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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평화의 상징이라 불리는 KHA가 강남에 있을까.
강남에 부자가 많으니까? 돈 없는 서민보다는 중산층들과 높으신 분들의 안위가 더 중요하니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달리 말해, 단순히 그 이유가 전부라는 것도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도곡동에 대한민국 최초로 1등급 게이트가 나타난 적이 있었다.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A급 사냥꾼 대다수와 당시 아직 세 명뿐이었던 S급 전원이 나서야 했다.
대한민국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전력을 쏟아부었으나 피해는 막심했다.
S급은 목숨을 건졌지만 많은 A급 판정의 사냥꾼이 불귀의 객이 되어야 했다.
그때부터였다.
청와대 근처에 있던 KHA의 본사를 강남으로 옮기고, 한반도 전역에 지부의 숫자를 늘린 건.
세계 역사를 둘러봐도 보고 사례가 많지 않은 1등급 게이트가 이 좁은 한국, 그것도 강남 지역에 발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니 이곳에 집중적으로 안보 레벨을 높이는 건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위이잉-!
<여기는 중앙 방위국 경보통제소입니다! 게이트 프렉쳐 경보를 발령합니다! 현재 시간 강남 지역에 실제 게이트 프렉쳐 경보를 발령합니다! 공무원의 지시에 따라 가까운 지하 대피소로 신속히->
그 과도한 경각심과 주의가, 오히려 이곳 주민들에게 안전불감증을 가져다주었다.
“에이 씨, 자다가 깼잖아.”
“어, 어떡하죠. 여보?”
“이 오밤중에 속옷 차림으로 뛰쳐나가라는 거야, 뭐야? 곧 잠잠해지겠지. 잠이나 마저 자자고.”
바로 지금처럼.
어느 제약회사의 고위 이사인 중년 남성은 귀를 틀어막으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와 동침 중이었던 부인이 지금 이 순간에도 시끄럽게 울리는 사이렌에 노심초사했다.
“그, 그래도 역시 대피소로 이동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 요즘 잠잠하다 싶더니 왜 갑자기…….”
“아, 협회 애들이 알아서 하겠지. 정 뭐, 그 괴물 새끼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오면 가디언 애들이 막아줄 텐데 뭘 그리 걱정해?”
가디언(Guardian).
유인(有人)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직원 전부가 사냥꾼으로 구성된 오늘날의 보안 업체이다.
특정 건물 근처의 사무실에 상주하여 유사시에는 언제든지 실력파 사냥꾼이 곧바로 출동하는 형식.
물론 동원되는 인력의 가치를 생각해보면 결국 가디언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건 가진 자들뿐이다.
“거, 어디 써먹지도 못하는 군바리들 있는 대피소보다는 우리 집이 훨씬 안전해.”
게이트 프렉쳐라면 두 번 정도 겪어봤다.
하지만 몬스터의 마수(魔手)가 그에게 닿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집 앞마당까지 몬스터가 들이닥쳤던 최악의 상황에도, 결국엔 가디언의 사냥꾼들이 입구에서부터 해결해줬으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접고 마저 자. 당신은 몰라도 난 내일 아침부터 출근해야 하는 몸이라고. 안 그래?”
***
위이이잉-!
전쟁 상황을 방불케 하는, 아니, 전쟁 상황 그 자체임을 시사하는 사이렌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탕-! 탕-!
“끄아아악-!”
초등학교 운동장 사이로 빗발치는 총성과 인간의 비명은.
위이잉-!
밤하늘에 닿을 것처럼 시끄럽게 울리는 사이렌에 모조리 파묻히고 있었다.
털썩-!
어깻죽지가 사선으로 잘려나간 오진태 대령을 마지막으로.
운동장에 대기 중이었던 군인 전원과 사냥꾼들이 사망했다.
크르르-
어금니가 드러난 입가에 선홍빛 피를 잔뜩 묻힌 늑대인간들의 무리가 넓은 운동장을 장악했다.
백랑 부대.
2.5m 상당의 거구를 지닌 녀석들은 저마다 창칼과 도끼 등을 부여잡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인근에 살아 있는 사냥감의 기척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귀를 따갑게 하는 경보음과 어렴풋이 들려오는 인간들의 가쁜 숨소리.
크르르-
백랑 부대를 이끄는 군단장이자 늑대인간 종족의 최상위 포식자인 바우칼라크가 붉게 번들거리는 안광을 내뿜으며 코를 킁킁거렸다.
