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078
‘한대성…… 한대성이 왜 나를?’
처음에는 납치범의 정체가 자신에게 원한을 품었던 숱한 불한당 중 하나일 거라 예상했다.
보복이라면 이전에도 수차례 당해봤으니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그런데 설마 하니, 그때 봤던 하얀 머리 남자를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은.
“자, 자네가 날 여기로 데려온 건가?”
“어.”
“왜지? 나는 자네한테 원한 같은 걸 산 기억은 없네만. 아니면 누구의 사주(使嗾)를 받고?”
“…….”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자네가 누구 밑에서 꼬랑지를 흔들 만한 인간으로 보이진 않아.”
“마치 나에 대해 잘 안다는 듯이 말하는군.”
“알다마다.”
황준영이 입가를 씰룩이며 말했다.
이렇게, 대성을 올려다보면서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만 해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발가벗겨진 채 사나운 맹수 앞에 선 기분이었다.
대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구치소에도 텔레비전은 있을 테니.”
“아니. 난 자네가 라이센스를 따기 전부터 자네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보았네.”
“뭐, 이야기 들어보니까 그때 멀리서 나를 되게 노려보고 있었다고 말은 하더군.”
“……뭐? 자, 자네가 그걸 어떻게…….”
라이센스 시험 당일, 확실히 황준영은 건물 입구로 들어서는 대성을 보며 날 선 경계의 눈빛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시선을 대성이 알아챈 듯한 낌새는 없었는데?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황준영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대성이 몸을 숙였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황준영을 꿰뚫듯이 물끄러미 응시했다.
“박동혁 박사 알지.”
그 이름이 거론된 순간.
안 그래도 경악스레 뜨였던 황준영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네 입에서 그 이름이 왜 튀어나오는 거지?”
“박동혁 박사 지금 어딨지? 아무리 검색해도 자료 하나 안 뜨던데.”
“당연하지. 그 친구, 내가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상당한 히키코모리거든. 오죽했으면 활달하기로 유명했던 그 친구 조수마저 그 친구 따라 은둔 폐인이 됐을까.”
“조수도 있었군.”
“그럼. 옆에서 보조할 인간도 없이 그 넓은 연구실을 운영하겠나.”
“어디 있는지 알아?”
“……나도 모르네.”
거짓말이다.
지금 여기서 박동혁이 있는 곳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허공록이 대성에게 아무 상관도 없는 황준영을 구하라고 말할 리는 없으니까.
‘귀안으로 이 인간의 기억을 들여다보면 그만이지만…….’
애석하게도 귀안은 죽은 자에게만 발동할 수 있는 스킬.
아무리 목적에 필요하다고 해서 적도 아군도 아닌 황준영을 대뜸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 순 없는 노릇.
그따위 무정한 악행(惡行)은 혼세의 짐승들이나 하는 짓이다.
다만, 한 가지 궁금했던 것은,
“왜 그렇게 박동혁 그놈을 감싸는 거지? 선량한 인간도 아닌데.”
“선량한 인간이 아니라니? 자네, 뭘 모르는군. 박동혁, 그는 내가 인정한 몇 안 되는 정의로운 사람 중 하나라네.”
황준영은 그 말이 마치 본인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처럼 여기며 열변을 토했다.
“에테르 공학에 있어선 그 어떤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실력자지. 살짝 오만할지언정 권위에 집착하지 않고, 일생을 오직 평화에만 바친 남자란 말일세.”
“…….”
“이제는 아니지만…… 한때는 나의 클랜이었던 <소울>도 박동혁, 그 친구가 손수 만들어준 장비 덕에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어.”
진실과는 별개로, 황준영은 박동혁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아마 대외적으로는 추악한 민낯을 철저히 숨기고 정의로운 인간인 척 연기했던 거겠지.
“그렇게 잘 알고 있다면, 당연히 박동혁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절대 모를 수가 없겠군.”
“……젠장.”
“말해.”
“박동혁에겐 무슨 볼일인가.”
“그건 말 못 해.”
“그렇다면 천년만년이 지나도 이 대화에 결론은 안 나겠군. 나도 말 못 하니까, 나를 죽이든 살리든 씹어 먹든 자네 마음대로 하게.”
상반신을 일으키고 고개를 세운 황준영이 대성과 눈높이를 맞췄다.
황준영은 두려워하는 한편으로도, 의연하게 눈을 빛냈다.
