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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발라르크는 귀왕의 통치 아래에서 사령 병사들을 지휘하던 군단장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귀왕의 폭거(暴擧)에 격분한 발라르크는 모반을 일으켰다.
사령으로 전락한 마수 중 유일하게 귀왕의 권능으로부터 심층 의식을 지배받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건 달리 말해, 발라르크의 반역에 동참해줄 병사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머지 사령 병사들은 자아의식을 빼앗긴 채, 귀왕에게 조건 없는 충성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겠지.’
결국 발라르크는 패배했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대신 영지 밖으로 추방되었다.
하루아침에 떠돌이 패배자 신세가 된 발라르크는 지옥을 방황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허름한 고성 하나를 발견했다.
‘섬멸룡이 지배하고 있던 고성.’
바로 대성이 지금 있는 이곳, ‘발라르크의 철성’이었다.
오랜 시간, 텅 빈 고성의 보물창고에 틀어박혀 배만 불리고 있었던 섬멸룡의 위세는 과거만 못했다.
떠돌이 신세를 견딜 수 없었던 발라르크는 그대로 고성으로 쳐들어가 섬멸룡과 혈전을 벌였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귀왕 밑에 있었을 시절, 사룡(死龍)을 길들일 수 있었던 목줄이 있었으니까.’
‘목줄’은 어디까지나 빗댄 말이긴 하지만, 꽤 정확한 비유였다.
확실히 발라르크가 지니고 있던 목줄은 지옥계 용족들에게 있어선 치명적인 아이템이었으니.
‘역시 잘 보관되어 있군.’
그리고 지금 대성이 발견한 발라르크의 보물고 속에서.
그 목줄이 찬란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이템 정보]
이름 : 용살흑도(龍殺黑刀)
분류 : 장비
‘명계의 용족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도검입니다.’
고유 성능1 : 용족에 속한 적 한정으로 공격력 60% 상승.
고유 성능2 : 장착 시 용족의 권능, 피어(Fear)로부터 완전 방어.
고유 성능3 : 용족 한정으로 특수 스킬, <일격일살(一擊一殺)> 발동 가능.
안 그래도 어두운 보물고 속에더 짙은 칠흑을 내뿜고 있는 길쭉한 도검 한 자루가 세워져 있었다.
‘용살’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그야말로 용을 죽이기에 이 이상 적격일 수가 없는 무기였다.
‘내가 발라르크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지.’
용살흑도가 애당초 용족이 아닌 사령이었던 발라르크에게 치명적이었던 원인은 다른 게 아니다.
발라르크는 섬멸룡을 죽이면서 녀석의 권능을 일부 흡수했다.
그 결과 절반은 사령이면서 절반은 반룡인 기묘한 육체로 거듭난 것이다.
‘발라르크의 갑옷’의 특수 스킬 중에 용의 날개를 펼치는 능력이 있는 것도, 발라르크가 절반이 용임을 나타내는 방증이었고.
[남은 보물고 이용 시간: 04:28]
5분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비밀 보물고지만 볼일을 마치는 건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스릉-
대성은 낡아빠진 곡검과 방패를 버린 뒤, 주저 없이 용살흑도를 집어 들었다.
‘나머지 것들은 필요 없다.’
지금 입고 있는 것보다 훨씬 성능이 뛰어난 방어구도 가득했으나, 대성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나다 한들 어차피 발라르크의 맹공 앞에선 종잇장과도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카가강- 카가강-
길쭉하게 뻗은 용살흑도를 바닥에 끌며 나아갈 때마다, 서슬 퍼런 불똥이 튀어 올랐다.
그렇게 성주의 방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계단을 전부 오른 순간.
[퀘스트가 완료되어 구현화 작업이 진척을 보입니다!]
[5,000pt의 공적 포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현재 구현율 : 발라르크의 철성 66%]
퀘스트 완료를 알리는 글귀가 나타났고, 그와 동시에 성주의 방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쿠구구-
용케 여기까지 온 침입자를 환영하듯이 열리는 문.