느껴진다.
유린을 즐길 장소가 어디 있는지.
유린당할 사냥감들이 제일 많이 몰려 있는 장소가 어디쯤인지.
청명한 보름달이 환하게 내리쬐는 한밤.
살육 욕구가 극상에 치달은 바우칼라크는 오늘, 이곳 세계를 지배할 작정이었다.
슥-
바우칼라크는 운동장 위로 도열 중인 백랑 병사들을 돌아본 뒤.
팍-! 커다란 대검을 위로 치켜들며 포효했다.
크오오오-!
그 호령에 맞춰 가히 세 자릿수에 달하는 백랑 병사들이 그야말로 늑대처럼 울부짖었다.
진군(進軍)이 시작되었다.
***
[소생 가능한 마수 목록: 1. 철성의 센티넬 2. 발라르크의 섬멸룡 3. 섬멸 용기사 발라르크]
[목록에 나와 있는 마수들을 소생 및 현세에 구현시키겠습니까?]
“…….”
턱을 괸 자세로 옥좌 위에 앉은 대성은 고민에 빠졌다.
필드를 구현한 것뿐만이 아니라, 그 필드에 있었던 마수들까지 불러올 수 있다는 말.
마수들을 현세에 구현시킨다.
여러 가지 의미로 판단을 내려야 될 부분이었다.
‘나한테 충성한다고 했으니, 지구를 위협하지는 않겠지만…….’
시스템이 주는 보상이 결과적으로 해가 되지는 않았기에 넙죽넙죽 받아왔다.
그러나 대성은 마수 구현만큼은 덥석 받아들이지 않았다.
‘확인이 필요해.’
지금 막 머릿속에 떠오른 이 ‘의문’만 해결되면, 그는 기꺼이 마수를 지구에 구현시킬 생각이었다.
대성이 시스템을 향해 물었다.
“구현시킨 마수들도, 필드와 아이템과 마찬가지로 로드가 가능한가?”
바로 타인의 눈에 띄지 않게 마수들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이때.
시스템의 대답이 돌아왔다.
[절대자께서 인식하신 특정 대상에 마수를 로드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로드 시, 마수의 본래 형태는 인식 대상에 가려져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성이 원하던 완벽한 대답이었다.
마수도 로드가 가능하다.
즉, 마수의 외견을 숨길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경비병이라도, 이런 흉하게 생긴 놈들이 가까이 있으면 엄마랑 지수가 무서워하겠지.’
대성은 구현한 마수 무리에게 자신의 가족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릴 생각이었다.
협회와 가까운 집에다 필드, 더해서 절대자의 명령이라면 절대 충성하는 마수들까지.
뜻하지 않은 삼중의 방호책까지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같은 편이라고 해도 심약한 혜정과 지수가 보기에 마수는 어디까지나 괴악하게 생긴 괴물들.
외관만이라도 숨길 필요가 있었다.
또한.
‘제삼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 마수를 다룰 수 있다는 건 커다란 메리트지.’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의 눈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 투명한 병사.
전술로써 응용할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했다.
결론을 내린 대성은 시스템의 질문에 긍정을 표했다.
[<철성의 센티넬>, <발라르크의 섬멸룡>, <섬멸 용기사 발라르크>. 총 3기의 마수가 소생합니다.]
[구현시킨 필드의 대표자, <섬멸 용기사 발라르크>가 판테온에 입장해 절대자께 인사를 올립니다.]
대성이 시스템에 나온 마수들의 소생을 허락한 순간.
파아악-!
발라르크의 영령에서 광휘가 쏟아져 나왔다.
이내 빛이 사라지고, 잿빛 갑옷과 붉은 망토를 걸친 광전사가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아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얼굴을 가린 투구 밖으로 중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섬멸의 용기사 발라르크가 주군께 인사를 올립니다.”
발라르크가 시공간의 인과를 뛰어넘고 이곳에 되살아난 순간.
[판데모니움의 마수들이 발라르크에게 부러움을 표합니다!]
[어떤 마수가 아픈 배를 움켜쥐며 바닥을 구릅니다!]
무(無)의 세계에 갇힌 마수들이 질투심을 보였다.
대성도, 발라르크도 그 메시지를 산뜻하게 무시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발라르크.”
“……인과의 재조정 덕에, 주군께서 새로운 지옥의 절대자로 자리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하드립니다.”
“그래.”
“주군께선 시공간을 초월하여, 저를 억류하고 있었던 외적을 친히 격퇴해주셨습니다. 이 은덕을 어찌 갚아야 할지…….”
