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43화 (43/180)

#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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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밴 잡냄새를 따뜻한 물줄기와 함께 씻어 보내면, 입으로 절로 클래식을 흥얼거리게 된다.

“흠, 흠, 흠.”

이석우는 후덥지근하게 피어오르는 수증기 속에서 샤워를 즐겼다.

쏴아아-

물줄기가 그의 탄탄한 몸매를 쓸어내며 구멍이 숭숭 뚫린 배수구로 모여들었다.

약간의 선홍빛을 띠며 말이다.

탁-

이석우는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탈탈 털어내며 욕실을 나섰다.

“으, 으흑, 흑…….”

이석우가 펜트하우스 겸 사무실로 사용하는 <홍마> 본사 건물 최고층 꼭대기.

거기엔 한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 숨죽이며 오열하고 있었다.

아래를 가릴 생각도 없는 전라의 이석우는 그 남자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헤어드라이기가 놓인 선반대로 걸어갔다.

“어, 흑, 흑……. 제발, 제발 목숨만은 살려-”

위이이잉-!

헤어드라이어에서 뿜어져 나온 소음이 남자의 흐느낌을 지워냈다.

자아도취에 젖은 이석우의 눈이, 전신거울 너머로 비치는 내부의 풍광을 천천히 훑었다.

“흠, 흠, 흠.”

열심히 대걸레질을 하고 있는 남자가 셋.

물걸레로 바닥을 쓸고 있는 남자가 둘.

무릎을 꿇은 채 오들오들 떨며 겁에 질린 남자가 하나.

그리고 시체가 한 구.

픽-

헤어드라이어의 전원을 끈 이석우가 알몸 위로 새하얀 가운을 걸치며 입을 열었다.

“살려드릴게요. 대신, 우리 약속 하나만 하죠.”

차가운 대리석 바닥 곳곳에 묻은 혈흔을 조심스레 피해가며, 이석우가 무릎을 꿇은 남자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다름 아닌 KHA의 감시과에서 파견된 남자, 허정우였다.

자신의 선임과 함께, <홍마>의 처분에 관한 내용을 통보하라는 임무를 받은.

지금은 혼자가 됐지만.

“그 약속, 지키겠다고 약속해주시면 당신은 살아서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어요.”

이석우는 무릎을 굽혀 허정우와 눈높이를 맞췄다.

허정우는 눈물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시선도 못 마주쳤다.

이석우가 물었다.

“어때요. 나쁘지 않은 조건이죠?”

“네, 네…….”

“무슨 약속인지 듣지도 않으셨으면서 네, 네는 무슨……. 걱정 마요. 어려운 거 아니니까.”

슥-

허리를 꼿꼿이 편 이석우가 허정우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었다.

그의 공포 어린 경련이, 미세하게 손목을 타고 올라와 이석우에게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줬다.

“가서 박정호 협회장님한테 말 몇 마디만 전하시면 돼요. 자, 지금부터 제가 알려드릴 테니까 그대로 복창하세요.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흑, 예, 흐윽…….”

“‘나를.’”

“나, 나를…….”

“‘건드리지.’”

“거, 건드리지…….”

“‘마라.’”

“마, 마라…….”

“뭐라고요?”

“나, 나를 건드리지 마라…….”

“잘했어요.”

이석우가 싱긋 웃으며 허정우의 뺨을 툭툭 건드리던 그때.

양손이 피범벅이 된 부하 한 명이 이석우에게 뭔가를 건넸다.

그것은 리본이 예쁘장하게 묶인 붉은색 선물 상자였다.

이석우는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부하를 물린 뒤 허정우의 손에 선물 상자를 들려주었다.

“이건 제가 KHA, 그리고 박정호 협회장님한테 보내는 선물이에요.”

“아, 으, 으으…….”

“부디 선물에 담긴 저의 메시지가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네요.”

허정우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가만히 상자를 든 채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약간의 무게감이 실린 선물 상자.

굳이 리본을 풀고 뚜껑을 열어보지 않아도, 이 안에 든 게 무엇인지 허정우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우, 우욱…….”

