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5/20)

외전 3. 새로운 시작

“정말 가야 돼?”

에드윈이 울먹이며 유리나의 두 손을 꽉 잡았다. 결혼식 내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의 두 눈은 이미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훌쩍 클뿐더러 웬만한 기사보다도 체격이 큰 에드윈이 아이처럼 우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그래서인지 우습다기보다는 오히려 더 안쓰러워 보였다.

유리나는 차마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애써 웃어 보였다.

“내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만…….”

“그만 울고 좀 비켜 봐! 작별 인사는 너 혼자만 하냐!”

옆에서 저스틴이 똑같이 충혈된 눈으로 핀잔을 주었지만 에드윈은 유리나의 손을 잡고 버텼다. 저스틴은 어깨로 그의 어깨를 툭툭 밀다가 한숨을 쉬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얼른 마무리해.”

똑같이 다혈질이고, 동생인 유리나를 끔찍이 아끼는 쌍둥이였지만 이상하게 에드윈이 저스틴보다는 유리나를 더 각별히 대했다. 그걸 아는 저스틴은 에드윈에게 시간을 더 주기로 했다.

에드윈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유리나를 내려다보며 또다시 흐르려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무슨 일이 있으면 오빠한테 꼭 연락해. 편지 보자마자 바로 달려갈 테니까.”

“그럴 일 없다는 거 알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레이가 잘…….”

잘 지켜 줄 거야. 그 말을 하려는데 에드윈이 유리나의 말을 자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그게 걱정이라니까!”

늘 유리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며 한 번도 말을 끊은 적이 없는 에드윈의 낯선 반응에 유리나는 순간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가 유리나의 뒤쪽에 서 있는 레이너드를 노려보았다.

유리나 앞에서는 푼수 같은 에드윈이지만 그는 제국에서도 알아주는 기사였다. 그가 진지하게 검을 잡으면 같은 기사들도 그의 눈빛에 압도당해 본능적으로 주춤하고는 한다.

그런 그의 눈빛을 받으면서도 레이너드는 겁에 질리기는커녕 눈 깜짝하지 않았다.

그 태연자약한 태도가 가뜩이나 심란한 에드윈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는 이 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 녀석이 혹시라도 무슨 짓을 하면 꼭 얘기해.”

“무슨 짓?”

“널 무시한다거나 때린다거나 바람을 피운다거나…….”

“오빠.”

유리나는 에드윈의 말을 자르며 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가만히 들으려고 했는데 더 이상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손아귀 힘이 그다지 강한 편이 아니었는데도 에드윈이 칼로 옆구리를 찔린 사람마냥 신음을 흘렸다. 유리나가 매섭게 노려보자 그는 입술을 안쪽으로 말며 조용해졌다.

“그럴 리 없다는 거 오빠도 잘 알잖아. 걱정되는 건 알지만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여행만 갔다 오면 나도 수도에서 지낼 건데.”

“우리 저택은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마차로 20분도 안 걸리잖아. 자주 올게. 응?”

유리나는 고개를 푹 숙인 에드윈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을 수 없는 듯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레이너드를 다시 노려보았다.

“유리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해는 동쪽에서 뜬다는 것 같은 당연한 진리를 읊는 듯한 태연한 레이너드의 대답을 들은 에드윈은 무언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유리나에게 여행 잘 다녀오라는 말을 남기도 저스틴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저스틴이 보인 행동도 에드윈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유리나에게 잘 지내라는 말과 레이너드에게 협박성 발언을 한 뒤 물러났다.

‘남은 건 릭스 오빠뿐인가.’

유리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릭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가자 그가 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았다. 그의 얼굴은 눈물 자국 하나 없이 메말라 있었고, 그의 눈 또한 전혀 충혈되지 않고 말끔했지만 유리나는 어쩐지 그가 소리 없이 울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리나는 언젠가 자신이 심한 열병이 걸렸을 때 죽으면 안 된다고 서럽게 울던 릭스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했다. 그 후로 그는 그녀 앞에서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 없지만 그때 그 얼굴이 지금 그의 얼굴 위로 어른거렸다.

쌍둥이와 대화할 때도 감정을 다스릴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 명치 아래가 울렁거리며 코끝이 시큰거렸다.

“오빠.”

애써 밝게 웃으며 손을 내밀자 릭스가 기사의 예를 갖추며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는 쌍둥이처럼 요란한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웃으니까 예쁘네. 울지 말고 항상 웃어.”

그저 그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작별 인사라고 하기엔 애매한 말. 그러나 유리나는 그 말 속에서 늘 행복하라는 그의 바람을 읽었다.

“응, 그럴게.”

