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69화 (69/180)

#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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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감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이곳이 원래는 ‘숲’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까.

[세, 세상에 맙소사…….]

나비 소녀가 분진폭발에 휘말려 황량해진 필드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감탄을 흘렸다.

단단했던 흙바닥은 새까맣게 그을린 채 뒤엎어졌고, 뿌리를 깊게 박았던 거목은 무참하게 뽑혀 나가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숲이라기보다는 황야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발상의 규모가 다르셔.’

분진이 아닌, 진짜 ‘폭연(爆煙)’이 피어오르는 숲을 눈에 담은 나비 소녀는 헛숨을 들이켰다.

‘적을 죽이는 걸 넘어, 아예 그들이 사는 본진 그 자체를 파괴해버리시다니…….’

나비 소녀는 대성으로부터 마수로서의 삶을 부여받은 존재.

시스템이 강제로 주입한 인과 덕에, 그녀는 대성이 위대한 존재임을 태생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위대한 존재가 지닌 강함의 실체를 직접 목도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싹, 오싹-

[흐, 흐으…….]

심장 어림에서 요동치는 이 오싹거림의 정체는 뭘까?

평범했던 숲이 불지옥으로 변모했다는 사실에서 느껴져 오는 쾌감?

아니면 이 모든 수라장을 몰고 온 절대자를 향한 두려움?

아니, 아니다.

이건 절대자를 향한 ‘경외’다.

그리고 ‘전율’이다.

‘나는 이분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

나비 소녀는 확신했다.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을 기꺼이 대성에게 바칠 준비가 되었다고.

그럴 가치가 충분히 차고 넘치시는 분이라고.

[주군! 새삼스럽사오나, 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평생 주군만을 따르겠나이다!]

“그래?”

웬일로 대성은 나비 소녀가 느닷없이 호들갑을 떠는 이유에 대해서 의문이나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휙-

그 대신 허리춤에 꽂아두고 있던 심판의 단검을 나비 소녀에게 던졌다.

[힉……!]

자신의 몸통 크기와 비슷한 단검이 날아오자 나비 소녀가 버둥대면서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잡아냈다.

그녀가 손잡이 부근을 양팔로 꼭 끌어안은 채 안간힘을 쓰며 물었다.

[주, 주군……. 어, 어찌하여 제게 단검을……?]

“충성심 테스트야.”

대성이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키자 나비 소녀의 고개도 슬그머니 돌아갔다.

거기엔 불씨가 타닥타닥 튀기는 숲길 위로 숯덩이가 된 키드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놈들 몸뚱이 안쪽 어딘가에 붉은 보석 같은 것들이 있을 거다. 가서 그걸 캐 와.”

[부, 붉은 보석 말이옵니까?]

“왜. 싫어?”

[아뇨! 아뇨, 당치도 않은 말씀이옵니다! 복창하겠나이다. 적들의 몸뚱이 안쪽 어딘가에 있는 붉은 보석을 캐는 것이 저의 임무이옵니다!]

“알아들었으면 가.”

나비 소녀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진심으로 기쁜 얼굴을 하며 사체가 있는 곳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쓸 만한 몸종을 얻었다며 대성이 그럭저럭 만족감을 느끼던 그때.

쿵-!

땅이 가볍게 울리기 시작했다.

대성은 등 뒤의 진원지로 몸을 돌렸다.

쿵-!

갈색 털에 뒤덮인 거대한 발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 울림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언제 나타나나 했는데.”

스릉-

대성은 등에 둘러멘 업화대검을 꺼내 들며 전방을 주시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마침내 나타난,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를.

성인 남성보다 3배는 커다란 마체테를 움켜쥔 거대한 원숭이였다.

2등급 보스 몬스터. 맨후드(Manhood).

끼에에에에엑-!!

놈의 포효엔 너무나도 또렷한 울분이 서려 있었다.

소중한 터전을 불태워버리고 동료를 죽인 인간을 향한 분노가!

“저놈 에테르는 내가 캐지.”

하지만 대성에게는 분노고 울분이고 뭐고, 그냥 걸어 다니는 돈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쿵, 쿵-!

끼에에에엑-!!

한 줌의 이성조차 남지 않은 맨후드는 거의 실성한 듯이 대성을 향해 쇄도해왔다.

훙-!

거목의 기둥보다 두꺼운 팔뚝에서 근육이 폭발적으로 솟구치고, 그 위세를 고스란히 받은 마체테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둘러졌다.

카가가가가각-!!

하지만 그보다도 빨리 횡 방향으로 공기를 갈라내며 움직인 업화대검이, 맨후드의 오른쪽 어깻죽지를 단숨에 찢어버렸다.

핏물이 낭자하게 뿜어지며 마체테를 쥔 맨후드의 오른팔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뒤로 날아갔다.

끼이이이익……!

