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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숨이 멎은 로만의 고개가 꺾이자, 피거품이 후두둑 떨어졌다.
로만은 영면(永眠)에 접어드는 순간까지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고, 눈조차 제대로 감지 못했다.
“…못난 놈.”
처참한 몰골로 죽어가는 조수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박동혁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만감이 교차하고, 좋았던 기억, 나빴던 기억이 번개처럼 뇌리에서 번뜩일 터.
황준영 또한 착잡한 얼굴로 박동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로만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게 아닌, 친구의 슬픔을 위로하는 의미로.
-반짝.
불귀의 객이 된 로만의 가슴팍에 빛이 번뜩였다.
대성이 빛을 낚아챘다.
[혼세의 존재, ‘디멘션 테이커’가 지녔던 권능이 절대자의 몸에 스며듭니다.]
[권능: <발검>을 획득했습니다.]
<권능 정보>
발검
[에테르의 결정(結晶)으로 이루어진 두 자루의 예검(銳劍)을 소환합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디멘션 테이커들이 지닌 ‘권능’이란 힘은 꽤 성능이 쏠쏠했다.
<발검>의 경우도, 좀처럼 자르기 힘든 망령 채집가의 사슬을 끊어 내지 않았던가.
“귀안.”
뭔가 티끌 하나의 가치라도 될 정보가 있나 싶어서 <귀안>으로 로만의 기억을 읽어 봤으나, 이미 알고 있는 정황과 내막뿐이었다.
‘진짜 도움 안 되는 새끼네.’
필요한 걸 챙긴 대성은 이제 이 모든 고생길에 진짜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박-.”
대성이 박동혁의 이름을 입에 담으려던 그때.
“부탁이 있어.”
박동혁 쪽에서 먼저 대성을 향해 불쑥 말을 건넸다.
“어려운 건 아니고. 아마, 어림짐작이지만 네가 내 연구소까지 온 목적에 들어맞는 이야기일 거야.”
“말해 봐.”
“여기를 전부 불태워 줘.”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대성이 덤덤하게 말하며 업화대검을 고쳐 쥐었다.
이 일련의 대화 속에서 가장 안절부절못한 이는, 오히려 당사자도 뭣도 아닌 황준영이였다.
“괘, 괜찮겠나? 여긴, 동혁이 자네가 일생을 바친 곳인데….”
“못난 조수의 잘못은 소장인 나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어.”
“…….”
“살아있는 인간이 실험 대상으로 쓰인 곳이야. 태워 버려야지.”
박동혁이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음을 흘리는 사이, 대성은 연구실 정경을 쭉 살펴보았다.
끔찍한 생체 실험의 흔적 외에도 아예 한쪽 구역 전체가 가공 코어를 녹인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와 앰풀로 즐비했다.
“…….”
아까 얼핏 본 카탈로그에 따르면, 이미 앰풀은 세계 각지의 암흑가에 숨어든 수많은 범죄자와 비밀조직 사이에 거래되었다.
하지만 적어도, 여길 불태워 저 악성 종양이 이 이상 널리 퍼지는 사태는 막을 수 있을 터.
‘여기서 완전히 꼬리를 자른다.’
화르륵-!
도화선에 불씨가 달라붙듯, 업화대검에 불길이 맺혔다.
[‘업화’ 모드의 첫 번째 특수 스킬이 발동됩니다.]
[특수 스킬 : <격노>]
훙-!
포물선을 그리며 휘둘러진 칼에서 불의 격랑(激浪)이 휘몰아쳤다.
부채꼴 모양으로 뻗어 나간 <격노>의 광풍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씹어 삼키듯이 연구실을 불태웠다.
“아니, 저 미친놈은 미리 언질이라도 좀 주던가…!”
기껏해야 기름 좀 들이붓고 불붙이는 정도겠지, 싶었던 박동혁이 욕설을 뱉으며 양팔을 활짝 벌려 황준영과 신초영을 넓은 품에 끌어안았다.
대성 본인도 나름대로 조절을 가한 건지, 불길은 절묘하게 그 셋이 있는 지점만 비껴갔다.
하지만 화톳불 바로 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듯한 열기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화아-악!
“눈 뜨자마자 만난 게 저런 또라이라니, 내 신세도 참 처량해.”
박동혁은 약간 농담조로 대성을 힐난하다가도.
화르륵-.
투둑-.
“…….”
무심코 돌아보았다.
일생의 추억이 담긴 장소가 속절없이 불타고 있었다.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태우는 불길이, 그 여섯 외눈에 하나도 빠짐없이 담겨 활활 타올랐다.
***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와라.
-어떻게 된 일인지 보고하라.
