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72화 (72/180)

# 72

072

혼돈의 거신.

그 이름이 ‘어둠 속의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쿵-!

마치 공간 그 자체가 뒤집히는 것처럼 사가트의 시야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더는 알려고 하지 마라.-

-고작해야 이제 ‘테이커’의 증표를 얻은 말단인 네년이 그분의 존재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란 말이다.-

-설욕의 때가…… 전쟁의 순간이 곧 찾아온다. 그때까지 우리는 승리의 깃발을 거머쥘 초석을 마련하기만 하면 된다.-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한시라도 빨리 그분을 깨울 제물을 모으고, 우리와 운명을 함께 할 병사를 모집해라. 그게 네 할 일이다.-

그저 기분에 따라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을 괴멸하고 잔인하게 동료와 보스를 죽인 사가트다.

그저 쾌락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살생을 벌일 수 있는 인간.

하지만 그런 잔혹한 성미를 가진 사가트조차 그때만큼은 ‘어둠 속의 사내’에게 반기를 들지 못했다.

‘죽을지도 몰라……!’

‘덤비면, 무조건 내가 진다!’

무채색의 공간을 새카맣게 물들이는 사내의 막강한 살기가. 알게 모르게 솟구치던 그녀의 반발심을 흔적도 없이 짓밟고, 지워버렸으니까.

-제물…… 제물을 모아야 해…….-

-실수를 만회해야 해. 이석우 그 병신 때문에 생긴 나의 실책을, 어떻게든…….-

-해내지 못하면 처벌이 내려질 거야. 그놈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조급했던 사가트는 결국 서둘러서 제물을 모으기로 했다.

그렇게.

그녀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게이트가 많이 발생한 도시인 성남시의 게이트를 터뜨릴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된 거였군.’

열여섯 게이트에서 벌어진 프렉쳐를 통해 무수한 몬스터를 방류.

그로 인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제물을 데려가려고 했었다.

물론 그 계획은 지금 대성에 의해 완벽하고도 철저하게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이런 젠……!-

그리고 온몸에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돌진하며 업화대검을 휘두르는 대성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사가트의 기억이 종료되었다.

<귀안>을 해제한 대성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서늘한 입김을 토해냈다.

“재밌네, 재밌어.”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많은 의문이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채워나갔다.

무채색의 공간 속에서 사가트에게 명령을 내리던 어둠 속의 사내.

그리고 혼돈의 거신.

아무리 사가트의 기억을 뒤져봐도 그들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나의 세계를 위협할 존재들이다.’

대성에게 있어서 ‘세계’라는 건, 단순히 이 지구의 땅을 지칭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곁에 머무른 소중한 이들.

혜정과 지수, 그리고 성찬호.

그들의 존재가 대성이 사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세계에 멋대로 발을 들여 난장을 피우려는 자들을 알게 되었다.

‘모조리 박멸해야 해.’

대성은 생각했다.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전부 죽이겠다고.

사가트는 지금 싸늘한 시체가 되었고, 제물과 병사를 모으던 ‘디멘션 테이커’가 한 명 사라졌으니 그것만으로 저들에게 충분한 경고가 되었으리라.

‘내가 먼저 찾아간다.’

내가 이곳에 버티고 서 있으니 함부로 찾아오지 말라는 경고가 아니었다.

지금부터 내가 너희들을 죽이러 간다는 경고였다.

부디 그 메시지가 저들에게 확실히 전달되었기를 바라며.

대성은 다시 한번 손에 쥐고 있었던 수정 구슬을 바라보았다.

“뭔가 했더니…….”

사가트의 기억을 훔쳐본 덕분에 그녀가 지니고 있던 수정 구슬의 정체 또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기폭제였다.

‘브레이커(Breaker).’

바로 차원과 차원을 잇는 문인 게이트를 강제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기폭제.

사가트는 성남시의 각 게이트에 브레이커를 설치해 프렉쳐를 일으키려고 했다.

스위치가 올라간 브레이커는 약 1시간 동안 서서히 이(異)차원의 세계를 감싼 게이트를 허물어버린다.

그렇게 게이트가 완벽히 허물어지면 소위 사람들이 알고 있는 ‘프렉쳐’가 발생하는 것이었고.

‘위험한 물건이었군.’

