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033
항상 궁금했었다.
지옥에서마저 죽은 영혼은 과연 어디로 가는지.
머지않은 날, 답을 얻었다.
지옥에서 죽은 영혼은 끝없는 무(無)의 세계로 떠난다.
그곳엔 어떤 희로애락도 없다. 죽음과 삶의 경계조차 무색하고, 시공간의 개념조차 모호한 새까만 심해의 밑바닥 같은 곳.
그런 곳임에도, 지명은 존재한다.
-판데모니움이라고 합니다.
복마전(伏魔殿).
밑바닥 중의 밑바닥 차원이라 할 수 있는 지옥에서마저 추방된 모든 영혼이 집결하는 곳.
업화대검에 깃든 염왕은 그렇게 전해왔다.
“판데모니움?”
익숙한 단어였다.
[판데모니움의 마수들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합니다!]
[판데모니움의 마수들이 흑암의 벽을 두드리며 여기서 꺼내달라고 절대자께 간청합니다!]
지옥에 잔류한 마수들 전부가 갇혀 있다던 공간의 지명이었다.
마수들은 판데모니움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처절한 기색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부디 자기들을 돌아봐 달라는 듯이.
대성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계속 얘기해봐.”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저는 지금도 판데모니움으로 전락하지 않고 업화대검 안에 깃들어 왔습니다.
300년 이상 오직 한 명에게만 사랑을 받아온 재보는, 그때부터 생물과 같은 자아를 가지고 소유자의 영령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죽은 영령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판데모니움으로 떠날 것인가, 아니면 재보에 깃들어 제2의 삶을 살아볼 것인가.
염왕은 당연히 후자를 택했다.
이미 지옥의 13주 중 하나였던 그는 죽으면 판데모니움에 갇힐 운명.
그 무의 세계에서 의미 없는 영원을 보내느니, 차라리 검에 깃드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주군께서 지구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돌아가신 날부터, 저는 홀로 남아 세월의 풍파 앞에서 닳아 없어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날 원망하나?”
-아닙니다. 그것이 주군의 선택이라면, 이 또한 저의 운명이라고 순응하면 그만이지요.
염왕에게 있어서 대성은 지옥의 권좌보다도 위에 있던 절대적 존재인 마신을 쓰러뜨린 존재였다.
최강을 쓰러뜨린다. 그것은 무구로서 누릴 수 있는 극상의 영광인 셈.
그런 영광을 가져다준 대성을 감히 어찌 원망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 뒤가 문제였지만요.
“무슨?”
-어느 날, 정체불명의 외적이 차원의 경계를 뚫고 나타났습니다.
대충 맥락을 알 것 같았다.
천상의 존재라고 시스템이 명명한 이들. 그들이 바로 지금 염왕이 언급한 외적일 터.
-군주의 공백에 마수들이 힘을 잃은 틈을 타서, 외적들은 순식간에 지옥의 시공간을 봉인하고 마수들을 판데모니움으로 추방했습니다.
은색 갑옷을 입고 하얀 날개를 휘날리는 천상의 군단들이 지옥을 휩쓸었다.
-저는 유린당하는 마수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옥의 대지를 아득히 수놓았던 마수들은 그날 모조리 죽임당해 판데모니움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텅 빈 지옥의 시공간을, 천상의 존재들이 봉인하였다.
-이내 거대하고 새하얀 뱀이 저를 삼켰습니다. 저는 온몸이 사슬에 꽁꽁 묶인 채, 그 뱀의 위장 속에서 자아마저 빼앗겨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방금 대성이 죽인 수호사였다.
-그래도 천만다행히 주군께서 저를 해방해주셨으니……. 외람된 질문이오나, 주군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게 아니었는지?
“네 도움이 필요하다. 자세한 건 때가 되면 알 테지만.”
-주군께서 다시금 저를 찾아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염왕이 에고(Ego)가 아니라 생물로써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머리를 조아리고 있을 것이다.
