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71화 (71/180)

# 71

071

목덜미를 옥죄는 억센 악력에 괴인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대로 억지로 목을 빼고 움직이려고 했다간 그대로 머리통이 뽑혀버릴 것만 같은 예감이다.

그리고 그 예감대로 괴인의 목숨 줄을 단단히 움켜잡은 대성이 입을 열었다.

“낯짝을 드러내라고 했잖아.”

“윽, 큭……!”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참 많아. 사람이 대화할 때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는 게 예의잖아?”

꾸욱-

목덜미를 붙잡은 대성의 손가락 마디에 점점 힘이 실리면서 괴인의 눈에 핏발이 솟구쳤다.

‘어, 어차피 이런 상태론 <은신>을 오래 유지하지 못해.’

<은신>은 외관, 냄새, 기척 등 모든 것을 지워 적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기습을 가하는 강력한 권능이다.

하지만 그만큼 약점도 뚜렷했다.

이렇게 상대방에게 덜미를 잡히면 지속 시간과 성능이 급속도로 저하되었으니까.

사아악-

<은신>이 풀린 괴인이 걷혔던 안개가 다시 모여드는 것처럼 서서히 드러났다.

괴기하게 생긴 그 모습을 보며 대성이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상판을 보아하니 사람이 아니군.”

“…….”

“어쨌든 이제야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네. 강기범을 저렇게 만든 게 너냐?”

S급의 서동철이 타고난 특이 오러로 몸을 경화(硬化)시켜 몬스터 같은 모습으로 변모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서동철을 제외하곤, 딱히 인간의 형상을 벗어나게 하는 오러 테크닉을 구사하는 사냥꾼이 있다는 얘기는 접해보지 못했다.

“대답 안 하는 걸 보니 네가 한 짓이 맞나 보군.”

“……젠장.”

“인간을 몬스터로 만드는 걸 보니 너도 평범한 놈은 아닌 것 같은데. 성남시에 있는 게이트를 통째로 터뜨리려는 것도 너겠지?”

“……맞아.”

괴인은 순순히 인정했다.

발뺌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차라리 정면으로 맞서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우리 계획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질문은.”

꾸구국-

그 순간, 괴인은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야말로 눈, 코, 입을 쥐어 짜낼 것처럼 대성의 우악스러운 손에 막대한 힘이 실렸기 때문이다.

“질문은 내가 하는 거야. 네가 하는 게 아니라.”

“켁, 켁……!”

죽는다.

대답을 바란다는 놈이 이렇게 죽일 듯이 목을 조르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괴인은 지금 마주한 하얀 머리 인간이 제대로 미친놈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죽기 전에 죽여야 해!’

처음에는 서서히 시간을 두고 이 미친놈의 정체를 캐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계획대로 했다간 이쪽이 먼저 죽을 판이다.

-꿈틀.

잡힌 건 어디까지나 목이었기에 괴인은 어렵지 않게 왼손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자.

“음?”

괴인을 붙잡고 있던 대성의 손가락이 천천히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주인의 의지를 벗어난 제멋대로의 움직임.

의아함을 느낀 대성이 잠깐 손가락을 주시하는 사이.

“크악-!”

괴인이 숨통이 트이기 무섭게 곧바로 대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헐레벌떡 다리를 박찼다.

“이건 또 뭐야.”

꾸국- 꾸구국-

멋대로 움직이는 오른손을 쳐다보며 대성이 인상을 팍 구겼다.

괴인은 아직도 아려오는 목구멍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사가트라고 한다.”

“네 이름을 물어본 기억은 없는데. 그보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뒈지기 전에 이름이라도 알고 가라는 거야. 구천에서도 내 이름을 떠올리며 벌벌 떨게 말이지.”

“질문에 대답하라니까 자꾸 딴소리하는군.”

멋대로 몸이 움직이는 현상을 겪고 있음에도 대성은 너무나 태연했다.

그 침착한 반응에 심기가 거슬렸던 사가트가 혀끝을 차며 대성의 한쪽 손에 잡힌 업화대검을 힐끗거렸다.

“그 칼, 좋아 보이네? 그걸로 <방벽>을 잘라냈어?”

“아까 내 오른손을 아작 낸 그 톱날 같은 거 말인가? 그래.”

