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075
‘칼을 꺼내는 게 눈에 보이지도 않았는데……. 아니, 그보다 대체 어디서 저 커다란 걸 꺼낸 거야?’
눈을 잠깐 감았다 뜨는, 5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성인 남성의 덩치보다 곱절은 커다란 대검이 뚝딱 튀어나왔다.
신초영이 영혼이 빼앗긴 사람처럼 칼에 한눈이 팔린 사이.
첨벙-! 푸드덕-!
전후좌우, 사방을 둘러싼 호수에서 물보라가 터져 나오며 다른 인면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정도면 ‘무리’가 아니라 ‘군단’이라 불러야 할 수준이었다.
“아, 이 지긋지긋한 생선 대가리 새끼들……!”
신초영이 욕설을 씹어 뱉었다.
인면어.
지성(知性)이 뛰어나고, 육해(陸海)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어 2급 위험도로 책정된 녀석들이다.
그런 놈들을 대체 어떻게 혼자서 때려 부수겠다는 건지, 신초영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철벅-
신초영의 인근에서 출몰한 인면어 군단이 서서히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씨X……! 내가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죽을 것 같아?”
이제는 각성자도 뭣도 아닌 일반인이지만. 적어도 이딴 생선들 따위에 삶을 마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신초영은 근처에 떨어진 돌멩이를 주워 들며 자세를 잡았다.
그녀가 전의(戰意)를 불태운 순간.
파바박-!
게에엑-!
인면어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그녀를 향해 쇄도했다.
“으아아-!!”
똑같이 괴성을 내지르는 것으로 응수한 신초영이 돌멩이를 치켜들던 그때.
[권능, <도발>이 발동됩니다.]
[반경 500m 내에 사용자가 인식한 적들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폭주하는 덤프트럭처럼 달려들던 인면어 무리가 그대로 신초영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
결사 항전의 다짐으로 활활 타오르던 마음이 팍 식어버리고, 눈이 볼링공처럼 휘둥그레졌다.
신초영은 돌을 치켜든 자세 그대로 굳어 뒤를 돌아보았다.
두두두두-!
<도발>의 권능에 걸려든 인면어들이 등불을 쫓는 나방 떼처럼 대성이 있는 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물론 사태의 내막을 알 리가 없었던 신초영이 무심코 대성의 오른손에 잡힌 업화대검을 쳐다본 순간.
파악-!
커다랗게 시야에 드리웠던 칼이 빠르게 멀어져 갔다.
대성이 첫 행동을 개시하는 순간이었다.
울긋불긋한 힘줄이 검의 손잡이와 인접한 손목부터 시작해서 어깻죽지까지 단숨에 팽창했다.
그리고.
후- 웅!
일격(一格).
업화대검이 굽이치는 화염을 꼬리처럼 늘어뜨리며 원을 그렸다.
콰가가각-!
360도 전방위로 대기를 가로지른 업화대검이 해당 반경에 있었던 인면어들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통째로.
“…….”
그리고 그 진풍경을 스무 발짝 정도 떨어져서 지켜보던 신초영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말문을 잃고 벌어진 그녀의 입이 다물어지기도 채 전.
콱-!
폭발적인 기세로 땅을 박찬 대성이 지면에 커다란 크레이터를 쾅쾅 터뜨리며 잔여 무리에게 쇄도했다.
훙-!
너울거리는 화염과 함께 휘둘러진 검이 인면어를 십수 마리씩 한꺼번에 일망타진했다.
대성이 땅을 내달리고 칼이 대기를 가르는 길목마다 시퍼런 피 분수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고 인면어들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주검이 되었다.
신초영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미, 미친…….”
양들의 목장에 뛰어든 한 마리의 늑대처럼 비쳤다.
그렇게 대성이 거침없는 파상공세를 이어가던 그때.
쉬- 익!
굵기가 통나무에 버금가는 작살 한 발이 어디선가 날아왔다.
팅-!
대성은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는 듯이 검날을 비스듬히 곧추세워 작살을 튕겨냈다.
그걸 시작으로 서너 차례 다발로 짓쳐들어오는 작살 세례.
팅-! 팅-! 팅-! 팅-!
대검을 역수로 쥔 대성이 유려하게 궤적을 틀어 심드렁하게 작살을 계속해서 막아냈다.