업화대검을 얻었으니 이 이상 여기에 체류할 이유는 없어졌다.
저것만 빼고.
“…….”
이번에도 있다.
보상으로 주어진 ‘수호사의 피’ 외에, 금색으로 빛나는 광휘가.
얼마 전 영혼수감소를 얻었을 때 보았던 것과 똑같은 종류임을 단박에 직감했다.
“염왕.”
-예.
“저게 뭔지 아나?”
대성은 육중한 대검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려 광휘를 가리켰다.
-저건……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왠지 낯설지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낯설지 않은 기운?”
-외적들에게서 느꼈던 것과 똑같은 기운입니다.
“흐음.”
-주군, 뭔지는 몰라도 일단…….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염왕의 조언이 채 끝나기도 전.
팡-!
광휘가 폭사하고, 금빛의 입자들이 대성의 왼쪽 손등에 응집됐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 보았던 것과 같은 디자인의 문양이 새겨졌다.
여전히 어딘가 중심부가 텅 빈 것 같은, ‘일부분’으로 보였지만.
-주군?
“시스템은 고생길 끝에 날 엿 먹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주군이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퀘스트 끝에 시스템이 뭔가를 제공했고, 또 그게 수집을 하는 형태.
신중해지는 건 일단 수집을 끝마친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전에 입장 ……있는 ……한을 획득하셨습니다. 2 / 3]
금색의 띠가둘린 테두리 속 텍스트는 저번과 비교해 몇 음절이 더 추가된 상태였다.
“어딘가에 입장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했다고 하는 모양이군.”
대성이 손등에 그려진 문양을 이리저리 둘러볼 때였다.
[해당 지역에서 퇴장해 판테온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판테온에서 퇴장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
지금까지는 바로 판테온에서 퇴장해 현실로 복귀했었다.
하지만.
“판테온으로 돌아가자.”
이번에 대성은 그러지 않았다.
업화대검 말고도 아직 얻어야 할 아이템이 남아 있었으니.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다.
[판테온으로 복귀합니다.]
***
D-7
조만간 있을 라이센스 시험에 임하는 사냥꾼 지망생 중엔 두 가지 부류가 존재한다.
합격선만 넘어서고자 하는 자.
그리고 합격선은 물론, 그 이상의 상위권 성적을 노리는 자.
비율은 후자가 압도적.
사냥꾼이 되고자 마음먹은 이들의 태반은 굉장히 오만하고 프라이드가 높다.
본인들은 선택받은 자들이라는 자부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시험’이나 ‘경쟁’에 있어서 다른 이들을 찍어 누르고 최고를 노리는 건 당연지사일 터.
시험을 주관하는 협회도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상위권의 성적을 거둔 이들에게는 그만한 혜택을 제공한다.
이를테면 최종 성적 톱5에 든 응시생에겐 추후 별도의 등급 재심사 없이 즉석에서 바로 최대 A급까지 등급을 높여준다든가.
“흡-!”
이것이 신초영이 피땀을 흘려가며 훈련에 매진하는 이유였다.
랭크 업.
당연하지만 게이트엔 입장 가능한 최대 등급의 제한이 있다.
그러니 등급이 높을수록 더 많은 게이트에 도전할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종료까지 10분 남았습니다.>
<남은 석판: 10개>
매처럼 부릅뜬 신초영의 예리한 눈이 빠르게 사위를 훑었다.
그때.
슥-
그녀의 후방에서 바닥이 갈라지며 표면이 반질반질한 검은색 석판이 튀어 올라왔다.
바닥이 열리는 소리도, 그 안쪽에서 석판이 올라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완벽한 무음.
시야의 사각에 있었기에 상식적으로는 눈치를 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파앙-!
그러나 오러를 확장해 기감을 넓힌 신초영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을 줄 알았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서걱-!
오러가 휘감긴 도검이 단단한 석판을 두부 자르듯 갈라냈다.