“아무리 내가 제자의 복수를 위해 눈이 먼 살인마라고 멸시받을지언정, 제 목숨 건사하겠다고 친구를 팔아먹을 망나니로 보이는가!”
“아니.”
황준영과 독대하는 건 오늘 이 순간이 처음이다.
그리고 이 짧은 대화 속에서, 대성이 느낀 황준영에 대한 첫인상이 지금 막 정해졌다.
답답하고 성가시기는 해도, 신의(信義)를 지킬 줄은 아는 자라고.
“나와.”
대성이 짤막하게 말한 순간.
저벅-
건물 내부 출입구에 깔린 칠흑 너머에서 발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황준영이 무슨 소린가 싶어서 발소리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초…….”
이윽고, 발소리의 정체가 서서히 어둠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황준영이 깜짝 놀랐다.
“초영아……?”
신초영.
그를 이성 잃은 괴물로 만들었던.
그만큼 마음을 쏟아부었던 소중한 제자가 그곳에 있었으니까.
“선생님.”
“초영이 네가 여길 왜……!”
말을 전부 잇기도 전에, 황준영이 아직 충격이 남은 몸을 끌고 신초영을 향해 다가갔다.
황준영이나 신초영이나, 서로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보다 초췌한 모습이었다.
“초영아, 몸은……. 몸은 좀 괜찮은 거냐? 다행히 네가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은 뉴스로 접해서 알고는 있지만…….”
“저, 저는 괜찮아요. 선생님.”
“아아…….”
“……이제는 영원히 오러를 쓸 수 없게 되었지만요.”
“뭐……!”
언론에는 신초영이 눈을 떴다는 소식을 전했을 뿐, 정확히 그녀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는 보도하지 않았다.
날벼락 같은 소식에 황준영의 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오, 오러를……. 그럼 앞으로 영원히 사냥꾼이 될 수 없다는 말이냐?”
“네, 맞아요. 하지만…….”
신초영이 엷은 웃음을 띠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자살을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스승과 재회할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한 기쁨으로 다가왔으니까.
“괜찮아요. 좌절 같은 건 하지 않을 테니까요.”
“하, 하지만 앞으로 네가 하고자 했던 복수는 어떻게…….”
“그 얘기는 나중에 해요, 선생님. 그보다 우선.”
신초영은 격한 감정을 보이는 황준영을 달랜 다음, 대성을 가리켰다.
“저분을 도와주시지 않겠어요?”
“저, 저 남자를……?”
“제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에요.”
의외의 말이 이어지자, 대성을 쳐다보던 황준영이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이 이맛살을 구겼다.
신초영이 차근차근 하나씩,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갑자기 게이트가 확 열려 그녀를 납치했던 것부터 해서, 인간의 말을 하는 몬스터, 용과 함께 녀석들을 일거에 무너뜨린 대성의 활약과 제물로 바쳐진 사람들의 끔찍한 광경까지.
믿을 수 없는 얘기가 이어질 때마다 황준영의 얼굴에선 점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런…… 그럴 수가…….”
“은혜에는 꼭 보답하고 있어요. 그렇게 배워왔으니까. 돌아가신 부모님한테도. 그리고 선생님한테도.”
“…….”
“저분, 나쁜 사람 아니에요.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확실해요. 조금 방식이 거칠기는 해도 악행을 저지를 분은 아니라고요.”
그 일례로, 대성은 심문 대상인 황준영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고문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힘이 있었을 텐데도.
“부탁드려요, 선생님.”
신초영이 애절한 어조로 그리 말하며 황준영의 손을 꼭 잡았다.
아무리 소중한 제자의 부탁이라고 해도, 의도를 알 수 없는 저 남자에게 친구의 위치를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저 남자는 신초영의 목숨을 살려주지 않았던가.
저번 라이센스 시험 때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하아-
길게 한숨을 뱉은 황준영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나랑 같이 가지. 지명(地名)이 뚜렷하지 않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곳이야.”
***
황준영이 말한 대로,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의정부시에 있는 도봉산 중턱 어디쯤이었다.
산 초입까지는 섬멸룡을 통해 이동하고, 그 뒤론 직접 두 발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석굴암을 지나쳐 계단 하나 없는 험한 산세를 한참을 걷던 중.
“여기일세.”
문득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선 황준영이 땅을 가리켰다.
