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행복과 축복
“뜨뜽님!”
열린 창문 너머로 톰의 해맑은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유리나에게 차를 따라 주던 베시가 주전자를 내려놓으며 웃었다.
“오늘은 정원에서 수업을 하는 모양이네요.”
“응. 꽃이 피어서 오늘은 꽃을 갖고 수업을 하는 모양이야.”
유리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가 창가로 다가갔다. 그녀의 방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정원에는 레이너드가 유리나를 위해 잔뜩 심어 놓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 사이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레이너드와 톰이 수업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 오늘은 이 꽃의 색깔을 바꿔 볼 거야.”
레이너드가 톰의 눈앞에서 흰색 꽃을 흔들었다. 꽃이 흔들릴 때마다 흰 꽃잎에 붉은 물이 스며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붉은 꽃으로 변했다. 입을 헤 벌리고 그 광경을 구경하던 톰이 손뼉을 짝짝 쳤다.
“우와아!”
수업이라기보다는 레이너드가 일방적으로 마법을 시연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여섯 살이 된 톰에게는 딱 어울리는 수업이었다.
아직 글도 제대로 떼지 못한 아이가 마법 기초 이론을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렇게 마법을 보여 주며 마법에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유리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톰의 머리를 쓰다듬는 레이너드의 모습을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톰이 이곳에 온 지 벌써 2년이나 되었다. 그건 즉, 유리나와 레이너드가 결혼한 지도 2년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그동안 레이너드는 아직 정식 교수는 되지 않았지만 제국에서 마법으로 가장 유명한 아카데미에서 몇몇 마법 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영지에는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돌볼 시설을 마련했다.
아직 2년밖에 되지 않아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톰은 그동안 잘 먹고 잘 놀아서 몸에도 얼굴에도 살이 올랐다. 톰의 누나인 애니도 마찬가지였다. 베시가 애니에게 하녀 일을 조금씩 가르쳤는데, 생각보다 머리가 영특해서 유리나는 애니도 본인이 원한다면 아카데미에 보낼까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더 이상 고민이 없을 줄 알았던 유리나는 요즘 큰 고민이 생겼다. 그녀는 톰의 토실토실한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장난을 치는 레이너드를 보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저렇게 아이를 좋아하는데…….’
결혼을 하고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사이가 무척이나 좋았다. 시간이 갈수록 불타는 사랑보다는 편안한 애정이 되었지만, 둘의 사랑은 식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특히 레이너드가 그랬다.
그는 그녀에게 처음 사랑을 속삭였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애정을 퍼부었다. 지금도 밤이 되면 유리나는 그에게 꽤나 시달려야 했다.
베시는 외박 한번 하지 않고 일찍 돌아와 유리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레이너드를 보며 아직도 신혼이라며 웃고는 했다.
다만,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결혼 전에도 후에도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언젠가 크론 왕국에서 유리나가 길 잃은 아이를 돌봐 주었을 때 레이너드가 아이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던 것이 두 사람이 아이에 대해 나눈 이야기의 전부였다.
그나마도 자신들의 2세 이야기는 전혀 한 적이 없었다. 할 이유가 없어서 안 했다기보다는 의도적으로 그 주제를 피한 편이었다.
친어머니가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신 것에 아직도 죄책감을 갖고 있는 레이너드는 말은 하지 않아도 행여나 유리나가 아이를 낳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눈치였다.
유리나는 그런 그의 마음을 잘 알아서 일부러 아이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아이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그렇다고 아이를 꼭 가져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누군가는 후계자가 없으면 어떡하냐는 걱정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그런지 유리나는 딱히 대를 이어야 하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 그건 평민으로 나고 자란 레이너드도 마찬가지였다.
꼭 아이가 있어야만 한 가정이 완성되는 게 아니다. 아이가 있어도 좋겠지만, 굳이 아이가 없이도 타오르는 불처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서로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았다.
‘차라리 아예 관심이 없었다면 나았을 텐데.’
외동으로 자라 또래 친구들에게도 선뜻 마음을 주지 못하는 레이너드는 의외로 아이를 좋아했다. 유리나에게 아이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지만 정작 아이에게 관심이 많은 건 그였다.
그는 아직 명료하게 말하지 못해 더듬거리고 버벅대는 톰의 말도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 주었고, 톰이 하고 싶다는 것이 있으면 다 들어주었다.
