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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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산 시장 지하에 있는 블랙마켓에 들어오자마자 대성은 코를 틀어막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블랙마켓 내부는 마작 테이블 여러 개가 놓인 도박장과 흡사한 형태였는데, 그 좁은 공간 안에 아편과 대마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이다.
‘오래 있을 곳은 못 되는군.’
적당히 기분을 상기시키는 담배 연기와는 달리 이건 두통을 유발케 하는 고약한 악취였다.
대성은 뿌옇게 퍼진 연기를 손으로 헤치며 메인 데스크에 있는 마스터에게 다가갔다.
마스터는 키가 자신의 골반 언저리밖에 안 되는 소인이었다.
대성은 강현도의 사령이 지닌 기억 속에 담겼던 정보를 입에 담았다.
“045번 로커. 5302.”
물건과 돈이 담긴 로커의 특정 고유 번호였다.
신흥동파의 핵심 인원만이 아는 금고의 식별 코드를 말한 이상, 마스터는 눈앞의 상대방에게 의심을 품을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있을 뿐.
“저, 따로 큰 가방 같은 건 안 들고 오셨는지요?”
금고 안에 든 것의 스케일을 생각해보면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피곤하게 변명할 생각이 없었던 대성은 침묵만 유지했다.
“……뭐, 저희들은 안내만 해드리면 되니까요.”
마스터는 떨떠름하게 고개만 끄덕인 뒤, 신분 확인 절차는 깔끔히 무시하고 옆의 부하에게 턱짓했다.
“따라오시죠.”
안내하라는 명령을 받은 부하가 도박장을 벗어나 암시장 뒤편 복도로 통하는 출입구로 걸어갔다.
대성도 그 뒤를 따랐다.
홍등가같이 새빨간 조명의 복도를 한참 걸어가자 이내 커다란 철문이 나타났다.
신흥동파의 금고였다.
철컥-
부하는 투박한 열쇠로 문에 걸린 자물쇠를 풀며 말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설명 필요하세요?”
“어.”
대성은 짤막하게 내뱉었다.
굳이 이런 악인(惡人)들에게까지 존댓말을 쓰고픈 마음은 없었다.
부하는 잠깐 기분이 확 상하려다가도, 우락부락한 대성의 풍채에 압도되어 고분고분히 설명을 덧붙였다.
“어……. 들어가시면 잠금장치가 있을 건데, 패스워드는 고유 번호랑 동일합니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대성은 이번엔 대답조차 하지 않고 1차 개방된 금고 안으로 들어갔다.
볼일 끝났으니 얼른 사라지라고 말하는 듯한 그 태도에 부하는 한 번 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오래 살아야지, 오래.’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제 성질로 시비를 걸 만한 상대는 아니라고 판단해, 말없이 물러났다.
삑- 삑-
잠금장치에 암호를 입력하자 두꺼운 철문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손잡이를 잡아당겨 철문을 연 뒤, 대성은 넓은 금고의 안쪽으로 들어가 스위치를 올렸다.
팟-
불빛이 들어오고 내부의 전경이 드러난 순간.
“오길 잘했어.”
대성은 무심코 코웃음을 치며 흡족해할 수밖에 없었다.
열 평 정도 되는 내부를 가득 채울 정도로 쌓인 돈다발 앞에서 미소 짓지 않을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
그래도 한 조직의 사금고치고는 적은 액수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역시 그놈 기억대로 돈만 들어 있는 게 아니었군.”
하지만 돈다발 뒤에 그득히 쌓인 것들이 의문을 해소시켜줬다.
바로, 신흥동파가 불법적인 루트로 수집해왔던 사냥꾼 장비였다.
아머와 웨폰은 물론, 일시적으로 오러의 운용을 향상시켜주는 고액의 보조 장비까지.
‘아무리 성능이 떨어져도 기본 10억은 호가한다고 했었지.’
즉, 가치를 환산해보면 옆에 있는 30억의 돈다발보다 이쪽이 ‘진짜’라는 말이 되는 셈.
별 볼 일 없는 놈들일수록 쓸데없이 비싼 장비에 의존하는 법일까.