목소리엔 은은한 노기가 또렷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은은함 속에 담긴 무게가 한없이 몸을 짓누른다.
날카로운 가시가 모골을 파고들면 이런 기분일까.
“…….”
적막이 감도는 새벽.
잠들기 직전의 남자, 오재익은 임종을 맞는 사람처럼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온몸의 세포란 세포가 모조리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스쳤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부르셨습니까.”
서늘한 안개가 짙게 깔린 무채색의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오재익은, 아니, ‘엘하임’을 비롯하여 그들은 이 무채색의 공간을 ‘혼세의 혈(穴)’이라 불렀다.
그리고 ‘혼세의 혈’ 중심엔, 마치 그곳만 구멍이 뻥 뚫린 것만 같은 깊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엘하임은 ‘어둠 속 사내’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주교(主敎)님.”
“엘하임.”
“송구스러워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끄럽-.”
“모르겠다고?”
“…….”
고개를 숙여 직접 눈을 마주 보지 않아도, 짙은 칠흑에 가려진 얼굴과 대면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분노의 감정을.
살기(殺氣)에도 크기가 있다면, 아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집어 삼켜졌을 거라고 엘하임은 생각했다.
“동방의 제단 하나가 무너졌다. 그리고 내가 본 것만 해도 두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지.”
“…예.”
“동방 쪽은 엘하임, 네놈의 소관이잖나? 할 말이 아주 많을 텐데?”
“저희의 존재를 알아챈 인간이 한 명 있습니다.”
“그래. 그런 것 같더군.”
아마 혼세의 주민을 모르는 인간들은 없을 것이다.
저들은 이미 예전부터 ‘몬스터’란 볼품없는 이름으로 혼세의 주민을 지칭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디멘션 테이커’의 존재, 더 나아가, ‘제단’과 ‘제물’의 존재까지 눈치챈 인간은 지금껏 없었다.
눈치챘다 뿐인가?
그 정체불명의 인간은, 눈치챈 걸 넘어서 아예 직접 제사장을 죽이고 제단마저 무너뜨렸다.
‘혼세’ 그 자체의 근간이 위협받는 중대한 사태가 벌어진 셈이다.
‘어둠 속 사내’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대책은?”
“이미 그 인간의 신상은 전부 파악해뒀습니다.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너무 염려 마시길.”
엘하임은 인간 세계에 숨어둔 테이커 중 유일한 KHA의 직원이었다.
최근에 사가트가 브레이커로 성남시에 대소동을 벌이려 했다는 소식은 진작 접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대소동을 사전에 차단하고 사가트를 죽인 사냥꾼이 있다고 한다.
거기까지 내다보고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이라면, 십중팔구 동방의 제단을 무너뜨린 자와 동일인물일 터.
그리고 협회의 정보망을 공유하고 있는 엘하임이 그 사냥꾼의 신상을 파악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한대성.’
안 그래도 최강의 사냥꾼이라는 명성이 협회 내에서도 자자해 주시하던 인물.
실수다.
이렇게까지 일을 벌일 줄 알았으면, 주시만 할 게 아니라 미리 손을 써 놨어야 했는데.
“제롬을 쓰러뜨릴 정도면 섣불리 전면전을 벌여도 될 만한 적은 아닐 겁니다.”
“그럼?”
“…뒤에서 흔들어야죠. 그쪽에서 먼저 무릎을 꿇게끔.”
‘어떻게’라는 질문이 번거롭게 주교의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도록, 엘하임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놈 주변 인물에게 자객을 보냈습니다.”
***
혜정은 처음으로 아들이 야속했다.
뭐, S급이니 초신성이니, 아들 녀석이 사냥꾼으로 승승장구하는 건 굉장히 기쁘지만….
‘이놈 자식. 그래도 집에 못 들어오면 못 들어온다고 문자라도 남겨야 할 거 아냐.’
엊그제 나간 뒤로 지금까지 아무 연락도 없이 집에 안 들어오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험한 일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내가 먼저 전화를 하기도 그렇고….’
그렇게 온종일 마음만 졸이다 보니 어느새 새벽 2시가 훌쩍 넘었다.
흔히 걱정되는 마음에 잠도 못 이룬다고 표현하지만, 그것도 이틀이 되니 몰려오는 수마를 이겨내는 게 보통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 혜정은 지쳐 쓰러지듯 깊은 잠에 빠졌다.
이틀 치 쌓인 피로가 빚어낸 깊고 깊은 숙면이기 때문일까.
-드르륵.
혜정과 지수, 그 누구도 베란다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니, 설령 깨어있다고 해도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칠 법한 작은 소리긴 했지만.
저벅-.
그리고 그보다도 더 작고 미약한 발소리가 거실의 정적에 섞였다.
‘생각보다 넓군.’
