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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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형을 마친 거상의 두 손은 마치 해머처럼 뭉툭했다.
‘저게 아마 놈의 공격 수단이겠지.’
대성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거상이 주먹…… 아니, 철퇴를 휘둘렀다.
탁-!
뒤로 몇 발짝 물러서는 것만으로도 가볍게 피할 수 있었다.
쿵!
철퇴가 바닥에 내려찍히자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흙먼지가 일고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막대한 파괴력!
하지만 단순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느리다.
‘다행이군.’
기계 생명체라는 설명을 확인했을 땐 내심 걱정했었다.
그냥 생명체라면 몰라도, ‘기계’를 상대해본 적은 없었으니까.
‘지극히 원시적인 공격이야. 회피엔 문제가 없겠군.’
대성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지잉-
거상이 구슬처럼 박힌 붉은 두 눈을 번뜩였다.
쿵, 쿵-!
놈이 둔중한 파공음을 자아내며 철퇴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동작이 느렸기에 그 움직임을 눈에 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정도면 그냥 잘 훈련된 일반인도 능히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골치 아프군.’
그래, 피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나 싸움이란 건 공격하는 쪽이 승자가 되는 법이다.
회피를 이어가봤자 체력이 소진되어 패배하는 미래만이 존재할 뿐.
‘정작 내겐 놈을 쓰러뜨릴 수단이 없다.’
능숙하게 거상의 공격을 피해내던 그가 혀를 찼다.
탓-!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대성은 거상으로부터 조금 더 넓게 거리를 벌렸다.
일종의 견제와도 같은 구도가 형성되면 상대방 쪽에서도 숙고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 무슨 속셈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나 거상은 그런 걸 모른다.
쿵, 쿵, 쿵!
놈은 그저 1차원적으로, 하지만 더없이 집요하게 대성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거상과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드는 짧은 순간, 대성은 주먹을 쥐었다.
‘역시 맨손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 건가?’
오직 무구에만 의존하여 지옥에서 80년이란 세월을 버텨온 게 아니다.
숱한 마수를 박살 내고 시스템이 만들어낸 난관들도 모조리 쳐부순 이 주먹.
그 주먹으로 저깟 석상 하나를 못 부술까.
“혈귀화를- 아니, 아니야.”
혈귀화를 발동하기 직전 대성은 스킬을 해제시켰다.
확실히 혈귀화의 위력이 더해진 주먹은 칼이나 둔기 못지않은 병기가 되어줄 것이다.
하나 이 스킬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존재했다.
그건 바로 소모되는 마력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거다.
지금은 그런 소모를 거듭하면서까지 질질 끌 싸움은 아니다.
‘한 방 한 방은 강력하지만 느려.’
상대는 움직임이 눈에 훤히 보이는 단순한 놈이다.
공격 수단이 막연하다고 해서 마력을 극심히 깎아먹는 스킬까지 동원하는 건 수지가 맞지 않는다.
붕-!
‘그렇다면…….’
허리를 숙여 가로로 휘둘러지는 철퇴를 피하며 그는 생각했다.
돌풍이 대성의 앞머리를 휩쓸었다.
‘……한번 해볼까?’
스킬이 아닌.
순수한 육체 그 자체의 힘.
즉, 맨손으로 저 거대한 거상을 파괴하는 것이다.
콰직, 콰직-!
철퇴가 땅을 내려찍을 때마다 흙먼지가 튀어 올라 비처럼 쏟아졌다.
한 대라도 허용했다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가공한 위력!
키이이잉-!
거상이 불쾌한 기계음을 토해내며 철퇴를 사선으로 휘두르려던 찰나.
‘지금.’
대성은 짧은 틈을 찾았다.
그 미세한 틈에 파고들어, 그가 거상의 가슴 앞까지 당도했다.
발을 뗀 시점에서 대성의 주먹은 이미 굳건히 쥐어진 상태.
훙-!
‘만에 하나’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전력이 담긴 원 펀치.
폭풍처럼 뻗쳐나간 대성의 주먹이 거상의 흉부를 가격했다.
쾅-!
그리고 거상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기둥을 잃은 건물처럼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일격즉살.
원래의 형체를 잃고 파편으로 전락한 거상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주먹 한 방에 한 마리라…….”
목숨 걸고 지근거리까지 접근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다.
대성은 혹시 몰라서 퀘스트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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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템 구현 퀘스트-1 (진행 중)
‘16p 아공간 포켓’
난이도 : 중
내용 : 포식자의 숲을 점령 중인 천상의 존재들을 제거하시오.
제한 시간 : 1시간
목표 : 백(白)의 거상 0 / 10
보상 : 심판의 단검
보상2 : 공적 포인트 + 2,000pt
구현화 : 아공간 포켓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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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0 / 10라고?
