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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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상반기 시험엔 사상 전례 없는 숫자의 응시생이 몰렸다.
그리고 그 대규모 인원이 게이트에 입장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얘기지만, 먼저 입장한 응시생들은 별도의 부저가 울리기 전까지는 공평성을 위해 눈에 띄는 큰 행위가 금지되어 있다.
무기를 만든다거나, 주변 지형지물을 탐색한다거나.
그러나 다행히도.
‘아무 말도 없군.’
나뭇가지를 꺾는 정도의 행동은 별다른 제재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 자리에 드러눕거나 하품을 하는 것과 비슷한 선상으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대성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핏 보기엔 먼저 들어온 놈들이 그나마 유리해 보이지만…….’
별도의 행동이 금지되어 있기는 해도, 상대방보다 먼저 지리적 요인을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이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 이점만큼 단점도 무시할 게 못 됐다.
‘오히려 먼저 들어온 놈들이 불리할 수도 있겠군. 이런 기후랑 환경이라면…….’
바로 이 푹푹 찌는 습기.
가만히 있어도 체내의 수분이 쥐어짜이듯 몸 밖으로 배출된다.
밀림이라는 필드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탈수의 지름길이다.
‘공평성은 무슨. 잘도 지어내는군.’
누가 봐도 공평하지 않았으나, 이에 대한 주최 측의 변명도 쉽게 예상이 되었다.
-실전에선 어떤 변수가 작용할지 모릅니다. 사냥꾼이라면 아무리 혹독하고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견뎌내야죠.
이렇게 말할 게 뻔하다.
사냥꾼이라면 무릇 인내심을 가지고, 갈증도 견뎌낼 것.
틀린 말은 아니다.
‘각기 다른 환경에 얼마나 잘 적응하는지 본다고 했었지.’
이번이 열대우림이라면 다음 층에선 서릿발이 치는 혹한의 지대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보다 더한 열대야가 펼쳐질 수도 있을 터.
‘그래, 적응해주마.’
다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요건이 갖춰져 있음에도 그 비위를 일일이 맞춰줄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딱 시험 개시 전까지만 말이지.’
그에게는 그 누구의 손에도 없는, 아니, 손에 넣지조차 못하는 특수한 아이템이 있으니까.
[아이템 정보]
이름 : 수호사의 피
분류 : 소비
‘천상의 수호사, 오르키엘의 뱀이 지니고 있던 혈액입니다. 복용할 시 이틀 동안 모든 상태 이상과 환경 변화에 면역을 지니게 됩니다.’
바로 얼마 전 구현화 퀘스트에서 수호사를 쓰러뜨리고 얻은 추가 보상이었다.
***
“시불탱. 이러다 시험 시작하기도 전에 말라 뒈지겠네.”
아직 공이 울리기도 전이건만, 게이트 안에선 앓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특히 다른 이들과 비교해 일찍 게이트로 입장한 응시생들이 그러했다.
“목이 바짝 말라서 침도 제대로 삼킬 수가 없어.”
앞서 감독관이 안내했던 대로 그들은 현재 각기 다른 위치에서 대기 중이었지만,
“벌써부터 이러면 나중엔 어떡하라는 거야.”
“망할 놈들! 아직 프로 사냥꾼도 아닌 응시생들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이거!”
“이딴 빌어먹을 정글에 뭐 어디 물 마실 곳이라도 있을까…….”
보다시피 터져 나오는 불만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
습기로 가득 찬 몸에선 땀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단순히 더운 것과 습한 건 다르다. 굳이 따지자면 습한 쪽이 더 최악이라 할 수 있겠다.
꿉꿉하고, 그만큼 불쾌지수가 상한선에 치달으니까.
하지만 그런 인간 군상 속에서도 딱 두 명만은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
‘최대한 머리를 비우자. 스트레스 받지 마. 열이 뻗치면 오히려 기력만 더 소모돼.’
한 명은 신초영.
‘존나 편하네.’
나머지 한 명은 정진철이었다.
신초영은 이미 극한의 요건 속에서 최대 한도의 저력을 내는 훈련을 몇 차례나 받았다.
<소울>에서 주관해준 지옥 훈련이 달콤한 열매를 맺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정진철은,
‘이거 진짜 약빨 개쩔잖아? 고마워요, 석우 형!’
훈련도 훈련이지만 그걸 가볍게 웃돌고도 남을 ‘무언가’를 받고 온 참이었다.
어쨌든 둘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이 기나긴 대기 시간을 버텨나가고 있었다.
