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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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트가 1초에 다다르고 업화대검이 나비 소녀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 버리기 직전.
나비 소녀의 앞에 돌연 나타난 시스템 창이 대성을 멈추었다.
“……천상의 상점?”
테두리가 금색 띠로 휘감겨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는 시스템 창.
그것은 얼마 전에도 구현화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몇 번 보았던 적이 있는 형태의 시스템이었다.
그러고 보니 초월자가 나비 소녀로 부화하기 전, 동기화가 되었다느니 시스템이 업데이트됐다느니 같은 메시지를 보내긴 했었다.
대성이 느닷없이 나타난 새로운 UI에 집중하는 사이, 나비 소녀가 절박함이 가득 묻어 나오는 어조로 외쳤다.
[자, 자세한 기억은 없으나 제 핏줄이 천상의 차원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사옵니다!]
“그래서.”
[주, 주군께서 아량을 베푸셔서 이 미천한 목숨을 살려주신다면, 제가 천상의 잡것들이 독점하고 있는 모든 것을 주군께 바치겠나이다!]
“…….”
나비 소녀가 지옥의 시스템을 통해 마수로 화한 존재라면, 지금 저 말이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급히 지어낸 변명이나 허세는 아닐 터.
실제로 이렇게 그녀는 ‘상점창’이라는 새로운 UI를 생성시키지 않았는가.
본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시스템 메시지를 활성화시키는 광경은 꽤 신선하기도 했다.
“이 상점창…… 아니, 천상의 차원에서 비롯된 시스템을 내가 직접 열람할 수는 없는 건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천상의 시스템만큼은 제가 직접 열람하고 갱신해야 하옵니다. 무, 물론 저는 주군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기에, 실질적으론 주군께서 직접 천상의 시스템을 조종하는 것과 큰 차이는 없사옵니다만…….]
나비 소녀가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레 대성의 안색을 살폈다.
부디 이것으로 자신의 쓸모가 절대자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는 표정이었다.
‘제대로 살펴봐야겠지.’
중요한 건 상점창 그 자체가 아니라, 이곳에 ‘무엇이’ 들어 있냐는 점이니까.
그가 눈앞에 둥실둥실 떠오른 상점창에 손가락을 갖다 댄 순간.
띠링-
UI의 텍스트가 재배열되더니 또 다른 세 개의 항목이 일렬로 나열되기 시작했다.
[아이템] [스킬] [정보]
굳이 뜻을 헤아릴 필요도 없을 정도로 알기 쉬웠다.
대성은 제일 먼저 아이템 카테고리를 살펴보았으나…….
‘당장 쓸모가 있어 보이는 물건은 보이지 않는군.’
주로 천상의 병사들이 사용하는 무기나 방어구, 혹은 일시적으로 신체 성능을 향상해주거나 축복을 걸어주는 영약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업화대검과 발라르크의 갑옷이 있는 대성이 굳이 저들이 쓰던 무기와 방어구를 구매할 필요는 없었다.
영약도 마찬가지.
‘스킬도 다를 건 없군.’
<스킬 정보>
오르키엘의 날개 Lv.1
[일정 시간 동안 오르키엘의 날개를 펼쳐 활공할 수 있습니다.]
[스킬 사용 시 부가적인 축복 마법이 시전자에게 깃듭니다.]
[스킬의 레벨이 향상할 때마다 최대 10가지의 축복 마법이 추가됩니다.]
<스킬 정보>
르뮈에의 단죄 Lv.1
[시전자의 등 뒤에 여러 갈래로 뻗어 나온 빛의 사슬낫을 소환합니다.]
[사슬낫은 자동으로 적을 추적해 공격합니다.]
[스킬의 레벨이 향상할 때마다 사슬낫의 개수가 늘어납니다.]
전투적인 측면에서 보면 나쁘지 않은 스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이걸 비싼 공적 포인트를 지급하면서까지 구매할 필요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결론은.
“일단 아이템, 스킬 둘 다 내겐 쓸모가 없군.”
[아, 아직은 그러실지도 모르오나, 조금만 제가 성장하기를 기다려주신다면 분명 마음에 쏙 드실 스킬이나 아이템이 등장할 것이옵니다!]
“성장한다고?”
그 말을 들은 대성이 다시 한번 상점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잠겨 있군.’
스킬과 아이템 품목이 주르륵 나열된 UI의 스크롤을 내려보니, 정확히 전체 스크롤의 3분의 1을 지난 기점으로 아이템과 스킬 모두 일체의 정보를 볼 수 없도록 잠금이 걸려 있었다.