그러다가 버릇이 나빠진다는 애니의 말에도 레이너드는 이 정도는 괜찮지 않냐고 그저 웃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유리나가 레이너드를 데려와 후원자로서 잘 대해 준 것처럼 그 또한 후원자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후원자를 넘어 톰과 애니를 제 동생들처럼 여겼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톰뿐만 아니라 사교계나 번화가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에게 저도 모르게 시선을 주고는 했다. 유리나는 어딘가 아련해 보이는 그의 눈빛에서 그가 아이를 원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서로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아이가 없어도 된다. 그렇지만 아이를 원한다면?
유리나는 어느새 팔다리를 힘차게 흔들며 정원을 뛰노는 톰의 얼굴 위로 레이너드를 닮은 아들의 얼굴을 덧씌워 보았다.
레이너드를 닮은 금발과 자신을 닮은 푸른색 눈. 웃을 때마다 레이너드의 것처럼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 해맑게 울려 퍼지는 아이의 낭랑한 웃음소리, 그리고 그 아이를 품에 안고 행복한 듯이 웃는 레이너드.
상상만 해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광경이었다.
레이너드는 늘 가족을 갖고 싶어 했다. 유리나와 가능하면 빨리 결혼을 하려고 했던 것도 모두 그녀와 가족이 되고 싶어서라고 말했던 남자다.
유리나는 그녀가 제 세계의 전부라고 말하는 그에게 더 넓은 세계를 보여 주고 싶었다.
* * *
“유리나.”
레이너드가 널찍한 침대 한가운데 앉아 유리나를 향해 손짓했다. 목욕을 하고 바로 왔는지 그의 머리카락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침대에 올라간 유리나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흰 수건을 내밀었다.
“말려 줘.”
마법으로 말리면 되는데도 그는 종종 이렇게 머리를 말려 달라며 부탁을 했다. 그게 그 나름대로의 애정을 갈구하는 방법인 것 같아 유리나는 그때마다 못 이긴 척 그의 부탁을 들어주곤 했다.
지금도 그녀는 별다른 핀잔을 주지 않고 수건을 받아 들었다. 레이너드는 그녀가 머리를 말려 주기 편하도록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유리나가 조심스럽게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지자 그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좋게 만드는 상쾌한 웃음소리였다.
유리나는 그를 따라 웃으며 저도 모르게 물었다.
“이게 그렇게 좋아?”
“응.”
레이너드가 유리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촉, 물기 어린 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이 그녀의 가슴에 닿았다 떨어졌다.
분명 잠옷 위로 한 입맞춤이었는데도 맨살에 한 것처럼 뜨거운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유리나는 잠시 손을 멈칫했다가 다시 태연하게 그의 머리를 말렸다.
레이너드는 계속해서 몸 이곳저곳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목, 쇄골 부근의 흰 피부에 붉은 점이 꽃처럼 울긋불긋 피어났다. 유리나는 그의 머리를 가볍게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운을 떼지.’
가볍게라도 이런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으니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할지 영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레이너드가 지금껏 마법으로 피임을 하고 있었던 것과 친어머니에 대해 알게 모르게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 때문에 유리나 또한 아이를 낳다가 잘못될까 봐 두려워한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내가 아이를 엄청 원한다면 설득을 하기가 쉬웠을 텐데.’
레이너드는 유리나에게 민감했다. 그녀가 짓는 표정 하나에도 그녀의 생각을 대충 읽어 내고, 말하지 않아도 먼저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었다. 그녀가 아이를 엄청 원한다고 거짓말을 해 봤자 단번에 그 거짓을 꿰뚫어 볼 테다.
그렇다고 ‘네가 아이를 원하는 것 같아서…….’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그는 곧바로 유리나의 속뜻을 짐작하고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딱 잡아뗄 테니까. 그러고 나면 앞으론 절대 그런 주제가 나오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회피를 할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을 해?”
진지하게 생각을 하느라 유리나가 잠깐 손을 멈추자 레이너드가 기민하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들며 재빨리 유리나와 시선을 맞췄다. 무언가를 읽어 낸 듯 얼굴을 꼼꼼하게 살피던 그의 눈썹이 살짝 삐딱하게 치켜 올라갔다.
“요즘 걱정 있어?”
“아니. 걱정 있을 게 뭐가 있어.”
“요즘 생각이 많아 보여서. 지금도…….”
그가 손가락을 들어 유리나의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넌 고민을 할 때 이렇게 입술을 깨무는걸.”
그랬나. 유리나는 어서 말해 보라고 재촉하는 듯 제 입술을 매만지는 그의 손가락을 괜히 아프지 않게 꽉 깨물었다 놓았다. 조금은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수건을 내려놓고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레이너드 또한 심각한 낯이 되었다.
“무슨 일이야?”
“별 건 아니고, 요즘 톰하고는 잘 지내고 있어?”