약간의 헛구역질과 함께 눈물을 흘리는 허정우의 옆, 사무실의 구석진 곳에는.

그와 함께 온 선임 감시과 직원, 김성수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목이 잘린 시체가.

***

다음 날.

“썩을.”

이른 아침부터 대성은 자신의 실책을 후회하며 욕을 뱉었다.

띠링-!

띠링-!

머리맡에 둔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알람을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KHA 공식 사이트 어플리케이션이 발송 중인 알람.

앱을 설치한 건 좋지만 알람은 꺼두는 거였는데.

자신의 판단 미스를 후회한 대성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바삐 울리는 알람을 꺼뜨린 뒤 휴대폰을 조작했다.

‘확인은 해봐야겠지.’

접속한 곳은 KHA 공식 사이트 어플리케이션이었다.

간단한 인증 절차를 거치자 공인된 사냥꾼만 접속할 수 있는 게시판이 활성화되었다.

한대성.

각성 등급: A

라이센스 코드: qnb268

‘역시 조사한 대로 S급은 되지 못하는군.’

물론 그가 S급보다 역량이 떨어지기에 A급 판정을 받은 게 아니다.

오러의 측정을 통해 부여받을 수 있는 등급의 최대 한도는 A급.

S급 승격부터는 수치나 점수 같은 걸로 환산할 수 없는, 새로운 기준이 제시된다.

‘사냥꾼으로서 국가와 인류에 커다란 공헌을 한 이들만이 S급이 될 수 있다고 나와 있었지.’

즉, 아무리 라이센스 시험에서 독보적인 1등을 차지했다고 해도 S급은 받지 못한다.

사냥꾼으로서 미증유의 사태를 해결했다든가, 혹은 만인 공통이 인정하고 있는 업적이 누적된 상태가 아닌 이상에야 말이다.

‘굳이 지금 당장 S급이라는 완장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지.’

물론 S급이 되면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도 많아지니 나쁠 건 없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쟁취한 A급이라는 자리도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S급 못지않게 좋다.

앞으로 벌어들일 수입은 지금 겪고 있는 가난을 타파하고, 혜정과 지수를 영원토록 부유하게 해주는 데 부족함이 없는 액수니까.

더 올라갈 수 있는 여지는 있으니 포기한 건 아니다.

다만, 성급하게 S급이라는 자리에 목맬 필요는 없을 뿐.

‘기회는 얼마든지 열렸고, 그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잡을 준비만 하고 있으면 돼.’

슥-

대성은 아직 이른 아침이라 곤히 잠든 혜정과 지수를 바라보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가족의 행복이니까.’

그 행복을 실현시키는 데에는, 지금의 여건만으로도 충분하다.

앞으로 A급 사냥꾼으로서 손에 넣을 수 있는 막대한 돈.

또, 아공간에 차곡차곡 저장해놓고 있었던 조폭들의 거금.

마지막으로…….

‘이 알람들.’

대성은 바로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의 신경을 긁어대던 알람의 정체를 확인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뭔지 알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한대성 님. <카이트> 클랜에서…….

-안녕하세요, 한대성 님. 저희들은 <흑랑> 클랜…….

-안녕하세요, 한대성 님. 저희들은…….

예상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홍마>를 제외한 빅10 클랜에서 보내는 스카우트 제안들.

거기엔 당연히 성찬호가 소속된 <소울> 클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 상반기 라이센스 시험은 저희 클랜 소속원조차 혀를 내두르게 하는 극악의 난이도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절대 두 번 다시 일어나선 안 될 사고마저 겹쳐 역대 최악의 시험이라는 반응이 자자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성자분께서 보여주신 침착하고도 냉정한 대응, 그리고 타의 추종을 불허케 하는 오러 테크닉과 독보적인 결과 성적에 저희들은 깊은 감명마저 느꼈습니다.

저희들은 각성자분께 결코 부족함 없을 계약 조건을 제시해드릴 뿐만 아니라, 계약 기간 동안에도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드리겠습니다.]

