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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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와 짐을 들이고 이사를 완전히 끝내고 난 그제야 이 넓은 타워팰리스가 자신의 집이라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세상에! 맙소사! 어떻게 한 집에 화장실이 네 개씩이나 있을 수가 있지?”
그리고 그 실감을 가장 크게 느끼는 중인 지수가 방방 뛰어다니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시했다.
“지수가 기뻐 보여서 다행이네. 하긴, 이제 막 철들기 시작한 어린 것이 그 좁은 집구석에서 얼마나 답답했겠어.”
대성과 함께 느긋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둘러보던 혜정이 흐뭇하게 웃음을 흘렸다.
대성은 빙그레 눈웃음을 짓는 혜정에게 물었다.
“엄마는 어때.”
“그걸 말이라고 해? 엄마도 당연히 기쁘지. 더군다나 아들이 직접 돈 벌어서 이 넓은 집으로 이사 오게 해줬는데, 엄마로서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니?”
“언제는 나보고 위험하니까 사냥꾼 하지 말라고 다그쳤으면서.”
“어머, 얘는……. 이제는 엄마한테 짓궂은 농담도 할 줄 아네?”
혜정이 손사래를 치면서 대성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항상 무표정하고, 뚱하게만 있던 아들이 걱정되던 참이었는데 좀 사람 냄새 나는 농담을 들으니 내심 기뻤다.
하지만.
가볍게 말을 꺼낸 대성과는 달리, 혜정은 방금 그 말에 뼈를 느꼈다.
“그래도…… 엄마는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어. 아무리 적성이 그쪽이라고 해도 엄마는 대성이 네가 그 일, 오래 안 했으면 좋겠다.”
“…….”
“돈 없어서 다시 쫓겨나도 괜찮아. 그 좁은 집구석으로 다시 돌아가도 돼. 대성이 너만 무사하면.”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무려 10년을 혼수상태로 있었던 아들이다.
그런데 봐라.
그저 깨어나 주기만 해도 감사했던 아들이 지금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대단하다고 인정받고, 천년만년을 일해도 과연 구경이나 할 수 있을까 싶은 넓은 집을 선물해주었다.
부모로서 어떻게 안 기쁠 수가 있겠는가.
솔직한 심정으로 ‘이게 내 아들이에요’, ‘내 아들이 이렇게 대단해요’라고 자랑하고 싶을 지경이다.
그래도.
“대성이 네가 없으면 이 집도, 돈도 다 필요 없어. 지수도 아마 같은 생각일 거야.”
하나뿐인 아들이, 사망률이 다른 직종과는 차원이 다른 사냥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부모 된 처지로 마음이 차분해질 수밖에 없었다.
“행복이란 게, 꼭 넓은 집이 있거나 돈이 많다고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잖니?”
“그렇지.”
“한 번만 더 약속해주렴. 험한 일 안 겪겠다고.”
“약속할게.”
대성은 그리 말하며 살며시 혜정의 손을 잡았다.
완벽하게, 오롯이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음에도 말이다.
‘내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이 행복도 오래가지 못한다.’
혜정과 지수가 그 지긋지긋하게도 허덕였던 가난에서 벗어나 고생 그만하고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
자신의 행복은 거기에서 나오니까.
그 행복을 위해선 자신이 조금 희생하고, 고생하고, 분주히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행복이 보상으로 따르는데 그 정도도 감내하지 못한다는 건 애당초 말이 안 되기도 하고.
‘이제야 그 행복의 실현이 궤도에 올랐고…… 이제 무너지지 않도록 유지만 하면 된다.’
필드 구현 퀘스트를 마치면서 방호책도 전부 마련했다.
발라르크를 비롯한 마수들도 온전한 힘을 지닌 채 일체의 흠결 없이 구현되었다.
걱정할 건 없다.
몇 가지만 빼고.
“지수야. 엄마.”
대성이 묵직한 목소리로 부르자, 저 멀리서 한창 부엌을 구경 중이던 지수가 쪼르르 달려왔다.
과장 좀 보태서, 그녀의 눈에 대성은 오빠가 아니라 신으로 비치고 있었다.