“톰?”
예상치 못한 주제에 그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혹시 톰이나 애니가 무슨 말을 한 거야?”
그렇게 묻는 그의 얼굴은 오묘했다. 유리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경계하는 편인데 상대가 아끼는 아이들이라니까 난감한 모양이다.
유리나는 그의 태도에 섭섭하기보다는 안도했다.
‘많이 좋아하나 보네.’
그렇다면 이야기가 조금 더 쉽지 않을까.
“레이, 우리…….”
“좀 배고프지 않아? 밀크티 좀 갖다 달라고 할까?”
레이너드가 눈치 빠르게 말을 돌렸다. 유리나는 도망치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의 두 손을 잡았다. 그는 차마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한쪽 다리만 바닥에 내놓은 어정쩡한 자세로 시선을 피했다.
유리나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언제까지 피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란 거 알잖아.”
“난 아이는 없어도 돼.”
꽉 다문 잇새 사이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는 싫어.’가 아니라 ‘없어도 돼.’라는 말에서 그의 진심이 묻어 나왔다.
“너만 있으면 돼.”
“정말?”
“응. 너 하나면 돼.”
유리나는 그의 그 단호한 말에 덜컥 겁이 났다. 누군가의 전부가 되는 건 가슴 벅찬 일이기는 하다. 이토록 모든 진심을 다해 열렬히 사랑해 준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그에게 유리나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의 앞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최대한 오래오래 함께했으면 좋겠지만 내일이라도 당장 큰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았다. 분명 끔찍할 테다. 매일매일 눈물로 하루를 지내며 식사도 하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것이다. 분명 살아도 사는 게 아니겠지.
그렇지만 버틸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베시나 데이브를 비롯하여 자신을 위하는 사람들을 보고 힘을 낼 거다.
과거, 교통사고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을 때도 그렇게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런데 레이너드는? 만약 그녀가 없다면 혼자 남은 레이너드는 어떻게 되는 걸까.
물론 이건 기우이기는 했다. 데프론가의 몰락으로 더 이상 그녀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은 없고, 있다고 해도 레이너드가 옆을 든든히 지켜 줄 테다.
사고가 나도 안전할 테고, 제국에서 손꼽히는 의원에게 진찰을 받고 있으니 큰 병에 걸릴 가능성도 적었다.
그러나 유리나는 레이너드에게 좀 더 큰 행복을 주고 싶었다. 아이가 행복의 척도는 아니다. 그의 말처럼 아이 없이 둘이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저렇게 아이를 좋아하는데 단순히 유리나가 걱정되어서 그런 거라면…….
“난 원해.”
“…….”
“네 말처럼 나도 너만 있어도 좋아. 그렇지만 널 닮은 아이들이 정원을 뛰어다니는 모습도 예쁠 것 같아.”
유리나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은근히 물었다.
“넌 날 닮은 딸, 안 보고 싶어?”
그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그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다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부정하지 않는다는 건 긍정이란 소리다.
“네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알아. 그렇지만 레이. 네가 살던 마을과 이곳 수도는 상황이 달라. 로드릭은 유능한 의원이라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어. 실제로 수도 귀족들은 대부분 건강히 아이를 낳고.”
“…….”
“나도 겨울이면 잔병치레를 하는 편이지만 몸은 건강한 편이고. 게다가…….”
유리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네가 있잖아.”
여전히 얼굴을 쥐고 있는 그의 두 손을 떼어 내 시선을 마주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가만히 안 있을 거잖아. 난 널 믿어.”
그는 말없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유리나는 미소 띤 얼굴로 그의 대답을 잠자코 기다렸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레이너드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며 유리나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그날 밤, 레이너드는 평소와 달리 조심스러웠지만 유리나는 확실히 그가 굳은 결심을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 *
레이너드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유리나를 찾았다. 그녀는 소파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인지 소파 옆에는 소설책 하나가 펼쳐진 채로 떨어져 있었다.
레이너드는 유리나를 보며 반사적으로 웃다가 이내 얼굴을 굳혔다.
‘침대에서 자지.’
한 해의 막바지에 다다르자 아카데미는 바빠졌다. 그는 아직 교수로서 경력이 적어서 논문 심사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학생들의 시험지를 채점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오늘도 일찍 온다고 노력했는데도 뜻대로 되지 않아 저녁 식사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유리나와 같이 저녁을 먹은 게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레이너드는 유리나에게 늘 자신이 늦게 오면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저녁을 먹고 자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그러나 유리나는 그 말을 잘 듣지는 않았다. 저녁은 혼자 먹기는 해도 그가 오는 것을 봐야 한다면서 잠은 꼭 안 자고 버텼다. 그러니 저녁 시간은 놓치더라도 취침 시간 전에는 올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유리나는 잠이 꽤 많아져서 그가 올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조는 일이 잦아졌다. 그냥 침대에서 자면 되는데도 유리나는 꼭 소파에서 선잠을 청했다.
