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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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시스템, 혹은 팝업 창.
텍스트가 적힌 네모난 테두리는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중이었다.
대성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허공에 부유 중인 홀로그램을 쳐다봤다.
“저기…… 한대성 씨? 혹시 어디 불편하신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이거.”
대성걱정스레 묻는 의사에게 대꾸하며 손가락으로 상태창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향하는 지점으로 의사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의사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재활 치료실의 구석 천장이 멀찍이 보일 뿐이었다.
“갑자기 천장은 왜……?”
“…….”
무슨 말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상태창은 눈에만 보이는 모양이군.’
마수 놈들이야 말을 못 하니, 그놈들 눈에도 상태창이 보이는지 항상 긴가민가했었다.
하지만 의사의 반응을 통해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상태창은 본인만 볼 수 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게 왜 지금 나타나는 거지?’
이미 어제도, 그저께도 확인 차 몇 번이고 상태창을 소환하려 했다.
보통은 ‘생각’을 통해서도 소환이 가능했지만 반응이 없자 혹시 몰라 육성으로도 시도해봤다.
그러나 역시 무반응인 걸 보고 대성은 지옥에서의 시스템이 지구에선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지금, 그 깨달음이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강림 퀘스트는 또 뭐고.’
게다가 그 시스템의 내용 또한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강림은 뭐고 퀘스트는 또 뭐라 말인가.
시스템의 양식, 그리고 종류는 언제나 간단했다.
레벨, 갖가지 상태 수치, 스킬 목록, 현재 보유 중인 아이템 목록, 경험치. 이게 전부다.
퀘스트란 녀석은 없었다.
그때였다.
상태창 바로 옆에 타이머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수락 여부까지 10초가 주어집니다. 미 응답 시 퀘스트는 자동으로 거부됩니다.]
[10, 9, 8…….]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상태창 때문에 대성의 판단력이 살짝 흐려졌다.
하지만 타이머의 숫자가 비정하게 줄어드는 와중에도 그의 마음은 이미 ‘수락’ 쪽에 기울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상태창.
더군다나 처음 보는 내용.
하지만 의심은 짧았다.
‘뭔지는 몰라도 상태창이다. 나쁠 건 없겠지.’
그것은 80년 동안 점층적으로 쌓인 ‘신뢰’라고 보면 된다.
아직 담당 주치의에게조차 완전한 불신을 떨쳐내지 못한 그가 상태창에게만큼은 무한한 믿음을 가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상태창은 80년 동안, 단 한 번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으니까.
상태창이 레벨 업을 했다고 알리면 실제로 그는 레벨 업을 통해 강해졌다.
상태창이 위험 신호를 알리면 실제로 그는 위험에 빠진 상태였다.
요컨대, 상태창은 그가 지옥 생활을 보내던 중 유일한 ‘아군’이 되어준 셈이다.
칠흑 같은 어둠을 비추는 등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때로는 기름기 쫙 뺀 진실만을 담담하게.
때로는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그러니 갑자기 이렇게 나타나니 좀 혼란스러운 한편 안심도 됐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시스템이 수락 여부를 굳이 묻는다는 건, 적어도 내게 해는 안 된다는 의미겠지.’
대성은 수락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시스템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예 / 아니오 중 원하는 대답에 시선을 맞추고 눈을 크게 두 번 깜빡이면 된다.
대성은 그렇게 했다.
깜빡, 깜빡.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이내 홀로그램 메시지의 문자가 흐려지더니 재배열되기 시작하고, 다시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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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퀘스트-1 (진행 중)
‘육체 수복.’
난이도 : 최하
내용 : 표시된 목표 지점까지 이동하십시오.
제한 시간 : 1시간
목표 : 표시된 지점까지 이동
보상 : 절대자를 위한 회복의 비약<小×1>
구현화 : 옥체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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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내용, 그다음에는 보상이 눈에 들어왔다.
회복이란 단어가 대성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지금의 그에게 제일 절실한 건 몸이 정상화되는 것이었으니.
그리고 마지막, 구현화.
다른 건 용어만으로도 의미가 유추됐으나 이 부분은 전혀 감이 잡히는 게 없었다.
옥체 플러스 10%. 그리고 구현.
직관적으로 해석해보면 옥체를 10% 정도 구현시킨다는 의미인데…….
‘왜 하필 옥체지?’
주로 제왕이나 군주의 신체를 가리킬 때 옥체라는 표현을 쓴다.
그 표현의 대상이 자기 자신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구현시킨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은 이런 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다.’
구현화의 의미를 추리하던 대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스템은 방향만 제시해줄 뿐, 모든 것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처음엔 몰라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자연스레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눈앞에 나타난 강림 퀘스트란 녀석도 마찬가지일 터.
