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36화 (36/180)

# 36

036

염왕의 권능이 깃든 업화대검의 불꽃은 생자와 망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을 태웠다.

원혼마저 태우는 지옥의 불.

그래서 대검이 뿜어내는 불꽃의 이름을 업화(業火)라고 불렀다.

[업화대검의 고유 성능1 ‘업화’가 발동되었습니다.]

[‘업화’ 슬롯이 활성화되어 특수 스킬 발동이 가능합니다.]

화륵-!

대검에 맺힌 새빨간 불꽃의 맹위가 한층 더 사나워졌다.

그저 칼날의 윤곽을 따라 불이 타올랐을 뿐임에도 대기의 수분이 순식간에 말라붙기 시작했다.

취익-!

취익……!

습기를 걷어내고 파멸적인 고열이 좁은 토굴 안을 가득 메우자 오크들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놈들 입장에선 모닥불 속에 타들어가는 땔감이 된 심정일 터.

“자비를 베풀어주지.”

박박-!

살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한껏 맛보는 중인 오크들이 토굴의 입구를 긁어댔다.

마치 빨리 내보내 달라는 것처럼.

안쓰럽게까지 보이는 놈들의 발악을 눈에 담으며, 대성이 머리 위로 대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고통 없이 보내주는 자비를.”

콰직-!

그리고 대검의 끝을 토굴 바닥에 깊게 찔러 넣은 순간.

칼날이 박힌 진원지를 중심으로 서서히 지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더니,

[‘업화’ 모드의 첫 번째 특수 스킬이 발동됩니다.]

[특수 스킬 : <격노>]

찰나의 순간 소리가 사라지고,

투콰- 앙!

시전자의 전방위에서 땅을 뚫고 용솟음친 불꽃의 회오리가 대지를 할퀴었다.

만물을 태워버리는 불의 폭풍 아래, 좁디좁은 토굴은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

불과 몇 분 전.

‘오러를 넓게 펼쳐. 집중하는 걸 그만두지 마. 움직이는 다리가 게을러져서는 안 돼.’

이 세 가지만 기억하자.

탁탁-!

울창한 밀림 사이를 바람처럼 가로지르며 신초영은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조였다.

그녀를 중심으로, 유심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지도 못할 희미한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둥글게 오러를 펼쳐 기감을 확장한 것이다.

최대 반경은 약 100m.

‘북서쪽에 한 마리 발견.’

그 범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이 생생했다.

그러니 저 멀리서 나무 꼭대기에 숨어 먹잇감을 노리는 오크의 기척을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잉-

오러와 공명한 신초영의 검은 안광이 푸른빛을 띠었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오는 세상의 풍경이 마치 방사선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흑백으로 변했다.

바스락-

나무 꼭대기에 매복 중인 오크의 움직임.

“흡-!”

신초영은 땅을 박차며 질주하던 기세 그대로 날렵하게 다리를 휘둘러 나무기둥을 가격했다.

쾅-!

취익-!

막대한 각력이 나무기둥을 빠르게 타고 올라 꼭대기까지 뒤흔들었다.

파르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나뭇잎들과 함께, 그곳에 숨어 있던 오크도 땅에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취, 취익-

“이걸로 세 마리째.”

페이스가 좋다.

시험이 시작된 지 얼추 10분이 흘렀다.

거의 3분에 한 마리 꼴로 잡는다는 건데, 잘하면 1시간 내로 1층을 돌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취이익-!

눈앞의 인간과 전면전을 하고 싶지 않았던 오크는 꽁무니를 빼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팡-!

신초영의 신형이 단숨에 10m가량을 훌쩍 쇄도했다.

그렇게 도주 중인 오크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

미리 나뭇가지를 날카롭게 깎아 만든 단검을 녀석의 뒤통수에 꽂아 넣으려던 순간.

팍-!

“어?”

부지불식간에 옆에서 그림자 같은 잔상이 튀어나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오크를 낚아채는 게 아닌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단검을 휘두르려던 신초영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콰과곽-

낙법을 취하며 미끄러지듯 지면에 착지한 그녀가 잔상의 정체를 확인했다.

“다섯 마리.”

정진철이었다.

그의 손에 잡힌 오크는 어느새 목과 몸통이 깔끔히 분리된 상태였다.

‘홍마……!’

<홍마>의 루키를 경계하라는 황준영의 경고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왔다.

더군다나 정진철은 그녀가 다 잡은 사냥감까지 가로챈 상태.

그러니 신초영의 입에서 고운 말이 튀어나올 리가 없다.

“그놈은 내 거였어. 남의 먹잇감이나 가로채고…… 뭐 하는 짓이야?”

“경쟁 중인데 네 거 내 거가 어디 있어? 대가리 빻은 년.”

“내가 다 유인해놓은 거 날로 먹은 주제에 입은 잘 놀리네.”

“그쪽 클랜에서 인성 훈련은 안 시켜주디? 으르렁대지 마. 지금 이 오크처럼 네년 대가리도 몸통에서 떼어내 버리는 수가 있으니.”

