰는 척하며 소년에게 힐끔힐끔 눈길을 주었던 레이너드가 입가를 씰룩이며 편지를 받았다. 라일락 빛 편지 봉투에서는 향긋한 봄꽃 향기가 희미하게 났다.

레이너드가 편지를 돌려 뒷장에 쓰인 발신인을 확인했다.

그 순간 에이든은 제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지난 일주일간 매사에 흥미가 없는 듯 심드렁하게 지냈던 레이너드의 얼굴에 마치 꽃봉오리가 톡 하고 터지며 꽃을 피워 내는 것처럼 순식간에 웃음꽃이 핀 것이다.

그가 편지에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네이선은 “레이너드 형아 왜 저래?”라며 심각한 표정이 되었지만 에이든의 눈에는 그가 기쁨에 겨워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푸흐흡 하고 바람 새는 소리 같은 웃음소리도 들렸다. 테이블 밑에서 두 다리도 동동거리는 것만 같았다.

“야, 레이너드. 괜찮아? 누구한테 온 편지길래 그래?”

레이너드가 고개를 퍼뜩 들며 제게 쏠린 눈동자들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그는 웃음을 멈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입가가 계속 씰룩이는 통에 별로 효과는 없었다.

“나,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방에 가 볼게!”

주섬주섬 책을 챙기며 내뱉은 그 말은 평소보다 잔뜩 올라가 있었다. 하얗기만 했던 그의 두 뺨 또한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저녁은 어쩌고?”

“오늘은 너네끼리 먹어. 나는 방에서 알아서 먹을게. 그럼 내일 봐!”

에이든이 채 잡기도 전에 레이너드는 쏜살같이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레이너드 형아가 이상해.”

빨개진 눈가를 닦으며 네이선이 중얼거렸다. 편지를 받지 못해 뾰로통한 얼굴로 공책에 찍찍 낙서를 하며 화풀이를 하던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진짜 이상해.”

에이든은 이번에는 그들에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이상하네.”

대체 누구에게서 온 편지길래 저렇게 좋아할까? 후원자? 제국에서 알고 지낸 친구?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 편지를 받고 난 후부터 레이너드의 기분이 급속도로 좋아졌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다음 날부터 그는 물을 잔뜩 먹어서 파릇파릇해진 새싹처럼 기운을 차렸다.

또랑또랑한 눈으로 교수님의 말을 경청하는 그를 보며 에이든은 정체 모를 편지의 발신인에게 고마워졌다.

* * *

제국력 468년, 레이너드 14세 봄.

“갑자기 웬 검술?”

뜬금없는 제안에 떨떠름하게 대꾸하면서도 레이너드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에이든은 재빠르게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그의 손에서 책을 뺏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이지!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면 몸이 비실비실해지는데 그런 몸으로 어디 공부를 제대로나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

“마법사들은 이래서 문제라니까.”

에이든이 꼭 자신은 마법사가 아닌 것처럼 혀를 쯧쯧 찼다.

“너 같은 애들 때문에 마법사에 대한 편견이 생기잖아. 다들 비쩍 말라서 비실거리면서 성격은 또 신경질적이라고 다들 그래. 난 그런 거 싫어.”

“그건 네 사정이고.”

레이너드는 이번에도 단호하게 일축했다. 말도 많고, 관심 있는 것도 많은 에이든은 지금처럼 터무니없는 소리를 곧잘 했다.

검술이라니. 에이든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하지만 레이너드가 알기로 검술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소모되는 운동이었다. 단순히 검만 휘둘러서 될 게 아니라 기초 체력 단련이나 대련 등 할 게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런 것에 할애할 시간이 있다면 마법서 한 장을 더 보는 게 나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책이나 줘.”

“인상 쓰지 말고 잘 좀 들어 봐!”

에이든은 손을 뻗는 레이너드를 피해 팔을 번쩍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야.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기사만 검을 배워? 귀족가에서는 무가가 아니더라도 검술은 기본으로 배운단 말이야. 나도 아카데미에 오기 전까지는 그랬고. 봐 봐. 여기 알통 보이지?”

