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059
별 영양가 없는 인터뷰 시간을 잠깐 가진 뒤.
대성을 비롯해 서른 명이 넘는 사냥꾼이 게이트로 돌입했다.
“필드 구성은 괜찮네.”
“좀 덥다는 것만 빼면.”
“저번 공략 때 밀림 나타난 거 기억하냐? 그땐 진짜 뒈질 뻔했는데.”
게이트를 넘자마자 펼쳐진 필드를 보고 <카이트>의 정예 대원들이 저마다 감상을 꺼냈다.
노을이 낮게 가라앉은 들판 위로 붉은 화석이 한가득 깔린 암석지대였다.
땅이 울퉁불퉁하여 오래 행군하기에 적절치 않다는 것만 빼면 실제 지구의 환경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필드였다.
저벅- 저벅-
대원들은 서로 몇 마디 잡담을 이어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벅-
하지만.
「…….」
그 잡담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고, 이내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현재 그들이 돌입한 게이트의 형태는 통상형.
변종이 아니다.
원래 같았으면 돌입 후 5분 안에 몬스터가 나타나야 정상이었으나.
“너무 조용한데…….”
“젠장. 보통 영화에선 이렇게 조용하면 조만간 뭐 하나 일이 터지던데.”
“이러다 갑자기 이상한 거 팍 튀어나오는 거 아니야?”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은 적어도 게이트 내부에선 통용되지 않는다.
이곳에 있는 이들 또한 2등급 게이트 토벌에 선발된 실력파들.
적어도 하염없이 이어지는 적막에 의구심과 경계를 품을 줄은 아는 아들이었다.
물론.
‘위군.’
그건 대성도 마찬가지.
오히려 그는 이 적막의 원인까지 단숨에 파악하고는 슬며시 고개를 올려 위를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 전체를 뒤덮듯이 자욱하게 낀 불그스름한 황색 구름.
그 너머에서 도사리고 있는 ‘이변’.
“영문을 모르겠군.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대체 뭐가 나온다는 거야?”
반면 오범석과 <카이트>의 대원들은 슬슬 이 기나긴 적막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대성과 함께 제일 앞에 선 오범석이 먼저 기감을 확장시켰으나 여전히 적의 기척은 포착되지 않았다.
그때.
툭-
“……응?”
물방울 하나가 오범석의 발치에 떨어져 땅을 적셨다.
적어도 3년은 가뭄이 쭉 이어진 것만 같은 이 메마른 장소에 물방울이 떨어졌다고?
의아함을 느낀 오범석이 눈을 좁히며 방금 물방울이 떨어진 바닥을 주시했다.
그리고.
치이익-
“헉……!”
마치 산(酸)에 닿은 것처럼 증기를 뿜어내며 땅이 부식되고 있음을 깨닫고 경악성을 내뱉었다.
“아아악-”
“이, 이게 뭐……! 끄아악-”
동시에후방 쪽에서도 비명이 터졌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입에서.
툭, 투둑…….
후두둑-
그 비명을 기점으로 간헐적으로 떨어지던 물방울이 단숨에 가랑비와 같은 속도로 떨어졌다.
“피해!”
“흩어져! 흩어지라고!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다! 각자 알아서 피해!”
“아니, 군집해서 오러 방벽을 겹겹이 쌓아! 그편이 더 나아!”
“씨X 근데 이거, 비가 아닌 것 같은데?”
얼마 안 가 폭우로 번질 기세로 쏟아지는 빗방울이 투명한 무색(無色)이 아닌 녹색임을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치 어느 짐승의 체액과 같은 녹색이었다.
어쨌든 무공을 극성으로 익힌 무협지 주인공이 아닌 이상에야 저 속절없이 쏟아지는 강산(强酸)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차라리 몬스터가 나타나면 나타났지, 난데없는 자연 재난에 휘말린 <카이트>의 대원들은 혼비백산하며 공황 상태에 빠졌다.
“어, 어어! 으아악-”
그건 제일 앞에 서서 대원들을 이끌어야 할 공대장인 오범석도 마찬가지였다.
치이익- 치이익-
산성액이나 극독을 뱉어내는 몬스터는 많다.
그런 녀석들과 마주칠 수 있다는 상정하에 제작된 A등급의 고급 아머를 입기도 했다.
“바위! 근처에 바위가 많으니까 거기로 다들 피신해!”