“…….”
가느다랗게 수축한 그의 동공이 바닥을 나뒹구는 작살들을 훑고 난 뒤, 전방으로 이동했다.
광활한 공동(空洞)의 1시와 11시 방향에 각각 세 마리, 네 마리씩.
철컥-
커다란 크로스보우에 다음 작살을 장전 중인 인면어들이 보였다.
“귀여운 짓을 하는군.”
<도발>의 권능이 닿는 500m 반경에서 훨씬 벗어난 녀석들.
그런 까마득한 거리에서도 정확히 목표를 조준하는 걸 보니, 실력이 예사로운 녀석들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실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기로 했다.
“섬멸룡 소환.”
[<한대성의 섬멸룡>이 구현의 인에서 소환됩니다.]
인(印)이 새겨진 대성의 손바닥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별안간 엉뚱한 방향으로 내뿜어지는 불을 지켜보던 신초영이 무심코 고개를 갸웃했다.
“어, 어어…….”
그러다 아직 다물어지지 않았던 입에서 다시금 경악성이 새어 나왔다.
화염방사기처럼 대성의 손에서 뿜어지던 불꽃이 점점 몸체를 부풀리며 어떤 ‘형체’을 갖추어갔기 때문이다.
“용……?”
그리고 그 형체가 마치 신화 속에서 보던 용의 것과 흡사하다는 걸 인지한 순간.
크오오오오-!!
검은 용 한 마리가 불길이 걷히고 완전히 거체를 드러내자마자 사납게 울부짖었다.
쩌렁거리는 포효에 바위 굴이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진동했다.
“……!”
-털썩.
다리에 맥이 탁 풀린 신초영이 주저앉았다.
‘몬스터’로 추정되는 괴수만 보면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던 그녀조차 기를 눌리게 만드는 맹위(猛威)였다.
바로 그때.
1초의 오차 간격도 없는 정확한 타이밍에 대성과 섬멸룡의 신형이 동시에 도약했다.
펄럭-!
1시 방향으로 솟구치는 섬멸룡의 반대편, 11시 방면으로 날아가는 대성의 등에도 어느덧 시꺼먼 용 날개가 펄럭이고 있었다.
“저, 저건…….”
일전의 라이센스 시험 때, 신초영을 포함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이의 사고를 아득하게 만들었던 ‘그 날개’였다.
쉬- 익!
날갯짓이 위아래로 한 번 왕복하기도 전에, 작살을 열심히 날려대던 인면어의 지척까지 당도한 섬멸룡.
녀석들이 소스라치며 시위를 손에서 놓았다.
쉭-!
되는대로 튕긴 줄이었지만 작살은 일직선으로 곧게 발사되었다.
팅-!
물론 티타늄 합금보다 몇 배는 단단한 섬멸룡의 거죽을 꿰뚫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일사불란하게 작살을 날려대던 인면어들이 안색을 하얗게 물들이며 주춤거렸다.
그리고 검은 유리알 같은 녀석들의 눈에 섬멸룡의 거체가 들이찬 순간.
콰가가각-!
놈들의 몸뚱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시 방향 해결.
같은 시간에.
서걱-!
대성이 담당하는 11시 쪽 녀석들도 가차 없이 몸뚱이가 상하로 분리되어 절명했다.
“세…… 세상에.”
그 환상의 콤비 플레이를 멀찌감치 아래에서 관망하던 신초영이 말을 더듬거렸다.
딱히 작전 의논을 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는데, 마치 서로의 생각이 이어져 있다고 과시하는 것처럼 정확하고 정교했다.
심지어 저 남자는, 이 군더더기 없는 협공 퍼포먼스를 무려 종 자체가 다른 ‘용’과 선보이지 않았는가.
그보다 애초에, 저 용은 뭘까?
‘몬스터…… 는 아닌가?’
인간이 손에서 몬스터를 소환한다는 얘기도, 그렇게 소환된 몬스터가 인간과 콤비 플레이를 펼친다는 얘기도, 신초영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때.
탁-
대강 눈에 보이는 것들은 전부 정리했다고 판단한 대성이 날개를 접고 섬멸룡의 등에 올라타 지면에 착지했다.
“저, 그…….”