지금 막 거상 하나를 쓰러뜨렸는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대성이 눈살을 찌푸리는 가운데.
우웅, 우웅-
진동이 울려 퍼졌다.
대성은 고개를 돌려 진원지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붉은색 구슬 하나가 파편들 사이에서 영롱히 빛났다.
이내 구슬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손상율 100%. 자체 수복을 실행 중.]
그 순간이었다.
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진 파편들이 갑자기 위로 부유했다.
파편은 한가운데 놓인 구슬을 기점으로 빠르게 모여들었다.
짧은 시간.
3초 걸렸을까?
[수복 완료.]
거상이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분명 잘게 조각났을 부위조차 퍼즐처럼 제자리를 찾았다.
멀쩡해진 거상 앞에서 대성은 어이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래서 그런 거였군.”
엄밀히 따져서 무찌른 게 아니라는 걸 시스템은 인지한 것이다.
[제거 대상의 공격 패턴 분석 완료. 본 기체의 성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합니다.]
“……!”
분석 완료. 한 단계 업그레이드.
그런 말들이 들리자 대성은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하나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철컥.
철퇴 모양이었던 거상의 손은.
어느덧 기관총처럼 변해 있었다.
[지금부터 원거리로 대응합니다.]
투두두두두!!
총탄이 빗발쳤다.
대성은 옆으로 굴렀다.
초당 50발 꼴로 쏘아진 총알이 흙바닥을 헤집었다.
몸이 360도 지점에서 회전하고 두 팔이 땅에 닿자마자.
탓-!
대성은 땅개처럼 사족보행으로 질주했다.
몸을 세울 시간조차 없었다.
투다다다다-!!
죽음의 파괴력을 지닌 노란 실선이 땅을 그었으니까.
‘곤란하군.’
아무리 비상식적인 방어력과 회복력을 가진 대성이라고 해도 땅 거죽이 뒤집힐 만큼의 기관총 세례를 가만히 맞았다가는 치명적일 터.
촤락-!
대성은 근처의 가까운 거목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살벌하게 빗발치던 총탄이 엉뚱한 곳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숨어서 틈을 노린다.’
이파리들이 촘촘히 밀집된 덤불 안으로 파고든 대성이 거상을 노려보았다.
목표물이 사라지자 석판으로 뒤덮인 거상의 얼굴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제거 대상을 놓쳤습니다. 적외선 모드를 발동합니다.]
“적외선?”
지잉-
안 그래도 붉었던 거상의 핏빛 눈동자가 한층 매섭게 번뜩였다.
[제거 대상 발견.]
“……!”
거상의 눈이 덤불을 노려본 순간.
대성은 다시 한번 옆으로 크게 굴러야만 했다.
투두두두-!!
유선형의 덤불을 형성하던 식물과 풀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번거롭게 구는군.’
거목 사이를 전전하던 대성은 급히 선회했다.
녀석은 적외선으로 그를 쫓고 있었다.
아무리 숨어봤자 소용없을뿐더러, 바닥에 뻗친 나무뿌리와 돌부리들 때문에 달리기도 어려웠다.
결국 거상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들판 방향으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끼릭, 끼릭-
이때, 쉴 틈 없이 휘몰아치던 포화가 잠시 멈췄다.
“젠장.”
대성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금이라도 여유가 났을 때 도주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대성이 발을 떼려던 그 순간.
위우우우우웅-!
“……?”
다시 총탄을 발포할 줄 알았던 녀석이 갑자기 사이렌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가늘고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사이렌은 숲 전체를 술렁이게 했다.
바로 그때.
쿵, 쿵!
쿵, 쿵, 쿵!
사방에서 에워싸듯이 들려오는 육중한 발소리들.
‘썩 좋지 않은 예감이…….’
대성이 침을 삼키는 것과 동시에.
[TYPE-B1의 신호를 감지.]
[TYPE-B1과 정보 공유 완료.]
[지금부터 10개 기체 모두 개별 동작을 종료합니다.]
[승인.]
[승인.]
[승인.]
불안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다른 거상들이 풀숲 너머의 아득한 칠흑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이 나타난 거상의 숫자는 모두 아홉.
녀석들은 대성과 맨 처음에 대적했던 놈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이로써 총 열 마리.
아마 포식자의 숲에 있는 백(白)의 거상 전부를 동원한 숫자일 터.
녀석들 사이로 질서정연한 포메이션(Formation)이 형성되었다.
“…….”
정면 돌파로는 승산이 없다.
스킬도 스킬 나름이다.
정작 몸을 지켜줄 무구(武具)가 없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투두두두-!
무자비한 총탄이 다시 한번 대성을 덮쳤다.
화력은 아까의 그 열 배.
대성은 일단 좁은 숲길로 한 번 더 접어들었다.
지금은 그게 최선이었다.
길이 험하고 좁으니 몸집이 커다란 거상들에겐 불리한 지형이다.