말은 소파에서 놀다가 존 것뿐이라고 하는데, 레이너드가 보기엔 잠깐 존 게 아닌 것 같았다.
“유리나.”
“으응.”
레이너드는 그 옆에 쪼그려 앉아 그녀의 안색을 살펴보다가 유리나를 안고 침실로 향했다. 지금도 그녀는 그가 안아 올리는 것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레이너드가 침대에 내려놓아 준 뒤에야 기척을 느꼈는지 힘겹게 눈을 떴다.
“……레이?”
“응, 나야.”
“언제 왔어?”
실눈을 겨우 뜨던 유리나가 그와 눈을 마주치며 환하게 웃었다. 늘 웃는 모습이 예쁘긴 했지만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웃을 땐 더욱 예뻤다.
벌떡 일어나려고 하길래 다시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언제 왔어?”
“방금. 피곤한 것 같은데 조금 더 자.”
“아냐, 많이 잤…….”
유리나는 말을 하다 말고 터져 나오는 하품에 입을 가렸다. 그녀는 민망해했지만 레이너드의 눈에는 그런 그녀의 모습마저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다만 걱정은 됐다.
‘요즘 잠이 많이 는 것 같은데.’
유리나는 원래 잠이 많은 편이었다. 밤에 조금 늦게 자는 편이긴 했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많이 늦었다.
그나마도 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그의 품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다가 잠들고, 다시 뭐라고 중얼거리다 잠들고를 몇 번 반복하다가 겨우 일어났다.
원래도 잠이 많기는 했지만, 유리나는 겨울이 되기가 무섭게 잠을 많이 자기 시작했다. 그가 아무리 깨워도 아침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건 기본이고, 매일 낮잠을 자거나 저녁을 먹고 오자마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일도 많아졌다.
단순히 잠이 많아진 것이라면 별 상관이 없는데, 혹시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 참이다.
유리나는 근심 가득한 그의 볼을 장난스럽게 한 번 꼬집었다 놓았다. 그래도 그의 얼굴에선 걱정이 떠나가지 않았다.
“날이 추워져서 그런가 봐. 걱정 안 해도 돼. 원래 겨울에는 잠을 많이 잤어. 나 개구리인가 봐.”
“웬 개구리?”
“겨울잠을 자는 게 개구리 같지 않아?”
가벼운 농담이었는데도 레이너드는 그걸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입을 다물고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개구리 말고 다람쥐.”
“응?”
“겨울잠 자는 다람쥐.”
“뭐가 다른데?”
“다람쥐가 훨씬 더 귀여워.”
유리나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는 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제 눈에는 유리나가 다람쥐보다 더 귀여운 걸 어쩌겠는가.
그는 유리나의 몸 위로 올라가 여전히 웃고 있는 그녀의 입에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아니면 겨울잠 자는 새끼 오리는 어때? 넌 맨날 내 뒤를 오리처럼 졸졸 따라다니잖아.”
유리나가 그를 샐쭉 흘겨보며 입술을 쭉 잡아당겼다.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네가 날 따라다니는 거지.”
“그럼 둘 다 오리 하면 되지.”
레이너드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가 이내 진지하게 유리나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열은 없는데…….”
“그냥 겨울이 되니까 몸이 노곤해져서 그런가 봐.”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의원을 부르자. 카르티아가에 연락을 넣을게.”
펠리어스가에는 아직 주치의가 없었다. 생명과 가장 직결될 수 있는 사항인 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아직 그럴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마법으로 치료할 수 있는 외상은 레이너드가 치료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카르티아가의 주치의의 진찰을 받았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조용히 중얼거리던 유리나는 그의 굳은 표정을 발견하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 *
“로드릭도 알잖아요. 나 원래 겨울이 되면 잠이 많아지는 거.”
“그거야 알고 있죠. 그래서 제가 아가씨의 체력이 너무 약한 것 같다고 늘 걱정했는걸요. 마님께서도 겨울이 되면 제게 몸에 좋은 음식들 좀 추천 달라고 하시고.”
“그렇죠? 걱정할 필요가 없대도 레이가 자꾸만 걱정을 하네요.”
멀찍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레이너드가 침대로 성큼 다가갔다.