일단 지금은 회복의 비약을 얻기 위해 퀘스트의 내용을 완수하는 게 급선무다.
‘표시된 목표 지점이라면…….’
대성이 치료실 내부를 여기저기 둘러보던 그때였다.
갑자기 그의 슬리퍼 끝부분에서 푸른색 화살표들이 쪼르르 길어지더니 한 줄기 선이 되었다.
선은 그의 맞은편에 있던 주치의를 지나쳐 평행봉 끝에 멈췄다.
그리고- 띠링, 띠링!
여기가 도착지라고 가리키는 듯이, ▼ 모양의 마크가 선의 맨 끝자락에 형성되었다.
‘저기가 목표 지점인가 보군.’
정확히 평행봉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거리는 평행봉의 중간 지점에 있는 대성을 기준으로 4m가량.
할 수 있을까?
‘할 수 없어도 해야지.’
고작 세 발짝 옮기는 게 한계인 지금의 그에게 있어서 4m는 국토 대장정급의 거리로 다가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갔다.
하지만 단신으로 마신을 쓰러뜨리고 지옥에서 살아남은 자신이, 고작 걷는 것도 힘겹다고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만약 저 회복의 비약이란 녀석이 이 분노를 가라앉히고 불안 증세를 잠재워준다면…….
‘도전할 가치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대성은 평행봉을 잡고 주저앉은 몸을 일으켰다.
“하, 한대성 씨?”
담당 주치의가 당황했다.
“서, 설마 계속하시려는 건…….”
“비켜.”
“오늘은 이쯤 하면 됐습니다. 마음이 급하신 건 이해하지만 내일 마저 하시는 게-”
“비키라고.”
“…….”
백번 설득하고 만류해도 꺾이지 않을 눈빛이었다.
이런 악에 가득 찬 환자를 처음 보는 게 아니다.
주치의는 비키라는 대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평행봉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 된 이상, 환자 본인이 스스로 깨닫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걸.
백 마디 말보다 본인이 개고생하고 후회해보는 게 더 싸게 먹힌다.
주치의는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이 팔짱을 꼈다.
‘다리가 안 움직이면 기어서라도 간다.’
대성은 무슨 철천지원수 바라보듯 목표 지점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가만히 서서 생각하는 동안에도 다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흡……!”
대성이 이를 악물고 목표 지점을 향해 전진했다.
1보…… 2보…….
서서히.
***
“썅.”
5보가 한계였다.
세 발짝 걷고 뻗었던 방금 전에 비하면 2배에 달하는 장족의 발전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근데 이 다섯 발짝 옮기는 데 30분 넘게 걸렸다.
관절염 걸린 나무늘보도 이보다는 빠르지 않을까 싶은 절망적인 속도.
이런 속도로라도 계속할 수만 있다면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다.
하나 문제는 퀘스트에 제한 시간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대자로 뻗은 대성이 상태창 쪽을 슬쩍 보았다.
[제한 시간 : 00:27:46]
남은 시간 27분.
뭐 얼마나 많이 지났겠나 싶었는데 벌써 33분이 흘렀다.
더 절망적인 건 이 다섯 보를 더해봤자 총 거리는 후하게 쳐도 1m라는 것.
목표 지점까지 남은 거리는 3m를 훌쩍 넘는다.
벌써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 걸 보니 그야말로 앞날이 막막했다.
주치의가 속으로 웃었다.
‘거봐라. 의사 말 안 들으니까 저 꼴이 나지.’
주치의는 겉으로만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뻗은 대성에게 다가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병실로 돌아가셔서 저녁 드시지요.”
“다물어봐.”
“예? 저는 딱히 질문드릴 건…….”
“아니. 입 좀 다물라고.”
“…….”
“생각 좀 하게.”
대성은 숨을 헐떡이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호로 잡놈의 새끼. 환자만 아니었어도 콱……!’
의사는 조용히 이를 갈았다.
의사의 분노엔 개의치도 않으며, 대성은 초조히 생각에 빠졌다.
‘근성의 힘으로 극복할 문제가 아니야. 남은 시간 내에 이 목표를 달성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근성의 힘으로 불가능을 극복. 이따위 지론이 얼마나 허황된 망상인지 그는 뼈저리게 알았다.
안 되는 건 안 된다.
그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눈앞에 나타난 보상을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 방법이 안 되면 저 방법으로 대체할 뿐.
‘문제는 그게 무슨 방법이냐는 건데…….’
뾰족한 수가 분명 하나쯤은 있으리라.