“정말 놀랍네.”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이죽거린 사가트가 왼팔을 옆으로 뻗은 순간.

꾸욱-!

이번엔 대성의 양손이 저절로 움직이며 업화대검을 역수로 쥐었다.

불타는 칼날이 그의 복부를 향하도록 말이다.

“근데 그 명검이 네놈의 배때기를 꿰뚫어버리는 경험은 더 놀라울 거야!”

조소를 내비친 사가트가 옆으로 뻗은 왼손으로 주먹을 쥠과 동시에.

팍-!

대성의 양팔이 움직였다.

이제 곧 선혈이 솟구치고 놈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 못한 채 절명하리라!

그렇게 생각한 사가트였으나…….

“……엉?”

꾸우욱-

사가트의 기대는 완벽히 빗나갔다.

칼날은 아슬아슬하게 대성의 복부로부터 짧은 간격을 앞둔 채 멈춰 있었으니까.

사가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 뭐……!”

“뭐가 이상하나?”

믿지 못하겠다는 듯 크게 경악하는 사가트와 상반되게, 대성은 입가에 여유로운 웃음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놈이 나한테 이빨을 드러내기를 기대한 건가, 설마?”

-이빨이라면, 주군께서 다시금 저를 찾으실 때 충분히 드러냈죠.

칼에 깃든 영령 마그누스가 농담조로 그리 말했다.

구현화 퀘스트 때 대성의 온몸을 불태웠던 시련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이, 이건……! 이럴 리가 없는데!”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사가트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짧은 실로 지정한 상대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권능, <염사(念絲)>.

<은신> 이상으로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공격이 통하지 않자 사가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염사>를 파훼한 건가? 아냐. 오히려 저건…….’

적이 권능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이상 그것을 파훼하는 것 또한 불가능할 터.

사가트의 눈이 대검에 머물렀다.

저 하얀 머리가 억지로 칼을 밀어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칼이 스스로 거부하고 있어!’

마치 자아를 가진 생물처럼.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혼란에 빠진 사가트가 <염사>의 운용을 느슨히 한 순간.

화르륵-!

펑-!

“컥……?!”

돌연 커다란 불덩어리 하나가 대포알 같은 속도로 날아와 사가트의 얼굴에 작렬했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히고 막대한 뜨거움을 느낀 사가트가 허리를 꺾으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작열’ 모드의 첫 번째 특수 스킬이 발동됩니다.]

[특수 스킬 : <염탄>]

검붉은 도깨비불이 대성의 머리 근처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염사>에 속박되어 있던 대성의 팔이 자유를 되찾았다.

권능을 행사한 당사자가 지금 거하게 한 방 먹은 참이니까.

“으아아아-!”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린 사가트가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악에 받친 비명과 함께 사가트의 양팔이 활짝 펼쳐졌다.

스르륵-

그러자 일대에 널브러져 있던 <황천> 대원의 시체들이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시건방진 인간 새끼가!”

<염사>의 실에 매달린 시체들이 떨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대성에게 들이닥쳤다.

그들의 손에 잡힌 창칼이 매섭게 휘둘러진 순간.

붕-!

그보다도 빨리 대기를 찢어내며 움직인 업화대검이 불꽃의 선을 그리며 시체들을 잘라냈다.

콰과과곽-!

시체들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허공에서 분리되었다.

“미친……!”

솔직히, 사가트는 저 미친놈이 아주 잠깐은 양심의 가책을 느낄 줄 알았다.

죽은 인간에게 공격을 가할 순 없다고.

근데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었다.

팍-!

쏟아지는 시체들의 피 분수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대성이 귀신 같은 몰골로 사가트를 향해 쇄도했다.

“이런 젠-”

크게 기겁한 사가트가 <염사>로 대성의 발을 묶으려 했다.

서걱-!

그러나 그 알량한 수작이 대성을 덮치기 전에, 불길을 둘러 입은 칼날이 이번엔 사가트의 상반신을 하반신에서 떼어냈다.

***

놀랍게도 사가트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물론 몸이 반 토막이 났으니 살아도 산 게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는걸 보니 놈은 얼마 안 가 과다출혈로 숨이 멎을 것이다.

