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4화 (14/180)

# 14

014

금고 안에는 지폐 다발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심지어 전부 샛노란 것이, 신사임당이 그려진 5만 원이다.

“…….”

눈이 돌아갈 만큼의 액수를 보고도 대성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금고 안에는 지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돈다발 사이사이, 백만 원짜리 수표도 그득히 쌓여 있다.

양손 한가득 지폐 뭉치를 쥔 대성은 고민에 잠겼다.

‘이걸 다 어떻게 들고 가지?’

이곳에 온 목적은 사채업자 녀석들을 말살시키지 위함이었지, 돈까지 챙기는 경우는 상정하지 못했다.

대성은 혹시 여기 어딘가 돈을 담을 수 있는 가방이 있지 않을까 싶어 사무실을 뒤적였다.

하나 진짜로 없는 건지, 그냥 못 찾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방 같은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금고를 통째로 들고 갈까?’

무게가 꽤 나가겠지만 그에겐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생각해보니 꽤 괜찮은 방법이다.

소형 금고를 통째로 들고 가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꽤 눈에 띄겠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대성은 직육면체의 금고를 어깨에 둘러멨다.

무수한 시체 밭을 뛰어넘고 사무실 밖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를 지나치고 엘리베이터로 향하기 직전.

“…….”

문득 복도엔 다른 문도 많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저 방에 들어갔을 땐 3명, 잠시 뒤에 4명, 5명이 더 들이닥쳤지.’

분명 같은 층의 다른 방에서 달려온 지원군이었음이 확실하다.

이 건물 전체가 녀석들의 소유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4층은 전부 녀석들의 것임은 불 보듯 뻔했다.

‘잠깐 둘러보고 갈까.’

잠시 어떤 가능성을 떠올린 대성은 바닥에 금고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중인 다른 사무실로 들어가 보았다.

“역시.”

사무실의 구석엔 또 다른 금고가 비치되어 있었다.

대성은 아까처럼 금고의 입구를 힘으로 뜯어냈다.

아니나 다를까.

안에는 지폐 다발과 백만 원권 수표가 태산처럼 쌓여 있었다.

“호오…….”

각 사무실마다 금고를 하나씩 놓아둔 걸까?

추측을 확인해보기 위해 다른 사무실에도 들어가 보았다.

세 곳 모두 똑같이 돈이 담긴 금고가 놓여 있었다.

“…….”

금고 하나당 1억이 가볍게 넘는 돈이 담겨 있으니…….

사무실당 금고 하나, 도합 다섯 개임을 통해 산정하면 대략 5억.

‘5억’이란 숫자가 가지는 위세는 압도적이다.

대성은 이 다섯 개의 금고가 궁핍한 집안 사정에 희망이 되어줄 것임을 직감했다.

‘다섯 개 전부 가져간다.’

한데 이렇게 되면 또 아까와 같은 고민에 직면한다.

‘어떻게 이것들을 다 챙기지?’

금고 하나나 두 개 정도면 모를까 다섯 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집에서 사무실까지는 거리도 꽤 되어, 일일이 왕복하는 것도 효율적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과거에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적이 있던 것 같군.’

오래 전.

아직 지옥 생활에 익숙해지지 못했을 시절.

처음으로 무구(武具)를 손에 넣었을 때도 해본 고민이다.

몸에 걸치는 투구와 갑옷 등을 어떻게 보관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지옥에 떨어졌을 때 가지고 있던 책가방만으론 여러 가지 아이템을 보관하기에 무리가 많았다.

그때 해답이 되어준 게, 시스템이 보상으로 제공해준 ‘아공간 포켓’이라는 아이템이었다.

‘지금 그게 있었더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거늘.’

지구엔 그런 형편 좋은 아이템이 없다는 게 참 뼈아픈 현실이다.

‘아냐, 잠깐.’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지옥에만 있는 아이템을 지구로 ‘구현’시키는 유일한 수단이 있다.

‘판테온.’