맥락을 따져보면 이 잠금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비 소녀의 성장일 터.
대성이 턱을 긁적이며 미간을 구기자 나비 소녀가 눈치 빠르게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정확히는 초월자를 없애고 시스템이 업데이트를 할 때마다 상점의 잠금도 하나둘씩 풀리는 형태이옵니다.]
“그래?”
대성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어쨌든 지금 당장 도움이 되어줄 만한 것들은 보이지 않기에 감흥은 별로 없었다.
아이템과 스킬 품목의 탐색을 마친 대성의 시선이 이윽고 마지막 카테고리에 머물렀다.
‘어쩌면 이건…….’
바로 ‘정보’에 말이다.
‘조금 쓸 만할지도 모르겠어.’
보편적인 경우, 대다수 인간은 휘발성 강한 ‘정보의 구매’보다는 눈에 확실히 보이고 영구적으로 사용이 가능한 스킬이나 아이템의 구매에 더 안정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대성은 달랐다.
이미 막강한 아이템과 스킬을 지녀서 아쉬울 게 없는 그에게,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정보를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은 오히려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알아볼 가치가 있다.’
그렇게 판단한 그는 정보 카테고리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정보 구매]
* 구매자에게 가장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 제공되는 정보의 유효 범위는 구매한 시점으로부터 24시간입니다.
* 정보는 1일 1회 구매할 수 있습니다.
[정보를 구매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구매한 시점으로부터 24시간이 유효 범위라면, 결국 내가 바라던 대답은 들을 수 없는 건가.’
천상에 있는 자들의 정체.
그리고 주신이란 자가 품고 있는 꿍꿍이.
판테온, 그리고 지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등.
‘……조급해하지 말자.’
대답이 듣고 싶은 궁금증을 지금 당장 해결하지 못한다는 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지금 당장 알아내지 못한다고 해서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천천히, 하나씩 알아가면 돼.’
어차피 당장 알아낼 방법이 없다면 거기에 계속 매달려 끙끙 앓는 쪽이 도리어 미련한 행위.
마음을 비운 대성은 그것들에 대한 의문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다시 ‘정보 구매’에 집중했다.
지금 자신한테 24시간의 유효 범위 내에 필요한 정보가 뭔지 본인조차도 모르는데, ‘정보 구매’를 하면 과연 어떤 정보가 나타날까.
그런 순수한 호기심이, 상점창이 제대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의구심과 맞물려 그가 손을 움직이게 했다.
[정보 구매에는 공적 포인트가 총 100,000pt 필요합니다.]
하루에 한 번밖에 구매하지 못한다는 특수성 때문일까.
제일 값어치 높은 스킬과 아이템이 요구했던 공적 포인트가 다섯 자리를 넘어가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굉장히 비싼 대가였다.
물론 구매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포인트가 부족한 건 아니지만.
[현재 공적 포인트: 2,300,000pt]
대성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많이도 쌓아놨군.’
라이센스 시험에 대비해 열흘 동안 속행했던 수차례의 아이템 구현화, 그리고 총 두 번의 필드 구현화 퀘스트를 거듭하면서 쟁여놨던 공적 포인트들.
하긴, 내심 좀 궁금하기는 했다.
퀘스트를 완료할 때마다 보상으로 공적 포인트를 주는 건 알겠는데, 정작 포인트의 쓰임새는 알 수가 없었으니까.
‘묵묵히 할 일을 하면, 언젠간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다.’
다시금 그 진리를 되새긴 대성은 10만 포인트를 지불하고 ‘구매’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화아악-
상점창에서 환한 금빛 깃털이 몇 가닥 터져 나와 으슥한 골목 사이에 흩날렸다.
허공을 하늘거리는 금빛 깃털은 이내 한 지점에 모여들어 뭉치기 시작하더니, 점차 A4 용지 정도 크기의 문서로 변했다.
[허공록(虛空錄)이 생성됩니다.]
사락-
문서, 허공록이 부드럽게 대성의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
대성은 읽기 쉽게 허공록을 빳빳하게 펼친 뒤 그곳에 적힌 글귀에 시선을 고정했다.
첫 줄을 막 읽기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디까지나 어떤 정보가 적혀 있나 싶은 단순한 호기심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주, 주군?]
나비 소녀가 안절부절못하며 대성을 바라보았다.
그럴 만도 했다.