“글쎄, 모르겠는데.”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너드가 기어코 그의 손에서 책을 되찾아 가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에이든은 이번엔 그의 옆자리로 가서 그의 어깨에 제 어깨를 툭 부딪쳤다. 레이너드가 충격에 잠깐 휘청거리자 에이든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번져 나갔다.

“이것 봐. 체력이 약하니까 그렇게 비실거리는 거 아냐.”

“체력이 문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갑자기 그런 공격을 받으면 나처럼 돼.”

“아니거든! 나처럼 근육이 있으면 누가 갑자기 들이받아도 넘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 으악.”

에이든은 레이너드가 순간적으로 어깨를 미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레이너드는 에이든이 의자에서 떨어지기 전 그의 팔을 잡아 주며 눈썹을 치켜세웠다가 내렸다.

“내가 뭐랬어. 누구나 그런 거라고 했지?”

“이건…… 그래! 이건 내가 요즘 통 검술 연습을 못 해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체력을 다시 키우기 위해 같이 검술 수업을 듣자는 거지. 어때? 하자. 하자아아아.”

“관심 없어. 듣고 싶으면 혼자 들으면 되잖아.”

“검술과 애들만 바글거리는 수업에 혼자 가면 민망하잖아.”

“가서 새 친구들을 사귀면 되지. 네 특기잖아.”

“정말 이러기야? 난 네 건강을 위해 신경 써 주는 건데.”

“교수님이 내준 과제 하기도 바빠.”

정말 관심이 없는지 레이너드는 더 이상 에이든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아니면 알렉스나 토마스에게 같이 듣자고 하든지.”

“걔네는…….”

순간 말문이 막혀 에이든은 입을 다물었다.

이미 오늘 아침에 같이 듣자고 했다가 퇴짜를 맞았다는 이야기는 절대 할 수 없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다들 검술을 배울 필요 없지 않냐며 레이너드의 결심만 더 굳건해질 게 뻔했다.

사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레이너드와 가장 같이하고 싶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아카데미에 와서 처음 사귄, 그것도 동갑내기 친구니까!

에이든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그를 설득할 다른 이유를 찾았다.

“검술을 배우면 말이야, 뼈와 근육을 자극해서 키가 커진대.”

“그거 안 해도 난 키가 클 거야. 집안 내력이거든.”

“지금은 나보다 작은데?”

“한 3년 뒤에 두고 봐.”

이거 안 먹히는걸. 망설임 없이 일축하는 레이너드를 보며 그는 다른 이유를 또다시 찾아내야만 했다.

“체력이 좋아지면 말이야, 잠을 얼마 안 자도 피곤하지가 않아. 잠자는 시간이 줄어들면 공부하는 시간이 늘어나잖아.”

“그 늘어나는 시간 동안 검술 연습을 하는 거잖아.”

“아, 그건 그런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에이든은 뒤늦게 자신이 레이너드에게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끄응, 이번에도 실패. 에이든은 머리를 싸매며 책상에 이마를 콩 박았다. 생각해야 한다.

생각해야 한다. 생각해야…….

“있지, 레이너드.”

에이든이 레이너드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의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이는 폼이 꼭 중대한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만 같았다.

“검술을 배우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진다?”

책장을 넘기던 레이너드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검을 배우면 키가 클 뿐만 아니라 어깨도 넓어지고 근육도 생기잖아. 여자들은 비쩍 마른 남자보다는 그렇게 근육 있고 건강한 남자들을 좋아해. 비쩍 말라서 체력도 없는 마법사보다는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 튼튼하고 듬직한 마법사를 더 좋아하지 않겠어?”

스스로가 생각해도 지금껏 말한 것 중 가장 어이없고 황당한 말이었다. 세상에 여자에게 잘 보이려는 이유로 검을 배우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게다가 레이너드는 이성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소년이었다. 여자에게 선물이나 편지를 받아도 심드렁하고, 고백을 받아도 생각해 보지도 않고 거절하는 녀석이란 말이다.

