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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가, 아스라이 가라앉는 검은 보름달을 후광 삼으며 지평선 저편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대성이 알고 있는 사령 병사도, 연구실 유리관 안에 잠들어 있었던 괴물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연구실 어딘가에, 유리관 괴물과 로만 말고도 뭔가가 하나 더 숨어 있었다는 건가.’
연구실과 통하는 어떤 시설에 숨어 있던 게, 필드 구현으로 인해 장소가 통합되면서 해방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대성이 저기 멀리서 열심히 도망치는 중인 로만을 쳐다보았으나…….
“음?”
의문 어린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뭔가’와 마주한 로만도 잠깐 뜀박질을 멈추고 적잖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기 때문이다.
쓰르륵-!
급정지한 로만이 미끄러지듯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소…….”
그 ‘뭔가’는.
특정한 종(種)을 구분할 수가 없는 생김새였다.
머리는 산양의 그것처럼 곡선으로 굽은 뿔이 달려 있는데 얼굴은 다이아몬드 같은 사각 외눈이 미간부터 시작해 양쪽으로 세 개씩 달려 있었다.
아가미 같은 게 달싹이는 빗장뼈부터 시작해 상체는 딱딱한 곤충의 검은 갑각으로 이뤄졌으나, 하체는 또 발톱과 털이 뒤덮인 조류의 다리를 연상케 했다.
거기다 파충류 같은 비늘에 둘러싸여 좌우로 요동치는 녹색 꼬리까지.
아무리 인간의 상식이 적용되지 않는 몬스터라 해도, 저토록 근본 없이 생긴 녀석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혼종 괴물과 마주친 로만이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소, 소장님……?”
비교적 거리가 가까웠던 혼종 괴물만이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였다.
“……소장님?”
하지만 이곳 영지 전부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대성의 귀에는 그 목소리가 충분히 닿고 있었다.
로만이 소장님이라고 말했다는 건.
저 혼종 괴물의 정체가 바로…….
“저게 박동혁이라고?”
예기치 못한 흐름에 대성은 오히려 로만이 지금 무슨 공포 때문에 머리가 돌아서 헛소리를 하는 거라는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박동혁은 분명 로만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을 텐데?’
하지만 로만이 헛소리를 뱉은 게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탁-!
혼종 괴물, 아니, 박동혁이 쓸어내듯이 땅을 박차며 순식간에 로만과 거리를 좁혔다.
이내 침팬지 같은 두껍고 거대한 손이 로만의 목을 움켜잡았다.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한 로만이 <발검>의 쇠칼을 휘두르며 발악했으나, 박동혁의 단단한 피륙을 쉽사리 꿰뚫지는 못했다.
“켁, 켁……!”
“재우야.”
“소, 소장님! 소장……!”
“남재우 이 빌어먹을 새끼야. 내가 동면(冬眠)하던 사이에 대체 무슨 난장판을 피운 거냐?”
이로써 저 혼종 괴물의 정체가 박동혁이라는 건 확실해진 상황.
대성은 전장을 살폈다.
사령 병사들은 이미 훨씬 전부터 유리관 괴물을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몰살한 상태였다.
‘상황 파악부터 해야겠군.’
원래는 로만을 죽이고 <귀안>으로 정보를 캐낼 계획이었으나…….
죽은 줄 알았던 박동혁의 등장으로 인해 일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꼬이고야 말았다.
[필드, ‘귀왕의 영지’의 구현화가 해제됩니다.]
알림 메시지가 사라짐과 동시에 광대한 죽음의 황야가 신기루처럼 사그라졌다.
다시 50평 남짓한 연구실의 풍경으로 돌아오자, 그제야 황준영과 신초영도 작금의 사태를 파악하며 놀란 소리를 뱉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대성의 말은 더 경악스럽기 짝이 없었다.
“박동혁.”
“켁……! 컥……!”
“그놈 놓고.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시지.”
그때.
황준영이 찬물을 흠뻑 뒤집어쓴 사람처럼 얼어붙었다.
박동혁이라고? 저 괴물이?
“…….”
박동혁이 로만의 목을 움켜쥔 채 징그러운 외눈을 꿈틀거렸다.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지 않고 사람 목소리를 서너 개는 겹친 듯한 이상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놓으면, 이 새끼 또 지랄발광할 텐데?”
“……그것도 그렇군. 그럼 그 상태로 말해라.”
“네가 말하라고 하면 난 순순히 대답해줘야 하는 처지인가? 이 빌어먹을 조수 새끼도 새끼지만, 너도 딱히 신용이 가는 놈은 아닌데?”