판테온의 시스템은 말했었다.

지옥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몇 가지의 퀘스트를 통해 지구에 구현할 수 있다고.

그 말은, 즉 아공간 포켓을 지구로 가져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의미다.

‘어쩔 수 없지.’

분명 병원에서 퇴원할 때 다시는 자기한테 관심 보이지 말라고 시스템에게 경고를 하긴 했었다.

근데 그냥 신경 안 쓰기로 했다.

그깟 체면 좀 챙기겠다고 쉬운 길을 포기할 정도로 대성은 바보가 아니었다.

어차피 판테온도 자신을 언제든 기다리겠다는 뉘앙스로 말했었다.

‘귀찮게 하는군.’

이미 얻었던 아이템을 다시 회수하는 작업은 번거롭게 다가왔다.

맨몸으로 지구로 귀환하는 길을 선택했기에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5억이라는 금전적 가치를 생각하면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여기서 좀 벗어나야겠군.’

판테온에 들어가 있을 동안 자신은 무방비일 터.

그사이에 놈들의 지원군이 들이닥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대성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뒤 건물 밖을 나섰다.

‘이쯤이면 되겠지.’

최대한 사람의 눈이 닿지 않을 만한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섰다.

대성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판테온.’

그때였다.

화르륵-!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느닷없이 검붉은 유황불이 사납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열기에 눈살을 찌푸린 대성이 손을 들었다.

이내 불길이 사그라지자 5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시커먼 석문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덜컹-!

끼이익-

굳게 닫혀 있던 입구가 좌우로 쩍 열리더니 내부가 드러났다.

환하고 새하얀 빛이 정면에 있는 대성을 집어삼킬 듯이 쏟아졌다.

병원에서는 그냥 의식을 통해 공간이 바뀌듯 입장했다면, 지금은 마치 본격적으로 왕의 알현을 반기듯이 ‘문’의 형태로 나타났다.

‘빨리 안 들어가면 주변의 이목을 살 수도 있겠는걸.’

후미진 골목이라고 해도 이런 열기, 이런 광휘는 목격자가 생길 우려가 있었다.

대성은 문의 저편으로 쏟아지는 빛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

[판테온에 입장합니다.]

[판테온이 ‘절대자의 일지’를 인식합니다.]

새하얀 공간에 들어선 순간.

마치 환영 인사를 건네듯 메시지들이 홍수처럼 들이닥쳤다.

[강림 퀘스트 완료 후 처음으로 판테온에 입장하셨습니다]

[판테온의 시스템이 재정비됩니다.]

[‘절대자의 일지’가 생성됩니다.]

메시지와 함께 돌연 반딧불 같은 빛 덩어리들이 허공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스르륵-

이내 공중에 둥실 떠오른 건, 거대한 공책 한 권이었다.

“이건…….”

대성에겐 이 공책의 디자인이 너무나도 낯에 익었다.

아니, 몰라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80년 동안 매일 끼고 살았던 물건이니까.

하루하루.

짐승처럼 싸우기만을 반복했던 그가 최소한 ‘인간’임을 잊지 않게 해준.

아득한 과거의 나날들을 자필로 기록해둔, 그 ‘일지’였다.

어째선지 그때랑 비교하면 사이즈가 훨씬 더 거대해지긴 했다만.

“이게 왜 여기에?”

그러고 보니 판테온에 들어올 때마다 시스템은 이런 말을 했었다.

판테온이 절대자의 일지를 인식했다고.

그렇다면 이 일지가, 판테온의 어떤 ‘핵’이 되어준다는 걸까?

그 의문을 뒷받침해주듯 시스템이 문자를 쏟아냈다.

[원하시는 페이지를 선택하시면 그때의 시간과 공간 등, 모든 요소가 이곳 판테온에 재현됩니다.]

[되짚어보고 싶은 시절을 말씀해주시면 해당 기억이 기록된 페이지를 자동으로 보여줍니다.]