하나 그가 처한 ‘불리함’에 비하면 거상의 ‘불리함’은 별것도 아니었다.
‘이대로 계속 시간을 끌어봤자…… 죽는 건 결국 나다.’
바람과 같은 속도로 수풀 사이를 헤쳐 나가며 대성은 생각했다.
뒤에선 열 개의 거상이 낑낑대며 좁은 길을 헤치며 쫓아왔다.
‘방금 개별 동작을 종료한다고 했지. 놈들은 지금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어.’
숲길이 결코 일직선이 아님에도 인원을 분산시키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한 몸처럼 움직인다는 건-’
휘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대성이 안광을 빛냈다.
‘일거에 몰아 죽일 기회가 있다는 말이다.’
대성은 계속해서 달렸다.
어쩔 땐 옆길로 새기도, 어쩔 땐 막연히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면서.
하지만 되는대로 움직이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지금, 정확히 어떤 ‘목표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곧 있으면 그게 나온다.’
포식자의 숲은 특정 지역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다.
사실 지옥에 존재한 모든 숲과 산이 ‘포식자의 숲’이었다.
지옥에 있을 땐 수백 번도 넘게 들락거려야 했다.
그쯤 되니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는 아주 훤했다.
***
잠시 뒤.
대성은 어느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다.
‘놈들은 내 꽁무니만 따라다녔어.’
단순한 움직임이다.
유도는 어렵지 않았다.
한 가지 더.
놈들은 기관총을 가지고 있음에도 발포하지 않았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이상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 것이다.
대성이 거목의 꼭대기 끝자락까지 오르고 30초가 지난 뒤.
바스락, 바스락-
저 멀리서 수풀을 뚫고 거상들이 그 흉험한 거구를 드러냈다.
[제거 대상과의 남은 거리 100m.]
[총탄이 닿는 범위 안으로 접근합니다.]
쿵, 쿵, 쿵.
거상들이 점점 이쪽을 향해 접근해 왔지만 대성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사정거리까지 앞으로 10m.]
“5m.”
거상은 거상대로, 대성은 대성대로 거리를 재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그의 눈은 더 이상 거상을 보고 있지 않았다.
대성은 그보다 조금 더 앞쪽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열 개의 거상으로부터 5m 떨어진 흙바닥을 말이다.
“1m.”
쿵!
[사정거리까지 앞으로 5m. 전 기체 집중포화 준-]
“이미 늦었다, 씹새들아.”
펑-!
돌연 거상들이 밟은 흙바닥이 폭죽처럼 튀어 오르더니.
그 너머에 덮여 있던 ‘늪’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사정거리에 발을 들인 거상들이 꼼짝없이 늪에 빨려 들어갔다.
심지어 평범한 늪도 아니었다.
‘맹독 호수.’
혹은 숲의 지뢰라고도 불린다.
언뜻 평범한 흙바닥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건 위장이다.
누군가 바닥을 밟는 순간 지면이 터져나가고 그 뒤에 숨겨져 있었던 독극물 같은 늪이 대상을 심연까지 빨아들인다.
부비 트랩. 전형적인 함정.
하지만 늪의 냄새가 매우 지독해서 방심만 하지 않으면 후각을 발휘해 피해 갈 수 있다.
‘물론 냄새를 맡지 못하는 기계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한 몸처럼 움직이던 열 마리의 거상이 일제히 늪에 빨려들었다.
산성의 늪이 거상들의 외피를 부식시켰다.
대성은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손상율 0%…… 치직- 자가 수복을 시- 치직, 치직!]
[칙- 손상율 0%…… 자가 수복을 시- 치직!]
[……! 치직, 칙- 칙-]
거상들이 고장 난 라디오 같은 소리를 내며 허물어져 갔다.
수복 속도보다 독의 늪이 녀석들을 집어삼키는 게 훨씬 더 빨랐다.
그렇게 늪이 놈들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코어(Core)까지 녹여내자.
[절대자께서 클리어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퀘스트가 완료되어 구현화 작업이 진척을 보입니다!]
[현재 구현율 : 아공간 포켓 100%]
[구현화 작업 완료!]
10마리의 거상이 흔적도 없이 바스라지고, 퀘스트가 종료됐다.
그제야 대성은 안도감 어린 한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후우…….”
죽다 살아났다.
만약 숲에 대한 지식이 없었더라면 꼼짝 없이 벌집 신세가 되었으리라.
긴장이 풀린 대성이 높다란 거목에 등을 기댄 찰나.
갑자기 허공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판데모니움간의 마수들이 절대자의 지략에 크게 탄복합니다!]
[절대자를 향한 마수들의 충성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지켜보고 있었나.”
판데모니움 속에서 마수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환호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대성은 뒷머리를 긁은 뒤.
하늘을 향해 중지를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