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37화 (37/180)

# 37

037

‘커트라인이 스무 명이라고 들었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콰직-!

취익……!

늪 속으로 피하려던 오크의 머리통을 으깨며, 정진철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X 맞네, 진짜.’

이걸로 열아홉 마리째.

앞으로 한 마리만 더 잡으면 1층을 돌파할 수 있다.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뿐하지도 않았다.

‘찝찝해 죽겠네.’

처음에 게이트에 입장했을 때는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습도는 더욱 거세졌고, 그럴 때마다 정진철은 체내의 ‘흐름’을 조절해야 했다.

열흘 전 <홍마>에서 주입받은 ‘융합’ 앰플.

부작용 없이 그 앰플의 효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면, 극도로 섬세한 심신의 컨트롤이 필요했다.

‘융합 리스트 중에 늪지대 환경에서 살았던 것들이 많아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부스럭-

수풀을 헤치며 나머지 한 마리 오크를 탐색하던 정진철의 시야에 무엇인가가 밟혔다.

그리고 그건 오크가 아니었다.

“저, 저 좀 도와주세요. 몸이 마, 마비돼서 아무것도…….”

땅바닥에 엎어진 채 사색이 되어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응시생이었다.

그의 어깨에는 날카롭게 다듬어진 화살 한 발이 꽂힌 상태였다.

몸이 마비됐다고 하는 걸 보니 촉에는 맹독이 발라져 있을 터.

피식.

자칫하면 사경을 헤맬지도 모르는 사람을 앞에 두고서도 정진철은 웃었다.

그는 방금 하다 만 상념의 뒷말을 목소리로 직접 뱉으며 말했다.

응시생의 귀에만 들리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안 그랬으면 나도 너 같은 쓰레기처럼 바닥을 기고 있었겠지.”

“네, 네……?”

“너 쓰레기라고.”

이제야 가까스로 도움을 청할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에게서 다짜고짜 쓰레기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떨까.

물론 정진철은 상대방의 기분을 고려하는 성격이 아니다.

대신, 철저히 계산적으로 머리를 굴릴 뿐.

“그래도 못 써먹을 쓰레기는 아니군. 재활용은 가능하겠어.”

응시생이 화살‘만’ 맞고 쓰러진 상태라면, 분명 주변에 기습을 가한 오크가 있다는 말.

‘즉, 저 쓰레기는 미끼라는 거지.’

다른 먹잇감이 몰려들도록 설치한 미끼.

응시생이 독화살에 맞아 마비 상태가 되었음에도, 이 이상의 추가 피해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그 증거였다.

‘내가 함정에 걸려주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으시겠다, 이건가?’

늪지대 오크는 영악하다.

포악하지만, 때로는 인내할 줄도 아는 녀석들.

먼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면 그 장단에 맞춰주는 수밖에.

정진철이 바닥에 엎어진 응시생에게 다가가 몸을 숙였다.

“아, 가, 감사합니…….”

“아가리 닥쳐. 누가 널 도와준대?”

그 말을 듣고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는 응시생 이상으로.

깔보듯이 내려다보는 정진철의 두 눈 또한 싸늘했다.

“이렇게 내가 널 도와주는 시늉이라도 안 하면-”

슥-

정진철이 응시생의 어깨에 꽂힌 화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제삼자의 시선에는 화살을 뽑아주려는 호의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놈이 나타나지를 않는단 말이야.”

실상은 반대였다.

꾸우욱-

“끄, 끄아아아악!!”

오히려 정진철은 화살 끝을 잡고 살갗 안쪽으로 더 깊게 밀어 넣었다.

안 그래도 근육을 뚫고 뼈마디까지 헤집은 화살촉이 상처 부위를 더 넓게 찢어냈다.

“아프셔도 조금만 참으세요! 비명을 지르시면 상처가 더 벌어진단 말입니다!”

“끄아아악! 끄아아악-!”