“이러다 미라 되겠다, 이 사이코패스 새끼들아!”
“물! 누가 물 좀…….”
반면, 그렇지 못한 이들은 본격적인 시작도 전에 탈수를 참지 못하고 공황 상태에 돌입했다.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
모두가 그 진리를 절감하며 고행을 이어가던 무렵.
삑-!
<응시생 전원 입장.>
<지금부터 1층의 클리어 조건을 공개하겠습니다.>
띵-
모두의 손목에 부착된 알림판에서 한 줄의 글귀가 떠올랐다.
<늪지대 오크 20마리를 사냥하십시오.>
***
“시작됐군.”
눈을 감고 조용히 앞으로 할 일을 정리하고 있었던 대성이 행동을 개시했다.
행동이라고 해봤자,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부동자세를 취했을 뿐이지만.
대신 그는 머릿속으로 시스템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소비 아이템 <수호사의 피>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사용.’
복용하는 형태의 소비 아이템은 이렇게 의식만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시험이 시작되고 나서야 아이템을 사용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효과의 지속 시간을 불필요한 대기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소비 아이템, <수호사의 피> 효과가 적용됩니다.]
[지금부터 48시간 동안 모든 상태 이상과 환경 요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목구멍에 비린 철분 맛이 감도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화아악-
막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대성은 지금 자신의 신체 윤곽을 따라 투명한 막이 생성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막이 외부의 모든 것을 차단시켜주었다.
살인적인 습기와 더위,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빛 등.
이 막 속에 있는 동안은 그저 산뜻한 봄바람을 맞는 기분이었다.
‘약간 있었던 갈증도 사라졌군.’
즉, 완전한 리셋(Reset).
모두가 탈진 상태에서 시험을 개시할 때 대성 혼자서만 꽃길을 누비게 된 셈이다.
자잘한 문제는 해결됐으니 이제는 클리어 조건에 집중할 때였다.
‘오크 20마리라.’
그 많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필드 속에서, 각자의 할당량이 20마리밖에 안 된다는 건.
‘직접 찾아서 죽이라는 거군.’
그가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산속에서 구현화 퀘스트에만 매달린 건 아니다.
퀘스트 외에도 시험의 양상, 그리고 도감에 기록된 몬스터의 목록 독파까지.
성찬호에게서 받은 모든 자료를 토대로, 면밀한 분석 또한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분석 끝에서 알 수 있었던 오크들의 습성은 이렇다.
‘다른 오크들이랑 달리 주로 늪지대에서 서식하는 녀석들은 전면전을 선호하지 않는다.’
놈들의 특징은 간단했다.
‘먹잇감이 사정 범위에 올 때까지 숨어서 기다린다.’
이것이 아까부터 놈들이 코빼기도 안 비치는 이유였다.
‘수풀이나 나무, 혹은 늪 속에서 위장 중이거나…….’
같은 오크라도 습성이 너무나도 달라 마이너 취급을 받는 늪지대 오크다.
그러나 역시 종의 근원에서 비롯된 본능은 크게 다르지 않다.
‘놈들은 군집을 이루어 은신처에 모여든다.’
바로 집단이 형성된 은신처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런 정글 속에서 은신처를 만들려면 상당히 교묘한 위장을 거쳐야 할 터.
그리고 그 위장은 마치 카멜레온이 보호색을 친 것처럼 눈에 쉽게 띄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몇몇 응시생도 알고 있는 상식.
하지만 지식으로 잘 아는 것과, 교묘하게 숨겨진 은신처의 위치를 잘 찾아내는 건 별개의 문제다.
물론,
‘어려울 게 전혀 없군.’
대성은 그걸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지만.
“사령 병사 다섯 마리 소환.”
왜냐하면, 그에겐 후각이 아주 뛰어난 ‘개’들이 있었으니까.
그어어-
대성의 주변으로 암흑의 물결이 퍼지더니 이내 다섯 마리의 사령 병사가 일제히 소환되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의 냄새를 쫓아. 그리고 날 안내해라.”
마약 탐지견이 마약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것처럼, 이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지닌 영혼의 냄새를 추적한다.
“잘 들어. 가능한 ‘개별’의 냄새가 아닌 ‘군집’된 것들의 냄새를 맡아야 한다.”
사령 병사들은 오크라는 개념을 모르니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어어-!
이때, 벌써 입질이 오는 게 있었는지 사령 병사들이 달그락거리며 수풀을 헤쳐 나갔다.