그런 녀석에게 이런 얼토당토않은 장점이 먹힐 리가 없었다.

……먹힐 리가 없는데 이상하게 레이너드에게서는 헛소리하지 말라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책을 보고 있었지만 계속 한 면만 바라볼 뿐,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레이너드는 책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대체 누가 그런 이유로 검을 배워?”

예상대로 퉁명한 목소리였다.

‘그래, 역시 먹힐 리가 없지.’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이든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른 이유를 생각해 내기 위해 또다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검을 배우면 말이야, 몸이 건강해져서 잔병치레도 하지 않아. 생각해 봐. 우리처럼 가족이랑 떨어져 있는 사람이 혼자 낯선 곳에서 아프면 얼마나 서러운지. 나 지난번에 고작 감기에 걸렸을 뿐인데 엄마가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그건 그렇네. 아프면 서럽지.”

어? 먹혔나? 에이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말은 안 했지만 이 녀석도 지난겨울 감기에 걸렸을 때 혼자 있는 게 서럽고 외로웠던 것이 분명하다. 레이너드의 마음이 흔들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에이든은 다다다 쏘아붙였다.

“그렇지? 그러니까 같이 검을 배우면서 몸을 단련하자. 그러다가 검술부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면 좋잖아. 응? 응?”

“……생각해 볼게.”

알겠다는 대답이 아니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에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생각해 보고 같이 하는 거다?”

레이너드는 한숨을 쉬며 다시 책을 폈다.

그날 저녁, 카페테리아에서 같이 저녁을 먹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레이너드는 같이 검술을 배우자고 다시 조르는 에이든의 제안을 마지못한 표정으로 승낙했다.

* * *

제국력 469년, 레이너드 15세 겨울.

오전 수업 내내 레이너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가끔씩 수업을 빼먹는 에이든과 달리 수업을 한 번도 빼먹은 적이 없는 레이너드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업 내내 초조하게 발을 흔들던 에이든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레이너드의 방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야, 레이너드. 안에 있어?”

몇 번을 노크해 보았는데도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방에 없나?’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에이든은 곧 고개를 저었다. 이 모범생 녀석이 수업을 빼먹고 다른 곳에 갔다기보다는 차라리 어제 늦게 자서 아직까지 자고 있다는 편이 더 말이 됐다.

‘설마 얘 어디 아프나?’

저도 모르게 생각했던 에이든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방문을 두드렸다.

“야, 야! 레이너드! 너 괜찮아? 있으면 대답 좀 해 봐!”

이번에도 나오지 않는다면 기숙사 사감을 불러 강제로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 생사 확인을 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에이든이 기숙사 사감에게 뛰어가기 직전에 문이 천천히 열렸다.

“뭐…… 야?”

평소보다도 창백한 얼굴을 한 레이너드가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에이든은 그 얼굴에서 그가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야, 너 괜찮아?”

“괜찮…….”

말을 채 끝내기 전에 마른기침을 하는 레이너드를 보며 에이든은 확신했다.

‘안 괜찮네.’

혹시나 하고 레이너드의 이마에 손을 올려 봤더니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레이너드가 눈을 찌푸리며 에이든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행동이 굼벵이처럼 느렸다. 휘적거리는 팔에는 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에이든은 다시 한번 확신했다.

‘얘 정말 많이 아프구나.’

하긴, 이 정도로 아프니까 오전 수업도 빼먹었을 테지. 에이든은 얼른 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젓는 레이너드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본인 또한 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뭐…… 야? 왜 들어와?”

“친구 좋다는 게 뭐야? 내가 간호해 줄게!”

“가는 게…… 도와주는 거야.”

“섭섭한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누워! 얼른, 얼른!”

에이든은 레이너드의 손을 끌어 강제로 침대에 눕혔다. 레이너드는 대거리할 기운도 없는지 에이든이 이끄는 대로 걸어가 쓰러지다시피 침대에 누웠다.

에이든은 레이너드의 목까지 이불을 덮어 준 뒤 잠시 골똘히 기억을 되짚었다.

‘감기에 걸리면 어떻게 했더라?’