“너를 위해 한 짓은 아니다. 다만 보답하고 싶다면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그게 무엇이든, 주군께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다면 제 시체라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기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발라르크는 충성심이 대단했다.
귀왕이 폭정만 저지르지만 않았어도 발라르크는 아마 평생 녀석의 앞잡이로 복종했을 터.
하지만 이제는 그 충성심이 대성의 것이 되었으니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대성이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예를 표하는 발라르크에게 명령했다.
“너는 앞으로 영원토록 내 가족을 지킨다.”
“주군의 혈족…… 말입니까?”
“내 목숨보다 소중한 이들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피해가 발생하면, 그때는 내가 너를 죽인다.”
“그것이 제 사명이라면, 모든 걸 내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완수해내겠습니다.”
대성은 발라르크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직접 검과 검을 맞대본 상대이기에 보낼 수 있는 신뢰였다.
얼마 전 성찬호와 함께 처음으로 들어갔던 게이트에서 만난 몬스터가 평균이라 가정한다면.
놈들이 수십, 수백씩 똘똘 뭉친다 해도 발라르크의 근처에도 오지 못할 터.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래도 확실히 시험해볼 필요는 있겠지.’
변수가 발생할 여지를 고려해봐야 한다.
막연한 상상이지만 지구로 구현된 마수의 위력이 지옥에 있을 때보다 약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지구라는 차원에서 구현된 마수들이 과연 잘 싸울 수 있는지, 확신을 얻고 싶었다.
그때.
[절대자의 손바닥에 마수와 필드 구현의 인(印)이 새겨집니다!]
[앞으로 구현 가능한 모든 마수와 필드는 아공간 포켓 대신 구현의 인 속에 저장됩니다!]
메시지를 읽은 대성이 오른 손바닥을 확인했다.
기이한 형태의 문신, 구현의 인이 그곳에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자꾸 이상한 게 몸에 생기는군.’
몸에 뭘 새기는 게 그리 달갑지 않았던 대성이 혀를 찼다.
하지만.
‘느껴진다.’
서서히, 그리고 묵직하게 퍼져나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두근거린다고 해야 할까.
뭐라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감각이 손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신체 곳곳에서 느껴졌다.
‘지옥이 내 손안에 있는 게.’
그저 평범한 손바닥.
하지만 이 안에, 철성의 센티넬과 섬멸룡, 더 나아가 발라르크의 철성 전역이 손에 잡힐 듯이 생생했다.
손에 잡힌다.
그것이 지금 대성이 느끼고 있는 감각을 나타내는 데 가장 정확한 표현이리라.
대성은 평소와 다른 감촉의 손바닥을 쥐었다 펴며 발라르크에게 말했다.
“너도 들어가 있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시길.”
대성이 명령을 내리기 무섭게 새카맣던 구현의 인이 피처럼 붉은빛을 흘렸다.
[<섬멸 용기사 발라르크>를 구현의 인 속에 회수하시겠습니까?]
대성이 고개를 끄적이자.
화아악-!
잿빛 광전사의 몸이 격렬하게 불타며 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볼일은 여기서 끝이다.
남은 건.
‘시험해보는 일만 남았군.’
한 치의 허점도, 실수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도 그럴 게, 지금 판테온에서 고생한 것도 다 가족을 지킬 방호책을 마련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엄마와 지수가 고난에 휘말렸을 때, 그때 가서 하자가 발견돼도 늦는다.’
어떻게 시험하면 좋을까.
어디 게이트 프렉쳐라도 발생해, 당장 손에 얻은 것들의 성능을 확인해볼 기회가 오면 좋을 텐데.
‘게이트 프렉쳐가 그리 빈번하게 발생할 리도 없고. 그런 형편 좋은 일은 기대해선 안 되겠지.’
대성은 괜히 조급해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판테온에 들르지 않고 바로 현실로 돌아갔다.
석문을 나선 그가 현실의 어둑한 밤거리로 발을 들이는 순간.
삐-! 삐-!
바지 주머니 속에 있는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뭔가 싶었던 대성이 휴대폰을 꺼내 신호의 정체를 확인하기 무섭게.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강남구 도곡동에 2등급 게이트 프렉쳐 발생!>
게이트 프렉쳐가 발생할 시 지역 불문 전국의 국민에게 발송되는 긴급재난문자.
‘형편 좋은 일이 벌어졌군.’