지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오크,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관람 중인 관객들 들으라고 선의의 대사를 외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뇌 신경을 통째로 찢어발기는 듯한 격통 속에서, 응시생은 성대가 박살이 날 기세로 비명을 질렀다.

“마비됐다면서 어깨 아픈 건 아나 봐? 엄살 부리지 마, 쓰레기야. 더 추해 보이니까.”

그리고 정진철의 매도는 숲이 떠날세라 울리는 비명에 파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피핏, 핏-

응시생의 어깨에서 분수처럼 솟는 선혈들이 정진철의 얼굴을 적시던 그때.

부스럭-

취익-!

지척에서 우거진 덤불을 뚫고 나온 오크가 몽둥이를 휘둘렀다.

물론 정진철은 그 기습을 예상하였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예상을 뛰어넘어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콰직-!

오크가 사각에서 튀어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진철은 정확한 각도로 몸을 꺾어 놈의 머리를 움켜쥔 뒤 수박처럼 터뜨려 버렸다.

<1층의 클리어 조건을 달성하셨습니다.>

<2층으로 향하는 워프 게이트의 좌표 번호를 전송합니다.>

<알림판의 키패드에 해당 번호를 입력하십시오.>

쾌재를 지르지는 않았다.

당연히 기분은 좋았지만, 일부러 그 티를 내지는 않았다.

“화살을 전부 뽑아내진 못했지만, 이걸로 최소한의 지혈은 했습니다! 아…… 마음 같아선 응급처치 요청을 해드리고 싶은데, 그건 싫다고 하시니 저로선 방도가 없네요!”

“자,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봐요, 저기요…….”

“압니다! 알아요! 제가 그쪽이 지닌 열정을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이 이상 제가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무운을!”

카메라가 사방에 깔린 이상, 그는 어떻게든 착한 사마리아인 행세를 이어나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진철은 정말 구해주고 싶지만 상대방의 결심을 존중해 어쩔 수 없이 떠나는 역할을 연기하며 응시생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넌 어차피 안 돼, 쓰레기야.”

그 한마디만을 남긴 뒤, 정진철은 2층으로 향했다.

눈물범벅으로 아픔을 삼키는 응시생을 뒤로한 채.

‘이건 뭐 보나 마나 1등이네.’

알림판에 기록된 시간을 확인한 정진철이 비릿하게 웃었다.

‘하긴 스팀팩을 그렇게 쪽쪽 빨고 왔는데도 1등 못 하면, 그건 내가 병신이지.’

의심의 여지를 가지지 않고 자신한 정진철은 알림판에 갱신된 2층의 클리어 조건을 확인했다.

그리고 확인하기 무섭게,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살벌한 눈보라가 파도처럼 덮쳐왔다.

“씨팔.”

정진철은 걸쭉한 욕을 씹어 뱉어준 뒤 체내에 주입된 앰플을 조정했다.

화악-!

그러자 마치 심장 대신 뜨거운 연탄이라도 박아 넣은 것처럼 몸속에 열이 치솟기 시작했다.

신체 곳곳에 퍼지는 따스함이 매서운 추위를 견디게 해주었다.

한숨 돌린 정진철이 눈보라 사이로 우뚝 솟은 설산으로 눈길을 돌리던 그때.

“응?”

그 시야가 향하는 방향에, 또 다른 누군가가 한 명 서 있었다.

눈보라 때문에 모습은 흐릿했다.

그러나 어쨌든 자신보다 한발 앞서서 누군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아까 있었던 폭발의 장본인인가?’

한창 신초영과 신경전을 벌였을 당시 숲 저편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었다.

주최 측에서 일으킨 사고는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폭발의 정체는 응시생 중 한 명이 펼친 오러 테크닉이라는 의미.

관심 없다는 신초영과 달리 관심이 아주 많았던 정진철은 곧장 그 폭발의 중심지로 달려 나갔었다.

그리고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부터 느낌이 좀 싸하다 싶더니만…….’