“단순히 잠만 많아진 게 아니니까 그렇지. 어제 베시에게 들었는데 요즘 통 먹지도 않는다면서.”
“그거야 이맘때쯤이면 원래 입맛이 좀 없어졌는걸.”
“그건 그렇긴 하죠. 아가씨뿐만 아니라 원래 겨울이면 다들 입맛이 없어지고는 하니까요.”
로드릭이 유리나에게 동조하듯 중얼거렸다. 유리나는 그에 힘입어 레이너드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뭐랬어, 엄청 걱정한댔지?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로드릭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그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예쁜 부부였다.
“확실히 카르티아가에 있을 때보다 더 피곤해 보이시기는 합니다. 조금 더 자세히 진료를 봐도 되겠습니까?”
“괜찮대도 그러네.”
툴툴거리면서도 유리나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사실 그녀가 지금까지 로드릭을 부르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마도…….’
처음엔 단순히 겨울이 돼서 나른하다고 생각했다. 로드릭에게 말한 것처럼 겨울이 되면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잠이 많아지고 입맛이 떨어졌으니까.
그러나 한 달에 한 번 올 것이 오지 않았을 때, 무언가 조금씩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얼마 전 카르티아 저택에 놀러 갔을 때 카르티아 후작 부인이 했던 말이었다.
―곧 좋은 소식이 있겠구나.
카르티아 후작 부인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그렇게 얘기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복잡한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로드릭을 불러 확인하려고 했다. 이렇게 레이너드가 예민하게 변화를 알아채고 걱정할 줄은 몰랐다.
유리나의 몸 상태를 살펴보던 로드릭이 은은하게 웃었다.
“축하합니다, 아가씨.”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이너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는 유리나가 알 만하다는 듯 웃으며 아랫배를 만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다급히 물었다.
“축하라뇨.”
“저보다는 아가씨…… 아니, 부인께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중하게 답한 로드릭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유리나를 바라보았다.
“이젠 정말 아가씨가 아니라 부인이라 불러야겠군요. 아가씨는 마냥 어리기만 하실 줄 알았는데.”
어릴 때부터 유리나와 레이너드를 봐 온 그의 눈엔 다 자란 이 아이들이 아직도 어린아이들처럼 보였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예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런 아이들이 이제 정말로 다 자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책없이 왜 이렇게 눈물이 날 것 같은지.
그는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마님과 주인님께서도 기뻐하시겠네요. 얼른 돌아가서 소식을 전해 드리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응. 그래 주면 고맙죠.”
“주의해야 할 점은 하녀에게 일러두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
로드릭이 나가자마자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아직까지도 얼떨떨해하는 얼굴로 말없이 눈만 껌뻑였다.
그러다 불현듯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그의 목소리와 어깨가 잘게 떨렸다.
“응.”
유리나의 대답에도 그는 바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몸을 떨며 감정을 추스르던 그는 한참 뒤에야 유리나를 안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었다간 그녀가 깨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유리나의 옆에 누운 그의 얼굴은 기쁘다기보다는 걱정이 많아 보였다.
“유리나, 난 두려워.”
레이너드가 손등으로 눈을 가리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누웠다.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유리나는 잔뜩 움츠러든 어깨에서 그의 심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내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우리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상처만 주면 어떡하지?”
“그렇지 않아.”
“우리 아이가 나 같은 아빠는 싫다고 하면 어떡해? 유리나, 난 그게 너무 무섭고 끔찍해.”
유리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의 마음의 짐을 덜어 주고 싶었지만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를 위로할 말을 바로 찾지 못했다. 이 어려운 질문에 그의 다친 마음을 녹여 줄 모범 답안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레이, 네 아버지는 분명 널 사랑하셨을 거야. 그러니 너도 우리 아이를 사랑할 수 있어.’?
허울만 좋았지 그에겐 참 잔인한 말이다. 실제 그의 아버지의 마음이 어땠든, 그는 외면당했고 어릴 적 입은 마음의 상처는 아직도 그의 몸속 어딘가에 큰 흉터로 남아 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느낀 적이 없었다.
‘우리 아이니까 보자마자 사랑하게 될 거야.’?
무책임한 말이다. 자식을 본능적으로 무조건 사랑할 수 있다면 왜 그를 비롯하여 많은 어린 영혼들이 상처를 받았을까. 모성애와 부성애라는 건 아이만 태어나면 정말로 저절로 생기는 걸까? 유리나는 그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
열심히 생각하던 그녀는 답을 꾸며 내기보단 솔직한 제 심정을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레이, 네가 두려워하는 건 당연해.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일이잖아. 사실 나도 많이 무서워.”