대성에게 있어서 재난은 다른 말로 기회이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강남이라면 여기서 거리가 꽤 된다. 뛰어갈까.’
상계동에서 도곡동까지.
대성이 단순한 달리기로만 주파할 경우 30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시간도 단축할 겸,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시험해볼 수 있는 게 존재했다.
“섬멸룡 구현.”
활짝 편 손바닥을 앞으로 내뻗으며 대성이 그리 중얼거린 순간.
[<발라르크의 섬멸룡>이 구현의 인에서 소환됩니다.]
[구현체가 절대자의 존재를 확인! <발라르크의 섬멸룡>이 주종 관계를 수정해 <한대성의 섬멸룡>으로 바뀝니다.]
화르륵-!
손바닥의 문신에서 불꽃이 세차게 터져 나오더니 거대한 용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불길을 뚫고 거대한 용의 발이 땅바닥을 밟았다.
이곳 밤거리를 가득 채울 만치 거대한 검은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옥의 섬멸룡이 현세에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푸륵, 푸륵-
놈은 다짜고짜 울부짖지 않는 대신 말처럼 무거운 숨만 뱉었다.
“가까운 곳에서 가족이 자고 있으니까 시끄러운 소리는 내지 말고.”
대성이 입가에 검지를 대며 말하자 섬멸룡은 작은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대성은 섬멸룡을 타고 강남으로 향할 작정이었다.
다만.
“흠…….”
문제는 달동네 길거리 하나를 거의 다 차지할 만큼 섬멸룡이 커다랬다는 점이다.
이런 몸뚱이로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면 분명 그 순간 주변의 담벼락과 집이 무너지면서 한바탕 난리가 벌어질 터.
대성이 어떻게 할지 방법을 고민하는 사이.
크르르-
[섬멸룡이 절대자의 편의에 맞춰 일시적으로 자신을 비룡(飛龍)으로 격하시킵니다.]
웅크려 앉은 섬멸룡의 몸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전함에 가까웠던 섬멸룡의 거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리무진만 한 크기로 축소되었다.
원하는 형태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족의 고유 권능, 폴리모프(Polymorph).
눈치 빠른 섬멸룡의 처신에 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고 가기도 딱 좋은 크기군.”
휙-!
대성은 가볍게 뛰어올라 비룡이 된 섬멸룡의 등 위에 안착했다.
섬멸룡은 순종적인 기색을 보이며 등에 탄 대성의 의식과 공명했다.
“강남으로 가자.”
강남이란 지명(地名)을 섬멸룡이 알 리 없었다.
그래도 의식의 공명 덕에 지금 주인이 말한 지역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펄럭-!
섬멸룡이 검은 날개를 기세 좋게 펄럭이며 하늘로 비상했다.
그저 땅을 한번 박찼을 뿐인데 대성을 태운 섬멸룡의 신형이 순식간에 구름을 뚫고 보름달 아래까지 솟구쳤다.
그리고…… 팡-!
허공을 박찬 섬멸룡이 창공을 가로지르며 비행을 개시했다.
세찬 밤바람이 들이닥치며 대성의 앞머리를 위로 쓸어냈다.
저 구름 아래로 어렴풋이 펼쳐진 드넓은 밤의 풍경이 빠르게 휙휙 바뀌었다.
뒤로 쭉 뺀 섬멸룡의 뒷발과 꼬리로부터 충격파가 쾅쾅 터져 나오며 구름이 폭발하듯이 흩어졌다.
소닉붐.
음속을 웃도는 속도로 어둠의 창공을 쇄도하는 섬멸룡의 등 뒤로 기다란 하얀 띠가 쭉 뿜어져 나왔다.
“기동력은 합격이군.”
격렬히 닥쳐오는 밤바람을 기분 좋게 맞으며 대성이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
***
쿵, 쿵, 쿵-!
크르르-
백랑 부대의 진군은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선 처음 보는 세계에 현신하는 것임에도.
발달한 후각을 통해 사냥감의 기척을 쫓는 그들의 전진은 마치 처음부터 이곳 지리를 꿰뚫어 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것이 원인이었다.
“살려줘! 살려주세요!”
“꺄아아악-!”
“경보 울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여기까지 몬스터가 닥쳐들어!”
무수한 사람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는 원인.
이제 막 구청 근처의 지하 대피소에 도착하려던 참인 지역민들 앞에 백랑 무리가 등장한 것이다.
콰직-!
데구르르…….