금고를 가득 채운 장비들을 혼자서 전부 아공간 포켓에 담으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듯했다.
물론.
“사령 병사 소환.”
이런 좁아터진 곳에서 땀 뻘뻘 흘리며 노동할 생각은 없었다.
그어어-
세 마리의 사령 병사가 칠흑의 연기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대성은 허공에 파문을 그리며 일렁거리는 아공간 포켓을 활짝 해방시키곤 명령했다.
“여기에 있는 거, 모조리 담아.”
특별히 녀석들 일하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구석으로 빠져주는 배려 정도는 베풀어줬다.
그어어-
명령을 받은 사령 병사 세 마리는 성실하게 돈과 물건들을 아공간 포켓 속으로 수납했다.
그런데도 보고 있기 묘하게 답답했던 대성이 명령 하나를 더 추가했다.
“서둘러.”
그어어……!
사령 병사들이 헐레벌떡 노동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10평짜리 금고 내부가 텅텅 비는 데는 5분이면 충분했다.
***
말총머리 여성과 더벅머리 남자는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블랙마켓을 떠나지 못하며 갈등에 휩싸였다.
백발 남자를 발견하면 보고하라는 이석우의 명령을 받았고, 드디어 오늘 타깃을 발견했다.
그런데 보고를 전달해야 할 이석우가 연락이 닿지 않는다.
더벅머리 남자가 대마를 뻑뻑 피워대며 불평을 쏟아냈다.
“우리보고 영원히 이곳에서 살라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야.”
그러자 옆에 선 말총머리 여성도 동의한다는 듯 한숨을 뱉었다.
그렇게 둘이 우물쭈물하며 방금 타깃이 들어갔던 출입구를 주시하던 그때.
덜컥-
출입구가 열리고 타깃이 다시 등장하더니, 서슴없이 블랙마켓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안 그래도 초조했던 둘은 타깃이 떠나가려 하자 마음이 조급해지는 걸 느꼈다.
말총머리 여성이 혀를 차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젠장. 저 새끼 나가는데?”
“아니, 그보다 가방도 안 가지고 온 놈이 금고는 왜 들어간 거야?”
“그건 우리가 알 바는 아니고. 아무튼, 어떡할래? 이대로 가만히 떠나보낼 거야?”
“기다려봐, 쓰벌. 생각 좀 하게…….”
몇 날 며칠을 이 아편 소굴에서 밤새워가며 기다린 타깃이다.
타깃이 다시 블랙마켓을 방문한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
일단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이대로 타깃을 놓치면, 자기들 신세가 단단히 꼬일뿐더러 성질 더러운 이석우한테 한 소리 들을 거라는 것.
결심을 내린 더벅머리 남성이 비장하게 말했다.
“……쫓아가자.”
“쫓아가서 뭘 어쩌게?”
“어쩌긴 뭘 어째. 일단 단장이 다음 명령 내리기 전까지 어떻게든 붙잡아놔야지.”
더벅머리 남성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나긴 기다림의 세월을 헛고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이야 말총머리 여성도 십분 이해했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저 새끼 했다던 짓 생각해보면 그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
“암만 나사 빠진 새끼라고 해도 우리가 개호구도 아니고. 설마 저놈 한 명을 어떻게 못 하겠어?”
“음…….”
“좀 용기를 가지세요, 이년아. 다 떠나서 시팔 난 후딱 이거 마무리하고 집 가서 좀 쉬고 싶다.”
“그렇긴 해.”
결론을 내린 둘은 블랙마켓을 나선 뒤 타깃의 뒤를 밟았다.
B급 각성자인 그들에게 미행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남은 건 타깃이 인적 드문 길로 빠져주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것뿐.
그렇게 5분 정도 따라갔을까.
“어?”
“야, 그래도 일이 나쁘지 않게 풀리는 것 같다.”
멍하니 앞만 보고 걷던 타깃이 느닷없이 방향을 확 꺾어 골목 안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순간 타깃이 미행의 기척을 알아채고 일부러 유도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타깃은 단 한 번도 힐끔거리거나 고개를 돌리는 기색 없이 앞만 보고 쭉 걸었으니까.