일부러 더 환하게 웃자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유리나의 손을 잡고 레이너드에게 걸어갔다. 그가 유리나의 손을 조심스럽게 레이너드에게 쥐여 주었다.

레이너드는 릭스와 눈빛으로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다가 유리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럼 가자.”

유리나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자 카르티아 저택의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거나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한 장소. 유리나는 오묘한 기분을 느끼며 마차가 움직일 때까지 밖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 맞은편에 앉은 레이너드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유리나.”

머리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에 유리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쪽 무릎을 의자에 대며 그녀의 위에 앉다시피 한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가족들이랑 떨어져서 슬픈 건 알겠지만…….”

그가 고개를 숙이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은 내 생각만 하면 안 돼?”

그의 붉은 눈동자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 더욱 번뜩였다. 유리나는 소유욕과 질투가 진득하게 묻어 나오는 그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가 다소 급하게 입을 맞췄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동안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조금이라도 붙어 있으려고 하면 쌍둥이 오빠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방해했기 때문이다.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힘들었으니 애정 표현을 하거나 사랑을 나누는 일도 당연히 없었다.

그동안 쌓여 온 욕망을 한꺼번에 터트리는 것처럼 레이너드는 꽤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원래도 부드럽다기보다는 다소 거친 편이었는데 지금은 자제가 되지 않는지 부드러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촉촉한 입술로 유리나의 윗입술, 아랫입술을 번갈아 물기도 하고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이를 세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도 했다. 유리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목을 끌어안자, 그가 낮게 웃으며 몸을 바짝 붙였다.

유리나는 그가 잠시 입을 뗀 사이에 숨 가쁘게 호흡을 했다. 잠깐 사이에 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숨을 깊이 들이쉬어도 헐떡였다.

바짝 붙은 레이너드의 단단한 몸은 그녀의 몸보다도 더 뜨거워 꼭 불길 안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레이너드는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녀의 가슴팍을 바라보다가 촉촉이 젖은 그녀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꾹 눌러 벌렸다.

유리나는 자꾸 갈증이 나는 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레이너드의 얼굴을 흘끔 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레이너드가 다시 입술을 맞부딪혀 왔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온 뜨거운 혀가 그녀의 혀를 집요하게 옭아맸다. 숨이 차올라서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쯤 레이너드는 능숙하게 얼굴을 뗐다가 유리나가 조금 진정이 됐다 싶으면 다시 입을 맞췄다.

그게 네 번쯤 반복됐을 때 유리나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러다가 도착하기도 전에 지치겠어.”

그가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웃었다.

“좀 봐줘. 오랜만이잖아.”

그러곤 유리나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다시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 * *

레이너드 펠리어스.

남작위를 받으며 그가 황제에게 같이 받은 이름이었다. 보통 작위를 받을 때 황제가 임의로 성을 수여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종종 당사자의 뜻을 존중하여 그가 원하는 성을 수여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레이너드의 경우엔 후자였다. 그러나 그는 유리나에게 왜 많고 많은 단어 중 펠리어스라는 성을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다. 유리나가 물어보아도 ‘그냥…….’이라고 말을 흐리며 미소 짓기만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데이브가 유리나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고대어를 찾아보시면 알 겁니다, 아가씨. 레이너드 군의 이름도 고대어를 따오지 않았습니까.

뜻을 말해 주자니 하나밖에 없는 제자를 배신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아예 입을 다물고 있자니 그동안 모셔 온 아가씨를 속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충분한 단서였다. 유리나는 레이너드 몰래 고대어 사전을 찾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손쉽게 뜻을 찾을 수 있었다.

펠리어스. 고대어로 행복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였다.

그 단어를 보자마자 어쩐지 마음이 뭉클해져서 유리나는 한동안 고대어 사전을 펼쳐 놓은 채로 멍하니 있었다.

‘행복이라…….’

많은 생각과 기억이 머릿속을 어지럽혀 놓았다. 멀미가 나는 것처럼 머리가 멍하고 속이 울렁거렸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 끝에 전에 들었던 레이너드의 말이 생각이 났다.

―있잖아, 유리나. 나 너무 행복해.

처음으로 같이 시간을 보낸 유리나의 생일 다음 날 새벽에 그가 비밀을 얘기하듯 조용히 속삭였던 그 말.

―너야말로 몰라. 널 만나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그가 말한 행복 속엔 늘 유리나가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성이 펠리어스.

너와 내가 앞으로 함께하면서 만들어 갈 행복.

그렇게 유리나는 그의 행복인 유리나 펠리어스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어색하기는 하네.’

펠리어스 남작 부인.