신초영이 사고와 이성이 마비된 상태로 섬멸룡과 대성을 올려다보았다.
일생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기백(氣魄).
신초영은 뒤늦게나마 왜 그때 황준영이 저 남자를 조심하라고 정색을 하며 경고했는지 절감했다.
“그…….”
대성의 기백에 압도된 것과는 별개로 구해줘서 고맙다는 감사의 말이 그녀 입에서 나오려던 찰나.
“신성한 제단에서 감히 이따위 난동을 피워!”
피를 토하는 듯한 날카로운 노성(怒聲)이 신초영의 말을 가로막았다.
방금 연기가 되어 사라진 제롬이 다시 연기로 모여들어 이 자리에 재림한 것이다.
섬멸룡의 목덜미에 발을 디디며 일어선 대성이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실소했다.
“나올 거면 진작 나오지. 부하들 다 죽고 난 뒤에 기어 나오는 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군.”
“나는 네놈까지 제단에 끌어들인 적은 없다! 대체 어떻게……!”
“자비를 베풀어주마.”
비교적 나긋나긋한 대성의 목소리가 제롬의 고함을 지워냈다.
“자비…… 라고?”
“적어도 네 입으로 직접 내 질문에 답할 기회를 주지. 자비로 여겨라.”
사가트에게도 한 번 베풀었던 전적이 있는 자비.
그리고 그 자비를 걷어찬 사가트가 종국엔 시체마저 능멸당했다는 사실을, 제롬은 몰랐다.
몰랐기에 이런 말이 이어졌다.
“네놈이야말로 목숨만 남기고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발긴 뒤 제발 살려달라고 구걸을 하게 해주마!”
“좋은 대답이야.”
흡족함을 느낀 대성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솔직히, 나는 네가 그렇게 말해주기를 내심 바랐거든.”
진위를 알 수 없는 놈의 대답을 가만히 들어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확 죽여버린 뒤 <귀안>으로 머리통을 들여다보는 쪽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성미에 걸맞은 방식이었으니까.
화르륵-!
업화대검의 칼날이 마치 대성이 지금 느끼는 투지(鬪志)에 호응하는 것처럼 불길을 거칠게 피워냈다.
그 순간.
“건방진 놈-!”
화- 악!
넘실대는 연기를 뿜어내며 허공에 부유한 제롬의 외눈에서 시린 빛깔이 터져 나왔다.
태양을 직접 쳐다본 듯한 막대한 광량에 대성이 한껏 눈살을 찌푸리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빛이 명멸하고.
“응?”
천천히 뜨이기 시작한 그의 눈이 본 것은.
“이건 또 무슨 경우야.”
분명 지옥이었다.
그것도, 등굣길 도중 난데없이 떨어졌던 그날의 풍경이었다.
***
사고를 당해 하늘로 돌아가신 아버님께는 죄송한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부고(訃告)를 전해 들었을 때 느꼈던 절망보다, 정신 차리고 보니 지옥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느낀 절망이 더 컸다.
그때는 꿈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꿈이라고 의심하기엔 너무나 생생했으니.
“…….”
발바닥이 부르트고 종아리에 알이 배길 때까지 걸어도 지옥은 결국 지옥이었다.
목청이 찢어지고 갈라질 때까지 외쳐보아도 결국 그 목소리가 다른 ‘사람’의 귀에 닿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지칠 때까지 지친 그가 협소한 동굴 안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웬 뿔 달린 코끼리 같은 괴물들이 달려들었다.
단언한다.
이때가 바로, 그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라고.
‘……감이 좀 잡히는군.’
그때와 같은 순간, 그때와 같은 모습을 한 대성이 무릎을 세우고 동굴 벽에 주저앉았다.
80년의 수라장을 헤친 끝에 탄생한 인간 병기와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은 그저, 약간 치수가 헐렁한 교복을 걸친 중학생 청소년이 있을 뿐이다.
‘이건 다 허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동굴 속 심연을 노려보는 그 두 눈만큼은//.// 가히 80년 뒤의 그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냄새가 없어.’
유황(硫黃)과 비슷한 지옥 특유의 냄새가 없었다.
지옥의 대기 성분과 미생물 한 톨까지 빠짐없이 구현했던 판테온의 퀘스트와 비교하면 어딘가 좀 어설프다고 해야 할까.
