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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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중 첫 번째 측정 단계부터 A급 판정을 받는 각성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
많아봐야 한 달에 한 명. 많으면 두세 명 정도.
그리 빈번하게 일어나는 케이스는 아니다 보니, 시작부터 A급 자질을 가진 각성자가 나타난다면 박정호의 귀에도 소문이 들려온다.
‘아까부터 왜 석연찮은 기분이 드나 했더니…….’
서류에 기재된 대성의 프로필을 뚫어져라 응시 중인 박정호가 게슴츠레 눈을 좁혔다.
그의 시선은 ‘각성 판정’란에 머물러 있었다.
거기엔,
‘이것 때문이었군.’
보더라인.
‘판정 보류’라는 의미를 지닌 네 글자가 기입된 상태였다.
박정호는 컬러로 인쇄된 대성의 무표정한 얼굴, 보더라인, 그리고 그가 이번 시험에서 쟁취한 압도적인 기록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이 부장, 자네도 이거 알고 있었나? 한대성 이 친구가 아직 각성 판정 결과가 없다는 거?”
“안 그래도 그것과 관련해서 말씀드릴 게 있던 참이었습니다.”
“왜 내가 올 초순에 A급을 받았다는 이들 중에 한대성이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나 했더니…… 이런 내막이 있었을 줄은 몰랐구먼.”
딱 잘라서, 솔직히 말할 수 있다.
자신은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한대성이란 젊은이가 A급 각성자일 줄 알았다고.
그것도 그냥 A급이 아니라, S급의 기량을 거뜬히 기대해볼 만한 유니크 한 A급.
그때, 이하원 비서실장이 이 대화의 흐름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이 다른 서류 한 장을 박정호에게 건넸다.
“이번 시험의 담당관 10명이 판정 내린 한대성 씨의 각성 등급입니다.”
시험 과정 중에 행해진 모든 행동을 기반으로, 해당 분기 시험의 담당관들이 보더라인 판정자에게 등급 결과를 결정한다.
합격 커트라인에 들어섰든, 들어서지 않았든 간에 무조건.
최종 승인은 협회 관련 업무의 총괄 책임자인 박정호의 몫.
그는 서류를 받아 들고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덤덤하게 말했다.
“만장일치로군.”
“협회장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두말하면 입 아프지 않겠나?”
10명 전원이 재고의 여지도 없이 내린 ‘A’라는 결과 옆.
탕-!
박정호는 호쾌하게 승인 도장을 공란에 찍어 내렸다.
“그럼 이대로 한대성 씨에게 A급 라이센스 발급해놓겠습니다.”
“부탁하네. 아, 그리고…….”
평화의 시대를 이끌어갈 재능 있는 젊은이에게 날개를 준다는 건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는 그 즐거운 일에서부터 벗어난 화제라는 듯이.
박정호의 표정에 무거운 엄숙함이 감돌았다.
“<홍마>의 처분에 대해 슬슬 논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
시골 촌구석에 사시 패스한 잠룡이 나타나면 그날은 마을 전체가 잔치를 벌인다고 했던가.
사냥꾼은 그 시골이 ‘전국’ 스케일로 업그레이드된다고 보면 된다.
물론 실제로 잔치가 벌어지냐고 하면 그건 과장된 표현이겠으나, 어쨌든 전국 각지의 매스컴에서 적지 않은 보도가 나온다.
수능 만점자의 이름과 얼굴이 뉴스에서 나오는 것처럼.
<역대 최악의 난이도로 논란이 된 올 상반기 사냥꾼 라이센스 시험에서 독보적인 성적을 거둔 한 응시생이 화제가 되어…….>
<진행 중 불미스런 사고에 휘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극단적이지만 침착한 판단을 보여…….>
<빅10의 단장들이 직접 시험장으로 달려와 즉석 영입을 제안할 예정이었으나, 현장에는 이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전문가들은 대한민국에 그동안 공석이었던 6번째 S급 각성자가 가까운 시일 내 등장할 거라 예측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번 시험은 유독 그 기조가 뜨거웠다.
화제의 104번 응시생도 그렇고, 특히나 <홍마>의 타 클랜 루키 피습 사건이 이번 라이센스 시험을 여론의 도마 위로 올려놓은 것이다.
달리 말해.
“어, 어어……. 어어?”
TV나 인터넷, 둘 중 하나라도 있는 집이라면 절대 모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화제의 104번이 어떻게 생겼고, 또 이름은 뭔지를 말이다.
“……오빠?”
툭.
지수는 손에 쥐고 있던 TV 리모컨을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텔레비전을 켰더니 대성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나오는 게 아닌가.