“허억, 꺽…….”

“나는 분명 네 입으로 털어놓을 기회를 줬다. 근데 넌 놓쳤지.”

묻고 싶은 게 정말로 많았다.

어떻게 평범한 인간인 강기범을 몬스터로 만들었는지.

정체가 뭔지.

그리고 성남시의 게이트를 한꺼번에 터뜨리려고 한 이유가 뭔지.

하지만.

“이미 송장이 된 놈한테 할 질문 따위는 없다.”

스릉-

업화대검이 사가트의 얼굴에 겨눠진 순간.

-슥!

희미하게 꺼져가던 사가트의 눈에 이채가 서리는 것과 동시에 녀석이 몸에 걸친 누더기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뭔가를 끄집어내려고 했다.

콰직-!

“억……!”

물론 그걸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대성이 아니었다.

커다란 발이 빠르게 움직여 사가트의 명치를 짓밟았다.

속전속결.

-콱!

대성은 쐐기를 박듯이 사가트의 안면에 대검을 쑤셔 박았다.

누더기 안쪽을 바쁘게 헤매던 사가트의 팔이 축 늘어졌다.

“…….”

이놈은 마지막까지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단순히 대성을 죽일 작정이었다면 굳이 옷 속에 팔을 집어넣는다는 번거로운 동작보다 더 현명한 방법이 있었을 터인데.

신경이 쓰였던 대성은 절명한 사가트의 손이 머물러 있는 누더기를 헤집었다.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크기의 작은 수정 구슬을.

투명한 구슬의 표면 안쪽에는 회오리 같은 것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게 뭔지 알아?”

대성은 아까부터 옆에서 얼쩡대고 있는 나비 소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나비 소녀 또한 구슬의 정체에 대해선 아는 게 없는지 곤란한 기색으로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소, 송구하오나 저도 잘…….]

“…….”

상점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만 빼면 장점이 없는 녀석이다.

대성은 어이없다는 눈초리를 거둔 뒤 게슴츠레 시야를 좁혀 구슬 안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힘차게 돌아가는 회오리.

일렁이는 아지랑이.

그리고 이따금 튀어 오르는 전류.

상당히 눈에 익었다.

“게이트랑 똑같이 생겼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냥꾼이라면 오히려 못 알아보는 게 이상했으니까.

수정 구슬 안쪽에 힘차게 공진하고 있는 것은 분명 게이트였다.

“죽는 순간까지도 수수께끼를 남기는 놈이네.”

대성은 이미 숨이 멎은 사가트를 내려다보며 불만을 표시했다.

정체도 모르는 걸 쳐다보고 있어봤자 해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귀안(鬼眼).”

대성이 그렇게 명령어를 나직이 뱉은 순간.

[복속된 마수, ‘사령단장 돌프’의 고유 권능이 일시적으로 절대자에게 전승되었습니다.]

[절대자에게 권능이 전승된 동안 마수는 해당 권능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사령단장 돌프’의 고유 권능: <귀안>이 발동됩니다.]

<사주의 눈>으로 보랏빛으로 물들었던 대성의 눈이, 이번에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주홍빛으로 변했다.

‘어차피 돌프 녀석이 지금 당장 귀안을 쓸 일은 없겠지.’

전직 귀왕이었던 돌프가 지금은 대성의 충복이 되었다.

녀석의 권능을 대성이 전승받아 사용할 수 있는 건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발라르크만이 길들일 수 있었던 섬멸룡이 이제는 대성만의 전유물이 된 것처럼 말이다.

<스킬 정보>

귀안 Lv.1(Max)

[사자(死者)의 기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귀안>은 사령화한 존재가 아니더라도 상대가 죽어 있기만 하면 곧바로 기억을 엿볼 수 있는 스킬.

이제는 ‘영혼수감소’로 일일이 적을 흡수하고, 소환하고, 기억을 들여다볼 필요가 사라진 것이다.

<귀안>이 열린 대성의 눈이 사가트의 기억을 읽어 내려갔다.

-평생을 사냥꾼이 되기만을 꿈꿨어! 그런데 이게 뭐냐고!-

-짐꾼? 짐꾼 따위로 뭘 먹고살란 말인데! 각성까지 한 내가!-

사가트의 기억을 엿본 대성은 의외의 사실에 눈을 치켜떴다.

