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 끝나지 않는 이야기
“엄마아!”
벌컥, 문이 열리더니 블레어가 방 안으로 쪼르르 뛰어 들어왔다. 배를 문지르며 동화책을 읽고 있던 유리나는 재빨리 읽던 책을 옆에 내려놓고 두 팔을 벌렸다.
낑낑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온 블레어가 엉금엉금 기어 와 그녀의 품에 쏙 안겼다. 밖에서 뛰어놀고 왔는지 그의 밝은 금발은 땀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엄마아! 브레어 와떠여!”
“뭐 하고 왔어?”
“베띠랑! 어, 어, 꽃! 봐떠여!”
베시와 정원에서 술래잡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유리나는 늘 제 곁을 지켜 준 언니 같은 베시를 블레어의 유모로 삼고 싶었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베시는 젖을 먹일 수 없었으니 유모가 될 수는 없었다.
대신, 베시는 유모 못지않게 블레어의 옆을 따라다니며 같이 놀아 주는 시간이 잦았다. 아이는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사람을 귀신같이 안다고, 블레어도 부모 못지않은 애정을 쏟아 주는 베시를 엄청 좋아했다.
요즘 날이 따뜻해져서 부담 없이 밖에서 놀 수 있게 됐더니, 블레어는 툭하면 베시의 치맛자락을 잡고 꽃 보러 나가자고 졸랐다.
블레어가 유리나의 목에 얼굴을 묻고 킁킁거렸다. 꼭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블레어, 뭐 해?”
“엄마아, 쪼은 냄째가 나여.”
“좋은 냄새?”
“웅! 엄마 냄째!”
블레어가 유리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까르르 해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건 꼭 레이 같네.’
누가 레이너드 아들 아니랄까 봐, 블레어는 의외의 곳에서 레이너드와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냄새가 아니라 좋은 향기라고 하는 거야.”
“하기?”
“향기.”
유리나의 차분한 목소리에 블레어가 앵둣빛 입술을 쭉 내밀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했다. 말이 늘긴 했지만 블레어는 아직 제 생각을 말로 다 표현하지는 못했다. 유리나는 묵묵히 블레어가 생각을 정리하는 것을 기다렸다.
“아빠가 냄째!”
“아빠가 냄새라고 그랬어?”
“웅! 냄째!”
유리나는 블레어를 침대에 눕혔다. 그러고는 블레어의 셔츠를 위로 밀어 올려 꿀단지처럼 볼록한 배에 코를 묻고 킁킁거렸다.
“블레어도 냄새나. 아가 냄새.”
간지러운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비틀던 블레어가 검지로 유리나의 부른 배를 콕 찔렀다.
“아가 여기떠!”
그러더니 냉큼 일어나 유리나가 했던 것처럼 그녀의 배에 코를 묻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아가 냄째!”
그는 팔을 활짝 벌려 유리나의 배를 꽉 감싸 안았다.
“브레어, 아가랑 놀고 시퍼여!”
“금방 볼 거야.”
유리나의 대답에 블레어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그는 통통한 뺨을 그녀의 배에 부비부비 문질렀다.
“얼른 만나아. 보고 시퍼.”
* * *
블레어는 힘겹게 까치발을 하며 요람 속에서 잠든 동생을 간신히 들여다보았다. 엄마를 닮은 분홍빛 금발이 새싹처럼 삐쭉삐쭉 난 아기는 새근새근 잘 자고 있었다.
그는 복숭아처럼 분홍빛이 도는 통통한 뺨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아.”
얼마 전, 볼록하게 튀어나온 엄마의 배가 조금 홀쭉해지더니 이 조그만 아기가 태어났다. 엄마 아빠 말로는 자신의 동생이라고 했다. 이름은 리즈벳. ‘사랑’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아빠가 얘기해 주었다.
아직 어린 블레어는 사랑이 뭔지 몰랐다. 그냥 엄마 아빠가 매일매일 사랑한다고 속삭여 줄 때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것만 알았다.
사랑은 기분이 좋은 걸까. 꼬물거리는 리즈벳을 보고 있으니 신이 나고 기분이 좋은 것을 보니 역시 사랑은 기분이 좋은 건가 보다.