“왜? 왜? 뭐 시킬 거 있어?”
“아침도 못 먹고 이사하느라 배고플 텐데, 구경은 이따 마저 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와! 이사 기념으로 오늘 뷔페 가는 거야?”
“뷔페……. 그래. 가자.”
흔쾌히 나온 대답에 지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혜정이 못 말린다는 듯이 혀를 찼다.
곧장 나갈 채비를 마친 둘이 현관문을 나서려 할 때, 대성이 말했다.
“잠깐 전화 받을 게 있어서 그런데, 엄마랑 지수 먼저 내려가 있어.”
“그래! 빨리 와야 한다?”
현관문이 닫히고, 안에는 대성만이 혼자 남았다.
지금부터 할 일은 되도록 가족의 눈에 띄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발라르크의 철성 구현.”
[필드 ‘발라르크의 철성’을 구현합니다.]
[해당 필드가 내장된 고유결계를 전개할 범위를 설정해주십시오.]
고유결계의 전개는 필드의 크기를 초과하지만 않으면 어디서든 가능했다.
이를테면 한반도 전체에 발라르크의 철성을 구현할 순 없는 것이다.
“이곳. 60층.”
대성은 입주 계약을 마친 60층에 철성을 구현했다.
화아악-
그러자 대성이 선 지점을 중심으로 둥그런 막이 넓게 펼쳐지면서 집 내부를 감쌌다.
고유결계가 전개될 영역이 설정되는 순간이었다.
촤르륵-
결계 생성이 완성되자 그 막 속에 둘러싸인 집 내부가 변형을 거듭하면서 철성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고오오-
다소 서늘한 기류가 흐르는 철성의 무기질적인 풍경을 바라보면서 대성은 한 번 더 명령을 내렸다.
“체크포인트 설정.”
[고유결계를 전개하신 해당 영역을 체크포인트로 지정합니다.]
[앞으로 어떤 장소에서든 지정하신 체크포인트로 순간이동이 가능합니다.]
[체크포인트는 구현한 필드당 하나만 지정할 수 있습니다.]
어제 타워팰리스에 필드를 구현했을 때 이런 메시지가 불현듯 나타났었다.
해당 영역을 체크포인트로 지정하겠냐고.
그때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무시했지만, 앞으로 가족과 함께 살 이곳은 다르기에 확실히 확인해둘 필요가 있었다.
덜컥-
대성은 철성의 석문, 즉 원래로 따지면 집의 ‘현관문’에 해당하는 문을 열고 밖을 나섰다.
‘로드는 문제없이 작동하는군.’
밖을 나서기 전까지는 철성의 석문이었으나, 지금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그냥 타워팰리스의 특색 없는 현관문이었다.
고유결계의 영역을 벗어난 바깥에서 보면 로드가 적용되어 철성의 외관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저벅-
대성은 비상계단을 타고 내려가 단숨에 1층까지 향했다.
어느 정도 충분히 고유결계로부터 떨어진 거리에 있다고 인지한 뒤.
“체크포인트로 이동.”
그 순간.
팟-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 사위의 풍경이 철성으로 뒤바뀌었다.
지정한 체크포인트까지 워프한 것이다.
‘딜레이도 없고, 어떤 장소에서도 가능하다고 했으니 거리 제한도 없겠군.’
다만.
[남은 체크포인트 사용 가능 시간: 1:59:58]
다음 사용까지 2시간이라는 쿨타임이 존재한다는 점.
그것이 유일한 흠이었다.
‘신중하게 사용해야겠군.’
체크포인트를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는 건, 가족의 신변에 무언가 위협이 닥쳤다는 의미일 터.
그런 지경인데 2시간이라는 쿨타임에 막혀 체크포인트를 이용하지 못하는 사태가 닥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정말로 필요할 때만 쓴다.’
쿨타임이 긴 건 어찌 됐든, 체크포인트라는 기능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한 정보였다.
이로써 필드와 마수가 가족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여차하면 자신이 직접 나설 기회가 생겼다는 거니까.
‘우리 가족은 무사하다.’