유리나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 낯선 호칭을 입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처음에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땐 유리나 카르티아라는 낯선 이름에 결코 적응할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어느새 적응이 된 모양이었다. 익숙해지려고 해도 아직 ‘유리나 펠리어스’라는 이름이 낯설었다.

‘차차 익숙해지겠지.’

유리나 카르티아로 산 세월보다 유리나 펠리어스로 살 세월이 훨씬 길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웃고 있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레이너드가 그녀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는 유리나에게 몸을 바짝 붙이며 그녀가 바라보고 있던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때, 마음에 들어?”

그가 귓가에 은근히 속삭였다. 유리나가 깜짝 놀라 몸을 바르작거리자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응? 어때?”

유리나는 그의 재촉에 창밖 풍경을 새삼 다시 관찰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한가운데엔 늦봄의 태양이 떠 있었고, 그 밑엔 사파이어빛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닷물에 반사된 햇빛이 눈 부셨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품에 나른하게 몸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마음에 들어.”

레이너드는 작위와 영지를 받을 때 제 생각보다는 유리나의 생각을 먼저 했다. 가문의 이름을 ‘펠리어스’로 지은 것만 해도 그랬다.

그는 줄곧 가족들과 떨어져 지낼 유리나를 걱정했다.

혹시라도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지내느라 어색하고 외로워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를 택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유리나가 보기엔 생각할 가치도 없는 터무니없는 고민이었지만 그는 꽤 진지했다.

그래서 수도에서 지낼 펠리어스가 저택을 최대한 카르티아 저택과 가까운 곳으로 구했다. 유리나가 언제라도 자유롭게 가족들을 만날 수 있도록.

그러고 나니 고민이 또 하나 생겼다.

‘영지…….’

1년의 대부분을 수도에서 지낸다고 하지만 영지에 아예 안 갈 수는 없었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기간으로 따지면 두세 달 정도는 영지에서 지내야 했다.

유리나나 카르티아 후작 부부 또한 주로 수도에서 지내더라도 여름이나 겨울엔 영지로 가서 영지민을 살폈다. 그게 귀족의 도리였다.

그러니 유리나와 레이너드 또한 영지를 살피러 가야 하는데, 그 기간 동안에는 수도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교류를 하기 힘들었다.

레이너드는 그걸 걱정했다. 안 그래도 낯선 영지인데 사람들마저 낯설면 외로움을 타거나 우울해하지는 않을까.

그래서 그는 유리나가 조금이라도 익숙함을 느낄 수 있도록 바닷가를 끼고 있는 영지를 하사받았다. 황태자인 커티스가 흔쾌히 그 부탁을 들어주어서 가능했다.

제국 남부에 있는 카르티아 영지와 달리 수도에서 제법 가까운 곳에 있는 영지였다. 크기는 카르티아 영지보다 작았지만 풍경은 카르티아 영지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사실 유리나는 굳이 바닷가가 아니라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너른 들판이 펼쳐진 곳이든, 만년설이 쌓인 산에 둘러싸인 곳이든 괜찮았다.

교류할 사람이 없으면 어떤가. 늘 레이너드가 옆에 붙어 있어서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을 텐데.

그러나 구태여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았다.

“응, 좋아.”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레이너드의 배려와 애정이 더 좋았다.

다소 긴장을 하고 있던 레이너드가 그제야 긴장을 풀며 유리나의 몸 위로 축 늘어졌다.

“다행이다.”

그의 입술이 유리나의 귀 뒤에 닿았다 떨어졌다.

“정말 다행이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안도와 기쁨이 묻어 나왔다. 유리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잘 정돈된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가 토마토처럼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 * *

마차는 달리고 또 달렸다. 이미 영지에 다녀온 적이 있는 레이너드는 아이처럼 들떠서 창밖을 바라보며 유리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해산물 좋아하지? 여기도 해산물이 맛있어.”

“수도와 가까워서 그런지 여기 번화가도 수도 못지않게 잘 발달돼 있어. 심심할 때마다 구경 나가면 좋을 거야.”

“바닷가라 그런지 여긴 겨울에도 따뜻하대. 넌 추위를 많이 타니까 겨울에 영지에 와서 지내면 좋을 것 같아.”

그가 말하는 모든 말 속에는 유리나가 빠짐없이 들어가 있었다.

유리나가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마차가 멈췄다. 계속해서 그녀에게 붙어 있던 레이너드가 서둘러 마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 왔다.”

지금껏 재잘재잘 떠들던 것과 달리 그의 얼굴엔 긴장감이 맴돌았다. 초조한지 그가 유리나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유리나는 천천히 올라갔다 내려오는 레이너드의 목울대를 보다가 그의 에스코트를 받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와, 여기야?”