블레어는 신이 나서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키득거렸다. 그 바람에 리즈벳이 보드라운 이맛살을 찌푸리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어, 어?”
그는 당황해서 주위를 살피며 어른들을 찾다가 진지한 얼굴로 리즈벳을 토닥여 주었다. 리즈벳이 울 때면 엄마도 아빠도 베시도 이렇게 해 주었다.
오빠의 분주한 노력을 안 것인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칭얼거리던 리즈벳이 잠잠해졌다. 블레어는 다시 새근새근 잠든 동생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한참 동안 까치발을 하고 동생을 바라보다가 속으로 굳은 다짐을 했다.
‘내가 지켜 주꺼야!’
아빠나 삼촌들은 늘 그에게 훌륭한 기사가 돼서 연약한 엄마와 동생을 지켜 주어야 한다고 했다.
아빠처럼 손에서 불꽃을 만들어 내는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마법 재능은 전혀 타고나지 않았다.
대신 카르티아가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았는지 날 때부터 뼈대가 튼튼했고, 크면 클수록 몸이 날렵해지고 힘도 세져서 분명 검술에 재능이 있을 거라고 쌍둥이 삼촌들이 그랬다. 좀 더 자라면 삼촌들이 검술도 가르쳐 준다고 했다.
열심히 배워서 엄마랑 리즈벳이랑 지켜 줄 거다. 블레어는 다시 몸을 살랑살랑 흔들며 실실 웃었다.
얼른 리즈벳이 자라서 같이 뛰어놀 수 있으면 좋겠다.
* * *
끼이익. 글씨 연습에 집중하고 있던 블레어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손을 멈칫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아무 소리도 못 들은 것처럼 다시 글씨 연습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몰래 들어온 침입자는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그를 향해 걸어왔다. 나름대로 열심히 소리를 숨기는 것 같았지만 검술을 배운 뒤로 또래에 비해 오감이 유독 예민해진 블레어는 이미 그 행동을 다 눈치챘다.
어설픈 움직임에서 침입자가 누군지 알아낸 지도 오래다.
‘리즈가 많이 심심한가 봐.’
레이너드와 유리나는 리즈벳에게 오빠가 공부를 할 때엔 절대 방해하지 말라고 엄히 일렀지만, 부모님 말을 잘 듣는 블레어와 달리 리즈벳은 엄마, 아빠 말을 잘 안 듣는 말썽꾸러기였다.
물론 부모님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말썽꾸러기는 아니었다. 그녀도 오빠의 공부가 끝날 때까지 최대한 기다리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나 꾹꾹 참다가 정말로 심심할 때면 몰래 그에게 달려왔다.
오빠를 놀라게 하는 것도 좋아해서 늘 기척을 숨긴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왔다. 오빠가 다 눈치채고도 속아 주는 척하는 줄도 모르고.
오빠를 놀라게 하는 데 성공했다며 의기양양해하는 리즈벳의 얼굴을 떠올리던 블레어는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며 손을 열심히 움직였다.
그러나 자꾸 웃음이 나와 어깨가 들썩이는 바람에 글씨가 자꾸만 지렁이처럼 꼬불꼬불거렸다.
손에 힘을 주고 다시 글씨 연습에 집중하는데 등 뒤에서 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깜짝이야.”
리즈벳은 오빠의 목소리가 책을 읽는 것처럼 딱딱하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개구지게 웃었다.
“오빠, 놀랐지? 놀랐지!”
“응, 응. 오빠 깜짝 놀랐어. 언제 왔어?”
“방금! 오빠는 리즈가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들었지?”
“응, 못 들었어.”
리즈벳이 우쭐해져서 어깨를 으쓱이다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빠, 뭐 해애?”
“오빠 글씨 연습해.”
“후웅.”
그녀는 글씨가 빼곡하게 적힌 글씨 연습장을 보며 입술을 삐쭉이다가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오빠아, 그거 하지 말고 리즈랑 놀자아.”
“놀아? 뭐 하고 놀까?”
