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76화 (76/180)

# 76

076

커다란 외눈과 함께 뒤통수 너머까지 칼에 꿰뚫린 제롬이 침묵했다.

순식간에 즉사한 제롬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조용히 땅에 떨어졌다.

“고생시킨 것에 비하면 싸게 죽은 편이군.”

대성은 처참한 행색으로 죽은 녀석을 곁눈질하며 차갑게 말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악몽을 떠올리게 해줬으니, 마음 같아선 아주 시체를 갈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종료됐고, 불필요한 행동에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쑤- 욱!

대성은 죽은 제롬의 동체에 비석처럼 꽂힌 업화대검을 뽑아냈다.

그와 동시에 대성의 눈에 이글거리는 불꽃이 타올랐다.

[복속된 마수, ‘사령단장 돌프’의 고유 권능이 일시적으로 절대자에게 전승되었습니다.]

[‘사령단장 돌프’의 고유 권능: <귀안>이 발동됩니다.]

이제부터는 본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정보 캐내기’에 집중할 시간.

사가트가 가졌던 기억보다는 영양가 있는 정보가 있기를 바라며, 대성은 제롬의 머리를 들여다보았다.

한편.

“허억……! 허억……!”

몸을 숙이고 정보를 캐내는 대성의 뒤에선 신초영이 달뜬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상황이건만, 그녀는 얼굴에는 땀이 비처럼 흐르고 안색도 새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엄마……. 아빠…….”

아직 <침식의 방>에서 보았던 광경의 여파가 다 가시지 않았으니까.

환상이었다고는 해도, 그리워 마지않았던 죽은 부모와 재회했다는 건 대단히 강렬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껏 재회한 시점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의 기억이라는 것 또한.

짜- 악!

‘정신 차려, 신초영.’

눈물 한 방울이 비어져 나오려던 순간, 신초영은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

‘환상은 환상일 뿐이야. 그리고…….’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 고통스러웠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최악 중 최악인 순간만큼은 피할 수 있지 않았던가.

가르간의 거대한 발이 부모를 덮치기 직전.

저 남자가 아니었더라면…….

“…….”

가급적이면 어떻게든 답례를 하고 싶지만, 그럴 만한 기회가 올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아까는 다 하지 못했던 감사 인사는 마저 해야겠지.

신초영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정신을 다잡은 뒤 대성에게 접근하며 고개를 숙였다.

“저기, 감사합니다.”

“…….”

“덕분에 살았어요. 또…… 현실이 아니었기는 해도, 아까 저희 부모님을 구해주신 것도 당신이죠?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

“저기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은 그를 보며 신초영이 의아하게 고개를 뺐다.

자기 말을 무시한다고 의심하기엔 제삼자도 일순 입을 다물 정도로 무시무시한 집중력이 느껴졌다.

‘뭐, 뭔지는 몰라도 방해 안 하는 게 좋아 보이네.’

신초영이 적당히 눈치껏 뒤로 물러서는 가운데.

고오오-

대성의 눈에 열린 <귀안>은 착실히 제롬이 지닌 기억과 정보를 빼내고 있었다.

‘이놈의 과거 이력 따위는 넘어간다. 얼른 본론만.’

제롬 또한 사가트와 마찬가지로 글러먹은 악인으로 살다가 ‘디멘션 테이커’가 되었다.

놈이 벌인 악행(惡行)은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던 대성은 동영상 플레이어의 재생 바를 움직이듯 기억 속 장면을 휙휙 넘겼다.

-당신의 명령을 받고 ‘그릇’을 무차별적으로 납치하는 저입니다만…… 참 아이러니하군요.

-당신을 만날 때마다 저도 납치되는 것처럼 갑작스레 이름도 모를 공간 속으로 불려오니……. 제가 데려오는 ‘그릇’들의 심정도 어쩐지 이해가 가네요.

사가트가 그랬던 것처럼, 제롬 또한 ‘어둠 속 사내’의 명령을 받는 자였다.