고통이 엄습하기 이전에 분노와 울분으로 헝클어진 이성이 조금이나마 제자리를 되찾았다.

유인원답게, 맨후드는 깨달은 거다.

눈앞의 인간은 어떻게 덤빈다고 해서 이겨낼 수 있는 적이 아니란 사실을.

끼에에에엑-!!

이번엔 다른 의미로 실성한 듯이 절규한 맨후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어깻죽지와 오른팔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고 골반 부근까지 살점이 덜렁덜렁 흔들리는 상태임에도, 고통을 초월한 생존본능이 두 다리를 박차게 해줬다.

그때.

턱-

……?

어떻게든 단 몇 발짝이라도 눈앞의 인간으로부터 달아나려던 맨후드는 이상한 점을 느꼈다.

아무리 발에 힘을 주고 다리를 허우적대도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딜 도망치려고?”

아까 첫 일격(一擊)을 날렸을 때와 전혀 거리감이 달라지지 않은 선명한 목소리에, 맨후드가 얼굴색을 새파랗게 물들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대성이 칼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녀석의 길쭉한 꼬리를 한 움큼 휘어잡고 있었다.

“너를 쫓을 시간은 없단 말이야.”

끼이이익-!

맨후드가 아연실색하며 극도의 공포가 실린 울부짖음을 토해내기 무섭게.

훙-!

콰지지지직-!!

이번엔 종(縱) 방향으로 파공성을 그려낸 대검이 맨후드의 정수리에 내려찍혀 명치와 복부까지 주르륵 갈라냈다.

두 쪽으로 나뉜 놈의 몸뚱이 사이로 시뻘건 피의 실타래가 찐득하게 늘어졌다.

[으…….]

나비 소녀는 유약하게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홱 돌려버린 뒤, 에테르를 캐는 작업에 마저 집중했다.

***

“점심 거른다고?”

KHA 본사.

점심시간을 몇 분 앞둔 시간, 선임 직원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끄덕.

오재익이 얼굴에 그린 미소 위로 어딘가 살짝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우, 어제 먹은 야식 때문에 그런가? 출근할 때부터 속이 좀 이상하더라고요.”

“어쩐지 아까부터 표정이 심상치 않더라니, 허……. 그럼 어떡해. 재익 씨, 진짜 점심 안 먹어도 돼?”

“예. 전 신경 쓰지 마시고 다들 갔다 오세요. 전 화장실 가서 속이라도 좀 비우든가 해야겠어요.”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영 힘들다 싶으면 휴게실에서 약 먹고 좀 쉬어, 재익 씨.”

“네. 어우…….”

오재익이 배를 부여잡으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벗어났다.

성실한 성격으로 나름 좋은 이미지를 구축한 그였기에, 동료들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오재익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덜컥-

화장실로 들어온 오재익은 문을 닫은 뒤 제일 구석에 있는 칸을 향했다.

“…….”

양변기 앞에 우두커니 선 오재익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아니, 그냥 무표정이었다.

슥-

그가 천천히 양손을 뻗었다.

내려가 있는 양변기 덮개를 올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탁.

마치 팬터마임처럼, 그의 양손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움켜쥐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팔뚝을 구부리며 양팔을 펼치는 순간.

쫘아아아악-

어떤 투명한 막이 찢어발겨지는 것처럼 대기가 좌우로 넓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틈새에, 시커먼 어둠이 생생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

심드렁하게 그 어둠을 노려본 오재익이 고개를 쭉 내밀었다.

그렇게.

그의 몸이 어둠 속으로 쏙 빨려들 듯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균열이 온데간데없이 소멸했다.

“후우…….”

어둠 너머의 세계로 몸을 던진 그가 길고 고요한 숨을 뱉었다.

근육이 떨리고 현기증이 일었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란 말이지.”

중얼거린 오재익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위’를 보았다.

“그래, 어디…….”

가장자리에 설치된 계단과 난간을 제외하면 휑하기 그지없는, 어떤 ‘탑’ 같은 곳의 내부였다.

저 꼭대기까지의 거리가 아득해서 천장이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그르륵-

키이익-!

무수한 괴물이 난간 안쪽에 서서 고개만 삐죽 내민 채 살벌한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오재익이 그 괴물을 올려다보며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제물은 얼마나 모였지?”

***

처음 알았다.

인간의 관절이 저런 방향으로도 꺾일 수도 있다는 걸.

아니.

억지로 꺾은 걸까?

우두둑!

마지막으로 남은 신입 대원의 목이 돌아가선 안 될 방향으로 꺾였다.

“헉! 헉……!”

엉덩방아를 찧으며 숨을 달싹이는 강기범의 눈에는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사람이 죽는 광경이라면 많이 봐서 익숙했다.