“나가서 놀자!”
블레어는 초롱초롱하게 생기가 도는 그녀의 분홍빛 눈을 보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밖에 추워서 안 돼.”
늘 동생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그답지 않게 단호한 거절에 리즈벳이 시무룩하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블레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 눈을 꽉 감았다. 동생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쳐다본다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 돼.’
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리즈벳은 툭하면 열이 오르고 잔병치레를 했다. 겨울이 될 때마다 감기를 달고 사는 유리나의 약한 체력을 물려받은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분홍색 눈을 타고난 이유가 더 컸다.
레이너드의 선명한 붉은 눈동자보다는 확연히 연한, 그러나 누구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분홍색 눈.
리즈벳이 태어났을 때 레이너드와 데이브를 비롯하여 제국 마법사들 사이에서 그녀가 베아투스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베아투스라고 하기엔 색이 선명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엔 분홍색 눈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며칠간의 관찰과 연구 끝에 레이너드와 데이브는 그녀 또한 베아투스라는 결론을 얻었다.
타고난 체내 마나와 마나 친화력이 소위 수재라고 불리는 마법사들보다도 월등했기 때문이다. 후에 소식을 듣고 찾아온 크론 왕립 아카데미의 허트슨 교수도 인정했다.
레이너드는 블레어가 태어났을 때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과 똑같은 베아투스인 리즈벳이 태어났을 땐 그보다 더 복잡한 심경이었다.
이 세상에서 자신과 똑같은 존재가 또 있다는 묘한 동질감과 그녀에게는 자신이 받았던 억압과 차별을 물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그때 그는 유리나가 어릴 적 그 고생을 하며 베아투스에 관한 고대 문헌을 찾아낸 것을 다시 한번 고마워했다.
만약 붉은 눈이 여전히 여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여겨진다면 리즈벳 또한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았을 것이다.
유리나와 레이너드가 보호를 하고 있으니 함부로 대하지는 못하겠지만 리즈벳은 기민하게 그걸 알아채고 상처받고 주눅이 들었을 테다.
그런 걸 물려주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색이 연한 탓이었을까. 날 때부터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체내 마나를 갈무리하던 레이너드와 달리 리즈벳은 마나를 갈무리하는 데 서툴렀다. 그래서인지 툭하면 열이 올랐다.
그나마 레이너드가 주기적으로 마나를 안정화시켜 주어서 큰 탈은 없었던 데다가 이젠 다섯 살이 된 그녀가 조금씩 마나를 스스로 갈무리하기 시작한 후로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한시름 덜었다.
그래도 오늘처럼 추운 날에 나가 놀면 밤에 분명 열이 오를 것이다.
마나 불안정으로 인한 열은 단순히 열병하고는 달라서 약도 별 소용 없고 열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니 애초에 열이 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오빠의 애타는 마음도 모르고 리즈벳이 발을 동동거리며 칭얼거렸다.
“그치만, 그치마아안…….”
“날이 따뜻해지면 놀자. 응?”
“그치만 리즈는 눈사람을 만들고 싶단 말이야!”
그 말에 뒤늦게 창문을 바라본 블레어는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조금 전까지는 글씨 연습에 집중하고 있어서 미처 몰랐는데 창밖에선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포근해 보이는 함박눈은 눈사람을 만들기에 좋아 보였다.
오빠의 흔들리는 표정을 눈치챘는지 리즈벳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녀는 블레어의 팔을 잡고 달랑달랑 흔들었다.
“오빠아, 리즈랑 같이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자아!”
이렇게까지 애원하는데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하면 리즈벳은 단단히 삐쳐서 그를 일주일은 피해 다닐 것이 분명했다.
블레어는 끙, 앓는 소리를 내다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럼 아빠한테 먼저 허락을 받고 나가자.”
“응!”
리즈벳은 촉촉이 젖은 눈을 손등으로 쓱쓱 닫고는 블레어가 필기구를 채 정리하기 전에 방 밖으로 쪼르르 뛰어나갔다.
* * *
“아빠아!”
