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62화 (62/180)

# 62

062

지옥의 15주(主) 중, ‘대군’을 호령하는 마수는 귀왕이 유일했다.

염왕이나 천공왕 등, 다른 15주의 마수는 휘하에 전속 사역마를 둘지언정 귀왕처럼 무식하게 대규모 군단을 이끌지는 않았다.

‘더 강하고, 많은 소환수를 한 번에 얻으려면 역시…….’

귀왕을 현세에 구현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발라르크를 구현하면서 그의 밑에 귀속된 섬멸룡과 철성의 센티넬까지 동시에 구현되었던 것처럼.

귀왕을 구현하면 귀왕의 권능에 속박된 무수한 죽음의 군대를 손에 넣을 수 있을 터.

[판테온에 입장합니다.]

[판테온이 ‘절대자의 일지’를 인식합니다.]

빛을 뚫고 잿빛 석문 너머로 들어선 대성은 곧장 시스템에 명령을 내렸다.

“필드 구현 퀘스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스템이 구현 가능한 필드의 목록을 보여주었다.

[1. 포식자의 숲 2. 귀왕의 영지 3. 염왕의 영지 4. 섬멸룡의 둥지 5. 거미 계곡]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

귀왕을 구현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판테온에 입장했으니,

“귀왕의 영지로.”

녀석이 살던 곳을 침략했던 시절을 선택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촤르륵-

마지막으로 수행했던 122p, 발라르크의 철성이 기재된 일지의 페이지가 조금 더 뒤로 넘어갔다.

[134p : -7년. 198일에 기록된 당시의 기억들이 복구됩니다.]

[필드 ‘귀왕의 영지’의 세이브 데이터를 불러옵니다.]

당시 기억들이 뚜렷하게 대성의 머릿속에 흘러들어 왔다.

몇 날 며칠을 사생(死生)을 오가며 벌였던 지독한 싸움의 기억.

추억이라 칭하기도 싫은 끔찍한 과거지만, 그래도 지금만큼은 그 기억을 마치 방금 겪은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했다.

‘귀왕의 영지는 정신 나간 곳이다.’

발라르크의 철성과는 비교도 안 되는 생지옥에 다시 발을 들이는 것이니까.

이미 죽음의 땅 그 자체인 지옥에서 또 죽은 영혼을 농락한다는 점에서 귀왕은 미치광이 그 자체였다.

‘방심하면 안 돼.’

기억과 경험을 지녔다고 해서 마음 놓고 여유를 부릴 순 없다.

대성이 마음을 결연히 다질 무렵.

텅-

[134p : -7년. 198일로 되돌아갑니다.]

육체와 분리된 대성의 혼백이 과거로 통하는 빛의 통로에 진입했다.

***

[절대자의 혼백이 과거의 유체(遺體)와 접속합니다.]

빛의 통로를 전부 지나고 어둠이 시야에 한가득 들이차기 무섭게.

삐이-

대성이 느낀 건 귓속에서 울리는 이명(耳鳴)과 살갗이 찢어발겨진 고통, 그리고 양쪽 손목이 옥죄는 답답함이었다.

‘엿 같은 부분부터 시작하는군.’

대성은 속으로 욕을 뱉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썩은 물방울이 천장에서 뚝뚝 흘러내리고, 오물이 내는 악취가 잔뜩 풍기는 어느 지하실이 보였다.

키아아악-

카아아악-

눈을 뜨기 무섭게 잔학무도한 광경이 시야를 채웠다.

각양각색의 마수들이 사지가 사슬에 묶인 채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거꾸로 매달려 인두에 살이 지져지는 마수, 쐐기가 잔뜩 박힌 수레바퀴에 몸이 묶인 마수, 관에 갇힌 채 용암이 펄펄 끓는 솥 안으로 천천히 담가지는 마수 등.

정상적인 정신력을 가진 자라면 보자마자 게거품을 물고 혼절해도 이상하지 않은 참경(慘景)이었다.

