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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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억은 없다.
죽은 발라르크의 몸에서 이변이 일어났던 적은 없었다.
뭔가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대성이 눈썹을 치켜뜬 그때.
촤아악-!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던 ‘뭔가’가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듯 그 몸체를 키워냈다.
“이건 또 뭐야.”
그것은.
뭐라 형용할 수가 없는 생김새를 한 존재였다.
어지러이 뒤엉킨 나무줄기 같기도, 있을 수 없는 크기로 확장된 종양 같기도 했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상에서 유일하게 짐작할 수 있었던 건, 눈으로 보이는 새빨간 두 개의 점이 몸체 사이로 번뜩인다는 점.
심지어.
<신성한 사도들의 숙명을 방해하는 넌 누구냐.>
말까지 했다.
음성변조를 최대한도로 낮춰서 적용한 것처럼 불쾌한 목소리였다.
“내가 할 말이다.”
대성이 용살흑도를 움켜쥐며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스템에 [email protected]#F 원인 불명의 fjkads;ld가 침투 djgldk 습니다.]
[필드의 지배자, ‘발라르크’를 세뇌한 ‘천상의 초월자’가 vqwr%@# fdkdj#%!$.]
[‘천상의 fjdkad’를 처치해 인과율을 조정하[email protected]#fdm,z시오.]
[인과율의 fadjal;d 에 성공[email protected]#면, 알마ᅟᅵᆼ 필드에 적용된 시공간의 봉인이 해제fdkal10니다.]
<천상의 초월자>
종족 : ■■■
「■■■■■■■■■」
「■■■■■■■■■■■■■■■■■■■■■■■■■■■」
메시지를 확인한 대성은 눈을 좁히며 미간에 주름을 그렸다.
마치 바이러스가 침투한 것처럼 군데군데 깨진 텍스트들.
아무래도 눈앞에 있는 종양은, 지옥의 시스템도 알지 못하는 이레귤러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필드의 지배자는 천상의 초월자에게 세뇌당했다고 했었지.’
대성은 퀘스트를 시작하기 전 판테온에서 본 메시지를 떠올렸다.
인과율을 조정하고, 시공간의 봉인을 해제하라.
저 종양같이 생긴 천상의 초월자란 놈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즉,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의미.
그렇게, 저놈은 과거로 거슬러 발라르크의 철성을 지배하던 발라르크를 숙주로 삼았다.
‘필드의 지배자를 세뇌하면 그 지배자가 통치하던 필드도 봉인되는 거겠지.’
아이템 구현 퀘스트가 현세의 육체로 현재의 지옥을 점령 중인 천상의 존재들을 무찔러 공간의 봉인을 해제하는 거라면.
필드 구현 퀘스트는 과거의 육체로 과거의 지옥을 점령 중인 초월자들을 무찔러 시간의 봉인을 해제하는 방식인 듯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공간’의 봉인이 전부 사라지는 것일 터.
‘저놈을 죽여 인과율이 조정되면, 이곳의 시공간이 비틀리며 필드가 해제되는 건가.’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지만.
어쨌든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혼자 넘겨짚는 건 불필요한 행위였다.
지금은 일단,
<사도들께서 수행 중인 과업에 초를 치지 마라, 이놈!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거냐!>
저 종양같이 생긴 초월자를 처리하는 게 급선무다.
꾸욱-
유일한 대항 수단인 용살흑도를 굳게 쥐며 대성은 생각했다.
‘전력을 가늠할 수가 없군. 생긴 게 저러니 어떤 방식으로 공격해 올지 예상도 안 가고.’
현세의 육체를 지닌 자신이었다면 전력 따위를 살펴볼 필요도 없이 무작정 찢어 죽이고 봤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육체는, 나약했던 시절의 자신이다.
그때는 어떻게든 몸을 사려가며 전황을 파악하고, 적이 자신보다 강할 시엔 주저 없이 줄행랑을 쳤어야 했다.
적에 대한 완벽한 분석 없이는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었던 약자.
그런 시절의 전투력을 지닌 상태로 정체불명의 적과 마주한 이상 섣부른 행동은 금물이었다.
분전(奮戰)을 예상하는 대성이 고요히 초월자를 노려보던 그때.
[구현화 작업을 완료하여, 현재 접속 중인 유체에서 혼백이 빠져나갑니다!]
딩-!
눈앞의 시야가 수십 갈래로 갈라지며 대성은 말 그대로 영혼이 빠져나가는 탈력감을 느꼈다.
팟-
바로 사위에 어둠이 펼쳐지고,
“…….”
대성은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야 한다는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 직감을 따라 대성이 우락부락한 팔을 앞으로 뻗은 순간.
촤아악-!
어둠이 걷히고 시커먼 핏물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시금 눈앞에 있는 천상의 초월자를 눈에 담는 것과 동시에, 대성은 지금 이 짧은 찰나에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깨달았다.
<뭐, 뭐냐, 이건…….>
자신은 지금.
<넌 또 어디서 튀어나온…… 아니, 같은 놈인가?>
과거의 나약했던 자신의 육체를 찢어발기고.