거기다 생뚱맞게 ‘독보적 1등 주자’나, ‘여섯 번째 S급 사냥꾼 유망주’ 같은 수식어도 같이.
“뭐야, 이거. 꿈이지? 꿈이겠지?”
어이가 없었던 나머지 뺨을 쭉 늘려봤더니 눈물이 찔끔 나왔다.
잠깐 며칠 동안 친구랑 여행 간다고 했던 오빠가 어느 날 갑자기 전도유망한 사냥꾼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전국에 송출되고 있다.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수는 아예 화면에 찰싹 달라붙어서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우연한 확률로 좀 닮게 생긴 동명이인인가 싶었지만,
“실화네?”
당연히 그럴 확률은 없다.
기절초풍 직전이었던 그녀는 부엌에 있는 혜정을 다급히 불렀다.
“대- 박! 엄마! 엄마!”
“이 계집애가 좀 있으면 오밤중이 다 돼가는데 동네 시끄럽게……. 왜?”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봐!”
“엄마 지금 저녁 차리느라 바쁘다.”
“아, 지금 저녁이 문제가 아니라! 오빠가 뉴스에 나온다고!”
땡그랑! 데구르르-!
찌개 끓이던 국자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나나 싶더니, 혜정이 헐레벌떡 방 안으로 들어왔다.
뉴스에 나온다는 말을 들었을 땐 십중팔구 무슨 사고가 터졌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실상은 그 예상보다도 아득하고 커다랬다.
“대, 대성아?”
“엄마. 저거 저 얼굴 오빠 맞지, 응? 내가 뭐 안면인식장애 이런 거 걸린 게 아니라, 내가 제대로 본 거 맞지?”
지금 찌개국물이 뚜껑을 들썩이며 부글부글 꿇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혜정은 정신이 멍해졌다.
둘이 그렇게 뭔가에 홀린 듯 가만히 넋을 넣고 있을 무렵, 현관문이 덜컥 열렸다.
“나 왔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오는 법.
얼어붙어 있던 혜정이 호랑이 같은 자식새끼 목소리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지수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와, 누가 보면 진짜로 여행 갔다 온 사람 목소리인 줄 알겠네.”
***
대한민국의 모든 사냥꾼을 통제하는 KHA에겐, 당연히 클랜을 해체할 권한도 가지고 있다.
물론 대형 클랜 같은 경우엔 차지하는 입지가 커다란 탓에 마음대로 입김을 불어넣을 순 없다.
“오늘 이 시간부로, <홍마> 클랜은 사냥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일절 금합니다.”
하지만 그런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벌어진 사태는 명백히 도를 넘었다.
대형 클랜이, 같은 대형 클랜의 루키를 피습했다.
“이곳에 소속된 각성자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클랜 강제 탈퇴로 행정 처리가 될 것이며…….”
그것도 단장 측에서 직접 피습을 명령했다는 게 정진철의 입에서 폭로된 상태.
이는 결코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중범죄다.
“단장인 이석우 씨는 구속해 오라는 협회장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괴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야 될 사냥꾼이 죄 없는 인간을 공격한 거니까.
“얌전히 따라와 주시죠.”
그리 말한 이는 KHA의 감시과 제2과장, 김성수였다.
옆에는 부하 직원인 남자가 긴장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붙잡아야 될 상대방은 대형 클랜의 단장이자 B급 각성자, 이석우.
당연히 감시과로 파견된 이들 또한 실력 좋은 B급 각성자였다.
<홍마> 본사의 단장 사무실 내부.
처분 내용을 고지받은 이석우는 뒷짐을 진 채 유리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당신들한테 끌려가면 저는 그다음에 어떻게 되는 건가요?”
“자세한 후속 조치에 관해선 협회 측이 직접 결정할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을 보낸 거군요? 협회장, 그 사람.”
우득-
자신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지칭하자, 김성수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하나 자신들의 소임은 어디까지나 명령 수행. 사적인 감정은 얼마든지 접을 수 있었다.
“통보받으셨으니, 지금 당장 저희랑 같이 협회로 가주시죠.”
“안 따라가면.”
“네?”
유리창에 반투명하게 비친 이석우의 눈이 김성수를 향하고 있었다.
멸시와 무시, 그리고 저항감이 잔뜩 깃든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제가 그쪽들 안 따라가면 그때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따라와 주시죠.”
스륵-
김성수의 손에서 푸른 기류가 슬그머니 휘감겼다.
“만약 불응할 시, 그때는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강압적인 수단…….”
이석우는 작지만 또렷하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오러의 파동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저항했다간 폭력을 행사할 거라고, 김성수는 그런 경고를 보내는 중이었다.
“저는요. 협회의 판단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이석우의 표정엔 미동도 없었다.