브레이커는 아예 게이트를 클리어해버리면 필드와 함께 어딘가로 소멸한다.

하지만 대성의 손에 들린 브레이커는 아직 스위치가 올라가지 않은 상태.

굳이 허겁지겁 폐기 처분을 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떻게 하지.’

처음에는 브레이커의 존재를 일단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좋을지 갈등했으나…….

이내 대성은 고개를 저었다.

‘협회도 알고 있는 게 좋겠지.’

불필요한 사명 의식 때문에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강제적으로 프렉쳐를 발생시킬 수 있는 물건이 발견된 이상, 숨기는 것보단 차라리 협회도 이걸 알고 있는 편이 대성에게도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브레이커의 쓰임새를 알게 되면 협회도 나름 경각심을 가지겠지.’

절대 맹신할 순 없어도 어쨌든 협회 또한 몬스터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존재들.

브레이커의 정보가 그들의 기강을 단단히 세울 명분이 될 수 있다면 나쁜 이야기는 아닐 터.

게이트를 나서면 곧장 박정호 협회장에게 브레이커의 존재를 알려야겠다고 대성이 생각하던 그때.

윙- 윙-

“응?”

작은 빛이 사가트의 품에서 반짝였다.

아니, 사가트뿐만이 아니었다.

처참한 모습으로 죽은 강기범의 몸에도 똑같은 빛이 새어 나왔다.

“뭐야, 이게?”

의구심이 들기 무섭게, 대성은 사가트의 품에 손을 뻗어 빛을 낚아챘다.

[혼세의 존재, ‘디멘션 테이커’가 지니고 있던 권능이 절대자의 몸에 스며듭니다.]

[권능: <은신>을 획득하셨습니다.]

[권능: <염사>를 획득하셨습니다.]

손에 잡힌 빛은 거품처럼 흐드러져 대성의 몸에 스며들었고, 그와 동시에 시스템이 그런 글귀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은신>과 <염사>라면……?’

그리고 권능을 흡수한 대성은 몸속에서 또 다른 부류의 힘이 넘실거림을 깨달았다.

지옥의 스킬을 발하게 해주었던 ‘마력’과는 다른 기운.

혼세의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힘.

그리고 그 힘을 일부 양도받은 인간들을 ‘각성’하게 해주는 근원(根源).

“에테르?”

에테르였다.

몬스터를 죽이고 나온 코어를 쥘 때마다 어렴풋이 느끼던 기운과 똑같은 힘이 체내에 흘렀다.

그러니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에테르였다.

“…….”

기대치 않았던 추가 수확!

이걸로 ‘마력’에 이어 ‘에테르’ 또한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어디…….”

새로운 힘을 한번 시험하고자 했던 대성이 가뿐하게 에테르를 끌어 올렸다.

에테르의 운용법 자체는 마력을 사용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어려울 게 없었다.

슥-

대성이 슬며시 강기범을 향해 팔을 뻗은 순간.

[권능, <염사>가 발동됩니다.]

촥-!

맥없이 널브러져 있던 강기범의 유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염사>는 실 형태로 짜낸 에테르로 상대방을 조종하는 권능.

대성은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듯이 자유자재로 강기범의 유해를 조종했다.

“…….”

대성이 손끝에 이어진 실의 감각에 집중했다.

그 순간 강기범의 팔다리에 이어진 무형(無形)의 실이 이번엔 그의 몸에서 반짝이는 빛 덩어리로 연결부를 바꿨다.

그리고 실이 빛을 휘감은 다음.

팍-!

대성이 팔을 잡아당기자 실에 묶인 빛이 그에게 날아왔다.

능숙하게 빛살을 잡아챈 대성이 권능의 정보를 확인했다.

[권능, <도발>을 획득하셨습니다.]

<권능 정보>

도발

[일시적으로 적들의 이목을 권능의 사용자에게 집중시킵니다.]

[권능의 발동되는 동안 사용자의 모든 능력치가 20% 향상됩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장단점이 뚜렷한 권능이었다.

물론 아무리 많은 적의 이목을 받아도 능히 깨부술 자신이 있는 대성에겐 장점이 되었으면 되었지, 단점이 될 이유는 없었지만.