마법 통신구를 통해 아카데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던 레이너드는 낭랑한 목소리에 얼른 두 팔을 벌렸다. 양 갈래 머리를 휘날리며 뛰어온 리즈벳이 그의 품에 쏙 안겼다.
“리즈, 그렇게 뛰어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부드럽게 타이르는 레이너드의 목소리는 엄한 기색은 하나 없이 애정만 잔뜩 묻어 나왔다. 그걸 기민하게 알아챈 리즈벳은 까르르 아이다운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급하게 왔을까?”
“그냥, 아빠가 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펠리어스 영애께서 오셨나 보군요. 그럼 저녁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통신구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리즈벳의 등을 토닥이며 이야기를 하던 레이너드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급한 이야기도 아니었는걸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백작님.]
레이너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통신구를 껐다.
펠리어스 백작. 2년 전, 선황제가 승하하고 커티스가 제위에 올랐을 때 그는 “자네 같은 인재에게 남작위라니. 아바마마께선 보는 눈이 참 없으셨어.”라며 레이너드에게 백작 작위를 내렸다.
권력에 별 미련이 없는 레이너드로서는 남작위나 백작위나 뭔 상관이 있었나 싶었다. 그러나 조금 더 높은 위치에서 가족들을 더욱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달가워했다.
후작가의 영애였던 유리나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남작가에 시집을 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뒤에서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콧대를 눌러 줄 수도 있었고.
“그래서 리즈, 무슨 일로 왔어?”
레이너드는 리즈벳의 뒤를 쫓아 쭈뼛거리면서 집무실 문 앞에 서 있는 블레어까지 발견하고는 이 귀여운 남매가 무언가를 꾸민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블레어도 서둘러 달려와 그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빠, 리즈가 나가서 눈사람이 만들고 싶대요.”
“눈사람?”
“아빠, 아빠아! 리즈 오늘만 나가면 안 돼? 응? 응?”
그의 목덜미를 꽉 끌어안은 리즈벳이 콧소리를 내며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오늘은 날이 많이 추운데…….”
“목도리도 하고, 장갑도 할게요! 네? 네?”
리즈벳은 원하는 것이 있을 때에만 존댓말로 애교를 부리고는 했다. 레이너드는 동그란 눈을 쉴 새 없이 깜빡거리며 배시시 웃는 리즈벳을 보며 난감한 듯 웃었다.
레이너드는 유리나에게 약했다.
유리나가 먼저 그에게 무엇을 해 달라고 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지만, 살짝 미소 짓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무엇이든지 해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고는 했다.
그러니 사랑하는 유리나를 꼭 닮은 딸에게 약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며 입술을 삐쭉이는 리즈벳의 뺨에 살짝 뽀뽀를 해 주며 작게 중얼거렸다.
“대신 오래는 안 돼. 알겠지?”
“응!”
“그럼 나가자.”
리즈벳이 두 손을 하늘 높이 올리며 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야호!”
아침부터 눈이 내린 정원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가지만 앙상한 나무 위에도, 씨앗이 잠들어 있는 땅 위에도 하얀색이 가득했다.
오빠와 아빠의 성화에 못 이겨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맨 리즈벳은 정원으로 쪼르르 달려 나갔다. 그러고는 정원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혼자 장갑을 낀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열심히 눈을 뭉쳤다.
“받아라!”
리즈벳은 단단하게 뭉친 눈 뭉치를 블레어를 향해 힘껏 던졌다. 그녀에게 살금살금 다가가던 블레어는 피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맞아 주었다. 그가 피할 줄 알았던 리즈벳은 눈 뭉치가 블레어의 어깨를 강타하자 되레 당황해서 빽 소리를 질렀다.
“왜 안 피했어?”
“안 아파. 괜찮아.”
“거짓말.”
“진짠데. 또 할까?”
리즈벳은 블레어의 어깨에 남아 있는 눈가루를 보며 입술을 삐쭉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눈싸움은 재미없어. 그거 말고 눈사람 만들래.”
“응, 응. 그러자. 눈사람 엄청 크게 만들자.”