그렇게 훤히 드러난 성주의 방 내부엔,
“오랜만이군.”
거대한 흑암의 옥좌 위로 서늘한 냉기를 띠처럼 두른 잿빛 갑주의 광전사가 앉아대성을 맞이했다.
허어-
시리도록 차가운 입김을 내뿜는 광전사를 향해 대성이 말했다.
“발라르크.”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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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 구현 퀘스트-3 (진행 중)
‘212p 발라르크의 철성’
난이도 : 불명
내용 : 철성의 성주(城主), 섬멸 용기사 발라르크를 쓰러뜨리십시오.
제한 시간 : 없음
목표 : 발라르크 격퇴
보상1 : 공적 포인트 + 20,000pt
구현화 : 발라르크의 철성+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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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발라르크와 처음으로 맞닥뜨렸을 때.
대성은 생각했다.
선공 필승이라고.
나약한 자일수록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치기 어린 실수를 저지르는 법일까.
패기 좋게 옥좌 위의 발라르크에게 쇄도했던 대성이 ‘선공 필승’이 실은 ‘자살행위’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 오고 있군.’
과거의 그가 옥좌의 지척까지 달려들었을 때 즈음.
콰장창-!
측면의 유리창과 벽면을 깨부수며 섬멸룡이 들이닥쳤으니까.
그때 벌어졌던 일은 지금도 똑같이 발생하고 있었다.
쿠르릉-
콰장창-!
성주의 방 한쪽 벽면을 뚫고 검은 거죽으로 뒤덮인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섬멸룡이었다.
“도마뱀 새끼.”
놈이 들이닥치는 범위 안에 있었던 과거의 대성은 갑작스레 난입한 섬멸룡의 돌진에 휩쓸려 크나큰 중상을 입었다.
결국 발라르크와의 첫 대면에서는 우스꽝스럽게도 놈과 제대로 된 싸움조차 해보지 못하고 도망쳐야 했다.
그것이 이유였다.
지금의 대성이, 먼저 쇄도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던 건.
크오오오-!!
드넓은 성주의 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섬멸룡이 쩌렁쩌렁한 포효를 토해냈다.
그 포효는, 그냥 되는대로 울부짖는 게 아니었다.
[섬멸룡이 드래곤 피어(Dragon fear)를 사용합니다!]
[섬멸룡보다 낮은 격(格)을 지닌 대상에게 드래곤 피어가 스며듭니다.]
[피어에 휘말린 대상의 모든 능력치가 30% 감소합니다.]
평상시 상태에도 발라르크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대성을 더욱더 깊은 수렁으로 떨어뜨린 원흉이었다.
피어에 담긴 무형의 살기와 기백이 창날처럼 쏘아져 대성을 휘감았다.
하지만.
[용살흑도의 고유 성능이 섬멸룡의 피어를 차단합니다.]
[용족 대상 발견! 사용자의 공격력이 60% 상승합니다.]
필살의 무구를 지닌 대성에게는 그냥 귀청 따가운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고오오-!
용살흑도의 시커먼 도신(刀身)에 흑색의 돌풍이 휘감겼다.
무구가 지닌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으으……!
섬멸룡 또한 대성의 손에 쥐어진 게 자기를 목 졸라 죽일 목줄임을 알아챈 건지 애처로운 소리를 흘리며 기세를 죽였다.
‘검 한 자루 휘두르는 것조차 나약한 몸. 정말 성가시군.’
용살흑도보다 몇 배는 더 무거운 업화대검을 한 손으로 휘둘렀던 현실의 육체에 비하면, 절망적이리만치 비실비실한 몸이 따로 없었다.
공교롭게도 대성자신의 몸길이에 비견될 만큼 기다란 도검을 그나마 능숙하게 휘두르기 위해선.