“바위도 녹고 있잖아!”
“이대로 가다간 다 죽겠다!”
그럼에도단발(斷發)이 아닌, 연발로 쏟아지는 산성비를 온전히 막아내기는 역시 힘들었다.
치이익-
‘그래, 비가 아니다.’
피부가 산화해 살이 녹아내리고 극악의 격통에 미쳐 날뛰는 아비규환이 펼쳐지던 가운데.
똑같이 강산의 소나기를 맞고 있는 대성만이 오로지 평온한 얼굴로 작금의 사태를 살피고 있었다.
[‘섬멸 용기사 발라르크의 갑옷’을 구현합니다.]
어느덧 용 껍질로 이루어진 검은 철갑을 입은 상태로 말이다.
모든 속성의 공격으로부터 40%의 방어력이 추가 상승하는 <발라르크의 갑옷>의 고유 성능과, 대성 본연의 신체가 지닌 회복력이 더해졌기에 연출될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저, 저 미친놈! 저건 또 어디서 가져온……?’
한편, 어떻게든 한 방울이라도 덜 맞아보려고 사방팔방을 날뛰던 오범석이 갑주를 걸친 대성을 보고 흠칫했다.
이 난리 속에서 유일하게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이 대단해서인지, 아니면 장비가 뛰어나서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때.
키아아악-!
“……?!”
못처럼 대성에게 박혀 있던 오범석의 시선이 괴성이 터진 하늘 쪽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는본인의 눈을 의심했다.
녹색 체액을 쏟아내는 구름을 뚫고, 웬 사람 크기만 한 벌레들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활공하고 있었으니까.
2등급 위험종, 비행형.
기거(Giger).
파르르르륵-!
카아아악-!
심지어 그 숫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놈들의 군집이 이쪽에서는 흡사 검은 안개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레인저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어지는 위기 상황에 오범석이 기적적으로 지시다운 지시를 내렸다.
레인저(Ranger).
주로 후방에 위치해 원거리 지원 사격을 하는 이들이었다.
“이 새끼들아, 뭐 해! 빨리 안 쏘고! 오고 있잖아!”
“끄아아악-!”
그러나 그들도 지원사격이고 뭐고 일단 산성의 세례로부터 살아남는 것이 급급했다.
즉, 차분하게 지시를 따르고 움직이는 게 불가능한 전력들.
순식간에 허수아비로 전락한 대원들을 본 오범석의 동공이 지진을 거듭하던 그때.
펄럭-
“응?”
측면에서 어렴풋이 불어온 바람이 머리칼을 넘기자 오범석이 무심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아니, 당신 그건…….”
대성이 갑주로 덮인 등 뒤로 용의 날개를 넓게 펼치고 있었다.
<발라르크의 갑옷>의 특수 스킬인 ‘비행’이 발동되는 순간이었다.
‘설마, 진짜 하려고?’라고 말하듯이 오범석이 휘둥그레 눈을 뜨던 그때.
파악-
대성이 산성에 녹아내리는 대지를 뒤로 밀어내듯 발돋움했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지금 막 포신(砲身)에서 떠난 포탄처럼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런 그의 손에는.
[‘업화대검’을 구현합니다.]
화르륵-
강산의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대검이 쥐어져 있었다.
키아아악-!
이제 막 한창 땅으로 내려가 유린의 시간을 가지려던 기거들은 날개 달린 인간이 이쪽으로 날아오는 걸 보자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이쪽은 다수고 저쪽은 하나.
상식적으론 뒤엎을 수 없는 수적 강세가 자신들에게 있는 이상, 두려워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카아아악-!
기거로 이뤄진 검은 폭풍우가 마구잡이로 휘몰아치며 대성이 있는 방향으로 떨어졌다.
“어, 어어……. 저, 저거! 저놈 저거 죽고 싶어서 환장했……!”
그리고 대성은그 폭풍우 앞에서도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가속하여 솟구치는 대성을 보며 오범석이 입에서 ‘어어.’ 하는 소리를 내던 찰나.
팍-
대성이 두 팔을 위로 내뻗더니 업화대검을 정수리 위로 치켜들었다.
[‘업화’ 모드의 두 번째 특수 스킬이 발동됩니다.]
[특수 스킬 : <염왕의 숨결>]
대성에게만 보이는 메시지.