타깃의 위치를 파악하는 감각, 그에 반응하는 순발력,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까지.
여기까지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하지만.
카악-!
석판을 잘라내기 무섭게 측면에서 스프링처럼 튀어나온 몬스터 한 마리가 신초영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큭……!”
프로그램이 증강현실로 구현시킨 가상의 몬스터였기에 물리적인 상처는 입지 않았다.
하지만 신경 회로로 전달되는 통각은 놀라우리만치 생생했다.
삐익-!
대미지를 입은 순간 훈련실 내부가 붉게 물들며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그것에 이어 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거기까지 하지. 프로그램 종료.>
“네? 아, 자, 잠깐……!”
신초영이 다급히 외치며 제지를 가했으나 야속하게도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은 남자의 명령을 따랐다.
스르륵-
녹음이 우거진 밀림의 풍경이 흐려지더니 새하얀 훈련실의 정경이 드러났다.
땡그랑-!
신초영이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도검을 내팽개치며 위를 보았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차갑게 그녀를 내려다보는 남자.
그녀의 담당 교관이자, <소울> 클랜의 단장인 황준영이었다.
스피커 너머로 황준영의 엄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올라와라. 얘기 좀 하자.>
***
[퀘스트가 완료되어 구현화 작업이 진척을 보입니다!]
[구현화 완료!]
***
훈련실을 빠져나오자 황준영이 스포츠 드링크를 건넸다.
“더 할 수 있었어요. 충분히.”
쫙 달라붙는 훈련용 슈트를 입은 신초영이 땀을 뻘뻘 흘리며 스포츠 드링크를 건네받았다.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마시기 전에 그녀가 물었다.
“근데 왜 종료하셨어요?”
“무리하는 게 보이니까.”
“무리하면 좋은 거 아닌가요? 사냥꾼 몸은 튼튼하니 괜찮다. 그러니 무리를 해서라도 원하는 걸 쟁취해라. 단장님이 저한테 항상 하시던 말씀이잖아요.”
“그랬지. 근데 그건 육체적인 무리를 말하는 거고. 넌-”
“전 정신적으로도 무리하지 않았어요. 제 몸은 제가 잘 알아요.”
“기계보다 잘 알까.”
황준영이 슬그머니 옆으로 눈짓하자 신초영이 그 시선을 따라갔다.
시선 끝에는 복잡한 설비로 이뤄진 계기판이 있었는데, 스크린에 표시된 선에 굴곡이 가득했다.
트레이닝을 하는 훈련생의 신체 및 정신 상태를 나타내는 보조 장치였다.
“이게 방금 네 멘탈이다.”
“이게 무슨 뜻인데요?”
“지금 이 미친놈 널뛰기하는 것처럼 치솟는 굴곡들만 봐도 감이 잡히지 않나?”
“으음…….”
“잡념이 많고 그 잡념이 이성을 갉아먹어. 그렇게 지나치게 감정적인 상태가 되니 일을 그르칠 수밖에.”
신초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계가 그렇다는데 본인이 무슨 반박을 할 수 있으랴.
“석판 근처에 몬스터가 있다는 건 몰랐나 보군.”
“프로그램에 몬스터도 포함되었다는 말은 없었잖아요. 얼마나 더 빠르고 정확하게 석판을 없애느냐, 이게 목적 아니었나요?”
“맞아, 내가 널 속인 거야. 근데 그거랑 별개로 그때 넓혔던 오러에 네가 제대로 집중했으면, 거기에 몬스터가 있다는 것도 쉽게 눈치채지 않았을까?”
“…….”
“집중하지 않았군.”
정곡을 찔린 신초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대로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 톱5는커녕, 그 근처에도.”
“그럼…… 안 되죠.”
“물론 안 되지. 너는 너대로 자존심 꺾이고 좌절할 테고, 널 대표하는 우리는 우리대로 망신이니까.”
드르륵!
