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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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야.”
성찬호의 집에서 하룻밤 묵은 대성이 다음 날 오전에 찾아간 곳은 사냥꾼 협회의 관악구 지부였다.
협회 건물은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은 마천루였다.
멍하니 그 꼭대기를 가만히 올려다보는 대성의 뒤에서 성찬호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일단 로비에 가서 직원한테 각성 판정 받으러 왔다고 말해. 그럼 그 사람이 알아서 안내해줄 거야.”
“그래.”
“그리고 존댓말 쓰는 거 잊지 말고, 인마. 아무한테나 반말 찍찍 내뱉으면 미친놈처럼 보여.”
“알고 있어.”
“알고 있기는 개뿔…….”
성찬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순수하게 기뻐서 웃음이 새어 나왔을 뿐이다.
협회 건물 꼭대기에 당당히 붙은 KHA라는 로고.
Korea Hunter Association. 직역하자면 한국 사냥꾼 협회.
삼성이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대명사라면, KHA는 대한민국 평화의 대명사라 할 수 있었다.
긍지 높고 찬란한,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 마련된 기관.
그 기관의 로고를 등에 지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대성의 모습을 보니 기뻤다.
이놈이 정말 식물인간에서 깨어나지 못하나 노심초사했던 과거의 나날과 비교해보면 더더욱.
“왜 웃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난 이만 출근하러 가볼게. 이따 판정 결과 나오면 나한테 문자나 연락 줘.”
“어.”
“건승을 빈다.”
위잉- 탁.
유리로 된 차창이 닫히고, 성찬호의 아우디가 부드럽게 나아갔다.
“…….”
대성은 협회 건물 주변에 넓게 조성된 부지를 가만히 둘러보았다.
정장을 입고 커피를 마시며 동료와 수다를 나누는 협회 직원들 사이로 평상복 차림의 사람들이 건물 입구로 들어가고 있었다.
입구로 들어서는 이들의 표정은 둘 중 하나였다.
긴장, 혹은 기대.
반면, 거꾸로 입구를 나서는 평상복 사람들의 표정 또한 둘 중 하나였으나 의미는 전혀 달랐다.
환희, 혹은 낙담.
‘각성 판정을 위해 협회를 방문한 사람들이군.’
입구로 발걸음을 옮기는 대성의 표정엔 긴장감도, 기대감도 없었다.
한없는 무표정.
본인도 그걸 인지하고 있다.
다만, 나중에 판정을 받고 출구를 나섰을 때의 기분은 환희에 가깝기를 바랐다.
판정 결과가 높게 나오면 나올수록 더 큰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찬호는 내가 못해도 B급, 적지 않은 확률로 A급도 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역시 본인이 직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속단할 수 없다.
입구의 회전문을 지나치자 드넓은 공동 로비가 펼쳐졌다.
안내 데스크의 여직원은 지금 이 순간에도 판정을 받으러 온사람들을 안내해주고 있었다.
오늘따라 부쩍 신청자가 늘었는지, 그녀가 한숨을 쉬며 어깨를 주물렀다.
“평일 오전인데도 몰리네. 으.”
점심때까지 조금만 더 힘내자고 여직원이 마음을 다잡을 때쯤.
슥-
문득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그녀를 뒤덮었다.
게슴츠레 눈을 뜬 채 하품을 할 참이던 여직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가 무심코 헛숨을 삼켰다.
‘힉…….’
여태까지 협회를 방문한 각성자 중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거구인 남성이 데스크 앞에 서 있었다.
대성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러들게 만들 정도의 위압감.
그녀가 이런 덩치, 이런 포스를 지닌 각성자를 눈앞에 직접 본 건 S급의 서동철밖에 없었다.
“저기요.”
“아, 네, 네!”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린 여직원이 다급히 반응을 보였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판정 받으러 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여직원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선입견이기는 하나, 이미 판정을 끝내고 등록을 마친 전문 사냥꾼이 다른 볼일로 찾아온 줄 알았는데.