지역민들을 안내하던 공무원 중 한 명이 백랑이 휘두른 흉기에 목이 날아갔다.
“앞에 빨리 좀 가라 그래! 씨팔!”
“밀지 마! 밀지 말라고!”
“우리 아이! 우리 아이가 보이질 않아요…….”
덕분에 느긋하게 대피소로 향하던 지역민들의 발걸음이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우당탕-!
자기가 먼저 대피소로 들어가겠다고,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며 혼비백산했다.
“다 비켜!”
“이러다 우리 다 죽겠어!”
고꾸라진 사람들끼리 몸이 뒤엉켰다. 제 목숨 살리기에 급급했던 이들은 넘어진 사람의 몸을 밟고 지나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느릿해도 비교적 질서정연했던 대피 행렬이 아수라장으로 돌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콰직-!
“아아악-!”
짧은 행렬의 꼬리 지점에선 아수라장을 넘어 살육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프렉쳐 경보를 듣고 대피소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사냥꾼들이 백랑 부대와 대치했지만.
“여, 여기는 대피소 근처! 지원 요청한다! 다시 말한다! 여기는 대피소 근처! 지원 요-”
푸우욱-!
“끄, 끄으윽…….”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절반 이상이 B급 상위와 A급으로 이뤄진 사냥팀이었음에도, 2등급 몬스터의 백랑 괴수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전투력도, 머릿수도.
<치직- 여기는 B팀. 미안하지만 여기도 아슬아슬하다. 본부에 외부 병력 투입을 요청했으니 조금만 더 버텨달라.>
“못 버텨. 이 이상은 못 버틴다고, 이 새끼야…….”
대피소 주둔 사냥팀의 지휘관이 숨을 헐떡였다.
방금 무전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절망적인 건, 지원팀이 이곳에 올 수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는 걸.
진짜 절망은 따로 있었다.
“대체 몇 마리나 있는 거야, 이 개새끼들……!”
분산 병력인 B팀 또한 아슬아슬하다 못해 또 다른 외부 지원이 절박했다.
그건 곧 강남 지역 일대를 잠식한 백랑 부대의 숫자가 도무지 가늠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지, 지휘관님. 어떡하죠?”
숱한 동료가 죽어나가는 악몽 앞에서도 용케 이성을 유지 중인 부하 사냥꾼이 물어왔다.
지휘관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다가 이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등 뒤에 선 시민들.
질서 따윈 온데간데없고, 밀치고 밟고 뒤엉키며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도망치는 이들의 광경.
여기서 더 상황이 최악으로 돌아가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시간을 벌어야지. 적어도 여기에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대피소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는.”
“…….”
백랑 부대와 대치한 사냥팀 멤버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 말은, 달리 표현하자면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크르르-
철갑을 두른 백랑 부대들이 절망에 빠진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이런 괴물들 앞에서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
“죽기 싫어…….”
그들은 이런 순간이 올 줄 각오하고 KHA 소속 사냥꾼이 되었다.
하지만 역시, 그 순간이 막상 닥치자 숭고했던 각오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희미해졌다.
슬금, 슬금-
그렇게, 그들이 백랑 부대의 위압에 짓눌려 뒷걸음질을 치는 순간.
크오오오-!
별안간 하늘에서 우렁찬 포효가 쏟아져 내렸다.
“이, 이건 또 뭐야!”
그것은 영락없는 몬스터의 포효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생각한 사냥팀의 지휘관이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 억…….”
그리고 휘둥그레 뜬 두 눈에 절망의 빛이 서렸다.
드래곤!
그림과 영상으로 접해본 것과 꼭 같은 모습의 검은 드래곤이, 이곳을 향해 하강해 오고 있었다.
“아, 아아…….”
정녕 이게 꿈이 아니고 현실이란 말인가.
정말로 오늘은 강남을 넘어 대한민국이 무너지는 날인가?
드래곤이라니.
헛것을 보는 게 아니라면 지금 앞에 있는 늑대인간들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지휘관과 그의 부하들이 헛숨만을 덜컥덜컥 내뱉으며 말을 잇지 못하던 그때.
“……어?”
“저, 저건…….”
그들은 보았다.
보름달이 쏘아내는 푸른 달빛이 검은 드래곤의 등을 훑고 지나간 순간.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게 희끄무레하게 드러난 것이다.
크오오오-!
맹렬한 포효를 토해내는 드래곤의 등 뒤에.
“저거 사람 아니야?”
하얀 머리의 남자가 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