막강한 현세의 육체를, 이곳에서 드러낸 것이다.
[절대자께서 지닌 현세의 육체가 과거의 유체를 걷어내고 지금 이 자리에 강림합니다!]
그 깨달음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듯이 시스템 메시지가 글귀를 띄웠다.
쿵-!
허약하고 비실비실했던 다리의 무게감이 돌덩이처럼 둔중해지고, 시야의 눈높이가 방금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상승한 게 느껴졌다.
“역시 옛날보단-”
현세 강림.
봉인된 시공간을 뛰어넘고 불러들인 ‘원래’의 자신을 자각하며.
“지금이 좋군.”
‘평소 상태’의 모습을 한 대성이 주먹을 쥐었다 펴며 심드렁하게 감상을 뱉었다.
<무, 무슨…….>
제삼자, 초월자의 시점에선 굉장히 기괴한 장면으로 보였을 것이다.
갑자기 눈앞에 있는 적의 몸이 찢겨나가더니 뱃속에서 웬 더 커다란 존재가 툭 튀어나온 셈이니까.
‘이 몸이라면 문제없지.’
저 종양같이 생긴 놈한테 패배한다는 게 상상이 안 가는 육체.
지금부터 어떻게 저놈을 족칠까, 그런 궁리를 시작한 대성이 여유로이 천상의 초월자를 바라봤다.
<과업이 이루어진 장소에 멋대로 발을 들이지 마라, 이놈!>
천상의 초월자는 언뜻 당황한 눈치였으나 이내 기세등등하게 외치며 쇄도해 왔다.
아니, 몸을 뻗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발라르크의 절단면에 뿌리를 내린 괴기스러운 몸을 길쭉하게 빼 달려들었으니까.
이윽고.
쩌억-
종양같이 생긴 몸에 공간이 생겨났다.
녀석 나름대로 ‘입을 벌린’ 것에 가까운 행위.
와득-!
천상의 초월자는 그 공간 속으로 대성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이놈을 숙주로 삼아, 이곳의 새로운 지배자로 만든다!’>
침식이었다.
숙주 삼은 필드의 지배자가 목숨을 잃은 지금.
초월자인 그가 시간을 뛰어넘어 이곳에 계속 수육(受肉) 하려면 새로운 숙주가 필요했다.
그 숙주를, 초월자는 대성으로 정한 것이다.
<‘표층 의식부터 잡아먹은 뒤 심층 부위까지 지배해주마!’>
의식과 무의식을 모조리 지배해 천상의 존재들이 설정해놓은 인과율 속에 숙주를 가둬놓는 것.
그것이 초월자가 행하는 침식이었다.
하지만.
<……!>
뭔가 이상했다.
심층 부위까지 지배하기는커녕, 첫 번째 관문이 표층 의식부터 단단히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이, 이건…….’>
그때.
초월자는 깨달았다.
<‘너, 너무……!’>
자신은 지금, 잡아먹어선 안 될 존재를 잡아먹었다고.
제아무리 잔학한 보아뱀이라도 코끼리를 집어삼킬 순 없다.
그렇듯, 대성의 의식을 완전히 지배하기엔.
초월자, 본인부터의 격이 너무나도 열등했다.
<어, 억……!>
그릇된 판단을 했음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콰아악-!
비대하게 부풀려진 초월자의 하얀 몸을 뚫고 우악스러운 팔뚝이 튀어나왔다.
이윽고.
<아, 아아악-!>
촤아악-!
초월자의 몸이 안에서부터 갈라지고, 폭발하듯 찢겨나갔다.
녹색의 체액이 한가득 터지나 싶더니 이내 초월자의 육편과 함께 신기루처럼 일렁이며 사라졌다.
“깔끔하게 사라지니 고맙군.”
한편으로는 잠깐이나마 초월자에게 집어삼켜진 불쾌감에 약간 닭살을 느끼며 대성이 그리 말했다.
[천상의 초월자가 소멸했음을 확인! 붕괴한 시스템을 복구합니다!]
[초월자의 지배가 사라져 해당 필드의 인과율이 조정됩니다!]
[필드의 지배자가 점했던 권좌(權座)를 점하여 퀘스트를 완료하십시오!]
[초월자의 지배가 사라져 해당 필드의 인과율이 조정됩니다!]
이제야 멀쩡한 텍스트가 쓰인 시스템이 나타났다.
권좌를 점하라.
처음에는 무슨 소리가 했지만, 이내 짚이는 바가 있었던 대성이 시선을 이동시켰다.
방의 가장 안쪽에 놓인, 발라르크가 앉아 있었던 검은 옥좌로.
“…….”
대성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거대한 옥좌 위에 앉았다.
그 순간.
스르륵-
절단된 발라르크의 시체에서 한 번 더 이변이 발생했다.
이번에 나타난 건 아까 그 초월자 같은 뭔가와 달랐다.
그것은 반투명한 발라르크의 혼백이었다.
발라르크는 유령처럼 흐릿한 모습으로 옥좌 위의 대성과 마주했다.
이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덜컹-! 쿵-! 쿵-!