아무 이유 없이 판테온이 갑자기 일지를 보여주고, 저런 정보를 알려주는 건 아닐 터.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단 시스템의 안내에 따라보는 게 좋으리라.

‘되짚어보고 싶은 시절이라…….’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돈을 담을 ‘아공간 포켓’이다.

그렇다면 그걸 처음으로 손에 넣었을 적을 말하면 되겠지.

“내가 아공간 포켓을 넣었을 때. 그때의 시절이 기록된 페이지를 보여줘.”

[절대자의 명령을 인식합니다.]

[특정 단어, ‘아공간 포켓’이 언급된 페이지를 검색 중입니다.]

촤르륵.

거대한 일지의 페이지들이 빠르게 앞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아공간 포켓을 얻었던 시점은 꽤나 초창기였다.

그래서일까.

두터운 일지의 앞장 부근까지 페이지가 쉼 없이 넘어갔다.

[검색 완료.]

[검색 결과 : 16p]

대성은 일지에 한 발짝 더 가까이 접근했다.

페이지에 적힌 내용을 한번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음?”

대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들여다본 페이지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였으니까.

“이건…….”

기억대로라면, 과거의 그는 한 페이지도 빠짐없이 일지를 작성했다.

딱히 어떤 부분을 건너뛰거나 하지는 않았다.

혹시 16p만 그런가 싶어서 대성은 손으로 직접 종이를 앞뒤로 넘겼다.

하지만 두 페이지 모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니, 아예 백지는 아니군.’

게슴츠레 눈을 좁혀보니 글씨가 아주 희미하게 보였다.

마치 누군가 지우개로 급하게 글씨를 지운 듯한 흔적이었다.

‘내가 했을 리는 없고.’

어떻게 보면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일지가 훼손된 거니, 묘한 불쾌감마저 느껴졌다.

고민해봤자 답은 안 나온다.

대성은 시스템을 향해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천상의 존재들이 명계의 시공간을 봉인 중입니다.]

[시공간의 범주에는 절대자께서 작성하신 일지에 기록된 ‘역사’도 포함됩니다.]

“흠…….”

그러고 보니 천상의 존재들이 지옥에 뭔가 수작을 부렸다고 시스템이 말했던 적이 있다.

멀쩡했던 일지의 글씨들이 지워진 것도 그 여파 때문일까.

“마음에 안 드네.”

대성은 천상의 존재라는 녀석들에게 적의를 느꼈다.

힘들게 썼던 일기를 놈들이 강제로 지운 셈이니 그럴 법도 했다.

하나 지금은 정체도 모를 놈들에게 화를 낼 때가 아니었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아공간 포켓을 손에 얻는 것.

“나한테 갑자기 이 일지를 보여준 이유가 뭐지?”

[해당 페이지를 선택하시면 해당 페이지에 기록된 이벤트를 재현합니다.]

[이벤트를 수행하시면 해당 페이지에 기록된 아이템과 추가 보상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호오.”

말하자면 타임머신 같은 거다.

지금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성은 완벽하게 이해했다.

“16페이지의 사건을 재현해줘.”

그 시절, 그 과거의 시간 속에서 얻었던 가장 큰 보상.

아공간 포켓을 얻기 위해서.

[16p : -5년. 75일을 판테온에 재현시키겠습니까? 예 / 아니오]

“그래.”

아공간 포켓은 무궁무진한 쓸모를 지녔다.

굳이 이번뿐만이 아니어도, 앞으로 계속 쓸 일이 생기리라.

[절대자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16p: -5년. 75일 당시의 환경과 사건을 판테온에 재현시킵니다.]

***

슈와악-

불식간에 일지에서 막대한 광채가 휘몰아쳤다.

그와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이었던 판테온이 블록처럼 쪼개지더니-

“여긴?”

어느새 녹음이 우거진 숲이 사방팔방 펼쳐졌다.

바닥에 깔린 짙은 흙탕물.