각 제안서 모두 세부적인 내용은 조금씩 달랐으나, 전체적인 맥락은 거기서 거기였다.

부족함 없는 계약 조건.

1대1 코칭 및 최상품의 장비 지원 등, 파격적인 대우.

어떻게든 제발 자기들한테 와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모습이 선명했다.

제안을 받는 사냥꾼 또한 인생 폈다며 눈물을 흘려도 이상하지 않을 내용들이었고.

하지만.

‘전제부터가 잘못됐어.’

대성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들이 말하는 모든 조건들, 그 이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부분이.

‘사탕발림으로 날 자기들 아래에 묶어둘 속셈이잖아, 이건.’

팀에 소속된 순간부터 따라야 될 윗선이 생기고 지켜야 될 규칙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억압.

저들은 ‘파격 조건’이라는 허울 좋은 당근을 내세우며, 선택이라는 이름의 강요를 하고 있었다.

그 강요에 따를 필요는 없었다.

자유로운 몸으로, 자유롭게 활동해 손에 들어오는 몫을 오롯이 전부 차지하는 것.

그것이, 대성에게 있어서는 제일 이상적인 케이스니까.

‘고민할 가치도 없지.’

대성은 일말의 미련도 없이 어플리케이션의 작동을 중지시켰다.

그때, 좁은 방에서 함께 자던 지수가 눈을 비비며 상반신을 세웠다.

“……휴대폰 불빛 때문에 내가 잠을 못 자겠다, 이 망할 오빠야.”

“미안.”

“오빠답지 않게 이 시간부터 웬폰질? 배고파서 깬 건 아닐 테고…….”

“맞아.”

“뭐?”

“배고파서 깼다고.”

그 말을 듣고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배고파서 깼다는 게 그다지 이상한 말은 아니지만, 왠지 대성의 입에서 나오는 게 뭔가 어색했으니까.

“어…… 배고프면 어제 먹다 남은 찌개라도 마저 먹는 게?”

“됐어. 다시 자. 지금 미리 푹 자두는 게 좋을 거야.”

“뭐, 뭔데 또. 갑자기. 왜?”

“좀 있다가 엄마랑 같이 맛있는 거 배 터지게 먹을 테니까.”

순간 그게 무슨 소린지 지수는 의미를 가늠해보다, 이윽고 ‘외식’을 하자는 의미로 이해했다.

물론 이 또한, 대성의 입에서 쉽사리 나올 법한 말은 아니었지만.

“오빠가 사 줄 거야?”

“어.”

“오빠가 돈이 어디 있다고?”

“받았어. <소울> 클랜 계약금.”

꿀꺽!

사냥꾼의 세계를 잘 모르는 지수도 <소울> 클랜이 대기업 같은 곳이란 건 잘 알고 있다.

그런 곳과 전속 계약을 맺고 받은 계약금이라면 분명 어마어마한 거금일 터.

지수가 긴장 어린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어, 얼마 받았는데……?”

“음…….”

대성은 곧장 아공간 포켓에 저장된 금액을 헤아려보았다.

사채업자 놈들의 금고를 털어서 번 5억. 거기다 강현도의 골프백에 들어 있던 비상금 10억가량.

비상금 같은 경우엔 자세히 세어보지는 않았으나, 사령으로 전락시킨 강현도의 기억 속에서 얼핏 보았던 액수니 거의 정확하리라.

“15억.”

“…….”

5초 뒤, 겨우 제정신을 되찾은 지수가 호들갑을 떨며 혜정을 깨웠다.

***

대성과 그의 가족들은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셋이서 여의도역 인근의 대형 쇼핑몰을 방문했다.

지수는 북적북적한 쇼핑몰 내부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우와…….”

천진난만한 어린애처럼 입을 살짝 벌리며 혼자서만 저만치 앞서 나가면서 말이다.

혜정은 간만에 보는 딸의 순진한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안타깝다는 듯 말을 이었다.

“……옛날부터 집 사정이 이러니, 지수 데리고 백화점에서 쇼핑 한번 제대로 못 시켜줬네.”

“…….”