‘이건 안 봐도 무조건 각성자일 것 같은데…….’
몸에 근육이 좀 많다고 다 사냥꾼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저 사나운 눈매며 늑대의 갈기처럼 예리한 백발이며.
이런 사람이 사냥꾼의 운명을 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건 그거고, 할 일은 한다. 여직원은 능숙하게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검사실 대기자 명단에 한대성 이름 석 자를 등록시켰다.
“저기 엘리베이터 타시고 6층으로 올라가신 다음, 3번 방으로 가시면 돼요.”
“그래요.”
대성은 뭔가 어중간한 대답을 남기고 쿨하게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여직원은 쩝 입맛을 다셨다.
‘저 정도면 판정이 안 떠도 헬스 트레이너로 먹고살 수는 있겠다.’
각성자는, 혹은 사냥꾼은 무조건 몸 좋은 근육남이라는 환상을 가졌던 시절이 그녀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협회 안내 직원으로 일하면서 그 환상은 모조리 깨졌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그 마음속 환상을 다시금 꽃피우게 하는 남자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일하는 도중에 뭔 시시한 생각을 하는 거람.’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
6층 검사실 3번 방 앞에는 스무 명가량의 대기자가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석 맞은편엔 직육면체의 방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저곳에 들어가서 판정을 받는 방식이었다.
‘……괜히 주눅 들게.’
‘운동해서 저런 거야, 아니면 각성해서 얻은 몸이야?’
‘나도 근육 좀 붙었는데 이거 각성한 거 맞겠지?’
현재 대기자들 사이론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웬 떡대가, 비주얼만 보면 이미 현역으로 몇 년은 구르다 온 것 같은 남성이 떡하니 대기석에 앉아 있었으니까.
그들도 나름 본인이 오늘 각성자가 되리라는 미지의 자부심을 품고 온 거였다.
하나 대성을 본 순간.
‘나는 무조건 각성자야’라는 단언이 ‘나 정도면 각성한 거 맞겠지?’라는, 자존감이 한 단계 낮은 의문형으로 변했다.
본인의 각성 여부는 주로 신체적 변화로 예측한다.
이를 테면, 요즘 부쩍 가만히 있어도 살이 빠진다거나 머리카락이 길게 자란다거나.
그러면 이게 혹시 어떤 각성의 전조가 아닌가 싶어 협회로 가서 확진을 내려보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갑자기 체중이 줄거나 머리카락이 많이 자라는 현상은 각성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하나 ‘혹시 나도?’ 같은 생각이 그들에게 기대감을 불어넣는 것이다.
지금 대기석에 앉은 이들 중 태반이 그 경우에 속한다.
하지만 대성을 본 순간, 그들은 급격히 불안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저 정도는 근육이 붙어야 각성자가 되는 건가?’
‘젠장, 요즘 좀 눈이 말똥말똥해져서 각성했나 싶었는데…… 저 사람 보니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정작 대성은 조용히 그냥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는데, 알아서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그들이었다.
대성의 순번은 아홉 번째.
그동안 그는 휴대폰을 매만지며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띠링-
그때, 혜정에게서 문자 하나가 날아왔다.
[아직 찬호 집이니? 집에 언제 와? 오늘 엄마 허리 아파서 가게 하루 쉬어.]
“…….”
대성은 아직 가족에게 자신이 협회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어제 급작스럽게 결정한 사안이기도 했고, 아직 판정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굳이 일찍 말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냥꾼이라는 위험한 일을 하겠다고 말하면 혜정이 극구 만류할지도 몰랐다.
여러모로 걱정을 끼치기 싫었던 대성은 적당한 거짓말로 둘러댔다.