벌써 아카데미에 온 지 2년이나 됐다고 어머니와 유모가 동생들이 아플 때 간호해 주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가물가물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기억을 되짚어 보니 차가운 물수건을 이마에 얹고 골골대던 장난꾸러기 동생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에이든은 당장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대야에 물을 펐다. 수건을 목에 둘러매고 물 대야를 낑낑거리고 들고 와 침대 옆에 앉았다. 그의 행동을 눈치챘는지 레이너드가 주춤거리며 멀리 도망갔다.

“어디 가. 이거 해야 열이 내리지!”

“그냥…… 약이나 먹고 잘래.”

“안 된다니까!”

에이든은 수건을 물에 푹 담갔다가 빼서 물기를 꾹 짰다. 그걸 이마에 올릴 만한 크기로 접어 레이너드의 이마에 올려놓자 물이 그의 얼굴을 타고 줄줄 흘렀다.

“다 흐르잖아.”

“미안, 미안해!”

에이든은 수건을 다시 한번 꾹 짠 뒤 도로 이마에 올려 주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물이 흐르지 않았다.

레이너드가 작게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몸이 좋지 않아서 오늘 하루는 그냥 조용히 방에서 잠이나 자려고 했는데, 저 너구리 같은 녀석이 올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저 녀석은 그냥 놔두고 돌아가 주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대체 뭐 하다가 감기에 걸린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걸린 거지.”

콜록콜록, 기침이 터져 나왔다. 에이든이 눈이 동그래지더니 약을 가져오겠다면서 쏜살같이 방을 나갔다. 레이너드는 그 모습을 흘끔 보다가 눈을 감으며 손등으로 감은 눈 위를 꾹 눌렀다.

아, 문을 열어 주는 게 아니었는데.

* * *

“레이.”

잠결에 그리웠던 목소리가 들렸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듣고 싶었던 목소리.

레이너드는 꾀꼬리처럼 고운 유리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더욱 꽉 감았다.

눈을 떠서 유리나의 얼굴을 마주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곳은 아카데미다. 유리나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 저 목소리는 환청이거나 꿈일 것이다.

전에도 이런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는 뭣 모르고 유리나를 보겠다고 눈을 떴었는데, 그럴 때마다 유리나를 보기는커녕 목소리마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이대로가 낫다. 괜히 눈을 떠서 빈방을 보는 것보다는 잠시 동안 유리나의 목소리를 듣는 편이 훨씬 좋았다.

“많이 아파?”

아니, 안 아파. 나 괜찮아. 걱정을 덜어 주려는 말을 해 주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오라는 목소리는 안 나오고 눈치 없는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꼭 유리나가 눈물을 닦아 주는 것처럼 보드라운 천이 눈물이 흐른 얼굴을 닦아 주는 느낌이 났다.

“푹 쉬어. 잠을 푹 자야 얼른 낫는대.”

문득 예전에 유리나가 간호를 해 주었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카르티아 저택에 간 지 며칠 되지 않았을 적의 일이었다.

얼굴도 떠올리기 싫은 로렌 부인인지 뭔지 하는 여자가 모진 말을 내뱉었던 바로 그날.

늘 듣던 소리라 레이너드는 로렌 부인의 말에는 크게 상처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르티아 가문을 운운해 가면서 말하는 건 조금 무서웠다.

유리나와 카르티아 후작은 자신을 후원해 주겠다고 말했지만, 혹시라도 붉은 눈이 불길해서 가문에 해가 될 거라는 로렌 부인의 말을 듣고 마음이 바뀌어 쫓아내면 어쩌나.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 없으면 어쩌나, 하고 두려웠다. 유리나가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불안했다.

지금이야 그녀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당시에만 해도 그는 그녀를 잘 몰랐다. 그렇게 귀한 아이가 변덕을 부려 그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하면 그는 당장에라도 저택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병든 닭처럼 듣기 싫은 목소리로 떠들어 대는 로렌 부인의 입을 막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지르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저도 모르게 그 못된 여자의 손을 할퀴고 난 뒤에는 더 큰 두려움이 찾아왔다.