하지만 대성은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똑바로 두 눈을 부릅뜬 채 고문실 내부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저놈.’

그르르-

이 모든 고문을 집행 중인, 검은 투구를 쓴 마수 한 마리를.

‘망령 채집가(Wraith collector).’

이곳의 고문 집행관이자, 자신의 군주에게 죽은 이의 넋을 바치는 귀왕의 하수인이었다.

귀왕에게 바칠 망령은 생전에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할수록 그에 비례해그 힘이 강해진다.

놈이 가학적인 고문을 가하며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는 사이, 퀘스트가 도착했다.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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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 구현 퀘스트- (진행 중)

‘134p 귀왕의 영지’

난이도 : 불명

내용 : 망령 채집가를 쓰러뜨리십시오.

제한시간 : 없음

목표 : 망령 채집가 처리

보상1 : 공적 포인트 + 6,000pt

구현화 : 귀왕의 영지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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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퀘스트를 확인하지 않아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확했다.

대성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시금 살폈다.

짤랑-

기다란 사슬이 연결된 수갑에 손목이 묶인 채 양팔을 넓게 벌리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의 힘으로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때의 시점은 발라르크를 격퇴한 이후.

80년 지옥 생활 중 황혼기에 접어든 시기였음에도, 사슬을 푸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처럼 혈귀화의 힘을 빌린다.’

순수한 육체의 힘으로 속박에서 벗어나는 게 힘든 이상, 스킬의 도움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

파앙-

스킬을 발동한 대성의 몸에 붉은 기류가 요동쳤다.

[‘혈귀화’가 발동됩니다.]

[모든 스테이터스 및 스킬의 공격력이 300% 상승합니다.]

전신에 울긋불긋한 핏줄이 돋아나기 시작하며 압도적인 힘의 격류가 양손에 휘몰아쳤다.

근육 전체에 혈귀화의 힘이 스민 대성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양쪽 손목을 잡아당겼다.

쩔렁- 쩔렁-

쩌저적-

그러자 사슬이 고정된 천장의 연결부에 점차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연결부 채로 뜯어내 자유를 되찾는 건 시간문제.

하지만.

그르르-

이 소란을 망령 채집가가 눈치를 못 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고문에 몰두하던 녀석이 느닷없는 소음을 듣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사슬을 뜯어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대성을 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다.’

들키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또, 다음에 이어질 고통을 감내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시련.

콱-

망령 채집가가 휘두른 갈고리가 대성의 정수리에 세차게 박혔다.

하지만 대성이 피를 흘리며 절명하는 일은 없었다.

꾸드드득-

대신 갈고리는 정수리 안쪽에 잠든 영혼의 뿌리를 통째로 뽑아내려고 했다.

‘정신력으로 버틴다.’

망령 채집가가 산 자의 영혼을 추출할 때 쓰는 갈고리로부터 버티는 방법은, 정신력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영혼을 육체에 붙드는 강인하고 억센 정신력 말이다.

그으윽-

망령 채집가가 줄다리기하듯 갈고리를 끌어당기는 사이.

대성은 영혼이 빼앗기지 않도록 어금니가 으깨질 기세로 이에 힘을 꽉 주며 손목에 힘을 실었다.

한 치라도 힘을 풀었다간 영혼이 뿌리부터 뽑히는 마당에 사슬까지 뜯어내야 하는 극악의 시련.

‘못 할 것 없지.’

하지만 과거의 대성은 이미 해냈었고, 한번 해냈던 걸 실패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으윽-

망령 채집가는 좀처럼 뽑히지 않는 영혼 때문에 당황한 눈치였다.

그리고.

콰드득-

속박을 푸는 힘이 임계(臨界)에 다다른 순간, 사슬과 이어진 천장의 연결부에서 흙먼지가 떨어졌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는 의미였다.

그때.