블레어는 리즈벳의 손을 잡고 눈이 가장 많이 쌓인 곳으로 향했다. 두 아이는 나란히 앉아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눈사람의 몸통이 되어 줄 커다란 눈 뭉치는 블레어가, 머리가 될 작은 눈 뭉치는 리즈벳이 만들기로 했다.
아무리 눈이 많이 쌓였다고 해도 아이들의 작은 손으로는 눈을 뭉치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이들이 낑낑거리는 것을 지켜보던 레이너드는 등 뒤에서 몰래 손을 까딱였다.
잘 뭉치지 않던 눈이 조금 전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뭉쳐지기 시작했다.
블레어와 리즈벳은 완성된 눈 뭉치를 벤치 옆에 놓았다. 부엌에서 가져온 강낭콩으로 눈을 만들고 길쭉한 당근으로 코를 만들었다.
빨갛게 익은 고추로 입을 만들어 주고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몸에 꽂아 주자 그럴싸한 팔이 만들어졌다.
“흐음.”
그러나 리즈벳은 팔짱까지 낀 채로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눈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밝게 웃더니 목에 두르고 있던 빨간 목도리를 풀어 눈사람의 목에 둘러 주었다. 워낙 빠르게 일어난 일이라 블레어가 말릴 새도 없었다.
블레어는 리즈벳을 나무라는 대신 제 장갑을 벗어 눈사람의 팔 끝에 끼워 넣었다.
“다 됐다!”
신이 나서 손뼉을 짝짝 치는 리즈벳의 두 뺨은 어느새 잘 익은 체리처럼 빨갰다. 바람이 차다고 해도 살짝 불그스름한 블레어의 뺨과 비교해 봤을 때 비정상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리즈.”
“아빠!”
레이너드는 성큼성큼 걸어가 정원에서 오빠와 놀고 있는 리즈벳을 품에 안아 올렸다. 딸을 안고 있는 두 손을 쓸 수가 없어서 그는 리즈벳의 뺨에 손 대신 제 뺨을 갖다 댔다.
그제야 확실해졌다. 리즈벳의 뺨과 이마는 확실 뜨거웠다. 옷을 단단히 입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새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
“오늘은 그만 놀고 들어가자.”
한창 흥이 올랐던 리즈벳은 입술을 삐쭉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나 오빠랑 더 놀 거야!”
“오빠랑 놀이방 가서 놀면 되지.”
“아냐! 여기서 놀 거야!”
“리즈, 오빠랑 들어가서 인형 놀이 하자.”
눈치 빠른 블레어가 까치발을 하고 리즈벳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봤자 아직 키가 작아 레이너드 품에 안겨 있던 리즈벳이 고개를 쑥 내려야만 했다.
“오빠는 리즈랑 인형 놀이 하고 싶어. 가서 쿠키도 먹고 인형 놀이 하자. 응?”
“움…….”
리즈벳이 생각을 하느라 입술을 삐쭉이는 틈을 타서 블레어가 그녀의 팔을 잡고 조심스레 흔들었다.
“응? 오빠랑 들어가서 놀자.”
“알게떠.”
오빠가 정 그렇다면야 내가 들어가서 같이 놀아 줄게.
그런 생각이 확연히 드러나는 새초롬한 말투에도 블레어는 그저 좋다며 헤헤거렸다. 레이너드 또한 작게 웃으며 리즈벳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럼 들어가자.”
“웅.”
리즈벳은 아빠의 품에 편하게 안겨 놀이방으로 향했다. 밖에서 열심히 뛰어논 아이들을 위해 베시가 간식거리를 갖고 왔다.
블레어와 리즈벳은 각자 양손에 쿠키와 우유를 쥐고 집중해서 간식을 오물거렸다. 아기 다람쥐 같은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레이너드는 조심스럽게 리즈벳의 이마에 손을 얹고 마나를 흘려보냈다.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환한 빛이 리즈벳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요동치던 그녀의 마나가 금세 진정됐다.
입가에 묻은 쿠키 가루를 털어 내던 리즈벳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빠, 그거 뭐야?”
그녀는 먹던 쿠키도 내려놓고 제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가 차가워졌어!”
“리즈가 더 예뻐지라고 아빠가 마법 걸어 준 거야.”