파앙-!
혈귀화의 도움이 불가피했다.
[사용자를 반인반마로 우화시켜줍니다.]
[활성화되면 일정 시간당 일정량의 HP를 소모합니다.]
[모든 스테이터스 및 스킬의 공격력이 300% 상승합니다.]
붉은 악귀 같은 형상으로 둔갑한 대성이 땅을 박차며 섬멸룡에게 들이닥쳤다.
쩌억-
섬멸룡이 커다란 아가리를 위아래로 넓게 벌린 순간, 놈의 시커먼 목구멍 너머가 선명한 황금색으로 달아올랐다.
‘섬멸룡의 브레스.’
용살의 무기를 지닌 적수를 만나서일까, 섬멸룡은 시작부터 자신이 낼 수 있는 전력을 쏟아냈다.
이윽고.
우르릉-!!
지축을 뒤덮을 듯이 막대한 천둥 번개가 섬멸룡의 아가리에서 뿜어져 나왔다.
마치 신이 내리는 천벌을 형상화한 것처럼 압도적인 맹위.
그러나.
스릉-!
벼락의 불씨가 졸아붙기 시작할 때부터 준비하고 있던 대성이 용살흑도를 횡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들이닥쳐 오던 섬멸의 번개가 피뢰침에 가로막히는 것처럼 작렬을 멈추고 사그라졌다.
크으으-!
일격에 끝낼 기세로 쏟아낸 브레스가 허무하게 가로막히자 섬멸룡의 눈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브레스를 쏟아낸 용은 잠시 몸을 웅크리고 그 후유증을 견뎌내야 한다.
진이 빠진 섬멸룡이 두려움을 느끼며 벅찬 호흡을 내뱉던 찰나.
팍-!
혈귀화의 도움을 받아 일순간에 높인 도약한 대성이, 몸을 웅크린 섬멸룡의 등 뒤에 올라탔다.
‘직접 심장을 뚫기 전까진, 용족은 절대 죽지 않는다.’
날개와 다리, 심지어 목이 잘려도 심장만 멀쩡하다면 거의 불사에 가까운 존재들.
게다가 세상 그 어떤 갑주보다 단단한 가죽을 뚫고 심장을 노리는 건, 별다른 수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의 대성에겐.
“너를 또 보니 지긋지긋했다. 냄새 나는 도마뱀 새끼.”
용살흑도라는 별다른 수가 존재했다.
콰악-!
크어어어-!
허공을 가르며 내리꽂힌 도검이 섬멸룡의 단단한 몸뚱이를 뚫고 그 안에 있는 내장까지 관통했다.
푸우욱-!
길쭉한 검신을 넘어 그 손잡이 부근까지 깊숙하게 박아 넣은 끝에야, 칼날이 놈의 심장에 도달했다.
크, 으억……!
심장이 꿰뚫린 섬멸룡이 엷게 갈라지는 단말마를 뱉었다.
다리에 힘을 잃고 축 늘어진 섬멸룡의 거체가 모래 먼지처럼 바스라진 끝에 새하얀 백골 한 조각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대성은 1분도 안 되는 사이에 용을 쓰러뜨리는 위업을 달성했으나, 거기에 안주를 할 틈은 없었다.
파지직-!
섬멸룡이 사라지자마자 그의 뒤에서 뇌전(雷電)이 날아왔으니까.
대성은 다급히 옆으로 몸을 굴러 가까스로 번개를 피해냈다.
꾸르릉-!
살벌하게 울려 퍼지는 굉음을 한 귀로 흘린 대성은 몸을 일으켜 뇌전을 날린 장본인을 노려보았다.
발라르크가 그제야 옥좌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아끼던 애완동물이 사라지니 화라도 났나? 그러니 지켜보지 말고 진즉에 같이 싸웠어야지.”
비꼬듯 꺼낸 말이었으나 틀린 부분은 없었다.