‘그릇’이란, ‘제물’이나 ‘병사’가 될 인간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사가트가 단순히 그릇을 제단으로 데리고 오는 역할을 맡았다면, 제롬은 아예 제단의 총괄이라는 임무까지 겸했다.

‘테이커 사이에서도 지위가 있는 모양이군.’

그리고 제단의 총괄 책임자인 제롬은 따지자면 사가트보다는 살짝 ‘위’에 있는 자였다.

하지만 그런 제롬마저도, ‘어둠 속 사내’의 정체는 알지 못했다.

또 그가 있는 저 무채색의 장소가 어디이며, 어디와 통하는지 또한.

‘어둠 속 사내’는 제롬을 필요로 할 때면 다짜고짜 자신이 있는 공간으로 제롬을 워프 이동시켰으니까.

-동방 지역 제단에선 제가 제일 실적이 나은 편입니까? 그것참, 다행이로군요.

-그런데 남방 지역은…… 흠. 확실히 당신의 말대로 여러모로 저조한 결과를 보이는군요.

제단에 관한 대목이 드러났다.

제단은 동서남북 방(方)의 다섯 군데씩, 총 스무 개가 존재한다.

테이커들은 ‘그릇’을 제단으로 데리고 온 뒤, 그들에게 선택지를 준다.

‘병사’, 즉 인간이길 포기하고 몬스터가 될지 말지.

“…….”

‘병사’가 되기를 선택한 이들은, 각자 외견과 정체를 숨긴 채 다양한 임무를 지니고 인간들의 사회에 숨어든다.

살인, 테러, 납치, 물색(物色), 암약(闇弱) 등. 정말 다양한 임무를 가지고.

그 임무를 수행하는 대가로, ‘병사’들은 바랐던 소망을 이루게 된다.

힘을 바라던 자에겐 힘이.

금전을 원하면 금전이.

‘암세포 같은 새끼들.’

진정한 의미로 ‘괴물’이 된 자들은 그런 식으로 세상에 스며들어, 크고 작은 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반드시 ‘병사’가 되는 건 아니었다.

-우, 웃기지 마라! 아무리 내가 밑바닥을 기는 인생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너희들 같은 괴물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마지막 자존심과 명예를 지켜, 인간으로 남기를 선택하는 자.

-그, 그럴 리가요! 될 수 없다니! 제가 이렇게나 원하고 있는데……!

-어,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개가 되라고 하면 개가 되어도 좋으니, 저는 어떻게든 저를 무시했던 그놈들에게 복수할 힘을 얻어야 한단 말입니다!

인간을 혼세의 병사로 만드는 의식(儀式).

얼마 전 사가트가 이석우를 매개로 하여 퍼뜨렸던 ‘가공 코어’를 그릇에 주입해, 종(種)의 근원을 뒤바꾸고 ‘혼세’라는 이세계의 이치와 만상(萬象)을 세뇌하는 과정.

정신력이 그 의식을 버티지 못하고 도중 포기를 선언하는 자들은 ‘병사’가 되지 못했다.

명예를 지킨 자들이든, 정신이 버티지 못한 이들이든, 최후는 결국 똑같았다.

-끄, 끄아아아악-!!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혼돈의 거신을 되살릴 제물로 바쳐졌다.

즉.

지금 이곳 어딘가에도 무참한 죽음을 맞이한 제물이 쌓여 있다는 의미.

“…….”

그리고 그 ‘참상’이, 제롬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대성의 눈에도 고스란히 보였다.

쯧.

대성이 혀끝을 찼다.

‘참 더럽게도 노는 놈들이다.’

기억의 풍경 사이로 떠오른 ‘장면’에 인상을 찌푸린 그는 얼른 다음 정보 수집에 나섰다.

-너무 남방의 제사장들을 나무라지 마십시오.

-그래도 ‘병사’의 양산(量産)에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건 남방의 제사장들 아닙니까.

-아, 물론 정확히는. 병사들을 양산할 지식을 갖춘 재목(材木)을 발견한 거지만요. 뭐, 그것만 해도 어딥니까.

그때, 대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익숙한 물건이 보였기 때문이다.

‘융합 앰플.’