“놓치기 전에 가자, 얼른.”
상황이 형편 좋게 흘러감을 확신한 더벅머리 남성이 말총머리 여성을 재촉하며 타깃이 접어들었던 골목길로 들어섰다.
환한 대낮임에도 골목 안은 인적 하나 닿지 않았을뿐더러, 그 흔한 CCTV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물과 쓰레기 냄새가 역하게 진동한 나머지, 고등학생들이 숨어서 담배 피울 엄두도 안 낼 정도.
하지만 오히려 잘됐다.
보는 사람 없고 CCTV도 없으면 훨씬 더 쉽게 타깃을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둘은 미소를 씩 흘리며 골목 어귀의 코너를 꺾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골목 끝자락에서 쪼그려 앉은 채, 똑같이 웃음을 짓고 있던 타깃을 보자마자 싹 지워졌다.
“……어?”
“…….”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흉흉한 안광을 빛내던 타깃 앞에서, 둘은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타깃, 대성이 입을 열었다.
“요즘 따라 왜 이렇게 날 따라다니는 벌레들이 꼬일까.”
***
도심 한복판에 벌어진 은밀한 미행은, 사실 모양새 이상하게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태였다.
대성의 뒤를 쫓는 남녀의 뒤로.
‘설마 내가 있는 것까지 알아챈 건 아니겠지, 저놈?’
아까부터 쭉 블랙마켓에서 <홍마>의 수하들을 주시하던 고광현이 따라다니고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도보가 아닌, 건물과 건물 사이를 날다람쥐처럼 뛰어넘으며 쫓은 거지만.
‘근데 저 하얀 머리, 어딘가 좀 낯이 익은 것 같기도…….’
고광현은 골목과 접한 4층짜리 건물의 꼭대기 난간 밖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보통은 당당히 두 발로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나, 이번만 유난히 이런 소극적인 자세로 신중을 기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저 두 연놈은 몰라도, 하얀 머리한테는 자칫하면 들킬 수도 있다.’
하얀 남자의 감각이 여간내기가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저 남자는 한참 멀리 떨어져서 걷던 자신마저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을 떠올리니 등에서 식은땀이 절로 배어 나왔다.
‘일단 뭐 어쩔 건지 보자.’
경계심이 마음에 드리워지는 한편으로, 저 남자의 다음 행동에 궁금증이 일었다.
슥-
쪼그려 앉았던 대성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몸을 일으킨 순간.
말총머리 여성과 더벅머리 남성의 목울대가 달싹였다.
무슨 사람 덩치가, 절대 낮지 않은 골목 담벼락을 대부분 가릴 정도였으니까.
한편.
‘저놈은?’
상황을 지켜보던 고광현은 그제야 선글라스를 벗어 던진 대성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낯이 익나 했더니, 그럴 만도 했다.
‘이번에 초신성이라고 자자했던 그놈이잖아?’
상반기 라이센스 시험이 종료된 지 사흘도 안 된 시점.
대성의 얼굴과 유명세는 이미 같은 사냥꾼 업계 내에서 쫙 퍼진 상태였다.
‘근데 그런 놈이 갑자기 블랙마켓은 왜 온 거지? <홍마> 떨거지들은 왜 저놈을 노리는 거고?’
하얀 머리의 정체가 그 초신성임을 깨닫자마자 또 다른 의문들이 뭉텅이로 이어졌다.
하지만 혼자 고민해봤자 답은 안 나올 테니, 일단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아, 아니. 잠깐…….”
“이 새끼 봐라? 살려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똥배짱을 부리네?”
말총머리 여성은 당황한 눈치였고, 더벅머리 남자는 누가 봐도 명백한 허세를 부리는 중이었다.
파들파들-
강한 말은 하는 와중에도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두 다리가 허세임을 입증해주고 있었으니까.
그 순간.
차캉-!
더벅머리 남자의 손등에 장착된 건틀렛에서 세 갈래의 예검(銳劍)이 마찰을 자아내며 튀어나왔다.
흔히 클로(Claw)라고 불리는 오러 웨폰.
저벅, 저벅-
흉기 앞에서도 기세를 잃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대성 앞에서.