로렌 부인은 직위는 낮지만 분명히 귀족이라고 했다. 나 같은 보잘것없는 애가 그런 귀족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괘씸하다고 쫓겨나는 건 아닐까?

나쁜 눈! 왜 난 하필 이런 붉은 눈을 타고나서! 나는 왜!

분풀이를 하듯 제 눈가를 마구 할퀴고 방 안에 꼭꼭 숨었다. 유리나를 보기 무서웠다. 그 모든 사실을 안 유리나가 실망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며 돌아가라고 할까 봐.

―난 네 눈이 좋아, 레이.

그런데 그의 상처를 보며 그보다도 더 괴로워하는 얼굴로 유리나가 중얼거리던 그 말.

레이너드는 처음에 그 말을 순수하게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해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처음 보았을 때처럼 햇살처럼 반짝이는 유리나의 푸른 눈을 보는 순간, 그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냥 믿고 싶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유리나는 열병에 걸린 것처럼 열이 오른 그의 곁에 머물며 간호를 해 주었다. 간호라고 해 봤자 그보다 어린 열 살 여자애가 해 줄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그녀가 해 준 것이라고는 그저 레이너드가 눈을 뜰 때마다 물을 주거나 이불을 턱밑까지 덮어 주는 것 정도였다.

그래도 좋았다.

그 하얗고 고운 손이 그녀의 이마와 그의 이마를 번갈아 가며 짚어 보는 것도, 손수건으로 땀에 젖은 목을 닦아 주는 것도, 얼른 가라며 그가 투덜거릴 때마다 어이없다는 듯이 웃어넘기는 것도.

그냥 아플 때 누가 그렇게 옆에 있어 준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한참 동안 유리나의 얼굴을 떠올려 보던 레이너드는 지금 옆에 아무도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눈을 더욱 꽉 감았다.

열에 들뜬 얼굴이 화끈거리고 머리가 묵직했다. 목은 많이 부었는지 숨을 쉬기 힘들고 온몸이 근육통이 있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런 것은 괜찮았다. 하지만 가장 서러운 것은 아픈 것이 아니라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왜 울어? 많이 아파?”

레이너드는 또 한 번 들려오는 유리나의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는 했지만 사실 많이 아팠다. 죽을 정도로 아픈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힘들고 지쳤다. 몸보다는 마음이 힘들었다.

그냥 딱 한 번, 딱 한 번만 얼굴을 보고 싶은데.

눈을 뜨면 꿈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레이너드는 눈을 감은 채로 제 얼굴을 닦아 주는 차가운 수건의 감촉을 느끼며 가쁜 숨만 내쉬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꼭 누가 옆에 있는 것처럼, 진짜 유리나가 있는 것처럼 울렁이던 속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 것을 느끼며 그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 *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한참 자고 났더니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 레이너드는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이마 위에 올려져 있던 물수건이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멍한 얼굴로 그 물수건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레이너드는 침대에 엎드리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에이든?”

아직 목이 살짝 부어 있어서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진짜로 중요한 건 침대 옆 바닥에 앉아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는 저 에이든 녀석이었다.

‘쟤가 왜 여기 있지?’

레이너드가 어제의 기억을 곰곰이 되새겨 보는데 기척을 느꼈는지 에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새집처럼 엉망이 된 머리를 하고서 하품을 하던 에이든은 레이너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일어났어? 몸 좀 괜찮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누가 머리를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레이너드가 인상을 쓰며 손바닥으로 관자놀이 위를 누르자 에이든이 목소리를 줄이며 다시 물었다.

“아직도 아파?”

“네가 왜 여기 있어?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야?”

“어? 기억 안 나? 네가 열어 줬잖아.”

에이든이 의아하단 투로 중얼거리며 레이너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레이너드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자 에이든은 그의 어깨를 한 번 찰싹 때리더니 손바닥으로 그의 이마를 짚었다. 그러더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이번에는 제 이마를 짚었다.