“리즈 그거 알아! 요정님이 공주님으로 만들어 줬잖아!”
리즈벳은 아빠가 자기 전에 읽어 주는 동화책 내용을 떠올리며 소리쳤다. 재투성이 아가씨를 마음씨 좋은 요정님이 아름다운 공주님으로 만들어 준 내용이었다.
“맞아. 그렇지.”
“하지만 리즈는 원래 예뻐.”
리즈벳은 밝은 금발을 손으로 차르륵 넘기며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너드는 귀여운 딸의 모습에 그저 웃고 말았다. 원래 부모 눈에 자식은 가장 예뻐 보인다지만, 유리나를 쏙 빼닮은 리즈벳은 객관적으로도 예뻤다.
그는 리즈벳의 분홍색 눈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베아투스라는 것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들과 다른 외향 때문에 리즈벳이 주눅 드는 건 아닌지 걱정을 했었는데 다행히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활발하게 자랐다.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티가 이런 사소한 언행에서도 묻어 나왔다.
레이너드는 이렇게 당당한 딸에게서 늘 유리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사악한 드래곤이다!”
간식을 배불리 먹은 블레어가 배가 통통한 검은색 드래곤 인형을 허공에 흔들었다. 레이너드가 아이들 몰래 손가락을 튕기자 드래곤의 입에서 붉은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리즈벳이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꺅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고개를 빼꼼 내밀어 상황을 살핀 그녀는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검 모양 헝겊 솜 인형을 휘둘렀다.
“나쁜 드래곤 죽어라!”
뭉뚝한 검 끝으로 드래곤의 배를 쿡 찌르자 블레어가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큭, 분하다. 내가 지다니.”
깨꼬닥. 블레어가 눈을 감고 소파 위에 엎어졌다. 리즈벳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며 코웃음을 쳤다.
“내가 이겼어!”
그러고는 레이너드를 돌아보았다.
“아빠, 나 잘했지?”
“응.”
실눈을 뜨고 상황을 살피던 블레어가 벌떡 일어나더니 이번에는 구석에 처박혀 있던 제 몸만 한 말 인형을 질질 끌고 왔다. 이번에도 레이너드가 손가락을 튕기자 말의 입에서 히이잉!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리즈, 오빠랑 말 타자.”
“좋아!”
두 아이들이 말 인형 등에 올라타서 “이랴, 이랴!”를 외치고 있을 때 놀이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블레어도, 리즈벳도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진한 금발 머리의 아이가 유리나의 품에 안겨 놀이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엄마의 가슴팍에 졸린 눈을 마구 비비다가 사이좋게 놀고 있는 형과 누나를 발견했다.
“눈나아!”
“이든!”
리즈벳이 아는 체를 하며 손을 흔들자 아이는 얼른 내려 달라며 몸을 비틀었다. 그는 유리나가 내려 주자마자 누나에게 다가갔다. 리즈벳은 무릎으로 기어가 동생을 품에 안았다.
“잘 잤어?”
펠리어스 세 남매 중 막내, 에이든 펠리어스가 누나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셋째 아이의 이름이 에이든이 된 것에는 기나긴 사연이 있었다.
레이너드가 첫째 아들의 이름을 블레어로 지은 것에 내심 충격과 상처를 받았던 에이든은 유리나가 둘째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또다시 편지를 보냈다.
당연히 이번에 아들이 태어나면 이름을 꼭 에이든이라고 지어 달라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둘째는 유리나를 닮은 딸이었고 레이너드는 아무런 고민도 없이 리즈벳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에이든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유리나가 셋째를 임신했을 때에도 똑같은 편지를 보냈다.
유리나는 그의 지치지 않는 끈기에 감탄하며 셋째가 아들이라면 에이든이라고 짓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물었지만 레이너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을 닮은 아들이 태어났을 때 레이너드는 몇 날 며칠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참의 고민 끝에 그는 결국 셋째 아이의 이름을 에이든이라고 짓기로 했다.