그것도 단순히 칼에 베이고 총에 맞는 그런 죽음이 아닌, 몬스터라는 포식자로부터 살점이 뜯기고 잡아먹히는 잔혹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사냥꾼은 익숙해져야 한다.

죽음으로부터 눈을 돌릴 시간에 단단히 정신을 차리고 포식자를 죽여야만 한다.

그것이 사냥꾼이란 직업이 짊어진 사명이자 비애였으니까.

그리고 A급 사냥꾼인 강기범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실천하는 자였다.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뭐, 뭐가……!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아무리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그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멀쩡히 살아서 대화를 나눴던 대원들이 돌연 사지가 비틀리고 꺾이고 쥐어짜이며 죽어가는 상황은.

“뭐야, 씨X……. 지금 이게 대체 뭐 하자는 거냐고!”

강기범은 거의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비명을 질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열두 명의 신인 대원이 절명했다.

그것도 줄 끊어진 구체관절 인형처럼 관절이 이상하게 꺾인,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한 모습으로.

이전의 그가 동료의 죽음을 마주하면서도 애써 용기를 내 포식자와 맞설 수 있었던 까닭은, 최소한 적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어떤 항거할 수도 없는 미지의 공포 앞에서, 강기범은 그저 무기력하게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변이(變異)…… 변이 게이트에 들어온 건가, 설마? 씨X, 재수 없게?’

강기범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오러의 출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게이트 자체의 파장에 변화가 생겼다거나 대기 성분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변이 게이트는 아닌데…… 그럼, 그럼 대체 이게 뭐야……. 고작해야 4등급 게이트에서 이딴 개 같은 일이 벌어질 리가 없는데……!’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한 강기범이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고 한 그때.

스르륵-

“어?”

새까만 먼지 같은 것들이 그의 앞에 모여들더니, 서서히 어떤 사람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현상과 마주한 강기범은 말을 잇지 못하면서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이건…….”

먼지가 모여들어 사람의 모습이 되는 게 아니라, 투명한 모습으로 ‘은신’해 있던 무언가가 그 은신을 서서히 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벅-

허공에 부유한 채 모습을 드러낸 ‘그것’이 깃털처럼 사뿐하게 땅에 내려앉으며 대뜸 이렇게 말했다.

“기량이 썩 나쁘지는 않네. 제물로 삼기엔 좀 아까워, 너.”

***

맨후드의 에테르를 채취한 대성은 숲이 들썩이는 걸 느꼈다.

다름 아닌 게이트가 곧 닫히려 한다는 징조였다.

‘게드락과 돌프야 알아서 하겠지만…… 나머지 녀석들이 걱정되는군.’

이곳은 해결되었으니 슬슬 다른 게이트의 진압이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대성은 낑낑거리며 캐낸 에테르를 아공간 속으로 던져놓는 중인 나비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가자.”

[하, 하오나 주군께서 명하신 임무를 아직 전부-]

“됐어. 이놈들 에테르 코어까지 일일이 하나하나 챙기고 있을 정도로 한가하진 않으니까.”

[아! 네, 네!]

드디어 진 빠지는 노동이 끝났다는 걸 깨달은 나비 소녀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둘은 그렇게 들어왔던 곳을 통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헉!”

다짜고짜 경악성을 뱉은 건 게이트 앞에서 쭉 대기하던 군인이었다.

분명 대성이 게이트에 입장한 지 20분밖에 안 지났을 텐데, 벌써 클리어했단 말인가?

과연 듣던 대로 어마어마한 실력에 군인이 놀라는 사이.

“20분……. 음, 저번과 비교하면 좀 오랜 걸린 편이네.”

마찬가지로 대성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성찬호가 운전석에서 그를 바라보며 이젠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성은 그런 둘의 반응엔 신경도 쓰지 않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KHA 사이트에 접속해 현재 성남시 게이트 클리어 현황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때.

-주군.

돌연 그의 머릿속에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 한창 3등급 생존형 게이트를 공략 중일 터인 사령단장 돌프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야.”

-그게…… 다름이 아니오라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문제?”

‘문제’라는 말이 들려오자 심상치 않음을 느낀 대성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한편.

“쟤는 왜 미친놈처럼 저기서 혼잣말을 하는 거야?”

멀찍이서 대성을 바라보는 성찬호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제삼자 시선에는 대성이 혼자서 뭐라 웅얼거리는 것으로 보였으니까.

징-

버튼을 눌러 운전석 유리창을 내린 성찬호가 목을 길게 빼며 외쳤다.

“야! 끝났으면 얼른-”

하지만 성찬호가 말을 마저 마치는 순간은 오지 않았다.

펄럭-!

돌연 대성의 등 뒤로 검은 용의 날개가 나타났으니까.

밀어내듯이 땅을 박찬 대성이 단숨에 창공으로 뛰어올라 어딘가로 날아갔다.

“저, 저 녀석 왜 저래, 갑자기?”

성찬호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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