나무의 잔가지와 뿌리가 번잡하게 엉킨 다른 곳들과 비교하면 유달리 매끈한 평지.
그리고 그 평지 위에, 네모난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박동혁 그 친구의 연구실은 이 안에 있네.”
“참 음험하게도 사는군.”
“워낙 세속의 때가 묻는 걸 싫어하는 친구라.”
세속의 때고 뭐고, 추악한 악행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겠지.
대성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며 철문을 바라보았다.
“안쪽에서 직접 록(Lock)을 해제하지 않으면 절대 열리지 않네. 미리 연락이라도 해야-”
대성이 개미라도 밟는 것처럼 가볍게 발을 바닥에 내려찍었다.
우직-!
그러자 방공호에 버금가는 강도의 철문이 구겨진 화장지처럼 엉망진창 뭉그러졌다.
콰지직-!
그런 다음, 대성이 이불을 걷어내듯이 자연스럽게 반 이상 뭉개진 철문을 모조리 뜯어냈다.
“…….”
황준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철문을 부수고 구멍 안쪽으로 몸을 쏙 던지는 대성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신초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첨벙-!
바닥에 착지한 대성의 신형 아래로 물보라가 세차게 튀어 올랐다.
철문 너머는 어째선지 산 중턱 아래였음에도 하수도와 같은 터널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시궁창에 사는 쥐새끼였군.”
대성이 역한 폐수(廢水) 냄새에 불쾌함을 표하며 걸음을 옮겼다.
챙- 챙- 챙-
뒤에선 황준영과 신초영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사다리 하부까지 내려온 황준영이 다급히 외쳤다.
“조, 좀 기다려보게! 방범 시스템이 돌아가서 다짜고짜 움직이면……!”
“시끄러운 영감이야.”
중얼거리며 나온 혼잣말이라 황준영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적의 본진을 급습한 마당에 고상하게 행동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딸깍.
위이이잉-!
이때, 10m 전방의 타일 벽 양측이 동시에 내려가더니 새카만 대형 미니건(Minigun)이 벌써부터 전기 톱날처럼 총열(銃列)을 회전시키며 튀어나왔다.
마침 같은 타이밍에 사다리를 전부 내려온 황준영과 신초영이 놀란 소리를 뱉기도 전.
드르르르륵-!
투두두두두두두-!!
고막까지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머신건이 불을 뿜었다.
탄환이 쉼 없이 쏟아지며 그늘로 뒤덮인 터널을 샛노랗게 물들였다.
“대성 씨!”
천둥벼락이 휘몰아치는 듯한 번쩍거림에, 신초영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외쳤다.
우레 같은 폭음이 이어지고, 그가 다진 고기가 되었으리라고 예상하며 천천히 눈을 뜬 신초영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저, 저게 무슨……?”
티티티티팅-! 퉁투투퉁-!
초당 70발꼴로 발사되는 탄환 하나하나가 일직선으로 작렬하는가 싶었으나, 잘 보니 한 발의 예외도 없이 엉뚱한 벽이나 천장에 도탄(跳彈)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섬멸 용기사 발라르크의 갑옷>을 구현합니다.]
송곳니처럼 각이 날카롭게 진 칠흑의 갑주가 개틀링의 총알 세례를 모조리 튕겨냈다.
“세상에, 저런…….”
1등품의 오러 아머도 저렇게 뻔뻔하게 티타늄 탄환을 버텨낼 순 없다.
그때.
화르륵-!
[<업화대검>을 구현합니다.]
[<심판의 단검>을 구현합니다.]
활짝 펼쳐진 그의 양손에 커다란 대검과 단검이 각각 하나씩 들렸다.
쐐- 액!
대성이 왼쪽 미니건을 향해 <심판의 단검>을 던졌다.
콰직-!
소낙비 같이 쏟아지는 총알 띠를 갈라내며 날아간 단검이 미니건의 총열 정중앙에 정확히 꽂혔다.
치직-! 칙-!
내구력에 이상이 생긴 미니건이 스파크를 터뜨리며 우왕좌왕하던 가운데, 대성이 나머지 오른쪽의 미니건을 향해 쇄도해 칼을 휘둘렀다.
서걱-!
무가 잘려나가듯 매끄럽게 개틀링의 몸체가 절단되었다.
훙-!
거기서 그치지 않고, 포물선을 그리며 좌측으로 틀어진 칼이 남은 왼쪽의 미니건마저 잘라냈다.