실제로 발라르크가 용기사의 권능으로 되살려낸 섬멸룡은 그가 아끼던 신수(神獸)였으니.
꾸르릉-!
발라르크의 오른손에는 날 끝이 벼락에 휘감긴 장창이 쥐어져 있었다.
과거 대성이 업화대검을 얻기 전, 유용하게 사용했던 발라르크의 뇌창이었다.
펄럭-!
반룡의 권능을 발동한 발라르크의 등 뒤에서 용의 날개가 뻗어 나왔다.
팍-!
넓은 방의 천장 부근까지 날아오른 발라르크가 뇌창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그러자.
파지직-!
창날 끝에서 번개 폭풍이 휘몰아치며, 또 다른 무수한 벼락의 창이 비처럼 바닥을 향해 쏟아졌다.
광범위하게 몰아치는 저 번개 폭풍을 피하는 건 불가능.
하지만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막아내는 건 가능했다.
‘지금의 발라르크는 반룡이다.’
즉, 용살흑도가 지닌 압도적인 성능의 위력이 가감 없이 먹히는 상대.
쉬잉-!
대성이 난도질하듯 흑도를 휘두르자 위에서 떨어지는 번개의 창들이 그 난무에 가로막혔다.
본래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섬멸룡의 브레스를 잘라낸 것과 마찬가지인 원리였다.
파지직-!
쉬잉-!
대성은 마지막으로 작렬한 번개의 창을 파훼한 뒤.
“……!”
검을 휘두르는 손에 의식을 집중시키며 소리 없는 기합을 내질렀다.
촤아악-!
그리고 사선으로 휘둘러진 용살흑도에서 반달 모양의 참격(斬擊)이 뻗쳐 나와 허공에 떠오른 발라르크를 향해 날아갔다.
용족인 적에게만 발동 가능한 용살흑도의 특수 스킬, <일격일살>.
대기를 절단해내며 천장으로 솟구친 <일격일살>의 참격이, 발라르크를 덮쳤다.
“……!”
투구에 덮여 얼굴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대성의 눈에는 발라르크가 당황해하는 모습이 비치는 듯했다.
그 순간.
서걱-!
쏘아져 나간 참격이 발라르크의 몸을 꿰뚫으며 지나갔다.
갑주와 함께 통째로 육신이 절반으로 갈라진 발라르크가 피 보라를 울컥 뿜어내며 땅으로 허물어졌다.
털썩-!
[퀘스트가 완료되어 구현화 작업이 진척을 보입니다!]
[20,000pt의 공적 포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현재 구현율 : 발라르크의 철성 100%]
[구현화 작업 완료!]
발라르크의 격퇴를 마지막으로 구현화 퀘스트가 종료되었다.
“…….”
대성은 말없이 절명한 발라르크의 유해를 응시했다.
그때와 똑같았다.
딱 지금과 같은 저 모습 그대로, 발라르크가 죽었다.
‘이때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근거지를 확보했었지.’
과거의 대성은 발라르크를 죽이고 새로운 성주가 되어, 이 드넓은 철성을 근거지로 삼았다.
발라르크의 갑옷을 얻었던 것도 이때였다.
‘나 혼자 살기엔 너무나도 넓고 춥고 어두워서, 안식처가 되어주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이 커다란 철성 역시 비바람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을 제외하곤 오래 있을 만한 장소는 되지 못했다.
대성은 조용히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이게 뭐 그리 좋은 기억이라고 아련하다는 듯 회상하는 건가.
대성은 한시라도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 가족과 진짜 집이 있는 현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음?”
아무리 가만히 기다려봐도 복귀하겠냐는 메시지가 생성되지 않았다.
그 순간.
꾸륵, 꾸륵-
대성은 볼 수 있었다.
절단된 발라르크의 단면에서 ‘뭔가’가 꿀렁대며 기어 나오고 있는 것을.
“저건…….”
그것은.
대성의 기억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이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