“그럼 나한테 설명하지 말고, 내 뒤에 있는 인간한테 말해.”
“…….”
관자놀이 부근에 달린 외눈이 옆으로 돌아갔다.
박동혁은 대성의 뒤에서 쭈뼛거리며 곤혹스러워하는 황준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제야.
분노로 마비되었던 이성이 조금은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막막해서 입이 잘 떼어지지 않았다.
“준영이 너한테는 내가 숨기던 게 있었다. 미안하지만…….”
***
항상, 박동혁은 생각했었다.
아무리 좋은 장비를 입고, 강력한 무기를 휘둘러도 인간은 결국 인간이라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육체가 다른데, 인간이 괴물을 어찌 이기겠나.”
‘오러’라는 신비의 힘을 다루는 각성자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들.
아예 종족이 다르고, 사는 세계와 차원이 다른 괴물들한테 범접할 바는 못 됐다.
오랜 세월을 포식자로만 살아온 인간들은 자기들이 피식자(被食者)가 되었다는 현실을 절대로 이해하지도,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협회 놈들도 그렇고, 사냥꾼 놈들도 그렇고. 그놈들, 죄다 자기 잘난 맛에 취해 현실을 보지 못해.”
“……자네가 나한테 누누이 해왔던 말이었지.”
“그래. 준영이 너는 나와 했던 얘기들도 있었으니 알겠네. 이대로 가면 인간들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이 대들보도 시원찮은 평화가 과연 얼마나 지속할 것 같냐고.”
“…….”
“우린 지금 이상한 외계 괴물들한테 침략당하는 처지다. 근데…… 의외로 사람들이 이걸 잘 모르더라고.”
창세기, 노아의 후손들이 제아무리 발악하며 하늘 높이 탑을 쌓아도 결국엔 창조주가 일으킨 대홍수 앞에선 무의미한 발악이었던 것처럼.
조만간 저 이차원 괴물들의 공습은 대자연의 분노에 버금가는 재앙을 몰고 올 것이며, 인간은 거기에 절대로 항거할 수 없으리라고.
박동혁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괴물들의 심장에서 빼낸, 그 조약돌 크기만도 못한 보석 따위로 저들의 힘을 흉내 낼 게 아니라…….”
끔찍한 괴물의 형태를 한 박동혁의 팔에 핏줄이 솟구쳤다.
기도가 옥죄인 로만이 답답한 신음을 토하며 몸을 비틀었다.
“우리가 직접, 인간의 편에 서서 싸워줄 또 다른 괴물을 만들어야 했다.”
“나는 자네가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을 줄은…….”
“그래. 내가 생각해도 미친 소리인 것 같아서 협회는 말할 필요도 없고, 준영이 너한테도 입 다물고 있었지.”
말만 따로 놓고 보면,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전형적인 미친 과학자 캐릭터의 대사가 따로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 못난 조수 놈을 좀 부려먹었다. 블랙마켓에는 이미 뒈진 몬스터 토막이 썩어 넘치잖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지.”
“…….”
“그리고 얼기설기 엮었다. 엑기스만 쪽쪽 뽑아내면서 섞었어. 각 개체가 지닌 강점만 섞으면 더 강한 무언가가 나오겠지, 하는 단순한 사고(思考)에서 시작한 발상이었다.”
그렇게 탄생할 수 있었다.
박동혁,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최강’에 가까운 생물이.
“인간과 같은 지능을 지니고, 인간보다 뛰어난 잠재력을 품었다. 적이었다면 꼼짝없이 우린 먹이사슬 아래층에서 잡아먹혔겠지만…….”
박동혁은 로만을 움켜쥐지 않은 나머지 왼팔을 활짝 펼쳤다.
자기를 좀 보라는 듯이 말이다.
“봐라. 그리고 상상해봐. 이런 생물이, 인간들의 편에 서서 저 괴물들로부터 맞서는 장면을.”
“……그런데 왜 그 생물한테서 자네 목소리가 나오는 건지 모르겠군.”
“확인이 필요했으니까.”
박동혁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키메라(Chimera)’라고 이름 지었다.
겉보기엔 그럴싸한 하드웨어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하드웨어를 움직이게 해줄 소프트웨어가 없었다.
“그래, 괜찮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때는.”
일단은 이런 껍데기라도 만든 게 어디인가.
문제는.
그 껍데기가 잘 만들어졌는지 어떤지, 확인이 필요했다.
“직접 느끼고 싶었다.”
“…….”
“그래서 이 육체와 나 스스로가 동기화하는 길을 선택했지.”
정신 연결.