‘어둠 속 사내’의 손을 거쳐 가공된 코어를 재가공해, 인간을 몬스터로 만드는 각성제.

이석우가 열심히 세상 각지에 불법 유통한 물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석우는 어디까지나 퍼뜨리는 역할을 했을 뿐.

그 각성제를 직접 제조하는 ‘기술자’가 따로 있는 건 당연했다.

저들이 말한 재목이, 바로 앰플을 만든 기술자를 가리켰다.

사가트는 가공 코어를 널리 퍼뜨릴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닌 자로 이석우를 선택했다.

그리고 남방의 제사장들은 가공된 코어를 각성제의 형태로 만들 만한 지식과 능력을 갖춘 ‘기술자’를 발견해, 이석우와의 협업을 주선했다.

‘사가트의 기억 속에 직접 앰플을 제조한 게 누구인지는 왜 안 나와 있나 싶더니……. 이석우만 관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건가.’

사가트는 어디까지나 앰플의 유통자인 이석우의 고삐를 쥐는 것에만 치중해, ‘기술자’의 정체까지는 알지 못했다. 아니,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어쨌든 이 모든 걸 쉽게 말하자면.

‘똑같은 놈들끼리 아주 제대로 쿵짝이 맞았군.’

남방의 제사장, 사가트, 이석우, 그리고 기술자까지. 그야말로이 넷이서 합심해 연출한 촌극이었다.

-이석우가 죽었다고요? 허…….

-뭐, 그럼. 어쩔 수 없이 당분간은 유통까지 ‘그’가 할 수밖에 없겠군요.

-골방에 틀어박혀 약만 만드는 샌님이기는 해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일단은 이석우와 유통 경로를 공유하니까요.

‘기술자’가 이석우의 사업에 맞추려면, 앰플이 ‘어디’에, 그리고 ‘누구’에게 얼마만큼 유통되는지 그 정보를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대성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 기술자란 놈은, 누가 앰플을 사들였고, 앰플이 지금 어디까지 퍼졌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다행히도, 남방의 제사장과 친분이 두터웠던 제롬은 그 기술자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박동혁 박사.’

융합 앰플을 제조한 인간.

이석우가 암세포를 퍼뜨린 놈이라면, 박동혁 그는 그 악성 종양을 손수 만든 자였다.

그런데 이제는 박동혁이 죽은 이석우를 대신해 암세포를 퍼뜨리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처리해야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인을 처단할 순 없다.

가령, 마피아나 야쿠자 같은 것들.

그런 것들까지 일일이 들쑤시고 다녔다가는 더러운 일에 휘말리기에 십상이고 그 영향은 가족에게까지 마수를 끼칠지도 모른다.

그런 자경단 같은 짓거리는 만화나 영화 속에 나오는 정의의 사도들이나 자처하는 거다.

그리고 대성은 본인을 무슨 ‘영웅’ 따위로 생각하지 않았다. 바라지도 않고.

하지만 적어도.

소중한 가족들이 사는 세계에 ‘인간이 아닌 것’들이 암약하는 것만큼은.

다른 차원의 괴물이 사람인 척 숨어들어 은근슬쩍 더러운 수작을 부리는 것만큼은.

‘결단코 내버려둘 수 없다.’

인외(人外)의 것들이 품고 있는 사고방식, 가치관은 이해할 것이 못 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놈들이 언젠간 가족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가족을 위해서라도.

이 땅에 숨어둔 이(異)차원의 괴물을 박멸하는 건 자신의 의무라고, 대성은 생각했다.

‘더 캐낼 정보도 없나.’

대성은 <귀안>을 해제한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박동혁 박사의 위치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박동혁과 협업했던 이석우라면 알겠지만, 그는 지금 관짝에서 썩어가는 상태.

이석우를 제외하고 박동혁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만한 자라면…….

‘남방 제단의 제사장들. 그놈들이라면 알고 있겠지.’

제일 먼저 박동혁을 발견해 이석우와 주선시킨 게 그들이니, 절대 모를 리가 없었다.

대성이 고요한 적의가 담긴 안광을 번뜩이던 찰나.