황준영이 의자 두 개를 끌어왔다. 하나는 자기 앞에. 하나는 신초영의 앞에.
훈련실을 나올 때만 해도 의기양양했던 신초영이 기가 잔뜩 눌려 있었다.
시무룩해진 그녀가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황준영이 신초영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까 한 번도 네게 물어본 적이 없었구나. 왜 그렇게 필사적인 거지? 아니, 뭐. 사람이 필사적이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넌 너무 무리하니까.”
“라이센스 시험에서 전 꼭, 제가 원하는 성적에 들어야 해요.”
“톱5 안?”
“네.”
“랭크 업을 노리는 건가? 뭐, A급이 되면 입장 가능한 게이트도 많아지니 수입이나 이름값은 올라가겠지만-”
“돈과 명예 따위를 좇자고 이러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뭐지? 황준영이 눈빛으로만 그렇게 묻자, 신초영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잠시 침묵했다.
가슴에 품은 결의를, 그것도 지금껏 그 누구한테도 말해주지 않았던 속내를 털어놓을 땐.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법.
“전…….”
그리고 그 준비를 끝내고 고개를 든 신초영의 얼굴엔 서슬 퍼런 비장감이 가득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몬스터를 모조리 쳐죽여버리고 싶어요.”
***
[퀘스트가 완료되어 구현화 작업이 진척을 보입니다!]
[구현화 작업 완료!]
***
D-5
두꺼운 개폐식 철문을 세 개나 통과한 끝에야 목적지인 격리실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지잉-
<홍마> 클랜의 단장 이석우는 지문 인식 장치에 손바닥을 갖다 댄 뒤 격리실의 문을 열었다.
“어우!”
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비린내가 장난이 아니었다.
찌걱- 찌걱-
“이런 곳에서 몇 날 며칠을 지내느니 나 같으면 그냥 자살하겠다.”
찌걱- 찌걱-
그곳엔 한 인간이 등을 보인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찌걱-
“미안하다, 진철아. 다음엔 격리실 안에도 환풍기를 놓든가 해야지.”
찌걱-
“진철아. 형 말 들려?”
그 순간.
휙-!
몸을 웅크리던 인간, 정진철이 고개를 돌렸다.
크르르-
들끓어 오르는 짐승의 울음소리.
‘인간’ 정친절의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울음소리였다.
아니, 인간이라는 표현도 지금으로선 어폐가 있었다.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뻗은 송곳니엔 살점과 핏자국들이 잔뜩 들러붙었고, 핏대 가득한 눈동자는 독사처럼 동공이 가늘었다.
“잘 지냈구나.”
이석우는 웃었다.
“밥도 잘 먹고…….”
정진철의 손에 들린 고깃덩어리들.
“우리가 신경 써준 보람이 있어.”
그리고 격리실을 잔뜩 메운, 뜯어먹힌 짐승들의 걸레짝 같은 시체들.
이 지독한 비린내의 정체였다.
이 모든 것에, 이석우는 감사하면서 웃고 있었다.
“많이 먹어. 하루 이틀은 더 많이 먹고 푹 쉬어야 약효가 진정되지.”
크르르-
이석우의 눈에 정진철은 인간이 아닌, 동족을 포식하는 몬스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일시적인 모습이다.
방금 말한 것처럼 당분간 포식에 집중해 안정을 취하면, 저 괴물 같은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완벽한 융합.
<홍마> 클랜의 비전이 결실을 보는 순간일 터.
“조만간 있을 라이센스 시험의 주인공은 네가 될 거다, 진철아.”
***
모두가 각자의 이상을 품에 안고 정진하는 사이, 시간이 흘렀다.
D-3
[퀘스트가 완료되어 구현화 작업이 진척을 보입니다!]
[구현화 작업 완료!]
D-1
흐르고 흘러…….
[퀘스트가 완료되어 구현화 작업이 진척을 보입니다!]
[구현화 작업 완료!]
그렇게 열흘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