“……직접 보니 미쳤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군.”
“동감이에요.”
황준영과 신초영은 사다리 근처에서 발도 떼지 못하며 탄성을 흘렸다.
언뜻 급한 상황은 종료된 것으로 보였으나…….
첨벙- 첨벙-
터널 깊숙한 저 너머.
무언가 붉은 동그라미 같은 게 열 쌍 정도 옹기종기 모여 서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투항하라.》
《투항하라.》
《투항하라.》
무심코 등골을 서늘케 하는 무미건조한 기계음.
황준영이 경계심을 빳빳이 세운 채 기계음의 정체를 확인했다.
“부, 불스아이(Bullseye)……?”
붉은 동그라미로 보였던 저것은 황소 머리를 한 몬스터의 눈이었다.
상반신은 그리스 신화의 미노타우로스와 비슷한데, 하반신은 산양의 몸뚱이를 따왔다.
2등급 위험종으로 불리는 몬스터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황준영은 혼란스러웠다.
“서, 설마 박동혁 이 친구 연구소에 게이트라도 터진 건가?!”
흔치 않지만 땅 밑에 게이트가 열리는 일도 있었다.
그때.
화들짝 놀라는 황준영의 눈에 잠시 의아함이 떠올랐다.
“저건……?”
방금 기계음이 들려온 게 이상하다 싶었더니, 불스아이의 어깻죽지에 웬 바주카 같은 게 주렁주렁 달린 것이 아닌가.
“잠깐…….”
잘려나간 미니건에서 치솟는 불꽃이 터널의 어둠을 지워낸 덕분에 황준영은 볼 수 있었다.
바주카의 표면에는,
라는 알파벳이 새겨진 상태였다.
“저게 왜 몬스터의 몸에-”
퓨우우-!
황준영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불스아이 무리의 바주카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사십 발에 가까운 미사일이 검회색 연기를 꼬리처럼 늘어뜨리며 대성을 향해 날아갔다.
미사일이 주포를 떠나 목표물에 당도하는 1초도 안 되는 찰나, 대성의 동공이 맹금류처럼 수축했다.
그리고…….
까가가가가강-!
물결치듯 휘둘러지는 칼날이 무수한 잔상을 그려내며 미사일을 튕겨내고, 자르고, 날렸다.
명중하지 못하고 튕겨 날아간 미사일이 몇 개는 바닥에 고인 폐수에 떨어져 불꽃을 꺼뜨리는가 하면.
휭- 펑-! 쿠구구-
몇 개는 천장과 벽에 충돌해 폭발했다.
우르르릉-!
“위험해!”
위급한 조짐을 느낀 황준영이 고함치며 신초영을 덮쳤다.
그와 동시에 둘의 근방 천장이 세차게 무너져 내렸다.
천장의 파편들이 폭우처럼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둘 앞에 태산 같은 벽이 생겨났다.
뿌연 먼지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쿨럭! 쿨럭!”
“초영아! 어디 다친 곳은……!”
“괘, 괜찮아요. 선생님은요?”
“나도 괜찮은 것 같다.”
서걱-! 쿵-!
둘 앞에 드리워진 벽 저편에서 격전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벽이 시야를 가리자 황준영의 사고가 다시금 재가동되었다.
‘…….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어.’
는 박동혁의 이니셜.
박동혁은 본인의 발명품에 항상 그 이니셜을 새겨 넣었다.
‘왜 몬스터한테 그 친구 물건이…….’
황준영이 혼란에 휩싸인 사이.
쾅-!
벽이 폭발하며 구멍이 생겨났다.
대성이 자욱하게 낀 먼지구름을 휘저으며 걸어 들어오자, 신초영이 구멍 밖으로 언뜻 보이는 불스아이의 사체들을 흘겨보며 물었다.
“벌써 다 없앴어요?”
“어.”
“……또 도움을 받게 됐네요.”
“나도 도움이 필요하니까.”
그리 말한 대성이 황준영을 돌아보았다.
사령 병사를 앞세워 박동혁의 위치를 추적해볼까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이곳이 불스아이처럼 다른 몬스터로 득실대는 장소라면, 콕 집어서 ‘박동혁’의 냄새를 탐지해내는 건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닐 터.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이 악취 가득한 지하를 몇 번이고 빙빙 방황하는 일은 불가피하리라.