둘이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한 발짝만 삐끗하면 사생결단이 터질 듯한 살기가 둘의 눈초리를 뚫고 튀어나왔다.

‘이딴 놈이랑 신경전 벌여봤자 시간 낭비야.’

더러운 똥은 피하는 게 상책.

신초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황준영은 그녀의 스승이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짧은 인연이었으나, 그는 전력을 기울여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런 황준영이 아끼던 루키가 재작년 시험에서 불구가 되었다.

<홍마>의 수작으로 인해.

그런 괴담을 뻔히 들어왔으니 초면인 정진철도 아니꼬울 수밖에.

‘저년 저거 상상 이상으로 싸가지 밥 말아 처먹은 년인데?’

그리고 초면부터 거지 취급당한 정진철의 속도 부글부글 끓어오를 지경이었다.

‘아직 일러.’

아직은 시험에 집중할 때.

고작 분풀이에 정신 팔려서 외양간을 잃는 우를 범할 순 없는 법.

‘대충 다음 층이나 3층에서 저년을 족치자.’

‘차라리 마주치질 말아야지.’

둘이 그렇게 상반된 생각을 품으며 엇갈리던 그때.

투콰- 앙!

“……?!”

“뭐, 뭐야!”

귀를 쩡쩡 울려대는 폭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둘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폭음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마치 서로 약속한 듯 동시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화아악-!

세상의 종말을 연상케 하는 불의 폭풍이 저 멀리서 휘몰아치고 있었으니까.

***

지직- 픽-!

“어, 어어?”

“뭐야. 저거 왜 저래, 갑자기?”

관중석에서 열심히 게이트 내부의 상황을 감상 중이던 구경꾼들이 난색을 보였다.

그들 중 대다수는 104번 응시생, 대성의 동향을 비추는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니터에서 노이즈가 이나 싶더니 픽, 하고 암전이 되는 게 아닌가?

“젠장, 잘 보고 있었는데!”

“그 많고 많은 카메라 중에서 왜 하필 104번 게 뻑이 나냐고!”

“아니, 카메라가 문제가 아니라 104번이 이번에도 또 뭔가 한 거 아니야?”

“와, 근데 장난 아니다. 시작한 지 30분도 안 돼서 오크들이 몰린 장소를 한 번에 찾아내네.”

“처음에 갑자기 웬 좀비 같은 걸 소환하나 싶더니…….”

관중석에서 불만 섞인 야유와 감탄 섞인 소란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사실 100개가 넘는 스크린 중에서 대성을 비추던 5개가량의 카메라만이 문제가 생겼을 뿐, 나머지 95개의 스크린은 아직도 멀쩡히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중 중 그 누구도 다른 응시생들의 상황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한창 신경전을 벌이던 신초영과 정진철에게조차도.

“1층 게이트 A5, B3, B4, B5, C1 카메라 전부 반응이 없습니다!”

“보고 올릴 시간에 빨리 복구나 해! 협회장님까지 지켜보는 마당에 이게 뭔 헛짓거리야!”

“저, 저……. 아예 기기 자체가 망가진 것 같은데요?”

“뭐?”

실제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쪽은 스크린 송출을 담당하던 보안팀이었다.

기기 자체가 망가졌다는 직원의 보고에 보안실장은 머리가 멍해지는 걸 느꼈다.

“아니, 미사일에라도 맞은 거야, 뭐야?”

실제로 게이트 내부 곳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는 방공호에 버금가는 내구력과 단단함을 자랑했다.

물론.

대성의 업화대검이 그까짓 내구력은 간단히 무시하고 일대의 카메라를 전부 태워버렸다는 사실을,

“빌어먹을, 귀신이 곡할 노릇일세.”

저들이 알 리는 없지만.

***

<1층의 클리어 조건을 달성하셨습니다.>

<2층으로 향하는 워프 게이트의 좌표 번호를 전송합니다.>

<알림판의 키패드에 해당 번호를 입력하십시오.>

운석이 충돌한 것처럼 주변의 일대가 움푹 함몰되었다.

둥그런 크레이터의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많던 수풀도, 나무들도, 흙바닥도. 모조리.

그저 검붉게 그을린 난장판 위로 대성이 홀로 서 있을 뿐.

‘1층부터 너무 몰아쳤나.’

삑-

전송받은 좌표 번호를 키패드에 입력하며 대성은 생각에 잠겼다.

[<격노> 쿨타임 : 01:27:41]

다음 격노의 사용까지 1시간 30분가량을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쿨타임이 길다는 건 그만큼 강력하다는 뜻이고, 1층부터 사용하기엔 적절치 못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독주(獨走)를 이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을 철회했다.

1%의 빈틈도 없이 파상 공세를 이어나가는 게 그의 목표였으니까.

구우웅-

번호를 전부 입력하자 지척에 바로 푸른색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2층으로 향하는 문.

대성은 망설임 없이 워프 게이트 안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게이트를 뚫고 나오는 순간, 경치가 급변했다.

휘오오-!

매서운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설원 지대가 펼쳐졌다.

빗발치는 눈보라의 향연.