박쥐 같은 날개가 접혔다.
흰자까지 시뻘건 눈이 좌우를 왕복하며 집 내부를 샅샅이 살폈다.
느껴지는 기척은 둘.
어느 쪽이든 한쪽은 목숨을 취해야 할 사냥감이었다.
‘어디부터 갈까.’
왼쪽? 오른쪽?
사소한 고민에 사로잡히는 한편으로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시금 떠올렸다.
-한 명은 살리고, 한 명은 죽여라.
-그놈에게 붙잡을 지푸라기를 두 개씩이나 줄 필요는 없겠지.
엘하임, 그는 뒷골목이나 전전하던 자신에게 두 번째 인생을 살 기회를 준 은인이다.
처음에 웬 이상한 약물이 담긴 주사기를 건넸을 땐, 대뜸 마약이라도 권하나 싶어 수상쩍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약물은, 자신에게 힘을 주었다.
인간을 뛰어넘는 힘을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 은혜에 보답할 순간이 찾아왔다.
‘결정.’
처음, 그러니까 ‘죽일 쪽’은.
오른쪽.
박쥐 사내가 거실과 맞닿은 부엌을 지나쳐 코너를 꺾었다.
그리고 고맙게도 활짝 열린 방문 틈새로 조용히 몸을 들이밀었다.
‘베란다 쪽도 안 잠갔고…. 이건 뭐, 나 좀 죽여 달라고 거의 목을 빼는 수준인데?’
이렇게 거저먹는 상황이니 도리어 숨겨진 함정이 있지는 않을지 의심이 치밀 정도다.
하지만 박쥐처럼 뛰어난 촉각이 잡아낸 기척은 분명 둘이었고.
무엇보다 사냥감의 행색이 그나마 있던 긴장마저 전부 지울 정도로 비루했다.
그냥 길거리를 걷다 어디로 시선을 던져도 발견할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중년 여성.
키잉-.
잔혹한 미소를 머금은 박쥐 사내의 손에 날카로운 발톱이 돌출됐다.
‘나도 양심은 있으니 고통 없이-.’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서슬 퍼런 빛을 번뜩이는 발톱이 중년 여성의 목에 박히기 직전.
-화륵.
“응?”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기묘한 불똥을 피웠다.
“…으음.”
어디서 바람이 새어 들어오나?
문득 서늘한 감촉이 목덜미에서 느껴지자, 혜정이 부스스한 눈을 뜨며 잠에서 깼다.
“음….”
어제부터 쭉 피곤한 상태였으니, 그냥 좀 잠을 설친 거겠지.
기분 탓이겠거니 싶어서, 도로 눈을 감고 잠에 빠진 혜정이었다.
“꺽…! 커헉, 컥…!”
“쉿.”
달빛만이 어슴푸레 깔린 밤하늘.
잿빛 갑주의 광전사가 내지른 장창(長槍)이 박쥐 사내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신묘한 솜씨였다.
창날은 아슬아슬하게 사내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는 선에서 그의 급소를 정확히 파고들었으니까.
용의 날개를 펼친 광전사, 발라르크가 창공에서 박쥐 사내를 붙든 채 작게 말했다.
“대부인(大夫人)께서 주무신다.”
“어헉, 꺽, 커헉…!”
“곱게 죽고 싶으면 입을 다물어.”
문득 발라르크가 미리 혜정의 목걸이에 자기를 ‘로드’시킨 대성의 혜안에 감탄하는 한편.
박쥐 사내의 머릿속은 온통 의문과 혼란이 가득 차올랐다.
‘왜, 왜…?!’
분명 모든 게 완벽했을 텐데!
아니, 완벽하고 자시고 갑자기 목걸이에서 불씨가 솟구쳐서 ‘뭐지?’했더니 이런 상황이다.
무슨 과정을 거쳐서 이렇게 된 건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우선, 지금은 그런 의문을 품을 때가 아니다.
박쥐 사내가 입에서 선혈을 쏟아내며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짰다.
“자, 잠깐…. 다, 다 설명할-.”
“나는 너랑 할 얘기가 없다.”
“뭐, 뭐, 뭐…?”
“할 말이 있다면 ‘그분’께 해라.”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이해할 수 없는 말의 연속이다.
공포로 얼룩진 눈물이 박쥐 사내의 눈에서 흘러넘쳤다.
확실한 건.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광전사가 ‘그분’이라고 존칭을 쓸 정도면….
[주군, 들리십니까.]
[대부인의 침소에 숨어든 쥐새끼를 발견했습니다.]
적어도 분명, 온정과 자비를 베풀 존재는 아니리라.
그런 직감이 퍼뜩 스친 박쥐 사내가 조용히 오열했다.