이건 틀림없는 환상이었다.
‘가장 아픈 기억을 들쑤시는…… 뭐 그런 종류의 권능이겠지.’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보여주기만 할 뿐만 아니라 당시에 그가 느꼈던 절망, 고통, 불안까지 가감 없이 전달했다.
그때의 감정까지 구현한다는 점만큼은 판테온보다 대단했다.
“…….”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어깨가 들썩이고 핏기가 쭉 사라졌다.
감정 상태에 따른 육체의 변화.
이건 어떻게 도무지 거스를 방도가 없었다. 숨을 참는다고 해서 심장도 알아서 멈추지는 않듯이.
하지만.
버틸 만했다.
“그 외눈박인 새끼. 아주 구질구질한 개수작을 부리는군.”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을 두드리는 공포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사그라진다.
앞날을 몰랐던 당시에 느꼈던 두려움과 이것이 환상임을 인지하는 상태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처음부터 레벨이 다르다.
그렇기에.
크르륵-
“오랜만이네.”
동굴 속 칠흑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코끼리 형태 마수, ‘젠마’의 등장 앞에서도 태연할 수 있었다.
슥-
대성은 그때와 똑같이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저놈들이 그가 기억하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악몽 중 하나라면.
그 악몽을 깨부수면 그만이다.
악몽이란 걸 알았으면 얼른 헤어 나올 노력부터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디 환상 속에서도 죽어봐라, 이 징글징글한 놈들아.”
냉혹히 선고한 대성이 땅을 박차 놈들과 맞서려던 순간.
콰직-!
느닷없이 거대한 용의 대가리가 동굴 안쪽으로 짓쳐들어오며 젠마를 물어뜯어 죽였다.
“섬멸룡?”
갑자기 섬멸룡이 왜 나오지?
그 의문은, 젠마의 소멸과 함께 무너지는 환상 속에서 생겨난 시스템 메시지 덕분에 해소되었다.
[해당 마수는 정신계 권능에 완전한 면역을 지녔습니다.]
[절대자의 의식과 동화(同化) 중인 섬멸룡이 환상 속에 개입합니다.]
“그런 재주도 있었나.”
아니, 그래.
생각해보면 이미 ‘피어’라는 최상위 정신계 스킬을 다루는 섬멸룡이니 이런 쪽에 면역을 지니는 건 당연할 터.
와장창-!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지옥의 풍경이 사라졌다.
“아직 끝난 게 아닌가?”
하지만 환상에서 벗어난 뒤에도 어째선지 현실의 광경과 잔뜩 동떨어진 검회색 어둠만 펼쳐져 있을 뿐이다.
한 번 더 메시지가 나타났다.
[권능, <침식의 방>은 같은 영역에 갇힌 대상 전원이 환상에서 벗어나야만 탈출할 수 있습니다.]
[현재 <침식의 방>에는 총 한 명의 대상이 환상 속에서 체류 중입니다.]
[환상을 벗어난 자는 다른 이의 환상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명령어, ‘개입’을 입에 담으면 무작위로 다른 이의 환상 속에 접속하실 수 있습니다.]
볼 것도 없이 신초영이었다.
번거로운 것.
어차피 ‘디멘션 테이커’를 찾는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그냥 무시하고 싶었으나…….
“이런 성가신…….”
신초영을 환상 속에서 끄집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니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개입.”
대성이 명령어를 입에 담은 순간.
슈와악-
그의 의식이 육체에서 빠져나와 이곳 어딘가에 있을 신초영의 환상에 파고들었다.
***
“엄마……! 아빠……!”
“돌아보지 마, 초영아! 아빠 손 놓치면 안 된다! 절대로!”
“여보……. 나, 숨이 너무…… 조금만 천천히……!”
“안 돼! 뛰어! 계속 뛰라고!”
행복했던 유원지에서의 가족 나들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부모의 손을 잡고 헐레벌떡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신초영의 뇌리에 문득 그런 상념이 떠올랐다.
“아…….”
그때와 모든 것이 똑같았다.
자신의 손을 잡아끌고 사색이 되어 달리는 엄마와 아빠.
불타고 무너지는 놀이공원.
그리고…….