하지만.

‘신선하지 못한 패턴이군.’

감상은 그게 전부.

수호사의 피의 효과를 받는 그에게 추위 따위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부터 2층의 클리어 조건을 공개하겠습니다.>

<눈앞에 있는 설산의 꼭대기를 정복하십시오.>

알림판에 글귀가 떠오른 순간.

휘이잉-

미리 그렇게 설계가 되어 있었던 건지, 사납게 휘몰아치던 눈보라의 기세가 약해지면서 우뚝 솟은 거대한 설산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알림판은 ‘설산’이라고 했지만, 더 정확히는 거대한 원통형 기둥에 가까운 외관이었다.

‘높이는……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5㎞는 족히 넘어가는군.’

산치고도 높은 고도.

‘다른 인간들에겐 힘들겠어.’

심지어 이 고도를, 그들은 별다른 장비도 없이 암벽등반하듯 맨손으로 올라가야 한다.

굳이 층수를 나눌 필요 없이 이 2층의 시련만으로도 과연 스무 명이나 통과할까 싶은 난이도였다.

‘이래서 C급이나 D급부터는 짐꾼으로 벌어먹는다 했었나.’

팀 내의 짐꾼이라면 굳이 라이센스 없이도 게이트의 입장이 가능하다.

달리 말하면, 실질적으로 라이센스를 따고 전투 포지션을 취득할 수 있는 클래스는 C급 상위나 B급부터라는 의미.

그 이하는 애초에 라이센스 취득 자체가 무리라 해도 좋을 정도로 힘들었다.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물론 다른 놈들의 사정 따윈 고려할 가치도, 필요도 없다.

내가 할 일에만 집중한다.

그것은 경쟁에 있어서 당연한 철칙이었고, 대성은 그 철칙을 따를 줄 알았다.

저벅-

대성은 눈보라를 거침없이 헤치며 설산의 바로 앞까지 당도했다.

‘오 킬로미터…….’

그에게는 그 거리를 수직으로, 그것도 맨손으로 등반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지옥에 있었을 무렵, 그는 천공 까마귀의 둥지를 점령하기 위해 이보다 훨씬 더 높고 가파른 절벽을 기어올랐던 적도 있다.

그것에 비하면 눈앞의 시련은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다만.

‘아까부터 계속 지켜보고 있군.’

위잉-

그의 주변으로 어느덧 유선형 드론들이 어지러이 체공하고 있었다.

드론의 몸체 하단부에는 카메라 렌즈가 반짝이고 있었다.

‘부정행위 판별을 위한 감시용 드론이라고 했었지.’

외부의 관중들은 이 드론의 눈을 통해 게이트 안쪽 상황을 구경한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재밌겠어. 안전한 곳에 앉아서 남이 힘들게 암벽을 낑낑대며 올라가는 장면이란.’

물론 낑낑대며 올라가야 하는 당사자로선 서커스 원숭이라도 된 기분일 터.

마음 같아선 이 감시용 드론을 모조리 때려 부수고 싶었다.

하지만 오러 테크닉으로 인한 불가피한 훼손이라면 모를까, 알면서 의도적으로 감시 카메라나 기계를 부수는 건 부정행위.

‘그놈들 재밌으라고 열심히 이 암벽을 올라가는 것도 속이 뒤틀리는군.’

그에겐 타인을 위해 서커스 원숭이가 되어주는 취미 따윈 없다.

하지만 시험은 시험.

설산의 꼭대기를 정복해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게 꼭 설산을 기어 올라가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

열흘 동안 산중에 틀어박히며 많은 준비를 해 왔다.

그 결실의 첫 번째가 수호자의 피, 두 번째가 업화대검이었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섬멸 용기사 발라르크의 갑옷’을 절대자께서 인식하신 방어구에 로드하시겠습니까?]

그 세 번째 결실이 찬란한 성과를 맺으려 했다.

***

104번 응시생이 2층으로 진입한 순간.

무수한 드론이 그의 모습을 비췄다.

1층 카메라의 오류로 인해 갈증에 시달리던 관중들은 가뭄 속에 단비라도 맞이한 것처럼 열광했다.

“104번 2층으로 들어갔다!”

“미쳤다, 미쳤어. 시작한 지 뭐 얼마나 됐다고 벌써 1층을 돌파해?”

“신초영이랑 정진철도 아직 1층에서 헤매는 판국에 저놈 뭐지?”

그야말로 독주에 독주를 달리는 104번의 맹활약에 모두가 경악을 넘어 경외심까지 느꼈다.

그러나 2층의 클리어 조건을 전해 들은 관중 몇몇은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104번이라도 이번엔 좀 힘들지 않을까?’

난이도가 규격 외다 보니, 열에 아홉은 104번이 분투할 것을 예상했다.

하지만,

“어!”

“야, 잠깐. 저거……?!”

스크린 속에 펼쳐진 104번의 다음 행동을 눈에 담은 순간.

“저, 저게 뭐지?”

그들은 깨달았다.

자신들이 104번의 진가를 과소평가하고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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