‘아니, 잠깐만.’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른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어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PM 11:27.

밤 11시가 훌쩍 넘었다는 건…….

“상점창.”

어젯밤 처음으로 상점창을 통해 ‘정보 구매’를 한 게 밤 11시가 가까워졌을 때니, 그로부터 24시간이 지났다는 거다.

1일 1회 이용할 수 있는 정보 구매를 지금 바로 써먹을 수 있다는 의미.

“정보 구매.”

나비 소녀를 통해 시스템을 활성화한 뒤 공적 포인트를 지불하자 금색 문서가 나타났다.

[허공록이 생성됩니다.]

대성은 지체 없이 허공록을 펴 들어 그곳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

「내일 오전 9시, 황준영은 하남시 구치소에서 수송대와 함께 출발해 화성시 북양리에 있는 각성자 전용 격리 수용소, ‘스퀘어’로 이동한다.」

「‘스퀘어’에 수감된 황준영은 수감 당일, 그를 적대하는 수감자들에게 급습당해 목숨을 잃는다.」

「본 문서에 기록된 미래가 그대로 일어날 시, 사용자에게 직간접적인 피해가 일어난다.]

“……?”

분명 박동혁에 대한 정보가 있으리라고 기대했는데.

갑자기 웬, 전혀 생뚱맞은 황준영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황준영이 죽는 거랑 내가 피해를 입는 거랑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거지?’

황준영과는 면식조차 없는 사인데.

아니, 어쩌면.

‘……박동혁과 황준영 사이에 무언가 관계가 있는 건가?’

전에 나비 소녀가 말했듯이, ‘정보 구매’는 모든 걸 형편 좋게 알려주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사가트나 디메션 테이커에 대한 얘기를 해주면 될 걸, 굳이 빙 둘러서 ‘성남시의 프렉쳐를 막아라’라고 알려줬던 것처럼.

참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반쪽짜리 서비스다.

하지만 어찌 됐든, 허공록에 적힌 대로 움직이니 무언가 수확이 따랐던 것도 사실.

‘뭔가 상관이 있나 보군.’

아닐 가능성도 있지만, 어쨌든 비싼 공적 포인트 주고 기껏 구매한 정보였다.

어떻게든 써먹어서 수지 타산을 맞출 수밖에.

“어이.”

“네, 네?”

허공록에서 시선을 떨어뜨린 대성이 신초영을 불렀다.

마침 황준영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기로 유명한 그녀가 여기에 있었다.

“박동혁이란 자를 아나?”

“박동혁이요? 박동혁, 박동혁……. 아, 네!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에요.”

“얼마나 잘 알지?”

“얼마나, 라고 하셔도……. 잘은 몰라요. 황준영 단장님을 통해 이야기만 몇 번 들어본 정도라.”

“그쪽 단장과 박동혁은 서로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지?”

역시.

괜히 허공록이 뜬금없는 황준영 얘기를 한 게 아니었다.

대성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신초영이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뱉기 시작했다.

“<소울>에서 사용하는 웬만한 장비들은 다 박동혁이란 사람의 손에서 탄생했다고, 저한테 맨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더라고요. 두 분이서 굉장히 친했나 봐요.”

“뭐 또, 그밖에 네가 박동혁에 대해 아는 건?”

“그것 말고는 없어요. 그 박동혁이란 사람, 그냥 일화나 좀 들어봤지. 실제로 만나본 적도 없고…….”

황준영이 박동혁과 친하다는 건,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다는 말일 터.

다음 목표는 정해졌다.

오늘 성남시 게이트 처리부터 제단의 침입까지……. 쉴 틈이 없다는 게 몹시 마음에 안 들었지만.

‘오늘을 넘기면, 황준영은 죽는다.’

오늘 안에 일을 해결해야 한다면, 조금만 더 귀찮음을 감수할 수밖에.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우선.

-샥.

대성은 망자가 된 제롬의 몸에 반짝이는 빛살을 손에 쥐었다.

[혼세의 존재, ‘디멘션 테이커’가 지니고 있던 권능이 절대자의 몸에 스며듭니다.]