같은 팀의 아군인 허정우마저 조마조마하게 사수의 살기를 힐끗거리는 중인데도 말이다.
김성수는 끝까지 구질구질하게 구는 이석우에게 슬슬 진심 어린 분노를 느꼈다.
“그쪽의 죄목이 뭔지는 분명 방금 고지해드렸습니다. 이해가 안 가시면 일단 가셔서 직접-”
“아니, 아뇨. 친절히 설명해주신 덕분에, 제 죄가 뭔지는 잘 알고 있어요.”
“그럼……?”
그 순간, 유리창에 비친 이석우의 표정이 바뀌었다.
섬뜩한 미소로.
“그러니까 내 말은, 왜 당신들 둘만 보냈냐 이거야. 나는 그게 이해가 안 된다고.”
덜컹-!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체격이 커다란 장성들이 들이닥쳤다.
누군지 물을 필요도 없다.
사냥꾼은 같은 사냥꾼을 알아보는 법이니까.
“과, 과장님…….”
“……자기 부하로 둔 사냥꾼을 무슨 용역 깡패 부리듯이 부리다니. 기도 안 차네.”
<홍마>의 본사에 있는 사냥꾼들.
그것도 이석우의 명령이라면 기꺼이 손을 더럽힐 수도 있는 악인들이었다.
“호랑이굴에 고작 사람 두 명 보낸다고 호랑이가 잡혀지던가? 박정호 그 인간도 늙어가니 점점 판단력이 흐려지는군.”
드넓은 사무실의 반절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인원이, 김성수와 허정우를 에워쌌다.
일이 순순히 진행되지는 않을 거라는 건.
“정우야, 준비해라.”
“과, 과장님……. 하지만 머릿수가 이러면…….”
“그럼 넌 가만히 맞아 죽을래? 죽일 각오로 싸워.”
잡아가야 될 상대가, 그 악명 높은 <홍마>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파지직-!
촤아악-!
김성수와 허정우가 팔찌의 버튼을 누른 순간, 그들의 몸을 뒤덮고 있던 검은 정장이 흔적도 없이 소멸됨과 동시에,
웅-
당장에라도 타오를 것처럼 붉은 오러 아머가 위용을 드러냈다.
그 광경을 본 이석우가 감탄했다.
“그거 입고 위에 또 정장 입으면 안 답답하디?”
“당신들은 지금 KHA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후폭풍이 두렵지도 않습니까?”
“글쎄. 지금 너희들이 느껴야 될 두려움보다는 훨씬 낫지 않나 싶은데.”
그것은 선언이었다.
지금부터, <홍마>는 대한민국을 적으로 돌리겠다는 선언.
“물어.”
이석우가 입을 연 순간.
파바박-!
그의 사냥개들이 김성수와 허정우를 향해 쇄도했다.
***
예보 시스템의 발달로 인해, 게이트 프렉쳐 같은 사태는 빈번하게 발생하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가끔씩 게이트 프렉쳐가 터지고 몬스터가 현실로 나타나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많은 사람이 죽는다. 도무지 21세기에선 벌어질 것 같지 않은 참사가 뉴스로 보도된다.
그렇기에 혜정은 안다.
몬스터란 게 얼마나 사납고 잔인한 놈들인지.
그리고 그런 놈들이랑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사냥꾼이란 게, 얼마나 위험한 직종인지도.
“난 네가 그런 일 안 했으면 좋겠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혜정과 지수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그 깐죽대던 지수조차도 지금은 한없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뉴스 보니까 오빠가 엄청 유명해진 건 알겠는데……. 유명한 건 유명한 거고, 위험한 건 위험한 거야.”
“엄마도 지수 말이 옳다고 봐, 대성아. 넌 어떻게 생각하니?”
대성은 즉답하지 못했다.
사실 이미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집에 들어오는 길이었다.
당분간 언론이 내내 떠들 거니까 각오하고 있으라고, 성찬호가 미리 말해줬으니까.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혜정이 자신에게 대격변이란 비밀을 숨기려 했으나 결코 오래가지는 못했던 것처럼.
‘어차피 사냥꾼이 되자마자 말할 생각이었고.’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른다.
어떻게 운을 떼면 좋을까 고민하던 참에, 매스컴이 먼저 알아서 떠들어줬으니.
“둘 다 너무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조심할 테니까.”
“네가 조심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잖니, 이게.”
“방금 찬호네 클랜이랑 계약하고 오는 길이야.”
대신, 거짓말을 좀 섞을 필요가 있었다. 되도록이면 유통기한이 최대한 오래가는 거짓말을.
이미 오는 길에 성찬호와 미리 말을 맞춰놓은 상태다.