사가트는 원래 인간이었다.

그것도 작년에 막 오러를 깨우친 각성자.

인간이었을 시절엔 ‘이지윤’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각성자가 된 그녀는 사냥꾼의 꿈을 품고 라이센스 시험에 도전했으나 그만 낙방하고야 말았다.

사냥꾼이 되어 떵떵거리는 삶을 얻고자 하던 꿈이 좌절된 것이다.

-정말…… 정말 라이센스가 없어도 여기에 들어올 수 있나요?-

-잘 해낼 자신 있습니다!-

-사람 죽이는 일? 그딴 것보다 제가 가진 능력을 썩히는 게 백배는 더 안타까운 비극 아니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어느 악명 자자한 범죄 조직에 몸을 담았다.

불법을 저질러 라이센스가 박탈된 사냥꾼이나 사가트처럼 아예 라이센스를 얻지 못한 각성자가 범죄 조직에 가담하는 일은 굉장히 흔했다.

“이거 생각 이상으로 정신 나간 년이었군.”

그리고 범죄 조직에 들어간 사가트는 무차별적으로 죄 없는 사람을 억압하고, 폭행하고, 죽였다.

마지막까지 살려달라고 빌며 억울한 죽음을 맞는 이들의 얼굴이 <귀안>을 발동한 대성의 눈에도 선명하게 담겼다.

-왜 이런 힘을 가진 내가 나보다 약한 놈의 지시를 따라야 하지?-

-더 큰물에서 놀 때가 됐어.-

-하찮은 새끼들! 너희들은 내가 아직까지도 호구 X으로 보이지? 내가 언제까지 너희들 밑에 굽실거리고 있을 것 같아?-

화르륵-!

불타는 건물과 그 안에서 피를 흘린 채 죽은 폭력단의 단원들이 보였다.

사가트가 벌인 짓이었다.

힘에 취한 그녀는 조직을 멸살하고, 그 후로도 몇 번씩이나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 다녔다.

그리고 어느 날.

미친 듯이 폭주하는 사가트에게 한 남자가 접근했다.

-쭉 너를 지켜봐왔다.-

-즐거웠겠지. 너보다 약한 이들을 짓밟고, 죽이고. 그를 통해 너 자신이 얼마나 잘난 존재인지 다시금 확인하며, 거기에 쾌감을 느끼는 건.-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나무라는 것도 아니지. 다만, 보고 있기에 안타까웠을 뿐이다.-

-보였거든. 아무리 죽이고, 때리고, 범해도. 밑 빠진 독처럼 채워지지 않는 너의 갈망과 욕구가 말이지.-

말끔하게 생긴 남자였다.

남자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신분을 밝히지도 않았고, 어떻게 사가트를 알고 찾아왔는지 설득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대신.

남자는 대뜸 이런 제안을 해왔다.

-내가 너에게 힘을 주마.-

-그 채워지지 못한 갈망과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아주 강력한 힘을.-

남자는 사가트의 몸에 슬며시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기이하게 생긴 문양이 사가트의 몸에 생겨났다.

“…….”

대성은 잠시 기억을 읽는 걸 멈추고 동굴 벽에 처박힌 채 죽은 강기범을 바라보았다.

‘있군.’

강기범의 가슴에도 똑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확인을 마친 대성은 다시 사가트의 기억을 읽어 내려갔다.

-이런 저를 혼세의 주민으로 받아주신 점, 감사합니다.-

-예, 압니다. 이제 막 이곳의 주민이 된 제게 많은 걸 알고 있을 권한 따위는 없겠지요.-

-알겠습니다. 제물을 모으란 말씀이시죠. ‘그분’을 깨울 제물을…….

사가트는 어느 무채색의 공간에서,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는 사내에게 명령을 받고 있었다.

‘혼세의 주민이라…….’

아마 저들이 사는 곳을 ‘혼세’라고 지칭하는 모양이었다.

바로.

지금 인류의 주적이라 부를 수 있는 게이트 너머의 세계였다.

‘어지간히도 크게 일을 벌이고 있었군.’

문양을 받은 이들은 ‘디멘션 테이커’라고 불리며 공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었다.