허공록에 나와 있는 글귀를 읽기 시작한 직후, 대성의 표정이 눈에 띄게 험악해지기 시작했으니.
***
다음 날 아침.
대규모 클랜인 빅10 중에서도 소속된 대원 숫자만 따지면 국내 최고라고 불리는 <황천> 길드의 본부.
쿵, 쿵-!
분노의 날이 잔뜩 돋친 발걸음이 사무실 바닥을 울렸다.
선이 얇은 몸에 얼굴에 각종 피어싱을 단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영업 부서로 향했다.
“대체 일을 하는 겁니까, 마는 겁니까!”
피어싱 남자, 강기범이 노기에 가득 찬 목소리로 그리 외치며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영업팀 직원이 어깨를 흠칫 떨며 작게 신음을 흘렸다.
“아니, 저, 그게…… 강 상무님. 일단 진정하시고-”
“진정? 오늘 신인 대원들 합동훈련이 있다는 걸 뻔히 아실 텐데 잘도 그 입에서 진정이란 말이 튀어나오는군요?”
<황천>뿐만 아니라 체계를 갖춘 웬만한 클랜에는 모든 신인 대원이 입단 첫해에 합동훈련을 시행해야 한다는 유구한 전통이 존재했다.
그리고 합동훈련은 대개 실제로 게이트에 들어가 실전을 치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당장 오늘이 훈련인데 아직까지 게이트 예약을 못 했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요!”
“가, 강 상무님 하,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뭐요! 영업 부서에 지금 사람이 몇 명인데, 일정 맞춰서 4등급짜리 생존형 게이트 하나를 확보 못 해요? 널리고 널린 게 4, 5등급 게이트인데!”
파릇파릇한 신인 대원의 전력 증강은 곧 클랜 전체의 영향력으로 직결되는 문제였다.
합동훈련 스케줄이 펑크가 나버린다는 건 며칠 내로 전장에 투입될 군인이 훈련을 못 한다는 말과 똑같았다.
강기범이 눈에 쌍심지를 켜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명색이 대형 클랜의 영업팀이란 자들이 정말로 무능해서 게이트 예약을 못 했을 리는 없었다.
영업팀 직원이 억울하다는 듯이 거의 울먹거리며 말했다.
“하, 하지만 강 상무님. 어, 어젯밤에 갑자기 인근 게이트 공략권을 한꺼번에 사들인 사람이 있어서…….”
“뭐요?”
강기범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한꺼번에 사들인 ‘사람’이라는 말은, 한 명이 복수의 게이트를 예약했다는 의미.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행위다.
“공략권 산 사람, 이름이 어떻게 되는데요.”
“그…… 산 사람은 성찬호인데 대표자는 한대성으로…….”
“한대성? 한대성이라면…… 제가 아는 그 한대성이요? 최근에 S급으로 승급한?”
영업팀 직원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강기범은 아예 책상에 놓인 컴퓨터 모니터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공략권 구매 페이지엔, 확실히 이곳 성남시에 있는 모든 게이트가 ‘한대성’이란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었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이 인간, 왜 갑자기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거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런 짓을 할 만한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사정을 알았으니 화가 좀 누그러졌겠지 싶어서 영업팀 직원이 강기범에게 슬며시 물었다.
“아,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됐으니 합동훈련은 연기하는 게 좋겠죠? 다른 지역 게이트는 타 클랜 관할이니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고…….”
“연기요? 누구 맘대로요?”
“예?”
“이쪽은 이쪽 관할 게이트를 침범당했어요. 그런데 그냥 가만히 순응하고 훈련 일정을 연기하자는 겁니까? 가오도 안 살게?”
성남시는 <황천>의 텃밭이다.
힘없는 클랜이나 솔로 사냥꾼 사이엔 <황천>의 허락 없이 함부로 성남시의 게이트를 에약해선 안 된다는 불문율이 존재했다.
소위 말하는 ‘텃세’였다.
그런데 지금, 그 텃세를 내지 않는 도둑놈이 나타났다.
강기범이 입술을 잘근 깨물며 모니터에 표시된 한대성 이름 석 자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가, 강 상무님. 대표자가 S급 사냥꾼이니만큼 이번엔 그냥 조용히 넘어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S급 사냥꾼?”
강기범이 반문한 순간.
사아악-
영업팀 직원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A급 사냥꾼의 비릿한 살기가 넓은 사무실을 가득 채워나갔다.
“빌어먹을 S급이라도 업계 상도는 순순히 따라야죠.”
***
같은 시각.