“찬호 오빠 클랜이면…… <소울>이랑 계약한 거야?”
지수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묻자, 대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완전 대기업이랑 맞먹는 클래스 아니야? 와, 확실히 능력이 입증되니 인맥도 빛을 발하는구나.”
“지수야.”
“알아, 엄마. 내가 뭐 잘됐다고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그녀는 따갑게 보내오는 혜정의 눈총을 흘려보냈다.
그냥 순수하게, 어제까지만 해도 백수였던 오빠가 하루아침에 인기인이 되고 대기업에 들어간 게 신기해서 감탄했을 뿐.
탐탁찮은 마음은 변함없었다.
“근데 <소울> 클랜이라고 해도, 결국 오빠가 게이트 들어가서 몬스터 때려잡아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잖아? 뭐 다크호스라고 평가받는 마당에 고상하게 영업직 같은 걸 할 리도 없고…….”
“게이트 돌입 팀으로 계약했어.”
“그렇지? 그럼-”
“후방 치유 담당으로.”
전력으로 따질 생각이었던 혜정과 지수가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현직 사냥꾼들이 정확히 어떤 진영을 짜고 무슨 담당이 있는지는 그들도 모른다.
다만 ‘후방’이랑 ‘치유’라는 단어에서 나오는 뉘앙스가 모종의 쿠션 역할이 되어준 것이다.
“후방에서 조용히 동료들 치료만 해주는 역할이야. 싸우는 사람은 따로 있고.”
“그, 그렇다고 해서…….”
어쨌든 결국 몬스터들이랑 같은 공간에 있어야 된다는 사실은 마찬가지 아닌가.
혜정은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엄마.”
“…….”
“만약 안전한 곳에 있었는데도 위험이 닥치면, 그때는 정말로 열심히 싸울게. 그리고 살아남을게.”
“……대성아.”
“내 한 몸 지킬 자신은 있어.”
미래의 여섯 번째 S급 사냥꾼.
이창식의 뒤를 이을 최강자의 탄생!
그런 세간의 평가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TV에서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아들이 적어도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는 강하다는 걸, 마치 TV가 대신 증명해주는 듯했다.
“……위험하면 도망쳐야 된다.”
“엄마?”
결국 한발 물러선 혜정의 대답에 제일 먼저 놀란 건 지수였다.
“어쩌겠니. 세상이 널 필요로 하고 있다는데, 엄마가 막을 수도 없고. 솔직히 엄마는 네가 그런 험한 일, 정말 안 해줬으면 좋겠지만…….”
겨우 10년 만에 되찾은 아들을 다시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 공포가 엄습함에도 불구하고, 혜정은 물러나준 것이다.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기 위해.
아들의 앞길을 막아서는 순간, 그건 걱정이 아니라 간섭이 되어버리고 마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아들이 소속된 곳이 성찬호의 클랜이라는 말이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지수야, 너는?”
혜정이 지수 쪽을 돌아보자,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면서 대성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내 깊은 한숨을 푹 쉬었다.
“……염병, 그래. 어디 가서 맞고 돌아올 비주얼은 아니다, 오빠가.”
저번에 자기 대신 악질 점주를 쥐어박아준 것도 그렇고. 지금 뉴스에서 들려오는 것도 그렇고.
몬스터 따위는 접어서 철가방에 넣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오빠다.
“둘 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목소리는 무덤덤했으나 대성은 그답지 않게 깊이 안도하고 있었다.
어쩌면 설득에 실패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으니.
자신이 가족을 아끼는 만큼 가족도 자신을 아낀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더 걱정이 컸다.
“대성아.”
혜정은 말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애써 눈물을 흘리는 건 참았지만 대성의 귓가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조심, 조심해야 돼, 아들. 다치지 말고…… 너 또 무슨 일 생기면, 그땐 엄마 버틸 자신이 없어.”
“…….”
“너 쓰러졌을 때 시절로 돌아가기 싫어. 엄마 너 없으면 못 살아. 대성이 너랑 지수 때문에 버텨나가는 거, 너희들도 알지?”
혜정은 참아냈던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말았다.
그 당차던 지수조차 뒤에서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슬픔이라는 감정이 마모된 대성은 똑같이 눈물을 흘리는 대신, 말없이 혜정을 마주 안아주었다.
넓고, 따스한 품.
그런 어머니의 품속이야말로, 80년을 지옥에서 버텨온 자신에게 돌아온 보상이라고 그는 느꼈다.
그리고…….
‘더 이상 고생할 필요 없어. 엄마도, 지수도.’
드디어 때가 왔다.
아공간 포켓에 든 거금.
가족에게 변명할 필요 없이, 그 거금을 마음껏 집안의 행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