얻을 수 있는 수확은 모두 손에 넣은 대성이 행동을 재개했다.

남은 건 이제 보스 몬스터를 무찌르고 게이트를 닫는 일만 남았다.

그 전에.

‘자칫하면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강기범을 죽였다고 오해받겠군.’

강기범을 죽인 건 대성이 맞지만,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였다.

그리고 <황천>의 대원들이 사가트에 의해 죽었다는 증거를 확보해야 뒤탈이 남지 않을 터.

그리고 그 증거를 손에 얻는 일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합동훈련을 위해 게이트를 들어왔다면 그 훈련 과정을 기록해뒀겠지.’

딸깍-

이렇게, 죽은 대원들의 오러 아머에 부착된 ‘기록용 소형 카메라’를 떼어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럼…….”

이제는 본격적으로 보스 몬스터를 죽이고 게이트를 닫을 시간.

팟-!

대성의 신형이 빠르게 동굴 속을 나아갔다.

고작해야 4등급 통상형 게이트.

마지막 남은 성남시의 게이트가 사라지는 데에는 3분이면 충분했다.

***

클랜 소속의 사냥꾼은 별다른 공략 일정이 잡히지 않았으면 그날은 그냥 휴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협회 소속의 사냥꾼은 공략 일정이 없어도 의무적으로 협회에 출근 도장을 찍어야 한다. 공무원처럼 말이다.

그런데 오늘.

“고광현 사냥꾼한테 연락이 없다고?”

협회 내에서도 성실하기로 유명한 사냥꾼이 무단으로 결근했다는 소식이 박정호의 귀에 들어왔다.

회장실로 연결된 수화기 너머에서 불안에 잠긴 부하 직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까부터 계속 전화를 걸어보는 중인데 도통 받지를 않으십니다. 협회장님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직통 번호로는 연락해봤나?”

<사냥꾼 전용 통신기, 개인 휴대폰, 전부 연락해봤습니다.>

“미심쩍군. 일언반구도 없이 잠적을 탈 양반은 아닌데……. 흠, 일단 알겠네. 멈추지 말고 계속 연락해보게나.”

<예, 알겠습니다.>

손에서 수화기를 내려놓은 박정호는 지끈거리는 골치에 주름살을 그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을 본 이하원 비서실장이 기운 내라는 의미에서 커피를 한 잔 더 내왔다.

“고맙네.”

“근심이 많으시겠습니다.”

“…….”

박정호는 새하얀 머그잔 밖으로 은은히 올라오는 커피 연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원인과 배후를 알 수 없는 사건을 맞닥뜨린다는 건, 등불도 없이 어둠을 헤매는 기분이로군.”

“…….”

“최근에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졌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고.”

“이해합니다.”

박정호가 힘없이 내뱉은 한탄대로, 확실히 최근엔 짧은 새에 너무나 많은 사건이 발생했다.

갑작스러운 <홍마>의 괴멸. 그리고 그들이 극비리에 양산했던 ‘융합 앰플’.

무엇보다 최근에 한창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대규모 실종 사건까지.

“미치겠구먼.”

머리가 터질 지경이던 박정호가 카페인의 도움이라도 빌리자는 생각에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때.

띠링-

부하 직원으로부터 온 메시지 알람이 컴퓨터에 표시되었다.

“오!”

쏟아지는 근심에 죽상이 되었던 박정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단기에 클리어하는 게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생존형을 제외하면, 대성의 활약 덕분에 성남시에 현존하는 모든 게이트를 닫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

메마른 가뭄 같던 박정호의 마음에 한 줄기 비가 되어주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아무리 대부분이 4에서 5등급이었다곤 하나, 한 시간도 안 돼서 열 개가 훨씬 넘는 게이트를 전부 닫다니…….”

이하원 비서실장도 무심코 숨을 삼키며 탄복했다.

어쨌든 게이트가 몇 개라도 더 사라졌다는 소식은 기뻐해야 할 터.

무엇보다.

“……그래. 대한민국에 이런 사냥꾼이 하나라도 더 탄생했다는 게 어디인가.”

이번 일을 통해 한대성이란 사냥꾼과 그가 이끄는 소환수의 역량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 그것만 해도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대성 씨도 참 독특하신 분이네요. 다른 S급 분들은 좀처럼 등급이 낮은 게이트엔 눈독을 잘 안 들이시는데…….”