“나도 감기가 옮았나 봐. 너랑 내 이마랑 온도가 비슷해. 나도 열이 나나?”

에이든은 누가 보더라도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 분명한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목소리를 줄여 재잘거렸다.

“그거 알아? 감기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면 감기가 금방 낫는대. 그래서 난 동생들이 감기에 걸릴 때마다 옆에 꼭 붙어 있었어. 그러다 진짜로 내가 감기가 걸리면 동생들은 다 나았다? 신기하지?”

별것 아닌 이야기였는데 그는 꼭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진지했다.

“이번에도 네 감기가 나한테 옮은 걸까? 그럼 너도 곧 감기가 나을 거야!”

레이너드는 가까이 다가와 제 얼굴을 살피는 에이든의 어깨를 뚱한 얼굴로 밀어냈다.

“바보야, 나이가 몇인데 그런 말을 믿어? 동생들이 감기가 나은 건 나을 때가 됐으니까 그랬던 거겠지. 그리고 네가 열이 나는 게 아니라 내가 열이 내린 거야.”

“그런가?”

“응.”

바보 소리를 들었는데도 에이든은 전혀 불쾌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환하게 웃더니 레이너드를 와락 끌어안았다.

“감기가 이미 다 나은 거구나! 약도 먹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하여 레이너드는 그를 밀어내지도, 마주 안아 주지도 못했다. 갈 곳을 잃은 그의 손이 허공에서 방황했다.

“어제 약 가지러 갔다가 너 기절한 거 보고 무슨 일 나는 줄 알았어! 진짜 걱정 많이 했다니까!”

레이너드는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에이든의 우렁찬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물이 가득 담긴 대야와 바닥에서 나뒹구는 물수건 몇 장,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약과 다 식어 버린 수프가 담긴 그릇. 지난밤에 에이든이 얼마나 발을 동동거리며 뛰어다녔는지 상상이 될 정도로 요란한 풍경이었다.

방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면 어떡하느냐는 생각보다는 알 수 없는 감정에 목 속이 간질거렸다. 아직 목이 부어 있어서 그런 걸까.

“배는 안 고파? 카페테리아에서 뭐 좀 가져올까? 혹시 모르니까 식사하고 약을 먹는 게 좋겠어!”

에이든이 레이너드를 놓아주고는 얼른 다녀오겠다며 방을 나서려고 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얼핏 쳐다본 그의 눈 밑은 거뭇거뭇하고, 그의 흰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상하게 에이든의 얼굴 위로 유리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유리나에게 미안한 일이기는 한데, 밤새 제 옆에 있었을 에이든의 얼굴에서 자신을 간호해 주던 유리나와 비슷한 표정이 보였다.

레이너드는 문고리를 잡는 에이든의 등 뒤로 저도 모르게 작게 웅얼거렸다.

“……고마워.”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였는데도 용케 그걸 들었는지 에이든이 뒤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고맙긴, 뭘. 친구끼리 이 정도는 당연한 거지.”

* * *

제국력 470년, 레이너드 16세 가을.

신은 역시 불공평하다.

레이너드가 온 힘을 실어 내리치는 목검을 막으며 에이든은 새삼스럽게 그 말을 되새겼다.

뙤약볕에서 대련을 하는 탓에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는데도 레이너드는 여전히 매혹적인 외모를 자랑했다. 이렇게 코앞에서 들여다보아도 못난 곳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땀 흘리면서 인상을 쓰면 조금은 못생겨 보여야 하는 거 아냐?’

나는 아마 지금 거울을 보면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되어 엄청 웃기게 생겼을 텐데! 왠지 모를 패배감에 에이든은 힘차게 레이너드의 목검을 쳐 냈다.

외모뿐이라면 말을 안 한다. 입학할 때부터 여신의 축복을 받은 ‘베아투스’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마법과를 떠들썩하게 뒤집어 놓더니, 고작 몇 년 만에 교수를 뛰어넘는 실력을 갖췄다는 이야기가 암암리에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를 3년 동안 옆에서 지켜본 에이든은 그 소문이 완전히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레이너드가 한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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