저벅-

정진철은 미간에 주름을 새기며 눈보라 너머의 존재에게 다가갔다.

‘만약 그 폭발이 누군가의 오러 테크닉이었다면, 나에게 있어선 이번 시험의 가장 큰 난관이다. 오히려 신초영보다도 제일 먼저 제거해야 할 놈이겠지.’

놈에게 추월당하지 않으려면.

좀 이를지도 모르겠으나, 어쩌면 지금이라도 결행을 해야 하리라.

정진철은 그리 다짐하며 인영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안 그래도 구겨졌던 미간을 한층 더 험악하게 찌푸렸다.

“신초영?”

그보다 한발 앞서 도착한 실루엣의 정체는 신초영이었다.

그 순간, 정진철은 머릿속에 피가 확 몰리는 걸 느꼈다.

“네년이 왜 나보다 먼저 여기에 있는 거야?”

그녀가 오크 세 마리를 잡을 때, 그는 다섯 마리를 잡았다.

절대 작지 않은 격차가 있었을 텐데, 어째서 신초영이 먼저 2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의뭉스러움 이상으로 분노가 치솟았다.

“아, 그래. 뭔지 알겠다. 곧 죽어도 난 반드시 제치겠다고 아주 발악을 떨었나 보구먼, 독한 년.”

“…….”

“그래. 그래서 이기니까 기분이 어때? 째질 것 같지? 그런데 어쩌냐. 1층에서 아주 지X발광을 떠느라 지쳤을 텐데 2층 클리어 조건이 이따위라.”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면서 비꼬고 있었으나 정진철의 왼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건.

아까부터 자꾸 신초영이 그의 말을 씹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근데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뭐라 대답이라도 해야-”

결국 울컥하고 만 그는 등을 보인 신초영과 눈을 마주치려다가 그대로 살짝 굳고 말았다.

그럴 만도 했다.

“너 표정이 왜 그러냐?”

분명 도도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녀는 경악하고 있었다.

두 눈을 화등잔처럼 크게 뜨고 입을 살짝 벌린 채.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늘에서 음식이라도 떨어지고 있나 대체 뭔-”

정진철 또한 신초영이 보고 있는 곳과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저건 또 뭐야?”

이내 그의 표정도 신초영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바뀌었다.

그곳엔.

한 남자가 용의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

2층의 클리어 조건은 정상을 정복하는 것이지, 등산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정상을 찍기만 하면 상관없다는 의미.

그렇기에 대성이 취한 방법은 너무나도 간단명료했다.

[아이템 정보]

이름 : 섬멸 용기사 발라르크의 갑옷

분류 : 장비

‘섬멸 용기사 발라르크가 전장에서 입었던 갑옷입니다. 섬멸룡의 권능을 일부 계승하여 반인반룡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고유 성능1 : 모든 속성의 피해로부터 40% 방어력 상승.

고유 성능2 : 반인반룡의 능력, 특수 스킬 <비행> 사용 가능.

바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비행을 쓸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예기치 않게 써먹을 구석이 생기는군.’

판테온을 통해 발라르크를 구현시킨 건 첫 번째 고유 성능 때문이었다.

시험에는 갖가지 종류의 필드와 몬스터가 존재할 터이고, 속성 불문 모든 공격으로부터 내성을 부여하는 갑옷의 성능은 분명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러니 <비행>은 그냥 있으나 마나 한 겉절이 정도로만 여겼다.

설산을 오르라는 클리어 조건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펄럭-!

‘조금 눈에 띄긴 하지만, 별수 없지.’

발라르크의 갑옷은 시험용 아머에 로드되어 외관이 보이지 않았다.

펄럭, 펄럭-!

하지만 <비행>으로 인해 갑옷 뒤로 뻗어 나온 용의 날개는 숨겨지지 않았다.

업화대검을 숨겨도 <격노>의 스킬 이펙트는 숨길 수 없었던 것처럼, 특수 스킬인 <비행> 또한 마찬가지인 셈이다.