다만, 에이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 크론 왕국에 있을 그 너구리 같은 녀석이 생각날 것 같아서 가족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 그를 ‘이든’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성격은 이름을 따라가는 것일까. 첫째 블레어는 아빠의 성격을 닮고 둘째 리즈벳은 엄마의 성격을 닮았는데, 막내 에이든은 이상하게…….
“눈나, 모해애?”
에이든 테시의 성격을 닮았다. 한마디로 누나와 형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직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끝없는 질문 공세를 펼쳤다.
“누나, 블레어 오빠랑 놀았어.”
“왜애?”
“심심해서! 눈이 왔거든!”
“이든은 왜애?”
“이든은 코해서 같이 못 놀았지.”
“왜애?”
“자는데 깨우면 안 되니까.”
“왜애?”
끈기를 갖고 대답을 해 주던 리즈벳이 자그만 주먹으로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아유, 왜 자꾸 물어봐! 이제 같이 놀면 되지!”
그녀는 에이든의 손을 잡고 졸졸 걸어가 그를 말 인형 위에 태웠다.
“이랴, 이랴!”
사이좋은 세 남매를 태운 커다란 말 인형은 레이너드의 마법에 따라 히이잉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세 남매는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놀이방 바닥에 나란히 엎어졌다. 블레어, 리즈벳, 에이든 순이었다.
오빠와 동생 사이에 낀 리즈벳은 기분 좋은 듯 실실 웃다가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며 칭얼거리는 에이든의 머리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온 분홍빛이 에이든의 머리로 스며들었다.
“리즈, 오빠는? 오빠도 여기가 아파.”
“흠…….”
리즈벳은 입술을 삐죽이다가 블레어의 머리를 문질렀다. 조금 전처럼 분홍빛이 반짝였다가 사라진 뒤에 그녀는 새침하게 중얼거렸다.
“오빠는 바보야. 이것도 못 하고.”
“리즈, 오빠한테 그런 말 하면 못써.”
유리나가 엄하게 타일렀지만 정작 바보 소리를 들은 블레어는 그저 좋다며 웃었다.
“응, 응. 오빠는 바보야. 이런 것도 하나 못 하고.”
“에휴, 그러니까 오빠는 리즈가 지켜 줘야 해.”
“응, 응. 오빠는 리즈가 지켜 줘야 해. 알겠지?”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귀엽다며 웃을 소리였다. 고작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블레어는 제국에서 검술로 손꼽히는 릭스에게 크게 될 아이라고 진심 어린 칭찬을 받았으니까.
마법이 최고인 줄 아는 리즈벳만 그 사실을 몰랐다.
그녀의 눈에 마법을 전혀 쓰지 못하는 오빠는 지켜 줘야 하는 연약한 존재였다. 자신이 태어났을 적부터 오빠가 지켜 주겠다고 다짐을 한 것도 모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쉰 리즈벳은 이번엔 에이든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든, 너는 아기니까 누나가 지켜 줄 거야.”
저택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리즈벳 펠리어스는 오늘도 이렇게 바빴다.
레이너드는 리즈벳의 한탄 어린 말을 들으며 웃다가 유리나에게 다가갔다.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른 유리나가 그와 마주 보며 웃었다. 레이너드는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시선을 피해 유리나의 입에 진하게 입을 맞췄다.
“오늘도 예쁘네.”
유리나 또한 아이들의 눈치를 살폈다가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너도 멋져.”
두 사람은 아이처럼 키득거리며 웃다가 엄마 아빠를 부르는 아이들을 향해 걸어갔다. 엄마 아빠가 양옆에 눕자 아이들이 아기 새처럼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엄마, 리즈는 저녁에 푸딩이 먹고 싶어.”
“왜애?”
“푸딩은 맛있으니까.”
“나두!”
“알겠어. 누나가 나눠 줄게.”
“리즈, 오빠는?”
“음…….”
“……싫어?”
“아냐, 오빠도 줄게!”
아이들의 머리 위로 손을 맞잡은 유리나와 레이너드는 아이들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오늘도 요란스러운 펠리어스가의 하루가 이렇게 저물어 갔다.
십여 년 전 어느 여름날,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땐 생각도 하지 못했던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