이이이-
귀곡성(鬼哭聲)을 흘리며 사람들을 먹어치우는 붉은 거인까지.
가르간(Gargan).
놈은 그 커다란 양손에 수십 명이 넘는 사람을 한꺼번에 움켜쥔 채 무식하게 입 안에 밀어 넣고 있었다.
우드득-!
콰드득-!
“으아악-!!”
뼈와 살이 짓이겨지는 소리와 극통에 찬 절규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신초영은 당장에라도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아빠의 손을 놓칠 게 뻔했기에 그저 참고 견뎌야 했다.
“으, 흑……. 흐윽-?”
6년 전의 모습을 한 신초영이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는 이것이 현실이 아닌 환상이라는 걸 안다. 알지만…….
“싫어, 싫어……!”
그때 느꼈던 것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감정이 차올라, 환상이라는 걸 알아도 버티기가 너무 힘들었다.
각성한 뒤로는 항상 생각했었다.
만약 6년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엄마 아빠를 죽인 그놈을 꼭 없애버릴 거라고.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토록 이를 갈며 떠올렸던, 6년 전 그날이 바라던 대로 찾아왔는데.
거인을 죽이겠다던 복수심과 증오는 어디로 가고, 지금은 그냥 나약한 두려움만이 마음을 채워간다.
무력한 자신을 향한 자괴(自愧)가 마구잡이로 소용돌이쳤다.
비록 환상일지라도, 6년 만에 부모와 재회했다는 애틋함마저 지워버리며.
“아……!”
오만 가지 감정에 휘둘리던 신초영은 무심코 발이 꼬인 나머지 꼴사납게 넘어지고야 말았다.
무수한 인파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혼비백산하는 난장판 속에서, 그녀의 부친은 순간 자신의 딸이 고꾸라졌다는 사실조차 바로 깨닫지 못했다.
“아, 아…….”
뒤집힌 시야 저 너머로 황급히 이쪽을 보며 되돌아오는 부모의 모습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그림자가 넘어진 신초영의 몸을 그대로 훑고 지나쳤다.
한 걸음당 5m가 훌쩍 넘는 가르간의 보폭이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짓밟는 일 없이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신초영을 지나친 거대한 발이 땅을 딛는 지점에.
불행히도, 그녀의 부모가 있었다.
이 빌어먹을 환상은 그때 그 순간까지 충실히 구현시켰다.
“이, 씨, X……!”
신초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부모가 괴물의 발에 짓밟혀 죽는 처참한 장면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도저히 직시할 자신이 없었던 그녀가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크오오오오-!!
“……?”
분명 6년 전에는 없었던 포효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선명히 들려왔다.
감았던 눈을 뜬 신초영의 시선이 앞을 향했다.
그리고 그곳엔.
“어……?”
언제부터인가 환상의 세계를 뚫고 날아온 대성이 검은 용과 함께 가르간의 목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있었다.
***
‘지금쯤이면 악몽에 시달려 영혼 밑바닥까지 썩어 문드러졌겠지.’
제롬은 무광(無光)의 검은 구체를 내려다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침식의 방>.
외눈에서 쏟아지는 빛과 마주한 대상을 고유 결계 속에 가두는 정신계 권능.
‘절대 못 벗어난다. 절대로.’
지금껏 <침식의 방>에 갇혀 살아 돌아온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설령 살아 돌아온다 해도, 영락없는 폐인으로 전락할 터.
‘그때는 내 손으로 직접 죽인 뒤, 거름으로 삼든 제물로 삼든 마음대로 하면 된다.’
저 검은 구체는 대상의 정신력이 한계에 달해 마모되면 자동으로 사라진다.
제롬이 그 순간만을 느긋이 기다리던 그때.
“응?”
불현듯 찾아온 심상찮은 기색이 제롬의 오감을 자극했다.
‘착각인가?’
착각이리라 생각했지만.
구구구구-
퍼버벙-!
“……!”
돌연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펑, 하고 터지는 검은 구체.
그리고 비산(飛散)하는 파편 사이로 섬멸룡과 함께 날아든 거대한 불의 대검이.
푸우- 욱!!
“거, 억……?!”
“덕분에 고생 좀 했다. 씹X야.”
제롬의 커다란 외눈에 힘차게 쑤셔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