쐐액-!

대성은 거대한 날개를 날렵하게 젖히며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5㎞의 거리가 100m 내로 좁혀지기까지는 20초면 충분했다.

하지만 시험은 또 하나의 난관을 준비한 상태였다.

카악-!

깃털 대신 얼음 조각이 송송 달린 새들이 정상 주변을 배회하는 중이었다.

‘프로스트 로크(Frost roc).’

대성은 한눈에 새들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주로 혹한 지대의 게이트에서 출몰하는 녀석들!

카악-!

떼를 지어 뭉친 프로스트 로크들이 갈고리처럼 날카로운 부리를 쩍 벌리며 날아왔다.

“한곳에 뭉쳐주니 고마운걸.”

화륵-!

그의 손에 쥐어진 업화대검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대성은 새빨간 눈을 부라리며 총알처럼 날아오는 프로스트 로크들의 무리를 향해,

팟-

가볍게 검극을 뻗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힘들게 휘두를 필요도, 놈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싸울 필요도 없었다.

[‘업화’ 모드의 두 번째 특수 스킬이 발동됩니다.]

[특수 스킬 : <염왕의 숨결>]

화아악-!!

앞으로 뻗어진 검극을 타고, 극한의 고열을 머금은 지옥 불이 화염방사기처럼 뿜어져 나왔으니까.

카악-!

카아악-!

불의 세례가 덮쳐들자 놈들은 얼음 깃털 하나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다.

대성은 순식간에 깔끔해진 천공을 가로지르며 정상을 향해 마저 날아올랐다.

이내 정상에 도착한 그가 날개를 접고 땅에 발을 디딘 순간.

삑-

알림판이 갱신되며 3층으로 향하는 좌표가 등장했다.

대성이 손가락을 움직여 좌표를 입력하자 지척에서 푸른색 소용돌이가 등장했다.

시험의 마지막, 3층으로 통하는 워프 게이트.

저벅-

걸음을 옮긴 대성이 워프 게이트를 넘어서는 것과 동시에.

“어둡군.”

암흑의 세계가 펼쳐졌다.

말 그대로 모든 게 새카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선 수호사의 피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겠어.’

단순한 더위나 추위라면 모를까, 이런 암흑 공간 속에선 수호사의 피도 무용지물일 터.

그냥 어두운 정도가 아니다.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손으로 두 눈을 가린 것처럼 아예 아무것도 안 보이는 수준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예 필드 자체를 무언가로 코팅해놨군.’

빗발치는 눈보라 사이에서도 아득한 설산의 고도를 정확히 가늠했던 시력이다.

그런 시력임에도 이 암흑 너머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주최 측에서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증거일 터.

‘어디 한번 장님이 되어보라는 거겠지.’

맹인 검객처럼 심안(心眼)이라도 깨우쳐보라는 걸까?

삑-!

<지금부터 3층의 클리어 조건을 공개하겠습니다.>

<필드를 이동하면서 몬스터들의 공습에 대비하십시오.>

<몬스터를 퇴치하여 포인트를 적립하십시오.>

<클리어에 필요한 포인트는 1,000점 이상입니다.>

<몬스터마다 보유한 포인트는 각각 다릅니다.>

즉,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도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의미.

사위를 탐지하는 감각의 세밀함뿐만 아니라 순발력,그리고 극한의 어둠 속에서도 공포를 극복해내는 담력까지.

과연 마지막 관문답게 총체적인 역량을 시험해보겠다는 듯한 내용이었다.

‘마력으로 감각을 넓히는 방법도 있겠지만…….’

시각이 아닌 감각을 테스트하고자 하는 취지를 생각해보면 그쪽이 정석이겠으나.

‘얌전히 정석을 밟아줄 필요는 없지.’

그에게는 더 쉬운 길이 있었다.

“사주(死蛛)의 눈.”

그 순간.

지잉-

대성의 동공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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