타닥, 탁-
[아직 찬호 집. 씻고 천천히 집에 가려고.]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자 빠르게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구나. 밥은 먹었니? 안 먹었으면 그냥 집에 와. 지수가 점심은 우리들이랑 같이 먹겠다고 방금 해장국 사러 나갔다.]
“빨리 가야겠는걸.”
순번은 어느덧 대성의 바로 앞인 여덟 번째까지 빠진 상태였다.
문제는 그 여덟 번째에서-
“아니, 씹팔! 내가 왜 미각성자야! 나 분명 각성했다니까 그러네!”
일이 터졌다.
검사실 안쪽에서 터져 나온 소란에 대기자들이 이목을 집중시켰다.
협회 관계자 몇 명이 급하게 검사실로 달려오자 자동문이 열리고 내부 전경이 드러났다.
머리가 벗겨진 남성이 있는 대로 악을 지르며 난동을 피우고 있었고, 담당관이 난감해하던 중이었다.
“저, 유감이지만 측정기가 음성으로 뜬 이상-”
“그러니까 그 측정기가 고물이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아니, 요즘 협회 놈들 일 처리 다 이따위야?”
너무나도 알기 쉬운 상황이었다.
눈앞의 결과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도피를 시도하는 부류의 인간.
이런 부류의 진상은 반년에 두세 명 정도 속출하기는 하나, 공교롭게도 담당관의 대처가 썩 좋지 못했다.
“2년 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고장 난 적 없는, 정확도 99%의-”
“99%면 1%는 고장 났을 수도 있다는 거네! 자꾸 개소리하지 말고 빨리 다른 측정기 가져오라고!”
이미 말을 듣지 않기로 결심한 인간한테 정확도 같은 얘기를 해봤자 무용지물이다.
보통 이럴 땐 그냥 조용히 돌아가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는 것이 최적의 대응법인 법.
“에이, 귀 아프게…….”
“좀, 그냥 순응하고 집에 가지.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은 뭔 죄야?”
그 상황을 바라보던 대기자들도 하나둘씩 작은 목소리로 불만을 토해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서 중얼거리는 선에서 그쳤지만.
“나 각성한 거 맞다고! 안 그러면 이렇게 사람이 하루아침에 머리가 벗겨질 리가 있냐고!”
“하, 하지만 검사 결과가 이렇게 나온 걸 저보고 따지시면 곤란합니다!”
진상을 피우는 남성의 대머리에서 빛이 반짝였다.
그 빛을 말없이 주시하며, 대성이 뺨을 긁었다.
‘하필 내 차례를 앞두고…….’
조용히 살고 싶으니 오지랖을 떨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 협회 관계자들도 달려왔으니 기다리다 보면 알아서 상황이 마무리될 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가족이 기다리고 있어.’
저놈이 진상을 피우면 피울수록 집에 돌아가는 시간이 늦어진다.
해장국을 사놓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혜정과 지수를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거친 수단을 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저런 해프닝은 지옥에선 절대 못 보는 구경거리라 신기하기도 하고.
그러니 그냥 조용히 몇 마디만 해주기로 했다.
“자꾸 계속 잡아떼면 내가 직접 여기 지부장한테 클레임-”
“어이.”
묵직하게 공기를 때리는 목소리.
음의 높낮이가 낮고 나긋했지만, 그것은 아주 또렷하게 대머리 남성의 귀에 박혔다.
그것이 대성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란 걸 안 옆자리 대기자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대성이 대기석에서 슬그머니 일어나며 하던 말을 이어갔다.
“뒤에 사람이 기다리잖습니까.”
“뭐야? 어떤 꼴같잖은 새끼가-”
안 그래도 눈에 보이는 게 없었던 대머리 남성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리고 허우대가 무슨 거인 같은 백발의 남성이 말을 한 장본인임을 깨닫게 된 순간.
“어…….”
눈에 뵈는 게 없던 동공이 잠깐 지진을 일으켰다.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트럭처럼 폭주하던 분노가 한 방에 치료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저벅-
대성이 잠깐 말문이 막힌 채 얼어붙은 대머리 남성이 있는 쪽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어, 어…….”