모든 것이 하얀 저택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분명 지어진 지 오래된 저택이었는데 레이너드가 마법을 쓰기라도 한 것인지 새로 지은 것처럼 얼룩 하나 없었다.

앞뜰에는 그의 눈을 닮은 붉은색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정중앙에는 시원한 물을 뿌리는 분수대가 있었다.

분수대 꼭대기에는 끝이 하트 모양으로 된 화살촉과 활을 쥐고 있는 통통한 아기 천사 동상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고용인들이 일렬로 서서 허리를 숙였다. 다른 마차를 타고 온 베시가 팔짱을 끼며 그 모습을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유리나가 어릴 적부터 그녀를 돌봐 온 베시는 당연히 유리나가 결혼하고도 펠리어스 가문으로 따라왔다.

새로 생긴 가문이라 원래 일하던 고용인이 없는 데다가 베시의 경력이 꽤 길어 유리나는 그녀에게 하녀장을 맡게 했다. 다른 가문의 하녀장에 비하면 젊긴 하지만 베시라면 잘 해낼 거란 믿음이 있었다.

역시나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능숙하게 고용인들의 옷차림과 자세 등을 살폈다. 며칠 간의 여정에 피곤할 텐데도 힘든 내색은 전혀 없었다.

‘베시가 있어서 다행이야.’

베시뿐만이 아니었다.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아직 많이 미숙한 유리나를 위해 카르티아 저택의 하녀와 하인들을 추려 펠리어스 가문으로 보내 주었다. 그 덕분에 아는 얼굴이 꽤 있었다.

게다가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평소 교류가 있는 가문에서 추천서를 받은 사람들을 고용해 준 덕분에 이제 막 생긴 가문인데도 꼭 몇 대에 걸쳐 관리를 한 가문처럼 고용인들에게선 미숙한 티가 나지 않았다.

‘시작이 좋네.’

그동안 귀족으로 생활하면서 익힐 것은 다 익혔지만 솔직히 걱정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안도하며 웃고 있는데 레이너드가 문득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유리나, 가자. 보여 주고 싶은 곳이 있어.”

그가 다른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이고는 그녀를 데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다른 곳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바로 저택의 꼭대기인 4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향한 곳은 4층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이었다. 그가 문고리를 쥐고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으며 유리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긴장한 것 같기도 하면서, 기쁜 것 같기도 하고, 또 동시에 굉장히…….

유리나가 채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레이너드가 다가와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꽉 끌어안자 그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입을 맞췄다.

닫혔던 문이 저절로 열렸다. 걸어가는 느낌이 났지만 유리나는 그가 향한 방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살펴볼 수가 없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어딘가에 내려 준 뒤에야 간신히 주위를 둘러볼 수가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거리는 하얀 캐노피 천이었다. 그 앞쪽에는 카르티아 저택에서 쓰던 것과 비슷한 흰색 화장대가 있고 그 옆에는…….

“유리나.”

갑자기 레이너드가 몸 위로 올라오는 바람에 유리나는 더 이상 주위를 볼 수가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레이너드의 얼굴뿐이었다.

유리나는 그가 목을 조이던 단추를 하나둘씩 푸는 것을 보며 침을 삼켰다. 단추를 반 정도 푼 그가 느른하게 웃더니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유리나는 서둘러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가 다리를 들어 올리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일단 씻어야…….”

그녀가 눈을 살짝 찌푸리며 한 소리를 하기가 무섭게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유리나는 발목에서 시작하여 머리끝까지 훑고 지나가는 시원한 느낌이 뭔지 알았다.

이건 레이너드의 마법이었다. 그와 밤을 보내고 나면 늘 그가 흔적을 없애기 위해 썼던 목욕 마법.

무척 유용한 마법이긴 하지만 그걸 여기서 이렇게 쓸 줄은 몰랐다.

“많이 참았어.”

그가 유리나의 하얀 발목에 입을 맞췄다. 시선은 유리나의 눈을 향한 채였다.

“더 이상은 못 참아.”

그가 복사뼈 밑에 움푹 파인 곳을 혀로 핥아 올렸다. 그러고는 과일이라도 씹는 듯 복사뼈를 깨물었다.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잡아먹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얀 발에 남은 잇자국을 보는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발을 조금 더 높이 들어 올리자 무릎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치맛자락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레이너드의 호흡이 일순 멈췄다가 불안하게 흐트러졌다. 그의 시선이 하얀 다리를 타고 천천히 내려가는 치맛자락을 따라갔다.

시선이 뜨거웠다. 그의 손이 닿은 발목보다 그의 눈빛이 닿은 곳이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오랜만이라 그런 걸까.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져 유리나는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면서.”

“아…….”

“이 방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거야?”