대성은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퀘스트의 내용을 한 차례 읽었다.
[표시된 목표 지점까지 이동하십시오.]
이건 어디까지나 짐작이지만, 시스템이 굳이 불가능한 미션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시스템은 언제나 현재 대성의 상태에 준해 변형되어왔다.
그러니 이 ‘퀘스트’란 놈도 마찬가지 아닐까?
대성이 지금 걷는 것도 버거운 몸인 걸 알면서도, 평행봉의 끝자락까지 걸어가라는 미션을 줄까?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한 시간 내에 도착 못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대성이 그런 의문을 품기 무섭게, 상태창이 대답을 내뱉었다.
[퀘스트 실패 시 페널티가 부가됩니다. 페널티의 수준은 퀘스트의 난이도에 비례합니다.]
[강림 퀘스트 특성상 페널티는 부가되지 않는 대신, 보상이 지급되지 않습니다.]
‘그게 그거지. 망할 새끼.’
지금의 대성에게는 보상을 안 준다는 부분 자체가 뼈아픈 페널티다.
80년 동안 그에게 도움이 되어줬던 상태창 시스템이었다.
혹시 이번 한 번쯤은 그에게 엿을 먹이려는 수작 아닐까.
걷기도 힘든 환자한테 4m를 걸으라는 내용 자체가 악랄하기 그지없는 심보-
‘아니, 잠깐만.’
불현듯 그는 위화감을 느꼈다.
뭘까. 뭐냐, 이건.
대성은 문득 자신이 하나 착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착각의 단서가 뭔지 곱씹으며, 대성은 퀘스트 내용을 다시 읽었다.
[표시된 목표 지점까지 이동하십시오.]
“아.”
그리고 단어 하나가 벼락처럼 대성의 뇌리를 강타했다.
‘이동’
목표 지점까지 ‘걸어가라’는 내용이 아니다.
목표 지점까지 ‘이동’하시오.
그렇다는 건…….
‘목표 지점을 찍었다는 결과만 있으면 된다는 거잖아.’
내용 어디에도 목표 지점까지 걸어가라는 문장은 없었다.
비록 퀘스트의 제목이 ‘걸음마’ 떼기인 게 마음에 걸리긴 해도 제목은 어디까지나 제목.
중요한 건 내용이다.
‘이걸 지금 눈치채다니.’
80년의 세월이 무성하리만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어차피 걸어서 가는 건 불가능하니 한 번쯤 시도해볼 가치는 있었다.
이 순간에도 제한 시간 타이머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으니.
“의사 선생.”
“아, 예. 휠체어 가져다 드릴까요?”
“부탁이 있어.”
“예. 휠체어인가요?”
“업어줘.”
“……?”
주치의는 귀를 의심했다.
“저……. 병실로 돌아가시는 거라면 그냥 휠체어를 타고 가시는 게 환자분께도 편하고 저도 안 힘들고 좋지 않을까요?”
“병실로 돌아가는 거 아냐. 그리고 휠체어 가져다주는 시간도 아까워.”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일단 나 좀 업어줘.”
“…….”
주치의는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화도 나지 않았다.
그는 일단은 환자가 시키는 대로, 대성을 업어 들었다.
대부분의 아픈 환자가 그렇듯 몸이 빼빼 말라 무겁지는 않았다.
다만 무거운 것과는 별개로 자괴감이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내가 이 짓 하려고 피똥 쌀 때까지 공부를…….’
물론 대성은 의사의 기분 따위 알 바가 아니었다.
의사의 등에 업힌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멈추라고 할 때까지 앞으로 걸어.”
“……예.”
의사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짜증과 분노를 씹어 삼키며 앞으로 걸었다.
한 5초 걸렸을까?
의사가 평행봉의 끝, 목표 지점을 밟기 무섭게.
빰-!
[절대자께서 클리어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퀘스트가 완료되어 구현화 작업이 진척을 보입니다!]
[현재 구현율 : 옥체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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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퀘스트-1 (완료)
‘육체 수복.’
난이도 : 최하
내용 : 표시된 목표 지점까지 이동하십시오.
제한 시간 : 1시간
목표 : 표시된 지점까지 이동
보상 : 절대자를 위한 회복의 비약<小>
구현화 : 옥체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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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파르 소리가 머릿속에서 짧게 울려 퍼졌다.
“그만 걸어. 멈춰.”
“예…….”
그리고 3초 정도의 딜레이 후, 새로운 알림창이 생겨났다.
[보상 ‘절대자를 위한 회복의 비약<小>×1이 지급되었습니다.]