더벅머리 남자가 여차하면 휘두르겠다는 듯이 으르렁댔다.
“그 이상 다가오면 얼굴 가죽을 뜯어버리겠-”
공교롭게도.
꽈직-!
그 협박이 적용된 대상은 말을 꺼낸 당사자가 되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심했다.
입술을 열고 말을 뱉어야 할 얼굴이 통째로 사라졌으니까.
“……응?”
고광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지금.
더벅머리 남자의 얼굴이 팍-! 하고 깨지나 싶더니,
촤악-!
좁은 골목 사방 천지에 골 조각과 살점이 연분홍 핏물과 어우러져 곳곳에 난무했다.
털썩-
정확히 2초 뒤에, 얼굴 없는 남자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
위에서 지켜보던 고광현조차 지금 벌어진 일의 정황을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시작’이랑 ‘결과’만 있고 ‘과정’은 온데간데없는 느낌이랄까.
“어, 어어, 어……?”
이 무정한 참상을 제일 가까이서 본 말총머리 여성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피슈욱-
피범벅이 된 대성의 오른손에서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걸.
털퍼덕-!
두 다리에 힘을 잃은 말총머리 여성이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다음에 이어질 여성의 행동은 너무나도 뻔했다.
“죄, 죄송-”
그리고 그 뻔한 언행을 일일이 봐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콱-!
“헉……?!”
우락부락한 대성의 손바닥이 갈고리처럼 여성의 정수리를 움켜잡았다.
딱 거기까지만 보고.
고광현은 자기도 모르게 옥상 난간 아래로 머리를 숙였다.
‘미, 미친……!’
비위 약한 사람이 영화를 보다가 잔인한 장면이 나오기 직전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는 거랑 비슷했다.
하물며 고광현은 사냥꾼.
피와 살점이라면 세상 그 어떤 직업보다 가까이서 보았다.
그게 몬스터일지라도.
그런 그가 고개를 돌려버릴 정도였다.
‘강단이 뚜렷한 놈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초신성이라 불리던 그가 만인이 보는 앞에서 잔혹하게 정진철을 도륙 냈다는 건 안다.
왜냐하면, 고광현도 현장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었으니까.
모두가 정의를 집행하는 초신성의 활약에 환성을 내질렀지만, 고광현만큼은 달랐다.
‘알고 보니 그냥 완전히 고삐 풀린 놈이었잖아!’
망설임 없이 목숨을 취하는 그의 잔혹성에 경악했었고, 그때 느꼈던 충격을 지금 다시 느끼고 있다.
‘저 새끼들은 내 손으로 잡아야 하는데, 저러다 저 미친놈이 다 죽여버리겠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가 <홍마>의 소속원을 발견하면 연행하라는 협회의 명령을 받은 처지라는 거였다.
그런데 이러다 목 없는 시체를 대령해야 할 판이었다.
머릿속에 혼선이 일어난 고광현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근데 왜 이렇게 아까부터 조용하지?’
비명이든, 머리통이 깨지는 소리든 뭐라도 들려와야 할 텐데.
문득 이상한 점을 느낀 고광현이 난간 위로 빼꼼 고개를 내민 그때.
고광현은 보았다.
훙-
갑자기, 대성이 여성을 훌쩍 들어 자신을 향해 집어 던지는 광경을.
“잠……?!”
예고도 없는 돌발 사태가 닥치자 고광현은 소스라치며 옥상의 난간에서 크게 물러났다.
쾅-!
우당탕-!
포환처럼 내던져진 여성이 시멘트 난간을 산산조각 내며 옥상 바닥을 아홉 바퀴씩이나 나뒹굴었다.
“뭐, 뭐……!”
고광현이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옥상 바닥 위로 축 늘어진 더벅머리 여성을 돌아보았다.
그러기 무섭게.
“넌.”
섬찟-
고광현의 등 뒤에서 묵직하게 꽂히는 중저음.
아연하게 여성을 보고 있던 고광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박살이 나서 가루가 된 난간 위로.
“넌 또 뭐 하는 놈이지?”
하얀 머리의 괴물이 조용히 물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