그녀는 흔들리는 캐노피 사이로 보이는 방을 다시 살피고 난 뒤에야 왜 그가 재촉해서 이 방에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아까는 제대로 보지 못해서 잘 몰랐는데 하얀 화장대를 비롯하여 방에 있는 것들이 모두 카르티아 저택에서 쓰던 것과 비슷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지만 티 테이블, 옷장, 침대, 거울 등등. 방 크기가 크다는 것을 제외하면 카르티아 저택에 온 것만 같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었다면 모든 것들이 기존에 쓰던 것과 비슷하되 조금 더 그녀의 취향에 맞게 조금씩 변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다소 유치하다고 느꼈던 거울 테두리의 금박은 사라지고 대신 은은한 꽃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티 테이블은 원형 대신 사각이었으며, 화장대는 서랍장 개수를 줄이고 높은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하나하나, 관심과 애정이 없다면 나오지 않았을 결과물들.

그러나 감동을 느낄 새나, 고맙다는 인사를 할 새도 없었다.

“조금 이따가 보여 줄게.”

조금은 성급하게 달려드는 레이너드 때문이었다.

* * *

‘조금 이따가는 무슨.’

유리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찌뿌드드한 허리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허리뿐만 아니라 온몸 이곳저곳이 욱신거렸다. 햇살이 좋은 오후부터 밤이 깊어질 때까지 레이너드에게 시달린 결과였다.

‘베시에겐 뭐라고 하지.’

저택에 오자마자 제대로 둘러보지도 않고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주인 부부라니. 고용인들을 볼 낯이 없었다. 다행히 눈치 빠른 베시가 상황을 파악하고 출입을 통제한 모양인지 아무도 오지 않았지만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걱정이었다.

저녁 식사 얘기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대체 베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언니처럼, 가족처럼 지낸 베시를 볼 낯이 없었다.

유리나는 자신을 꽉 끌어안고 자고 있는 레이너드를 한번 흘겨보았다가 그의 품에서 나오려고 바스락거렸다. 두툼한 커튼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보아하니 생각보다 오래 잔 모양이었다.

‘얼른 가서 준비를 하고 고용인들을 둘러봐야 하는데.’

그러나 아무리 몸을 움직여 보아도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은 레이너드의 팔을 풀 수가 없었다.

“……왜? 뭐 필요한 것 있어?”

직접 그의 팔을 떼어 내기 위해 손을 들자 기척을 느꼈는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레이너드가 한껏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일어나야 할 것 같아서.”

“왜?”

“왜냐니. 어제 고용인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까 오늘은 가서…….”

그가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양 픽 웃으며 유리나를 좀 더 꽉 껴안았다.

“난 또 뭐라고. 그건 나중에 하면 되지. 그나저나 몸은 괜찮아?”

말 돌리기가 퍽 능숙했다. 그러나 유리나는 대충 속아 넘어가는 척하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조금 뻐근해. 근육통이 있나 봐.”

“그래? 어디? 여기?”

따뜻한 그의 손끝이 유리나의 맨 허리를 더듬거렸다. 그의 손가락이 척추뼈 위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파스를 붙인 것처럼 시원한 느낌과 함께 통증이 말끔히 사라졌다.

허리를 시작으로 어깨, 팔, 다리까지 마사지를 하듯 매만져 준 그는 유리나에게 이불을 덮어 주며 눈을 감았다.

“더 자자.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잔 적은 없잖아.”

그건 그랬다. 그는 늘 해가 뜨기 전에 돌아갔었으니까.

“그러니까 좀 더 있자.”

차마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베시나 다른 고용인들도 이해해 주겠지.

유리나는 그렇게 합리화를 하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 * *

영지에 온 후로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꽤나 바쁘게 지냈다. 고용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얼굴과 이름을 익혔고, 저택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것을 점검했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바다에 나가 산책을 하거나 테라스에서 한가로이 차를 마시며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일주일이 그냥 지나갔다.

바쁘게 일을 처리하고 한숨 돌릴 때쯤, 어떻게 알았는지 때를 잘 맞춰 수도에 있는 오빠들에게서 편지가 왔다. 잘 있냐는 안부와 레이너드가 잘 해 주냐, 오빠는 보고 싶지 않느냐 등 많은 이야기를 담은 편지였다.

유리나는 바로 답장을 썼다. 잘 지내고 있다, 새로운 영지는 바닷가에 있어서 마음에 든다, 사람들이 좋아서 금방 적응할 수 있겠다 등의 내용을 써 내려갔다.

‘서운해하려나.’

이 편지를 받은 쌍둥이 오빠들은 ‘오빠들이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지낼 수 있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보지 않아도 시무룩해하는 광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뭘 보고 그렇게 웃고 있어?”