대머리 남성의 반짝거리는 정수리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지, 대머리 남성이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측정기를 어색하게 가리키며 덧붙였다.
“아, 아니. 이게……. 측정기가 고장이 나서…….”
“측정기 고장?”
둘 사이에 불쑥 난입한 건 지원을 하러 온 협회 직원이었다.
옆에 있던 후임이 협회 직원을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선배도 일단 각성자 아니에요?”
“내가 확인해보지.”
후임이 하는 말이 뭘 뜻하는지 파악한 협회 직원이 측정기를 손에 집어 들었다.
사냥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각성자이긴 하니 측정기의 고장 여부를 알 수 있을 터.
협회 직원이 측정기의 수정구에 손바닥을 올리자 은은한 녹색빛이 흘러나왔다.
측정기의 수정구는 대상이 에테르와 감응하는 정도에 반응을 보인다.
더 폭넓게 정의하자면, 에테르를 포함해 ‘이계’의 기운에 성질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수정구의 표면은 기본적으로탁한 흰색인데, 대상의 감응 레벨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색깔을 바꿔간다.
미각성자는 당연히 감응 레벨이 0이니 수정구의 색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협회 직원에 반응한 수정구의 색깔은 녹색. C급이라는 의미.
요지는.
“뭐야, 멀쩡하네.”
“…….”
협회 직원이 보라는 듯이 측정기를 대머리 남성에게 내밀었다.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그게…….”
“정 미련이 남으시면 다시 수정구에 손 올리세요. 그게 아니면.”
직원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다음 분들이 기다리고 계시니 그냥 순응하고 조용히 돌아가 주시죠.”
“…….”
대머리 남성은 더 이상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니, 억지를 부리려면 얼마든지 부릴 수야 있다.
다만, 앞에서 눈을 번들거리고 있는 이 협회 직원도 직원이지만…….
슥-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윽…….”
귀신같은 인상을 한 백발 남자가 조용히 그를 쏘아보고 있었으니까.
정말로, 진심으로.
여기서 더 난동을 피웠다가는 이 남자에게 좋지 않은 꼴을 당할 것 같았다.
“에잉…….”
순식간에 태세가 바뀐 대머리 남성은 소심하게 중얼거린 뒤 거의 도망치듯이 검사실을 빠져나갔다.
사소한 소란이 있었지만 아무튼 무사히 대성의 차례가 왔다.
협회 직원이 대머리 남성을 대신하여 대성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불미스런 일이 벌어진 점에 대하여 사죄드립니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예.”
대성은 짧게 대답하고는 검사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스쳐 가는 대성의 몸을, 협회 직원이 고개를 숙인 채 한쪽 눈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조금 궁금해졌는데 결과만 보고 갈까?’
숱한 각성자를 보고 온 그조차도 일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풍채.
방금 그 대머리 남성이 왜 저 남자를 보자마자 어린애처럼 겁을 집어먹었는지 이해가 가기도 했다.
과연 저 남자는 어떤 등급이 나올까. 그런 순수한 호기심이 들었으나,
“와, 선배. 우리도 저분 결과만 확인하고 가면 안 돼요?”
“음, 안 돼.”
직원인 자신들이 검사실 앞에 가만히 서서 결과를 기다리는 장면은 뭔가 이상하지 않겠는가.
궁금증을 삼킨 협회 직원이 단호하게 자리를 벗어나자 후임이 시무룩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뭐, 그냥 벌크업 열심히 한 미각성자일 수도 있지.’
생각해보니 딱히 새삼스레 호기심을 가질 일도 아니지 않은가.
협회 직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일선에 복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몰랐다.
불과 2분도 지나지 않아, 그 백발 남자의 차례에서 유례없는 빅 이벤트가 벌어지리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