파스스-

그으윽-

돌연 갈고리를 쥔 망령 채집가의 손이 손목부터 시작해서 어깻죽지까지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음?”

난데없는 돌발 상황에 망령 채집가는 물론 대성 또한 약간 놀랐다.

이런 장면은 기억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후에 이어진 시스템 메시지가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내려주었다.

[유체에 스며든 절대자의 혼백이 외부의 간섭을 차단합니다.]

‘그런가.’

지금의 그는 육체는 과거의 것일지언정, 안에 스민 영혼은 현재의 것.

한낱 망령 채집가 따위는 가히 건드려서도 안 될 절대자의 혼백이 예기치 못한 동아줄이 된 셈이다.

‘나쁘지 않군.’

자신에게 감사한 대성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띤 순간.

콰드득-

콰직-

천장의 연결부가 완전히 뜯겨나가며 사슬이 뽑혔다.

짤랑-

대성은 속박에서 풀리자마자 수갑에서 뻗어 나온 은색 사슬을 손목에 칭칭 감은 뒤 망령 채집가에게 달려들었다.

그으윽-

망령 채집가가 연탄재처럼 바스러진 팔에 연연하는 사이, 대성은 재빨리 놈의 목에 사슬을 휘감았다.

목울대를 옥죄는 감각에 망령 채집가가 컥 소리를 내기 무섭게, 대성이 놈의 복부를 걷어차며 사슬을 감은 손목을 뒤로 확 잡아당겼다.

뻐걱-

그러자 놈의 기도(氣道)가 단숨에 틀어막히며 목뼈 부러지는 소리가 서슬 퍼렇게 울려 퍼졌다.

숨이 멎은 망령 채집가가 맥없이 고개를 툭 떨어뜨림과 동시에 퀘스트의 완료를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퀘스트가 완료되어 구현화 작업이 진척을 보입니다!]

[6,000pt의 공적 포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현재 구현율 : 귀왕의 영지 33%]

이젠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할 때.

스릉-

대성은 바닥에 널브러진 망령 채집가의 갈고리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마치 세상에 필터를 뒤집어씌운 것처럼 시야가 푸르게 물들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았던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방금 목숨을 잃은 망령 채집가를 비롯해 고문받다가 죽은 마수의 육신 위로 영혼이 떠오르는 광경이.

‘망자의 강을 건너려면 제물이 필요해.’

더 정확히 말하면, 강을 건너게 해줄 뱃사공의 마음을 사로잡을 뱃삯이었다.

‘제물이 양질이고 수가 많을수록 효과적이었지.’

영혼수감소 구현 퀘스트 때 얻은 <악충의 가호>가 없는 지금.

귀왕의 영지에 들어서려면 망자의 강을 지키는 뱃사공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휘릭-

대성은 갈고리를 휘둘러 영혼을 하나둘씩 채집해나갔다.

갈고리에 꿰인 영혼은 이내 완자처럼 덩어리져가며 그의 손에 모여들었다.

이윽고 반투명한 얼굴 거죽을 한데 뭉친 듯한 괴상한 영혼 덩어리가 완성되었다.

‘이 정도면 됐다.’

대성은 영혼 채집을 제외하면 쓸모가 없는 갈고리를 내던진 뒤 영혼 덩어리를 손에 한 움큼 쥔 채 고문실을 빠져나왔다.

그는 으슬으슬한 적막이 감도는 긴 동굴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이내 통로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망자의 강에 도착했습니다.]

[강을 건너려면 <뱃사공 보르크>에게 대가를 지불하십시오.]

등이 꼽추처럼 휜 마수가 대가를 바라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녀석이 아니면 강을 건널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면에 몸이 닿는 순간 육체뿐 아니라 영혼마저 동시에 녹아내리기에 헤엄쳐서 간다는 선택지도 없었다.

하물며.

[<섬멸 용기사 발라르크의 갑옷>의 특수 스킬인 ‘비행’이 발동되지 않습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망자의 강물을 건널 시, 끝없는 미궁이 대상을 가둘 것입니다.]