편지를 접어 밀랍 인장을 찍으려고 하는데 레이너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유리나는 서둘러 인장을 찍고 레이너드에게 다가갔다.

“웬 바구니야?”

그의 왼손엔 피크닉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오늘은 마을에 나가 보자.”

“마을?”

“응. 번화가 쪽에도 볼 게 많아. 겸사겸사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살펴보고.”

“그래. 그럼 잠깐만 기다릴래? 챙기고 나올게.”

“알았어.”

유리나는 그가 나가고 난 뒤 베시의 도움을 받아 서둘러 몸단장을 했다. 위화감 없이 사람들 틈에 스며들 수 있도록 옷은 평소에 입는 나들이 드레스 대신에 베시가 주로 입는 가벼운 원피스를 입었다.

피부가 타면 안 된다고 베시가 씌어 준 챙이 넓은 모자를 마지막으로 앞뜰로 나가자 레이너드가 잔뜩 들뜬 얼굴로 유리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른 가자.”

다른 쪽 팔에는 베시가 준비해 준 점심 도시락 바구니가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다.

유리나는 그의 손을 바로 잡지 않고 잠시 그의 환한 얼굴을 멀뚱히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좀 더 짓궂게 웃었다.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한쪽 입술만 삐쭉 들어 올린 모습은 거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왜 그렇게 멍하니 봐? 내가 그렇게 좋아?”

어릴 때부터 자기 잘난 줄 아는 오만한 꼬맹이이긴 했는데, 결혼을 하고 난 뒤로 그는 좀 더 자신감이 생긴 듯했다.

어쩌면 이제 유리나가 저 옆에서 영원히 떨어질 일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며 예전 성격이 다시 나오는 것도 같았다.

“허튼소리 하지 말고 가자.”

유리나는 그의 손을 잡는 대신 코웃음을 치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레이너드가 허둥지둥 따라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서둘러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손깍지를 꽉 끼는 행동에서 조급함과 당황함이 묻어 나왔다.

집사가 마차를 대기시킬까 물어봤지만 마차도 필요 없었다. 레이너드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저 멀리서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골목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주위를 살핀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손을 잡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젠 우리도 익숙해져야 할 곳이니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엔 비장함이 맴돌았다. 책임감을 느끼는 듯했다. 유리나는 넌 혼자가 아니라는 뜻으로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수도나 카르티아 영지의 번화가에 비하면 규모가 작았지만 펠리어스 영지의 번화가는 꽤나 잘 정돈되어 있었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설명을 들으며 풍경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얼른 익숙해져야지.’

저 멀리 깔끔해 보이는 카페에서 한가로이 애프터눈 티를 즐기는 또래의 여자아이들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유리나는 갑자기 팔을 당기는 느낌에 휘청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

“레이?”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앞서 걷던 레이너드가 한 발짝 뒤쪽에 멈춰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화를 내는 것인지, 슬퍼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오묘했다.

유리나가 아무리 손을 흔들며 불러도 듣지 못한 것처럼 그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대체 뭘 보고 있길래…….’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던 유리나는 그가 보고 있던 광경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 한복판에서 허름한 차림새의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사람들에게 꽃을 팔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여덟 살 정도 되어 보였고, 남자아이는 서너 살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아이라기보다는 아직 아기라는 단어가 어울릴 법한 앳된 얼굴.

제대로 씻지 못했는지 두 아이의 머리는 모두 기름져서 지저분했고 얼굴이나 팔다리에도 거뭇거뭇한 먼지가 잔뜩 묻어 제 피부색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유리나가 레이너드를 처음 봤을 때보다 더 꼬질꼬질한 모습이었다. 무엇보다도 허름한 옷 사이로 드러난 몸이 과거 ‘톰’보다 더 앙상했다. 지금 당장 영양실조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레이너드는 저 아이들의 모습에서 과거의 제 모습을 본 것일까. 유리나는 말없이 레이너드의 얼굴을 살폈다. 어금니를 꽉 깨문 것처럼 그의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레이, 가서…….”

아이들에게서 꽃이라도 사 줄까 하고 물어보려던 순간이었다. 레이너드의 눈이 커지더니 그가 유리나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리나는 여자아이가 웬 남자에게 떠밀려서 바닥에 넘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에이, 재수 없게시리. 왜 자꾸 달라붙는 거야?”

아이를 밀친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오물을 보기라도 한 듯 바닥에 엎어져 끙끙거리는 아이를 보며 얼굴을 구겼다. 그는 옷자락을 탈탈 털어 내더니 소녀를 일으켜 주지도 않고 그대로 가 버렸다.