등 뒤에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자 레이너드가 몸을 움찔거리나 싶더니 이내 돌아누워 그녀를 품에 안았다. 유리나는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자신을 꽉 끌어안는 그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나는 가족들에게 사랑받고 자랐어. 그렇지만 그건 딸로서 부모님께 받은 사랑이야. 나는 여전히 부모로서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몰라. 너랑 나랑 똑같아.”
“…….”
“나야말로 묻고 싶어. 레이,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당연히 넌 그럴 거야.”
“그건 모르는 일이지. 그리고 좋은 엄마라는 평가도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아이가 내리는 거고.”
유리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웃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네 걱정대로 우리 아이가 우리 같은 부모는 싫다고 할 수도 있어. 좋은 부모가 되지 못할 수도 있고. 그런데 사실 난 좋은 부모가 어떤 건지도 잘 모르겠어. 부족함 없이 키우는 거? 잘 놀아 주는 거?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게 하는 거? 아니면 나쁜 길로 가지 않도록 훈육을 강하게 하는 거? 그건 아마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할걸.”
“…….”
“그렇지만 그걸 미리 두려워하고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가 부모로서 한 발자국 내디딘 것 아닐까?”
“…….”
“그러니까 같이 노력하자. 응?”
레이너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잔뜩 긴장했던 몸이 조금씩 힘이 빠지는 것을 보며 유리나는 그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를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한참 뒤에야 레이너드가 한숨을 토해 내듯 중얼거렸다.
“응. 같이 노력하자.”
“응. 그러자.”
“너랑 함께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레이너드는 잠옷 사이로 드러난 유리나의 어깨에 입술을 꾹꾹 눌렀다. 지금껏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는지 그제야 그는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아예 유리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도리질을 치며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고마워, 유리나.”
“고맙다니. 고마워할 일은 아닌데.”
“아냐, 정말…….”
그가 말을 잠시 삼켰다가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더 잘할게.”
유리나는 그의 등을 토닥이다가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잘할 건데?”
“너에게 더 잘하고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될 거야.”
“좋은 부모라는 말이 나와서 그런데…….”
유리나는 그의 품에서 꼬물거리며 빠져나오며 아랫배를 매만졌다.
“아기가 배고프대.”
“응?”
“아기가 배고프다고.”
실제로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레이너드의 주의를 돌리기 위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해하지 못한 듯 아직은 납작한 유리나의 배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그러다 뒤늦게 그 의미를 깨닫고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가 드물게 당황하며 허둥지둥 댔다.
“많이? 어, 그러니까……. 뭐, 먹고 싶어?”
“음…….”
유리나는 진지하게 제 대답을 기다리는 그를 보며 뒤늦게 고민에 빠졌다. 그냥 장난이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어졌다.
유리나는 레이너드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며 말을 아꼈다. 며칠간 그에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먹고 싶은 것이 있기는 있었다.
‘그때 먹었던 딸기가 참 맛있었는데.’
그녀는 원래 과일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한 입 베어 물면 상큼한 향과 달달한 맛이 한 번에 느껴지는 딸기를 가장 좋아했는데, 유독 크론 왕국에 놀러 갔을 때 레이너드와 함께 먹었던 딸기의 맛이 그리웠다. 제국으로 돌아와서 지금껏 한 번도 그리워해 본 적이 없는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나 비닐하우스 같은 농사법이 없는 이곳에서는 제철이 아니라면 과일을 맛보는 것이 힘들다. 탐스러운 과일은커녕, 파릇파릇한 이파리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이 추운 겨울날에 딸기를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법이 발달한 크론 왕국이었다면 비싸기는 해도 보존 마법을 걸어 둔 과일을 살 수 있을 테지만, 제국에서 그런 건 황실에나 진상되는 아주 고급품이었다. 재력이 있어도 구할 수가 없다는 소리다.
말해 봤자 어차피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괜히 레이너드의 마음만 무겁게 만들 것 같아서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
“근데 지금은 못 먹는 거야.”
“왜? 내가 다 구해다 줄 수 있어.”
“아냐, 너라도 못 구해.”
“그럴 리가 없잖아. 얼른 말해 봐.”
그가 유리나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볍게 콩 갖다 댔다. 유리나는 조금 더 뜸을 들이다가 말이라도 해 보자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딸기가 먹고 싶기는 해.”
“딸기?”
“응. 그렇지만 곧 봄이니까 괜찮겠지.”
유리나는 심각하게 변한 그의 얼굴을 보며 서둘러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유리나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듣지 않던 그가 다짐하는 것처럼 조용히 중얼거렸다.