“그러게 말일세.”

박정호가 힘써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삐리리.

그의 정장 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업무용 전화가 아닌 개인용 휴대폰에서 난 소리.

그리고 협회장인 그에게 개인용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은 가족을 제외하면…….

“한대성 씨한테 온 전화군.”

대성과 같은 S급 사냥꾼밖에 없었다.

마침 잘됐다고 생각한 박정호는 서슴없이 대성의 연락을 받았다.

“예, 사냥꾼님. 무슨 일로-”

그리고 밝은 얼굴로 전화를 받았던 박정호의 표정에 음영이 드리워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성이 전한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박정호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

그로부터 약 세 시간이 지났다.

5등급 게이트가 발생한 응암동 폐공장 근처.

그곳에 대다수가 A급이나 B급으로 이뤄진 KHA 소속 사냥팀들이 긴장한 얼굴로 모여 있었다.

그밖에도 협회의 직원과 군인들이 폐공장 일대에 높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민간인 통제 확실히 하고 있지?”

“예.”

“명심해. 10㎞ 반경 내에 그 누구도 들어오게 해선 안 된다.”

마치 비밀 실험이라도 자행하려는 듯한 철두철미한 움직임.

아니, 어쩌면 ‘비밀 실험’이라는 표현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좀처럼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박정호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직접 행차할 수밖에 없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으니까.

-강제적으로 프렉쳐를 일으킬 수 있는 물건을 찾았습니다.-

방금 대성이 직접 알려준 ‘브레이커’라는 것의 존재를.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강제적으로 프렉쳐를 일으킬 수 있는 물건이라니.

자칫하면 세계에 큰 혼돈을 초래할 수 있는, 그야말로 재앙과도 같은 물건이 아닌가.

“게다가 이건…….”

대성에게서 들은 충격적인 소식은 브레이커뿐만이 아니었다.

협회 직원 중 한 명이 데이터 칩이 꽂힌 노트북에 동영상 파일 하나를 재생시키고 있었다.

거기엔.

<끄아아아악-!!>

<교관님! 교관님 살려주세요!>

무참하게 죽어가는 <황천> 대원들의 최후가 담겨 있었다.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털썩 주저앉는 강기범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종료되었다,

“…….”

꿀꺽.

박정호는 충격과 공포의 감정이 여실히 드러난 얼굴로 눈앞의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

한편.

박정호가 그토록 경악스레 쳐다보았던 게이트 안쪽엔 대성이 있었다.

다름 아닌, 그 스스로가 자처해서 들어온 것이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니, 지금 막 성남시 게이트를 공략하고 오셔서 피곤하실 텐데……. 한대성 씨는 푹 쉬시고 저희가 따로 탐사대를 보내는 편이.-

-제가 갈 거니까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게 대성이 발견한 ‘브레이커’라는 것의 정체를 모두가 눈에 담기 위해 마련된 자리.

협회는 프렉쳐가 일어나도 최대한 피해가 적을 5등급 게이트를 실험 장소로 정했다.

그리고 대성은 브레이커가 작동되는 순간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협회에 정보를 공유해줄 수 있는 건 브레이커까지. 그 외에는 섣불리 내 손에 들어온 패를 전부 드러낼 수야 없지.’

이를테면 사가트와 같은 ‘디멘션 테이커’의 존재나 혹은 혼세에 관한 이야기들.

그런 것들까지 가볍게 입을 놀렸다가는 일이 복잡해질 게 뻔했다.

우선은 어떻게 그런 정보를 접하게 됐냐는 질문 공세부터 쏟아질 터.

굳이 성가신 상황을 조성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먼저 그놈들의 윤곽을 파악하기 전까진 아무도 내 일에 개입하게 만들 수 없지.’

협회도 예외는 아니다.

적을 섬멸하는 일에는 혼자서 행동하는 편이 더 나으니까.

그래서 <황천> 대원의 카메라에 녹화된 영상도, 사가트가 모습을 드러내는 뒷부분은 일부러 잘라냈다.

‘참 다재다능한 녀석이야.’

물론 직접 영상 편집을 한 건 성찬호였다.

그때였다.

-쩌적.