[보상 정보]
이름 : 절대자를 위한 회복의 비약<小>
분류 : 소비
‘절대자의 현재 상태를 소량 개선 및 회복시켜주는 다용도 비약입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친절하게 보상 정보까지 알려줬다.
그런데 지급되었다는 알림과는 다르게, 대성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의아하게 느끼던 중, 뭔가 맑은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
그 액체의 맛을 음미하기도 전.
이상한 감각이 대성의 전신을 엄습했다.
대성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혈관 줄기를 타고 액체의 효과가 골고루 퍼지는 느낌!
그와 동시에 정신을 압박하던 피로감이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팔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조금씩 완화되기까지 했다.
아직 미세한 아픔은 느껴졌지만, 방금 전처럼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
더 생생했다.
발끝부터 시작해서, 골반까지 올라오는 다리의 감각이.
“내려줘.”
“……아뇨. 기왕 이렇게 된 거, 서비스로 휠체어 있는 곳까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거의 자포자기한 어조였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대성의 말은 주치의를 무안케 했다.
“그냥 내려줘.”
“쓰러질지도 모르는데요?”
“괜찮아.”
대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쓰러져도 내 책임 아니란 거지?’
한번 시원하게 엉덩방아 찧는 장면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주치의는 곧바로 대성의 등허리에 받치던 두 팔을 풀었다.
하지만 그가 내심 기대했던 대로 콰당!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읏차.”
사뿐.
마치 깃털이 내려앉듯이, 대성이 두 다리 멀쩡히 바닥을 밟았다.
“어?”
주치의가 이상해하며 황급히 대성을 돌아보고, 이내 크게 놀랐다.
‘펴, 평행봉 없이는 걷기도 힘들었을 사람이?’
아무런 지탱도 없이, 자기 스스로 두 발로 서 있는 게 아닌가.
물론 아주 완벽한 건 아니고, 갓 태어난 당나귀처럼 중심이 흔들리기는 했다.
그러나 곧 넘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후우…….”
대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는 무릎을 곧게 펴는 것도 죽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냥 관절이 조금 저릿한 정도?
‘회복의 비약이란 녀석이 효과를 보이고 있어.’
대성의 마음에 기쁨이 스쳤다.
그는 고개를 들어 기다랗게 이어진 평행봉의 반대편 끝 지점을 바라봤다.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졌던 그 거리가, 지금은 별것도 아닌 것처럼 다가왔다.
‘할 수 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절대 아니다.
뛰는 건 좀 힘들겠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걸어서 가는 거라면?
100%…… 아니, 200% 가능하다!
‘좋아.’
대성은 꿀꺽 침을 삼켰다.
마음의 준비를 짧게 마친 뒤, 그는 한 발짝 내디디려 했다.
이 한 발짝이 사실상 모든 걸 의미했다.
첫걸음이 버겁다면 저기까지 가는 것도 불가능할 테니.
슥-
발걸음을 떼고, 다시 밟는 그 짧은 과정.
전혀 어렵지 않았다.
물론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됐다.’
대성의 입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는 섣불리 쾌재를 지르지 않고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자신이 정한 목표 지점은, 반대편 평행봉의 끝을 찍는 것.
한 발짝 다음엔 두 발짝.
두 발짝 다음엔 세 발짝.
네 발짝, 다섯 발짝, 여섯 발짝…….
성큼성큼-
저벅저벅-
순식간이었다.
“……맙소사.”
경악한 쪽은 오히려 가만히 지켜보던 주치의였다.
그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15년 의사 경력 동안 쌓아왔던 모든 의료 지식이 부정당하는 느낌!
그럴 만도 했다.
“……이, 이건 대체-”
세 발짝도 걷기 힘들어했고, 그것도 평행봉을 붙잡지 않으면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워했던 환자가.
걸었다.
10m가 넘는 거리를.
그것도 평행봉도 안 붙잡고.
통상적으론 이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4개월에서 5개월이 걸리는 게 당연할 텐데-
주치의가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고쳐 쥐었다. 당황할 때 나오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후-”
대성은 한 번 더 날숨을 뱉었다.
다리는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지만 근육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뛰는 건 힘들어도 걷는 거라면 하루 종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제야 그는 만족할 수 있었다.
‘그래. 적어도 이 정도 속도로는 회복이 돼야지.’
“의사 선생.”
대성이 말을 꺼내자 한창 얼이 빠져 있던 의사가 어깨를 떨었다.
“예, 예?!”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아, 아……. 예……. 아, 아니. 그…….”
의사의 표정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잔뜩 질려 있었다.
대성은 여유가 넘치는 걸음걸이로 치료실을 나섰다.
치료실 입구에 놓인 휠체어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이 빌어먹을 휠체어도 치워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