물론 에테르 공학에 있어선 그 누구도 따라올 자 없는 기술자인 그라고 해도, SF 영화처럼 영혼과 정신을 짐 상자 나르듯이 뚝딱 옮길 수는 없었다.
“옮겨 간 키메라의 육체로 눈을 뜨기까지 한 달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었지. 그래서 나는 내 연구실 가장 깊은 곳에서 동면에 접어들어 이 몸으로 깨어나기를 막연히 기다렸다.”
그렇게 말한 박동혁이 여섯 개의 외눈을 움직이며 연구실 내부를 쭉 훑어보았다.
분명 자신이 잠들기 전까지는 없었던 것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내 원래 몸을 저 꼴로 만든 덕분에 억지로 동면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아, 이건 몰랐군. 잠에서 깨는 조건이 인간 쪽 육체를 아예 죽여버리는 것이라니.”
“켁, 컥……! 소장, 님……!”
“네놈 덕분이다, 이 빌어먹을 조수 새끼야. 네놈이 날 죽여버리는 바람에 의도치 않은 발견을 했다고. 이거 아주 고마워서 미칠 지경인걸.”
박동혁이 로만과 코가 맞닿을 거리까지 오른팔을 끌어당겼다.
늑대의 눈동자가 담긴 여섯 외눈이 안광을 번뜩이며 로만을 압박했다.
“자, 내 얘기는 여기까지다. 이제는 네놈이 지껄일 시간이야.”
“켁, 커, 헉……!”
“저 시체들은 다 뭐고, 또 너는 왜 모습이 그따위야? 내가 눈 감은 사이에 무슨 짓을 했냐고.”
박동혁이 그리 질문한 순간.
목이 압박당한 탓에 있는 대로 찌푸려진 얼굴로, 로만이 갈라진 웃음을 힘겹게 흘렸다.
“내가, 컥…… 당신 그늘…… 밑에서……. 당신 뒤치다꺼리나…… 커헉, 하고 있을 때…….”
“…….”
“당신, 은…… 그 미친 실험 때문에 멋대로…… 숙면하시고…… 나는 졸지에 낙동강 컥……! 오리 알 신세가 되어서…… 이 어둡고 축축한…… 시궁창에서 시간만 허비할 때…….”
‘그것’이 왔다.
언제나 그랬듯, 인간의 강한 염(念)을 맡고 몰려온 것이다.
디멘션 테이커가.
“나한테, 묻더…… 라고…….”
-네가 박동혁인가?-
“그, 래서…… 히, 히히! 내가 뭐라고…… 했게?”
-맞습니다. 제가 박동혁입니다.-
“이도…… 저도 아닌, 남재우…… 라고 대답하는 것, 보단…… 당신, 당신 행색을, 컥, 하는 게…… 더 이득일 거라…… 생각했어.”
사칭(詐稱)이었다.
남재우는 자신을 찾아온 남방 제단의 디멘션 테이커에게 본인을 박동혁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그리고 저들의 편에 붙어, ‘로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고 혼세의 존재가 되었다.
그 뒤로 벌어진 일은, 대성이 제롬의 기억에서 읽었던 것과 같았다.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제롬이 알고 있던 박동혁이란 자가 사실은 로만이었던 것뿐이고.
“다, 당신…… 이. 저, 정신 이동…… 이니, 도, 동면…… 이니 개…… 개지랄을 떨 때…… 그들은 내가 더 많은…… 당신이 이룩…… 한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성취를…… 이루게 해줬, 어……!”
그들은 ‘가공 코어’를 건네주었고.
로만은 그것으로 인간과 몬스터를 융합하는 각성제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인간을 뛰어넘는 상위 개체를 탄생시킨다는 박동혁의 이상(理想)을 실현한 것이다.
그로써, 로만은 본인이 그토록 시기하면서도 동시에 경외했던 박동혁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다, 당신의…… 뜻을……. 다, 당신의 연구를…… 내가 완성시킨 거야……! 뭐, 뭐 결국…… 마지막엔 저 새끼들…… 때문에 당신도 죽이고…… 이곳 시설 전부를…… 다 폐기 처분…… 하려고 했지만…….”
“…….”
“어, 어쨌든 고마운, 줄…… 알아도 모자랄 판에…… 하나뿐인…… 제자의 멱살을…… 틀어쥐어? 컥!”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말을 쥐어 짜내던 로만의 입에서 기어코 고통 어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도저히 참다못한 박동혁이 녀석을 벽에 집어 던진 것이다.
“컥, 쿠훅……!”
저벅-
박동혁이 피를 한 움큼 쏟아내는 로만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네가 내 밑에서 그런 마음 고충을 겪었다고 했을 땐,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 뻔했어. ‘사람’ 가지고 생체 실험을 했다는 얘기를 듣기 전까진 말이야.”