그러느니 차라리 박동혁이 어디 있는지 확실히 아는 황준영을 내세우는 게 효율적이었다.
그런 결론에 도달한 대성이 생각에 잠겨 약간 멍한 얼굴이 된 황준영을 일으켜 세웠다.
“박동혁이 있는 곳까지 안내해.”
“……그래.”
황준영이 이를 빠득거렸다.
“그 친구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내 두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그제야 황준영도 뭔가 심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지고 있음을 이해했다.
그때.
쿠르르릉-
이번엔 터널 전체가 요동치기 시작하며 먼지 비를 떨어뜨렸다.
“이제 무너지겠군. 서두른다.”
대성이라면 모를까, 저 둘의 뜀박질 속도가 터널이 무너지는 속도보다 빠를 리는 만무할 터.
번거로운 것들이라고 생각하며 대성이 손을 뻗어 인(印)을 발동했다.
[<한대성의 섬멸룡>이 구현의 인에서 소환됩니다.]
화르륵-!
다행히도 섬멸룡의 덩치는 터널의 너비보다는 작았다.
대성이 둘을 데리고 섬멸룡의 등허리에 탑승하기 무섭게.
쿠구구구-
우르르릉-!
터널 전체에 거미줄 같은 금이 퍼져나가더니, 이내 바닥을 덮을 듯이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출발.”
크오오오오-!
포효를 쏟아낸 섬멸룡이 돌풍과 같은 속도로 터널을 빠져나갔다.
***
터널의 끝에 도착하자 연구실로 통하는 또 다른 철문이 나타났다.
마지막 차례로 섬멸룡에서 내린 신초영이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나갈 땐 어떡하지.”
끝에서 끝까지 붕괴한 하수도는 3m 넘게 쌓인 파편들 때문에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저벅-
연구실 입구 앞에 선 황준영이 메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부수고 들어갈 건가?”
“어.”
“……그럴 줄 알았네.”
까가가가가각-!
대성이 칼을 내리그어 전자동 개폐문을 찢은 뒤 틈새에 손을 밀어 넣더니 좌우로 잡아 뜯었다.
개폐문을 넘어서는 대성을 바라보며 황준영이 이마를 짚었다.
“박동혁이한테는 참 몹쓸 짓을 하게 됐구먼…….”
이어서 황준영과 신초영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박동혁의 연구실을 찾았으니 이제 더는 쓸모가 없었지만, 대성은 굳이 저들을 내치지 않았다.
따라오든 말든 거기까지 상관할 바는 아니었으니까.
“여긴가.”
개폐문을 통과하자 족히 50평은 넘어 보이는 연구실이 펼쳐졌다.
불현듯 오늘 제롬과 만났던 바위 굴의 풍경을 떠올린 신초영이 오싹한 반응을 보이는 한편.
황준영의 눈에 ‘그것’이 들어왔다.
“…….”
복잡한 설비가 뒤엉킨 연구실 안쪽에 길쭉한 유리관이 일렬로 쭉 나열해 있었다.
뒤늦게 유리관을 발견한 신초영이 창백한 안색으로 할 말을 잃었다.
“박동혁 이 친구야…….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다, 단장님. 이건.”
유리관 안쪽엔 인간과 몬스터가 냉동된 채 잠들어 있었다.
누가 봐도 인간과 몬스터를 가지고 생체 실험을 한 현장이었다.
“…….”
조용히 연구실을 가로지르던 대성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기감이 울부짖었다.
이 연구실 어딘가에, 생물의 기척이 마구 꿈틀거렸다.
‘대처 한번 빠르군.’
그런데 그게.
‘인간’의 기척은 아니었다.
덜컹-!
“……!”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황준영과 신초영이 화들짝 놀리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넓은 연구실 맨 안쪽 구석에 설치된 1인용 방공 셸터의 문이 천천히 열리며,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와, 너희들 진짜 잽싸네.”
다소 경박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는, 적어도 황준영이 기억하고 있는 박동혁의 음성은 아니었다.
저벅-
셸터를 빠져나오고 모습을 드러낸 건 양손이 쇠칼처럼 날카롭게 다듬어진 괴인이었다.
그리고 그 괴인의 손엔,
“터널이랑 여기까지 거리가 꽤 될 텐데…… 뭐 날아오기라도 했냐?”
뚝- 뚝…….
박동혁의 잘린 목이 핏물을 흘리며 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