대성은 저 편에서 헤벌쭉 웃고 있는 지수를 바라보며 말없이 혜정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특히 너 쓰러진 뒤로는 자기도 돈 벌겠다 뭐 하겠다 난리를 치니까……. 한창 친구랑 옷 사고 화장품 살 나이에 학교도 때려치우고…… 어휴. 엄마가 너희들한테 미안한 게 너무 많다.”

“됐어. 이런 날에 우울한 얘기 그만하고. 엄마도 즐기자.”

대성이 그렇게 말하자, 혜정은 어두운 기분을 떨쳐낸 뒤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성이 의식을 차린 후 처음으로 제대로 해보는 가족과의 외출.

쇼핑몰이라는 환경 자체는 대성 본인에게도 낯설었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 있으면 그 낯선 기분조차도 행복으로 치환된다.

“헐! 대박! 엄마! 엄마! 이것 좀 봐봐! 이거 엄마가 입으면 엄청 예쁠 것 같지 않아?”

지수는 놀이공원에 처음 온 어린애처럼 혜정의 손을 이끌고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대성은 한 발짝 물러서서 그 광경을 지긋이 구경했다.

싱긋.

아마 처음일 것이다.

조소나 실소가 아닌, 참된 의미의 미소가 그의 입가에 그려진 것은.

그렇게 셋이서 쇼핑몰 내부를 구경하던 중.

어느 멀티숍의 쇼윈도 앞에서 혜정의 발걸음이 멈췄다.

혜정은 잠시 뭔가를 뚫어져라 응시하나 싶더니,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게 사고 싶은 거야?”

그러나 대성의 눈썰미를 피할 순 없었다.

혜정은 어깨를 움찔 떨며 괜히 시치미를 뗐다.

“뭐, 뭐가?”

“저기에 있는 가방. 가지고 싶다는 듯이 봤잖아. 솔직히 말해도 돼, 엄마. 사 줄 테니까.”

“뭐, 뭐……. 비싼 핸드백 싫어하는 여자가 어디 있겠니.”

대성은 피식 웃었다.

비싼 핸드백은커녕, 아들딸 먹여 살리려고 점심저녁마다 무거운 비닐봉투 들고 장보러 다니기에 급급한 그녀였다.

그것은 혜정에게 있어서 당연한 의무였고, 그 의무를 짐짝처럼 느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싸구려 클러치백 하나도 가지지 못했건만, 혜정은 아쉬워하는 티 한번 내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그간 고생한 만큼의 보상을 누릴 가치가 있다.’

대가 없는 헌신만을 평생 바쳐온 혜정에게 고가 핸드백 하나 선물하는 것쯤이야.

여건이 갖춰줬다면야, 아들로서 당연히 해줘야만 했다.

“가서 골라, 엄마. 내가 사 줄게.”

“아, 아니. 얘. 그래도……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

“말했잖아. 계약금 많이 받았다고. 사 줄게. 아니, 내가 사 주고 싶어서 그래.”

“아들…….”

혜정은 핸드백 자체보다도 선물을 사 주고 싶다는 대성의 마음에 더 큰 감격을 느꼈다.

그 따스한 마음에 어린 진심에 비하면, 핸드백의 값어치 따윈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말이다.

“지수 너도 사고 싶은 거 있으면 골라. 옷이든 뭐든.”

“와! 진짜? 무르기 없기다?”

“빨리 가서 고르기나 해.”

“오빠 진짜 짱!”

지수는 방방 뛰며 곧장 옷가게로 들어갔다.

몸에 밴 가난은 쉽게 떨쳐낼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기에, 모두가 사치 앞에서 낯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어수룩함은 앞으로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 것이다.

지수와 혜정의 얼굴에 떠오른 행복한 웃음들이 그걸 증명해줬다.

‘사냥꾼이 되기를 잘했어.’

앞으로 벌어들일 수입으로 이와 같은 행복을 영원토록 가족에게 가져다줄 수 있다는 사실에 대성은 더없이 만족했다.

‘저 미소만큼은, 내가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지킨다.’

동시에, 결연히 마음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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