“딸기라…….”
* * *
다음 날 저녁. 유리나는 일찍 목욕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도 방 안에서 지내서 특별히 피곤할 일이 없었는데 저녁을 먹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레이는 언제 오려나.’
아카데미 일 때문에 한동안 늦게 돌아오던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임신 소식을 들은 뒤로는 저택에 빨리 돌아왔다. 그 전까지는 같이 저녁 식사를 하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요즘은 매일같이 저녁을 먹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는 저택을 나서기 전 늦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넌지시 건넸다. 무슨 일이 있냐는 유리나의 물음에도 그는 그럴 일이 있다며 얼버무렸을 뿐이다.
‘설마 딸기를 구하겠다고 크론 왕국까지 가는 건 아니겠지?’
유리나는 하품을 하며 그가 전에 자신이 크론 왕국으로 보냈던 손수건을 찾겠다고 떠난 일을 떠올렸다.
그의 성격이라면 그녀를 위해 딸기를 구하러 크론 왕국까지 갔다 올 법하지만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아카데미를 며칠이나 떠날 수도 없고, 유리나가 행여나 다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저택을 비울 일도 없었다.
‘차라리 황궁에 쳐들어가서 커티스에게 딸기 좀 달라고 하는 게 더 현실적이지.’
사실 그것도 별로 현실성은 없었다. 제가 한 생각이 어이가 없어서 혼자 웃다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레이너드는 언제 들어갈지 모르니 피곤하면 먼저 자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다만 소파 대신 침대에 누워 눈을 깜빡였다. 임신을 한 뒤에 레이너드가 소파에 앉는 것도 불편해서 안 된다며 과할 정도로 걱정을 한 탓이다.
유리나는 최대한 그가 들어오는 모습이라도 보려고 버티려 했다. 그런데 그녀의 마음도 모르는 눈꺼풀이 자꾸 무겁게 내려오는 통에 눈을 도통 뜰 수가 없었다.
* * *
단잠에 빠졌던 유리나가 눈을 뜬 것은 잠결에 들린 레이너드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유리나, 잠깐만 일어나 봐.”
오늘따라 특이한 일의 연속이었다. 평소 집에 돌아왔을 때 유리나가 자고 있다면 레이너드는 그녀를 깨우지 않고 옆에 누워 그녀를 구경하거나 같이 잠을 청하고는 했다.
이런 식으로 곤히 자고 있는 그녀를 깨운 적은 없었다.
“레이, 왔어?”
레이너드는 작게 하품을 하며 눈을 비비는 유리나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그녀가 자리에 앉는 것을 도와주었다. 유리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초점을 맞춘 뒤에야 그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창밖을 보니 이미 깜깜한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다. 저택이 고요한 것을 보니 시간이 제법 지난 듯했다.
“많이 졸려?”
“아니, 괜찮아. 별로 안 졸려.”
말과는 달리 유리나는 대답을 하자마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레이너드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잠깐 나랑 같이 어디 좀 갈래?”
“어디…….”
질문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주위 풍경이 바뀌었다. 촛불도 켜지 않아 어두컴컴했던 침실 대신 달빛이 드리우는 정원이 보였다.
가을까지만 해도 꽃과 단풍 풍경이 아름다웠던 정원은 지금은 가지만 앙상한 나무만 가득해 황량하게 느껴졌다.
‘대체 여기는 왜?’
의아했지만 유리나는 레이너드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정원 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레이너드는 유리나의 어깨에 커다란 담요를 둘러 주고는 정원 구석으로 향했다.
유리나는 그가 마법으로 만든 빛 구체에서 나오는 빛에 의지하며 그의 행동을 살폈다.
‘뭘 하려는 거지?’
지난가을까지만 해도 코스모스를 심어 두었던 화단에는 흙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년 봄에 다른 꽃을 심자고 정원사와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이너드는 볼 것도, 할 것도 없는 화단 앞에 서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주머니였다.
“그게 뭐야?”
고개만 빼꼼 내밀며 묻자 그가 그녀를 돌아보며 웃었다.
“잠깐만 기다려 봐. 보면 알아.”
그러더니 화단 위에서 주머니를 거꾸로 들어 탈탈 털었다. 주머니에서 아주 작은 씨앗들이 아주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레이너드는 주머니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지휘를 하듯 손짓했다. 그의 손짓에 따라 작은 씨앗들이 줄지어 날아가더니 땅에 하나둘 쏙쏙 들어갔다.
그가 다시 손짓하자 씨앗 위에 흙이 저절로 덮이면서 옆에 내려 두었던 물뿌리개가 두둥실 날아 흙 위에 물을 뿌렸다. 잘 짜인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
“뭘 심은 거야?”