앞으로 그 어떤 최악의 사태, 최악의 변수가 닥쳐와도 걱정 없었다.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린 대성은 구현화를 취소했다.
드넓은 타워팰리스 내부의 정경이 태연하게 복구되었다.
“…….”
삼중, 아니, 사중의 방호책까지 설치한 그제야.
대성은 완전히 마음을 놓고 이 넓은 터가 자신과 가족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만끽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군.’
대성은 아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혜정과 지수를 떠올리고는 서둘러 현관문을 나섰다.
탁-
그렇게 기나긴 가난에서 벗어나,
산뜻한 새 삶이 찾아왔다.
***
다음 날 아침.
끼익-
대성은 발소리를 죽이고 지수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그녀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대성은 지수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용히 짧은 글귀 몇 줄을 새긴 쪽지 하나를 머리맡에 두었다.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학원부터 등록해라. 제일 실력 좋은 강사들 있는 곳으로. 등록비는 걱정하지 말고.>
그녀가 학교도 자퇴하고 자신의 병원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결정했던 사안이었다.
대성은 지금이라도 지수가 다시 공부를 시작해 좋은 친구도 사귀고 무사히 대학도 졸업하기를 바랐다.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 금방 따라잡을 거다.’
이것 말고도 적당히 틈을 봐서 혜정에게 식당 일을 그만두라는 말도 꺼낼 생각이었다.
매일 밤 요통에 시달리며 앓는 모습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으니.
할 일을 마친 대성은 곧바로 집을 나섰다.
타워팰리스 입구에는 아우디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집 좋네! 축하한다!”
성찬호였다.
대성은 피식 웃어준 뒤 조수석에 탑승하자마자 물었다.
“어제 문자로 부탁했던 건?”
“일단 뭐, 네가 하라는 대로는 문제없이 다 했지.”
“좋아.”
“좋기는 무슨……. 누가 보면 정신 나간 놈이라고 욕할 거다.”
시동을 밟기 전, 성찬호는 가볍게 담배를 한 대 태우며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입장할 게이트를 예약해두는 페이지가 떠올라 있었다.
“게이트를 한 번에 6개나 예약해두는 놈이 세상천지 어디 있냐고.”
마이페이지에 표시된 예약 게이트 목록을 확인한 성찬호는 말문이 막혔다.
어제저녁, 그는 대성에게서 문자로 이런 부탁을 하나 받았다.
강남 지역 인근에 생성된 게이트 입장권을 모조리 낙찰하라고.
“너 혼자서 강남 게이트의 씨를 말릴 작정이구나, 아주.”
사들인 게이트는 예약 시간 1시간 전까지 낙찰자가 현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자동으로 예약이 취소된다.
즉, 비싼 돈만 날리는 셈.
당연하지만, 보편적으론 다들 하루에 하나의 게이트만 예약한다.
시간적 여건, 현실적인 가능성, 그리고 공략에 들이는 수고와 노력을 생각해봐도 그편이 타당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루 만에 무려 여섯 개의 게이트를 돌겠다는 대성의 결심은 파격, 그 자체였다.
“나 진짜 야밤에 이것들 사들이느라 잠도 못 잤다. 대성이 너, 이거 수습할 자신은 있는 거지?”
“있어.”
“……그래, 뭐. 군단형 게이트도 30분 만에 닫은 놈한테 내가 뭘 의심하겠냐.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나는 뒤에서 밀어주기만 할 테니.”
미친 짓이란 걸 알지만, 성찬호가 알고 있는 한대성이란 인간은 그 미친 짓을 태연하게 해내는 괴물이었다.
부릉-
성찬호는 우선 첫 번째로 예약된 게이트가 있는 장소로 차를 몰았다.
***
게이트 프렉쳐 사태가 하룻밤 만에 수습되는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보통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 시간 중 대부분은 미처 잡지 못하고 놓쳐버린 몬스터 잔당을 정리하는 데 할애된다.
하지만 그저께 벌어졌던 사태는 평소와 달랐다.