용 날개를 펼쳐 날아간다는 선택지 또한 이곳에선 무용지물이었다.

대가를 지불해 배를 얻어 타든가.

혹은 육신과 영혼이 녹아내리는 게 두렵지 않으면 직접 헤엄이라도 쳐서 건너든가.

양자택일이었다.

기이익- 기이익-

대성의 손에 들린 영혼 덩어리에 혹했는지, 뱃사공이 안달 내는 소리를 내며 손을 내밀었다.

태생적으로 탐욕스러움을 지닌 뱃사공은 제물만 똑바로 바친다면 그 누구든 가리지 않고 귀왕의 영지까지 데려다줬다.

‘죽이는 게 손해인 녀석이지.’

이런 녀석의 도움을 빌릴 수 있다면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었다.

대성은 흔쾌히 녀석의 손에 영혼 덩어리를 건넸다.

기이이…….

뱃사공이 비둘기의 그것처럼 새빨갛고 동그란 눈을 탐욕스레 빛내며 영혼 덩어리를 살펴보았다.

이내 녀석은 한쪽에 세워둔 삿대를 들고 강 앞에 정박시킨 목제 뗏목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른 대성이 뗏목에 올라서자, 발밑에서 출렁이는 강물에 몸이 기우뚱거렸다.

‘배를 탔다고 안심해선 안 됐다.’

뱃사공이 삿대를 저으며 천천히 뗏목이 강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던 와중, 대성은 과거를 복기했다.

과거 겨우 뱃사공의 마음을 돌려 강을 건넌 그는 긴장의 끈을 풀다가 호된 꼴을 당했던 적이 있었다.

이렇게.

첨벙-

카아악-

강물 아래서 수면을 뚫고 튀어나온 어류 형태의 마수가 시시각각 닥쳐들었으니까.

망자의 강에만 서식하는 사어(死魚)였다.

콰직-

두 번의 실수, 두 번의 방심은 없다.

사어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대성이 팔을 뻗어 녀석의 아가미를 틀어쥐어 터뜨렸다.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놈들과 씨름할 순 없지.’

이 속도라면 강을 벗어나기까지 족히 2시간은 가까이 걸릴 터.

그 시간 동안 사어랑 신경전을 벌이는 건 기력 낭비였다.

대성은 아공간 포켓을 활성화했다.

‘발라르크를 무찌른 뒤의 시점이라면, 분명 이게 있었지.’

대성이 아공간 안쪽으로 잠긴 팔을 밖으로 빼내자.

파지직-

그의 손에는 어느덧 벼락이 타오르는 장창이 쥐어져 있었다.

‘발라르크의 뇌창.’

발라르크를 무찌르고 얻은 전리품.

뇌창을 꺼내 든 대성은 샛노란 번개가 타닥타닥 튀어 오르는 창날을 수면 아래로 푹 담갔다.

그 순간.

파지지직-!

시커먼 강물 사방팔방으로 번개가 작렬하며 거센 물보라가 튀었다.

무지막지한 전류가 강 밑바닥까지 할퀴며 퍼져나가니, 뗏목 아래에서 먹잇감을 노리던 사어들 입장에선 그야말로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키아악-

죽음의 강 아래서 사어들의 절규가 메아리치며 거품이 솟아올랐다.

둥실-

잠시 뒤, 강물 곳곳에서 전기 구이가 된 사어들이 둥실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제야 좀 편하게 갈 수 있겠어.’

그제야 그는 긴장의 끈을 약간 느슨하게 풀며 뗏목 위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뗏목이 느릿하게 강물을 타고 나아간 지 2시간이 지나고.

‘보이는군.’

마침내 어둠의 통로를 완전히 뻗어 나오고 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생명이 말라붙은 완연한 죽음의 땅.

망자들의 집결지이자, 사령 군단을 호령하는 귀왕의 고향.

[무덤 정원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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