“비밀.”
레이너드가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동시에 그의 발밑에서 뻗어 나온 빛이 땅속으로 스며들더니 씨앗을 심은 자리에서 초록색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추운 겨울바람이 쌩쌩 부는데도 새싹은 꼭 봄날의 햇빛을 받은 것처럼 쑥쑥 자라나더니 곧 하얀 꽃을 피워 냈다.
그러나 그의 마법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하얀 꽃이 순식간에 시들고 만 것이다. 유리나가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꽃이 시든 자리에서 초록색 열매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새끼손톱만 한 것이 점점 자라나 엄지만 한 크기가 되었다.
초록색 열매가 붉은색으로 변한 것을 본 뒤에야 유리나는 그가 뭘 하고 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딸기네.’
레이너드가 탐스럽게 익은 딸기를 모조리 땄다. 그가 들뜬 얼굴로 다가오더니 유리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커다란 그의 손바닥 위에 놓인 딸기는 따뜻한 봄에 정상적으로 자란 딸기보다는 크기가 조금 작았지만 새빨갛게 익어 참 탐스럽게 보였다. 새콤달콤한 맛을 상상하자 저절로 입에 침이 고였다.
“설마 딸기 씨앗 구하려고 오늘 늦게 온 거야?”
“응. 마음 같아서는 보존 마법 처리한 딸기를 구하고 싶었는데 아무리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가 없었어. 그렇다고 크론 왕국까지 갔다 올 수는 없잖아. 아쉬운 대로 이렇게라도 해야지. 오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저 주위에 보온 마법을 걸어 두었으니까 당분간은 딸기를 먹을 수 있을 거야.”
그가 딸기를 든 손을 유리나에게 좀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보지만 말고 한번 먹어 봐.”
유리나는 가장 예쁘게 생긴 딸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새콤달콤한 향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자 레이너드가 입을 맞춰 왔다.
“맛있어?”
“응.”
“많이 먹어.”
그가 유리나의 입에 딸기를 하나 더 넣어 주며 웃었다. 그는 유리나의 두 손에 딸기를 가득 쥐여 주며 그녀의 아랫배를 바라보았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 내가 다 구해다 줄 수 있어.”
유리나는 쉴 새 없이 딸기를 우물거리며 그가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는 그녀의 배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멈칫하며 손을 거두고, 다시 뻗었다가 손을 거두는 것을 반복했다.
끝내는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왜 망설이고 그래.”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제 아랫배에 갖다 댔다. 그가 흠칫 놀라며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유리나가 힘을 주며 버텼다.
“괜찮아.”
“그렇지만…….”
레이너드는 손가락을 어정쩡하게 굽히며 망설였다. 정말 만져도 될까 하는 의문이 그의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붉은 눈이 불길하다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의 시선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것을 지금은 안다.
더 이상 붉은 눈은 제국에서 저주의 상징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민이나 귀족들 사이에서는 새로 태어나는 아이가 붉은 눈을 타고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자꾸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만져서 아기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유리나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정말 괜찮아.”
그녀의 목소리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레이너드는 손가락을 쫙 펴서 유리나의 배를 매만졌다.
이제 갓 임신 소식을 안 유리나의 배는 전과 다를 것이 없이 평평했다. 그렇지만 이 안에 그동안 원했던 아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목을 타고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얼른 만났으면 좋겠다.”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얼른 만나고 싶어.”
* * *
레이너드는 방문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였다. 방 안에서 유리나의 고통 어린 신음 소리가 들릴 때마다 몸이 흠칫흠칫 떨렸다.
그는 하얗게 질린 두 손을 꽉 쥐며 처음으로 여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제발, 아무 일도 없게 해 주세요.’
몇 시간 전, 유리나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아카데미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왔을 때만 해도 유리나는 괜찮았다. 머리가 새하얘져서 허둥지둥대는 그를 달래며 웃기도 하고, 가볍게 대화도 나눴다.
그러나 진통의 간격이 줄어들고, 산통이 점점 심해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말이 없어지더니 그의 손을 꽉 움켜쥐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도 그녀는 이를 악물고 신음 소리를 삼켰다.
레이너드는 그녀가 마음껏 소리를 지르지 못하는 게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뜩이나 그녀가 아이를 낳다가 잘못되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하는 그가 더 겁을 먹을까 봐.
산파와 의원이 오고 레이너드가 방 밖으로 쫓겨난 뒤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소리를 죽였다.
차라리 티를 내면 나을 것 같은데.
레이너드는 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