그러나 그 메시지가 지나가고 드러나는 ‘현상’은, 당연히 오범석과 그 아래에 있던 이들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화아아악-!
기거의 대군 쪽으로 겨눠진 업화대검의 칼날 끝에서, 태산마저 불태울 기세의 화염 줄기가 분출되었다.
화르르르륵-!
키아아아악-!
구름을 뚫고 지상으로 떨어지는 검은 안개 덩어리를,
지상으로부터 튀어 올라 창공에 머무른 채 뿜어지는 화염의 격류가 모조리 불태워냈다.
걷어내듯이.
“…….”
검은색과 붉은색이 뒤엉키며 자욱하게 낀 구름마저 증발시키는 광경이 마치 세기말 같았다.
오범석을 포함한 <카이트> 대원은 그만 넋이 나가고야 말았다.
저마다 엄폐할 만한 건축물이나 처마 밑으로 숨어 강산의 폭우를 피하는 일촉즉발의 상황.
그러나 그 위기감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의 덩어리 앞에선 ‘경외심’ 같은 감정으로 바뀌었다.
후둑, 철퍼덕-
숯덩이가 된 기거들의 잔해가 땅바닥에 떨어지며 나뒹굴었다.
“……미, 미쳤어.”
“아예 수준이 다르잖아, 젠장.”
살충제에 맞아 죽는 해충 같았다.
2등급 위험종의 몬스터였는데 말이다.
그때.
펄럭-
기거들의 안개를 얼추 전부 걷어낸 대성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날개를 꼿꼿이 펼쳐 더 높이 날아올랐다.
이내 그의 거구는 구름이 전부 증발에 활짝 갠 황천(黃天) 안으로 빨려가듯이 쏙 들어갔다.
인외(人外)의 경지로 몬스터를 일망타진했던 그의 활약이 아직도 눈앞에 성성하던 <카이트> 대원 중 한 명이 파르르 떨며 뇌까렸다.
“에, S급이 원래 저 정도였나……?”
***
구름이 있었던 지점을 뚫고 그보다 더 높은 곳까지 날아올라도,
후두둑-
강산의 폭우는 여전히 똑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애초부터 이건 폭우(雨)가 아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진원지는 따로 있었다.
“뭔가 큼지막한 게 위에서 느껴진다 했더니, 너였군.”
거의 대기권과 맞닿을 지경으로 드높은 상공 한가운데.
구우우우-
거대한 고래가 부유하고 있었다.
물론 몬스터였고, 평범한 포유류 생물 고래와는 달랐다.
검은 갑각(甲殼)으로 이뤄진 외골격에다 머리 부분은 기거와 똑같이 생긴, 길쭉한 더듬이를 쫑긋거리는 벌레였다.
2등급 특급 위험종, 네임드(Named), 산란형(産卵形), 비행형.
기거 여왕(Giger queen).
푸우우-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놈의 등에서 녹색의 분수가 치솟으며 아래로 떨어졌다.
“저게 원인이었군.”
하늘에서 떨어졌던 죽음의 비의 원흉이었다.
어차피 대성에게는 유효한 피해를 주지 못하니 상관없다.
하지만.
후욱- 후욱-
몸뚱이 아랫부분, 기거 여왕의 넓적한 배에 무수한 종기가 다닥다닥 달라붙어 꿈틀거리고 있었다.
불쾌하고 징그러운 광경에 대성이 눈살을 찌푸리며 시야를 좁혀보았다.
금세 그것이 종기가 아니라 어떤 ‘알’임을 알 수 있었다.
반투명한 양막(羊膜) 안에 시커먼 벌레들의 태아가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저 알이 부화하며 방금 같은 기거의 대군이 쏟아져 나왔음이 분명했다.
‘저 알을 전부 터뜨리면서 놈과 싸우기보다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산성 체액의 세례를 맞아가면서도 대성의 눈은 예리하게 번뜩였다.
옹기종기 들러붙어 꿈틀거리는 징그러운 알들 사이로, 유독 더 커다랗고 시뻘건 핏줄이 선 덩어리가 이쪽까지 진폭이 느껴질 기세로 박동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저것까지 한꺼번에 태워버리는 게 낫겠군..’
그리고 그 덩어리의 정체는 누가 봐도 심장이었다.
펄럭-
날개를 널찍하게 펼친 대성이 곧장 저 심장을 향해 쇄도하려 했으나.