[권능: <침식의 방>을 획득하셨습니다.]

<권능 정보>

침식의 방

[검은 구체 모형의 고유 결계를 생성해 지정한 대상을 가둡니다.]

[고유 결계에 갇힌 대상은 자신이 지닌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을 환상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해당 권능은 대상이 지닌 정신력의 강약에 따라 유동적인 위력을 보입니다.]

당하는 입장에선 짜증 나기 그지없긴 했지만 재미는 썩 있는 권능이었다. 챙겨둬도 나쁠 건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새로운 권능을 획득한 대성이 깊고 어두운 바위 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유히 어딘가로 향하는 그의 뒤를 신초영이 황급히 따라갔다.

“자, 잠깐만……!”

남한테 기대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저 남자에게 의지하는 것이 그녀 입장에선 제일 현명한 선택지였다.

대성 또한 뒤따라오는 신초영을 굳이 내치진 않았다.

오히려 따라온 김에 물었다.

“황준영이란 남자, 평소에 다른 사람들한테 원한 같은 걸 많이 샀나?”

“원한이요? 아뇨, 딱히……. 아, 근데 확실히. 나쁜 놈들한테는 원한을 많이 사셨긴 했겠죠.”

“흠…….”

“단장님 손에 잡힌 악질 각성자만 해도 수두룩한걸요.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유명해요, 꽤.”

그래서 허공록에 그가 내일 수용소에서 같은 수감자에게 급습을 당한다고 적힌 것이었다.

아무래도 좋을 얘기지만,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질문.

“하…….”

그런 정의로운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린 신초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는 사이 바위 굴 제일 깊은 곳에 당도한 둘 앞에 커다란 남색 석문이 나타났다.

어쩐지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모습에 신초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게 뭔가요?”

신초영의 말에 방점이 찍힌 순간.

콰- 앙!

대성이 다짜고짜 발을 휘둘러 석문을 깨부수었다.

갑작스런 굉음에 무심코 눈을 질끈 감은 신초영은 할 말을 잃었다.

저 무쇠보다 단단해 보이는 석문을 맨발로 부순 걸 신기해해야 할지, 이 거침없는 행동 그 자체를 놀라워해야 할지…….

저벅-

대성은 적당히 사람 크기만 한 구멍이 뻥 뚫린 석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들어가? 말아?’

신초영이 잠깐 망설였다.

아니, 여기까지 와서 망설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민망해진 신초영이 구멍 너머로 발을 떼려던 찰나.

“들어오지 마.”

멈칫.

칠흑 구멍 너머에서 들려온 대성의 목소리가 그녀를 걸음을 내딛다 만 어정쩡한 자세로 굳게 만들었다.

대성의 말이 약간 음산하게 메아리치며 이어졌다.

“안 들어오는 게 좋을걸.”

“그,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보지 않는 편이 나을 텐데.”

언뜻 심드렁하고 무심하게 울리는 어조 사이로 왠지 모를 분노가 은근하게 섞여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신초영이 물었다.

“거, 거기에 뭐 있어요?”

“어.”

“뭐가 있는지 물어봐도 돼요?”

“묻지 마. 입에 담기도 싫다.”

“…….”

“뭐, 들어오고 말고는 좋을 대로 해. 그것까지 내가 일일이 강요하는 것도 웃기는군.”

되도록 들어오지 않는 편을 추천한 거지, 무조건 들어오지 말라는 말은 아니었다.

들어가도 딱히 큰 민폐는 아니겠다 싶었던 신초영이 조심스레 걸음을 마저 뗐다.

구멍을 넘고…….

완전히 석문 안쪽으로 접어든 신초영은 갑작스레 훅 깔린 어둠에 인상을 찡그렸다.

“잘 안 보이네.”

그래도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암전(暗轉)인 공간은 아니어서, 눈이 금세 어둠에 적응했다.

그리고 보였다.

“어……?”

일찍이.

그 대성마저 제롬의 기억 속에서 발견하고 진저리를 쳤던.

‘참상’의 실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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