소녀와 손을 잡고 있던 남자아이는 덩달아 넘어져서 빽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제대로 울 기운도 없는지 울음소리는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것처럼 작았다.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남자아이를 안아서 달래 주는 사이 서둘러 달려가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었다. 제대로 씻지 못해 더러운 얼굴이었는데도 아이답게 때 묻지 않은 맑은 초록색 눈동자가 인상 깊은 아이였다.

“괜찮니?”

“아, 저 괜찮…….”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가 유리나의 차림새를 보더니 놀라서 끅, 소리를 냈다. 지금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밖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눈에 띄지 않을 가벼운 옷을 입었는데도 귀족인 것이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소녀는 유리나의 하얀 손에 묻은 먼지를 보며 울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서둘러 옷소매로 그녀의 손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유리나가 말릴 틈도 없었다.

그러나 때가 잔뜩 묻은 옷으로 닦아 봤자 제대로 닦일 리가 없었다. 아이는 더 더러워지기만 하는 유리나의 손을 보며 파들파들 떨었다. 그러다 제 동생이 레이너드의 품에 안겨 있다는 걸 뒤늦게 발견하고는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톰!”

어색하게 아이를 다독여 주던 레이너드가 움찔했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힘없이 쌕쌕거리던 갈색 머리 아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소녀를 보았다.

“눈나아.”

“어서 내려와. 이리 와.”

레이너드가 아이를 내려 주자마자 그녀는 동생을 등 뒤로 숨기며 두 사람을 살폈다.

그동안 길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보아 온 그녀는 눈치가 제법 빠른 편이었다.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그다지 비싸 보이지 않은 평범한 옷이었지만 두 사람의 외모가 평범하지 않았다. 특히 금발 여자 쪽이 더 눈에 띄었다.

햇빛을 많이 보지 않고 잘 관리한 것처럼 뽀얗고 결이 좋은 피부, 갈라진 것 없이 윤기 나는 머리카락, 분명 웃고 있는데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위압감.

대부호의 딸이나 몰래 놀러 나온 귀족이 아닐까. 그런 사람의 손을 덥석 잡고 더럽히기까지 했다고 생각하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소녀는 바닥에 풀썩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응?”

“한 번만 용서를……. 아니, 저는 벌을 받아도 좋으니까 제 동생은……. 동생은 아무 잘못도 없어요.”

어깨를 바들바들 떨면서도 꿋꿋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꼭 여러 번 해 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유리나는 어쩐지 마음이 뭉클거려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렇게 어린 아인데.’

그것도 제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대체 지금껏 무슨 험한 꼴을 당했으면 이렇게 도움을 받은 것으로도 덜덜 떠는 걸까.

“눈나아…….”

뒤에서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상황을 지켜보던 아이가 울먹이더니 기어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지친 탓인지 눈물은 거의 흐르지 않는데도 숨은 할딱할딱거렸다.

유리나는 서둘러 소녀를 일으켰다.

“넌 아무 잘못도 없어. 그러니 이렇게 무릎 꿇고 빌지 않아도 돼.”

“네?”

“그나저나 다치지는 않았어? 아까 심하게 넘어졌던데.”

소녀는 다정다감한 유리나의 목소리에 놀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눈 주위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움푹 팬 눈이 그저 안쓰럽기만 했다.

유리나가 채 입을 떼기도 전에 레이너드가 다가와 소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깐 무릎 좀 봐도 될까?”

소녀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랐는지 입술만 달싹이다가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레이너드는 소녀의 치맛자락을 살짝만 들어 올려 무릎을 살폈다.

안쓰러울 정도로 뼈가 툭 튀어나온 무릎에선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가 상처 주위에 손을 올리자마자 하얀빛이 터져 나오며 상처가 금세 아물었다.

치마를 내리려던 레이너드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소녀의 무릎뿐만이 아니라 종아리나 발목에도 자잘한 생채기와 멍이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소녀의 허락을 구하고 겉으로 드러난 곳에 자리 잡은 상처도 마저 치료해 주었다.

“동생도 좀 봐도 돼?”

소녀는 깨끗해진 제 무릎을 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다가 서둘러 등 뒤에 있던 동생을 레이너드에게 보여 주었다. 아이의 팔에도 생채기가 난 까닭이다.

하지만 낯선 사람이 영 무서웠는지 아이는 도로 누나의 뒤에 숨어 버렸다.

“괜찮아. 이리 와.”

유리나는 도시락 바구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달콤한 향이 물씬 나는 화려한 모양의 초콜릿에 홀렸는지 아이가 쭈뼛거리면서도 레이너드 앞에 섰다.