아우디 한 대가 성남시 판교역 근처에 진입했다.
지하철 역 인근엔 이미 바리케이드가 설치된 상태라 군인과 특경을 제외하면 인적이 거의 없었다.
싸늘한 아침 공기와 어우러져 흐르는 무거운 적막 속에서, 성찬호가 긴장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네가 그렇게 다급하게 나한테 뭘 부탁한 적은 처음이다, 야.”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어젯밤.
정보 구매를 통해 문서에 나온 글귀를 읽은 대성은 곧바로 성찬호에게 전화를 걸며 말했다.
당장 성남시에 있는 모든 게이트 공략권을 사들이라고.
거기엔, 지금 대성이 말한 것처럼 그래야만 할 이유가 존재했다.
‘그 문서에 적힌 정보가 사실이라면…… 서둘러야 한다.’
덜컥-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서 내린 그는 통제선을 넘고 게이트로 다가갔다.
3등급 통상형 게이트.
대성이라면 10분 안에 깨고도 남을 평범하기 그지없는 게이트였다.
그러나.
‘지금 성남시에 존재하는 게이트는 전부 열여섯.’
3등급부터 5등급까지, 그것도 통상형, 생존형, 군단형 가리지 않고 합계 열여섯 게이트를 한꺼번에 닫아야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대성은 다시 한번 어제 확인했던 정보를 떠올렸다.
「내일 성남시에 있는 모든 게이트에 프렉쳐 현상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프렉쳐 발발까지의 제한 시간은 생존형을 제외하면 1시간 안팎.」
「게이트를 클리어함으로써 미래를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본 문서에 기록된 미래가 그대로 일어날 시, 사용자에게 직간접적인 피해가 일어난다.]
한 도시에 생겨난 게이트가 같은 타이밍에 전부 터져버린다는 말을 과연 누가 믿을까. 아마 열에 열 명은 거짓말이라고 치부하리라.
심지어 정보를 접한 대성조차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무조건 막아야 해.’
성남시는 지금 혜정과 지수가 살고 있는 강남구와 가까운 지역.
만약 16개의 게이트 프렉쳐로 인해 외부로 유출된 대규모 몬스터 무리가 가족이 살고 있는 땅까지 올라오게 된다면…….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을 동안엔 절대 용납 못 한다.’
사중으로 겹겹이 쳐진 방호책이 가족을 지킨다 해도 말이다.
그 야만스럽고 포악한 괴물들이 가족의 근처에서 숨결을 토한다는 사실 자체가 상상만 해도 속이 뒤틀렸다.
그런 엿 같은 일은, 벌어지기 전에 미리 차단하는 게 최선이다.
[저…… 주군. 그런데 어떻게 게이트 16개를 한 번에 닫으실 생각이시옵니까?」
‘다 방법이 있어.’
앳된 목소리가 그의 귓전 근처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바로 나비 소녀였다.
그녀의 질문에 대성이 전음(傳音)으로만 대답했다.
나비 소녀의 모습은 오직 대성만이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대놓고 그의 머리 근처에서 날아다니고 있음에도 그 누구도 눈치를 못 챈다는 게 그 증거였다.
시스템이 대성의 눈에만 보이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까.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만.
[흠…… 그런데 상당히 묘하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단순한 우연은 아닌 듯하옵니다만…….]
‘그래, 이게 우연일 리가 없지.’
약간의 시간 차도 두지 않고 열여섯 개의 게이트가 동시에 터질 확률은 무조건 0%.
그런데 확률적으로 벌어질 수 없는 일이 이리 태연하게 일어나고 있다면, 뻔하지 않겠는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개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거겠지.’
외부의 의지가 간섭했다는 말밖에 더 되지 않았다.
물론 이런 개수작을 벌인 게 누구인지 배후를 알아내는 건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급한 불부터 끄는 게 우선이니까.
그렇게 생각한 대성이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오른손을 펼쳤다.
그리고.
“……헉!”
같은 현장에 있었던 성찬호와 게이트 근처의 군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성의 손에 아주 작고 새카만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으니까.
게이트 바깥쪽에서 갑자기 오러 테크닉을 발동한 까닭이 뭘까?
군인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하던 가운데.
“지금부터 내가 지정한 곳에 들어가서 전부 죽여라. 한 시간 안에.”
그 순간.
화아악-
[죽음의 군단이 절대자의 명령을 따릅니다.]
칠흑의 소용돌이가 삽시간에 여러 갈래의 검은 연기로 흩어지며 성남시 전역에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