그렇게 디멘션 테이커가 된 사가트는 세계 각지의 인간들을 마구잡이로 납치한 뒤 ‘어둠 속 사내’에게 갖다 바쳤다.

“……이렇게 된 거였나.”

최근 대한민국을 포함해 지구촌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문의 대규모 실종 사태의 원인.

다름이 아니라 사가트를 포함해 ‘디멘션 테이커’라고 하는 자들이 벌인 작당이었다.

‘제물을 바침으로써 부활시키려고 하는 놈이 누군지, 그리고 사가트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자의 정체까지는 알 수 없군.’

사가트 또한 이제 막 혼세의 주민이 되고 디멘션 테이커의 자격을 얻었을 뿐인 말단에 불과했다.

아마 진실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자는 ‘어둠 속의 사내’일 터.

그리고 그 ‘어둠 속의 사내’가 사가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병사…… 말씀이신가요?-

-곧 부활하실 ‘그분’과 함께 맞설…….-

제물을 모으라는 명령 다음엔 병사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렇게 사가트에게 몇 개의 에테르 코어와 ‘권한’이 주어졌다.

-이건……?-

사가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어둠 속의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말했다.

특수한 방법으로 가공된 그 코어는 평범한 인간을 혼세의 괴물로 만들 것이며, 딱 한 번 ‘권한’을 통해 원하는 이에게 ‘디멘션 테이커’임을 상징하는 ‘문양’을 부여할 수 있다고.

‘어둠 속의 사내’는 그것들을 가지고 인간들에게 힘을 선사해 그들을 ‘병사’로 키우라고 명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사가트는 첫 병사로 삼기에 가장 적절한 이들을 찾았다.

힘을 가질 수 있다면 기꺼이 인류를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고, 살인을 저지르는 데 거리낌이 없는.

그러면서도 절대 적지 않은 영향력을 보유한 자들을.

바로 <홍마>였다.

“…….”

사가트는 <홍마>의 단장인 이석우와 접촉해 그에게 코어를 건넸다.

이석우는 곧장 정제된 코어를 한 번 더 재가공했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융합’ 앰플.

대성은 문득 저번 라이센스 시험에서 죽였던 정진철을 떠올렸다.

‘정진철이 EMP를 터뜨리고 신체를 재생시킬 수 있었던 것도 이 앰플 때문이었나.’

‘어둠 속 사내가’가 말한 대로, 특수한 코어를 녹여 만든 앰플은 인간을 몬스터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로 만들었다.

그렇게 어렵지 않게 앰플의 힘을 받아들인 정진철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정진철은 대성의 손에 죽었고 <홍마>의 악행은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사가트는 분개했다.

-멍청한 새끼! 이러다 우리의 계획이 탄로 나면 어쩌려고!-

-저놈들이 냄새를 맡아버리고 말았잖아!-

은밀하게 앰플을 퍼뜨리면서 서서히 병사를 양성하는 게 사가트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홍마>의 정체를 알게 된 KHA가 냄새를 맡게 됨으로써 모든 게 틀어지고 말았다.

사가트는 이석우의 실책에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이석우를 죽이고, <홍마>를 몰살했다.

하지만 어쨌든 이석우의 실책은 사가트가 짊어져야 할 몫.

사가트는 ‘어둠 속의 사내’로부터 질책을 받아야만 했다.

-처벌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오랜 세월. 인간을 납치하고, 혹은 그들을 괴물로 만들면서 그녀는 깊은 허무감을 느꼈다.

이 모든 게 누구를 위함인지.

사가트가 ‘어둠 속의 사내’에게 물었다.

-한 가지만 대답해주십시오. 저는 지금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겁니까? 당신이 그토록 칭송하는 ‘그분’이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대답해주십시오! 이제 더는, 누군지도 모를 존재에게 충성하는 건 지긋지긋합니다!-

적어도, 적어도 자신이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누구를 위한 ‘병사’인지.

누구를 위한 ‘제물’인지.

이제는 슬슬 깨달을 때가 됐다고 생각한 사가트가 처절하게 ‘어둠 속의 사내’에게 물었다.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어둠 속의 사내’가 사가트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이 모든 건 혼돈의 거신(巨神)께서 부활하시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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