퍼벙- 퍼버버벙-
기거 여왕의 배에 달린 알들이 일제히 폭발하며 악취 가득한 양수(羊水)를 쏟아냈다.
키아아악-!
그리고 터진 알들에서 부화한 기거들이 여왕의 몸체에서 떨어져 나와 대성에게 쇄도했다.
규모만 따지면 아까 처음으로 맞닥뜨렸던 놈들보다 곱절은 더 많아 보였다.
오죽하면 놈들의 대군이 자아내는 검은 음영이 노을빛 구름을 새카맣게 물들일 정도일까.
하지만.
‘상관없다.’
10배, 아니, 백만 대병(大兵)이 몰려와봤자 결국엔 벌레에 불과하다.
오히려 대성은 저들이 난잡하게 흩어지지 않고 한데 모여 있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꼈다.
‘한꺼번에 태워버리면 그만이야.’
화르륵-
검에 깃든 염왕의 사념 또한 투쟁심을 불태우듯 화력을 끌어올렸다.
진짜 목표는 저 벌레 무리를 태우는 게 아니다.
저 벌레 무리를 넘어, 녀석들의 어미인 기거 여왕까지 모조리.
아예 이 하늘을 통째로 지워버릴 기세로 태워버리는 것이, 대성의 진짜 목표였다.
키아아악-!
기거 대군으로 이뤄진 검은 물결이 대성을 향해 쏟아졌다.
[‘업화’ 모드의 첫 번째 특수 스킬이 발동됩니다.]
[특수 스킬 : <격노>]
곧 종말의 불벼락이 자신들에게 들이닥칠 거란 사실도 모른 채.
***
잠시 뒤.
“헉……. 허, 억……!”
정수리 위를 가릴 수 있는 지형지물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몸을 숨기고 있던 <카이트>의 대원들이 벅찬 숨을 달싹였다.
죽음의 비가 흙바닥을 세차게 두드리던 소리가 어느덧 완전히 잦아들고 정적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멈췄나?”
“아니, 새끼야. 머리 내밀지 마. 이러다 갑자기 또 확, 하고 떨어진다.”
“진짜 멈춘 것 같은데?”
그렇게 방심한 틈을 타서 사냥꾼 뒤통수를 연타로 후리는 게 게이트란 곳이다.
하물며 3, 4등급도 아니고 2등급이라면 더더욱.
그때.
“어!”
“저, 저거 왜 저래!”
문득 겁에 질린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본 이들이 경악성을 뱉었다.
쿠구구-
메아리처럼 희미하게 들려오는 굉음과 함께, 새빨갛던 구름이 이제는 아예 활활 불타고 있었다.
“씨X! 저건 또 뭐야!”
“다들 엄폐물 밖으로 고개 내밀지 마! 더 큰 게 온다!”
“교전 준비해-”
당장 운석이라도 떨어뜨릴 것같이 하늘에 이변이 발생하자, <카이트> 대원들이 혼비백산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들이 우려했던 후속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구름의 형태는 어딘가 이상하긴 했지만.
“…….”
그러고 보니.
아까 용 날개를 펼치며 저 하늘로 사라진 대성은 어떻게 됐을까.
하늘의 변화가 그와 어떤 관련이라도 있는 걸까.
모두가 저마다 침묵을 유지한 채 그런 의문을 떠올리고 있을 즈음.
사악-
“……응?”
불꽃이 넘실거리는 구름을 뚫고 무언가 떨어졌다.
방금 발생했던 폭우와는 달리 깃털처럼 하늘하늘 유려하게 살랑이며 떨어지는 것의 정체는.
“……재?”
검은 재였다.
누가 보아도.
‘생뚱맞게 갑자기 재?’라는 의문이 들 법도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태반이 어째선지 그 재의 정체를 눈치채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아까 대성이 처음으로 기거 무리를 휩쓸었을 때, 이것과 비슷한 재가 떨어진 적이 있었으니까.
“…….”
오범석을 비롯해 <카이트> 대원은 조심스레 엄폐물을 빠져나와 꼿꼿이 허리를 편 채 하늘을 보았다.
여명(黎明)이 반짝이는 붉은 세계에 검은 재가 흩날렸다.
그야말로 이런 이계(異界)가 아니면 절대 보지 못할, 초현실적인 장관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가만히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