“이, 이 씨, 팔……! 아프잖아!”
“그런데 뭐? 그래놓고 내 뜻을 완성했다고 지껄여? 내가 결국 무엇을 위해 이런 정신 나간 짓을 저지른 건지 모르니까 그딴 개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오지?”
“이-!”
터질 듯이 근육이 부푼 팔이 휘둘러지고, 흉포한 짐승의 주먹이 로만의 얼굴에 작렬했다.
퍽-!
“커, 헉……!”
“그래, 네놈 새끼 때문에 난 영원히 이 몸에 갇히게 생긴 건 그렇다 쳐. 어찌 보면 내가 자초한 일이기도 하니까.”
퍽-! 퍽-!
망치로 살이 짓뭉개지는 듯한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그런데 네가, 사람들을 실험 재료로 가지고 놀고 저 괴물 새끼들 편에 붙은 건 도저히 못 참겠다.”
사정없이 주먹이 휘몰아치는 와중에도 로만은 어떻게든 반격을 꾀했으나 소용없었다.
박동혁이 그토록 혼신을 기울여 만든 최강의 몸은, 본인이 바랐던 대로 어렵지 않게 혼세의 존재를 압도하고 있었다.
조금은 무자비한 물리 교육 현장이 벌어지던 가운데, 대성은 천천히 연구실 안쪽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발견했다.
‘이건가?’
다양한 국적의 이름과 지난 날짜, 그리고 어떤 물건의 수량(數量) 같은 게 적힌 카탈로그.
바로…….
‘융합 앰플의 거래처 목록.’
이곳에 온 진짜 목적.
세계 각지에 퍼진 암세포의 리스트였다.
대성은 아공간 안쪽에 카탈로그를 소중히 보관했다.
이제 남은 건…….
대성이 말했다.
“그래도 지내온 정이 있다고, 차마 죽이기는 힘든 모양이지?”
“…….”
고개를 돌려 직접 보지 않아도 뻔히 느껴졌다.
죽일 듯이 로만을 패도, 결국엔 목숨을 끊을 결정타는 가하지 못하는 박동혁의 망설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리는 목소리로 박동혁이 대꾸했다.
“이놈한테는…… 이 천하의 씹X끼한테는 내가 참 많은 걸 가르쳐줬다.”
“그러시겠지.”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겠어, 씨이- 팔……. 미쳐버리겠네.”
“그럼 내가 도와주지.”
박동혁에겐 나름대로 입장이 있을 테니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이해‘만’.
결국, 로만…… 남재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해를 봐왔고, 앞으로도 피해를 볼 것인가.
동정의 여지도 없고, 그딴 자비 같은 걸 베풀기 위해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것도 아니었다.
까가강-
대성이 길쭉한 대검을 바닥에 끌며 박동혁과 로만이 있는 곳으로 느릿하게 다가갔다.
“비켜. 네가 못하는 걸 내가 대신 해주마.”
“…….”
“마음에 안 들면 막아보든가.”
“……아니.”
박동혁이 고개를 저었다.
“이 새끼 목숨은 네가 거둬라.”
“아! 잠깐! 잠깐……!”
초탈한 표정과 함께 박동혁이 돌아서자 로만이 황급히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지 말라는 듯이.
자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듯이.
콱-!
“컥……!”
그리고 박동혁의 것보다도 훨씬 우악스럽고, 사납고, 무정한 손아귀가 로만의 광대를 쥐어 잡았다.
길거리에 널브러진 오물을 쳐다보는 듯한 눈을 하며 대성이 말했다.
“한 가지만 묻자.”
“웁……! 우, 우웁……!”
“너 있지. 너한테 힘을 줬다던 그놈들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 줄 수 있나? 그게 가능하면 5분은 더 연명하게 해줄게.”
“웁……! 억……!”
로만의 새하얀 가면에서 눈물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이성적인 생각이 불가능했던 로만이 솔직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순간.
콰득.
대성이 칼을 앞으로 곧추세워 놈의 가슴에 밀어 넣었다.
최대한 천천히.
단죄의 칼날은 너무나 느릿하게 로만의 뼈와 살을 파고들었다.
피가 울컥울컥 흘러넘칠 때마다 가면 틈새로 드러난 로만의 동공이 서서히 뒤집혔다.
“역시 넌 5분도 살아 있을 가치가 없는 놈이었다.”
로만의 투명한 눈물이 새빨간 핏물로 변했을 때.
-콰득!
업화의 검이 놈의 등을 뚫고 튀어나와 벽까지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