아이의 팔에 손을 가져다 댄 레이너드가 잠깐 놀란 듯 멈칫했지만 이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물어 가는 상처에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유리나의 손에 들린 초콜릿만 빤히 바라보았다. 누나와 똑같은 초록색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먹고 싶어?”

“녜!”

유리나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초콜릿을 조그만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문 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는 녹은 초콜릿이 잔뜩 묻은 입술을 빠르게 오물거리다가 누나를 돌아보았다.

“눈나아. 이거…….”

“아냐, 너 먹어.”

소녀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아냐. 누나아.”

기특하기도 하지. 유리나는 아이의 떡진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자기 먹기 바쁠 텐데.’

저 나이대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행동한다. 게다가 옷 아래로 배가 홀쭉하게 들어가서 앙상한 갈비뼈가 톡 튀어나온 것이 보일 정도로 굶었는데 누나를 챙길 정신이 있을까.

“이건 너 먹어. 누나 거도 있어.”

유리나의 말에도 쭈뼛거리던 아이는 그녀가 바구니에서 다른 초콜릿을 꺼내자 그제야 초콜릿을 와앙 베어 물었다.

소녀는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다가 초콜릿을 받아 앞니로 초콜릿 끄트머리를 조심스럽게 갉아먹었다. 소녀의 얼굴에도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사이 아이의 상처를 다 치료해 준 레이너드가 바구니에서 샌드위치를 꺼냈다. 고급 햄과 치즈 그리고 싱싱한 야채를 듬뿍 넣어 만든 호화스러운 샌드위치였다.

순식간에 초콜릿을 몽땅 해치운 아이의 시선이 샌드위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꼴깍. 침 넘기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유리나, 괜찮겠지?”

유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 한 끼 정도는 굶어도 상관없었다. 누군가는 한순간의 변덕으로 한 번 적선할 바엔 차라리 하지 말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눈앞에 굶고 있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냥 갈 수는 없었다.

레이너드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아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강아지처럼 신이 나서 그를 졸졸 따라갔다. 유리나도 소녀의 손을 잡고 카페로 향했다.

카페 직원이 아이들의 행색을 보고 난색을 표했지만 유리나가 동전을 몇 개 건네자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잘못하면 체할 수 있으니까 천천히 먹어.”

“녜!”

당당한 대답이 무색하게도 아이는 샌드위치를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해바라기 씨를 잔뜩 욱여넣은 햄스터처럼 두 볼이 빵빵하게 부푼 것이 꽤나 귀여웠다.

차가운 샌드위치만 먹다가는 배탈이 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따뜻한 빵과 양송이 수프를 시켜 주었다. 소녀는 스푼을 쥐는 것이 아직은 서툰 동생에게 직접 수프를 떠먹여 주었다. 뜨겁지 않게 호호 불어 가며 먹이는 모습이 동생을 돌보는 데 꽤나 익숙해 보였다.

아이는 아기 새처럼 누나가 먹여 주는 음식을 잘 받아먹었다.

‘레이가 생각나는걸.’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아이들이 식사를 하는 중에 이것저것을 물으며 몇 가지 정보를 알아냈다.

소녀는 겉보기보다 많은 열한 살, 남자아이는 네 살이었다. 예상대로 둘은 남매였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얼마 전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친척 집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머뭇거리며 말을 아끼는 모양새를 보니 얼떨결에 두 사람을 맡은 친척은 그들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정말 아끼고 돌봤다면 이렇게 아이들만 거리에 내보내지 않았을 테지.’

아직은 좀 더 어리광을 부리며 사랑을 받고 자랄 나인데, 거리에서 사람들의 모진 시선을 받아야 한다니. 무언가 더 해 주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 두 사람을 위해 뭔가 해 줄 수 없었다.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지금처럼 따뜻한 식사 한 끼 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것도 이번 한 번이 고작. 운이 좋다면 수도로 돌아갈 때까지 몇 번 더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걸로 될까.’

착잡했다.

아이들이 먹는 것을 바라보던 레이너드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로 향했다.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소녀가 넘어지면서 떨어뜨렸던 장미 다발이 들려 있었다.

사람들의 발에 무자비하게 짓밟혔을 장미는 그의 마법 덕분인지 갓 딴 것처럼 싱싱했다. 소녀가 이번에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이너드는 장미에 코를 묻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이거 내가 다 사도 될까?”

“네? 그걸 전부 다요? 하지만…….”

소녀가 머뭇거리며 테이블에 남은 음식 잔해와 통통해진 배를 두 손으로 신기하다는 듯 두드리고 있는 동생을 번갈아 보았다. 음식까지 먹었는데 장미까지 다 산다고 하니 미안한 거겠지.

레이너드가 환하게 웃으며 장미 꽃다발을 유리나에게 건넸다.

“사랑하는 사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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