“탐지기에도 딱히 몬스터의 것으로 추정되는 에테르는 잡히지 않습니다. 강남 지역 전부가요.”
“경이롭군요.”
“한두 마리 정도는 새어 나갈 법도 한데…… 믿기질 않네.”
2등급으로 분류된 백랑 군단 전체가 외부로 유출되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 수장이 퇴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 한 마리의 잔여 개체도 남기지 않고 전원 소멸했다.
이틀 전 발생한 프렉쳐 사태를 해결한 장본인, 초신성이라 불리는 대성의 활약 덕분이었다.
탁-
조명이 옅은 회의실 내부.
길쭉한 타원형 테이블 위로 손을 올린 박정호가 말했다.
“이에, 저는 협회장으로서 한대성 사냥꾼이 여섯 번째 S급으로 승격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문장에 방점을 찍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박정호가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이었다.
“다른 S급 분들의 의견은 어떠하신지요?”
거물들.
테이블의 지정석에 앉은 세 명의 S급 사냥꾼을 향해 말이다.
「…….」
잠시 회의실에 정적이 흘렀다.
국내 사냥꾼 랭킹 2위, 세계 랭킹 9위, 서동철.
국내 사냥꾼 랭킹 4위, 세계 랭킹 17위, 류서연.
국내 사냥꾼 랭킹 5위, 세계 랭킹 19위, 조한울.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에서도 순위권에 꼽히는 강자인 그들이 협회장의 호출을 받고 한자리에 모였다.
서동철을 제외하면 웬만해선 KHA의 부름에 잘 응답하지 않는 그들이 이 자리에 모인 건, 그럴 만한 화두가 던져졌기 때문이다.
“S급이라는 직책이 가지는 무게가 무게이니만큼, 협회 이사진들뿐만 아니라 다른 S급 분들 전원의 동의 또한 필요합니다. 아시겠지만요.”
자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를 선정하는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참고로 게이트 공략 때문에 회의에 불참한 이창식 사냥꾼님과 백하린 사냥꾼님께는 미리 동의를 구해놨습니다. 남은 건 이제-”
“저도 동의합니다.”
그때.
제일 먼저 의견을 피력한 건 서동철이었다.
‘전차’라는 별칭답게 근육질의 거구를 지닌 그가 커다란 손을 위로 들며 말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2등급 몬스터 군단을 단신으로 막아냈다는 건, 이미 A급에 머물 경지가 아니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창식이 동의했다면 나도 이견은 없어.”
서동철의 말을 받은 이는 류서연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유일한 여성인 그녀는 고고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 이창식이 인정했다는 거잖아? 백하린 그년 의견은 별로 달갑지 않지만…….”
“예, 그럼…….”
다섯 명 중 네 명이 대성이 S급이 되는 것에 동의를 표했다.
거의 확정이 난 분위기.
이제 남은 건,
슥-
박정호가 타원형 테이블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눈길을 옮겼다.
조한울.
그의 대답만 남은 셈이었다.
“…….”
꿀꺽.
박정호는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서동철과 류서연을 비롯한 S급 사냥꾼은 흔쾌히 대성의 승급을 허락한 가운데.
유일하게 조한울만이 아까부터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조한울은 까다롭고 냉혹하기로 정평이 난 인간이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인상을 지닌 이 젊은 사내는 눈이 높기로 유명했다.
자기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과 선, 철학이 있는 것이다.
이번에 극악의 난이도로 말이 많았던 라이센스 시험의 필드 설계도 조한울의 개입이 상당히 들어간 결과였다.
‘만약 여기서 조한울의 입에 No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일이 귀찮아질 터.
조한울의 대답을 기다리는 박정호가 그의 입술에 집중하던 그때.
“근데 말이죠.”
마침내 조한울의 입이 움직였다.
그것도, 박정호의 우려가 무색하지 않게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엇다.
“그래도 혼자서 2등급 프렉쳐를 막았는데, S급 승급으로만 퉁치지 말고 협회에서 밥이라도 대접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
마음에 들지 않았던 포인트가 그쪽이었단 말인가.
박정호는 어이가 없는 한편으로도 안도감 섞인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