대성은 녀석들의 뒤를 느긋이 따라갈 뿐.
‘영리한 개새끼들이 따로 없군.’
그것이 대성이 녀석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시험장 바깥쪽에 별도로 마련된 공동에는 수많은 스크린이 설치된 상태였다.
다름 아닌 게이트 내부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해주는 모니터였다.
협회는 사냥꾼과 관련된 종사자들에게만 특별히 이 라이브를 관람하게 해주는 편의를 제공했다.
즉, 이 무수한 관객 대다수는 같은 사냥꾼이거나 클랜에서 파견된 영업 인사들이라는 말.
그중에서도 어느 중소 규모 클랜의 팀장급 인사가 작게 경악했다.
“아니, 저게 저런……. 기다려봐. 오러 테크닉으로 저런 것도 가능했던가?”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경악 중인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클랜의 규모를 막론하고, 지금 이 라이브를 보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충격의 도가니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 좀비 같은 거 소환하지 않았어?”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건가?”
“와 씨, 무슨. 듣도 보도 못한 기술을 사용하네.”
당연한 반응이었다.
오러 테크닉(Aura technique).
사냥꾼들은 각성한 오러를 운용 및 응용하여 초능력과 같은 기술을 발휘할 수 있다.
오러의 성질을 변화해 손에서 불을 뿜는다거나, 육체를 강화한다거나.
그런데.
“104번 응시생인가?”
“104번…… 104번……. 아, 여기 있네. 이름이 한대성이래.”
“쟤는 혼자서 판타지 소설을 찍는구먼. 이건 시험이고 뭐고 떠나서 해외 토픽감이다, 야.”
104번 응시생, 대성은 이상한 좀비 같은 몬스터를 소환했다.
사냥꾼들은 원한다면 벽을 수직으로 탈 수도 있다.
아니면 공중부양에 가까운 기예를 펼치거나.
하지만 그것도 결국엔 발현자의 신체에서 운용된 오러가 근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저렇게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몬스터를 소환하는 건,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듣도 보도 못한 테크닉이었다.
“이번 시험은 신초영이랑 정진철이 씹어 먹을 줄 알았는데.”
“경쟁자가 몰리다 보니 웬 돌연변이가 막 튀어나오네.”
“여보세요? 예, 팀장님! 저…… 죄송한데 직접 현장에 오셔서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아니, 이게 말로는 설명이 잘…….”
“합격 여부는 둘째 치고 일단 104번 영입 목록에 넣자. 쟤 저거 놓치면 안 돼, 절대로.”
아직 시험 시작한 지 30분도 안 됐건만 현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목적은 거기서 거기였다.
올 상반기 시험의 수석임이 거의 확정된 신초영과 정진철의 활약상을 구경하거나,
혹은 다른 떡잎들을 물색해서 영입 제안을 보내거나.
그런데 후자라면 몰라도 전자는 이 순간 완전히 묻혀버렸다.
“미쳤다. 후덥지근해서 죽을 지경인데도 땀 한 방울 안 흘리네.”
“독종이야, 독종.”
왜냐하면, 그 둘을 가볍게 묻어버릴 만한 다크호스가 등장했으니까!
‘예상했던 대로다.’
그렇게 모두가 104번 응시생에게 열광하던 가운데.
현장에 남아 스크리닝을 하던 황준영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틀림없어. 아까 봤던 그 백발 녀석이야.’
건물 입구에서 짙은 존재감을 드러내며 등장했음에도, 그때까진 그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직 황준영만이.
백발의 남성, 대성을 경계했다.
그리고…….
‘누군가를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게 몇 년 만인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때 보았던 대성의 육체에서 뻗어 나오는 ‘기운’은,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너무나도 커다랗고 이질적이라, 어중간한 각성자는 느끼지도 못할 강기(罡氣).
더 경악스러웠던 건.
‘이런 나조차도 고작 빙산의 일각밖에 엿보지 못했다는 거지.’
그 모든 위압감을 오롯이 파악해내기엔, 그로서도 그릇이 따라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번 시험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정진철이 될 줄 알았건만……. 아니야. 저놈에 비하면 녀석은 발톱의 때만도 못해.’
도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이 튀어나온 걸까.
두근, 두근.
황준영은 격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써야만 했다.
한편.
대성에게 흥분과 열광이 아닌 다른 시선을 보내는 또 다른 이가 관중들 틈에 앉아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저건 그 새끼군.’
이석우였다.
그는 유유히 다리를 꼰 채 104번을 비춘 카메라를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했다.