필드 어딘가에 씨앗처럼 심어둔 브레이커가 조금씩 균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브레이커의 수정 표면에 생긴 것과 똑같이 생긴 균열의 파장이, 필드의 허공을 찢었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잔처럼 산산조각 깨져가는 이 세계 속에서.

“대청소의 시간이 왔군.”

화르륵-!

대성이 꺼내 든 업화대검이 호탕하게 불을 뿜었다.

***

“어어! 저, 저거!”

그리고 게이트 바깥에 대기하던 이들은 비명을 질렀다.

분명 사전 조사에 따르면 눈앞의 게이트는 프렉쳐 발생까지 아직 5시간의 유예가 있었다.

그런데.

“정말 한 시간이 지나니까 게이트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사나운 자기장을 쏟아내는 게이트를 바라보며, 박정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로써 브레이커가 정말로 강제적으로 프렉쳐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전투 준비-!”

“5등급이라고 방심하면 안 돼! 보스 몬스터까지 녀석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프렉쳐의 조짐을 눈에 담은 사냥팀들이 일사불란하게 포메이션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협회 직원과 군인이 헐레벌떡 뛰어와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고 박정호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려 했다.

바로 그때.

쾅-!

게이트가 폭발했다.

프렉쳐가 발생하는 순간을 처음으로 본 몇몇 이는 압도되어 몸을 움츠렸다.

케에엑-!

키아악-!

유리 조각 같은 파편을 흩뿌리며 폭발하는 게이트 사이로 등장한 몬스터는 오크, 그리고 보스 몬스터이자 오크들의 왕인 하이로드 오크였다.

“미친! 통상형이라며!”

“숫자가 거의 군단형이잖아!”

벌집에서 쏟아지는 벌 떼처럼 나타난 무수한 오크 군단에 사냥팀들이 일순 당황하기 시작했다.

5등급이긴 해도 결국 프렉쳐는 프렉쳐.

분전(奮戰)을 예감한 사냥팀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던 찰나.

“응?”

“어라?”

이상한 점을 눈치챈 사냥팀들이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키이익-

케에엑…….

현신하자마자 호전적으로 돌진하던 오크들이 돌격을 멈췄기 때문이다.

그러기를 잠시.

-휙!

하이로드 오크를 비롯한 모든 오크 군단의 고개가 일제히 뒤쪽을 향했다.

사냥팀과 협회 관계자들의 시선 또한 오크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향했다.

“편리하군, 이거.”

프렉쳐가 발생한 중심지에 흡족한 미소를 띤 대성이 서 있었다.

[권능, <도발>이 발동됩니다.]

[반경 500m 내에 사용자가 인식한 적들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오늘 막 손에 얻은 권능을 발동한 채 말이다.

물론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던 다른 사람들은 왜 오크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키에엑-!

카아악-!

<도발>에 걸려든 오크들이 반강제적으로 이성이 거세된 채 대성에게 쇄도해오기 시작했다.

시야를 꽉 채울 만큼 수많은 몬스터 군단이, 오직 단 한 명에게만 달려드는 광경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 광경을 본 박정호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다 말고 황급히 외쳤다.

“다들! 한대성 씨를 엄호-”

절규에 가까운 박정호의 외침이 터져 나오고 오크들의 군세가 대성의 코앞까지 들이닥친 순간.

[‘업화’ 모드의 첫 번째 특수 스킬이 발동됩니다.]

[특수 스킬 : <격노>]

투콰- 앙!

게이트가 터질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폭발이 일대를 휩쓸었다.

그때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호흡을 멈춘 채 같은 광경을 보았다.

거대한 불의 파도가 천지를 울리는 폭음을 자아내며 몸을 일으키는 광경을.

“이건, 한대성 사냥꾼의……?”

“직접 보니 무시무시하군…….”

그 누구도 감히 불의 파도에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살벌하게 모습을 드러낸 화마(火魔) 속에서 불타오르는 오크 군단의 거뭇한 형체가 일렁이고 있었다.

잠시 뒤.

저벅-

그 불의 파도를 일으킨 당사자, 대성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무심하게 걸어 나왔다.

사냥팀의 지휘관이 결례를 무릅쓰고 박정호에게 물었다.

“저희가 누구를 엄호한다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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