굳게 닫힌 성주의 문이 활짝 열리며 두 갈래의 돌풍이 들이닥쳤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방을 가로지르던 돌풍은 옥좌의 바로 앞에서 움직임을 멈추고 바닥에 안착했다.
두 개의 돌풍은 서서히 형상을 갖춰가기 시작하며 발라르크의 옆에 도열했다.
‘센티넬. 섬멸룡.’
방금 대성이 죽인 철성의 센티넬과 섬멸룡의 혼백이었다.
그렇게 영령의 형태로 등장한 세 마리의 마수가 옥좌를 점한 대성을 맞이한 순간.
슥-
그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마치 왕을 알현(謁見)하는 신하들처럼.
엄숙하고도 기묘한 기류가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시스템이 안내문을 띄웠다.
[‘발라르크의 철성’의 시공간이 완벽히 해제되어, 해당 필드에 주둔했던 마수들을 소생시킬 수 있습니다!]
[소생된 마수들은 시공간의 벽을 허물고 절대자에게 영원토록 충성할 것입니다!]
[소생 가능한 마수 목록 : 1. 철성의 센티넬 2. 발라르크의 섬멸룡 3. 섬멸 용기사 발라르크]
[목록에 나와 있는 마수들을 소생 및 현세에 구현시키겠습니까?]
***
도곡동 어느 초등학교의 운동장.
총화기를 움켜쥔 몇몇 군인이 꿀꺽 침을 삼키고 있었다.
어지러이 주차된 장갑차 다섯 대와 원형 운동장의 외곽에 둘린 철벽의 바리케이드.
장소를 생각해보면 괴리감 가득한 장면이었으나, 거기엔 마땅한 이유가 존재했다.
‘……불안한 감은 틀린 적이 없어.’
오진태 대령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장 한가운데에 휘몰아치고 있는 게이트를 응시했다.
그렇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2등급 게이트가 발생한 것이다.
물론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건 당연했다.
‘이거, 무조건 터진다.’
하물며 그 게이트가 프렉쳐 현상을 보이기 직전이라면, 그냥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원군을 더 불러모으고, 인근에 미리 사냥꾼들을 대기시키고, 바리케이드를 이중 삼중으로 치는 것.
당연하다 못해, 최소한 이렇게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첫 발견 당시, 프렉쳐 발생까지 예상 시간이 5시간이라고 했었지.’
협회 소속의 게이트 시커들은 해당 게이트의 에테르 파장과 진폭을 계산해 프렉쳐까지의 남은 시간을 분석한다.
일기예보처럼 말이다.
그리고 프렉쳐 발생까지 12시간도 안 남은 게이트가 발견되면, 이렇게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수많은 병력이 현장에서 대기한다.
만약 게이트가 터지면 즉석에서 참사를 막아낼 필요가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게이트의 프렉쳐 발생 예상 잔여 시간은 5시간.
안 그래도 터지기 직전의 게이트인데 더 최악이었던 건.
“지금 몇 시야?”
“23시 37분입니다.”
“젠장, 한 시간도 안 남았네.”
프렉쳐를 막기 위해 게이트로 돌입했던 사냥팀에게서 소식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안 그래도 다섯 시간 안에 봉쇄하는 게 기적 같은 2등급 게이트.
그런데 도무지 게이트가 닫힐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멍청이라도 이것이 무슨 흐름인지 파악할 수 있으리라.
“지금부터 교전에 대비한다.”
“대, 대령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 게이트는 무조건 터져.”
오진태 대령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사색이 되었다.
그들은 그저 바랐다.
남은 시간 내로 돌입팀들이 성공적으로 게이트를 봉쇄하기를.
***
돌입팀의 지휘 대장, 이도훈은 이 순간이 부디 악몽이기를 기도했다.
“꺼, 꺼억……!”
온몸이 하얀 갈기에 뒤덮인 새하얀 늑댄 인간의 몬스터였다.
2등급 게이트에 출몰하는 상위 몬스터, 백랑(白狼).
그들 중에서도 제일 약한 말단 병사가.
“컥……!”
우득-!
이도훈이 이끄는 돌입팀의 가장 강력한 에이스를 일격에 목뼈를 부러뜨려 죽여버린 것이다.
크르르-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는 듯이, 백랑 병사가 으르렁대면서 코웃음을 쳤다.
“아, 아아…….”
축 늘어진 에이스의 시체를 본 이도훈은 도피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홱 돌렸지만 소용없었다.
사방에 즐비하게 널린 인간의 시체들이 동산을 이루고 있었으니까.
“엄마, 엄마…….”
강직하고 굳건하기로 유명한 협회 소속의 A급 사냥꾼 이도훈이 눈물을 왈칵 흘렸다.
쿵, 쿵-
남은 먹잇감이 흐느끼는 걸 본 백랑 병사가 육중한 발소리를 내며 이도훈에게 다가갔다.
슥-
그리고 예기 어린 발톱을 내세우며 팔을 치켜들었다.
“어, 엄마, 살려주세요. 엄마…….”
이도훈이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흐느낀 순간.
콰직-!
이도훈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게이트 바깥쪽에 대기 중인 이들이 그토록 바랐던 기적은.
끝끝내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