촉수처럼 기묘하게 뻗쳐 나온 나무와 이끼가 잔뜩 서린 수풀 등.

매우 눈에 익은 장소였다.

[16p에 기록된 장소, ‘포식자의 숲’이 재현되었습니다.]

[천상의 존재에 의해 포식자의 숲이 봉인된 상태입니다.]

‘아니. 내가 알던 포식자의 숲과는 한참 달라.’

장소는 확실히 그가 알던 그 포식자의 숲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헬 베어와 목숨을 걸고 싸웠었다.

그렇게 탈취한 헬 베어의 심장을 숲의 끝자락에 위치한 재단에 바치면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보상이 바로 ‘아공간 포켓’이다.

기억이 이토록 생생하거늘, 이질감이 드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고요해.’

숲에 발을 들이면 흉험한 소리가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먹잇감의 존재를 알아차린 숲의 포식자들이 동면에서 깨어나는 소리였다.

하나 지금은 오로지 정적뿐이다.

“…….”

대성은 시스템을 통해 ‘포식자의 숲’의 정보를 불렀다.

[차원 봉인으로 인해 해당 장소의 정보를 표시할 수 없습니다.]

차원 봉인이라면, 그 천상의 존재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벌인 소행일 터.

‘놈들이 시공간을 봉인했다는 게 이런 의미였군.’

포식자의 숲도 결국엔 자연이다.

하지만 자연이 지녀야 할 어떤 생명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공동묘지도 으슬으슬한 기운 정돈 감돌건만.

‘숲에 들어오면 1분이 지나기도 전에 마수가 습격한다.’

포식자의 숲에선 먼저 잡아먹는 놈이 임자다.

그래서 놈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재빠르게 숲의 침략자를 공격한다.

하나 지금은 1분이 훨씬 지났음에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부 판데모니움이란 곳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겠군.’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건, 대성 혼자뿐이라는 말이 될까?

하지만 시스템은 분명 어떤 이벤트를 수행하라고 했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 대체 뭘 하라는 말인가.

그때였다.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

아이템 구현 퀘스트-1 (진행 중)

‘16p 아공간 포켓’

난이도 : 중

내용 : 포식자의 숲을 점령 중인 천상의 존재들을 제거하시오.

제한 시간 : 1시간

목표 : 백(白)의 거상 0 / 10

보상 : 심판의 단검

보상2 : 공적 포인트 + 2,000pt

구현화 : 아공간 포켓 + 100%

-----

‘공적 포인트?’

퀘스트의 상세 내용을 읽어본 대성이 의문을 표했다.

심판의 단검이야, 강림 퀘스트 때 줬던 스태미나 포션처럼 시스템의 추가 보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적 포인트는 처음 보는 요소였다.

일단 보상 개념으로 지급되는 이상 언젠가 이득이 되어주면 되어주지 해가 되진 않을 터.

‘뭐, 자세한 건 차차 알아가 보면 되겠지.’

대성이 슬슬 행동을 개시하기 위해 발걸음을 뗀 그때였다.

슥-

갑자기 바닥에 넓게 깔리는 어떤 거대한 그림자.

그리고 등 뒤에서 짓쳐들어오는 무형의 살기(殺氣).

“……!”

대성은 튕겨나가듯이 정면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후방에서 느껴진 살기의 정체를 빠르게 노려봤다.

[확인되지 않은 간섭자 발견. 제거하겠습니다.]

인간처럼 손과 발이 달린, 3m가 넘는 크기의 거대한 석상이었다.

일체 감정이 담기지 않은 냉혹한 기계음이 석판으로 뒤덮인 얼굴에서 흘러나왔다.

<백(白)의 거상-직립형>

종족 : 기계 생명체

「천상의 존재들이 만들어낸 자율 행동 병기입니다.」

[전투 모드. 활성화.]

갈퀴같이 생긴 석상의 두 손이 기계적인 변형을 거듭하며 형태를 바꿔나갔다.

그것이 개전(開戰)의 신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