-피, 피가 잔뜩 묻은 새, 새하얀 백발에 키가 190에 달하는 거구였습니다.
-주, 죽어간 저희 형님들, 그, 그리고 조직원이 흔적도 없이 그놈 손가락에 빨려 들어가서-
얼마 전 박살이 난 신흥동파의 떨거지가 전한 말이었다.
마침 딱 104번이 190㎝에 가까운 거구에다 백발이었다.
무엇보다.
‘괴상망측한 기술을 쓰는군.’
거의 마법의 경지에 가까운 기교를 부린다는 점.
백발의 거구가 기묘하기 짝이 없는 오러 테크닉을 구사한다.
이게 과연 그냥 우연일까?
그럴 리가.
“한마디로 저 새끼가 우리 거래처 고객들을 개박살 냈단 말이지.”
이석우는 웃었다.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
필드 안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는 사실 고기 인형에 가깝다.
신경계를 차단해 의식불명이 된 몬스터에게 제어 장치를 심어, 외부에서 조작을 가하는 가짜들.
하지만 지금 이 필드가 그런 것처럼, 이 고기 인형에 불과한 몬스터들도 모양새가 꽤 그럴싸했다.
제어 장치가 있다 뿐이지, 행동거지, 습성 등 모든 요소가 실제의 오크와 99% 일치했다.
그렇기에 필드 내부에 속속히 숨어 있는 녀석들은, 실제 늪지대 오크라면 진짜로 했을 법한 생태를 보였다.
이를테면, 그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곳에 토굴을 판다든가.
취익-
취이익-!
그리고 그 좁은 토굴 속에 옹기종기 모인 녀석들은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정 범위 안에 응시생, 즉 먹잇감이 걸려들기를.
바스락- 부스럭-
지금 이 순간에도 토굴 근처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그리고 기척들.
늪지대 오크는 다른 종족들과 비교해도 오감이 매우 뛰어난 편이다.
그래서 토굴 안에 틀어박혀 있음에도 녀석들의 눈과 귀에는 생생히 전달되고 있었다.
먹잇감의 숫자와 거리에 관한 정보들이.
바스락-!
그때였다.
취익-?
지금까지 들려온 발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기척들.
스륵-
첫 번째 먹잇감이 근접했음을 감지한 어떤 녀석이 쇠도끼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탁-
그대로 토굴 밖으로 튀어 나가기 직전, 옆에 있던 놈이 녀석을 말렸다.
절레절레.
아직은 때가 아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취익-
쇠도끼를 쥔 녀석은 그 말에 순순히 따랐다.
확실히, 한 번의 기습으로 끝내기엔 어중간한 거리감이니.
바스락, 부스럭-
그렇게 몇 번의 기척이 토굴 속에 있는 오크들의 오감을 자극했고.
취익-?
느닷없이 침묵이 흘렀다.
아니, 뭔가 이상했다. 먹잇감이 발걸음을 멈췄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기척 그 자체가 사라졌다.
잘 다가오던 먹잇감이 갑자기 하늘로 솟은 느낌이라고 할까.
취익……?
토굴 속의 오크들이 갑작스레 급변한 기류에 당황하던 그때.
쾅-!
일직선 형태를 한 토굴의 허리 부분이 무너졌다.
쿠르릉-!
두꺼운 토굴의 천장이 무너지더니, 이내 커다란 신형 하나가 안쪽으로 떨어졌다.
취익!
취익-?!
입구 쪽에 몰려 있던 오크들이 후편에서 벌어진 소란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성가시게 땅속에 토굴을 파놨군. 개미 같은 새끼들.”
나뭇가지를 쥔 대성이 흙먼지를 비집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취익-!
취익-!!
전혀 예상치 못한 먹잇감과의 전면전에 늪지대 오크들이 눈에 띄게 당황하던 가운데.
대성이 태연자약하게 입으로 뭔가를 웅얼거렸다.
“한 놈, 두 놈, 세 놈…… 뭐. 눈대중으로 봐도 스무 마리는 족히 넘어가겠군.”
대성이 나뭇가지를 쥐었다.
나뭇가지로 ‘위장한’ 업화대검을 말이다.
-주군이시여, 명령을 내리소서.
대검에 깃든 염왕의 사념이 정중한 어조로 그리 말했다.
화륵-
업화대검의 끝에서 불씨가 고요히 타오름과 동시에, 대성이 짤막하게 명령했다.
“전부 태워버려.”
먹잇감이 잔학무도한 포식자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